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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8F%84%20%EC%87%BC%EC%97%90%ED%82%A4 | 안도 쇼에키 |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あんどう しょうえき, 1703~1762)는 에도 시대 중기의 의사, 사상가, 철학자이다. 아키타 번 출신. 호는 확룡당양중(確龍堂良中)이다. 사상적으로는 무신론과 아나키즘의 요소를 포함했으며 농업 중심의 계급없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다. 근대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와도 연결되는 사상의 소유자로 평가되었다.
생애
데와국 (아키타현 오다테시)의 부농에서 태어났고 생을 마감했다. 소년기와 청년기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신이 과거에 선종(禪宗)의 노승으로부터 대오(大悟)를 인정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어, 이를 받아들인다면 청년 쇼에키는 깨달음의 경지를 체험한 선승(禪僧)이었을 것이다. 묘심사(妙心寺)에서 선종을 공부했고 기타노 덴만구에서 공부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후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아지오카 산파쿠(味岡三伯, 後世方別派)에게 배워 의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당시 의학의 중심지였던 교토에서 의학을 배우는 한편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연마해 백과사전적 지식인으로 변모했다.
1744년부터는 지금의 아오모리(靑森) 현 하치노헤(八戶) 시에 살면서 지방의 문화 서클에서 사상 강연을 하는가 하면 관청으로부터 어려운 치료를 의뢰받을 정도로 유능한 의사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1745년에는 영주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서 『暦大意』를 썼다. 일개 동네 의사이면서도 인자하지 못한 영주를 극도로 비난했다. 1757년에는 천성사(天聖寺)에서 강연과 토론회를 열었다. 이후 고향인 오다테로 돌아가 제자를 키웠다. 제자인 神山仙庵는 하치노헤 번주의 의사가 되었다.
쇼에키가 하치노헤에 정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농산물의 지나친 상품작물화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이로 인해 이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기갈로 인해 환자와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비극적인 사태에 직면한 그는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병이 발생한 원인에 눈을 돌렸다. 곧 자연 파괴는 눈앞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경제적 시스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비판적 지성인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 근세 철학사에서 보기 드문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남기고 농민 운동가로서 농민들로부터 ‘수농대신(守農大神)’이라 숭앙을 받으며 1762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연진영도
안도 쇼에키는 변증법 사상과 반봉건적 사회관 때문에 잊힌 사상가되었다. 교토대학의 가노 고키치 박사가 헌책방에서 ≪자연진영도≫라는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발견하게 되면서 안도 쇼에키와 그의 사상은 약 100년 만에 부활하게 된다. 가노 교수는 ≪자연진영도≫의 독창적이며 비판적인 사상에 “쇼에키는 일본이 낳은 최대의 사상가로 세계 사상사에 빛날 인물”이라고 감탄했다.
쇼에키는 자신의 시대를 법세로 간주하고 법세 이전에 자연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법세를 자연세로 되돌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했다.
신분과 계급을 부정하고 모두가 노동해야 한다는 철저한 평등사상을 제창했으며 자연진영도(『自然真営道』「自然ノ世論」)에 그 이상사회를 묘사했다. 쇼에키의 노동은 모두가 땀흘리며 괭이로 지면을 경작한다는 실천적인 것이다. 그의 사상체계는 봉건사회의 혼란과 모순을 직접 목격한 끝에 나온, 시대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구축된 것으로 위정자를 놀고먹는 자들로 지목한다.
당시 오우(奥羽) 지방에서는 1749년 1755년 1757년에 기근이 들었다. 또한 관동지방 일대에 영아 살해가 널리 벌어진 것도 이 시기였다. 쇼에키는 이 현실을 목도했다.
자연진영도의 내용은 공산주의나 농본주의, 환경 운동에까지 이어지며 무정부주의와도 맥이 닿는다. 또 쇼에키는 에도 막부가 봉건제를 유지하고 민중을 착취하기 위해 유교를 이용했다 주장하고 공자와 유교, 특히 주자학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그는 도쿠가와막부의 봉건제도에 대해 비판하며 무사 계급을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농업 평등 사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제자인 神山를 시작으로 쇼에키학파가 형성되어 실천적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 그는 19세기에 일어난 왕정복고 운동의 선구자이며, 동서양 학문에 박학다식하고 유럽 사상을 연구한 최초의 일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중심 사상으로는 기일원론(氣一元論), 사회변혁론(社會變革論), 존왕론(尊王論) 등을 들 수 있다.
쇼에키는 인류의 역사가 태고의 자연세로부터 성인이 출현한 이래의 법세를 거쳐 이상사회인 자연세로 되돌아간다고 봤다. ‘자연세-법세-자연세’라는 쇼에키의 역사관은 근대적인 진보 사관이나 변증법적인 발전 사관이 아니라 동양 고대의 순환 사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도원향(桃園鄕)으로서의 이상사회를 꿈꾸기만 한 유토피언은 아니었다. 최고 강령으로서의 ‘자연세’에 도달하기 위한 과도적 사회를 모색하고 있는데, 이런 과도적 사회는 ‘읍정(邑政)’ 자치를 기초로 하는, ‘직경자’가 결정권을 가진 사회다. ‘법세’의 계급과 신분 등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모든 인간이 직경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이별(二別)’의 문제를 해소해 가게 되는 것이다. 쇼에키에 따르면 과도적 사회에 ‘직경’과 ‘호성’을 체현한 참으로 바른 사람, 곧 ‘정인(正人)’이 나타날 때 ‘자연세’로 이행한다.
그중 <법세 이야기>는 동물이 집회를 가지고 인간의 ‘법세’를 비판한다는 줄거리다. 이것은 이솝보다는 오히려 스위프트(swift)에 가까운 픽션으로 ≪자연진영도≫ 가운데서 극히 특이한 양식을 이루고 있다. 새·짐승·벌레·물고기, 즉 네 종류의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이지만, 동물의 그와 같은 생존 방식은, 이른바 ‘통(通)·횡(橫)·역(逆)’이라는 ‘활진(活眞)’의 운행 논리에 근거하는 한 극히 자연적인 것이다. 한편, 통기의 존재인 인간의 자연은 횡기의 존재인 동물의 자연과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세’에서 멀리 떨어져 버린 인간의 법 세계가, 동물의 세계와 얼마나 비슷한가를 극명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본래 동물과 달라야 할 인간이 동물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반자연화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역설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통기의 존재인 인간이 횡기의 삶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법세’를 보여 주면서 자연에 즉해서 살아가는 동물이 자연에 반해서 살아가는 법세의 인간보다도 훨씬 행복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저서
1752 통도진전『統道真伝』
1753 자연진영도『自然真営道』
법세 이야기, 지만지
쇼에키의 저서로서는 원고본과 간행본으로 된 ≪자연진영도≫와 ≪통도진전(統道眞傳)≫ 등이 있다. 주일대사를 역임한 캐나다의 허버트 노먼이 Ando Shoeki and the Anatomy of Japanese Feudalism (1950)을 써서 널리 알려졌다.
같이 보기
철학자 목록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외부 링크
電子版自然真営道
안도 쇼에키 자료관 - 하치노헤시
참고 문헌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理想社會論. 박 문 현. (동의대 교수). hwp
각주
1762년 사망
1703년 출생
무쓰국 사람
데와국 사람
하치노헤시의 역사
에도 시대의 의사
일본의 무신론자
18세기 학자
일본의 철학자 | https://en.wikipedia.org/wiki/And%C5%8D%20Sh%C5%8Deki | Andō Shōeki | was a Japanese philosopher of the 18th century. He rejected much of the Buddhist and Confucian thinking prevailing in Edo period Japan. He also opposed feudalism in the political system. Shoeki never became a prominent philosopher, and throughout his life he had few followers compared to other beliefs in Japan.
Ideology
Ando Shoeki believed that recorded history was a deviation from the natural order of the world, and began with the advent of writing and the rise in power of specific groups, like government officials, priests, or scholars. These groups instituted laws, and began what Shoeki called the "World of Law". In Shoekian thought, the "World of Law" was flawed, unnatural, and unequal. He wanted all humans to have the same social status because Shokei believed that all humans were, in reality, the same person, and it was impossible for one to truly be above another. It was also important for Shoeki that humans only produce and consume what was necessary, a state which he called the "Right Cultivation." Once every human was equal and had abandoned the "World of Law", Shoeki believed that mankind would finally enter the "Self-Acting World", a kind of paradise on Earth, although Shoeki believed that this would only be possible if the "Right Man", a messiah-like figure, arrived and fixed the world. Shoeki did not consider himself to be the "Right Man"; he was content to wait for him to arrive.
Metaphysics
Shoekian metaphysics involves the transfer of energy in all living things. Shoeki believed that each type of organism had a different vector of energy: human energy went up because humans walked upright; animal energy went side-to-side because they crawled and because they ate each other in what Shoeki described as a sideways line; plant energy went down because they always were on the ground. These energies could be transferred across organisms to create new life as well. Humans, for example, are made from the excess energy in wheat, and mice are born from the smoke of a human's fire.
The Five Terrible Crimes and The Ten Offenses
To show some of the ways to achieve the Right Cultivation, Shoeki made a series of laws named Buddhist rules and principles in an effort to satirize Buddhist thoughts. Each of these laws demonstrate some aspect of his anti-establishment ideology.
The Five Terrible Crimes
Becoming a leader of men
Consuming greedily
Teaching about social relations
Polygamy
Being concerned with money or metals
The Ten Offenses
Making music
Playing Go (game)
Sacrificing animals
Establishing borders
Being part of the warrior class
Giving the warrior class authority
Being an artisan
Trading goods
Crafting expensive things
Writing and being an arrogant writer
References
Notes
1703 births
1762 deaths
18th-century Japanese philosophers
18th-century atheists
Japanese atheists
People of Edo-period Japan
Japanese medical researchers
People from Akita Prefecture |
https://ko.wikipedia.org/wiki/%EB%9F%AC%EB%8D%B0%EB%A5%B4%ED%9D%90%201%EC%84%B8%20%ED%95%98%EC%97%98 | 러데르흐 1세 하엘 | 러데르흐 1세 하엘(: fl. 580년-614년경)는 헨 오글레드 지역의 브리튼인 왕국 알트클리트의 왕이었다. 헨 오글레드에서 가장 유명한 왕들 중 하나로, 후대의 웨일스어 및 라틴어 중세작품들에서 자주 등장한다.
할리 족보서 및 아돔나누스 히엔시스의 콜룸바 성인전에 따르면, 러데르흐 1세는 알트클리트 왕 투드왈의 아들로, 부왕을 계승해서 즉위했다. 9세기의 「니니안 주교의 기적」, 「성자 니니안의 삶」에 "투두아엘()", "투드왈두스()"라는 이름의 폭군이 나오는데, 러데르흐 1세의 부왕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러데르흐 1세의 족보는 그 조상이 더픈왈 1세 헨이라고 한다. 이런 족보들을 제외하면 러데르흐의 친족관계에 관해서는 웨일스어 문헌들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대개 프러데인섬의 삼제시 같은 영웅시가에 파편적으로 남아 있다. 친족 중에 세널트 하엘(Senyllt Hael)이라는 이는 「어 고도딘」에서 인색하지 않고 후덕한 것으로 이름났다고 한다. 세널트의 아들 누드 하엘(Nudd Hael)은 "프러데인 섬의 3대 관대한 남자" 삼제시에 러데르흐와 함께 등장한다.
12세기 웨일스의 법전서 『와운의 흑색서』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러데르흐가 북방의 다른 군주들과 함께 남쪽의 귀네드로 원정을 갔다는 이야기다. 또다른 북방 군주 엘디르 무인파우르()는 귀네드 아르본 칸트레브에서 죽임을 당했고, 러데르흐가 에이던의 왕 클러드노, 상술한 누드 하엘, 그리고 달리 알려진 정보가 없는 모르다브 하엘(Mordaf Hael) 등과 합류하여 귀네드 왕 룬 히르 압 마엘군에게 복수하러 쳐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들 북방군은 바다를 통해 쳐들어가 아르본을 약탈했으나 룬 히르의 군대에 격퇴되었다. 룬 히르는 러데르흐를 역공하여 포스강까지 북쪽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 내용이 워낙 불확실하여 이 아르본 원정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런 내용은 실제로 6세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기보다, 룬 히르의 후손인 웨일스 왕들이 룬 히르의 위대함을 윤색하기 위해 그전부터 이미 웨일스 전통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러데르흐 1세를 그 적수로 갖다붙여 지어낸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웨일스 전통사에서 러데르흐 1세는 베오르니체의 앵글로색슨인들과 초기 항쟁을 벌인 북부 브리튼인 왕들 중 하나로 기록한다. 『브리튼인의 역사』 제63장에서 러데르흐 1세가 6세기 말의 여러 베오르니체 왕들의 적이었다고 묘사하지만, 어느 전역에서 그들과 맞섰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레게드 왕 우리엔, 및 다른 브리튼계 왕 모르칸트 불크와 동맹하여 베오르니체 왕 테오도리쿠스와 싸웠는데, 우리엔이 린디스판 섬을 삼일 밤낮 봉쇄하면서 승세를 잡은 적도 있었으나, 우리엔의 군재를 시기한 모르칸트가 그를 암살하면서 내분이 일어나 망했다.
러데르흐 1세가 참전한 주요 전쟁으로는 베오르니체의 앵글로색슨인과의 항쟁 외에도, 게일인 왕국 달 리어타의 아단 막 가브란이 알트클리트에 쳐들어와 맞서 싸운 것이 하나 더 있다. 아단은 알트클리트의 수도에 쳐들어와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물론 짐승 한 마리 살려두지 않고 쑥대밭을 만들었다고 콜룸바 히엔시스가 기록해 놓았다. 콜룸바의 기록을 제외하면 이 브리튼인과 게일인 사이의 전쟁에 관해서 기록한 문헌은 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트클리트와 달리어타는 후로마 시대 이레 중세 초기까지 이웃나라로서 여러 차례 싸우지 않았다고 볼 증거도 없어 보인다. 달 리어타는 당대 브리튼 정치의 상대적 뉴커머였지만, 그 일대 지역에 살던 스코트인들은 보르티게르누스 시대부터 하드리아누스 방벽 주위의 브리튼인 왕국들에 쳐들어오곤 했다. 또한 아단 막 가브란은 픽트랜드에서 노섬브리아에 이르기까지 전선을 확대하고 다닌 공격적인 군주였다.
이런 웨일스어 문헌들을 제외하면, 러데르흐 1세에 관한 주요 정보원으로는 라틴어로 쓰인 기독교 성인전들이 있다. 특히 글래스고의 수호성인인 성 뭉고는 6세기 사람응로 러데르흐 1세 및 아단 막 가브란과 동시대인이었다. 12세기에 이오켈리누스 데 푸르네스가 쓴 뭉고 성인전은 그 내용 전반이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 뭉고에게 우호적인 후원자로 "레데레크(Rederech)"라는 왕이 나온다. 레데레크 왕은 뭉고에게 글래스고의 땅을 주어 어스트라드클리드 일대의 주교좌를 마련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왕의 왕좌부는 파르틱에 있었다고 한다.
러데르흐 1세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뭉고 성인전에서는 뭉고와 같은 해(614년)에 죽었다고 하고, 웨일스 편년사서들에서는 612년에 죽었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614년으로 조정했다. 610년대에 죽었다면 이것은 아돔나누스 히엔시스가 러데르흐 1세가 콜룸바 히엔시스(597년 몰)와 동시대인이라고 한 것과 부합한다. 아돔나누스는 러데르흐 1세가 전쟁터에서 죽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액면 그대로 믿을만 한 것 같다.
러데르흐 1세는 더르누인()이라는 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검은 프러데인섬의 13대 비보 중 하나라고 한다. 자격이 있는 사람이 이 검을 뽑으면 검날이 불타오르는 마검인데, 러데르흐 1세는 이 검을 누구에게든 건네주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관대왕"이라는 뜻의 "하엘"(, )을 별명으로 얻게 되었다. 하지만 왕이 관대하게 검을 건네주어도 그 누구도 감히 그것을 건드리지 못했다.
참고 자료
Bromwich, Rachel, Trioedd Ynys Prydein: The Triads of the Island of Britain. Cardiff: University of Wales Press, 1978; revised ed. 1991
Clarkson, Tim. "Rhydderch Hael." The Heroic Age, Autumn/Winter 1999
MacQuarrie, Alan, "The Kings of Strathclyde", in A. Grant & K.Stringer (eds.) Medieval Scotland: Crown, Lordship and Community, Essays Presented to G. W. S. Barrow, (Edinburgh, 1993), pp. 1–19.
생년 미상
614년 사망
어스트라드클리드 국왕
6세기 스코틀랜드의 군주
7세기 스코틀랜드의 군주 | https://en.wikipedia.org/wiki/Rhydderch%20Hael | Rhydderch Hael | Rhydderch Hael (), Riderch I of Alt Clut, or Rhydderch of Strathclyde, (fl. 580 – c. 614) was a ruler of Alt Clut, a Brittonic kingdom in the Hen Ogledd or "Old North" of Britain. He was one of the most famous kings in the Hen Ogledd, and appears frequently in later medieval works in Welsh and Latin.
Historical / Semi-historical references
Rhydderch appears in Adomnán's Vita Sancti Columbae, written around 700, where he sends a secret message to the saint asking him to prophesy the method of his death. The king is concerned if he should die by the hand of one of his enemies, but the saint tells him that he will die at home in his bed. The description of his death is assumed to be accurate, as Adomnán was writing at a time when Rhydderch's life was probably still relatively well known, and he would be unlikely to attribute a false prophecy to St Columba.
In the 9th century Historia Brittonum, Rhydderch is one of four Brythonic kings (along with Urien, Gwallog and Morcant) named as fighting against Hussa of Bernicia. This is often interpreted as an alliance of Northern Brythonic kings, though it is not explicitly stated that they fought together against Hussa. If they did fight together, Rhydderch may have been present at the siege of Ynys Metcaut (the Island of Lindisfarne), where Urien was assassinated by Morcant.
Rhydderch was possibly the leader of the victorious army at the Battle of Arfderydd (dated 573 by the Annals Cambriae). The earliest (12th century copy of presumed 10th century original) manuscript of the AC dates the battle, but does not give the combatants. John Veitch describes him as the Prince of Lanark.
The 13th century Black Book of Chirk contains a story about a military expedition by Clydno Eidyn and the Tri Hael (Rhydderch, Nudd Hael and Mordaf Hael), where they travel to Gwynedd to avenge the death of Elidir Mwynfawr. Elidir had apparently been killed in a dispute with Rhun Hir over the succession of the kingdom following the death of the previous king Maelgwn Gwynedd. The historical validity of this story is doubted.
Legendary material
Life of St Kentigern
In the Life of St Kentigern, Rhydderch is the royal patron of the saint, and through this tied to the founding of the city of Glasgow. One of the saint's miracles was to save Rhydderch's adulterous Queen Languoreth from the king's wrath, by rediscovering her lost ring and thereby proving her innocence. The coat of arms of Glasgow features a salmon with a ring in its mouth in reference to this story.
Welsh mythology
Rhydderch appears in several of the Welsh Triads, along with many characters and events associated with him, indicating a once well known story now lost.
He is the owner of one of the Thirteen Treasures of the Island of Britain: a magical sword called Dyrnwyn (white-hilt). The list also attempts to justify Rhydderch's epithet 'Hael' in describing the sword: "if a well-born man drew it himself, it burst into flame from its hilt to its tip. And everyone who used to ask for it would receive; but because of this peculiarity everyone used to reject it. And therefore he was called Rhydderch the Generous."
References
Sources
Bromwich, Rachel, Trioedd Ynys Prydein: The Triads of the Island of Britain. Cardiff: University of Wales Press, 1978; revised ed. 1991
Clarkson, Tim. "Rhydderch Hael." The Heroic Age, Autumn/Winter 1999
MacQuarrie, Alan, "The Kings of Strathclyde", in A. Grant & K.Stringer (eds.) Medieval Scotland: Crown, Lordship and Community, Essays Presented to G. W. S. Barrow, (Edinburgh, 1993), pp. 1–19.
610s deaths
Monarchs of Strathclyde
6th-century Scottish monarchs
7th-century Scottish monarchs
Year of birth unknown
Year of death uncertain
Mythological swordfighters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93%9C%20%EB%A7%89%20%EC%95%88%EB%AF%B8%EB%A0%88%ED%81%AC | 아드 막 안미레크 | 아드 막 안미레크(: ?-598년)는 북 이 넬의 왕이다. 케넬 코날 씨족 소속으로, 성자 콜룸바 히엔시스의 먼 친척이 된다. 부친은 안미러 막 세트너이고, 모친은 라긴의 이 켄셀럭 씨족의 에네 켄살라크의 아들 크림한 막 엔너의 아들 나흐의 아들 알릴의 아들 콥터그의 딸 브리그(Bríg)다.
드루이드교 전통을 따른 마지막 아르드리 디어르마트 막 케르발이 죽고(565년) 수십 년 지난 뒤 아드 막 안미레크가 권력을 잡았다. 이 시기에 이 넬 씨족이 아르드리를 지냈는지, 아드의 동시대인들이 아드를 아르드리로 인정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6세기 말 아르드리 지위를 케넬 노간 씨족과 케넬 코날 씨족이 번갈아가면서 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드의 치세를 그의 육촌형 바탄 막 니네더(586년 몰)의 치세와 구분하는 것도 어렵다. 아드의 치세는 문헌마다 제각각 제시되지만 그 시작점은 모두 바탄이 죽기 전으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7세기에 편찬된 가장 오래된 아일랜드 왕사 Baile Chuinn에는 이 두사람이 모두 없지만, 이것은 문서가 편파적이라서 그런 것 같다. 어쩌면 바탄 막 니네더는 아르드리가 된 적이 없는데, 울라의 달 피어타크의 바탄 막 카릴(581년 몰)의 치세를 해명하기 위해 역사학자들이 바탄 막 니네더를 왕으로 비정한 것일 수도 있다. 바탄이 타라 언덕에서 아르드리에 올랐는지 아닌지 여부는 그래서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북 이 넬 씨족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아드 막 안미레크였다.
575년 아드는 드림케트(Druim Cett)의 회의에서 달 리어타 국왕 아단 막 가브란과 만나 동맹을 맺기로 합의했다. 친척인 성자 콜룸바가 이것을 중개했을 수도 있다. 아드와 아단은 모두 달 피어타크의 바탄 막 카릴의 야심에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이해가 일치했다. 아드는 이 동맹 이후인 576년경에 아르드리가 된 것 같다. 아니면 아드와 아단의 회동은 사실 587년경 이후에야 있었던 일일 수도 있다. 바탄 막 니네더는 586년에 죽었고, 『울라 편년사』에는 바탄 막 카릴의 사망일자가 두 개 올라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587년이다.
아드의 북 이 넬 패권에 대한 도전은 케넬 노간 씨족의 콜쿠 막 돔날에 의해 시작되었다. 양자는 580년 드림 멕 에르커(오늘날의 티론주 드럼힉) 전투에서 격돌했고 콜쿠가 패사했다. 그리고 586년에는 아드의 육촌형 바탄 막 니네더가 아르드리 자리에 도전한 남 이 넬의 콜만 마르 막 디어르마토에 의해 렘 인 에크(Léim in Eich)에서 죽임을 당했다(콜만은 573년에도 아르드리에 도전했을 수 있다). 587년, 벨라크 다히(Belach Dathi) 전투에서 콜만이 패사함으로써 아드가 승리했다.
또다른 도전은 동쪽의 울라에서 들어왔는데, 달 나라디 씨족의 피어크네 막 바탄이었다. 드림케트 회의에서 오스라거의 문제가 논의된 것을 보면 이 대 아드의 영향력은 무운에도 미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97년, 무운 영토에서 벌어진 슬리어브 쿠어(Sliab Cua) 전투에서 피어크네가 승리했다. 피어크네는 594년 브레가의 키어나크타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그래서 590년대에 피어크네가 타라 언덕의 아르드리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드는 이후 라긴 국왕 브란둡 막 에카크와 분쟁에 들어갔다. 브란둡은 이 켄셀럭 씨족으로, 이 넬 씨족의 세력잠식에 저항하고 있었다. Borúma Laigin에 보존된 이야기에 따르면, 아드의 아들 쿠마스카크(Cummascach)가 순행을 하던 도중 브란둡의 아내와 동침할 권리를 요구하자 브란둡이 쿠마스카크를 죽였다고 한다. 편년사서들에서는 브란둡이 597년 둔 부하트(Dún Buchat)에서 아드의 아들 쿠마스카크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589년 둔 볼그(Dún Bolg, 현 위클로주 둔보이크) 전투에서 아드는 브란둡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
아드는 친척인 성자 콜룸바와 아주 밀접했다. 그는 콜룸바가 죽었을 때 추도문을 발주하기도 했고, 어쩌면 더로 수도원을 세울 땅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 아드 사후 북 이 넬 왕위는 케넬 노간의 바탄 막 미르케르터그의 아들 콜만 리미드가 계승했다. 아들의 아들 코날 무 막 아도는 아르드리에 도전해서 실패했지만, 그 아들들인 말 코보 막 아도와 돔날 막 아도는 이후 북 이 넬 출신 아르드리가 된다.
참고 자료
Annals of Ulster at at University College Cork
Annals of Tigernach at at University College Cork
Adomnán, Life of St Columba, tr. & ed. Richard Sharpe. Penguin, London, 1995.
Byrne, Francis John, Irish Kings and High-Kings. Batsford, London, 1973.
Charles-Edwards, T. M. (2000), Early Christian Irelan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Mac Niocaill, Gearoid (1972), Ireland before the Vikings, Dublin: Gill and Macmillan
아르드리
598년 사망
더니골주 출신
작전 중 사망한 군주 | https://en.wikipedia.org/wiki/%C3%81ed%20mac%20Ainmuirech | Áed mac Ainmuirech | Áed mac Ainmuirech (born c.530 - died 598) was High King of the Northern Uí Néill. He belonged to the Cenél Conaill and was a distant cousin of Columba of Iona. He was the son of Ainmuire mac Sétnai (died 569), a previous possible high king. His mother was Bríg, daughter of Chobtaig, son of Ailill, son of Nath Í, son of Crimthann mac Énnai son of Énnae Cennsalach of the Uí Ceinnselaig dynasty from Leinster. He was born in 530 according to the Annals of Tigernach (596.2).
He came to power some decades after the death of the last old, pagan style high-king of Tara, Diarmait mac Cerbaill (d. 565), after a period in which it is not clear that the Uí Néill had a high-king, nor is it certain that his contemporaries would have acknowledged Áed as such. The high kingship of Ireland rotated between the Cenél nEógain and Cenél Conaill branches in the late 6th century. It is difficult to disentangle the reign of Áed from that of his older second cousin Báetán mac Ninneda (died 586). Various lengths are given to the reign of Áed in the kinglists all of which would put the start of his reign before the death of Báetán. Both kings are omitted from the Baile Chuinn, the earliest Irish king list of the late 7th century, but this was probably a partisan document. It is possible that Báetán was not actually high king but was given this position by the synthetic historians to explain away the rule of Báetán mac Cairill (died 581) of the Dal Fiatach of Ulster as high king. The kinglists only assign him a reign of one year. Whether Báetán was king of Tara or not, the real effective power among the northern Ui Neill was Áed mac Ainmuirech.
He is known to have met with Áedán mac Gabráin, king of Dál Riata, in 575 at The Synod or Convention of Drumceat, to agree an alliance, presumably arranged by his cousin Columba. Áed and Áedán were both threatened by the activities of the Ulaid king, Báetán mac Cairill of the Dál Fiatach, and it served both interests that Dál Riata not be subjected to the ambitious Báetán. In this they succeeded. Áed may have become high king after this possibly in 576. It is also quite possible that this conference did not take place until circa 587 which is the date recorded in the Annals of Clonmacnoise. The death of Báetán mac Ninneda had occurred in 586 and the Annals of Ulster record two death dates for Báetán mac Cairill, one being in 587.
A challenge to the rule of Áed among the northern Ui Neill was launched by Colcu mac Domnaill of the Cenél nEógain branch. However they clashed at the Battle of Druim Meic Erce (Drumhirk, modern County Tyrone) in 580 and Colcu was slain. Then in 586, Báetán mac Ninneda was killed at Léim in Eich at the instigation of Colmán Bec (died 587), the southern Ui Neill king of Uisnech who was making a bid for the high kingship, and who may have made an earlier bid in 573. In 587 Áed ended this threat when Colman was slain at the battle of Belach Dathi.
Another challenge to Áed may have come from the direction of Ulster in the person of Fiachnae mac Báetáin (died 626) of the Dál nAraidi. At the royal conference at Druim Cett the affairs of Osraige had been discussed implying an influence by Áed over the affairs of Munster. In 597 Fiachnae won the Battle of Sliab Cua in the territory of Munster. Fiachnae had earlier won a battle over the Ciannachta of Brega in 594. There is a possibility that Fiachnae was a king of Tara in the 590's.
Áed came into conflict with Brandub mac Echach, King of Leinster from the Uí Cheinnselaig who was resisting Ui Neill encroachment. According to the saga tradition preserved in the Borúma Laigin (Cattle Tribute of Leinster), Brandub had killed Cummascach, the son of Áed for demanding the right to sleep with Brandub's wife during a royal tour. The annals record Brandub's killing of Áed's son Cummascach in 597 at Dún Buchat. However, at the battle of Dún Bolg (Dunboyke, modern County Wicklow) in 598, Áed was defeated and killed by Brandub.
Áed had close relations with his cousin Saint Columba. He may have commissioned a eulogy upon the saint's death and most likely granted the land for the monastery of Durrow. Áed was followed as king of the Northern Uí Néill by Colmán Rímid, son of Báetán mac Muirchertaig, of the Cenél nEógain. Áed's son Conall Cú mac Áedo (died 604) failed in a bid for the high kingship after his death but his sons Máel Cobo (died 615) and Domnall (died 642) were later high kings of the Northern Uí Néill.
Notes
References
Annals of Ulster at at University College Cork
Annals of Tigernach at at University College Cork
Adomnán, Life of St Columba, tr. & ed. Richard Sharpe. Penguin, Londo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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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Edwards, T. M. (2000), Early Christian Irelan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Mac Niocaill, Gearoid (1972), Ireland before the Vikings, Dublin: Gill and Macmillan
6th-century births
598 deaths
High Kings of Ireland
People from County Donegal
6th-century Irish monarchs |
https://ko.wikipedia.org/wiki/%EC%9E%8E%EA%B0%80%EB%9D%BD%EB%8F%84%EB%A7%88%EB%B1%80%EB%B6%99%EC%9D%B4%EC%86%8D | 잎가락도마뱀붙이속 | 잎가락도마뱀붙이속(Phyllodactylus)은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남부에 서식하는 도마뱀붙이류의 일속이다. 서식지에서는 리프토 게코(leaf-toed geckos), 서식지 밖에서는 아메리칸 리프토 게코(American leaf-toed geckos)라고 불리는데, 발 모양이 비슷한 다른 속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분류
잎가락도마뱀붙이속은 다음과 같은 종들을 포함한다:
Phyllodactylus angustidigitus Dixon & Huey, 1970 – narrow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barringtonensis Van Denburgh, 1912 – Barringto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baurii Garman, 1892 – Baur'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benedettii Ramírez-Reyes & Flores-Villela, 2018
Phyllodactylus bordai Taylor, 1942 – Guerrer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bugastrolepis Dixon, 1966 – Catalina Island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clinatus Dixon & Huey, 1970 – Cerro Illescas gecko
Phyllodactylus darwini Taylor, 1942 – Darwin'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avisi Dixon, 1964 – Davis'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elcampoi Mosauer, 1936 – Del Campo'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elsolari Venegas, Townsend, Koch & Böhme, 2008
Phyllodactylus dixoni Rivero-Blanco & Lancini, 1968 – Dixon'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uellmani Dixon, 1960 – Duellman's pigmy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uncanensis Van Denburgh, 1912
Phyllodactylus galapagensis W. Peters, 1869 – Galapago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gerrhopygus (Wiegmann, 1834) – South Americ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gilberti Heller, 1903 – Gilbert'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gorii Lanza, 1973 - Español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hispaniolae Schwartz, 1979 – Dominic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homolepidurus H.M. Smith, 1935 – Sonor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inaequalis Cope, 1876 – Peru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insularis Dixon, 1960 – Belize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interandinus Dixon & Huey, 1970 – Ande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johnwrighti Dixon & Huey, 1970 – Rio Huancabamb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julieni Cope, 1885 – Arub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kofordi Dixon & Huey, 1970 – coastal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kropotkini Ramírez-Reyes & Flores-Villela, 2018
Phyllodactylus lanei H.M. Smith, 1935 – Lane'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leei Cope, 1889 – San Cristóbal Island leaf-toed gecko, Chatham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leoni Torres-Carvajal, Carvajal-Campos, Barnes, Nicholls & Pozo-Andrade, 2013
Phyllodactylus lepidopygus (Tschudi, 1845) – wester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magister Noble, 1924 – Noble'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martini Lidth de Jeude, 1887 – Dutch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microphyllus Cope, 1876 – central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muralis Taylor, 1940 – Oaxac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nocticolus Dixon, 1964 – peninsul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pachamama Koch, Flecks, Venegas, Bialke, Valverde, & Rödder, 2016
Phyllodactylus palmeus Dixon, 1968 – Hondura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papenfussi Murphy, Blair & Mendez-de la Cruz, 2009
Phyllodactylus paralepis McCranie & Hedges, 2013
Phyllodactylus partidus Dixon, 1966 – Pardita Norte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paucituberculatus Dixon, 1960 – Rio Marquez Valley gecko
Phyllodactylus pulcher Gray, 1830 – Barbado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pumilus Dixon & Huey, 1970
Phyllodactylus reissii W. Peters, 1862 – Peters'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rutteni Hummelinck, 1940 – Venezuel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sentosus Dixon & Huey, 1970 – Lim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sommeri Schwartz, 1979 – Haiti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thompsoni Venegas, Townsend, Koch & Böhme, 2008
Phyllodactylus transversalis Huey, 1975 – Colombi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tuberculosus Wiegmann, 1834 – yellowbelly gecko
Phyllodactylus unctus (Cope, 1864) – San Lucan gecko
Phyllodactylus ventralis O'Shaughnessy, 1875
Phyllodactylus wirshingi Kerster & H.M. Smith, 1955 – Puerto Ric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xanti Cope, 1863 – leaf-toed gecko, peninsular leaf-toed gecko
주의사항: 삽입어구의 이명 명명자(:en:Binominal nomenclature)는 원래 해당 종을 현재와 다른 속에 속한 것으로 기술했을지도 모른다.
각주
참고 문헌
Boulenger GA (1885). Catalogue of the Lizards in the British Museum (Natural History). Second Edition. Volume I. Gekkonidæ ... London: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Natural History). (Taylor and Francis, printers). xii + 436 pp. + Plates I-XXXII. (Genus Phyllodactylus, p. 76).
Gray JE (1828). Spicilegia Zoologica: or Original Figures and Short Systematic Description of New and Unfigured Animals. London: Treuttel, Wurtz and Wood. (Phyllodactylus, new genus, p. 3).
도마뱀붙이과
존 에드워드 그레이가 명명한 분류군 | https://en.wikipedia.org/wiki/Phyllodactylus | Phyllodactylus | Phyllodactylus is a genus of geckos distributed in South America and Central America, and as far north as the southern United States. They are commonly known as "leaf-toed geckos" in their native range, and otherwise as American leaf-toed geckos to distinguish them from unrelated genera with similar feet.
Species
Phyllodactylus contains these species:
Phyllodactylus andysabini Arteaga, Bustamante, Vieira, Tapia & Guayasamin, 2019 – Andy Sabin's leaf-toed gecko, Wolf Volcano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angustidigitus Dixon & Huey, 1970 – narrow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apricus Dixon, 1966 – Las Animas Island gecko
Phyllodactylus barringtonensis Van Denburgh, 1912 – Barringto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baurii Garman, 1892 – Baur'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benedettii Ramírez-Reyes & Flores-Villela, 2018
Phyllodactylus bordai Taylor, 1942 – Guerrer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bugastrolepis Dixon, 1966 – Catalina Island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cleofasensis Ramírez-Reyes, Barraza-Soltero, Nolasco-Luna, Flores-Villela & Escobedo-Galván, 2021
Phyllodactylus clinatus Dixon & Huey, 1970 – Cerro Illescas gecko
Phyllodactylus coronatus Dixon, 1966 – Coronado Island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arwini Taylor, 1942 – Darwin'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avisi Dixon, 1964 – Davis'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elcampoi Mosauer, 1936 – Del Campo'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elsolari Venegas, Townsend, Koch & Böhme, 2008
Phyllodactylus dixoni Rivero-Blanco & Lancini, 1968 – Dixon'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uellmani Dixon, 1960 – Duellman's pigmy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duncanensis Van Denburgh, 1912
Phyllodactylus galapagensis W. Peters, 1869 – Galapago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gerrhopygus (Wiegmann, 1834) – South Americ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gilberti Heller, 1903 – Gilbert'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gorii Lanza, 1973 - Español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hispaniolae Schwartz, 1979 – Dominic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homolepidurus H.M. Smith, 1935 – Sonor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inaequalis Cope, 1876 – Peru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insularis Dixon, 1960 – Belize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interandinus Dixon & Huey, 1970 – Ande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johnwrighti Dixon & Huey, 1970 – Rio Huancabamb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julieni Cope, 1885 – Arub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kofordi Dixon & Huey, 1970 – coastal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kropotkini Ramírez-Reyes & Flores-Villela, 2018
Phyllodactylus lanei H.M. Smith, 1935 – Lane'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leei Cope, 1889 – San Cristóbal Island leaf-toed gecko, Chatham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leoni Torres-Carvajal, Carvajal-Campos, Barnes, Nicholls & Pozo-Andrade, 2013
Phyllodactylus lepidopygus (Tschudi, 1845) – wester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magister Noble, 1924 – Noble'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magnus Taylor, 1942
Phyllodactylus maresi Lanza, 1973 – Mares'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martini Lidth de Jeude, 1887 – Dutch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microphyllus Cope, 1876 – central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muralis Taylor, 1940 – Oaxac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nocticolus Dixon, 1964 – peninsul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nolascoensis Dixon, 1964 – Nolasco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pachamama Koch, Flecks, Venegas, Bialke, Valverde & Rödder, 2016
Phyllodactylus palmeus Dixon, 1968 – Hondura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papenfussi Murphy, Blair & Méndez-de la Cruz, 2009
Phyllodactylus paralepis McCranie & Hedges, 2013
Phyllodactylus partidus Dixon, 1966 – Pardita Norte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paucituberculatus Dixon, 1960 – Rio Marquez Valley gecko
Phyllodactylus pulcher Gray, 1830 – Barbado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pumilus Dixon & Huey, 1970
Phyllodactylus reissii W. Peters, 1862 – Peters'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rutteni Hummelinck, 1940 – Venezuel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santacruzensis Dixon, 1966 – Santa Cruz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saxatilis Dixon, 1964
Phyllodactylus sentosus Dixon & Huey, 1970 – Lima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simpsoni Arteaga, Bustamante, Vieira, Tapia & Guayasamin, 2019 – Simpson's leaf-toed gecko, Western Galápagos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sommeri Schwartz, 1979 – Haiti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thompsoni Venegas, Townsend, Koch & Böhme, 2008
Phyllodactylus transversalis Huey, 1975 – Colombi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tuberculosus Wiegmann, 1834 – yellowbelly gecko
Phyllodactylus unctus (Cope, 1864) – San Lucan gecko
Phyllodactylus ventralis O'Shaughnessy, 1875
Phyllodactylus wirshingi Kerster & H.M. Smith, 1955 – Puerto Rican leaf-toed gecko
Phyllodactylus xanti Cope, 1863 – leaf-toed gecko, peninsular leaf-toed gecko
Nota bene: A binomial authority in parentheses indicates that the species was originally described in a genus other than Phyllodactylus.
References
Further reading
Boulenger GA (1885). Catalogue of the Lizards in the British Museum (Natural History). Second Edition. Volume I. Gekkonidæ ... London: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Natural History). (Taylor and Francis, printers). xii + 436 pp. + Plates I-XXXII. (Genus Phyllodactylus, p. 76).
Gray JE (1828). Spicilegia Zoologica: or Original Figures and Short Systematic Description of New and Unfigured Animals. London: Treuttel, Wurtz and Wood. (Phyllodactylus, new genus, p. 3).
Lizard genera
Taxa named by John Edward Gray |
https://ko.wikipedia.org/wiki/%EB%8D%B1%EC%8A%A4%ED%8A%B8%EB%9E%80 | 덱스트란 | 덱스트란()은 복잡한 분지형 글루칸(포도당의 축합으로부터 유래한 다당류)이다. IUPAC는 덱스트란을 "주로 C-1 → C-6의 글리코사이드 결합을 가지고 있는 미생물 기원의 분지된 폴리-α-d-글루코사이드"로 정의한다. 덱스트란 사슬의 길이(3~2,000 킬로달톤까지)는 다양하다.
중합체의 주사슬은 글루코스 단량체들 사이에 α(1→6) 글리코사이드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분지되는 부분은 α(1→3) 글리코사이드 결합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적인 분지화는 덱스트란과 덱스트린을 구분하는 특징이다. 덱스트린은 α(1→4) 글리코사이드 결합 또는 α(1→6) 글리코사이드 결합에 의해 연결된 글루코스의 중합체이다.
생성
덱스트란은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포도주의 미생물 생성물로 발견되었지만, 대량 생산은 알렌 진스에 의해 세균을 사용한 공정이 개발된 후에 가능해졌다. 치태는 덱스트란이 풍부하다. 덱스트란은 수크로스 용액의 점도를 높이고, 배관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수크로스(설탕) 정제 과정에서 복잡한 오염물질이다.
덱스트란은 현재 락토바실러스속의 특정 젖산균에 의해 수크로스로부터 생성된다. 종으로는 류코노스톡 메센테로이데스(Leuconostoc mesenteroides)및 충치균(Streptococcus mutans) 등이 있다. 생성된 덱스트란의 구조는 세균 종 뿐만 아니라 균주에 따라 달라진다. 덱스트란은 단백질이 없는 추출물로부터 에탄올을 사용한 분별 침전에 의해 분리된다. 일부 세균들은 프럭탄을 같이 생성하는데, 이는 덱스트란의 분리를 복잡하게 할 수 있다.
용도
의학적으로 덱스트란은 혈액의 점성을 낮추기 위한 항혈전제로 사용되며, 저혈량증에서 혈량 증량제로 사용된다. 덱스트란 70은 의료제도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의약품들인 WHO 필수 의약품 목록에 있다.
미세수술
덱스트란 제제는 미세수술에서 혈관 혈전증을 줄이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덱스트란의 항혈전 효과는 적혈구, 혈소판 및 혈관 내피의 결합을 통해 매개되어 전기 음성도를 증가시켜 적혈구 응집 및 혈소판 접착성을 감소시킨다. 덱스트란은 또한 제8인자 폰 빌레브란트 인자를 감소시켜서 혈소판 기능을 감소시킨다. 덱스트란의 투여 후에 형성된 혈병은 변경된 혈전 구조(피브린으로 보다 고르게 분포된 혈소판)로 인해 보다 쉽게 용해된다. α-2 항플라스민을 억제함으로써 덱스트란은 플라스미노젠 활성인자로 기능을 하므로 혈전용해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 이외에도, 분자량이 큰 덱스트란은 혈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 강력한 삼투제이므로 저혈량증 치료에 사용되어 왔다. 덱스트란의 사용으로 혈액량 증가로 인한 혈액희석은 혈류를 개선하여 미세봉합기술의 개방성을 더욱 향상시키고, 혈전증을 감소시킨다. 여전히, 덱스트란의 동맥 내 및 정맥 내 투여와 비교하여 항혈전 효과에서의 차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덱스트란은 3,000 Da ~ 2,000,000 Da 범위의 다중 분자량으로 이용가능하다. 보다 큰 덱스트란(60,000 Da 이상)은 콩팥에서 제대로 배설되지 않으므로 대사될 때까지 몇 주 동안 혈액에 남아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덱스트란은 항혈전 및 콜로이드 효과를 연장시킨다. 이러한 물질군에서 덱스트란 40(분자량: 40,000 Da)은 항응고 요법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정맥 내 주입 후 24시간 이내에 텍스트란 40의 70% 가까이가 소변으로 배설되고 나머지 30%는 몇 일 더 체내에 잔류한다.
다른 의학적 용도
덱스트란은 일부 안약에서 윤활제로 사용된다. 또한 덱스트란은 특정 정맥 내 유체에서 철(철 덱스트란으로 알려진 용액에서)과 같은 다른 인자를 용해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덱스트란을 함유한 정맥 주사는 혈량 증량제 및 비경구 영양 수단으로 기능을 한다. 이러한 용액은 일단 체내에서 세포에 의해 포도당과 물로 소화되는 삼투성 중성 용액을 제공한다. 덱스트란은 수혈할 수 없는 응급 상황에서 손실된 혈액을 대체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필요한 전해질을 공급할 수 없고 저나트륨혈증 또는 다른 전해질 이상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덱스트란은 또한 혈당량을 증가시킨다.
실험실용
덱스트란은 삼투압을 생물학적 분자에 적용하기 위한 삼투 스트레스 기술에 사용된다.
덱스트란은 또한 일부 크기 배제 크로마토그래피 매트릭스에서도 사용된다. 예로는 세파덱스가 있다.
덱스트란은 또한 바이오리엑터의 활용을 돕기 위해 비드 형태로 사용되어 왔다.
덱스트란은 바이오센서의 고정에 사용된다.
덱스트란은 초기 엔도솜에 우선적으로 결합한다. 형광 표지된 덱스트란을 사용하여 이들 엔도솜을 형광 현미경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
덱스트란은 산화로부터 금속 나노입자를 보호하고 생체 접합성을 개선하기 위한 안정화 코팅으로 사용될 수 있다.
플루오레세인 아이소싸이오사이아네이트와 같은 형광 분자와 결합한 덱스트란은 영상화를 위한 확산성 분자의 농도 기울기를 형성하고 농도 기울기 다음의 특성화를 허용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형광 표지된 덱스트란 용액은 혈관 투과성을 분석하기 위해 조작된 혈관을 통해 관류될 수 있다.
덱스트란은 산업적 세포 배양을 위한 마이크로캐리어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부작용
덱스트란의 사용과 관련된 부작용은 비교적 적지만, 부작용이 일어나면 매우 심각할 수 있다. 이러한 부작용으로는 아나필락시스, 혈액량 과부하, 폐부종, 뇌부종, 혈소판 기능이상 등이 있다.
덱스트란 삼투 효과의 드물지만 중요한 합볍증은 급성 신부전이다. 이러한 신부전의 발병기전은 사구체에 대한 직접적인 독성 효과가 제안된 메커니즘의 일부로서 많은 논쟁의 주제이다. 당뇨병, 만성 신부전, 혈관 장애 병력이 있는 환자가 가장 위험하다. 브룩스(Brooks) 및 다른 이들은 만성 신부전 환자에서 덱스트란 요법을 피할 것을 권장한다.
연구
변형된 덱스트란 중합체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들 중 하나는 변형된 하이드록시기를 가진 아세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물에 녹지 않지만, 유기 용매에는 녹는다. 이것은 용매 증발 및 유화액과 같은 공정을 통해 PLGA와 같은 많은 폴리에스터와 동일한 방식으로 가공될 수 있도록 한다. 아세탈화 덱스트란은 아세틸화 덱스트란과 구조적으로 다르다. 2017년에 약물 전달을 위한 몇 가지 용도가 시험관 내에서 연구되었으며, 일부는 동물 모델에서 테스트되었다.
같이 보기
덱스트린
각주
외부 링크
Resource on dextran properties and structure of dextran polymers
다당류 | https://en.wikipedia.org/wiki/Dextran | Dextran | Dextran is a complex branched glucan (polysaccharide derived from the condensation of glucose), originally derived from wine. IUPAC defines dextrans as "Branched poly-α-d-glucosides of microbial origin having glycosidic bonds predominantly C-1 → C-6". Dextran chains are of varying lengths (from 3 to 2000 kilodaltons).
The polymer main chain consists of α-1,6 glycosidic linkages between glucose monomers, with branches from α-1,3 linkages. This characteristic branching distinguishes a dextran from a dextrin, which is a straight chain glucose polymer tethered by α-1,4 or α-1,6 linkages.
Occurrence
Dextran was discovered by Louis Pasteur as a microbial product in wine, but mass production was only possible after the development by Allene Jeanes of a process using bacteria. Dental plaque is rich in dextrans. Dextran is a complicating contaminant in the refining of sugar because it elevates the viscosity of sucrose solutions and fouls plumbing.
Dextran is now produced from sucrose by certain lactic acid bacteria of the family lactobacillus. Species include Leuconostoc mesenteroides and Streptococcus mutans. The structure of dextran produced depends not only on the family and species of the bacterium but on the strain. They are separated by fractional precipitation from protein-free extracts using ethanol. Some bacteria coproduce fructans, which can complicate isolation of the dextrans.
Uses
Dextran 70 is on the WHO Model List of Essential Medicines, the most important medications needed in a health system.
Medicinally it is used as an antithrombotic (antiplatelet), to reduce blood viscosity, and as a volume expander in hypovolaemia.
Microsurgery
These agents are used commonly by microsurgeons to decrease vascular thrombosis. The antithrombotic effect of dextran is mediated through its binding of erythrocytes, platelets, and vascular endothelium, increasing their electronegativity and thus reducing erythrocyte aggregation and platelet adhesiveness. Dextrans also reduce factor VIII-Ag Von Willebrand factor, thereby decreasing platelet function. Clots formed after administration of dextrans are more easily lysed due to an altered thrombus structure (more evenly distributed platelets with coarser fibrin). By inhibiting α-2 antiplasmin, dextran serves as a plasminogen activator, so possesses thrombolytic features.
Outside of these features, larger dextrans, which do not pass out of the vessels, are potent osmotic agents, thus have been used urgently to treat hypovolemia . The hemodilution caused by volume expansion with dextran use improves blood flow, thus further improving patency of microanastomoses and reducing thrombosis. Still, no difference has been detected in antithrombotic effectiveness in comparison of intra-arterial and intravenous administration of dextran.
Dextrans are available in multiple molecular weights ranging from 3 kDa to 2 MDa. The larger dextrans (>60,000 Da) are excreted poorly from the kidney, so remain in the blood for as long as weeks until they are metabolized. Consequently, they have prolonged antithrombotic and colloidal effects. In this family, dextran-40 (MW: 40,000 Da), has been the most popular member for anticoagulation therapy. Close to 70% of dextran-40 is excreted in urine within the first 24 hours after intravenous infusion, while the remaining 30% are retained for several more days.
Other medical uses
Dextran is used in some eye drops as a lubricant. and in certain intravenous fluids to solubilize other factors, such as iron (in a solution known as Iron Dextran).
Intravenous solutions with dextran function both as volume expanders and means of parenteral nutrition. Such a solution provides an osmotically neutral fluid that once in the body is digested by cells into glucose and free water. It is occasionally used to replace lost blood in emergency situations, when replacement blood is not available, but must be used with caution as it does not provide necessary electrolytes and can cause hyponatremia or other electrolyte disturbances.
Dextran also increases blood sugar levels.
Dextran can be used in an ATPS for PEGylation
Laboratory uses
Dextran is used in the osmotic stress technique for applying osmotic pressure to biological molecules.
It is also used in some size-exclusion chromatography matrices; an example is Sephadex.
Dextran has also been used in bead form to aid in bioreactor applications.
Dextran has been used as an immobilization agent in biosensors.
Dextran preferentially binds to early endosomes; fluorescent-labelled dextran can be used to visualize these endosomes under a microscope.
Dextran can be used as a stabilizing coating to protect metal nanoparticles from oxidation and improve biocompatibility.
Dextran coupled with a fluorescent molecule such as fluorescein isothiocyanate can be used to create concentration gradients of diffusible molecules for imaging and allow subsequent characterization of gradient slope.
Solutions of fluorescently-labelled dextran can be perfused through engineered vessels to analyze vascular permeability
Dextran is used to make microcarriers for industrial cell culture
Orally-administered dextran sodium sulphate is used to induce colitis in animal models of inflammatory bowel disease.
Side effects
Although relatively few side effects are associated with dextran use, these side effects can be very serious. These include anaphylaxis, volume overload, pulmonary edema, cerebral edema, or platelet dysfunction.
An uncommon but significant complication of dextran osmotic effect is acute kidney injury. The pathogenesis of this kidney failure is the subject of many debates with direct toxic effect on tubules and glomerulus versus intraluminal hyperviscosity being some of the proposed mechanisms. Patients with history of diabetes mellitus, chronic kidney disease, or vascular disorders are most at risk. Brooks and others recommend the avoidance of dextran therapy in patients with chronic kidney disease.
Research
Efforts have been made to develop modified dextran polymers. One of these has acetal modified hydroxyl groups. It is insoluble in water, but soluble in organic solvents. This allows it to be processed in the same manner as many polyesters, like poly(lactic-co-glycolic acid), through processes like solvent evaporation and emulsion. Acetalated dextran is structurally different from acetylated dextran. As of 2017 several uses for drug delivery had been explored in vitro and a few had been tested in animal models.
See also
Dextran drug delivery systems
Pentoxifylline
References
External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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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technology products
Polysaccharides
Intravenous fluids |
https://ko.wikipedia.org/wiki/%EC%A7%84%EA%B3%B5%ED%9D%A1%EC%9D%B8%20%EC%9C%A0%EB%B0%A9%EC%83%9D%EA%B2%80%EC%88%A0 | 진공흡인 유방생검술 | 진공흡인 유방생검술(Vacuum Assisted Breast Biopsy, VAB)은 바늘을 이용해 유방의 일부분을 잘라 조직을 채취하는 검사법이다. 바늘은 홈이 패인 안쪽 바늘과 바깥쪽의 자르는 회전칼로 구성되며, 바늘 내에 진공의 음압을 가하여 조직 검사를 하는 동안 바늘을 빼지 않고 지속적인 조직 채취가 가능하다. 진공흡인 유방생검술은 흔히 편의상 ‘맘모톰 시술’로 불리지만, 맘모톰(Mammotome)은 정확하게는 시술 명칭이 아닌 진공흡인 유방생검술 최초의 검사장비 기기명이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맘모톰, 엔코, 벡스코어, 에이택 등의 기기가 대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의료기술 등재
진공흡인 유방생검술은 세 번째 도전 만에 신의료기술 등재에 성공했다. 2019년 8월 한국보건의료연구원(National Evidence-based healthcare Collaborating Agency, NECA)은 한국원자력의학원에 공문을 통해 '초음파유도하의 진공보조장치를 이용한 유방 양성병변 절제술'(이하 진공흡인 유방생검술)에 대한 안전성·유효성 평가결과를 통보했다. 결과에 따르면 제7차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2019.7.26) 심의결과, 진공흡인 유방생검술은 유방 양성병변 환자의 병변을 제거하는데 있어 안전하고 유효한 기술로 심의되었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시술 관련 합병증 발생이 외과적 절제술과 유사해 안전한 수준”이라면서 “교과서 및 가이드라인에서 유방 양성병변의 제거를 위해 사용 가능한 기술로 언급돼 있고 환자 만족도가 높다”고 평가했다.
장점
진공흡인 유방생검술의 장점은 굵은 바늘을 이용하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양의 조직을 채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방 종양의 크기가 적고 여러군데 생긴 미세석 회화 병변, 유관 내 병변 등의 조직검사 방법으로 흔히 사용되며, 최근에는 신의료기술로 인정받아 섬유선종과 같은 양성 혹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또한 절개 흉터가 5-7mm로, 매우 작다는 장점이 있다.
진공흡인 유방생검술은 유방종양 진단과 제거에 대한 유용성과 안전성이 입증된 시술이다. 기존 검사는 종양의 일부를 떼어내 악성 여부를 판단한 후, 악성이면 별도의 수술을 통해 제거해야만 했다. 그러나 진공흡인 유방생검술은 평균 3-5분의 짧은 시간으로 유방 내 종양 전체를 떼어내 정확도 높은 검사를 할 수 있으며, 종양도 제거할 수 있다. 또한 최소한의 절개로 흉터는 물론 합병증을 줄일 수 있다. 시술한 종양의 크기는 2.0cm 이하가 약 89%, 3.0cm 이상이 3.1%로, 최근 사례가 증가하면서 3cm가 넘는 큰 양성종양까지도 시술이 가능해졌다.
진공흡인 유방생검기기 개발 배경
진공흡인 유방생검기기가 개발되기 전에는 악성종양이 의심되는 경우, 외과적 수술(유방절개 생검)을 통해 유방 조직을 채취했다. 그러나 유방절개생검은 조직검사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수술 흉터가 크게 남는다는 한계가 있었으며, 95%의 환자가 유방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외과적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에 1994년 미국의 스티브 파커(Steve Parker) 박사가 최초의 진공흡인 유방생검기기 맘모톰을 개발·출시한다.
질환 및 시술의 증가
대한민국에서 유방암은 여성에게 발생하는 전체암 중 갑상선암에 이어 두 번째로 흔한 암으로, 2015년 유방암은 전체 여성암의 18.9%를 차지한다. 2000년 6,237명이었던 대한민국의 유방암 환자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2006년에는 12,115명이 발생하면서 2배에 이르렀다. 2015년 22,550명의 새로운 유방암 환자가 발생해 연간 유방암 발생자수는 2만 명을 넘어섰다.
최근 유방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유방암 정기 검진율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2018년 대한민국의 유방암 수검률은 63.1%로, 위암(72.8%)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더불어 유방암(악성종양) 진단에 쓰이는 진공흡인 유방생검술을 받은 환자 수는 2017년 55,175명에서 2018년 162,763명으로 약 3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술 전 준비사항
아스피린이나 쿠마딘 등 항응고 제제를 복용하고 있는 경우, 시술 도중 출혈의 위험이 있으므로 해당 약을 일주일 정도 복용하지 않은 다음 시행해야 안전하다. 따라서 약을 처방받은 병원에서 해당 약을 잠시 중단해도 되는지 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시술 방법
병변 부위를 깨끗하게 소독한다.
부분 마취제를 시술 부위에 주입한다.
피부에 보통 4-5mm의 작은 절개를 낸 후 바늘을 넣고, 초음파를 본다.
바늘을 유방내 병변 가까이 위치시킨다.
진공을 이용하여 바늘 내에 패인 홈으로 조직을 당긴다.
홈 내에 들어온 조직을 회전 칼날로 자른다.
조직을 인체 밖으로 빼낸다.
시술 후 꿰맬 필요는 없으며, 작은 접착밴드를 붙인다.
전체 소요시간은 약 40분 정도이며, 시술 후 약 20분 정도의 지혈 및 안정 시간이 필요하다.
시술 후 주의사항
피부 절개 부위를 꿰매지 않고 작은 테이프를 붙이므로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시술 후 3일 간은 목욕을 피해야 하며, 시술 후 일주일 정도는 격한 운동을 삼가 해야 한다. 시술한 당일은 사고의 위험이 있으므로 본인이 직접 운전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출혈로 인해 멍이 들고 피가 뭉쳐 혈종이 생길 경우, 단단하게 만져질 수 있으나 대개 1-2주 내에 서서히 흡수가 된다. 시술 직후 시술 부위가 1-2일 내에 빠르게 부풀어 오른다면, 시술 부위에 출혈이 진행되는 신호일 수 있으므로 다시 병원을 방문해야 한다. 시술한 다음날부터 약 일주일간 약간의 뻐근함과 욱신거림이 있을 수 있다. 만약 진통이 심하다면, 약국에서 진통제를 구입해 복용해도 된다.
부작용
시술 과정 중이나 이후에 드물게 출혈, 혈종, 혈성 유두 분비, 통증, 감염 및 염증, 피부 열상 (피부가 갈라져 붙지 않는 것), 마취제 부작용 등이 있을 수 있다.
결과 확인
진공흡인 유방생검술은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시행한다. 시행 후 결과는 검사일로부터 대개 7-10일 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결과 확인은 진료를 본 해당 진료과 의사 (유방외과 의사)에게 확인한다.
각주
생검
유방암 | https://en.wikipedia.org/wiki/Vacuum-assisted%20breast%20biopsy | Vacuum-assisted breast biopsy | Vacuum-assisted breast biopsy (VAB) is a minimally invasive procedure (biopsy) to help in the diagnosis of breast cancer. VAB is characterized by single insertion, acquisition of contiguous and larger tissue samples, and directional sample capability. It also offers 10x the tissue of core needle biopsy.
References
Breast surgery
Biopsy
Breast cancer |
https://ko.wikipedia.org/wiki/%EB%A6%AC%EB%B3%B4%EC%8A%A4%205-%EC%9D%B8%EC%82%B0 | 리보스 5-인산 | 리보스 5-인산(, R5P)은 오탄당 인산 경로의 생성물 및 대사 중간생성물이다. 오탄당 인산 경로에서 산화 반응의 마지막 단계는 리불로스 5-인산의 생성 반응이다. 신체 상태에 따라 리불로스 5-인산은 가역적으로 이성질화되어 리보스 5-인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 리불로스 5-인산은 다른 오탄당 인산들 뿐만 아니라 과당 6-인산 및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둘 다 해당과정의 대사 중간생성물임)을 초래하는 일련의 이성질화 뿐만 아니라 트랜스알돌화 및 트랜스케톨화를 겪을 수 있다.
리보스-인산 다이포스포키네이스는 리보스 5-인산을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으로 전환시킨다.
구조
리보스 5-인산은 5탄당인 리보스의 5번 탄소에 인산기가 결합되어 있다. 리보스 5-인산은 선형 또는 푸라노스 고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리보스 5-인산은 주로 푸라노스 형태로 존재한다.
생합성
리보스 5-인산의 합성은 세포 생장 및 니코틴아마이드 아데닌 다이뉴클레오타이드 인산(NADPH), 리보스 5-인산 및 아데노신 삼인산(ATP)의 필요에 크게 의존한다. 각 분자의 생성은 2가지 다른 대사 경로, 즉 오탄당 인산 경로 및 해당과정에서 포도당 6-인산(G6P)의 흐름에 의해 조절된다. 두 경로 사이의 관계는 다른 대사 상황을 통해서 조사할 수 있다.
오탄당 인산 경로
리보스 5-인산은 모든 생물에서 오탄당 인산 경로에서 생성된다. 오탄당 인산 경로는 해당과정과 병행해서 진행되는 대사 경로이다. 오탄당 인산 경로는 환원성 생합성(예: 지방산 합성)에 대한 NADPH 및 오탄당의 중요한 공급처이다. 오탄당 인산 경로는 NADPH를 생성하는 산화적 단계와 당의 상호전환을 포함하는 비산화적 단계의 두 가지 단계로 구성된다. 오탄당 인산 경로의 산화적 단계에서 포도당 6-인산(G6P)을 리불로스 5-인산(RuBP)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통해 2분자의 NADP+를 2분자의 NADPH로 환원시킨다. 오탄당 인산 경로의 비산화적 단계에서, 리불로스 5-인산은 리보스 5-인산 이성질화효소의 촉매 작용을 통해 리보스 5-인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
NADPH 및 리보스 5-인산에 대한 수요가 균형을 이루면 포도당 6-인산은 오탄당 인산 경로를 통해 한 분자의 리불로스 5-인산을 형성하여 두 분자의 NADPH와 한 분자의 리보스 5-인산을 생성한다.
해당과정
NADPH보다 더 많은 리보스 5-인산이 필요할 때, 리보스 5-인산은 해당과정의 대사 중간생성물을 통해 생성될 수 있다. 포도당 6-인산은 해당과정동안 과당 6-인산 및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 트랜스케톨레이스 및 트랜스알돌레이스는 2분자의 과당 6-인산과 1분자의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을 3분자의 리보스 5-인산으로 전환시킨다. 빠른 세포 생장 동안 뉴클레오타이드 및 지방산 합성을 위해 더 많은 양의 리보스 5-인산 및 NADPH가 필요하다. 해당과정의 대사 중간생성물은 피루브산 키네이스 동질효소에 대한 유전자 발현에 의해 오탄당 인산 경로의 비산화적 단계로 유입될 수 있다. 피루브산 키네이스 동질효소는 해당과정에서 병목 현상을 일으켜 오탄당 인산 경로가 해당과정의 대사 중간생성물들을 사용하여 NADPH와 리보스 5-인산을 합성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은 피루브산 키네이스 동질효소의 기질인 포스포엔올피루브산에 의한 삼탄당 인산 이성질화효소의 저해에 의해 더욱 활성화된다.
기능
리보스 5-인산 및 리보스 5-인산의 유도체들은 DNA, RNA, ATP, 조효소 A, FAD 및 히스티딘을 비롯한 많은 생체분자들의 전구체로 역할을 한다.
뉴클레오타이드 생합성
뉴클레오타이드는 핵산인 DNA와 RNA의 단위체로 역할을 한다. 뉴클레오타이드는 핵염기, 5탄당,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인산기로 구성된다. 뉴클레오타이드는 퓨린 계열의 염기 또는 피리미딘 계열의 염기를 가지고 있다. 퓨린 뉴클레오타이드 합성에서 모든 대사 중간생성물들은 리보스 5-인산을 포함하고 있다. 리보스 5-인산은 또한 피리미딘 뉴클레오타이드 합성에서 중요한 전구체로 역할을 한다.
뉴클레오타이드 생합성 과정 동안, 리보스 5-인산(R5P)은 리보스-인산 다이포스포키네이스(PRPS1)에 의해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PRPP)으로 전환된다.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의 생성은 퓨린의 신생합성 경로 및 퓨린의 회수 경로에 필수적이다. 신생합성 경로는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의 리보스 5-인산 부분의 활성화로부터 시작되며, 이어서 뉴클레오타이드의 전구체인 포스포리보실아민으로 전환된다. 퓨린의 회수 경로에서 포스포리보실트랜스퍼레이스는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을 염기에 첨가한다.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은 또한 피리미딘 뉴클레오타이드 합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리미딘 뉴클레오타이드 합성의 5번째 단계에서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PRPP)의 리보스 부분의 1번 탄소는 오로트산과 공유 결합으로 연결된다. 이 반응은 오로트산 포스포리보실트랜스퍼레이스(PRPP 트랜스퍼레이스)에 의해 촉매되어, 오로티딘 일인산(OMP)을 생성한다.
히스티딘 생합성
히스티딘은 사람에서 신생합성되지 않는 필수 아미노산이다. 뉴클레오타이드와 마찬가지로, 히스티딘의 생합성은 리보스 5-인산의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PRPP)으로의 전환에 의해 개시된다. 히스티딘 생합성의 속도 결정 단계는 ATP 포스포리보실트랜스퍼레이스에 의한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과 ATP의 축합 반응이다. 히스티딘 생합성은 피드백 억제에 의해 조절된다.
다른 기능들
리보스 5-인산은 리보스 5-인산 아데닐릴트랜스퍼레이스에 의해 아데노신 이인산 리보스로 전환될 수 있으며, 아데노신 이인산 리보스는 TRPM2 이온 통로에 결합하여 이를 활성화시킨다.
질병 관련성
질병은 세포의 리보스 5-인산의 불균형과 관련이 있다. 암과 종양은 DNA와 RNA의 합성 증가와 관련된 리보스 5-인산의 조절된 생성을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드문 질환인 리보스 5-인산 이성질화효소 결핍증은 리보스 5-인산의 불균형과 관련이 있다. 리보스 5-인산 이성질화효소 결핍증의 분자병리학은 아직 이해되지 않고 있지만, 가설에 RNA 합성 감소가 포함되었다. 리보스 5-인산과 관련된 또 다른 질병은 통풍이다. 포도당 6-인산의 양이 증가하면 해당과정의 대사 중간생성물들이 축적되어 리보스 5-인산의 생성으로 전환된다. 리보스 5-인산은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PRPP)으로 전환되어 퓨린의 과잉 생산을 야기하고 이로 인해 요산이 축적된다.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의 축적은 레쉬-니한 증후군에서 발견된다.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의 축적은 하이포잔틴-구아닌 포스포리보실트랜스퍼레이스(HGPRT)에 의해 야기되며, 이는 뉴클레오타이드 합성을 감소시키고, 요산의 생성을 증가시킨다.
리보스 5-인산(R5P)을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PRPP)으로 전환시키는 반응을 촉매하는 효소인 리보스-인산 다이포스포키네이스(PRPS1)의 과다활성은 신경발달 장애 및 감각신경성 난청 뿐만 아니라 통풍과 관련이 있다.
같이 보기
리보스
리불로스 5-인산
각주
유기 인산염
단당류 유도체 | https://en.wikipedia.org/wiki/Ribose%205-phosphate | Ribose 5-phosphate | Ribose 5-phosphate (R5P) is both a product and an intermediate of the pentose phosphate pathway. The last step of the oxidative reactions in the pentose phosphate pathway is the production of ribulose 5-phosphate. Depending on the body's state, ribulose 5-phosphate can reversibly isomerize to ribose 5-phosphate. Ribulose 5-phosphate can alternatively undergo a series of isomerizations as well as transaldolations and transketolations that result in the production of other pentose phosphates as well as fructose 6-phosphate and glyceraldehyde 3-phosphate (both intermediates in glycolysis).
The enzyme ribose-phosphate diphosphokinase converts ribose-5-phosphate into phosphoribosyl pyrophosphate.
Structure
R5P consists of a five-carbon sugar, ribose, and a phosphate group at the five-position carbon. It can exist in open chain form or in furanose form. The furanose form is most commonly referred to as ribose 5-phosphoric acid.
Biosynthesis
The formation of R5P is highly dependent on the cell growth and the need for NADPH (Nicotinamide adenine dinucleotide phosphate), R5P, and ATP (Adenosine triphosphate). Formation of each molecule is controlled by the flow of glucose 6-phosphate (G6P) in two different metabolic pathways: the pentose phosphate pathway and glycolysi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pathways can be examined through different metabolic situations.
Pentose phosphate pathway
R5P is produced in the pentose phosphate pathway in all organisms. The pentose phosphate pathway (PPP) is a metabolic pathway that runs parallel to glycolysis. It is a crucial source for NADPH generation for reductive biosynthesis (e.g. fatty acid synthesis) and pentose sugars. The pathway consists of two phases: an oxidative phase that generates NADPH and a non-oxidative phase that involves the interconversion of sugars. In the oxidative phase of PPP, two molecules of NADP+ are reduced to NADPH through the conversion of G6P to ribulose 5-phosphate (Ru5P). In the non-oxidative of PPP, Ru5P can be converted to R5P through ribose-5-phosphate isomerase enzyme catalysis.
When demand for NADPH and R5P is balanced, G6P forms one Ru5P molecule through the PPP, generating two NADPH molecules and one R5P molecule.
Glycolysis
When more R5P is needed than NADPH, R5P can be formed through glycolytic intermediates. Glucose 6-phosphate is converted to fructose 6-phosphate (F6P) and glyceraldehyde 3-phosphate (G3P) during glycolysis. Transketolase and transaldolase convert two molecules of F6P and one molecule of G3P to three molecules of R5P. During rapid cell growth, higher quantities of R5P and NADPH are needed for nucleotide and fatty acid synthesis, respectively. Glycolytic intermediates can be diverted toward the non-oxidative phase of PPP by the expression of the gene for pyruvate kinase isozyme, PKM. PKM creates a bottleneck in the glycolytic pathway, allowing intermediates to be utilized by the PPP to synthesize NADPH and R5P. This process is further enabled by triosephosphate isomerase inhibition by phosphoenolpyruvate, the PKM substrate.
Function
R5P and its derivatives serve as precursors to many biomolecules, including DNA, RNA, ATP, coenzyme A, FAD (Flavin adenine dinucleotide), and histidine.
Nucleotide biosynthesis
Nucleotides serve as the building blocks for nucleic acids, DNA and RNA. They are composed of a nitrogenous base, a pentose sugar, and at least one phosphate group. Nucleotides contain either a purine or a pyrimidine nitrogenous base. All intermediates in purine biosynthesis are constructed on a R5P "scaffold". R5P also serves as an important precursor to pyrimidine ribonucleotide synthesis.
During nucleotide biosynthesis, R5P undergoes activation by ribose-phosphate diphosphokinase (PRPS1) to form phosphoribosyl pyrophosphate (PRPP). Formation of PRPP is essential for both the de novo synthesis of purines and for the purine salvage pathway. The de novo synthesis pathway begins with the activation of R5P to PRPP, which is later catalyzed to become phosphoribosylamine, a nucleotide precursor. During the purine salvage pathway, phosphoribosyltransferases add PRPP to bases.
PRPP also plays an important role in pyrimidine ribonucleotide synthesis. During the fifth step of pyrimidine nucleotide synthesis, PRPP covalently links to orotate at the one-position carbon on the ribose unit. The reaction is catalyzed by orotate phosphoriboseyltransferase (PRPP transferase), yielding orotidine monophosphate (OMP).
Histidine biosynthesis
Histidine is an essential amino acid that is not synthesized de novo in humans. Like nucleotides, biosynthesis of histidine is initiated by the conversion of R5P to PRPP. The step of histidine biosynthesis is the condensation of ATP and PRPP by ATP-phosphoribosyl transferase, the rate determining enzyme. Histidine biosynthesis is carefully regulated by feedback inhibition/
Other functions
R5P can be converted to adenosine diphosphate ribose, which binds and activates the TRPM2 ion channel. The reaction is catalyzed by ribose-5-phosphate adenylyltransferase
Disease relevance
Diseases have been linked to R5P imbalances in cells. Cancers and tumors show upregulated production of R5P correlated to increased RNA and DNA synthesis. Ribose 5-phosphate isomerase deficiency, the rarest disease in the world, is also linked to an imbalance of R5P. Although the molecular pathology of the disease is poorly understood, hypotheses included decreased RNA synthesis.
Another disease linked to R5P is gout. Higher levels of G6P lead to a buildup of glycolytic intermediates, that are diverted to R5P production. R5P converts to PRPP, which forces an overproduction of purines, leading to uric acid build up.
Accumulation of PRPP is found in Lesch-Nyhan Syndrome. The build up is caused by a deficiency of the enzyme hypoxanthine-guanine phosphoribosyltransferase (HGPRT), which leads to decreased nucleotide synthesis and an increase of uric acid production.
Superactivity in PRPS1, the enzyme that catalyzes the R5P to PRPP, has also been linked to gout, as well as neurodevelopmental impairment and sensorineural deafness.
References
Organophosphates
Monosaccharide derivatives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85%B8%EC%8B%A0%20%EC%9D%BC%EC%9D%B8%EC%82%B0 | 이노신 일인산 | 이노신 일인산(, IMP) 또는 이노신산()은 뉴클레오사이드 일인산의 한 종류이다. 이노신 일인산은 향미 증진제로 널리 사용되며, 일반적으로 닭의 부산물 또는 다른-육류 가공의 부산물로부터 얻는다. 이노신 일인산은 물질대사에서 중요하다. 이노신 일인산은 하이포잔틴의 리보뉴클레오타이드이고, 퓨린 뉴클레오타이드 합성 과정에서 첫 번째로 생성되는 뉴클레오타이드이다. 이노신 일인산은 아데노신 일인산의 탈아미노화에 의해 생성되고, 이노신으로 가수분해된다. 이노신 일인산은 퓨린 대사에서 생성되는 리보뉴클레오사이드 일인산 대사 중간생성물이다. 맥주효모균의 YJR069C 유전자에 의해 발현되며 (d)ITPase 와 (d)XTPase 효소 활성을 가지고 있는 디옥시리보뉴클레오사이드 삼인산 피로포스포하이드롤레이스는 이노신 삼인산(ITP)을 이노신 일인산(IMP)과 피로인산(PPi)으로 가수분해한다.
이노신 일인산의 중요한 유도체로는 핵산에서 발견되는 퓨린 뉴클레오타이드 및 아데노신 삼인산 등이 있으며, 이들은 근육 및 다른 조직에서 화학 에너지를 저장하는데 사용된다.
식품 산업에서 이노신산 및 이노신산 이나트륨과 같은 이노신산의 염들은 향미 증진제로 사용된다. 이노신산의 E 번호는 E630이다.
이노신 일인산의 합성
이노신 일인산의 합성은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PRPP)에서부터 시작되며, 복잡한 과정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 글루타민에 의해 제공되는 아미노기는 포스포리보실 피로인산의 1번 탄소에 부착된다.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분자인 포스포리보실아민은 매우 불안정하며, 생리적 pH에서 반감기가 30초이다. 포스포리보실아민은 글리신과 결합하여 글리신아마이드 리보뉴클레오타이드(GAR)를 형성한다. 이어서, 테트라하이드로폴산으로부터 폼일기가 글리신아마이드 리보뉴클레오타이드로 전달되어 폼일글리신아마이드 리보뉴클레오타이드(FGAR)를 형성한다.
글루타민의 질소 원자는 ATP를 사용하는 반응을 통해 폼일글리신아마이드 리보뉴클레오타이드로 전달되어 폼일글리신아미딘 리보뉴클레오타이드(FGAM)를 형성한다. 다음 반응에서 ATP를 사용해서 이미다졸 고리를 형성하게 되어 5-아미노이미다졸 리보뉴클레오타이드(AIR)를 생성한다.
다음 반응은 ATP를 사용하여 카복시아미노이미다졸 리보뉴클레오타이드(CAIR)를 생성하기 위해 중탄산염을 첨가하는 것이다(이 반응은 균류와 세균에서만 일어난다. 고등 진핵생물은 단순히 CO2를 첨가하여 카복시아미노이미다졸 리보뉴클레오타이드를 생성한다). 그런 다음, 카복시아미노이미다졸 리보뉴클레오타이드의 이미다졸 고리 부분의 카복시기에 ATP를 사용하여 아스파르트산을 첨가해서 N-석시닐-5-아미노이미다졸-4-카복사마이드 리보뉴클레오타이드(SAICAR)를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글리신, 폼산, 중탄산염, 글루타민, 아스파르트산을 사용하여 퓨린 고리를 합성하기 위해 거의 모든 필요한 원자들을 포함하는 대사 중간생성물이 만들어진다. N-석시닐-5-아미노이미다졸-4-카복사마이드 리보뉴클레오타이드에서 푸마르산이 제거되어 5-아미노이미다졸-4-카복사마이드 리보뉴클레오타이드(AICAR)를 형성하고, 테트라하이드로폴산으로부터 폼일기가 5-아미노이미다졸-4-카복사마이드 리보뉴클레오타이드로 전달되어 N-폼일아미노이미다졸-4-카복사마이드 리보뉴클레오타이드(FAICAR)을 형성한다. N-폼일아미노이미다졸-4-카복사마이드 리보뉴클레오타이드는 탈수 반응으로 1분자의 H2O가 빠져나가면서 퓨린 고리를 완성하여 이노신 일인산(IMP)을 생성하게 된다. 이노신 일인산은 퓨린 뉴클레오타이드 합성 경로에서 완전한 퓨린 고리를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대사 중간생성물이다.
이노신 일인산의 합성에 참여하는 효소들은 세포에서 다효소 복합체(multienzyme complex)를 구성하고 있다. 다기능 효소(multifunctional enzyme)가 있다는 증거가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대사 경로에서 비순차적 단계들을 촉매한다.
IMP로부터 AMP와 GMP의 생합성
아데노신 일인산(AMP)와 구아노신 일인산(GMP)는 이노신 일인산(IMP)로부터 생성된다. AMP와 GMP는 둘 다 RNA를 구성하는 뉴클레오타이드이다. IMP의 퓨린 고리의 6번 탄소의 카보닐기가 아미노기로 치환되면 AMP가 생성된다. AMP와 IMP 사이의 상호전환은 퓨린 뉴클레오타이드 회로의 일부로 일어난다. IMP가 산화되면 잔토신 일인산(XMP)가 생성되고, 글루타민의 아미노기가 XMP의 퓨린 고리의 2번 탄소의 카보닐기를 치환하면 GMP가 생성된다. IMP의 산화 과정에서 전자수용체는 NAD+이다. XMP가 GMP로 전환되는 반응에서 ATP를 소비함으로써(ATP가 AMP+PPi로 분해됨) 아미노기로 치환된다. AMP의 합성 과정에서는 GTP가 사용되지만, GMP의 합성 과정에서는 ATP가 사용된다. 이러한 차이는 중요한 조절 가능성을 제공한다.
IMP는 퓨린 뉴클레오타이드 생합성의 조절에 관여함
이노신 일인산(IMP) 및 다른 많은 분자들은 5-포스포리보실-1-피로인산(PRPP)을 5-포스포리보실아민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촉매하는 효소인 아미도포스포리보실트랜스퍼레이스를 저해한다. 즉, IMP의 양이 많으면 아미도포스포리보실트랜스퍼레이스가 저해되어 결과적으로 IMP의 양이 감소하게 된다. 또한, AMP와 GMP가 생성되지 않으며, AMP와 GMP는 RNA를 구성하는 중요한 뉴클레오타이드이기 때문에 RNA 합성이 제대로 완료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용
이노신산은 이노신산 이나트륨(E631), 이노신산 이칼륨(E632), 이노신산 칼슘(E633)을 포함한 다양한 염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들 세 가지 화합물은 감칠맛의 향미 증진제로 사용되며 비교적 효과가 크다. 이들 육류의 향을 강화하고 균형을 잡기 위해 수프, 소스 및 조미료에 주로 사용된다.
같이 보기
각주
더 읽을거리
Berg, Jeremy M.; Bioquímica; Editorial Reverté; 6ena edició; Barcelona 2007.
Nelson, David L.; Principles of biochemistry; Editorial W.H Freeman and Company; 4th edition; New York 2005.
식품 첨가물
유기산
뉴클레오타이드
퓨린 | https://en.wikipedia.org/wiki/Inosinic%20acid | Inosinic acid | Inosinic acid or inosine monophosphate (IMP) is a nucleotide (that is, a nucleoside monophosphate). Widely used as a flavor enhancer, it is typically obtained from chicken byproducts or other meat industry waste. Inosinic acid is important in metabolism. It is the ribonucleotide of hypoxanthine and the first nucleotide formed during the synthesis of purine nucleotides. It can also be formed by the deamination of adenosine monophosphate by AMP deaminase. It can be hydrolysed to inosine.
The enzyme deoxyribonucleoside triphosphate pyrophosphohydrolase, encoded by YJR069C in Saccharomyces cerevisiae and containing (d)ITPase and (d)XTPase activities, hydrolyzes inosine triphosphate (ITP) releasing pyrophosphate and IMP.
Important derivatives of inosinic acid include the purine nucleotides found in nucleic acids and adenosine triphosphate, which is used to store chemical energy in muscle and other tissues.
In the food industry, inosinic acid and its salts such as disodium inosinate are used as flavor enhancers. It is known as E number reference E630.
Inosinate synthesis
The inosinate synthesis is complex, beginning with a 5-phosphoribosyl-1-pyrophosphate (PRPP). Enzymes taking part in IMP synthesis constitute a multienzyme complex in the cell. Evidence demonstrates that there are multifunctional enzymes, and some of them catalyze non-sequential steps in the pathway.
Synthesis of other purine nucleotides
Within a few steps inosinate becomes AMP or GMP. Both compounds are RNA nucleotides. AMP differs from inosinate by the replacement of IMP's carbon-6 carbonyl with an amino group. The interconversion of AMP and IMP occurs as part of the purine nucleotide cycle. GMP is formed by the inosinate oxidation to xanthylate (XMP), and afterwards adds an amino group on carbon 2. Hydrogen acceptor on inosinate oxidation is NAD+. Finally, carbon 2 gains the amino group by spending an ATP molecule (which becomes AMP+2Pi). While AMP synthesis requires GTP, GMP synthesis uses ATP. That difference offers an important regulation possibility.
Regulation of purine nucleotide biosynthesis
Inosinate and many other molecules inhibit the synthesis of 5-phosphoribosylamine from 5-phosphoribosyl-1-pyrophosphate (PRPP), disabling the enzyme that catalyzes the reaction: glutamine-5-phosphoribosyl-1-pyrophosphate-amidotransferase. In other words, when levels of inosinate are high, glutamine-5-phosphoribosyl-1-pyrophosphate-amidotransferase is inhibited, and, as a consequence, inosinate levels decrease. Also, as a result, adenylate and guanylate are not produced, which means that RNA synthesis cannot be completed because of the lack of these two important RNA nucleotides.
Applications
Inosinic acid can be converted into various salts including disodium inosinate (E631), dipotassium inosinate (E632), and calcium inosinate (E633). These three compounds are used as flavor enhancers for the basic taste umami with a comparatively high effectiveness. They are mostly used in soups, sauces, and seasonings for the intensification and balance of the flavor of meat.
See also
References
Further reading
Berg, Jeremy M.; Bioquímica; Editorial Reverté; 6ena edició; Barcelona 2007.
Nelson, David L.; Principles of biochemistry; Editorial W.H Freeman and Company; 4th edition; New York 2005.
Food additives
Organic acids
Flavor enhancers
Nucleotides
Purines
E-number additives |
https://ko.wikipedia.org/wiki/2020%EB%85%84%20K%EB%A6%AC%EA%B7%B81 | 2020년 K리그1 | 2020년 K리그1은 1983년 수퍼리그'에서 시작해 38번째를 맞은 시즌이자 2013년 도입한 승강제 이후 8번째 시즌이다.
시즌 개요
운영 방식
리그는 코로나19 때문에 전년도와 달리 2020년 시즌에 한해 △12개팀이 2차에 걸쳐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정규 라운드(1~22 라운드)와 △정규 라운드 성적을 토대로 나누어진 파이널 A.B 내에서 6개팀이 싱글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파이널 라운드(23~27 라운드)로 진행한다.
리그가 끝난 뒤 우승 팀에게는 2021년 AFC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준우승, 3위에게는 2021년 AFC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출전권이 주어진다. 만약 리그 3위 이내의 팀이 2020년 FA컵에서 우승하는 경우, 리그 4위가 플레이오프 출전권을 획득하게 되며 그리고 리그 최하위 12위는 자동으로 K리그2 2021로 강등된다.
2020년 2월 24일, 코로나19가 대한민국 전지역에서 급격한 대유행이 임박한 것으로 보여서 한국프로축구연맹은 긴급이사회에서 K리그1과 K리그2의 개막경기 라운드와 초반 몇개 라운드를 잠정 연기하였다.
2020년 4월 24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이사회에서 K리그1 2020 시즌을 2020년 5월 8일 금요일밤에 개막하기로 결정하였고 팀당 정규리그 22경기와 파이널 라운드 5경기로 축소운영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초반 리그 경기들을 코로나-19 대유행 때문에 당분간 무관중경기로 진행하였다가 8월 1일부터 경기장 전체 정원의 10%까지 유관중 입장이 허용되었다. 8월 14일부터 정원의 25%까지 확대수용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내 서울과 경기도에서 코로나-19 대유행으로 8월 16일부터 다시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로 다시 강화되어서(부산은 8월 17일부터), 서울, 성남, 수원, 인천(인천시 자체적으로 시행), 부산 홈경기는 무관중경기로 진행된다.
대한민국 내 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 시행시, 해당 기간이나 지역에서 프로축구리그는 자동중단된다. 만일 재강화될 경우 리그가 다시 중단될 수 있다. K리그 2020년 시즌 규칙상 K리그1는 최소 팀당 22경기를 마쳐야 시즌 성립과 우승팀과 강등팀이 결정된다.(단, 상주 상무는 만일 시즌이 최소 22경기를 못 채우고 조기종료되어도 무조건 다음 시즌 K리그2로 강등된다.)
승격 구단과 강등 구단
{|
|}
참가 구단
감독, 주장, 유니폼 스폰서
감독 변화
외국인 선수
외국인 선수들은 각 팀당 AFC 소속 국가들의 국적인 1인과 AFF소속선수 국가들 국적1인을 포함해서 최대 4인까지 경기에서 뛸 수 있다.
이적 시장
경기 중계
JTBC+JTBC 골프&스포츠
IB 스포츠
스카이 스포츠
시즌 성적
최종 순위
라운드별 순위
1~22 라운드
23~27 라운드
경기결과
정규 라운드 (1~22 라운드)
파이널 라운드 (23~27 라운드)
파이널 A
파이널 B
우승 구단
시즌 통계
개인 기록
득점
도움
해트트릭
무실점경기
팀 기록
관중 기록
구단별 관중 기록
코로나-19 대유행 때문에 2020년 시즌이 2020년 5월 8일에 늦게 개막하여서 무관중경기로 시행되었다. 관중경기를 8월1일부터 진행하다가 8월 16일부터 서울, 부산과 경기도 등부터 전국에 다시 무관중경기로 전환되었다. 10월 12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완화되어서 10월 17일 경기부터 다시 유관중경기가 허용되며 경기장 수용규모의 25%까지 관중을 받을 수 있다.(단, 10월 16일 강원FC 강릉 홈경기는 강릉시청이 10월 18일까지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를 연장하여서 무관중경기로 시행되었다.)
수상
K리그 대상
후원: 하나원큐
K리그1의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 클럽상
팬 프렌들리 클럽상 : 대구 FC
그린 스타디움상 : 전남 드래곤즈
페어플레이상 : 성남 FC
사랑 나눔상 : 포항 스틸러스, 대전 하나 시티즌, 안산 그리너스
▲ 특별상
전경기 전시간 출장 : 조현우 (울산 현대 축구단),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송범근 (전북 현대 모터스)
베스트 포토상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감사상 : 하나은행
공로상 :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표창 : 닐손 주니어 (FC 안양)
EA Sports 피파온라인4 Most Selected Player : 홍철 (수원 삼성)
▲ 심판상
최우수 주심상 :
최우수 부심상 :
라운드별 MVP
이달의 감독상
후원 : 신라스테이
이달의 선수상
후원:EA 스포츠
매달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 한 명을 전문가 의견 (70%), K리그 팬 투표 (20%), 피파온라인4 유저 투표 (10%) 토대로 선발한다.
G모먼트 어워드
후원:게토레이
한 달간 가장 센스있고, 개성있는 플레이를 선보인 선수 1명을 뽑아 시상한다. 매달 두 건의 플레이를 후보로 선정해 연맹 공식 SNS채널을 통한 팬 투표 결과로 수상자를 선정한다.
같이 보기
2020년 대한민국 축구
전체 2020년 대한민국의 축구
202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축구
국가대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20 시즌
2020년 대한민국 프로/아마 리그와 FA컵 대회
1부 (프로) K리그1 2020
2부 (프로) K리그2 2020
3부 (세미프로) K3리그 2020
4부 (세미프로) K4리그 2020
5부 (아마추어) K5리그 2020
6부 (아마추어) K6리그 2020
7부 (아마추어) K7리그 2020
FA컵 FA컵 2020
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2020
2020 축구 리그
2020년 대한민국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연기된 스포츠 행사 | https://en.wikipedia.org/wiki/2020%20K%20League%201 | 2020 K League 1 | The 2020 K League 1 was the 38th season of the top division of professional football in South Korea since its establishment in 1983 as K League, and the third season under its current name, the K League 1. Jeonbuk Hyundai Motors were the defending champions. They successfully defended their title and won a record-breaking eight K League championship.
The regular season was scheduled to begin on 29 February and to end on 4 October, but was postponed due to the COVID-19 pandemic. The K League 1 season officially began on 8 May. On 24 April 2020, the Korean Professional Football Union (K League) confirmed that they would adopt a modified plan for the season, changing the regular season to 22 matches, and 5 Final Round matches per team. Sangju Sangmu and the lowest-placed team at the end of the season were relegated to the K League 2 for the 2021 season.
Commencing this season, an additional spot for foreign players has been added for players from member countries of the ASEAN Football Federation.
Promotion and relegation
Teams relegated to the 2020 K League 2
Gyeongnam FC
Jeju United
Teams promoted from the 2019 K League 2
Gwangju FC
Busan IPark
Participating clubs by province
The following twelve clubs will compete in the K League 1 during the 2020 season.
Stadiums
Foreign players
Restricting the number of foreign players strictly to five per team, including a slot for a player from the Asian Football Confederation countries and a slot for a player from the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 team could use five foreign players on the field each game, including at least one player from the AFC confederation.
The name in bold indicates that the player was registered during the mid-season transfer window.
League table
Positions by matchday
Round 1–22
Round 23–27
Final rounds were from round 23 to round 27
Fixtures and results
Matches 1–22
Teams play each other twice, once at home, once away.
Final Round Matches 23–27
Teams only play each other once.
Final A
Final B
Season statistics
Top scorers
Top assists
Awards
Most Valuable Player of The Round
Monthly Awards
Season Awards
The 2020 K League Awards was held on 5 November 2020.
K League Most Valuable Player
The K League Most Valuable Player award was won by Son Jun-ho (Jeonbuk Hyundai Motors).
K League Young Player
The K League Young Player award was won by Song Min-kyu (Pohang Steelers).
K League Top Scorer
The K League Top Scorer award was won by Júnior Negrão (Ulsan Hyundai).
K League Top Assistor
The K League Top Assistor award was won by Kang Sang-woo (Sangju Sangmu / Pohang Steelers).
K League Best XI
K League Manager of the Year
The K League Manager of the Year award was won by Kim Gi-dong (Pohang Steelers).
See also
2020 K League 2
References
K League 1 seasons
South Korea
2020 in South Korean football
K League |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1%9C%ED%94%BC%EC%98%A4%EB%8B%90-CoA | 프로피오닐-CoA | 프로피오닐-CoA() 또는 프로피오닐 조효소 A()는 프로피온산의 조효소 A 유도체이다. 프로피오닐-CoA는 24개의 탄소로 구성되어 있으며(조효소 A 부분을 제외하면 3개의 탄소로 구성됨), 생성 및 대사 운명은 프로피오닐-CoA가 어떤 생물에 존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특정 아미노산의 이화작용 또는 홀수 지방산의 산화와 같은 여러 대사 경로를 통해 프로피오닐-CoA가 생성될 수 있다. 프로피오닐-CoA는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 또는 메틸시트르산 회로를 통해 분해될 수 있다. 다른 생물에서 프로피오닐-CoA를 통제된 구역으로 격리시켜 축적시킴으로써 잠재적인 독성을 완화시킬 수 있다. 프로피오닐-CoA의 생성 및 분해에 대한 유전적인 결함은 사람에서 임상적으로 중요성이 크다.
생성
프로피오닐-CoA를 생성하는 여러 대사 경로가 존재한다.
프로피오닐-CoA는 3탄소 화합물인 프로피온산의 유도체이다. 따라서 홀수 지방산은 산화되어 아세틸-CoA 뿐만 아니라 프로피오닐-CoA를 생성한다. 프로피오닐-CoA는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에 의해 메틸말로닐-CoA로 전환되고, 이어서 비타민 B12를 보조 인자로 사용하는 메틸말로닐-CoA 뮤테이스에 의해 석시닐-CoA로 전환된다.
프로피오닐-CoA는 홀수 지방산의 산화 뿐만 아니라 메티오닌, 발린, 아이소류신, 트레오닌을 포함하는 아미노산의 산화에 의해 생성된다. 또한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에 의한 프로피오닐-CoA를 메틸말로닐-CoA로 전환하는 것은 아미노산의 이화작용의 결과일 수도 있다.
담즙산을 형성하는 콜레스테롤의 산화는 부산물로 프로피오닐-CoA를 생성한다. 술드(Suld) 등이 수행한 실험에서 간의 미토콘드리아, 조효소 A, 프로피온산을 혼합했을 때, 프로피온산에 표지된 동위 원소가 분해되었다. 그러나 5β-콜레스테인-3α,7α,12α,26-테트롤-26,27-C14의 대사 과정을 추적한 결과 프로피오닐-CoA는 쓸개즙의 형성과 함께 발견되었다.
대사 운명
프로피오닐-CoA의 대사(이화 작용의 운명)는 합성되는 환경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혐기성 환경에서 프로피오닐-CoA는 호기성 환경에서와는 다른 대사 운명을 가질 수 있다.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에 의한 이화작용 또는 메틸시트르산 생성효소에 의한 여러 대사 경로들은 또한 다양한 유전자들의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에 의한 반응
사람에서 시트르산 회로의 옥살아세트산과 상호작용하여 메틸시트르산을 형성하는 프로피오닐-CoA는 또한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에 의한 카복실화를 통해 메틸말로닐-CoA로 촉매될 수 있다. 메틸말로닐-CoA는 나중에 석시닐-CoA로 전환되어 시트르산 회로에서 사용될 수 있다.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는 프로피오닐-CoA의 메틸말로닐-CoA로의 카복실화를 촉매할 뿐만 아니라 여러 상이한 아실-CoA들에도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는 프로피오닐-CoA에 가장 높은 친화력을 나타낸다. 또한 프로피오닐-CoA의 전환은 글루탐산과 같은 몇몇 시트르산 회로 마커의 부재에 의해 억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용기작은 왼쪽에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다.
작용기작
포유류에서 프로피오닐-CoA는 중탄산염과 ATP를 필요로 하는 비오틴 의존성 효소인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에 의해 D-메틸말로닐-CoA로 전환된다.
D-메틸말로닐-CoA는 메틸말로닐-CoA 에피머화효소에 의해 L-메틸말로닐-CoA로 전환된다.
L-메틸말로닐-CoA는 메틸말로닐-CoA 뮤테이스에 의해 시트르산 회로의 대사 중간생성물인 석시닐-CoA로 전환된다. 메틸말로닐-CoA 뮤테이스는 탄소-탄소 결합의 치환기들의 위치 이동을 촉매하기 위해 코발라민을 필요로 하는 효소이다.
메틸말로닐-CoA 뮤테이스의 작용기작은 5'-디옥시아데노실의 5' CH2−와 3+의 산화 상태(III)인 코발트(Co) 사이의 결합의 분해로 시작되며 중간생성물로 5'-디옥시아데노실 라디칼과 환원된 Co(II) 산화 상태의 코발라민을 생성한다.
다음으로 5'-디옥시아데노실 라디칼은 메틸말로닐-CoA의 메틸기로부터 수소 원자를 뺏어서 5'-디옥시아데노신을 형성하고, 메틸말로닐-CoA는 메틸말로닐-CoA 라디칼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라디칼은 조효소와 탄소-코발트 결합을 형성하게 하고, 이어서 기질의 탄소 골격이 재배열되어 석시닐-CoA 라디칼이 생성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석시닐-CoA 라디칼은 이어서 이전에 생성된 5'-디옥시아데노신으로부터 수소를 뺏어서 석시닐-CoA를 형성하고, 5'-디옥시아데노신은 5'-디옥시아데노실 라디칼을 형성하게 된다. 5'-디옥시아데노실 라디칼은 조효소를 공격하여 초기 복합체를 재형성하게 된다.
메틸말로닐-CoA 뮤테이스의 결합은 혈액의 pH를 감소시키는 위험한 이상 질환인 메틸말론산혈증을 유발한다.
메틸시트르산 회로
프로피오닐-CoA의 축적은 생물에 독성을 나타낼 수 있다. 프로피오닐-CoA가 피루브산으로 전환되는 다른 회로들이 제안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메틸시트르산 회로이다. 초기 반응은 β 산화되어 프로피오닐-CoA를 형성하며, 프로피오닐-CoA는 회로에서 추가로 분해된다. 메틸시트르산 회로는 시트르산 회로와 관련된 효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유해한 프로피오닐-CoA로부터 세균을 보호하기 위한 전반적인 반응에 기여한다. 또한 메틸시트르산 회로는 미코박테리아에서 지방산의 이화작용으로 인한 경로로 간주된다. 대사를 진행시키기 위해 prpC 유전자는 메틸시트르산 생성효소를 발현시키고, 만약 존재하지 않으면 메틸시트르산 회로는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이화작용은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를 통해 진행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참여하는 반응물, 생성물, 중간생성물, 효소와 함께 왼쪽에 표시되어 있다.
세균의 물질대사
결핵균의 물질대사
피루브산을 형성하기 위한 프로피오닐-CoA의 산화는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의 필요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프로피오닐-CoA의 축적은 독성을 나타낼 수 있다. 결핵균에서 프로피오닐-CoA의 대사가 세포벽의 생성에 관여하는 것으로 제안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이화작용의 부재는 다양한 독소, 특히 대식세포의 항균 메커니즘에 대한 세포의 감수성을 증가시킬 것이다. 결핵균에서 프로피오닐-CoA의 운명에 관한 또 다른 가설은 프로피오닐-CoA가 홀수 지방산의 β 산화에 의해 생성되므로, 메틸시트르산 회로는 완충 메커니즘으로 작용하여 임의의 잠재적 독성을 상쇄하기 위해 후속적으로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로도박터 스파에로이데스에서 가능한 격리
프로피오닐-CoA는 세균을 포함하여 다른 종들에서 많은 악영향 및 독성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도박터 스파에로이데스(Rhodobacter sphaeroides)에서 프로피오닐-CoA의 축적에 의한 피루브산 탈수소효소의 저해는 치명적일 수 있다. 또한, 대장균과 마찬가지로 미코박테리아 종에서 프로피오닐-CoA의 유입은 즉시 처리하지 않으면 독성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독성은 세균의 세포벽을 형성하는 지질과 관련된 경로에 의해 발생한다. 긴 사슬 지방산의 에스터화를 이용하여, 과량의 프로피오닐-CoA를 격리하고, 트라이아실글리세롤로 저장하여 프로피오닐-CoA의 상승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러한 지방산의 메틸 분지 과정은 이들이 프로피오닐-CoA를 축적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
대장균의 물질대사
루오(Luo) 등에 의해 수행된 연구에서, 대장균은 프로피오닐-CoA의 대사가 어떻게 잠재적으로 3-하이드록시프로피온산의 생성을 유도할 수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경로에 관여하는 핵심 유전자인 석신산 CoA-전이효소(succinate CoA-transferase)의 돌연변이가 3-하이드록시프로피온산을 크게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분야는 여전히 발전 중인 분야로, 이 주제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이다.
식물의 물질대사
식물의 아미노산 대사는 특정 경로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로 간주된다. 그러나 식물의 아미노산 대사에 프로피오닐-CoA의 생성 및 사용과 관련된 효소들이 관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관련된 것은 아이소뷰티릴-CoA의 대사이다. 프로피오닐-CoA와 아이소뷰티릴-CoA는 발린 대사에서 중간생성물로 간주된다. 프로피온산은 프로피오닐-CoA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프로피오닐-CoA는 퍼옥시좀의 β 산화 경로를 통해 β-하이드록시프로피온산으로 전환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기장대에서 발린을 프로피오닐-CoA로 전환시키는 주요 효소들은 관찰되지 않았다. 루카스(Lucas) 등이 수행한 다양한 실험들에서 식물에서 퍼옥시좀의 효소를 통해 프로피오닐-CoA 및 아이소뷰티릴-CoA가 발린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기질들의 대사에 관여하는 것으로 제안되었다.
균류의 물질대사
지방산의 이화작용을 통한 프로피오닐-CoA의 생성은 또한 싸이오에스터화와 관련이 있다. 아스페르길루스 니둘란스(Aspergillus nidulans)에 관한 연구에서, 위에서 언급한 경로의 메틸시트르산 생성효소 유전자인 mcsA의 억제로 별개의 폴리케타이드의 생성이 억제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메틸시트르산을 통한 프로피오닐-CoA의 사용은 프로피오닐-CoA의 농도를 감소시키는 동시에, 폴리케타이드의 농도를 증가시킨다. 폴리케타이드는 아세틸-CoA 및 말로닐-CoA로 만들어지고 균류에서 흔히 발견되는 구조라는 점에서 보다 더 일반적으로 알려진 화합물인 폴리펩타이드와 다르다. 폴리케타이드는 식물에 병원성을 나타내는 균류를 통해 농업 작물에 대한 폴리케타이드의 독성을 제한함으로써 의약적으로나 잠재적으로 해로운 속성에 대한 연구를 증가시키게 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 대한 임상적 중요성
Gen5
식물의 퍼옥시좀 내의 효소가 프로피오닐-CoA 및 아이소뷰티릴-CoA와 결합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사람의 아세틸기전이효소인 Gen5는 프로피오닐-CoA 및 뷰틸 사이아노아크릴레이트와 결합한다. 이들은 GCN5L2의 촉매 도메인에 특이적으로 결합한다. 이렇게 보존된 아세틸기전이효소는 히스톤의 N-말단 꼬리의 리신 잔기의 아세틸화에 의한 전사 조절을 담당한다. 이러한 아세틸화 작용은 프로피오닐화 또는 뷰티릴화보다 반응 속도가 훨씬 빠르다. 프로피오닐-CoA의 구조로 인해 Gen5는 서로 상이한 아실-CoA 분자들을 구별한다. 실제로 뷰티릴-CoA의 프로필기는 불포화된 아실 사슬로 인해 Gen5의 활성 부위에 대한 입체특이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반면에 프로피오닐-CoA의 3번 탄소는 정확한 방향으로 Gen5의 활성 부위로 들어갈 수 있다.
프로피온산혈증
신생아의 발달 단계에서 프로피오닐-CoA 카복실화효소의 결핍으로 인한 프로피온산혈증은 장애, 정신 장애 및 기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프로피오닐-CoA가 메틸말로닐-CoA로 전환될 수 없기 때문에 프로피오닐-CoA의 축적에 의해 야기된다. 신생아들은 높은 프로피오닐카르니틴에 대한 검사를 받는다. 이러한 질병을 진단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소변 검사가 있다. 반복되는 증상을 되돌리고 방지하는데 사용되는 의약품에는 프로피온산의 생성을 줄이기 위해 보충제를 사용하는 것이 포함된다.
같이 보기
석시닐-CoA
메틸말로닐-CoA
각주
물질대사
조효소 A의 싸이오에스터 | https://en.wikipedia.org/wiki/Propionyl-CoA | Propionyl-CoA | Propionyl-CoA is a coenzyme A derivative of propionic acid. It is composed of a 24 total carbon chain (without the coenzyme, it is a 3 carbon structure) and its production and metabolic fate depend on which organism it is present in. Several different pathways can lead to its production, such as through the catabolism of specific amino acids or the oxidation of odd-chain fatty acids. It later can be broken down by propionyl-CoA carboxylase or through the methylcitrate cycle. In different organisms, however, propionyl-CoA can be sequestered into controlled regions, to alleviate its potential toxicity through accumulation. Genetic deficiencies regarding the production and breakdown of propionyl-CoA also have great clinical and human significance.
Production
There are several different pathways through which propionyl-CoA can be produced:
Propionyl-CoA, a three-carbon structure, is considered to be a minor species of propionic acid. Therefore, odd-number chains of fatty acids are oxidized to yield both propionyl-CoA as well as acetyl-CoA. Propionyl-CoA is later converted into succinyl-CoA through biotin-dependant propionyl-CoA carboxylase (PCC) and b12-dependant methylmalonyl-CoA mutase (MCM), sequentially.
Propionyl-CoA is not only produced from the oxidation of odd-chain fatty acids, but also by the oxidation of amino acids including methionine, valine, isoleucine, and threonine. Furthermore, catabolism of amino acids can also be a result of the conversion of propionyl-CoA to methylmalonyl-CoA by propionyl-CoA carboxylase.
Cholesterol oxidation, which forms bile acids, also forms propionyl-CoA as a side product. In an experiment performed by Suld et al., when combining liver mitochondria and propionic acid with the addition of coenzyme A, labeled isotopes of psionic acid were degraded. However, following 5β-cholestane-3α,7α,12α,26-tetrol-26,27-C14 incubation, propionyl CoA was able to be rescued along with the formation of bile.
Metabolic fate
The metabolic (catabolic fate) of propionyl-CoA depends on what environment it is being synthesized in. Therefore, propionyl-CoA in an anaerobic environment could have a different fate than that in an aerobic organism. The multiple pathways, either catabolism by propionyl-CoA carboxylase or methylcitrate synthase, also depend on the presence of various genes.
Reaction with propionyl-CoA carboxylase
Within the citric acid cycle in humans, propionyl-CoA, which interacts with oxaloacetate to form methylcitrate, can also catalyzed into methylmalonyl-CoA through carboxylation by propionyl-CoA carboxylase (PCC). Methylmalonyl-CoA is later transformed to succinyl-CoA to be further used in the tricarboxylic acid cycle. PCC not only catalyzes the carboxylation of propionyl-CoA to methylmalonyl-CoA, but also acts on several different acyl-CoAs. Nevertheless, its highest binding affinity is to propionyl-CoA. It was further shown that propionyl-CoA transformation is inhibited by the absence of several TCA markers, such as glutamate. The mechanism is shown by the figure to the left.
Mechanism
In mammals, propionyl-CoA is converted to (S)-methylmalonyl-CoA by propionyl-CoA carboxylase, a biotin-dependent enzyme also requiring bicarbonate and ATP.
This product is converted to (R)-methylmalonyl-CoA by methylmalonyl-CoA racemase.
(R)-Methylmalonyl-CoA is converted to succinyl-CoA, an intermediate in the tricarboxylic acid cycle, by methylmalonyl-CoA mutase, an enzyme requiring
cobalamin to catalyze the carbon-carbon bond migration.
The methylmalonyl-CoA mutase mechanism begins with the cleavage of the bond between the 5' - of 5'-deoxyadenosyl and the cobalt, which is in its 3+ oxidation state (III), which produces a 5'-deoxyadenosyl radical and cobalamin in the reduced Co(II) oxidation state.
Next, this radical abstracts a hydrogen atom from the methyl group of methylmalonyl-CoA, which generates a methylmalonyl-CoA radical. It is believed that this radical forms a carbon-cobalt bond to the coenzyme, which is then followed by the rearrangement of the substrate's carbon skeleton, thus producing a succinyl-CoA radical. This radical then goes on to abstract a hydrogen from the previously produced 5'-deoxyadenosine, again creating a deoxyadenosyl radical, which attacks the coenzyme to reform the initial complex.
A defect in methylmalonyl-CoA mutase enzyme results in methylmalonic aciduria, a dangerous disorder that causes a lowering of blood pH.
Methylcitrate cycle
Propionyl-CoA accumulation can prove toxic to different organisms. Since different cycles have been proposed regarding how propionyl-CoA is transformed into pyruvate, one studied mechanism is the methylcitrate cycle. The initial reaction is beta-oxidation to form the propionyl-CoA which is further broken down by the cycle. This pathway involves the enzymes both related to the methylcitrate cycle as well as the citric acid cycle. These all contribute to the overall reaction to detoxify the bacteria from harmful propionyl-CoA. It is also attributed as a resulting pathway due to the catabolism of fatty acids in mycobacteria. In order to proceed, the prpC gene codes for methylcitrate synthase, and if not present, the methylcitrate cycle will not occur. Instead, catabolism proceeds through propionyl-CoA carboxylase. This mechanism is shown below to the left along with the participating reactants, products, intermediates, and enzymes.
Bacterial metabolism
Mycobacterium tuberculosis metabolism
The oxidation of propionyl-CoA to form pyruvate is influenced by its necessity in Mycobacterium tuberculosis. Accumulation of propionyl-CoA can lead to toxic effects. In Mycobacterium tuberculosis,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e metabolism of propionyl-CoA is involved in cell wall biogenesis. A lack of such catabolism would therefore increase the susceptibility of the cell to various toxins, particularly to macrophage antimicrobial mechanisms. Another hypothesis regarding the fate of propionyl-CoA, in M. tuberculosisis, is that since propionyl-CoA is produced by beta odd chain fatty acid catabolism, the methylcitrate cycle is activated subsequently to negate any potential toxicity, acting as a buffering mechanism.
Possible sequestration in R. sphaeroides
Propionyl-CoA has can have many adverse and toxic affects on different species, including bacterium. For example, inhibition of pyruvate dehydrogenase by an accumulation of propionyl-CoA in Rhodobacter sphaeroides can prove deadly. Furthermore, as with E. coli, an influx of propionyl-CoA in Myobacterial species can result in toxicity if not dealt with immediately. This toxicity is caused by a pathway involving the lipids that form the bacterial cell wall. Using esterification of long-chain fatty acids, excess propionyl-CoA can be sequestered and stored in the lipid, triacylglycerol (TAG), leading to regulation of elevated propionyl-CoA levels. Such a process of methyl branching of the fatty acids causes them to act as sinks for accumulating propion
Escherichia coli metabolism
In an investigation performed by Luo et al., Escherichia coli strains were utilized to examine how the metabolism of propionyl-CoA could potentially lead to the production of 3-hydroxypropionic acid (3-HP). It was shown that a mutation in a key gene involved in the pathway, succinate CoA-transferase, led to a significant increase in 3-HP. However, this is still a developing field and information on this topic is limited.
Plant metabolism
Amino acid metabolism in plants has been deemed a controversial topic, due to the lack of concrete evidence for any particular pathway. However, it has been suggested that enzymes related to the production and use of propionyl-CoA are involved. Associated with this is the metabolism of isobutyryl-CoA. These two molecules are deemed to be intermediates in valine metabolism. As propionate consists in the form of propionyl-CoA, it was discovered that propionyl-CoA is converted to β-hydroxypropionate through a peroxisomal enzymatic β-oxidation pathway. Nevertheless, in the plant Arabidopsis, key enzymes in the conversion of valine to propionyl-CoA were not observed. Through different experiments performed by Lucas et al., it has been suggested that in plants, through peroxisomal enzymes, propionyl-CoA (and isobutyryl-CoA) are involved in the metabolism of many different substrates (currently being evaluated for identity), and not just valine.
Fungi metabolism
Propionyl-CoA production through the catabolism of fatty acids is also associated with thioesterifcation. In a study concerning Aspergillus nidulans, it was found that with the inhibition of a methylcitrate synthase gene, mcsA, of the pathway described above, production of distinct polyketides was inhibited as well. Therefore, the utilization of propionyl-CoA through the methylcitrate cycle decreases its concentration, while subsequently increasing the concentration of polyketides. A polyketide is a structure commonly found in fungi that is made of acetyl- and malonyl-CoAs, providing a product with alternating carbonyl groups and methylene groups. Polyketides and polyketide derivatives are often highly structurally complex, and several are highly toxic. This has led to research on limiting polyketide toxicity to crops in agriculture through phytopathogenic fungi.
Protein Propionylation
Propionyl-CoA is also a substrate for post-translational modification of proteins by reacting with lysine residues on proteins, a reaction called protein propionylation. Due to structural similarities of Acetyl-CoA and Propionyl-CoA, propionylation reaction are thought to use many of the same enzymes used for protein acetylation. Although functional consequences of protein propionylation are currently not completely understood, in vitro propionylation of the Propionyl-CoA Synthetase enzyme controls its activity.
Human and clinical significance
Gen5
Similar to how plant peroxisomal enzymes bind propionyl-CoA and isobutyryl-CoA, Gen5, an acetyltransferase in humans, binds to propionyl-CoA and butyryl-CoA. These specifically bind to the catalytic domain of Gen5L2. This conserved acetyltransferase is responsible for the regulation of transcription by lysine acetylation of the histone N-terminal tails. This function of acetylation has a much higher reaction rate than propionylation or butyrylation. Because of the structure of propionyl-CoA, Gen5 distinguishes between different acyl-CoA molecules. In fact, it was found that the propyl group of butyrl-CoA cannot bind due to lack of stereospecificity to the active binding site of Gen5 due to the unsaturated acyl chains. On the other hand, the third carbon of propionyl-CoA can fit into the active site of Gen5 with the correct orientation.
Propionic acidemia
In the neonatal developmental stages, propionic acidemia, which is a medical issue defined as the lack of propionyl-CoA carboxylase, can cause impairment, mental disability, and numerous other issues. This is caused by an accumulation of propionyl-CoA because it cannot be converted to methylmalonyl-CoA. Newborns are tested for elevated propionylcarnitine. Further ways of diagnosing this disease include urine samples. Medications used help to reverse and prevent recurring symptoms include using supplements to decrease propionate production.
References
Thioesters of coenzyme A
Metabolism |
https://ko.wikipedia.org/wiki/2019%EB%85%84%20%EC%9D%BC%EB%B3%B8%20%EC%8B%9C%EB%A6%AC%EC%A6%88 | 2019년 일본 시리즈 | 2019년 일본 시리즈(, ) 또는 SMBC 일본 시리즈 2019()는 2019년 10월 19일부터 10월 23일까지 열린 제70회 일본 프로 야구 일본 시리즈 경기이다.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총 4차례의 접전을 펼친 끝에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누르고 4전 전승의 성적을 기록, 3년 연속 10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개요
이 대회는 연호가 레이와로 변경되면서 레이와 시대 최초의 일본 시리즈를 개최하게 됐다.
요미우리는 5년 만에 센트럴 리그 정상에 오르면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우승하여 일본 시리즈에 진출하게 됐다. 소프트뱅크는 전년도에 이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퍼시픽 리그 우승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를 누르고 2년 연속 리그 2위 팀으로서 일본 시리즈에 진출하여 2017년부터 3년 연속 일본 시리즈에 출전하게 됐다. 리그 우승이 아닌 팀의 일본 시리즈 출전은 2017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2017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리그 3위로부터 2위 팀 한신과 리그 우승팀 히로시마에게 연거푸 승리하면서 일본 시리즈에 진출) 이래 3년 연속이 된다.
양팀 대결은 2005년에 팀의 운영 주체가 여러번 바뀐 호크스가 소프트뱅크로 이름을 바꾼 후로는 첫 맞대결이 성사됐지만 소프트뱅크 전신 구단인 난카이·다이에 시절을 포함하면 11번째이며, 요미우리 V9 시대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양팀 감독(당시)의 ‘ON 대결’로 주목을 받은 2000년 요미우리 - 다이에(당시) 이후 19년 만이다. 일본 시리즈 대전 카드로는 지금까지의 요미우리 대 세이부(전신 구단을 포함)의 10회를 제치고 최다 대전 횟수 기록을 세웠다. 사다하루·나가시마 두 사람은 현장에서 물러나 있지만 사다하루는 소프트뱅크 구단 회장, 나가시마는 요미우리 교진군 종신 명예 감독으로서 각각 구단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음지에서나마 ‘ON 대결’이 이뤄진 셈이다.
이번에도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예고 선발을 채택했다.
전 경기가 돔 구장에서 개최된 일본 시리즈는 2012년(요미우리 대 닛폰햄) 이후 7년 만이다. 또한 요미우리가 출전함으로써 2015년(야쿠르트 대 소프트뱅크) 이후 4년 만에 도쿄도에서 개최되는 일본 시리즈가 됐다.
최종적으론 소프트뱅크가 요미우리를 4경기에서 모두 승리(일명 ‘스윕 승리’)하여 3년 연속이자 팀 통산 10번째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4연승에서의 일본 시리즈 우승은 2005년에 지바 롯데 마린스가 한신에 4연승을 기록한 이래 14년 만이자 6번째이며 무승부를 포함한 무패 우승은 8번째이다. 정규 시즌 2위 이하 팀에 의한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른 것은 사상 처음이다.
이로써 소프트뱅크는 2014년 이후 최근 6년간 5차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석권하게 됐다. 호크스로서는 난카이 시절이던 1959년에 4연승으로 요미우리에게 승리한 이후 이 대회에서 60년 만에 일본 시리즈에서의 요미우리를 또다시 이기게 됐다. 또한 60년 전과 마찬가지로 4경기 전승, 그리고 일본 시리즈 우승은 적지(당시는 고라쿠엔 구장)에서 결정지었다.
또한 소프트뱅크는 이미 2018년 히로시마를 상대로 맞대결을 벌인 끝에 우승함으로써 일본 시리즈에서 전체 6개 구단을 상대로 전신인 난카이 시절을 포함한 기존 센트럴 리그 6개 팀에서 일본 시리즈 정상 자리를 탈환했다. 이 해를 우승으로 1989년 연고지를 후쿠오카로 이전한 후 2005년에 모기업인 소프트뱅크로 변경된 후에 한해서도 센트럴 리그 전체 6개 구단을 상대로 일본 시리즈 우승을 석권하게 됐다. 이는 퍼시픽 리그 구단 사상 첫 쾌거이다. 또 센트럴 리그 구단들이 현재의 모기업이 된 이후 모든 팀을 상대로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소프트뱅크는 상대 리그 팀이 현재의 모기업이 된 이후 모든 팀을 상대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유일한 구단이 됐다.
더 나아가 2018년 일본 시리즈 3차전부터 이어진 일본 시리즈에서의 연승을 8로 늘리면서 세이부, 요미우리, 지바 롯데와 나란히 일본 시리즈 타이 기록이 됐다. 2시즌 연속 8연승은 1975년부터 1976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펄로스)가 세운 7연승(2무승부를 포함)을 뛰어넘는 일본 시리즈 신기록을 세웠다. 반면 패배한 요미우리는 1990년 세이부 라이온스(당시)전 이후 29년 만에 쇼와·헤이세이·레이와의 세 연호에서 각각 한 차례씩 4연패를 세 번이나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양팀 감독인 하라 다쓰노리·구도 기미야스는 모두 1990년에 요미우리·세이부 선수로서 각각 출전했고 하라는 1990년 당시 감독이던 후지타 모토시에 이어 선수와 감독 모두 일본 시리즈 4연패를 당하는 굴욕을 겪어야만 했다. 또한 일본 시리즈에 출전한 감독으로 내리 4연승 또는 4연패를 모두 경험한 것은 하라가 최초다. 한편 구도는 선수·감독 양쪽에서 내리 4연승을 경험한 첫 감독이 됐다.
또한 이 대회에서 소프트뱅크의 승리로 일본 시리즈에서의 센트럴 리그 팀과 퍼시픽 리그 팀의 리그 통산 우승 횟수가 35회로 동률을 이뤘다. 1959년에 소프트뱅크의 전신인 난카이가 요미우리를 누르고 우승한 시점에서 센트럴·퍼시픽 리그 팀이 각각 5회 우승으로 나란히 기록한 후 1960년 일본 시리즈에서 다이요 웨일스(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가 다이마이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를 누르고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른 이후 59년에 걸쳐 센트럴 리그가 우세했다. 2002년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가 세이부를 꺾은 시점에서 센트럴 리그 32회, 퍼시픽 리그 21회였고 양대 리그 우승 횟수 차이가 역대 최다인 11까지 벌어졌지만 그 후 17년간 퍼시픽 리그가 14회 우승, 특히 2013년 일본 시리즈에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요미우리를 꺾은 이후 7년 연속으로 퍼시픽 리그가 승리함에 따라 60년 만에 퍼시픽 리그가 통산 우승 횟수에서 동률을 이룬 것이었다.
그리고 승리한 경기 수도 2019년 이전 시점에서는 센트럴 리그가 202승, 퍼시픽 리그가 201승으로 센트럴 리그가 우세했지만 소프트뱅크가 첫 경기부터 연승하면서 2차전 종료 시점에서 203승으로 역전하게 됐는데 이것은 1963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니시테쓰(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가 요미우리에 승리한 시점에서 퍼시픽 리그가 38승 3무 37패로 앞선 이후 56년 만에 퍼시픽 리그의 승수가 센트럴 리그를 넘어서게 됐다. 결과적으로 소프트뱅크가 4승 무패로 일본 시리즈를 마무리 지으면서 퍼시픽 리그의 205승 8무 202패를 기록하여 1959년 난카이의 4연승에 의한 퍼시픽 리그가 31승 2무 27패로 남긴 이후 최다 승수를 기록했다. 반면 센트럴 리그는 1974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주니치 드래건스가 롯데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에게 승리한 시점에서 81승 3무 57패로 승수 차이가 사상 최대인 24로 넘어섰고 2002년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가 세이부에게 4연승한 시점에서도 165승 6무 144패로 승수 차이가 21을 웃돌았으나 2003년 이후 17차례에서 퍼시픽 리그의 61승에 대한 센트럴 리그가 37승으로 역전당하는 셈이다.
1차전과 2차전은 퍼시픽 리그 연고지에서의 경기에서 모두 소프트뱅크가 승리함으로써 2013년 7차전에서 라쿠텐의 승리로 이어지는 퍼시픽 리그 출전팀의 연고지 연승 기록을 17승으로 늘렸다. 소프트뱅크 단독으로서도 2011년 7차전에서 주니치에게 승리한 것부터 계속되는 연고지 연승 기록을 14로 늘렸다. 게다가 1차전부터 4차전까지 모두 돔 구장에서 경기를 치렀고 4경기 모두 소프트뱅크가 승리함으로써 2013년 5차전(도쿄 돔)에서 라쿠텐의 승리로 이어지는 퍼시픽 리그 출전 팀의 돔 구장 연승 기록을 19로 늘렸다.
2014년부터 6년 연속으로 NPB 파트너인 미쓰이스미토모 파이낸셜 그룹(SMBC 그룹)을 메인 스폰서로서 ‘SMBC 일본 시리즈 2019’()라는 이름으로 개최했다. SMBC 그룹이 일본 시리즈의 메인 스폰서가 된 이후 요미우리가 출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NPB는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레이와 원년 동일본 태풍에서의 이재민 지원을 목적으로 이 대회의 입장료 및 공식 상품 매출 수익금 일부를 일본 시리즈 종료 후 태풍 피해를 입은 재해 지역에 수재의연금을 기탁하기로 밝혔다.
일본 시리즈 종료 직후 요미우리의 아베 신노스케가 이 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4차전 종료 후에 우측 외야 관중석 및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각각 10번의 헹가래가 이뤄졌다(후자에 대해서는 소프트뱅크측의 제의로 이뤄졌고 소프트뱅크의 주장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필두로 하여 헹가래를 쳤다). 일부에서는 이 소프트뱅크측의 행동에 대해 당시 이 시기에 일본에서 개최된 럭비 월드컵에 빗대 ‘노 사이드(럭비 용어로 경기 종료 후에 적이냐 우리 편이냐를 넘어 서로의 건투를 칭찬하는 의미)’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아베에 이어 스캇 매티슨도 현역에서 은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상세 규칙
경기 일정
1차전 : 10월 19일(후쿠오카 야후오쿠! 돔)
2차전 : 10월 20일(후쿠오카 야후오쿠! 돔)
3차전 : 10월 22일(도쿄 돔)
4차전 : 10월 23일(도쿄 돔)
※어느 팀이 4승을 올린 시점에서 일본 시리즈는 종료한다.
※5차전 이전에 취소됐을 경우에는 5차전과 6차전 사이의 이동일은 마련하지 않는다.
※퍼시픽 리그 홈경기(1·2·6·7차전)에서는 지명 타자 제도를 채택한다.
※무승부에 있어서 7차전에서 승부가 나지 않는 경우에는 7차전 다음날에 8차전, 8차전에서도 역시 승부가 나지 않는 경우에는 이동일을 하루 끼고 도쿄 돔에서 9차전이 열린다.
개최 구장
개시 시간
도쿄 돔
3·4차전: 각 18시 15분에 시작.
후쿠오카 야후오쿠! 돔
1·2차전: 각 18시 30분에 시작.
클라이맥스 시리즈 경기 결과
☆·★=클라이맥스 시리즈·파이널의 어드밴티지 1승 1패분
출장자 명단
경기 기록
일본 시리즈 경기 결과
1차전
10월 19일 - 후쿠오카 야후오쿠! 돔
2차전
10월 20일 - 후쿠오카 야후오쿠! 돔
3차전
10월 22일 - 도쿄 돔
4차전
10월 23일 - 도쿄 돔
수상 선수
MVP
유리스벨 그라시알(소프트뱅크)
감투상
가메이 요시유키(요미우리)
우수 선수상
다카하시 레이, 마쓰다 노부히로, 알프레도 데스파이네(이상 소프트뱅크)
시구식
1차전 : 소네 아키라(2019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여자 78㎏급 금메달리스트)
2차전 : 켄타로(배우, 메인 스폰서인 미쓰이스미토모 은행의 CM 캐릭터)
3차전 : 요시노 아키라(아사히 카세이 명예연구원·2019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4차전 : 가미지 유이(휠체어 테니스 2020년 도쿄 패럴림픽 대표, 메인 스폰서인 미쓰이스미토모 은행의 CM 캐릭터)
주해
각주
같이 보기
2019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2019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외부 링크
2019년 SMBC 일본 시리즈 경기 결과(일본야구기구 공식 기록)
SMBC 일본 시리즈 2019 - 일본 야구 기구 홈페이지
2019년 야구
프로 야구 일본 시리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9년 10월 | https://en.wikipedia.org/wiki/2019%20Japan%20Series | 2019 Japan Series | The 2019 Japan Series (known as the SMBC Nippon Series 2019 for sponsorship reasons) was the championship series of Nippon Professional Baseball's (NPB) 2019 season. The 70th edition of the Japan Series, it was played from 19-23 October. The series was a best-of-seven playoff between the Fukuoka SoftBank Hawks, the Pacific League's (PL) Climax Series champion and defending Japan Series champions, and the Yomiuri Giants, the Central League's (CL) Climax Series champion. The Hawks defeated the Giants in a four game sweep to win their third consecutive Japan Series championship, their fifth title in six years; they are also the first team to win three straight Japan Series titles since the Seibu Lions did it from 1990 to 1992.
The Hawks finished the 2019 regular season in second place in the Pacific League. They advanced to the Japan Series after defeating the Tohoku Rakuten Golden Eagles and the Saitama Seibu Lions in the PL Climax Series. The Giants finished in first place in the Central League, earning a bye in the first stage of the CL Climax Series, followed by a victory over the Hanshin Tigers to reach the Japan Series.
Mirroring the 1959 Japan Series in which the Nankai Hawks beat Yomiuri in four games to capture their first Japan Series championship, SoftBank beat Yomiuri in four games to capture the franchise's tenth Japan Series championship. This marked the sixth time the Japan Series ended in a sweep, with the most recent being in 2005. The first two games were played at the Fukuoka Yafuoku! Dome and the other two at the Tokyo Dome. Yurisbel Gracial was given the Japan Series Most Valuable Player Award and Yoshiyuki Kamei was awarded with the Fighting Spirit Award.
Climax Series
For the second year in a row, the Fukuoka SoftBank Hawks finished the 2019 regular season in second place in the Pacific League (PL) behind the Saitama Seibu Lions, securing them a place as host team for the First Stage of the Climax Series, a best-of-three series against the Tohoku Rakuten Golden Eagles. After defeating the Eagles 2–1, SoftBank advanced to the Final Stage, where they competed against the pennant winning Lions. The series was best-of-six and the Lions were awarded a one-win advantage as well as home field advantage for the entire series. For the second time in as many years, the Hawks went into the MetLife Dome and overcame the Lions' one-win advantage, defeating the Lions in four games to advance to their third consecutive Japan Series, as well as their fifth in the past six seasons.
For the first time since , the Yomiuri Giants finished with the best record in the Central League, giving them a First Stage bye and advancing them directly to the Final Stage. They defeated the third place Hanshin Tigers 4–1, securing them a place in the Japan Series for the first time since 2013.
Series notes
A Japanese baseball dynasty of the 2010s, the Fukuoka SoftBank Hawks had won the previous two Japan Series and four in the last five years. The Yomiuri Giants had won 22 Japan Series championships, more than any other team in the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NPB). The last time the Giants won the championship was in the 2012 Japan Series, which was also the last time a Central League team had won the Japan Series. The Giants and the Hawks last played against each other in the Japan Series in 2000, when the Giants defeated the Hawks in six games. Kimiyasu Kudo, the Hawks manager in 2019, had pitched for the Giants in the 2000 series and Tatsunori Hara was Giants manager both times. A week before the post-season began, Yomiuri catcher Shinnosuke Abe announced that he would be retiring at the end of the season after 19 years with the Giants. Abe has been described as one of the greatest catchers to have played in the NPB.
Home field advantage for the Japan Series alternates between the Pacific and Central leagues every year. For this series, it was the PL's turn to receive the advantage so it was awarded to the Hawks. SoftBank beat Yomiuri in their only interleague series during the 2019 regular season. For the sixth year in a row, Sumitomo Mitsui Banking Corporation (SMBC) sponsored the naming rights for the Japan Series, so it was officially known as the "2019 SMBC Japan Series".
Series overview
Game summaries
Game 1
In Game 1, the starting pitchers for the Fukuoka SoftBank Hawks and Yomiuri Giants were Kodai Senga and Shun Yamaguchi, respectively. It was Senga's third straight year starting Game 1 of the Japan Series and it was Yamaguchi's first Japan Series start. Both starting pitchers were Eiji Sawamura Award candidates during the regular season. Senga allowed a home run to Shinnosuke Abe in the top of the second inning, but Yurisbel Gracial hit a two-run home run n the bottom of the second inning. Senga allowed only the one run in seven innings. Meanwhile, SoftBank scored a third run in the sixth inning with a run batted in (RBI) sacrifice fly by Akira Nakamura, and scored four runs in the seventh inning with a two-RBI single by Taisei Makihara, an RBI single by Yuki Yanagita, and an RBI ground out by Shuhei Fukuda. Takumi Ohshiro hit a solo home run for the Giants in the ninth inning to complete the game's scoring.
Game 2
Rei Takahashi started Game 2 for SoftBank, and did not allow a hit into the seventh inning. C.C. Mercedes, the starting pitcher for Yomiuri, also allowed one hit to SoftBank in six innings. With Kan Otake pitching for the Giants in the seventh inning, an error then a single allowed two players to reach base. SoftBank then scored the game's first runs on a three-run home run by Nobuhiro Matsuda. SoftBank added three more runs in the bottom of the eighth inning on a solo home run by Yuki Yanagita and a two-run home run by Shuhei Fukuda. In the ninth inning, SoftBank's Jumpei Takahashi recorded one out but walked the bases loaded. Yuito Mori, their closer, entered the game and Kazuma Okamoto drove in two runs, but was tagged out running the bases. Abe singled for the Giants to close the score to 6–3, but Mori retired the next batter, ending the game. With the win, SoftBank extended their championship finals series home winning streak to fourteen.
Game 3
Yuki Takahashi started Game 3 for Yomiuri and Rick van den Hurk started for SoftBank. Yomiuri's Yoshiyuki Kamei scored the game's first run with a solo home run in the first inning. Gracial hit a solo home run for SoftBank in the top of the second inning. Alfredo Despaigne hit an RBI single in the top of the third inning, but Yomiuri tied the game at 2–2 in the bottom of the third inning with another home run by Kamei. Shosei Togo relieved for the Giants in the fourth inning, but allowed four runs, including an RBI sacrifice fly by Yuya Hasegawa, a bases loaded base on balls to Yuki Yanagita, and a two-RBI single by Despaigne. Both teams prevented each other from scoring again, as SoftBank won 6–2, to move to within a victory of a three-peat.
Game 4
Tomoyuki Sugano started Game 4 for Yomiuri and Tsuyoshi Wada started for SoftBank. Gracial hit a three-run home run in the fourth inning for SoftBank to open the scoring. Wada struck out six Giants in five innings without allowing a run. The Giants scored their first runs when Kazuma Okamoto hit a two-run home run off of Robert Suárez in the sixth inning. The Hawks and Giants both scored another run in the seventh inning. Mori finished the victory for SoftBank by pitching a scoreless ninth inning, earning the save, to cap the sweep.
The Hawks clinched their third straight Japan Series title with the victory. Gracial, who batted 6-for-16 (.375) with three home runs and six RBIs in the series, won the Japan Series Most Valuable Player Award.
See also
2019 Korean Series
2019 World Series
References
Japan Series
2019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season
Japan Series
Fukuoka SoftBank Hawks
Yomiuri Giants |
https://ko.wikipedia.org/wiki/%EA%B5%B4%EB%A7%88%EA%B0%9C%EB%8F%84%EB%A7%88%EB%B1%80%EB%B6%99%EC%9D%B4 | 굴마개도마뱀붙이 | 굴마개도마뱀붙이(Diplodactylus conspicillatus)는 배리어블 팻테일 게코(variable fat-tailed gecko), 버로우플러그 게코(burrow-plug gecko)라 불리며, 호주대륙 가운데의 건조한 내륙지대에 고유한 돌도마뱀붙이류(Diplodactylid)의 일종이다. 굴마개는 대륙 전역에 분포하며, 스피니펙스 풀이 우거진 모래사막에서 제일 흔하게 발견된다. 동물원에서 사육되거나 애완동물로서 길러지기도 한다.
묘사
돌마개는 몸뚱이가 연황갈색에서 적황갈색을 띄는 중소형 도마뱀붙이류이다. 등 전체에 적갈색 그물무늬가 나있으며, 옅거나 흰색을 띄는 반점이 몸을 뒤덮고 있다. 다리, 입술, 밑부분은 다른 부위보다 창백하며, 주둥이와 눈 사이에 짙은 줄무늬가 존재하고 때로는 눈 뒤까지 뻗친다.
몸뚱이는 통통하며, 팔다리는 짧고 꼬리는 넓고 납작하며 머리 크기와 비슷하다. 길이는 대략 60mm이며, 꼬리 길이는 주둥이-항문 (SVL = 주둥이 끝부분에서 총배설강까지 잰 길이) 길이의 약 40% (대략 24mm) 정도이다.
등비늘은 크고 균일하며 판모양으로 꼬리까지 이어진다. 콧구멍과 주둥이비늘(rostral scale) 사이에는 코앞비늘(anterior nasal scale)이 나있으며, 턱비늘(mental scale)은 반구형이다. 큰 일차입술위비늘(primary supralabial scale)이 나있고, 작고 오돌토돌하며 인접한 눈코사이(:en:lore)비늘(loreal scale)보다 크지 않은 입술위비늘(supralabial scale)이 뒤따라 나있다.
굴마개는 대부분의 도마뱀붙이류처럼 눈꺼풀이 없는 대신 투명한 눈비늘이 눈을 엎고 있고, 길고 유연한 혀로 눈을 핥아 촉촉하고 깨끗하게 유지한다.
암수 구분 없이 총배설강옆박차(paracloacal supr)가 있으며, 3-8개의 가시가 모여 나있다. 하지만 암컷의 박차는 인접한 몸비늘에 비해 50%이상 크지 않다. 이 밖에도 항문전공이 없다는 것이 굴마개의 핵심 식별요소이다.
분류
굴마개는 1987년에 아서 헨리 루카스와 찰스 프로스트가 최초로 기술하였다.
돌도마뱀붙이속은 27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통 스톤 게코나 팻테일 게코라고 불린다. 이 속의 종들은 형태적으로는 유사하나 유전적으로는 떨어져있다.<ref name=Doughty>{{저널 인용|last1=Doughty |first1=Paul |last2=Oliver |first2=Paul |title=Systematics of Diplodactylus (Squamata:Diplodactylidae) from the south-western Australian biodiversity hotspot: redefinition of D. polyophthalmus and the description of two new species |journal=Records of the Western Australian Museum |date=2013 |volume=28 |pages=44–65 |url=http://museum.wa.gov.au/sites/default/files/RecWAMuseum_2013_28(1)_44to65_DOUGHTYetal_0.pdf |accessdate=May 24, 2019}}</ref> 예를 들어, Diplodactylus kenneallyi, Diplodactylus savage, Diplodactylus pulcher, Diplodactylus conspicillatus''는 전부 형태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따라서 대부분의 돌도마뱀붙이속의 종들은 속의 다양성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재분류되고 재기술되어왔다.
분포와 서식지
굴마개는 호주 내륙의 건조, 반건조 서식지 전역에 널리 분포한다. 구체적으로는 뉴사우스웨일스주, 퀸즐랜드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북부와 노던준주의 내륙 지역에 분포한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북서부와 노던준주 북동부의 해안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이 지면성 도마뱀붙이류는 모래사막, 탁 트인 수풀지대, 덤불지대, 바위노두, 바위로 뒤덮인 지역 따위의 다양한 생태계에 서식하지만, 스피니펙스 풀이 우거진 모래사막에서 제일 흔하게 발견된다. 쓰러진 나무, 지면의 균열, 바위 사이, 버려진 도마뱀/거미 땅굴 속에 숨은 채로 발견되곤 한다.
생태
굴마개는 다른 도마뱀들처럼 외온성(:en:ectothermic)이며, 낮에는 햇빛의 온기와 에너지를 흡수하고, 그 힘으로 밤에 먹이를 사냥하고 소화한다. 굴마개는 야행성으로서 낮에는 바위, 쓰러진 나무, 거미나 도마뱀이 버려준 땅굴 속에 숨는다. 사막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들이 숨을 곳을 찾는 습성이 있는데, 주행성 포식자를 피하고 적절체온(preferred body temperature (PBT))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호주대륙의 외딴 지역에 고유한 굴마개의 행동과 습성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이러한 딜레마는 굴마개가 같은 속에 속한 다른 종과 생김새가 비슷하여 식별하기 어려운 탓이기도 하다. 번식, 사냥, 적응행위에 대한, 혹은 환경생리학(:en:ecophysiology)적인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식성
굴마개는 식성이 까다로워서 흰개미 이외에는 거의 먹지 않는다. 흰개미 외에는 귀뚜라미, 거미, 개미 따위의 작은 곤충을 먹을 것이다.
호주의 건조한 지역에서는 물을 보기 드물기 때문에 아침이슬 따위의 물 잔여물에서 물을 섭취할 것으로 보인다.
번식
굴마개는 난생이며, 이는 알의 형태로 새끼를 낳는다는 것을 뜻한다. 10-2월에, 북쪽에서는 11-3월에 번식한다. 짝짓기행위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지만, 총배출강돌기(cloacal spur)는 짝짓기 도중 암컷에 몸을 고정하는 데 쓰일 것 같다고 여겨진다.
임신한 암컷은 허리둘레가 눈에 띄게 늘어나며, 알을 쓰러진 나무 따위의 초목 사이의 모래 표면이나 축축한 모래의 꽃줄기에 알을 낳는다. 보통 한 번에 1-2개의 알을 낳으며, 번식기에는 여러 번 산란한다. 알의 크기는 15.5 x 9.25 mm (길이 x 폭) 에 달하며 59–65 일 뒤에는 부화한다. 유체의 크기는 평균 항문까지 24–27 mm (SVL) 에 달한다.
사육시에는 부화한지 12-18개월이 지나서 70-80%의 개체가 성체급 주둥이-항문 길이를 갖추어 성적으로 성숙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위협
맹금류, 뱀, 도마뱀 따위가 야생에서 굴마개를 포식한다. 굴마개는 낮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은신하여 대부분의 포식자를 피한다.
굴마개는 IUCN 적색 목록에 '관심 필요'로 등재되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호주의 종들처럼 현재는 위협받지 않고 있더라도 서식지 파괴와 감소, 기후 변화 같은 증대하는 환경적 위협이나 고양이, 개, 여우 따위의 가정 동물로 인한 포식 따위에 취약하다.
각주
돌도마뱀붙이속
1897년 기재된 파충류
아서 헨리 셰익스피어 루카스가 명명한 분류군
찰스 프로스트 (박물학자)가 명명한 분류군 | https://en.wikipedia.org/wiki/Diplodactylus%20conspicillatus | Diplodactylus conspicillatus | Diplodactylus conspicillatus, the variable fat-tailed gecko or burrow-plug gecko, is a diplodactylid gecko endemic to central and arid inland areas of Australia. Widespread across the continent, the variable fat-tailed is most commonly found in sandy desert habitats dominated by spinifex grasses. They have also been bred in captivity by zoos and as pets.
Description
The variable fat-tailed gecko is small-medium-sized gecko with a pale fawn to reddish-brown body. It has a dark brown reticulated pattern over the dorsal aspect of its body and pale to white speckles covering the body. Limbs, lips and underside of the geckos are paler than the rest of the body and a dark streak presents between the snout and eye, sometimes continuing beyond the eye.
Variable fat-tailed geckos have a stout body, short limbs and a broad, flat tail of similar size to the head. They are approximately 60mm long, snout-to-vent (SVL = measurement taken from the tip of an animal's nose to the opening of the cloaca) with a tail around 40% of the SVL (approximately 24mm).
The dorsal scales are large and homogenous, continuing into plate-like scales over the tail. Nostrils are separated from the rostral scale by an anterior nasal scale and the mental scale is hemispherical in shape. They have a large primary supralabial scale followed by small, granular supralabials no larger than the adjacent loreals.
Like most gecko species, the variable fat-tailed gecko lacks a moveable eyelid and instead relies on a long, flexible tongue to keep their eyes moist and clean.
Both male and female geckos possess paracloacal (parallel to the cloaca) spurs, small clusters of around 3-8 spines.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although present in both sexes, paracloacal spurs in females are rarely more than 50% larger than adjacent body scales. In addition to paracloacal spurs, a key identifying feature of the variable fat-tailed gecko is a lack of pre-anal pores.
Taxonomy
Diplodactylus conspicillatus was first identified in 1897 by Arthur Henry Lucas and Charles Frost.
The genus Diplodactylus consists of 27 gecko species commonly referred to as stone or fat-tailed geckos. Species within the genus are morphologically similar but genetically distinct.<ref name=Doughty>{{cite journal |last1=Doughty |first1=Paul |last2=Oliver |first2=Paul |title=Systematics of Diplodactylus (Squamata:Diplodactylidae) from the south-western Australian biodiversity hotspot: redefinition of D. polyophthalmus and the description of two new species |journal=Records of the Western Australian Museum |date=2013 |volume=28 |pages=44–65 |doi=10.18195/issn.0312-3162.28(1).2013.044-065 |url=http://museum.wa.gov.au/sites/default/files/RecWAMuseum_2013_28(1)_44to65_DOUGHTYetal_0.pdf |accessdate=May 24, 2019}}</ref> For example, Diplodactylus kenneallyi, Diplodactylus savage, Diplodactylus pulcher and Diplodactylus conspicillatus all share similar morphological traits. As a result, many Diplodactylus species have been reclassified and redescribed over the years to more accurately represent the diversity within the genus.
Distribution and habitat Diplodactylus conspicillatus is widely distributed across mainland Australia within arid and semi-arid habitats. They range from inland New South Wales, Queensland and South Australia to northern regions of Western Australia and the Northern Territory. They are also found in coastal regions of north-western Western Australia and north-eastern Northern Territory.
These terrestrial geckos inhabit a variety of ecosystems including sandy deserts, open grasslands, shrublands, rocky outcrops and stony ranges, although are most commonly found in sandy deserts dominated by Spinifex grasses. They are often found sheltering in fallen trees, cracks in the soil, among rocks and in abandoned lizard/spider burrows.
Ecology
Variable fat-tailed geckos are nocturnal (active during the night) and like most lizards are ectothermic, absorbing warmth and energy from the sun during the day, so they can then hunt and digest their food at night. As a nocturnal species, the variable fat-tailed gecko seeks out warm places to shelter in during the day such as rocks, fallen trees and abandoned burrows or spiders and other lizards. Shelter-seeking behaviour is observed in many desert dwelling species to provide protection of diurnal (active during the day) predators and prevent body temperatures from exceeding the preferred body temperature (PBT).
Endemic to remote areas of Australia, there is little known about the behaviours and ecology of the variable fat-tailed gecko. This dilemma is also contributed to by the difficulties often faced identifying this species correctly due to similarities with other Diplodactylids. Further research into breeding, hunting and adaptive behaviours as well as the ecophysiology of this species is needed.
Diet
Variable fat-tailed geckos are specialist feeders, feeding almost exclusively on termites. In addition to termites, these insectivores will also eat crickets, spiders, ants and other small insects.
Water sources in many arid zones of Australia are scarce and so, variable fat-tailed geckos most likely obtain water from morning dew and other water residues.
Reproduction Diplodactylus conspicillatus'' are oviparous meaning they lay eggs as opposed to giving birth to live young. They breed from September to February and November to March in more northern areas. Little is known about their mating behaviour; however, it is thought cloacal spurs are most likely used to grasp the female during copulation.
Gravid females exhibit a marked increase in girth before laying their eggs in shallow scapes of moist sand or on the sand surface beneath fallen trees and other vegetation. Typical clutch size is 1-2 eggs, with females laying multiple clutches per season. Eggs are 15.5 x 9.25 mm (length x width) in size and reach full incubation around 59–65 days. The average hatchling size is 24–27 mm (SVL).
In captivity, the variable fat-tailed gecko has been observed to reach sexual maturity at 70-80% of adult SVL around 12–18 months of age.
Predators and threats
Natural predators of the variable fat-tailed gecko include birds of prey, snakes and other lizards. Many of these predators are avoided during the day by seeking shelter.
The variable fat-tailed gecko is currently listed on the IUCN Red List as of least concern. However, although not currently threatened like many Australian species they are still susceptible to increasing environmental threats such as habitat degradation, habitat loss, climate change and predation by feral species such as cats, dogs and foxes.
References
Diplodactylus
Reptiles described in 1897
Taxa named by Arthur Henry Shakespeare Lucas
Taxa named by Charles Frost (naturalist)
Geckos of Australia |
https://ko.wikipedia.org/wiki/%EC%8B%B8%EC%9D%B4%EC%BD%94%ED%8C%A8%EC%8A%A4%20%EB%8B%A4%EC%9D%B4%EC%96%B4%EB%A6%AC | 싸이코패스 다이어리 | 《싸이코패스 다이어리》는 2019년 11월 20일부터 2020년 1월 9일까지 방영된 tvN 수목 드라마이다.
등장 인물
주요 인물
윤시윤 : 육동식 역 - 34세. 대한 증권 자산운용 3팀 사원. 자신을 싸이코패스라 착각한 호구. 종철의 아들. 지연의 남동생. 동찬의 이복형.
정인선 : 심보경 역 - 30세. 낙산 지구대 경사. 이상은 높지만 현실을 택하고 살아온 동네 경찰. 동식을 진짜 싸이코패스 포식자 살인마로 착각해서 경장에서 경사로 진급.
박성훈 : 서인우 역 - 36세. 대한 증권 이사. 일기장을 잃어버린 냉혹하고 치밀한 싸이코패스.
동식의 주변인물
이한위 : 육종철 역 - 60대. 육공화국 사장. 지연&동식&동찬의 아버지
황효은 : 육지연 역 - 30대. 종철의 큰딸, 동식의 누나. 동찬의 의붓누나
김결 : 조용구 역 - 40대. 지연의 남편, 동식의 매형. 자기도 잘난 거 하나도 없으면서 동식을 무시하는 얄미운 타입.
정수빈 : 육동찬 역 - 18세. 종철과 인혜 사이에서 태어난 지연과 동식의 이복 남동생. 낙산고등학교 2학년.
소희정 : 나인혜 역 - 50대. 종철의 두번째 아내. 동찬의 어머니. 지연과 동식의 새 어머니.
보경의 주변인물
최성원 : 허택수역 - 28세. 낙산 지구대 순경. 보경의 부사수로 아직 1년 차 늦깎이 신참.
김명수 : 심석구 역 - 50대. 보경의 아버지. 과거 사고로 머리를 다쳐 아이 같은 지능을 갖게 된 인물. 재준의 파트너. 숙연의 남편.
이칸희 : 이숙연 역 - 50대. 보경의 어머니. 카페를 운영 중인 우아하고 부드러운 중년 여성. 동식이 기억상실이 되기 전 유기견 산책 알바로 인연을 맺었었다. 동식의 알리바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 하지만 숙연과 동식의 관계를 전혀 몰라 진실이 한참 후에야 드러난다.
이해영 : 류재준 역 - 50대. 서울지방경찰청 경감. 과거 석구의 파트너.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프로파일러. (1회 ~ 12회)
인우의 주변인물
박정학 : 서충현 역 - 60대. 대한증권 회장. 인우와 지훈의 아버지. (1회 ~ 14회)
유비 : 서지훈역 - 30대. 대한증권 상무. 충현과 은실의 아들. 인우의 이복동생.
윤예희 : 김은실 역 - 50대. 지훈의 어머니이자 정실 부인. 첩 자식인 인우를 껄끄러워 한다.
김혜나 : 서지윤 역 - 30대. 인우의 의붓누나. 지훈의 누나. 충현과 은실의 큰딸.
임일규 : 김찬일 역 - 40대. 인우와 지훈의 매형. 언론사 집안 출신 사위. 대한경제신문 부사장.
황선희 : 조유진 역 - 30대. 대한증권 감사팀 팀장, 인우를 짝사랑하는 감사팀장.
한수현 : 박무석 역 - 40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해주는 형사 출신 탐정이자 인우의 해결사. (1회 ~ 12회)
동식의 직장및 주변인물
최대철 : 공찬석 역 - 40대. 대한증권 자산운용 3팀 팀장. 호구 동식을 무시하고 괴롭히고 갑질 하던 첫판왕.
김기두 : 박재호 역 - 30대. 대한증권 자산운용 3팀 대리. 잔머리 잘 굴리고 눈치 백단에 약삭빠른 동식의 입사 동기.
조시내 : 한정아 역 - 40대. 대한증권 자산운용 3팀 주임. 아이 둘에, 제멋대로 직장을 들락날락하는 남편 때문에 삶이 고단하기만 한 워킹맘.
최태환 : 신석현 역 - 30대. 대한증권 자산운용 3팀 사원. 재호처럼 사내 정치에 비빌 깜냥은 없으면서도 동식 같은 호구는 되기 싫은 미꾸라지. 눈치나 보며 적당히 사는 개인주의자.
이민지 : 오미주 역 - 30대. 대한증권 자산운용 3팀 사원. 선배~ 선배~ 하며 호구 동식을 톡톡히 이용해 먹었던 사무실 막내.
허성태 : 장칠성 역 - 30대. 한물 간 조폭. 동식의 윗집에 사는 조폭 출신의 백수.
송훈 : 송훈 역 - 40대. 대한증권 자산운용 2팀 팀장. 공찬석 팀장 앞에서는 기를 못 펴는 아부쟁이.
특별출연
정해균 : 김명국 역 - 노숙자
유라
윤지온 : 주영민 역 - 신성증권 이사
김모범 : 네루꾸이 역 - 고성케미컬 외국인 근로자
조석현 : 남성철 역 - 포식자 모방범
윤경호
한지은
조윤호 : 칠성의 후배 역
이현웅 : 오명달 역 - 8년 전 손지민양 살인 사건 진범으로 누명을 쓴 재소자
촬영지
구포국수
아이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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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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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목록 (ㅅ)
2019년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목록
외부 링크
싸이코패스 다이어리 공식 홈페이지
2019년 드라마
2020년 드라마
TvN 수목드라마
201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202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2019년에 시작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2020년에 종료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 https://en.wikipedia.org/wiki/Psychopath%20Diary | Psychopath Diary | Psychopath Diary () is a 2019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starring Yoon Shi-yoon, Jung In-sun and Park Sung-hoon. It aired on tvN from November 20, 2019 to January 9, 2020.
Synopsis
Yook Dong-sik (Yoon Shi-yoon), an analyst who works at Daehan Securities, has a timid personality and he can't even get angry at the people who look down upon him. One day, shortly after failing on his attempt of suicide, he witnesses a murder. He unintentionally picks up a diary belonging to murderer, on which was written the log of his murders. He flees with the diary, but he is accidentally hit by Police Officer Shim Bo-kyung's (Jung In-sun) patrol car which causes him to suffer from retrograde amnesia. Due to the diary in his possession, Dong-sik mistakenly believes he is a psychopath. Since that moment, his behavior started to change. Bo-kyung, who got involved with Dong-sik, decides to catch the serial killer.
Meanwhile, Seo In-woo (Park Sung-hoon), the director and son of the chairman of Daehan Securities where Dong-sik works, turns out to be the heartless psychopath serial killer. He loses his diary when his 6th victim, a homeless old man tossed his diary away. He feels insecure ever since.
Cast
Main
Yoon Shi-yoon as Yook Dong-sik, a timid and pushover man who works as a clerk at Daehan Securities. His weak personality begins to change when he perceive himself as a killer.
Jung In-sun as Shim Bo-kyung, an officer in a patrol station.
Park Sung-hoon as Seo In-woo, the real psychopathic serial killer who is also the director of Daehan Securities where Dong-sik works at.
Supporting
People around Yook Dong-sik
Lee Han-wi as Yook Jong-chul, Dong-sik's father.
Hwang Geum-byul as Yook Ji-yeon, Dong-sik's older sister.
Kim Gyul as Jo Yong-gu, Dong-sik's brother-in-law.
Jung Su-bin as Yook Dong-chan, Dong-sik's younger half-brother.
So Hee-jung as Na In-hye, Dong-sik's step-mother, Dong-chan's mother.
Heo Sung-tae as Jang Chil-sung, a gangster who lives at Unit 708. He later addresses Dong-sik as his 'Big Boss' after mistakenly believes him to be a serial killer.
People around Shim Bo-kyung
Choi Sung-won as Heo Taek-soo, Bo-kyung partner.
Kim Myung-soo as Shim Seok-gu, Bo-kyung's father who is a former investigator police.
Lee Kan-hee as Lee Suk-yeon, Bo-kyung's mother.
Lee Hae-young as Officer Ryu Jae-joon
People around Seo In-woo
Park Jung-hak as Seo Chung-hyeon, In-woo's father who is the chairman of Daehan Securities.
Yoo Bi as Seo Ji-hun, In-woo's step-brother and managing director of Daehan Securities.
Yoon Ye-hee as Kim Eun-shil, Chung-hyeon's wife and Ji-hun's mother.
Kim Hye-na as Seo Ji-eun, In-woo's step-sister.
Lim Il-gyu as Kim Chan-il, In-woo's brother-in-law.
Han Soo-hyun as Kim Mu-seok, former detective who now works for In-woo.
People at Daehan Securities
Choi Dae-chul as Gong Chan-seok, the manager of Team 3 and Dong-sik's boss who is selfish and rude.
Kim Ki-doo as Park Jae-ho, Dong-shik's cunning team member who claims to be his best friend.
Jo Shi-nae as Han Jung-ah, Dong-sik's colleague.
Lee Min-ji as Oh Min-joo
Choi Tae-hwan as Shin Seok-hyun
Hwang Sun-hee as Jo Yoo-jin
Others
Gu Ja-geon as a bully
Special appearances
Jung Hae-kyun as Kim Myung-gook, a homeless man. ( 1–2)
Yura as a girl with a dog in park (Ep. 2)
Nam Jung-hee as murder victim (Ep. 2)
Jo Yoon Ho as Chil-sung's junior (Ep. 2)
Han Ji-eun as a woman with a big guy (Ep. 2)
Yoon Ji-on as Joo Young-min (Ep. 4–5)
Lee Hyun-woong as Oh Myung-dal (Ep. 12–13, 16)
Production
The first script reading was held in August 2019 in Sangam-dong, Seoul.
Original soundtrack
Part 1
Part 2
Viewership
References
External links
TVN (South Korean TV channel) television dramas
Korean-language television shows
2019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debuts
2020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endings
Television series by Studio Dragon
Television series by KeyEast
South Korean comedy television series
South Korean thriller television series |
https://ko.wikipedia.org/wiki/2020%EB%85%84%20%ED%95%98%EA%B3%84%20%EC%98%AC%EB%A6%BC%ED%94%BD%20%EB%A9%94%EB%8B%AC%20%EC%A7%91%EA%B3%84 | 2020년 하계 올림픽 메달 집계 | 2020년 하계 올림픽 메달 집계는 일본 도쿄도에서 열린 2020년 하계 올림픽 동안에 집계한 메달의 수의 순위를 국가 올림픽 위원회별로 매긴 것이다.
올림픽 메달
제조
이번 대회의 메달은 2017년 4월부터 2019년 3월까지 2년간 일본 시민이 기부한 폐휴대전화 등의 전자 기기에서 추출한 금, 은, 동으로 만들어졌다. 메달의 표면은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규정대로 제1회 하계 올림픽이 열린 그리스 아테네의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 서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와, 대회의 정식 명칭, 올림픽 상징 등이 새겨져 있다.
수여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대회 직전 새로운 규정을 발표하였는데, 메달 수여식에서 선수가 시상자로부터 메달을 받아 본인이 직접 목에 걸도록 하였다.
메달 수의 변동
종목 규정에 의해 원래부터 2명에게 동메달을 수여하는 복싱, 유도, 태권도, 레슬링, 가라테를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금, 은, 동메달은 각각 1명에게만 수여되지만 육상 남자 높이뛰기에서 2명의 선수가 같은 성적으로 1위를 기록하여 금메달을 공동 수상했다. 또한 여자 체조 마루에서 같은 점수를 받은 2명이 동메달을 공동 수상했다.
메달 집계
2020년 하계 올림픽의 메달 현황표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메달 현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버뮤다, 필리핀, 카타르가 올림픽 출전 이래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부르키나파소와 산마리노, 투르크메니스탄은 자국의 올림픽 역사상 첫 메달을 획득하였다.
|-
|1||align=left|||39 ||41 ||33 ||113
|-
|2||align=left|||38 ||32 ||18 ||88
|-bgcolor=#ccccff
|3||align=left|||27 ||14 ||17 ||58
|-
|4||align=left|||22 ||21 ||22 ||65
|-
|5||align=left|||20 ||28 ||23 ||71
|-
|6||align=left|||17 ||7 ||22 ||46
|-
|7||align=left|||10 ||12 ||14 ||36
|-
|8||align=left|||10 ||12 ||11 ||33
|-
|9||align=left|||10 ||11 ||16 ||37
|-
|10||align=left|||10 ||10 ||20 ||40
|-
|11||align=left|||7 ||6 ||11 ||24
|-
|12||align=left|||7 ||6 ||8 ||21
|-
|13||align=left|||7 ||6 ||7 ||20
|-
|14||align=left|||7 ||3 ||5 ||15
|-
|15||align=left|||6 ||7 ||7 ||20
|-
|16||align=left|||6 ||4 ||10 ||20
|-
|17||align=left|||4 ||5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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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align=left|||4 ||4 ||3 ||11
|-
|19||align=left|||4 ||4 ||2 ||10
|-
|20||align=left|||4 ||2 ||2 ||8
|-
|21||align=left|||4 ||1 ||4 ||9
|-
|22||align=left|||3 ||8 ||6 ||17
|-
|23||align=left|||3 ||6 || ||9
|-
|24||align=left|||3 ||4 ||6 ||13
|-
|25||align=left|||3 ||4 ||4 ||11
|-
|26||align=left|||3 ||3 ||2 ||8
|-
|27||align=left|||3 ||2 ||2 ||7
|-
|28||align=left|||3 ||1 ||5 ||9
|-
|29||align=left|||3 ||1 ||3 ||7
|-
|30||align=left|||3 ||1 ||2 ||6
|-
|31||align=left|||3 ||1 ||1 ||5
|-
|32||align=left|||3 || ||2 ||5
|-
|33||align=left|||2 ||5 ||1 ||8
|-
|34||align=left|||2 ||4 ||6 ||12
|-
|35||align=left|||2 ||2 ||9 ||13
|-
| rowspan="2"|36||align=left|||2 ||1 ||1 ||4
|-
|align=left|||2 ||1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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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align=left|||2 ||1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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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39||align=left|||2 || ||2 ||4
|-
|align=left|||2 || ||2 ||4
|-
|41||align=left|||2 ||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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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42||align=left|||2 || || ||2
|-
|align=left|||2 || || ||2
|-
|44||align=left|||1 ||6 ||12 ||19
|-
|45||align=left|||1 ||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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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46||align=left|||1 ||3 || ||4
|-
|align=left|||1 ||3 || ||4
|-
|48||align=left|||1 ||2 ||4 ||7
|-
|49||align=left|||1 ||2 ||3 ||6
|-
| rowspan="2"|50||align=left|||1 ||2 ||1 ||4
|-
|align=left|||1 ||2 ||1 ||4
|-
|52||align=left|||1 ||2 || ||3
|-
|53||align=left|||1 ||1 ||5 ||7
|-
|54||align=left|||1 ||1 ||4 ||6
|-
|55||align=left|||1 ||1 ||3 ||5
|-
| rowspan="2"|56||align=left|||1 ||1 ||2 ||4
|-
|align=left|||1 ||1 ||2 ||4
|-
|58||align=left|||1 ||1 || ||2
|-
| rowspan="4" |59||align=left|||1 || ||1 ||2
|-
|align=left|||1 || ||1 ||2
|-
|align=left|||1 || ||1 ||2
|-
|align=left|||1 ||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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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3" |63||align=left|||1 || || ||1
|-
|align=left|||1 || || ||1
|-
|align=left|||1 ||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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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align=left||| ||4 ||1 ||5
|-
|67||align=left||| ||3 ||4 ||7
|-
|68||align=left||| ||3 ||2 ||5
|-
|69||align=left||| ||2 ||2 ||4
|-
|70||align=left||| ||2 ||1 ||3
|-
|71||align=left||| ||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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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72||align=left||| ||1 ||2 ||3
|-
|align=left||| ||1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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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3"|74||align=left||| ||1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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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 ||1 ||1 ||2
|-
|align=left||| ||1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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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 ="6" |77||align=left||| ||1 || ||1
|-
|align=left||| ||1 || ||1
|-
|align=left||| ||1 || ||1
|-
|align=left||| ||1 || ||1
|-
|align=left||| ||1 || ||1
|-
|align=left||| ||1 || ||1
|-
|83||align=left||| || ||8 ||8
|-
|84||align=left||| || ||4 ||4
|-
|85||align=left||| || ||2 ||2
|-
| rowspan="8" |86||align=left||| || ||1 ||1
|-
|align=left||| || ||1 ||1
|-
|align=left||| || ||1 ||1
|-
|align=left||| || ||1 ||1
|-
|align=left||| || ||1 ||1
|-
|align=left||| || ||1 ||1
|-
|align=left||| || ||1 ||1
|-
|align=left||| || ||1 ||1
|-
! colspan="2" |합계 (93개 국가 · 지역)||340||338||402||1080
|}
같이 보기
올림픽 메달 집계
2020년 하계 패럴림픽 메달 집계
메달
하계 올림픽 메달 집계 | https://en.wikipedia.org/wiki/2020%20Summer%20Olympics%20medal%20table | 2020 Summer Olympics medal table | The 2020 Summer Olympics, officially known as the Games of the XXXII Olympiad, was an international multi-sport event held in Tokyo, Japan, from 23 July to 8 August 2021. The games were postponed by one year as part of the impact of the COVID-19 pandemic on sports. However, the Games was referred to by its original date in all medals, uniforms, promotional items, and other related media in order to avoid confusion in future years. A total of 11,417 athletes from 206 nations participated in 339 events in 33 sports across 50 different disciplines.
Overall, the event saw two records: 93 nations received at least one medal, and 65 of them won at least one gold medal. Athletes from the United States won the most medals overall, with 113, and the most gold medals, with 39. Host nation Japan won 27 gold medals surpassing its gold medal tally of 16 at both the 1964 and 2004 summer editions. Athletes from that nation also won 58 medals overall, which eclipsed its record of 41 overall medals won at the previous Summer Olympics.
American swimmer Caeleb Dressel won the most gold medals at the games with five. Meanwhile, Australian swimmer Emma McKeon won the greatest number of medals overall, with seven in total. As a result, she tied Soviet gymnast Maria Gorokhovskaya's seven medals at the 1952 summer edition for most medals won at a single games by a female athlete. Bermuda, Qatar, and the Philippines won their nation's first Olympic gold medals. Meanwhile, Burkina Faso, Turkmenistan, and San Marino won their nation's first Olympic medals. However, Turkmenistani athletes had previously competed as nationals of the Russian Empire and of the Soviet Union, in particular during the 1992 summer edition, Turkmenistani athletes competed as part of the Unified Team. North Macedonia won their nation's first Olympic silver medal, having previously only won a bronze medal.
Medals
The medals used for the 2020 Summer Olympics were designed by Junichi Kawanishi. They were manufactured using metal extracted from recycled small electronic devices donated by the public. The ribbon uses the traditional Japanese design motifs found in , a harmonised chequered pattern, and , a traditional kimono layering technique. The case is manufactured from Japanese ash wood dyed with the same colour as the Olympic emblem. The circular lid and the body of the case can be opened like a ring connected by a magnet. The obverse of the medals features Nike, the Greek goddess of victory, in front of Panathenaic Stadium and the Olympic rings.
As a result of safety protocols stemming from the COVID-19 pandemic, athletes were presented with their medals on trays, and were asked to put them on themselves (or each other, in the case of team winners), rather than having them placed around their necks by a dignitary.
Medal table
The medal table is based on information provided by the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IOC) and is consistent with IOC convention in its published medal tables. By default, the table is ordered by the number of gold medals the athletes from a nation have won, where nation is an entity represented by a National Olympic Committee (NOC). The number of silver medals is taken into consideration next and then the number of bronze medals.
In boxing, judo, karate, taekwondo, and wrestling, two bronze medals are awarded in each weight class. Two gold medals (and no silver) were awarded to Mutaz Essa Barshim and Gianmarco Tamberi for a first-place tie in the men's high jump athletics event. Two bronze medals were awarded to Angelina Melnikova and Mai Murakami for a third-place tie in the women's floor gymnastics event.
Key
Changes in medal standings
Key
Disqualified athlete(s)
See also
All-time Olympic Games medal table
2020 Summer Paralympics medal table
References
External links
Medal table
Summer Olympics medal tables |
https://ko.wikipedia.org/wiki/2020%EB%85%84%20%ED%95%98%EA%B3%84%20%ED%8C%A8%EB%9F%B4%EB%A6%BC%ED%94%BD%20%EB%A9%94%EB%8B%AC%20%EC%A7%91%EA%B3%84 | 2020년 하계 패럴림픽 메달 집계 | 2020년 하계 패럴림픽 메달 집계는 2020년 하계 패럴림픽에서 획득한 메달 순으로 매긴 각국의 패럴림픽 위원회들의 목록이다.
메달 집계
다음은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토대로 한 표로, 금메달 · 은메달 · 동메달의 수 순서로 랭킹을 매긴다. 금은동의 수가 모두 동률일 경우, 같은 순위가 되고 IPC 국가 부호의 알파벳 순으로 목록에 표시한다.
주최국인 일본은 연보라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
| 1 || align=left | || 96 || 60 || 51 || 207
|-
| 2 || align=left | || 41 || 38 || 45 || 124
|-
| 3 || align=left | || 37 || 36 || 31 || 104
|-
| 4 || align=left | 러시아 패럴림픽 위원회 || 36 || 33 || 49 || 118
|-
| 5 || align=left | || 25 || 17 || 17 || 59
|-
| 6 || align=left | || 24 || 47 || 27 || 98
|-
| 7 || align=left | || 22 || 20 || 30 || 72
|-
| 8 || align=left | || 21 || 29 || 30 || 80
|-
| 9 || align=left | || 14 || 29 || 26 || 69
|-
| 10 || align=left | || 14 || 1 || 4 || 19
|- style="background-color:#ccccff"
| 11 || align=left | || 13 || 15 || 23 || 51
|-
| 12 || align=left | || 13 || 12 || 18 || 43
|-
| 13 || align=left | || 12 || 11 || 1 || 24
|-
| 14 || align=left | || 11 || 15 || 28 || 54
|-
| 15 || align=left | || 9 || 15 || 12 || 36
|-
| 16 || align=left | || 8 || 5 || 6 || 19
|-
| 17 || align=left | || 7 || 6 || 12 || 25
|-
| 18 || align=left | || 7 || 5 || 4 || 16
|-
| 19 || align=left | || 7 || 2 || 13 || 14
|-
| 20 || align=left | || 7 || 4 || 3 || 22
|-
| 21 || align=left | || 6 || 3 || 3 || 12
|-
| 22 || align=left | || 6 || 2 || 1 || 9
|-
| 23 || align=left | || 5 || 10 || 6 || 21
|-
| 24 || align=left | || 5 || 8 || 6 || 19
|-
| 25 || align=left | || 5 || 5 || 8 || 18
|-
| 26 || align=left | || 5 || 2 || 4 || 11
|-
| 27 || align=left | || 5 || 1 || 1 || 7
|-
| 28 || align=left | || 4 || 5 || 2 || 11
|-
| 29 || align=left | || 4 || 4 || 4 || 12
|-
| 30 || align=left | || 4 || 4 || 3 || 11
|-
| 31 || align=left | || 4 || 3 || 8 || 15
|-
| 32 || align=left | || 4 || 2 || 1 || 7
|-
| 33 || align=left | || 4 || 1 || 5 || 10
|-
| 34 || align=left | || 4 || 1 || 2 || 7
|-
| 35 || align=left | || 4 || 1 || 1 || 6
|-
| 36 || align=left | || 4 || 0 || 1 || 5
|-
| 37 || align=left | || 3 || 7 || 14 || 24
|-
| 38 || align=left | || 3 || 2 || 2 || 7
|-
| 39 || align=left | || 3 || 2 || 0 || 5
|-
| 40 || align=left | || 3 || 1 || 1 || 5
|-
| 41 || align=left | || 2 || 10 || 12 || 24
|-
| 42 || align=left | || 2 || 4 || 9 || 15
|-
| 43 || align=left | || 2 || 3 || 4 || 9
|-
| 44 || align=left | || 2 || 3 || 3 || 8
|-
| 45 || align=left | || 2 || 3 || 1 || 6
|-
| 45 || align=left | || 2 || 3 || 1 || 6
|-
| 47 || align=left | || 2 || 0 || 2 || 4
|-
| 48 || align=left | || 2 || 0 || 0 || 2
|-
| 49 || align=left | || 1 || 5 || 3 || 9
|-
| 50 || align=left | || 1 || 5 || 2 || 8
|-
| 51 || align=left | || 1 || 3 || 7 || 11
|-
| 52 || align=left | || 1 || 3 || 1 || 5
|-
| 52 || align=left | || 1 || 3 || 1 || 5
|-
| 54 || align=left | || 1 || 1 || 1 || 3
|-
| 55 || align=left | || 1 || 1 || 0 || 2
|-
| 56 || align=left | || 1 || 0 || 2 || 3
|-
| 57 || align=left | || 1 || 0 || 1 || 2
|-
| 57 || align=left | || 1 || 0 || 1 || 2
|-
| 59 || align=left | || 1 || 0 || 0 || 1
|-
| 59 || align=left | || 1 || 0 || 0 || 1
|-
| 59 || align=left | || 1 || 0 || 0 || 1
|-
| 59 || align=left | || 1 || 0 || 0 || 1
|-
| 63 || align=left | || 0 || 5 || 4 || 9
|-
| 64 || align=left | || 0 || 5 || 2 || 7
|-
| 65 || align=left | || 0 || 3 || 4 || 7
|-
| 66 || align=left | || 0 || 3 || 2 || 5
|-
| 67 || align=left | || 0 || 3 || 0 || 3
|-
| 68 || align=left | || 0 || 2 || 3 || 5
|-
| 69 || align=left | || 0 || 2 || 0 || 2
|-
| 70 || align=left | || 0 || 1 || 2 || 3
|-
| 71 || align=left | || 0 || 1 || 1 || 2
|-
| 71 || align=left | || 0 || 1 || 1 || 2
|-
| 71 || align=left | || 0 || 1 || 1 || 2
|-
| 71 || align=left | || 0 || 1 || 1 || 2
|-
| 75 || align=left | || 0 || 1 || 0 || 1
|-
| 76 || align=left | || 0 || 0 || 3 || 3
|-
| 77 || align=left | || 0 || 0 || 2 || 2
|-
| 78 || align=left | || 0 || 0 || 1 || 1
|-
| 78 || align=left | || 0 || 0 || 1 || 1
|-
| 78 || align=left | || 0 || 0 || 1 || 1
|-
| 78 || align=left | || 0 || 0 || 1 || 1
|-
| 78 || align=left | || 0 || 0 || 1 || 1
|-
| 78 || align=left | || 0 || 0 || 1 || 1
|-
| 78 || align=left | || 0 || 0 || 1 || 1
|-
| 78 || align=left | || 0 || 0 || 1 || 1
|-
| 78 || align=left | || 0 || 0 || 1 || 1
|-
!colspan=2| 합계 || 539 || 540 || 589 || 1668
|}
같이 보기
2020년 하계 올림픽 메달 집계
메달 집계
하계 패럴림픽 메달 집계 | https://en.wikipedia.org/wiki/2020%20Summer%20Paralympics%20medal%20table | 2020 Summer Paralympics medal table | The medal table of the 2020 Summer Paralympics ranks the participating National Paralympic Committees (NPCs) by the number of gold medals that are won by their athletes during the competition. The 2020 Paralympics were the sixteenth Games to be held, a quadrennial competition open to athletes with physical and intellectual disabilities. The games were held in Tokyo, Japan from 24 August to 5 September 2021. There were 539 medal events.
Athletes from Costa Rica, Ecuador, El Salvador, Montenegro, and Oman won their first Paralympic medals. El Salvador and Oman had never won an Olympic medal. Costa Rica, Ecuador, Ethiopia, Pakistan, and Sri Lanka won their first Paralympic gold medals.
Medal table
Judo, table tennis and taekwondo award two bronze medals per discipline - the table tennis to losing semi-finalists,a first since the 1996 Summer Paralympics and the two combat sports by a repechage system whereby defeated athletes up to the semi-final stage rejoin competition for a bronze medal.
Two silver medals were awarded for a second-place tie in the men's high jump T47 athletics event. No bronze medal was awarded as a result.
Two bronze medals were awarded for a third-place tie in the men's 100 metres T64 athletics event.
Two bronze medals were awarded for a third-place tie in the women's 100 metre freestyle S7 swimming event.
Due to the disqualification of two participants, a bronze medal was not awarded in the women's 100 metres T11 athletics event.
Key
Podium sweeps
Changes
Marcin Polak was provisionally suspended from the men's individual pursuit B pending an adjudication following a positive test for a banned substance.
See also
All-time Paralympic Games medal table
2020 Summer Olympics medal table
References
External links
Tokyo 2020 Official Homepage
medal table
Summer Paralympics medal tables |
https://ko.wikipedia.org/wiki/%EB%84%A4%EC%A6%88%ED%8D%BC%EC%8A%A4%EC%96%B4 | 네즈퍼스어 | 네즈퍼스어(Nez Perce)는 미국 아이다호주에 사는 네즈퍼스족의 언어이다. 사합틴어족에 속한다. 네즈퍼스라는 이름은 “뚫은 코”를 뜻하는 프랑스어 “”에서 왔지만, 사실 네즈퍼스족은 코를 뚫지 않는다. 프랑스인들은 코를 뚫는 관습이 있는 이웃 부족들과 네즈퍼스족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네즈퍼스족은 스스로를 “사람들”이라는 뜻인 “니미푸(Nimipu)”라고 부른다.
네즈퍼스어는 심각한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유창하게 구사하는 화자 수 집계는 출처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100명 미만인 것은 확실하다. 네즈퍼스족은 언어 재활 계획을 통해 네즈퍼스어를 재도입하려 시도하고 있지만, 현재로서 네즈퍼스어의 미래를 낙관할 수는 없다.
음운론
네즈퍼스어 음운론에는 모음조화(노엄 촘스키와 모리스 핼리의 《영어의 음성체계》에 언급된 바 있음) 및 Crook (1999)가 기술한 복잡한 강세 체계가 있다.
자음
음소 /, , , , /는 하류 방언에만 나타난다.
모음
강세는 양음 부호로 표시한다(á, é, í, ó, ú).
문법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와 마찬가지로 네즈퍼스어는 포합어이다. 네즈퍼스어 동사 하나는 영어 문장 하나에 해당하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주어와 목적어의 인칭과 수가 동사 접사로 표시되며, 시제와 상 또한 동사 접사로 표시된다.
{| cellpadding="4"
| 단어:
| ʔaw̓líwaaʔinpqawtaca
|-
| 형태소:
| ʔew - ʔilíw - wee - ʔinipí - qaw - tée - ce
|-
| 해석:
| 1/2-3OBJ - fire - fly - grab - straight.through - go.away - IMPERF.PRES.SG
|-
| 번역:
| '나는 그를 불 속에서 건져내려 간다.' (Cash Cash 2004:24)
|}
{| cellpadding="4"
| 단어:
| hitw̓alapáyna
|-
| 형태소:
| hi - tiw̓ele - pááy - e
|-
| 해석:
| 3SUBJ - in.rain - come - PAST
|-
| 번역:
| '그는 빗속에 도착했다.' (Aoki 1979)
|}
격
네즈퍼스어에서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에는 격 접미사가 붙을 수 있다. 네즈퍼스어는 격표시에 있어 자동사의 주어, 타동사의 주어, 타동사의 목적어를 모두 다르게 취급한다. 즉, 네즈퍼스어는 세계적으로 드문 삼분법 언어에 속한다. 격표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순은 자유로운 편이다. 네즈퍼스어는 어순을 통해 구정보와 신정보를 나타내지만, 주어와 목적어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자동사의 주어는 격표지가 붙지 않으며, 주어가 3인칭이라면 동사에 3인칭 주어 일치 접두사 hi-가 붙는다. 타동사의 주어에는 능격 접미사 -nim이 붙는다. (능격 접미사는 -im, -nm, -m 따위로 실현되기도 하며, 1, 2인칭 대명사에는 붙지 않는다). 타동사의 목적어에는 대격 접미사 -ne가 붙는다. (대격 접미사는 -e로 실현되기도 하며, 1, 2인칭 대명사에도 붙는다.) 타동사의 목적어가 3인칭이 아니라면, 자동사의 경우와 똑같이 주어 일치 접두사가 붙는다. 타동사의 목적어가 3인칭인 경우, 주어가 3인칭이 아니라면 동사에 일치 접두사 ʔe(w)- 가 붙고, 주어가 3인칭이라면 pée-가 붙는다.
능격 접미사 -nim
ᶍáᶍaas-nim hitwekǘxce
grizzly-ergative he.is.chasing
‘회색곰이 나를 쫓고 있다.’
대격 접미사 -ne (여기서는 모음조화 때문에 -na로 나타난다)
ʔóykalo-m titóoqan-m páaqaʔancix ᶍáᶍaas-na
all-ergative people-ergative they.respect.him grizzly-accusative
‘모든 사람이 회색곰을 존경한다.’
자동사의 주어
ᶍáᶍaac hiwéhyem
grizzly has.come
‘회색곰이 왔다.’ (Mithun 1999)
다음과 같이 다양한 어순이 나타난다.
VSO 어순
kii pée-ten’we-m-e qíiw-ne ’ iceyéeye-nm
this 3→3-talk-csl-past old.man-obj coyote-erg
‘코요테가 노인에게 말했다.’
SVO 어순
Kaa háatya-nm páa-’nahna-m-a ’iceyéeye-ne
and wind-erg 3→3-carry-csl-past coyote- obj
‘그리고 바람이 코요테를 여기로 데려왔다.’
SOV 어순
Kawó’ kii háama-pim ’áayato-na pée-’nehnen-e
then this husband-erg woman-obj 3→3-take.away- past
‘그러자 남편이 여자를 데려갔다.’ (Rude 1992).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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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ki, Haruo; & Walker, Deward E., Jr. (1989). Nez Perce oral narratives. University of California publications in linguistics (Vol. 104).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Cash Cash, Phillip. (2004). Nez Perce verb morphology . (Unpublished manuscript, University of Arizona, Tucson).
Crook, Harold D. (1999). The phonology and morphology of Nez Perce stress. (Doctoral disserta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Mithun, Marianne. (1999). The languages of Native North Americ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hbk); .
Rude, Noel E. (1985). Studies in Nez Perce grammar and discourse. (Doctoral dissertation, University of Oregon).
Rude, Noel. (1992). Word Order and Topicality in Nez Perce. Pragmatics of Word Order Flexibility, viii, 193-208. John Benjamins Publishing.
모음조화
Chomsky, Noam; & Halle, Morris. (1968). Sound pattern of English (pp. 377–378). Studies in language. New York: Harper & Row.
Hall, Beatrice L.; & Hall, R. M. R. (1980). Nez Perce vowel harmony: An Africanist explanation and some theoretical consequences. In R. M. Vago (Ed.), Issues in vowel harmony (pp. 201–236). Amsterdam: John Benjamins.
Kim, Chin (1978). 'Diagonal' vowel harmony?: Some implications for historical phonology. In J. Fisiak (Ed.), Recent developments in historical phonology (pp. 221–236). The Hague: Mouton.
학습 자료
사전과 어휘
Aoki, Haruo. (1994). Nez Perce dictionary. University of California publications in linguistics (Vol. 112).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문법
Aoki, Haruo. (1965). Nez Perce grammar.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Aoki, Haruo. (1970). Nez Perce grammar. University of California publications in linguistics (Vol. 62).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Reprinted 1973, California Library Reprint series).
텍스트와 학습 과정
Aoki, Haruo. (1979). Nez Perce texts. University of California publications in linguistics (Vol. 90).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2, 3
Aoki, Haruo; & Whitman, Carmen. (1989). Titwáatit: (Nez Perce Stories). Anchorage: National Bilingual Materials Development Center, University of Alaska. . (Material originally published in Aoki 1979).
Watters, Mari. (1990). Nez Perce tapes and texts. [5 audio cassettes & 1 booklet]. Moscow, Idaho: Mari Watters Productions, Upward Bound, College of Education, University of Idaho.
외부 링크
Nez Perce language videos (유튜브)
필립 캐시 캐시의 웹사이트 (네즈퍼스 연구자)
Nez Perce sounds
Joseph Red Thunder: Speech of August 6, 1989 at the Big Hole National Battlefield Commemorating our Nez Perce Ancestors (has audio)
Hinmatóowyalahtq'it: Speech of 1877 as retold by Jonah Hayes (ca. 1907) (.mov)
Fox narrative animation (.swf)
Nez Perce Verb Morphology (.pdf)
wéeyekweʔnipse ‘to sing one’s spirit song’: Performance and metaphor in Nez Perce spirit-singing (.pdf)
Tɨmnákni Tímat (Writing from the Heart): Sahaptin Discourse and Text in the Speaker Writing of X̣ílux̣in (.pdf)
A map of American languages (TITUS project)
Nez Percé, 로제타 프로젝트
네즈퍼스어 관련 OLAC 자료
사합틴어족
미국의 언어
모음 조화 언어 | https://en.wikipedia.org/wiki/Nez%20Perce%20language | Nez Perce language | Nez Perce, also spelled Nez Percé or called nimipuutímt (alternatively spelled nimiipuutímt, niimiipuutímt, or niimi'ipuutímt), is a Sahaptian language related to the several dialects of Sahaptin (note the spellings -ian vs. -in). Nez Perce comes from the French phrase nez percé, "pierced nose"; however, Nez Perce, who call themselves nimiipuu, meaning "the people", did not pierce their noses. This misnomer may have occurred as a result of confusion on the part of the French, as it was surrounding tribes who did so.
The Sahaptian sub-family is one of the branches of the Plateau Penutian family (which, in turn, may be related to a larger Penutian grouping). It is spoken by the Nez Perce people of the Northwestern United States.
Nez Perce is a highly endangered language. While sources differ on the exact number of fluent speakers, it is almost definitely under 100. The Nez Perce tribe is endeavoring to reintroduce the language into native usage through a language revitalization program, but (as of 2015) the future of the Nez Perce language is far from assured.
Phonology
The phonology of Nez Perce includes vowel harmony (which was mentioned in Noam Chomsky & Morris Halle's The Sound Pattern of English), as well as a complex stress system described by Crook (1999).
Consonants
The sounds , , , and only occur in the Downriver dialect.
Vowels
Nez Perce has an average-sized inventory of five vowels, each marked for length. Unusually for a five-vowel system, however, it lacks a mid front vowel //, with low front // in its place. Such an asymmetrical configuration is found in less than five percent of the languages that distinguish exactly five vowels, and among those that do display an asymmetry, the "missing" vowel is overwhelmingly more likely to be a back vowel // or // than front //. Indeed, Nez Perce's lack of a mid front vowel within a five-vowel system appears unique, and contrary to basic tendencies toward triangularity in the allocation of vowel space. A potential reason for this peculiarity is discussed in the section on vowel harmony below.
Stress is marked with an acute accent (á, é, í, ó, ú).
Diphthongs
Nez Perce distinguishes seven diphthongs, all with phonemic length:
Vowel harmony
Nez Perce displays an extensive system of vowel harmony. Vowel qualities are divided into two opposing sets, "dominant" // and "recessive" //. The presence of a dominant vowel causes all recessive vowels within the same phonological word to assimilate to their dominant counterpart; hence // "raspberry" becomes // "for a raspberry" with the addition of the dominant-marked suffix /-/. With very few exceptions, therefore, phonological words may contain only vowels of the dominant or recessive set. Despite occurring in both sets, /i/ is not neutral; instead, it is either dominant or recessive depending on the morpheme in which it occurs.
This system presents a challenge to common concepts of vowel harmony, since it does not appear to be based on obvious considerations of backness, height, or tongue root position. To account for this, Katherine Nelson (2013) proposes that the two sets be considered as distinct "triangles" of vowel space, each by themselves maximally dispersed, where the recessive set is somewhat retracted (further back) in comparison to the dominant:
This dual system would simultaneously explain two apparent phonological aberrances: the absence of a mid front vowel //, and the fact that phonemic /i/ can be marked either as dominant or recessive. Since the three vowels of a given set are placed with regard to the other vowels of the same set, the low height of the front vowel // appears natural (that is, maximally dispersed) against its high counterparts //, as in a three-vowel system such as those of Arabic and Quechua. The high front vowel // meanwhile, is retracted much less in the transition from recessive to dominant - little enough that the distinction does not surface phonemically - and therefore can be placed near to the crux around which the triangle of vowel space is "tilted" by retraction.
Syllable structure
The Nez Perce syllable canon is CV()(C)(C)(C)(C); that is, a mandatory consonant-vowel sequence with optional vowel length, followed by up to four coda consonants. The arrangement of permitted coda clusters is summarized in the following table, where segments in each column can follow those to their right (C' represents any glottalized consonant), except when the same consonant would occur twice:
Writing system
Grammar
As in many other indigenous languages of the Americas, a Nez Perce verb can have the meaning of an entire sentence in English. This manner of providing a great deal of information in one word is called polysynthesis. Verbal affixes provide information about the person and number of the subject and object, as well as tense and aspect (e.g. whether or not an action has been completed).
History
Asa Bowen Smith developed the Nez Perce grammar by adapting the missionary alphabet used in Hawaiian missions, and adding the consonants s and t. In 1840, Asa Bowen Smith wrote the manuscript for the book Grammar of the Language of the Nez Perces Indians Formerly of Oregon, U.S.. The grammar of Nez Perce has been described in a grammar and a dictionary with two dissertations (Rude 1985; Crook 1999).
Case
In Nez Perce, the subject of a sentence, and the object when there is one, can each be marked for grammatical case, an affix that shows the function of the word (compare to English he vs. him vs. his). Nez Perce employs a three-way case-marking strategy: a transitive subject, a transitive object, and an intransitive subject are each marked differently. Nez Perce is thus an example of the very rare type of tripartite languages (see morphosyntactic alignment).
Because of this case marking, the word order can be quite free. A specific word order tells the hearer what is new information (focus) versus old information (topic), but it does not mark the subject and the object (in English, word order is fixed — subject–verb–object).
Nouns in Nez Perce are marked based on how they relate to the transitivity of the verb. Subjects in a sentence with a transitive verb take the ergative suffix -nim, objects in a sentence with a transitive verb take the accusative suffix -ne, and subjects in sentences with an intransitive verb don’t take a suffix.
This system of marking allows for flexible word order in Nez Perce:
Verb–subject–object word order
Subject–verb–object word order
Subject–object–verb word order
References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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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learning materials
Dictionaries and vocabulary
Aoki, Haruo. (1994). Nez Perce dictionary. University of California publications in linguistics (Vol. 112).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Grammar
Aoki, Haruo. (1965). Nez Perce grammar.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Aoki, Haruo. (1970). Nez Perce grammar. University of California publications in linguistics (Vol. 62).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Reprinted 1973, California Library Reprint series).
Texts and courses
Aoki, Haruo. (1979). Nez Perce texts. University of California publications in linguistics (Vol. 90).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2, 3
Aoki, Haruo; & Whitman, Carmen. (1989). Titwáatit: (Nez Perce Stories). Anchorage: National Bilingual Materials Development Center, University of Alaska. . (Material originally published in Aoki 1979).
Watters, Mari. (1990). Nez Perce tapes and texts. [5 audio cassettes & 1 booklet]. Moscow, Idaho: Mari Watters Productions, Upward Bound, College of Education, University of Idaho.
External links
Nez Perce language videos, YouTube
Phillip Cash Cash website (Nez Perce researcher)
Nez Perce sounds
Joseph Red Thunder: Speech of August 6, 1989 at the Big Hole National Battlefield Commemorating our Nez Perce Ancestors (has audio)
Hinmatóowyalahtq'it: Speech of 1877 as retold by Jonah Hayes (ca. 1907) (.mov)
Fox narrative animation (.swf)
Nez Perce Verb Morphology (.pdf)
wéeyekweʔnipse ‘to sing one’s spirit song’: Performance and metaphor in Nez Perce spirit-singing (.pdf)
Tɨmnákni Tímat (Writing from the Heart): Sahaptin Discourse and Text in the Speaker Writing of X̣ílux̣in (.pdf)
A map of American languages (TITUS project)
Nez Percé at the Rosetta Project
OLAC resources in and about the Nez Perce language
Indigenous languages of Idaho
Nez Perce
Sahaptian languages
Vowel-harmony languages
Endangered indigenous languages of the Americas
Native American language revitalization
Endangered languages of the United Stat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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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fibular ne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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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atine nerves
Palmar branch of the median nerve
Palmar branch of ulnar nerve
Pancreatic plexus
Patellar plexus
Pelvic splanchnic nerves
Perforating cutaneous nerve
Perineal branches of posterior femoral cutaneous nerve
Perineal nerve
Petrous ganglion
Pharyngeal branch of vagus nerve
Pharyngeal branches of glossopharyngeal nerve
Pharyngeal nerve
Pharyngeal plexus
Phrenic nerve
Phrenic plexus
Posterior auricular nerve
Posterior branch of spinal nerve
Posterior cord
Posterior cutaneous nerve of arm
Posterior cutaneous nerve of forearm
Posterior cutaneous nerve of thigh
Posterior scrotal nerves
Posterior superior alveolar nerve
Proper palmar digital nerves of median nerve
Prostatic plexus (nervous)
Pterygopalatine ganglion
Pudendal nerve
Pudendal plexus
Pulmonary branches of vagus nerve
Radial nerve
Recurrent laryngeal nerve
Renal plexus
Sacral plexus
Sacral splanchnic nerves
Saphenous nerve
Sciatic nerve
Semilunar ganglion
Sensory nerve
Short ciliary nerves
Sphenopalatine nerves
Splenic plexus
Stylohyoid branch of facial nerve
Subcostal nerve
Submandibular ganglion
Suboccipital nerve
Superficial branch of the radial nerve
Superficial fibular nerve
Superior cardiac nerve
Superior cervical ganglion
Superior ganglion of glossopharyngeal nerve
Superior ganglion of vagus nerve
Superior gluteal nerve
Superior hypogastric plexus
Superior labial nerve
Superior laryngeal nerve
Superior lateral cutaneous nerve of arm
Superior mesenteric plexus
Superior rectal plexus
Supraclavicular nerves
Supraorbital nerve
Suprarenal plexus
Suprascapular nerve
Supratrochlear nerve
Sural nerve
Sympathetic trunk
Temporal branches of the facial nerve
Third occipital nerve
Thoracic aortic plexus
Thoracic splanchnic nerves
Thoraco-abdominal nerves
Thoracodorsal nerve
Tibial nerve
Transverse cervical nerve
Trigeminal nerve
Trochlear nerve
Tympanic nerve
Ulnar nerve
Upper subscapular nerve
Uterovaginal plexus
Vagus nerve
Ventral ramus
Vesical nervous plexus
Vestibular nerve
Vestibulocochlear ne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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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B%A0%AC%20%28%EC%96%B8%EC%96%B4%ED%95%99%29 | 정렬 (언어학) | 언어학에서 정렬(整列, )이란, 세 종류의 핵심 논항, 즉 타동사의 두 논항과 자동사의 하나뿐인 논항이 문법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방식을 뜻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는 타동사의 보다 능동적인 논항과 자동사의 유일한 논항을 한데 묶어 ‘주어’로 취급하고, 타동사의 보다 수동적인 논항은 ‘목적어’로 취급하는데, 세계의 여러 언어들은 이와 다른 방식으로 세 논항을 구분짓기도 한다. 이러한 구분은 격과 일치 등을 통해 형태론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순 등을 통해 통사론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밖에 간접목적어와 같은 논항에 관해서도 의미가 확장되어 쓰이기도 한다.
용어
정렬에 관해 말할 때에는 논항의 종류를 다음과 같은 기호로 나타낸다.
S: 자동사의 하나뿐인 논항.
A: 타동사의 주어, 즉 타동사의 두 논항 중 가장 행위자에 가까운 논항.
O: 타동사의 목적어, 즉 타동사의 두 논항 중 가장 피행위자에 가까운 논항. P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 기호들은 ‘subject(주어)’ 또는 ‘sole(유일한)’, ‘agent(행위자)’, ‘object(목적어)’, ‘patient(피행위자)’의 머릿글자에서 왔지만, 원래 단어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S, A, O 또는 P라는 용어는 언어학에서 널리 쓰이지만 저자마다 정의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위의 정의를 따르면 ‘타동사’가 무엇인지, 또 ‘타동사’의 두 논항 중 ‘주어’와 ‘목적어’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가 모호할 수 있다. 이러한 모호함을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치다’, ‘깨트리다’, ‘죽이다’처럼 행위자와 피행위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원형적인 타동사들을 통해 A와 O를 정의하는 것이다.
주격-대격 체계는 S와 A를 동일하게 취급하고 O를 구별한다. 그러나 능격-절대격 체계는 S와 O를 동일하게 취급하고 A를 구별한다. 한국어나 영어는 전형적인 주격-대격 언어에 속한다. 이 용어는 (S와 A를 나타내는) 주격과 (O를 나타내는) 대격에서 왔다. 능격-절대격 언어의 예로는 바스크어를 들 수 있다. 이 용어는 (S와 O를 나타내는) 절대격과 (A를 나타내는) 능격에서 왔다. 한국어에서처럼 S와 A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경우 S가 A와 정렬되었다고 하며 마찬가지로 바스크어에서는 S가 O와 정렬되었다고 한다.
유형
주격-대격 정렬
주격-대격 정렬(또는 대격 정렬)은 자동사의 S 논항을 타동사의 A 논항과 똑같이 취급하며 타동사의 O 논항은 다르게 취급한다. (S=A; O) 형태론적으로 격을 표시하는 언어라면, S와 A를 무표적으로 두거나 주격으로 표시하고 O를 대격으로 표시할 수 있다. 다음 라틴어 예문에서 -us는 주격, -um은 대격 접미사이다. Julius venit. “율리우스가 왔다.”; Julius Brutum vidit. “율리우스가 브루투스를 보았다.” 세계 언어의 대부분은 주격-대격 언어이다.
유표적 주격 언어라 불리는 드문 하위 유형이 있는데, 이러한 언어에서는 주어(S=A)가 주격 표지를 받고 목적어(O)는 무표적이다. 이 유형은 아프리카 동북부, 특히 쿠시어파 언어들 및 미국 서남부와 멕시코 인근 지역의 유마어족 언어에서 많이 나타난다.
몇몇 주격-대격 언어에는 타동사의 A 논항을 강등시키고 O 논항을 S 논항으로 승격시키는 과정이 있는데, 이를 수동태라고 부른다.
능격-절대격 정렬
능격-절대격 정렬(또는 능격 정렬)은 S와 O를 똑같이 취급하며 A를 다르게 취급한다. (S=O; A) A 논항은 능격으로 표시되기도 하며(능격 표지는 속격이나 도구격의 기능을 겸하는 경우도 많다), S와 O는 무표적으로 남거나 절대격으로 표시되기도 한다. 세계 언어의 약 6분의 1이 능격-절대격 현상을 보인다. 잘 알려진 예로 마야어족과 에스키모알류트어족, 대부분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언어 등이 있다.
몇몇 능격-절대격 언어에는 타동사의 O 논항을 강등시키고 A 논항을 S 논항으로 승격시키는 과정이 있으며, 이를 역수동태라 부른다.
활격-불활격 정렬
활격-불활격 정렬(또는 활격 정렬)은 어떤 S는 A와 같이 취급하고 어떤 S는 O와 같이 취급한다. (Sa=A; So=O) 예를 들어 다음 조지아어 문장 Mariamma imğera “마리암(-ma)이 노래했다.”에서 ‘마리암’은 다음의 타동사문 Mariamma c'erili dac'era “마리암(-ma)이 편지(-i)를 썼다.”에서와 같은 격표지를 받지만, 다음 문장 Mariami iq'o Tbilisši revolutsiamde “마리암은 혁명 때까지 트빌리시에 있었다.”에서는 타동사의 목적어와 같은 격표지를 받는다. 즉, 자동사의 논항이 한 가지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S가 A처럼 취급되느냐 O처럼 취급되느냐 하는 문제에는 일반적으로 의미론적 요인이 관여한다. 그 기준은 언어마다 다르며, 동사의 의미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고, 동작의 의도성·통제 가능성·영향의 정도·화자의 공감 수준 등에 따라 화자가 선택하기도 한다. Sa=A가 받는 격을 활격, So=O가 받는 격을 불활격이라 부르기도 한다.
오스트로네시아 정렬
오스트로네시아 정렬(또는 필리핀형 정렬)은 필리핀, 보르네오, 타이완, 마다가스카르 등지의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언어에서 나타난다. 이 유형에 속하는 언어에서는 타동사문을 대격 언어처럼(S=A) 나타내기도 하고 능격 언어처럼(S=O) 나타내기도 한다. 과거에는 이를 각각 ‘능동태’와 ‘수동태’라 부르기도 했지만, 혼란의 여지가 크므로 오늘날에는 ‘행위자중심’과 ‘피행위자중심’ 구문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러한 언어들에서는 일반적으로 피행위자중심이 더 기본적인 구문이다. 양쪽 구문 모두 두 개의 핵심 격을 사용하는데(따라서 하나의 격만을 사용하는 수동태나 역수동태와는 다름), 행위자중심 구문의 ‘주격’과 피행위자중심 구문의 ‘절대격’이 동일하다. 따라서 다음 3개의 핵심 격이 쓰인다. S/A/O에 공통으로 쓰이는 격(주격 또는 직격이라 불림), 능격의 A, 대격의 O. 또한 많은 오스트로네시아 언어에는 장소나 수혜자를 직격으로 표시하는 구문들도 존재하며, 행위자중심이나 피행위자중심과 나란히 장소중심, 수혜자중심 따위로 불린다.
직격 정렬
직격 정렬(또는 중립 정렬)은 S, A, O를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따라서 청자는 문맥과 상식으로 논항을 구별해야 한다. S=A=O에 해당하는 격을 직격이라 부르기도 한다. 직격 정렬은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삼분법 정렬
삼분법 정렬은 S, A, O를 모두 다르게 취급한다. 보통 이들을 각각 자동격, 능격, 대격이라 부른다. 여기에 속하는 언어로는 네즈퍼스어 등이 있다.
타동성 정렬
타동성 정렬은 A와 O를 같게 취급하고 S를 다르게 취급한다. 전자를 타동격, 후자를 자동격이라 부른다. 루샨어 등 일부 이란어군 언어는 과거시제에서 타동성 정렬을 보이며, 타동격은 비과거시제의 대격과 같다.
직격 정렬, 삼분법 정렬, 타동성 정렬은 드물게 나타난다. 오스트로네시아 정렬을 제외한 나머지 정렬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정렬 유형의 혼합
어떤 언어가 문법의 한 영역에서 특정한 정렬을 따른다고 해서,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같은 정렬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정렬이 나타나는 영역 문단 참조.) 예를 들어 문법의 특정 영역에서는 능격-절대격 정렬을 따르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주격-대격 정렬을 따르는 언어들이 많은데, 이를 분열 능격성이라 한다. 능격성과 대격성 사이의 분열은 힌디어나 마야어족에서처럼 상에 따라 일어나기도 하고, 많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언어에서처럼 생물성 위계에 따라 일어나기도 한다. 디야리어와 같은 몇몇 호주 언어는 생물성에 따라 대격 정렬, 능격 정렬, 삼분법 정렬이 모두 나타난다.
이 처음 주장한 바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구문은 보편적으로 대격 정렬을 선호하고 다른 종류의 구문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변형적 구문(behavioral constructions; 통제, 상승, 관계화)은 대격 정렬을 선호하고 부호화 구문(coding constructions; 일치, 격 표시)은 특별히 선호하는 정렬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발상은 일찍이 ‘심층적’ 능격성과 ‘표면적’ 능격성(또는 ‘통사론적’ 능격성과 ‘형태론적 능격성’)을 구별하고자 했던 동기가 되었다. (예컨대 , ) 많은 언어들은 표면적 능격성을 지녔을 뿐 (즉, 격이나 일치만 능격 정렬을 따를 뿐) 변형적 구문에서는 능격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통사론적 능격성을 지닌 (변형적 구문에서 능격성을 보이는) 언어는 그보다 드물어 보인다.
정렬이 나타나는 영역
문법의 여러 영역에서 정렬을 따질 수 있다. 이 문단은 여러 언어에서 가져온 예를 통해 정렬을 설명한다.
논항의 격 표시
정렬이라는 용어는 논항의 격 표시에 대해 쓰이는 경우가 가장 많다.
한국어는 격조사 ‘이/가’와 ‘을/를’을 통해 핵심 논항을 표시한다.
{| cellpadding="6" style="line-height: 1em;"
|+ 한국어 (주격-대격 정렬)
|-
| 문장:
| colspan="2" | 아이가 왔다.
|
| colspan="3" | 남자가 아이를 보았다.
|-
| 단어:
| 아이 가
| 왔다
|
| 남자 가
| 아이 를
| 보았다
|-
| 분석:
| 아이 주격
| 왔다
|
| 남자 주격
| 아이 대격
| 보았다
|-
| 기능:
| S
| 자동사
|
| A
| O
| 타동사
|}
보다시피 한국어는 A(타동사의 주어)와 S(자동사의 주어) 논항을 똑같이 ‘이/가’로 표시하고, 그와 달리 O(타동사의 목적어)는 ‘을/를’로 표시한다. 따라서 한국어의 격 표시는 주격-대격 정렬을 따른다. 주격-대격 언어에서 A와 S가 받는 격을 주격이라 하고 O가 받는 격을 대격이라 한다. 대격은 목적격이라고도 부른다.
다음으로 호주 원주민 언어인 지르발어의 예를 보자.
{| cellpadding="6" style="line-height: 1em;"
|+ 지르발어 (능격-절대격 정렬)
|- lang="dbl"
| 문장:
| colspan="2" | yaɻa baniɲu
|
| colspan="3" | yaɻaŋgu ɲalŋga buɻan
|- lang="dbl"
| 단어:
| yaɻa-∅
| baniɲu
|
| yaɻa-ŋgu
| ɲalŋga-∅
| buɻan
|-
| 분석:
| 남자-절대격
| 왔다
|
| 남자-능격
| 아이-절대격
| 보았다
|-
| 기능:
| S
| 자동사
|
| A
| O
| 타동사
|-
| 번역:
| colspan="2" | 남자가 왔다.
|
| colspan="3" | 남자가 아이를 보았다.
|}
지르발어로 ‘’는 ‘남자’, ‘’는 ‘아이’라는 뜻이다. 지르발어는 S와 O 논항을 똑같이 어간 자체로 나타내고 A 논항만 접미사 ‘-ŋgu’로 표시한다. 따라서 지르발어의 격 표시는 능격-절대격 정렬을 따른다. 능격-절대격 언어에서 A가 받는 격을 능격이라 하고 S와 O가 받는 격을 절대격이라 한다.
동사 일치
동사가 하나 이상의 논항에 일치하는 언어에서는 동사 일치의 정렬을 따질 수 있다.
라틴어 동사는 A 또는 S 논항의 수와 인칭에 일치하고, O 논항에는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라틴어의 일치 체계는 주격-대격 정렬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 cellpadding="6" style="line-height: 1em;"
|+ 라틴어 (주격-대격 정렬)
|- lang="la"
| 문장:
| colspan="2" | dominus venit
|
| colspan="3" | servus dominum audit
|- lang="la"
| 단어:
| domin-us
| veni-t
|
| serv-us
| domin-um
| audi-t
|-
| 분석:
| 주인-주격
| 오다-3인칭.단수
|
| 하인-주격
| 주인-대격
| 듣다-3인칭.단수
|-
| 기능:
| S
| 자동사-S
|
| A
| O
| 타동사-A
|-
| 번역:
| colspan="2" | 주인이 온다.
|
| colspan="3" | 하인이 주인을 들었다.
|}
한편 과테말라의 마야어족 언어인 추투힐어에서 동사는 A와 O, 또는 S 논항에 일치하는데, S와 O 일치 접사의 형태는 서로 같고 A 일치 접사는 그와 다르다. 따라서 추투힐어의 일치 체계는 능격-절대격 정렬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 cellpadding="6" style="line-height: 1em;"
|+ 추투힐어 (능격-절대격 정렬)
|- lang="tzj"
| 문장:
| xoqwari
|
| xoqkeechʼey
|- lang="tzj"
| 단어:
| x-oq-war-i
|
| x-oq-kee-chʼey
|-
| 분석:
| 과거-1인칭.복수.절대격어-자다-접미사
|
| 과거-1인칭.복수.절대격어-3인칭.복수.능격어-때리다
|-
| 기능:
| S-자동사
|
| O-A-타동사
|-
| 번역:
| 우리가 잤다.
|
| 그들이 우리를 때렸다.
|}
각주
참고 문헌
Aikhenvald, A. Y., Dixon, R. M. W., & Onishi, M. (Eds). (2001). Non-canonical Marking of Subjects and Objects. Netherlands: John Benjamins.
Anderson, Stephen R. (1985). Inflectional morphology. In T. Shopen (Ed.), Language typology and syntactic description: Grammatical categories and the lexicon (Vol. 3, pp. 150–201). Cambridge: University of Cambridge Press.
Chen, V. (2017). A reexamination of the Philippine-type voice system and its implications for Austronesian primary-level subgrouping (Doctoral dissertation). University of Hawaiʻi at Mānoa.
Dixon, R. M. W. (Ed.) (1987). Studies in ergativity. Amsterdam: North-Holland.
Foley, William; & Van Valin, Robert. (1984). Functional syntax and universal gramm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Kroeger, Paul. (1993). Phrase structure and grammatical relations in Tagalog. Stanford: CSLI.
Mallinson, Graham; & Blake, Barry J. (1981). Agent and patient marking. Language typology: Cross-linguistic studies in syntax (Chap. 2, pp. 39–120). North-Holland linguistic series. Amsterdam: North-Holland Publishing Company.
Patri, Sylvain (2007), L'alignement syntaxique dans les langues indo-européennes d'Anatolie, (StBoT 49), Otto Harrassowitz, Wiesbaden,
Plank, Frans. (Ed.). (1979). Ergativity: Towards a theory of grammatical relations. London: Academic Press.
Schachter, Paul. (1976). The subject in Philippine languages: Actor, topic, actor–topic, or none of the above. In C. Li. (Ed.), Subject and topic (pp. 491–518). New York: Academic Press.
Schachter, Paul. (1977). Reference-related and role-related properties of subjects. In P. Cole & J. Sadock (Eds.), Syntax and semantics: Grammatical relations (Vol. 8, pp. 279–306). New York: Academic Press.
van de Visser, M. (2006). The marked status of ergativity. Netherlands: LOT Publications.
Wouk, F. & Ross, M. (Eds.). (2002). The history and typology of western Austronesian voice systems. Canberra: Pacific Linguistics, ANU Press.
문법
언어유형론 | https://en.wikipedia.org/wiki/Morphosyntactic%20alignment | Morphosyntactic alignment | In linguistics, morphosyntactic alignment is the grammatical relationship between arguments—specifically, between the two arguments (in English, subject and object) of transitive verbs like the dog chased the cat, and the single argument of intransitive verbs like the cat ran away. English has a subject, which merges the more active argument of transitive verbs with the argument of intransitive verbs, leaving the object distinct; other languages may have different strategies, or, rarely, make no distinction at all. Distinctions may be made morphologically (through case and agreement), syntactically (through word order), or both.
Terminology
Arguments
Dixon (1994)
The following notations will be used to discuss the various types of alignment:
S (from sole), the subject of an intransitive verb ;
A (from agent), the subject of a transitive verb;
O (from object), the object of a transitive verb. Some authors use the label P (from patient) for O.
Note that while the labels S, A, O, and P originally stood for subject, agent, object, and patient, respectively, the concepts of S, A, and O/P are distinct both from the grammatical relations and thematic relations. In other words, an A or S need not be an agent or subject, and an O need not be a patient.
In a nominative–accusative system, S and A are grouped together, contrasting O. In an ergative–absolutive system, S and O are one group and contrast with A. The English language represents a typical nominative–accusative system (accusative for short). The name derived from the nominative and accusative cases. Basque is an ergative–absolutive system (or simply ergative). The name stemmed from the ergative and absolutive cases. S is said to align with either A (as in English) or O (as in Basque) when they take the same form.
Bickel & Nichols (2009)
Listed below are argument roles used by Bickel and Nichols for the description of alignment types. Their taxonomy is based on semantic roles and valency (the number of arguments controlled by a predicate).
S, the sole argument of a one-place predicate
A, the more agent-like arguments of a two-place (A1) or three-place (A2) predicate
O, the less agent-like argument of a two-place predicate
G, the more goal-like argument of a three-place predicate
T, the non-goal-like and non-agent-like argument of a three-place predicate
Locus of marking
The term locus refers to a location where the morphosyntactic marker reflecting the syntactic relations is situated. The markers may be located on the head of a phrase, a dependent, and both or none of them.
Types of alignment
Nominative–accusative (or accusative) alignment treats the S argument of an intransitive verb like the A argument of transitive verbs, with the O argument distinct (S = A; O separate) (see nominative–accusative language). In a language with morphological case marking, an S and an A may both be unmarked or marked with the nominative case while the O is marked with an accusative case (or sometimes an oblique case used for dative or instrumental case roles also), as occurs with nominative -us and accusative -um in Latin: Julius venit "Julius came"; Julius Brutum vidit "Julius saw Brutus". Languages with nominative–accusative alignment can detransitivize transitive verbs by demoting the A argument and promoting the O to be an S (thus taking nominative case marking); it is called the passive voice. Most of the world's languages have accusative alignment. An uncommon subtype is called marked nominative. In such languages, the subject of a verb is marked for nominative case, but the object is unmarked, as are citation forms and objects of prepositions. Such alignments are clearly documented only in northeastern Africa, particularly in the Cushitic languages, and the southwestern United States and adjacent parts of Mexico, in the Yuman languages.
Ergative–absolutive (or ergative) alignment treats an intransitive argument like a transitive O argument (S = O; A separate) (see ergative–absolutive language). An A may be marked with an ergative case (or sometimes an oblique case used also for the genitive or instrumental case roles) while the S argument of an intransitive verb and the O argument of a transitive verb are left unmarked or sometimes marked with an absolutive case. Ergative–absolutive languages can detransitivize transitive verbs by demoting the O and promoting the A to an S, thus taking the absolutive case, called the antipassive voice. About a sixth of the world's languages have ergative alignment. The best known are probably the Inuit languages and Basque.
Active–stative alignment treats the arguments of intransitive verbs like the A argument of transitives (like English) in some cases and like transitive O arguments (like Inuit) in other cases (Sa=A; So=O). For example, in Georgian, Mariamma imğera "Mary (-ma) sang", Mariam shares the same narrative case ending as in the transitive clause Mariamma c'erili dac'era "Mary (-ma) wrote the letter (-i)", while in Mariami iq'o Tbilisši revolutsiamde "Mary (-i) was in Tbilisi up to the revolution", Mariam shares the same case ending (-i) as the object of the transitive clause. Thus, the arguments of intransitive verbs are not uniform in its behaviour. The reasons for treating intransitive arguments like A or like O usually have a semantic basis. The particular criteria vary from language to language and may be either fixed for each verb or chosen by the speaker according to the degree of volition, control, or suffering of the participant or to the degree of sympathy that the speaker has for the participant.
Austronesian alignment, also called Philippine-type alignment, is found in the Austronesian languages of the Philippines, Borneo, Taiwan, and Madagascar. These languages have both accusative-type and ergative-type alignments in transitive verbs. They are traditionally (and misleadingly) called "active" and "passive" voice because the speaker can choose to use either one rather like active and passive voice in English. However, because they are not true voice, terms such as "agent trigger" or "actor focus" are increasingly used for the accusative type (S=A) and "patient trigger" or "undergoer focus" for the ergative type (S=O). (The terms with "trigger" may be preferred over those with "focus" because these are not focus systems either; morphological alignment has a long history of confused terminology). Patient-trigger alignment is the default in most of these languages. For either alignment, two core cases are used (unlike passive and antipassive voice, which have only one), but the same morphology is used for the "nominative" of the agent-trigger alignment and the "absolutive" of the patient-trigger alignment so there is a total of just three core cases: common S/A/O (usually called nominative, or less ambiguously direct), ergative A, and accusative O. Some Austronesianists argue that these languages have four alignments, with additional "voices" that mark a locative or benefactive with the direct case, but most maintain that these are not core arguments and thus not basic to the system.
Direct alignment: very few languages make no distinction among agent, patient, and intransitive arguments, leaving the hearer to rely entirely on context and common sense to figure them out. This S/A/O case is called direct, as it sometimes is in Austronesian alignment.
Tripartite alignment uses a separate case or syntax for each argument, which are conventionally called the accusative case, the intransitive case, and the ergative case. The Nez Perce language is a notable example.
Transitive alignment: certain Iranian languages, such as Rushani, distinguish only transitivity (in the past tense), using a transitive case for both A and O, and an intransitive case for S. That is sometimes called a double-oblique system, as the transitive case is equivalent to the accusative in the non-past tense.
The direct, tripartite, and transitive alignment types are all quite rare. The alignment types other than Austronesian and Active-Stative can be shown graphically like this:
In addition, in some languages, both nominative–accusative and ergative–absolutive systems may be used, split between different grammatical contexts, called split ergativity. The split may sometimes be linked to animacy, as in many Australian Aboriginal languages, or to aspect, as in Hindustani and Mayan languages. A few Australian languages, such as Diyari, are split among accusative, ergative, and tripartite alignment, depending on animacy.
A popular idea, introduced in Anderson (1976), is that some constructions universally favor accusative alignment while others are more flexible. In general, behavioral constructions (control, raising, relativization) are claimed to favor nominative–accusative alignment while coding constructions (especially case constructions) do not show any alignment preferences. This idea underlies early notions of ‘deep’ vs. ‘surface’ (or ‘syntactic’ vs. ‘morphological’) ergativity (e.g. Comrie 1978; Dixon 1994): many languages have surface ergativity only (ergative alignments only in their coding constructions, like case or agreement) but not in their behavioral constructions or at least not in all of them. Languages with deep ergativity (with ergative alignment in behavioral constructions) appear to be less common.
Comparison between ergative-absolutive and nominative-accusative
The arguments can be symbolized as follows:
O = most patient-like argument of a transitive clause (also symbolized as P)
S = sole argument of an intransitive clause
A = most agent-like argument of a transitive clause
The S/A/O terminology avoids the use of terms like "subject" and "object", which are not stable concepts from language to language. Moreover, it avoids the terms "agent" and "patient", which are semantic roles that do not correspond consistently to particular arguments. For instance, the A might be an experiencer or a source, semantically, not just an agent.
The relationship between ergative and accusative systems can be schematically represented as the following:
The following Basque examples demonstrate ergative–absolutive case marking system:
{| cellpadding="6" style="line-height: 1em;"
|+ Ergative Language
| Sentence:
| colspan="2" | Gizona etorri da.
|
| colspan="3" | Gizonak mutila ikusi du.
|-
| Words:
| gizona-∅
| etorri da
|
| gizona-k
| mutila-∅
| ikusi du
|-
| Gloss:
| the.man-ABS
| has arrived
|
| the.man-ERG
| boy-ABS
| saw
|-
| Function:
| S
| VERBintrans
|
| A
| O
| VERBtrans
|-
| Translation:
| colspan="2" | 'The man has arrived.'
|
| colspan="2" | 'The man saw the boy.'
|}
In Basque, gizona is "the man" and mutila is "the boy". In a sentence like mutila gizonak ikusi du, you know who is seeing whom because -k is added to the one doing the seeing. So the sentence means "the man saw the boy". If you want to say "the boy saw the man", add the -k instead to the word meaning "the boy": mutilak gizona ikusi du.
With a verb like etorri, "come", there's no need to distinguish "who is doing the coming", so no -k is added. "The boy came" is mutila etorri da.
Japanese – by contrast – marks nouns by following them with different particles which indicate their function in the sentence:
{| cellpadding="6" style="line-height: 1em;"
|+ Accusative Language
| Sentence:
| colspan="2" | Kodomo ga tsuita.
|
| colspan="3" | Otoko ga kodomo o mita.
|-
| Words:
| kodomo ga
| tsuita
|
| otoko ga
| kodomo o
| mita
|-
| Gloss:
| child NOM
| arrived
|
| man NOM
| child ACC
| saw
|-
| Function:
| S
| VERBintrans
|
| A
| O
| VERBtrans
|-
| Translation:
| colspan="2" | 'The child arrived.'
|
| colspan="2" | 'The man saw the child.'
|}
In this language, in the sentence "the man saw the child", the one doing the seeing ("man") may be marked with ga, which works like Basque -k (and the one who is being seen may be marked with o). However, in sentences like "the child arrived" ga can still be used even though the situation involves only a "doer" and not a "done-to". This is unlike Basque, where -k is completely forbidden in such sentences.
See also
Agreement (linguistics)
Differential argument marking
Differential object marking
Milewski's typology
References
Further reading
Aikhenvald, A. Y., Dixon, R. M. W., & Onishi, M. (Eds). (2001). Non-canonical Marking of Subjects and Objects. Netherlands: John Benjamins.
Anderson, Stephen. (1976). On the notion of subject in ergative languages. In C. Li. (Ed.), Subject and topic (pp. 1–24). New York: Academic Press.
Anderson, Stephen R. (1985). Inflectional morphology. In T. Shopen (Ed.), Language typology and syntactic description: Grammatical categories and the lexicon (Vol. 3, pp. 150–201). Cambridge: University of Cambridge Press.
Chen, V. (2017). A reexamination of the Philippine-type voice system and its implications for Austronesian primary-level subgrouping (Doctoral dissertation). University of Hawaiʻi at Mānoa.
Comrie, Bernard. (1978). Ergativity. In W. P. Lehmann (Ed.), Syntactic typology: Studies in the phenomenology of language (pp. 329–394).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Dixon, R. M. W. (1979). Ergativity. Language, 55 (1), 59–138. (Revised as Dixon 1994).
Dixon, R. M. W. (Ed.) (1987). Studies in ergativity. Amsterdam: North-Holland.
Dixon, R. M. W. (1994). Ergativ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Foley, William; & Van Valin, Robert. (1984). Functional syntax and universal gramm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Kroeger, Paul. (1993). Phrase structure and grammatical relations in Tagalog. Stanford: CSLI.
Mallinson, Graham; & Blake, Barry J. (1981). Agent and patient marking. Language typology: Cross-linguistic studies in syntax (Chap. 2, pp. 39–120). North-Holland linguistic series. Amsterdam: North-Holland Publishing Company.
Patri, Sylvain (2007), L'alignement syntaxique dans les langues indo-européennes d'Anatolie, (StBoT 49), Otto Harrassowitz, Wiesba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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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uk, F. & Ross, M. (Eds.). (2002). The history and typology of western Austronesian voice systems. Canberra: Pacific Linguistics, ANU Press.
Grammar |
https://ko.wikipedia.org/wiki/%EB%84%A4%EB%B0%9C%ED%86%B1%EB%8F%84%EB%A7%88%EB%B1%80%EB%B6%99%EC%9D%B4%EC%86%8D | 네발톱도마뱀붙이속 | 네발톱도마뱀붙이속(Gehyra), 일명 웹토 게코(web-toed geckos), 디텔라(dtellas)는 도마뱀붙이과에 속한 도마뱀붙이류의 일속이며, 집도마뱀붙이류를 닮아서 아시아의 어떤 지역에서는 흔히 오인받는다.
분포
네발톱도마뱀붙이속은 분포범위가 넓다. 오세아니아와 멜라네시아의 대부분의 영역을 차지하며, 북쪽으로는 태국과 류큐 열도에 이른다.
형태
네발톱도마뱀붙이속은 집도마뱀붙이속을 닮은 중형 도마뱀붙이류이다. 발가락에는 빨판과 튼튼한 발톱이 있다. 다른 몇몇 도마뱀붙이류처럼 부주의하게 핸들링하면 찢어진 피부를 떨구는 경향이 있다. 집도마뱀붙이류와 비슷하게 찍찍 짹짹 대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만, 찍찍대는 소리는 대개 집도마뱀붙이류보다 작다.
분류
다음의 종들이 유효하다고 인정받는다.
Gehyra angusticaudata – narrow-tailed four-clawed gecko
Gehyra australis – top-end dtella
Gehyra baliola – short-tailed dtella
Gehyra barea – Banda Island dtella
Gehyra borroloola – Borroloola dtella
Gehyra brevipalmata – Palau Island dtella
Gehyra capensis – north west Cape gehyra
Gehyra catenata – chain-backed dtella
Gehyra crypta – western cryptic gehyra
Gehyra dubia – dubious dtella
Gehyra einasleighensis – Einasleigh rock dtella
Gehyra fehlmanni – Fehlmann's dtella
Gehyra fenestrula – Hamersley Range spotted gehyra
Gehyra finipunctata – small-spotted midwest rock gehyra
Gehyra georgpotthasti
Gehyra girloorloo – Kimberley karst gecko
Gehyra granulum – Kimberley granular-toed gecko
Gehyra incognita – Northern Pilbara cryptic gehyra
Gehyra insulensis – Pacific stump-toed gecko
Gehyra interstitialis – Oudemans's dtella
Gehyra kimberleyi – Kimberley dtella
Gehyra koira – banded rock dtella
Gehyra lacerata – lacerated dtella
Gehyra lazelli
Gehyra leopoldi – Leopold dtella
Gehyra macra – large Pilbara rock gehyra
Gehyra marginata – Moluccan gecko
Gehyra media – medium Pilbara spotted rock gehyra
Gehyra membranacruralis – Port Moresby dtella
Gehyra micra – small Pilbara spotted rock gehyra
Gehyra minuta – dwarf dtella
Gehyra montium – Centralian dtella
Gehyra moritzi
Gehyra multiporosa
Gehyra mutilata – stump-tailed gecko
Gehyra nana – northern spotted rock dtella
Gehyra occidentalis – Kimberley Plateau dtella
Gehyra oceanica – Pacific dtella
Gehyra ocellata – Pilbara Island gehyra
Gehyra pamela – Arnhemland Watercourse dtella
Gehyra papuana – Papua dtella
Gehyra paranana – Litchfield spotted gecko
Gehyra peninsularis – Burrup Peninsula rock gehyra
Gehyra pilbara – Pilbara dtella
Gehyra pluraporosa – northern Kimberley gecko
Gehyra polka – large-spotted midwest rock gehyra
Gehyra pseudopunctata – southern Kimberley spotted gecko
Gehyra pulingka
Gehyra punctata – spotted dtella
Gehyra purpurascens – purplish dtella
Gehyra robusta – robust dtella
Gehyra rohan
Gehyra serraticauda
Gehyra spheniscus – small wedge-toed gecko
Gehyra unguiculata – crescent-marked Pilbara gehyra
Gehyra variegata – tree dtella
Gehyra versicolor
Gehyra vorax – voracious dtella
Gehyra xenopus – crocodile-faced dtella
주의사항: 삽입어구의 이명 명명자(:en:Binominal nomenclature)는 원래 해당 종을 현재와 다른 속에 속한 것으로 기술했을지도 모른다
각주
참고 문헌
Boulenger GA. 1885. Catalogue of the Lizards in the British Museum (Natural History). Second Edition. Volume I. Geckonidæ ... London: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Natural History). (Taylor and Francis, printers). xii + 436 pp. + Plates I-XXXII. (Genus Gehyra, p. 147).
Gray JE. 1834. "Characters of Two New Genera of Reptiles (Geoemyda and Gehyra)". Proc. Zool. Soc. London 1834: 99-100. (Gehyra, new genus, p. 100). (in Latin and English).
Smith MA. 1935. The Fauna of British India, Including Ceylon and Burma. Reptilia and Amphibia. Vol. II.—Sauria. London: Secretary of State for India in Council. (Taylor and Francis, printers). xiii + 440 pp. + Plate I + 2 maps. (Genus Gehyra, p. 104, Figure 30).
돌도마뱀붙이과
존 에드워드 그레이가 명명한 분류군 | https://en.wikipedia.org/wiki/Gehyra | Gehyra | Gehyra is a genus of geckos in the family Gekkonidae. They are known as web-toed geckos or dtellas, and most species within the genus bear close resemblance to geckos from the genus Hemidactylus.
Geographic range
Gehyra species have a wide geographic range, covering most of the Oceania and Melanesian Islands as far north as the Ryukyu Islands and Thailand.
Description
Dtellas are moderately sized geckos that resemble house geckos. Gehyra species have toepads and powerful claws. Like some other geckos they also have a tendency to drop strips of skin if handled carelessly. Similar to house geckos, dtellas are able to communicate with clicks or chirps, although their chirp is often quieter than that of house geckos.
Species
The following species are recognized as being valid.
Gehyra angusticaudata – narrow-tailed four-clawed gecko
Gehyra arnhemica – East Arnhem land gehyra
Gehyra australis – top-end dtella
Gehyra baliola – short-tailed dtella
Gehyra barea – Banda Island dtella
Gehyra borroloola – Borroloola dtella
Gehyra brevipalmata – Palau Island dtella
Gehyra calcitectus – relictual karst gehyra
Gehyra capensis – North West Cape gehyra
Gehyra catenata – chain-backed dtella
Gehyra chimera – western Kimberley tree gehyra
Gehyra crypta – western cryptic gehyra
Gehyra dubia – dubious dtella
Gehyra einasleighensis – Einasleigh rock dtella
Gehyra electrum – amber rock dtella
Gehyra fehlmanni – Fehlmann's dtella
Gehyra fenestrula – Hamersley Range spotted gehyra
Gehyra finipunctata – small-spotted midwest rock gehyra
Gehyra gemina – plain tree gehyra
Gehyra georgpotthasti
Gehyra girloorloo – Kimberley karst gecko
Gehyra granulum – Kimberley granular-toed gecko
Gehyra incognita – northern Pilbara cryptic gehyra
Gehyra insulensis – Pacific stump-toed gecko
Gehyra interstitialis – Oudemans's dtella
Gehyra ipsa – Bungle Bungle Ranges gehyra
Gehyra kimberleyi – Kimberley dtella
Gehyra koira – banded rock dtella
Gehyra lacerata – lacerated dtella
Gehyra lapistola – Litchfield rock gehyra
Gehyra lauta – Gulf tree gehyra
Gehyra lazelli
Gehyra leopoldi – Leopold dtella
Gehyra macra – large Pilbara rock gehyra
Gehyra marginata – Halmahera giant gecko, Ternate dtella
Gehyra media – medium Pilbara spotted rock gehyra
Gehyra membranacruralis – Port Moresby dtella
Gehyra micra – small Pilbara spotted rock gehyra
Gehyra minuta – dwarf dtella
Gehyra montium – Centralian dtella
Gehyra moritzi
Gehyra multiporosa
Gehyra mutilata – common four-clawed gecko, stump-toed gecko
Gehyra nana – northern spotted rock dtella
Gehyra occidentalis – Kimberley Plateau dtella
Gehyra oceanica – Pacific dtella
Gehyra ocellata – Pilbara island gehyra
Gehyra pamela – Arnhemland watercourse dtella
Gehyra papuana – Papua dtella
Gehyra paranana – Litchfield spotted gecko
Gehyra peninsularis – Burrup Peninsula rock gehyra
Gehyra pilbara – Pilbara dtella
Gehyra pluraporosa – northern Kimberley gecko
Gehyra polka – large-spotted midwest rock gehyra
Gehyra pseudopunctata – southern Kimberley spotted gecko
Gehyra pulingka
Gehyra punctata – spotted dtella
Gehyra purpurascens – purplish dtella
Gehyra robusta – robust dtella
Gehyra rohan
Gehyra serraticauda
Gehyra spheniscus – small wedge-toed gecko
Gehyra unguiculata – crescent-marked Pilbara gehyra
Gehyra variegata – tree dtella
Gehyra versicolor
Gehyra vorax – voracious dtella
Gehyra wongchan
Gehyra xenopus – crocodile-faced dtella
Nota bene: A binomial authority in parentheses indicates that the species was originally described in a genus other than Gehyra.
References
Further reading
Boulenger GA (1885). Catalogue of the Lizards in the British Museum (Natural History). Second Edition. Volume I. Geckonidæ .... London: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Natural History). (Taylor and Francis, printers). xii + 436 pp. + Plates I-XXXII. (Genus Gehyra, p. 147).
Gray JE (1834). "Characters of Two New Genera of Reptiles (Geoemyda and Gehyra)". Proceedings of the Zoological Society of London 1834: 99-100. (Gehyra, new genus, p. 100). (in Latin and English).
Smith MA (1935). The Fauna of British India, Including Ceylon and Burma. Reptilia and Amphibia. Vol. II.—Sauria. London: Secretary of State for India in Council. (Taylor and Francis, printers). xiii + 440 pp. + Plate I + 2 maps. (Genus Gehyra, p. 104, Figure 30).
Lizard genera
Taxa named by John Edward Gray |
https://ko.wikipedia.org/wiki/BBC%20%EC%9B%A8%EC%8A%A4%ED%8A%B8%EB%AF%B8%EB%93%A4%EB%9E%9C%EC%A6%88 | BBC 웨스트미들랜즈 | BBC 미들랜즈 (BBC Midlands)는 헤리퍼드셔, 슈롭셔, 스태퍼드셔, 워릭셔, 웨스트미들랜즈, 우스터셔 일대의 지역 라디오 방송과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BBC 잉글랜드 지역방송이다. 텔레비전 지역방송 역시 제작하고 있으며 이쪽은 글로스터셔 북부와 옥스퍼드셔 북부의 일부 지역까지 시청권역에 포함하고 있다.
1927년 개국 당시 BBC 미들랜드 리전 (BBC Midland Region)이란 이름이었다가 1970년대 들어서 '미들랜즈'로 바뀌었다. 이후 1991년 BBC 이스트미들랜즈가 분리 개국하여 'BBC 웨스트미들랜즈'란 이름으로 불리나, 공식적으로는 'BBC 미들랜즈'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
방송
텔레비전
BBC 미들랜즈는 현재 여러 가지 지역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다. 간판 뉴스프로그램인 <미들랜즈 투데이>를 비롯해 지역뉴스 단신, 주간 지역 매거진 프로그램 <인사이드 아웃>, 그리고 <선데이 폴리틱스> 방송 도중에 삽입 편성되는 20분 분량의 자체제작방송 등이 있다. 주간 축구소식 프로그램인 <레이트 킥 오프>는 BBC 미들랜즈와 BBC 이스트미들랜즈가 공동 제작한다.
라디오
BBC 미들랜즈는 BBC WM, BBC 코번트리 워윅셔, BBC 헤리퍼드 우스터, BBC 라디오 스토크, BBC 라디오 슈롭셔 등의 지방 라디오방송을 총괄한다.
BBC 미들랜즈 산하 방송국의 프로그램 중에는 미들랜즈 지역 내 다른 라디오 방송국과의 동시방송으로 진행되는 것도 있으며, 야간에 편성되는 BBC 라디오 5 라이브 역시 동시방송이다.
온라인과 상호 방송
BBC 웨스트미들랜즈는 BBC 레드 버튼과 BBC 로컬 홈페이지에 지역별 뉴스와 로컬 라디오 페이지를 각각 제공하고 있다.
역사
초창기
BBC 미들랜즈는 BBC 잉글랜드 지역방송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지역국으로, 1927년 BBC 미들랜드 리전이라는 이름으로 개국하였다. 당시 대번트리의 보로힐에 고성능 라디오 송신소가 건설되어, 기존에 있던 버밍엄 5IT 송신소 같은 도시 내 위치한 저성능 라디오 방송국을 처음으로 대체하게 되었고 지역방송과 전국방송을 기술적으로 구축하는 데 한몫하게 되었다.
대번트리 송신소는 두 개의 채널을 내보냈다. 이후 1929년 런던의 브루크맨스파크 송신소 개소를 시작으로 들어선 각 지방 송신소 역시 똑같이 두 개 채널을 내보내기 시작했고, 이 같은 과정이 전쟁 전까지 계속 반복되었다. 채널로는 5XX와 5GB가 있었는데 5XX는 런던에서 송출되는 전국방송인 BBC 내셔널 프로그램을 재송출하였다. 반면 5GB는 BBC 리저널 프로그램을 송출하였는데 이쪽은 런던의 네트워크 프로그램과 버밍엄 기지국에서 제작한 지역 프로그램, 다른 지역에서 내보낸 프로그램을 알맞게 섞어 자유롭게 편성할 수 있는 지역방송 관제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설립된 미들랜드 지역방송의 첫 지역국장은 퍼시 에드거 (Percy Edgar)란 인물로, 1922년 5IT 송신소 첫 송출 당시 아나운서이자 프로그램 책임자를 맡았으며 1945년까지 미들랜즈 지역 방송에 있어 독보적인 방송인이었다. 에드거는 지역제작의 가치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으로, 미들랜드 리전 방송국이 지역사회에 초점을 맞춘 선도적 프로그램을 개척해나가는 독자적 보급원으로 자리매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예로 <미들랜드 팔리아먼트> (Midland Parliament)란 프로그램을 들 수 있는데 시민 구성원들이 주요 대중인사들과 함께 논쟁적 사안에 대해 토론하는 방송이었다.
1935년 BBC 미들랜드 리전은 더포터리스에서 노퍽에 이르는 지역까지 방송 권역을 확대하였고 전체 방송 중 40%를 자체제작 방송으로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BBC 스코틀랜드보다 높은 수치였다. 뿐만 아니라 방송국 내 프로듀서만 14명을 두어 런던 외 라디오 지역국으로는 가장 큰 규모가 되었다.
텔레비전 시대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지역 라디오 방송은 전면 중단되었으나, 유럽 내 종전 후인 1945년 7월 기존의 지역별 프로그램과 유사한 지역 기반 방송인 BBC 홈 서비스가 출범하게 되었다. 미들랜즈 지역 방송은 새 디렉터로 데니스 모리스가 맡게 되었으나 에드가가 구축한 독자적, 혁신적 운영노선은 고스란히 유지하였다. 그런 덕에 1946년 방송 청취자의 의견을 듣는 프로그램인 <리스너스 앤서 백> (Listeners Answer Back)과 1951년 라디오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장수한 프로그램이자 가장 인기 있는 라디오극인 <디 아처스> (The Archers)가 제작 방송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두가지 기술적인 발전으로 인해 기존의 낡은 지역 방송망이 조금씩 한계에 부딫히기 시작했다. 우선 FM 라디오의 개발은 훨씬 많은 수의 라디오 채널을 충돌이나 혼선 없이 전파망에 수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더 많은 마을과 도시에서 자체 라디오 기지국을 마련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1967년 미들랜즈 지역국은 BBC 최초의 로컬 라디오 기지국인 BBC 라디오 레스터를 개국하였고 그 이후로도 소규모 지역 기지국의 개국 계획이 잇따르면서, 지금의 미들랜즈 지역국이 웨일스 인근에서 북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포괄할 당위성이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했다.
텔레비전 방송 역시 기회보다는 위기에 가까웠다. 미들랜즈 지역국은 1949년 서튼 콜드필드 송신소를 완공하면서 런던 이외 지역에서의 첫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하게 되었지만, 반대로 텔레비전 방송의 제작비가 라디오 방송보다 컸기에 언제나 BBC 본부에서 제작되는 중앙방송 위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1950년에는 버밍엄에 텔레비전 스튜디오가 문을 열었다. 초창기 인기를 끌은 프로그램으로는, 지역국 제작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는 사상 최초로 전국 방송망 정규 편성이 이뤄진 <컴 댄싱> (Come Dancing, 1949)와 영국 최초의 일일 지역뉴스 프로그램인 <미들랜즈 투데이> (1964)가 있었다. 지역 자체방송은 1957년 저녁시간대 단신 지역뉴스를 내보냄에 따라 확립됐다. 이 같은 행보의 BBC 미들랜즈는 고전하고 있던 BBC 노스나 BBC 웨스트 (한때 미들랜즈 지역국에 병합될 처지이기도 했다)에 비하면 더 나은 성과를 보이긴 했다. 그러나 라디오 시장 내에서 진정한 지역방송을 하기에는 너무 덩치가 커서 문제였던 동시에, 텔레비전 방송 편성을 하는 데 있어서 전 시간대 프로그램을 자급자족하기에는 너무 덩치가 작아 문제였다.
지역국 분리
이런 고민들은 1969년 <70년대의 방송> (Broadcasting in the Seventies)라는 사내 보고서가 발행되면서 근본적 대개편에 나서는 것으로 결과가 났다. 당시 BBC 미들랜즈의 동부 방송 권역을 노리치에 본부를 둔 BBC 이스트로 분리시키고, BBC 이스트와 BBC 미들랜즈 모두 지역 텔레비전 방송 (특히 지역뉴스)와 로컬 라디오 방송에 집중하도록 하였다. 또 라디오 4 채널의 지역방송 (1980년 중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별 라디오 방송을 중단시켰고, 전국 방송망을 위한 모든 텔레비전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은 별도의 기관인 BBC 버밍엄 네트워크 프로덕션 센터에서 맡게 되었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며 텔레비전 방송 제작비가 줄어들면서 BBC의 미들랜즈 지역 방송에도 영향을 끼쳤다. 작게는 지역별 채널을 늘릴 수 잇는 기회가 열렸다. 그렇지 않아도 BBC의 미들랜즈 지역 방송은 지나치게 버밍엄 지역에만 편중되어 있다는 비난에 시달려 왔기에, 1991년 월텀 송신소발 텔레비전 방송과 BBC 라디오 레스터, BBC 라디오 노팅엄, BBC 라디오 더비 산하 라디오 방송은 노팅엄 기반의 BBC 이스트미들랜즈 지역국을 신설해 그곳으로 묶이게 되었다.
이런 방향에서 훨씬 더 앞서나간 움직임이 있었으니, 바로 2006년 웨스트미들랜즈 지역국이 BBC 로컬 TV를 시험 송출한 일이었다. 서비스를 통해 내보내는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의 포괄 지역이 총 여섯 지역이었는데, 하나같이 기존의 TV 방송 권역보다 훨씬 좁았다. 버밍엄과 블랙컨트리 지역의 경우에는 현지 라디오 기지국의 방송권역보다 더 작을 정도였다. 디지털 텔레비전으로 송출되고 인터넷을 통해서만 시청 가능했던 이 서비스는 2006년 9월 종료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와 비슷한 시험방송은 재개되지 않고 있다.
스튜디오
BBC 미들랜즈가 운영한 최초의 스튜디오는 버밍엄시 브로드 스트리트에 자리한 사무실과 소형 스튜디오였으나, 확대되는 방송 지역에 비해 규모가 너무 작았다. 따라서 이곳의 소형 스튜디오는 단신 보도에 알맞춤인 곳으로 취급되어 1971년까지 지역 뉴스 프로그램이 제작되었고, 나머지 프로그램은 고스타그린의 옛 영화관과 에지바스턴 (Edgbaston)에 있는 섭정시대 지어진 고저택에서 제작하였다.
1971년 분산 운영되던 모든 방송 시설을 새로 지은 통합 스튜디오 단지인 페블 밀 스튜디오 (Pebble Mill Studios)로 이전하였다. 페블 밀 스튜디오는 70년대 유명 프로그램에서 종종 등장하여 일종의 아이콘이 되었다. 페블 밀 스튜디오는 두 개의 스튜디오를 두고 있었는데 주요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스튜디오 A와 <미들랜즈 투데이> 및 여타 지역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스튜디오 B로 나뉘었다. 스튜디오 단지 건설 당시 드라마 제작을 위한 스튜디오 C가 들어갈 공간도 염두에 두었으나 실현되진 않았으며, 그 자리에는 갤러리와 각종 시설이 들어섰고, 빌딩 현관이 부설 스튜디오로 활용됐다. 여기에 온실 스튜디오까지 지어져 아침 프로그램인 <굿모닝 위드 앤 앤드 닉> (Good Morning with Anne and Nick)이 수년간 제작된 바 있었다. 신설 스튜디오는 네트워크 및 지역별 프로그램 제작, 라디오 방송에 BBC 잉글리시 리전스 본부의 기능까지 겸하였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생긴 여러 변화로 페블 밀 스튜디오의 미래가 불확실해졌다. 기술의 발달로 야외 방송의 제작비가 절감되면서 제작 횟수도 늘어난 반면,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독자제작과 외주제작 비용은 늘어났다. 이런 환경변화를 종합해 본다면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 페블 밀 스튜디오와 같은 대형 통합 스튜디오 단지는 점차 필요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었다. 더욱이 스튜디오 건물 자체의 난방비와 유지보수비도 늘어만 갔다. 2000년에는 사측의 예산절감 방침에 따라 스튜디오 A가 폐쇄되었고 페블 밀 스튜디오를 처리할 계획이 세워지게 되었다.
2004년 프로그램 제작 스튜디오가 두 곳으로 갈라졌다. BBC 웨스트미들랜즈, <미들랜즈 투데이>, BBC WM, BBC 잉글리시 리전스, 네트워크 방송 제작 본부인 BBC 버밍엄이 버밍엄 도심에 있는 더 메일박스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프로그램의 제작 본부는 BBC 드라마 빌리지로 옮겨갔다. 더 메일박스에는 스튜디오와 뉴스룸, 라디오 방송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각 시설마다 낸 투명한 창을 통해 방문객들로 하여금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제작과정을 살펴볼 수 있게 의도하였다.
같이 보기
BBC 잉글리시 리전스
참고 문헌
각주
외부 링크
BBC의 지역국
1949년 설립된 텔레비전 방송국과 채널 | https://en.wikipedia.org/wiki/BBC%20West%20Midlands | BBC West Midlands | BBC Midlands (known as the Midland Region from 1927 until c. 1974) is the BBC English Region producing local radio and web content for the City of Birmingham, West Midlands, Herefordshire, Shropshire, Staffordshire, Warwickshire, Worcestershire and parts of Gloucestershire.
Although the region has been unofficially called BBC West Midlands since BBC East Midlands became a separate region in 1991, it retains the BBC Midlands name and brand, with its history dating from 1927, for public use.
Services
Television
The BBC Midlands region carries a number of regional programmes today. The regular schedule consists of the flagship Midlands Today news programme, regional news bulletins, the weekly regional magazine programme Inside Out and a twenty-minute opt-out during Sunday Politics.
Radio
The region is the controlling centre for BBC WM, BBC Coventry and Warwickshire, BBC Hereford and Worcester, BBC Radio Stoke and BBC Radio Shropshire.
Some of this programming is simulcast with the radio stations in the BBC East Midlands region, and overnight BBC Radio 5 Live is simulcast.
Online and Interactive
BBC West Midlands also produces regional news and local radio pages for Ceefax (retired after the digital switchover in 2012), BBC Red Button and BBC Local News websites for each county.
History
Early years
BBC Midlands is the oldest of the BBC English Regions, having been formed (as the Midland Region) in 1927, when the new Borough Hill high-powered radio transmitter at Daventry became the first to replace the earlier lower-powered city-based radio stations, such as Birmingham's 5IT, and make regional and national broadcasting a technical possibility.
The Daventry transmitter broadcast two channels, and as further regional transmission stations followed (starting with London's Brookmans Park in 1929), this quickly established the pattern for pre-war broadcasting. 5XX from Daventry (later – from 7 October 1934 – from Droitwich) carried the BBC National Programme originating in London, while 5GB broadcast the BBC Regional Programme, the regional controller of which was free to schedule, as he saw fit, a mix of networked programming from London, regional programmes produced by the Birmingham base, and items taken from the output of other regions.
The first director of the new Midland regional service was Percy Edgar, who had been the announcer and Head of Programming for 5IT on its opening night in 1922 and was to be the dominant figure in Midlands broadcasting from its birth until 1945. Edgar was a strong believer in the value of local production and fought to establish the Midland Region as an independent source of programming, pioneering community-focussed initiatives such as the Midland Parliament programme, where members of the public debated controversial issues on air with major public figures.
By 1935, the BBC's Midland Region covered an area extending from The Potteries to Norfolk and was producing 40% of its broadcast output itself - a greater proportion even than that of BBC Scotland. With 14 producers, it was the largest BBC department outside London.
The television era
Regional radio was suspended during World War II, but in July 1945, the BBC Home Service was launched on a similar regional basis to the pre-war Regional Programme. The Midlands Region continued under new director Dennis Morris in the independent and innovative vein established by Edgar – pioneering on-air listener feedback with Listeners Answer Back in 1946 and launching the longest-running and most popular programme in the history of radio – The Archers – at the beginning of 1951.
Despite these successes, two technological developments gradually started to make the old regional system untenable. The development of FM radio made it possible to fit a far greater number of channels into the spectrum without conflict and interference, which opened the possibility of more towns and cities having their own radio stations. The Midlands Region opened the BBC's first local radio station, BBC Radio Leicester, in 1967, and with many more of these planned, the relevance of the regional radio station broadcasting from the Welsh border to the North Sea was immediately cast into doubt.
Television was also presenting more of a threat than an opportunity. Although the Midlands had been the first area outside London to receive television coverage with the opening of the Sutton Coldfield transmitting station in 1949, the greater cost of television production compared to radio meant that it was always going to be a more centralised service.
A television studio was opened in Birmingham in 1950 and early successes included Come Dancing in 1949 – the first regionally produced television programme to establish itself as a regular in the national network schedule - and Midlands Today in 1964, one of the UK's first daily regional news programmes. Regional television had been established in 1957 with the launch of local evening news bulletins. Although it fared better than the struggling BBC North or BBC West (which was threatened for a while with being absorbed by the Midlands Region), it was clear that if BBC Midlands was too large to be truly local in the radio market, it was equally too small to be as self-sufficient across the full range of television programming as it had been in radio.
Division of the Region
The result was the radical shakeup that took place following the publication of the Broadcasting in the Seventies report in 1969. The eastern part of the region was reborn as the Norwich-based BBC East, with both it and the smaller remaining BBC Midlands focussing entirely on regional television (primarily regional news) and local radio. Regional radio ceased almost entirely (save for regional opt-outs on Radio 4 until 1980), and all television and radio production for national networks was transferred to the separate BBC Birmingham network production centre.
The cost of television production technology decreased throughout the 1980s and 1990s and this had several effects on the BBC in the Midlands. Smaller, more local channels became viable. The BBC's Midlands coverage had long been accused of being excessively Birmingham-centric, and in 1991, television broadcasting from the Waltham transmitting station and the BBC Radio Leicester, BBC Radio Nottingham and BBC Radio Derby radio stations were given over to a new Nottingham-based BBC East Midlands.
A more radical move in this direction took place in 2006 when the West Midlands Region piloted the BBC's Local TV initiative, with television news programmes produced for six local areas, all much smaller than the traditional TV regions, and in the case of Birmingham and the Black Country, even smaller than those covered by local radio stations. This programming was broadcast on digital television and over the internet only. The experiment came to an end as planned in September 2006 and has not been repeated since.
On the 15 January 2021, BBC Radio launched a new temporary station called BBC Radio Wolverhampton.
Studios
The first studios used by BBC Midlands were offices and a small studio in Broad Street, Birmingham; however these became too small for the expanding region. Regional News remained at Broad Street until 1971, the small studio being ideal for news bulletins, while other productions took place in a former cinema in Gosta Green and a regency mansion in Carpenter Road, Edgbaston.
In 1971, all of these operations were condensed into a new integrated studio complex, Pebble Mill Studios. Pebble Mill became iconic because it featured in some of the most popular programming of the 1970s. Pebble Mill had two studios, studio A for major productions and studio B, for Midlands Today and other local programming. When the complex was built it was intended that there should be a studio C for drama production; however this never happened, and instead the foyer of the building was used as an extra studio, complete with the gallery and facilities built in for studio C. A conservatory studio was also built that held Good Morning with Anne and Nick for many years. The new studios encompassed network and regional productions and radio, and was the Headquarters for BBC English Regions.
By the 1990s, change meant Pebble Mill's future was uncertain. Advances in technology made outside broadcasts cheaper and much more common, while also increasing the scope for independent and outsourced television production. In combination these meant that much television programming could increasingly be produced without the need for the sort of large integrated studio complexes represented by Pebble Mill. In addition, the building was getting costly to heat and maintain. In 2000, studio A was closed following the need to make savings at the corporation, and plans were made to dispose of Pebble Mill.
In 2004, productions split two ways. BBC West Midlands, Midlands Today, BBC WM, BBC English Regions and the network production base BBC Birmingham moved to The Mailbox in Birmingham city centre, with many of the productions moving to the BBC Drama Village. The Mailbox contains the studios, newsroom and radio facilities, all of which have windows allowing the public to view how their television and radio is made.
It was announced in August 2022, that BBC Birmingham will leave The Mailbox for the new creative quarter in Digbeth, Birmingham from 2026. The new broadcast centre will occupy the former Tyhpoo Tea factory. By then in adjacent studios the BBC’s flagship show Masterchef would have already taken up residence. The move coincides with BBC’s lease at The Mailbox coming to an end having been located there since the move from Pebble Mill in 2004.
See also
BBC English Regions
References and further reading
References
External links
West Midlands
Mass media in Birmingham, West Midlands
Television channels and stations established in 1949 |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83%81%EC%B6%9C%EC%8B%9C%20%ED%8E%B8%EC%8A%A4%ED%86%A0%EB%9E%91 | 신상출시 편스토랑 | 《신상출시 편스토랑》은 매주 금요일 저녁 8시 30분에 방송되는 요리 전문 예능 프로그램이다. 짧게 편스토랑으로도 부른다.
방송 개요
연예계 소문난 '맛.잘.알 (맛을 잘 아는)' 스타들이 혼자 먹기에 아까운 필살의 메뉴를 공개, 이 중 메뉴 평가단의 평가를 통해 승리한 메뉴가 방송 다음날 실제로 전국의 편의점에서 출시되는 신개념 편의점 신상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타이틀명은 '편하게 먹는 레스토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승 시에는 GS25 편의점에서 간편식으로 출시된다. 밀키트는 HY (에치와이) 밀키트 브랜드 잇츠온에서 생산한다.
방송 시간
출연자
진행자
역대 진행자
스페셜 MC
수상 경력
2019년
2019년 KBS 연예대상
핫이슈 프로그램상
쇼·오락 부문 우수상 - 도경완
쇼·오락 부문 신인상 - 정일우
베스트 커플상 - 이경규, 이영자
방송작가상 - 백순영 작가
2020년
2020년 KBS 연예대상
쇼 버라이어티부문 신인상 - 김재원
리얼리티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 오윤아, 류수영
프로듀서 특별상 - 이영자
리얼리티 부문 우수상 - 이유리
2021년
2021년 KBS 연예대상
핫이슈 예능인상 - 이연복
인기상 - 류수영
리얼리티 부문 우수상 - 오윤아
2022년
2022년 KBS 연예대상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 차예련
쇼·버라이어티 부문 우수상 - 이찬원
쇼·버라이어티 부문 최우수상 - 류수영
같이 보기
관련 항목
요리
음식
방송 프로그램
한식탐험대 (KBS 시사교양본부 제작)
한국인의 밥상 (KBS 1TV)
백종원 클라쓰 (KBS 2TV)
최고의 요리 비결 (EBS 1TV)
찾아라! 맛있는 TV, 백파더: 요리를 멈추지 마!, 볼빨간 신선놀음, 로컬 식탁 (MBC TV)
결정 맛대맛, 백종원의 골목식당, 맛남의 광장, 식자회담 - 국가발전 프로젝트 (SBS TV)
우리가 아는 맛-알토란 (MBN)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TV조선)
삼시세끼, 백패커, 줄 서는 식당 (tvN)
토요일은 밥이 좋아 (E채널)
맛있는 녀석들 (iHQ)
노중훈의 여행의 맛 (MBC 표준FM)
결방 및 편성 변경 안내
2019년
12월 27일 : 《2019 KBS 가요대축제》 중계방송으로 인한 결방.
2020년
1월 24일 : 설 특집으로 저녁 8시 20분에 조기 방송.
5월 15일 : KBS 스포츠 2020년 KBO 리그 정규시즌 《롯데 자이언츠 VS 한화 이글스》 중계방송으로 인해 밤 10시에 지연 방송.
10월 2일 : 추석특선영화 《엑시트》 편성으로 인한 밤 10시에 지연 방송.
11월 20일 : KBS 스포츠 2020년 한국시리즈 3차전 《NC 다이노스 VS 두산 베어스》 중계방송으로 인한 결방.
12월 18일 : 《2020 KBS 가요대축제》 중계방송으로 인한 결방.
2021년
2월 12일 : 설 특집으로 밤 10시 10분에 지연 방송.
7월 30일 : 《2020 도쿄 올림픽》 중계방송으로 인해 저녁 8시 50분에 조기 방송.
8월 6일 : 《2020 도쿄 올림픽》 중계방송으로 인해 밤 11시 30분에 지연 방송.
11월 26일 : 제42회 《청룡영화상》 시상식 중계방송으로 인한 결방.
12월 17일 : 《2021 KBS 가요대축제》 중계방송으로 인한 결방.
12월 31일 : 《2021 KBS 연기대상》 시상식 중계방송으로 인한 결방.
2022년
2월 11일 :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 중계방송으로 인한 결방.
8월 12일 : 《서울 페스타 2022 개막공연 K-POP SUPER LIVE》 편성으로 인한 밤 10시 30분에 지연 방송.
9월 9일 : 추석 특집 밤 9시 지연 방송.
10월 14일 : 스페셜 편성으로 인한 결방.
11월 25일 : 제43회 《청룡영화상》 시상식 중계방송으로 인한 결방.
12월 16일 : 《2022 KBS 가요대축제》 중계방송으로 인한 결방.
2023년
3월 10일 :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VS 일본》 중계방송으로 인한 결방.
3월 31일 : 《2023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개막공연》 편성으로 인한 밤 9시 지연 방송.
8월 11일 : 《2023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K-POP 슈퍼라이브》 편성으로 인한 밤 9시 10분 지연 방송.
9월 29일 :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중계방송으로 인한 저녁 5시 방송.
10월 6일 :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중계방송으로 결방.
각주
외부 링크
KBS 2TV 신상출시 편스토랑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한국방송공사의 연예오락 프로그램
대한민국의 음식 텔레비전 프로그램
2019년에 시작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201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202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 https://en.wikipedia.org/wiki/Stars%27%20Top%20Recipe%20at%20Fun-Staurant | Stars' Top Recipe at Fun-Staurant | Stars' Top Recipe at Fun-Staurant () is a South Korean television program that airs on KBS2. It currently airs every Friday at 20:30 (KST). The program is also available to watch on KBS World's YouTube channel from November 5, 2019.
The program is notable for popularizing the Macanese coffee beverage later known as "Dalgona coffee" by former cast member Jung Il-woo.
Overview
Based on a theme, celebrities will develop and reveal their own creative recipes, plus cooking personally. They will also share various cooking tips and other related helping points. The competing dishes (that should be convenience store-friendly) are then judged by a judge squad, and the winning dish will be available in CU outlets around South Korea the next day after the announcement of the winning dish. In addition, the winning dishes, beginning Round 17, are also available in online markets, in the form of a meal kit.
On May 2, 2022, it was announced that the show has signed a partnership with GS25. The winning dishes, beginning Round 41, will be available in GS25 outlets, instead of CU outlets. Each winning dish would also be known as the "Meal of the Month".
Proceeds from the sales of the winning dishes will be donated to charities. The amount of sales has totaled up to more than ₩364,201,970, as reported on episode 153.
Judge Squad
From the show's premiere to Round 13, the celebrities' dishes were judged by a judge squad. The judge squad consisted of chefs and Lee Won-il, singer Lee Seung-chul and Kim Jung-hoon, the MD of CU. They will judge the dishes based on these categories: Taste, Texture, Originality, and Marketability. Lee Won-il has not appeared after Round 9, possibly due to the effects of the media reports accusing his wife Kim Yoo-jin of bullying behaviour in the past.
From Rounds 14 to 16, the judge squad consisted of 20 individuals (5 each from the 10s, the 20s, the 30s-40s and the 50s-60s). The 20 individuals could include idol singers or the sons/daughters of celebrities. The judge squad also include the guest host(s) of the round and chef Lee Yeon-bok. The judging criteria remains the same. Due to this change, Lee Seung-chul and Kim Jung-hoon have no longer appeared on the show from Round 14.
From Rounds 17 to 40, the judge squad consisted of only chefs, including Lee Yeon-bok as the head judge. Lee Won-il reappeared as part of the Judge Squad alongside Lee Yeon-bok from Round 33 to Round 40.
From Round 41, a professional judge squad consisting of Lee Yeon-bok and various experts, and a special judge squad would decide in the winning dish. The judge squads would taste the competing dishes without knowing who cooked them.
Cast
Host
Fixed Judge Squad
Other than being part of the judge squad to judge the food, they will sit together with the guest host(s) and the cast lineup to watch the recorded clips of the celebrities preparing their creative recipes.
Current
Former
Special Judge Squad
Episodes (2019)
Notes:
No broadcast on December 27 due to the broadcast of 2019 KBS Song Festival.
Episodes (2020)
Notes:
No broadcast on November 20 due to the live broadcast of the 2020 KBO League's 2020 Korean Series.
No broadcast on December 18 due to the live broadcast of the 2020 KBS Song Festival.
Episodes (2021)
Notes:
No broadcast on November 26 due to the live broadcast of the 42nd Blue Dragon Film Awards.
No broadcast on December 17 due to the live broadcast of the 2021 KBS Song Festival.
No broadcast on December 31 due to the live broadcast of the 2021 KBS Drama Awards.
Episodes (2022)
Notes:
No broadcast on February 11 due to the live broadcast of the 2022 Winter Olympics.
No broadcast on October 14, and a special broadcast was aired, featuring Ryu Soo-young in Rounds 45 and 48, Lee Chan-won in Round 46, and Cha Ye-ryun in Round 45.
No broadcast on November 25 due to the live broadcast of the 43rd Blue Dragon Film Awards.
No broadcast on December 16 due to the broadcast of 2022 KBS Song Festival.
Episodes (2023)
Notes:
No broadcast on March 10 due to the live broadcast of the 2023 World Baseball Classic.
No broadcast on October 6 due to the live broadcast of the 2022 Asian Games.
Winning tally
Ratings
Ratings listed below are the individual corner ratings of Stars' Top Recipe at Fun-Staurant. (Note: Individual corner ratings do not include commercial time, which regular ratings include.)
In the ratings below, the highest rating for the show will be in and the lowest rating for the show will be in each year.
2019
2020
2021
2022
2023
Awards and nominations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Korean Broadcasting System original programming
South Korean variety television shows
South Korean television shows
Korean-language television shows
2019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debuts
South Korean cooking television series |
https://ko.wikipedia.org/wiki/%ED%85%8C%EC%9B%8C%EB%93%9C%EB%A1%9C%EC%8A%A4%20%EC%95%84%EB%93%9C%ED%95%98%EB%86%88 |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이여수스(, 1965년 3월 3일 ~ )는 학자, 관료이다. 티그라이주의 보건국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에티오피아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과 보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17년 7월부터 세계보건기구(WHO)의 사무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생애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에수스는 1965년 3월 3일에 에티오피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에리트레아 아스마라에서 아드하놈 거브러이여수스와 멜라슈 웰데가비르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86년에는 아스마라 대학교로부터 생물학과 과학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말라리아 연구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높였다. 에티오피아 사회주의 임시 군사 정부에서는 보건부의 청소년 공중보건 전문가로 활동했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실각한 이후에는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런던 대학교 산하 런던 위생 열대의학 대학원으로부터 감염성 질환 면역학과 과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라이주의 말라리아 유행 및 적절한 통제 조치에 대한 댐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통해 노팅엄 대학교로부터 지역 사회 보건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1년에 티그라이주 보건국장으로 임명된 이후에 티그라이주의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에이즈)·수막염 발병률을 크게 감소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티그라이주 각지의 병원·진료소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연결하는 대규모 사업을 진행했고 어린이에 대한 백신 예방 접종률 증가, 건강 관리 직원 증원 등의 큰 성과를 기록했다. 2003년에는 에티오피아 보건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2005년 10월 12일부터 2012년 12월 29일까지 멜레스 제나위·하일레마리암 데살렌 내각에서 에티오피아 보건부 장관을 역임하던 동안에는 에티오피아의 의료진 확충, 영아 사망률 감소 등의 성과를 기록하는 한편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국제 기금 조성에 공헌했다. 2012년 11월 29일부터 2016년 11월 1일까지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내각에서 에티오피아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던 동안에는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에 대한 국제 사회의 공동 대응, 에티오피아의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 건설을 둘러싼 수단·이집트와의 분쟁 중재에 나섰다.
2017년 5월 23일에 열린 제70차 세계보건총회(WHA)에서 마거릿 챈의 후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면서 아프리카 출신으로는 최초로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017년 7월 1일에는 제8대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사건 및 논란
로버트 무가베 아프리카 친선 대사 임명 논란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이여수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은 2017년 10월 18일에 열린 비감염성 질병 퇴치를 위한 세계보건기구 국제 회의에서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을 아프리카 친선 대사로 임명하면서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아프리카의 보건 향상에 기여했다"며 임명 사유를 밝혔다. 그러나 거브러이여수스 사무총장의 이러한 행동은 일부 국가들로부터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의 독재 체제와 관련된 짐바브웨의 열악한 의료 환경, 인권 침해를 은폐시키려는 행동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결국 세계보건기구는 2017년 10월 22일에 공개된 공식 성명을 통해 로버트 무가베를 친선 대사로 임명했던 계획을 철회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범유행 대처 논란
2019년 말부터 중국에서 일어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으로 인하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코로나-19)가 이웃 나라로 확산되어 감염자를 발생시킨 상황임에도 세계보건기구는 2020년 1월 23일에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 선포를 유예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세계 각지로 확산되면서 세계보건기구는 2020년 1월 30일에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나 이마저도 코로나-19의 진원지인 중국에 대한 여행·교역 제한은 권고하지 않았다.
거브러이여수스 사무총장은 2020년 1월에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면담하는 한편 코로나-19 확산 차단을 위한 중국 정부의 행동을 지지하는 발언을 계속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2017년에 거브러이여수스가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던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 지원을 약속한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20년 2월 7일에는 온라인 청원 웹사이트인 Change.org에 거브러이여수스 사무총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청원이 게재되었으며 해당 청원은 32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3월 10일, 이 청원은 40만 명의 서명을 받았고결국 5월 1일, 지난 1월 29일부터 시작된 해당 청원은 102만 5412명의 서명을 받아 UN과 WHO에 제출된다.
같이 보기
코피 아난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에티오피아 인민 혁명 민주 전선
각주
외부 링크
WHO 사무총장 소개
196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에티오피아의 각료
아스마라 출신
런던 대학교 동문
에티오피아의 외무장관
에티오피아의 유엔 직원
세계 보건 기구 직원
세계 보건 기구 사무총장 | https://en.wikipedia.org/wiki/Tedros%20Adhanom%20Ghebreyesus | Tedros Adhanom Ghebreyesus | Tedros Adhanom Ghebreyesus (, sometimes spelt ; born 3 March 1965 in Asmara, Eritrea) is an Ethiopian public health official, researcher, and the Director-General of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since 2017. Tedros is the first African to become WHO Director-General, receiving an endorsement for the role by the African Union. He played a role in the response to the Ebola virus epidemic, the COVID-19 pandemic, and the 2022–2023 mpox outbreak.
Prior to serving as Director-General, he held two high-level positions in the government of Ethiopia: Minister of Health from 2005 to 2012 and Minister of Foreign Affairs from 2012 to 2016. Tedros was included in Times 100 Most Influential People of 2020.
Early life and education
Tedros was born in Asmara, Eritrea (at that time part of the Ethiopian Empire), to Adhanom Gebreyesus and Melashu Weldegabir. His family originated from the Enderta awrajja of Tigray. Tedros recalled that as a child he was very aware of the suffering and death caused by malaria. His younger brother died at the age of 3 or 4 years, possibly of a preventable disease like measles, which Tedros often discusses as a defining personal experience in regards to the need for global healthcare.
In 1986, Tedros received a Bachelor of Science degree in biology from the University of Asmara. He studied at the London School of Hygiene & Tropical Medicine and was awarded a Master of Science degree in immunology of infectious diseases from the University of London in 1992. In 2000, he earned a Doctor of Philosophy in community health from the University of Nottingham for research on the effects of dams on malaria transmission in the Tigray region.
Early career
In 1986, after his first degree, Tedros joined the Ethiopian Ministry of Health as a junior public health expert.
Tedros joined the Tigray People's Liberation Front.
In 2001, Tedros was appointed head of the Tigray Regional Health Bureau. In 2003, he was appointed a State Minister (deputy minister) for Health, a post he held for just over a year.
Ethiopian politics
Minister of Health of Ethiopia (2005–2012)
In October 2005, Tedros was appointed Minister of Health of Ethiopia by Prime Minister Meles Zenawi of Tigray People's Liberation Front. At this time the Ethiopian health ministry faced challenges that included poverty, poor infrastructure, and a declining global economic situation; Ethiopia employed fewer doctors than the number of Ethiopian doctors working in the Chicago metropolitan area. A review published in Global Health Governance considered progress in health indicators during this period to be significant. The Health Ministry's activities from 2005 to 2008 were supported by US$1.9 billion in development aid, increased focus on links between community and centralized health systems, and less exclusive attention to HIV/AIDS and malaria. Tedros designed the health workforce "flooding" reform strategy that has resulted in the training and deployment of thousands of doctors, nurses, pharmacists, laboratory technologists and health officers. This program included the construction of 4,000 health centres, trained and deployed more than 30,000 health extension workers, and developed a new cadre of hospital management professionals as part of a Health Extension Program (HEP). A 2011 Demographic Health Survey suggests these efforts reduced Ethiopian infant mortality from 123 deaths per 1,000 live births in 2006 to 88 in 2011.
As Minister of Health, Tedros formed relationships with figures and organizations including former American president Bill Clinton, his Clinton Foundation and the 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 In 2010 the US State Department named Ethiopia as one of the US Global Health Initiative Plus countries, providing the country with greater access to resources for public health projects.
Global health initiatives
During his time as Minister of Health of Ethiopia, Tedros was very active in global health initiatives. Ethiopia was the first country to sign a compact with the International Health Partnership. He was chair of the Roll Back Malaria Partnership (2007–2009), a member of the Programme Coordinating Board of UNAIDS from 2009 to 2010 and the Global Fund to fight AIDS, Tuberculosis and Malaria from 2009 to 2011 and co-chair of the Partnership for Maternal, Newborn & Child Health (2005–2009). He also served as a member of the Global Alliance for Vaccines and Immunization (GAVI) Board as well as the Institute of Health Metrics and Evaluation (IHME) and the Stop TB Partnership Coordinating Board. He was also a member of several academic and global health think tanks including the Aspen Institute and 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 He served as vice-president of the 60th World Health Assembly that was held on 14–23 May 2007. From 2008 until 2009, he was a member of the High Level Taskforce on Innovative International Financing for Health Systems, co-chaired by Gordon Brown and Robert Zoellick.
The Global Fund to Fight AIDS, Tuberculosis and Malaria
In July 2009, Tedros was elected board chair of The Global Fund to Fight AIDS, Tuberculosis and Malaria for a two-year term. In a profile published in April 2010, The Lancet reported that Tedros was "a household name at the Global Fund Secretariat" before his election as board chair where his leadership was regularly cited at the Global Fund that resulted in Ethiopia being named as an exemplary high-performing country.
Maternal and child health
Tedros oversaw a program introducing 30,000 health extension workers, focused on reducing maternal mortality and child mortality.
The rate of child deaths fell by 30 percent between 2005 and 2011. Infant mortality decreased by 23 percent, from 77 to 59 deaths per 1,000 births, while under-five mortality decreased by 28 percent, from 123 to 88 per 1,000 births. The number of expectant mothers who delivered with the help of a skilled provider rose from 6 percent in 2005 to 10 percent in 2011, according to the 2011 Ethiopia Demographic and Health Survey.
Tuberculosis
During Tedros's tenure as Minister of Health, tuberculosis prevention and treatment services were included as one of the packages of Health Extension Workers, which has resulted in improvements in performance and the achievement of the tuberculosi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 (MDG) ahead of the target date.
Malaria
Deaths from malaria fell by more than 50% from 2005 to 2007. The rate of new malaria admittances fell 54% in the country over the same period, while the number of childhood malaria cases reported at clinics fell by 60%. The Health Ministry conducted the distribution of 20.5 million insecticide-treated bed nets to protect over 10 million families in malaria-prone areas between 2005 and 2008.
According to the WHO Africa office (WHO-AFRO), in 2011 when Tedros was the minister of health, 75% of the land and 60% of the population was exposed to malaria in Ethiopia, although malaria admissions and deaths marginally fell in recent years.
The National Malaria Guideline (3rd Edition) prepared by the Ministry of Health of Ethiopia in 2012, before the departure of Tedros to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states that "52 million people (68%) live in malaria-risk areas." The document also states, "Ethiopia is one of the most malaria-prone countries in Africa, with rates of morbidity and mortality increasing dramatically (i.e. 3.5-fold) during epidemics" and alleges serious policy failures of the Government of which Tedros was the Minister of Health until 2013. It argues, "Ethiopia faces many challenges related to human resources for healthcare, including the shortage of skilled health workers, high turnover and lack of retention of health professionals." In addition to these challenges, the National Malaria Guideline stresses "serious problems in coordinating health interventions and implementing partners."
AIDS
Under Tedros, the Ministry of Health was able to turn around Ethiopia's record of the highest number of new HIV infections in Africa, bringing the number down dramatically. The prevalence was reduced from its double-digit record to 4.2 in cities and 0.6 in rural areas. According to the HIV/AIDS Prevention and Control Office (HAPCO), Ethiopia's rate of HIV infection declined by 90% between 2002 and 2012, while AIDS-related death dropped by 53%. The number of people starting HIV treatment increased more than 150-fold during 2005–2008.
The decline in the infection rate has been attributed to the concerted effort of the Ministry of Health in providing medicines and organizing various awareness-raising programs. The office has managed to integrate the people in HIV prevention and control activities. The wide range of media campaigns to inform the public about the disease has helped achieve behavioral change. Prevention measures like the use of condoms have shot up starkly with increased awareness on the disease and advertising urging safe sex practices and condom use. The government's collaboration with local and international governmental and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has also positively influenced access to HIV/AIDS related service centers.
Family planning
Under Tedros's tenure, the unmet need for family planning in Ethiopia declined, and the contraceptive prevalence rate doubled in five years. Contraceptive prevalence rates reached 65% in 2015 by reaching an additional 6.2 million women and adolescent girls. Recognising that early childrearing is a major factor in infant mortality, the Ministry of Health targeted its efforts on adolescent girls (15 to 19 years) who have the highest unmet need for family planning.
Minister of Foreign Affairs of Ethiopia (2012–2016)
In November 2012, Tedros became Ethiopia's Minister of Foreign Affairs. He held this position until 2016, as part of Hailemariam Desalegn's cabinet reshuffle after he was approved by the EPRDF as party leader (and thus Prime Minister).
Financing for Development Conference (FfD3)
Tedros was instrumental in the successful outcome of the Third International Conference for Financing for Development, which was held in Addis Ababa, Ethiopia, on 13–16 July 2015. He was responsible for the organization of the Addis Ababa Action Agenda (AAAA) document in which the attending countries committed to financing for the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He played a key role in saving the Forum from collapse by bringing polarized positions closer. The outcome document, the Addis Ababa Action Agenda (AAAA), set policy actions by Member States, which draw upon all sources of finance, technology, innovation, trade, and data to support the implementation of the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The Conference was criticized by a few observers for failing to come up with new money for implementing the SDGs while a follow-up April 2016 report by the Economic and Social Council Forum was much more optimistic and provided the framework to monitor the commitments. Tedros served as a member of the High Level Task Force for innovative financing for Health Systems chaired by former World Bank President and U.K. Prime Minister Gordon Brown.
Agenda 2063 of Africa Union
As Chair of the Executive Council of the AU in 2014, Tedros highlighted the need for a paradigm shift in Africa's political and socio-economic governance and development to realize the continent's long-term agendas. He emphasized the need for Africa to focus on issues of economic emancipation, peace and stability, the acceleration of rapid economic growth, governance and democratization. During his tenure, the AU adopted its First Ten Year Implementation Plan for Agenda 2063 – a roadmap for achieving a prosperous Africa based on inclusive growth and sustainable growth, which has placed health as its centerpiece. He also helped achieve the agreement between the Federal Government of Somalia and Jubaland Political Actors, which played a role in improving the delivery of health services and protecting the safety and security of Somali citizens.
West Africa Ebola Crises
As Minister of Foreign Affairs, Tedros played a pivotal leadership role in the Africa Union's response to the 2013–2016 Western African Ebola virus epidemic. He particularly facilitated greater country ownership and urging countries to adhere to the WHO guidelines including the full implementation of the International Health Regulations. He also advocated that the Ebola crises offer a unique opportunity to strengthen primary health care and highlight the importance of health as a critical security issue. In an interview he conducted with Devex in November 2014, Tedros discusses what "disappointed" him in the global response to Ebola, the importance of solidarity in overcoming the outbreak, and how the deadly virus has transformed to a crisis beyond health. He also promptly mobilised 200 Ethiopian health workers highly trained in management of public health emergencies and surveillance (by an initiative he created when he was the Minister of Health) to join the African Union response team.
Hidase Dam controversy
In May 2013, controversy intensified over the under-construction Hidase Dam in the Benishangul-Gumuz near Sudan as Ethiopia began diverting the Blue Nile for the dam's construction. At that time, the dam was more than 22 percent complete and expected to produce 6,000 megawatts, making it Africa's largest hydroelectric power plant. The dam was expected to have a reservoir of around 70 billion cubic meters, which was scheduled to start filling in 2014. Egypt, Ethiopia and Sudan established an International Panel of Experts to review and assess the study reports on the dam. The panel consisted of 10 members; 6 from the three countries and 4 international in the fields of water resources and hydrologic modelling, dam engineering, socioeconomic, and environmental. The panel held its fourth meeting in Addis Ababa in November 2012. It reviewed documents about the environmental impact of the dam and visited the dam site. The panel submitted its preliminary report to the respective governments at the end of May 2013. Although the full report has not been made public, and will not be until it is reviewed by the governments, Egypt and Ethiopia both released details. The Ethiopian government stated that, according to the report, the dam meets international standards and will be beneficial to Egypt, Sudan and Ethiopia. According to the Egyptian government, the report found that the dimensions and size of the dam should be changed.
On 3 June 2013, while discussing the International Panel of Experts report with President Mohammad Morsi, Egyptian political leaders suggested methods to destroy the dam, including support for anti-government rebels. The discussion was televised live without those present at meeting aware. Ethiopia requested that the Egyptian Ambassador explain the meeting. Morsi's top aide apologized for the "unintended embarrassment" and his cabinet released a statement promoting "good neighborliness, mutual respect and the pursuit of joint interests without either party harming the other." Morsi reportedly believes that is better to engage Ethiopia rather than attempt to force them. However, on 10 June 2013, he said that "all options are open" because "Egypt's water security cannot be violated at all," clarifying that he was "not calling for war," but that he would not allow Egypt's water supply to be endangered. Tedros said the dam will be used exclusively for power generation and is being constructed in a way that takes Egypt's water security concerns into account. On 18 June, Tedros and Egyptian Foreign Minister Mohamed Kamel Amr issued a joint statement reiterating "their commitment to strengthen their bilateral relations and coordinate their efforts to reach an understanding regarding all outstanding issues between both countries in a manner of trust and openness building on the positive developments of their relations." Both agreed to review the report of the International Panel of Experts and implement their recommendations, working to defuse the tensions and ease the crisis.
Director-General of World Health Organization (2017–present)
First term (2017–2022)
Electoral campaign
On 24 May 2016, on the margins of the 69th World Health Assembly, Tedros officially announced his candidacy for the post of the director-general of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as the sole African candidate, with endorsement from the African Union and Ministers of Health of the continent. His official launch of candidacy in Geneva was attended by the chairperson of the African Union Commission, Nkosazana Dlamini-Zuma, the Ministers of Foreign Affairs of Rwanda and Kenya, and the Minister of Health of Algeria. During the launch, it was stressed that the nomination of Tedros was based on merit and his prolific national and global credentials. His campaign tagline was "Together for a Healthier World." His Campaign Chair was Senait Fisseha, an Ethio-American lawyer and a professor of gynaecology and obstetrics from the University of Michigan. During this period she was also Director of International Programmes at the Susan Thompson Buffett Foundation, a post she held since 2015 to advance women's health and reproductive rights globally. She later led his transition team. Negash Kebret Botora, Ethiopia's ambassador to the UN and international organisations in Geneva, also played a critical role in the campaign. The campaign was supported in part by a fund created by East African countries. Tedros also hired Mercury Public Affairs, a US-based lobbying company, to help him with his bid.
During its 140th meeting in January 2017, the executive board of the WHO shortlisted Tedros as the front runner out of six candidates through two rounds of secret voting. He collected the most votes during both rounds. Tedros "was supported by a bloc of African and Asian countries, including China, which has considerable influence with those members" while "the US, UK and Canada... lent their support to... the British doctor David Nabarro." One observer called it "a really nasty" election.
Tedros was elected as Director-General of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by the World Health Assembly on 23 May 2017, becoming the first director-general who is not a medical doctor, with an overwhelming 133 votes out of 185. He became the first African to lead the WHO, as well as the first Director-General elected in a vote open to all Member States. He took office for a five-year term on 1 July 2017.
In May 2017, just prior to the WHO election, stories surfaced about an alleged cover-up of three possible cholera epidemics in Ethiopia in 2006, 2009 and 2011. The outbreaks were allegedly wrongly labelled as "acute watery diarrhea" (AWD)—a symptom of cholera—in the absence of laboratory confirmation of Vibrio cholerae in an attempt to play down the significance of the epidemics. UN officials said more aid and vaccines could have been delivered to Ethiopia if the outbreaks had been confirmed as cholera. The allegations were made by Larry Gostin, an American law professor who was acting as an adviser to rival candidate David Nabarro from the UK, and were reported in The New York Times. The African Union delegation to the UN dismissed the report as "an unfounded and unverified defamation campaign, conveniently coming out only days before the election." Tedros denied the allegation of a cover-up and said he was "not surprised at all but quite disappointed" by what he called a "last-minute smear campaign." When Tedros was named the new Director-General of the WHO, members of Ethiopia's Amhara community impacted by the alleged cover-up protested in front of WHO's headquarters in Geneva.
Tedros's candidacy for WHO director general was opposed vigorously by several Ethiopian parties, due to his past membership of the Tigray People's Liberation Front.
In office
Tedros has overseen the WHO's management of the Kivu Ebola epidemic. He made early trips to both the Democratic Republic of Congo and China during the Kivu Ebola epidemic.
Tedros has identified universal health coverage as his top priority at the WHO. He campaigned on the issue and reiterated this focus in his first speech as Director-General and throughout the 72nd Session of the UN General Assembly. In October 2017, he announced his senior leadership team, with women representing 60% of appointments. While Tedros received praise for his commitment to gender equality, he also received criticism for a lack of transparency. He appointed Tereza Kasaeva of the Russian Ministry of Health to lead the WHO Global Tuberculosis Program without soliciting civil society input; days before the appointment, civil society organizations had published an open letter calling for a competitive, open process to identify the Program's new director.
On 18 October 2017, Tedros announced that he had chosen President Robert Mugabe of Zimbabwe to serve as a WHO Goodwill Ambassador to help tackle non-communicable diseases for Africa. He said Zimbabwe was "a country that places universal health coverage and health promotion at the centre of its policies to provide health care to all." Mugabe's appointment was severely criticised, with WHO member states and international organisations saying that Zimbabwe's healthcare system had in fact gone backwards under his regime, as well as pointing out Mugabe's many human rights abuses. It was also noted that Mugabe himself does not use his own country's health system, instead travelling to Singapore for treatment. Observers said Tedros was returning a campaign favour. Mugabe was chair of the African Union when Tedros was endorsed as a sole African Union candidate in a murky process that did not consider qualified alternatives like Michel Sidibé of Mali and Awa Marie Coll-Seck of Senegal. His judgement was widely questioned on social media. The editor-in-chief of Lancet, a prominent medical journal, called Tedros "Dictator-General." After a widespread condemnation, on 22 October 2017 Tedros rescinded Mugabe's goodwill ambassador role.
Tedros has aired concerns about the Tigray conflict in Ethiopia. In remarks to Turkey's Anadolu Agency, some Ethiopian government officials anonymously accused Tedros of soliciting support for the Tigray People's Liberation Front (TPLF) during the 2020 Tigray conflict. They accused him of pressurizing UN bodies so they would try to restrain the Government of Ethiopia's offensive on the TPLF, as well as seeking support from Egypt and East African nations for the group. Ethiopia's Chief of General Staff, Birhanu Jula Gelalcha, publicly accused Tedros of backing the group and trying to get weapons for them on 19 November 2020. Tedros denied soliciting support for the TPLF. On 14 January 2022 the Ethiopian government demanded the WHO investigate Tedros for supporting the TPLF.
COVID-19 pandemic response
In early 2020, Tedros oversaw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s management of the COVID-19 pandemic. In January 2020, Tedros met with Chinese leaders including Foreign Minister Wang Yi and Communist Party General Secretary Xi Jinping about COVID-19. On 23 January 2020, the WHO stated it did not yet rise to the level of an international emergency, but that the organization was closely tracking the virus' evolution. During the announcement, Tedros said "Make no mistake, though, this is an emergency in China. But it has not yet become a global health emergency. It may yet become one." On 31 January 2020, the WHO declared the COVID-19 outbreak a Public Health Emergency of International Concern (PHEIC). During the PHEIC announcement, Tedros stated there was no cause to limit trade or travel with China and said "Let me be clear, this declaration is not a vote of no confidence in China." In the first week of February 2020, Tedros reiterated per WHO and international guidelines that governments adopt policies to stop the spread of the disease that were "evidence-based and consistent," and not to "unnecessarily interfere with international travel and trade."
On 11 March 2020, the WHO declared COVID-19 a pandemic. Tedros commented, "We are deeply concerned both by the alarming levels of spread and severity and by the alarming levels of inaction. We have therefore made the assessment that COVID-19 can be characterized as a pandemic." In March, he called the pandemic "the defining global health crisis of our time" and urged countries to increase testing for the virus, as well as warning of the damage the virus could do in poor countries. Tedros praised China for its containment measures, describing them as a "new standard for outbreak control."
During the COVID-19 pandemic some government officials and public-health experts accused Tedros of failing to declare a pandemic soon enough, and of having a too close relationship with the government of China. According to the BBC, "while Dr Tedros may be political, a lot of that political effort seems to be spent reassuring authoritarian, opaque governments, in a bid to get them to work with the WHO to tackle diseases which threaten global health." African leaders expressed support for Tedros's handling of the COVID-19 crisis, with South African President and Chair of the African Union Cyril Ramaphosa stating that he showed "exceptional leadership."
On 8 April 2020, in response to President Donald Trump's threat to cut U.S. funding to the WHO, Tedros asked that the virus not be politicized and called for unity in fighting the "common enemy."
Tedros said he had received death threats and racist remarks that he attributed to Taiwan with complicity from its Foreign Ministry, an allegation Taiwanese officials vehemently denied, requesting an apology. Taiwanese Foreign Minister Joseph Wu said the claim had no evidence.
On 19 December 2020, during the height of the pandemic, the WHO, under Tedros's leadership, announced that it had secured 2 billion vaccine doses for distribution starting in 2021, once they had been approved by national agencies. Earlier that month, he said, "progress on vaccines gives us all a lift and we can now start to see the light at the end of the tunnel. However, WHO is concerned that there is a growing perception that the COVID-19 pandemic is over".
In May 2022, Tedros commented that the zero-COVID strategy is no longer considered sustainable based on "the behavior of the virus now" and future trends. The comment was suppressed on the Chinese Internet.
Ukraine and white bias
Regarding the humanitarian crisis in Ukraine, following the 2022 Russian invasion of Ukraine, Tedros said that the attention given to the conflict was significantly larger than other crises in Ethiopia, Yemen, Syria or Afghanistan and said it seemed like this was a result of bias against black lives.
Blockade of the Tigray region
In early October 2021, Mark Lowcock, who led OCHA during part of the Tigray War between the Ethiopian government and Tigray rebels, stated that the Ethiopian federal government was deliberately starving Tigray. Tedros called the blockade by Ethiopia "an insult to our humanity", saying "Imagine a complete blockade of seven million people for more than a year. And there is no food. There is no medication, no medicine. No electricity. No telecom. No media."
Mpox declaration
On 23 July 2022, Tedros declared the 2022 mpox outbreak a Public Health Emergency of International Concern (PHEIC), despite 9 of the experts in the committee disagreeing with the call and only 6 in favour.
Second term (2022–present)
Reelection bid
Tedros made plans to seek re-appointment as early as May 2021. On 22 September 2021 Germany proposed him for a further term without opposition. In fact by 29 October he had been nominated by 28 nations: Austria, Bahrain, Barbados, Botswana, Cook Islands, Croatia, Denmark, Estonia, Finland, France, Germany, Greece, Hungary, Indonesia, Ireland, Kazakhstan, Kenya, Luxembourg, Malta, Netherlands, Oman, Portugal, Rwanda, Slovakia, Spain, Sweden, Tonga, and Trinidad and Tobago. He was poised for a second term since no opposing candidate has surfaced. He was re-appointed on 24 May 2022, unopposed for a term that was scheduled to begin on 16 August 2022.
Personal life
Tedros is married and has five children. He is an Orthodox Christian.
Membership
2005–2009: Partnership for Maternal, Newborn & Child Health, co-chair
2005–2006: Stop TB Partnership, Coordinating board member
2007: 60th World Health Assembly, Vice President
2007: 56th Session of WHO Regional Committee for Africa, Chairman
2007–2009: Roll Back Malaria (RBM) Partnership, Chair
2008–2009: GAVI, the Vaccine Alliance, board member
2008–2009: High-Level Task Force for Innovative Financing for Health Systems, Member
2009–2011: Global Fund, Chair
2009–2010: Joint UN Programme on HIV/AIDS (UNAIDS), chair, Programme Coordinating Board
2009: The Aspen Institute, Ministerial Leadership Initiative, Aspen Global Health and Development at the Aspen Institute, Ministry Team
2011–2017: The Aspen Institute, Global Leaders Council for Reproductive Health, Member
2012–2014: Harvard University, Ministerial Leadership in Health Program, Advisory Board
2012–2013: Child Survival Conference, co-chair and co-host
2012–2017: Intergovernmental Authority on Development (IGAD), Executive Council Chair
2012–2017: High-Level Task Force for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Population and Development (ICPD), Member
2013: African Union, Executive Council of Foreign Ministers of the African Union, Chair
2013: AIDS Watch Africa, Chair
2015–?: Tana High Level Forum on Security in Africa, board member
Every Woman Every Child, Steering Group Member
Awards
1999: American Society of Tropical Medicine and Hygiene, Young Investigator of the Year
2003: Ethiopian Public Health Association, Young Public Health Researcher Award
2011: National Foundation for Infectious Diseases, Jimmy and Rosalynn Carter Humanitarian Award
2012: London School of Hygiene & Tropical Medicine, Honorary Fellow
2012: Wired magazine, One of 50 people who will change the world in 2012
2012: Yale University, Stanley T. Woodward Lectureship
2015: New African magazine, One of the 100 most influential Africans for 2015
2016: Women Deliver Conference, Women Deliver Award for Perseverance
2018: Umeå University, Faculty of Medicine, Honorary Doctorate
2019: Newcastle University, honorary degree
2020: African leadership magazine, African of the Year 2020 Award.
2021: University of Nottingham, honorary professorship
2021: Nizami Ganjavi International Medal
2022: Ubuntu Humanitarian Award, 6th Ubuntu Awards, Special Ubuntu Humanitarian Award
2023: University of Michigan, Thomas Francis Jr. Medal in Global Public Health
Selected works and publications
Journals
Newspapers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Dr Tedros Adhanom Ghebreyesus, Director-General, at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Coronavirus disease (COVID-2019) press briefings at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Dr. Tedros Adhanom at HuffPost
|-
1965 births
Alumni of the London School of Hygiene and Tropical Medicine
Alumni of the University of London
Alumni of the University of Nottingham
Ethiopian officials of the United Nations
Foreign ministers of Ethiopia
Living people
People from Asmara
Tigray People's Liberation Front politicians
Umeå University alumni
World Health Organization director-generals |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88%98%EB%A7%90%ED%8C%8C%EC%96%B4%EC%A1%B1 | 미수말파어족 | 미수말파어족()은 니카라과 동해안과 인근 지역의 원주민 언어들이 이루는 작은 어족이다. ‘미수말파’는 존 올든 메이슨이 지은 이름이며, 미수말파어족의 세 갈래인 미스키토어, 수모어군, 마타갈파어군의 이름에서 따온 음절로 되어 있다. 1920년에 민속학자 발터 레만이 처음 발견하였다. 마타갈파어군에 속하는 언어들은 모두 사멸했지만 미스키토어와 수모어군은 살아 있다. 미스키토어는 화자 수가 약 20만 명에 달하며 모스키토 해안의 다른 원주민 언어 화자들도 제2언어로 사용한다. 케네스 헤일에 따르면 수모어군 언어 화자들은 대부분 미스키토어도 구사한다.
Kaufman (1990)은 미수말파어족이 확대 치브차어족에 속한다는 가설이 “설득력 있다”고 하지만, 미수말파어족 전문가인 케네스 헤일은 치브차어족과 미수말파어족 사이의 관계가 “증명하기에는 너무 멀다”고 여긴다.. 한편 최근의 연구(Jolkesky 2017:45-54)는 미수말파어족과 호크어족을 연결지을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한다.
분류
미스키토어 – 화자 약 200,000명, 주로 니카라과 북카리브 자치구에 분포하지만 온두라스에도 조금 분포.
수말파어파:
수모어군 – 화자 약 8,000명, 와스푹강과 그 지류를 따라 주로 니카라과에 분포하지만 온두라스에도 조금 분포. 상당수가 미스키토어로 언어 전이를 겪음.
마양나어 - 수모어군의 주된 변이형
울와어
마타갈파어군
카카오페라어 † – 과거에 엘살바도르 모라산주에서 쓰임
마타갈파어 † – 과거에 니카라과 중앙 고지대와 온두라스 엘파라이소주에서 쓰임
미스키토족이 모스키토 해안을 식민화한 영국 제국과 연합한 결과로 미스키토어는 17세기 후반부터 모스키토 해안의 주된 언어가 되었다. 니카라과 동북부에서 미스키토어는 지금도 수모어군을 몰아내고 있다. 미스키토어의 사회언어학적 지위는 니카라과 동남부의 영어 기반 크리올보다 낮으며, 이 지역에서 미스키토어는 밀려나는 것으로 보인다. 수모어군은 쓰이는 지역 대부분에서 소멸 위기이다. 미스키토어가 부상하기 전까지는 해당 지역의 주된 언어였다는 증거도 있지만 말이다. 마타갈파어군은 오래전에 사멸했으며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미수말파 언어의 음소 목록은 모두 같지만 음소배열론은 차이가 난다. 자음은 p, b, t, d, k, s, h, w, y, 그리고 m, n, ŋ, l, r과 그에 대응하는 무성 자음이다. 모음은 a, i, u의 장모음과 단모음이다.
각주
외부 링크
Ulwa Language home page
The Misumalpan Causative Construction – 케네스 헤일
Theoretical and Universal Implications of Certain Verbal Entries in Dictionaries of the Misumalpan Languages – 케네스 헤일
The Joy of Tawahka – 데이비드 마골린
Matagalpa Indigena – 마타갈파어 단어 목록
Andrew Koontz-Garboden의 웹페이지 (울와어에 관한 논문 링크)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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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FDL bibliography (general, but search specific language names)
Ulwa Language Home Page bibliography
Moskitia bibliography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
메소아메리카의 언어 | https://en.wikipedia.org/wiki/Misumalpan%20languages | Misumalpan languages | The Misumalpan languages (also Misumalpa or Misuluan) are a small family of languages spoken by indigenous peoples on the east coast of Nicaragua and nearby areas. The name "Misumalpan" was devised by John Alden Mason and is composed of syllables from the names of the family's three members Miskito, Sumo languages and Matagalpan. It was first recognized by Walter Lehmann in 1920. While all the languages of the Matagalpan branch are now extinct, the Miskito and Sumu languages are alive and well: Miskito has almost 200,000 speakers and serves as a second language for speakers of other indigenous languages in the Mosquito Coast. According to Hale, most speakers of Sumu also speak Miskito.
External relations
Kaufman (1990) finds a connection with Macro-Chibchan to be "convincing", but Misumalpan specialist Ken Hale considered a possible connection between Chibchan and Misumalpan to be "too distant to establish".
Classification
Miskito – nearly 200,000 speakers, mainly in the North Caribbean Coast Autonomous Region of Nicaragua, but including some in Honduras.
Sumalpan languages:
Sumo languages – some 8,000 speakers along the Huaspuc River and its tributaries, most in Nicaragua but some in Honduras. Many of them have shifted to Miskito.
Mayangna - dominant variety of the Sumo family
Ulwa
Matagalpan
Cacaopera † – formerly spoken in the Morazán department of El Salvador; and
Matagalpa † – formerly spoken in the central highlands of Nicaragua and the El Paraíso department of Honduras
Miskito became the dominant language of the Mosquito Coast from the late 17th century on, as a result of the people's alliance with the British Empire, which colonized the area. In northeastern Nicaragua, it continues to be adopted by former speakers of Sumo. Its sociolinguistic status is lower than that of the English-based creole of the southeast, and in that region, Miskito seems to be losing ground. Sumo is endangered in most areas where it is found, although some evidence suggests that it was dominant in the region before the ascendancy of Miskito. The Matagalpan languages are long since extinct, and not very well documented.
All Misumalpan languages share the same phonology, apart from phonotactics. The consonants are p, b, t, d, k, s, h, w, y, and voiced and voiceless versions of m, n, ng, l, r; the vowels are short and long versions of a, i, u.
Loukotka (1968)
Below is a full list of Misumalpan language varieties listed by Loukotka (1968), including names of unattested varieties.
Mosquito group
Mosquito / Miskito - language spoken on the Caribbean coast of Nicaragua and Honduras, Central America. Dialects are:
Kâbô - spoken on the Nicaraguan coast.
Baldam - spoken on the Sandy Bay and near Bimuna.
Tawira / Tauira / Tangwera - spoken on the Prinzapolca River.
Wanki - spoken on the Coco River and on the Cabo Gracias a Dios.
Mam / Cueta - spoken on the left bank of the Coco River, Honduras.
Chuchure - extinct dialect once spoken around Nombre de Dios, Panama. (Unattested.)
Ulua / Wulwa / Gaula / Oldwaw / Taulepa - spoken on the Ulúa River and Carca River, Nicaragua.
Sumu / Simou / Smus / Albauin - spoken on the Prinzapolca River, Nicaragua. Dialects are:
Bawihka - spoken on the Banbana River.
Tawihka / Táuaxka / Twaca / Taga - spoken between the Coco River and Prinzapolca River.
Panamaca - spoken between the Pispis River, Waspuc River, and Bocay River.
Cucra / Cockorack - spoken on the Escondido River and Siqui River.
Yosco - spoken on the Tuma River and Bocay River. (Unattested.)
Matagalpa group
Matagalpa / Chontal / Popoluca - extinct language once spoken from the Tumo River to the Olama River, Nicaragua.
Jinotega / Chingo - extinct language once spoken in the villages of Jinotega and Danlí, Nicaragua. (only several words.)
Cacaopera - spoken in the villages of Cacaopera and Lislique, El Salvador.
Proto-language
Below are Proto-Misumalpan reconstructions by Adolfo Constenla Umaña (1987):
Notes
Bibliography
Benedicto, Elena (2002), "Verbal Classifier Systems: The Exceptional Case of Mayangna Auxiliaries." In "Proceedings of WSCLA 7th". UBC Working Papers in Linguistics 10, pp. 1–14. Vancouver, British Columbia.
Benedicto, Elena & Kenneth Hale, (2000) "Mayangna, A Sumu Language: Its Variants and Its Status within Misumalpa", in E. Benedicto, ed., The UMOP Volume on Indigenous Languages, UMOP 20, pp. 75–106. Amherst, MA: University of Massachusetts.
Colette Craig & Kenneth Hale, "A Possible Macro-Chibchan Etymon", Anthropological Linguistics Vol. 34, 1992.
Constenla Umaña, Adolfo (1987) "Elementos de Fonología Comparada de las Lenguas Misumalpas," Revista de Filología y Lingüística de la Universidad de Costa Rica 13 (1), 129-161.
Constenla Umaña A. (1998). "Acerca de la relación genealógica de las lenguas lencas y las lenguas misumalpas," Communication presented at the First Archeological Congress of Nicaragua (Managua, 20–21 July), to appear in 2002 in Revista de Filología y Lingüística de la Universidad de Costa Rica 28 (1).
Hale, Ken. "El causativo misumalpa (miskitu, sumu)", In Anuario del Seminario de Filología Vasca "Julio de Urquijo" 1996, 30:1-2.
Hale, Ken (1991) "Misumalpan Verb Sequencing Constructions," in C. Lefebvre, ed., Serial Verbs: Grammatical, Comparative, and Cognitive Approaches, John Benjamins, Amsterdam.
Hale, Ken and Danilo Salamanca (2001) "Theoretical and Universal Implications of Certain Verbal Entries in Dictionaries of the Misumalpan Languages", in Frawley, Hill & Munro eds. Making Dictionaries: Preserving indigenous Languages of the America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Koontz-Garboden, Andrew. (2009) "Ulwa verb class morphology", In press in International Journal of American Linguistics 75.4. Preprint here: http://ling.auf.net/lingBuzz/000639
Ruth Rouvier, "Infixation and reduplication in Misumalpan: A reconstruction" (B.A., Berkeley, 2002)
Phil Young and T. Givón. "The puzzle of Ngäbére auxiliaries: Grammatical reconstruction in Chibchan and Misumalpan", in William Croft, Suzanne Kemmer and Keith Denning, eds., Studies in Typology and Diachrony: Papers presented to Joseph H. Greenberg on his 75th birthday, Typological Studies in Language 20, John Benjamins 1990.
External links
FDL bibliography (general, but search specific language names)
Ulwa Language home page
Ulwa Language Home Page bibliography
Moskitia bibliography
The Misumalpan Causative Construction – Ken Hale
Theoretical and Universal Implications of Certain Verbal Entries in Dictionaries of the Misumalpan Languages – Ken Hale
The Joy of Tawahka – David Margolin
Matagalpa Indigena – some words of Matagalpan
Andrew Koontz-Garboden's web page (with links to papers on Ulwa)
Language families
Mesoamerican languages
Indigenous languages of Central America
Macro-Chibchan languages |
https://ko.wikipedia.org/wiki/HYNN | HYNN | HYNN(흰, , 1998년 1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학력
인천석남중학교 (졸업)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졸업)
동덕여자대학교 실용음악과 (학사)
발표곡
2018년
2018년 12월 28일 공식데뷔 싱글 LET ME OUT(렛미아웃)를 발표했다.
2019년
2019년 3월 31일 시든 꽃에 물을 주듯 앨범을 발표했다.
2019년 11월 12일 미니앨범 [차가워진 이 바람엔 우리가 써있어(Bad Love) (The 1st Mini Album)] 발매했다.
2020년
2020년 3월 31일 미니앨범 [아무렇지 않게, 안녕 (When I Tell You Goodbye) (The 2nd Mini Album)] 발매했다.
2020년 5월 30일 [Vol.57 유희열의 스케치북: 서른네번째 목소리 '유스케 X HYNN(박혜원)'] <Track 9>을 발표했다.
2020년 6월 5일 [Vol.58 유희열의 스케치북: 서른네번째 목소리 '유스케 X HYNN(박혜원)'] <이미 넌 고마운 사람>을 발표했다.
2020년 10월 22일 한 번만 내 마음대로 하자 앨범을 발표했다.
2021년
2021년 1월 21일 그대 없이 그대와(With and Without You) 앨범을 발표했다.
2021년 7월 15일 주말이 싫어졌어(Weekends without you) 앨범을 발표했다.
2021년 10월 15일 미니앨범 [To You (The 3rd Mini Album)] 앨범을 발표했다.
2022년
2022년 10월 5일 끝나지 않은 이야기(The Story of Us) 앨범을 발표했다.
2022년 11월 23일 정규1집 [First of all (The 1st Album)] 발매했다.
2023년
2023년 8월 10일 미니앨범 [하계 : 夏季 (The 4th Mini Album)] 발매했다.
음반 목록
공식앨범
싱글앨범
미니앨범
정규앨범
참여곡
2014년 5월 30일 <연애는 어려워>-리틀티(Little-T)(Feat.박혜원, 이미래, 정효진)
2015년 6월 1일 <Day Dream Morning2"심쿵로맨스>-리틀티(Little-T)(Feat.박혜원,Mojo)
2016년 11월 11일 <Stand Up For You>-슈퍼스타K 2016 #8
2016년 11월 18일 <노래(Move)>-슈퍼스타K 2016 TOP10
2016년 11월 25일 <Lonely Night>-슈퍼스타K 2016 TOP7
2017년 12월 22일 <Another Me>-ASTERIA(클로저스'루나 아이기스'주제곡)
2018년 12월 4일 <Falling in love>-사의 찬미의 OST(He Hymn of Death OST)
2019년 10월 11일 <헤어질 자신 있니(no you, no me)>-앤씨아, HYNN(박혜원)
2019년 10월 25일 <알아>-엠씨몽(Feat. HYNN(박혜원))
2019년 12월 14일 <그 시간 그 자리에>-던전앤파이터 OST
2019년 12월 16일 <2.7 Grams of Hope , Produced by Noella(노엘라)>-2020 부산세계탁구선수권 대회 뮤직비디오
2020년 5월 29일 <Track 9>-[Vol.57 유희열의 스케치북: 서른네번째 목소리 '유스케 X HYNN(박혜원)']
2020년 6월 5일 <이미 넌 고마운 사람>-[Vol.58 유희열의 스케치북: 서른네번째 목소리 '유스케 X HYNN(박혜원)']
2020년 9월 24일 <So Nice>-Grand Mint Band(GMB), GMF2020 Ver
2020년 11월 6일 <그대가 꽃이 아니면>-구미호뎐 OST Part6
2020년 10월 22일 <한 번만 내 마음대로 하자>-한 번만 내 마음대로 하자
2021년 4월 7일 <그대가 없어도 난 살겠지>-김재환(With.HYNN(박혜원))
2021년 8월 3일 <너였다면>-비긴어게인 오픈마이크 EPISODE.16
2021년 9월 10일 <하늘을 달리다>-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 OST Part.11
2021년 10월 3일 <바래>-THE LISTEN-바람이 분다
2021년 10월 18일 <느린 이별>-THE LISTEN-바람이 분다
2021년 11월 6일 <대낮에 한 이별>-[Vol.144 유희열의 스케치북 With you]
2021년 11월 6일 <그런일은>-비긴어게인 오픈마이크 EPISODE.22
2022년 3월 31일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바야흐로 사랑의 계절
2022년 4월 8일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2022년 5월 28일 <Break Away>-WSG워너비 조별경연
2022년 6월 4일 <어마어마해>-WSG워너비 12
2022년 7월 6일 <시든 꽃에 물을 주듯>-뉴페스타 EPISODE.5
2022년 7월 9일 <그때 그 순간 그대로(그그그)>-WSG워너비 1집
2022년 7월 13일 <천일동안>-뉴페스타 EPISODE.6
2022년 8월 6일 <눈을 감으면>-WSG워너비
2022년 9월 24일 <WANNABE>-아바타싱어 ROUND 2
2022년 9월 24일 <가을밤에 든 생각>-히든싱어7-Episode.6
2022년 10월 22일 <나타나>-아바타싱어 ROUND 4
2022년 11월 12일 <그여자>-아바타싱어 ROUND 5
2023년 3월 17일 <결국엔 너에게 닿아서>-결국엔 너에게 닿아서
2023년 7월 15일 <그대는 나의>-킹더랜드 OST Part.6
출연
슈퍼스타K 2016[Mnet] (최종 Top 3)
2016년 9월 22일 - 1라운드 20초 타임배틀
<Higher> - 에일리 [2013.09.16 앨범: Higher] 커버
2016년 10월 8일
<세월이가면> - 최호섭 [1988.03.30 엘범: 바람이 불어] 커버
2016년 10월 20일 - 2 VS 2배틀
<싫어> - 박정현 [2000.10.28 앨범: Naturally] 커버
2016년 11월 3일 - 파이널 더블 미션
<Love Scanner> - 윤종신,정석원 [2011.08.04 앨범:月刊 尹鍾信 August] 커버
2016년 11월 10일 - 솔로곡 미션
<Stand Up For you> - 손승연,유성은,우혜미,지세희 [2012.05.19 앨범: The Voices - The Voice Of Korea Collaboration Project] 커버
2016년 11월 17일 - 1차 경연
<노래(Move)> - 윤복희 [1989.8] 커버
2016년 11월 24일
<그중에 그대를 만나> - 이선희 [2014.03.25 앨범: SERENDIPTY 30주년 기념앨범] 커버
2016년 11월 25일 - 2차 경연
<lonely night> - 부활 [1997.07.07 앨범: 불의 발견] 커버
2016년 12월 1일
<함께> - 김건모,박광현 [1992.07.25 앨범: 박광현3집] 커버
2016년 12월 1일 - 3차 경연
<미안해요> - 김건모 [2001.05.05 앨범: 김건모7집] 커버
히든싱어5[JTBC]
2018년 8월 5일 히든싱어5 에일리(Ailee)편
유희열의 스케치북[KBS]
2019년 8월 16일 유희열의 스케치북(어쩌다 신인 특집)<ref>심민경 기자 (2019년 8월 17일). [유희열의 스케치북] 가창력 수준급! 대형 신인 HYNN(흰) ♬ 시든 꽃에 물을 주듯. KBS미디어. 2020년 6월 18일 확인.</ref>
<시든 꽃에 물을 주듯(The Lonely Bloom Stands Alone)>
2019년 8월 30일 유희열의 스케치북(고퀄 보컬 특집)
<야생화>-박효신 [2014.03.28 앨범: 야생화] 커버
2020년 5월 29일 유희열의 스케치북
<Track 9>-이소라 [2008.12.18 앨범: 이소라] 커버
2020년 6월 5일 유희열의 스케치북
<이미 넌 고마운 사람>-김연우[2004.01.06 앨범: 연인] 커버
2021년 1월 9일 유희열의 스케치북
<2easy>-니브(Nlve)X흰(HYNN)
2021년 11월 6일 유희열의 스케치북
<대낮에 한 이별>-유회승(엔플라잉)xHYNN(박혜원)
불후의 명곡 2(Immortal Songs 2)[KBS]
2019년 11월 9일 불후의 명곡 (작곡가 박근태 편)
<사랑안해>-백지영 [2006.03.30 앨범: Smile Again] 커버
2019년 11월 23일 불후의 명곡 (가수 유열 편)
<사랑의찬가>-서영은 [2001.03.05 드라마 불꽃 OST] 커버
2020년 1월 11일 불후의 명곡 (작곡가 장욱조 편 )
<꼬마인형>-최진희 [1994.04.01 앨범: 남자에게] 커버
2020년 4월 18일 불후의 명곡 (90년대생이 온다 편)
<휠릴리>-이수영 [2004.09.09 앨범: The Color’s Of My Life] 커버
2021년 7월 10일 불후의 명곡 (가요톱10 VS 뮤직뱅크 편)
2021년 7월 17일 불후의 명곡 (가요톱10 VS 뮤직뱅크 편)
<체념>-빅마마 [2003.02.06 앨범: Like The Bible] 커버
2021년 8월 7일 불후의 명곡 (아티스트 거미 편)
<구르미 그린 달빛>-거미 [2016.09.06 앨범: 구르미 그린 달빛 OST - Part3]
2023년 2월 4일 불후의 명곡(2023 오 마이 스타3)
<바람의 노래>-조용필 [1997.05.01 앨범: Eternally]
열린음악회(Open Concert)[KBS]
2019년 11월 17일 1266회
2020년 8월 23일 1298회
2020년 10월 18일 1306회
2020년 12월 13일 1314회
2021년 6월 20일 1338회
2021년 10월 31일 1355회
2022년 5월 29일 1383회
2023년 2월 5일 1417회
콘서트 문화창고[KBS]
2020년 2월 12일 콘서트 문화창고 72회
슈가맨3(SUGARMAN3)[JTBC]
2020년 2월 28일 슈가맨3 13회
<Feeling>-김사랑 [1999.11.23 앨범: 나는 18살이다] 커버
스튜디오 음악당[Mnet]
2020년 4월 7일 스튜디오 음악당 12회
<Chandelier>-Sia 커버
복면가왕[MBC]
2020년 5월 31일 257회
2020년 6월 7일 258회
2020년 6월 14일 259회
2020년 6월 21일 260회
2020년 7월 12일 263회
2020년 7월 19일 264회
2020년 10월 4일 275회
2020년 10월 11일 276회
2020년 11월 29일 283회
2020년 12월 6일 284회
2022년 3월 27일 349회
2022년 4월 3일 350회
2023년 1월 22일 388회
2023년 1월 29일 389회
문화콘서트 난장[MBC]
2020년 6월 13일 606회
2020년 11월 28일
열린예술무대 뒤란[SBS]
2020년 9월 25일 629회
2021년 6월 4일 660회
스페이스 공감[EBS]
2020년 9월 25일
비디오스타[MBC every1]
2020년 10월 6일 217회
예스터데이[MBN]
2020년 12월 11일
2021년 1월 15일
당신은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MBC every1]
2020년 12월 30일
비긴어게인 오픈마이크[JTBC]
2021년 6월 28일
THE LISTEN-바람이 분다[SBS]
2021년 9월 27일 1회
2021년 10월 4일 2회
2021년 10월 11일 3회
2021년 10월 18일 4회
세종 도시 플레이리스트[MBC]
2021년 11월 13일
국가가 부른다[TV조선]
2022년 3월 24일 6회
놀면 뭐하니[MBC]
2022년 4월 16일 133회
2022년 5월 28일 139회
2022년 6월 4일 140회
2022년 6월 18일 142회
2022년 6월 25일 143회
2022년 7월 9일 145회
2022년 7월 16일 146회
2022년 7월 23일 147회
2022년 7월 30일 148회
2022년 8월 6일 149회
2022년 8월 13일 스페셜 1회
2023년 4월 15일 181회
뉴페스타[JTBC]
2022년 6월 28일 4회
2022년 7월 5일 5회
2022년 7월 12일 6회
아바타싱어[MBN]
2022년 8월 26일 1회
2022년 9월 23일 4회
2022년 9월 30일 5회
2022 아이돌스타 선수권대회[MBC]
2022년 9월 12일
히든싱어7[JTBC]
2022년 9월 23일 6회 잔나비 최정훈편
K-909[JTBC]
2022년 11월 26일
MBC연예대상[MBC]
2022년 12월 29일
피크닉라이브 소풍[MBC M]
2022년 12월 30일
비긴어게인 인터미션[JTBC]
2023년 1월 6일 1회
2023년 1월 13일 2회
2023년 1월 20일 3회
2023년 1월 27일 4회
2023년 2월 3일 5회
2023년 2월 10일 6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SBS]
2023년 1월 19일 62회
가든스테이[KBC]
2023년 4월 30일
불꽃밴드[MBN]
2023년 8월 17일
단독 콘서트
수상 내역
2019 KY STAR AWARDS "도대체 몇번째야 실연송 상" 수상
2021년 제7회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 여자 신인상
2023년 브랜드 고객충성도 대상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 보컬 부문 수상
홍보대사
2020년 11월 한국생명의전화 홍보대사
2022년 6월 인천시교육청 홍보대사
각주
외부 링크
HYNN - X(트위터)
199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여자 발라드 가수
대한민국의 여성 유튜버
대한민국의 개신교도
음악 유튜버
인천석남중학교 동문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동문
인천광역시 출신 가수
슈퍼스타K 참가자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참가자 | https://en.wikipedia.org/wiki/Hynn | Hynn | Park Hye-won (; born January 15, 1998), also known by the stage name Hynn (; stylised in all caps), is a South Korean singer and songwriter. She was a contestant in Superstar K 2016, where she finished in the top 3. On December 28, 2018, she made her official debut with the single, "Let Me Out".
Career
Hynn first garnered attention when her song "The Lonely Bloom Stands Alone", released on March 31, 2019, had surged to the top 10 of various major real-time music charts six months after its release.
Hynn participated in MBC's King of Mask Singer in 2020, where she was crowned the Mask King once, and was the youngest participant in the show's history to have been crowned the Mask King, at 22 years old. This record was broken when Lee Mu-jin was crowned Mask King in end 2021, when he just turned 21 years old.
She is also part of the seasonal South Korean all-female supergroup WSG Wannabe, which was formed through MBC variety show Hangout with Yoo. Under the supergroup, she became a member of the sub-unit Gaya-G, and with the song "At The Moment", she scored her first music show win in Show! Music Core on July 23, 2022.
Discography
Studio Albums
Extended plays
Single albums
Singles
Soundtrack appearances
Filmography
Television shows
Ambassadorship
Public Relations Ambassador of the Incheon Education Bureau (2022)
Awards and nominations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HYNN Official YouTube Channel
1998 births
Living people
South Korean female idols
21st-century South Korean women singers
Superstar K participants
School of Performing Arts Seoul alumni
Musicians from Incheon |
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C%9A%B0%EB%8B%A4%20%EB%A7%88%EB%A6%AC%EC%BD%94 | 코우다 마리코 | 코우다 마리코(, 1969년 9월 5일~)는 일본의 아오니 프로덕션에 소속되어 있는 성우 겸 가수이다. 사이타마현 미나미사이타마군 미야시로정 출신. 기혼. 애칭으로는 마리아네(マリ姉), 마리네상(マリねえさん) 등이 있다.
출연 작품
TV애니메이션
시기불명
마루코는 아홉살 - 시기불명 - 1992년 소녀, 여자아이
1991년
키테레츠 대백과 - 아키코, 여자아이 A
금붕어 주의보 - 아케코(아름)
겟타로보 호 - 여자아이A
울트라맨 키즈 - 아이들
1992년
소년 아시베 - 야마다 요코
스페이스 오즈의 모험 - 도로시
대초원의 작은 천사 부시베이비 - 톰 빌, 학생
1993년
고스트 스위퍼 - 오키누
츠요시 정신차려 - 미토모 마사미
즐거운 윌로 타운 - 애니, 랍피
닌자보이 란타로 - 유키(대역)
1994년
마멀레이드 보이 - 코이시카와 미키
1995년
애니 세계의 동화 - 그레텔
사우르스 팡팡 - 아가씨
1996년
명견 래시 - 프리실라 래드릭
겐지의 봄 - 토시
1997년
CLAMP 학원 탐정단 - 미유키
포춘 퀘스트 L - 맥스
HAUNTED 정션 - 하세가와 하나코
1998년
지켜줘 수호월천! - 수호월천 샤오린
1999년
크레용 신짱 - 신비한 마법소녀 마리
자폭군 - 퀸셀
주간 스토리 랜드 - 나미
몬스터팜 - 홀리
2000년
도라에몽 - 아오조라 유카리, 마호, 여자아이
원피스 - 카야
2001년
찬스 트라이앵글 섹션 - REIKA
포켓몬스터 - 사쿠라
2002년
Kanon - 미나세 나유키
2003년
플라네테스 - 우주닌자의 전처
포켓몬스터 사이드 스토리 - 사쿠라
2004년
탐정학원Q - 호쇼 미츠루
2005년
무적코털 보보보 - 떡보(덴보)
AIR - 미나세 나유키를 닮은 여학생
GUN X SWORD - 비비안
제노사가 THE ANIMATION - 페브로니아
2006년
신족가족 - 후미코
디지몬 세이버즈 - 다이몬 사유리
파워퍼프걸Z - 시로가네 미코
빈곤자매 이야기 - 아스의 반의 선생
매지널 프린스 ~월계수의 왕자들~ - 크리스티나 그랜트
2007년
과학닌자대 갓챠핀 - 갓챠핀 3호
코드 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 교사, 리포터
시온의 왕 - 야스오카 사치코
2008년
절대가련 칠드런 - 아카시 요시미
뱀파이어 기사 Guilty - 쿠란 쥬리
포르피의 긴 여행 - 엘레나
2009년
밀림의 왕자 레오 - 통신
명탐정 코난 - 세토 미즈키
2011년
UN-GO - 쿠라미츠 미네
다마고치! - 멜로마마치
2012년
이것은 좀비입니까? 오브 더 데드 - 망상 유
스마일 프리큐어! - 호시조라 이쿠요
기어와라! 냐루코 양 - 르히 지스톤
2013년
탐험 도리랜드 - 월천사 쿠라라
원피스 에피소드 오브 메리 - 카야
2014년
명탐정 코난 - 나카니시 유카
해피니스 차지 프리큐어! - 퀸 미라주
2015년
모두 모여라! 팔콤 학교 SC - 크리스
2016년
판파카판츠 W오NEW! - 쿠로리
2017년
마사무네의 리벤지 - 모모
케모노 프렌즈 - 말코손바닥사슴(헤라지카)
드래곤볼 슈퍼 - 캬웨이
여동생만 있으면 돼 - 아리스
2018년
명탐정 코난 - 사메이 리카
센류소녀 - 유키시로 치후유
OVA
1992년
우주의 기사 테카맨 블레이드 2 - 유미 프랑소와
1994년
더티페어 FLASH - 유리
상남2인조 - 이마이 나미키
1995년
이상한 나라의 미유키 - 미유키
은하아가씨전설 유나 - 시오리
1996년
은하아가씨전설 유나 - 시오리
팝 팀 에픽 - 포푸코(청룡ver. #14 A파트)
2000년
전심 지켜줘 수호월천! - 수호월천 샤오린
2002년
Kanon - 미나세 나유키
2011년
장갑기병 보톰즈 - 수행승 A
극장판 애니메이션
1991년
드래곤 퀘스트 타이의 대모험(유메짱)
1994년
GS 미카미 (오키누)
1995년
마멀레이드 보이 - 코이시카와 미키
1999년
트윈비 PARADISE(마리카)
2000년
A・LI・CE(마리아〈SS1X〉)
게임
동급생 PCE&SS&동급생 마작 - 사쿠라기 마이
라이트닝 레전드 다이고의 모험 - 다이고 라이오
랑그릿사 2 - 리아나, 라나
뿌요뿌요 CD 通 - 트리오 더 반시
용기전승 - 뮤
은하아가씨전설 유나 - 대범한 시오리, 고귀한 사유카
프로젝트 크로스 존 2 : 브레이브 뉴 월드 - 우라시마 치즈루
프린세스 커넥트! - 아이카와 미사토
프린세스 커넥트! Re:Dive - 미사토
FIST - 바니 메이
Kanon - 미나세 나유키
L@VE ONCE - 타카나시 시오네
외부 링크
아오니 프로덕션 성우 정보
196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여자 가수
일본의 여자 성우
일본의 내레이션
킹레코드 (일본)의 아티스트
아오니 프로덕션
사이타마현 출신 | https://en.wikipedia.org/wiki/Mariko%20Kouda | Mariko Kouda | is a Japanese actress, voice actress, J-pop singer and radio personality. She graduated from Kasukabe Kyōei High School and went on to major in Communications at Tamagawa University in Machida City, Tokyo, graduating in 1990. Kouda has had at least one song appear on the program Minna no Uta.
She was a member of the J-pop voice acting group, Drops, until they disbanded. They were most well known for singing the ending theme to the anime Doki Doki School Hours although they did perform a couple of concerts one of which was released on DVD.
She works for the talent management firm Aoni Production. Her most notable roles include Okinu from Ghost Sweeper Mikami, Miki Koishikawa from Marmalade Boy and Shaorin from Mamotte Shugogetten.
Filmography
Television animation
Anime World Fairytales (Gretel)
Black Jack (Rei Asato)
Bobobo-bo Bo-bobo (Ruby, Denbo)
Chance Pop Session (Reika)
CLAMP School Detectives (Miyuki)
Crayon Shin-chan (Young Witch Marie)
Detective Academy Q (Mitsuru Hōshō)
Digimon Savers (Sayuri Daimon)
Doraemon (Yukari Aozora, Maho, girl)
Fortune Quest (Max)
Ghost Sweeper Mikami (Okinu)
Goldfish Warning! (Shuko)
Gun X Sword (Vivian)
HappinessCharge PreCure! (Queen Mirage)
Haunted Junction (Hanako Hasegawa)
Jibaku-kun (Kuinsheru)
Kaginado (Nayuki Minase)
Kamisama Kazoku (Fumiko Komori)
Kanon (Nayuki Minase)
Kemono Friends (Moose)
Kyōryū Bōkenki Jura Tripper (Ojō)
Mamotte Shugogetten (Shaorin)
Marmalade Boy (Miki Koishikawa)
Masamune-kun's Revenge (Momo)
Meiken Lassie (Priscilla)
Monster Farm (Holly)
Nintama Rantarō (Yuki)
Nyaruko: Crawling With Love (Luhy Distone)
One Piece (Kaya)
Panpaka Pants (Croli)
Pokémon (Sakura)
Princess Connect! Re:Dive (Misato)
Rosario + Vampire Capu2 (Mako Yakumaru)
Shūkan Storyland (Nami)
Smile PreCure! (Ikuyo Hoshizora)
The Wonderful Galaxy of Oz (Dorothy)
Tanoshii Willow Town (Annie)
Ultraman Kids: 30,000,000 Light Years in Search of Mother (Nōji)
Vampire Knight (Juri Kuran)
Welcome to Demon School! Iruma-kun Season 3 (Vepar)
Xenosaga (Febronia)
OVA
Denshin Mamotte Shugo Getten! (Shaorin)
Dirty Pair Flash (Yuri)
Dragon Half (Lufa)
Galaxy Fraulein Yuna (Shiori)
Gall Force Revolution (Catty Nebulart)
Gestalt (anime) (Suzu)
Harukaze Sentai V Force (Natsuki Aoi)
Hozuki's Coolheadedness (Toyotama-hime)
Idol Project (Mimu Emiruton)
Kanon (Nayuki Minase)
Maps (Hoshimi Kimizuka)
Miyuki-chan in Wonderland (Miyuki)
Ryūki Denshō (Myū)
Shonan Junai Gumi (Namiki Ibu)
Special Drama Fantasian na Nichijō (Madoka)
Spectral Force (Azerea)
The Super Dimension Fortress Macross II: Lovers, Again (Amy)
Tattoon Master (Nima)
Tekkaman Blade II (Yumi Francois)
Twinbee:Winpī no 1/8 Panic (Madoka)
Twinbee Paradise (Madoka)
Virgin Fleet (Ise Haruoshimi)
Theatrical animation
A·LI·CE (Maria)
Dragon Quest: Dai no Bōken (Gome)
Ghost Sweeper Mikami (Okinu)
Marmalade Boy (Miki Koishikawa)
Spring and Chaos (Toshi)
Video games
Aoi Namida (Mana Fujihara)
BS Zelda no Densetsu: Inishie no Sekiban (Princess Zelda)
Doki Doki Pretty League (Chiaki Nonohara)
Dōkyūsei (Yui Sakuragi)
Dragon Shadow Spell (Prinveil)
Dragon Knight III (Marie)
FIST (Masumi Dotsuki)
Free Talk Studio ~Mari no Kimama na O-Shaberi~ (Mari Kousaka, Natsumi Kawai)
Galaxy Fraulein Yuna series (Shiori)
Granblue Fantasy (Gabriel)
Hot Shots Golf (Nanako and Ayaka)
Kanon (Nayuki Minase)
Langrisser I & II (Liana, Lána)
Makeruna! Makendō 2 (Madonna)
Medarot NAVI (NAVI, Navi-Commun)
Megami Paradise II (Lilith)
Mitsumete Knight (Ann)
Otome-teki Koi Kakumei★Rabu Rebo!! (Natsumi)
Popful Mail (Mail (PC-Engine version))
Project X Zone 2 (Dr. Chizuru Urashima)
Puyo Puyo CD Tsu (Trio the Banshee)
Ryūki Denshō: Dragoon (Myū)
Super Real Mahjongg P IV (Aina)
Twinbee Paradise (Madoka)
Twinbee RPG (Madoka)
Xenosaga (Febronia)
Dubbing
Barbie as the Princess and the Pauper (Serafina)
Freaks and Geeks (Lindsay Weir)
Jawbreaker (Marcie Fox)
Stressed Eric (Maria Gonzalez, Various)
Live action
Eat & Run (Marie)
Looking For
Setsunai
Voice
Radio
Banana Hōsōkyoku Young Radio Grand Prix
Chikada Haruo no Lion Package Song
Doyō no Yoru Desu: Uha Uha Daihōsō Anime Street
Furumoto Shinnosuke no Parachute Yūgekitai
Kobayashi Yutaka no Super Gang Nouveau
Kouda Mariko no Come On Funky Lips!
Kouda Mariko no Doki Doki On Air
Kouda Mariko no Game Museum
Kouda Mariko no GM (part of OBC's V-Station)
Kouda Mariko no Nebusoku Radio: Yume ha Sora Iro
Kouda Mariko no Taisetsu ni Oboerumono no ga Issho nara Ii yo ne
Kore ga Sō na no ne, Koneko-chan
MBS Radio Ore-tachi Yattemāsu Getsuyōbi
Mō Sugu Ore-tachi xxx Yattemāsu
Nazo Nazo Dreamin'''Ore-tachi YattemāsuOre-tachi xxx YattemāsuOre-tachi xxx Yattemāsu NextShao & Taisuke no Kon'ya mo Sugo GettenTensai! Hayamimi Radio-kun: Kouda Mariko no Honjitsu mo Game SanmaiTwinbee ParadiseTwinbee Paradise 2Twinbee Paradise 3TV Game Radions RUha Uha Daihōsō Anime StreetUltra Mania BanzaiVoice of Wonderland Other CD Data FANet Artist Information: Kouda MarikoIdol on StageMinna no Uta: Ame nochi SpecialMusic JumpMusic Voice: Seiyū Idol DaishūgōSeishun Adventure: Majo-tachi no TasogareYūshoku Banzai CX Discography
Singles
Konami MusicBokura no Suteki (written by Masami Tozawa/ composed by Katsuki Maeda) / Harmony (composed by Miki Matsubara), 1994Mimikaki wo shiteiru to (written by Masami Tozawa/ composed by Toshio Kamei) / Dare no Sei demo nai Futari (written by Masami Tozawa/ composed by Miki Matsubara), 1995Watashi ga Tenshi dattara ii noni (written by Yoshiko Miura, Mariko Kouda/ composed by Miki Matsubara) / Machibuse (written/composed by Yumi Matsutōya), 1996Yume wa Hitori mirumono janai (composed by Miki Matsubara) / Owaranai Encore (composed by Akio Minami), 1996Egao de aishiteru (written/composed by Tomoko Tane) / Dore dake aisareru ka janakute (composed by Miki Matsubara),1997Kaze ga tomaranai (written/composed by Tomoko Tane) / Soba ni iru kara (written/composed by Mariko Kouda), 1997Ame nochi Special (composed by Miki Matsubara) / Iidasenakute (composed by Uni Inoue), 1997Looking For (composed by Marron Nagatsuki) / Ōzora no Achira e (composed by Tatsuya Nishiwaki), 1998Cobalt (composed by Hideshi Hachino) / Sha-La-La~Futari~ (composed by Miki Matsubara), 1998Taisetsu ni Omoerumono ga issho nara ii yone (composed by Marron Nagatsuki) / Ganbare! Rōnin (composed by Uni Inoue), 1998Matte imashita (written/composed by Tomoko Tane) / Taiyō de ikō! (composed by Kaori Okui), 1999
King Records
On King RecordsChikyū no Omoi~Hoshi no Omoi~ / Ame Agari no Asa ni / Setsuna.Clear / Nemuri no UmiHachimitsu / Sekaichū no Post / Natsu Iro no HanaHana / Machi ni Kesarenaimono / Hifumi yoJiyū na Tsubasa / Daisuki Nandamono!Kara no Te no Hira / Namida Kumo no Ue ni / Nichiyōbi no TaikutsuKimi ga Iru Sora / Yasashii TsukiKokoro no Yajirushi / Asa Iro no Wappen / Eki made no Michi woMonshirochō / Deatta Goro ni / Fukukaze no Naka deNiji ga Yonderu / Koi ha BōkenSabishigari ya no Koi / Wasurenai de~Forever We're Together~ / HenachokoSono Toki made / Spice / Boku no SeikatsuTa·ra·ra / Serial to Kiss / Haruka~To My Mother & Father on the Earth~Wish (as Shaorin)
DramaCD Drama: Eiyū Densetsu III: Shiroki Majo (Kurisu)Dengeki CD Bunko: Samurai Spirits (Nakoruru)Falcom Special Box '97 CD Drama: Eiyū Densetsu III vs. Brandish VT (Kurisu)Kishō Seireiki 1: Shūchū Gōu no Tsubishikata (Yumemi, Naiasu, Suhichimi, Ugaia)Kishō Seireiki 2: Tadashii Taifū no Okoshikata (Yumemi, Naiasu, Suhichimi, Ugaia)Kishō Seireiki 3: Shōryō-san to no Sugoshikata (Yumemi, Naiasu, Suhichimi, Ugaia)Popful Mail Paradise (Kachūsha)Popful Mail: The Next Generation (Kachūsha)TARAKO Pappara Paradise (Kachūsha)Tinkle Saver NOVA (Hayana Suzuna)Zelda no Densetsu Sound & Drama (Zelda)
AlbumsAitakuteB Side CollectionDaisuki na UtaHappy! Happy! Happy!Kiss (mini album)Kono Sora kara KikoeruMariko Kouda Concert Tour '95–'96: Owaranai EncoreMetronomeMy Best Friend (best album)My Best Friend 2 (best album)My Best Friend 3 (best album)Nande Datteba!?Neiro Enpitsu Jūni IroPurePure Energy (selection album)SoraTwinbee Vocal Paradise featuring Mariko Kouda (best album)Vitamin Punch!VividYatte MiyōOther albumsEru Sanku: Koiki na Kanajo-tachi (vol.1-5)GS Mikami Utsukushiki Dōbōsha (vol.1-5)Honki ni Shinai de / Itsuka May BeIdol Project Special CD (included in limited edition of game)Kimi ga Daisuki / Happy Birthday PresentKuchibiru ni PromiseMade in Heaven: Ai no BrideMelody: Dakishimete / StoryMinna Chikyū no Nakama-tachi: Pink no WaniMitsumete Knight Original Soundtrack (only includes Ann's game version of the song which is slightly different from the full version)Mitsumete Knight ~Vocalize~ (contains Ann's full version of her song)MomentSaigo no Yakusoku / Kyō no Owari niSeiyū Grand Prix Club Special '95 '96Sunday IslandTenshi no Sugao'' (OVA insert CD single)
References
External links
Mariko Kouda at the Seiyuu database
1969 births
Living people
Aoni Production voice actors
Japanese women singers
Japanese video game actresses
Japanese voice actresses
Singers from Saitama Prefecture
Voice actresses from Saitama Prefecture |
https://ko.wikipedia.org/wiki/%EC%B0%8C%EC%97%90%EC%9A%B0%20%EC%99%95%EC%A1%B0 | 찌에우 왕조 | 찌에우 왕조()는 베트남 사학가들이 주장하는 베트남 역사의 한 왕조이다. 베트남 사학가들은 찌에우다(조타)가 진나라 말 한나라 초에 영남 지역에 세운 정권을 베트남 역사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통치자 찌에우다의 성이 찌에우(趙)였으므로 베트남 역사에서 통치자의 성을 따서 왕조의 명칭을 붙이는 관례를 따라 이 왕조 역시 '찌에우 왕조'라고 지칭하였다.
기원전 207년, 찌에우다가 남해군(南海郡)의 태수(太守)가 되었는데, 이는 베트남 사학계에 따르면 찌에우 왕조가 세워진 연도가 된다. 이어 찌에우다는 진나라가 말기에 큰 혼란이 벌어진 틈을 타 영남 지역에서 할거하였고, 기원전 204년에 스스로 남월왕(南越王)이라고 칭하고 남월국(南越國)을 세웠다. 기원전 111년, 한 무제가 병사를 보내 남월국을 멸망시켰는데, 전통적인 베트남 사학계의 관점에 따르면 이 해는 찌에우 왕조가 종결된 해이며 이때부터 베트남은 제1차 중국의 베트남 지배 시기에 진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남월국이 중국인에 의해 세워져 지방에서 할거한 정권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베트남인들이 제시한 '찌에우 왕조'라는 표현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찌에우 왕조가 베트남 역사상 정통 왕조인지 아닌지는 베트남 사학계에도 논쟁의 대상이며, 이는 찌에우 왕조 정통성 문제로 비화되었다.
베트남 역사상 찌에우 왕조의 영토에 대한 주장
쩐 왕조 시기에 완성된 《대월사기(大越史記)》는 찌에우 왕조를 베트남의 왕조로 분류한 현존하는 가장 이른 베트남의 관찬 사서로, 남월국의 여러 왕의 본기(本紀)를 「조기(趙紀)」로 칭하고 있다. 레반흐우는 해당 책에서 "찌에우 무제(趙武帝)는 능히 우리 월(越)을 개척하였으며, 그 나라에서 황제가 된 이래로... 우리 월을 위하여 제왕의 기업을 창시하였다."라고 평가함으로써 찌에우 왕조의 흥망이 베트남의 국통(國統)과 시시각각 상관이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동시기의 《월사략》에도 역시 「조기(趙紀)」가 존재한다. 《안남지략(安南志略)》은 찌에우 왕조의 역사를 「조씨세가(趙氏世家)」로 분류하였는데, 딘 왕조, 전 레 왕조, 리 왕조, 쩐 왕조의 「정씨세가(丁氏世家)」, 「여씨세가(黎氏世家)」, 「이씨세가(李氏世家)」, 「진씨세가(陳氏世家)」와 함께 베트남 역대 왕조로 분류한 것이다.
이후 후 레 왕조의 응오시리엔은 《대월사기전서》를 편수할 때 역시 찌에우 왕조를 「조씨기(趙氏紀)」로 분류하였다. 응오시리엔은 "조씨(趙氏)가 한번 그 나라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나라는 망하고 국통은 끊어졌다."라고 평가하여 레반흐우와 관점이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찌에우 왕조의 영토는 베트남인들에게 옛 강역을 장기적으로 상실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청나라가 입관한 뒤 명나라의 잔여세력은 중국의 남쪽 지역을 지키면서 청나라의 침공에 대항하였다. 1646년, 중국의 정국이 더욱 불온해지자 광서(廣西) 지역 변경의 토사(土司)들이 후 레 왕조, 막 왕조의 보호를 구하였다. 용주(龍州)의 토사 조유경(趙有涇)이 그의 족형(族兄) 조유도(趙有濤)에게 살해되자 조유경의 아들 조유계(趙有啓)는 후 레 왕조에 도움을 구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찐 주의 찐짱은 즉시 병사를 내어 북벌하여 조유도 및 그의 가속을 사로잡아 돌아온 뒤 '화목(和睦)으로써 깨우치고, 본주(本州)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같은 해 여름, 남명의 융무제가 청나라에게 사로잡히자 영력제는 광동(廣東) 조경(肇慶)에서 즉위하였다. 찐짱은 병사를 보내 광동을 병탄할 것을 계획하였다. 1647년 여름, 찐짱은 전선 3백 척을 바로 염주부(廉州府)로 파견하였으나, 청나라가 방비를 하고 있음을 보고 철군하였다.
떠이선 왕조 시기에 이르러 응우옌후에는 청나라의 침공을 격퇴한 뒤 비록 청나라에 화평을 구하는 동시에 청나라의 번속(藩屬)이 되겠다고 했으나, 청나라에 보복할 것을 도모하였다. 응우옌후에는 적극적으로 징병하고 사졸을 훈련시켰고, 또한 화남해적을 초유하고 찬조하여 그들로 하여금 베트남 연해에 거점을 설립하도록 해주는 동시에 끊임없이 중국 화남(華南) 연해 일대에서 소요를 일으키도록 했다. 그리고 광서(廣西)의 천지회(天地會)의 봉기를 지지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의 학자 다이앤 H. 머레이(Dian H. Murray)는 응우옌후에는 화남 지역을 정복하여 역사상에 존재한 백월왕국(百越王國)의 회복을 희망했다고 고증하였다.
응우옌후에는 거대한 전선을 건조하여 베트남이 전투 시에 사용하는 큰 코끼리를 광주(廣州)로 운반하고자 하였다. 1792년, 응우옌후에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해 응우옌찌에우비엔(阮招遠)을 청나라로 파견해 화친을 요청하는 동시에 청나라가 양광(兩廣)의 땅을 할양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를 명분으로 전쟁의 실마리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갑자기 병이 나서 사망하여 사신단이 청나라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고, 이로 인해 청나라는 그 사안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응우옌 왕조 시기에 이르러 베트남인들은 여전히 찌에우 왕조가 통치했던 양광 지역이 베트남 역사상 상실한 옛 강역이라고 간주하였다. 《대남실록(大南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민망 5년(1824년) 겨울 11월, 승천부(承天府)의 안로(安魯) 사람 응우옌쑤언쩐(阮春振)이 민망 황제의 가마를 막고 상서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양광의 땅으로 나아가 취할 것을 요청하였다. 민망 황제는 그 상서문을 불태우고 응우옌쑤언쩐을 승천부로 보내 1개월 동안 칼을 씌워 대중에게 보이도록 한 뒤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동시에 민망 황제는 광망히 임금에게 고하는 것을 불허하며, 따르지 않을 경우 율에 따라 죄를 다스리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와 동시에 여전히 조정 측에서는 찌에우 왕조를 베트남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간주하였다.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에는 뜨득 황제가 해당 책을 어람한 뒤 주필로 비평하기를 "전후의 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면 우리 월(越)의 땅이 중국에 떨어진 것이 이미 태반이나 된다. 안타깝게도 역대의 명군과 양신이 또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자가 많아 끝내 촌토를 회복할 수 없었으니 크게 한스러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것으로 회복하는 것이 어려우니, 슬프다!"라고 하였다. 이는 응우옌 왕조 시기의 조정의 논점이 여전히 양광의 땅을 베트남 역사상 찌에우 왕조의 옛 강역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쩐쫑낌은 《월남사략(越南史略)》을 집필할 때 남월국을 찌에우 왕조로 지칭하였고, 찌에우 왕조가 멸망한 뒤 바로 중국의 지배 시기를 맞았다고 하였다.
각주
참고 문헌
남월
베트남의 옛 나라 | https://en.wikipedia.org/wiki/Tri%E1%BB%87u%20dynasty | Triệu dynasty | The Triệu dynasty or Zhao dynasty (; ; 茹趙) ruled the kingdom of Nanyue, which consisted of parts of southern China as well as northern Vietnam. Its capital was Panyu, in modern Guangzhou. The founder of the dynasty, Zhao Tuo (Triệu Đà), was a Chinese general from Hebei and originally served as a military governor under the Qin dynasty. He asserted the state's independence in 207 BC as the Qin dynasty was collapsing. The ruling elite included both native Yue and immigrant Han peoples. Zhao Tuo conquered the Vietnamese state of Âu Lạc and led a coalition of Yuè states in a war against the Han dynasty, which had been expanding southward. Subsequent rulers were less successful in asserting their independence and the Han dynasty finally conquered the kingdom in 111 BC.
Historiography
The scholar Huang Zuo produced the first detailed published history of Nanyue in the fifteenth century. Chinese historians have generally denounced Nanyue as separatists from the Han dynasty (206 BC – 220 AD), but have also praised them as a civilizing force. A particularly strident denunciation was produced by poet Qu Dajun in 1696. Qu praised Qin Shi Huang as a model of how to uphold the purity of Chinese culture, and compared Zhao Tuo unfavorably to the emperor. A more positive view of Nanyue multiculturalism was presented by Liang Tingnan in Nányuè Wŭ Zhǔ Zhuàn (南越五主傳; "Biographies of the Five Lords of Nanyue") in 1833. Cantonese refer to themselves as Yuht, the Cantonese pronunciation of Yuè/Việt. In modern times, the character (yuè) refers to Cantonese while (yuè) refers to Vietnamese. But historically, these two characters were interchangeable.
Meanwhile, Vietnamese historians have struggled with the issue of whether to regard the Triệu dynasty heroically as founders of Vietnam, or to denounce them as foreign invaders. For centuries afterward, Zhao Tuo was a folk hero among the Viets, and was remembered for standing up to the Han Empire. After Lý Bí drove the Chinese out of northern Vietnam, he proclaimed himself "Emperor of Nam Việt" (Nam Việt đế; 南越帝) in 544, thus identifying his state as a revival of the Nanyue, despite obvious differences in terms of location and ethnic makeup. In the thirteenth century, Lê Văn Hưu wrote a history of Vietnam that used the Triệu dynasty as its starting point, with Zhao Tuo receiving glowing praise as Vietnam's first emperor. In the 18th century, Ngô Thì Sĩ reevaluated Zhao Tuo as a foreign invader. Under the Nguyễn dynasty, Zhao Tuo continued to receive high praise, although it was acknowledged that the original Nanyue was not in fact a Vietnamese state. The current Communist government of Vietnam portrays Zhao Tuo negatively as a foreign invader who vanquished Vietnam's heroic King An Dương despite there being a campaign to reconsider the role of Zhao Tuo due to rising tensions between Vietnam and China. Modern Vietnamese are descended from the ancient Yue of northern Vietnam and western Guangdong, according to Peter Bellwood.
History
Zhao Tuo
Zhao Tuo (r. 204–136 BC), also called Triệu Đà, the founder of the dynasty, was an ethnic Chinese born in the State of Zhao, now Hebei province. He became military governor of Nanhai (now Guangdong) upon the death of Governor Ren Xiao in 208 BC, just as the Qin dynasty was collapsing. The Qin governor of Canton advised Zhao to found his own independent kingdom since the area was remote and there were many Chinese settlers in the area. He asserted Nanhai's independence declared himself the king of Nam Việt in 204 BC, established in the area of Lingnan, the modern provinces of comprises Guangdong, Guangxi, south Hunan, south Jiangxi and other nearby areas. He ruled Nanyue and committed acts of defiance against Emperor Gaozu of Han and he severed all ties with the Han dynasty, killed many Han employees appointed by the central government and favored local customs. Being a talented general and cunning diplomat, he sought a peaceful relationship with both the Qin dynasty and the succeeding Han dynasty.
In 196 BC, the Emperor Gaozu of Han sent the scholar Lu Jia to the court of Zhao Tuo. On this occasion, Zhao Tuo squatted and wore his hair in a bun, in the Yuè manner.
"You are a Chinese and your forefathers and kin lie buried in Zhending in the land of Zhao", Lu told the king. "Yet now you turn against that nature which heaven has given you at birth, cast aside the dress of your native land and, with this tiny, far-off land of Yue, think to set yourself up as a rival to the Son of Heaven and an enemy state....It is proper under such circumstances that you should advance as far as the suburbs to greet me and bow to the north and refer to yourself as a 'subject'." After Lu threatened a Han military attack on Nanyue, Zhao Tuo stood up and apologized. Lu stayed at Panyu for several months and Zhao Tuo delighted in his company. "There is no one in all Yue worth talking to", said the king, "Now that you have come, everyday I hear something I have never heard before!" Lu recognized Zhao Tuo as "King of Yue". An agreement was reached that allowed legal trade between the Han dynasty and Nanyue, as the people of Nanyue were anxious to purchase iron vessels from the Han dynasty. When Lu returned to Chang'an, the Emperor Gaozu of Han was much pleased by this result.
Lü Zhi, the Han empress dowager, banned trade with Nanyue in 185 BC. "Emperor Gaozu set me up as a feudal lord and sent his envoy giving me permission to carry on trade," said Zhao Tuo. "But now Empress Lü...[is] treating me like one of the barbarians and breaking off our trade in iron vessels and goods." Zhao Tuo responded by declaring himself an emperor and by attacking some border towns. His imperial status was recognized by the Minyue, Western Ou (Âu Việt), and the Luolou. The army sent against Nanyue by Empress Lü was ravaged by a cholera epidemic. When Zhao Tuo was reconciled with the Han Empire in 180 BC, he sent a message to the Emperor Wu of Han in which he described himself as, "Your aged subject Tuo, a barbarian chief". Zhao Tuo agreed to recognize the Han ruler as the only emperor.
Peace meant that Nanyue lost its imperial authority over the other Yue states. Its earlier empire had not been based on supremacy, but was instead a framework for a wartime military alliance opposed to the Han. The army Zhao Tuo had created to oppose the Han was now available to deploy against the Âu Lạc kingdom in modern-day northern Vietnam. This kingdom was conquered in 179–180 BC. Zhao Tuo divided his kingdom into two regions: Cửu Chân and Giao Chỉ. Giao Chỉ now encompasses most of northern Vietnam. He allowed each region to have representatives to the central government, thus his administration was quite relaxed and had a feeling of being decentralized. However, he remained in control. By the time Zhao Tuo died in 136 BC, he had ruled for more than 70 years and outlived his sons.
In modern Vietnam, Zhao Tuo is best remembered as a character in the "Legend of the Magic Crossbow". According to this legend, Zhao Tuo's son Trong Thủy married Mỵ Châu, the daughter of King An Dương of Âu Lạc, and used her love to steal the secret of An Dương's magic crossbow.
Zhao Mo
Zhao Tuo died in 136 BC and was succeeded by his grandson Zhao Mo (; ). He was 71 years old at the time of ascending to the throne. In 135 BC, the Minyue attacked and Zhao Mo requested the assistance of the Han Empire. The Emperor Wu of Han offered to "help" by sending his army, ostensibly to suppress the assist Nanyue, but with an eye of seizing the country should an occasion arise. Crown Prince Zhao Yingqi was sent to live and study in the Han court. Zhao Mo took this as a gesture of goodwill by the Emperor Wu of Han, whom he viewed as a brother, to strengthen the relationship between Han and Nanyue. Zhao Mo died in 124 BC. His mausoleum was found in Guangzhou in 1983.
Zhao Yingqi
Zhao Yingqi (, , r. 124–112 BC) was the crown prince when his father, Zhao Mo, died. Zhao Yingqi's appointment to kingship was a conciliatory measure to the Han emperor in Chang'an as a sign of respect. This crowned prince, Zhao Yingqi, lived most of his life in the Han dynasty where he had fathered a son by an ethnic Chinese woman surnamed Jiu (); In one popular theory, she was Emperor Wu's own daughter. He named the son Zhao Xing. Only when his father, Zhao Mo, died did Zhao Yingqi receive permission to go home for his father's funeral. This happened in 124 BC. Zhao Yingqi then ascended the throne of Nanyue. Not much is known about Zhao Yingqi's reign, probably because it is a short one and he was subservient to the Han emperor. His son, Zhao Xing, was only about 6 years old when he died. Owing to Zhao Xing's extreme youth, his mother Lady Jiu, became the Empress Dowager.
Zhao Yingqi's death precipitated the events that would lead to the seizure and domination of Nanyue by the Han forces.
Zhao Xing
Zhao Xing (r. 113–112 BC), also called Triệu Hưng, was just 6 years old when he ascended the throne. Soon thereafter, Emperor Wu of Han summoned him and his mother, Lady Jiu, to an audience to pay homage in the Han court. The Han dynasty held Lady Jiu and Zhao Xing under the pretext that the young king needed their protection. By acquiescing to this gesture, both the empress dowager and the young emperor gave the public the impression that they were just puppets in the hands of the Han court.
With Zhao Xing in their hands and the queen dowager beheaded, the Han dynasty prepared their army for an invasion. In 112 BC, the emperor sent two of his commanders, Lu Bode and , along with 5,000 of his best soldiers to invade Nanyue.
Zhao Jiande
Nanyue's senior prime minister, Quan Thai-pho, Lü Jia sent out the army to meet the Han at the border to repel the invasion. The army was strong, but smaller in number. Meanwhile, inside the country, the word has spread that Zhao Xing was in the hand of the Han dynasty. The Nanyue feared that if they resist, their king would be harmed by the Han dynasty. The country was now in a state of chaos. When the Han kept sending more and more reinforcements for his army at the border, the Nanyue's army was unable to hold their position. Lü Jia saw that Nanyue must have a new king in order to calm its people and to stir up Nanyue patriotism to fight. Zhao Jiande (also called Triệu Kiến Đức), Zhao Yingqi's eldest son from one of his concubines, took the burden of leading his people to war.
Decline of the dynasty
Emperor Wu of Han dispatched soldiers against Nanyue. With its king being too young and inexperienced and leading an untrained, however brave army, Nanyue was only able to keep their stronghold for a while. Han crushed the Nanyue army along with Lü Jia and his King (Zhao Jiande), both resisted until the end. Based on many temples of Lü Jia, his wives and soldiers scattering in Red River Delta of modern-day northern Vietnam, the war might last until 98 BC.
After the fall of Panyu, Tây Vu Vương (the captain of Tây Vu area of which the center is Cổ Loa) revolted against the First Chinese domination from Western Han dynasty. He was killed by his assistant Hoàng Đồng (黄同).
Afterwards, Nanyue territory was divided into nine districts and incorporated into the Han dynasty as the prefecture of Jiaozhi (Giao Chỉ). Han dynasty would dominate Jiaozhi until the revolt of the Trưng Sisters, who led a revolt in AD 40.
List of monarchs
Nanyue culture
There was a fusion of the Han and Yue cultures in significant ways, as shown by the artifacts unearthed by archaeologists from the tomb of Nanyue in Guangzhou. The Nanyue tomb in Guangzhou is extremely rich. There are quite a number of bronzes that show cultural influences from the Han, Chu, Yue and Ordos regions.
Gallery
See also
An Dương Vương
Âu Lạc
Baiyue
Changsha Kingdom
Dong Son culture
Emperor Wu of Han
Han conquest of Nanyue
Lü Jia (Nanyue)
Minyue
Museum of the Mausoleum of the Nanyue King
Nanyue
Panyu District
Tây Vu Vương
Yelang
Zhao Tuo
Citations
References
Taylor, Keith Weller. (1983). The Birth of Vietnam (illustrated, reprint e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Retrieved 7 August 2013.
Viet Nam Su Luoc by Trần Trọng Kim
Viet Su Toan Thu by Pham Van Son
History of Guangzhou
Ancient Vietnam
States and territories established in the 3rd century BC
207 BC
200s BC establishments
Nanyue
111 BC
States and territories disestablished in the 2nd century BC
2nd-century BC disestablishments
1st-millennium BC disestablishments in Vietnam |
https://ko.wikipedia.org/wiki/Yeezus | Yeezus | Yeezus는 2013년 6월 18일 데프 잼 레코딩스에서 발매된 미국의 래퍼, 프로듀서 카니예 웨스트의 6번째 정규 음반이다. 웨스트의 절친한 프로듀서인 마이크 딘을 포함해 다프트 펑크, 노아 골드스테인, 아르카, 허드슨 모호크, 트래비스 스콧 등의 프로듀서진들이 참여했으며, 저스틴 버논, 치프 키프, 키드 커디, 어쌔신,킹 루이, 찰리 윌슨, 프랭크 오션 등의 음악가가 피처링진으로 참여했다. 발매 15일 전 웨스트는 릭 루빈에게 찾아가 더욱 미니멀리즘한 사운드를 얻기 위해 사운드를 벗겨냈다고 한다.
Yeezus는 카니예 웨스트의 작품 중 가장 실험적이고 사운드 디자인에 신경쓴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음반은 인더스트리얼 음악, 애시드 하우스, 일렉트로, 펑크, 드릴 음악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있으며, Blood on the Leaves 트랙에서는 니나 시몬의 1965년 노래 Strange Fruit을 카니예 웨스트 특유의 샘플링 방식을 사용하면서 기존의 방식 역시 채택한 작품이다. 또한 이 음반은 별 다른 음반 커버 없이 CD를 쥬얼 케이스에 담고 빨간색 테이프와 샘플 크레딧이 적힌 문구만이 담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음반은 Black Skinhead와 Bound 2 총 두개의 싱글을 발매했다.
이 음반은 매체의 호평을 받았으며, 몇몇 전문지에서는 당시 년도 최고의 작품으로 손 꼽기도 하였다. 또한 이 음반은 첫 주 327,000장을 판매하면서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역시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이 음반은 56회 그래미 어워드에도 최우수 랩 음반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으나, 매클모어 & 라이언 루이스의 The Heist에 밀려 수상하지는 못했다.
수록곡
Notes
signifies a co-producer
signifies an additional producer
"I Am a God" credits God as a featured artist and features additional vocals by Justin Vernon
"New Slaves" features additional vocals by Frank Ocean
"Hold My Liquor" features vocals by Chief Keef and Justin Vernon
"I'm In It" features vocals by Justin Vernon and Assassin
"Guilt Trip" features uncredited vocals by Kid Cudi
"Send it Up" features vocals by King L
"Bound 2" features additional vocals by Charlie Wilson
샘플 크래딧
"On Sight" contains an interpolation of "Sermon (He'll Give Us What We Really Need)", written by Keith Carter, Sr.
"I Am a God" contains samples of "Forward Inna Dem Clothes", written by Clifton Bailey III and H. Hart, performed by Capleton; and samples of "Are Zindagi Hai Khel", written by Anand Bakshi and Rahul Burman, performed by Burman, Manna Dey and Asha Bhosle.
"New Slaves" contains samples of "Gyöngyhajú lány", written by Gábor Presser and Anna Adamis, performed by Omega.
"I'm In It" contains samples of "Lately", written by Vidal Davis, Carvin Haggins, Andre Harris, Kenny Lattimore and Jill Scott, performed by Lattimore.
"Blood on the Leaves" contains a sample of "Strange Fruit", written by |Lewis Allan, performed by Nina Simone
"Guilt Trip" contains interpolations of "Chief Rocka", written by Keith Elam, Kevin Hansford, Dupre Kelly, Christopher Martin, Alterick Wardrick and Marlon Williams, performed by Lords of the Underground; and a sample of "Blocka (Ackeejuice Rockers Remix)", written by Terrence Thornton and Tyree Pittman, performed by Pusha T featuring Travis Scott and [Popcaan.
"Send It Up" contains a sample of "Memories", written by Anthony Moses Davis, Collin York and Lowell Dunbar, performed by Beenie Man.
"Bound 2" contains interpolations of "Aeroplane (Reprise)", written by Norman Whiteside, performed by Wee; samples of "Bound", written by Bobby Massey and Robert Dukes, performed by Ponderosa Twins Plus One; a sample of "Sweet Nothin's", written by Ronnie Self, performed by Brenda Lee.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2013년 음반
카니예 웨스트의 음반
영어 음반
힙합 음반
미국의 1위 음반
데프잼 레코드 음반
카니예 웨스트가 프로듀싱한 음반 | https://en.wikipedia.org/wiki/Yeezus | Yeezus | Yeezus is the sixth studio album by American rapper and producer Kanye West. It was released on June 18, 2013, through Def Jam Recordings and Roc-A-Fella Records. West gathered a number of artists and close collaborators for the production, including Mike Dean, Daft Punk, Noah Goldstein, Arca, Hudson Mohawke, and Travis Scott. The album also features guest vocals from Justin Vernon, Chief Keef, Kid Cudi, Assassin, King L, Charlie Wilson, and Frank Ocean.
Fifteen days before its release date, West enlisted the help of producer Rick Rubin to strip down the sound of Yeezus in favor of a more minimalist approach. The album has been characterized as West's most experimental and sonically abrasive work. It draws from an array of genres, including industrial, acid house, electro, punk, and Chicago drill. West's unconventional use of samples is also contained, as on "Blood on the Leaves", which contains a sample from Nina Simone's 1965 rendition of "Strange Fruit".
The physical CD edition was released in a clear jewel box with only a strip of red tape and sample credits. Initial promotion included worldwide video projections of the music and live television performances. West released two singles from the album; "Black Skinhead" in July 2013 and "Bound 2" the following month. The release of Yeezus coincided with that of rapper J. Cole's album Born Sinner, which was moved back a week to coincide with Yeezus release, leading to speculation about which release would sell more copies.
Yeezus received widespread acclaim from critics, many of whom named it among West's best work and commended its brash direction, though public response was divided. The album was nominated for Best Rap Album at the 2014 Grammy Awards. The album debuted at number one on the US Billboard 200, selling 327,000 copies in the first week of release, while also topping the charts in Australia, Canada, Denmark, New Zealand, Russia and the United Kingdom. It has since been certified double platinum by the 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 (RIAA), and was named by several publications as one of the best albums of the 2010s, including Rolling Stone, who later included it at 269 on its 2020 list of the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
Background
Following the release of his fifth studio album,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2010), Kanye West collaborated with longtime friend Jay-Z on Watch the Throne (2011). In July 2012, producer No I.D. revealed that he had been working on West's sixth solo studio album (and seventh overall) and that it would be released after Cruel Summer (2012), a collaborative compilation album between members of West's record label GOOD Music. For Yeezus, West enlisted several collaborators, including Kid Cudi, Charlie Wilson, S1, The Heatmakerz, Mike Dean, Hudson Mohawke, Skrillex, Young Chop, Chief Keef, Frank Ocean, Odd Future, Travis Scott, The-Dream, Cyhi the Prynce, Malik Yusef, King L, John Legend, James Blake, RZA, Mase, and Pusha T. The album features additional vocals by Justin Vernon, Frank Ocean, Kid Cudi, Chief Keef, King L, Assassin, and Charlie Wilson.
West was influenced primarily by minimalist design and architecture during the production of Yeezus, and visited a furniture exhibit in the Louvre five times. A single Le Corbusier lamp was his "greatest inspiration". West worked closely with the architect Oana Stănescu, and took "field trips" to Le Corbusier homes. Fascinated by Stănescu's comments on the unusual and radical nature of Corbusier design choices, West applied the situation to his own life, feeling that "visionaries can be misunderstood by their unenlightened peers". West also met with architect Joseph Dirand and Belgian interior designer Axel Vervoordt, and had "rare Le Corbusier lamps, Pierre Jeanneret chairs and obscure body-art journals from Switzerland" delivered to the loft. West also wanted a deep hometown influence on the album, and listened to 1980s house music most associated with his home city of Chicago for influence. Alejandro Jodorowsky's The Holy Mountain was also an inspiration for the album and its ensuing tour. The album was originally titled Thank God for Drugs.
Recording and production
In 2012, West began recording his sixth studio album with collaborators, including No I.D. and DJ Khaled. The first recordings were held in January 2013, in the living room of his personal loft at a Paris hotel, referred to in the album's credits as the "No Name Hotel". West kept compositions simple in order to hear the tracks more clearly; too much bass or complexity would simply overpower the room's poor acoustics. The beats emanating from the loft space, which sometimes lasted through the night, provoked complaints from neighbors. Reports emerged that he and his then-girlfriend Kim Kardashian had moved to the loft in order for West to begin work on the album.
The atmosphere in the studio was described by contributor Evian Christ as "very focused", and West once again brought in several close collaborators. Producer Hudson Mohawke noted the inclusive "group" atmosphere of the sessions, in which multiple contributors would work on similar pieces, with different elements ultimately selected from each. All involved were given a song to work on and return the next day to sit and critique, a process Anthony Kilhoffer compared to an art class. Producer Arca described being initially asked to send West music, noting that she purposefully sent perhaps the strangest stuff she had, with West happening to be excited by it. Describing West's collaborative style, Arca stated: It was a lot of coming up with design, like solving riddles. If the song called for something aggressive, it was up to three or four people to design what in their head was the best solution for that aggression in that moment. Everyone would approach it in completely different ways, and ultimately, it would all be edited by Kanye himself.
Determined to "undermine the commercial", several tracks were left off the finished product that were deemed too melodic or more in line with West's previous material. West set parameters regarding sound and style, insisting that there be no "bass wobbles" reminiscent of dubstep. The album's recording process was described as "very raw" by Thomas Bangalter of the French electronic duo Daft Punk, who produced four songs for the album, adding that West was "rapping – kind of screaming primally, actually". While previous albums, particularly Dark Fantasy, took considerable time in the studio, Yeezus was described by Kilhoffer as "the fastest record we ever made". In May 2013, Def Jam executives listened to the "final product", (only later to be changed) describing the album as "dark". American musician Travis Scott opined that the snippets he'd heard of Yeezus were from the year 3000 and recalled "crazy memories" from being around West during the recording of it.
W writer Christopher Bagley reports that West's creative process often bordered on perfectionist. In March 2013, West described the album to Bagley as near completion, only to revise this statement one month later to the album being "only 30 percent complete". West made several last-minute alterations to Yeezus, enlisting the co-founder of Def Jam Recordings, Rick Rubin, as an executive producer for additional recording mere days before its release; changes included re-recording whole songs and rewriting entire verses. The rough cut West played Rubin ran nearly three and a half hours long. West's orders to Rubin were to take the music in a "stripped-down minimal direction", often removing elements already recorded. In a September 2013 interview with radio DJ Zane Lowe, West said of Rubin that "he's not a producer, he's a reducer".
For several days in late May and early June 2013, West and a "rotating group of intimates, collaborators and hangers-on" holed up at Rubin's Shangri-La studio in Malibu in service of completing the record. Rubin thought it impossible to meet the deadline and all involved ended up working long hours with no days off in order to complete the record. West had intended the album be 16 tracks until Rubin suggested cutting the album down to fewer tracks, from 16 songs to 10, saying the others could be reserved for a follow-up. Rubin gave as example "Bound", which was "a more middle of the road R&B song, done in an adult contemporary style" before West decided to replace the musical backing with a minimalistic sample, "a single note bassline in the hook which we processed to have a punk edge in the Suicide tradition". Two days before the album had to be delivered to the label, West wrote and sang the lyrics to two songs while also recording the vocals to three others in just two hours.
Music and composition
According to Chicago Tribune critic Greg Kot, Yeezus is a "hostile, abrasive and intentionally off-putting" album that combines "the worlds of" 1980s Chicago acid-house, 2013 Chicago drill music, 1990s industrial music, and the "avant-rap" of Saul Williams, Death Grips, and Odd Future. The Independent, Mass Appeal, and The Village Voice described it as an experimental release, while Meagan Garvey of The Outline described it as West's "industrial album". Rolling Stone described it as "an extravagantly abrasive album full of grinding electro, pummeling minimalist hip-hop, drone-y wooz and industrial gear-grind", while Vulture called it a "punk rap opus", and Rolling Stone called it an "industrial-rap opus". Slant Magazine critic Ted Scheinman described the album as "built on alien, angular beats, slowly morphing drones and sirens, abrupt periods of silence, and a pulse-quickening style of delivery from Yeezy himself", writing that West reconceives the "notion of what kind of music (or noise) can underpin hip-hop". According to Charles Aaron of Spin, Yeezus is "a hip hop album, not a rap album", because of how its sounds and subject matter are assembled together, and although listeners can hear "'punk' or 'post-punk' or industrial'" throughout, "hip-hop has always been about noise and dissonance and dance music as agitation". The album also incorporates elements of industrial and trap music. The record "most closely resembles" 1990s industrial rock, during which the genre had a significant pop culture impact, with artists such as Nine Inch Nails, Ministry, and Marilyn Manson gaining success. The industrial scene created a "vast global underground community", and Esquire notes that one of its epicenters was in Chicago, where West was raised. Evan Rytlewski of The A.V. Club characterized its opening series of songs as electro and industrial hip hop.
Referencing the sound of Yeezus in September 2013, West stated: "For me as Kanye West, I got to fuck shit up... I'm going to take music and try to make it three dimensional... I'm not here to make easy listening, easily programmable music". At the same time, he viewed himself as artistically being "here to crack the pavement and break new ground, sonically". West would later go onto describe the sound of the album as "a protest to music". West elaborated, claiming that he "was like 'I'm gonna take my ball and go home'".
Yeezus is primarily electronic in nature, and boasts distorted drum machines and synthesizers that sound like they're malfunctioning, low-resolution samplers that add a pixelated digital aura to the most analog sounds. To this end, the album incorporates glitches reminiscent of CD skips or corrupted MP3's, and Auto-Tuned vocals are modulated to a point in which they are difficult to decipher. Esquire cites "On Sight" as an early example of the album's connection to electronic music, citing its "droning synthesizer tone", which is "modulated until the signal starts throwing off harshly treble-heavy spikes and begins to clip, as if it were overloading a digital audio processor".
Yeezus continues West's practice of eclectic samples: he employs an obscure Hindi sample on "I Am a God", and a sample of 1970s Hungarian rock group Omega on "New Slaves". "On Sight" interpolates a melody from "Sermon (He'll Give Us What We Really Need)" by the Holy Name of Mary Choral Family, although the track originally sampled an old vocal track from the original recording. "Bound 2" features heavy soul music samples and has been described as the only song on Yeezus which recalls the sound of West's early work. "Bound", a 1971 song by American soul group Ponderosa Twins Plus One from their album 2 + 2 + 1 = Ponderosa Twins Plus One, serves as the primary sample used in West's track.
The album's second track "Black Skinhead" has alternately been called an industrial hip hop song and "a galloping punk-rap manifesto". "I Am a God" was inspired by a "diss" from a major fashion designer, who informed West of his invitation to a widely anticipated runway show on the condition he agree to not attend other shows. "I'm in It" began with a different sample and melody, but West removed the sample and Rubin edited the track down from a six-minute arrangement. "Blood on the Leaves", which samples Nina Simone's 1965 rendition of "Strange Fruit" and was the first track in the first incarnation of the track list, is an example of West's signature dichotomy in which he melds the sacred and profane. "Strange Fruit", first recorded by Billie Holiday in 1939, brought the lynchings of black Americans to a "startling poignancy", creating "one of the most towering, important songs of the 20th century". West's anthemic re-telling instead details an MDMA-fueled hookup and the perils of fame.
Promotion and release
On May 1, 2013, West used Twitter to post a single message reading "June Eighteen", leading several media outlets to speculate that the post referred to the release date of West's upcoming album. On May 17, he began promotion of the album by unveiling the previously unreleased song "New Slaves" through video projections in 66 assorted locations. The following day, West appeared on the American late-night live television sketch comedy show Saturday Night Live and performed the songs "New Slaves" and "Black Skinhead". West subsequently revealed the album's cover and title, Yeezus, on his official website. Fellow rapper Kendrick Lamar offered his opinion on the title in an interview that same month, stating: "That's crazy, I want to hear that. That's that creative Kanye genius stuff out the box". He also claimed that the album's "whole marketing scheme is crazy" and "very inspiring". The iTunes Store made Yeezus available for pre-order on May 20, but the listing was subsequently taken down for unknown reasons. On May 29, A.P.C. founder Jean Touitou unveiled an advertisement for Yeezus which stated that the album would not be available for pre-order. Speaking about the album's minimal promotion, West stated: "With this album, we ain't drop no single to radio. We ain't got no NBA campaign, nothing like that. Shit, we ain't even got no cover. We just made some real music".
In May 2013, American rapper J. Cole called West "one of the greatest artists of our generation" via Twitter, with him following this by tweeting: "Which is exactly why I'm moving my release date up. Born Sinner June 18th". He explained releasing his second studio album Born Sinner on the same day as Yeezus during an interview that same month, saying: "I'm not going to sit [here]... I worked too hard to come a week later after Kanye West drops an amazing album. It'd be like, 'Oh and J.Cole dropped too, a week later.' Nah. I'm going to go see him on that date. He's the greatest". The next month, J. Cole gave further context, claiming for the coinciding release to be "more about the statement" than the sales. J. Cole elaborated on this, admitting that the music being competed over "is art" and he "can't compete against the Kanye West celebrity and the status that he's earned just from being a genius", though stated: "But I can put my name in the hat and tell you that I think my album is great and you be the judge and you decide". A lyrical reference to releasing on the same date as West is included in the track "Forbidden Fruit" from Born Sinner.
The physical CD edition of Yeezus was released in a clear jewel box with no album artwork, reflecting the minimalist tone. The packaging consists of little more than a piece of red tape and a sticker affixed to the back, with sample credits and the album's UPC. Other versions of this release have different colors of stickers, with green, yellow and orange being some of the other colors. The front is affixed with a Parental Advisory label. The Source pointed out a resemblance between the Yeezus CD packaging and a packaging concept designed for the single "Crystal" by the English band New Order in 2001. In a 2016 BBC interview with Annie Mac, West explained the album cover; "The whole concept for the Yeezus album is that we're not going to be using CDs in the future and since this is the last time we're going to see it, this is an open casket for the CD."
Def Jam confirmed in late June 2013 that "Black Skinhead" would be serviced to American radio as the album's first single on July 2, 2013, and that a music video for the track was being produced. It was officially released to radio in the United Kingdom on June 19. The song peaked at number 69 on the US Billboard Hot 100 and 34 on the UK Singles Chart. In August 2013, it was revealed that "Bound 2" would be released as the second single from Yeezus. "Bound 2" features vocals from American soul singer Charlie Wilson and incorporates numerous samples into its production, including prominent elements of the song "Bound" (1971) by soul group Ponderosa Twins Plus One. "Bound 2" received general acclaim from music critics, who referred to the song as one of the highlights of the album and compared its soul sample-based production to West's early work from his debut studio album The College Dropout (2004). The song has since peaked at number 55 on the UK Singles Chart. In November 2013, producer Hudson Mohawke revealed that "Blood on the Leaves" would serve as the album's third single. West subsequently made the announcement in an interview on New York's 92.3 NOW.
On September 6, 2013, West announced The Yeezus Tour, a North American tour to take place between October 19 through December 7, 2013; two months prior to West's announcement, Yeezus co-producer Mike Dean had announced a tour for the album. The tour was marketed as his "first solo tour in 5 years", and featured Kendrick Lamar, Pusha T, A Tribe Called Quest, and Travis Scott as the supporting acts. On October 30, 2013, while on the road to Vancouver, a truck carrying custom-made video screens and equipment for the show was involved in a car accident, the crash damaged the equipment beyond repair. The tour resumed on November 16, 2013, at the Wells Fargo Center in Philadelphia. The missed Chicago and Detroit shows were rescheduled however, the rest of the missed dates were cancelled, Def Jam cited routing logistics as the reason.
Critical reception
Yeezus was met with widespread critical acclaim. At Metacritic, which assigns a normalized rating out of 100 to reviews from professional publications, the album received an average score of 84, based on 46 reviews. Aggregator AnyDecentMusic? gave it 8.2 out of 10, based on their assessment of the critical consensus.
Reviewing the album in The Guardian, lead critic Alexis Petridis found it "noisy, gripping, maddening, potent", while Helen Brown from The Daily Telegraph said it was "the most exciting album" she had heard in some time. Jon Dolan from Rolling Stone called it a "brilliant, obsessive-compulsive career auto-correct" that made other abrasive records by "mad geniuses", such as In Utero by Nirvana and Radiohead's Kid A, seem tame by comparison. Pitchfork critic Ryan Dombal viewed it as a "razor-sharpened take" on West's fourth studio album, 808s & Heartbreak, concluding that "cohesion and bold intent are at a premium on Yeezus, perhaps more than any other Kanye album. Each fluorescent strike of noise, incongruous tempo flip, and warped vocal is bolted into its right place across the album's fast 40 minutes". Randall Roberts of the Los Angeles Times felt it was his most ambitious piece of music yet, and Evan Rytlewski from The A.V. Club said it was his most uninhibited record: "Even by the standards of an artist who reinvents himself with each release, it's a drastic departure". In a highly positive review, AllMusic's David Jeffries opined that the album was an "extravagant stunt with the high-art packed in, offering an eccentric, audacious, and gripping experience that's vital and truly unlike anything else". Ann Powers of NPR described the album as "juxtaposing avant-garde industrial and electronic innovations with the high romantic hip-hop West had already perfected." Rock artist Lou Reed reviewed Yeezus in July 2013 shortly before his death, describing it as majestic and inspiring. "He's really trying to raise the bar. No one's near doing what he's doing, it's not even on the same planet".
Some reviewers expressed reservations. In The New York Times, Jon Pareles said West's innovative transfiguration of his music—with unrefined electronica and drill elements—was undermined by his distasteful lyrics and appropriation of 1960s civil rights slogans "to his own celebrity or to bedroom exploits". In Robert Christgau's opinion, the combination of harsh rock and hip hop sounds on Yeezus was as bold as Public Enemy's music during the 1980s, but West's lyrics were grotesquely off-putting. "He's wordsmith enough to insure that his sexist imagery is very hard to take", Christgau wrote in The Barnes & Noble Review, looking at the album as an "alt-rap also-ran". Chris Richards from The Washington Post found West's lyricism perhaps "his least compelling" yet and "drunk on bitterness", though viewed the album as "West at his most wasted, stumbling through rubble". Alex Griffin of Tiny Mix Tapes expressed similar feelings, describing it as "a nebulous, dense, paranoid web of utterly unfiltered expression that's utterly or negligibly fascinating depending on how much you care about Yeezy". In The Times, Will Hodgkinson surmised that Yeezus could have been West's masterpiece had he not become "so hopelessly self-important".
Accolades
Based on 146 individual year-end top ten lists compiled by Metacritic, Yeezus was the most critically acclaimed album of 2013, appearing on 61 lists and being named first on 18 of them. In October 2013, Complex named Yeezus the sixth best hip hop album of the last five years. Yeezus was rated as album of the year by nine publications. Spin named it the best album of 2013, writing, "Yeezus was a thorny tangram puzzle of boxy headbanger blats that exemplified a year of equally stripped-down, basal pleasures". The A.V. Club named it the best album of 2013 saying "It's magnificent, and it sounds like absolutely nothing else". Rolling Stone named it the second best album of 2013, comparing it in concept to Reed's polarizing 1975 album Metal Machine Music: "No wonder the late, great Lou Reed embraced Yeezus, since it's basically the Metal Machine Music concept translated into futuristic hip-hop, all industrial overload and hypertense egomania and hostile vibes". Exclaim! also named it the hip hop album of the year. NME named it the second best album of the year calling it "his most sonically challenging album to date". Stereogum, Time, and Complex were also among the publications that named Yeezus the best album of 2013.
Yeezus was also nominated in two categories at the 2014 Grammy Awards including for Best Rap Album and Best Rap Song for "New Slaves". West responded unfavorably to this due to not receiving more nominations. He then addressed the National Academy of Recording Arts and Sciences at one of his concerts and referred to it as patronizing. The album received nominations for Foreign Rap Album of the Year at the Hungarian Music Awards, International Album of the Year at the Danish Music Awards, World's Best Album at the 2014 World Music Awards, and Best Album at the 2014 NME Awards.
In January 2014, Yeezus was named the best album of 2013 by The Village Voices Pazz & Jop annual critics' poll. By topping the poll, West attained his fourth album to do so, following on from The College Dropout, Late Registration, and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in 2004, 2005, and 2010, respectively. On the same poll for singles, "Bound 2", "New Slaves", and "Black Skinhead" were ranked in the top 10. In 2020, Rolling Stone ranked Yeezus as the 269th album on their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 list.
Commercial performance
Yeezus debuted at number one on the US Billboard 200, becoming West's sixth chart-topping studio album and selling 327,000 copies in the United States in its first week. The album failed to reach the 500,000 sales projections, and marked West's lowest solo opening week sales in the US. However, it still had the third-best first week sales of 2013 at the time of release and marked the highest first week sales by a hip hop album since Drake's 2011 album Take Care. Simultaneously, Born Sinner entered at number two on the Billboard 200 with sales of 297,000 copies, selling 30,000 less than Yeezus. The second week sales saw the album fall dramatically; although it descended two places to end at number three on the chart, sales dropped by 80% to 65,000 units, making Yeezus the largest second-week percentage drop for a number one-debuting album in 2012–13 and the fourth-largest for a number one-bowing album in the SoundScan era. Billboards Keith Caulfield attributed the diminished figures to the non-traditional marketing, considering that the lack of singles and public appearances led the album to find "difficulty in sustaining its momentum". That same week, Born Sinner remained at number two on the Billboard 200, outselling Yeezus by nearly 20,000 units with sales of 84,000 copies. The following week, Born Sinner climbed to number one on the chart, tying the peak position attained by Yeezus previously. On August 12, 2013, Yeezus was certified gold in the US by the 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 (RIAA) for sales of over 500,000 copies. By September 19, 2013, the album had sold 537,000 copies, being outperformed by the 599,000 copies sold of Born Sinner. J. Cole responded to this by commenting that he doesn't "live for the accolades" and claiming: "I'm more so about the music. Making it, and putting it out. Those are the two best feelings". Yeezus was later certified platinum in the US by the RIAA on January 8, 2014, for shipments of one million albums shipped to stores and digital retailers. Yeezus was ranked as the 37th most popular album of 2013 on the Billboard 200.
On the ARIA Albums Chart, Yeezus initially debuted at number two after selling 9,500 copies in three days, entering behind The Great Country Songbook by Troy Cassar-Daley and Adam Harvey at the summit. However, after a data error was found, a re-count of sales was done. The re-count found that Yeezus was actually the number one album of the week. ARIA issued an apology and the chart was fixed. The album stood as West's first chart topper in Australia. Yeezus reached number one on the Canadian Albums Chart, becoming West's fifth chart-topping album in Canada. In the United Kingdom, the album experienced a chart-topping performance, with it debuting at number one on the UK Albums Chart and giving West his first number one on the chart since Graduation in 2007, as well as his fourth top ten album in the UK. The following week, Yeezus descended five places to number six on the UK Albums Chart. The album was ultimately certified gold in the UK by the British Phonographic Industry (BPI) on February 20, 2015, for sales of 100,000 units. Yeezus was also a chart topper in Denmark, New Zealand and Russia. The album was the ninth best-selling cassette album in the US in 2017.
Public reaction
Public reaction to Yeezus, including its unorthodox and deliberate lack of promotion as well as its brash and aggressive sound, was mixed. Yeezus was noted as one of the most anticipated releases of 2013 by major publications, but the lack of a major radio single was regarded as a risky move. Regardless, radio stations have still played tracks from Yeezus on air, despite it being a departure from the normal playlists found on hip-hop stations. "When I listen to radio, that ain't where I wanna be no more", stated West at his headlining June 9, 2013 Governor's Ball performance, where he unveiled several tracks from the record for the first time. Rolling Stone summarized the audience's response: "Half the crowd cheered, half almost audibly rolled their eyes". West's June 11 interview with Jon Caramanica of The New York Times was similarly viewed with a mixed reaction, with many outlets mocking West's seemingly vain statements. In the article, West compares himself to Apple co-founder Steve Jobs and refers to himself as "the nucleus of all society".
Within four days prior to the release, Yeezus was leaked online. The New York Times wrote that the leak "stirred up a Twitter frenzy" and received widespread media coverage. The Washington Post commented on the significance of the leak: "Kanye West’s new album didn’t leak online over the weekend. It gushed out into the pop ecosystem like a million barrels of renegade crude — ominous, mesmerizing and of great consequence". Critics were very kind to Yeezus regarding critical reviews, but others viewed the release as "musical and commercial suicide", and "fans live-blogged their own befuddlement on Twitter and Facebook". The New Yorkers Sasha Frere-Jones suggests that Yeezus may be preferred over any of West's previous works in coming decades by a new generation due to the "lean vibrancy" of the album. "One of the most fascinating aspects of Yeezus arrival is the discursive crisis it's caused, produced by a fast-react culture colliding with a work of art so confounding", wrote The Atlantic columnist Jack Hamilton.
West was criticized by the UK and US Parkinson's disease Associations for controversial lyrics in lead-song "On Sight". Oasis lead member Liam Gallagher criticized Yeezus over its title, saying of West: "He's a fucking idiot. You'll never see Jesus banging his head". American rapper Hopsin dissed West over the album within the lyrics of his single "Hop Is Back" in October 2013, while the music video included Hopsin reenacting one of West's numerous encounters with the paparazzi. That same month, Hopsin went on to explain the diss, admitting that he is a fan of West who likes a lot of his older music and viewing Yeezus as West "on some straight up [bullshit]".
Jay-Z described Yeezus as "polarizing", though claimed "that's what great art is" and that West "pushes the genre forward" with his experimentation. Expressing his thoughts on the mixed reception of the album in October 2013, fellow rapper Lupe Fiasco viewed himself as not facing the same difficult struggle. Lupe Fiasco continued, assuring that his then-upcoming studio album Tetsuo & Youth (2015) wouldn't be as open for interpretation as Yeezus. In February 2014, English singer Lily Allen announced that she would title her third studio album Sheezus. In an interview with Australian radio station Nova, Allen stated that she is terrified that West would think it's "a diss rather than a tribute". She said that she thinks West is brilliant and praised him for speaking his mind all the time. That same month, Jack White, a vocal advocate of analog recording, remarked that Yeezus "is obviously recorded on Pro Tools but sounds unbelievable, because it is very simple and there aren't a lot of components going on, and this really allows the songs to shine. Plus he mixed using analogue components". West went on to make the claim in October 2015 that despite many people rating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as his best album, Yeezus is "so much stronger" in comparison.
In 2013, Yeezus was voted as both the year's "Most Overrated Album" and "Most Underrated Album" by Pitchfork readers.
Track listing Notes signifies a co-producer
signifies an additional producer
"I Am a God" credits God as a featured artist and features additional vocals by Justin Vernon
"New Slaves" features additional vocals by Frank Ocean
"Hold My Liquor" features vocals by Chief Keef and Justin Vernon
"I'm in It" features vocals by Justin Vernon and Assassin
"Guilt Trip" features uncredited vocals by Kid Cudi
"Send it Up" features vocals by King L
"Bound 2" features additional vocals by Charlie WilsonSample credits "On Sight" contains an interpolation of "Sermon (He'll Give Us What We Really Need)", written by Keith Carter, Sr.
"I Am a God" contains samples of "Forward Inna Dem Clothes", written by Clifton Bailey III and H. Hart, performed by Capleton; and samples of "Are Zindagi Hai Khel", written by Anand Bakshi and Rahul Burman, performed by Burman, Manna Dey and Asha Bhosle.
"New Slaves" contains samples of "Gyöngyhajú lány", written by Gábor Presser and Anna Adamis, performed by Omega.
"I'm in It" contains samples of "Lately", written by Vidal Davis, Carvin Haggins, Andre Harris, Kenny Lattimore and Jill Scott, performed by Lattimore.
"Blood on the Leaves" contains a sample of "Strange Fruit", written by Lewis Allan, performed by Nina Simone
"Guilt Trip" contains interpolations of "Chief Rocka", written by Keith Elam, Kevin Hansford, Dupre Kelly, Christopher Martin, Alterick Wardrick and Marlon Williams, performed by Lords of the Underground; and a sample of "Blocka (Ackeejuice Rockers Remix)", written by Terrence Thornton and Tyree Pittman, performed by Pusha T featuring Travis Scott and Popcaan.
"Send It Up" contains a sample of "Memories", written by Anthony Moses Davis, Collin York and Lowell Dunbar, performed by Beenie Man.
"Bound 2" contains interpolations of "Aeroplane (Reprise)", written by Norman Whiteside, performed by Wee; samples of "Bound", written by Bobby Massey and Robert Dukes, performed by Ponderosa Twins Plus One; a sample of "Sweet Nothin's", written by Ronnie Self, performed by Brenda Lee.
Personnel
Credits are adapted from the album's liner notes.Technical Noah Goldstein – associate production, additional programming (3; SFX on 8), engineering (all), mixing (1, 6–8)
Hudson Mohawke – production consultancy, additional programming (4)
Arca – production consultancy, additional programming (4)
Young Chop – production consultancy
Ken Lewis – noises and vocal sounds creation and engineering (4), "oh" vocals creation (6), choir production (1)
Tammy Infusino – "oh" vocals creation (6)
Che Pope – additional programming (3)
Travis Scott – additional programming (3)
Anthony Kilhoffer – engineering (1–8, 10), mixing (4, 9)
Mike Dean – engineering (1–6, 8)
Andrew Dawson – engineering (1, 9)
Brent Kolatalo – engineering (6)
Marc Portheau – engineering assistance (all)
Khoï Huynh – engineering assistance (all)
Raoul Le Pennec – engineering assistance (all)
Nabil Essemlani – engineering assistance (all)
Keith Parry – engineering assistance (all)
Kenta Yonesaka – engineering assistance (1–5, 7, 8)
David Rowland – engineering assistance (1–5, 7, 8)
Sean Oakley – engineering assistance (1, 2, 4–8), mixing assistance (1, 4, 6–9)
Eric Lynn – engineering assistance (1, 2, 4–8), mixing assistance (1, 4, 6–9)
Dave "Squirrel" Covell – engineering assistance (1, 2, 4–8), mixing assistance (1, 4, 6–9)
Josh Smith – engineering assistance (1, 2, 4–8), mixing assistance (1, 4, 6–9)
Kevin Matela – engineering assistance (4)
Mat Arnold – engineering assistance (6, 8)
Dale – engineering assistance (6)
Damien Prost – engineering assistance (7)
Manny Marroquin – mixing (2, 3, 5, 10)
Delbert Bowers – mixing assistance (2, 3, 5, 10)
Chris Galland – mixing assistance (2, 3, 5, 10)
Kyle Ross – mixing assistance (4)
Uri Djemal – choir engineering (1)
Vlado Meller – mastering
Mark Santangelo – assistant mastering engineering
Chris Gehringer – mastering (2)Musicians Mike Dean – additional instrumentation (guitar solo on 5; bass, guitar on 10)
Chris "Hitchcock" Chorney – additional instrumentation (cellos on 8)
Dylan Wissing – drums (1)
Matt Teitelman – percussion (1)
Alvin Fields – choir direction (1)
Carmen Roman – choir (1)
K. Nita – choir (1)
John Morgan – choir (1)
Jessenia Pena – choir (1)
Ronnie Artis – choir (1)
Crystal Brun – choir (1)
Sean Drew – choir (1)
Natalis Ruby Rubero – choir (1)
Lorraine Berry – choir (1)
Gloria Ryann – choir (1)
Timeka Lee – choir (1)
Matthew Williams – music consultancy
Benji B – DONDA music consultancyArtwork'''
Kanye West – creative direction, art direction
Virgil Abloh – art direction
Matthew Williams – art direction
Justin Saunders – DONDA art direction
Joe Perez – DONDA graphic design
Jim Joe 13 – illustration and type treatment for DONDA
Todd Russell – art production
Kristen Yiengst – art production
Alex Haldi – art production
Andrew Zaeh – art production
Meredith Truax – art production
Tai Linzie – art production
The DGS Team – art production
Charts
Weekly charts
Year-end charts
Certifications
Release history
See also
2013 in hip hop musicBorn Sinner"Hop Is Back"
List of number-one albums of 2013 (Australia)
List of number-one albums of 2013 (Canada)
List of UK top-ten albums in 2013
List of UK R&B Albums Chart number ones of 2013
List of Billboard 200 number-one albums of 2013
List of Billboard number-one R&B/hip-hop albums of 2013
List of Billboard number-one rap albums of 2013
List of number-one albums from the 2010s (Denmark)
List of number-one albums from the 2010s (New Zealand)
List of UK Albums Chart number ones of the 2010sSheezusTetsuo & Youth''
Notes and references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2013 albums
Albums produced by 88-Keys
Albums produced by Arca (musician)
Albums produced by Benjamin Bronfman
Albums produced by Gesaffelstein
Albums produced by Guy-Manuel de Homem-Christo
Albums produced by Hudson Mohawke
Albums produced by Kanye West
Albums produced by Lunice
Albums produced by Lupe Fiasco
Albums produced by Mike Dean (record producer)
Albums produced by No I.D.
Albums produced by Rick Rubin
Albums produced by Symbolyc One
Albums produced by Thomas Banga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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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s recorded at Shangri-La (recording studio)
Alternative hip hop albums by American artists
Def Jam Recordings albums
Electronic albums by American artists
Experimental music albums by American artists
Industrial hip hop albums
Kanye West albu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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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조작 사건
PRODUCE X 101
《프로듀스 X 101》이 종영된 후 시청자들은 최종 순위 발표식의 득표 차이가 29,978표, 7,494표 등으로 동일하게 반복되는 경우가 다수이고, 1위부터 20위까지의 득표수가 상수 7,494.44의 배수인 사실 등을 밝히며 디시인사이드 프로듀스 X 101 갤러리를 중심으로 투표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2019년 7월 24일,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은 《프로듀스 X 101》의 투표 조작이 거의 확실하다고 밝히며, 이는 채용 비리이자 취업 사기라고 주장했다. 하태경 의원은 "주변 수학자들에게 물어 보니, 1등에서 20등까지 20개의 이런 숫자 조합이 나올 확률은 수학적으로 0에 가깝답니다. 투표결과가 사전에 이미 프로그램화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라고 지적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투표 조작은 청소년들에게도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을 심어준다고 밝히며 검찰 수사를 촉구했다.
한편 프로듀스 X 101 유료투표 진상 규명 위원회에서는 법무법인 마스트에 형사 소송에 대한 변호사 선임을 완료했다며,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집단 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자 투표는 유료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민사 소송이 아닌 사기 및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 혐의로 고소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기 혐의가 입증될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선고될 수 있으며,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가 인정될 경우에도 5년 이하의 징역,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선고될 수 있다. 법무법인 측은 이외에도 방송법, 업무상 배임 등 혐의도 적용할 수 있는지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도 관련 민원이 260여건이 접수되어 안건 상정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논란이 커지자 무입장으로 일관하던 엠넷 측은 뒤늦게 최종 득표수 집계에 오류가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순위 변동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하태경 의원은 엠넷의 추가 해명도 오류투성이라고 비판하며, 반올림 후 나오는 숫자가 0과 9 사이에서 다양하지 않고 0과 5로만 나온 것을 그 근거로 들었다. 또한, 이러한 경우는 복권에 연달아 두 번 당첨될 확률보다 훨씬 낮다며 원본 데이터(raw data) 공개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자 엠넷은 재차 사과글을 올린 후, 사실관계 파악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돼 공신력 있는 수사 기관에 수사를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경찰에서 투표 조작 의혹에 대한 내사를 시작하면서 7월 31일, CJ ENM 내 제작진 사무실과 문자 투표 데이터 보관 업체를 압수수색했다. 이어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도 이 사건을 형사6부에 배당한 후,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수사하도록 지휘했다.
같은 해 8월 19일, 경찰이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제작진이 조작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녹음 파일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또한, 녹음 파일에는 이전 시즌에 대한 조작도 언급되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서 8월 12일, 경찰은 CJ E&M 사무실 및 제작진 주거지 등에 대해 2차 압수수색을 실시하였다고 밝혔다. 9월 2일, 서울지방경찰청은 기자간담회에서 PRODUCE 101의 모든 시즌에 대하여 조작 의혹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10월 1일,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프로듀스 X 101에서 데뷔조로 선발된 11명 가운데 일부 연습생의 최종 득표수가 실제로는 탈락군에 속했던 사실을 파악했으며, 탈락군에서 데뷔조로 순위가 뒤바뀐 연습생은 2 ~ 3명 정도라고 밝혔다. 따라서, 경찰은 이와 같은 순위 변동에 사실상 투표수 조작이 있었다고 보고, 안준영 PD 등 제작진을 업무방해 혐의로 입건했다. 아울러 투표수 조작을 두고 제작진과 연습생 소속사 사이 금전 거래가 오갔는지도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고 노컷뉴스가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같은 날 경찰은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울림 엔터테인먼트, MBK 엔터테인먼트 등 보이 그룹 X1의 일원이 소속된 소속사를 압수수색했다.
또한, MBC PD수첩은 "과제를 미리 알고 있었어요. 이미 정해져 있던데요."라는 내용의 글씨가 써진 예고편을 공개하며, 2019년 10월 15일에 투표 조작 의혹과 관련하여 방송할 것이라고 밝혔다. 10월 3일,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프로듀스 X 101에 참가한 한 연습생이 제작진이 처음부터 특정 연습생들만 촬영해 방송하였으며, 일부는 경연곡을 미리 알고 연습했다는 증언을 했다고 보도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4일, 대한민국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프로듀스 X 101 투표 조작 의혹과 관련하여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이와 관련 동종 프로그램의 전수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이 사건은 방송은 물론 나라의 신용도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발언했다. 그러자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데이터만 보더라도 의혹은 충분"하다며, "방심의에서 엄격하게 살펴봐야겠지만 저희들도 유사 프로그램 실태 파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또한, 강상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위원장은 "방송 내용이 사실과 다를 경우에 굉장히 엄격하게 다루고 있는데, 의도(적으로 결과를 왜곡)까지 더해진다면 중징계가 예상된다"고 전했다.
10월 15일, MBC PD수첩은 이러한 논란에 관하여 방송하였으며, 해당 방송은 이날 MBC가 방송한 모든 프로그램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10월 30일, 경찰은 업무방해·사기·배임수재 등 혐의로 PRODUCE X 101 제작진들 및 연예 기획사 관계자 4명에 대하여 구속 영장을 신청하였다.
11월 1일에는 경찰이 안준영 PD, 김용범 CP, PD 이 모씨,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부사장 김 모씨 등에 대해 지난 1일 출국금지 조치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11월 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안준영 PD와 김용범 CP를 비롯한 프로듀스 X 101 제작진들 및 연예 기획사 관계자 4명에 대한 영장실질심사가 진행되었고, 포승줄에 묶여 유치장으로 이송되었다. 구속 위기에 몰리자 엠넷은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수사 결과에 따라 책임질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며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결국 서울중앙지방법원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사기와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안준영 PD와 김용범 CP 2명에 대하여 구속 영장을 발부하였다. 한편, 서울지방경찰청은 CJ ENM 신형관 부사장의 사무실과 연예 기획사 1곳에 대해 추가 압수수색을 진행하였다. 같은 날, SBS 8 뉴스에서는 안준영 PD가 연예 기획사 관계자들로부터 강남에 위치한 유흥업소에서 수백 만원 대에 달하는 접대를 여러 차례 받은 정황과 휴대전화 메시지 등 증거를 없애려 한 정황을 경찰이 포착하여 확인했다고 보도하였다.
다음 날인 11월 6일, 경찰은 안준영 PD가 《PRODUCE 48》과 《PRODUCE X 101》의 순위 조작 혐의를 인정했으며, 《PRODUCE 101》과 《PRODUCE 101 시즌 2》에 대해서는 혐의를 부인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경찰은 안준영 PD가 2018년 하반기부터 연예기획사들로부터 서울 강남 일대 유흥업소에서 40차례 이상 접대를 받았고, 한 번에 수백만 원씩 전체 접대 액수가 1억 원이 넘는 접대를 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11월 7일, CJ ENM은 X1 일원의 소속사들과 계약서 내용이 절충이 되지 않아 결국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고, X1은 CJ ENM과의 정식 계약서 없이 활동을 이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11월 8일, 경찰은 《PRODUCE 48》과 《PRODUCE X 101》 시청자 문자 투표를 관리했던 업체 원본 자료가 실제 방송에서 공개된 순위와 다른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한, 특히 《PRODUCE X 101》의 경우 경합을 하기 전에 이미 순위가 정해져 있었다고 밝혔다. 안준영 PD도 미리 정해놓은 연습생들이 있었다고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11월 12일, 서울지방경찰청은 기자 간담회에서 《PRODUCE X 101》 제작진과 연예 기획사 관계자 뿐만 아니라 CJ ENM 고위 관계자까지 총 10여 명을 입건했다고 밝혔다.
11월 14일, 안준영 PD와 김용범 CP는 구속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검찰로 송치되었다.
11월 16일, 이 사건의 여파로 결국 X1은 2019 브이라이브 어워즈 'V 하트비트'에 불참하였고, 추가 활동 일정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X1은 사실상 활동 중단 상태가 되었다. 그 후 공식 석상에서 볼 수 있었던 건 남도현이 한림연예예술고등학교 합격자 예비소집에 온 것이 전부였다.
11월 18일, X1 팬덤 '원잇'은 가입비 환불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여 팬클럽 가입비 환불을 촉구하며 항의하였고, 환불 조치가 진행되지 않을 경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7월에 팬클럽에 가입한 후 현재까지 회원 카드 등이 포함된 공식 키트도 받지 못했으며, 특히 X1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티켓 선예매나 공식스케줄 우선 참여 혜택 등을 팬클럽 활동 기간 내에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엠넷은 사건의 여파로 《PRODUCE 101》 모든 시즌의 다시보기 서비스를 중단하였다.
11월 26일, IZ*ONE , X1은 12월 4일 열리는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 불참을 확정하였다.
12월 3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PRODUCE 101》 모든 시즌이 순위가 조작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안준영 PD와 김용범 CP를 업무방해와 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였다. 한편, 보조PD 이모 씨는 안준영 PD 등과 같은 혐의로 불구속기소하였다. 또한,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김모 대표와 김모 부사장, 울림 엔터테인먼트 전 직원 이모 씨, 에잇디 크리에이티브 전 직원으로서 자신의 기획사 앙팡테리블을 차린 류모 씨, 어라운드어스 소속 김모 씨를 비롯한 연예기획사 임직원 5명은 배임증재·배임수재·청탁금지법 위반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였다.
12월 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첫 재판 날짜를 12월 20일로 확정하였다. 한편,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공소장을 보면 안준영 PD나 김용범 CP 등 제작진의 개인 일탈로 결론이 되었고, 오히려 CJ ENM은 '피해자'로 판단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MBC PD수첩 CP 박건식 시사교양1부장은 "CJ가 피해자가 되면서 조직적인 조작 의혹에 대해 더 윗선으로 수사가 확대되지 못했다"며 꼬리 자르기 의혹을 제기했다.
12월 6일, 다수의 언론에서 《PRODUCE 101》 시리즈 제작진을 접대한 소속사로 연예기획사 4곳이 언급되어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에잇디크리에이티브는 "현재 프로듀스101 제작진 접대와 관련해 거론되고 있는 류모 씨는 당사에서 음반 PR 업무를 전담해 맡은 적은 있으나 지난해 퇴사하여 본인 기획사 앙팡테리블을 설립해 본사와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본사는 류씨가 설립한 앙팡테리블의 소속 연습생이 프듀X 출연 과정에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에잇디크리에이티브는 본 순위 조작 관련해 그 어떠한 조사도 받은 적이 없으며 접대한 사실조차 없다"고 밝혔다. 이어 "소속 아티스트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사실과 다른 추측성 루머의 유포와 언론 보도를 자제해 주시길 요청드린다"고 덧붙였다. 또한, 어라운드어스도 "해당 PD와 업무적인 관계 유지를 위한 술자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청탁은 절대 없었다"고 밝혔다. 한편, 스타쉽 엔터테인먼트와 울림 엔터테인먼트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침묵하거나 관련 내용을 "확인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같은 날, 안준영 PD 등 《PRODUCE 101》 제작진 담당 법무법인은 법원에 사임계를 제출하였다.
X1은 이 사건에 발목잡혀, 결국 데뷔할 때부터 해체할 때까지 지상파 방송에 아예 출연하지 못했다. X1뿐만 아니라 프로듀스 X 101 파이널 방송 자체의 조작 의혹 때문에, 당시 프듀X 파이널 진출자로 프듀X 이후 솔로 혹은 그룹 앨범을 발표한 이진혁과 송유빈이 이 여파로 뮤직뱅크에 출연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X1은 각 멤버들의 소속사 간에 이견까지 발생하면서, 2020년 1월 6일에 해산했다.
그리고 X1이 해체한 후 김우석, 남도현, 이한결, 한승우가 지상파에 나왔을 때에도, 김우석이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언급하기 전까지 지상파에서 X1에 대한 언급은 한동안 나가지 않았다.
논란 속에서 활동했음에도, CJ 측이 X1 멤버들에게 정산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다시 한 번 일었다. 2020년 7월 15일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김우석을 통해 X1이 지상파에 처음 언급됐는데, X1 활동으로 정산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논란이 있었던 정산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2020년 5월 1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결심 공판에서 김용범과 안준영은 모두 징역 3년을 구형받았으며, 안준영에게는 추징금 3,600만 원이 추가됐다.
같은 법원에서 5월 29일에 열린 1심 선고 공판 결과 안준영은 징역 2년에 추징금 3,700만 원, 김용범은 징역 1년 8개월을 선고받았으며, 모두 집행유예 없이 실형이 확정됐다. 함께 기소된 보조 PD와 기획사 임직원 5명은 벌금형에 그쳤다. 이에 대해 안준영 PD 측은 6월 4일에 항소했다.
그러나 2020년 11월 18일 서울고등법원에 열린 항소심(2심)에서 피해자가 밝혀졌다. 단순히 피해자 명단을 공개하는 것을 넘어서, 어떤 방식으로 조작을 당했는지 법정에서 내역을 대놓고 공개함에 따라 안준영과 김용범은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조작으로 누가 선발되었는지는 법정에서 공개하지 않았다.
결국 김용범과 안준영은 또 판결에 불복했고, 사건은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PRODUCE 48
2019년 8월 30일, KBS는 PRODUCE 48도 투표 조작 정황이 있다고 보도하였다. 11월 6일, 안준영 PD가 《PRODUCE 48》 순위 조작 혐의를 인정하면서 아이즈원은 첫 정규 앨범 발매가 2020년으로 연기되었고, 스케줄이 연달아 취소되는 등 직격타를 맞았다. 그리고 소속사에서 요구해 멤버를 조작했다고 알려진다. 미리 데뷔조 12명을 정해놓았고 실제로는 이가은이 5위, 한초원이 6위로 데뷔해야 했으나 원래 정해져 있던 12명을 데뷔시킨 것이다.
아이돌학교
2019년 9월 6일에 서울지방경찰청이 아이돌학교에 대해서도 투표 조작 여부에 대한 수사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아이돌학교 관계자 및 '아이돌학교 조작논란 진상규명위원회'를 소환해 참고인을 조사하였다고 밝혔다. 10월 2일, 아이돌학교에 참가했던 이해인의 아버지는 탁구 커뮤니티 고고탁과 디시인사이드 이해인 갤러리에 글을 남기며 엠넷의 부당한 처사에 억울함을 드러냈다. 해당 글에는 아이돌학교 촬영 중에 자신의 딸 이해인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정체를 알 수 없는 계약서에 서명해야 했고, 조작 논란 당시에도 회사 측에서 2019년 10월까지 데뷔는 물론 개인 활동까지 시켜준다고 약속해놓고 방치했다고 밝혔다. 덧붙여, 엠넷의 투표 조작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딸을 두 번이나 희롱한 것이며, 비인간적인 행동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10월 7일, 이해인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장문의 글을 남겼고, 촬영 당시 "인권이라는 것이 없었다"며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11월 6일, 경찰은 자료 분석이 끝나는 대로 조만간 아이돌학교 제작진 등 관련자를 소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20년 7월 8일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제작진을 불구속 기소했다.
PRODUCE 101
2019년 11월 14일, 안준영 PD는 결국 《PRODUCE 101》 순위도 조작하였다고 시인하였다. 그러자, 《PRODUCE 101》 시청자도 진상규명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원본 데이터 공개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2월 13일, 안준영 PD에 대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불기소이유서를 통해 아이오아이 멤버 중 1명이 투표 조작으로 데뷔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당시 제작진이 최종 데뷔 조인 상위 11명에 포함되었던 A 연습생과 11위 밖에 있던 B 연습생의 순위를 바꿔치기 하면서 B 연습생을 데뷔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만, 검찰은 안준영 PD가 시즌1에서는 1차 선발 과정 조작에만 개입한 것으로 판단했다. 대신 데뷔조 조작에 관여한 다른 제작진으로 보이는 시즌1 당시 CP 한동철 PD와 메인작가였던 박모 작가가 거론되었다. 검찰은 불기소이유서에서 "안준영 PD는 시즌1 마지막 생방송 당시 중계차에서 촬영분을 편집하며 방송 송출 업무를 보고 있었고 투표 결과 집계 업무를 담당하지 않아 집계 결과를 조작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프로그램을 총괄하던 한동철 전 CJ ENM PD와 박 작가도 투표결과 집계 업무는 자신들이 했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PRODUCE 101 시즌 2
2019년 11월 14일, 안준영 PD는 결국 《PRODUCE 101 시즌 2》 순위도 조작하였다고 시인하였다. 그러자, 《PRODUCE 101 시즌 2》 시청자도 진상규명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원본 데이터 공개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당시 한 연습생이 데뷔 순위권(상위 11위)에 들었지만 데뷔조에 들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에 데뷔조에 들고 싶지 않다는 연습생을 제외, 12위 연습생을 데뷔조에 넣었다고 주장했다. (순위 조작이 아닌 11명을 맞추기 위해 데뷔 순위권에 들지 못한 연습생들 중 가장 순위가 높은 연습생을 대신하여 데뷔조에 넣은 것)
수사 결과
처벌
안준영 PD는 징역 1년 6개월, 김용범 CP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모두 매번 판결에 불복하여 결국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으나, 대법원에서는 원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에 따라 김용범은 2021년 7월 4일에, 안준영은 2021년 11월 4일에 잔여 형기를 보낸 후 만기 출소했다.
CJ ENM 측은 2022년 6월에 김용범과 안준영은 모두 사내 징계 절차를 밟았다고 발표했으며, 개인정보라는 이유를 들어 징계위가 열린 시기와 세부내용은 비공개했다. 징계 후 김용범은 CJ ENM의 글로벌 뮤직 TF로 복귀했으나, 안준영은 휴직계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은 PD는 2020년 7월 8일에 불구속 기소됐고, 2021년 6월 10일에 열린 1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됐다. 이에 김태은 CP는 판결에 불복하며 항소했으나, 2021년 12월 10일에 열린 2심 결심 공판에서도 징역 1년을 구형받았다.
반응
X1은 결국 2020년 1월 6일에 해체했다. 아이즈원은 방송 출연 등 활동이 확연히 줄었고 신곡 발표가 늦춰지는 등 활동에 직격타를 맞았으며, 골든디스크에서는 2년 연속 노미네이트 대상에서 제외됐다.
각주
외부 링크
2019년 논쟁
2019년 대한민국
PRODUCE 101
텔레비전 논쟁
엠넷
CJ ENM | https://en.wikipedia.org/wiki/Mnet%20vote%20manipulation%20investigation | Mnet vote manipulation investigation | The Mnet vote manipulation investigation is a 2019 South Korean entertainment scandal involving electoral fraud in several reality competition series produced and broadcast by the television channel Mnet. The incident primarily involves the Produce 101 series and Idol School, which were intended to create K-pop groups with members selected by audience vote.
In July 2019, during the final episode of the Produce 101 series' fourth season, Produce X 101, several viewers suspected that the total votes were manipulated after noticing numerical patterns. On August 1, 2019, 272 viewers filed a lawsuit against Mnet, as their on-site text voting service charged per vote, prompting an investigation led by the Seoul Metropolitan Police.
Ahn Joon-young and Kim Yong-bum, producers for the Produce 101 series, were arrested on November 5, 2019. Ahn later admitted to manipulating the rankings to all four seasons of the Produce 101 series. On December 3, 2019, Ahn, Kim, and six other entertainment agency representatives were indicted for charges including obstruction of business, fraud, and bribery. A court trial began on December 20, 2019.
The investigation has affected promotions for the groups produced by Mnet's franchises, with X1 later being disbanded by the agencies and Iz*One going on hiatus, as well as public perception of Mnet's ongoing competition reality series.
Background
In 2009, South Korean cable television channel Mnet produced their first reality competition series, Superstar K, which immediately became popular, creating a boom of audition program franchises. In 2016, they launched Produce 101, aiming to create a short-term K-pop project group of 101 contestants with all 11 members selected by audience vote. The group formed from that show, I.O.I, was successful throughout their one-year contract, and due to their popularity, Mnet subsequently continued the series, creating its own franchise. The next two seasons, Produce 101 Season 2 and Produce 48 (a collaboration with the AKB48 Group), formed Wanna One and Iz*One respectively, with both groups finding individual success in the music market. The fourth season, Produce X 101, which was broadcast in 2019, created the group X1. In addition to the Produce 101 series, Mnet launched Idol School in 2017 with a similar premise, which created the girl group Fromis 9.
Investigation
Incident and lawsuit
During the live broadcast of the final episode of Produce X 101 on July 19, 2019, several viewers suspected that Mnet had tampered with the total votes after noticing irregular patterns in the voting numbers. First, viewers noticed that when they compiled a list of the differences in the number of votes between each rank, a lot of them were the same. In particular, a difference of exactly 29,978 votes was observed five times. Furthermore, a difference of either 7,494 or 74,945 votes was observed six times. Viewers also realized that when the average individual vote count and divided that by 100, they got 7494.442. They then realized that each of the top 20 individuals vote counts were a multiple of 7494.442. Furthermore, viewers realized that by multiplying 7494.442 by 2000, they got the total number of votes. Some viewers then tried using the same formula on the individual vote counts of the final 20 Produce 48 members. This time, viewers realized that each of the top 20 individuals vote count were a multiple of 445.2178. In addition, they were able to get the total number of votes after multiplying 445.2178 by 10,000, rather than by 2000. In response to the allegations, Mnet admitted that there were errors in calculation, but also maintained that the final rankings were correct and that there was no intention of changing X1's member line-up. Fourteen representatives from the entertainment agencies of the 20 finalists held a meeting on July 29, 2019, and agreed to support Produce X 101'''s outcome and X1's debut. On August 1, 2019, 272 viewers filed a lawsuit against Mnet for electoral fraud, as their on-site text voting service charged per vote.
First police raids and witness allegations
On August 20, 2019, a search warrant was issued on CJ E&M offices and a text voting company by the Seoul Metropolitan Police Agency. During their first search, the police uncovered voice recordings of the staff members discussing vote manipulation on the previous seasons of the show, resulting in them extending their investigation to all four seasons of the Produce 101 series, Idol School, Show Me the Money, and Superstar K.
Produce X 101
On October 1, 2019, the Seoul Metropolitan Police Agency confirmed that votes from eliminated trainees were added to the total votes of the members who debuted in X1, a process that affected 2-3 trainees who were originally in the top 11. The police issued a search and seizure warrant on the offices of Starship Entertainment, Woollim Entertainment, and MBK Entertainment. The police also investigated several agencies involved in Produce 48. Reportedly, per contract signed with CJ E&M, the entertainment agencies were paid for every episode their talent appeared in. An anonymous trainee alleged only was given to their talent agencies for participating in a song, while each participant would only get a small percentage, and CJ E&M would keep additional profits if the song performed well. Some entertainment agencies who disagreed would request their talents to be eliminated at the last minute to withdraw them.
On October 15, 2019, MBC broadcast a feature on the vote rigging controversy on PD Note. Participants of Produce X 101 and Idol School and agency officials alleged anonymously that the production teams were biased towards trainees they preferred, such as forcing song producers to give certain trainees more lines and providing them with more screen time; one of them alleged that a contestant had his screen time completely removed after raising a complaint against a staff member, who had yelled at him to wake up. An anonymous trainee alleged that one trainee, under pressure from Starship Entertainment, was secretly informed about a mission in advance by one of the choreographers. He also alleged that some trainees knew the final rankings before the results were announced, and that a trainee from Woollim Entertainment was told by a representative that only one person from their company would debut in X1.
Two trainees alleged that the center position for the theme song, "X1-MA", was originally assigned to a different contestant chosen by trainee vote before the producers changed it to audience vote at the last minute. A fourth trainee claimed that many participants felt the show was biased towards trainees from Starship Entertainment. Staff members anonymously alleged that, for the final ranking results, only one off-site producer had counted the votes in a separate room and sent them the results via text message.
Idol School
On October 3, 2019, a trainee of Idol School alleged anonymously that only three to four of the 4,000 applicants had auditioned to appear on the show, indicating that the majority of the contestants did not have to go through an audition process to compete. In an interview with MBC, a trainee alleged that, throughout their six-month training period, the contestants were only given clothes appropriate for the summer and had to wear them in cold weather. In addition to that, they were cut off from outside communication, were only allowed to buy daily necessities once a month, and were not given enough food to eat.
During the October 15 broadcast of PD Note, several trainees anonymously claimed that their living quarters had poor ventilation and some girls developed rashes from dust. The trainees also claimed that they were so malnourished that some of them did not menstruate or had periods lasting for two months.
Bribery investigation, arrests, and indictments
On October 16, 2019, the police began investigating whether the producers had accepted money for manipulating the votes. On November 5, 2019, after approval from the Seoul National District Court, the police issued arrest warrants and travel bans for director Ahn Joon-young, chief producer Kim Yong-bum, a producer with the surname Lee, and Starship Entertainment's vice president Kim Kang-hyo, after they had attempted to destroy evidence. By evening, Ahn and Kim Yong-bum were arrested. During questioning, Ahn initially admitted to having manipulated the rankings for Produce 48 and Produce X 101 only, but he later also admitted to partially manipulating the rankings for the first two seasons as well.
On November 7, 2019, the police revealed that the final rankings of the top 20 trainees during Produce 48 and Produce X 101 had already been predetermined by the producers before the final performances were recorded and broadcast. A total of 10 people, including the previously reported four individuals, were arrested on November 12, 2019. One of the other six people arrested was Shin Hyung-kwan, the vice president of CJ ENM.
On December 3, 2019, Ahn, Kim Yong-bum, and Lee were indicted for obstruction of business and fraud; executives Kim Shi-dae and Kim (first name not revealed) from Starship Entertainment, former Woollim Entertainment employee Lee, former 8D Creative employee Ryu, and Around Us Entertainment employee Kim were indicted for bribery and violating the Improper Solicitation and Graft Act. The indictment revealed that Ahn and Kim Yong-bum had met with one other professional two days before the live finale of Produce X 101 to determine the final 11 members of X1 based on pre-finale online votes and had wanted to exclude contestants they did not prefer, particularly those who had already debuted in other groups. Ahn and Kim Yong-bum held a similar meeting in August 2018 before the live finale of Produce 48 to choose Iz*One's final 12 members. Ahn swapped rankings for one trainee who was supposed to debut in Wanna One. A later report mentioned that the indictment also revealed rankings for one trainee who was supposed to debut in I.O.I were swapped.
In addition to this, Ahn had also swapped rankings for other contestants in the earlier evaluations. One trainee from Produce X 101 had originally passed the first elimination had been swapped for another, while the same method was used for the third elimination. He also swapped rankings for two trainees from Produce 101 and one trainee from Produce 101 Season 2, all of whom had originally passed the first elimination. Ahn and Kim Yong-bum stated in the indictment that they had predetermined the line-up for Iz*One and X1 because they were pressured by Wanna One's success.
CJ ENM had earned from the paid text messaging votes from Produce 48 and Produce X 101. Police previously found that Ahn had used services from adult entertainment establishments in Gangnam. This was paid for 40 times by various talent agencies, beginning from the second half of 2018, the cost of which estimated to . The indictment, however, clarified that, from January 2018 to July 2019, Ahn received services 47 times, estimating , that were paid for by the five talent agency representatives in exchange for giving their trainees favorable screentime. In response to this report, 8D Creative stated that Ryu was no longer working for their agency and was being indicted for bribery on Produce X 101 through his own agency, Enfant Terrible. Around Us Entertainment stated that their employee Kim purchased alcohol for Ahn but they were not involved in bribery.
On February 14, 2020, the Seoul Metropolitan Police issued arrest warrants for two people who were on the production staff of Idol School.
Trial
The first trial was held on December 20, 2019. During the trial, the defendants admitted to the charges while also requesting a closed trial to avoid disclosing the names of the trainees whose rankings were changed.
A second trial was held on January 14, 2020 and attended by the legal representatives of the defendants and the prosecution. Ahn and Kim, through their legal team, maintained that while they manipulated the rankings, their actions were not illegal. Han Dong-chul, the chief producer of the first season of Produce 101, and a staff member with the surname Park appeared at the hearing as witnesses; both had been suspected of manipulating the rankings for the first season of the show. The prosecution requested Lee Hae-in and another Produce 101 season 1 contestant as witnesses, but Lee's summoning was delayed and her lawyer stated that she would appear at the next hearing. Han and Park were also scheduled to be interrogated at the next hearing.
On February 7, 2020, all eight defendants were present. Ahn and Kim's lawyer stated that the votes were rigged in favor of the trainees from the first two seasons wanting to leave the program. In addition, Ahn claimed that while he violated the Improper Solicitation and Graft Act, he only drank with entertainment agency representatives without accepting bribes, a statement that was supported by the other defendants. The third hearing took place on March 6, 2020.
On November 18, 2020, the trial of appeals for the case of Produce 101 series was held, the court revealed the list of contestants who were eliminated due to manipulation.
Sentencing
Final arguments were heard on 12 May 2020 with the prosecution requesting prison sentences of three years each for producing director (PD) Ahn Joon-young and chief producer (CP) Kim Yong-bum; two years for assistant PD Lee Mi-kyung; and one year for each of the five agency representatives charged with collusion.
The sentencing hearing took place on 29 May at Seoul District Court; all eight defendants heard guilty verdicts. PD Ahn Joon-young was fined ₩37 million and sentenced to two years; CP Kim Yong-beom was sentenced to 20 months; and assistant PD Lee Mi-kyung was fined ₩10 million. Agency representatives identified only as "Kim", "Lee", and "Ryu" were fined ₩7 million a piece, while two additional representatives both identified as "Kim" were each fined ₩5 million.
Reactions
Mnet's response
Mnet issued an apology after the vote investigation allegations first broke in July 2019. Despite the backlash, in the midst of investigation, Mnet announced on October 21, 2019 that they were launching another reality competition series, Teen Singer, in 2020. On November 5, 2019, Mnet issued a statement mentioning that they were cooperating with the police after arrest warrants were issued. Following Ahn Joon-young and Kim Yong-bum's arrests, Mnet stated that their current and future reality programs, such as Queendom and Teen Singer, will be implementing an "observer system", where ordinary people and third parties will be overseeing the votes. In addition, their current program, World Klass, is implementing a system where winners will be selected through evaluations from industry experts and V Live votes, while removing paid text message voting. On November 18, 2019, Mnet announced they were withdrawing all four seasons of the Produce 101 series from video on demand services.
On December 3, 2019, Mnet issued another apology regarding the results of the investigation and announced that they will soon disclose future plans for Iz*One and X1. On December 18, 2019, Kang Ji-hoon, the contents operation manager at Mnet, announced that Mnet will no longer be producing audition programs and were discussing how to compensate trainees who were unfairly eliminated.
Impact on music acts
After the lawsuit was filed in August 2019, several brands cancelled their endorsement deals with X1 or put them on hold. The agencies of several of the members refused to sign contracts with CJ ENM until the allegations were cleared up. In spite of this, X1's debut proceeded as planned. After their appearance at the 2019 V Live Awards V Heartbeat was cancelled, Mnet announced that there were currently no plans for the group to promote.
Iz*One's first studio album, Bloom*Iz, was originally scheduled for release on November 11, 2019 with the lead single "Fiesta". Both the album and song were postponed after Ahn Joon-young's questioning on November 6. In addition, Iz*One's showcases, promotions, and several guest appearances were cancelled or put on hold, as well as their concert film, Eyes on Me: The Movie. On November 28, 2019, Iz*One's Japanese promotions were also suspended, including Sakura Miyawaki and Hitomi Honda's individual radio shows. On December 4, 2019, Iz*One's official Japanese fan club suspended activity, closing registrations for new members and refunding current members.
On December 30, 2019, Mnet and CJ ENM announced that both Iz*One and X1 will begin discussing future plans for the groups, and that the eliminated trainees will be fairly compensated. Both Iz*One and X1 were dropped from the nominations for the 34th Golden Disc Awards. On January 6, 2020, X1 disbanded after the members' agencies failed to reach an agreement on the group's future, while the agencies of Iz*One's members agreed to continue promoting. Iz*One disbanded on April 29, 2021.
Public response
Following initial accusations in July 2019, politician Ha Tae-keung (Bareunmirae member at the time, now with People Power Party) condemned Mnet, stating that some of the numbers had a low probability of naturally occurring. On October 17, 2019, Korea Communications Standards Commission revealed that they may fine Mnet up to for violating the Enforcement Decree of the Broadcasting Act.
The production committee for Produce 101 Japan, the 2019 Japanese spin-off of the original Produce 101 franchise, stated on their official website that they are not affiliated with the Korean production team and have a separate voting system, with votes analyzed by a group of third-party lawyers.
After Ahn Joon-young admitted the first two seasons of the show were rigged, an image that Mnet had posted on their official Facebook account coinciding with the finale of Produce 101 Season 2 went viral. The image had originally included Kang Dong-ho, Samuel Kim, and Kim Jong-hyun as the winners of the show instead of Yoon Ji-sung, Kim Jae-hwan and Ha Sung-woon, but Mnet had stated it was a mistake and deleted it shortly after posting it.
Responses from contestants
In October 2019, the father of Lee Hae-in, a contestant on the first season of Produce 101 and Idol School, alleged through her fan site that CJ ENM suggested during her audition that she sign with their subsidiary agency to ensure that she would be able to debut after elimination, and she had done so out of fear of not being accepted into Idol School. However, after being eliminated, CJ ENM did not follow up and she was unable to sign contracts with other agencies, before finally signing up with The Groove Company in 2020. In response, CJ ENM issued an apology. Following the news, Lee revealed on Instagram and on the October 15 broadcast of PD Note the poor conditions she and other contestants worked under.
After Ahn Joon-young and Kim Yong-bum's arrests, Shiori Niwa, another contestant of the first season, posted and later deleted tweets alleging that some of the trainees already knew the lyrics and choreography to "Pick Me" by the time she heard it. Jung Dong-soo, a contestant of Produce 101 Season 2, called for the culprits to be punished and later stated that, while he had suspected the ranks were manipulated, he was "shocked" and "angry". At the same time, both voiced support for all trainees in the show. Lee Dae-hwi and Park Hee-seok, who were also contestants on Produce 101 Season 2'', voiced their support for Iz*One and X1.
References
Scandals in South Korea
Entertainment scandals
Crime in South Korea
Television controversies in South Korea
CJ E&M
Mnet (TV channel)
Starship Entertainment
Woollim Entertainment |
https://ko.wikipedia.org/wiki/2019%EB%85%84%20%ED%95%9C%EA%B5%AD%EC%8B%9C%EB%A6%AC%EC%A6%88 | 2019년 한국시리즈 | 2019 신한은행 MY CAR KBO 한국시리즈는 2019년 10월 22일부터 10월 26일까지 펼쳐진 2019년 KBO 리그의 챔피언 결정전이다. 대진은 2019년 KBO 리그 정규 시즌 1위 팀으로 통산 6번째 우승이자 3년 만에 통합 우승에 도전하는 두산 베어스와 플레이오프 승리팀으로 2014년 이후 5년 만에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라와 창단 첫 우승에 재도전하는 키움 히어로즈의 7전 4선승제 대결로써 KBO 리그 출범 후 처음으로 서울특별시 연고 팀들끼리 붙는 한국시리즈로 펼쳐졌다.
결과는 총 4차전을 치러 두산 베어스가 4승 무패로 승리를 거뒀고, 3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이자 통산 6회 우승을 달성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18타수 6안타(.333) 1홈런 6타점, 1차전 끝내기 안타와 4차전 결승타로 활약하며 기자단 투표 69표 중 36표를 획득한 두산의 1루수 오재일이 선정됐다.
정규 시즌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는 승, 무, 패, 승률이 모두 동일하지만 두산 베어스가 SK 와이번스와의 상대 전적이 9승 7패로 앞서므로 1위를 차지했다.
KBO 포스트시즌 대진표
와일드카드 결정전
지난 시즌 10위의 불명예를 얻었지만 이번 시즌 5위로 가을 야구에 돌아온 NC 다이노스와 정규 시즌 4위로 3년 만에 가을 야구에 진출한 LG 트윈스가 맞붙은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는 4위로 1승의 어드벤티지를 얻은 LG 트윈스가 3:1로 승리를 거두며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1차전에서 마무리하고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MVP는 6.2이닝 3피안타(1피홈런) 1사사구 1실점 3K를 기록한 LG 트윈스의 켈리에게 돌아갔다.
준플레이오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5위 NC 다이노스를 꺾고 올라온 4위 LG 트윈스와 지난 시즌에 이어서 2년 연속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한 3위 키움 히어로즈가 맞붙었다. 1~2차전을 짜릿한 끝내기 승리로 장식한 키움 히어로즈는 3차전을 내줬지만 4차전에서 10명의 투수를 쓰는 총력전까지 펼치며 4차전을 승리해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시리즈 MVP는 1차전 끝내기 홈런을 포함해 16타수 6안타 3홈런 6타점, 타율 .375로 활약한 키움 히어로즈의 내야수 박병호가 차지했다.
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에서는 준PO 승리팀인 3위 키움 히어로즈와 1위 두산 베어스와 승, 무, 패 기록이 모두 같지만 상대 전적에서 열세를 보여 정규리그 2위가 된 SK 와이번스가 맞붙었다. 지난해 플레이오프의 리턴 매치로 진행됐다.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키움 히어로즈의 투타 밸런스가 매우 뛰어났고 그 결과 시리즈 전적 3승으로 2014 시즌 이후 5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시리즈 MVP는 타율 .533(15타수 8안타) 3타점 4득점으로 맹활약한 키움 히어로즈의 외야수 이정후가 차지했다.
출장자 명단
경기 기록
한국시리즈 경기
1차전
2019년 10월 22일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애국가 : 멜로망스
시구 : 임채청 소방장 / 시타 : 권하나 소방교
1차전 MVP : 두산 오재일 - 5타수 2안타 1타점 (9회말 끝내기 안타)
두산 오재일, 한국시리즈 역대 9번째 끝내기 안타 (PS 역대 30번째)
두산 김태형 감독, 한국시리즈 역대 5번째 퇴장 (PS 7번째 퇴장 / 사유 - 비디오 판독 결과 항의)
1차전에서 두산은 린드블럼, 키움은 요키시가 각각 선발 등판했다. 키움은 1회초 2사 2루에서 박병호의 적시타로 선취 득점을 얻었으나, 두산이 2회말 1사 만루에서 김재호의 밀어내기 볼넷과 박세혁의 적시타로 2득점해 역전에 성공했고, 4회말에는 허경민의 안타와 요키시의 보크, 최주환의 땅볼로 만들어진 1사 3루에서 김재호의 적시타가 터졌다. 2사 후 2루 주자가 된 김재호는 박건우의 타구를 빠트린 김웅빈의 실책 때 홈으로 뛰어들어 득점에 성공했다. 이어진 공격에서 페르난데스의 2타점 2루타까지 터진 두산은 6:1로 달아나며 경기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키움은 린드블럼이 내려간 뒤 두산의 불펜을 공락하며 6회초 무사 1-2루에서 샌즈의 적시타, 1사 만루에서 상대 야수 선택과 김혜성의 희생플라이로 3득점하며 반격에 나셨고, 7회초 1사 2-3루에서 샌즈의 내야땅볼 타점과 대타 송성문의 적시타로 2점을 내며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이어진 승부는 9회말 갈렸다. 9회말 두산은 선두타자 박건우가 유격수 김하성의 뜬공 실책으로 출루했고, 정수빈의 번트안타, 1사 후 김재환의 볼넷으로 만루 찬스를 잡았다. 여기서 오재일은 중견수 키를 넘기는 끝내기 안타를 터트리며 두산이 한국시리즈 1차전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2차전
2019년 10월 23일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애국가 : 가수 김나영
시구 : 배우 이다희
2차전 MVP : 두산 박건우 - 5타수 2안타 1타점(9회말 끝내기 안타)
두산 박건우, 한국시리즈 역대 10번째 끝내기 안타 (PS 역대 31번째)
두산, 한국시리즈 사상 최초 이틀 연속 끝내기 승리 (PS 역대 3번째)
2차전에서 두산은 이영하, 키움은 이승호가 각각 선발 등판했다. 1차전에 이어 선취점은 키움의 몫이었다. 키움은 1회와 2회 두 번의 무사 1-3루 찬스에서 희생플라이로 차곡차곡 득점을 하며 앞서나갔으나, 두산이 4회말 2사 1루에서 터진 오재일의 동점 2점 홈런으로 원점으로 돌렸다. 하지만 키움은 6회초 공격에서 1사 1루에서 박병호의 1타점 2루타, 이어진 1-2루에서 송성문과 이지영의 연속 적시타로 3점을 올리며 이영하를 강판시켰다. 이 때까지만 해도 승기는 키움이 잡고 있었다. 그러나 두산은 8회말 1사 1-2루에서 페르난데스의 땅볼 타구를 상대 2루수 김혜성이 빠트리는 실책을 틈타 추격의 불씨가 되는 점수를 뽑은데 이어 9회말에는 키움 마무리 오주원을 상대로 무사 2-3루 찬스를 잡았고, 바뀐 투수 한현희를 상대로 김재호의 적시타와 대타 김인태의 희생플라이로 동점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 뒤 폭투가 발생해 1사 2루가 된 상황에서 터진 박건우의 끝내기 안타로 두산이 1차전에 이어 2차전까지 극적인 끝내기 승리를 거두며 시리즈 2승을 챙기는데 성공했다.
3차전
2019년 10월 25일 - 고척스카이돔
애국가 : 가수 먼데이키즈
시구 : 문채원 (KBO 한국시리즈 시구자 공모 선정자)
3차전 MVP : 두산 박세혁 - 2타수 2안타 2타점 2볼넷 (4출루 경기, 3회초 결승 1타점 3루타)
두산, 한국시리즈 역대 5번째 팀 싸이클링 히트(3회초 - 박세혁 3루타, 박건우 홈런, 김재환 단타, 오재일 2루타 / PS 5번째)
두산 박세혁, 한국시리즈 역대 3번째 선발 포수 3루타(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한문연 이후 35년만의 기록 / PS 6번째)
두산 김재환, 한 경기 최다 삼진(4개) 타이(KS 7번째, PS 4번째)
3차전에서 키움은 브리검, 두산은 후랭코프가 각각 선발 등판했다. 3차전은 경기 내내 두산의 분위기로 흘러갔다. 두산은 3회초 공격에서 선두타자 김재호가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한 상황에서 박세혁이 우측 선상으로 빠지는 1타점 3루타로 선취점을 안겨준데 이어 박건우의 2점 홈런, 2사 후 김재환의 안타와 오재일의 1타점 2루타로 대거 4점을 뽑아내며 기선을 제압했다. 반면 키움은 선발 브리검을 내리고 4회부터 불펜을 운영하며 추격을 노리고 있었으나 타선은 득점을 뽑지 못했다. 4회말 2사 만루 찬스 무산, 7회말은 무사 만루에서 박동원의 우익수 플라이 때 2루주자 샌즈의 주루미스로 더블플레이가 발생한 상황이 치명적이었다. 8회초 2사 3루에서 박세혁의 적시타로 송성문의 실책으로 살아나갔던 허경민이 득점하며 쐐기를 박은 두산은 6이닝 무실점의 선발 후랭코프와 7회말 무사 만루 위기를 넘기며 남은 3이닝을 책임진 이용찬의 호투까지 더해지며 시리즈 3연승으로 3년만에 통합 우승에 1승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4차전
2019년 10월 26일 - 고척스카이돔
애국가 : 가수 이해나
시구 : 장성규 (방송인)
4차전 MVP : 두산 오재원 - 5타수 3안타 3타점
키움, 포스트시즌 팀 최다 투수 출장 신기록 (11명)
두산 김재환, 한국시리즈 경기 최다 4구 타이기록 (3개, 18번째)
두산 배영수, 한국시리즈 최다 출장 경기 신기록 (24경기), 한국시리즈 역대 최고령 세이브 신기록(만 38세 5개월 22일)
한국시리즈 한 경기 최다 2루타 신기록 (9개 - 키움 4개, 두산 5개)
포스트시즌 한 경기 최다 투수 출장 신기록 (20명 - 키움 11명, 두산 9명)
4차전에서 키움은 최원태, 두산은 유희관이 각각 선발 등판했다. 4차전은 화끈한 타격전으로 펼쳐졌다. 키움이 1회말 2사 2루에서 박병호의 타구를 유격수 김재호가 빠트리는 실책과 샌즈의 1타점 2루타로 2점을 뽑자 두산은 2회초 2사 후 4타자 연속 안타로 3점을 뽑아내며 뒤집었다. 이후 키움이 곧바로 2회말 공격에서 11명의 타자가 등장해 안타 4개, 볼넷 3개, 이정후의 스퀴즈 번트로 6점을 뽑아내자, 두산이 4회초 2사 1루에서 허경민의 1타점 2루타, 5회초에는 10명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 안타 4개와 사사구 3개(볼넷 2, 몸에 맞는 공 1)로 5득점으로 맞받아치며 전세를 뒤집었다. 두산은 시리즈 우승에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겼던 9회말 2사 만루에서 3루수 허경민이 실책을 저지르며 동점을 허용했지만, 10회초 2사 3루에서 오재일의 1타점 2루타와 김재환의 적시타로 2득점하여 9회말의 충격을 극복 했고, 다시 찾아온 시리즈 마무리 상황에서 10회말 1사에 올라온 배영수가 마지막 타자 샌즈를 투수땅볼로 처리하며 두산이 마침내 시리즈 4전 전승으로 3년 만의 통합 우승이자 통산 6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한국시리즈 MVP : 두산 오재일 - 18타수 6안타(타율 .333) 1홈런 6타점(1차전 9회말 끝내기 안타, 4차전 10회초 결승 1타점 2루타)
중계 일정
2019년 한국시리즈는 다음과 같은 방송사로부터 중계방송됐다.
TV 중계
1차전
KBS2 (캐스터 : 이광용 / 해설 : 장성호, 봉중근)
2차전
SBS (캐스터 : 정우영 / 해설 : 이순철, 이승엽)
3차전
MBC (캐스터 : 김나진 / 해설 : 허구연)
4차전
KBS2 (캐스터 : 이광용 / 해설 : 장성호, 봉중근)
각주
한국시리즈
한국시리즈
한국시리즈
두산 베어스
키움 히어로즈 | https://en.wikipedia.org/wiki/2019%20Korean%20Series | 2019 Korean Series | The 2019 Korean Series is the championship series of the 2019 KBO League season. The Doosan Bears, as the regular season champions, automatically advanced to the Korean Series, where they faced the Kiwoom Heroes. The series ran from October 22 to October 26.
The Bears swept the Heroes in four games to win the title.
Background
The Doosan Bears won the 2015 and 2016 Korean Series. They lost the 2017 Korean Series to the Kia Tigers. and the 2018 Korean Series to the SK Wyverns. The team won the pennant race to advance directly to the Korean Series in dramatic fashion. Trailing the SK Wyverns for second place for most of the year, Doosan was 9 games back of SK by late August and even fell back to third place behind the Kiwoom Heroes. After a rally which started in late August and following a late-season collapse of SK, Doosan was able to secure the pennant in the last game of the season. During this last game against the NC Dinos, Doosan overcame a three-run deficit in the eighth inning to finally win by a score of 6–5 in extra innings. With this victory, Doosan achieved the same record as the Wyverns, 88–55–1, but was ranked above SK due to winning the regular season head-to-head record 9–7.
The Kiwoom Heroes, were founded in 2008, and have never won the Korean Series, despite appearing in the 2014 Korean Series and reaching the postseason in 6 of the past 7 seasons. 2019 marked the first year of the team's partnership with Kiwoom Securities, having been known as the Nexen Heroes the previous year. Kiwoom trailed SK and Doosan for most of the year, and finally settled for 3rd place in the regular season. In the semi-playoff, the Heroes beat the 4th-place LG Twins in 4 games, and swept the defending champions SK Wyverns in a rematch of the previous year's playoffs.
Nexen faced Doosan for the third time in the postseason, with Doosan winning their two previous confrontations in the semi-playoff round in 2013 and 2015.
Summary
See also
2019 Japan Series
2019 World Series
References
Korean Series
Doosan Bears
Kiwoom Heroes
Korean Series
Korean Series
Korean Series |
https://ko.wikipedia.org/wiki/%ED%8F%B0%EC%8A%A4%20%ED%9E%88%ED%81%AC%EB%A7%8C | 폰스 히크만 | 폰스 히크만(, 1966년- , 독일 함 Hamm 출생)은 독일의 그래픽 디자이너, 타이포 그래피 디자이너이며 작가이자 베를린 예술대학교의 교수이다.
히크만은 독일 뒤셀도르프 응용과학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였고, 부퍼탈 대학교에서 미학과 미디어이론을 전공하였다. 히크만이 수장으로 있는 베를린의 디자인 스튜디오 폰스 히크만 M23은 전반적인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코퍼레이트 디자인과 책, 포스터, 매거진, 웹디자인과 같은 다양한 매체의 디자인을 중점으로 한다.
생애
그의 디자인 스튜디오 폰스 히크만 M23은 2001년 세계적인 해양레저 축제인 독일 키엘위크의 코퍼레이트 아이덴티티 공모전 키엘러보헤(Kieler Woche)에 당선 되었다. 그 외에도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국제 디자인 비엔날레에 대표적으로 초청 되었다.
폰스 히크만은 2007넌까지 빈 응용미술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재직 하였고, 2007년 여름 학기부터는 독일의 베를린 예술대학교의 조형학부 그래픽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학과의 교수를 맡았다. 그 이전에는 독일의 에센과 도르트문트의 대학교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뉴욕의 타입 다이렉터스 클럽, 국제 그래픽 연맹(AGI), 독일 아트 디렉터스 클럽의 회원이기도 한 히크만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독일 브레머하펜의 디자인 연구소의 간부를,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독일 연방공화국의 디자인상의 심사위원을 역임 하였으며, 2018년부터 100 베스테 플라카테 연합의 대표를 맡고 있다.
히크만이 다른 열명의 독일 디자이너들과 함께 활동한 독일을 위한 11명의 디자이너는 미디어의 큰 호응을 이끌며 공공사회에 그래픽 디자인의 인식을 높였으며 2006년 독일 월드컵의 바람직 하지 못한 공식 로고의 사용 저지를 촉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히크만의 전문적인 축구 지식은 2014년에 출간된 출판물 모든 시대의 최고의 경기 - 100년 축구 역사의 분당 프로토콜 (Das Beste Spiel aller Zeiten – ein Minutenprotokoll aus 100 Jahren Fußballgeschichte)에 축적되어 있다.
폰스 히크만과 그의 스튜디오는 세계의 첫 그래픽디자인을 위한 박물관인 네덜란드 브레다의 그래픽 디자인 뮤지엄(Graphic Design Museum)의 개관 전시에 초빙 되었다. 그래픽 디자인의 유럽 챔피온 쉽 전시는 2008년 6월 11일에 네덜란드 베아트릭스 여왕의 등장과 함께 개최되었다. 베를린에 위치한 그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폰스 히크만 M23은 러시아 모스크바 골든 비 어워드(Golden Bee Award Moskau)를 포함한 iF 어워드, 독일, 유럽, 미국의 아트 디렉터스 클럽, 리드어워드, 요제프 빈더 어워드 등 세계 여러 곳에서 200개가 넘는 주요 상을 받았다. 히크만의 모든 작품들은 2012년 슬로바키아의 트르나바 트리날레에서 마스터스 아이 어워드 (Master’s Eye Award)상을 수여 받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폰스 히크만은 사진에서부터 미디어이론을 넘어 축구와 대중문화까지 이르는 여러 학문 분야의 전공서적 출판에 점점 더 전념하고 있다.
관련 작품
폰스 히크만이 쓰거나 폰스 히크만에 대한 출판물
Morgen und davor – 100 Arbeiten aus 10 Jahren Klasse Hickmann, Pascal Kress, Fons Hickmann (Hrsg.) 헤르만 슈미트 출판사 (Verlag Hermann Schmidt) 2017, ISBN 978-3-87439-888-6
Anschlag Berlin – Zeitgeistmedium Plakat. Hickmann, Lindhorst-Emme (Hrsg.) 젤트만+죄네 출판사 (Verlag Seltmann+Söhne) 베를린 2015, ISBN 978-3-944721-56-9
Das Beste Spiel aller Zeiten. Büsges, Gehrs, Hickmann (Hrsg.) 카인 & 아버 출판사 (Kein & Aber Verlag) 취리히 2014, ISBN 978-3-0369-5700-5
Ästhetik & Kommunikation. Als Ob – Produktive Fiktionen. Galling-Stiehler, Haebler, Schulz, Hickmann (Hrsg.) 2014, ISBN 978-3-00-044911-6
Liebeslexikon. Hickmann, Morlok, Conrads (Hrsg.), 헤르만 슈미트 출판사 (Verlag Hermann Schmidt), 마인츠 2016, ISBN 978-3-87439-879-4
Taschenlexikon der Angst. Hickmann, Barber, Wagenbreth (Hrsg.), 헤르만 슈미트 출판사 (Verlag Hermann Schmidt), 마인츠 2012, ISBN 978-3-87439-842-8
Beyond Graphic Design – Klasse Fons Hickmann. 헤르만 슈미트 출판사 (Verlag Hermann Schmidt) 2007, ISBN 978-3874397414
Fons Hickmann – Touch Me There. 디 게슈탈텐 출판사 (Die Gestalten Verlag), 베를린/런던 2005, ISBN 3-89955-079-X
Fons Hickmann & Students. Hesign China Youth Press 2004, ISBN 7-5006-5665-3
Displace yourself_! Unrealized Material by Fons Hickmann. 빈 2002
Parallelwelten. Fons Hickmann (Hrsg.) 디 게슈탈텐 출판사 (Die Gestalten Verlag), 베를린/런던 2000 ISBN 3-931126-51-X
참고 문헌
폰스 히크만의 사진 및 문장을 내포하는 출판물
Von erfolgreichen Designer lernen. 갈릴레오 출판사 (Galileo Press) 2014, ISBN 978-3-8362-2540-3
Ulmer Gespräche: Fons Hickmann - Pop Politics. IFG Ulm, Regula Stämpfli, Epubli Verlag 2012 ISBN 978-3-8442-2636-2
New Masters of Poster Design. John Foster, Rockport Publishers 2008 ISBN 978-1592534340
5 × Berlin. Designfestival Chaumont. 피라미드 출판사 (Pyramid Press), Paris 2006, ISBN 2-35017-035-7
100 Beste Plakate, KEINE KUNST - NO ART. 헤르만 슈미트 출판사 (Verlag Hermann Schmidt), 마인츠 2006, mit Texten von Hickmann, Troxler, Werner ISBN 978-3874397032
Black & White Graphics. Gingko Press, Corte Madera 2004, S. 8–9 und 134–139
Graphic Design for the 21st Century. 타셴 출판사 (Taschen Verlag), 쾰른 2003, S. 266–271
AREA. 파이돈 출판사 (Phaidon Press), 뉴욕 2003, S. 140–143
각주
외부 링크
Fons Hickmann m23
Klasse für Grafik Design
11 Designer für Deutschland
Fons Hickmann Interview Novum
PAGE online: Gestalter im Gespräch: Fons Hickmann
Shutterstock: Analog Mensch Digital: Interview Fons Hickmann m23
it's nice that: Fons Hickmann selects a vintage atlas and a found collection of X-rated mags
독일의 미술가
살아있는 사람
1966년 출생 | https://en.wikipedia.org/wiki/Fons%20Hickmann | Fons Hickmann | Fons Hickmann (born 1966) is a German graphic designer and professor of Communication Design at the Berlin University of the Arts. He is the founder and director of the design studio Fons Hickmann m23.
Life and career
Hickmann was born in the German city of Hamm and studied photography and communication design combined with philosophy at the University of Applied Sciences Düsseldorf, and aesthetics and media theory in Wuppertal. In 2001 Hickmann and Gesine Grotrian-Steinweg founded the design studio Fons Hickmann m23 in Berlin. Hickmann serves as its director. The emphasis of the studio's work is on the development of complex communication systems and corporate design as well as book, poster, magazine and web design. The studio has received numerous international awards, and its works have been represented at every international design biennial.
Hickmann was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Applied Arts Vienna from 2001 to 2007, before taking over the professorship in Graphic Design in the Berlin University of the Arts Faculty of Design in 2007. Previously, he had taught at the Universities of Essen and Dortmund, and gave lectures and seminars in, among other places, London, Ljubliana, Istanbul, Beijing and Shanghai. He is an appointed member of the Type Directors Club of New York and the Art Directors Club Germany, as well as of the Alliance Graphique Internationale.
Hickmann and his colleagues promoted the initiative "11 Designers for Germany" which tried to bring a consciousness of graphic design into the public sphere. The group received wide media attention for their effort to prevent the adoption of an embarrassing logo for the 2006 FIFA World Cup in Germany.
Hickmann and his studio were invited to exhibit at the opening of Museum of the Image (MOTI) in the Netherlands, the world's first graphic design museum. The exhibition, European Championship of Graphic Design was opened by Queen Beatrix in June 2008.
From 2012 to 2014 he was a member of the expert jury of the "Design Award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Since 2018 he is president of the professional association 100 Beste Plakate (100 Best Posters).
Publications
Hickmann's publications include:
The Neubad Plakat - A Contemporary Design Phenomenon. Erich Brechbühl, Fons Hickmann, Lea Hinrichs, Sam Steiner, Sven Lindhorst-Emme (Hrsg.) slanted publisher 2023 ISBN 978-3-948440-49-7
Morgen und davor – 100 Arbeiten aus 10 Jahren Klasse Hickmann. Pascal Kress, Fons Hickmann (Hrsg.) Verlag Hermann Schmidt 2017, ISBN 978-3-87439-888-6
Das beste Spiel aller Zeiten! (2014) (with Markus Büsges and Oliver Gehrs). Kein & Aber.
Von erfolgreichen Designern lernen (2014) (with Boris Kochan, Rolf Mehnert, Daniel Rothaug, Raban Ruddigkeit, and Jochen Theurer). Galileo Design.
Beyond Graphic Design (2007). Verlag Hermann Schmidt.
Touch Me There (2005). Die Gestalten Verlag.
Fons Hickmann & Students (2004). China Youth Press.
Displace yourself! (2002). University of Applied Arts Vienna (published in conjunction with his retrospective exhibition in Vienna)
References
Further reading
Jorge Chamorro (Hrsg.): Collage meets Design. Hoaki 2023 ISBN 978-84-17656-89-8 S. 132–137
5 x Berlin. Designfestival Chaumont. Pyramid Press, Paris 2006,
AREA, Phaidon Press, New York (2003) p. 140 – 143
Black & White Graphics Gingko Press, Corte Madera (2004) p. 08 – 09, 134 – 139
Graphic Design for the 21st Century, Taschen Verlag Cologne (2003), p. 266 – 271
External links
Fons Hickmann m23
11 Designers for Germany
Prof. Fons M. Hickmann, Berlin University of the Arts
it's nice that: Fons Hickmann selects a vintage atlas and a found collection of X-rated mags
German graphic designers
German poster artists
Graphic design studios
Living people
1966 births
Academic staff of the Berlin University of the Arts |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95%84%EC%9D%B4%EB%82%98%20%EC%B9%B4%ED%8C%8D | 우아이나 카팍 | 우아이나 카팍()은 잉카 제국의 세 번째 사파 잉카이자, 하난 왕조에서 배출한 여섯 번째 왕이다. 다른 사파 잉카들과 같이 그의 이름에는 긴 수식어가 붙어있는데, 그의 정식 이름은 '우아이나 카팍 잉카 사팔라 투쿠이 라크타 우야'로, 한국어 뜻으로 해석하면 '위대한 지배자 우아이나 카팍, 모든 자의 의견을 듣는 자'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의 이름은 '티투 쿠스 왈파'였다. 투팍 잉카 유팡키의 뒤를 이어 잉카 제국을 다스렸다. 잉카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황제이기도 하다.
가족 관계
우아이나 카팍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가 쿠스코에서 자랐다는 점과, 1468년에 쿠엥카 부근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설은 내려온다. 그는 잉카 제국을 대대적으로 확장한 그의 아버지 투팍 유팡키의 뒤를 이어 제국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우아이나 카팍의 첫 번째 아내는 그의 이복누이였던 쿠시 르메이였다. 그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태어나지 못했지만, 우아이나 카팍은 다른 여자들 사이에 50명의 넘는 아들들과 200명이 넘는 자손들을 두었다. 나중에 우아이나 카팍은 그의 또다른 이복누이인 라와 오클로와 결혼하여 나중에 황제로 즉위하는 우아스카르를 낳게 된다.
그가 낳은 또다른 아들들에는 황제에 즉위하는 아타우알파, 투팍 왈파, 망코 잉카, 파울루 잉카 등이 있다. 나중에 이들 중 몇몇은 스페인인들에 의해 각자 명목상의 사파 잉카에 오른다.
그는 쿠시 르메이와 라와 오클로 외에도 오시카, 라리, 아나왈케, 콘타와추 등 50명이 넘는 아내들을 두었다.
통치
우아이나 카팍은 잉카 제국의 영역을 남쪽으로 넓혀 현재의 칠레와 아르헨티나까지 진출했다. 또한 제국의 국경을 북쪽으로도 크게 넓혀, 현재의 에콰도르와 남부 콜롬비아까지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특히 현재의 에콰도르, 당시에는 키토 왕국이었는데, 우아이나 카팍은 키토 왕국의 여왕과 결혼을 통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온 왕국과의 불화를 끝내고 결국 잉카 제국의 보호 아래에 두는 방식으로 국력을 높였다. 이 때, 이 둘 사이의 결합으로 인해 나중에 사파 잉카의 자리에 오르는 아타우알파가 태어나게 된다. 키토 왕국의 여왕과 잉카 제국의 황제 사이에서 태어난 아타우알파는 당연히 키토 왕국령의 정당한 계승자였고, 후에 우아이나 카팍의 명령에 따라 그 곳을 다스리게 된다.
우아이나 카팍은 에콰도르를 점령한 후 점점 그 곳에 매력을 느꼈고, 끊임없이 남쪽에서 인력과 기술자들을 불러와 그 곳에 새로운 도시들을 세웠다. 당시 제국의 수도는 남쪽에 있던 쿠스코였지만, 우아이나 카팍은 에콰도르에 새로운 제 2의 수도를 건립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잉카 제국의 황제로서, 우아이나 카팍은 에콰도르 지역에 많은 천문대들을 건설하였으며 투메밤바와 같은 요새도시들을 강화하여 제국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는 현재 볼리비아에 있는 코차밤바에 2,000여개가 넘는 곡물 저장 창고를 지어 그 곳을 중요한 농경 지역이자 행정 수도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한편 에콰도르 북쪽에서는, 잉카 제국의 군대가 아마존 분지 일부를 점령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원주민들의 극렬한 반격과 기후 탓에 실패하고 물러나야 했다.
우아이나 카팍은 유난히 북부 안데스 산맥의 고산지대를 좋아하였으며 그 곳에 별장을 지어 많은 유희를 즐겼다. 그는 키토에서 사망하였는데, 그의 시신을 미라화하기 위해 쿠스코로 옮기던 중, 그가 에콰도르 지역에서 가장 좋아하던 도시에 잠시 머무르며 그의 영혼을 기렸다.
잉카 제국은 그의 통치 하에 최대 판도를 자랑하며 최전성기를 맞는다. 제국의 영토는 볼리비아,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에콰도르에 모두 걸쳐져 있었고, 눈덮인 산맥에서 질퍽한 늪지까지 남아메리카 대륙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의 정복 활동으로 인해 200개가 넘는 부족, 왕국들이 잉카 제국의 깃발 아래 모였으며, 제국은 서쪽으로는 태평양, 남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 동쪽에는 아마존 우림을 곁에 두었으며, 남북으로 무려 3,500km나 되는 영토를 차지했다.
그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군주였으며, 제국 전역에 도시, 사원, 무덤, 곡물 저장 창고들을 세워 신민들을 보살폈다. 그는 잉카 고유의 건축 양식, 예를 들어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석재만을 정교하게 깎아 쌓아올리는 건축기법, 계단식 농업 등 다양한 기술들을 각국에 전파하였다. 또한 이 때에 잉카 제국의 도로망이 크게 확장되는데,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스페인인들의 침략에 유용하게 쓰였다.
우아이나 카팍은 1515년에 스페인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제국의 영토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죽음
우아이나 카팍은 콜롬비아 지역에서의 원정을 끝내고 키토로 돌아오는 동안 갑작스런 고열과 두통에 시달리게 되고, 152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는 스페인인들이 바다를 건너오며 함께 옮겨온 천연두, 홍역과 같은 질병들에 잉카인들이 전혀 면역이 되어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우아이나 카팍 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잉카인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들 가운데에는 우아이나 카팍의 형이었던 아퀴 투팍 잉카와, 우아이나 카팍의 공식 후계자였던 니난 쿠유치 등이 있었다. 니난 쿠유치가 우아이나 카팍보다 먼저 세상을 뜨자, 우아이나 카팍은 2명의 아들들에게 제국을 양분하여 주기로 결정하는데, 그가 더 좋아했던 아들이었던 아타우알파에게는 키토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북쪽 부분, 또다른 아들인 우아스카르에게는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남쪽 부분을 주었다. 이와 같은 분할 방식은 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잉카 제국의 국력이 크게 떨어진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처럼 보였으며, 우아스카르가 아타우알파를 공격하기 전까지, 약 4~5년간 제국은 평화롭게 유지되었다.
우아스카르는 당시 쿠스코에 있던 아타우알파를 급습, 감옥에 가두지만, 아타우알파는 그의 아내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하여 키토로 도망치게 된다. 그 곳에서 아타우알파는 점차 우아스카르를 지지하던 장군들을 포섭하고, 군대를 모아 우아스카르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그를 감옥에 넣게 된다.
미라
모든 잉카 제국의 사파 잉카, 즉 황제들은 죽은 후 시체를 미라화한다. 당연히 우아이나 카팍의 시체 또한 미라화되어 쿠스코의 신전에 모셔지게 되는데, 나중에 스페인인들이 밀고 들어오자 우아이나 카팍의 시종들과 귀족들은 그의 미라를 옮겨 몰래 비밀스러운 신전에 숨기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1599년에 이 미라는 결국 스페인 군대에 의해 발견되고 말았고, 다른 10여구의 황제들의 미라와 함께 이 미라도 리마에 있던 병원에 전시용으로 옮겨지게 된다. 하지만 미라들은 리마의 상대적으로 습하고 더운 기후에 잘 버틸 수가 없었고, 곧 부패하고 악취를 풍기기 시작하자 스페인인들은 미라들을 모두 불태우거나 땅에 묻어버리게 된다.
나중에 이 병원이 있던 곳에서 고고학자들이 미라의 흔적을 찾기 위해 2001년에 조사를 시작하였으나, 빈 관만 찾고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각주
사파 잉카
잉카 제국 사람 | https://en.wikipedia.org/wiki/Huayna%20Capac | Huayna Capac | Huayna Capac (before 14931527) was the third Sapa Inca of Tawantinsuyu, the Inca Empire. He was the son of and successor to Túpac Inca Yupanqui., the sixth Sapa Inca of the Hanan dynasty, and eleventh of the Inca civilization. He was born in Tumipampa and tutored to become Sapa Inca from a young age.
Tawantinsuyu reached its greatest extent under Huayna Capac, as he expanded the empire's borders south along the Chilean coast, and north through what is now Ecuador and southern Colombia. According to the priest Juan de Velasco he absorbed the Quito Confederation into his empire by marrying Queen Paccha Duchicela, halting a long protracted war. Huayna Capac founded the city Atuntaqui and developed the city Cochabamba as an agriculture and administrative center. The Sapa Inca greatly expanded the Inca road system and had many Qullqa (storehouses) built.
Huayna Capac died in 1527, likely from a European disease introduced to the Americas by the Spaniards. The death of him and his eldest son Ninan Cuyochi sparked the Inca Civil War, in which his sons Huáscar and Atahualpa fought over succession as the next Sapa Inca. Tawantinsuyu fell to Spanish conquests shortly after Atahualpa's victory.
Names
Huayna Capac's original name was Titu Kusi Wallpa before ascending to Sapa Inca. Huayna Capac has many alternative transliterations, including Guayna Cápac, Guayna Capac, Huain Capac, Guain Capac, Guayana Capac (in Hispanicized spellings), Wayna Kapa, Wayn Capac, Wayana Qhapaq, Wayna Kapak, Wayna Capac, and Wayna Qhapaq. The name comes from Quechua wayna boy, young, young man; qhapaq "the mighty one", "the young mighty one", "powerful young one" or "powerful youth"
Subjects commonly approached Sapa Incas adding epithets and titles when addressing them, such as Wayna Qhapaq Inka Sapa'lla Tukuy Llaqt'a Uya "Unique Sovereign Wayna Qhapaq Listener to All Peoples".
Background and family
The exact place and date of Huayna Capac's birth are unknown. Though he was raised in Cusco, he may have been born in 1468 in Tumebamba (modern Cuenca) and have spent part of his childhood there. He was the son of Túpac Inca Yupanqui (ruled 1471–1493) who had extended Inca rule north into present-day Ecuador, a process continued by Huayna Capac.
Huayna Capac's first wife was his full sister, Koya "Queen" Coya Cusirimay. The couple produced no male heirs, but Huayna Capac sired more than 50 legitimate sons, and about 200 illegitimate children with other women. Huayna Capac took another sister, Araua Ocllo, as his royal wife. They had a son they named Thupaq Kusi Wallpa, later known as Huáscar.
Other sons included Ninan Cuyochi (the Crown Prince), Atahualpa, Túpac Huallpa, Manco Inca, Paullu Inca, Atoc, Konono, Wanka Auqui, Kizu Yupanqui, Tito Atauchi, Waman Wallpa, Kusi Wallpa, Tilka Yupanqu. Some of them later held the title of Sapa Inca, although some later Sapa Inca were installed by the Spaniards.
Among the daughters of Huayna Capac were Coya Asarpay (the First Princess of the Empire), Quispe Sisa, Cura Ocllo, Marca Chimbo, Pachacuti Yamqui, Miro, Kusi Warkay, Francisca Coya and others.
In addition to Kusi Rimay and Rawa Okllo, Huayna Capac had more than 50 wives including Osika, Lari, Anawarque, Kontarwachu and Añas Qolque.:143
Administration
As a "boy chief" or "boy sovereign", Huayna Capac had a tutor, Wallpaya,:218 a nephew of Túpac Inca Yupanqui. This tutor's plot to assume the Incaship was discovered by his uncle, the Governor Waman Achachi, who had Wallpaya killed.
In the south, Huayna Capac continued the expansion of Tawantinsuyu into what is now Chile and Argentina, and tried to annex territories towards the north in what is now Ecuador and southern Colombia.
According to the Ecuadorian priest Juan de Velasco Huayna Capac absorbed the kingdom of Quito into the Inca Empire. He supposedly married Paccha Duchicela, the queen of Quito.
Huayna Capac became fond of Ecuador and spent most of his time there, founding cities like Atuntaqui. Huayna Capac rebuilt Quito to make it the "second capital" of the empire, besides Cusco.
As Sapa Inca, he built astronomical observatories in Ecuador such as Ingapirca. Huayna Capac hoped to establish a northern stronghold in the city of Tumebamba, inhabited by the Cañari people. In the Sacred Valley, the sparse remains of one of Huayna Capac's estates and his country palace called Kispiwanka can still be found in the present-day town of Urubamba, Peru.
In what is now Bolivia, Huayna Capac was responsible for developing Cochabamba as an important agriculture and administrative center, with more than two thousand silos (qullqas) for corn storage built in the area. Further north in Ecuador, Huayna Capac's forces attempted to expand into the lowlands of the Amazon basin, reaching the Chinchipe River, but they were pushed back by the Shuar.
Huayna Capac acquired a special fondness for the central Peruvian Andes and its local highlights; he is recorded as having spent time relaxing in the Chinchaycocha lake on the Bombon plateau. Many Inca rafts were brought to the lake directly from Ecuador for his amusement. On its way to Cusco, after Huayna Capac's death in Quito, the procession carrying his body stopped in the vicinity of Shawsha, a city in the central Peruvian Andes, acknowledging the fondness that he had felt for the region, and because the local inhabitants had been some of the most loyal to its causes.
Tawantinsuyu, or the Inca Empire, reached the height of its size and power under his rule, stretching over much of what is now Bolivia, Peru, Argentina, Chile, Ecuador, and southwestern Colombia. It included varying terrain from high frozen Andes to the densest swamps. His subjects spanned more than two hundred distinct ethnic groups, each with their own customs and languages. The empire spanned north to south, comprising the Pacific Ocean coast on the west, the Andes in the southeast and the Amazon Basin on the east. A dedicated ruler, Huayna Capac did much to improve the lives of his people. In addition to building temples and other works, Huayna Capac greatly expanded the road network. He had qollqa built along it for food so that aid could be quickly rushed to any who were in danger of starvation.
Huayna Capac knew of the Spanish arrival off the coast of his empire as early as 1515.
Death and legacy
Huayna Capac died in 1527. When Huayna Capac returned to Quito he had already contracted a fever while campaigning in present-day Colombia (though some historians dispute this), likely resulting from the introduction of European disease like measles or smallpox, The Spaniards had carried a wide variety of deadly diseases to North, Central and South America; and the Native Americans had no acquired immunity against them. Millions of Central- and South Americans died in that epidemic including Huayna's brother, Auqui Tupac Inca, and Huayna's would-be successor and eldest son, Ninan Cuyochi. According to some sources, his sons Atahualpa and Huáscar were granted two separate realms of Tawantinsuyu: his favorite Atahualpa, the northern portion centered on Quito; and Huáscar, the southern portion centered on Cusco. According to other sources, Atuahualpa was acting as provincial governor on behalf of his brother. The two sons reigned peacefully for four to five years before Huáscar (or possibly Atahualpa) decided to grab power.
Huáscar quickly secured power in Cusco and had his brother arrested. However, Atahualpa escaped from his imprisonment with the help of his wife. Atahualpa began securing support from Huayna Capac's best generals, Chalcuchímac and Quizquiz, who happened to be near Quito, the nearest major city. Atahualpa rebelled against his brother and won the ensuing civil war, imprisoning Huáscar at the end of the war. Huayna Capac's city of Tumebamba was destroyed during the war. The Spanish Francisco Pizarro and his men ascended into the Andes just as Atahualpa was returning to Cusco after the successful conclusion of his northern campaigns. After launching a surprise attack in Cajamarca and massacring upward of 6,000 Incan soldiers, Pizarro took Atahualpa prisoner. Pizarro's ransom of Atahualpa and his subsequent execution marked the immediate turning point of the Spanish conquest of Tawantinsuyu.
Lost mummy
All the Inca emperors had their bodies mummified after death. Huayna Capac's mummy was housed in his palace in Cusco and was seen by the Spanish conquistadors. Later, it was taken from Cusco to his royal estate of Kispiwanka where it was hidden from the Spanish by Huayna Capac's relatives and servants. At some point it was taken back to Cusco, where it was discovered in 1559 by the Spanish. Along with mummies of 10 other Inca emperors and their wives, the mummy was taken to Lima where it was displayed in the San Andres Hospital. The mummies deteriorated in the damp climate of Lima and eventually they were either buried or destroyed by the Spanish.
An attempt to find the mummies of the Inca emperors beneath the San Andres hospital in 2001 was unsuccessful. The archaeologists found a crypt, but it was empty. The mummies may have been removed when the building was repaired after an earthquake.
References
Further reading
Sarmiento de Gamboa, Pedro. The History of the Incas.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07. Originally published in Spanish in 1572. .
Helen Pugh, Intrepid Dudettes of the Inca Empire (2020)
1464 births
1527 deaths
15th-century Sapa Incas
16th-century Sapa Incas
Inca emperors
People from Azuay Province
Deaths from smallpox |
https://ko.wikipedia.org/wiki/%EC%98%81%ED%98%BC%EC%88%98%EC%84%A0%EA%B3%B5 | 영혼수선공 | 《영혼수선공》은 2020년 5월 6일부터 2020년 6월 25일까지 방영된 KBS 2TV 수목드라마이다.
기획 의도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닌 '치유'하는 것이라고 믿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마음성형 메디컬 드라마
방송 시간
등장인물
주요 인물
신하균 : 이시준 역 - 30대 후반, 은강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조교수, 세상에 둘도 없는 괴짜 의사
정소민 : 한우주 역 (아역 임하비) - 30대 초 중반, “환자이나 환자가 아닌, 연극으로 정신질환자들을 돕는 뮤지컬 배우”. 금방 차가웠다가 금방 뜨거워지고, 감정의 높낮이가 극과 극을 오가는 물과 불의 여자
태인호 : 인동혁 역 - 30대 후반, 은강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교수, 이시준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시에 라이벌.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뇌! 뇌가 마음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의사. 정답은 한 알의 약에 담겨있다고 믿는 정신과 의사.”
박예진 : 지영원 역 - 30대 후반, 지영원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원장. 시준, 동혁과 친구 사이로 대학 때부터 절친한 관계
주민경 : 공지선 역 - 30대 초 중반, 우주의 절친한 친구이자, 식당 공밥집 운영. 은강 병원 전공의인 공지희의 친언니
은강병원 사람들
정해균 : 박대하 역 - 50대 후반,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정교수. 의사들의 의사. 이시준, 인동혁을 비롯한 레지던트와 인턴들의 스승
안동구 : 노우정 역 - 30대 초반, 전공의 레지던트 3년 차 의사. 시준의 팀원
박한솔 : 공지희 역 - 20대 후반, 공지선의 동생. 전공의. 레지던트 1년 차. 시준의 팀원
하영 : 강누리 역 - 20대 후반, 전공의. 레지던트 2년 차. 동혁의 팀원
장유상 : 임세찬 역 - 20대 후반, 전공의. 레지던트 1년 차. 동혁의 팀원
박수영 : 오기태 역 - 50대 후반, 은강 병원 진료부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정교수, 시준과 대립하는 인물
조경숙 : 조인혜 역 - 50대 중 후반, 은강 병원 병원장. 소화기내과 출신
박현숙 : 오화영 역 - 정신건강의학과 입원병동 책임간호사
김가란 : 장유미 역 - 20대 중 후반, 정신건강의학과 인턴. 동혁의 팀원
김강민 : 김영석 역 - 20대 중 후반, 정신건강의학과 인턴. 시준의 팀원
최정우 : 이택경 역 - 60대 중후반. 시준의 아버지. 전직 외과 의사
그 외 인물
박정언 : 판사 역
박상훈 : 박루오 역
이찬희 : 황민욱 역
지주연 : 정세연 역
정지순 : 박종우 역 -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기관사
서윤아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백홍민의 여동생 역
박예영 : 허민영 역 - 은강병원 중환자실 간호사
서은아 : 나선경 역 - 은강병원 중환자실 간호사
이지수
특별 출연
위하준 : 오유민 역 - 축구선수, 신체증상장애 환자
이성민 : 고재학 역 - 은강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
진환 : 성민호 역 - 섭식장애(이식증) 환자
김동영 : 차동일 역 - 가짜 경찰, 과대망상증 환자
이노아 : 황보영 역 - 섭식장애(거식증) 환자
송지호 : 신종식 역 - 은강병원 응급의. 도촬사 회원
강신일 : 고상모 역 - 국회의원, 틱장애 환자
오륭 : 백홍민 역 - 소방대원, 주요우울장애,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환자
반효정 : 구원숙 역 - 백홍민의 초등학교 은사
류시원 : 송민수 역 - 군 부대 중령
촬영지
가톨릭대학교 은평성모병원
유니버설아트센터
소바식당
시청률
참고 사항
본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된 '영혼수선공'이란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제일 높은 대한민국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라는 직업적 의미보단,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진료하여, 영혼을 수선해주는 사람'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모든 계층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휴먼 메디컬 드라마로 제작한 것이다.
수술 장면이 등장하는 여타 의학 드라마와는 달리,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진료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애틋한 직업관을 연출하면서, 황폐해진 영혼의 상처를 회복시키기 위한 마음성형 메디컬 드라마 '영혼수선공'의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다.
최정우와 신하균은, 영화《고지전》이후 무려 9년 여만에 전격으로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최정우와 유현기 PD는... 주말연속극《내 딸 서영이》를 비롯해... 드라마《최고의 이혼》 그리고... 드라마《영혼수선공》까지 세번째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본방송 시점이 당초 2020년 3월 25일에 방영을 개시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 문제로 인한 사회적 시국을 고려하여, 2020년 5월 6일부터 방영을 개시했다.
본 드라마는 픽션이며, 실제와 관련 없음을 밝힌다.
본 화면은 레터박스로 구성되었다.
동시간대 드라마
tvN 수목드라마
《오 마이 베이비》 (2020년 5월 13일 ~ 2020년 7월 2일)
tvN 목요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2020년 3월 12일 ~ 2020년 5월 28일)
JTBC 수목드라마
《쌍갑포차》 (2020년 5월 20일 ~ 2020년 6월 25일)
MBC 수목드라마
《꼰대인턴》 (2020년 5월 20일 ~ 2020년 7월 1일)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목록 (ㅇ)
2020년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목록
각주
외부 링크
영혼수선공 홈페이지
2020년 드라마
한국방송공사 수목드라마
한국방송공사의 의학 드라마
정신 질환을 소재로 한 작품
이향희 시나리오 작품
202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2020년에 시작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2020년에 종료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 https://en.wikipedia.org/wiki/Soul%20Mechanic | Soul Mechanic | Soul Mechanic () is a 2020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starring Shin Ha-kyun, Jung So-min, Tae In-ho and Park Ye-jin. It aired on KBS2 from May 6 to June 25, 2020.
Synopsis
A team of psychiatrists who believe in healing, and not just treating sick patients. Lee Shi-joon (Shin Ha-kyun) is happy to deal with living in a crazy world by being his eccentric self and leaning on humor to reach out to patients. He ends up being assigned a problem patient, Han Woo-joo (Jung So-min), a musical rising star with terrible anger management issues.
Cast
Main
Shin Ha-kyun as Lee Shi-joon
Jung So-min as Han Woo-joo
Tae In-ho as In Dong-hyuk
Park Ye-jin as Ji Young-won
Supporting
Joo Min-kyung as Gong Ji-sun
Jo Kyung-sook as Jo In-hye
Park Soo-young as Oh Ki-tae
Jung Hae-kyun as Park Dae-ha
Choi Jung-woo as Lee Taek-kyung
Park Hyun-suk as Oh Hwa-young
Ahn Dong-goo as No Woo-jung
Park Han-sol as Gong Ji-hee
Kim Kang-min as Kim Young-seok
Shin Ha-young as Kang Neu-ri
Baek Soo-hee as Kim Yoo-ra
Jang Yoo-sang as Im Se-chan
Oh Yoon-hong as Doctor
Kang Shin-il as Gu Won-sook
Kim Ga-ran as Jang Yoo-mi
Ji Joo-yeon as Jung Se-yeon
Kim Hyun as Patient
Park Sang-hoon as Park Luo (Patient)
Special appearances
Wi Ha-joon
Lee Sung-min
Kim Dong-young as Cha Dong-il
Ban Hyo-jung
Kim Hye-eun
Ryu Si-won
Original soundtrack
Part 1
Part 2
Part 3
Part 4
Part 5
Part 6
Ra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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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Korean Broadcasting System television dramas
2020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debuts
2020 South Korean television series endings
Korean-language television shows
South Korean medical television series
Television about mental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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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A%80%EB%A5%B4%ED%82%A4%EC%98%88%EC%9D%98%20%EB%B6%81%EB%8F%99%EC%8B%9C%EB%A6%AC%EC%95%84%20%EC%B9%A8%EA%B3%B5 | 튀르키예의 북동시리아 침공 | 2019년 튀르키예의 북동시리아 침공은 평화의 샘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진행 중인 군사작전으로, 로자바 북부에서 튀르키예 및 시리아 국민군과 시리아 민주군 및 시리아 국민군이 맞서 싸우고 있다. 2019년 10월 6일 트럼프 행정부가 쿠르드 동맹군을 지원하던 곳인 북동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군사 작전은 3일 후인 10월 9일 튀르키예 공군이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국경에 공습을 가하면서 시작되었다. 분쟁이 시작된 이후 130,000명의 사람들이 이산했고, 몇몇 시민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튀르키예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에 따르면, 쿠르드 노동자당과 연관이 있는 시리아 민주군을 테러 단체로 보고 이를 격퇴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지만, 미국과 그 동맹국은 시리아 민주군을 ISIL에 맞서 싸우는 동맹으로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부 시리아에는 안전지대가 설치되었고, 360만 명의 시리아 난민 중 일부가 이곳에 재정착할 예정이었다. 예정된 정착 지역은 쿠르드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재정착 계획은 급격한 주민 변화를 유도한다고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은 튀르키예 정부가 부인했고, 튀르키예 정부는 시리아 민주군에 의해 바뀐 구성을 돌려놓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시리아 민주군 측의 자료에 따르면 공세 동안 튀르키예군이 아인 이사 감옥 일대를 폭격하면서 750명의 ISIL 연계자들이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이와는 반대로, 튀르키예 측 자료에서는 시리아 민주군이 텔아브야드 감옥에 있는 ISIL 수감자를 석방시켰다고 주장한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튀르키예 측의 주장을 지지했지만, 미국 상원의원들은 튀르키예 지원 자유 시리아군이 수감자들을 석방시켰다고 말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 반대했다.
유럽 연합, 아랍 연맹, 이란, 이스라엘, 인도, 영국, 아르메니아 등 여러 국가가 튀르키예의 공세를 아랍 국가와 그 주권에 대한 공격이자 "잠재적으로 심각한" 인도주의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행동으로 보고 터키를 비난했다. 여러 유럽 연합 회원국들은 튀르키예에 대해 무기 제재를 가했고, 유럽 연합 각국은 튀르키예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미국은 시리아의 공세에 대응해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경제 제재의 수위를 높이겠다는 의도를 밝혔다.
여파
지정학 변화
튀르키예의 공세에 대응해, 러시아가 다마스쿠스의 시리아 정부와 쿠르드군 사이의 협상을 개시했다. 시리아 쿠르드족 총사령관인 마즈룸 아브디는 블라디미르 푸틴과 바샤르 알아사드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스크바와 바샤르 알아사드와 함께 일한다면, 그들과 고통스러운 협정을 맺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협정과 우리 민족의 학살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삶을 무조건 선택할 것입니다." 합의의 세부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리아 민주군이 시리아군에 통합되고, 북동시리아는 시리아 정부의 직접적인 통치에 놓일 것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시리아 쿠르드 정부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가 몇몇 국경 지역의 보안을 인수하는 것이 합의되었지만, 쿠르드의 자치 행정부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쿠르드 자치가 심각하게 줄어들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는 쿠르드족이 미군의 철수로 인해 촉발된 튀르키예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고, 터키와 수니파 반군 민병대에 적대적인 아사드 휘하의 시리아 정부군이 쿠르드족의 도움 요청 이후 북동시리아에 거점을 다시 마련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현재 상황에 관하여, 마즈룸 아브디는 "우리는 현재의 위기에 실망하고 좌절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공격 당하고 있고, 우리의 안전은 우리의 주요한 걱정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람을 지키는 데 어떻게 최선을 다할까?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우리의 동맹국인가?"라고 말했다.
10월 15일, 러시아 국방부 장관이 발표한대로, 러시아군이 튀르키예군과 시리아군 사이의 접촉 노선을 따라 지역을 순찰하기 시작했고, 갑작스런 미군 철수로부터 생긴 안보의 공백을 러시아가 채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디오는 러시아 병사들과 기자들이 미군이 버리고 간 기지를 관광하는 것을 보여준다.러시아의 시리아 특수 사절단인 알렉산드르 라브렌티예프는 터키의 시리아 공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경고하며, 터키군과 시리아군 사이의 분쟁을 막으려고 함을 언급했다.
몇몇 미군 법조계는 쿠르드 동맹군을 버린 것을 비판하며 쿠르드족이 미국과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시리아 아사드 정권과 러시아, 이란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모스크바의 몇몇 관측에 따르면, 상황은 러시아의 즉각적인 이익이 되지 못하며, 러시아가 지원하는 시리아 정부와 튀르키예의 시리아 개입이 충돌함에 따라 시리아에서 미국이 철수한 이후 러시아가 중재자의 역할을 맡을 기회는 줄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이 철수한 이래로, 러시아는 중동의 필수적인 브로커라는 지위를 굳히고 있다고 논평자가 말했다.
시리아에서의 상황으로 인해 튀르키예와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 사이의 분립의 조짐이 보였고, NATO가 상황을 효율적으로 조정할 능력이 없고, 튀르키예 정부는 NATO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다고 비쳤다. 더욱이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미군, 그리고 미국 정치가들은 튀르키예의 NATO 가입이 미국이 튀르키예와 시리아 쿠르드군 사이의 분쟁에 개입할 수 없는 주요한 이유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더 보기
시리아 북부 완충 지대
각주
2019년 분쟁
2019년 튀르키예
2019년 시리아
시리아-튀르키예 관계
로자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관한 논쟁
2019년 10월 | https://en.wikipedia.org/wiki/2019%20Turkish%20offensive%20into%20north-eastern%20Syria | 2019 Turkish offensive into north-eastern Syria | The 2019 Turkish offensive into north-eastern Syria, code-named Operation Peace Spring () by Turkey, was a cross-border military operation conducted by the Turkish Armed Forces (TSK) and the Syrian National Army (SNA) against the Syrian Democratic Forces (SDF) and later Syrian Arab Army (SAA) in northern Syria.
On 6 October 2019, the Trump administration ordered American troops to withdraw from northeastern Syria, where the United States had been supporting its Kurdish allies. The military operation began on 9 October 2019 when the Turkish Air Force launched airstrikes on border towns. The conflict resulted in the displacement of over 300,000 people and has caused the death of more than 70 civilians in Syria and 20 civilians in Turkey. Human rights violations have also been reported. Amnesty International stated that it had gathered evidence of war crimes and other violations committed by Turkey and Turkish-backed Syrian forces who are said to "have displayed a shameful disregard for civilian life, carrying out serious violations and war crimes, including summary killings and unlawful attacks that have killed and injured civilians".
According to Turkish President Recep Tayyip Erdoğan, the operation was intended to expel the SDF—designated as a terrorist organization by Turkey "due to its ties with the Kurdistan Workers Party (PKK)", but considered an ally against ISIL by the Combined Joint Task Force – Operation Inherent Resolve—from the border region as well as to create a 30 km-deep (20 mi) "safe zone" in Northern Syria where some of the 3.6 million Syrian refugees in Turkey would resettle. As the proposed settlement zone is heavily Kurdish demographically, this intention has been criticized as an attempt at ethnic cleansing, a criticism rejected by the Turkish government who claimed they intended to "correct" the demographics that it alleges have been changed by the SDF.
The Turkish operation was met with mixed responses from the international community, including condemnations as well as support for the operation for the settlement of refugees in Northern Syria. Although Turkey claimed self-defense, according to international law experts it is an illegal use of force. While originally acknowledging Turkey's "right to defend itself", on 15 October, Russia hardened its position against the operation and deployed troops. Ten European nations and Canada imposed an arms embargo on Turkey, while the U.S. imposed sanctions on Turkish ministries and senior government officials in response to the offensive in Syria. The Assad-led Syrian government initially criticized the SDF for the Turkish offensive, accusing it of separatism and not reconciling with the government, while at the same time also condemning the foreign invasion of Syrian territory. However, a few days later, the SDF reached an agreement with the Syrian government, in which it would allow the Syrian Army to enter the SDF-held towns of Manbij and Kobanî in an attempt to defend the towns from the Turkish offensive. Shortly thereafter, Syrian state broadcaster SANA announced that Syrian Army troops had started to deploy to the country's north. Turkey and the SNA launched an offensive to capture Manbij on the same day.
On 17 October 2019, U.S. Vice President Mike Pence announced that the U.S. and Turkey agreed on a deal in which Turkey would agree to a five-day ceasefire in Syria in return for a complete withdrawal by the SDF from its positions on the Syria-Turkey border. On 22 October 2019, Russian President Vladimir Putin and Turkish President Recep Tayyip Erdoğan reached a deal to extend the ceasefire by 150 additional hours if the SDF would move 30 kilometers away from the border, as well as from Tal Rifaat and Manbij. The terms of the deal also included joint Russian–Turkish patrols 10 kilometers into Syria from the border, except in the city of Qamishli. The new ceasefire started at 12pm local time on 23 October. The captured area remains part of the Turkish occupation of northern Syria.
Background
Turkish motives
Turkey has complained about a supposed presence of PKK-related forces at its southern border since 2012, when the first YPG pockets appeared during the Syrian Civil War. Following the 2014 Siege of Kobanî and the expansion of YPG/SDF forces and administration, Erdoğan's government considered the force a national security threat. The 2013–2015 peace process collapsed in July 2015, resulting in a war between PKK and Turkish forces. Like other regions in southeast Turkey, regions north of the border with Syria have seen numerous PKK-related deaths. According to a Crisis Group death toll analysis based upon Turkey government and Turkish media publications, the border regions north of SDF-controlled areas had 8 Turkey security forces and 5 civilians killed in PKK-related violence in 2018 and 2019 prior to the offensive. The Şırnak region had 26 security forces and 6 civilian deaths over the same period. Crisis Group did not specify if "PKK-related" deaths are linked to Syria's YPG and SDF, or from Turkey or Iraqi PKK.
Recent increase in jobless rate and electoral collaboration of opposition parties lead to significant AKP defeats in the 2019 Istanbul mayoral election, signaling difficulties for the leadership party. Military operations are known to boost nationalism and Turkey executive's popularity. It is also seen as an effective way to break apart opposition alliances, between pro-Kurdish and pro-peace representatives actively criminalized by the government, and other opposition parties who are faced with the dilemma of betraying the informal political alliance in order to showcast popular patriotism. Moreover, another driver for the Turkish operation into Syria is the domestic politics involving the 3.6 million Syrian refugees residing in Turkey—the highest number of refugees hosted by any country—which has led to increasing public dissatisfaction and therefore public support and pressure for intervention. The negative sentiment against refugees among the Turkish electorate allows Erdogan and his AKP to benefit from moving refugees back to Syria. According to CrisisGroup analysis, this political strategy has cost AKP half of its conservative Kurds' supports since 2015.
Immediate context rebuff
Turkey and the United States struck a deal in August 2019 after months of Turkish threats to unilaterally invade northern Syria. The United States viewed the Syrian Democratic Forces as one of its key allies in the military intervention against ISIL in Syria, while Turkey viewed the group as an extension of the Kurdistan Workers Party (PKK), which it considers a terrorist group. The agreement established the Northern Syria Buffer Zone, which aimed to reduce tensions by addressing Turkey's security concerns with monitoring and joint patrols, while still allowing the NES to retain control over the areas that it had under its control at that time. The agreement was received favorably by the U.S. and SDF, but Turkey was generally dissatisfied with it. Turkey's dissatisfaction led to numerous Turkish efforts to expand the area covered by the buffer zone, secure Turkish control over parts of it, or relocate millions of refugees into the zone, with all of these efforts failing in the face of firm SDF resistance and American ambivalence.
Despite the official start of U.S.-Turkish ground patrols, the dismantling of SDF fortifications, and the withdrawal of YPG units from parts of the buffer zone, tensions continued to rise as Turkey levied yet more demands on the SDF—all of which the SDF denied, as they felt they had accepted a harsh compromise by permitting Turkish troops to take part in joint patrols with their American counterparts in northern Syria. Turkey's dissatisfaction with the status quo of the agreement grew into open hostility, with the Turkish president openly posing an ultimatum against the SDF. The ultimatum was ignored by the group and Turkey declared its "deadline" to have expired at the start of October that same year.
Prelude
Preparations for the offensive began in July 2019, with the final preparation in October starting with the withdrawal of American forces from positions near the Turkish border. This withdrawal followed a phone call between Turkish President Recep Tayyip Erdoğan and United States President Donald Trump, wherein Erdoğan informed President Trump that Turkey would "soon" be carrying out a planned military offensive into Kurdish-administered northern Syria against SDF-held areas east of the Euphrates river. While the U.S. government stated it did not support the Turkish-led offensive, the White House also announced on 6 October 2019 that it would not interfere, and would withdraw all personnel in the area to avoid a potential U.S.-Turkish standoff; U.S. Secretary of State Mike Pompeo denied that this amounted to giving Turkish forces a "green light" to attack the SDF while a spokesman for the SDF called the U.S. withdrawal a betrayal. The US also reportedly cut off aid to the SDF in order to avoid arming them against a NATO ally.
On 8 October 2019, the Turkish military reportedly bombed a convoy of weapons vehicles heading from Iraq into Syria destined for the SDF. However the SDF did not retaliate and no casualties were reported as a result of the air strike. On the same day Russian special forces opened a crossing on the Euphrates river between areas held by the Syrian Government and SDF in the Deir ez-Zor Governorate. While the SDF stated that the Syrian military was preparing to enter the city of Manbij in northeastern Aleppo, the Syrian government responded by saying the build up of the Syrian military near Manbij was being done in order to prevent the Turkish military from entering the city. On the same day, Turkish forces shelled Ras al-Ayn and fired machine guns in the vicinity of the city.
Operation timeline
9 October 2019
The operation began on 9 October 2019, with Turkish airstrikes and howitzers targeting the SDF-held towns of Tell Abyad, Ras al-Ayn where thousands of people were reported to have fled the town, Ayn Issa and Qamishli. The start of the incursion was symbolic, as it was the 21st anniversary of the PKK leader Abdullah Öcalan's expulsion from Syria in 1998 by the government of Hafez al-Assad.
In response to the cross-border shelling, SDF's spokesman stated that Turkey was targeting civilians. Six rockets were later launched at the Turkish city of Nusaybin as a response by the YPG, and two reportedly hit the Turkish town Ceylanpınar. The SDF also announced in response to the start of the Turkish operation they would be halting anti-ISIL operations, and that two civilians had been killed. In response to the airstrikes, the SDF called upon the United States to establish a no-fly zone over northern Syria.
During the day, under pressure from Congressmen and public opinion, Trump sent a letter to Erdoğan urging him to come to an agreement with General Mazloum and avoid any further conflict. Enclosed within the letter was a copy of a letter written by the General detailing concessions the General would be willing to make. Trump also threatened economic retaliation, stating "I don't want to be responsible for destroying the Turkish economy." According to official sources, Erdoğan took offense to the letter, reportedly throwing it in the trash. The White House released the letter to the press on 16 October, receiving wide ridicule.
Ground offensive
By the end of the day, the Turkish military announced that the ground phase of the operation had begun from three points including Tell Abyad.
10 October 2019
Before dawn on the morning of 10 October 2019, the Turkish military officially began the ground offensive against the SDF; they also announced they had hit 181 targets in northern Syria, and 14,000 rebels backed by Turkey, including Ahrar al-Sharqiya rebel group, Sultan Murad Division, and Hamza Division, are also taking part in the Turkish-led offensive. According to a research paper published this October by the pro-government Turkish think tank SETA, "Out of the 28 factions [in the Syrian National Army], 21 were previously supported by the United States, three of them via the Pentagon’s program to combat DAESH. Eighteen of these factions were supplied by the CIA via the MOM Operations Room in Turkey, a joint intelligence operation room of the 'Friends of Syria' to support the armed opposition. Fourteen factions of the 28 were also recipients of the U.S.-supplied TOW anti-tank guided missiles."
The SDF said they repelled a Turkish advance into Tell Abyad. Later during the day, clashes reportedly broke out between the SDF and Turkish-aligned forces near al-Bab. Turkish-led forces made advances around the area of Tell Abyad and captured the villages of Tabatin and Al-Mushrifah. By nightfall Turkish Armed Forces declared control of 11 villages. As fighting went on around Tell Abyad, the Syrian National Army announced it captured the villages of Mishrifah, Al-Hawi, Barzan, Haj Ali and a farm east of the city. During Turkish air strikes during the fighting, SDF stated that the Turkish air force hit a prison that was holding captured ISIL fighters. Turkish media reported in the late evening that 174 SDF fighters were killed, wounded or captured.
Turkish President Recep Tayyip Erdoğan stated that day that 109 SDF fighters had been killed in the operation as well as an unspecified number of fighters wounded and captured. In a speech to lawmakers from Erdoğan's AKP, the Turkish president also threatened to flood Europe with 3.6 million refugees if European nations continued to criticize the military operation, in particular if they labelled it an invasion.
70,000 people fled from border towns in the SDF following Turkish bombardment.
According to Turkey's Ministry of National Defence, one Turkish soldier was killed by the YPG.
11 October 2019
Two journalists were wounded in Nusaybin, when the building they were filming from came under fire from Qamishli across the border by SDF fighters. The incident was broadcast live on Turkish TV channels, according to Turkish sources.
Three civilians were killed in Suruc by SDF shelling. In response to the attack, Turkey shelled YPG positions in Kobani, across the border from Suruç. Eight more civilians were killed later in the day in Nusaybin and 35 were injured by SDF mortar attack, raising the total civilians killed by SDF shelling in Turkey to 18, according to Turkish sources.
Seven civilians were killed in Syria by Turkish forces in the Tal Abyad area including three killed by Turkish snipers according to SOHR.
As reported on this day, according to the Turkish Ministry of National Defence, a total of 399 SDF fighters were killed, captured or wounded since the start of the Turkish military operation.
The Syrian National Army stated to have taken the village of Halawa which is southeast of Tell Abyad. TAF and SNA announced the capture of Tell Halaf later in the day and released a video from inside the town.
In the city of Qamishli, a suspected ISIL car bomb killed five civilians, while a reported Turkish artillery strike hit a nearby prison, and five suspected ISIL members, previously detained in SDF custody, escaped according to SDF.
In the city of Kobanî, the area immediately around a U.S. special forces base experienced heavy shelling by Turkish artillery; the U.S. troops did not retaliate, but withdrew after the shelling ended. Turkey responded by denying that it targeted the U.S. base, instead stating that it had fired upon SDF positions. The Pentagon further raised concerns that the Turkish Army deliberately "bracketed" US Forces stationed in Kobanî with artillery fire. According to Turkish Defense Minister, the mortar attack targeting the town of Suruç earlier in the day was deliberately launched 1000 meters from the US base in Kobanî by SDF to avoid Turkish retaliation and the attack was in response.
The BBC reported that 100,000 people have fled their homes in northern Syria. The Kurdish Red Crescent (Heyva Sor) said there had been 11 confirmed civilian deaths so far. Turkey's military confirmed a soldier's death, and said three others had been wounded.
Turkey's Ministry of National Defence announced that three more soldiers had been killed by the YPG, two of which were killed in a mortar attack on a Turkish military base in a Turkish-occupied part of Syria. This brought the total number of Turkish soldiers killed in the operation to four. The SOHR reported that the actual number of Turkish soldiers killed in the operation was six. Later in the day, the SOHR reported that at least 12 Turkish border guards were either killed or wounded in a confrontation with the SDF in Kobanî.
12 October 2019
Turkish Armed Forces and Syrian National Army said they reached the M4 highway, deep into Syrian territory and effectively cutting the supply line between Manbij and Qamishli. SNA also said they captured 18 villages close to M4 highway in eastern Raqqah.
Turkish interior minister Süleyman Soylu announced that nearly 300 mortar shells had been fired at Mardin Province by the SDF since the start of the operation.
Around 12:00 (UTC+03:00), the TAF and SNA stated they had captured Ras al-Ayn, but the SDF denied that Turkey had taken control of the city.
Turkish-backed members of Islamist militia Ahrar al-Sharqiya executed Hevrin Khalaf, Secretary General of the Future Syria Party. Nine civilians, including Khalaf, were executed by the Ahrar al-Sharqiya fighters at a roadblock on the M4 highway south of Tal Abyad. Turkish news source Yeni Safak reported that Khalaf was "neutralized" in a "successful operation" against a politician affiliated with a "terrorist" organization. Her execution was widely described by Western sources as a war crime under international law. A spokesman for Ahrar al-Sharqiya meanwhile announced that she was killed for being "an agent for U.S. intelligence".
A Bellingcat video solidly traces the killings to rebels backed by Turkey Ahrar al-Sharqiya.
13 October 2019
Turkish Armed Forces and Syrian National Army announced the capture of the town of Suluk, located in Tell Abyad District, in the early morning. The SOHR confirmed that the Turkish forces and SNA had taken full control of Suluk, and clashes were nearing towards Ayn Issa. The SOHR also reported that pro-Turkish forces had targeted an ambulance in the Tell Abyad area which remains missing.
The SOHR also reported that the SDF was able to regain almost all control over the contested city of Ras al-Ayn after a counterattack.
Tell Abyad captured and M4 highway cut by Turkey and SNA
Turkish Armed Forces and Syrian National Army announced in the afternoon they had captured the center of Tell Abyad. Turkish Armed Forces and Syrian National Army fully captured Tall Abyad late in the afternoon according to the SOHR. Turkish Armed Forces and Syrian National Army also cut the M4 highway according to SOHR. Turkish sources also reported that SDF shelling towards Jarablus had killed 2 Syrian civilians.
In light of the pro-Turkish forces advance on Ayn Issa, the SDF stated that 785 ISIL-linked people had escaped from a detention camp in the area, SDF also stated the escapees received assistance of the pro-Turkish forces and Turkish airstrikes. In contrast, Turkey stated that the SDF released ISIL prisoners at the Tell Abyad prison before the arrival of Turkish forces. This statement was supported by U.S. President Donald Trump, but opposed by senior U.S. officials who stated that Turkish-backed Free Syrian Army (FSA) forces were the ones freeing ISIL prisoners.
United States Secretary of Defense Mark Esper said that US was planning to evacuate all 1,000 remaining soldiers from northern Syria. US also informed SDF of its intention to withdraw from military bases in Manbij and Kobanî and had already evacuated from Ayn Issa according to SOHR and The Washington Post.
Syrian government–SDF deal
Shortly after the capture of Tall Abyad by Turkey and SNA, a deal between the Syrian government and SDF was reached whereby the Syrian Army would be allowed to enter the towns of Kobanî and Manbij in order to deter a possible Turkish military offensive in those areas.
Later an advisor to leader of AKP Recep Tayyip Erdoğan, Yasin Aktay, said there could be conflict between the two armies, if the Syrian government tries to enter northeastern Syria.
SDF commander-in-chief Mazloum Abdi said he was willing to ally with the Syrian government for the sake of saving the Kurdish population in Northern Syria from what he called a genocide.
14 October 2019
Russian and Syrian forces were reported to have been deployed at the front line between areas controlled by the Manbij Military Council and Euphrates Shield groups respectively, with further deployments to take place along the Syrian-Turkish border. In addition, the SOHR reported that the U.S. forces in the region were attempting to hinder the Russian and Syrian deployments in the region.
The SOHR reported that violent clashes had continued in Ras Al-Ayn and its countryside at the border strip, where the Turkish forces were attempting to encircle the city completely and to cut off the road between Ras Al-Ayn and Tal Tamr, under a cover of artillery shelling and airstrikes with the purpose of taking control of the city by 15 October. Turkish aerial and ground bombardment were reported to have occurred in the border town Al-Darbasiyyah targeting civilian houses which caused 4 reported injuries of medical personnel as per the SOHR.
Turkish President Recep Tayyip Erdoğan told a press conference that Turkey had received a positive response from Russia on Kobani and that Turkey was at the execution phase of its Manbij decision. Turkish Armed forces deployed additional troops to Manbij frontline as of the previous night according to Turkish sources. Turkish Minister of National Defence Hulusi Akar said that Tal Abyad and Ras al-Ayn were under Turkish control and that works were ongoing for the whole region.
The Syrian Army reportedly deployed to the town of Al-Thawrah, as well as Ayn Issa, Tell Tamer and as close as 6 km from the Syria–Turkey border. It also took over the 93rd Brigade Headquarters just south of Ayn Issa, as well as Al-Jarniyah to the east of the Euphrates. The Syrian Army further reported taking control of the Tabqa Dam. The Syrian flag was reportedly raised for the first time in years in several towns and villages in the Al-Hasakah Governorate, such as the city of Al-Yaarubiyah.
Jarabulus Military Council was reportedly to have targeted a vehicle south of Jarabulus by a guided missile leaving 2 persons dead in conjunction with an assassination that targeted members of Turkey-loyal factions south of Azaz.
Turkish Armed Forces and Syrian National Army launched a military operation to capture Manbij in the late afternoon. Turkish Armed Forces and Syrian National Army captured 3 villages in the Manbij countryside shortly after the launch of the operation according to Turkish sources. At the same time, Syrian state media stated that the Syrian Army had started entering the town.
Announcement of total U.S. withdrawal from north Syria
Later in the day, U.S. President Donald Trump announced that all U.S. personnel would withdraw from Syria except those in Al-Tanf base.
15 October 2019
The SOHR reported that a counterattack was carried out by the SDF in the outskirts and western countryside of Ras al-Ayn city, and managed to achieve an advancement in the area recovering 3 areas lost previously.
2 civilians were killed and 12 were wounded in Kızıltepe, Turkey after an SDF mortar attack according to Turkish sources.
Turkish President Erdoğan, speaking at the Turkic Council in Baku, said: "We are now announcing the establishment of a safe area 444 km from west to east and 32 km from north to south, to which the refugees in our country will return." President Erdoğan also said a total of had been captured by TAF and SNA since the start of the operation. President Erdoğan also said a Turkish soldier was killed in Manbij by Syrian Army artillery fire and that there was an intense retaliatory fire for the attack which made the regime pay a heavy price.
Syrian Army forces started entering the town of Manbij according to SOHR, but were blocked by US troops when trying to enter Kobani according to SOHR, which resulted in the convoy's return to Manbij. Syrian Army forces also entered Al-Thawrah according to Syrian government media. Later, Erdoğan told that Syrian Government troops entering Manbij is "not negative" and adding "as long as terrorists in the area are cleaned".
16 October 2019
Villages around the M4 in Jazira province were reportedly shelled by the TAF at dawn while shelling and clashes had caused power outages and a water shortage in the city of Al-Hasakah, the latter of which returned after 5 days since it had been cut off, as per a SOHR report. The SOHR also reported that clashes continued to the west of Ayn Issa as the SDF attempted to launch a counterattack where they were able to successfully regain 2 locations. Clashes had also broken out within the SDF-controlled camp in Ayn Issa between families of ISIL members and displaced civilians which resulted in 2 deaths, as per the SOHR report.
Heavy shelling and airstrikes by the TAF were reported in Ras al-Ayn with heavy fighting on the ground according to SOHR. The SOHR further reported that Turkish forces and allied factions had launched a wide scale offensive and managed to advance into parts of the Ras al-Ayn city. Turkish President Erdoğan announced that Turkey controlled over 1200 square kilometers area since start of the operation.
The Russian military deployed near Kobani on 16 October in the afternoon after crossing Qara Cossack bridge from Manbij to the east of Euphrates according to SOHR. The SOHR also reported that the Syrian Army had completed its deployment in Ayn Issa, north of Raqqa. The Syrian Army also reportedly entered the city of Kobanî at nightfall. This was precipitated by the sudden advance of the Syrian National Army towards the Kurdish-held border city.
U.S. army withdrawal from its military bases
US forces withdrew and destroyed its former air base, south of Kobanî. The airbase was the largest U.S. base in Syria, capable of landing C-130 as well as C-17 heavy transport planes.
17 October 2019
TAF and SNA forces completely besieged and captured half of Ras al-Ayn after getting around the town and cutting off the roads leading to it amid heavy clashes according to SOHR.
Turkish Interior Minister Süleyman Soylu stated that over 980 mortar shells and rockets were launched at Turkey by SDF since the start of the operation killing 20 civilians.
120-hour ceasefire
On 17 October 2019, US Vice President Mike Pence and Turkish President Recep Tayyip Erdoğan reached a deal to implement a 120-hour cease-fire for Turkey's operation in northern Syria to allow SDF to withdraw from a designated safe zone, spanning from the Turkey-Syria border to 20 miles (32 km) south. Mike Pence stated that once the military operation completely stops all sanctions imposed on Turkey by the United States would be lifted and there would be no further sanctions. According to a US statement, the safe zone would be "primarily enforced by the Turkish Armed Forces". This ceasefire deal was described as another US betrayal of the Kurds and a Kurdish surrender to Turkey by several US commentators and officials.
Turkish Foreign Minister Mevlüt Çavuşoğlu stated that it was not a ceasefire but a temporary pause to allow SDF to withdraw from the designated safe zone, after which if completed the operation would end and if not the operation would continue. The SDF commander Mazloum Abdi said that they accepted the ceasefire agreement only in the area between Tall Abyad and Ras al-Ayn.
The Syrian Kurdish politician Salih Muslim stated that "Our people did not want this war. We welcome the ceasefire, but we will defend ourselves in the event of any attack … Ceasefire is one thing and surrender is another thing, and we are ready to defend ourselves. We will not accept the occupation of northern Syria."
During the ceasefire
18 October 2019
Cautious calm prevailed at the east of Euphrates on 18 October according to SOHR with minor clashes in besieged Ras al-Ayn. The SDF claimed that Turkey was violating the ceasefire and of shelling civilian areas of Ras al-Ayn. An unnamed US official said the following day that Turkish backed forces had violated the ceasefire, and the SDF had stopped fighting.
Turkey announced it aimed to establish 12 "observation posts" in its safe zone, with President Erdoğan stating that Turkey will respond if the Syrian government "makes a mistake".
19 October 2019
SDF had not withdrawn from any positions east of Euphrates despite the passage of 37 hours of the US-Turkish agreement to suspend the Turkish military operation for 120 hours according to SOHR. SOHR also reported that since the start of the operation, Turkish Armed Forces and allies had captured an area of . Both sides claimed that the other side was violating the ceasefire. The SDF stated that Turkish forces prevented medical aid from reaching Ras al-Ain, a claim backed by SOHR. Unnamed US officials said the "ceasefire is not holding". In the afternoon the SDF said an aid convoy had been let through, after having been prevented from entering the town since Thursday.
20 October 2019
SDF withdraws from Ras al-Ayn
A Turkish soldier was killed by a mortar attack near Tal Abyad due to violations of YPG according to Turkish Defense Ministry, whilst the SDF stated that 16 fighters had been killed by Turkish forces. SDF fully withdrew from Ras al-Ayn alongside the aid convoy per SOHR. Both sides claimed that the other side made ceasefire violations.
Continued U.S. withdrawal
US forces withdrew from their airbase near Sarrin as well as their airbase near Tell Beydar and destroyed it per SOHR. US forces had completely withdrew from the countrysides of Aleppo and Raqqa per SDC as well. In the largest ground move to date, a United States convoy of almost 500 personnel moved eastward through northern Syria towards the border of Iraq. As they withdrew, locals threw rotten produce and shouted insults at them, demonstrating a sense of betrayal among the populace.
U.S. President Donald Trump favored leaving a contingent of 200–300 US troops in Deir ez-Zur countryside of eastern Syria where majority of the country's oil fields are located per NYT and WSJ. The SDF, however, stated that "The fields have stayed in our hands. We have an agreement with the [Syrian] regime to give them some of our positions along the Turkish border, but we have not negotiated with them on the oil fields yet. There will probably be a version of joint control and revenue sharing with the regime from these fields. I don’t know if Trump understands this."
21 October 2019
The SOHR reported continued ceasefire violations despite the withdrawal of the SDF from Ras al-Ayn. Per SOHR, Turkish drone strikes had targeted a vehicle carrying 4 members of the SDF near Ain Issa, resulting in the death of all fighters. The Abu Rasin area, east of Ras al-Ayn also experienced heavy clashes and shelling by Turkey as per SOHR.
On the aftermath of the SDF withdrawal from the Ras al-Ayn, there were widespread accounts of looting, theft, burning of houses and kidnappings by the pro-Turkish forces with documented examples of members of the Hamza Division per to the SOHR.
The SOHR reported a US withdrawal from northern Syria with a military convoy passing through Simalka border into Iraq at midnight.
22 October 2019
Russian Defense Minister Sergei Shoigu has stated that Russia would need to deploy additional troops and equipment to Syria to patrol the border. As the deadline of the US-brokered 120-hour ceasefire agreement was nearing, Shoigu further stated that the US had less than two hours to comply with the agreement (i.e., removing the sanctions against Turkey) and suggested that the US forces had until the end of the 120-hour period to withdraw from Syria.
According to Syrian state news channel Al-Ekhbaria, Syrian President Assad has told Russian President Putin that his government rejects the occupation of Syria's lands under any pretext in a phone call today. In a reference to the SDF during his visit to the war zone near Al-Habeet in Idlib, the Syrian President Assad stated that "We said we are ready to support any group that takes up popular resistance against Erdogan and Turkey. This is not a political decision, we have not made a political decision, this is a constitutional duty and this is a national duty. If we don't do this, we don't deserve the homeland."
U.S. senator Mitch McConnell introduced a resolution in opposition to President Trump's withdrawal from Syria.
Jim Jeffrey, US special envoy for Syria and the global coalition against ISIL, said that he was not consulted or advised in advance about the withdrawal of the US from Syria.
Russian–Turkish memorandum
On 22 October 2019, Russian President Vladimir Putin and Turkish President Recep Tayyip Erdoğan met in Sochi and reached an agreement about the situation in Syria. They subsequently released a 10-point memorandum detailing the provisions of the agreement.
In the agreement, the established status quo of the Operation Peace Spring area, covering Tell Abyad and Ras Al Ayn with a depth of 32 kilometers from the border, will be maintained. Starting from 12.00 noon on 23 October, Russian military police and Syrian border guards would enter the Syrian border territory outside the Operation Peace Spring area to facilitate the removal of the YPG in the area with a depth of 30 kilometers from the border, which would be finalized within 150 hours. Hereafter, joint Russian–Turkish patrols would start to the west and east of the Operation Peace Spring area to a depth of 10 kilometers from the border, excluding Qamishli city. The YPG would be removed from both Manbij and Tal Rifat.
Russian President Putin informed Syrian President Assad about the provisions of the deal in a phone call. The Russian government announced that Assad voiced his support for the agreement and was ready to deploy the Syrian border guards in line with the agreement.
23 October 2019
President Trump announced that there was a 'permanent' ceasefire in the region and sanctions on Turkey would therefore be lifted, but he also added that the word 'permanent' is questionable for that part of the world. US lawmakers publicly criticized Trump's decision to lift the sanctions.
Dmitry Peskov, the Russian presidential press secretary, urged the Kurdish forces to withdraw from Syria's border namely because the Syrian border guards and Russian military police would have to step back otherwise, adding that the remaining Kurdish units would be 'steamrolled' by the Turkish military. Peskov further stated that the United States had both betrayed and abandoned the Kurds despite being their closest ally in recent years.
As Newsweek first reported, it's stated that the United States is considering and preparing to deploy tanks and troops to defend the oil in eastern Syria. Even though the stated purpose is preventing ISIL from regaining the oil fields, the effort is just as likely an attempt to block Syria and Russia.
24 October 2019
Syria's state news agency SANA reported that Turkish troops and allied fighters attacked Syrian army positions outside Tal Tamr, resulting in several Syrian casualties as they fought back, and clashed with Kurdish-led fighters. The SOHR also confirmed clashes between the SDF and the Syrian National Army near Tal Tamr. The Kurdish-led SDF said that three of its troops were killed during the fighting with the Syrian National Army.
Russia carried out several airstrikes in the Syrian rebel-held territory, targeting the Idlib, Hama, and Latakia provinces among comments by analysts that Idlib, the remaining Turkey-supported rebel stronghold, was the Syrian government's next target.
During the NATO meeting, Germany's Defense Minister Annegret Kramp-Karrenbauer had presented a proposal for an internationally monitored security zone in northeast Syria to be mandated by the United Nations. The following day, the Russian Foreign Minister Sergey Lavrov rejected the idea of a NATO-controlled security zone in Syria. On 26 October, the Turkish Foreign Minister Mevlut Cavusoglu also rejected the German plan for an international security zone and said that the proposal was not realistic.
25 October 2019
US Defense Secretary Mark Esper said the United States would send troops, including 'mechanized' forces, to defend the oil in eastern Syria to keep it from ISIL. It was unclear whether the Kurds would welcome the Americans again in the aftermath of the US withdrawal, as Syrian Kurdish leader Ilham Ahmed commented earlier on 24 October that "If the U.S. presence in the area is not going to benefit us when it comes to stability, security, and [stopping] the genocide and ethnic cleansing, they won’t be welcomed."
The Russian Defense Ministry announced that around 300 Russian military police have arrived in Syria. The military police, from the Russian region of Chechnya, would patrol the border region and help with the withdrawal of the Kurdish forces from the border region.
26 October 2019
The Turkish President Erdogan said that "If this area is not cleared from terrorists at the end of the 150 hours, then we will handle the situation by ourselves and will do all the cleansing work." The Turkish president also criticized the European Union of lying to provide the 6 billion euros to help house and feed around 3.6 million Syrian refugees residing in Turkey, while stating that the EU only provided half of the promised amount and adding that Turkey has spent around 40 billion euros. He warned that Turkey will open its border for the refugees to go to Europe if European countries failed to provide more financial support for the return of the refugees to Syria.
A U.S. military convoy drove south of Qamishli heading towards the oil fields in Deir el-Zour. The SOHR also reported the convoy when it earlier arrived from Iraq. Major General Igor Konashenkov, the Russian Defense Ministry spokesman, characterized the US actions to send armored vehicles and combat troops to protect the oil in eastern Syria as 'banditry'. The Russian Foreign Minister Sergei Lavrov spoke with the US Secretary of State Mike Pompeo about Syria, with the Russian side emphasizing the sovereignty and territorial integrity of Syria according to the Russian public statement.
A large convoy of Syrian government troops was deployed to eight villages at the Ras al-Ayn area along the M4 highway and close to the Syrian–Turkish border.
Casualties were reported after clashes in Tal Tamr and Ras al-Ayn, nine dead among the pro-Turkish forces and six dead among the SDF.
27 October 2019
The SDF released a statement saying: "The SDF is redeploying to new positions away from the Turkish–Syrian border across northeast Syria in accordance with the terms of the agreement in order to stop the bloodshed and to protect the inhabitants of the region from Turkish attacks."
29 October 2019
The SOHR reported reoccurring clashes between joint Syrian–SDF forces and Turkish-led forces in the area between Tal Tamr and Ras al-Ayn. During the clashes along the border, Turkish forces reportedly killed 6 Syrian soldiers near Ras al-Ayn. Meantime, Turkish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announced that they have captured 18 persons who stated to be Syrian government forces.
Russian Defense Minister Sergei Shoigu announced that the Kurdish-led armed forces had withdrawn from the safe zone along the Syria–Turkey border.
Post-ceasefire activity
Diplomatic relations
In a press statement addressed to the SDF, the Syrian Defense Ministry announced that they would accept any unit who is willing to join the Syrian military in a joint effort to battle invading Turkish troops and the Turkish-supported Syrian rebels, and offered reconciliation to those not needed for security. The Syrian Interior Ministry offered civil services across the northeast, as they described the difficult living conditions due to the Turkish-led incursion. They also offered to integrate the Asayesh security forces of the SDF into the government's internal security agency. The Syrian Education Ministry offered to support the children, as they described that children are deprived of schooling due to the unrest.
In response, the SDF said that they appreciated the efforts to unify Syria's defense and repel the Turkish aggression but also stated: "Our position was clear from the beginning, wherein uniting the ranks should begin from a political settlement that recognizes and preserves the exclusivity of the SDF and its structure, and creates a sound mechanism for restructuring the Syrian military establishment as an overarching framework for unifying efforts."
Situation around the safe zone
On 31 October, the Turkish President Erdogan announced that the joint Turkish-Russian patrols in northeast Syria would begin on Friday.
On 1 November 2019, Turkish and Russian forces began their joint patrols.
Since the ceasefire, there have been intermittent clashes between Syrian government troops and Turkish-backed forces around Ras al-Ain and Tal Tamr. Turkey returned 18 Syrian government soldiers who were captured by Turkish-backed Syrian fighters south of Ras al-Ayn amidst growing tensions between Syria and Turkey. The Turkish Defense Ministry announced the handover on 1 November.
31 October 2019
The SNA shelled the village of Tal-al ward resulting in the deaths of 2 civilians and injuring an additional 5. Small skirmishes occurred in the western side of Tal Al-ward between forces of the SAA, SDF and SNA. The SAA withdrew from the villages of Temir, Zirgan and Dirbesiye following bombardment from the SNA. The SDF bombarded the villages of Azizia and Jamiliyyeh, which caused the 2 military vehicles of the SNA to be destroyed. 3 people where killed and 4 injured from the shelling.
According to pro-SDF media US reinforcements arrived at Sarin Base including 17 armored vehicles and 82 trucks. Nevertheless, the base was captured by Russian forces on 17 November.
The SDF began a counter-offensive around Tall Tamr.
November 2019 Syria bombings: On 2 November, a car bomb attack killed at least 13 civilians in Tell Abyad, 2 weeks after its capture from SDF. Turkey and SNA accused the SDF as responsible for the attack. The SDF responded in a press statement stating: "We believe this is the work of the Turkish state and their intelligence and mercenaries to frighten and terrorize the local people".
1 November 2019
The SNA attempted to enter the vicinity of Tell Tamer. Firefights between the SDF and SNA occurred in the villages of Anek al-Hawa, Tal Muhammad, Khirbet Jammu and Mahmudiya. The SDF claims it has made advances into the villages of Mahmudiya and Khirbet Jammu.
6 November 2019
The SNA launched an offensive north of Ayn Issa, shelling SDF positions. The SDF and SNA clashed in villages of Mahmudiyyeh, Soda, Arisha, Abu Rasin, al-Qantra area as well as other areas on the outskirts of Ayn Issa north of al-Raqqah city as well as the exchange of shelling between the SDF and SNA. Clashes also occurred in the village of Aneeq Al-Hawa of Abu Rasin town as well as Manajir town south of Ras Al-Ayn.
8 November 2019
Protests occurred in Northern Syria against joint Turkish/Russian patrol protesters threw rocks and shoes at armored vehicles. Turkish patrols responded with tear gas. One protester was run over during the protest and died shortly after.
11 November 2019
A car bomb south of Tell Abyad killed 8 civilians and wounded over 13. Turkey claimed that the YPG was responsible for the attack.
16 November 2019
A car bomb in Al-Bab, targeting its bus terminal, killed 19 people, including 13 civilians. Additional 30 persons were wounded. Turkish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said that YPG and PKK was responsible for the attack. No group has claimed responsibility for the attack.
Turkish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said that the Turkish Army had defused over 988 IEDs and 442 mines, which were placed by the YPG, since the start of the operation.
The SDF made advances into the northern countryside of Tal Tamr town in the area leading to Abu Rasin, capturing positions and points north of Tal Tamr, the TAF responded with drone strikes on SDF positions.
17 November 2019
Russian forces entered the abandoned US base near Sarrin and seized control of it. Video footage of the abandoned US base was shared by Russian forces who entered the base showing abandoned US equipment.
18 November 2019
According to a pro-opposition media source, an SNA commander, Abu Hafs Al-Gharbi was killed in clashes with the SDF.
20 November 2019
Ayn Issa clashes
Clashes occurred between SNA and SDF on 20 November around the SDF controlled Ayn Issa, clashes resulted in the death of 8 SNA Fighters and 4 SDF fighters in the first day of clashes. According to pro-SDF media SNA attacked villages around Ayn Issa with rockets, UAVs and heavy weapons, as well as the positions in Tell Tamer.
As a result of fighting in Ayn Issa, guards of Ayn Issa refugee camp – home to ISIS families, left their posts to fight the SNA and several ISIS families managed to escape as a result.
Later in the same day SDF launched an offensive to retake Shrekrak silos from the SNA, SDF shelled SNA positions and the SNA shelled the surrounding villages controlled by SDF. The SNA continued to advance towards Ayn Issa, which resulted in 13 SNA fighters dying and 6 fighters dying among the SDF.
SDF managed to regain full control of Ayn Issa and its surroundings after heavy clashes and a counter attack. Russian Planes flew over Ayn Issa after the failed offensive.
23 November 2019
A car bomb went off in Tell Abyad, killing 9 and wounding 20 civilians.
24 November 2019
The SDF captured villages near Ayn Issa, after failed SNA offensive near Ayn Issa. 21 SNA fighters were killed in the fighting. SDF casualties are unknown.
War crimes
In October 2019, Syrian Kurdish authorities and doctors reported a number of patients with severe burns seemingly caused by a chemical weapon, accusing Turkey of employing the chemical white phosphorus to target people. Hamish de Bretton-Gordon, a former commander of the UK's chemical, biological, radiological and nuclear regiment, said of wounds he had been shown pictures of, "the most likely culprit is white phosphorus". Syrian Kurdish authorities also accused Turkey of using napalm.
The Organisation for the Prohibition of Chemical Weapons (OPCW) stated that it was aware of the situation and collecting information over the reported use of chemical weapons but cautioned that it had not yet determined the credibility of the allegations. However, the OPCW did not launch an investigation into the alleged use of white phosphorus, stating that the issue falls outside its remit as white phosphorus injuries are produced by thermal rather than chemical properties.> It remarked that "White phosphorus is commonly used in military operations to produce smoke or provide illumination. When white phosphorus is used as smoke, illumination or as an incendiary weapon, its use does not fall under the purview of the Chemical Weapons Convention".
Amnesty International stated that it had gathered evidence of war crimes and other violations committed by Turkish and Turkey-backed Syrian forces who are said to "have displayed a shameful disregard for civilian life, carrying out serious violations and war crimes, including summary killings and unlawful attacks that have killed and injured civilians".
In Autumn 2019, video footage and photographs emerged in which Turkish-allied Syrian rebel forces were seen apparently committing executions and other war crimes; the Syrian National Army condemned these acts and the Turkish government said it was investigating. Jim Jeffrey, the US envoy for Syria and the global coalition against ISIL, has stated in a hearing before the US Senate Foreign Relations Committee that they have seen several incidents which they consider war crimes committed by the Turkish-supported Syrian opposition forces, and characterized these groups as very dangerous and even extremist in some cases. In a US House Foreign Affairs Committee hearing, he stated that they have reached out to the Turkish government to discuss the war crimes committed by the Turkish-supported opposition.
Hevrin Khalaf, a Syrian Kurdish political leader, and other people, was summarily executed by the armed faction Ahrar al-Sharqiya. UN human rights spokesman Rupert Colville stated that "Turkey could be deemed responsible as a State for violations committed by their affiliated armed groups, as long as Turkey exercises effective control over these groups, or the operations in the course of which those violations occurred. [...] we urge the Turkish authorities to immediately launch an impartial, transparent and independent investigation into both incidents, and to apprehend those responsible, some of whom should be easily identifiable from the video footage they themselves shared on social media." According to Committee on Violations under the Ministry of Defence of Syrian Interim Government, the perpetrators were detained and sent to the military judiciary. Turkish Foreign Minister Mevlut Cavusoglu has responded that Turkey will investigate any allegation of human rights violations in the region and will not tolerate any human rights violation.
Members of the pro-Turkish Levant Front also evicted Christians from their homes in Tell Abyad, though left the local Kurds mostly alone.
Reports by the Syrian Observatory for Human Rights
According to the Syrian Observatory for Human Rights (SOHR), Turkish backed forces have looted countless homes in Ras al-Ayn and Tal Abyad have engaged in theft of property, physical, and verbal abuse, kidnappings of civilians for ransom and abuse against the citizens who did not flee. According to the report some civilians, unable to flee, paid smugglers $300 in order to be delivered to the nearest point of the Autonomous Administration areas (Rojava) at which point they were handed over to Turkish intelligence as members of the SDF after their money was taken from them.
A report by SOHR states that Turkish backed factions began demolishing houses in Kormazat villages of local Kurds who fled from fighting as well as members of the SDF from Tal Abyad, as well as taking barley in Abu Julud village in Mabrukah area in the western countryside of Ras Al-Ayn.
Population displacement
SOHR states that the number of displaced people exceeds 300,000 amid the humanitarian crisis and conflict. People have fled towards the autonomous Kurdish region within the border of Iraq.
Ibrahim Kalin, a Turkish presidential spokesman, has stated that they do not want Syrian government or Kurdish forces in the Syrian border areas but intend Turkey to oversee the region. He further said that Turkey intends to resettle up to 2 million Syrian refugees, currently in Turkey, who will not go back if these areas are under the control of either of these forces.
In response to European criticism, Turkish President Erdoğan warned that Turkey would "open the gates" for 3.6 million refugees who are currently in Turkey to go to Europe if its military operation is called an invasion. This comes under the context that Europe has employed foreign countries such as Turkey to serve as border guards, in a policy of border externalization.
Amnesty International remarked that Turkey "has borne a disproportionate responsibility" hosting 3.6 million refugees from Syria while European countries "have largely devoted their energies to keeping people seeking asylum from their territories" including not resettling the refugees residing in Turkey, the tensions between Turkish citizens and Syrian refugees are rising, and the decline in Turkish public support for refugees has led to an expression in policies where the Turkish government aims to resettle its Syrian refugee population in a demilitarized safe zone with the 2019 military operation as the latest development.
Amnesty International has reported that Turkey is illegally and forcibly deporting its Syrian refugees back to Syria while portraying the returns as voluntary. Hami Aksoy, a Turkish Foreign Ministry spokesman, stated that Turkey rejects Amnesty International's statements about the forceful repatriation and underscores that Turkey is conducting the safe and voluntary return of Syrians.
There are fears of ethnic cleansing of the Kurds from the region.
Jens Laerke, spokesman for the United Nations 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 said that 94,000 civilians have returned to their homes, while 100,000 are still displaced.
ISIL prisoners
There are concerns about a possible resurgence of the Islamic State (ISIL) in the region, as the Kurdish-led Syrian Democratic Forces (SDF)—who conducted counter-terrorism operations against ISIL and held the ISIL captives in the region—fight against the Turkish-led offensive and thus could lose control over the detainees. There are at least 10,000 ISIL prisoners and more than 100,000 ISIL family members and other displaced persons in several camps across northeastern Syria. A number of the ISIL detainees are foreign fighters, but their status have become increasingly uncertain due to the Turkish offensive as their own countries refuse to take them. As the threat of ISIL emerged as consequence, European countries have been criticized for failing to act by taking back their nationals, while the situation deteriorates. When asked about the situation after the US withdrawal from Syria, US President Donald Trump dismissed the threat of ISIL, remarking that "they're going to be escaping to Europe".
Îlham Ehmed, a Syrian Kurdish official, stated that the SDF felt betrayed by their American allies for "exposing us to an invasion by Turkish troops who aim to destroy us", remarking that they do not have the resources to both defend against the Turkish attacks and maintain security over the ISIL captives. Nevertheless, as stated by Jim Jeffrey, the US special envoy for Syria and the global coalition against ISIL, on 23 October, almost all of the prisons that the SDF were guarding are still secured and the SDF still have people there. The SDF commander Mazloum Abdi said, on 21 October, that there aren't any prisons in the Turkish-occupied areas and that all prisoners from those areas have been moved to prisons under their control.
As a consequence of the US withdrawal and the Turkish offensive, the SDF will be more restricted in time and resources to help the United States in the fight against ISIL, as it is also focused on the threat from the Turkish forces and the preservation of its autonomy against Syria and Russia.
According to Turkish sources, the SDF freed ISIL prisoners from a prison in Tal Abyad before Turkish forces could arrive. Other US officials, however, refuted the accusations, which they called baseless and false. They stated that the SDF are still defending their bases and are relocating ISIL detainees to facilities further south. They also reported that the Syrian National Army is purposefully releasing ISIL prisoners, previously held by the SDF before their territory was captured.
At least 750 ISIL affiliates were reported by the SDF to have escaped from a displacement camp in Ayn Issa after Turkish bombing on 13 October 2019. On 23 October, Jim Jeffrey stated that over 100 prisoners of ISIL have escaped and that they do not know where the escapees are.
On 18 October, Turkish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claimed that YPG had freed over 800 ISIL prisoners in Tal Abyad.
On 19 November, the Defense Department inspector general released a report finding that the American withdrawal and subsequent Turkish incursion allowed ISIL to "reconstitute capabilities and resources within Syria and strengthen its ability to plan attacks abroad".
Reactions
Domestic Turkish reaction
The Turkish offensive initially enjoyed support from party leaders across the political spectrum, with the support of three major opposition parties, but not the Peoples' Democratic Party (HDP). Opposition newsrooms and opposition parties were largely supportive of the operation. However, as time progressed, the Turkish opposition began criticizing the governmental strategy. Opposition Republican People's Party leader Kemal Kılıçdaroğlu blamed the government's "adventurous foreign policy", stating that "If I do not respect the territorial integrity of another government, I will make enemies. Today we have made all the world as our enemies." Meanwhile, opposition İyi Party leader Meral Akşener urged the government to dialogue with Assad in order to make peace while criticizing President Erdoğan for his silence on U.S. sanctions.
According to a research by Metropoll, the amount of support to the operation was at 79 percent, while Operation Olive Branch had 71 percent support according to the poll before.
Detainments in Turkey
Turkish police detained more than 120 online critics of the Turkish operation for spreading "terrorist propaganda". Turkish prosecutors opened investigations against MPs Sezai Temelli and Pervin Buldan, co-leaders of the pro-Kurdish HDP party. Turkey detained at least 151 members of the HDP, including district officials, and at least 4 HDP mayors for reported links to the PKK, which Turkey considers to be a terrorist group. Turkish authorities have also detained web editor of opposition BirGün newspaper (who was later released) and managing editor of the online news portal Diken.
The government launched a domestic campaign to eradicate dissenting opinions from media, social media, streets actions or any civil parties opposing the military operation.
On 10 October, Turkey's broadcasting regulatory body RTÜK warned media that "any broadcasting that may negatively impact the morale and motivation of the soldiers or may mislead citizens through incomplete, falsified or partial information that serves the aims of terror".
Social media dissidents, journalists, protesters have been criticized of "terrorism" and harassed via criminal investigation, arbitrary detention and travel bans. Dissidents face lengthy prison sentences if found guilty.
Controversy in Northern Cyprus
On 12 October President of Northern Cyprus, Mustafa Akıncı made "anti-war" remarks in response to the operation, in which, although defending the right of Turkey to defend itself, said that in all wars there will be much bloodshed. Erdoğan as well as VP Fuat Oktay condemned Akıncı's statement. While Prime Minister of Northern Cyprus, Ersin Tatar's National Unity Party attempted to get a resolution through the legislature that condemned Akıncı, and called for his resignation for his statement. Akıncı also received a slew of death threats, and filed a complaint on 17 October to the police. Erdoğan said that Akıncı's legitimacy is thanks to Turkey, and should therefore support Turkey. Akıncı rebuked Erdogan, stating "There is only one authority decides how to get to this office, it's the Turkish Cypriot people".
Sanctions and suspension of arms sales
European Union
On 10 October, a large majority of Dutch MPs backed the introduction of sanctions against Turkey. France, Germany, Sweden, Finland, Spain, Italy, and Norway implemented export restrictions on arms exports to Turkey. France as well as Sweden expressed their intention to back an EU-wide weapons embargo on the nation, with discussions in the European Union on possible union-wide sanctions on Turkey beginning on the 13th. Italy, formerly Turkey's largest arms supplier, later joined the arms embargo against Turkey.
On 14 October, all EU countries agreed to stop selling arms to Turkey, but stopped short of an official union-wide arms embargo. The EU also issued a press release condemning "...Turkeyʼs unilateral military action in North East Syria which causes unacceptable human suffering, undermines the fight against Daʼesh and threatens heavily European security."
United States
Trump said he was working with congressional leaders, including the Democratic opposition, to impose "powerful" economic sanctions against Turkey for its cross-border attacks in north-eastern Syria. Senator Lindsey Graham warned that he would "introduce bipartisan sanctions against Turkey if they invade Syria". He said he would also "call for their suspension from NATO if they attack Kurdish forces who assisted the United States in the destruction of the ISIS Caliphate". Bipartisan legislation has been introduced in the Senate to sanction Turkey, as well as in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On 14 October, the U.S. government declared sanctions against the Turkish ministries of defense, interior and energy. The U.S. statement delivered by Treasury Secretary Steven Mnuchin and Vice President Mike Pence denounced the Turkish government for "endangering innocent civilians, and destabilizing the region, including undermining the campaign to defeat ISIS", said that the U.S. had not given a "green light" to a full-on Turkish invasion, and warned that sanctions would continue and worsen "until Turkey embraces an immediate ceasefire". On the same day, U.S. President Donald Trump demanded a ceasefire from Turkey in a conversation with Turkish President Erdoğan, froze negotiations on a $100bn US-Turkey trade deal, and imposed sanctions on Turkish government officials.
On 16 October, the 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 in a rare bipartisan vote of 354 to 60, "condemned" President Trump's withdrawal of U.S. troops from Syria, for, in the view of both parties, "abandoning U.S. allies, undermining the struggle against ISIS, and spurring a humanitarian catastrophe".
On 17 October, after reaching a ceasefire agreement with Turkish President Recep Tayyip Erdoğan, US Vice President Mike Pence announced that all sanctions imposed on Turkey by the United States would be lifted and there would be no further sanctions once a permanent ceasefire was reached in the operation.
On 29 October 2019, the U.S. House of Representatives voted 405–11 to recognize the Armenian genocide, as a result of Turkey's invasion of Syria. However, the motion was blocked in the Senate by South Carolina Republican Senator Lindsey Graham, following a request from the White House. On 12 December 2019, the Senate unanimously passed a resolution recognizing the Armenian genocide, after it had been previously blocked by three different Republican Senators (Lindsey Graham of South Carolina, David Perdue of Georgia and Kevin Cramer of North Dakota) at the request of the White House.
Likewise, Trump's sudden pullout of US forces in Syria was also criticized by many, including former US military personnel, as a "serious betrayal to the Kurds" as well as a "catastrophic blow to US credibility as an ally and Washington's standing on the world stage", with one journalist stating that "this is one of the worst US foreign policy disasters since the Iraq War". On 19 November, the US Defense Department inspector general released a report finding that the American withdrawal and subsequent Turkish incursion allowed ISIL to "reconstitute capabilities and resources within Syria and strengthen its ability to plan attacks abroad". However, James Jeffrey, the US special envoy to Syria, said he had concealed the true number of US troops from the Trump administration, while praising Trump's decision to withdraw troops. “When the situation in northeast Syria had been fairly stable after we defeated ISIS, [Trump] was inclined to pull out. In each case, we then decided to come up with five better arguments for why we needed to stay. And we succeeded both times.” It ended with U.S. forces still operating in Syria, denying Russia and the Syrian regime territory and preventing remnants of ISIS from regrouping. He also noted that no one in Washington has ever offered the Kurdish forces (People's Defense Units) assurances against NATO ally Turkey.
Media coverage
In Turkey, authorities such as the Chief Prosecutor's Office of Istanbul have been criticized of censoring critical reports of the Turkish offensive into Syria through detaining or harassing journalists in an attempt to "intimidate the media into silence". Furthermore, Turkish President Erdoğan has written op-eds about the Turkish offensive, which has been characterized as propagandist in nature.
Much of western media's coverage and commentary of the U.S.'s role in the conflict emphasized President Donald Trump's "strategic blunder" that led to the Turkish offensive, particularly his upending of the U.S.'s general alliance with the Syrian Kurds, the withdrawal process of U.S. ground forces, and the greater geopolitical and humanitarian impact of the offensive.
ABC News was criticized for incorrectly portraying footage from a Kentucky gun range as footage of Turkish forces bombing Syrian territory in early October. This portrayal of the incident in the video was quickly debunked. The news network has since issued an apology for their mistake.
Aftermath
In October 2019, in response to the Turkish offensive, Russia arranged for negotiations between the Syrian government in Damascus and the Kurdish-led forces. Mazloum Abdi, the Syrian Kurdish commander-in-chief, announced that they were ready to partner with Vladimir Putin (Russia) and Bashar al-Assad (Syria), stating that "We know that we would have to make painful compromises with Moscow and Bashar al-Assad if we go down the road of working with them. But if we have to choose between compromises and the genocide of our people, we will surely choose life for our people." The details of the agreement is unknown, but there are reports that suggest that the SDF will be incorporated into the Syrian Armed Forces and that northeastern Syria will come under direct rule of the Syrian government in Damascus. According to Syrian Kurdish officials, the deal allows Syrian government forces to take over security in some border areas, but their own administration would maintain control of local institutions.
The prospects for Kurdish autonomy in the region was severely diminished, because the Kurds were exposed to the Turkish-led offensive by the US withdrawal and the Russia-backed Syrian government forces under Assad—whose commonality is enmity towards Turkey and Sunni rebel militias—regained their foothold in northeast Syria after the Kurds had to seek their help. In regards to the United States and the situation, Mazloum Abdi stated that "We are disappointed and frustrated by the current crisis. Our people are under attack, and their safety is our paramount concern. Two questions remain: How can we best protect our people? And is the United States still our ally?" A deep sense of betrayal by their once American allies has come to be felt among the Syrian Kurdish populace.
As announced by Russia's Ministry of Defense on 15 October, Russian forces have started to patrol the region along the line of contact between Turkish and Syrian forces, indicating that Russia is filling the security vacuum from the sudden US withdrawal. Video footage shows Russian soldiers and journalists touring a base that the US left behind. Alexander Lavrentiev, Russia's special envoy on Syria, warned that the Turkish offensive into Syria is unacceptable and stated that Russia is seeking to prevent conflict between Turkish and Syrian troops.
Several US lawmakers have criticized the abandonment of their Kurdish allies, remarking that it undermines US credibility as an ally while benefiting Russia, Iran, and the Syrian regime of Assad. Meanwhile, several commentators in Moscow have stated that the situation is not in the immediate Russian interests, as the Turkish intervention in Syria clashes with Russia's backing of the Syrian government in the region, but it may provide opportunities for Russia as mediator as the US withdraws from Syria. Commentators have remarked that, since the US withdrawal, Russia has cemented its status as the key power broker in the Middle East.
Due to the situation in Syria, there are signs of a schism between Turkey and other NATO members, in which NATO is seen as effectively "powerless" to manage the situation and the Turkish government is aware that NATO does not hold much leverage. Furthermore, US President Trump, as well as US military and diplomatic officials, has cited the NATO membership of Turkey as a key reason that the United States can not be involved in the conflict between the Turkish and Syrian Kurdish forces. Meanwhile, due to Turkey's strategic position between Europe and the Middle East, the NATO alliance members are in a situation where they have limited themselves to relatively muted criticism.
The U.S. is reviewing the potential withdrawal of its nuclear weapons from Incirlik airbase under NATO's nuclear sharing as a result of the Turkish offensive per NYT. Republican senator Lindsey Graham and Democratic representative Eric Swalwell have called for possibly suspending Turkey's membership in NATO.
On 9 December, Russian troops entered Raqqa and began distributing humanitarian aid.
Turkish actions
Erdogan stated that Turkey was ready to resettle the Syrian refugees in the northern area that Turkey had invaded, and that Turkey would pay for it if necessary. On 9 December 2019, various local accounts indicated that Turkey was moving Syrian refugees into its zone of operations in Northern Syria for the first time. Erdogan said that Turkey was working to settle one million people in the cities of Tal Abyad and Ras Al-Ain in northern Syria. This has led to fears of population change.
Russia said it would pledge to remove Turkish forces from a key highway in northern Syria, and replace them with Russian forces to maintain stability. Meanwhile, Turkey began to appoint mayors in several northern Syrian towns.
It was reported that the Russian and Turkish armies had made a deal whereby electricity would be supplied to Tal Abyad by Russia's allies, the Syrian Democratic Forces (SDF); while water would be supplied by the Alouk water station that is controlled by Turkish forces. This deal was mainly facilitated by Russian military officials.
It appeared that Turkey was withdrawing all of its forces away from the al-Shirkark silos, which hold important supplies of wheat, this seemed to be a result of Russian mediation.
Russian and Turkish forces are continuing their joint patrols. Questions remained about how much control Turkey has over its proxies, such as the Free Syrian Army.
Syrian and AANES actions
Some reports stated that Bashar Assad was favorable towards Russia's efforts to restore calm and to stabilize the situation in Syria.
Meanwhile, various Kurdish faction that were historical rivals began to meet in order to work together more. Their stated reason was to stand together against Russia and Turkey more strongly if needed. The Russian government has informed the Kurdish factions that they should reconcile and come up with a unified set of demands to clarify to Russia. Various Kurdish factions blamed each other and their council for lack of progress.
Mustafa Bali, head of the Syrian Democratic Forces (SDF) said there were some agreements on the ground with the Syrian government, for Syrian forces to be deployed along the border. Russian military officials forged agreements between Syria, Turkey and SDF for areas to be patrolled by each side.
The national Syrian government sent representatives to northeast Syria to meet with local groups there in order to address their concerns and to emphasize unity and combined effort to address problems. A meeting occurred in Qamishli city, in northeast Syria, that included Syrian national officials, and delegates from Kurdish, Arab, and Syrian figures and forces. The delegates emphasized their desire to help to protect Syria as a whole.
At a panel discussion on the conflict in December 2019, several experts said the conflict was slowly moving towards resolution. One expert said that the "Astana" diplomatic process, involving Turkey, Russia, and Iran, was having some positive results. Experts also said that Bashar Assad had made progress in restoring rule by local councils in areas affected by the conflict.
Russia said it would pledge to remove Turkish forces from a key highway in northern Syria, and replace them with Russian forces to maintain stability. Meanwhile, Turkey began to appoint mayors in several northern Syrian towns.
On 9 December 2019, various local accounts indicated that Turkey was moving Syrian refugees into its zone of operations in northern Syria for the first time. Erdogan said that Turkey was working to settle one million people in the cities of Tal Abyad and Ras Al-Ain in northern Syria, leading to fears of population changes.
Diplomacy with NATO member nations
At the NATO summit in London in December 2019, President Emmanuel Macron of France highlighted major differences with Turkey over the definition of terrorism, and said there was little chance this aspect of the conflict could be resolved positively. Macron criticized Turkey strongly for fighting against groups who had been allied with France and the West in fighting terrorism.
Numerous issues in resolving the conflict emerged at the NATO summit in London. Turkey proposed a safe zone where Syrian refugees could be relocated, but this idea did not receive support from all parties. One professed "exclusive" press report claimed that prior to the NATO Summit, there was a meeting at 10 Downing Street of the leaders of France, the UK, Germany and Turkey. One key point that emerged that the Western countries insisted that refugees could only be relocated voluntarily. Meanwhile, there were concerns in NATO about Turkey's growing closeness with Russia.
Erdogan claimed that a four-way summit on Syria was scheduled to occur in Turkey in February 2020, to include Turkey, Germany, the UK and France.
Diplomacy with nations outside NATO
At a meeting in Damascus, Russian and Syrian officials clearly stated their support for Syria regaining control over all of its territory. The United Arab Emirates also expressed official support for Assad.
A new round of meetings for the Astana summit process took place in the Kazakh capital Nur Sultan. The meeting includes Russia, Syria, Turkey and Iran.
See also
Operation Olive Branch
Operation Euphrates Shield
Eastern Syria Insurgency
Syrian–Turkish border clashes during the Syrian Civil War
Timeline of the Syrian Civil War
References
Informational notes
Citations
External links
OCHA Syria ǀ Flash Update #1 – Humanitarian impact of military operation in north-eastern Syria (10 October 2019)
2019 in international relations
2019 in the Syrian civil war
Offensive into north-eastern Syria
Al-Hasakah Governorate in the Syrian civil war
Aleppo Governorate in the Syrian civil war
Drone warfare
2019 offensive into north-eastern Syria
Invasions of Syria
2019 offensive into north-eastern Syria
Military operations of the Syrian civil war in 2019
Military operations of the Syrian civil war involving the People's Protection Units
Military operations of the Syrian civil war involving the Syrian Democratic Forces
2019 offensive into north-east
October 2019 events in Syria
Raqqa Governorate in the Syrian civil war
Trump administration controversies
Cross-border operations of Turkey into Syria |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C%84%B8%20%ED%94%84%EB%9E%80%EC%8B%9C%EC%8A%A4%EC%BD%94%20%EB%AA%B0%EB%A6%AC%EB%82%98 | 호세 프란시스코 몰리나 | 호세 프란시스코 몰리나 히메네스(, 1970년 8월 8일, 발렌시아 지방 발렌시아 ~)는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이자 현 감독으로 현역 시절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현재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의 단장이다.
11년 동안 지속된 그의 프로 현역 시절에, 그는 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해 총 5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14시즌에 걸쳐, 그는 415번의 라 리가 경기에 출전했다.
스페인 국가대표로 4년을 보낸 몰리나는 1998년 FIFA 월드컵과 2번의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클럽 경력
몰리나는 발렌시아 지방 발렌시아 사람으로, 평범한 알시라에서 프로 무대 첫 발을 디뎠고, 이후 인근 거함 발렌시아로 1991년에 둥지를 옮겼다. 또다른 발렌시아 지방 구단 비야레알로 임대를 떠난 후, 그는 알바세테에 매각되어 1-0으로 이긴 레알 오비에도와의 1995년 1월 8일 안방 경기에서 라 리가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말일 경기인 데포르티보와의 안방 경기에서 8골을 실점했지만, 알바세테는 플레이오프전을 통해 강등을 면했다.
몰리나는 그가 지지하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는 1995년에 수도 연고 구단에 입단해 1년차에 리그와 코파 델 레이를 석권하여 국내 무대 2관왕을 달성하였고, 4시즌을 도합해 고작 2경기를 결장하는데 그쳤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강등되자, 그는 2000년에 리그 정상에 선 데포르티보로 이적해 코파 델 레이와 2번의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을 거두었고, 갈리시아 연고의 구단 소속으로도 붙박이 주전이 되었다. 그러나, 2002년 10월 14일, 그는 고환암을 앓고 있다고 밝혔고, 항암 치료로 골문 앞에서 벗어나게 되어, 대부분의 2002-03 시즌 경기에 결장했으나, (데포르가 3위를 차지한 이 시즌에 10번의 리그 경기에 결장하였다.) 완치되어 복귀했다.
계약이 만료되면서, 몰리나는 고향 발렌시아로 복귀해 1부 리그 하위권의 레반테 소속으로 2006-07 시즌을 보냈지만, 시즌이 만료된 후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구단의 1부 리그 잔류를 확정한 직후에 은퇴했다.
국가대표팀 경력
몰리나는 1996년 4월 24일 노르웨이와의 경기에서 스페인 국가대표팀 첫 경기를 뛰었는데, 수문장이 아닌 다른 역할로 깜짝 출전을 하였다. 그는 좌측 미드필더로 출전했는데, 하비에르 클레멘테가 선수를 모두 교체한 와중에 후안 마누엘 로페스가 부상으로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UEFA 유로 1996과 1998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한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UEFA 유로 2000이 되어서야 주전 지위를 확보했고, 그마저도 0-1로 패한 노르웨이전에서 실수로 경기를 망치면서 이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은퇴 후
2009-10 시즌, 몰리나는 테르세라 디비시온의 비야레알 C의 감독이 되면서 감독일을 시작했다. 2011년 5월 12일, 그는 경질된 하비 그라시아를 대신해 심각한 강등 위기에 처한 세군다 디비시온의 2군 감독이 되었다.
몰리나는 2011년 12월 22일에 해임된 후안 카를로스 가리도를 대신해 비야레알 1군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도 전 소속 구단인 레반테와의 이듬해 3월 18일 원정 경기에서 0-1로 패하면서 직위가 해제되었고, 노란 잠수함은 17위로 강등권과 매우 근접하여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2014년, 헤타페 B를 이끌고 세군다 디비시온 B 에서 14위의 성적을 낸 몰리나는 홍콩의 킷치 감독이 되었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즌에 그는 국내 3관왕을 달성하고, AFC컵 8강의 성적을 기록했다.
2016년 5월 3일, 몰리나는 같은 스페인 국적의 안토니오 로페스 아바스를 대신해 인도 슈퍼리그의 ATK 감독이 되었다.
이듬해 11월 14일, 그는 시즌 클라우수라를 앞두고 아센소 MX에 소속된 아틀레티코 산루이스의 감독이 되었다. 2018년 2월 18일, 그는 모든 대회를 통틀어 11경기에서 2승을 거두는 데에 그치면서 해고되었고, 그의 소속 구단은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다.
2018년 7월, 몰리나는 2018년 FIFA 월드컵에서 스페인 국가대표팀 성적 부진으로 사표를 낸 페르난도 이에로를 대신할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의 신임 단장이 되었다.
수상
클럽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라 리가: 1995–96
코파 델 레이: 1995–96
데포르티보
코파 델 레이: 2001–02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0, 2002
개인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 1995–96
감독
킷치
홍콩 프리미어리그: 2014–15
홍콩 FA컵: 2014–15
홍콩 리그컵: 2014–15
ATK
인도 슈퍼리그: 2016
각주
외부 링크
CiberChe 바이오그래피 및 통계
Eu-Football 스페인 국가대표팀 통계
197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발렌시아주 출신 축구 선수
발렌시아 출신 축구인
남자 축구 골키퍼
라리가의 축구 선수
세군다 디비시온의 축구 선수
세군다 디비시온 B의 축구 선수
테르세라 디비시온의 축구 선수
발렌시아 CF 메스타야의 축구 선수
UD 알시라의 축구 선수
발렌시아 CF의 축구 선수
비야레알 CF의 축구 선수
알바세테 발롬피에의 축구 선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축구 선수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의 축구 선수
레반테 UD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UEFA 유로 1996 참가 선수
199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UEFA 유로 2000 참가 선수
스페인의 축구 감독
라리가의 축구 감독
세군다 디비시온의 축구 감독
세군다 디비시온 B의 축구 감독
비야레알 CF B의 축구 감독
비야레알 CF의 축구 감독
킷치 SC의 축구 감독
인도 슈퍼리그의 축구 감독
ATK (축구단)의 축구 감독
스페인의 해외 진출 축구 감독
홍콩의 외국인 축구 감독
인도의 외국인 축구 감독
멕시코의 외국인 축구 감독
고환암 생존자
테르세라 디비시온의 축구 감독 | https://en.wikipedia.org/wiki/Jos%C3%A9%20Francisco%20Molina | José Francisco Molina | José Francisco Molina Jiménez (born 8 August 1970) is a Spanish retired footballer who played as a goalkeeper.
Eleven years of his extensive professional career were spent at Atlético Madrid and Deportivo de La Coruña, where he won a total of five titles. Over 14 seasons, he appeared in 415 La Liga matches.
A Spain international for four years, Molina represented the nation at the 1998 World Cup and two European Championships.
Playing career
Club
Born in Valencia, Valencian Community, Molina started playing professionally with modest UD Alzira, being purchased in 1991 by local giants Valencia CF. After a loan stint with neighbours Villarreal CF he was sold to Albacete Balompié, making his La Liga debut on 8 January 1995 in a 1–0 home win against Real Oviedo. Even though he conceded eight goals in the last matchday, a home loss against Deportivo de La Coruña, his team managed to escape relegation in the playoffs.
Molina's career was intimately related with Atlético Madrid, of which he claimed to be a fan. Signing in 1995, he helped the capital side win a double (league and Copa del Rey) in his first year, going on to miss only two league matches in four seasons combined.
Joining 2000 league champions Deportivo La Coruña after Atlético's relegation, Molina helped win a Spanish cup and two supercups, being an undisputed starter throughout his stint in Galicia. However, on 14 October 2002, he announced that he suffered from testicular cancer, and that he was forced to undergo treatment for his illness, thus missing most of the 2002–03 campaign (ten league appearances, as Depor finished third); he eventually recovered fully.
After his link expired, Molina returned home to Valencia for 2006–07, playing for top-division strugglers Levante UD, but did not renew his contract after the season's end, retiring subsequently after the club retained its league status.
International
Molina made his Spain national team debut as an outfield player against Norway on 24 April 1996 – a cameo appearance as a left winger, as all replacements had been made by coach Javier Clemente and Juan Manuel López retired injured.
He was then included in the squads for UEFA Euro 1996 and the 1998 FIFA World Cup, but had to wait until Euro 2000 for first-choice status, although he was dropped after a blunder in the opening 1–0 loss to Norway and did not play afterwards.
Coaching career
In the 2009–10 campaign, Molina started a coaching career with Villarreal C of Tercera División. On 12 May 2011, he replaced the fired Javi Gracia at the helm of the reserves in the Segunda División as the team was seriously threatened with relegation.
Molina reached Villarreal's main squad on 22 December 2011, taking the place of sacked Juan Carlos Garrido. He was himself dismissed on 18 March of the following year after a 1–0 away loss against former club Levante, with the Yellow Submarine dangerously close to the relegation zone (17th).
In 2014, after leading Getafe CF B to the 14th place in the Segunda División B, Molina was appointed at Hong Kong's Kitchee SC. In his only season he managed win the domestic treble, also taking the team to the quarter-finals of the AFC Cup.
On 3 May 2016, Molina was announced as the head coach of Indian Super League side ATK, replacing countryman Antonio López Habas. On 14 November of the following year, he was appointed at Ascenso MX club Atlético San Luis ahead of the Clausura tournament. He was relieved of his duties by the latter on 18 February 2018 after just two wins in 11 matches in all competitions, with his side in last position in the league.
In July 2018, Molina was appointed as sporting director of the Royal Spanish Football Federation, replacing Fernando Hierro who had resigned in the aftermath of Spain's performance at the 2018 FIFA World Cup. In December 2022, he left his position following a last-16 elimination at the 2022 World Cup at the hands of Morocco.
Honours
Player
Atlético Madrid
La Liga: 1995–96
Copa del Rey: 1995–96
Deportivo
Copa del Rey: 2001–02
Supercopa de España: 2000, 2002
Individual
Ricardo Zamora Trophy: 1995–96
Manager
Kitchee
Hong Kong Premier League: 2014–15
Hong Kong FA Cup: 2014–15
Hong Kong League Cup: 2014–15
Atlético Kolkata
Indian Super League: 2016
See also
List of Atlético Madrid players (+100)
List of La Liga players (400+ appearances)
References
External links
CiberChe biography and stats
1970 births
Living people
Spanish men's footballers
Footballers from Valencia
Men's association football goalkeepers
La Liga players
Segunda División players
Segunda División B players
Tercera División players
Valencia CF Mestalla footballers
UD Alzira footballers
Valencia CF players
Villarreal CF players
Albacete Balompié players
Atlético Madrid footballers
Deportivo de La Coruña players
Levante UD footballers
Spain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UEFA Euro 1996 players
1998 FIFA World Cup players
UEFA Euro 2000 players
Spanish football managers
La Liga managers
Segunda División managers
Segunda División B managers
Tercera División managers
Villarreal CF B managers
Villarreal CF managers
Kitchee SC managers
Indian Super League managers
ATK (football club) managers
Spanish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Hong Kong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India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Mexico
Spanish expatriate sportspeople in Hong Kong
Spanish expatriate sportspeople in India
Spanish expatriate sportspeople in Mexico |
https://ko.wikipedia.org/wiki/%EC%B0%BD%EC%B6%98%EC%97%AD | 창춘역 | 창춘역(장춘역, )은 중국 지린성 창춘시 콴청구에 위치한 철도역으로, 1907년에 지어졌다. 현재 중국철도 선양국 그룹 유한공사 직속의 여객운송 특등역으로, 징하 철로 100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창춘역은 창바이 철로, 창투 철로, 창훈 성제철로의 시·종착역이다.
역 시설
북역사 출구
12306 “춘지약(春之约)”안내데스크
북역사 종합환승센터(北站房综合换乘中心)
남역사 출구
북부 1매표소 : 18개의 매표창구(서에서 동번호 76-92), 6대의 자동판매기(번호 7-12)에서, 파란색 마그네틱 티켓을 제공하다. 야외 매표 창구도 여럿 있으며, 파란색 마그네틱 티켓을 제공하다.
남부 1매표소 : 티켓 판매창구 14개(번호 61-74), 자동발매기 6대(번호 2-6)를 포함하여, 푸른색 마그네틱 카드를 제공하는 4대의 자동발매기가 있으며, 인터넷 발권 승차권 24대, 붉은 종이 승차권 7개를 제공한다. 일련번호는 247-250이다.
북부 2매표소 : 1층 시공으로 인해 모든 매표소가 운영을 일시 중단했다. 완공된 2층은 푸른색 마그네틱 티켓을 제공하는 매표창구 14개가 있으며, 일련번호는 19-32이다.
남광장 매표소 : 붉은색 종이 승차권이 제공되며, 지금은 사용을 중지하고 있으며, 매표 설비가 북1 매표소 야외 매표창구로 옮겨졌다.
사용 현황
창춘역은 징하 철로, 하다 철로, 창투 철로, 창베이 철로, 창훈 서제철로, 하다 여객철도이 지나는 여객 특등역이다. 매일 332대의 여객 열차가 지난다.
역 인근
춘이 호텔(春谊宾馆)
춘톄 빌딩(春铁大厦)
중국농업은행, 중국우정저축은행은 창춘역 남쪽 출구 부근에 저축소를 두고 있으며, 교통은행, 상하이 푸둥개발 은행도 여기에 ATM기기를 두고 있다.
창춘역 종합교통환승센터(长春站综合交通换乘中心)
2009년 6월 26일 오전 착공식을 열었고, 2012년 5월 말 완공되었다. 지상 광장의 면적은 34,046 m2, 지하총 건축면적은 81,446 m2이다. 지상광장은 버스 승하차 구역, 택시와 공영 차량 하차 구역 및 출구 광장이다. 지하 1층 건축면적은 4,5418m2으로, 동서 양쪽으로 140여 개의 택시 대합실과 서비스 및 환승홀, 2개의 통로가 있고, 铁北二路 북부와 남북광장을 각각 잇는 동서 양쪽의 시영 통로와 역건물의 통로가 있다. 지하 2층은 지하철 1호선과 경궤 4호선 환승홀 및 공영 차량 400대 주차 공간이 있으며, 건축 면적은 36,028 m2이다. 지하 3층은 경궤 4호선 승강장, 지하철 1호선 설비층이다. 지하 4층은 지하철 1호선 승강장층이다.
남쪽의 중추 공사가 2010년 7월에 시작되었다. 역전광장은 2014년 5월 19일 착공하여, 공사기간은 3년 반으로 예상된다. 창춘역 남광장 지하 4층 0.39만 m2는 지하철 1호선 승강장, 지하 3층 25,500 m2는 경궤 3호선 승강장과 공영 주차장, 지하 2층 25,500 m2는 경궤 지하철 공용 대합실이자 공영 주차장, 지하 1층 43,000 m2는 지하철 1호선 및 경궤 3호선 환승 통로/교통층이다.
기차역 서쪽의 지하를 통과하는 남북 통로는 2009년 6월 착공하여 2009년 12월 토건이 완공되었다.
역사
1907년 : 일본은 창춘시 터우다오거우(头道沟)와 얼다오거우(二道沟)에 "만철부속지(滿鐵附屬地)"가 설립, 창춘역은 콴청쯔체 역(宽城子车站) 남쪽에 세워졌다. 당시에는 “창춘 주차장(长春停车场)”이라 불린 종착역이었다. 서남쪽으로 멍자툰(孟家屯)과 선양(沈阳)을 잇는 철도가, 서북쪽으로 콴청쯔제와 하얼빈을 잇는 철도가 연결되었으며, 창춘 동역, 지린역을 남동으로 연결하는 창지 철로(长吉铁路)는 아직 건설 계획이 없었다.
1907년 11월 3일 : 창춘역에 화물운송업소가 개설.
1907년 12월 1일 : 남만주철도 개통, 창춘역 여객운송업소 개설.
1913년 3월 : 남만주철도에서 32만 위안을 투자하여, 4000m2의 창춘역 건물을 착공하여 1914년 5월에 준공하였다. 건축면적은 4000m2이며, 역 앞의 원형 광장은 지름 100칸(182m, 1칸=1.816m)이다.
1992년 5월 26일 : 85년 역사의 창춘역의 구 역사가 폭파로 철거.
1995년 : 창춘역 신역사(현재 역사)가 완공되어 개장했다.
2007년 : 창춘역 역사의 외벽을 개조하여 타일 커버를 석재 커버로 변경했다.
2012년 9월 20일 : 창춘역 북 출구를 개조하여 사용이 시작되고, 창춘역 창바이로(长白路) 대합실과 함께 여객운송 업무를 진행하였으며, 동시에 원래 남쪽 출구는 시공단계에 들어가 사용이 중지되었다.
여객 열차의 목적지
현재 창춘역에서 하루 약 247편의 열차가 출발하는데, 이 중 227편은 고속 전동열차(高速动车组列车)와 도시간 전동열차(城际动车组列车), 25편은 전동열차(动车组列车), 15편은 직행 특급열차(直达特快列车), 7편은 특급 열차(特快列车), 40편은 급행열차(快速列车), 10편은 보통급행 열차(普快列车), 4편은 보통여객열차(普客列车)이다.
현재 창춘역의 하루 열차는 약 147편으로, 이 중 79편이 고속 열차이다.
관련 열차
Z61/62차 열차
Z63/64차 열차
베이징-창춘 동차조열차
K2288/2285, K2286/2287차 열차
T122/123, T124/121차 열차
도시철도
도시철도 창춘 역()은 중국 지린성 창춘시 콴청구에 위치한 한 도시철도역으로 창춘 궤도교통 1호선과 3호선의 환승역이다. 현재 창춘역 남북 통로(长春站南北通道)를 거쳐 창춘역 북역에 도착하여 창춘 궤도교통 4호선과 환승할 수 있다. 향후, 본역에서 개조 계획이 있으며, 1호선과 역내에서 환승하게 된다.
승강장 구조
역사
2002년 10월 30일 - 3호선 개통
2019년 1월 26일 - 1호선 개통
인접 정차역
같이 보기
창춘 서역
각주
외부 링크
长春站北站房昨日开门迎客 新文化报 2012-09-21 A02版
中国中央电视台:《长春的铁路》2003-68(189)
长春档案信息资源网:火车的鸣响(下)
지린성의 철도역
1907년 개업한 철도역
창춘시의 교통
창춘 궤도교통역 | https://en.wikipedia.org/wiki/Changchun%20railway%20station | Changchun railway station | Changchun station () is a railway station of Beijing–Harbin railway, Harbin–Dalian railway, Changchun–Tumen railway, Changchun–Baicheng railway and Changchun–Jilin intercity railway. The station is located in Changchun, in the Jilin province of China. It is served by Changchun Rail Transit Line Line 1, Line 3 and Line 4.
History
The station opened in 1907. The new station building was constructed in 1994. In 2014, renovations were completed on an expanded station, with additional tracks and a new north building. A new masonry south facade was added.
Services
China Railway
Chanchun Subway
Changchun Railway Station
Changchun Railway Station is a subway station on Line 1 and Line 3 of the Changchun Subway in China. It is located in Kuancheng District in Changchun under the building of Changchun railway station southern square. The station first opened on 30 October 2002, when Line 3 was put in operation.
Changchun Railway Station is an underground station with one platform and two side tracks per line. Line 1 runs at the station in the direction north-south, and Line 3 runs west-east.
Changchun Railway Station (North)
Changchun Railway Station (North) is a subway station on Line 1 and Line 4 of the Changchun Subway in China. It is located in Kuancheng District in Changchun under the building of Changchun railway station northern square, hence the name. The station first opened on 7 May 2012, when Line 4 was put in operation.
Changchun Railway Station (North) is an underground station with one platform and two side tracks per line. Line 1 runs at the station in the direction north-south, and Line 4 runs west-east.
See also
2167/2168 Changchun-Mudanjiang Through Train
Changchun Light Rail Transit
Chinese Eastern Railway
South Manchuria Railway
South Manchuria Railway Zone
References
External links
Railway stations in China opened in 1907
Buildings and structures in Changchun
Buildings and structures in Jilin
Transport in Changchun
Transport in Jilin
Railway stations in Changchun
Railway stations in Jilin
Stations on the Changchun–Jilin Intercity Railway
Stations on the Beijing–Harbin Railway |
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C%9D%B4%EC%8A%A4%20%EC%95%84%EB%A5%B4%EC%BD%94%EB%82%98%EB%8B%A4 | 루이스 아르코나다 | 루이스 미겔 아르코나다 에차리(, 1954년 6월 26일 바스크 지방 산 세바스티안 ~)는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골키퍼로 활약하였다.
현역 시절, 프로 무대에서 레알 소시에다드 소속으로 20년 가까이 활약한 아르코나다는, 산 세바스티안 연고 구단이 라 리가 2회 우승을 포함해 4번의 우승을 하도록 도왔다.
아르코나다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8년을 활약하며 총 68번의 경기에 출전하였으며, FIFA 월드컵과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 각각 2번씩 참가했다.
클럽 경력
아르코나다는 기푸스코아 주 산 세바스티안 사람이다. 16세가 되었을 때, 아르코나다는 인근 거함 레알 소시에다드의 유소년부에 합류해, 훗날 현역 시절 전부를 보내게 되었고, 문어(El Pulpo)라는 별칭이 붙었다.
2년 동안 우루티의 후보 수문장이었던 아르코나다는 붙박이 주전으로 도약했다. 그는 라 리가 연속 우승에 큰 공을 세웠는데, 2번째 우승 이후 참가한 유러피언컵에서는 나중에 우승을 차지하는 함부르크와의 준결승전까지 하양-파란 군단을 올렸다.
아르코나다는 1985-86 시즌 개막전에 중상을 당해, 남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1986년 FIFA 월드컵 참가도 물건너갔다. 그는 복귀 이후 3시즌을 뛰며 건재함을 확인하였고, 이 기간에 하양-파란 군단은 두 차례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올랐다. 그는 414번의 리그 출장(모든 대회 통틀어 551 경기 출전)의 기록으로 35세의 나이로 은퇴하였고, 이후 축구 활동을 모두 접었다.
국가대표팀 경력
1977년 3월 27일, 아르코나다는 1-1로 비긴 헝가리와의 알리칸테 안방 친선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미겔 앙헬과 후반전에 교체되어 국가대표팀 경기에 처음 출전하였다. 수 차례 주장 완장을 찼던 그는 1978년과 1982년의 FIFA 월드컵, 1980년과 1984년의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였다. 후자의 대회에서는 1984년에 결승전까지 올라갔지만 개최국 프랑스를 상대로 큰 실책을 범해 선제골을 허용해 0-2 완패의 빌미가 되었다: 그는 미셸 플라티니의 프리킥을 몸을 던져 가슴으로 공을 눌러 거의 막았지만, 공이 밑으로 미끄러져 천천히 골망으로 굴러갔다. 그는 정상급 수문장이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결승전에서의 실책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스페인에서는 이 실책을 "아르코나다의 골"이라고 부른다.
아르코나다가 출전한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는 0-3으로 패한 웨일스와의 1986년 FIFA 월드컵 예선전이었다. 소속 구단 경기에 출전하는 와중에 십자 인대 중상을 당하면서, 그는 본선에 나서지 못했고, 같은 바스크 출신인 안도니 수비사레타가 그의 자리를 꿰찼다.
스페인이 UEFA 유로 2008을 우승하고 열린 트로피 수여식에서, 선수단의 3번째 골키퍼였던 안드레스 팔로프는 아르코나다가 UEFA 유로 1984 결승전에서 입었던 유니폼을 입고 플라티니 UEFA의 회장으로부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르코나다는 캐나다의 퀘벡 주 몽레알에서 열린 1976년 하계 올림픽에서도 스페인 선수단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1라운드를 넘지 못했다.
플레이스타일
아르코나다는 지도력, 대담함, 그리고 꾸준함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스페인 역대 최고 골키퍼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의 신체적 능력, 민첩함, 공을 막아내는 능력, 반사신경, 발재간, 그리고 기교적인 동작은 이케르 카시야스에게 영감을 주었다.
사생활
루이스 아르코나다의 동생 곤살로는 프로 무대에서 공을 찬 적이 없지만, 오랜 기간 3부 리그 위주로 감독 생활을 했다. 곤살로 아르코나다는 2006년 초 몇 달 동안 레알 소시에다드 1군을 이끌기도 했다.
수상
클럽
레알 소시에다드
라 리가: 1980–81, 1981–82
코파 델 레이: 1986–87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2
국가대표팀
스페인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1984
개인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 1979–80, 1980–81, 1981–82
같이 보기
원클럽맨 명단
각주
외부 링크
Eu-Football 스페인 국가대표팀 통계
Porteros Vascos de Leyenda 프로필
1954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산세바스티안 출신 스포츠인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바스크주 출신 축구 선수
남자 축구 골키퍼
라리가의 축구 선수
레알 소시에다드 B의 축구 선수
레알 소시에다드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아마추어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197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1982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UEFA 유로 1980 참가 선수
UEFA 유로 1984 참가 선수
스페인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197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바스크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테르세라 디비시온의 축구 선수 | https://en.wikipedia.org/wiki/Luis%20Arconada | Luis Arconada | Luis Miguel Arconada Etxarri (born 26 June 1954) is a Spanish retired footballer who played as a goalkeeper.
He played only for Real Sociedad for nearly 20 years, and helped the club to four titles including two La Liga championships.
Arconada collected 68 caps for Spain over eight years, and was part of the squads at two World Cups and two European Championships.
Club career
Arconada was born in San Sebastián, Gipuzkoa. Aged 16, he joined local giants Real Sociedad's youth ranks, going on to play there his entire career and being known as "El pulpo" (Octopus in English).
After two seasons backing up Urruti, Arconada became the club's undisputed starter. He was instrumental in consecutive La Liga titles, which led – after the second – to a semi-final run in the European Cup.
Arconada was seriously injured in 1985–86's league opener, which caused him to miss the remainder of the campaign and the 1986 FIFA World Cup. He still returned strong for three more seasons, helping Real Sociedad to two consecutive Copa del Rey finals before retiring at 35 with a total of 414 appearances (551 overall); after that, he remained apart from the football world.
International career
On 27 March 1977, Arconada played his first game for Spain, a 1–1 friendly with Hungary in Alicante, replacing Real Madrid's Miguel Ángel for the second half. Having captained the nation on many occasions, he represented it at the 1978 and 1982 FIFA World Cups as well as at UEFA Euro 1980 and 1984. In the latter competition, his blunder resulted in the opening goal for hosts France in a 2–0 final defeat: he appeared to have smothered a free kick from Michel Platini under his chest in a diving save, but he fumbled the ball, which slid off under his body and rolled slowly into the net; despite his reputation as a world-class goalkeeper, several years later he was still widely remembered for the error, known as "Arconada's goal" in Spain.
Arconada's last game was a 3–0 defeat in Wales for the 1986 World Cup qualifiers. A severe cruciate ligament injury while playing for Real ousted him from the final stages, being replaced by fellow Basque Andoni Zubizarreta.
During the ceremony following Spain's victory in Euro 2008, third choice Andrés Palop wore Arconada's original Euro 84 final shirt as he received the gold medal from Platini, now president of UEFA. Arconada also represented his native country at the 1976 Summer Olympics in Montreal, Quebec, Canada, where Spain was eliminated in the first round.
Style of play
Arconada was known for his leadership, bravery and consistency, and was regarded as one of the best Spanish goalkeepers of all time. His athleticism, speed, shot-stopping ability, reflexes, footwork and acrobatic style served as an inspiration to Iker Casillas.
In 2017, former goalkeeper Manuel Almunia also praised Arconada for his ability to produce saves with his feet.
Personal life
Arconada's younger brother, Gonzalo, never played professional football, but had an extensive coaching career, mainly in the third division. For a few months in early 2006, he coached Real Sociedad's first team.
Honours
Real Sociedad
La Liga: 1980–81, 1981–82
Copa del Rey: 1986–87; runner-up 1987–88
Supercopa de España: 1982
Spain
UEFA European Championship runner-up: 1984
Individual
Ricardo Zamora Trophy: 1979–80, 1980–81, 1981–82
See also
List of La Liga players (400+ appearances)
List of one-club men in association football
List of Real Sociedad players
References
External links
Real Sociedad official profile
Biography at Porteros Vascos de Leyenda
1954 births
Living people
Spanish men's footballers
Footballers from San Sebastián
Men's association football goalkeepers
La Liga players
Tercera División players
Real Sociedad B footballers
Real Sociedad footballers
Spain men's youth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amateur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1978 FIFA World Cup players
1982 FIFA World Cup players
UEFA Euro 1980 players
UEFA Euro 1984 players
Olympic footballers for Spain
Footballers at the 1976 Summer Olympics
Basque Country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
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C%9D%B4%EC%8A%88%EB%B0%94 | 다이슈바 | 다이슈바(対州馬, たいしゅうば/たいしゅううま)는 일본 쓰시마(対馬,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를 중심으로 사육되어 온 일본의 재래종 말이다. 언덕길을 잘 오르고 온순한 성질이 특징이다.
다른 일본 재래마 품종과 마찬가지로 몸의 높이 147cm 이하의 조랑말로 분류되는 소형 말이나, 대부분이 험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쓰시마에서는 농사에 동원하거나 목재 ・ 농작물 ・ 일용품 등을 운반하는데 활용되어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2019년 4월 15일 쓰시마 시는 다이슈바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호칭
「対州馬」라는 한자 표기는 일본어로는 일반적으로 「다이슈바」(たいしゅうば)로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다이슈우마」(たいしゅううま)라고도 읽는다. 일본마사협회(日本馬事協会)에서는 후자를 택하고 있다.
원산지인 쓰시마에서는 우(う)음 한 글자가 생략되어 「다이슈마」(たいしゅう-ま) 또는 「다이슈바」(たいしゅうば)로도 불린다.
나가사키 시나 쓰시마에서는 「쓰시마우마」(対馬馬, つしまうま)로 불리는 경우도 많다.
체격
몸 높이 : 107~136cm. 수컷은 평균 127cm, 암컷은 125cm 정도이다.일본 재래마로 알려져 있는 여덟 종 가운데 홋카이도 와종(北海道和種) 등 3종은 중형마, 토카라바(トカラ馬) 등 4종은 소형마로 분류되는데, 다이슈바는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털 색깔 : 다이슈바 본래의 털색은 검은색이었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갈색의 구렁말 계열이 더 많고, 이어 검은색, 밤색 털이 많다.
체격 : 머리 부분이 크고 눈은 크고 둥글다. 등성마루(머리와 등의 경계를 이루는 튀어나온 부분)가 높고 길다. 산길에서 사역하기 적합하도록 개량되었기 때문인지 어깨 부분의 폭이 좁고 가슴이 가늘며 어린이나 체구가 작은 사람들도 타기가 쉽다.
특징
성격이 온순하고 조악한 사료를 먹고도 잘 견딘다.
체질이 강건하고 다리가 튼튼하며 경사가 급하고 험한 산길을 위아래로 오갈 수 있다. 언덕길의 보행에 적합한 측대보(側対歩)를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다.
많은 무게의 짐을 질 수 있으며, 통상 130~150kg의 물건을 운반할 수 있다.
발굽이 튼튼하여 평소에도 편자를 박지 않는다.
등으로 이밖에도 일본 재래마는 물론 한국의 재래마 가운데 하나인 제주마에도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이 발견된다.
쓰시마와 다이슈바
쓰시마는 고대로부터 좋은 말의 산지로 알려져 있었는데, 《속일본기》 덴표(天平) 11년(739년) 3월에 쓰시마에서 신사에 봉납할 신마(神馬)를 조정에 바쳤다는 기록이나, 간닌 3년(1019년) 도이의 입구 당시 도이(여진족 해적)들이 쓰시마의 오다우라(小田浦)에 침입해서 소와 말을 약탈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원나라의 일본 원정 당시 쓰시마국(対馬国)을 다스리던 소 씨(宗氏) 일족의 무장들이 부렸다고 전하고 있으나, 당시와 오늘날의 다이슈바의 체격이나 성질이 얼마나 같고 또 달랐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이슈바가 자라는 쓰시마의 지형은 표고 200~300m 전후의 산지가 전체 면적의 90%를 차지하고 경사면이 많다. 농지 비율은 3% 이하로 낮아서 남성은 어업에 종사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소나 말을 기르거나 말로 운반하는 것은 거의 여성들의 일이었다. 다이슈바는 특유의 성질과 체격 덕분에 쓰시마의 좁고 험준한 길을 따라 운반하기도 어려움이 없었으며, 성질도 온순하였기 때문에 여성들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이러한 성질을 가진 다이슈바는 쓰시마 사람들의 생활속에 녹아 들었으며, 메이지(明治) 이후 신정부의 국책으로 서구종에 의한 마필 개량이 추진되었을 때도 쓰시마 현지에서는 이에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다이슈바는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그대로 보존되었고 귀중한 일본 재래마로써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다만 1931년에 가고시마 현으로부터 앵글로아랍종 잡종의 종마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잡종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5년 무렵까지는 쓰시마에서 대부분의 가정에서 다이슈바 암말 두 필 정도가 사육되고 있었으며, 1~2년에 한 필씩 새끼 말을 낳았고 한쪽이 새끼를 배고 있는 동안에는 새끼를 배지 않은 다른 쪽 말을 사역하였다. 태어난 새끼는 생후 2세에서 3세 사이에 시장에 내다 팔았다. 교대로 새끼를 남기는 경우 어미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일을 익혀버려서 따로 길들이거나 조교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쓰시마처럼 언덕이 많은 나가사키 시의 고지대 지역에서도 최근까지 소수나마 다이슈바가 건축자재 운반 등에 사역되었다.
말갖춤
쓰시마에는 말을 제어할 말갖춤으로써 하미(馬銜, 말재갈)를 쓰지 않고 무쿠치토우라쿠(無口頭絡)나 「쓰메메다테」(締め前立て, 「메다테」前立て라고도 한다)라 불리는 메토우라쿠(帯締頭絡, 띠 말굴레)가 사용된다. 말몰이꾼은 무쿠치토우라쿠의 왼쪽 입 부분으로 연결된 「잇폰테즈나」(一本手綱, 한쪽 고삐)만으로 말을 제어하는데, 이는 온순한 성질을 가진 다이슈바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사육 두수의 추이와 전망
1952년 조사에서는 2,408두(頭)가 확인되었으나, 60년에는 1,884두、70년 654두、80년 148두、95년 70두、2000년에는 29두、05년 25두로 50년 만에 1/100 가까이 줄어들었다. 이는 일본의 재래마로써도 오키나와현의 미야코바(宮古馬)에 비해서도 적은 규모이다.
쓰시마의 농업 인구는 나날이 줄어들고 있으며, 도로망이 정비되고 자동차가 보급되고 농기구들의 기계화 등이 이루어지면서 다이슈바의 사육 두수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또한 다이슈바 사육자의 고령화가 두드러지면서 다이슈바라는 품종 자체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다이슈바 보존 활동
1972년에 「다이슈바 진흥회」(対州馬振興会)가 일본에서 발족하였다(이 단체는 다이슈바의 증식 기술 지도 등 오늘날까지 다이슈바의 보존 활동의 중심을 맡고 있는 단체이다).
1988년에 다이슈바의 보존 등을 목적으로 쓰시마 현지의 미쓰시마 정(美津島町)에서 다이슈바의 사육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유인도인 시마야마지마(島山島)에 다이슈바 목장을 짓고 보존 ・ 증식을 시도하였다.
1989년, 일본 농림수산성(農林水産省)의 「진 뱅크 사업」(ジーンバンク事業)에 따라 다이슈바의 정액을 동결보존하고 세 필의 다이슈바를 홋카이도(北海道)의 가축 개량 센터 토카치 목장(十勝牧場)으로 보냈다. 해당 목장에서 증식에 성공하여 다음 세대의 다이슈바 몇 두가 태어났는데 이후 세대를 거치는 경우 장내의 개체만으로는 근친교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처해 있다.
1997년 시마야마지마의 다이슈바 목장의 다이슈바 가운데 12두를 나가사키 현 안팎의 목장이나 유치원에 분양하였다. 다이슈바 목장에서는 당초 9두였던 다이슈바를 47두까지 늘렸으나, 두수가 늘어난 만큼 재정상의 부담이 커져서 「사토리오야」(里親)를 모집, 일부 다이슈바를 분양하였다. 남은 다이슈바들은 시마야마지마에서 미쓰시마 정 안에 있는 자연공원인 「아소베이 파크」(あそうベイパーク)로 옮겨졌다.
2002년 7월, 가미아가타 정(上県町) 세타(瀬田) 지구에서 「우마토바세」(馬跳ばせ)를 부활시켰다. 이곳에서는 메이지 시대부터 하쓰우마사이(初午祭)의 여흥으로써 다이슈바를 사용한 소규모 경마 경기 「우마토바세」가 행해졌는데, 전성기에는 20필이 참여하였다고 하나 이후 다이슈바 사육이 감소하면서 사용할 다이슈바 마필이 없어 1960년대 후반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정 차원에서의 다이슈바의 보존과 함께 가미아가타 정과 쓰시마 현지 유지들에 의해 결성된 하츠우마사이 실행위원회(初午祭実行委員会)가 메호로 댐(目保呂ダム) 상류의 공원을 회장으로써 「우마토바세」를 부활시켰고, 호평을 받으면서 쓰시마 하쓰우마사이는 연례행사가 되었고(오늘날에는 10월에 실시) 많은 관광객들을 모았다. 하쓰우마사이에는 중심 행사이자 인기행사인 「우마토바세」 외에도 야부사메(流鏑馬) 룰렛이나 승마 체험 등에도 다이슈바를 활용하고 있다.
2004년 3월, 섬 안의 6개 정(하쓰우마사이를 행하는 가미아가타 정, 「다이슈바 목장」을 운영하고 있던 미쓰시마 정을 포함)이 합병되어 쓰시마 시가 신설되었다. 시에서는 메호로 댐의 공원을 「메호로 댐 마사공원」(目保呂ダム馬事公園)으로써 리뉴얼하였다(「아소우베 파크」의 마구간도 존속했다). 2006년 2월부터 메호로 댐 마사공원에서는 「다이슈바 만나기 체험」(対州馬ふれあい体験)으로써 다이슈바 승마 체험을 실시하고 승마 클럽의 개설도 검토되고 있다.
2006년 5월, 「메호로 댐 마사공원」에서 암컷 다이슈바 1두가 새로 태어났다.
2006년 8월 나가사키 신문에 따르면 다이슈바의 현지 사육두수는 26두로 소유자 면면을 보면 진흥회에서 8두, 쓰시마 시에서 12두, 기타 6두이다. 이 가운데 「아소베이 파크」와 「메호로 댐 마사공원」에서 각기 6두를 관리하고 있다.
2012년에서 2013년까지 총 7마리가 더 태어나서 다이슈바 두수는 31마리까지 늘었지만 일본 전국의 재래마 8종 중에서 가장 적은 것이다.
다이슈바는 일본의 다른 재래종 말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농림수산성(農林水産省) 「일본 재래마의 보존 활용 추진 사업」(日本在来馬の保存活用推進事業)이나 「일본 재래마종 보존사업」(日本在来馬種保存事業), 「일본 재래마종 보존 소개 사업」(日本在来馬種保存紹介事業)의 대상이 되어 있다. 이에 의해 경마마사생산진흥기금(競馬馬事生産振興基金) ・ (사) 일본마사협회의 조성 기금 등을 받는 활동을 행하고 있다.
각주
같이 보기
소 스케쿠니
왜구
참고 문헌
岩手県立博物館(編)『北の馬文化 -岩手県立博物館開館20周年記念特別企画展図録』, (財)岩手県文化振興事業団
早坂昇治(1996)『馬たちの33章 ―時代を彩ったうまの文化誌』, 緑書房.
原田俊治(1997)『馬のすべてがわかる本 ―速い、優しい、立って寝る』, PHP研究所.
野澤謙(1997)日本在来馬をめぐる諸問題. 畜産の研究, 51-5:135-142.
近藤誠司(2001)『ウマの動物学』, 東京大学出版会.
외부 링크
공익사단법인 일본마사협회 홈페이지 다이슈바 소개(일본어)
아소베이 파크 제공 다이슈바 소개(일본어)
다이슈바 보존회(일본어)
「다이슈바의 보존과 활용에 대하여」(논문) - 쓰시마 시 발간(일본어)
「다이슈바 보존 계획」 - 쓰시마 시 발간(일본어)
쓰시마시 (나가사키현)
말 품종 | https://en.wikipedia.org/wiki/Taish%C5%AB%20horse | Taishū horse | The Taishū (, taishū uma) or Tsushima (, tsushima uma) is a rare Japanese breed of small horse from Tsushima Island in the Korea Strait, in Nagasaki Prefecture, Japan.
In 1989 the population was reported as "critical" at 89 head. In 2007 it was listed by the FAO as "critical-maintained", and a population of 30 was reported in 2008.
The Taishū is small, with strong legs. In the past, it was used for transport on the narrow paths between remote villages in the mountains of the island.
References
Horse breeds
Horse breeds originating in Japan |
https://ko.wikipedia.org/wiki/%ED%8E%AD%EC%88%98 | 펭수 | 펭수(남극 '펭'+빼어날 '수'(秀))는 EBS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자이언트 펭TV》에 등장하는 펭귄 캐릭터이다. 펭수는 현재 EBS 연습생으로 최고의 크리에이터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 2019년 12월 29일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본
본인이 즐겨먹는 참치로 만들어진 꽃다발을 수상자에게 수여하였다. 타이거 JK, 비지, 비비와 《펭수로 하겠습니다》 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다. 팬덤 이름은 펭클럽이다.
역사
펭수는 2019년 3월에 시작된 《자이언트 펭TV》에 등장하는 펭귄 캐릭터이다. 처음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설정한 캐릭터로 한국의 일산초등학교에 전학을 온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유튜브 채널이 함께 운영되었고 5월까지 구독자 수는 37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의 어린이 프로그램 캐릭터가 가지는 모범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깨방정'을 떠는 모습이나 솔직하게 질투를 표출하는 모습 등 일종의 안티히어로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어린이가 아닌 성인들이 더욱 열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EBS 육상 선수권 대회 (E육대)라는 프로그램에서 다른 캐릭터들과 등장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고, EBS의 사장 김명중의 이름을 거침없이 호명하며 투덜대는 장면은 직장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현재 어른들의 뽀통령으로 불리고 있다.
대중적 인기가 상승하자 연습생이라는 설정을 이용해 MBC의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에는 도티와 같이 나오기도 했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에도 등장하여 이른바 펭성(펭귄+인성 (人性))을 드러내었고, 외교부에서 촬영한 일을 두고는 신분 확인이 안된 캐릭터를 국가 1급시설에 출입케 하였다는 바른미래당 정병국 의원의 문제 제기와 펭수의 신분은 EBS의 영업비밀로서 방송된 내용은 사전 신분 확인을 거친 뒤 편집된 것이라는 외교부의 해명이 화제가 될 정도였다.
2019년 11월 11일 경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가 50만 명을 넘었으며, 2019년 11월 13일에 펭수의 카카오톡 이모티콘이 출시되었다. 2019년 11월 16일 JTBC 《아는 형님》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펭수가 패션 화보를 촬영하는 에피소드가 2019년 11월 15일에 방영되었으며, 이 때 촬영한 화보가 패션 잡지 《나일론》 12월호에 게재되었다. 11월 18일 펭수는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와의 협업으로 허진호 감독과 만나 영화 오디션을 본다는 내용의 에피소드를 촬영하였다. 11월 22일에는 펭수와 패스트 패션 브랜드 스파오의 협업이 발표되었다.
2019년 11월 26일 유튜브 채널 구독자 100만 명 도달을 앞두고 2019년 11월 28일 유튜브에서 라이브 방송을 할 예정임을 발표하였다.2019년 11월 27일 유튜브 채널 구독자가 100만 명을 돌파하였다. 12월 4일 인크루트가 조사한 2019년 올해의 인물 방송·연예 분야에서 1위에 선정되었다. 높은 인기로 협업 요청이 쇄도하자 EBS는 12월에 전담 태스크 포스를 조직하였다.
12월 6일 첫 상업 광고로 한국인삼공사의 정관장 광고를 EBS 사옥에서 촬영하였다. 2020년 1월 1일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 행사에 참석하였으며 2020년 1월 13일 JTBC 뉴스룸에서 "제야의 종 타종행사에 참석한 첫 번째 펭귄"으로 소개된바 있다. 2020년 1월 5일 골든디스크 시상식에 시상자로 참석하면서 자신의 우상인 방탄소년단을 만났다.
그리고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윌리엄, 벤틀리와 만나 즐겁게 노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2020년 1월 29일 유튜브 채널 구독자가 200만 명에 도달하였다. 2020년에 출시된 2020학년도 EBS 수능특강 및 EBS 만점왕 문제집 표지 모델로 들어가기도 했다.
2020년에 [[Show Me The Money 9](쇼미더머니9)]에 지원하여 영상심사에서 합격하였다.
우당탕탕 은하안전단 시작송도 만들었다.
캐릭터 설정
공식 홈페이지의 자기 소개서에 의하면 펭수의 나이는 10살, 현재 신분은 EBS의 연습생이다. 펭수는 나이를 먹지 않으며 자신은 "평생 친구하기로 했기 때문에" 계속 10살이라고 한다. 오디션 영상에서 펭수가 말한 바에 따르면 최고의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 남극에서 헤엄쳐가다 스위스에 불시착해 요들송을 배우고 스위스에서부터 인천 앞바다까지 헤엄쳐 왔다고 한다.그리고 EBS의 뽀로로처럼 되고싶어 왔다고하였다. 펭수의 성별은 불명이며, 펭수만의 화장실과 샤워실을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종은 자이언트 펭귄이며,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유일한 자이언트 펭귄이라고 밝혔으나,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했을 때나 《펭수로 하겠습니다》의 가사에서는 자신이 황제펭귄이라고 하였다.
보건복지부에서 펭수에게 펭수의 가족 그림을 선물했으나 자신에게 동생은 없다고 했으며,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와 《아는 형님》에서 펭수의 한자가 남극 펭, 빼어날 수(秀)라고 밝혔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에서 펭수의 헤드셋은 김명중 EBS 사장이 준 것으로, 브랜드는 김명중이고, 유일한 것이라고 소개하였다.
평가
《자이언트 펭TV》는 "한때 어린이였던 어른이"를 위한 방송이라는 평을 듣는다. 펭수 본인은 비교당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어른들을 위한 B급 뽀로로"라는 평도 있다.
여담
이말년을 만나는 에피소드에서 같은 펭귄이자 그 동안 EBS의 대표적인 캐릭터였던 뽀로로와 갈등에 대해 "화해했습니다. 그래도 보기 싫은 건 똑같습니다."라고 답했다.
펭수가 김명중 EBS 사장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는 데 대하여 김명중 사장은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지금은 펭수의 표현의 자유"라고 반응하였다.
펭수는 빙그레가 2019년 6월부터 7월에 개최한 슈퍼콘 댄스 챌린지에 참가하였으나 137위에 그쳤다. 2019년 12월 22일 슈퍼콘 챌린지 담당자가 EBS에 방문하여 펭수에게 메로나 칫솔과 참치회를 선물로 주는 영상이 공개되었으며, 2020년 1월 28일 빙그레의 붕어싸만코의 모델로 펭수가 발탁되었음이 발표되었다.
2020년에 방송된 Show me the Money 9에 지원하였다.
2020년 10월 18일에는 T전화×NUGU이벤트에 참여했으며 현재 그 이벤트는 계속되고 있다.
2020년 11월 26일부터 넥슨 코리아와 콜라보레이션을 하였다.
흔한남매에게 200만 구독자가 되는 방법을 알고싶어 찾아가 스승과 제자 관계를 맺자고 해 흔한남매와 제자와 스승이 됐다. 흔한남매에게 배우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달리기를 가장 잘한다고 한다.
음반 목록
커버곡 목록
광고 모델
같이 보기
김명중
자이언트 펭TV
EBS
펭수로 하겠습니다
남극
펭귄
황제펭귄
뽀로로
뿡뿡이
아미 (팬덤)
각주
내용 주
참조 주
외부 링크
가공의 펭귄
텔레비전 등장인물
대한민국의 유튜버
한국교육방송공사
2019년 창조된 가공인물
2019년 인터넷 문화 | https://en.wikipedia.org/wiki/Pengsoo | Pengsoo | Pengsoo (, Pengsu) is a penguin character that appears on the YouTube channel Giant Peng TV, run by Educational Broadcasting System (EBS) in South Korea. Pengsoo is a ten-year-old trainee at EBS who dreams of being a universal superstar.
The popularity of Pengsoo, expanding outside the initial target demographic for the character, has resulted in Pengsoo appearing in television programs, games, radio programs, advertising, government PSAs, and on multiple branded products both physical and digital.
On January 29, 2020, Giant Peng TV (자이언트 펭TV), Pengsoo's YouTube channel, reached 2 million subscribers.
History
Educational Broadcasting System (EBS) first conceptualized Pengsoo as a character "the whole family could like" and was originally designed to target a demographic of children in South Korea around 10 years old. While EBS had significant success with children's programming, the company had generally targeted a younger age group with simple, "cute and cuddly" personas such as Pororo the Little Penguin. Pengsoo was intentionally written with a personality more akin to an antihero.
In May 2019, the number of subscribers was only 37.
Pengsoo portrays the role of an anti-hero such as a light behavior or an honest expression of jealousy. It breaks existing social norms in Korea and contrasts with another famous penguin character on EBS, Pororo the Little Penguin, who is a more gentle creature. It began to gain popularity as he appeared with other characters in the program called EBS Athletics Championships (E-Yuk Dae), and the scene of complaining about the name of EBS's president Kim Myung-joong without hesitation gained a great response from office workers.
Currently, it is called the PO-president of adults. Pengsoo appeals to Kidults and has built a fan base of more than 2 million YouTube subscribers.
Character
According to the self-introduction on the official website, Pengsoo is 10 years old and currently is an EBS trainee. According to Pengsoo in its audition video, it said that it had been swimming in Antarctica to become the best creator, then crash-landed in Switzerland to learn the yodeling song and swim from Switzerland to the coast of Incheon, and he wanted to be like Pororo of EBS. Pengsoo is deliberately genderless, and the height of Pengsoo is 2m 10 cm. In addition, Pengsoo is described as using Pengsoo's own toilets and showers.
Media appearances
It also entered the 2021 EBS College Scholastic Ability Test (CSAT) special lecture and was featured as the EBS PerfectScore Workbook cover model, which was released in 2020. Pengsoo was selected as a presenter for the 34th Golden Disk Awards and has made content with K-Pop group TWICE.
Popularity and influence
Pengsoo's rise in popularity is largely credited to its unique character. It has been described as rude, back-talking, and brazen. Within a nine month span in 2019 - 2020, Pengsoo generated 10 billion won (approx. 7.6 million USD) in revenue. In 2019, Pengsoo's popularity was cited in increased searches by South Koreans of travel to Ushuaia, a point close to Antarctica allowing for wildlife viewing such as penguins. Pengsoo was chosen as the "Animal of the year 2020". Pengsoo i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penguins in South Korea currently. The official fandom name of Pengsoo is "Peng Club" (펭클럽).
In 2019, Pengsoo beat BTS to become South Korea's "Person of the Year".
Government-related appearances
Pengsoo has received attention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nd was invited to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nd met Minister Kang Kyung-wha on November 6, 2019 to promote a special summit between South Korea and the ten-member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has shot many TV commercials and public advertisements for encouragement, cheering on the public during the COVID-19 pandemic.
Pengsoo COVID-19 cheering
Pengsoo's the right way to wash your hand
Pengsoo Vote encouragement
Buzzwords
Pengsoo is credited with popularizing buzzwords like "눈치챙겨 [keep your wits], 엣헴엣헴 [ahem], 신이나 [it's fun/I'm having fun], 펭러뷰 [Peng(soo) loves you], 펭하 [Peng hi], 펭빠 [Peng bye]"
Merchandise and licensing
The Pengsoo character has a large variety of merchandise and has been licensed with multiple products. Pengsoo Mall, a website hosting many of Pengsoo's official products, has featured Pengsoo branded fashion, kitchen, bathroom, beauty, technology, and food products. Pengsoo has appeared on debit cards, Companies who successfully secure licensing for the character saw increased stock trading activity and rising stock price in 2019, with the cost to win a bid to license the character being compared to the same cost to the rights to popular Disney characters. Pengsoo also made an appearance as a playable character in Nexon’s mobile game KartRider Rush+ since November 26, 2020. A digital sticker pack released on KakaoTalk featuring Pengsoo became a bestseller immediately upon release.
In March 2020, EBS announced an effort to legally target copyright infringements of Pengsoo.
Discography
As a lead artist
Filmography
Television show
References
External links
Fictional penguins
Bird mascots
South Korean YouTubers
Mascots introduced in 2019
Television characters introduced in 2019 |
https://ko.wikipedia.org/wiki/%EB%AA%85%EC%8B%A4%EB%A1%9D | 명실록 | 명실록(明實錄)은 명나라에서 편찬한 실록으로, 명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총 2909권에 달하며, 한문으로 쓰여져 있다. 후일 청에서 작성한 《명사》의 중요 참고자료가 되었다.
《명실록》은 대량의 원사료를 포함하고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고, 학술적으로도 문헌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개요
한국의 고려나 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 왕조도 새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감수(監修), 정(正) · 부(副) 총재(總裁), 찬수(撰修) 등을 임명하여 선대 황제의 실록을 편찬하였으며, 현존하는 《명실록》은 그러한 편찬 작업의 산물이다.
명 왕조의 실록 편찬 제도에 따르면 실록은 정본(正本)과 부본(副本)을 작성하여 따로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실록》이 정식으로 편수가 이루어진 뒤에는 첫머리에 어제서(御制序) 즉 황제 자신이 쓴 서문이 붙고, 신하들이 진실록표(進實錄表)라는 실록 완성을 알리는 표문을 찬수에 참여한 신하들의 이름과 찬수 범례(凡例) 등과 함께 황제에게 올리고, 초고는 소각하였으며(조선의 경우는 세초) 정본을 내부(內府)에 보관하였다. 이후 가정(嘉靖) 13년(1534년)부터는 내부가 아닌 황사성(皇史宬)에 보관하였고, 부본은 처음에 고금통집고(古今通集庫)에 보관하다 나중에 문연각(文淵閣)으로 옮겨 보관하여 후대 각신(閣臣), 사관(史官)들이 실록을 편찬할 때 전범으로서 참고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정본・부본 외에 열람용으로 대본(大本)을 따로 만들어 건청궁(乾淸宮)에 보관하였으며, 어람용으로 소본(小本)도 제작하였는데 실록이 편찬된 뒤에는 지정된 사고에 보관되어 외부로의 반출 및 열람이 제한되었고 심지어 국왕조차도 실록을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었던 조선 왕조와는 다른 점이다. 또한 중수가 이루어지더라도 개수실록이라는 이름을 붙여 기존의 실록과 함께 보관하지 기존 실록을 아예 폐기하거나 소각하지 않았던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명실록』은 중수가 이루어지고 나면 기존의 실록은 폐기되었다.
이렇게 편수, 제작된 『명실록』의 정본・부본・대본・소본은 명조가 멸망하면서 (일부 훼손은 있었지만) 청(淸) 왕조에 인수되어 《명사》 편찬을 위해 설치한 명사관(明史館)에 보관되었다. 청조의 명사관은 《명사》를 편찬하면서 『명실록』의 네 가지 초본을 종합해서 새로운 초본을 만들었는데, 이 명사관 초본은 건륭(乾隆) 48년(1783년) 기존의 네 가지 초본을 전량 폐기한 이후 가장 양질의 선본(善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청 왕조가 멸망 이후 명사관 초본 『명실록』은 베이핑도서관(北平圖書館), 즉 오늘날의 중국국가도서관(中國國家圖書館)에서 보관하게 되었다. 명사관 초본 『명실록』은 보통 홍격본(紅格本)이라고 불린다.
이처럼 국가가 작성하여 보관하던 초본 외에 만력(萬曆) 연간에 대학사(大學士) 신시행(申時行)이 여러 학사들에게 『명실록』에 대한 교수(校讎)를 명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실록의 각종 초본이 만들어져 세상에 나돌기 시작하였다. 이 초록 유포 과정에서 권질(卷帙), 내용, 자구 등이 누락되거나 첨삭되기도 하고, 주요 사건이 생략되거나 순서가 뒤바뀌고 연대가 착오가 생기는 일도 적잖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홍격본 외에도 대략 십여 종의 『명실록』 초본이 현존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명실록》은 민간에서 제작, 유포한 초본까지도 남게 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명실록』의 초본은 두 종이 영인되었는데, 1941년에 난징(南京)의 국학도서관(國學圖書館) 소장 초본을 영인한 것과 1962년 타이완(臺灣)의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에서 출판한 영인한 것으로, 민국 시대부터 베이핑 도서관 소장 홍격본 『명실록』을 저본으로 삼아 각종 초본과의 대조와 교감 작업을 수행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자들이 주로 쓰고 있는 통행본은 1962년 영인본이다.
목록
명실록의 구성은 다음과 같은데, 혜제(惠帝)와 대종(代宗) 그리고 사종(思宗)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명 태종 즉 영락제가 정난의 변을 일으키고 건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건문 연호를 홍무 32년부터 35년으로 포함시켜 버렸다.
명 영종 즉 정통제 남궁복벽(南宮復辟) 즉 탈문의 변을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천순제로서 복위한 뒤 경태제를 인정하지 않고 탈락시켜 버렸다.
명 사종 즉 숭정제가 이자성이 북경을 쳐서 함락시킨 이른바 갑신지변(甲申之變)으로 자결한 뒤 청 왕조에서는 『숭정장편(崇禎長編)』과 『숭정실록(崇禎實錄)』 등으로 기술하였다. 즉 숭정제의 실록은 명 왕조가 멸망한 뒤 청 왕조에 의해 편찬된 것이다.
또한 가정 연간에 명 세종이 자신의 생부를 위해 『대명공목헌황제실록(大明恭穆獻皇帝實錄)』 50권(《명사》는 《예종실록》이라 되어 있다)을 편찬하였는데, 현재 그 초본 제11-50권이 톈진도서관(天津圖書館)에 소장되어 있고, 『명실록』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명실록의 출판
1941년 양홍지(梁鴻志)가 장쑤성립국학도서관(江蘇省立國學圖書館)에 전해지던 초본을 처음으로 영인 출판하였는데, 건문제 때의 일을 부록으로 실은 《명태종실록》이나 후세 사람들이 보충해 넣은 《숭정실록》(崇禎實錄) 17권을 포함하여 모두 500책을 헤아린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영인본이고 이제까지의 초본들을 처음으로 수합 정리하였다고는 하지만 착오가 너무 많았다.
1930년부터 1961년에 이르기까지 타이완의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 역사어언연구소(歷史語言研究所)에서 옛 국립베이핑도서관(國立北平圖書館)에서 소장하고 있던 홍격초본(紅格鈔本) 《명실록》에 대한 대규모 정리 및 교감을 행하였다. 이 정리 및 교감 작업은 홍격초본이라 불리는 청대의 《명실록》 초본을 저본으로 광방언관본(廣方言館本), 포경루본(抱經樓本), 베이핑 대학본(北京大學本), 예왕부본(禮王府本), 가업당본(嘉業堂本), 천일각본(天一閣本), 명내각정사본(明內閣精寫本), 양홍지 영인본, 내각문고(內閣大庫) 소장 청 초기 명사관 초본 등 수십 종의 사본들을 대교본(對校本)으로 삼아 《명실록》의 착오에 대한 교감이 이루어졌다.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친 대규모 교감 작업에는 전후로 부사년(傅斯年), 왕숭무(王崇武), 황창건(黃彰健) 등의 중국사 전문가들이 참여하였고, 여러 세대의 피와 땀이 응결된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작업의 결과로 교정을 거친 공신력 있는 저본이라 할 대본(臺本)이 완성,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아울러 완성과 동시에 상당한 분량의 《명실록교감기》(明實錄校勘記)도 함께 출간되었다. 전체 분량은 정문(正文) 133책에 교감기(校勘記) 29책, 부록(附錄) 21책으로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는 가장 우수한 저본이 되었다. 이 버전은 중국과 대만 양국에서 모두 출판되었다.
홍격초본 명실록
명 왕조에서는 한 대의 실록 편수를 마치면 가장 좋은 사본을 가려 보관하였으며 특히 명 신종 이후에는 실록과 보훈(寶訓)을 마친 뒤에 바로 4부를 등사해서 실록과 보훈용 정본을 황사성에, 부본을 내각에, 대본을 건청궁에 보관하였으며, 소형본을 어람용으로 제작 보관하였다. 이와 같이 네 종의 본이 동시에 존재하였는데 내용은 완전히 동일하며 어떠한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이자성이 북경에 들어온 뒤 이들 4종의 명실록 사본들은 여러 차례 손상을 입었지만 청 건륭제까지 그 대부분이 온존해 있었다.
청 초기에는 《명사》를 편수하기 위해 네 종의 명실록 사본들을 명사관으로 옮겨 소장하였으며, 검열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명사관에서는 이들 네 종을 하나로 종합하여 초록을 만들고 역사 편수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륭 연간에 《명사》가 완성되고, 기휘 문제로 《명실록》은 금서가 되었으며 민간에 유통되던 필사본은 대부분 수거되어 소각되었으며, 명사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네 종의 《명실록》 사본들은 그 서책의 방대함으로 다른 기록 보관을 위해서도 옮겨져야만 했다. 동시에 명 왕조의 정사(공식 역사)인 《명사》의 편찬도 이미 마쳤고 남아 있는 실록도 어차피 잔결된 것이 많다는 이유로, 대학사 삼보(三寶)의 요청에 따라 건륭 48년(1783년) 3월에 《명실록》과 황제보훈 모두 4,757권이 사관에서 반출되어 모두 소각되고 말았다. 그 후 명사관에서 제작된 초본만이 가장 유일하며 동시에 가장 뛰어난 사본으로서 남게 되었다.
이마저도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훼손되었고, 민국 시대에는 베이핑 도서관에 소장되어 홍격초본(紅格抄本)이라 불렸는데, 여기저기를 떠돌다 현재는 타이완의 국립고궁박물원 도서문헌관에 소장되어 있다.
각주
외부 링크
중국의 역사책
명나라
실록
편년체 | https://en.wikipedia.org/wiki/Ming%20Veritable%20Records | Ming Veritable Records | The Ming Veritable Records or Ming Shilu (), contains the imperial annals of the emperors of the Ming dynasty (1368–1644). It is the single largest historical source for the dynasty. According to modern historians, it "plays an extremely important role in the historical reconstruction of Ming society and politics." After the fall of the Ming dynasty, the Ming Veritable Records was used as a primary source for the compilation of the History of Ming by the Qing dynasty.
Historical sources
The Veritable Records (shilu) for each emperor was composed after the emperor's death by a History Office appointed by the Grand Secretariat using different types of historical sources such as:
"The Qiju zhu (), or 'Diaries of Activity and Repose'. These were daily records of the actions and words of the Emperor in court."
"The 'Daily Records' (). These records, established precisely as a source for the compilation of the Veritable Records, were compiled by a committee on the basis of the diaries and other written sources."
Other sources such as materials collected from provincial centres and "culled from other official sources such as memorials, ministerial papers and the Metropolitan Gazette."
List of books
See also
History of Ming
References
Citations
Sources
Works cited
provides detailed and extensive background information on how the Ming Shi-lu was composed and the rhetoric that it uses.
Further reading
Wade, Geoff. tr. (2005). Southeast Asia in the Ming Shi-lu: an open access resource. Singapore: Asia Research Institute and the Singapore E-Press,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External links
Interactive scholarly edition, with critical English translation and multimodal resources mashup (publications, images, videos) Engineering Historical Memory.
Chinese history texts
Ming dynasty literature
Tai history
History of Laos
History of Myanmar
History of Malaysia
History of Vietnam
History books about the Ming dynasty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B%B9%84%EC%97%90%EB%A5%B4%20%EC%9A%B0%EB%A3%A8%ED%8B%B0%EC%BD%94%EC%97%90%EC%B2%B4%EC%95%84 | 하비에르 우루티코에체아 |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곤살레스 우루티코에체아(; 1952년 2월 17일, 바스크 지방 산 세바스티안 ~ 2001년 5월 24일, 카탈루냐 지방 에스플루게스 데 료브레가트)는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골키퍼로 활약했다.
그는 플러트코 페렌츠, 안토니 라마예츠, 후안 벨라스코, 그리고 리카르도 사모라와 같은 화려한 골키퍼 계보로 알려진 바르셀로나와 레알 소시에다드, 그리고 에스파뇰에서 16시즌 가까이 307번의 라 리가 경기에 출전하여 큰 족적을 남겼다.
우루티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3차례 FIFA 월드컵에 참가하기도 했다. 2001년, 그는 바르셀로나 인근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클럽 경력
우루티는 기푸스코아 주 산 세바스티안 사람으로, 우루티는 렌고코아크 유소년부에서 축구를 하다가 1969년에 레알 소시에다드 일원이 되어 2군 소속으로 3년을 보냈다. 이후 라 리가 무대에서는 소속 구단의 주전 골키퍼 자리를 놓고 전설적인 루이스 아르코나다와 흥미로운 경쟁을 이어갔다.
주전 경쟁이 아르코나다의 승리로 끝나면서, 우루티는 에스파뇰로 이적하였는데, 이곳에서 활약하면서 1981년에 돈 발론 올해의 국내 선수상을 받았고, 그 시즌이 끝나고 도시 반대편으로 건너가 바르셀로나에 입단하였다.
우루티는 3년차에 리그에서 1경기를 제외하고 전경기 출전하여 최우수 골키퍼로 등극하였다. 그는 테리 베너블스 감독이 이끄는 카탈루냐 연고 구단이 1984-85 시즌에 우승을 거두는 데에 주축 선수로 활약하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바르셀로나가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오르는 데에 맹활약하였다. 1985년 3월 25일, 그는 바야돌리드와의 경기에서 마히코 곤살레스의 페널티 킥을 막아내어 바르셀로나의 우승에 쐐기를 박았다.
IFK와의 유러피언컵 준결승 2차전에서 우루티는 1차전에서 0-3으로 패한 후 공이 나가고 실점한 것에 대해 심판에 이의를 잘 제기하여 실점을 무효화시켜 승부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했다. 결국 바르셀로나는 동점으로 따라잡고, 승부차기에서 주자를 한 명 막아내고 직접 주자로 나서서 골망을 갈랐다. 그러나, 스테아우아와의 경기는 실망스럽게 끝났는데, 득점 없이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2명을 막아세웠지만, 상대 루마니아 수문장 헬무트 두카담은 4명의 주자를 모두 막아세웠기 때문이었다.
또다른 바스크 연고 선수인 안도니 수비사레타가 1986년에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건너오면서, 우루티는 후보 선수로 밀려났고, 막판 2시즌에는 단 1번의 리그 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고, 이후 구단의 골키퍼 코치가 되었다. 2001년 5월 24일, 불과 49세의 나이에 바르셀로나 주 에스플루게스 데 료브레가트 순환로의 중앙 칸막이와 충돌하면서 사망했고, 연간 골프 대회인, 하비에르 우루티 추모전이 그를 기리기 위해 개최되었다.
국가대표팀 경력
우루티는 2년에 걸쳐 스페인 국가대표팀 경기에 5번 출전했고, 1978년, 1982년, 그리고 1986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한 스페인 선수단의 일원이었으며, UEFA 유로 1980에서도 선수단으로 차출되었다. 그가 출전한 첫 국가대표팀 경기는 1978년 3월 29일, 히혼에서 진행된 노르웨이와의 친선경기였다. 그러나, 소속 구단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가대표팀 차출 기회를 얻기도 힘들어졌고, 같은 바스크 출신의 아르코나다와 수비사레타를 제치고 국가대표팀에서 자리를 확보할 수 없었다.
우루티는 바스크 국가대표팀 경기에 2번 출전하기도 했다.
수상
클럽
바르셀로나
라 리가: 1984–85
코파 델 레이: 1982–83, 1987–88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3
코파 데 라 리가: 1983, 1986
UEFA 컵위너스컵: 1981–82
유러피언컵 준우승: 1985–86
개인
돈 발론 올해의 국내 선수: 1980–81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 1983–84
각주
외부 링크
FC 바르셀로나 프로필
Eu-Football 스페인 국가대표팀 통계
Porteros Vascos de Leyenda 바이오그래피
1952년 출생
2001년 사망
산세바스티안 출신 스포츠인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바스크주 출신 축구 선수
남자 축구 골키퍼
라리가의 축구 선수
레알 소시에다드 B의 축구 선수
레알 소시에다드의 축구 선수
RCD 에스파뇰의 축구 선수
FC 바르셀로나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아마추어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B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197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UEFA 유로 1980 참가 선수
1982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198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바스크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
20세기 스페인 사람
21세기 스페인 사람 | https://en.wikipedia.org/wiki/Javier%20Urruticoechea | Javier Urruticoechea | Francisco Javier González Urruticoechea (17 February 1952 – 24 May 2001), known as Urruti, was a Spanish footballer who played as a goalkeeper.
At FC Barcelona, a club known for goalkeepers like Franz Platko, Antoni Ramallets, Juan Velasco and Ricardo Zamora, he became a legend, playing 307 La Liga games over the course of 16 seasons and also representing in the competition Real Sociedad and Español.
Urruti represented Spain in three World Cups. In 2001, he died in a road accident near Barcelona.
Club career
Born in San Sebastián, Gipuzkoa, Urruti played as a junior with Lengokoak before joining Real Sociedad in 1969, spending three full years with the reserve team. For the next La Liga seasons, he maintained an interesting battle for first-choice status with legendary Luis Arconada.
After Arconada finally settled, Urruti moved to RCD Español, where he won the Don Balón award in 1981 (Spanish Footballer of the Year), moving across the city after that campaign to join FC Barcelona.
In his third year, Urruti won the Ricardo Zamora Trophy while playing in all the matches safe one. He was a prominent member of the Catalonia team coached by Terry Venables that won the league in 1985 and then reached the final of the European Cup in the following year; on 25 March 1985, in a game against Real Valladolid, his penalty save against Mágico González effectively clinched the title.
During the second leg of the European Cup semi-final against IFK Göteborg, Urruti successfully protested to the referee about a conceded goal after he spotted the ball had gone out of play – Barcelona were trailing 0–3 from the first leg and the decision kept them in the game. They eventually drew level, and in the subsequent penalty shootout he saved a crucial penalty and then scored one; the final with FC Steaua București, however, was to end in disappointment as, although he saved two shots in the shootout (after 0–0 in regulation), his Romanian counterpart, Helmuth Duckadam, stopped all four.
After Andoni Zubizarreta, another Basque, arrived from Athletic Bilbao in 1986, Urruti was pushed to the bench and only appeared in one league match in his final two seasons combined, later being the club's goalkeeper coach. On 24 May 2001, he died after his car hit the central barrier of a ring road in Esplugues de Llobregat, Barcelona, at just 49; an annual golf tournament, the Memorial Javier Urruti, was subsequently played in his honour.
International career
Urruti played five times for Spain in a two-year span, and was a member of the Spanish squads for the 1978, 1982 and 1986 FIFA World Cups, also being picked for UEFA Euro 1980. His debut came in a friendly with Norway on 29 March 1978, in Gijón; however, his struggles at the club level translated to the international front, as he was never able to replace fellow Basques Arconada and Zubizarreta.
Urruti also earned two caps for the Basque Country national team.
Honours
Club
Barcelona
La Liga: 1984–85
Copa del Rey: 1982–83, 1987–88
Supercopa de España: 1983
Copa de la Liga: 1983, 1986
European Cup Winners' Cup: 1981–82
European Cup runner-up: 1985–86
Individual
Don Balón Award – Spanish Footballer of the Year: 1980–81
Zamora Trophy: 1983–84
References
External links
Biography at Porteros Vascos de Leyenda
1952 births
2001 deaths
Spanish men's footballers
Footballers from San Sebastián
Men's association football goalkeepers
La Liga players
Real Sociedad B footballers
Real Sociedad footballers
RCD Espanyol footballers
FC Barcelona players
Spain men's under-23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amateur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B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1978 FIFA World Cup players
UEFA Euro 1980 players
1982 FIFA World Cup players
1986 FIFA World Cup players
Basque Country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Road incident deaths in Spain |
https://ko.wikipedia.org/wiki/20%EC%84%B8%EA%B8%B0%20%EB%AC%B8%ED%95%99 | 20세기 문학 | 20세기 문학(20世紀文學)은 1901년부터 2000년 사이의 20세기 동안 만들어진 전 세계 문학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랑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은 프랑스의 정치·경제·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와 사회의 관련이 더욱 강화된 20세기 문학은 두 번의 대전을 경계로 하여 3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에는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이 시기에 대가(大家)로서 존경을 받은 것은 이미 자연주의 시대부터 비판적이던 프랑스, 로티, 부르제, 바레스 등이었다.
이 시기의 사조는 텐으로 대표되는 실증주의·과학주의에서 베르그송으로 대표되는 반(反)지성주의로 이행한다. 이 동향은 상징주의 영향과 중첩하여 20세기 문학의 주조(主調)를 만들어 나갔다. 20세기 문학의 참다운 개척자인 클로델, 지드, 프루스트, 발레리 등은 모두 이러한 방향에서 출발하여 전후(戰後)의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는 또 인도주의적·사회주의적·카톨릭적인 흐름의 원천이 되는 롤랑과 페기 및 쉬르레알리즘의 선구적 시인인 아폴리네르 등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기성가치(旣成價値)의 부정과 정신적 불안으로서 문학에 나타났는데 다다이즘과 쉬르레알리즘은 그 두드러진 예이다. 이러한 동향의 배후에 있는 프로이트의 영향도 빠뜨릴 수 없다. 양차 세계대전 간에는 전기한 대가들 이외에 여러 작가가 독자적인 일을 하였다.
시(詩)에서는 브르통, 엘뤼아르, 아라공, 콕토가 소설에서는 콜레트, 모르와, 몽테를랑과 모리아크 등의 카톨릭 작가들이 있고 연극에서는 지로두, 살라크루, 아누이 등이 활동하였다. 1920년대 문학은 자아(自我)를 중심으로 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1930년대가 되면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눈을 돌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로맹 등의 대하(大河) 소설과 말로, 생텍쥐페리 등 이른바 행동주의 문학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은 1930년경에 시작한 세계적인 경제공황(經濟恐慌)과 파시즘의 대두 등 긴장된 사회정세와 관련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먼저 저항의 문학을 낳았다. 전후는 사르트르를 지도자로 하는 실존주의 문학이 화려하게 등장하여 인간의 고독과 불안과 번민을 드러내어 문학과 정치의 관련을 강조했다. 이것은 엄격한 역사상황에 직면한 시대의 요구에 잘 합치된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가 되어 일단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이룩하자 비정치적인 문학을 구하는 바람도 일어났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사강의 소설은 그 단적인 표시이다. 한층 더 중요한 동향으로서 소설에 있어서 누보 르망, 연극에는 앙티데아트르가 등장하였다. 양자는 다같이 정치와 절연하여 사실주의 실존주의와는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현실을 포착하려는 것으로 이미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누보 르망은 프랑스 문학에서 퇴보하는 경향이 되었다. 사로트는 주로 희곡에 전념했고, 로브 그리예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오늘날 프랑스 작가들은 다양한 종류의 소설을 시도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을 힘찬 시적 문체에 담고 있다. 미셸 투르니에는 인간의 정체성과 의사소통의 문제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파트릭 모디아노는 개인의 추억이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점령 문제를 다루고 있다.
1970년에는 페미니즘 경향이 나타나 기존에 활동을 한 여성 작가들이 주목을 끌었고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여성들이 현대문학을 텍스트로 삼아 표현과 여성 등장인물들을 분석함으로써 문학 전반을 재점검했다.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로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엘렌식수를
들 수 있다. 특히 모니크 위티그는 과거의 문학 언어가 주로 남성의 관점에서 표현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페미니즘 작가이다. 20세기 후반에도 시는 계속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브 본푸아는 복잡하고 함축된 언어로 철학적인 시를, 장클로드 르나르는 신비로운 경험을 시로 쓰고 있다.
동유럽
20세기에 들어서자 헝가리 문단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그 원동력이 된 것은 문예잡지 <뉴가트>(서양)의 창간(1908)이었다. 이 <뉴가트>의 그룹에는 서유럽의 근대 문예사조의 세례를 받은 젊은 세대의 문학자들이 참여하여, 새로운 문학운동을 통해서 당시 사회의 보수적 경향에 도전했다. ‘뉴가트’파의 지도자는 20세기 헝가리가 낳은 이색적인 시인 아디였으나 이 밖에 바비츠(1883-1941), 코츠톨라니(1885-1936)를 비롯해서 수많은 우수한 시인, 소설가가 이 그룹에 결집했다. 이 ‘뉴가트’파에서 출발한 소설가에 헝가리 리얼리즘 문학의 제1인자 모리츠(1879-1942)가 있고, ‘뉴가트’그룹에 가까운 서구파 작가에 희곡 <리리옴>(1909)이나 소년소설 <파르가(街)의 소년들>(1906) 등을 쓴 몰나르(1878-1952)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헝가리에는 쿤 베라의 공산혁명이 일어나 루카치(1885-1971), 바라지(1884-1949) 등의 평론가·문학가가 이 정권에 참가했으나 혁명 실패 후 망명작가가 되어 국외로 떠났다. 한편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소설가 사보(1879-1945)가 있어 혁명·반혁명의 투쟁이나 인플레이션의 불안에 위협을 받고 있던 전후의 혼란기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양 대전간의 시대에는 ‘뉴가트’파의 작가들 외에 여러 경향의 작가들이 제나름의 문예잡지를 통해 활발한 문예활동을 전개했다. 우선 서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소시민 작가에는 질라히(1891- ? ), 마라이(1900- ?) 등이 있고 두 사람 다 다방면의 필재에 의해 1930년대의 헝가리 문단에서 활약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 망명했다. 또한 <걸리버 여행기>의 속편을 쓴 풍자소설가 카린티(1887-1938)는 이 시대의 지적인 작가로서 알려졌고, 그의 작품은 서구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전, 불우한 생활 속에서 자결(自決)한 시인 요제프(1905-1937)는 전후 그 진가가 인정되어 오늘날 페퇴피, 아디와 나란히 헝가리가 낳은 3인의 대표적 서정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헝가리는 다른 동유럽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혁을 겪었으며, 그 영향은 당연히 문학분야에도 현저하다. 전후의 헝가리 문단의 주류를 점한 것은, 전전(前戰)부터 국내에서 문학활동을 하고 있던 ‘민중파’(이른바 파퓰리스트)와 해외망명이나 지하생활에서 문학에 복귀한 공산주의계 작가들이다. ‘파퓰리스트’파라는 것은 헝가리 문학의 중요한 테마의 하나인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는 작가 그룹으로 그 대다수는 소농출신(小農出身)들이기 때문에 이 그룹의 작품 속에는 농지해방과 집단농장을 둘러싼 전후 농촌생활의 여러 모습이 자주 취급되고 있다. ‘파퓰리스트’파의 대표적 작가로서는 전전에 자전적 장편 <푸스타의 사람들>(1936)을 발표한 이에시(1902-?), <두려움>(1947)과 <에게테 에스테르>(1956) 등의 역작을 썼고, 소설 외에도 희곡·평론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네메트(1901-1975)를 들 수 있다. 한편 전전의 공산주의계 작가 중 제1인자는 데리(1894-1977)로서 그의 이름은 전후의 라코시 정권에 의한 공포정치를 풍자한 작품 <니키>(1956)와 1956년 헝가리 의거에서의 활동으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위에서 언급한 외에 더욱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작가로는 ‘헝가리의 누벨 바그’로 평가받은 <새끼 사슴>(1959)의 여류작가 사보(1917- ), 전후 헝가리 최대의 베스트 셀러 소설 <고철 묘지>(1962)의 페예시(1923- ), 르포르타주 문학의 문제작 <20시간>(1963)의 샨타(1927- ), 그리고 이들보다 더욱 젊은 세대에 속하는 단편작가 모루드바 등이 있다.
미국
19세기 말의 미국문학은 리얼리즘이 중시되어 헨리 제임스, 워튼, 캐서 등이 출현했고, 유전과 환경을 결정론으로 하는 노리스, 스티번 크레인과 런던 등이 활약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기계문명의 발달이 생활과 의식, 사고활동에 영향을 끼쳤다. 물량(物量)·스피드·매스커뮤니케이션이 비인간적 사회를 만들었고, 문학은 이에 비평을 가했다.
우선 드라이저는 산업주의사회에서 파멸하는 인간을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묘사했고, 싱클레어는 사회주의가 노동자 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셔우드 앤더슨은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무리를 프로이트적 방법으로 해명했으며, 루이스는 속악(俗惡)한 사회에서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개인을 크게 부각시켜 노벨상(賞)을 받았다. 또한 시인 샌드버그는 사회의식을 주제로 했고, 로빈슨은 고독과 유머를, T. S. 엘리엇은 개성(個性)으로부터의 도피를 노래했다. 극단(劇團)에서는 오닐이 자연주의 수법을 도입했고, 엘머 라이스나 로슨은 사회적 관심이 강한 극작을 발표했다.
1917년에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 젊은이들은 대학에서 전장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은 전쟁에 환멸을 느꼈고, 허무함을 느낀 끝에 향락사상을 지니게 되었다. 1919년에 금주법이 성립되자 밀주가 횡행하고 젊은이들은 파리로 몰려갔다. 당시 파리에 있던 스타인 여사는 전후의 미국을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 칭했는데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포크너, 도스 패소스 등이 그 대표로서 활약했고, 시인으로서는 커밍스, 제퍼스가 허무적 상황을 집요하게 추구하여 미국문학을 개화시켰다.
1929년 가을에 시작된 주가(株價)의 대폭락은 미국사회를 일변시켰다. 은행은 도산되고, 실업자는 1천 500만에 달하여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실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서 미국 사회주의사상이 민중 속으로 침투되어 도스 패소스, 헤밍웨이, 스타인벡 등이 빈농(貧農) 및 노동자의 실체를 묘사했고, 시인 해럴드 크레인은 자살하였으며, 랜섬, 테이트, 워렌은 남부의 경제와 사회에 관심을 나타냈다. 극단(劇壇)에서도 맥스웰 앤더슨은 사회주의를, 킹슬리, 그린은 백인 빈농(貧農)을, 오데츠는 노동자의 파업을 주제로 택했다. 당시 포크너는 남부사회의 몰락을 묘사하였으나 1940년대의 후반에 이르기까지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39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맞게 되었다. 전후 메일러를 비롯하여 다수의 전쟁소설이 발표되었고, 시인으로는 샤피로, 에버하트, 제럴이 종군하여 전쟁과 인간을 시의 주제로 하였다. 한편 1947년의 매카디 선풍으로 공산당 작가는 좌절되고, 도스 패서스, 흑인인 라이트 등은 전향했다. 1950년의 한국동란으로 미국은 호경기를 맞이하나, 50년대 중엽에는 긴스버그, 케루악을 중심으로 비트 문학이 발흥하여 사회에 저항했다. 극단에서는 아서 밀러가 상업 메케니즘의 부정(不正)에 도전했고, 테네시 윌리엄스는 포크너와 함께 남부의 퇴폐적 세계를 묘사하여 호평을 얻었다. 포크너,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을 탔고, 케네디 대통령의 등장으로 흑인시민권이 약속되어 흑인 볼드윈이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메일러, 베로는 고독한 인간을 묘사하고, 시인 판첸, 로웰은 행동에 호소했으며, 극작가 인지, 오베르트는 현대정신의 비애를 논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20세기의 미국문학은 절망과 불안, 그리고 초조감의 연속이었다. 상업주의의 압박, 인간성의 상실 등 여러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공통의 주제가 되고 있다.
독일
자연주의 문학은 독일에서는 지극히 단명하였다. 이에 대신하여 20세기 초두에 신(新)낭만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미 바르는 <자연주의의 극복>(1891)을 저술하였으나 그 정신적 원동력이 된 것은 니체였다. 그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이래, 본래의 생명력을 잃어가던 기성 그리스도교(敎)를 공격하고 "신(神)은 죽었다"라는 정언(定言)을 던져 세기말 유럽의 니힐리즘에 예리한 메스를 가하는 한편 중다(衆多)를 앞세우는 사회주의나 민주주의에 반대하여 정신의 귀족과 개인주의에 근원한 생(生)철학을 설파하였다.
독일은 19세기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빌헬름 2세 통치하의 제국주의시대로서, 사회주의적·인도주의적·반(反)군국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조공>이나 <축전극>은 한때 상연이 금지되었다. 신(新)낭만주의는 정치적·사회적 비판을 단념하고 오로지 관념적인 주관세계에 빠져 있었다. 신(新)낭만주의도 이를 더욱 세분하면 지각 내지 감각과 기분에서 출발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관능(官能)과 형식의 아름다움을 구하고 덧없는 환상(幻像)을 추구하며 작자의 인상을 충실히 재현하려고 시도한 인상주의 문학(릴리엔크론, 데멜, 바르, 빈파(派)의 슈니츨러, 호프만시탈, 다우텐다이 등)과 현실의 예감을 상징적 수법이나 신비적 사상에서 구하는 상징주의 문학(게오르게, 릴케, 후흐, 오이레베르크, 슈토켄 등)으로 나뉜다.
자연주의 문학에서 신낭만주의를 거쳐 만년의 그리스적 운명감과 신비사상에 도달한 하우프트만이나 자연주의적 수법에서 출발하여 풍자적 문명비평의 교양소설을 쓴 토마스 만이나, 예리한 심리분석을 장기로 하는 풍속작가(風俗作家) 바서만이나 내면성을 파고들어 독자적인 교양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헤세, 카로사, 무질, 브로호나 부조리한 세계를 실존주의적 수법으로 표현한 카프카 등은 하나의 조류(潮流) 속에 묶어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신낭만주의에 싫증을 느껴 고전주의 정신과 형식으로의 복귀를 외치며, 특히 헤벨을 재인식하려고 하는 일파(一派)의 신고전주의 문학(에른스트, 숄츠)이나 건전한 혈연과 향토에 바탕을 둔 문학을 제창한 향토문학(鄕土文學)(슈트라우스, 토마, 셰퍼, 슈미트본 등)도 민족성을 지나치게 고취한 나머지 나치스에 이용당하여 어용문학(프렌젠, 콜벤하이어, 그림 등)으로 전락된 것도 있다.
외계에서 내계로 방향을 돌린 인상주의에 대해 내계에서 외계로 자기의 감정을 표백하는 표현주의 문학(1912-1926)은 슈트린드베리나 도스토예프스키에 영향을 받고 하인리히 만이나 베데킨트를 선구자로 하여 현상학(現象學)과 프로이트나 베르그송의 철학적 배경하에 전후의 반전사상을 주로 하여 서정시나 희곡에서 전개되었다(카이저, 베르펠, 되블린, 슈테른하임, 추크마이어, 크라븐트, 벤, 트라클, 하임 등). 표현주의가 양식상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사회주의 혁명에로의 길을 밟은 작가(브레히트, 베허, 프랑크, 톨러 볼프 등)도 있었다.
너무나 주관주의적인 감정의 도취(陶醉)에 치우치던 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가 일어나 새로운 객관성, 마(魔)의 리얼리즘이라 불려 근대기술의 유선형(流線型), 특히 건축의 합목적적 실용성을 찬미하여 보고(報告)문학이나 전쟁문학(케스트너, 렌, 레마르크 등)으로 개화되었다.
‘피와 흙’의 문학을 구가한 나치스 문학에는 전술한 사람 외에 요스트, 브룽크, 그리제 등의 작가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 네덜란드, 프랑스, 소비에트, 미국에 망명한 작가들(만 형제, 프랑크, S.츠바이히, 되블린, 운루, 비헤르트, 포이히트방거 등)은 이민문학(移民文學)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전후의 문학으로서는 서독의 뵐, 자이델, 괴스, 융거 형제, 베르겐그륀, 르 포르, 안드레스, 카자크, 아이히, 그라스, 바이스, 슈미트, 서정시의 바하만, 엔챈스베르거, 스위스의 후리셰, 동독의 제거스, A. 츠바이히 등이 있다. | https://en.wikipedia.org/wiki/20th%20century%20in%20literature | 20th century in literature | Literature of the 20th century refers to world literature produced during the 20th century (1901 to 2000).
In terms of the Euro-American tradition, the main periods are captured in the bipartite division, Modernist literature and Postmodern literature, flowering from roughly 1900 to 1940 and 1960 to 1990 respectively, divided, as a rule of thumb, by World War II. The somewhat malleable term "contemporary literature" is usually applied with a post-1960 cut off point.
Although these terms (modern, contemporary and postmodern) are most applicable to Western literary history, the rise of the globalization has allowed European literary ideas to spread into cultures other than European fairly rapidly, so that the diversity of Asian and African literatures can be included into these divisions. And in some ways, such as in Postcolonial literature, writers were on the forefront of literary development.
Technological advances during the 20th century allowed cheaper production of books, resulting in a significant rise in production of popular literature and trivial literature, comparable to the similar developments in music. The division of "popular literature" and "high literature" in the 20th century is by no means absolute, and various genres such as detectives or science fiction fluctuate between the two. Largely ignored by mainstream literary criticism for the most of the century, these genres developed their own establishments and critical awards; these include the Nebula Award (since 1965), the British Fantasy Award (since 1971) or the Mythopoeic Awards (since 1971).
Towards the end of the 20th century, electronic literature developed due to the development of hypertext and later the World Wide Web.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was awarded annually throughout the century (with the exception of 1914, 1918, 1935 and 1940–1943), the first laureate (1901) being Sully Prudhomme. The New York Times Best Seller list has been published since 1942.
The best-selling literary works of the 20th century are estimated to be The Lord of the Rings (1954/55, 150 million copies), Le Petit Prince (The Little Prince, 1943, 140 million copies), Harry Potter and the Philosopher's Stone (1997, 120 million copies) and And Then There Were None (1939, 115 million copies).
The Lord of the Rings was also voted "book of the century" in various surveys.
Perry Rhodan (1961 to present) proclaimed as the best-selling book series, with an estimated total of 1 billion copies sold.
1901–1918
The Fin de siècle movement of the Belle Époque persisted into the 20th century, but was brutally cut short with the outbreak of World War I (an effect depicted e.g. in Thomas Mann's The Magic Mountain, published 1924). The Dada movement of 1916–1920 was at least in part a protest against the bourgeois nationalist and colonialist interests which many Dadaists believed were the root cause of the war; the movement heralded the Surrealism movement of the 1920s.
1900
Lord Jim by Joseph Conrad (Poland, England)
The Knights of the Cross by Henryk Sienkiewicz (Poland)
Genre fiction
The Wonderful Wizard of Oz by L. Frank Baum (US)
1901
Buddenbrooks by Thomas Mann (Germany)
The Inheritors by Joseph Conrad and Ford Madox Ford (England)
Kim by Rudyard Kipling (India, England)
Genre fiction
The Purple Cloud by M. P. Shiel (Montserrat, England)
The First Men in the Moon by H. G. Wells (England)
1902
Heart of Darkness by Joseph Conrad
The Immoralist by André Gide (France)
The Wings of the Dove by Henry James (US, England)
The Grand Babylon Hotel by Arnold Bennett (England)
Genre fiction
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by Arthur Conan Doyle (Scotland)
Just So Stories by Rudyard Kipling
Plays
Man and Superman by George Bernard Shaw (Ireland)
1903
Romance by Joseph Conrad and Ford Madox Ford
The Ambassadors by Henry James
The Pit by Frank Norris (US)
In Wonderland by Knut Hamsun (Norway)
Genre fiction
The Call of the Wild by Jack London (US)
The Riddle of the Sands by Erskine Childers (England, Ireland)
1904
The Golden Bowl by Henry James
Nostromo by Joseph Conrad
The Napoleon of Notting Hill by G. K. Chesterton (England)
The Peasants by Władysław Reymont (Poland)
Genre fiction
The Food of the Gods by H. G. Wells
The Sea-Wolf by Jack London
Green Mansions by William Henry Hudson (Argentina, England)
Plays
John Bull's Other Island by George Bernard Shaw
1905
Hadrian the Seventh by Frederick Rolfe aka Baron Corvo (England, Italy)
Where Angels Fear to Tread by E. M. Forster (England)
Kipps by H. G. Wells
Songs of Life and Hope by Rubén Darío (Nicaragua)
The House of Mirth by Edith Wharton (US)
The Club of Queer Trades by G. K. Chesterton
1906
The Jungle by Upton Sinclair (US)
The Confusions of Young Törless by Robert Musil (Austria)
Genre fiction
Puck of Pook's Hill by Rudyard Kipling
Peter Pan in Kensington Gardens by J. M. Barrie (Scotland)
Time and the Gods by Lord Dunsany (Ireland, England)
White Fang by Jack London
Plays
The Aran Islands by John Millington Synge (Ireland)
The Morality of Mrs. Dulska by Gabriela Zapolska (Poland)
1907
The Secret Agent by Joseph Conrad
The Longest Journey by E. M. Forster
Genre fiction
The Listener and Other Stories by Algernon Blackwood (England) – contains The Willows, one of the first 'cosmic horror' stories
The Hill of Dreams by Arthur Machen (England)
Plays
The Playboy of the Western World by John Millington Synge
Poetry
Cautionary Tales for Children by Hilaire Belloc (France, England)
1908
The Man Who Was Thursday by G. K. Chesterton
A Room with a View by E. M. Forster
The Iron Heel by Jack London
Hell by Henri Barbusse (France, Russia)
The Magician by Somerset Maugham (England, France) – based on the author's meeting with Aleister Crowley
Genre fiction
The Wind in the Willows by Kenneth Grahame (England)
Poetry
Personae by Ezra Pound (US, England, Italy) – one of the first examples of 'modernist' poetry
1909
Martin Eden by Jack London
Sparrows: the story of an unprotected girl by Horace W C Newte
Tono-Bungay by H. G. Wells
Three Lives by Gertrude Stein (US, France)
Poetry
Exultations by Ezra Pound
Poems by William Carlos Williams (US)
Plays
The Blue Bird by Maurice Maeterlinck (Belgium)
1910
Howards End by E. M. Forster
The Card by Arnold Bennett
The History of Mr Polly by H. G. Wells
1911
Zuleika Dobson by Max Beerbohm (England)
In a German Pension by Katherine Mansfield (England) – short stories
Under Western Eyes by Joseph Conrad
The White Peacock by D. H. Lawrence (England)
Jennie Gerhardt by Theodore Dreiser (US)
In Desert and Wilderness by Henryk Sienkiewicz (Poland)
Genre fiction
Peter and Wendy by J. M. Barrie (Scotland)
1912
The Trespasser by D. H. Lawrence
Death in Venice by Thomas Mann (Germany)
Genre fiction
Riders of the Purple Sage by Zane Grey (US)
The Lost World by Arthur Conan Doyle
Tarzan of the Apes by Edgar Rice Burroughs (US)
Plays
Pygmalion by George Bernard Shaw
1913
Petersburg by Andrei Bely (Russia)
Swann's Way by Marcel Proust (France)
Le Grand Meaulnes by Alain-Fournier (France)
Sons and Lovers by D. H. Lawrence
Chance by Joseph Conrad
Genre fiction
A Prisoner in Fairyland by Algernon Blackwood – adapted into a play, it later became the Andrew Lloyd Webber musical Starlight Express
The Mystery of Dr. Fu-Manchu by 'Sax Rohmer' (England)
Poetry
Alcools by Guillaume Apollinaire (Poland, France) – dada poems
Gitanjali by Rabindranath Tagore
1914
Dubliners by James Joyce (Ireland, France, Italy) – short stories
The Prussian Officer and Other Stories by D. H. Lawrence – short stories
The Vatican Cellars by André Gide
Tender Buttons by Gertrude Stein
The Golem by Gustav Meyrink (Austria)
Mist by Miguel de Unamuno (Spain)
Maurice by E. M. Forster – unpublished
Sinister Street by Compton Mackenzie (Scotland, Greece)
The Flying Inn by G. K. Chesterton
The Ragged-Trousered Philanthropists by Robert Noonan (UK)
Poetry
North of Boston by Robert Frost (US)
1915
The Good Soldier by Ford Madox Ford
The Rainbow by D. H. Lawrence
The Metamorphosis by Franz Kafka
Of Human Bondage by Somerset Maugham
The Underdogs by Mariano Azuela (Mexico)
Victory by Joseph Conrad
Pointed Roofs by Dorothy Richardson
The Voyage Out by Virginia Woolf (England)
Vainglory by Ronald Firbank (England)
Rashōmon by Ryūnosuke Akutagawa
Genre fiction
The Thirty-Nine Steps by John Buchan (Scotland, Canada)
1916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by James Joyce
Women in Love by D. H. Lawrence – initially banned, published in 1920
Genre fiction
Greenmantle by John Buchan
Poetry
Salt-Water Poems and Ballads by John Masefield (England)
Mountain Interval by Robert Frost
1917
Under Fire by Henri Barbusse (France, Russia)
Walpurgis Night by Gustav Meyrink
Growth of the Soil by Knut Hamsun
The Shadow Line by Joseph Conrad
Caprice by Ronald Firbank
Poetry
Dulce et Decorum est and Anthem for Doomed Youth by Wilfred Owen (England) – published posthumously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 by T. S. Eliot (US, England)
1918
Tarr by Wyndham Lewis (Canada, England)
Man of Straw by Heinrich Mann (Germany)
Poetry
Calligrammes by Guillaume Apollinaire – dada poetry
Non-fiction
Eminent Victorians by Lytton Strachey (England)
Interwar period
The 1920s were a period of literary creativity, and works of several notable authors appeared during the period. D. H. Lawrence's novel Lady Chatterley's Lover was a scandal at the time because of its explicit descriptions of sex. James Joyce's novel, Ulysses, published in 1922 in Paris,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achievements of literary modernism.
1919
Within a Budding Grove by Marcel Proust
Night and Day by Virginia Woolf
Winesburg, Ohio by Sherwood Anderson (US) – the first 'lost generation' novel
Valmouth by Ronald Firbank
Bazaar-e-Husn by Premchand (publ. in Hindi as Seva-sadan)
Genre fiction
Dope by Sax Rohmer – inspired by the true story of Limehouse dope-dealer Brilliant Chang
Dope Darling by Leda Burke (David Garnett) (England)
1920
We by Yevgeny Zamyatin (Russia)
Limbo by Aldous Huxley (England) – short stories
The Lost Girl by D. H. Lawrence
This Side of Paradise by F. Scott Fitzgerald (US)
The London Venture by Michael Arlen (Armenia, England)
Storm of Steel by Ernst Jünger (Germany)
A Voyage to Arcturus by David Lindsay (Scotland)
Main Street by Sinclair Lewis (US)
The Age of Innocence by Edith Wharton (US)
Plays
Six Characters in Search of an Author by Luigi Pirandello (Italy)
Beyond the Horizon and Anna Christie by Eugene O'Neill – Pulitzer prize winner
1921
The Guermantes Way by Marcel Proust
Crome Yellow by Aldous Huxley
England, My England and Other Stories by D. H. Lawrence – short stories
The Forsyte Saga by John Galsworthy (England) – pentalogy, first volume published in 1906
My Life and Loves by Frank Harris (England, US) – four volumes of quasi-factual sex gossip, the fifth completed by Alex Trocchi
Plays
Back to Methuselah by George Bernard Shaw
R.U.R. (Rossum's Universal Robots) by Karel Čapek – from which the term 'robot' was coined
1922
Ulysses by James Joyce
Jacob's Room by Virginia Woolf
Sodom and Gomorrah by Marcel Proust
Croatian God Mars by Miroslav Krleža
The Enormous Room by E. E. Cummings (US)
Futility by William Gerhardie (Russia, England)
The Beautiful and Damned by F. Scott Fitzgerald
Mortal Coils by Aldous Huxley – short stories
Aaron's Rod by D. H. Lawrence Kim
The Garden Party by Katherine Mansfield – short stories
Siddhartha by Hermann Hesse (Germany, Switzerland)
Peter Whiffle by Carl Van Vechten (US)
Babbitt by Sinclair Lewis
Lady into Fox by David Garnett
Poetry
The Waste Land by T. S. Eliot
1923
Confessions of Zeno by Italo Svevo (Italy)
The Good Soldier Švejk by Jaroslav Hašek (Czechoslovakia)
The Captive by Marcel Proust
Kangaroo by D. H. Lawrence
Antic Hay by Aldous Huxley
Three Soldiers by John Dos Passos (US)
The Great American Novel by William Carlos Williams
The Devil in the Flesh by Raymond Radiguet (France)
Aelita by Alexey Tolstoy (Russia)
Plays
The Shadow of a Gunman by Seán O'Casey (Ireland)
Poetry
New Hampshire by Robert Frost
The Duino Elegies by Rainer Maria Rilke
1924
The Magic Mountain by Thomas Mann (Germany)
In Our Time by Ernest Hemingway (US) – short stories
A Passage to India by E. M. Forster
The Vortex by José Eustasio Rivera (Colombia)
Little Mexican and Other Stories by Aldous Huxley – short stories
Bohemian Lights by Ramón del Valle-Inclán (Spain)
The Fox and The Captain's Doll by D. H. Lawrence – short stories
Miranda by Antoni Lange (Poland)
Riddles and Conundrums for All Occasions
Genre fiction
The Murder of Roger Ackroyd by Agatha Christie (England)
Plays
Juno and the Paycock by Seán O'Casey
The Vortex by Noël Coward (England)
1925
Mrs Dalloway by Virginia Woolf
The Trial by Franz Kafka (Czechoslovakia) – posthumous, first English translation in 1930
The Great Gatsby by F. Scott Fitzgerald – often described as the epitome of the "Jazz Age" in American literature
The Green Hat by Michael Arlen – perhaps the epitome of the jazz age in British literature
Paris Peasant by Louis Aragon (France)
Albertine disparue by Marcel Proust
Manhattan Transfer by John Dos Passos
In the American Grain by William Carlos Williams
The Desert of Love by François Mauriac (France)
Gentlemen Prefer Blondes by Anita Loos (US)
Those Barren Leaves by Aldous Huxley
St Mawr by D. H. Lawrence – short stories
The Making of Americans by Gertrude Stein
Heart of a Dog by Mikhail Bulgakov (Russia)
Genre fiction
Beau Geste by P. C. Wren (England)
Poetry
The Hollow Men by T. S. Eliot
Non-fiction
The Old Straight Track by Alfred Watkins (England) – introducing ley lines
1926
The Castle by Franz Kafka – posthumous, first English translation in 1932
The Counterfeiters by André Gide
The Sun Also Rises aka Fiesta by Ernest Hemingway
Moravagine by Blaise Cendrars (France)
Don Segundo Sombra by Ricardo Güiraldes (Argentina)
Nigger Heaven by Carl Van Vechten
Two or Three Graces and Other Stories by Aldous Huxley – short stories
The Plumed Serpent by D. H. Lawrence
The Call of Cthulhu by H. P. Lovecraft
Genre fiction
Winnie-the-Pooh by A. A. Milne (England)
Poetry
A Drunk Man Looks at the Thistle by 'Hugh MacDiarmid' (Scotland)
Plays
The Plough and the Stars by Seán O'Casey
Non-fiction
Seven Pillars of Wisdom by T. E. Lawrence (England, Arabia)
1927
To the Lighthouse by Virginia Woolf
Time Regained by Marcel Proust
Steppenwolf by Hermann Hesse
Men Without Women by Ernest Hemingway – short stories
Vestal Fire by Compton Mackenzie
Dusty Answer by Rosamond Lehmann (England)
Elmer Gantry by Sinclair Lewis
The Rocking-Horse Winner by D. H. Lawrence – short stories
Plays
The Silver Tassie by Seán O'Casey
1928
Berlin Alexanderplatz by Alfred Döblin (Germany)
Nadja by André Breton (France)
Story of the Eye by Georges Bataille (France)
Parade's End by Ford Madox Ford – war tetralogy, first volume in 1926
Gypsy Ballads by Federico García Lorca
Point Counter Point by Aldous Huxley
Lady Chatterley's Lover by D. H. Lawrence – banned until 1963
Decline and Fall by Evelyn Waugh (England)
Amerika by Franz Kafka – posthumous, first English translation in 1938
Plays
Strange Interlude by Eugene O'Neill (US) – Pulitzer prize winner
Messrs. Glembay by Miroslav Krleža
Non-fiction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by Erich Maria Remarque (Germany) – recounts the horrors of World War I and also the deep detachment from German civilian life felt by many men returning from the front
1929
Les Enfants Terribles by Jean Cocteau (France)
A Farewell to Arms by Ernest Hemingway (US)
Look Homeward, Angel by Thomas Wolfe
Death of a Hero by Richard Aldington (England)
The Sound and the Fury by William Faulkner (US)
Doña Bárbara by Rómulo Gallegos (Venezuela)
Mario and the Magician by Thomas Mann (Germany)
The Escaped Cock by D. H. Lawrence (England)
The Defence by Vladimir Nabokov (Russia, France)
Wolf Solent by John Cowper Powys (England)
The Good Companions by J. B. Priestley (England)
Non-fiction
Good-Bye to All That by Robert Graves (England)
A Room of One's Own by Virginia Woolf (England)
Genre fiction
Red Harvest by Dashiell Hammett (US) – the first hard-boiled American detective novel
1930
Vile Bodies by Evelyn Waugh
The Apes of God by Wyndham Lewis
Brief Candles by Aldous Huxley – short stories
As I Lay Dying by William Faulkner
Narcissus and Goldmund by Hermann Hesse
Angel Pavement by J. B. Priestley
The Virgin and the Gypsy and Love Among the Haystacks by D. H. Lawrence – short stories
Genre fiction
Last and First Men by Olaf Stapledon (England)
The Maltese Falcon by Dashiell Hammett (US)
Poetry
Whoroscope by Samuel Beckett (Ireland, France)
Plays
Private Lives by Noël Coward
Non-fiction
Memoirs of a Fox-Hunting Man by Siegfried Sassoon (England) – 2 volumes, 1st in 1929
1931
The Good Earth by Pearl S. Buck
The Waves by Virginia Woolf
Night Flight by Antoine de Saint-Exupéry (France)
Genre fiction
The Glass Key by Dashiell Hammett
At the Mountains of Madness by H. P. Lovecraft
Plays
Mourning Becomes Electra by Eugene O'Neill
Cavalcade by Noël Coward
Non-fiction
Axel's Castle by Edmund Wilson (US)
Music at Night by Aldous Huxley
1932
The Return of Philip Latinowicz by Miroslav Krleža
Journey to the End of Night by Louis-Ferdinand Céline (France)
Brave New World by Aldous Huxley (England)
The Memorial by Christopher Isherwood (England)
Laughter in the Dark by Vladimir Nabokov (Russia, France)
Light in August by William Faulkner
A Glastonbury Romance by John Cowper Powys
Stamboul Train by Graham Greene (England)
Black Mischief by Evelyn Waugh
Radetzky March by Joseph Roth (Austria)
Jew Boy by Simon Blumenfeld (England)
Poetry
The Orators by W. H. Auden (England)
1933
Man's Fate by André Malraux (France)
Love on the Dole by Walter Greenwood (England)
Miss Lonelyhearts by Nathanael West (US)
The Autobiography of Alice B. Toklas by Gertrude Stein
Genre fiction
Lost Horizon by James Hilton (England)
Murder Must Advertise by Dorothy L. Sayers (England)
Non-fiction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 by George Orwell (England)
Texts and Pretexts by Aldous Huxley
In Praise of Shadows by Jun'ichirō Tanizaki
1934
Tropic of Cancer by Henry Miller (US) – a groundbreaking obscenity case before the U.S. Supreme Court in 1961 allowed its publication there
Call It Sleep by Henry Roth (Austria, US)
Tender Is the Night by F. Scott Fitzgerald
Threepenny Novel by Bertolt Brecht (Germany)
Despair by Vladimir Nabokov
It's a Battlefield by Graham Greene
A Handful of Dust by Evelyn Waugh
20,000 Streets Under the Sky by Patrick Hamilton (England)
Voyage in the Dark by Jean Rhys (Dominica, France, England)
Appointment in Samarra by John O'Hara (US)
A Scots Quair by Lewis Grassic Gibbon (Scotland)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in 1932
Genre fiction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by James M. Cain (US)
Novel with Cocaine aka Cocain Romance by M. Ageyev (Russia)
Poetry
18 Poems by Dylan Thomas (Wales)
Non-fiction
Burmese Days by George Orwell
Death in the Afternoon by Ernest Hemingway
1935
Mr Norris Changes Trains by Christopher Isherwood
Eyeless in Gaza by Aldous Huxley
Auto-da-Fe by Elias Canetti (Bulgaria, Germany)
A Clergyman's Daughter by George Orwell
England Made Me by Graham Greene
A House in Paris by Elizabeth Bowen (Ireland)
Tortilla Flat by John Steinbeck (US)
Studs Lonigan by James T. Farrell (US)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in 1932
Genre fiction
Little House on the Prairie by Laura Ingalls Wilder (US)
Poetry
Collected Poems by Cecil Day-Lewis (Northern Ireland)
Plays
Waiting for Lefty by Clifford Odets (US)
1936
Death on the Installment Plan by Louis-Ferdinand Céline
Black Spring by Henry Miller
U.S.A. by John Dos Passos
Mephisto by Klaus Mann (Germany, US)
Absalom, Absalom! by William Faulkner
Keep the Aspidistra Flying by George Orwell
Confession of a Murderer by Joseph Roth
Invitation to a Beheading by Vladimir Nabokov
The Wessex Novels by John Cowper Powys (England) – tetralogy, 1st vol published in 1927
Godaan by Premchand
Poetry
Ballads of Petrica Kerempuh by Miroslav Krleža
Genre fiction
Jamaica Inn by Daphne du Maurier (England)
Gone with the Wind by Margaret Mitchell (US)
A Gun for Sale by Graham Greene
1937
To Have and Have Not by Ernest Hemingway
The Years by Virginia Woolf
Of Mice and Men by John Steinbeck
Lions and Shadows by Christopher Isherwood
The Black Book by Lawrence Durrell (UK, Egypt)
Ferdydurke by Witold Gombrowicz (Poland)
Revenge for Love by Wyndham Lewis
White Mule by William Carlos Williams
Wide Boys Never Work by Robert Westerby (England, US)
Genre fiction
Star Maker by Olaf Stapledon
Night and the City by Gerald Kersh (England, US)
The Face on the Cutting-Room Floor by Cameron McCabe (Ernest Bornemann) (Germany, England)
The Hobbit by J. R. R. Tolkien (England)
Non-fiction
The Road to Wigan Pier by George Orwell
How Green Was My Valley by Richard Llewellyn (Wales)
1938
Nausea by Jean-Paul Sartre (France)
Murphy by Samuel Beckett
Tropic of Capricorn by Henry Miller
Man's Hope by André Malraux
The Death of the Heart by Elizabeth Bowen
Brighton Rock by Graham Greene
Scoop by Evelyn Waugh
The Gift by Vladimir Nabokov
Genre fiction
Brighton Rock by Graham Greene
Rebecca by Daphne du Maurier
Non-fiction
Journey to a War by W. H. Auden and Christopher Isherwood
Homage to Catalonia by George Orwell
Enemies of Promise by Cyril Connolly (England)
1939
The Grapes of Wrath by John Steinbeck
Finnegans Wake by James Joyce
The Banquet in Blitva by Miroslav Krleža
At Swim-Two-Birds by Flann O'Brien (Ireland)
Goodbye to Berlin by Christopher Isherwood
After Many a Summer by Aldous Huxley
Coming Up for Air by George Orwell
On the Marble Cliffs by Ernst Jünger
Good Morning, Midnight by Jean Rhys
The Day of the Locust by Nathanael West
The Legend of the Holy Drinker by Joseph Roth
Lotte in Weimar by Thomas Mann
The Confidential Agent by Graham Greene
Mister Johnson by Joyce Cary (Ireland)
Wind, Sand and Stars by Antoine de Saint-Exupéry
Pal Joey by John O'Hara
Genre fiction
The Big Sleep by Raymond Chandler (US)
Rogue Male by Geoffrey Household (England)
The Mask of Dimitrios by Eric Ambler
And Then There Were None by Agatha Christie
Poetry
Autumn Journal by Louis MacNeice (N Ireland)
The Map of Love by Dylan Thomas
Plays
This Happy Breed by Noël Coward
World War II
1940
Native Son by Richard Wright (US, France)
Darkness at Noon by Arthur Koestler (Hungary, England)
The Master and Margarita by Mikhail Bulgakov – published in English 1966
For Whom the Bell Tolls by Ernest Hemingway
The Power and the Glory by Graham Greene
The Heart Is a Lonely Hunter by Carson McCullers (US)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Dog by Dylan Thomas
Owen Glendower by John Cowper Powys
You Can't Go Home Again by Thomas Wolfe
And Quiet Flows the Don by Mikhail Sholokhov (Russia) – two volumes, first published in 1934
The feeling of the world by Carlos Drummond de Andrade (Brazil)
Genre fiction
Journey into Fear by Eric Ambler (England)
Farewell, My Lovely by Raymond Chandler
Plays
The Iceman Cometh by Eugene O'Neill
Non-fiction
To the Finland Station by Edmund Wilson
1941
Hangover Square by Patrick Hamilton
Reflections in a Golden Eye by Carson McCullers
The Third Policeman by Flann O'Brien
Genre fiction
Mildred Pierce by James M. Cain
Non-fiction
Grey Eminence by Aldous Huxley
1942
The Stranger by Albert Camus (Algeria, France)
Our Lady of the Flowers by Jean Genet (France)
Flight to Arras by Antoine de Saint-Exupéry
Plays
The Flies by Jean-Paul Sartre
1943
Arrival and Departure by Arthur Koestler
The Ministry of Fear by Graham Greene
The Man Without Qualities by Robert Musil (Austria)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1930
Genre fiction
Double Indemnity by James M. Cain
The Little Prince by Antoine de Saint-Exupéry (France)
Poetry
Selected Poems by Keith Douglas (England)
Non-fiction
Being and Nothingness by Jean-Paul Sartre
The Myth of Sisyphus by Albert Camus
1944
The Horse's Mouth by Joyce Cary
Ficciones by Jorge Luis Borges (Argentina) – short stories
The Razor's Edge by Somerset Maugham
Time Must Have a Stop by Aldous Huxley
Plays
The Glass Menagerie by Tennessee Williams (US)
1945
Black Boy by Richard Wright (author)
Animal Farm by George Orwell
Watt by Samuel Beckett – published in 1953
Brideshead Revisited by Evelyn Waugh
Black Boy by Richard Wright
Lark Rise to Candleford by Flora Thompson (England) – trilogy, first volume in 1939
Genre fiction
If He Hollers Let Him Go by Chester Himes (US, France)
The Space Trilogy by C. S. Lewis (N Ireland) – first volume published in 1938
1946
Cry, the Beloved Country by Alan Paton (South Africa)
The Miracle of the Rose by Jean Genet
El Señor Presidente by Miguel Ángel Asturias (Guatemala)
Froth on the Daydream by Boris Vian (France)
The Member of the Wedding by Carson McCullers
Poetry
Deaths and Entrances by Dylan Thomas
Plays
The Winslow Boy by Terence Rattigan (England)
Non-fiction
Alamein to Zem Zem by Keith Douglas
Memoirs of Hecate County by Edmund Wilson
This Way for the Gas, Ladies and Gentlemen by Tadeusz Borowski (Poland)
1947
The Plague by Albert Camus
Under the Volcano by Malcolm Lowry (England, Canada)
Bend Sinister by Vladimir Nabokov
The Victim by Saul Bellow (Canada, US)
The Conformist by Alberto Moravia (Italy)
The Middle of the Journey by Lionel Trilling (US)
Slaves of Solitude by Patrick Hamilton
Of Love and Hunger by Julian MacLaren-Ross (England)
Funeral Rites by Jean Genet
Snow Country by Yasunari Kawabata
Plays
A Streetcar Named Desire by Tennessee Williams
Non-fiction
The Diary of a Young Girl by Anne Frank (Netherlands)
1948
The Naked and the Dead by Norman Mailer (US)
Confessions of a Mask by 'Yukio Mishima' (Japan)
The Heart of the Matter by Graham Greene
El Túnel by Ernesto Sabato (Argentina)
The City and the Pillar by Gore Vidal (US)
Ape and Essence by Aldous Huxley
Ashes and Diamonds by Jerzy Andrzejewski (Poland)
Querelle of Brest by Jean Genet
Genre fiction
No Orchids for Miss Blandish by James Hadley Chase (England)
Plays
The Browning Version by Terence Rattigan
Non-fiction
The Second Sex by Simone de Beauvoir (France — early feminist study)
The Kon-Tiki Expedition by Thor Heyerdahl (Norway)
1949
Nineteen Eighty-Four by George Orwell
The Roads to Freedom by Jean-Paul Sartre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1945
The Thief's Journal by Jean Genet
The Man with the Golden Arm by Nelson Algren (US)
The Train Was on Time by Heinrich Böll (Germany)
The Aleph by Jorge Luis Borges
The Kingdom of this World by Alejo Carpentier (Mexico)
The Heat of the Day by Elizabeth Bowen
Genre fiction
The Trouble with Harry by Jack Trevor Story (England)
The Mating Season by P. G. Wodehouse
Plays
Death of a Salesman by Arthur Miller (US)
Postwar period
The intermediate postwar period separating "Modernism" from "Postmodernism" (1950s literature) is the floruit of the beat generation and the classical science fiction of Isaac Asimov, Arthur C. Clarke and Robert A. Heinlein. This period also saw the publication of Samuel Beckett's trilogy of novels, Molloy, Malone Dies, and The Unnameable, which enacted the dissolution of the self-identical human subject and inspired later novelists such as Thomas Bernhard, John Banville, and David Markson. The first works of electronic literature were written in the 1950s.
1950
Scenes from Provincial Life by William Cooper (England) – the first of the British 1950s 'kitchen sink' novels
Canto General by Pablo Neruda
Plays
The Bald Soprano by Eugène Ionesco (Romania, France)
Genre fiction
A Town Like Alice by Nevil Shute (England, Australia)
Strangers On a Train by Patricia Highsmith (US)
Non-fiction
The Authoritarian Personality by Theodor Adorno (Germany, US)
1951
Molloy by Samuel Beckett (Ireland, France)
Malone Dies by Samuel Beckett (Ireland, France)
The Catcher in the Rye by J. D. Salinger (US)
The Hive by Camilo José Cela (Spain)
Porius (A Romance of the Dark Ages) by John Cowper Powys (England)
The Grass Harp by Truman Capote (US)
Memoirs of Hadrian by Marguerite Yourcenar (France)
The Opposing Shore by Julien Gracq (France)
Plays
The Lesson by Eugène Ionesco (Romania, France)
Non-fiction
The Rebel by Albert Camus (France)
1952
Invisible Man by Ralph Ellison (US)
Wise Blood by Flannery O'Connor (US)
Go by John Clellon Holmes (US) – the first Beat novel
The Natural by Bernard Malamud (US)
The Old Man and the Sea by Ernest Hemingway
East of Eden by John Steinbeck
Love Letter Generator by Christopher Strachey
Genre fiction
The Tiger in the Smoke by Margery Allingham (England)
The Killer Inside Me by Jim Thompson (US)
Plays
The Chairs by Eugène Ionesco (Romania, France)
1953
The Unnameable by Samuel Beckett (Ireland, France)
Junkie and Queer by William S. Burroughs (US)
Go Tell It On the Mountain by James Baldwin (US, France)
The Outsider by Richard Wright
The Adventures of Augie March by Saul Bellow
The Captive Mind by Czesław Miłosz (Poland)
Hurry on Down by John Wain (England) – the first 'angry young man' novel
Genre fiction
Casino Royale by Ian Fleming (England, Jamaica) – first James Bond novel
The Long Goodbye by Raymond Chandler
Childhood's End by Arthur C. Clarke (England, Sri Lanka)
Foundation by Isaac Asimov (US)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in 1951
Prelude to a Certain Midnight by Gerald Kersh
Plays
Waiting for Godot by Samuel Beckett
1954
Lord of the Flies by William Golding (England)
Lucky Jim by Kingsley Amis (England) – the most famous 'angry young man' novel
Under the Net by Iris Murdoch (England)
Bonjour Tristesse by Françoise Sagan (France)
Genre fiction
Fahrenheit 451 by Ray Bradbury (US)
Story of O by Pauline Réage (France)
Plays
Under Milk Wood by Dylan Thomas
The Quare Fellow by Brendan Behan (Ireland)
Non-fiction
The Doors of Perception by Aldous Huxley
1955
Lolita by Vladimir Nabokov
One by David Karp (US)
The Quiet American by Graham Greene
The Bread of Those Early Years by Heinrich Böll
The Tree of Man by Patrick White (Australia)
The Inheritors by William Golding
Pedro Páramo by Juan Rulfo (Mexico)
The Voyeur by Alain Robbe-Grillet (France)
The Genius and the Goddess by Aldous Huxley
The Deer Park by Norman Mailer
The Recognitions by William Gaddis (US)
Memed, My Hawk by Yaşar Kemal (Turkey)
Genre fiction
The Lord of the Rings by J. R. R. Tolkien, first volume in 1954
The Talented Mr. Ripley by Patricia Highsmith
Plays
Cat on a Hot Tin Roof by Tennessee Williams
Bus Stop by William Inge (US)
Poetry
The Less Deceived by Philip Larkin (England)
1956
The Fall by Albert Camus
The Devil to Pay in the Backlands by João Guimarães Rosa
Giovanni's Room by James Baldwin
The Lonely Londoners by Samuel Selvon (Trinidad, England)
A Walk on the Wild Side by Nelson Algren
Genre fiction
The Chronicles of Narnia by C. S. Lewis (N Ireland) – seven volumes, first in 1950
Peyton Place by Grace Metalious
The Hundred and One Dalmatians by Dodie Smith (England)
Plays
Look Back In Anger by John Osborne (England) – the first 'angry young man' play
Poetry
Howl and Other Poems by Allen Ginsberg (US)
Non-fiction
Heaven and Hell by Aldous Huxley
1957
On the Road by Jack Kerouac (Canada, US)
Young Adam by Alexander Trocchi (Scotland)
Room at the Top by John Braine (England)
Doctor Zhivago by Boris Pasternak (Russia)
Voss by Patrick White
The Assistant by Bernard Malamud
Second Thoughts by Michel Butor (France)
Pnin by Vladimir Nabokov
Cairo Trilogy by Naguib Mahfouz (Egypt)
Gimpel the Fool by Isaac Bashevis Singer (Poland, US) – short stories, originally published in Yiddish years earlier
Atlas Shrugged by Ayn Rand (US)
Genre fiction
On the Beach by Nevil Shute
Plays
The Room and The Birthday Party by Harold Pinter (England)
Endgame by Samuel Beckett
The Entertainer by John Osborne
Orpheus Descending by Tennessee Williams
The Visit by Friedrich Dürrenmatt (Switzerland)
Poetry
Calling Out to Yeti by Wisława Szymborska (Poland)
1958
If This Is a Man by Primo Levi (Italy)
Breakfast At Tiffany's by Truman Capote
The Dharma Bums by Jack Kerouac
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by Alan Sillitoe (England)
A Taste of Honey by Shelagh Delaney (England)
Things Fall Apart by Chinua Achebe (Nigeria)
The Bell by Iris Murdoch
Fowlers End by Gerald Kersh
Our Man in Havana by Graham Greene
Candy by Terry Southern (US)
Genre fiction
Exodus by Leon Uris (US)
Zimiamvian Trilogy by E. R. Eddison (England) – first volume in 1935
Molesworth by Geoffrey Willans (England) and Ronald Searle (England, France) – tetralogy, first book in 1954
Plays
Krapp's Last Tape by Samuel Beckett
Suddenly, Last Summer by Tennessee Williams
Non-fiction
The Theatre and Its Double by Antonin Artaud (France)
Borstal Boy by Brendan Behan
1959
A Raisin in the Sun by Lorraine Hansberry (United States of America)
The Tin Drum by Günter Grass (Germany)
Naked Lunch by William S. Burroughs
The Last of the Just by André Schwarz-Bart (France)
Goodbye, Columbus by Philip Roth (US)
Zazie in the Metro by Raymond Queneau (France)
In the Labyrinth by Alain Robbe-Grillet
The Loneliness of the Long Distance Runner by Alan Sillitoe
Billy Liar by Keith Waterhouse (England)
The Long Day Wanes by Anthony Burgess (England)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in 1956
The Magic Christian by Terry Southern
Genre fiction
The Gormenghast Trilogy by Mervyn Peake (England) – first volume in 1946
The Getaway by Jim Thompson
Plays
The Dumb Waiter and The Caretaker by Harold Pinter
Rhinoceros by Eugène Ionesco
Cold War period 1960–1989
1960
To Kill a Mockingbird by Harper Lee (US)
The London Trilogy by Colin MacInnes (England) – first volume, Absolute Beginners, published in 1957
Cain's Book by Alexander Trocchi (UK, France, US)
This Sporting Life by David Storey (UK)
A Burnt-Out Case by Graham Greene
Hiroshima Mon Amour by Marguerite Duras (France)
The Ballad of Peckham Rye by Muriel Spark (Scotland)
The Rosy Crucifixion by Henry Miller (US)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1949
The Sot-Weed Factor by John Barth (US)
The Magician of Lublin by Isaac Bashevis Singer
Non-fiction and Quasi-fiction
The Morning of the Magicians by Louis Pauwels and Jacques Bergier (France) – the 1960s obsession with the occult starts here. Published in English 1963
A Canticle for Leibowitz by Walter M. Miller Jr. (US)
1961
Catch-22 by Joseph Heller (US)
A House for Mr Biswas by V. S. Naipaul (Trinidad, England)
Riders in the Chariot by Patrick White
The Prime of Miss Jean Brodie by Muriel Spark
A Severed Head by Iris Murdoch
Sword of Honour by Evelyn Waugh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in 1952
Revolutionary Road by Richard Yates (US)
Hear Us O Lord from Heaven Thy Dwelling Place by Malcolm Lowry – posthumous
Genre fiction
Solaris by Stanisław Lem (Poland)
Stranger in a Strange Land by Robert A. Heinlein (US)
The Man in the High Castle by Philip K. Dick (US)
1962
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 by Aleksandr Solzhenitsyn (Russia)
A Clockwork Orange and The Wanting Seed by Anthony Burgess (England)
Pale Fire by Vladimir Nabokov
Island by Aldous Huxley
The Time of the Hero by Mario Vargas Llosa (Peru)
The Golden Notebook by Doris Lessing (Zimbabwe, England)
The Death of Artemio Cruz by Carlos Fuentes (Mexico)
The Alexandria Quartet by Lawrence Durrell – first volume published 1957
Big Sur by Jack Kerouac – the last of the Lost Generation at the end of the Beat Generation
Genre fiction
The IPCRESS File by Len Deighton (England) – first of the Harry Palmer novels
Non-fiction
Silent Spring by Rachel Carson (US) – the first major popular study on the deterioration of the environment
1963
V. by Thomas Pynchon (US)
The Bell Jar by Sylvia Plath (US, England)
Hopscotch by Julio Cortázar (Argentina)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by Ken Kesey (US)
The Collector by John Fowles (England)
The Lowlife by Alexander Baron (England)
Cat's Cradle by Kurt Vonnegut (US)
Genre fiction
Planet of the Apes by Pierre Boulle (France)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by John le Carré (England)
The Grifters by Jim Thompson
Non-fiction
The Truce by Primo Levi
1964
Herzog by Saul Bellow
A Single Man by Christopher Isherwood
Last Exit to Brooklyn by Hubert Selby (US)
The Spire by William Golding (England)
Nothing Like the Sun by Anthony Burgess
Genre fiction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by Roald Dahl (UK)
The Three Stigmata of Palmer Eldritch by Philip K. Dick (US)
Little Big Man by Thomas Berger (US)
Non-fiction
Understanding Media by Marshall McLuhan (Canada)
1965
The Magus by John Fowles
The Interpreters by Wole Soyinka (Nigeria)
Cosmicomics by Italo Calvino (Italy)
The Painted Bird by Jerzy Kosinski (Poland, US)
Here We Go Round the Mulberry Bush by Hunter Davies (England) – the kitchen sink novel mutates into the swinging 1960s novel
Genre fiction
The Cyberiad by Stanisław Lem
Plays
Marat/Sade by Peter Weiss (Germany, Sweden)
Tango by Sławomir Mrożek (Poland)
Poetry
Briggflatts by Basil Bunting
Non-fiction and Quasi-fiction
The Kandy-Kolored Tangerine-Flake Streamline Baby by Tom Wolfe (US)
The Autobiography of Malcolm X by Alex Haley (US)
1966
A Man of the People by Chinua Achebe (Nigeria)
Alfie by Bill Naughton (England)
The Comedians by Graham Greene
Wide Sargasso Sea by Jean Rhys
Tremor of Intent by Anthony Burgess
Genre fiction
Pavane by Keith Roberts (England)
The Anti-Death League by Kingsley Amis
Non-fiction and Quasi-fiction
In Cold Blood by Truman Capote
Hell's Angels: The Strange and Terrible Saga of the Outlaw Motorcycle Gangs by Hunter S. Thompson (US)
Been Down So Long It Looks Like Up to Me by Richard Fariña (US)
1967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by Gabriel García Márquez (Colombia)
The Crying of Lot 49 by Thomas Pynchon
The Vendor of Sweets by R. K. Narayan (India)
Poor Cow by Nell Dunn (England)
A Grain of Wheat by Ngũgĩ wa Thiong'o
Non-fiction
In the First Circle by Aleksandr Solzhenitsyn
The Medium is the Message by Marshall McLuhan and Quentin Fiore
1968
Cocksure by Mordecai Richler (Canada)
Couples by John Updike (US)
The Public Image by Muriel Spark
Lunar Caustic by Malcolm Lowry – posthumous
The Abyss by Marguerite Yourcenar
Non-fiction and quasi-fiction
Cancer Ward by Aleksandr Solzhenitsyn
The Electric Kool-Aid Acid Test by Tom Wolfe
The Armies of the Night and Miami and the Siege of Chicago by Norman Mailer
Bomb Culture by Jeff Nuttall (England)
Slouching Towards Bethlehem by Joan Didion (US)
The Teachings of Don Juan by Carlos Castaneda (US)
1969
Portnoy's Complaint by Philip Roth
The French Lieutenant's Woman by John Fowles
A Void by Georges Perec (France)
Passacaille by Robert Pinget (France)
Dark as the Grave wherein my Friend is Laid by Malcolm Lowry – posthumous
Genre fiction
Barefoot in the Head by Brian Aldiss
The Final Programme by Michael Moorcock (England, US)
Slaughterhouse-Five by Kurt Vonnegut (US)
The Godfather by Mario Puzo (US)
Non-fiction and Quasi-fiction
Papillon by Henri Charrière (France)
The View Over Atlantis by John Michell (England)
1970
Play It as It Lays by Joan Didion
Mr. Sammler's Planet by Saul Bellow
Being There by Jerzy Kosiński
October Ferry to Gabriola by Malcolm Lowry – posthumous
Genre fiction
The Hot Rock by Donald E. Westlake (US)
Deliverance by James Dickey (US)
Non-fiction and Quasi-fiction
The Female Eunuch by Germaine Greer (Australia, England)
Groupie by Jenny Fabian (England)
Playpower by Richard Neville (Australia, England)
Revolt into Style by George Melly (England)
Soledad Brother by George Jackson (US) – prison letters
Soul on Ice by Eldridge Cleaver (US)
1971
In a Free State by V. S. Naipaul (Trinidad, England)
M/F by Anthony Burgess
Our Gang by Philip Roth
The Dice Man by Luke Rhinehart (US)
Another Roadside Attraction by Tom Robbins (US)
Genre fiction
The Day of the Jackal by Frederick Forsyth (England)
Non-fiction and Quasi-fiction
The Happy Hooker by Xaviera Hollander (Indonesia, Netherlands)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by Hunter S. Thompson
1972
The Infernal Desire Machines of Doctor Hoffman by Angela Carter (England)
Invisible Cities by Italo Calvino
G by John Berger (England, France)
The Good for Nothing by Oğuz Atay (Turkey)
Genre fiction
The Friends of Eddie Coyle by George V. Higgins (US)
Jonathan Livingston Seagull by Richard Bach (US)
The Odessa File by Frederick Forsyth
Poetry
Crossing the Water and Winter Trees by Sylvia Plath
1973
Gravity's Rainbow by Thomas Pynchon
Crash by J. G. Ballard (England)
Season of Anomy by Wole Soyinka (Nigeria)
Life Is Elsewhere by Milan Kundera (Czechoslovakia, France)
Sweet Dreams by Michael Frayn (England)
Fear of Flying by Erica Jong (US)
The Great American Novel by Philip Roth
Genre fiction
Frankenstein Unbound by Brian Aldiss
1974
If Beale Street Could Talk by James Baldwin (US)
The Conservationist by Nadine Gordimer (South Africa)
The Fan Man by William Kotzwinkle (US)
The Lost Honour of Katharina Blum by Heinrich Böll
I, the Supreme by Augusto Roa Bastos (Paraguay)
Napoleon Symphony by Anthony Burgess
Myra Breckinridge and Myron by Gore Vidal – first of pair published in 1968
Genre fiction
Tinker Tailor Soldier Spy by John le Carré
Fletch by Gregory Mcdonald (US)
Genre fiction
Jaws by Peter Benchley (US)
Non-fiction and Quasi-fiction
All the President's Men by Bob Woodward and Carl Bernstein (US)
Poetry
Mr. Cogito by Zbigniew Herbert (Poland)
1975
Humboldt's Gift by Saul Bellow
The Deptford Trilogy by Robertson Davies – first volume published 1970
Dead Babies by Martin Amis (England)
The Autumn of the Patriarch by Gabriel García Márquez
The History Man by Malcolm Bradbury (England)
The Periodic Table by Primo Levi – short stories
Genre fiction
Watership Down by Richard Adams (England)
The Choirboys by Joseph Wambaugh (US)
Shōgun by James Clavell (England, US)
'Salem's Lot by Stephen King (US)
1976
Ragtime by EL Doctorow (US)
Genre fiction
Interview with the Vampire by Anne Rice (US)
Non-fiction and quasi-fiction
Roots by Alex Haley
Another Day of Life by Ryszard Kapuściński (Poland)
Drama
Death and the King's Horseman by Wole Soyinka
1977
The Engineer of Human Souls by Josef Škvorecký (Czechoslovakia)
Song of Solomon by Toni Morrison (US)
1978
Success by Martin Amis
The Sea, the Sea by Iris Murdoch
Lanark: A Life in Four Books by Alasdair Gray (Scotland)
Life A User's Manual by Georges Perec
The Book of Laughter and Forgetting by Milan Kundera
Jake's Thing by Kingsley Amis
The World According to Garp by John Irving (US)
1985 by Anthony Burgess
Horatio Stubbs by Brian Aldiss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in 1970
Non-fiction and Quasi-fiction
The Emperor by Ryszard Kapuściński
Genre fiction
Rumpole of the Bailey by John Mortimer (England)
1979
A Bend in the River by V. S. Naipaul
The Unlimited Dream Company by J. G. Ballard
Sophie's Choice by William Styron (US)
Non-fiction and Quasi-fiction
The White Album by Joan Didion
The Right Stuff by Tom Wolfe (US)
1980
The Name of the Rose by Umberto Eco
Pascali's Island by Barry Unsworth (England)
Earthly Powers by Anthony Burgess
1981
Midnight's Children by Salman Rushdie (India, UK)
The Comfort of Strangers by Ian McEwan (England)
The White Hotel by D. M. Thomas (England)
Chronicle of a Death Foretold by Gabriel García Márquez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by Raymond Carver (US) – short stories
Genre fiction
The Red Dragon by Thomas Harris (US)
Gorky Park by Martin Cruz Smith (England, Russia)
Non-fiction
Conversations with an Executioner by Kazimierz Moczarski (Poland)
1982
Schindler's Ark by Thomas Keneally (Australia)
An Ice-Cream War by William Boyd (Ghana, Scotland)
The Color Purple by Alice Walker (US)
A Wild Sheep Chase by Haruki Murakami
Genre fiction
Prizzi's Honor by Richard Condon
Limes Inferior by Janusz A. Zajdel (Poland)
1983
Waterland by Graham Swift (England)
Shame by Salman Rushdie
Erev by Eli Schechtman (USSR, Israel)
Genre fiction
The Colour of Magic by Terry Pratchett (England) – first book of the Discworld series
1984
Money by Martin Amis
Bright Lights, Big City by Jay McInerney (US)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by Milan Kundera
Flaubert's Parrot by Julian Barnes (England)
Nights at the Circus by Angela Carter
Enderby by Anthony Burgess – tetralogy, first volume published in 1963
The Witches of Eastwick by John Updike
Non-fiction
Empire of the Sun by J. G. Ballard
1985
White Noise by Don DeLillo (US)
Less than Zero by Bret Easton Ellis (US)
Oranges Are Not the Only Fruit by Jeanette Winterson (England)
The Accidental Tourist by Anne Tyler (US)
Hawksmoor by Peter Ackroyd (England)
Illywhacker by Peter Carey (Australia)
The Kingdom of the Wicked by Anthony Burgess
Genre fiction
L.A. Quartet by James Ellroy (US) – tetralogy, first volume published 1984
The Handmaid's Tale by Margaret Atwood – (US)
1986
Slaves of New York by Tama Janowitz (US)
The Old Devils by Kingsley Amis
An Artist of the Floating World by Kazuo Ishiguro (Japan, UK)
Non-fiction
Decolonising the Mind: The Politics of Language in African Literature by Ngũgĩ wa Thiong'o
1987
The Satanic Verses by Salman Rushdie
The Bonfire of the Vanities by Tom Wolfe
Anthills of the Savannah by Chinua Achebe
The Alchemist by Paulo Coelho (Brasil)
Genre fiction
Presumed Innocent by Scott Turow (US)
1988
Mother London by Michael Moorcock
Libra by Don DeLillo
Oscar and Lucinda by Peter Carey (Australia)
Love in the Time of Cholera by Gabriel García Márquez
Genre fiction
Sprawl by William Gibson (Canada, US)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1984
1989
London Fields by Martin Amis
Foucault's Pendulum by Umberto Eco
The Remains of the Day by Kazuo Ishiguro
To the Ends of the Earth by William Golding – trilogy, first volume published 1980
The Book of Evidence by John Banville (Ireland)
The Trick of It by Michael Frayn
1990s
The English Patient by Michael Ondaatje
Slam poetry
1990
The New York Trilogy by Paul Auster (US) – first volume published 1985
The Black Book by Orhan Pamuk (Turkey)
Restoration by Rose Tremain (England)
Possession by A. S. Byatt (England)
The Buddha of Suburbia by Hanif Kureishi (England)
Dirty Weekend by Helen Zahavi (England)
Genre fiction
Devil in a Blue Dress by Walter Mosley (US)
Good Omens by Neil Gaiman and Terry Pratchett
1991
Generation X: Tales for an Accelerated Culture by Douglas Coupland (Canada)
1994
Blood of Elves by Andrzej Sapkowski (Poland)
1996
Infinite Jest by David Foster Wallace (US)
1997
Underworld by Don DeLillo (US)
American Pastoral by Philip Roth
Nightmare by Zlatko Topčić
Into Thin Air by Jon Krakauer
Genre fiction
Northern Lights by Philip Pullman (UK) – first in His Dark Materials trilogy
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 by J. K. Rowling (UK) – first in series
See also
American literature
Experimental literature
French literature of the 20th century
List of 20th-century writers
Literary modernism
Twentieth-century English literature
20th-century music
20th century in poetry
Electronic literature
References
External links
Discovering Literature: 20th century at the British Library |
https://ko.wikipedia.org/wiki/19%EC%84%B8%EA%B8%B0%20%EB%AC%B8%ED%95%99 | 19세기 문학 | 19세기 문학은 19세기 동안 제작된 세계 문학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랑스
19세기 문학은 대혁명으로 새로운 사회의 담당자가 된 부르주아지가 과거의 제약에서 자아를 해방하여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근대문학은 여기에서 시작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세기는 이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많은 정치적 변천을 겪으면서 나아간다. 이러한 사회변동과 밀접한 영향관계를 유지하면서 문학에 있어서도 갖가지 유파가 생겨나고 또 교체해 간다.
최초에 출현한 것이 낭만주의이다. 위고를 중심으로 한 이 유파는 전(前)낭만주의의 영향하에 18세기의 이성중심주의와 형식화한 고전주의 이론에 반대하여 문학에 개성적 감정을 풍성하게 하는 일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낭만주의는 19세기 중엽까지 문단의 주류를 점했다. 그러나 이 사이에도 이미 객관적 사실주의에 눈뜬 작가들이 나와서 걸작을 쓰고 있었다. 스탕달과 발자크 등이 바로 그들이다.
주관주의 내지는 주정주의(主情主義)의 과도한 발달이 원인이 되어서 낭만주의가 쇠퇴하자 이를 대신하여 주관적 요소를 배제하여 현실세계의 충실한 재현을 지향하는 사실주의(寫實主義)가 대두되었다. 여기에는 자연주의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보급된 과학정신과 실증주의 영향이 컸다. 사실주의 문학가 중에는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1848년의 2월혁명의 실패로 정치에 대한 절망감, 물질주의를 구가하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혐오 등이 큰 사회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파를 대표하는 소설가로서는 플로베르가 있고 시 움직임에는 고답파(高踏派) 시인들이 이와 같은 사조를 전개하였다.
이처럼 문학에 객관성을 구하는 움직임에서 더 나아가 과학적 근거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 1870년경부터 대두한 자연주의이다. 텐류(流)의 실증주의 영향을 받아서 사람은 결정론에 지배되고 있다는 문학관에 입각해서 그의 갖가지 양상을 실험적·과학적 방법으로 세세하게 묘사하려던 졸라를 중심으로 관찰과 실험을 주로 한 이 유파의 작가들은 부르주아지 사회의 부패를 묘사한 작품을 많이 냈다. 1889년경부터 자연주의는 차차로 쇠퇴하여 문단은 심리적·윤리적 작품을 썼던 부르제, 바레스의 세대로 옮겨갔다.
자연주의가 주로 소설을 지배하였던 기간에 시 분야는 고답파의 쇠퇴와 함께 1880년경부터는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의 시대를 맞이했다. 보들레르의 영향을 깊게 받은 이 시인들은 음악적 운율(韻律)과 영상(影像)으로서 사물을 암시하고 내심(內心)세계의 정확한 묘사를 지향하여 시를 모든 산문적 요소가 배제된 순수상태에까지 올려놓았다. 이러한 시인들과 그들의 영향하에 생긴, 상징파라 불리는 모레아스 등의 시인들에 의해 20세기까지 계속된 일련의 운동을 상징주의라 한다. 이 사조는 근대시의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의 영역을 넘어 20세기 문학 전체에 직접 큰 영향을 주었다.
동유럽
이 시대의 선구자는 극작가 베셰니에이(1747-1811), 시인 베르제니(1776-1836), 평론가 카진치(1759-1831) 등 이었으나 얼마 안 가 연애시집 <리라의 노래>(1805)로써 알려진 서정시인 초코나이(1773-1805)가 나와, 헝가리 문학에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다. 19세기 전반은 합스부르크 통치에 대한 민족 독립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였고, 이에 호응해서 문학면에서도 많은 명작이 탄생한 국민문학의 융흥기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 작가로는 극작가 키시팔루디(1788-1830), 카토나(1791-1830), 시인 뵈뢰시마르티(1800-1855) 등이 있다. 특히 카토나의 애국적 사극 <방크 반>(1821)은 헝가리 극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의 하나로, 오늘날도 각지의 극장에서 되풀이하여 상연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점차로 강력히 일기 시작한 반(反)합스부르크의 민족감정은 얼마 안 가 오스트리아 지배로부터의 완전독립을 지향하는 국민적 봉기로서 폭발하였다. 헝가리측의 완전한 패배로 끝난 이 헝가리 독립전쟁(1848-1849)에는 많은 문학자들도 참가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당시 국민적 우상이던 청년시인 페퇴피의 전사는 이 전쟁의 최대 비극으로서 모든 헝가리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고 있다. 독립전쟁 후의 한동안,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신음했으나 국민문학의 전통은 서정시의 페퇴피와 함께 손꼽히는 서사시인 아라니(1817-1882) 등에 의해 보존되었다. 또한 이 시대의 민족적 고뇌를 강력히 반영하고 있는 시인에 마다치(1823-1864)가 있어, 그의 철학적 시극 <인간의 비극>(1860)은 헝가리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극단에서 지금도 자주 상연되고 있다. 1867년의 아우스글라이히(오스트리아·헝가리 화평조약) 이후, 헝가리는 또다시 많은 정치적 자유를 회복했고 경제적으로도 일단 안정을 얻었다. 이 시기의 헝가리 문단의 제1인자는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요카이로서 많은 장편을 썼고 요카이에 이어 이 시대의 인기작가가 된 미크자트(1847-1910)도 소설분야에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러시아, 소련
러시아 19세기 문학은 카람진과 함께 시작된다. 그는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의 규범을 타파하고 문학을 개인감정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 평가하고 부드러운 문체를 써서 낭만주의에의 길을 열었다.
1810년대에서 1820년대 말까지는 낭만주의가 번성한다. 초기의 대표자는 주콥스키(1783-1852)이다. 그가 폐쇄된 개인의 내면을 파고든 데 반해, 나폴레옹 전쟁으로 자유의 공기를 맛본 청년 귀족들 사이에서는 전제주의에 대한 반항을 통해 자아를 해방시키려는 시민적 낭만주의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데카브리스트(Dekabrist=12월 당원)가 되나, 푸슈킨은 독자의 입장에서 국민문학의 창조를 지향하게 된다. 30년대에 들어서자 산문이 발달하였고 실작면(實作面)에서는 푸슈킨에 이어서 고골리, 레르몬토프, 이론면에서는 벨린스키가 나오기에 이르러, 리얼리즘에 기초를 둔 국민문학이 탄생한다. 이 흐름은 1840년대에 들어와 ‘자연파’로서 확정되어,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곤차로프 등 많은 작가가 배출됨으로써 리얼리즘은 새로운 전개를 보이기 시작한다. 1850년대 말부터 60년대에 걸쳐서는 농노제의 쇠퇴와 함께 체르느이셰프스키, 도브롤류보프를 선두로 하는 잡계급(雜階級) 인텔리겐차가 등장하여 비판적 리얼리즘의 입장을 강력히 추진한다. 혁명운동의 격화와 함께 1870년대에는 여기에서 인민파의 작가가 탄생한다. 한편 1850년대 초에 등장한 톨스토이를 포함한 기성의 대가들은 ‘자연파’의 한계를 뛰어넘어 러시아 사회·러시아 민족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또한 현대적으로 깊은 통찰에 바탕을 두고 묘사함으로써 러시아 문학은 근대문학의 발걸음을 내디딘 지 반세기 남짓만에 세계문학이 된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말에 이르러, 체호프에 의해 푸슈킨에서 비롯된 러시아 산문은 완벽의 경지로 다듬어진 것이다.
독일
독일의 19세기 문학은 낭만주의, 사실주의(현실주의), 세기말에 생긴 자연주의 등을 포함한다.
만년의 괴테 작품은 낭만적 사조와 교섭을 갖는다. 또 전기낭만파는 고전주의와 대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숭배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원래 그리스 문화와 르네상스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고전주의에 대해서 고딕 정신의 앙양과 게르만 민족의 자각을 주장한 것이기 때문에, 1798년 슐레겔 등의 기관지 <아테네움(Athen
um)>이 발간을 보게 된 후로는 양자는
뚜렷하게 구분되게 되었다. 독일 낭만주의의 사상적 기초는 칸트에서 출발하여, 그 이원대립(二元對立)을 조화시키려는 피히테의 절대자아(絶對自我)의 관념이나 헤겔의 변증법은 절대진리의 추구와 무한에의 동경을 본질로 하는 낭만파 시인에게 다대한 영향을 끼쳤다. 셸링의 자연철학과 미적 이상주의도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낭만파의 풍조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고전주의 전성기(1800년 직전)경으로 최고 전성기는 1820-30년경인데, 여기에 위대한 존재로 또 각각 고립되어 있어 어느 주의, 어느 유파로 규정지을 수 없는 시인이 있다. 즉 횔데를린과 클라이스트, 그리고 장 파울 등이다.
전기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은 슐레겔 형제이고 티크, 노발리스, 바켄로더 등의 시인이 이에 참여하였다. 다분히 이지적(理智的)요소(要素)를 내포하며, 이론을 붙이기에 급한 나머지 창작면에서 뛰어난 것이 드물었다. 후기낭만파는 백화난만(百花爛漫)의 느낌이 있어 특히 서정시 중에 수작(秀作)이 많다. 그리고 이지적 면에 편중되었던 전기낭만파는 순정·소박·총합적인 요소가 지배적이었다. 또한 전자가 종교나 철학을 중시한 데 반해 후자는 자연과 역사에 치중하였다. 아르님, 브렌타노, 아이헨도르프, 쾨르너, 울란트, 슈바프, 하우프, 샤미소, 푸케, 호프만, 플라텐, 뤼케르트 등이 후기낭만파에 속한다. 또 그림 형제는 시인은 아니지만, 전설과 옛 이야기에 관한 연구 수집은 불후의 가치를 갖고 있다.
1830년대의 유럽의 양상은 일변되어 산업혁명에 의한 사회구조의 변혁은 현실주의·사실주의 문학의 대두를 촉진시켰다. 낭만주의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동경’이며 리얼리즘은 현재 또는 현실에 근거하는 태도이다. 또 이즈음에 사회적·정치적인 야심을 버리고, 소시민적 존재를 감수하는 경향이 대두하여 문학적으로는 낭만적 정서를 품으면서 사실적 필치로 보잘 것 없는 세계에 애정을 쏟는 ‘비데르미어(Biedermier)문학’이 탄생하였다. 즉 그릴파르처, 뫼리케, 슈티프터, 드로스테 휠스호프 등이 이에 속한다. 이것에 대하여 ‘젊은 독일’ 시인들은, 문학은 시대의 정치적·사회적·정신적 요청에 호응하며, 이에 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저널리즘의 발로라 보여지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고취하면서 그 작품은 비데르미어적(的)·낭만적 경향을 띠는 것이다. 하이네가 가장 대표적인 작가이다.
1890년경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은, 이에 뒤따르는 자연주의 문학과 달리, 현실을 묘사하면서 거기에 영원의 그림자를 담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고전주의로부터 유래하는 문학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서, ‘시적 현실주의’(특히 1860-70년대)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현실생활을 묘사하는 사실주의 문학의 흐름에서 볼 때 서정시나 희곡보다는 결국 산문소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표적 시인으로는 독일에 헤벨과 루트비히, 스위스에 켈러와 마이어가 있으며, 리하르트 바그너는 ‘악극(樂劇)’을 창조하였다. 고전주의 시대를 독일문학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데 대해서, 이 시대를 ‘백은시대(白銀時代)’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 거장들은 각자의 개성을 지니고 있어 상호 남을 용납하지 않으며 자칫하면 자기 내부에만 칩거하는 폐쇄적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은 프랑스, 영국, 또는 러시아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의미의, 즉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이 아니고 개인이나 개인주의에 매몰된 문학인 것이다. 슈토름, 로이터, 레나우, 프라이타크, 릴리엔크론, 폰타네 등이 이 시대의 작가에 속한다.
19세기 후반 근대과학의 비상한 발달과 사회경제 조직의 일대 변혁은 이상주의적·긍정적·낙천적 색조(色調)를 더욱 희박하게 하여서 도처에서 회의적·상대주의적·실증주의적·기계적인 것이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세상물정에 응해 등장한 문학이 자연주의 문학으로, 유물론적·자연과학적 인생관을 표방하며, 소재를 현실생활에서 구하고 물질문명의 암흑면, 세기말의 불안, 세기의 전변(轉變)으로 생기는 세계적 고민을 표현하려 하였다. 홀츠와 슐라프가 이 문학론의 제창자로서 이 제창을 실천에 옮겨 성과를 올린 것이 하우프트만과 주더만이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독일혼에 깊이 뿌리박은 낭만적 경향에 맞지 않아 단명으로 끝났다. | https://en.wikipedia.org/wiki/19th%20century%20in%20literature | 19th century in literature | Literature of the 19th century refers to world literature produced during the 19th century. The range of years is, for the purpose of this article, literature written from (roughly) 1799 to 1900. Many of the developments in literature in this period parallel changes in the visual arts and other aspects of 19th-century culture.
Literary realism
Literary realism is the trend, beginning with mid nineteenth-century French literature and extending to late-nineteenth- and early-twentieth-century authors, toward depictions of contemporary life and society as it was, or is. In the spirit of general "realism," realist authors opted for depictions of everyday and banal activities and experiences, instead of a romanticized or similarly stylized presentation.
Anglophones
Lionel Stevenson wrote that "The most explosive impact in English literature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is unquestionably Thomas Carlyle's. From about 1840 onward, no author of prose or poetry was immune from his influence."
George Eliot's novel Middlemarch stands as a great milestone in the realist tradition. It is a primary example of nineteenth-century realism's role in the naturalization of the burgeoning capitalist marketplace.
William Dean Howells was the first American author to bring a realist aesthetic to the literature of the United States. His stories of 1850s Boston upper-crust life are highly regarded among scholars of American fiction. His most popular novel, The Rise of Silas Lapham, depicts a man who falls from materialistic fortune by his own mistakes. Stephen Crane has also been recognized as illustrating important aspects of realism to American fiction in the stories Maggie: A Girl of the Streets and The Open Boat.
Latin American Literature
Adventure novels about the gold rush in Chile in the 1850s, such as Martin Rivas by Alberto Blest Gana, and the gaucho epic poem Martin Fierro by Argentine José Hernández are among the iconic and populist 19th century literary works written in Spanish, published in Latin America.
Zenith
Honoré de Balzac is often credited with pioneering a systematic realism in French literature, through the inclusion of specific detail and recurring characters. Fyodor Dostoyevsky, Leo Tolstoy, Gustave Flaubert, and Ivan Turgenev are regarded by critics such as FR Leavis as representing the zenith of the realist style with their unadorned prose and attention to the details of everyday life. In German literature, 19th-century realism developed under the name of "Poetic Realism" or "Bourgeois Realism," and major figures include Theodor Fontane, Gustav Freytag, Gottfried Keller, Wilhelm Raabe, Adalbert Stifter, and Theodor Storm. Later "realist" writers included Benito Pérez Galdós, Nikolai Leskov, Guy de Maupassant, Anton Chekhov, José Maria de Eça de Queiroz, Machado de Assis, Bolesław Prus and, in a sense, Émile Zola, whose naturalism is often regarded as an offshoot of realism.
People
Leopoldo Alas
Louisa May Alcott
Hans Christian Andersen
Machado de Assis
Jane Austen
Gertrudis Gómez de Avellaneda
Gustavo Adolfo Bécquer
Honoré de Balzac
Alberto Blest Gana
Elizabeth Barrett Browning
Charles Baudelaire
Richard Beatniffe
Anne Brontë
Charlotte Brontë
Emily Brontë
Georg Büchner
Ivan Bunin
Lord Byron
Hall Caine
Lewis Carroll
Thomas Carlyle
Rosalía de Castro
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Anton Chekhov
Kate Chopin
Samuel Taylor Coleridge
James Fenimore Cooper
Stephen Crane
Eduard Douwes Dekker
Emily Dickinson
Charles Dickens
Fyodor Dostoevsky
Arthur Conan Doyle
Alexandre Dumas, père
Alexandre Dumas, fils
Paul Dunbar
José Maria Eça de Queirós
José Echegaray
George Eliot (Mary Ann Evans)
Ralph Waldo Emerson
Gustave Flaubert
Theodor Fontane
Margaret Fuller
Elizabeth Gaskell
Johann Wolfgang von Goethe
Nikolai Gogol
Manuel González Prada
Juana Manuela Gorriti
Brothers Grimm
Henry Rider Haggard
Ida Gräfin Hahn-Hahn
Thomas Hardy
Francis Bret Harte
Nathaniel Hawthorne
Friedrich Hölderlin
Heinrich Heine
Victor Hugo
Henrik Ibsen
Washington Irving
Henry James
John Keats
Gottfried Keller
Rudyard Kipling
Caroline Kirkland
Jules Laforgue
Giacomo Leopardi
Mikhail Lermontov
Nikolai Leskov
Stéphane Mallarmé
Alessandro Manzoni
José Martí
Clorinda Matto de Turner
Herman Melville
Guy de Maupassant
John Neal
Friedrich Nietzsche
José María de Pereda
Benito Pérez Galdós
Edgar Allan Poe
Marcel Proust
Bolesław Prus
Aleksandr Pushkin
Fritz Reuter
Arthur Rimbaud
John Ruskin
George Sand (Amandine-Aurore-Lucile Dupin)
Mary Shelley
Percy Shelley
Henryk Sienkiewicz
Stendhal (Marie-Henri Beyle)
Robert Louis Stevenson
Adalbert Stifter
Bram Stoker
Theodor Storm
Harriet Beecher Stowe
Alfred, Lord Tennyson
Henry David Thoreau
Leo Tolstoy
Ivan Turgenev
Mark Twain
Juan Valera y Alcalá-Galiano
Giovanni Verga
Paul Verlaine
Jules Verne
Lew Wallace
H. G. Wells
Edith Wharton
Walt Whitman
Jack London
Oscar Wilde
William Wordsworth
Émile Zola
José Zorrilla
By language
Golden Age of Russian Poetry
19th-century French literature
By year
1800s – 1810s – 1820s – 1830s – 1840s – 1850s – 1860s – 1870s – 1880s – 1890s – 1900s
See also
19th century#Literature
Kailyard school
19th century in poetry
References
External links
History of literature |
https://ko.wikipedia.org/wiki/18%EC%84%B8%EA%B8%B0%20%EB%AC%B8%ED%95%99 | 18세기 문학 | 18세기 문학은 18세기 동안 제작된 세계 문학을 의미한다.
프랑스
17세기에 완성의 영역에 도달한 고전주의 문학 전통은 18세기에 계승되어 내려온다. 가령 마리보의 여러 작품과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의 간결한 문체, 그리고 후자의 비극작품 등은 그 영향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고전주의는 17세기와 상이한 점이 꽤 많이 나타나고 또 전 세기의 수준을 능가하는 작품도 나오지 않았기에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라 말한다.
한편 이 세기에는 고전주의에 대체할 새로운 문학도 생겨났다. 절대 왕권제도를 확립하고 고전주의 문학의 비호자이기도 했던 루이 14세가 1715년에 죽은 후에는 비교적 자유스런 분위기를 이루어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대두하였고, 국제교류도 빈번하게 되어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도 점차로 대담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과학의 진보가 이성주의와 일반적인 진보의 사상을 재촉하였으나 이 징조는 이미 전 세기 말의 ‘신구 논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정을 중심으로 해서 번영하여 질서·균형·절도를 중히 여긴 고전주의 문학은 시대의 요구를 감당해 낼 수 없게 되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회의(懷疑)를 알고, 뉴턴의 과학과 로크의 경험주의를 배운 작가들은 ‘이성(理性)’과 ‘진보’를 모토로하여 문학 속에서 절대왕정과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일부는 유물론이나 무신론에까지 줄달음을 쳐갔다. 이른바 계몽(啓蒙)사상과 계몽문학이 개화(開化)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특히 18세기의 후반에 더욱 철저하다. 그들을 철학자라 부르고 있지만 형이상학적 사색이나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을 의미 하지는 않으며 정치·경제·종교·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행동적인 문학자를 가리키고 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는 이러한 계몽적 동향의 일대 기념비이다. 그들의 노력은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프랑스 혁명에 의한 구(舊)제도 타파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 한편 이 세기에는 인간의 정열과 감수성을 존중하는 문학도 나왔다. 세기 전반에 프레보는 일찍이 정열적인 소설을 썼으며, 후반에는 유물론자 디드로가 한편에서 감수성을 예찬했고 루소의 연애소설은 독자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라는 명예를 지니고 있다. 이성주의에 만족할 수 없었던 독자들은 이 밖에도 영국이나 독일 등의 로맨틱한 문학으로 갈증을 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에는 낭만주의의 기초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르별(別)로 보면 서정시는 매우 부진하였다. 셰니에는 유일한 예외지만, 그의 작품도 19세기가 되어서야 인정을 받았다. 고전주의의 영향을 덜 받은 소설은 발달하였는데 특히 풍자소설은 우수한 것이 있다. 라클로나 사드 등의 소설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떤 의미에서 주목되고 있다. 극에는 고전극에 대한 디드로의 시민극(市民劇) 제창이 탁견(卓見)이었으나 실작(實作)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보마르셰가 프랑스 혁명 직전에 독특한 작풍으로 인기를 모았다.
남유럽
1681년 칼데론의 죽음과 함께 ‘황금세기’의 영광은 끝났다. 18세기초 에스파냐에는 부르봉가(家) 출신의 국왕이 들어와서, 에스파냐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완전히 프랑스에 종속되었다.
문예사조의 주류를 이룬 ‘신(新)고전주의’도 프랑스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비교적 주목을 끌었던 작가로서는 연극에 <아가씨가 승낙할 때>의 작자 레안드로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 짧은 소극(笑劇)으로 실생활을 그린 라몬 데 라 크루스와 산문에서는 <모로코 통신>의 호세 카달소 등이 있고 이 밖에 우화시(寓話詩)를 쓴 사마니에고, 이리아르테 등이 있다.
러시아, 소련
17·18세기 전환기에 표트르가 차르(황제)의 권좌에 앉아서 적극적인 서구화 운동에 나섬으로써 ‘새로운 시대’, 즉 러시아적인 근대가 비롯된다.
급속도로 서구화하는 사회에서 문학의 세속화는 가속되었다. 교회와는 관계가 없는 잡지나 문학작품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꽤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문학과 사회생활의 관계가 긴밀하여져 문학은 사회의 동태에 직접·간접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군사면이나 행정면에서의 서구적인 여러 제도의 도입은 표트르 대제의 치세 중에 거의 완료되었으나 문학세계의 서구화는 이것보다 다소 늦게 진행되었다. 가령 표트르 대제 시대를 반영하는 <바실리 코리오츠키의 이야기> 등은 아직 전대의 세상 이야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표트르 대제와 동시대의 문인으로서는 노브고로드의 대주교인 프로코포비치가 르네상스인(人)다운 박삭다재로서 알려졌을 뿐이다.
깊은 교양의 소유자로서 프랑스 문학의 소개와 자작의 풍자시에 의해 러시아 문학에 신풍(新風)을 주입시킨 것은 칸테미르(1708-1744)였다. 그에 이어서 트레자코프스키, 로모노소프, 수마로코프가 나타나 프랑스 문학의 압도적 영향 밑에 18세기 중엽에는 고전주의가 문학의 모든 장르를 지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세계문학사에 있어 가장 화려한 1장을 형성하는 러시아 근대문학은 18세기 동안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고, 또한 시분야에 있어서도 혁신이 일어나 새로운 시법이 성립되었으며 연극, 저널리즘이 이에 뒤따랐다.
산문, 즉 소설부문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은 이 세기말에 등장하는 주정주의(主情主義) 작가들이다. 이성만능(理性萬能), 규범엄수에 대신하여 감정의 우위를 주장하는 주정주의의 한쪽 기수는 카람진이고, 다른 한쪽은 라디시체프에 의해 대표된다.
영국
1750년대에는 낭만주의적 경향이 나타나서 1780년대에 이르면 그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전반적으로 18세기는 17세기 후반에 발달한 고전주의 문학을 계승, 발전시킨 시대라 할 수 있다.
문학의 목적은 ‘환희와 동시에 교훈을 부여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포프, 애디슨(1672-1719), 스위프트 등에서 볼 수 있는 인생비판과 사회풍자의 문학이 대세를 차지한다. 이성, 양식(良識), 진리, 현실성, 합리주의가 무엇보다 존중되어 서민의 계몽과 각 방면에 걸친 사회비평이 문인의 사명이 되고 있었다. 인간성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불변의 것이라는 신념으로, 개별성보다 일반성을 구현하는 문학을 더 높이 평가하였다. 또 국가는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자유권을 보장해야만 한다고 설파하여 사법, 행정, 입법의 3권분립을 주장한 로크(1632-1704)의 정치사상은 왕권당(王權黨)과 민권당(民權黨)에 의한 정당정치의 확립, 중산계급의 발흥, 저널리즘의 발달 등과 관련하여 정치와 문학을 밀착시켰다.
일간신문은 1703년 처음으로 탄생하였으나 그 후 각종의 정기간행물이 이어서 나오게 되고, 특히 1711년에 애디슨과 스틸(1672-1729)에 의하여 창간된 <스펙테이터>는 건전한 유머와 우아한 필치로 전 시대부터의 방종한 풍습을 바로잡아 종교와 정치에는 관용을 역설하고 여성의 교양을 높이는 일을 염원하여 편견과 미신을 배척할 것을 논하여 오랫동안 이러한 종류 신문의 모범이 되었다.
중산계급의 발흥은 필연적으로 독자를 확대하는 것이 되어 디포, 리처드슨, 필딩, 스턴 등의 산문소설가를 배출하고, 내용도 가공적 낭만적인 것이 아닌 일상의 현실생활에서 취재한 성격묘사를 존중하는 사실적 근대소설이 나와서 그중 어떤 것은 대륙에서도 열광적으로 읽히었다.
이 세기 후반의 문단에 있어서 본산적(本山的) 존재인 존슨 박사는 그리스도교적 모랄리스트로서, 그의 문학관은 어디까지나 고전주의적이었고 새롭게 일어나고 있던 낭만주의 문학에 대하여는 동정과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으나, 풍부한 학식과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건전한 지혜를 나타냈다.
극단(劇壇)에서도 새로운 관객층을 획득하였는데, 세기의 전반에는 게이(1685-1732)의 풍자적 희극을 제외하고는 눈물 자아내는 권선징악적인 것이 많고, 후반에는 골드스미스(1728-1774), 셰리든(1751-1816)의 본격적인 희극과 릴로(1693-1739)의 가족비극(家族悲劇)이 특기할 만하고, 명우(名優)가 배출된 것에 비하여 극작가의 활동은 부진하였다.
독일
18세기는 유럽의 정신사상 계몽주의 시대라 불리고 그 사상은 계몽사상이라 지칭되고 있다.
근대의 계몽사상은 처음 영국에서 발생하여 프랑스에서 최고도로 발달하고 독일에도 파급되었는데 과연 ‘계몽’이란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18세기의 철학자 칸트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 책임 하에 있는 미성년 상태에서 탈각하는 것이다. 미성년이란 남의 지도 없이는 자기의 지성을 발취할 능력이 없는 상태라는 뜻이며 또한 미성년 상태가 자기의 책임하에 있다는 것은 그런 상태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지도없이 지성을 발휘하려는 결의와 용기가 결핍되어 있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힘써 현명하여라!’ ‘네 자신의 지성을 발휘할 용기를 가져라!’고 하는 것이 계몽의 슬로건인 것이다.”
이것은 1784년에 발표된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논문의 서두에 있는 한 구절로 이에 의하면 참다운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의 지성을 활용하여 용기를 가지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진리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적극적인 정신운동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결국 전통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합리적 지식을 보급하여 무지와 미신의 상태로부터 민중을 해방하고 그것에 의해 합리적·현세적인 근대 시민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는 생각, 이것이 즉 18세기의 계몽사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계몽사상에는 사유의 합리성, 종교적·정치적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과거 특히 중세에 대한 관계의 비역사성(非歷史性), 낙천적, 사해동포적 등의 특색이 있다.
독일 계몽주의는 30년전쟁의 차질로 인해서 선진국보다 뒤떨어진 결과가 됐으나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豫定調和說)이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제 계몽주의 등을 출현케 하였다. 독일 문학도 이러한 시대사조의 권외에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시에 활약했던 문학가로서는 곳셰트(1700-66), 보트머(1698-1783), 브라이팅거(1707-76), 클롭슈토크, 하게도른(1708-1754), 게레르트(1715-69), 빌란트 외에 다수가 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독일 계몽주의 문학의 기수라고 불리기에 알맞는 사람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인 곳셰트였다. 그는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볼프의 제자로 독일문법을 저술하고 사전 편찬에 주력하는 등 독일어 정리에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우(女優)노이베린 등과 협력하여 독일 연극계의 향상에 힘을 기울여 그것을 시민의 교양을 얻는 광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독창적 시재(詩才)를 갖고 있지 못하였으며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을 모범으로 삼은 그의 문학관은 합리주의에 치우쳐 시야가 좁고 정열이나 감정의 권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비난을 받게 되었다.
반격자의 대표세력은 스위스의 보드머와 브라이팅거였다. 이 두 사람은 문학의 목적을 도덕의 교화와 오락에 두고 바로크적 난삽(難澁)을 배제하고 명석한 표현을 존중한 점에서는 계몽주의자에 속하나 문학의 세계에 비합리적인 요소를 허용하고 문학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고 정서와 상상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공상(空想)’의 권리를 주장한 점에서 곳셰트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곳셰트의 프랑스 취향이 무너지고, 영국문학이 독일문학에 도입되는 길이 트이게 됐다. 그들은 중세 독일문학에도 관심을 쏟아 그것을 간행하였다. 또 이 시대에는 전술한 곳셰트의 일파와 이와 부분적으로 대립을 보이는 스위스파(派) 외에 계몽적·교훈적인 시풍으로서 알려져 있는 슈나벨(1690-1750), 하라(1703-77), 브로케스(1680-1747) 등이 있으나, 이에 대항하여 차안(此岸)의 생활을 긍정하며, 생의 기쁨과 향락을 노래한 로코코 문학이 있어 전술한 하게도른, 게레르트 및 빌란트는 로코코 문학의 대표적 시인들로서 유명하다. | https://en.wikipedia.org/wiki/18th%20century%20in%20literature | 18th century in literature | Literature of the 18th century refers to world literature produced during the years 1700–1799.
European literature in the 18th century
European literature of the 18th century refers to literature (poetry, drama, satire,essay and novels) produced in Europe during this period. The 18th century saw the development of the modern novel as literary genre, in fact many candidates for the first novel in English date from this period, of which Daniel Defoe's 1719 Robinson Crusoe is probably the best known. Subgenres of the novel during the 18th century were the epistolary novel, the sentimental novel, histories, the gothic novel and the libertine novel.
18th century Europe started in the Age of Enlightenment and gradually moved towards Romanticism. In the visual arts, it was the period of Neoclassicism.
The Enlightenment
The 18th century in Europe was the Age of Enlightenment, and literature explored themes of social upheaval, reversals of personal status, political satire, geographical exploration and the comparison between the supposed natural state of man and the supposed civilized state of man. Edmund Burke, in his A Vindication of Natural Society (1756), says: "The Fabrick of Superstition has in this our Age and Nation received much ruder Shocks than it had ever felt before; and through the Chinks and Breaches of our Prison, we see such Glimmerings of Light, and feel such refreshing Airs of Liberty, as daily raise our Ardor for more."
Translations
Translations of foreign-language works became ever-more ubiquitous in Europe in the 19th century. Works translated from French to English and vice versa were particularly common, but works written in nearly all major world languages, from Arabic to Greek, likewise proliferated. In 1708, Simon Ockley translated Ibn Tufail's Hayy ibn Yaqdhan directly from Arabic to English for the first time, while Michael Wodhull was the first to translate all the extant writing of Euripides into English, with his work published in four volumes in 1782.
Translations in the eighteenth century were typically liberal and loose, as it was common for translators to alter the text to appeal more to their intended audience and to add their own original work to it. John Lockman, for example, described his French translations as "versions" to indicate the large changes he'd made to the original text. Unclear labeling further complicated matters, resulting in complicated translation loops. In some cases, works of fiction were translated from French to English and, later, from English back into French, with the second translator being unaware that the work they were translating was not the original.
Notable eighteenth-century translators from Asia included Sugita Genpaku, who translated the Dutch medical work Kaitai Shinsho into Japanese in 1774, making it among the first Western works to be translated in Japan.
English literature in the 18th century by year
1700–1709
1700: William Congreve's play The Way of the World premiered. Although unsuccessful at the time, The Way of the World is a good example of the sophistication of theatrical thinking during this period, with complex subplots and characters intended as ironic parodies of common stereotypes.
1703: Nicholas Rowe's domestic drama The Fair Penitent, an adaptation of Massinger and Field's Fatal Dowry, appeared; it would later be pronounced by Dr Johnson to be one of the most pleasing tragedies in the language. Also in 1703 Sir Richard Steele's comedy The Tender Husband achieved some success.
1704: Jonathan Swift (Irish satirist) published A Tale of a Tub and The Battle of the Books and John Dennis published his Grounds of Criticism in Poetry. The Battle of the Books begins with a reference to the use of a glass (which, in those days, would mean either a mirror or a magnifying glass) as a comparison to the use of satire. Swift is, in this, very much the child of his age, thinking in terms of science and satire at one and the same time. Swift often patterned his satire after Juvenal, the classical satirist. He was one of the first English novelists and also a political campaigner. His satirical writing springs from a body of liberal thought which produced not only books but also political pamphlets for public distribution. Swift's writing represents the new, the different and the modern attempting to change the world by parodying the ancient and incumbent. The Battle of the Books is a short writing which demonstrates his position very neatly.
1707: Henry Fielding was born on 22 April.
1711: Alexander Pope began a career in literature with the publishing of his An Essay on Criticism.
1712: French philosophical writer Jean Jacques Rousseau was born on 28 June and his countryman Denis Diderot was born the following year 1713 on 5 October. Also in 1712 Pope published The Rape of the Lock and in 1713 Windsor Forest.
1709: Samuel Johnson was born on 18 September in Lichfield, Staffordshire.
1710–1719
1717: Horace Walpole was born on 24 September.
Daniel Defoe was another political pamphleteer turned novelist like Jonathan Swift and was publishing in the early 18th century. In 1719, he published Robinson Crusoe.
1719: Eliza Haywood published Love in Excess, an unusually sympathetic portrayal of a fallen woman.
Also in 1719: Alexander Smith was a biographer who published A Complete History of the Lives and Robberies of the Most Notorious Highwaymen. The book includes heavily fictionalised accounts of English criminals from the medieval period to the eighteenth century.
1720–1729
1720: Daniel Defoe's Captain Singleton was published.
1722: Daniel Defoe's Moll Flanders and A Journal of the Plague Year were published.
1726: Jonathan Swift published Gulliver's Travels, one of the first novels in the genre of satire.
1728: John Gay wrote The Beggar's Opera which has increased in fame ever since. The Beggar's Opera began a new style in Opera, the "ballad opera" which brings the operatic form down to a more popular level and precedes the genre of comic operettas. Also in 1728 came the publication of Cyclopaedia, or, A Universal Dictionary of Arts and Sciences (folio, 2 vols.), an encyclopedia by Ephraim Chambers. The Cyclopaedia was one of the first general encyclopedias to be produced in English and was the main model for Diderot's Encyclopédie (published in France between 1751 and 1766).
1729: Jonathan Swift published A Modest Proposal, a satirical suggestion that Irish families should sell their children as food. Swift was, at this time, fully involved in political campaigning for the Irish.
1730–1739
1731: George Lillo's play The London Merchant was a success at the Theatre-Royal in Drury Lane. It was a new kind of play, a domestic tragedy, which approximates to what later came to be called a melodrama.
1738: Samuel Johnson published London, a poem in imitation of Juvenal’s Third Satire. Like so many poets of the 18th century, Johnson sought to breathe new life into his favorite classical author Juvenal.
1740–1749
1740: Samuel Richardson's Pamela, or Virtue Rewarded was published and the Marquis de Sade was born.
1744: Alexander Pope died, and in 1745 Jonathan Swift died.
1746: Tobias Smollett's first poem "The Tears of Scotland", about the Battle of Culloden, was published.
1748: John Cleland's Memoirs of a Woman of Pleasure (popularly known as Fanny Hill), arguably the first work of pornographic prose, was published. Also in 1748, Samuel Richardson's Clarissa was published; finally, Tobias Smollett's first picaresque quasi-autobiographical novel The Adventures of Roderick Random was also published.
1749: Henry Fielding's The History of Tom Jones, a Foundling was published. His sister Sarah Fielding also published The Governess, the first full-length novel written for children.
1750–1759
1751: Thomas Gray wrote 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
Also in 1751, Denis Diderot began the 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 Over the next three decades Encyclopédie attracted, alongside of those from Diderot, notable contributions from other notable intellectuals of the 18th century including Voltaire, Jean-Jacques Rousseau and Louis de Jaucourt.
1754: Henry Fielding died.
1755: Samuel Johnson completed his influential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sometimes published as Johnson's Dictionary, and at the time a huge improvement on previously available dictionaries. It was a daunting task that took nine years in all, two years of preparation and seven years of research and writing.
1760–1769
1760–1767: Laurence Sterne wrote Tristram Shandy.
1761: Samuel Richardson died.
1764: Horace Walpole published The Castle of Otranto (initially under a pseudonym and claiming it to be a translation of an Italian work from 1529); the first gothic novel.
1766: Oliver Goldsmith's The Vicar of Wakefield was published.
1770–1779
1770: William Wordsworth was born on 7 April.
1771: Tobias Smollett published his epistolatory novel, The Expedition of Humphry Clinker just three months before his death.
1773: Oliver Goldsmith's play She Stoops to Conquer, a farce, was performed in London.
1776: The United State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as created and ratified.
1777: The play The School for Scandal, a comedy of manners by Richard Brinsley Sheridan, was first performed in Drury Lane.
1778: Frances Burney published Evelina anonymously.
1779–1781: Samuel Johnson wrote and published Lives of the Most Eminent English Poets. This compilation contains short biographies of 52 influential poets (most of whom lived in the 18th century) along with critical appraisals of their works. Most notable are Alexander Pope, John Dryden, John Milton, Jonathan Swift, and Joseph Addison.
1780–1789
1783: Washington Irving was born.
1784: Samuel Johnson died on 13 December.
1785: William Cowper published The Task, a volume of poetry in blank verse.
1786: Robert Burns published Poems Chiefly in the Scottish Dialect. The mood of literature was swinging toward more interest in diverse ethnicity. Beaumarchais' The Marriage of Figaro (La Folle journée ou Le Mariage de Figaro) was adapted into a comic opera composed by Wolfgang Amadeus Mozart, with libretto by Lorenzo da Ponte.
1789: The Interesting Narrative of the Life of Olaudah Equiano, one of the first slave narratives to have been widely read in historical times, was published. Also in 1789, James Fenimore Cooper was born on 15 September.
1790–1799
1792: Percy Bysshe Shelley was born on 4 August.
1793: Salisbury Plain was published by William Wordsworth.
1794: Ann Radcliffe published her most famous Gothic novel, The Mysteries of Udolpho.
1795: Samuel Taylor Coleridge met William Wordsworth and his sister Dorothy. The two men published a joint volume of poetry, Lyrical Ballads (1798), which became a central text of Romantic poetry.
1796: Matthew Lewis published his controversial anti-Catholic gothic novel The Monk and Charlotte Smith published her novel Marchmont. Also in 1796, Mary Hays published her outspoken novel Memoirs of Emma Courtney.
Other literature in the 18th century by year
1700-1739
From 1704 to 1717, Antoine Galland published One Thousand and One Nights (also known as The Arabian Nights in English), based on Arabian folk tales. His version of the tales appeared in twelve volumes and exerted a huge influence on subsequent European literature and attitudes to the Islamic world. Galland's translation of the Nights was immensely popular throughout Europe, and later versions of the Nights were written by Galland's publisher using Galland's name without his consent.
In 1707, playwright Carlo Goldoni was born.
In 1729, Gotthold Ephraim Lessing was born.
In 1731, Manon Lescaut, a French novel by the Abbé Prévost that narrates the love affairs of an unmarried couple and inaugurates one of the most common themes of the literature of the time: the sentimental story, taking into account for the first time the female point of view and not only the courtship and the conquest or the failure of man.
1740–1769
1743 Gavrila Derzhavin was born.
1752 Micromégas, a satirical short story by Voltaire, features space travellers visiting Earth. It is one of the first stories to feature several elements of what will later become known as science fiction. Its publication at this time is also indicative of the trend toward scientific thinking that characterizes the Enlightenment.
1759 Voltaire's Candide/Optimism was published. On November 10,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is born.
1761 Jean Jacques Rousseau's 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was published.
1762 Jean Jacques Rousseau's Émile was published.
1767 September 8: August Wilhelm von Schlegel was born.
1770–1800
1772 March 10: Karl Wilhelm Friedrich von Schlegel was born.
German poet Novalis was born.
1774 Goethe wrote The Sorrows of Young Werther, a novel which approximately marks the beginning of the Romanticism movement in the arts and philosophy. A transition thus began from the critical, science-inspired, Enlightenment writing to the romantic yearning for forces beyond the mundane and for foreign times and places to inspire the soul with passion and mystery.
Also in 1774, Alberto Fortis published his travel book Viaggio in Dalmazia ("Journey to Dalmatia") and started Morlachism.
1776 Ignacy Krasicki published the first novel in Polish, The Adventures of Mr. Nicholas Wisdom.
1778 Death of Voltaire, 30 May. Death of Jean Jacques Rousseau, 2 July. Two major contributors to Diderot's Encyclopédie died in the same year.
1784 Denis Diderot died 31 July. Voltaire, Rousseau and Diderot have all died within a period of a few years, and French philosophy had thus lost three of its greatest enlightened free thinkers. Rousseau's thoughts on the nobility of life in the wilds, facing nature as a naked savage, still had great force to influence the next generation as the Romantic movement gained momentum. Beaumarchais wrote The Marriage of Figaro. Maria and Harriet Falconar publish Poems on Slavery. The anti-slavery movement was growing in power, and many poems and pamphlets were published on the subject.
1791 Dream of the Red Chamber was published for the first time in movable type format.
1793 August 25: John Neal was born.
1796 Denis Diderot's Jacques le fataliste was published posthumously.
See also
18th-century French literature
Novel#18th-century novels
List of years in literature#1800s
Neoclassicism
English literature
Augustan literature
Amatory fiction
German literature
German Romanticism
Sturm und Drang
18th century in poetry
References
External links
History of literature |
https://ko.wikipedia.org/wiki/17%EC%84%B8%EA%B8%B0%20%EB%AC%B8%ED%95%99 | 17세기 문학 | 17세기 문학은 17세기에 제작된 세계 문학을 의미한다.
프랑스
프랑스 17세기 문학은 일반적으로 고전주의 문학이라 말하고 있으나 참다운 고전주의는 루이 14세의 친정(親政)이 시작된 1661년부터 약20년 동안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세기의 문학은 그 20년 동안과 이를 전후하는 시기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1598-1661)는 모든 면에 있어서 규율화의 경향과 바로크적 경향과의 항쟁시기이다. 즉 전자의 출현은 정치면에 있어 절대 왕정제도의 진행과 종교계에서는 카톨릭 복권(復權)의 노력이고 문화면은 언어의 정화와 제형식의 적용, 취미의 세련 및 예절의 강제로서 말레르브, 보질라(1585-1650), 발자크(1597-1654) 등 ‘프레시오지테’의 경과를 보이면서도 살롱을 중심으로 하는 ‘사교계’와 아카데미가 이에 참가한다. 이 동안 데카르트가 출현할 ‘이성의 군림’을 준비한다. 이 경향에 대해 휴머니즘의 전통에서는 자유파와 독립파는 테오피르를 중심으로 영감(靈感)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프레시오지테’에 대하여 스카롱을 선두로 하는 ‘뷔를레스크’의 반항이 생겨 나와 이 시기에 독특한 색채, 즉 바로크적 경향을 띠면서 모름지기 규율화에의 저항을 나타냈다.
제2기(1661-1685)는 전대의 자유사상을 극복하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질서가 확립되며 그로인해 지탱된 참다운 고전주의의 시기이다. 고전주의 문학의 원리는 이성에 의한 인간심리, 모랄의 보편성, 즉 ‘참다운 것’을 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로마의 문화에서 모범을 찾아 거기에서 도출(導出)된 방식을 지키며 정리 순화된 언어로 ‘사람의 마음에 들면서 사람을 교육’하기 위하여 내용의 ‘참된 것’을 절도있는 형식으로 표현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가들은 특히 ‘고전주의파’를 결성하지는 않았고 각자 독자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전술한 바와 같은 공통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장식하는 작가들로서는 의지의 비극을 강조한 코르네유와 섬세한 문체로서 여성심리의 심오함을 파헤친 라신, 자연에 따르도록 가르쳐 불후의 전형(典型)을 그린 몰리에르, 고전주의 이론을 집대성한 보왈로, 이성과 감성의 논리를 훌륭한 문체로 쓴 파스칼, 우화의 라 퐁테느, 모랄리스트인 라 로시푸코, 뛰어난 심리소설의 라피트 부인, 서간문학의 세비네 부인, 대설교가인 보쉬에 등으로 그들은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하여 프랑스 문학을 다시금 유럽에 군림하는 문학이 되게 하였다.
제3기(1685-1715)는 고전주의 분해와 신풍이 불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즉 왕권의 쇠퇴는 기성질서의 옹호를 초래하고, 이 질서 위에 서 있던 이성과 감성의 균형이란 고전주의의 이상이 이성의 우월이란 형태로 분해되어 간다. 그 상징적 사건은 ‘신구(新舊)논쟁’에 있어서 페로 등 근대파의 승리인 것이다. 또 고전주의의 실천자이지만 유연한 문체와 자유스러운 정신으로 신풍을 예고한 페늘롱과 라 브뤼에르가 활약하였고 베일 퐁트넬은 18세기 철학자의 선구자가 된다.
러시아, 소련
17세기 초 참칭자(僭稱者)인 가짜 드미트리의 출현을 계기로 해서 일어난 대동란은 러시아 사회에 현저한 변화를 초래한 것은 물론이고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귀족에 대신한 사족(士族)의 진출, 상공업의 발흥에 수반한 새로운 독자층의 출현, 서구제국과의 교섭증대 등이 원인이 되어 문학에 세속적 요소가 점차로 뚜렷해진 것이 바로 그것이다.
17세기 초에는 대동란에서 취재한 <모스크바 국가의 포로와 멸망 이야기> <스코핀 슈이스키공의 죽음과 매장 이야기> 돈 카자흐의 활약을 묘사한 <아조프 농성 이야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 등 몇 개의 종군기가 나왔으며, 이들 작품은 전통적 수법을 지키면서도 사건의 즉물적 묘사에의 경향 가운데 새로운 시대의 조짐을 감지케 한다.
17세기 문학의 최대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일련의 세 상인의 이야기이다. 운문으로 된 <불행한 이야기>는 어떤 상인의 아들이 ‘불행’에 봉착, 속세의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수도원에 들어가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상인의 아들이 등장해서 남의 젊은 아내와 밀통하는 <사바 그루친의 이야기>에서도 결국 주인공은 영혼의 구제를 수도원에서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어느 쪽이나 이야기의 흥미 중심은 세상의 묘사에 있다. 가난한 청년이 책략을 써서 부유한 귀족의 딸을 손에 넣고 자신의 출세를 꾀하는 <프롤 스코베예프의 이야기>, 남편의 부재시 현명한 처가 종횡무진의 지략을 써서 정조를 지키는 <카르프 수툴로프의 이야기>에는 종교 냄새나 교훈적 색채 같은 것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들 작품의 작자는 미상이다.
이 밖에 17세기에는 <요르슈 에르쇼비치의 이야기> <셰미야카의 재판 이야기> 등과 같은 풍자문학도 성행했다.
또한 새로운 경향은 성인전 분야에도 미쳐 아들에 의해 묘사된 여성의 전기로서 흥미가 있는 <율리아니아 라자 레프스카야전(傳)>이나, 고대문학의 도미(掉尾)를 장식하는 걸작 <자전>이 나왔다.
영국
1603년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붕어(崩御)로 ‘영국사의 최성기’라고까지 일컬어졌던 시대에 선이 그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영국 르네상스 문학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세기의 대표적인 시인인 존 밀턴을 르네상스 문학 최후의 꽃으로 보는 견해가 상식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국에 있어 근대화의 걸음이 이 시대에서 시작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이 시대, 특히 그 전반은 르네상스적 사조와 계몽사조가 혼류한 과도기적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화의 걸음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은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지만 자연과학적 세계관, 분석·비판의 정신, 자의식의 각성과 같은 풍조는 그 어김없는 징조로 보여진다. 이 개혁적인 정신이 홉스나 로크의 정치학설을 탄생하게 한 기반을 만들었고 또 청교도 혁명과 왕정복고 후의 명예혁명을 성공시킨 배경이 된다. 영국은 이렇게 하여 국정의 주권을 인민의 손에 위임하게 되었고 민주사상은 이 시대의 산물이었다.
시의 세계에서는 왕당파 시인이라 불리는 일단의 활약을 볼 수 있고, 또 철학시라고 후에 이름지어진 작풍이 생겨났다. 1642년에 청교도가 극장을 폐쇄하게 되어 극은 왕정복고 이후에 오히려 개방적인 내용의 작품이 속출하였다. 위철리(1641-1716)와 콘그리브(1670-1729)의 풍속희극이라는 것이 성행했다. 또 산문의 진출이 현저하다. 1611년 완성된 흠정영역 성서가 보여준 간경(簡勁)하고 웅장한 문체는 영국산문의 모범이 되었다. 기타 베이컨, 로버트 버튼(1577-1640), 토머스 브라운경(卿)(1605-1682) 등의 산문이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산문의 진출은 사람들의 근대화의 자각과 관계가 있다고 보겠다. | https://en.wikipedia.org/wiki/17th%20century%20in%20literature | 17th century in literature |
Events and trends
1605–1615 – Miguel de Cervantes writes the two parts of Don Quixote.
1616: April – Death of both William Shakespeare and Miguel de Cervantes.
1630-1651: William Bradford writes Of Plymouth Plantation, journals that are considered the most authoritative account of the Pilgrims and their government.
1660–1669 – Samuel Pepys writes his diary.
1667–68 – Marianna Alcoforado writes her Letters of a Portuguese Nun.
1671–1696 – Madame de Sévigné writes her famous letters.
Metaphysical poets
German literature of the Baroque period
New books and plays
1600
Hamlet, Prince of Denmark by William Shakespeare
England's Helicon (anthology) – including work by Edmund Spenser, Michael Drayton, Thomas Lodge, Philip Sidney and others
Old Fortunatus – Thomas Dekker
The Spanish Moor's Tragedy – Thomas Dekker, John Marston, and William Haughton
1601
Twelfth Night, or What You Will by William Shakespeare
Cynthia's Revels – Ben Jonson
Disputationes Metaphysicae by Francisco Suárez first published
Satiromastix – Thomas Dekker
1602
Rymes by Lope de Vega
Troilus and Cressida by William Shakespeare
Antonio and Mellida (play) – John Marston
Mirum in Modum (poetry) – John Davies of Hereford
Satiromastix (play) – Thomas Dekker and John Marston
A Survey of Cornwall – Richard Carew
1603
The True Law of Free Monarchies by King James VI and I
Ane Godlie Dreame (poem) by Elizabeth Melville published in Edinburgh
Measure for Measure by William Shakespeare
Othello by William Shakespeare
The Tragical History of Doctor Faustus by Christopher Marlowe (published)
1604
All's Well That Ends Well by William Shakespeare
The Honest Whore (play) – Thomas Dekker
The Malcontent (play) – John Marston
1605
Timon of Athens by William Shakespeare
The Dutch Courtesan (play) – John Marston
The Tragedy of Philotas (play) – Samuel Daniel
The Tragedy of King Lear by William Shakespeare
Don Quixote (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 Part I – Miguel de Cervantes
Epistle concerning the Excellencies of the English Tongue – Richard Carew
1606
Macbeth by William Shakespeare
Antony and Cleopatra by William Shakespeare
1607
A Woman Killed with Kindness (play) – Thomas Heywood
Bussy D'Ambois (play) – George Chapman
Michaelmas Terme (play) – Thomas Middleton
The Knight of the Burning Pestle (play) – Francis Beaumont
The Famous History of Sir Thomas Wyatt (play) – Thomas Dekker and John Webster
The Legend of Great Cromwell – Michael Drayton
Pericles, Prince of Tyre by William Shakespeare
The Revenger's Tragedy by Thomas Middleton
1608
Coriolanus by William Shakespeare
A Nest of Ninnies – Robert Armin
Humour out of Breathe (play) – John Day
The Belman of London (play) – Thomas Dekker
The Merry Devil of Edmonton (play) – anonymous; has been attributed to William Shakespeare, Michael Drayton and others.
1609
The Winter's Tale by William Shakespeare
Jerusalem Conquered (epic poem) by Lope de Vega
Fourre Birds of Noahs Arke – Thomas Dekker
1610
Sidereus Nuncius by Galileo Galilei
Cymbeline by William Shakespeare
The Faithful Shepherdess (play) – John Fletcher
1611
Fuente Ovejuna (play) – Lope de Vega
The Authorized Version (King James version) of the Bible
The Tempest by William Shakespeare
Catiline his Conspiracy (play) – Ben Jonson
The Roaring Girle (play) – Thomas Dekker and Thomas Middleton
1612
Four Soluloquies – Lope de Vega
El comendador de Ocaña (Ocaña's mayor) – Lope de Vega
A Woman is a Weather-Cocke – Nathan Field
1613
Soledades – Luis de Góngora
La dama boba (the fool lady) – Lope de Vega
The Dog in the Manger (play) – Lope de Vega
Henry VIII by William Shakespeare
Tears on the Death of Moeliades – William Drummond of Hawthornden
The Revenge of Bussy D'Ambois – George Chapman
Purchas, his Pilgrimage; or, Relations of the World and the Religions observed in all Ages – Samuel Purchas
1614
Bartholomew Fair (play) – Ben Jonson
La Lira by Giambattista Marino
Fama fraternitatis Roseae Crucis oder Die Bruderschaft des Ordens der Rosenkreuzer – Johannes Valentinus Andreae
1615
Don Quixote, Part II – Miguel de Cervantes
El caballero de Olmedo (The knight from Olmedo) (play) – Lope de Vega
Confessio oder Bekenntnis der Societät und Bruderschaft Rosenkreuz – Johannes Valentinus Andreae
1616
Ben Jonson's Works
The Whole Works of Homer – George Chapman
Chymische Hochzeit Christiani Rosencreutz Anno 1459 – Johannes Valentinus Andreae
Rollo, Duke of Normandy (also known as The Bloody Brother) (?1616–30?) – John Fletcher, Ben Jonson, Philip Massinger, George Chapman (The drinking song)
1617
Warenar (play) by Pieter Corneliszoon Hooft
A Faire Quarrell (play) – Thomas Middleton and William Rowley
1618
History of Tythes – John Selden
Amends for Ladies (play) – Nathan Field
1619
A King and No King (play) – Beaumont and Fletcher
The Maid's Tragedy (play) – Beaumont and Fletcher
The Shoemaker's Holiday – Thomas Deloney
The Custome of the Countrey – John Fletcher and Philip Massinger
Reipublicae Christianopolitanae descriptio – Johannes Valentinus Andreae
1620
Philaster – Beaumont and Fletcher
1621
The Anatomy of Melancholy – Robert Burton
Women Beware Women – Thomas Middleton
El vergonzoso en palacio – Tirso de Molina
The Countess of Montgomery's Urania – Lady Mary Wroth
1623
The Heir (play) – Thomas May
The Historie of the Raigne of King Henry the Seventh – Francis Bacon
The French Disease – Richard Brome
The Beggar's Bush – John Fletcher
El tejedor de Segovia – Juan Ruiz de Alarcón
The Changeling – Thomas Middleton and William Rowley text
1623
L'Adone by Giambattista Marino
Love, honour and power (play) – Pedro Calderón de la Barca
The Duchess of Malfi – John Webster
First Folio – William Shakespeare
1624
Circe (poem) bu Lope de Vega
Nero Caesar, or Monarchie Depraved – Edmund Bolton
The Sun's Darling – John Ford
1625
De jure belli ac pacis by Hugo Grotius
Complete Essays – Francis Bacon
Les Bergeries – Racan
1626
El Buscón – Francisco de Quevedo
1627
England's schim (play) – Pedro Calderón de la Barca
The Bataile of Agincourt – Michael Drayton
First Steps up Parnassus – Michael Drayton
1628
Microcosmographie – John Earle
1629
The Roman Actor (play) – Philip Massinger
La Dama Duende (play) – Pedro Calderón de la Barca
The Tragedy of Albovine (play) – William D'Avenant
1630
The Conceited Pedlar – Thomas Randolph
1631
The punishment without vengeance (play) – Lope de Vega
1632
L'Allegro – John Milton
La Dorotea – Lope de Vega
The Fatal Dowry (play) – Nathan Field and Philip Massinger
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 by Galileo Galilei
The Muses' Looking-Glass by Thomas Randolph
1633
A New Way to Pay Old Debts (play) – Philip Massinger
Love's Sacrifice (play) – John Ford
The Gamester (play) – James Shirley
The Temple (poetry) – George Herbert
1634
Tottenham Court (play) – Thomas Nabbes
1636
Life is a dream (play) – Pedro Calderón de la Barca
Le Cid (play) – Pierre Corneille
1637
La Vega del Parnaso (Parnasos' river bank) – Lope de Vega
Discourse on the Method – René Descartes
1638
Two New Sciences by Galileo Galilei
Alcione (play) – Pierre du Ryer
1639
Argalus and Parthenia (play) – Henry Glapthorne
The City Match – Jasper Mayne
1640
Horace (play) – Pierre Corneille
The Bay Psalm Book, the first book printed in North America
Joseph's coloured Coat – Thomas Fuller
1641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 René Descartes
Episcopacy by Divine Right – Joseph Hall
The Cardinall (play) – James Shirley (first extant edition, 1652)
A Joviall Crew (play) – Richard Brome (first extant edition, 1652)
1642
September: Playhouses closed in England by government order.
Religio Medici Sir Thomas Browne
Saul (play) by Pierre du Ryer
1644
Principles of Philosophy – René Descartes
Areopagitica by John Milton
1646
Andronicus or the Unfortunate Politician – Thomas Fuller
Pseudodoxia Epidemica or Vulgar Errors – Sir Thomas Browne
1647
Philosophical Poems – Henry More
1648
The Amorous War – Jasper Mayne
Hesperides by Robert Herrick (poet)
Padmavati – Alaol (in Bengali)
1649
Eikon Basilike – John Gauden
1650
Silex scintillans – Henry Vaughan
1651
El alcalde de Zalamea – Pedro Calderón de la Barca
Leviathan – Thomas Hobbes
Reliquiae Wottonianiae – Sir Henry Wotton (posthumous)
Jeune Alcidiane – Marin le Roy de Gomberville
1652
Brief Character of the Low Countries – Owen Feltham
Theophilia or Love's Sacrifice (poetry) – Edward Benlowes
The Cardinall (play) – James Shirley
1653
A History of New England – Edward Johnson
The Compleat Angler – Izaak Walton
Poems and Fancies – Margaret Cavendish
The Princess Cloria – Percy Herbert, 2nd Baron Powis
1654
Lucifer (play) – Joost van den Vondel
Parlhenissa, a novel – Roger Boyle, 1st Earl of Orrery
1655
L'Étourdi ou les Contretemps first play by Molière
1656
El gran teatro del mundo (World's great theatre) (play) – Pedro Calderón de la Barca
Nature's Pictures – Margaret Cavendish
Oceana by James Harrington
1657
Guárdate del agua mansa (Keep out from silent waters) – Pedro Calderón de la Barca
Katharina von Georgien (play) by Andreas Gryphius
1658
Hydriotaphia, Urn Burial – Sir Thomas Browne
The Garden of Cyrus -Sir Thomas Browne
1659
Sati Mayna O Lorchandrani – Alaol (in Bengali)
Lucasta – Richard Lovelace (posthumous)
Pharonnida – William Chamberlayne
1660
Tohfa – Alaol (in Bengali)
1661
by Samuel von Pufendorf
1662
A new edition of the Book of Common Prayer of the Church of England (this edition remains the officially authorised book to the present day).
1664
La Thébaïde (play) – Jean Racine
1665
Alexandre le Grand (Alexander the Great) (play) – Jean Racine
Memoires of François Bassompierre (posthumous)
Saptapaykar – Alaol (in Bengali)
1666
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inners by John Bunyan
1667
Paradise Lost by John Milton
Andromaque by Jean Racine
Annus Mirabilis, the Year of Wonders 1666 – John Dryden
Secret Love (play) – John Dryden
1668
Le Tartuffe – Molière
The Miser – Molière
Simplicius Simplicissimus – Hans Jakob Christoffel von Grimmelshausen
Cyprianus Anglicanus – Peter Heylin
Essay of Dramatick Poesie – John Dryden
Observations upon Experimental Philosophy – Margaret Cavendish
1669
Saifulmuluk O Badiujjamal – Alaol (in Bengali)
1670
Pensées by Blaise Pascal
The Conquest of Granada – John Dryden
1671
Madame de Sévigné writes her first letter
Samson Agonistes – John Milton
The Rehearsal (play) – George Villiers, 2nd Duke of Buckingham performed
Sikandarnama – Alaol (in Bengali)
1672
Bajacet (play) by Jean Racine
Marriage à la mode by John Dryden
The Rehearsal (play) by George Villiers, 2nd Duke of Buckingham published
1674
Iphigénie (play) by Jean Racine
The Tragedy of Nero, Emperour of Rome (play) – Nathaniel Lee
1675
The Country Wife by William Wycherley
Gerania; a New Discovery of a Little Sort of People, anciently discoursed of, called Pygmies by Joshua Barnes
1676
The Man of Mode (play) – George Etherege
English-Adventures by a Person of Honor – Roger Boyle, 1st Earl of Orrery
1677
Phèdre – Jean Racine
Treatise of the Art of War – Roger Boyle, 1st Earl of Orrery
1678
All for Love – John Dryden
The True Intellectual System of the Universe – Ralph Cudworth
The Pilgrim's Progress by John Bunyan
Threnodia Carolina – Sir Thomas Herbert
1679
Anima Mundi – Charles Blount
1680
The Life and Death of Mr Badman – John Bunyan
1681
Miscellaneous Poems by Andrew Marvell (posthumous)
Absalom and Achitophel by John Dryden
1682
The Life of an Amorous Man (好色一代男, Kōshoku Ichidai Otoko) by Ihara Saikaku
1685
Five Women Who Loved Love (好色五人女, Kōshoku Gonin Onna) by Ihara Saikaku
1686
The Life of an Amorous Woman (好色一代女, Kōshoku Ichidai Onna) by Ihara Saikaku
1687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 Isaac Newton
The Hind and the Panther – John Dryden
The Hind and the Panther Transversed to the Story of the Country and the City Mouse – Matthew Prior
Bellamira, or The Mistress (play) – Sir Charles Sedley
The Great Mirror of Male Love (The Encyclopedia of Male Love) (男色大鑑, Nanshoku Okagami) by Ihara Saikaku
1688
The Eternal Storehouse of Japan (日本永代蔵, Nippon Eitaigura) by Ihara Saikaku
1689
The Massacre of Paris (play) – Nathaniel Lee
Table Talk – John Selden (posthumous)
1690
Amphitryon, or the Two Socias – John Dryden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 John Locke
Memoires of the Navy by Samuel Pepys
1691
Athalie (play) – Jean Racine
1692
Reckonings that Carry Men Through the World or This Scheming World (世間胸算用, Seken Munazan'yō) by Ihara Saikaku
1693
The Impartial Critick – John Dennis
1694
The Fatal Marriage (play) – Thomas Southerne
1696
Louis de Rouvroy, Duc de Saint-Simon starts writings his Memoirs
1697
A New Voyage Round the World – William Dampier
1698
The Campaigners (play) – Thomas D'Urfey
1699
Dialogues of the Dead – William King and Charles Boyle
Translations
The Bible - translated into Italian by Giovanni Diodati
Don Quixote - translated into Italian by Lorenzo Franciosini
Euclid's Elements - translated into Chinese by Xu Guangqi
Hayy ibn Yaqdhan by Ibn Tufail – translated into Latin by Edward Pococke the Younger, translated into Dutch by Johannes Bouwmeester, and translated into English by George Ashwell
The works of Tacitus - translated into Italian by Adriano Politi
Births
1600 – Marin le Roy de Gomberville
1601 – Baltasar Gracián
1602 – Jean-Jacques Boissard
1603 – Pierre Corneille
1605 – Thomas Browne
1607 – Francisco de Rojas Zorrilla
1608 – Padre António Vieira/ John Milton
1609 – Jean Rotrou
1611 – William Cartwright; Thomas Urquhart
1613 – John Cleveland
1615 – Tanneguy Lefebvre
1617 – Ralph Cudworth
1620 – Lucy Hutchinson
1621 – Hans Jakob Christoph von Grimmelshausen
1622 – Molière
1623 – Blaise Pascal
1625 – Thomas Corneille
1626 – Marie de Rabutin-Chantal, marquise de Sévigné
1627 – John Flavel
1628 – Miguel de Molinos
1630 – Isaac Barrow
1631 – John Dryden
1632 – John Locke
1632 – Baruch Spinoza
1633 – Samuel Pepys
1639 – Thomas Ellwood
1640 – Aphra Behn
1642 – Isaac Newton
1643 – Gilbert Burnet
1644 – Matsuo Bashō
1646 – Gottfried Leibniz
1648 – Robert Barclay
1651 – William Dampier
1652 – Thomas Otway
1657 – Bernard le Bovier de Fontenelle
1667 – Jonathan Swift
1668 – Alain-René Lesage
1675 – Louis de Rouvroy, duc de Saint-Simon
1681 – Robert Keith
1685 – George Berkeley
1689 – Samuel Richardson
1694 – Voltaire
1698 – Metastasio
Deaths
1600 – Richard Hooker (theologian)
1605 – John Stow
1607 – Sir Edward Dyer
1612 – Juan de la Cueva; Robert Armin
1615 – Mateo Alemán
1616 – William Shakespeare; Miguel de Cervantes; Francis Beaumont; Richard Hakluyt
1621 – Guillaume du Vair
1623 – William Camden
1624 – Stephen Gosson
1625 – John Fletcher; Thomas Lodge
1626 – Lancelot Andrewes; Samuel Purchas
1627 – Luis de Góngora
1631 – Michael Drayton; Guillén de Castro y Bellvis
1633 – Abraham Fraunce
1634 – George Chapman
1635 – Lope de Vega; Thomas Randolph; Richard Corbet; John Hall (son-in-law of Shakespeare)
1638 – Robert Aytoun
1639 – Juan Ruiz de Alarcón
1640 – Philip Massinger; Robert Burton
1641 – Augustine Baker
1643 – William Cartwright
1644 – Luis Vélez de Guevara; Francis Quarles
1645 – Francisco de Quevedo; William Lithgow
1647 – Francis Meres
1648 – Tirso de Molina; Alonso de Castillo Solórzano; George Abbot; Vincent Voiture
1650 – René Descartes
1658 – Baltasar Gracián; Pierre du Ryer
1660 – Thomas Urquhart
1661 – María de Zayas y Sotomayor
1662 – François le Métel de Boisrobert
1667 – Georges de Scudéry
1672 – Anne Bradstreet; Tanneguy Lefebvre
1673 – Molière
1674 – Marin le Roy de Gomberville
1676 – Hans Jakob Christoph von Grimmelshausen
1678 – Andrew Marvell
1679 – Thomas Hobbes
1681 – Pedro Calderón de la Barca
1682 – Thomas Browne
1685 – Thomas Otway
1688 – John Bunyan; Ralph Cudworth
1689 – Aphra Behn
1691 – Richard Baxter; John Flavel
1696 – Miguel de Molinos; Madame de Sévigné
Wikisource reference work
The First Half of the Seventeenth Century (1906) by Herbert J. C. Grierson. Periods of European Literature series, vol. 7. George Edward Bateman Saintsbury, ed. Edinburgh and London: William Blackwood and Sons.
See also
17th century in poetry
German literature of the Baroque period
French literature of the 17th century
Early Modern English literature
Baroque literature
Early Modern literature
16th century in literature
1700 in literature
18th century in literature
list of years in literature
External links
Bartleby - Table of Principal Dates
History of literature
Early Modern literature |
https://ko.wikipedia.org/wiki/16%EC%84%B8%EA%B8%B0%20%EB%AC%B8%ED%95%99 | 16세기 문학 | 16세기 문학은 16세기에 제작된 일련의 문학 작품을 의미한다.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16세기 전체가 르네상스라 말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중세 그리스도 세계는 긴 기간의 독단과 편견에 의하여 경직(硬直)화하여 이르는 곳마다 혼란과 무질서를 낳았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케케묵은 전통에 의한 견고한 권위를 뒤집고 이제까지 잊혀진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학과 사상 안에 생활의 지혜를 찾으려는 운동이 싹텄다. 이것이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란 말은 ‘재생(再生)’을 의미하는 프랑스 말이다. 결국 고대의 학문과 사상이 이 시대에 새롭게 바뀌어 태어난 것을 가리킨다. 물론 중세에 있어서도 라틴 어학이나 문학의 연구가 중단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시기가 되어 중세와는 전혀 다른방법과 왕성한 지식욕으로 주석에 의하지 않고 고대의 원전(原典)에서 직접 배우려는 기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르네상스를 낳은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15세기 말에서 약 반세기에 걸쳐 거듭된 이탈리아 원정이다. 알프스를 넘어 발달한 이탈리아 문화에 접한 프랑스인은 이탈리아인의 사치스럽고 고상한 생활과 세련되고 우아한 사교계에 심취하여 이것을 프랑스에 가지고 갔다.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많은 미술품이 프랑스에 들어가서 단테의 <신곡>과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도 소개되었다.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매개로 하여 고대의 전통이 밝혀지고 다시금 고대문화의 가치가 인식되었다.
16세기의 문학은 보통 세 시기로 나뉜다. ⑴르네상스 전기(1515-1534)―프랑수아 1세가 즉위한 1515년부터 20년 동안으로 젊은 왕은 새로운 사상에 호의를 가지고 문예를 장려하였다. 이 시기에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손을 맞잡고 진척하여 문학자들은 고대작품에의 호기심과 새로운 종교운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 작가로는 시인인 클레망 마로와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라 불리는 프랑수아 라블레가 있다.
⑵ 르네상스 개화기(1534-1560)―1534년의 ‘격문사건(檄文事件)’을 경계로 프랑수아 1세의 종교정책은 심한 탄압으로 바뀌어 마로는 이탈리아로 망명하고 라블레는 몸을 숨긴다. 이 시기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결별하여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많은 문학가는 종교개혁을
멀리하여 고대의 원전 속으로 몰입한다. 1550년경이 되면 롱사르를 중심으로 플레야드(La Plei-ade)가 고대시형을 부활하여 고대극을 모방한 희곡을 썼다.
⑶ 르네상스 원숙기(1560-1598)―이시기는 종교전쟁과 일치한다. 문학가도 각기 그들이 속해 있는 당파의 신념에 입각하였으며, 가령 도비네와 몬뤼크처럼 전쟁에 참가하기도 한다. 다만 이 고난의 시대를 맞아 몽테뉴는 광신적인 상호 혐오의 어리석음을 알고 고대에서 배운 행복의 철학을 역설하였다. 르네상스는 몽테뉴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소련
전세기말에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난 러시아는 모스크바 공국에 의해 통일되어 16세기에는 모스크바 공을 차르(Tsar’=皇帝)로 추대하는 중앙집권국가가 성립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시기는 국민의식이 매우 앙양되었음을 볼 수 있다. 때마침 동로마 제국이 터키에 의해 멸망당했기 때문에, 러시아야말로 그리스 정교의 마지막 옹호자라는 ‘모스크바 즉 제3로마’의 이론이 수도사 피로페이에 의해 제창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15세기 말 또는 16세기 초에 나온 <블라디미르의 제공(諸公) 이야기>에도 반영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모스크바의 제공들이야말로 왕년에 키예프에 군림했던 류리크공을 잇는 정통이며 나아가서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혈연에 연결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모스크바시(市)의 주교 마카리의 지도하에 편찬된 대규모적인 연대기 집성, 그리고 <대성인전집>도 이 시대의 고양된 국가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는 세계 개벽에서부터 아우구스투스, 류리크를 거쳐 모스크바공에 이르는 10권 2만 페이지로 되어 있는 웅대한 구상의 역사서이며, 후자는 러시아 각지에 산재하고 있던 성인전을 모두 집대성한 것으로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외국의 성인전기도 남김없이 수록하고 있다.
전대의 쿠리코보 전쟁의 기록이나, <콘스탄티노플 함락기>의 전통을 잇는 종군기로서는 이 세기의 60년대에 쓰여진 <카잔 왕국사(王國史)>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카잔 한국(汗國)의 성립에서 이반 대제의 정복에 이르는 경과를 기술한 것으로, 특히 모스크바 포위군과 농성군의 최후 공방전은 특징 있는 서사적 스타일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작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반 대제에 의한 카잔 공략(攻略)의 양상은 이 당시 구전문학의 새로운 형식인 ‘역사 가요’에서도 읊어지고 있다.
연대기거나 종군기거나 거기에는 통일 러시아의 성립이라는 시대 특유의 강한 정치의식·역사의식이 나타나 있으며 이 시기에는 동시대의 정치 및 사회 양상에 관한 관심을 그대로 표시하고 있는 저작이 많이 나왔다. 서구적 합리주의의 영향하에 발생한 온갖 이단(異端)을 둘러싼 논쟁,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따지는 ‘요시프파(派)’와 ‘청렴파’의 대립, 차르의 절대주의를 지지하는 이반 페레스베토프의 저서, 차르의 권력에 관한 이반 뇌제 자신과 쿠르프스키공의 격렬한 응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 평론적 문학’은 러시아 문학에서 하나의 뿌리깊은 전통이 되었다.
또한 문학적 가치로서는 빈약하나 이 시대의 분위기를 적절히 전하는 것으로는 가장으로서의 마음 가짐을 가르치는 시리베스토르 승(僧)의 <가정훈(家庭訓)>이 있다. | https://en.wikipedia.org/wiki/16th%20century%20in%20literature | 16th century in literature | This article presents lists of literary events and publications in the 16th century.
Events
1501
Italic type (cut by Francesco Griffo) is first used by Aldus Manutius at the Aldine Press in Venice, in an octavo edition of Virgil's Aeneid. He also publishes an edition of Petrarch's Le cose volgari and first adopts his dolphin and anchor device.
1502
Aldine Press editions appear of Dante's Divine Comedy, Herodotus's Histories and Sophocles.
1507
King James IV grants a patent for the first printing press in Scotland to Walter Chapman and Andrew Myllar.
1508
April 4 – John Lydgate's The Complaint of the Black Knight becomes the first book printed in Scotland.
The earliest known printed edition of the chivalric romance Amadis de Gaula, as edited and expanded by Garci Rodríguez de Montalvo, is published in Castilian at Zaragoza.
Elia Levita completes writing the Bovo-Bukh.
1509
Desiderius Erasmus writes The Praise of Folly while staying with Thomas More in England.
1510
April 10 – Henry Cornelius Agrippa pens the dedication of De occulta philosophia libri tres to Johannes Trithemius.
1510–1511
Ein kurtzweilig Lesen von Dyl Ulenspiegel, geboren uß dem Land zu Brunßwick, wie er sein leben volbracht hat … is published by printer in Strassburg in Early New High German, the first appearance of the trickster character Till Eulenspiegel in print.
1512
The word "masque" is first used to denote a poetic drama.
1513
The Aldine Press editiones principes of Lycophron, Lysias, Pindar and Plato is published by Aldus Manutius in Venice.
Niccolò Machiavelli is banished from Florence by the House of Medici and writes The Prince as De Principatibus (On Principalities) in Tuscany this summer.
Johannes Potken publishes the first Ge'ez text, Psalterium David et Cantica aliqua, at Rome.
1514
May 15 – The earliest printed edition of Saxo Grammaticus' 12th-century Scandinavian history Gesta Danorum, edited by Christiern Pedersen from an original found near Lund, is published as Danorum Regum heroumque Historiae by Jodocus Badius in Paris.
Gregorio de Gregorii begins printing Kitab Salat al-Sawa'i (a Christian book of hours), the first known book printed in the Arabic alphabet using movable type. It is falsely assigned in Venice to Fano.
1515
Christoph Froschauer becomes the first printer in Zürich.
1516
Samuel Nedivot prints the 14th-century Hebrew Sefer Abudirham in Fez, the first book printed in Africa.
Paolo Ricci translates the 13th-century Kabbalistic work Sha'are Orah by Joseph ben Abraham Gikatilla as Portae Lucis.
1519
Apokopos by Bergadis, the first book in Modern Greek, is printed in Venice.
The chivalric romance Libro del muy esforzado e invencible caballero Don Claribalte (Book of the much striving and invincible knight Don Claribalte), the first work by Gonzalo Fernández de Oviedo y Valdés, is published in Valencia, Spain, by Juan Viñao. In a foreword dedicating it to Ferdinand, Duke of Calabria, Oviedo relates that it has been conceived and written in the Captaincy General of Santo Domingo (the Caribbean island of Hispaniola), where he has been working since 1514. It can therefore claim to be the first literary work created in the New World.
1521
June 29 or 30 – Neacșu's letter is the oldest surviving dateable document written primarily in Romanian (using the Romanian Cyrillic alphabet).
1522
Luo Guanzhong's 14th-century compilation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is first printed as Sanguozhi Tongsu Yanyi.
Luther Bible: Martin Luther's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 into Early New High German from Greek, Das newe Testament Deutzsch, is published.
1522–24
St Ignatius Loyola writes his Exercitia spiritualia (Spiritual Exercises), on which Jesuit spirituality is based. It is published in 1548 after formal approval by Pope Paul III.
1524
Eyn Gespräch von dem gemaynen Schwabacher Kasten ("als durch Brüder Hainrich, Knecht Ruprecht, Kemerin, Spüler, und irem Maister, des Handtwercks der Wüllen Tuchmacher") is published in Germany, the first publication in the "Schwabacher" blackletter typeface.
1526
Spring – The first complete printed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 into English by William Tyndale arrives in England from Germany, having been printed in Worms. In October, Cuthbert Tunstall, Bishop of London, attempts to collect all the copies in his diocese and burn them.
The New Testament in Swedish, the first official Bible translation into Swedish, is made by Olaus Petri under royal patronage.
The first complete Dutch-language translation of the Bible is printed by Jacob van Liesvelt in Antwerp.
The Bibliotheca Corviniana in Ofen is destroyed by troops of the Ottoman Empire.
1530
January – The first printed translation of the Torah in English, by William Tyndale, is published in Antwerp for distribution in Britain.
An edition of Erasmus's Paraphrasis in Elegantiarum Libros Laurentii Vallae is the first book to use the Roman form of the Garamond typeface cut by Claude Garamond.
Paracelsus finishes writing Paragranum.
1533
October – The censors of the Collège de Sorbonne condemn François Rabelais' Pantagruel as obscene.
1534
Luther Bible: Martin Luther's Biblia: das ist die gantze Heilige Schrifft Deudsch, a translation of the complete Bible into German, is printed by Hans Lufft in Wittenberg, with woodcut illustra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 granted a royal charter by King Henry VIII of England to print "all manner of books" and so becomes the first of the privileged presses.
Rabbi Asher Anchel's Mirkevet ha-Mishneh (a Tanakh concordance) is the first book printed in Yiddish (in Kraków).
1535
The earliest printed book in Estonian, a Catechism with a translation by Johann Koell from the Middle Low German Lutheran text of Simon Wanradt, is printed by Hans Lufft in Wittenberg for use in Tallinn.
1536
Petar Zoranić writes the first Croatian novel, the pastoral-allegorical Planine ("Mountains"); it first appears posthumously in Venice in 1569.
1537
Construction of the Biblioteca Marciana in Venice to the design of Jacopo Sansovino begins, continuing to 1560.
Paracelsus starts to write Astronomia Magna or the whole Philosophia Sagax of the Great and Little World.
December 28 – Ordonnance de Montpellier initiates a legal deposit system for books in the Kingdom of France.
1538
Paracelsus finishes writing Astronomia Magna or the whole Philosophia Sagax of the Great and Little World.
December 20 – Pietro Bembo is made a Cardinal.
1539
April – Printing of the Great Bible (The Byble in Englyshe) is completed. It is distributed to churches in England. Prepared by Myles Coverdale, it contains much material from the Tyndale Bible, unacknowledged as Tyndale's version is officially considered heretical.
Game Place House in Great Yarmouth becomes the first English building to be used regularly as a public theatre.
Marie Dentière writes an open letter to Marguerite of Navarre, sister of the King of France; the Epistre tres utile (Very useful letter) calls for expulsion of Catholic clergy from France.
The first printing press in North America is set up in Mexico City. Its first known book, Manual de Adultos, appears in 1540.
1540
Sir David Lyndsay's Middle Scots satirical morality play A Satire of the Three Estates is first performed, privately.
1541
Elia Levita's chivalric romance, the Bovo-Bukh, is first printed, becoming the earliest published secular work in Yiddish.
1542
La relación/The Account, written by Álvar Núñez Cabeza de Vaca, appears, as the first European publication devoted wholly to discussion of North America.
1550
Primož Trubar's Catechismus and Abecedarium, the first books in Slovene, are printed in Schwäbisch Hall.
Popol Vuh is written after a long oral tradition.
1551
An edition of the Book of Common Prayer becomes the first book printed in Ireland.
1552
June – Sir David Lyndsay's Middle Scots satirical morality play A Satire of the Three Estates is first performed publicly in full, at Cupar in Fife.
1554
Publication of Menno Simons' Uytgangh ofte bekeeringhe begins the Dutch Golden Age of literature.
1565
Torquato Tasso enters the service of Cardinal Luigi d'Este at Ferrara.
1567
October 14 – António Ferreira becomes Desembargador da Casa do Civel and leaves Coimbra for Lisbon.
Approximate date – The first publication in book form of the Chinese shenmo fantasy novel Fengshen Yanyi.
1571
October 7 – In the naval Battle of Lepanto, Miguel de Cervantes is wounded.
Michel de Montaigne retires from public life and isolates himself in the tower of the Château de Montaigne.
1572
England's Vagabonds Act 1572 prescribes punishment for rogues. This includes acting companies lacking formal patronage.
Luís Vaz de Camões of Portugal publishes his epic Os Lusíadas.
1575
September 26 – Miguel de Cervantes is captured by Barbary pirates, to be ransomed only five years later.
Sir Philip Sidney meets Penelope Devereux, the inspiration for his Astrophel and Stella.
1576
December – James Burbage builds The Theatre, London's first permanent public playhouse. This opens the great age of English Renaissance theatre.
1586
October 17 – The poet Sir Philip Sidney (born 1554) dies of wounds received at the Battle of Zutphen.
1590
A troupe of boy actors, the Children of Paul's, is suppressed due to its playwright John Lyly's role in the Marprelate controversy.
1596
Blackfriars Theatre opens in London.
1597
Ben Jonson is briefly jailed in Marshalsea Prison after his play The Isle of Dogs is suppressed.
1598
September 22 – Ben Jonson kills actor Gabriel Spenser in a duel, but is only held briefly in Newgate Prison.
December 28 – The Theatre in London is dismantled .
Thomas Bodley refounds the Bodleian Library at the University of Oxford.
1599
Spring/Summer – The Globe Theatre built in Southwark, London, utilises material from The Theatre.
June 4 – Bishops' Ban of 1599: Thomas Middleton's Microcynicon: Six Snarling Satires and John Marston's Scourge of Villainy are publicly burned as the English ecclesiastical authorities clamp down on published satire.
Late – The War of the Theatres, a satirical controversy, breaks out on the London stage.
New books
1500
This is the Boke of Cokery, the first known printed cookbook in English
Desiderius Erasmus – Collectanea Adagiorum (1st ed., Paris)
Singiraja – Maha Basavaraja Charitra
1501
Desiderius Erasmus – Handbook of a Christian Knight (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
Margery Kempe – The Book of Margery Kempe (posthumous)
Marko Marulić – Judita (written)
1502
Shin Maha Thilawuntha – Yazawin Kyaw
1503
William Dunbar – The Thrissil and the Rois
Euripides – Tragoediae
Approximate date: "Robin Hood and the Potter" (ballad)
1505
Georges Chastellain – Récollections des merveilles advenues en mon temps (posthumous)
Stephen Hawes
The Passtyme of Pleasure
The Temple of Glass
Lodovico Lazzarelli – Crater Hermetics (posthumous)
Pierre Le Baud – Cronique des roys et princes de Bretaigne armoricane (completed)
1508
William Dunbar – The Goldyn Targe
Erasmus of Rotterdam – Adagiorum chiliades (2nd ed., Venice)
Johannes Trithemius – De septem secundeis
1509
Manjarasa – Samyukta Koumudi
1510
Garci Rodríguez de Montalvo – Las sergas de Esplandián
Ruiz Paez de Ribera – Florisando
1511
The Demaũdes Joyous (joke book published by Wynkyn de Worde in English)
Erasmus – The Praise of Folly
1512
Henry Medwall – Fulgens and Lucrece
Huldrych Zwingli – De Gestis inter Gallos et Helvetios relatio
Il-yeon - The Samguk Yusa
1513
Mallanarya of Gubbi – Bhava Chintaratna
First translation of Virgil's Aeneid into English (Scots dialect) by Gavin Douglas
1514–15
Gian Giorgio Trissino – Sofonisba
1516
Henry Cornelius Agrippa
Dialogus de homine (Casale)
De triplici ratione cognoscendi Deum
Erasmus – Novum Instrumentum omne (Greek New Testament translation)
Robert Fabyan (anonymous; died c. 1512) – The New Chronicles of England and France
Marsilio Ficino – De triplici vita
Thomas More – Utopia
1517
Francysk Skaryna's Bible translation and printing
Teofilo Folengo's Baldo, a popular Italian work of comedy
1518
Henry Cornelius Agrippa – De originali peccato
Erasmus – Colloquies
Tantrakhyan (Nepal Bhasa literature)
1519
Santikirti – Santinatha Purana
1520
Scholars at Complutense University, Alcalá de Henares, under the direction of Diego Lopez de Zúñiga – Complutensian Polyglot Bible
1521
Goražde Psalter
1522
Luo Guanzhong (attrib.) –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first publication
Martin Luther – Das newe Testament Deutzsch,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 into German
1523
Jacques Lefèvre d'Étaples – Nouveau Testament,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 into French
Martin Luther – , translation of the Pentateuch into German
Maximilianus Transylvanus – De Moluccis Insulis, the first published account of the Magellan–Elcano circumnavigation
1524
Philippe de Commines – Mémoires (Part 1: Books 1–6); first publication (Paris)
Martin Luther and Paul Speratus – Etlich Cristlich Lider: Lobgesang un Psalm ("Achtliederbuch"), the first Lutheran hymnal (Wittenberg)
Martin Luther and others – Eyn Enchiridion oder Handbüchlein (the "Erfurt Enchiridion"), two editions of a hymnal printed respectively by Johannes Loersfeld and Matthes Maler (Erfurt)
Johann Walter – Eyn geystlich Gesangk Buchleyn ("A sacred little hymnal") (Wittenberg)
1525
Pietro Bembo – Prose della volgar lingua
Francesco Giorgi – De harmonia mundi totius
Paracelsus – De septem puncti idolotriae christianae
Antonio Pigafetta – Relazione del primo viaggio intorno al mondo ("Report on the First Voyage Around the World"); partial publication (Paris)
1526
William Tyndale's New Testament Bible translation
1527
Hector Boece – Historia Scotorum
Philippe de Commines – Mémoires (Part 2: Books 7–8); first publication
Hans Sachs and Andreas Osiander – Eyn wunderliche Weyssagung von dem Babsttumb, wie es ihm biz an das endt der welt gehen sol ("A wonderful prophecy of the papacy about how things will go for it up until the end of the world")
1528
Baltissare Castiglione – The Book of the Courtier (Il Cortegiano)
Jacques Lefèvre d'Étaples – Ancien Testament, translation of the Old Testament into French
Francisco Delicado – Portrait of Lozana: The Lusty Andalusian Woman (Retrato de la Loçana andaluza)
William Tyndale – The Obedience of a Christian Man
1530
William Tyndale – The Practice of Prelates
1531
Henry Cornelius Agrippa – De occulta philosophia libri tres, Book One
Andrea Alciato – Emblemata
Sir Thomas Elyot – The Boke Named the Governour, the first English work concerning moral philosophy
Niccolò Machiavelli (posthumous) – Discourses on Livy
Paracelsus – Opus Paramirum (written in St. Gallen)
Michael Servetus – De trinitatis erroribus ("On the Errors of the Trinity")
1532
Niccolò Machiavelli (posthumous) – The Prince
François Rabelais (as Alcofribas Nasier) – Pantagruel (Les horribles et épouvantables faits et prouesses du très renommé Pantagruel Roi des Dipsodes, fils du Grand Géant Gargantua)
Feliciano de Silva – Don Florisel de Niquea
1533
Henry Cornelius Agrippa – Books Two and Three of De occulta philosophia libri tres
Antoine Marcourt (as Pantople) – Le livre des marchans
1534
Asher Anchel – Mirkevet ha-Mishneh
Martin Luther (translator) – "Luther Bible" (Biblia)
François Rabelais (as Alcofribas Nasier) – Gargantua (La vie très horrifique du grand Gargantua, père de Pantagruel)
Polydore Vergil – Historia Anglica
1535
John Bourchier, 2nd Baron Berners – Huon of Bordeaux
Simon Wanradt and Johann Koell – Catechism
Bible d'Olivétan (first translation of the complete Bible made from the original Hebrew and Greek into French)
1536
John Calvin –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n Latin)
Sir Thomas Elyot – The Castel of Helth
Paracelsus – Die große Wundarzney
1538
Hélisenne de Crenne – Les Angoisses douloureuses qui procèdent d'amours
Sir Thomas Elyot – The dictionary of syr Thomas Eliot knyght (Latin to English)
1539
Robert Estienne – Alphabetum Hebraicum
1540
Historia Scotorum of Hector Boece, translated into vernacular Scots by John Bellenden at the special request of James V of Scotland
The Byrth of Mankynde, the first printed book in English on obstetrics, and one of the first published in England to include engraved plates
1541
George Buchanan
Baptistes
Jephtha
Joachim Sterck van Ringelbergh – Lucubrationes vel potius absolutissima kyklopaideia
1542
Paul Fagius – Liber Fidei seu Veritatis
Edward Hall – The Union of the Two Noble and Illustrate Famelies of Lancastre & Yorke
1543
Nicolaus Copernicus –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On the Revolution of the Heavenly Spheres)
Andreas Vesalius – De humani corporis fabrica libri septem (On the Fabric of the Human body in Seven Books)
1544
Cardinal John Fisher – Psalmi seu precationes (posthumous) in an anonymous English translation by its sponsor, Queen Katherine Parr
John Leland – Assertio inclytissimi Arturii regis Britanniae
1545
Roger Ascham – Toxophilus
Bernard Etxepare – Linguae Vasconum Primitiae
Sir John Fortescue – De laudibus legum Angliae (written c. 1471)
Queen Katherine Parr – Prayers or Meditations, the first book published by an English queen under her own name
1546
Sir John Prise of Brecon – Yn y lhyvyr hwnn (first book in Welsh; anonymous)
François Rabelais – Le tiers livre
1547
Gruffudd Hiraethog – (posthumous collection of Welsh proverbs made by William Salesbury)
Martynas Mažvydas – The Simple Words of Catechism (first printed book in Lithuanian)
Queen Katherine Parr – The Lamentation of a Sinner
William Salesbury – A Dictionary in Englyshe and Welshe
1548
John Bale – Illustrium majoris Britanniae scriptorum, hoc est, Angliae, Cambriae, ac Scotiae Summarium... ("A Summary of the Famous Writers of Great Britain, that is, of England, Wales and Scotland"; 1548–9)
1549
Johannes Aal – Johannes der Täufer (St. John Baptist)
The Complaynt of Scotland
1550
Martin Bucer – De regno Christi
The Facetious Nights of Straparola published in Italian, the first European storybook to contain fairy-tales
1552
François Rabelais – Le quart livre
Gerónimo de Santa Fe – Hebræomastix (posthumous)
Libellus de Medicinalibus Indorum Herbis (Little Book of the Medicinal Herbs of the Indians), composed in Nahuatl by Martín de la Cruz and translated into Latin by Juan Badiano.
1553
Francesco Patrizi – La Città felice ("The Happy City")
1554
Anonymous – Lazarillo de Tormes
1559
The Elizabethan version of the Book of Common Prayer of the Church of England, which remains in use until the mid-17th century and becomes the first English Prayer Book in America
Jorge de Montemayor – Diana
Pavao Skalić – Encyclopediae seu orbis disciplinarum tam sacrarum quam profanarum epistemon
1560
Jacques Grévin – Jules César
William Whittingham, Anthony Gilby, Thomas Sampson – Geneva Bible
1562
William Bullein – Bullein's Bulwarke of Defence againste all Sicknes, Sornes, and Woundes
1563
John Foxe – Foxe's Book of Martyrs
1564
John Dee – Monas Hieroglyphica
1565
Camillo Porzio – La Congiura dei baroni
1567
Joan Perez de Lazarraga – Silbero, Silbia, Doristeo, and Sirena (MS in Basque)
Magdeburg Centuries, vols X-XI
William Salesbury – Testament Newydd ein Arglwydd Iesu Christ (translation of New Testament into Welsh)
Séon Carsuel, Bishop of the Isles – Foirm na n-Urrnuidheadh (translation of Knox's Book of Common Order into Classical Gaelic)
1569
Alonso de Ercilla y Zúñiga – La Araucana, part 1
Petar Zoranić – Planine
1571
Ali Sher Bengali – Sharḥ Nuzhat al-Arwāḥ (in Persian)
François de Belleforest – La Pyrénée (or La Pastorale amoureuse), the first French "pastoral novel"
Aibidil Gaoidheilge agus Caiticiosma (first printing in Irish)
1572
Friedrich Risner – Opticae thesaurus
Turba Philosophorum
1560-1575
Dawlat Wazir Bahram Khan – Laily-Majnu in Bengali
1576
Jean Boudin – Six livres de la République
George Pettie – A Petite Palace of Pettie His Pleasure
The Paradise of Dainty Devices, the most popular of the Elizabethan verse miscellanies
1577
Richard Eden – The History of Travayle in the West and East Indies
Thomas Hill – The Gardener's Labyrinth
Raphael Holinshed – The Chronicles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e
1578
George Best – A True Discourse of the Late Voyages of Discoverie...under the Conduct of Martin Frobisher
John Florio – First Fruits
Jaroš Griemiller – Rosarium philosophorum
Gabriel Harvey – Smithus, vel Musarum lachrymae
John Lyly – Euphues: the Anatomy of Wit
1579
Stephen Gosson – The Schoole of Abuse
Thomas Lodge – Honest Excuses
1581
Barnabe Riche –
1582
George Buchanan – Rerum Scoticarum Historia
Richard Hakluyt – Divers VoyagesJohn Leland – (posthumous translation)
1583
Philip Stubbes – The Anatomy of Abuses1584
James VI of Scotland – Some Reulis and CautelisDavid Powel – Historie of CambriaReginald Scot – The Discovery of Witchcraft1585
Miguel de Cervantes – La GalateaWilliam Davies – Y Drych Cristianogawl1586
John Knox – Historie of the Reformatioun of Religioun within the Realms of ScotlandJohn Lyly – Pappe with an hatchet, alias a figge for my GodsonneGeorge Puttenham (attr.) – The Arte of English Poesie1588
Thomas Hariot – A Briefe and True Report of the New Found Land of VirginiaThomas Nashe – The Anatomie of Absurditie1590
Thomas Lodge – Rosalynde: Euphues Golden LegacieThomas Nashe – An Almond for a Parrat1592
Robert Greene – Greene's Groatsworth of WitGabriel Harvey – Foure Letters and certaine SonnetsRichard Johnson – Nine Worthies of London1594
Sir John Davis – The Seamans SecretsRichard Hooker – Of the Lawes of Ecclesiastical Politie1595
Sir Philip Sidney (posthumous) – An Apology for Poetry (written )
1596
Sir Walter Raleigh – The Discoverie of the Large, Rich and Beautiful Empyre of Guiana1597
Francis Bacon – Essays1598
John Bodenham – Politeuphuia (Wits' Commonwealth)King James VI of Scotland – The Trew Law of Free MonarchiesFrancis Meres – Palladis Tamia, Wits TreasuryJohn Stow – Survey of London1599
John Bodenham – Wits' TheaterNew drama
1502The Monologue of the Cowboy1504Beunans Meriasek (Cornish)
1508
Ludovico Ariosto – CassariaThe World and the Child, also known as Mundas et Infans (probable date of composition)
1509
Ludovico Ariosto – I suppositi1513
Juan del Encina – Plácida y Victoriano1517A Trilogia das Barcas1522
Niklaus Manuel Deutsch I – Vom Papst und Christi Gegensatz1523Farsa de Inês Pereira1524
Niklaus Manuel Deutsch I – Vom Papst und seiner Priesterschaft1525
Niklaus Manuel Deutsch I – Der Ablasskrämer1531
Accademia degli Intronati – Gl' Ingannati1536
Hans Ackermann – Der Verlorene Sohn1538
John BaleKynge Johan, the earliest known English historical drama (in verse)Three Laws of Nature, Moses and Christ, corrupted by the Sodomytes, Pharisees and Papystes most wicked1541
Giovanni Battista Giraldi – Orbecche1551
Marin Držić – Dundo Maroje1553
(about 1553) – Gammer Gurton's Needle and Ralph Roister Doister, the first comedies written in English
António Ferreira – Bristo1562
Thomas Norton and Thomas Sackville – GorboducJack Juggler – anonymous, sometimes attributed to Nicholas Udall
1566
George Gascoigne – Supposes1567
John Pickering – Horestes1568
Ulpian Fulwell – Like Will to Like1573
Torquato Tasso – Aminta1582
Giovanni Battista Guarini – Il pastor fido1584
John LylyCampaspeSapho and PhaoGeorge Peele – The Arraignment of ParisRobert Wilson – The Three Ladies of London (published)
1588
George Peele – The Battle of Alcazar (performed)
1589The Rare Triumphs of Love and Fortune – anonymous (published)
1590
Christopher Marlowe – Tamburlaine (both parts published)
George Peele – Famous Chronicle of King Edward the FirstRobert Wilson – The Three Lords and Three Ladies of London (published)
1591
John Lyly – Endymion (published)The Troublesome Reign of King John – Anonymous (published)
1592
Thomas Kyd – The Spanish Tragedy (published)
William Shakespeare – Henry VI, Part 1, Part 2, Part 3Arden of Faversham – anonymous (previously attributed to Shakespeare)
1594
Samuel Daniel – CleopatraRobert GreeneFriar Bacon and Friar Bungay (published)Orlando Furioso (published)
Thomas Lodge & Robert Greene – A Looking Glass for London (published)
Lope de Vega – El maestro de danzar ("The Dancing Master")
George Peele – The Battle of Alcazar (published)
William Shakespeare – Romeo and JulietRobert Wilson – The Cobbler's Prophecy (published)
1595
Anonymous – Locrine (published)
1597
Thomas Nashe and Ben Jonson – The Isle of DogsWilliam Shakespeare – Richard II (published)
1598
Robert Greene – The Scottish Historie of James the Fourth (published)
Ben Jonson – Every Man in His Humour1599
Thomas Dekker – The Shoemaker's HolidayThomas Dekker, Henry Chettle, and William Haughton – Patient GrisselBen Jonson – Every Man Out of His HumourWilliam Shakespeare – Henry VNew poetry
1505
Pietro Bembo – Gli Asolani1514
Francesco Maria Molzo – Translation of the Aeneid into Italian, in consecutive unrhymed verse (forerunner of blank verse)
1516
Ludovico Ariosto – Orlando Furioso (first version, April)
1527
Pietro Aretino – Sonetti Lussuriosi ("Sonnets of lust" or "Aretino's Postures", to accompany an edition of Raimondi's erotic engravings, I Modi)
1528
Anna Bijns – Refrains1530
Pietro Bembo – RimeBy 1534
"A Gest of Robyn Hode"
1550
Sir Thomas Wyatt – Pentential Psalms1557
Giovanni Battista Giraldi – ErcoleTottel's Miscellany1562
Arthur Brooke – The Tragical History of Romeus and JulietTorquato Tasso – Rinaldo1563
Barnabe Googe – Eclogues, Epitaphs, and Sonnets1567
George Turberville – Epitaphs, Epigrams, Songs and Sonnets1572
Luís de Camões – Os Lusíadas1573
George Gascoigne – A Hundred Sundry Flowers1575
Nicholas Breton – A Small Handful of Fragrant FlowersGeorge Gascoigne – The Posies1576The Paradise of Dainty Devices, the most popular of the Elizabethan verse miscellanies
1577
Nicholas Breton – The Works of a Young Wit and A Flourish upon Fancy1579
Edmund Spenser – The Shepherd's Calendar1581
Torquato Tasso – Jerusalem DeliveredThomas Watson – Hekatompathia or Passionate Century of Love1586
Luis Barahona de Soto – Primera parte de la Angélica1590
Sir Philip Sidney – ArcadiaEdmund Spenser – The Faerie Queene, Books 1–3
1591
Sir Philip Sidney – Astrophel and Stella (published posthumously)
1592
Henry Constable – Diana1593
Michael Drayton – The Shepherd's GarlandGiles Fletcher, the Elder – Licia1594
Michael Drayton – Peirs Gaveston1595
Thomas Campion – Poemata1596
Sir John Davies – Orchestra, or a Poeme of DauncingMichael Drayton – The Civell Warres of Edward the Second and the BarronsEdmund Spenser – The Faerie Queene, Books 1–6
1597
Michael Drayton – Englands Heroicall Epistles1598
Lope de VegaLa ArcadiaLa Dragontea1599
Sir John DaviesHymnes of AstraeaNosce TeipsumGeorge Peele – The Love of King David and Faire BethsabeBirths
– Garcilaso de la Vega, Spanish soldier and poet (died 1536)
1503 – Thomas Wyatt
1504 – Nicholas Udall (died 1556)
1508 – Primož Trubar, author of the first printed books in Slovene (died 1586)
1510 – Martynas Mažvydas
1511 – Johannes Secundus (died 1535)
1513 – Daniele Barbaro (died 1570)
1515 – Roger Ascham
1515 – Johann Weyer, Dutch occultist (died 1588)
1517 – Henry Howard
c. 1520 – Christophe Plantin, printer (died 1589)
1524 – Luís de Camões (died 1580)
1547 – Miguel de Cervantes (died 1616)
1551 – William Camden
1554 – Philip Sidney
1555 – Lancelot Andrewes
1558 – Robert Greene
1558 – Thomas Kyd
1561 – Luís de Góngora y Argote, Spanish poet (died 1627)
1562 – Lope de Vega, Spanish poet and dramatist (died 1635)
1564 – Henry Chettle, English dramatist (died 1607)
1564 – Christopher Marlowe, English poet and dramatist (died 1593)
1564 – William Shakespeare, English poet and dramatist (died 1616)
1570 – Robert Aytoun
1572 – Ben Jonson, John Donne
1576 – John Marston
1577 – Robert Burton
1580 – Francisco de Quevedo (died 1645)
1581 – Pieter Corneliszoon Hooft
1583 – Philip Massinger
1587 – Joost van den Vondel
1594 – James Howell
Deaths
1502
Felix Fabri (Felix Faber), Swiss Dominican theologian and travel writer (born c. 1441)
Henry Medwall, English dramatist (born c. 1462)
1513 – Robert Fabyan, English chronicler and sheriff (year of birth unknown)
1515 – Aldus Manutius, Italian publisher (born 1449)
1527 – Ludovico Vicentino degli Arrighi, Italian calligrapher and type designer (born 1475)
1534 – Wynkyn de Worde, Lotharingian-born English printer
1536 – Johannes Secundus, Dutch poet writing in Latin (born 1511)
1542 – Thomas Wyatt, English poet (born 1503)
1546 – Meera, Indian poet and mystic (born 1498)
1552 – Alexander Barclay, English or Scottish poet (born c. 1476)
1553
Hanibal Lucić, Croatian poet and playwright (born c. 1485)
François Rabelais, French writer and polymath (year of birth unknown)
1555 – Polydore Vergil (Polydorus Vergilius), Italian scholar (born c. 1470)
1563
John Bale, English historian, controversialist and bishop (born 1495)
Martynas Mažvydas, Lithuanian religious writer (born 1510)
1566 – Marco Girolamo Vida, Italian poet (born 1485?)
30 December 1568 – Roger Ascham, English scholar and didact (born 1515)
1570 – Daniele Barbaro, Italian writer, translator and cardinal (born 1513)
1577 – George Gascoigne, English poet and soldier (born c. 1535)
1580 or 1582 – Wu Cheng'en, Chinese writer (born c. 1500)
1584 – Jan Kochanowski, Polish poet (born 1530)
1585 – Pierre de Ronsard, French poet (born 1524)
1586 – Primož Trubar, Slovene author (born 1508)
1588 – Johann Weyer, Dutch occultist (born 1515)
1 July 1589 – Christophe Plantin, Dutch humanist and printer (born c. 1520)
3 September 1592 – Robert Greene, English dramatist (born 1558)
30 May 1593 – Christopher Marlowe, English dramatist, poet and translator (born 1564)
15 August 1594 (burial) – Thomas Kyd, English dramatist (born 1558)
5 November 1595 – Luis Barahona de Soto, Spanish poet (born 1548)
In literature
The main action of Peter Shaffer's drama The Royal Hunt of the Sun'' (1964) is set in 1532–33.
See also
16th century in poetry
15th century in literature
17th century in literature
List of years in literature
Early Modern literature
Renaissance literature
References
Renaissance literature
Early Modern literature
History of literature |
https://ko.wikipedia.org/wiki/%ED%8A%80%EB%A5%B4%ED%82%A4%EC%98%88%EC%96%B4%EC%9D%98%20%EA%B3%84%EC%82%AC | 튀르키예어의 계사 | 이곳에서는 튀르키예어에서의 계사의 활용에 대하여 다룬다. 터키어에서 계사는 ek-eylem [ec ˈejlem] 또는 ek-fiil [ec fiˈil]('접미동사')라고 부른다. 터키어는 교착성이 세기 때문에,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계사는 접미사로 인식된다.
영계사
영계사(零繫辭, )는 헝가리어나 러시아어와 같이 3인칭에서 나타나는 규칙이다. 두 명사, 혹은 명사와 형용사가 병치되는 것으로써 어떠한 계사 없이 문장을 성립시킬 수 있다. 3인칭 복수의 경우, 복수접사 「-lar/-ler」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 Hakan yolcu.
| Hakan은 여행자이다.
|-
| Deniz mavi.
| 바다는 파랗다.
|-
| Kapılar ve camlar açık.
| 문과 창문이 열려 있다.
|-
| Asansör bozuk.
| 승강기가 고장나 있다.
|-
| İşçiler üzgün.
| 노동자들은 슬프다.
|}
「olmak」와 「imek」
터키어에서는 규칙/조동사(olmak)로서의 「to be」와 계사(imek)로서의 「to be」가 대조된다.
조동사 「imek」(어간은 「i-」)는 오직 서술어의 접미사로서만 존재를 보인다. 그러한 서술어로는 명사, 형용사, 또는 간혹 어간활용이 존재하며, 터키어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불규칙 동사로 여겨지기도 한다.
「i-」 형태의 탈락은 「ol-」로 대치된다. 부정사 olmak이 그 예시이다. 이를테면, 부정사 *imek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전 문헌에는 부정사 「ermek」이 나타난다. 어간 「er-」이 현재의 「i-」이 되었다.
「idir」와 이형태 「imek」은 진리양상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는 강조와 명확성이 요구될 때 사용된다. 「İdir」는 전접적이며, 접미사로서 쓰일 경우 「idir」와 같이 모음조화를 따른다. 따라서 「Ali asker idir」는 「Ali askerdir」가 된다. 다음 예시에서 강조된 낱말은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align=left | || align=right |
|-
| Abbas yolcudur.
| Abbas는 여행자이다.
|-
| Deniz mavidir.
| 바다는 파랗다.
|-
| Kapılar ve camlar açıktır.
| 문과 창문이 열려 있다.
|-
| Asansör bozuktur.
| 승강기는 고장나 있다b.
|-
| İşçiler üzgündür.
| 노동자들은 슬프다.
|}
부정계사
부정표현은 부정계사 「değil」을 통해 표현된다. 「değil」은 접미사로 쓰이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서 접미사가 따라붙을 수 있다.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align=left | || align=right |
|-
| Abbas yolcu değil.
| Abbas는 여행자가 아니다.
|-
| Kapılar ve camlar açık değildir.
| 문과 창문은 열려 있지 않다.
|-
| Öğretmen değilim.
| 나는 선생님이 아니다.
|-
| Mutlu değilmişiz.
| (아마)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
인칭계사
활용동사 「imek」가 함축된 인청접사가 접미사로 붙는 것으로 완성된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접미사는 인칭대명사와 문법적 인칭을 표현한다.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 Öğretmen-i-m.
| teacher--
| 나는 선생님이다.
|-
| Öğretmen-si-n.
| teacher--
| 너는 선생님이다.
|-
| Öğretmen.
| teacher
| 그는 선생님이다.
|-
| Öğretmen-i-z.
| teacher--
| 우리는 선생님이다.
|-
| Öğretmen-si-niz.
| teacher--
| 너희는 선생님이다. / 당신은 선생님입니다.
|-
| Öğretmen-ler.
| teacher-
| 그들은 선생님이다.
|}
과거형 계사
단정 과거시제는 「idi」로 표현된다. 「imek」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는 전접적이며, 「idir」와 같이 모음조화를 따른다.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 Öğretmen-di-m
| teacher--
| (명백히) 나는 선생님이었다.
|-
| Öğretmen-di-n
| teacher--
| (명백히) 너는 선생님이었다.
|-
| Öğretmen-di
| teacher-
| (명백히) 그는 선생님이었다.
|-
| Öğretmen-di-k
| teacher--
| (명백히) 우리는 선생님이었다.
|-
| Öğretmen-di-niz
| teacher--
| (명백히) 너희는 선생님이었다. / 당신은 선생님이었습니다.
|-
| Öğretmen-di-ler
| teacher--
| (명백히) 그들은 선생님이었다.
|}
추정 과거시제는 「imiş」로 표현된다. 이는 전접적이며, 「idir」와 같이 모음조화를 따른다.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 Öğretmen-miş-i-m
| teacher---
| (듣기로는) 나는 선생님이었다.
|-
| Öğretmen-miş-si-n
| teacher---
| (듣기로는) 너는 선생님이었다.
|-
| Öğretmen-miş
| teacher-
| (듣기로는) 그는 선생님이었다.
|-
| Öğretmen-miş-i-z
| teacher---
| (듣기로는) 우리는 선생님이었다.
|-
| Öğretmen-miş-si-niz
| teacher---
| (듣기로는) 너희는 선생님이었다. / (듣기로는) 당신은 선생님이었습니다.
|-
| Öğretmen-ler-miş
| teacher--
| (듣기로는) 그들은 선생님이었다.
|}
조건계사
조건적(가설적)인 분위기는 「ise」로 표현된다. 이는 전접적이며, 「idir」와 같이 모음조화를 따른다.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 Öğretmen-se-m
| teacher--
| 내가 선생님이라면
|-
| Öğretmen-se-n
| teacher--
| 너가 선생님이라면
|-
| Öğretmen-se
| teacher-
| 그가 선생님이라면
|-
| Öğretmen-se-k
| teacher--
| 우리가 선생님이라면
|-
| Öğretmen-se-niz
| teacher--
| 너희가 선생님이라면 \ 당신이 선생님이라면
|-
| Öğretmen-ler-se
| teacher--
| 그들이 선생님이라면
|}
각주
튀르키예어 문법 | https://en.wikipedia.org/wiki/Turkish%20copula | Turkish copula | The Turkish copula is one of the more distinct features of Turkish grammar. In Turkish, copulas are called ek-eylem () or ek-fiil () ('suffix-verb'). Turkish is a highly agglutinative language and copulas are rendered as suffixes, albeit with a few exceptions.
Zero copula
Zero copula is the rule for third person, as in Hungarian and Russian. That means two nouns, or a noun and an adjective can be juxtaposed to make a sentence without using any copula. Third-person plural might be indicated with the use of plural suffix -lar/-ler.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 Hakan yolcu.
| Hakan is a traveller.
|-
| Deniz mavi.
| The sea is blue.
|-
| Kapılar ve camlar açık.
| The doors and windows are open.
|-
| Asansör bozuk.
| The elevator is broken.
|-
| İşçiler üzgün.
| The workers are sad.
|}
To be (olmak versus imek)
Turkish "to be" as regular/auxiliary verb (olmak) and "to be" as copula (imek) contrasts.
The auxiliary verb imek (i- is the root) shows its existence only through suffixes to predicates that can be nouns, adjectives or arguably conjugated verb stems, arguably being the only irregular verb in Turkish.
The missing forms of i- are supplied by ol-: the infinitive olmak is an example, since there is no infinitive *imek. An infinitive ermek appeared in ancient texts; its stem er- became the current i-.
The word idir, a variation of imek indicates alethic modality, so is used for emphasis, or to prevent ambiguity. İdir is an enclitic word, and exhibits vowel harmony when used as a suffix. Therefore Ali asker idir turns into Ali askerdir. In examples, emphasised word is written bold: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align=left | || align=right |
|-
| Abbas yolcudur.
| Abbas is a traveller.
|-
| Deniz mavidir.
| The sea is blue.
|-
| Kapılar ve camlar açıktır.
| The doors and windows are open.
|-
| Asansör bozuktur.
| The lift is broken.
|-
| İşçiler üzgündür.
| The workers are sad.
|}
Negative copula
Negation is indicated by the negative copula değil. Değil is never used as a suffix, but it takes suffixes according to context.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align=left | || align=right |
|-
| Abbas yolcu değil.
| Abbas is not a traveller.
|-
| Kapılar ve camlar açık değildir.
| The doors and windows are not open.
|-
| Öğretmen değilim.
| I am not a/the teacher.
|-
| Mutlu değilmişiz
| (Apparently) we were not happy.
|}
Personal copulas
A complete sentence is formed by the addition of a suffix to a noun or adjective as an instance of nonverbal person agreement, with the conjugate verb "imek" only implied. These suffixes are, in origin, personal pronouns and indicate grammatical person.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 Öğretmen-i-m
| teacher--
| I am a/the teacher
|-
| Öğretmen-si-n
| teacher--
| You are a/the teacher
|-
| Öğretmen
| teacher
| He/she/it is a/the teacher
|-
| Öğretmen-i-z
| teacher--
| We are (the) teachers
|-
| Öğretmen-si-niz
| teacher--
| You [plural/formal] are (a/the) teacher(s)
|-
| Öğretmen-ler
| teacher-
| They are (the) teachers
|}
Past copulas
Alethic past tense is indicated with idi, another variation of imek. It is enclitic and exhibits vowel harmony like idir.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 Öğretmen-di-m
| teacher--
| I was a/the teacher (as I know)
|-
| Öğretmen-di-n
| teacher--
| You were a/the teacher (as I know)
|-
| Öğretmen-di
| teacher-
| He/she/it was a/the teacher (as I know)
|-
| Öğretmen-di-k
| teacher--
| We were (the) teachers (as I know)
|-
| Öğretmen-di-niz
| teacher--
| You [plural/formal] were (a/the) teacher(s) (as I know)
|-
| Öğretmen-di-ler
| teacher--
| They were (the) teachers (as I know)
|}
The inferential past tense is indicated with imiş. It is enclitic and exhibits vowel harmony like idir.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 Öğretmen-miş-i-m
| teacher---
| I was a/the teacher (as I've heard)
|-
| Öğretmen-miş-si-n
| teacher---
| You were a/the teacher (as I've heard)
|-
| Öğretmen-miş
| teacher-
| He/she/it was a/the teacher (as I've heard)
|-
| Öğretmen-miş-i-z
| teacher---
| We were (the) teachers (as I've heard)
|-
| Öğretmen-miş-si-niz
| teacher---
| You [plural/formal] were (a/the) teacher(s) (as I've heard)
|-
| Öğretmen-ler-miş
| teacher--
| They were (the) teachers (as I've heard)
|}
Conditional copulas
Conditional (hypothetical) mood is indicated with ise. It is enclitic and exhibits vowel harmony like idir.
{| border="0" cellspacing="6" cellpadding="3"
|-
| Öğretmen-se-m
| teacher--
| If I am a/the teacher
|-
| Öğretmen-se-n
| teacher--
| If you are a/the teacher
|-
| Öğretmen-se
| teacher-
| If he/she/it is a/the teacher
|-
| Öğretmen-se-k
| teacher--
| If we are (the) teachers
|-
| Öğretmen-se-niz
| teacher--
| If you [plural/formal] are (a/the) teacher(s)
|-
| Öğretmen-ler-se
| teacher--
| If they are (the) teachers
|}
References
Copula |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9E%9C%EC%8B%9C%EC%8A%A4%20%EC%95%A8%EB%9F%B0 | 프랜시스 앨런 | 프랜시스 앨리자벳 앨런(Frances Elizabeth "Fran" Allen, 1932년 8월 4일 ~ 2020년 8월 4일)은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이자 컴파일러 최적화 분야의 개척자이다. 최초의 여성 IBM 펠로우였으며 2006년에는 튜링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다. 그녀는 컴파일러의 주요 작업, 프로그램 최적화 및 병렬화가 포함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2002년부터 IBM의 명예 연구원(Fellow Emerita)로 있다.
교육 및 초기 생활
앨런은 뉴욕 페루의 한 농장에서 자랐다. 뉴욕 주립 교육대학 (현 올버니 대학교의 일부)에서 1954년 수학으로 학사학위를 받고 고향 페루에서 교사 생활을 보냈다. 2년 후 그녀는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력 및 연구
학자금 채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앨런은 1957년 프로그래머로 뉴욕 포킵시에 있는 IBM 리서치에 입사하여, 신규 직원들에게 포트란의 기초를 가르치는 업무를 맡았다. 채무 상황이 해결되면 교직으로 복귀할 예정이었으나, 그녀는 결국 45년 동안 IBM에 계속 재직하게 되었다. 1959년에 미국 국가안보국에서 코드 브레이킹 프로젝트에 배정되어, Alpha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업했다. 그녀는 Harvest와 Stretch 프로젝트에서 컴파일러 최적화 팀을 관리했다. 1960년대에 그녀는 ACS-1 프로젝트에, 1970년대에는 PL/I에 공헌하였다. 1970년부터 1971년까지 뉴욕 대학교에서 안식년을 보냈으며 몇 년 동안 겸임 교수로 활동했다. 그후 다음 안식년인 1977년, 스탠포드 대학으로 이동했다.
앨런은 1989년에 최초의 여성 IBM 펠로우가 되었다. 그녀는 2002년 IBM에서 퇴직했으나, 명예 펠로우(Fellow Emerita)로 회사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7년에 IBM Ph.D. 펠로우쉽상이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선정 출판물
그녀의 논문은는 다음과 같다.
Allen, Frances E. and John Cocke. “A catalogue of optimizing transformations,” in Randall Rustin (ed.), Design and Optimization of Compilers (Prentice-Hall, 1972), 1-30.
Allen, Frances E., “Interprocedural data flow analysis,” Proceedings of Information Processing 74, IFIP, Elsevier / North-Holland (1974), 398-402.
Allen, Frances E. and J. Cocke, “A program data flow analysis procedure,” Communications of the ACM, Vol. 19, Num. 3 (March 1976), 137-147.
Allen, Frances E. et al., “The Experimental Compiling System,” IBM Journal of Research and Development, Vol. 24, Num. 6, (November, 1980), 695-715.
Allen, Frances E., “The history of language processor technology at IBM,” IBM Journal of Research and Development, Vol. 25, Num. 5 (September 1981), 535-548.
수상 및 영예
알렌은 IEEE 및 ACM의 펠로우이다. 2000년 그녀는 "병렬 컴퓨터를 위한 프로그램 최적화 및 컴파일에 기여한" 공로로 컴퓨터 역사 박물관의 펠로우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1987년에 국립 공학 아카데미, 2001년에 미국 철학 협회,, 2010년에는 국립 과학 아카데미에 선정되었다. 그녀는 1994년에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원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1997년 IEEE 컴퓨터 협회 Charles Babbage Award를, 2004년 IEEE 컴퓨터 협회 Computer Pioneer Award를 수상했다. 1997년에 앨런은 WITI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그녀는 2002년 여성 컴퓨팅 협회로부터 Augusta Ada Lovelace Award를 수상했다. 2004년 Anita Borg Institute의 ABIE 기술 리더십 상을 수상했다.
2006에 수상한 튜링상을 통해 앨런은 고성능 컴퓨팅 분야에서 일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튜링상의 40여년의 역사 가운데 최초의 여성 수상자가 되었으며, 이는 컴퓨터 과학 부문에서 노벨상에 필적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녀는 수상 소감에서 "과학, 컴퓨팅 및 엔지니어링 분야의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갈 것을 기대했다.
2009년에 그녀는 맥길대학교로부터 "현대 최적화 컴파일러 및 자동 병렬 실행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컴파일러 기술 최적화 이론 및 실천에 대한 선구자적 기여" 로 명예 과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사생활
앨런은 1972년 NYU 교수 Jacob T. Schwartz 와 결혼했었다.
참고 문헌
외부 링크
Frances Allen: 2000 Fellow Awards Recipient via Computer History Museum
Fran Allen on Compilers and Parallel Computing Systems Notes from her 2008 Organick Memorial Lecture
뉴욕 주립 대학교 올버니 동문
뉴욕 대학교 교수
ACM 석학회원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석학회원
튜링상 수상자
여자 컴퓨터 과학자
미국의 여자 과학자
1932년 출생
2020년 사망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20세기 미국 사람
21세기 미국 사람
IEEE 석학회원
프로그래밍 언어 연구자 | https://en.wikipedia.org/wiki/Frances%20Allen | Frances Allen | Frances Elizabeth Allen (August 4, 1932August 4, 2020) was an American computer scientist and pioneer in the field of optimizing compilers. Allen was the first woman to become an IBM Fellow, and in 2006 became the first woman to win the Turing Award. Her achievements include seminal work in compilers, program optimization, and parallelization. She worked for IBM from 1957 to 2002 and subsequently was a Fellow Emerita.
Early life and education
Allen grew up on a farm in Peru, New York, near Lake Champlain, as the oldest of six children. Her father was a farmer, and her mother an elementary schoolteacher. Her early elementary education took place in a one-room school house a mile away from her home, and she later attended a local high school.
She graduated from The New York State College for Teachers (now part of the University at Albany, SUNY) with a Bachelor of Science degree in mathematics in 1954 and began teaching school in Peru, New York. After two years, she enrolled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and earned a Master of Science degree in mathematics in 1957.
Career and research
Deeply in debt with student loans, she joined IBM Research in Poughkeepsie, New York, as a programmer in 1957, where she taught incoming employees the basics of Fortran. She planned to return to teaching once her student loans had been paid, but ended up staying with IBM for her entire 45-year career. In 1959, Allen was assigned to the Harvest project for code breaking with the National Security Agency, and worked on a programming language called Alpha. She managed the compiler-optimization team for both Harvest and the Stretch project.
In 1962, she was transferred to Thomas J. Watson Research Center, where she contributed to the ACS-1 project, and later in the 1970s, to PL/I. During these years, she worked with fellow researcher John Cocke to write a series of seminal papers on optimizing compilers, helping to improve the efficiency of machine code translated from high-level languages.
From 1970 to 1971 she spent a sabbatical at New York University and acted as adjunct professor for a few years afterward. Another sabbatical brought her to Stanford University in 1977.
From 1980 to 1995, Allen led IBM's work in the developing parallel computing area, and helped to develop software for the IBM Blue Gene project. Allen became the first female IBM Fellow in 1989. She retired from IBM in 2002, but remained affiliated with the corporation as a Fellow Emerita. In 2007, the IBM Ph.D. Fellowship Award was created in her honor. After retiring, she remained active in programs that encourage women and girls to seek careers in science and computing.
Her A. M. Turing Award citation reads:
Awards and honors
Allen was a Fellow of the 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s Engineers (IEEE) and the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ACM). In 2000, she was made a Fellow of the Computer History Museum "for her contributions to program optimization and compiling for parallel computers". She was elected to the 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 in 1987, to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in 2001, and to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in 2010. She was nominated a Fellow of 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in 1994.
She received the IEEE Computer Society Charles Babbage Award in 1997 and the Computer Pioneer Award of the IEEE Computer Society in 2004. In 1997, Allen was inducted into the Witi Hall of Fame. She won the 2002 Augusta Ada Lovelace Award from the Association for Women in Computing. In 2004, Allen was the winner of the ABIE Award for Technical Leadership from the Anita Borg Institute.
Allen was recognized for her work in high-performance computing with the 2006 Turing Award. She became the first woman recipient in the forty-year history of the award, which is considered the equivalent of the Nobel Prize for computing and is given by the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In interviews following the award she hoped it would give more "opportunities for women in science, computing, and engineering".
In 2009 she was awarded an honorary doctor of science degree from McGill University for "pioneering contributions to the theory and practice of optimizing compiler techniques that laid the foundation for modern optimizing compilers and automatic parallel execution".
Publications
A list of her select publications includes:
Allen, Frances E., "Interprocedural data flow analysis", Proceedings of Information Processing 74, IFIP, Elsevier / North-Holland (1974), 398–402.
Allen, Frances E. and J. Cocke, "A program data flow analysis procedure", Communications of the ACM, Vol. 19, No. 3 (March 1976), 137–147.
Allen, Frances E. et al., "The Experimental Compiling System", IBM Journal of Research and Development, Vol. 24, No. 6, (November 1980), 695–715.
Allen, Frances E., "The history of language processor technology at IBM", IBM Journal of Research and Development, Vol. 25, No. 5 (September 1981), 535–548.
Personal life
In 1972, Allen married New York University computer science professor and collaborator Jacob T. Schwartz. They divorced in 1982.
Allen died on August 4, 2020, her 88th birthday, from complications with Alzheimer’s disease.
References
External links
Frances Allen: 2000 Fellow Awards Recipient via Computer History Museum
Fran Allen on Compilers and Parallel Computing Systems Notes from her 2008 Organick Memorial Lecture
1932 births
2020 deaths
American computer scientists
Programming language researchers
American women computer scientists
Turing Award laureates
Fellows of 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Fellows of the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Fellow Members of the IEEE
IBM Fellows
Members of the United States 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
IBM Research computer scientists
New York University faculty
People from Peru, New York
University at Albany, SUNY alumni
University of Michigan College of Literature, Science, and the Arts alumni
20th-century American scientists
21st-century American scientists
20th-century American women scientists
21st-century American women scientists
Scientists from New York (state)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D%8C%8C-%EB%A6%AC%EB%86%80%EB%A0%8C%EC%82%B0 | 알파-리놀렌산 | α-리놀렌산(, ALA)은 오메가-3 지방산이며, 필수 지방산이다. α-리놀렌산은 아마씨, 호두, 치아, 삼 및 많은 식물성 기름을 포함한 많은 씨앗과 기름에서 발견된다.
α-리놀렌산은 구조적인 면에서 올-시스-9,12,15-옥타데카트라이엔산이다. 생리학 문헌에서 α-리놀렌산은 지질 번호로 18:3 (n-3)으로 표시된다. α-리놀렌산은 18개의 탄소로 구성된 사슬에 3개의 시스 이중 결합이 있는 카복실산이다. 첫 번째 이중 결합은 n 말단으로 알려진 지방산 사슬의 메틸 말단으로부터 세 번째 탄소에 위치한다. 따라서, α-리놀렌산은 다불포화 오메가-3(n-3) 지방산이다. α-리놀렌산은 18:3 (n-6) 지방산(즉, 3개의 이중 결합을 가지고 있는 다불포화 오메가-6 지방산)인 γ-리놀렌산(GLA)의 이성질체이다.
어원
리놀렌산(linolenic acid)이라는 단어는 리놀레산(linoleic acid)에서 불규칙적으로 파생된 것으로, 단어 자체는 그리스어인 "linon"("flax", "아마"를 의미)에서 유래하였다. 리놀레산의 오메가-6 이중 결합이 포화되면 올레산을 생성하기 때문에 리놀레산(linoleic acid)의 "올레(oleic)"는 올레산(oleic acid)의 또는 올레산과 관련됨"을 의미한다.
식이 공급원
종자유는 α-리놀렌산의 가장 풍부한 공급원이며, 특히 삼씨기름, 치아씨유, 들기름, 아마인유, 카놀라유, 콩기름에 α-리놀렌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α-리놀렌산은 또한 완두 잎의 틸라코이드 막에서도 얻을 수 있다. 식물의 엽록체는 광합성 틸라코이드 막이 95% 이상을 차지하며, 리놀렌산이 풍부하여 유동성이 매우 높으며, 이는 고해상도 탄소-13 NMR 스펙트럼에서 급격한 공명으로 나타난다. 일부 연구에서는 α-리놀렌산이 가공 및 조리 중에 안정적으로 유지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연구들은 α-리놀렌산이 전이 금속 촉매로 건성유에 사용되는 기능 자체로 중합되기 때문에 베이킹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일부 α-리놀렌산은 베이킹 온도에서 산화될 수도 있다. 아래 표의 α-리놀렌산 백분율은 각 품목에서 추출한 오일을 나타낸다.
영양과 건강에서의 잠재적인 역할
α-리놀렌산의 가장 좋은 공급원은 씨앗이지만, 대부분의 씨앗과 씨앗 기름은 오메가-6 지방산인 리놀레산이 훨씬 더 풍부하다. 아마씨(적절한 영양소의 흡수를 위해선 갈아야 하기 때문)와 치아씨는 예외로 한다. 리놀레산은 필수 지방산이며 다른 오메가-6 지방산들처럼 세포막의 위치를 두고 오메가-3 지방산과 경쟁하며 사람의 건강에 매우 다른 영향을 미친다. 필수 지방산 상호작용의 복잡한 세트가 있다.
사람은 12-탈포화효소와 15-탈포화효소가 없어서 스테아르산으로부터 α-리놀렌산을 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물을 통해서 α-리놀렌산을 섭취해야 한다. 에이코사펜타엔산(EPA, 20:5 n-3) 및 도코사헥사엔산(DHA, 22:6 n-3)은 어류 및 조류의 기름으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으며, 이들 지방산은 많은 대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에이코사펜타엔산과 도코사헥사엔산은 또한 식이 α-리놀렌산으로부터 사람에 의해 합성될 수 있다. α-리놀렌산 → 스테아리돈산 → 에이코사테트라엔산 → 에이코사펜타엔산 → 도코사펜타엔산 → 9,12,15,18,21-테트라코사펜타엔산 → 6,9,12,15,18,21-테트라코사헥사엔산 → 도코사헥사엔산의 대사 과정을 거치지만, 단지 몇 %의 효율에 불과하다. 오메가-3 긴사슬 다불포화 지방산 합성의 효율이 α-리놀렌산 전환의 캐스케이드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α-리놀렌산으로부터 도코사헥사엔산의 합성은 에이코사펜타엔산의 합성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다. α-리놀렌산의 도코사헥사엔산으로의 전환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잘 일어난다.
여러 연구에서 α-리놀렌산과 전립선암 위험 증가 사이의 관계가 밝혀졌다. 이러한 위험은 α-리놀렌산의 공급원(예: 육류, 식물성 기름)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2006년에 실시된 대규모 연구에서는 α-리놀렌산의 총섭취량과 전립선암의 전반적인 위험 사이에는 연관성이 없었다. 2009년의 메타 분석은 초기 연구에서 출판 편향의 증거를 발견했으며, α-리놀렌산이 전립선암의 위험 증가에 관여한다면 위험 증가에 기여하는 부분은 매우 작다고 결론지었다.
안정성 및 수소화
α-리놀렌산은 상대적으로 산화되기 쉬우며 다른 많은 기름들보다 더 빨리 산패된다. α-리놀렌산의 산패는 제조업자가 콩기름과 같은 α-리놀렌산을 함유하고 있는 기름을 부분적으로 수소화하는 것을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콩은 미국에서 식용유의 가장 큰 공급 원료이며, 2007년 연구에 따르면 콩기름 생산량의 40%가 부분적으로 수소화되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수소화될 때, 불포화 지방산의 일부는 건강에 해로운 트랜스 지방산이 된다. 소비자들은 트랜스 지방을 함유하고 있는 제품을 점점 더 기피하고 있으며, 정부는 식품에 트랜스 지방이 포함되는 것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규제와 시장의 압력으로 인해 α-리놀렌산을 적게 함유한 콩의 개발이 촉진되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품종의 콩은 많은 응용 분야에서 수소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보다 안정적인 기름을 생산하므로 튀김 기름과 같은 트랜스 지방이 없는 제품을 생산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몇몇 컨소시엄이 α-리놀렌산을 적게 함유한 콩을 시장에 출시하고 있다. 듀퐁은 Δ6-불포화효소를 암호화 하고 있는 FAD2 유전자를 침묵시키는데 성공하여, α-리놀렌산 및 리놀레산을 매우 적게 함유하고 있는 콩기름을 생산하고 있다. 몬산토는 전통적인 육종 기술을 통해 만들었기 때문에 GMO 제품보다 논란이 적은 α-리놀렌산을 적게 함유한 콩의 브랜드인 "비스티브 골드(Vistive Gold)"를 시장에 선보였다.
심혈관계
어떤 과학적 리뷰에 따르면, α-리놀렌산의 소비를 많이 할수록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성이 약간 낮아지지만, 여러 연구들에서의 결과의 다양함은 확실한 결론을 도출하기 전에 추가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역사
α-리놀렌산은 1942년에 J. W. 매커천(J. W. McCutcheon)의 합성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롤렛(Rollett)에 의해 최초로 분리되었으며, 그린(Green)과 힐디치(Hilditch)의 1930년대의 조사에서 언급되었다. α-리놀렌산은 1995년에 처음으로 인공적으로 합성되었다. [(Z-Z)-노나-3, 6-다이엔-1-일]트라이페닐포스포늄 브로마이드의 포스포늄 염과 메틸 9-옥소노나노에이트의 비티히 반응 후 비누화하여 합성을 완료하였다.
같이 보기
γ-리놀렌산
필수 지방산
오메가-3 지방산
오메가-3 지방산의 목록
영양소
건성유
밀배아유
각주
지방산
알켄산
필수 지방산
필수 영양소
5α-환원 효소 억제제 | https://en.wikipedia.org/wiki/%CE%91-Linolenic%20acid | Α-Linolenic acid | α-Linolenic acid, also known as alpha-Linolenic acid (ALA) (from Greek alpha meaning "first" and linon meaning flax), is an n−3, or omega-3, essential fatty acid. ALA is found in many seeds and oils, including flaxseed, walnuts, chia, hemp, and many common vegetable oils.
In terms of its structure, it is named all-cis-9,12,15-octadecatrienoic acid. In physiological literature, it is listed by its lipid number, 18:3, and (n−3). It is a carboxylic acid with an 18-carbon chain and three cis double bonds. The first double bond is located at the third carbon from the methyl end of the fatty acid chain, known as the n end. Thus, α-linolenic acid is a polyunsaturated n−3 (omega-3) fatty acid. It is an isomer of gamma-linolenic acid (GLA), an 18:3 (n−6) fatty acid (i.e., a polyunsaturated omega-6 fatty acid with three double bonds).
Etymology
The word linolenic is an irregular derivation from linoleic, which itself is derived from the Greek word linon (flax). Oleic means "of or relating to oleic acid" because saturating linoleic acid's omega-6 double bond produces oleic acid.
Dietary sources
Seed oils are the richest sources of α-linolenic acid, notably those of hempseed, chia, perilla, flaxseed (linseed oil), rapeseed (canola), and soybeans. α-Linolenic acid is also obtained from the thylakoid membranes in the leaves of Pisum sativum (pea leaves). Plant chloroplasts consisting of more than 95 percent of photosynthetic thylakoid membranes are highly fluid due to the large abundance of ALA, evident as sharp resonances in high-resolution carbon-13 NMR spectra. Some studies state that ALA remains stable during processing and cooking. However, other studies state that ALA might not be suitable for baking as it will polymerize with itself, a feature exploited in paint with transition metal catalysts. Some ALA may also oxidize at baking temperatures. ALA percentages in the table below refer to the oils extracted from each item.
Potential role in nutrition and health
Although the best source of ALA is seeds, most seeds and seed oils are much richer in an n−6 fatty acid, linoleic acid. Exceptions include flaxseed (must be ground for proper nutrient absorption) and chia seeds. Linoleic acid is the other essential fatty acid, but it, and the other n−6 fatty acids, compete with n−3s for positions in cell membranes and have very different effects on human health. There is a complex set of essential fatty acid interactions.
α-Linolenic acid can be obtained by humans only through their diets, because the absence of the required 12- and 15-desaturase enzymes makes de novo synthesis from stearic acid impossible. Eicosapentaenoic acid (EPA; 20:5, n−3) and docosahexaenoic acid (DHA; 22:6, n−3) are readily available from fish and algae oil, and play a vital role in many metabolic processes. These also can be synthesized by humans from dietary α-linolenic acid: ALA → stearidonic acid → eicosatetraeonic acid → eicosapentaenoic acid → docosapentaenoic acid → 9,12,15,18,21-tetracosapentaenoic acid → 6,9,12,15,18,21-tetracosahexaenoic acid → docosahexaenoic acid, but with an efficiency of only a few percent.
Because the efficacy of n−3 long-chain polyunsaturated fatty acid (LC-PUFA) synthesis decreases down the cascade of α-linolenic acid conversion, DHA synthesis from α-linolenic acid is even more restricted than that of EPA. Conversion of ALA to DHA is higher in women than in men.
Stability and hydrogenation
Compared to many other oils, α-Linolenic acid is more susceptible to oxidation and will become rancid more quickly. Oxidative instability of α-linolenic acid is one reason why producers choose to partially hydrogenate oils containing α-linolenic acid, such as soybean oil. Soybeans are the largest source of edible oils in the U.S., and, as of a 2007 study, 40% of soy oil production was partially hydrogenated.
However, when partially hydrogenated, part of the unsaturated fatty acids become unhealthy trans fats. Consumers are increasingly avoiding products that contain trans fats, and governments have begun to ban trans fats in food products. These regulations and market pressures have spurred the development of low-α-linolenic acid soybeans. These new soybean varieties yield a more stable oil that doesn't require hydrogenation for many applications, thus providing trans fat-free products, such as frying oil.
Several consortia are bringing low-α-linolenic acid soy to market. DuPont's effort involves silencing the FAD2 gene that codes for Δ6-desaturase, giving a soy oil with very low levels of both α-linolenic acid and linoleic acid. Monsanto Company has introduced to the market Vistive, their brand of low α-linolenic acid soybeans, which is less controversial than GMO offerings, as it was created via conventional breeding techniques.
Health
ALA consumption is associated with a lower risk of cardiovascular disease and a reduced risk of fatal coronary heart disease. Dietary ALA intake can improve lipid profiles by decreasing triglycerides, total cholesterol, high-density lipoprotein, and low-density lipoprotein. A 2021 review found that ALA intake is associated with a reduced risk of mortality from all causes, cardiovascular disease, and coronary heart disease but a slightly higher risk of cancer mortality.
History
In 1887, linolenic acid was discovered and named by the Austrian chemist Karl Hazura of the Imperial Technical Institute at Vienna (although he did not separate its isomers). α-Linolenic acid was first isolated in pure form in 1909 by Ernst Erdmann and F. Bedford of the University of Halle an der Saale, Germany, and by Adolf Rollett of the Universität Berlin, Germany, working independently, as cited in J. W. McCutcheon's synthesis in 1942, and referred to in Green and Hilditch's 1930s survey. It was first artificially synthesized in 1995 from C6 homologating agents. A Wittig reaction of the phosphonium salt of [(Z-Z)-nona-3,6-dien-1-yl]triphenylphosphonium bromide with methyl 9-oxononanoate, followed by saponification, completed the synthesis.
See also
Canola Oil
Flax Seed Oil
Gamma-Linolenic acid
Drying oil
Essential fatty acid
List of n−3 fatty acids
Essential nutrient
Wheat germ oil
References
5α-Reductase inhibitors
Fatty acids
Essential fatty acids
Essential nutrients
Alkenoic acids
Semiochemicals
Insect pheromones |
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B%A6%AC%EC%B8%A0%20%EB%AA%A8%EC%8A%88%EC%BD%94%ED%94%84%EC%8A%A4%ED%82%A4 | 모리츠 모슈코프스키 | 모리츠 모슈코프스키(, ; 1854년 8월 23일1925년 3월 4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겸 교사이며,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그의 형 알렉산더 모슈코프스키는 베를린에서 유명한 풍자 작가로 활동하였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는 "모슈코프스키는 쇼팽 사후 피아노곡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모든 피아노 연주법을 망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록 오늘날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모슈코프스키는 19세기 말 당시에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생애
부유한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던 그의 부모는 자비에르치에 근처에 있는 필리카에서 1854년에 프로이센의 브레슬라우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로 이사해와 그를 낳았다.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경시하던 때에 모슈코프스키는 열렬한 유대교 신자로 남아있었다. 그는 아주 어린나이부터 재능을 보여주었고, 1865년에 가족이 드레스덴으로 이사해가면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거기서 그는 음악 학교를 다니며 피아노를 계속 배우다가, 1869년에 줄리우스 스턴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에듀아르드 프랑크에게서 피아노를, 프리드리히 킬에게서 작곡을 배웠으며, 테오도르 쿨락의 신음악학교(Neue Akademie der Tonkunst)에 입학하여 리하르트 뷔에르스트에게 작곡을, 하인리히 도른에게서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웠다. 여기서 그는 자브레 샤브렌카, 필립 샤브렌카 형제와 친교를 가지게 된다. 1871년에 그는 쿨락의 제안을 받아들여 학교의 교사가 되는데, 오케스트라에서 퍼스트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1873년에 모슈코프스키는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되는데, 곧 인근 도시들에 연주여행을 다니며 경험과 평판을 쌓기 시작한다. 이년 후 그는 아침 공연(matineé)에서 두대의 피아노를 위해 편곡된 자신의 피아노협주곡을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리스트가 초청한 관객들 앞에서 연주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1875년부터 그는 베를린 음악원에서 교사직을 이어가며 프랑크 담로슈, 호아킨 닌, 어니스트 셸링, 호아킨 투리나, 칼 라크문드, 버나드 폴락, 에른스트 요나스, 빌헬름 작스, 헬렌 폰 샤크, 알베르트 울리히, 요한나 벤첼 등의 제자를 둔다. 그 후 모슈코프스키는 유럽 전역에서 연주여행을 가지며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서 성공적으로 명성을 쌓아가고, 지휘자로서의 평판 역시 얻게 된다. 1884년 모슈코프스키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세실 샤미나드의 여동생인 헨리에타 샤미나드와 결혼하고, 마르셀이라는 이름의 아들과 실비아라는 이름의 딸을 둔다. 그러나 1880년대에 그는 팔 신경에 문제가 생겨 작곡, 교사, 지휘 등의 연주회 활동을 점진적으로 줄여나가게 된다. 1887년에는 런던에서 초청을 받는데, 여기서 그는 본인이 작곡한 관현악곡들을 소개하고, 이로써 로열 필하모닉 협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받는다. 삼년 후 그의 부인은 시인인 루드비히 풀다와 바람을 피고 이년 후 이혼하게 된다.
1897년 부와 명예를 가진 모슈코프스키는 파리로 이사하여 류 블랑셰(Rue Blanche)와 그의 딸과 함께 살아간다. 파리에서 그는 교사로서 음악가들을 교육하는데 힘썼다. 여기서 그는 블라도 페를뮈테르, 토머스 비첨(1904년에 앙드레 므싸제의 조언을 받아 모슈코프스키에게서 관현악법을 배움), 요제프 호프만(모슈코프스키는 그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선언함), 반다 란도프스카, 그리고 비공식적이지만 가비 카자드쉬를 가르쳤다. 여름에는 몽티니 줄 루앙 근처에 있는 소설가 앙리 뮈르제의 빌라를 빌려 생활했다. 1899년에는 베를린 아카데미가 그를 회원으로 선출하였다. 미국에서는 많은 피아노 제작사들이 그를 불러 많은 사례를 주겠다며 자신의 피아노를 사용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언제나 거절하였다.
1908년에 54세의 모슈코프스키는 건강상의 문제로 음악계를 떠나게 되고, 이로써 그의 유명세는 점점 사라지고 기울어져간다. 그는 더이상 제자들을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 "그들이 스크랴빈, 쇤베르크, 드뷔시, 사티 등 예술적으로 미친놈들처럼 곡을 쓰고싶어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모든 저작권을 팔아 전부 독일, 폴란드, 러시아 채권 및 유가증권에 투자했는데, 후에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종잇장과 같이 되면서 가난한 말년을 보냈다. 그의 제자 요제프 호프만과 버나드 폴락이 그를 돌봐주러 왔는데, 폴락은 모슈코프스키의 오페라인 《보압딜(Boabdil)》의 피아노 편곡을 라이프치히의 피터스 출판사에 보내 모은 1만 프랑을 로열티인것으로 위장해 호프만의 사비 1만 마르크와 자신의 사비 5천 마르크와 함께 전달하였다. 1924년 12월 21일, 지병에 막중한 부채까지 있던 모슈코프스키를 위해 그의 친구들과 팬들은 그의 원조를 위해 카네기 홀에서 15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두고 커다란 기념 연주회를 열었다. 오십 가브릴로비치, 퍼시 그레인저, 요제프 레빈, 엘리 나이, 빌헬름 박하우스, 해롤드 바우어가 연주자로 참여하였으며, 파데레프스키는 참여하지 못하게 된 사과를 전보로 보내와 대신 프랑크 담로슈가 지휘하였다. 이 콘서트는 13,275달러(2017년 5월 기준으로 187,793.67달러와 같은 가치)의 수익을 냈는데, 이 수익은 모슈코프스키의 빚을 갚기 위해 일부는 뉴욕 내셔널 시티 은행의 파리 지점으로 옮겨졌으며,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으로도 옮겨져 모슈코프스키가 매년 1,250달러의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모슈코프스키의 병세는 계속 그를 좀먹었고, 결국 이듬해 3월 4일 기금이 전달되기 전에 위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 기금은 대신 그의 부인과 아들에게 전달되었고, 장례식 비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작품
밝고 명료함과 환상적인 기교가 잘 균형잡혀 온 유럽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린 그의 연주실력과 함께 그의 작품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슈코프스키는 피아노 실력과 레파토리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찬사를 받았으나, 사람들이 더욱 칭찬한 것은 그의 작품들이었다. 그의 음악들은 빠르게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무대와 콘서트홀에서도 대중들의 인정을 받았다.
모슈코프스키는 이백개가 넘는 피아노 소품을 남겼는데, 그중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스페인 무곡 (Spanish Dance), Op. 12》로 가장 인정받았다. 이 작품은 후에 필립 샤브렌카에 의해 솔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곡으로 편곡되었다.
그의 초기작인 《세레나데 (Serenade), Op. 15》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어 Liebe, kleine Nachtigall 등 다양한 곡에서 등장한다. 오늘날 그는 열 다섯개의 《비르투오소의 에튀드 (Études de Virtuosité) Op. 72》로 가장 유명한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역시 이 곡을 연주한 바 있고, 일라나 베레드는 1970년에 처음으로 전곡을 녹음하였다. 《불똥 (Étincelles), Op. 36 No. 6》 등의 곡들은 요즘도 앵콜곡으로 자주 연주되고 있다.
모슈코프스키는 대편성의 곡들도 썼는데, 두개의 피아노 협주곡 (1874년에 작곡되어 2011년에 발견되었고 2013년에 발간된 나 단조의 피아노 협주곡 1번, Op. 3과 1898년에 작곡된 모슈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 Op. 59), 바이올린 협주곡 다장조, Op. 30, 세개의 관현악 모음곡 (Opp. 39, 47, 79), 그리고 교향시 《잔다르크, Op. 19》가 있다. 그의 오페라 《마지막 무어왕 보압딜 (Boabdil der letzte Maurenkönig), Op. 49》은 보압딜의 포위라는 역사적인 주제를 가지고 쓴 음악인데, 1892년 4월 21일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서 초연되어 이듬해 프라하와 뉴욕에서도 공연되었다. 많이 연주되는 레파토리로 오래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발레버전은 꽤 오랫동안 자주 연주되었다. 모슈코프스키는 1896년에 세개의 막을 가진 발레 《라우린 (Laurin)》을 작곡했다.
녹음
일라나 베레드는 1970년에 《비르투오소의 에튀드 (Études de Virtuosité) Op. 72》 전곡을 녹음했다. 세타 타녤(Seta Tanyel)은 모슈코프스키의 솔로 피아노를 위한 곡들을 연주한 음반 세 장을 하이페리온사에서 발매했다.
모슈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마이클 폰티에 의해 처음 녹음되었으며, 최근에는 피어스 레인과 요제프 무그(Joseph Moog)가 녹음을 남겼다. 《두대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사장조, Op. 71》는 이츠하크 펄먼과 핀커스 주커만에 의해 녹음되었다.
디스코그래피
Moritz Moszkowski and Paderewski: The Romantic Piano Concerto, Vol. 1. (Piers Lane)
Moritz Moszkowski: Piano Music Vol. 1, 2 & 3 (Seta Tanyel)
Moritz Moszkowski: Piano Concerto In E major & Suite for Orchestra "From Foreign Lands". Markus Pawlik, Antoni Wit
Moritz Moszkowski: Serenata. John McCormack, Fritz Kreisler
Moritz Moszkowski: Vingt Petites Études, Op. 91 & Brahms: Hungarian Dances. Esther Budiardjo
각주
출처
참고 문헌
Maurice Hinson, Moszkowski – 20 Short Studies Op. 91 (Alfred Masterwork Edition), Alfred Music Publishing (2002),
Maurice Hinton, Moszkowski – 15 virtuosic etudes: "Per aspera" Op. 72 (Masterwork Edition Series), Alfred Music Publishing (1992),
Gdal Saleski, Famous musicians of Jewish origin, pp. 123–124, Bloch Pub. Co. – New York (1949)
외부 링크
How I wrote the Spanish Dances on IMSLP
Hyperion Recordings: includes audio samples on Hyperion Records.com.uk
Moritz Moszkowski Suite for 2 Violins & Piano, Op.71-Sound-bites and discussion of work on Editions Silvertrust.com
Etude, Opus 24, No.1 by Moritz Moszkowski, played by Felix Fox on the Ampico Reproducing System, circa 1920, Roll #101003L
Guitarre: pour piano, Opus 45, No.2 at University of Toronto Robarts Library
1854년 출생
1925년 사망
19세기 클래식 작곡가
20세기 클래식 작곡가
베를린 예술대학교 동문
독일의 클래식 작곡가
독일의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유대계 독일인
브로츠와프 출신
폴란드의 클래식 작곡가
유대계 폴란드인
피아노 작곡가 | https://en.wikipedia.org/wiki/Moritz%20Moszkowski | Moritz Moszkowski | Moritz Moszkowski (23 August 18543 March 1925) was a German composer, pianist, and teacher of Polish-Jewish descent. His brother Alexander Moszkowski was a famous writer and satirist in Berlin.
Ignacy Paderewski said: "After Chopin, Moszkowski best understands how to write for the piano, and his writing embraces the whole gamut of piano technique." Although less known today, Moszkowski was well respected and popular during the late nineteenth century.
Life and career
He was born in Breslau, Kingdom of Prussia (now Wrocław, Poland), into a wealthy Polish-Jewish family whose parents had come to Breslau from Pilica, near Zawiercie, in 1854. He was an ardent Jew at a time when many Jews downplayed their Jewishness. He showed early talent from a very tender age, beginning his musical training at home until 1865, when his family moved to Dresden. There he continued his piano studies at the conservatory. He moved to Berlin in 1869 to continue his studies first at the Julius Stern Conservatory, where he studied piano with Eduard Franck and composition with Friedrich Kiel, and then at Theodor Kullak's Neue Akademie der Tonkunst, where he studied composition with Richard Wüerst and orchestration with Heinrich Dorn. There he became close friends with the Scharwenka brothers, Xaver and Philipp. In 1871 he accepted Kullak's offer to become a teacher in his academy; as he was also a more than competent violinist, he sometimes played first violin in the orchestra.
In 1873, Moszkowski made his first successful appearance as a pianist, and soon began touring the nearby cities in order to gain experience and establish his reputation. Two years later he was already playing his piano concerto on two pianos with Franz Liszt at a matinée before a selected audience invited by Liszt himself.
Retaining his post as a teacher at the Berlin conservatory from 1875, he had among his pupils Frank Damrosch, Joaquín Nin, Ernest Schelling, Joaquín Turina, Carl Lachmund, Bernhard Pollack, Ernst Jonas, Wilhelm Sachs, Helene von Schack, Albert Ulrich and Johanna Wenzel. Moszkowski then travelled successfully throughout Europe with the reputation of being an exceptional concert pianist and brilliant composer, having also gained some recognition as a conductor. In 1884, Moszkowski married the younger sister of pianist and composer Cécile Chaminade, Henriette Chaminade, with whom he had a son named Marcel and a daughter named Sylvia. By the mid-1880s, Moszkowski began suffering from a neurological problem in his arm and gradually diminished his recital activity in favor of composing, teaching and conducting.
In 1887, he was invited to London where he had the chance to introduce many of his orchestral pieces. There he was awarded honorary membership of the Royal Philharmonic Society. Three years later his wife left him for the poet Ludwig Fulda and a divorce was issued two years later.
In 1897, famous and wealthy, Moszkowski moved to Paris, where he lived on rue Nouvelle with his son and daughter. In 1906, he lost his 17-year-old daughter Sylvia while his son was engaged in the French army. In Paris, he was frequently sought after as a teacher, and was always generous in investing his time on aspiring musicians. Among his Parisian students were Vlado Perlemuter, Thomas Beecham (who took private lessons in orchestration with him on the advice of André Messager in 1904), Josef Hofmann (of whom he claimed once that there was nothing anyone could teach him), Wanda Landowska, and, informally, Gaby Casadesus. In the summer he rented a villa near Montigny-sur-Loing owned by the French novelist and poet Henri Murger.
In 1899, the Berlin Academy elected him a member. He was many times invited by piano manufacturers to appear in the United States to show off their pianos, but despite being offered massive fees, he always refused.
In 1908, by the age of 54, Moszkowski had already become a recluse as he began to suffer from poor health. His popularity began to fade and his career slowly went into decline. He stopped taking composition pupils because "they wanted to write like artistic madmen such as Scriabin, Schoenberg, Debussy, Satie ...".
His last years he spent in poverty for he had sold all his copyrights and invested the whole lot in German, Polish and Russian bonds and securities, which were rendered worthless on the outbreak of the war. Two of his former pupils, Josef Hofmann and Bernhard Pollack, came to his aid. Through the intervention of Pollack, who sent new piano arrangements of Moszkowski's opera Boabdil to Peters Publishing House in Leipzig, he collected an extra 10,000 francs camouflaged as royalties besides a gift of 10,000 marks and personal donations of 10,000 marks from Hofmann and 5,000 marks from himself. On 21 December 1921, when he was ill and heavily in debt, his friends and admirers arranged a grand testimonial concert on his behalf at Carnegie Hall, involving 15 grand pianos on stage. Ossip Gabrilowitsch, Percy Grainger, Josef Lhévinne, Elly Ney, Wilhelm Backhaus and Harold Bauer were among the performers, and Frank Damrosch conducted (Paderewski telegrammed his apologies). The concert netted US$13,275 (the equivalent of US$187,793.67 in May 2017), with one part transferred to the Paris branch of the National City Bank of New York in order to provide immediate relief from his financial problems, and an annuity purchased at the Metropolitan Life Insurance Company, whereby he would receive US$1,250 annually for the rest of his life.
However, Moszkowski's illness lingered and he died from stomach cancer on 3 March 1925, before the supply of funds could reach him. The money raised went instead to pay his funeral expenses and to his wife and son.
Works
Despite the balance and bright limpidity of his playing and his wonderful technique, which aroused the enthusiasm of admirers throughout Europe, his music has also been described as "devoid of the masculine and the feminine". He was a master in his pianistic repertoire, but it was in his own compositions that he was more admired. His music rapidly became a sensation, but he also had legitimate success in major works for the stage and the concert hall.
Moszkowski was quite prolific, composing over two hundred small-scale piano pieces, which brought him much popularity – notably his set of Spanish Dances Op. 12, for piano duet (later arranged for solo piano, and for orchestra by Phillip Scharwenka).
His early Serenade, Op. 15, was world-famous and appeared in many guises, including the song Liebe, kleine Nachtigall. Today he is probably best known for his fifteen Études de Virtuosité, Op. 72, which have been performed by virtuoso pianists such as Vladimir Horowitz and Marc-André Hamelin. Ilana Vered made the first complete recording in 1970. Many of his small but brilliant piano pieces, such as Étincelles (Sparks), are used as encore performances at the end of classical concerts.
He also wrote larger scale works including two piano concertos (one in B minor, Op. 3, in 1874, only rediscovered in 2011 and published in 2013, and the much better known Concerto in E major, Op. 59, from 1898), a Violin Concerto in C major, Op. 30, three orchestral suites (Opp. 39, 47, 79), and a symphonic poem Jeanne d'Arc, Op. 19. His opera Boabdil der letzte Maurenkönig, Op. 49, on the historical theme of the capture of Granada, premiered at the Berlin Court Opera on 21 April 1892, and appeared in Prague and New York City the following year. It did not stay in the repertoire, but its ballet music was very popular for a number of years. He wrote the three-act ballet Laurin, which premiered in Berlin in 1896.
Recordings
Ilana Vered made the first complete recording of Moszkowski's Études de Virtuosité, Op. 72, in 1970.
Seta Tanyel recorded three volumes of Moszkowski's solo piano works from 1993 to 1998, issued concurrently on Hyperion/Helios records and Collins Classics.
Ian Hobson released the first volume of a projected complete traversal of Moskowski's solo piano music, on Toccata Classics. Vol. 1 was released in 2021. Concurrently, Toccata Classics has released recordings of Moskowski's orchestral works and piano concerti.
The Piano Concerto in E major was first recorded by Michael Ponti, and more recently by Piers Lane and Joseph Moog. The Suite in G minor for 2 violins and piano, Op. 71, has been recorded by such duos as Itzhak Perlman and Pinchas Zukerman.
Selected discography
Moritz Moszkowski and Paderewski: The Romantic Piano Concerto, Vol. 1. (Piers Lane)
Moritz Moszkowski and Adolf Schulz-Evler: The Romantic Piano Concerto, Vol. 68 (Ludmil Angelov)
Moritz Moszkowski and Mieczysław Karłowicz: The Romantic Violin Concerto, Vol. 5 (Tasmin Little)
Moritz Moszkowski: Piano Music Vol. 1, 2 & 3 (Seta Tanyel)
Moritz Moszkowski: Piano Concerto In E major & Suite for Orchestra "From Foreign Lands". Markus Pawlik, Antoni Wit
Moritz Moszkowski: Serenata. John McCormack, Fritz Kreisler
Moritz Moszkowski: Vingt Petites Études, Op. 91 & Brahms: Hungarian Dances. Esther Budiardjo
See also
Paul de Schlözer
Notes
References
Bibliography
Maurice Hinson, Moszkowski – 20 Short Studies Op. 91 (Alfred Masterwork Edition), Alfred Music Publishing (2002),
Maurice Hinton, Moszkowski – 15 virtuosic etudes: "Per aspera" Op. 72 (Masterwork Edition Series), Alfred Music Publishing (1992),
Gdal Saleski, Famous musicians of Jewish origin, pp. 123–124, Bloch Pub. Co. – New York (1949)
External links
Moritz Moszkowski recordings at the Discography of American Historical Recordings.
How I wrote the Spanish Dances on IMSLP
Hyperion Recordings: includes audio samples on Hyperion Records.com.uk
Moritz Moszkowski Suite for 2 Violins & Piano, Op.71-Sound-bites and discussion of work on Editions Silvertrust.com
Etude, Opus 24, No.1 by Moritz Moszkowski, played by Felix Fox on the Ampico Reproducing System, circa 1920, Roll #101003L
Guitarre: pour piano, Opus 45, No.2 at University of Toronto Robarts Library
Scores by Moritz Moszkowski in digital library Polona
1854 births
1925 deaths
19th-century classical composers
19th-century classical pianists
19th-century German composers
19th-century German male musicians
20th-century classical composers
20th-century classical pianists
20th-century German composers
20th-century German male musicians
Berlin University of the Arts alumni
Composers for piano
Honorary Members of the Royal Philharmonic Society
German classical pianists
19th-century German Jews
German male classical composers
German pianists
German male pianists
German Romantic composers
Jewish classical composers
Jewish classical pianists
Male classical pianists
Musicians from the Province of Silesia
Musicians from Wrocław
Polish male classical composers
Polish Romantic composers |
https://ko.wikipedia.org/wiki/%EC%9A%A9%EC%99%95%EC%A0%84 | 용왕전 | 용왕전(竜王戦)은 요미우리 신문 주최의 쇼기 기전으로 전신인 십단전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1988년에 창설되었다. 도전기 형식의 타이틀전(용왕전, 명인전, 왕위전, 왕좌전, 기왕전, 예왕전, 왕장전, 기성전) 중 하나로 서열 1위 기전이다. 우승상금은 4400만엔으로 쇼기계 최고이다.
역사
요미우리 신문사는 본래 쇼기에서는 십단전, 바둑에서는 기성전을 주최하고 있었으나 계약금 규모는 기성전이 두 배 이상 컸다. 이에 1980년대초 쇼기연맹 이사회에서는 바둑과 쇼기는 역사, 실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대등하다는 견지에서 계약금을 대폭 증액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요미우리는 1984년, 이에 대해 "바둑에서 기성전은 최고 서열의 기전이지만 쇼기의 십단전은 명인전 다음에 위치하는 기전이기 때문에 계약금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으로, 바둑과 쇼기를 차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요미우리에서는 쇼기계 최고의 기전을 주최하는 것에 강한 관심이 있다"고 답변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새로운 기전 창설의 움직임이 생겨났고, 1985년에는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1987년 10월에 연맹과 요미우리의 신 기전 계약이 최종적으로 조인되어, 십단전이 1987년 제26기를 마지막으로 발전적 해소되고 1988년에 제1기 용왕전이 개최되었다.
기전명
신 기전명 후보로 "기신전(棋神戦)", "최고봉전(最高峰戦)", "거인전(巨人戦)", "거성전(巨星戦)", "기보전(棋宝戦)", "달인전(達人戦)", "용왕전", "쇼기도코로(将棋所)" 등이 제시되었다. 이 중 "神"이 들어가는 이름은 종교적 색채를 띠고, "巨"가 들어가는 이름은 야구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약칭인 교진(巨人)과 혼동을 줄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다른 후보들이 소거되고 최종적으로 용왕전으로 결정되었다. "용왕전"이라는 명칭은 "용왕은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황제의 심볼로, 고귀한 것을 상징한다", "쇼기 기물 중 용왕은 최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두 가지 근거에서 유래한다.
영세칭호
5연패 또는 통산 7회 타이틀획득을 하면 영세용왕 칭호를 얻는다. 칭호 획득은 원칙적으로 은퇴시에 이루어지며, 2019년 10월 현재 자격을 보유한 자는 와타나베 아키라, 하부 요시하루의 2 명이다.
대회 방식
개요
현역기사 전원, 여류기사 4명, 장려회원 1명, 아마추어 5명이 참가하며, 랭킹전 시스템을 통해 전 기사를 1조부터 6조까지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 각 조에서 성적 상위자 일정 수가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2패 탈락제로 각 조에서 4명이 다음 기 상위 조로 승급, 4명이 하위조로 강급된다. 결승 토너먼트는 래더 방식의 토너먼트이고, 도전자결정전 3번기의 승자가 용왕 타이틀 보유자와 도전 7번기를 치르게 된다.
랭킹전
전 경기 단판 토너먼트제이고 제한시간은 5시간(스톱워치방식)이다. 단, 4조 이하의 잔류결정전은 체스클록방식의 3시간으로 치러진다.
1조
원칙적으로 16명에 의한 토너먼트이고, 5명이 결승토너먼트에 진출한다.
우승상금은 460만엔, 준우승상금은 115만엔이다.
랭킹전 1회전 패자 8명이 5위 결정전, 2회전 패자 4이 4위 결정전, 준결승 패자 2명이 3위결정전을 통해 결승토너먼트 진출자를 선발한다.
5위결정전 1회전 패자 4명은 2조로 강등된다.
2조
원칙적으로 16명에 의한 토너먼트이고, 우승자와 준우승자는 결승토너먼트에 진출한다.
우승상금은 360만엔, 준우승상금은 93만엔이다.
우승/준우승자 및 준결승까지의 패퇴자들 간의 승급자 결정전을 통해 선발된 2명, 총 4명이 1조로 승급된다.
랭킹전 1회전 패자 8명끼리 치러지는 승급자결정전 1회전의 패배자는 3조로 강등된다.
3조
원칙적으로 16명에 의한 토너먼트이고, 우승자는 결승토너먼트에 진출한다.
우승상금은 260만엔, 준우승상금은 62만엔이다.
승급자 및 강등자를 결정하는 방식은 2조와 같다.
4조
원칙적으로 32명에 의한 토너먼트이고, 우승자는 결승토너먼트에 진출한다.
우승상금은 205만엔, 준우승상금은 52만엔이다.
우승/준우승자 및 준결승까지의 패퇴자들 간의 승급자 결정전을 통해 선발된 2명, 총 4명이 3조로 승급된다.
랭킹전 1회전 패자 16명끼리 치러지는 승급자결정전 1회전의 패자 8명은 잔류결정전을 치르게 되고, 잔류결정전의 패자 4명은 5조로 강등된다.
5조
원칙적으로 32명에 의한 토너먼트이고, 우승자는 결승토너먼트에 진출한다.
우승상금은 155만엔, 준우승상금은 41만엔이다.
승급자 및 강등자를 결정하는 방식은 4조와 같다.
6조
1~5조 소속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 전원 및 여류기사 4명, 장려회원 1명, 아마추어 5명에 의한 토너먼트이고, 우승자는 결승토너먼트에 진출한다.
우승상금은 93만엔, 준우승상금은 20만엔이다.
우승/준우승자 및 준결승까지의 패퇴자들 간의 승급자 결정전을 통해 선발된 2명, 총 4명이 5조로 승급된다.
결승토너먼트
상위 조 소속일수록, 랭킹전 성적이 좋을수록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하게 되는 토너먼트 방식이고, 결승(도전자결정전)은 3번기로 치러진다. 제한시간은 5시간이다.
도전 7번기
10월~12월에 걸쳐서 치러지고 제한시간 8시간, 이틀제 대국이다. 대국 개시 시각은 오전 9시, 중식휴게 시간은 오후12시30분~1시30분, 첫날 오후 6시에 봉수를 행하게 된다. 둘째날 오전 9시에 봉수 개봉 및 대국 재개, 중식휴게 시간은 첫날과 동일하며, 오후에는 종국시까지 휴게 없이 진행된다.
제1국은 과거에 수 차례 해외에서 치러진 바 있으며 제30기(2017년)부터는 도쿄 세룰리언 타워 노가쿠도(能楽堂)에서 부분공개대국으로 진행되고 있다.
역대 해외 대국
제3기 (1990년) 프랑크푸르트 (독일)
제4기 (1991년) 방콕 (태국)
제5기 (1992년) 런던 (영국)
제6기 (1993년) 싱가포르
제7기 (1994년) 파리 (프랑스)
제8기 (1995년) 북경 (중국)
제9기 (1996년) 로스앤젤레스 (미국)
제10기 (1997년) 골드코스트 (호주)
제11기 (1998년) 뉴욕 (미국)
제13기 (2000년) 상하이 (중국)
제15기 (2002년) 타이베이 (타이완)
제17기 (2004년) 서울 (대한민국)
제19기 (2006년) 샌프란시스코 (미국)
제21기 (2008년) 파리 (프랑스)
제27기 (2014년) 하와이 (미국)
역대 7번기 결과
※ 전적은 우승자 기준으로 O = 승, X = 패, 千 = 천일수, 持 = 지쇼기를 나타낸다.
협찬
도큐 그룹이 제30기(2017년)부터 7번기 제1국을 협찬하여 자사 소유의 세룰리언 타워 지하의 노가쿠도를 대국장으로 제공하고, 취위식(就位式) 장소를 제공하고 있으며, 제31기(2018년)부터는 용왕전 전체를 협찬하고 있다.
노무라 증권이 제31기(2018년)부터 특별협찬하고 있다.
(주)메이지의 "메이지 요구르트 R1"이 제31기(2018년)부터 협찬하고 있다.
각주
쇼기 기전 | https://en.wikipedia.org/wiki/Ry%C5%AB%C5%8D | Ryūō | Ryūō (also Ryu-O, Ryu-oh, Ryuuou; in Japanese 龍王, 竜王, lit. "Dragon King") is an annual Japanese professional shogi tournament and the title of its winner. The current Ryūō title holder is Sōta Fujii.
The Ryūō Tournament (Ryūō-sen 竜王戦) is sponsored by the Yomiuri Shimbun as well as the title awarded to its winner. It is one of the eight major professional shogi title matches and was first held in 1988. Among the eight titles in the professional shogi titleholder system, Ryūō and Meijin are the most prestigious ones. However, the Ryūō title gives out the highest monetary prizeeven more than the Meijin title. Cash prizes are ¥44,000,000 for the winner of championship and new Ryūō titleholder, and ¥16,500,000 for the loser. Additional compensation includes ¥14,500,000 for the previous titleholder and ¥7,000,000 for the challenger.
This title should not be confused with that of Amateur Ryūō which is awarded each year to the winner of the Amateur Ryūō Tournament.
Name
The basic meaning of ryūō is a "promoted rook". It can move as both a rook (hisha 飛車) and a silver (ginshō 銀将) during a turn and is one of the two most powerful pieces in shogi.
Tournament structure
The tournament consists of six class tournaments and one ladder-format challenger tournament. All currently active professional shogi players as well as qualifying women's professionals, apprentice professionals and amateurs are assigned to one of six classes. There are roughly 16 players each in Class 1 to Class 3, 32 players in Class 4 and Class 5, and then all remaining players are assigned to Class 6. The top players in these class tournaments (the top five players from Class 1, the top two from Class 2, and the top player from Class 3, Class 4, Class 5 and Class 6) are then seeded into the challenger tournament. The two players advancing to the final of the challenger tournament play a three-game match to determine the overall winner. In the title match, the first player to win four out of seven championship games becomes the new titleholder.
History
The Ryūō is a continuation of the earlier Tenth Dan (十段戦 jū-dan sen) title tournament. The Tenth Dan (1962–1987) itself is a continuation of the Ninth Dan (九段戦, 1956–1961) and the earlier 全日本選手権戦 (1948–1955) tournaments, which were also sponsored by the same Yomiuri Shimbun. The 全日本選手権 tournament became a title tournament in 1950, where the title was known as the Ninth Dan (九段) title. (At this time, the highest dan rank in shogi was 8-dan unlike the current ranking system.) Considering this lineage, the Ryūō is second historical title and the longest running title tournament apart from the Meijin title.
Lifetime Ryūō
"Lifetime Ryūō" (Eisei Ryūō) is the title awarded to a player who wins the championship five times in a row or seven times in total. Active players may qualify for this title, but it is only officially awarded upon their retirement or death.
Only two players have qualified for the Lifetime Ryūō title: Akira Watanabe and Yoshiharu Habu. Watanabe qualified for the title by winning his fifth championship in a row in 2008 (he has also won the title eleven times), whereas Habu qualified by winning his 7th title overall in 2017. Both players will be officially designated Lifetime Ryūō upon retirement or death.
Winners
The number in parentheses represents the cumulative times the player had won the title to date.
Records
Most titles overall: Akira Watanabe, 11
Most consecutive titles: Akira Watanabe, 9 in a row (2004–2012)
Most times recapturing title: Yoshiharu Habu, 4
Longest period between titles: Yoshiharu Habu, 15 years (2003–2017)
Oldest person to win title: Yoshiharu Habu, 47 years and 2 months
Youngest person to win title: Yoshiharu Habu, 19 years and 2 months.
Games played outside Japan
The first game of each of the following Ryūō title matches was played outside of Japan.
29th Ryūō challenger controversy
Hiroyuki Miura won the three-game challenger playoff match for the 29th Ryūō tournament by defeating Tadahisa Maruyama two games to one in early September 2016. Three days before Miura was to begin play against reigning Ryūō Akira Watanabe, however, the Japan Shogi Association (JSA) announced that Maruyama was replacing Miura as the challenger. The official reason given by the JSA had to do with Miura failing to follow proper procedure in requesting to be allowed to withdraw from the match, but there also had been suspicions raised about Miura's recent frequent leaving of his seat during official shogi games. Suspicions had been raised that he was doing so to consult shogi software or an app installed on a smartphone. Miura denied the accusations at a meeting of the JSA managing directors on October 11, and said he was withdrawing from the upcoming title match because he could not play shogi under such circumstances. The JSA said that Miura failed to submit an official notification of withdrawal by the required deadline on October 12 and as a result Miura was suspended from official game play until December 31, 2016.
The JSA subsequently established an independent investigative panel at the end of October 2016 to determine whether Miura had actually done anything wrong and to evaluate the appropriateness of its response to the allegations. The panel held a press conference on December 26, 2016 to announce its findings. The panel found there was insufficient evidence to support the accusations of cheating made against Miura and that the claim that he had excessively left his seat during official games was false. Regarding the action taken by the JSA, the panel stated that it believed that the JSA response was appropriate given the circumstances since it had no real option other than to act the way it did. In response to the panel's report, both the JSA and Miura held separate press conferences. JSA president Koji Tanigawa apologized to Miura and announced he was being allowed to return to active status in January. Tanigawa also stated that he and three other executives of the JSA would have their salaries cut by 30% for a period of three months. Miura criticized the JSA in his press conference and stated that "he wonders why the association banned him from participating in the Ryu-oh championship match since there was no evidence of wrongdoing" and that "he wants things to be settled as soon as possible and that he will try hard to get back to his winning ways".
On January 18, 2017, Tanigawa announced that he was resigning as JSA president to assume responsibility for the JSA's handing of the matter. The following day, the resignations of Tanigawa and Akira Shima, the director in charge of the JSA's handling of the Miura allegations, were accepted at an emergency meeting of the JSA's board of directors.
On February 27, 2017, another emergency meeting of JSA professionals was held in response to a petition signed by 28 current and former professionals asking that the JSA remove five board members involved in the handling of the controversy. The meeting took place via teleconferencing at JSA offices in Tokyo and Osaka, and a vote was held to determine whether the five should be asked to step down. Out of the 234 voting members of the JSA, 216 votes (including 64 by written proxy) were cast and a majority voted for the dismissal of three of the five: Teruichi Aono, Daisuke Nakagawa and Daisuke Katagami.
On May 24, 2017, Miura and new JSA president Yasumitsu Satō held a joint press conference to announce that a settlement had been reached to resolve any outstanding issues between the two sides. Both sides acknowledged their acceptance of the findings in the independent investigative panel's report and expressed their desire to move on from the matter. It was also announced that the JSA agreed to pay Miura an undisclosed financial settlement to compensate him for not only lost game fees, but also for the mental anguish and damage caused to his reputation. Miura also announced that he met with Ryūō title holder Watanabe prior to the press conference and that he accepted Watanabe's apology for his role in the controversy.
Players by Ryūō class
Below is a list of professional players grouped by their class for the 36th Ryūō league (20222023) including their dan ranking. In addition to the regular professional players, current women's professional title holders Kana Satomi, Tomoka Nishiyama and Sae Itō as well as one other women's professional Momoko Katō, one apprentice professional 3-dan, and four qualifying amateur players also were assigned to Class 6. Women's professional ranks are denoted by a "W" and apprentice professional ranks are denoted by an "A" before a player's dan ranking.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Ryūō Tournament: Japan Shogi Association
Ryūō Tournament website
Shogi tournaments |
https://ko.wikipedia.org/wiki/%EC%B9%BC%20%EB%8B%AC%EB%A1%9C | 칼 달로 | 칼 달로(, 1990년 10월 8일 ~ )는 잉글랜드의 클럽 리즈 유나이티드의 골키퍼 로 활동하는 축구 선수이다. 그는 웨일스 1958 월드컵 팀의 선수이었던 전 웨일스 국가대표선수 켄 리크 의 손자이다. 달로는 에스턴빌라와 노팅엄포레스트의 유스 아카데미 출신으로 커리어 초반에는 뉴포트카운티와 월솔에서 임대 생활을 하였다.
클럽 경력
노팅엄 포레스트
16세 때 아스톤빌라와의 계약이 해지된 몇 주 후, 아스톤빌라의 골키퍼 코치인 에릭 스틸은 달로에게 노팅엄 포레스트를 추천하였고, 그는 노팅엄 포레스트의 유스 아카데미에 가입하였다. 리저브팀에서의 인상적인 경기들후 달로는 2010-11 시즌 달로는 벤치에서 리 캠프의 서브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의 데뷔는 2010-11 시즌의 마지막 날 크리스탈팰리스왕의 경기였는데 노팅엄포레스트는 3-0승리를 차지해 성공적인 데뷔를 이루었다.
2012년 3월, 달로는 내셔널리그의 뉴포트 카운티에 1달 임대로 합류하였다. 그는 게이츠헤드와의 홈경기에서 1-0으로 이기며 클럽에서의 데뷔를 하였다.
2012년 9월 21일, 달로는 월솔에 한달간의 임대를 떠났다. 임대기간에 달로는 자신의 클럽인 노팅엄포레스트와 2015년까지의 3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10월 22일 월솔에서의 임대생활은 2012년 12월 22일까지 연장되었지만 노팅엄포레스트는 4 일 후 골키퍼인 디미타르 이브티모브가 부상을 당하자 임대복귀하였다.
그리고 달로는 2013년 1월 1일 1달 임대로 다시 월솔에 합류하였다.
달로는 10월 1일에 다시 임대 복귀되었다 이후 리 캠프는 그가 자유계약으로 팀을 떠날수도 있다고 말했다. 2013년 1월 12일, 피터버러와의 2-1 승리로 풀시진을 소화하였고 2012-13 시즌에는 20 번의 리그 출장을 하였다. 달로는 2013년 8월 23일에 새로운 4년 계약을 체결하였고 여음 이적시장 도루스 드 베리의 이적에도 빌리 데이비스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였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달로는 2014년 8월 9일 프리미어 리그의 클럽인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비공개로 장기 계약을 체결하며 이적하였다. 이 계약으로, 뉴캐슬의 자말 러셀스를 2014–15 시즌 노팅엄을로 임대를 보냈다.
달로는 2015년 8월 25일, 뉴캐슬이 4-1로 노샘프턴 타운과의 EFL 컵 승리로 데뷔했다. 달로는 2015년 12월 28일 웨스트 브로 미치 앨 비언을 상대로 프리미어 리그 데뷔를 하였고, 주전 골키퍼 롭 엘리엇은 부상이였다. 달로가 대런 플레처의 헤더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뉴캐슬은 1-0으로 지게 되었다. 국가대표 경기를 치르는 동안 시즌 아웃을 당한 앨리엇을 대신해 달로는 강등권 탈출을 위해 뉴캐슬의 마지막 8경기 출장을 맡았다. 2016년 4월 30일, 달로는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페널티 킥을 막아내며 1-0 승리를 만들어냈다. 뉴캐슬은 5월 11일 강등권인 선덜랜드가 에버튼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강등을 당하고 말았다.
뉴캐슬은 챔피언십에서의 2016-17시즌 우승 목표로 여러 선수와 계약하였고, 그로 인해 달로는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달로는 챌트넘 타운과 울버햄튼과의 뉴캐슬 첫 리그 컵 두 경기에서 모두 클린시트를 기록하였다. 9월 28일, 달로는 시즌 첫 출장을 하며 받았으며 노리치와의 경기에서 4-3 승리를 거두었다.
달로는 베니테즈 체제 아래 클럽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해 34경기 츨장 13번의 클린시트를 기록하며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도왔다 달로는 2017-18 프리미어 리그에서 롭앨리엇과 경쟁후 12경기를 출장하였으나 마틴 두브라브카가 2018년 1월 임대계약을 맺은 후 입지를 잃었다.
달로는 2018-19시즌 두브라브카의 서브로 시작하였고 2018년 8월 29일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3-1승리로 첫 경기를 치렀다.
국제 경력
달로는 그의 할아버지인 캔리그가 예인스빌에서 태어나 웨일스 국가대표로 활약했지 때문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국가대표로 뛸 자격이 있다. 웨일스 축구 협회는 달로를 2013년 2월 6일 오스트리아와의 친선경기를 위해 발탁하였으나 거절 하였다.
웨일스 국가대표팀의 감독인 라이언 긱스는 달로를 웨일스 스쿼드에 포함시키기위해 2018년 3월 접근하였으나 뉴캐슬에 집중하기 위해 거절했다고 하였다.
우승 기록
뉴캐슬 유나이티드
EFL 챔피언십 : 2016–17
참고 문헌
외부 링크
노팅엄 포레스트 프로필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
웨일스계 잉글랜드인
잉글리시 풋볼 리그의 축구 선수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
월솔 FC의 축구 선수
뉴포트 카운티 AFC의 축구 선수
노팅엄 포리스트 FC의 축구 선수
남자 축구 골키퍼
잉글랜드의 남자 축구 선수
살아있는 사람
1990년 출생
헐 시티 AFC의 축구 선수
내셔널리그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 | https://en.wikipedia.org/wiki/Karl%20Darlow | Karl Darlow | Karl Darlow (born 8 October 1990) is an English professional footballer who plays as a goalkeeper for EFL Championship club Leeds United. Darlow is a product of the Aston Villa and Nottingham Forest academies and has spent most of his career at Newcastle United, whilst also having time on loan at both Newport County and Walsall earlier in his career. He is the grandson of former Wales international forward Ken Leek who was included in the Welsh 1958 World Cup squad.
Club career
Nottingham Forest
Weeks after being released by Aston Villa at the age of 16, Villa goalkeeping coach Eric Steele recommended Darlow to Forest and he was signed up in their academy. After impressive displays in the reserve team, Darlow was awarded a space on the bench where he was present for the majority of the 2010–11 season. His debut was against Crystal Palace, on the last day of the 2010–11 season, as a substitute for Lee Camp. The Reds won the game 3–0, a result that secured them a play-off spot.
Loan to Newport County
In March 2012, Darlow joined Newport County in the Conference National league on loan for a month. He made his first appearance for the club in a 1–0 home win against Gateshead.
Loan to Walsall
On 21 September 2012, Darlow joined Walsall on loan for one month. While there, he signed a new three-year contract at parent club Forest, keeping him there until 2015. On 22 October, his loan with Walsall was extended until 22 December 2012, but Forest recalled him four days later to cover for injured Forest goalkeeper Dimitar Evtimov.
Darlow rejoined Walsall on 1 January 2013 on a one-month loan deal, with the prospect of extending the loan for the remainder of the season, However, he was recalled to Forest yet again on 10 January after first choice Lee Camp had been told he could leave the club on a free transfer. On 12 January 2013 he made his full Forest league debut in their 2–1 win over Peterborough, and ended the 2012–13 season with 20 league appearances for the club. Darlow signed a new four-year contract on 23 August 2013 and established himself as manager Billy Davies's first-choice goalkeeper despite the summer arrival of Dorus de Vries.
Newcastle United
On 9 August 2014, Darlow signed a long-term contract with Premier League club Newcastle United for an undisclosed fee. As part of the deal, he and teammate Jamaal Lascelles were loaned back to Nottingham Forest for the 2014–15 season.
He made his debut for Newcastle on 25 August 2015, in a League Cup fixture against Northampton Town which Newcastle won 4–1. He made his Premier League debut on 28 December 2015, against West Bromwich Albion as a late inclusion, after regular keeper Rob Elliot was forced to pull out due to illness; the Magpies lost the game 1–0 after Darlow let Darren Fletcher's header slip through his hands. Following a season-ending injury to Elliot while away on international duty, Darlow was forced to take over in net for Newcastle's final eight matches as they attempted to avoid relegation. On 30 April 2016, Darlow saved a penalty from Yohan Cabaye, in a 1–0 Premier League win against Crystal Palace. although Newcastle were relegated on 11 May following a victory for rivals Sunderland over Everton.
Darlow entered the 2016–17 season in competition with summer signing Matz Sels to start the Championship season in goal, which Darlow lost. Darlow played in Newcastle's first two League Cup matches against Cheltenham Town and Wolverhampton, keeping clean sheets in both. On 28 September, Darlow received his first Championship start of the season, replacing Sels against Norwich City for a 4–3 win. He became the club's first-choice goalkeeper under Rafael Benítez ahead of Elliot, Sels and Freddie Woodman. Darlow made 34 appearances, keeping 13 clean sheets, in 2016–17 as Newcastle were promoted to the Premier League as winners of the Championship. Darlow would compete with Rob Elliot during 2017–18 season as first choice goalkeeper in the Premier League, with Darlow making 12 appearances, however both lost their place in the team when Martin Dúbravka was signed on loan in January 2018.
After starting the 2018–19 season as second choice behind Dúbravka, Darlow made his first and only appearance of that season on 29 August 2018, when he started in the EFL Cup 3–1 defeat against his former club Nottingham Forest. On 11 September 2020, he signed a five-year extension to his contract that would keep him at the club until 2025.
Loan to Hull City
On 31 January 2023, Darlow joined Hull City on loan for the remainder of the 2022–23 season. The terms on his loan meant that Darlow could not be recalled despite Newcastle facing a goalkeeping shortage ahead of the 2023 EFL Cup final on 26 February. He made his debut for Hull City on 25 February 2023, in a 1–0 loss away to Bristol City.
Leeds United
On 29 July 2023, Darlow joined Leeds United on a three-year deal for an undisclosed fee. He made his first appearance for
The Whites on 9 August 2023 in their 2–1 League Cup victory over Shrewsbury Town.
International career
In addition to England, Darlow is eligible to represent Wales as his grandfather Ken Leek (a Wales international forward) was born in Ynysybwl. The Football Association of Wales confirmed Darlow had declined an invitation to be included in the Wales national football team friendly match against Austria on 6 February 2013.
New Wales Manager Ryan Giggs approached Darlow in March 2018 to be included in the Wales squad. Darlow advised he was currently concentrating on winning back his place in the Newcastle United starting line-up.
Speculation developed that Darlow might have ended his playing in the Wales squad in November 2020 after revealing his ambition of playing for England, saying: "It’s the one thing that as a child you want to do" and "I would love nothing more".
Career statistics
Honours
Newcastle United
EFL Championship: 2016–17
References
External links
Nottingham Forest profile
1990 births
Living people
Footballers from Northampton
English men's footballers
Men's association football goalkeepers
Nottingham Forest F.C. players
Newport County A.F.C. players
Walsall F.C. players
Newcastle United F.C. players
Hull City A.F.C. players
Leeds United F.C. players
English Football League players
National League (English football) players
English people of Welsh descent
Premier League players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8F%84%EB%8B%88%20%EA%B3%A0%EC%9D%B4%EC%BD%94%EC%97%90%EC%B2%B4%EC%95%84%20%EC%98%AC%EB%9D%BC%EC%8A%A4%EC%BD%94%EC%95%84%EA%B0%80 |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올라스코아가 |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올라스코아가(, 1956년 5월 23일, 바스크 지방 알론소테기 ~)는 줄여서 고이코()로 알려진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현역 시절, "빌바오의 도살자"로 수식되었던 거친 중앙 수비수였던 고이코에체아는 주로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활약하였고, 또한 스페인 국가대표팀과 에우스카디 11인 대표로 활동했었다. 그의 소속 구단 지지자들은 알론소테기의 거인(El Gigante de Alonsotegui)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스페인을 대표로 40경기 출전한 고이코에체아는 자국을 대표로 1번의 FIFA 월드컵과 1번의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였다.
클럽 경력
고이코에체아는 비스카야 주 알론소테기 출신으로, 인근의 아르부요에서 축구를 시작한 뒤 1973년에 아틀레틱 빌바오로 이적하게 되었고, 이듬해 2군 경기에 출전하였고, 이후에 1군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데뷔 첫 해에 27번의 라 리가 경기에 출전해 4골을 기록했지만, 이어지는 3년 동안 도합하여 24경기에 나서는 데에 그쳤다.
1980년대, 다니, 호세 라몬 가예고, 호세 누녜스, 마누엘 사라비아, 그리고 안도니 수비사레타와 더불어 고이코는 하비에르 클레멘테 감독이 이끄는 빌바오의 중흥기를 장식한 일원이었다. 1983-84 시즌, 바스크 연고 구단은 리그 정상을 차지하였고, 같은 해 코파 델 레이도 석권해 2관왕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마라도나에 범한 반칙
1983년 9월 24일, 고이코에체아는 디에고 마라도나에 악명 높은 반칙을 범했는데, 이 사건은 "스페인 축구 역사상 범한 최악의 반칙"으로 수식되며, 캄 노우에서 벌어진 이 리그 경기에서, 고이코에체아는 아르헨티나인을 뒤에서 걸어 넘어뜨렸고, 그 결과 발목이 골절되었다. 마라도나는 골절 당시 들은 소리를 나무 부러지는 소리에 비교했고, 이후 잉글랜드 기자 에드워드 오언은 고이코에체아를 묘사할 호칭으로 "빌바오의 도살자"를 붙였고, 그에게 붙은 꼬리표는 현역 시절에 계속 따라다녔다. 마라도나와 같은 국적이며, 당시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았던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는 스페인 선수를 "'반축구인'의 족속"이라고 비난하였고, 영구 출장 정지를 요청했다. 고이코에체아는 이 사건으로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으로부터 10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고, 이후의 보도에 따르면 "(마라도나의) 발목 힘줄을 파괴하는데 쓰인... 축구화"는 자택의 유리 상자 안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발생 2년 전, 고이코에체아는 또다른 바르셀로나의 미드필더로 카탈루냐 연고 구단에서 활동하던 베언트 슈스터에 중상을 입혔고, 독일인은 복귀 후로도 당시 당한 오른쪽 무릎 부상에서 완전히 재활하지 못했다. 고이코에체아와 마라도나가 1984년 5월에 1-0으로 빌바오가 승리한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재회했을 때, 양 선수단 간의 패싸움이 일어났는데, 고이코에체아는 이번에 마라도나의 가슴을 걷어찼다. 이후, 그는 처음에 18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지만, 이후 징계는 7경기 출장 정지로 경감되었다.
말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3년을 보내면서 고이코에체아는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고, 아틀레틱 소속으로 369번의 공식 경기에 나서서 44골을 넣은 그는 거의 34세가 되어서 은퇴하였다.
국가대표팀 경력
고이코에체아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경기에 39번 출전하였는데, 1983년 2월 16일에 네덜란드를 상대로 국가대표팀 신고식을 치렀다. 그는 스페인을 대표로 UEFA 유로 1984와 1986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었다. 후자의 대회에서는 덴마크와의 16강전 경기에서 국가대표팀으로 활약하면서 넣은 4골 중 1골을 기록해 4골을 넣은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와 5-1 승리를 합작하였다.
고이코에체아는 1978년과 1990년 사이 바스크 대표팀 경기에 4번 출전하기도 했다.
감독 경력
고이코에체아는 은퇴 2년 후 감독일을 시작하였는데, 1996년부터 구단 감독을 맡기 시작하여 감독직을 살라망카 2번, 콤포스텔라 1번, 누만시아 2번, 라싱 산탄데르 1번, 그리고 라요 바예카노 1번 맡았다. 1996-97 시즌, 살라망카를 준우승으로 1부 리그에 올려놓았다. 앞서 그는 미국에서 열린 1994년 FIFA 월드컵에서 빌바오 시절 그를 지도했던 클레멘테 감독을 보좌하여 스페인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를 맡기도 했었다.
2007년 6월, 고이코에체아는 알리칸테 연고의 2부 리그 구단 에르쿨레스에 입단하였지만, 구단의 내부 조직에 "석연치 않다"고 짚은 것으로 인해 구단으로부터 자격 정지되어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2013년 2월, 그는 적도 기니 감독으로 내정되었으나, 2015년 1월,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개막 3주를 앞두고 포르투갈 하부 리그 구단에 패하는 것을 포함해 친선경기에서 성적이 부진하여 경질되었다.
플레이스타일
고이코에체아는 거친 경기 방식으로 악명이 높은데, 마라도나와 슈스터에 범한 악랄한 반칙(마라도나에 범한 반칙 부문 확인)만으로 "빌바오의 도살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 아니었다. 2007년, 잉글랜드 정간지 타임스는 그를 "역대 가장 거친 수비수"로 선정했다.
경력 통계
클럽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수상
클럽
아틀레틱 빌바오
라 리가: 1982–83, 1983–84
코파 델 레이: 1983–84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4
국가대표팀
스페인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1984
감독
스페인 U-21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1996
3위: 1994
각주
외부 링크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 아틀레틱 빌바오
195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알론소테기 출신
비스카야 주 출신 스포츠인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바스크주 출신 축구 선수
남자 축구 수비수
라리가의 축구 선수
테르세라 디비시온의 축구 선수
빌바오 아틀레틱의 축구 선수
아틀레틱 빌바오의 축구 선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남자 U-21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아마추어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UEFA 유로 1984 참가 선수
198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스페인의 비치 사커 선수
바스크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의 축구 감독
라리가의 축구 감독
세군다 디비시온의 축구 감독
세군다 디비시온 B의 축구 감독
UD 살라망카의 축구 감독
SD 콤포스텔라의 축구 감독
CD 누만시아의 축구 감독
라싱 산탄데르의 축구 감독
라요 바예카노의 축구 감독
에르쿨레스 CF의 축구 감독
AD 세우타의 축구 감독
스페인 U-21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적도 기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스페인의 해외 진출 축구 감독
적도 기니의 외국인 축구 감독
적도 기니에 거주한 스페인인 | https://en.wikipedia.org/wiki/Andoni%20Goikoetxea | Andoni Goikoetxea | Andoni Goikoetxea Olaskoaga (born 23 August 1956), Goiko for short, is a Spanish former football centre-back and manager.
He was known for his aggressive play and was nicknamed "The Butcher of Bilbao". He mainly played for Athletic Bilbao; among the club's fans, he was also known as El Gigante de Alonsotegui (The Giant of Alonsotegui).
Goikoetxea was a Spanish international in the 1980s. He won 39 caps, and represented the country in the 1986 World Cup and Euro 1984.
Playing career
Club
Born in Alonsotegi, Biscay, Goikoetxea began playing football with local Arbuyo before joining Athletic Bilbao in 1973 where, after starting out at the reserve side, he soon established himself in the senior team squad. He scored four La Liga goals in 27 games in his debut season, but played a lesser role in the following three years with a total of only 24 appearances.
During the 1980s, along with Dani, José Ramón Gallego, José Núñez, Manuel Sarabia and Andoni Zubizarreta, Goiko was a prominent member of the successful Bilbao side coached by Javier Clemente. In 1984 the Basque club renewed its league title, also achieving the double (league and Copa del Rey) in that year.
Maradona foul
On 24 September 1983, Goikoetxea achieved notoriety for a foul on Diego Maradona described as "one of the most brutal fouls ever delivered in the history of Spanish football". In a league match at the Camp Nou, he tackled the Argentine from behind and broke his ankle. Maradona compared the sound he heard to that of wood breaking and, in the aftermath, English journalist Edward Owen coined the phrase "Butcher of Bilbao" to describe Goikoetxea, a nickname which stayed with him for the rest of his career. Maradona's compatriot César Luis Menotti, the coach of FC Barcelona, accused the Spaniard of "belonging to a 'race of anti-footballers'" and called for a lifelong ban; he was served a ten-match ban by the Royal Spanish Football Federation. It was later reported he kept "the boot he had used to destroy...(Maradona's) ankle ligaments" at home in a glass case.
Two seasons earlier, Goikoetxea had severely injured Barcelona midfielder Bernd Schuster, leaving him with a serious right knee injury from which the German never fully recovered. When the two teams met in the 1984 Copa del Rey Final in May, the match ended 1–0 for Athletic. Featuring in a mass brawl on the pitch, he kicked Maradona's chest; he was initially banned for 18 games for his actions, but the suspension was later reduced to seven.
Later years
After three years with Atlético Madrid where he featured sparingly, Goikoetxea retired at almost 34 after appearing in 369 competitive matches for Athletic, netting 44 times.
International
Goikoetxea played 39 matches with Spain, making his debut against the Netherlands on 16 February 1983. He represented the nation at both UEFA Euro 1984 and the 1986 FIFA World Cup. During the latter competition he scored one of his four international goals, through a penalty in a round-of-16 5–1 win against Denmark – the remaining four came courtesy of Emilio Butragueño.
Coaching career
Goikoetxea became a coach two years after retiring, starting to work at club level in 1996 and going on to be in charge of UD Salamanca (twice), SD Compostela, CD Numancia (two spells), Racing de Santander and Rayo Vallecano. In the 1996–97 season he guided Salamanca to promotion from the Segunda División, finishing second. He was assistant with the Spain national team to his former manager Clemente, during the 1994 World Cup held in the United States.
In June 2007, Goikoetxea joined Alicante-based Hércules CF in the second tier, being released at the end of the campaign after being suspended by the club for implying its internal structures "stank". In late February 2013 he was appointed coach of Equatorial Guinea, being dismissed in January 2015 just three weeks before the start of the 2015 Africa Cup of Nations due to poor performance in friendlies, which included a loss to a lower league side in Portugal.
Style of play
Goikoetxea was notorious for his aggressive style of play, not least because of the two heavy fouls (see Maradona foul) on Maradona and Schuster which earned him the nickname "Butcher of Bilbao". In 2007, English newspaper The Times named him the "hardest defender of all time".
Career statistics
Club
International goals
Scores and results list Spain's goal tally first, score column indicates score after each Goikoetxea goal.
Honours
Player
Athletic Bilbao
La Liga: 1982–83, 1983–84
Copa del Rey: 1983–84
Supercopa de España: 1984
Spain
UEFA European Championship runner-up: 1984
Manager
Spain U21
UEFA European Under-21 Championship runner-up: 1996; third place 1994
References
External links
1956 births
Living people
People from Alonsotegi
Spanish men's footballers
Footballers from Biscay
Men's association football defenders
La Liga players
Tercera División players
Athletic Bilbao B footballers
Athletic Bilbao footballers
Atlético Madrid footballers
Spain men's youth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under-21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amateur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UEFA Euro 1984 players
1986 FIFA World Cup players
Basque Country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nish beach soccer players
Spanish football managers
La Liga managers
Segunda División managers
Segunda División B managers
UD Salamanca managers
SD Compostela managers
CD Numancia managers
Racing de Santander managers
Rayo Vallecano managers
Hércules CF managers
AD Ceuta managers
Spain national under-21 football team managers
Equatorial Guinea national football team managers
Spanish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Equatorial Guinea
Spanish expatriate sportspeople in Equatorial Guinea |
https://ko.wikipedia.org/wiki/Tales%20from%20Topographic%20Oceans |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는 1973년 12월 7일 애틀랜틱 레코드가 발표한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의 여섯 번째 스튜디오 음반이다. 예스의 리더인 존 앤더슨은 1973년 일본 순회공연에서 힌두교 경전의 4개 시체에 대해 기술한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어느 요기의 자서전》에서 샤스트라, 스므리티, 푸라나, 탄트라라는 특정한 분야에 대한 각주를 읽으면서 이 콘셉트 음반을 고안했다. 두 사람은 기타리스트 스티브 하우에게 아이디어를 투구한 뒤 각 텍스트에 따라 4개의 측면 긴 곡을 수록한 더블 음반으로 형상화한 음반의 테마와 가사를 개발했다. 이 음반은 키보디스트인 릭 웨이크먼에 의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릭 웨이크먼은 이 음반의 구조와 정교한 콘셉트에 동의하지 않았고, 작곡된 음악에 기여할 수 없다고 느꼈다. 예스 음반으로는 첫 번째 예스 음반으로, 전년에 빌 브루포드를 대신한 드러머 앨런 화이트가 수록되었다.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는 엇갈린 비판적 반응을 얻었고, 상세한 개념과 긴 노래로 프로그레시브 록 과잉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음반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영국 음반으로는 처음으로 예약 주문만으로 골드 인증에 도달했다. 2주 동안 영국 음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미국에서 6위에 올랐으며, 1974년 50만장을 팔아서 골드를 땄다. 예스는 당시 밴드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유럽과 북미 5개월간의 투어 공연으로 음반 전체가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반을 지원했다.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는 1994년과 2003년에 재발행되었고, 후자는 이전에 공개되지 않은 트랙을 포함했다. 스티븐 윌슨의 새 스테레오 및 5.1 서라운드 사운드 믹스가 포함된 에디션은 2016년에 출시되었다.
녹음
예스는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를 편곡, 리허설, 녹음하는데 5개월을 보냈다. 이 그룹은 녹음 장소를 결정하는 데 의견이 갈렸다. 앤더슨과 웨이크먼은 시골에서 후퇴하기를 원했고 스콰이어와 하우는 처음에 무관심한 화이트를 동률 투표로 남겨두고 런던에 머물기를 원했다. 앤더슨은 밤에 숲에 있는 텐트 밑에서 전기 발전기를 땅에 묻어서 소리가 나지 않게 녹음하려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것을 제안했을 때, 그들은 모두 '존, 정신 차려!'고 말했다." 예스는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인 에디 오포드가 합류했는데, 에디 오포드는 1970년부터 밴드와 함께 일했고 밴드와 제작 업무를 공유했다. 그는 "어떤 꽃과 나무들"이 그룹 내에서 만들어졌던 긴장을 완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매니저 브라이언 레인을 이 나라에서 녹음하도록 강요하려고 했다. 예스는 런던에 남아서 모건 스튜디오에 녹음하는 것에 흔들렸다. 그것은 스튜디오에서 더 큰 가능성을 보여준 암펙스에 의해 생산된 영국 최초의 24트랙 테이프 머신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스콰이어는 기계가 자주 오작동했다고 회상했다. 스콰이어는 무려 16시간 동안, 일주일에 7일 동안 음반 작업을 했다.
발매
1973년 11월 8일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는 진행자 데이비드 젠슨이 라디오 룩셈부르크에서 연주할 예정이었으나 앤더슨에 따르면, 라디오 방송국은 어떻게든 빈 테이프를 받아 음반이 소개된 후 죽은 공기가 되었다고 한다. 11월 9일 니키 혼과 함께한 《Your Mother Wouldn't Like It》와 11월 10일 피트 드러먼드와 함께 《Rock on Radio One》에서 두 개의 음반 라디오 방송이 더 방영되었다.
이 음반은 1973년 12월 7일에 영국에서 발매되었고, 이어 1974년 1월 9일에 북미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1973년 4월 영국 축음기 협회가 골드 디스크 자격을 얻기 위해 업계 규정을 변경한 후 7만 5천 개의 주문을 받은 후 사전 주문만으로 영국 레코드로는 처음으로 골드 인증을 획득했다. 2주간 영국 음반 차트 1위에 올랐고, 미국 빌보드 200 차트 6위로 정점을 찍었다. 이 음반은 1974년 3월 1일에 영국에서, 1974년 2월 8일에 미국에서 골드 인증을 받았으며, 후자는 50만 장이 팔렸다.
곡 목록
모든 곡들은 존 앤더슨, 스티브 하우, 크리스 스콰이어, 릭 웨이크먼 그리고 앨런 화이트에 의해 작사/작곡하였다.
오리지널 발행
1994년 재발행
각주
외부 링크
1973년 음반
예스의 음반
콘셉트 음반
애틀랜틱 레코드 음반 | https://en.wikipedia.org/wiki/Tales%20from%20Topographic%20Oceans |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is the sixth studio album by English progressive rock band Yes, released on 7 December 1973 by Atlantic Records. It is their first studio album to feature drummer Alan White, who had replaced Bill Bruford the previous year. Frontman Jon Anderson devised its concept during the Close to the Edge Tour, when he read a footnote in Autobiography of a Yogi by Paramahansa Yogananda that describes four bodies of Hindu texts about a specific field of knowledge, collectively named shastras–śruti, smriti, puranas, and tantras. After pitching the idea to guitarist Steve Howe, the pair spent the rest of the tour developing an outline of the album's musical themes and lyrics.
Rehearsals lasted for two months in London, during which the band decided to produce a double album containing four side-long tracks based on each text, ranging between 18 and 21 minutes. Keyboardist Rick Wakeman was critical of the concept and felt unable to contribute to the more experimental music that was being produced to fit a double album, and distanced himself from the group. Yes decided against recording in the countryside in order to use Britain's first 24-track machine at Morgan Studios, where they decorated the studio to resemble a farm. Roger Dean incorporated suggestions from the band into the album's cover art, which inspired his designs for the stage used on its tour.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received mixed reviews upon release and became a symbol of the perceived excesses of progressive rock, but earned a more positive reception in later years. It was a commercial success, becoming the first UK album to be certified Gold based solely on pre-orders, and spent two weeks at number one. In the US it peaked at number 6, where it was certified gold in 1974 for surpassing 500,000 copies. Yes toured the album for five months across Europe and North America, the first half of which featured the entire album performed live. Wakeman, who was against playing the whole album, quit the band at its conclusion to continue his solo career. In 2003, the album was remastered with previously unreleased tracks, and an edition with new stereo and 5.1 surround sound mixes by Steven Wilson, with additional bonus tracks, followed in 2016.
Background and writing
Conception
By 1973, Yes had stabilised with a line-up of frontman and lead vocalist Jon Anderson, bassist Chris Squire, guitarist Steve Howe, keyboardist Rick Wakeman, and drummer Alan White, who had replaced original drummer Bill Bruford in the previous year. Their fifth album, Close to the Edge (1972), was released to commercial and critical acclaim, and the band toured worldwide to support the album between July 1972 and April 1973.
Anderson had begun searching for ideas for their next album during this time, one of which involved a "large-scale composition" as the group were writing successful longform pieces, including the 18-minute "Close to the Edge". While in his hotel room in Tokyo during the Japanese tour in March 1973, Anderson found himself "caught up in a lengthy footnote" in Autobiography of a Yogi by Paramahansa Yogananda which outlines four bodies of Hindu texts named shastras. Yogananda described them as "comprehensive treatises [that cover] every aspect of religious and social life, and the fields of law, medicine, architecture, art..." that "convey profound truths under a veil of detailed symbolism". Anderson "became engrossed" with the idea of a "four-part epic" concept album based on the four texts, though he later admitted that he only had a basic understanding of them. King Crimson drummer and percussionist Jamie Muir recommended Yogananda's book to Anderson at Bruford's wedding reception earlier in the month. Anderson said of Muir: "I felt I had to learn from him. We started talking about meditation in music—not the guru type but some really heavy stuff." Anderson gained further clarification of the texts from talking to Vera Stanley Alder, a mystic, painter, and author of spirituality books that had a profound influence on him. The 1973 BBC documentary series The Ascent of Man also gave Anderson "a lot to think about", and was influenced by host Jacob Bronowski's explanations of Earth, the solar system, and human "knowledge and truth".
Yes moved on to Australia and the US in March and April 1973, during which Anderson pitched his idea to Howe, a prolific songwriter and arranger in the group, who took an interest in building on Anderson's concept. The pair held writing sessions in their hotel rooms lit by candlelight, exchanging musical and lyrical ideas. Howe recalled: "Jon would say to me, 'What have you got that's a bit like that...?' so I'd play him something and he'd go: 'that's great. Have you got anything else?' and I'd play him another tune". One riff that Howe played was initially discarded, but it was later incorporated into side three as by then, the two sought for a different theme that would suit the track. Howe looked back on this time as a "golden opportunity" for Anderson and himself to "explore the outer reaches of our possibilities", and avoided predictable choruses and song structures. A six-hour session in Savannah, Georgia, that ended at 7 a.m. saw Anderson and Howe complete the outline of the album's vocals, lyrics, and instrumentation, which took the form of one track based on each of the four texts. Anderson described the night as "magical [that] left both of us exhilarated for days". Anderson and Howe presented the album's concept to the rest of the band, which was met with some uncertainty; Howe recalled: "But Jon and I did manage to sell the idea ... sometimes [we] really had to spur the guys on".
Phil Carson, then the London Senior Vice President of Atlantic Records, remembered that, during a dinner with Anderson and Nesuhi Ertegun, Anderson was originally going to name the album Tales from Tobergraphic Oceans. He claimed he had invented the word "tobergraphic", which he used to depict one of astronomer Fred Hoyle's theories on space. Ertegun informed Anderson that "tobergraphic" was similar to the word "topographic" and described its meaning, and Anderson changed the title accordingly. An interview with Eddy Offord and a Melody Maker advert congratulating Yes for winning a readership poll published in August and September 1973, respectively, touted the upcoming album as Tales from the Tobergraphic Ocean and Tales from Tobergraphic Oceans. Wakeman jokingly nicknamed the album Tales from Toby's Graphic Go-Kart.
Rehearsals at Manticore
After touring finished, Yes regrouped at Manticore Studios in Fulham, London, a former cinema bought by fellow progressive rock band Emerson, Lake & Palmer, in May 1973. They spent eight weeks rehearsing and developing Anderson and Howe's initial ideas. This resulted in four tracks, as Wakeman described: "One was about eight minutes. One was 15. One was 19 and one was 12, but the band had to decide whether to refine them to fit a single album or extend them to make a double. Howe recalled a mutual agreement to make a double, which Wakeman supported provided that the group could come up with strong enough material. Anderson had gained confidence towards a double from the success of Yessongs, their first live album, released as a triple in May 1973 that contained almost 130 minutes of music. Wakeman described an early musical concept for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around the time of its release, whereby its parts could be interchangeable at any time depending on the audience's reaction, thus allowing the band to perform upbeat portions back to back and skip the slower sections until a later time in the piece. The problem, however, was putting such a concept on a record.
The group agreed to make a double album but had no ideas at hand to develop, so the four tracks were fleshed out through improvisations. Wakeman disagreed with the "almost busking, free-form thinking" approach and the musical "padding" that resulted, which he thought needed further rehearsal. He felt sections resembled "avant-garde jazz rock, and I had nothing to offer". Squire recognised "a lot of substance" to the four tracks but at times they lacked strength, which resulted in an album that was varied and scattered. Despite the uncertainty, Anderson stated in the liner notes that Squire, Wakeman, and White made important contributions to the music. Anderson looked back at this time and thought the band were on the same page, but disagreements from Wakeman and producer Eddy Offord marked the end of the period of "illusive harmony" that had been in the group since Fragile. Yes took a break roughly one month into rehearsals, during which Anderson vacated to Marrakesh with his family and wrote lyrics.
Recording
The group were split in deciding where to record; Anderson and Wakeman wanted to retreat in the countryside while Squire and Howe preferred to stay in London, leaving White, who was indifferent, as the tie-breaking vote. Anderson wanted to record at night under a tent in a forest with electrical generators buried into the ground so they would be inaudible, but "when I suggested that, they all said, 'Jon, get a life!'" Yes were joined by Offord, their engineer and producer who had worked with the band since 1970 and mixed their sound on tour. He pushed their manager, Brian Lane, to record in the country, thinking "some flowers and trees" would lessen the tension that the album was creating within the group. Yes were swayed to remain in London, but wanted to avoid the familiar surroundings of Advision Studios in Fitzrovia, so they chose to record at Morgan Studios in Willesden as it housed a 3M M79, Britain's first 24-track tape machine, which presented greater possibilities in the studio. Despite the advantage, the machine malfunctioned often and required periods of down time for repairs. Squire worked in the studio for as long as sixteen-hour days, seven days a week.
In July 1973, Yes settled into studio 3 at Morgan for a period of ten weeks. Lane and Anderson proceeded to decorate the studio to resemble a farm; Squire believed Lane did so as a joke on Anderson as his tent idea was shut down. Anderson brought in flowers, pots of greenery, and cutout cows and sheep; white picket fences were placed around Wakeman's keyboards with amplifiers placed on stacks of hay. When Black Sabbath moved into studio 4 to record Sabbath Bloody Sabbath, singer Ozzy Osbourne visited and recalled a model cow with electronic udders and a small barn in the corner, "like a kid's plaything." Offord remembered the cows being covered in graffiti and the plants dying halfway through recording, "that just kind of sums up that whole album". One time during recording, Anderson wanted to replicate the sound he heard while singing in the bathroom and asked lighting engineer Michael Tait to build him a three-sided tiled booth for him to sing in. Despite Tait explaining how the idea would not work, he built one using plywood and glued tiles on the inside. Sound engineer Nigel Luby recalled tiles falling off the box during takes. Wakeman distanced himself from the band as recording went on and spent most of his time drinking and playing darts in the studio bar. Osbourne befriended him and remembered Wakeman was "bored out of his mind", and invited him to play the synthesizer on "Sabbra Cadabra". Wakeman would not accept money for his contribution, so the band paid him in beer. While talking to reporter Chris Welch in August 1973, Anderson dispelled rumours that someone was quitting the band, and that a difference of opinion from an unnamed member had been resolved.
Yes spent one week putting down the backing tracks for each of the four songs, after which they worked on the overdubs. Howe said a considerable amount of time was spent on both tasks, and took turns with Anderson to lead and convince the other members when they questioned if the arrangements were going to work. Anderson recalled a near-disaster situation with the finished tapes. After working through the night with Offord to complete the last mix, the pair left Morgan at dawn and Offord placed the tapes on the roof of his car to find the keys. He proceeded to drive off, forgetting about the tapes. They stopped the car to find the tapes had fallen onto the road, and Anderson rushed back to save them from an oncoming bus. The tapes were unharmed from the incident. Yes had spent five months arranging, rehearsing, and recording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and their time spent in Morgan amounted to £90,000 in studio costs.
Songs
The album contains four tracks, or "movements", as described by Anderson, that range between 18 and 21 minutes. All band members are credited for composing the music. Anderson provided a short description of how the album came together, and how its concept is expressed in a musical sense in each track, in the album's liner notes. The original LP lists Anderson and Howe as co-writers of the lyrics, but the 2003 reissue lists Squire as an additional co-author for "The Ancient" and Squire, Wakeman, and White as additional co-authors for "The Remembering".
"The Revealing Science of God (Dance of the Dawn)" is based on the shruti, which Yogananda described as scriptures that are "directly heard" or "revealed", in particular the Vedas. Regarding its title, Anderson said: "It's always delicate to start talking about religious things ... [it] should have just been 'The Revealing'. But I got sort of hip." The track was originally 28 minutes long, but six minutes were cut due to the time constraints of a record. Anderson was inspired to open the track with voices that gradually build from listening to Gregorian chants, and used the Vietnam War as a source for its lyrics. Howe plays a Gibson ES-345, and his solos were influenced by his belief that Frank Zappa performed lengthy solos "because the audience wanted it. I was thinking at one stage, 'I'll do that. They'll love it'. The "Young Christians see it" section originated from an unused take from the Fragile sessions, a take from which was released as a bonus track in 2015 as "All Fighters Past". White recalled the group spent around six days mixing the track. The 2003 CD reissue of the album includes a previously unreleased two minute introduction.
"The Remembering (High the Memory)" relates to the smriti, texts literally meaning "that which is remembered". Yogananda wrote the smritis were "written down in a remote past as the world's longest epic poems", specifically the Mahabharata and Ramayana. Anderson described it as "a calm sea of music" and wanted the band to play like the sea with "rhythms, eddies, swells, and undercurrents" of sound. The track includes a keyboard solo that Anderson wrote "bring[s] alive the ebb and flow and depth of our mind's eye", and rated it as one of Wakeman's best. Squire played a fretless Guild bass, and described his performance as "one of the nicest things" he has done, and ranked it higher than his playing on more popular songs. He considered the track was particularly successful in its arrangement. White came up with the chord basis of a section on a guitar, which he does not play confidently, but Anderson recognised his tune and told him to repeat it until he could grasp his idea. Howe plays a Danelectro electric sitar, lute, and acoustic guitar.
"The Ancient (Giants Under the Sun)" is attributed to the puranas, meaning "of ancient times", which contain eighteen "ancient" allegories. "Steve's guitar", wrote Anderson, "is pivotal in sharpening reflection on the beauties and treasures of lost civilisations." The lyrics contain several translations of the word "Sun" or an explanation of the Sun from various languages. Howe felt the opening section amazes him to this day, thinking how the band could "go so far out". He plays a steel guitar and a Spanish Ramirez acoustic guitar, and described it as "quite Stravinsky, quite folky". To help achieve the right sound he wanted out of his guitars, Howe played several recordings by classical guitarist Julian Bream to Offord as a guide. The track ends with an acoustic-based song which later became known as "Leaves of Green". White used a hollowed out log and brushes on an aluminium sheet as percussion.
"Ritual (Nous sommes du soleil)" relates to the tantras, literally meaning rites or rituals. Anderson described its bass and drum solos as a presentation of the fight and struggle that life presents between "sources of evil and pure love". Howe is particularly fond of his guitar solo at the beginning, which to him was "spine-chilling" and "heavenly to play", and uses a Gibson Les Paul Junior. He wrote the chords and some lyrics to the "Life is like a fight" section. His outro guitar solo was more improvised and jazz-oriented at first, but the rest of the group felt dissatisfied with the arrangement. Anderson suggested that Howe pick several themes from the album and combine them, which Howe did with "a more concise, more thematic approach". During one of Wakeman's absences from the studio, White came up with the piano sequence for the closing "Nous sommes du soleil" section. The second half contains a percussion jam that features the main melody played on the drums. White, who played a standard kit, taught the sequence to the other members, with Anderson on a cocktail kit and Squire on timpani. Howe, despite participating on the drum solo on stage early on, opted out as it affected his guitar playing afterward.
Artwork
The album was packaged as a gatefold sleeve designed and illustrated by Roger Dean, who had also designed the artwork for Fragile, Close to the Edge, and Yessongs. Each of them carried a loose narrative thread that Dean did not continue for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Dean and Anderson discussed ideas for the cover during a flight from London to Tokyo via Anchorage, Alaska, for the Japanese leg of the Close to the Edge Tour. Prior to the flight, Dean had completed the artwork to John Michell's book The View over Atlantis. He recalled: "The wives and girlfriends made a cake ... and we all had some. I have no idea what was in it but from London to Anchorage, I was stoned ... But from Anchorage to Tokyo, I couldn't stop talking. And I was telling Jon all about this book, about patterns in the landscape and dragon lines, and we were flying hour after hour after hour over the most amazing landscapes ... So the idea of ... a sort of magical landscape and an alternative landscape ... that informed everything: the album cover, the merchandising, the stage."
Dean, who primarily describes himself as a landscape painter, wished to convey his enthusiasm for landscapes on the cover, and everything depicted in the design is of something that exists. Painted using watercolour and ink, the front depicts fish circling a waterfall under several constellations of stars. In his book Views, Dean explained that the final collection of landmarks on the front was more complex than intended "because it seemed appropriate to the nature of the project that everyone who wanted to contribute should do so." Anderson wanted a Mayan temple at Chichen Itza with the sun behind it, and White suggested using markings from the plains of Nazca. The landscape comprised, amongst other things, famous English rocks taken from Dominy Hamilton's postcard collection, including Brimham Rocks, the last rocks at Land's End, Logan Rock at Treen, and single stones from Avebury and Stonehenge. Dean thought "the result is a somewhat incongruous mixture, but effective nonetheless."
Initial pressings included a slipstream in the background behind the fish that was removed from later copies. Although it was not a part of the original design, Anderson persuaded Dean to add it after it had been painted, so Dean drew it on a clear cel and photographed the cover with and without the slipstream. Dean thought the idea still did not work, and used the original design for the advertisements and posters. In 2002, readers of Rolling Stone magazine voted the album's cover as the best cover art of all time.
Release
The album was finished in the first week of November 1973, and aired on British radio several times before its release in stores. It was set for broadcast on David Jensen's show on Radio Luxembourg on 8 November, but according to Anderson, the radio station somehow received blank tapes, resulting in dead air after the album was introduced. Two more radio broadcasts followed, one on Your Mother Wouldn't Like It hosted by Nicky Horne on Capital Radio on 9 November, and on Rock on Radio One with Pete Drummond on BBC Radio 1 the following day. A listening session was held at Morgan, which studio engineer and manager Roger Quested attended and remembered rows of seats laid out by a set of speakers before the whole album was played. "All but the diehard had drifted away before it had finished." Radio consultant Lee Abrams recalled the risk and difficulty in getting the album played on American radio, with many stations mainly playing "The Revealing Science of God" and primarily at night hours.
The album was released in the UK on 7 December 1973, followed by its North American release on 9 January 1974. It was a commercial success for the group; following a change in industry regulations by the British Phonographic Industry for albums to qualify for a Gold disc in April 1973, the album became the first UK record to reach Gold certification based on pre-orders alone after 75,000 orders were made. It was number 1 on the UK Album Chart for two consecutive weeks and peaked at number 6 on the US Billboard Top LPs chart. The album was certified Gold in the UK on 1 March 1974 and in the US on 8 February 1974, the latter for surpassing 500,000 copies.
Reception
Early reviews
The album received an initial divided reception from British critics. Robert Sheldon for The Times termed the music as "rockophonic", and selected "The Ancient" as a piece of music that "will be studied twenty-five years hence as a turning point in modern music". The Guardian newspaper thought Anderson's "high-pitched and carefully modulated voice ... seemed at ease and control". Steve Peacock reviewed the album and a live performance of it for Sounds magazine using the headlines "Wishy washy tales from the deep" and "Close to boredom". Critic and Yes biographer Chris Welch reviewed the album for Melody Maker and wrote: "It is a fragmented masterpiece, assembled with loving care and long hours in the studio. Brilliant in patches, but often taking far too long to make its various points, and curiously lacking in warmth or personal expression". He thought "Ritual" brought the "first enjoyable moments" of the entire album, "where Alan's driving drums have something to grip on to and the lyrics of la la la speak volumes. But even this cannot last long and cohesion is lost once more to the gods of drab self-indulgence." For New Musical Express, Steve Clarke, who had listened to the album for two months and saw the band perform the album live once, declared the album "a great disappointment", coming from the strength of Close to the Edge and notes the "colour and excitement" that the group usually puts on their albums was missing. He thought Wakeman's abilities were restricted, and a lack of "positive construction" in the music which too often loses itself to "a wash of synthetic sounds". Howe's guitar adopts the same tone as Wakeman's keyboards, which bored Clarke, but Anderson was praised in helping carry the music through with his "frail, pure and at times very beautiful" voice. Clarke concluded with a hope of Yes making a return to "real songs" which demonstrate their musicianship better.
The album also received mixed reviews in America. Abrams thought it could have received better marketing, and suggested "an experiment in recording" as a tag line. Record World magazine considered it "by far the most progressive album to date" and displays the talents of each band member well, particularly Wakeman's. A review in Billboard said the four sides produce mixed results, with Anderson's "weighty spiritual concept" having "indigestible lyrics that are fortunately outplayed by the band's rich, sweeping playing" and praised Wakeman's keyboards in particular. It concluded with "Ritual (Nous sommes du soleil)" as the most "complete" track. In his negative review for Rolling Stone, Gordon Fletcher described the record as "psychedelic doodles" and thought it suffers from "over-elaboration" compared to more successful songs on Fragile and Close to the Edge. He complained about the album's length, Howe's guitar solos on "The Ancient", and the percussion section on "Ritual", but praised Wakeman for his "stellar performance" throughout and believed the keyboardist was the "most human of the group". Fletcher singled out the acoustic guitar section from "The Ancient" as the album's high point. Cash Box magazine praised the album with its "spectacular cuts" making a "phenomenal" record, and noted the band "are as much in touch with the bright future of their art form as they are with its rich, traditional past". Wakeman's "inspirational" playing was also pointed out which "sparkles" throughout the album. It concluded with "one of this year's best without doubt." In September 1974, Time magazine called it "by far the most provocative album of the past year."
Later reviews
Retrospectively, Bruce Eder of AllMusic thought the album contains "some of the most sublimely beautiful musical passages ever to come from the group, and develops a major chunk of that music in depth and degrees in ways that one can only marvel at, though there's a big leap from marvel to enjoy. If one can grab onto it, Tales is a long, sometimes glorious musical ride across landscapes strange and wonderful, thick with enticing musical textures". In its fortieth anniversary issue from 1992, NME selected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as their "40 Records That Captured The Moment". In 1996, Progression magazine writer John Covach wrote that it is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not Close to the Edge, that represents the band's true hallmark of the first half of their 1970s output and their "real point of arrival". He pointed out "the playing is virtuosic throughout, the singing innovative and often complex, and the lyrics mystical and poetic. All this having been asserted ... even the most devoted listener to Tales is also forced to admit that the album is in many ways flawed. Tracks tend to wander a bit ... and the music therefore is perhaps not as focused as it might be." He notes that while Howe "set a new standard for rock guitar", he thought Wakeman's parts were not used properly and that the keyboardist was instead "relegated to the role of sideman". Author and critic Martin Popoff called the album the "black hole of Yes experiences, the band dissipating, expanding, exploding and imploding all at once", though he thought it contained "some fairly accessible music".
Band members
In January 1974, Squire picked The Yes Album and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as the two most personally satisfying Yes albums "in terms of being captivated". In 1984, after Yes had released 90125 (1983), Anderson looked back on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as "difficult in some respects", but felt it was "stupid to even think about defending it." In 1990, he said that he was pleased with three quarters of the album, with the remaining quarter "not quite jelling", but the tight deadline to finish it meant there was little time to make the necessary changes. Squire recalled the album as an unhappy period in the band's history, and commented on Anderson's attitude then: "Jon had this visionary idea that you could just walk into a studio, and if the vibes were right ... the music would be great at the end of the day ... It isn't reality". Wakeman continues to hold a mostly critical view. In 2006, he clarified that there are some "very nice musical moments in Topographic Oceans, but because of the format of how records used to be we had too much for a single album but not enough for a double, so we padded it out and the padding is awful ... but there are some beautiful solos like "Nous sommes du soleil" ... one of the most beautiful melodies ... and deserved to be developed even more perhaps."
Reissues
Anderson spoke about his wish to edit the album and reissue it as a condensed 60-minute version with remixes and overdubs, but the plan was affected by "personality problems". The album was digitally remastered for CD by Joe Gastwirt using the original master tapes, in 1994. It was remastered again by Bill Inglot in 2003 as an "expanded" version on Elektra/Rhino Records, which features a restored two-minute introduction to "The Revealing Science of God" not included on the original LP, but previously released on the 2002 box set In a Word: Yes (1969–). The set includes studio run-throughs of the same track and "The Ancient". The 2003 edition was included in the band's 2013 studio album box set, The Studio Albums 1969–1987.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was reissued with new stereo and 5.1 surround sound mixes by Steven Wilson in October 2016 on the Panegyric label. The four-disc set was available on CD and Blu-ray or DVD-Audio and includes the new mixes, bonus and previously unreleased mixes and tracks, and expanded and restored cover art.
Tour and aftermath
Yes had planned to start touring the album with an American leg from October 1973, but it was cancelled in order to have more time to complete it in the studio. Shortly after its release, Anderson wished the album and tour to be pushed back until January 1974 in order to allocate more time for rehearsals, but half of the available tickets for the opening British tour had quickly sold and the band were unable to cancel. Yes sold out five consecutive nights at the Rainbow Theatre in London, which marked the first time a rock band achieved the feat. They tried to secure two extra shows, but the dates were unavailable; promoter Harvey Goldsmith said the huge demand for tickets for the UK dates was comparable to a Rolling Stones tour. The first Rainbow show was to be filmed by the BBC for broadcast on The Old Grey Whistle Test and to air on radio, but recording did not go ahead. Initial tour rehearsals took place at Manticore.
The 77-date tour visited Europe and North America between November 1973 and April 1974, with a two-hour set of Close to the Edge and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performed in their entirety, plus encores. The band toured with no support act. The set was altered as the tour progressed; within a month Lane, Tait, and the road crew had advised Yes to drop "The Ancient" as they thought it was dragging the set, but the group had started to perform it better and kept it in. "The Remembering" was removed completely from March. The North American leg included two sold-out shows at Madison Square Garden in New York City that grossed over $200,000. The band spent £5,000 on a hot air balloon which was decorated with the album's artwork and tethered in each city they performed in the US.
Yes brought four times as much equipment than their previous tours, which included an elaborate set designed by Dean and his brother Martyn. Two versions of the stage were built; the second, used from the American leg onward, consisted of fibreglass structures, dry ice effects, a drum platform surrounding White, and a tunnel that the band emerged from. During one show, the structure around White that opened and closed failed to operate, leaving him trapped inside. White and Wakeman claimed the incident was the inspiration behind a scene depicted in the rock mockumentary This Is Spinal Tap. Tait spent £10,000 on lighting equipment for the tour, and Offord mixed the band's live sound using a 24-track mixing desk.
No full recording from the tour has been officially released, apart from a performance of "Ritual" from Zurich in April 1974 on the album's 2016 reissue. Yes continued to perform "Ritual" until the end of their 1976 North American tour, after which material from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would not be performed for 20 years, when the album's line-up reunited for the Keys to Ascension albums and performed "The Revealing Science of God". From 1997 to 2004 either "The Revealing Science of God" or "Ritual" was performed live, which included the latter performed with an orchestra on stage in 2001. From 2016 to 2018, Yes performed sides one and four as part of their Album Series Tour.
Wakeman's departure
Following the Rainbow gigs Wakeman called for a band meeting and announced his decision to quit, but the band, Lane, and Carson convinced him to stay for the rest of the tour. His frustration from playing the entire album, and the lack of rehearsal time for the British tour, culminated at a subsequent show in Manchester where his technician brought him a curry which he ate on stage. Roadie Bill Turner recalled Wakeman waving to the audience with a hand puppet and running a wind-up toy dinosaur across the stage when he got bored. Anderson felt he had pushed Wakeman too far, as he was unsatisfied with one of his keyboard solos in the set and had constantly asked him to get it right. Despite the problems, Wakeman said the situation improved as the American leg progressed. When the tour finished, Wakeman declined to attend rehearsals for their next album and confirmed his exit on 18 May 1974, his twenty-fifth birthday; later that day, he found out his solo album, Journey to the Centre of the Earth, had entered the UK chart at number one. Wakeman was replaced by Swiss keyboardist Patrick Moraz.
Track listing
Personnel
Yes
Jon Anderson – lead vocals, percussion
Steve Howe – guitars, electric sitar, lute, backing vocals
Chris Squire – bass guitar, backing vocals
Rick Wakeman – keyboards
Alan White – drums, percussion
Technical
Yes – producer
Eddy Offord – producer
Guy Bidmead – tapes
Roger Dean – cover design and illustration
Mansell Litho – plates
Charts
Certifications
References
Citations
Sources
Books
Magazines
DVD media
External links
Official Yes website at YesWorld
Yes (band) albums
Albums with cover art by Roger Dean (artist)
1973 albums
Concept albums
Albums produced by Eddy Offord
Atlantic Records albums |
https://ko.wikipedia.org/wiki/%EA%B3%B5%EC%88%98%EB%B6%80%EB%8C%80%20%EB%AA%A9%EB%A1%9D | 공수부대 목록 | 이 문서는 각 나라별로 낙하산병, 공중강습부대를 포함하여 공수능력을 갖춘 공수부대의 목록이다.
가봉
제1공수연대
그리스
육군
제1강습낙하산여단
제71공중기동여단
해군
수중폭파사령부
공군
제31탐색구조작전비행대대 "아킬레우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제44낙하산연대; 여단: 1978-1999, 연대: 2000-현재
네덜란드
제11공중기동여단
대한민국
제1공수특전여단
제3공수특전여단
제7공수특전여단
제9공수특전여단
제11공수특전여단
제13특수임무여단
제7강습대대
해병대 공정대대
독일
제3제국/나치 독일
야전군
제1강하군
군단
제1강하엽병군단; 1943년 ~ 1945년
제2강하엽병군단; 1943년 ~ 1945년
사단
제1강하엽병사단
제1강하기갑사단 헤르만 괴링
제2강하엽병사단
제2강하기갑척탄병사단 헤르만 괴링
제3강하엽병사단
제4강하엽병사단
제5강하엽병사단
제6강하엽병사단
제7강하엽병사단 "에르트만"; 1944년 ~ 1945년
제8강하엽병사단
제9강하엽병사단
제10강하엽병사단
제11강하엽병사단
제20강하엽병사단
제21강하엽병사단
제22착륙사단
여단
람케 강하엽병여단
동독/독일 연방
사단
공중기동작전사단
신속전력사단
제1공수사단
여단
제1공수여단
동독/국가인민군
제40항공돌격연대
러시아
제7근위공중강습사단
제76근위공중강습사단
제98근위공수사단
제106근위공수사단
제11근위공수여단
제31근위공수여단
제56근위공수여단
제83근위공수여단
제242훈련소
제38근위공수통신여단
제45근위스페츠나츠여단
제247근위공중강습연대
제345독립근위공수연대
맥시코
낙하산소총병여단; 1969년 ~ 현재
미국
육군
제18(XVIII)공수군단
제82공수사단
제101공수사단 (공중강습)
제25보병사단, 4여단전투단
제173공수여단전투단
제75레인저연대
그린베레
델타포스
해군
네이비실
제1해군특수전단
제2해군특수전단
제11해군특수전단
해군 특수전개발단 (실 6팀)
공군
제24특수작전단
제190특수작전단
제352특수작전단
제353특수작전단
해병대
포스리컨중대
해병 레이더연대
방글라데시
낙하산코만도여단; 2016-현재
벨기에
특전단
벨기에 육군
특수작전연대; 1948년 ~ 현재
즉각대응반
제1낙하산대대 (벨기에); 1946년 ~ 2011년
제2코만도대대 (벨기에); 1945년 ~ 현재
제3낙하산대대 (벨기에); 1950년 ~ 현재
제4코만도대대 (벨기에); 1970년 ~ 1979년
낙하산코만도 야전포병포대; 1973년 ~ ?
낙하산코만도 대전차중대; 1963년 ~ 1994년
벨라루스
제5스페츠나츠여단
제38별동근위공중강습여단
제38별동근위공수여단
불가리아
불가리아 육군
제68특전여단
불가리아 해군
제63해군특전정찰분견대 "흑해 상어"
브라질
브라질 육군
특수작전사령부
낙하산여단
해군
전투잠수부전단
해군보병특수작전대대
공군
공수구조전대
비엣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비엣남 국군
제1베트남인낙하산대대
제3베트남인낙하산대대
제5베트남인낙하산대대
제6베트남인낙하산대대
제7베트남인낙하산대대
베트남 공화국 공수사단
스리랑카
공중기동여단; 1966년 ~ 현재
아르헨티나
제4낙하산여단
알제리
제17공수사단
제25정찰연대
앙골라
특전여단()
영국
제1공수군단
제1공수사단
제6공수사단
제16공수사단
제1착륙여단
제1낙하산여단
제2낙하산여단; 1942년 ~ 1948년
제3낙하산여단
제4낙하산여단
제5공수여단; 1982년 ~ 1999년
제5낙하산여단
제6낙하산여단
제16낙하산여단; 1948년 ~ 1977년
제16공중강습여단
왕립기마포병 제7낙하산연대
제24(공중기동)여단; 1945년 ~ 1999년
제44낙하산여단
낙하산연대
오스트리아
국군
엽병사령부
육군
제25엽병대대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특수작전사령부
SAS 연대
제1코만도연대
제2코만도연대
육군
제1낙하산대대; 1943-1946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3대대
4대대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포병대, A야전포대
왕립공군
낙하산병 훈련부대
우크라이나
제1공중강습사단
제25독립공수여단
제45공중강습여단
제46공중강습여단
제79공중강습여단
제80공중강습여단
제81공중기동여단
제95공중강습여단
이란
제55공수여단
제65공수특전여단
이집트
제414낙하산여단
이탈리아
제80공수사단 라스페치아
제184공수사단 넴보
제185공수사단 폴고레
폴고레 공수여단; 1963년 ~ 현재
제185낙하산포병연대; 2013년 ~ 현재
제9낙하산강습연대; 1953년 ~ 현재
제4알피니낙하산연대; 2004년 ~ 현재
제1낙하산카라비니에리연대 "투스카니아"
인도
영국령 인도
제44인도공수사단
제14착륙여단; 1944년 ~ 1947년, 파키스탄 육군으로 전속.
제50인도낙하산여단; 1941년 ~ 현재
제77인도낙하산여단; 1942년 ~ 1945년
인도
제50낙하산여단; 1941년 ~ 현재
낙하산연대 (인도)
일본
일본 제국 육군 정진부대
제1정진집단
정진연대
일본 제국 해군
정진부대
요코스카 진수부 - 제1,3특별육전대
육상자위대
제1공정단
특수작전군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특종부대
인민해방군 공군
공강병군
중화민국
육군
특종작전지휘부
카자흐스탄
제36공중기동여단
캄보디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제1크메르낙하산연대; 1952년 ~ ?
제911특전연대
캐나다
캐나다 특수작전연대; 2006년 ~ 현재
캐나다 공수연대; 1968년 ~ 1995년
제1캐나다낙하산대대; 1942년 ~ 1945년
왕립캐나다연대, 3대대; 1970년 ~ 현재
캐나다 SAS중대; 1947년 ~ 1949년
여왕의 캐나다 소총대, 낙하산예비중대
폴란드
제1독립공수여단; 1941년 9월 23일 ~ 1947년 6월 30일
제6공수여단
프랑스
프랑스 육군
프랑스 육군 특수작전사령부
제10낙하산사단; 1956–1961년, 알제리 쿠데타
제24공수사단; 1945-1945년
제25공수사단; 1946–1948년
제25낙하산사단; 1956–1961년, 알제리 쿠데타
제4공중기동여단; 1999-2010년
제11낙하산여단; 1961년-현재
제1낙하산검기병연대; 1945년-현재
제1낙하산엽기병연대; 1943년-현재
제9낙하산엽기병연대; 1562년-현재
제13낙하산용기병연대; 1676년-현재
제17낙하산공병연대; 1944년-현재
코만도낙하산집단
에트랑제
제1외인낙하산연대; 1955-1961년, 알제리 쿠데타
제2외인낙하산연대; 1948-현재
제3외인낙하산연대; 1955-1955년
제22외인낙하산연대
제35낙하산포병연대
해병대
제1낙하산해병보병연대; 1940-현재
제2낙하산해병보병연대; 1947-현재
제3낙하산해병보병연대; 1948-현재
제6낙하산해병보병연대; 1948-1998년
제8낙하산해병보병연대; 1951-현재
해군
해군코만도
공군
공군푸질러코만도
국가헌병대
국가헌병개입단
피지
특수작전중대
핀란드
핀란드 육군
우티 엽병연대
특수경보병대대
낙하산경보병중대
특수병력중대
핀란드 해군
해안여단 특수작전부
참고
목록
부대 목록 | https://en.wikipedia.org/wiki/List%20of%20paratrooper%20forces | List of paratrooper forces | Many countries around the world maintain military units that are trained as paratroopers. These include special forces units that are parachute-trained, as well as non-airborne forces units.
Abkhazia
Independent Special Purpose Detachment (Отдельный Отряд Специального Назначения - Otdel'nyy Otryad Spetsial'nogo Naznacheniya)
Albania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Batalioni i Operacioneve Speciale)
Algeria
Army
17th Airborne Division
1st Parachute Commando Regiment (الفوج 1 المظليين المغاوير - Alfawj 1 Almazaliyiyn Almaghawir)
4th Parachute Commando Regiment (الفوج 4 المظليين المغاوير - Alfawj 4 Almazaliyiyn Almaghawir)
5th Parachute Commando Regiment (الفوج 5 المظليين المغاوير - Alfawj 5 Almazaliyiyn Almaghawir)
6th Parachute Commando Regiment (الفوج 6 المظليين المغاوير - Alfawj 6 Almazaliyiyn Almaghawir)
12th Parachute Commando Regiment (الفوج 12 المظليين المغاوير - Alfawj 12 Almazaliyiyn Almaghawir)
18th Parachute Commando Regiment (الفوج 18 المظليين المغاوير - Alfawj 18 Almazaliyiyn Almaghawir)
Parachute Artillery Regiment
Parachute Engineers Battalion
25th Reconnasissance Regiment
104th Operational Maneuver Regiment (الفوج104 للمناورات العملياتية - Alfwj 104 Lilmunawarat Aleamliatia)
Commando Instruction and Parachute Training School "Martyr Derbal M'barek" (مدرسة تكوين المغاوير و التدريب المظليالشهيد دربال أمبارك - Madrasat Takwin Almaghawir w Altadrib Almazaliyi "Alshahid Derbal M'barek")
Special Troops Superior School "Martyr Mustapha Khoja called Si Ali" (المـدرسـة العـليــا للقـوات الخـاصـة الشهيد مصطفى خوجة المدعو سي علي - Almdrst Alelya Llqwat Alkhas "Alshahid Mustapha Khoja almadeui Si Ali")
Air Force
772nd Parachute Air Commando Fusiliers Regiment (الفوج 772 للرماة المغاوير المطاريون - Alfawj 772 Lilramat Almaghawir Almitariuwn)
782nd Parachute Air Commando Fusiliers Regiment "Martyr Jaloul bin Azzouz" (الفوج 782 للرماة المغاوير المطاريون "الشهيد جلول بن عزوز - Alfawj 782 Lilramat Almaghawir Almitariuwn "Alshahid Jalul bin Azzouz)
Angola
Special Forces Brigade (Brigada de Forças Especiais)
Special Forces Training School (Escola de Formação de Forças Especiais)
Argentina
Army
Rapid Deployment Force (Fuerza de Despliegue Rápido)
4th Airborne Brigade (IV Brigada Aerotransportada)
(2nd Parachute Infantry Regiment)
"14th Parachute Infantry Regiment", including
Parachute Reserve Company "Córdoba" (Compañía de Reserva Paracaidista Córdoba)
("4th Parachute Artillery Battalion")
4th Parachute Cavalry Scout Squadron (Escuadrón de Exploración de Caballería Paracaidista 4)
(4th Parachute Engineers Company)
(4th Parachute Signal Company)
Compañía Apoyo de Lanzamientos Aéreos Paracaidista 4 (4th Parachute Airdrop Support Company)
Parachute Guides Platoon "1st Lt. Guillermo Abally" (Sección Guías Paracaidistas "Teniente Primero Guillermo Abally")
Parachute Intelligence Platoon (Sección de Inteligencia Paracaidista)
Special Operations Forces Group (Agrupación de Fuerzas de Operaciones Especiales)
601 Special Forces Company
601 Commando Company (Compañía de Comandos 601)
602 Commando Company (Compañía de Comandos 602)
(603 Commando Company)
(Airborne Troops and Special Operations School)
Navy
Amphibious Commandos Group (Agrupación de Comandos Anfibios)
Tactical Divers Group (Agrupación de Buzos Tácticos)
Air Force
Special Operations Group
Armenia
1st Special Forces Regiment (Armenia) (1-ին գնդակից հատուկ նպատակ - 1-in Gndakits' Hatuk Npatak)
Australia
Australian Army
Special Operations Command
Special Air Service Regiment
1st Commando Regiment
2nd Commando Regiment
Special Operations Engineer Regiment
Australian Defence Force Parachuting School
Royal Australian Air Force
B Flight, No. 4 Squadron
Austria
Jagdkommando
Military Partrooper School (Militär Fallschirmspringer Truppenschule)
Azerbaijan
Army
777th Special Purpose Brigade (777-ci Xüsusi Təyinat Briqada)
Navy
Marine Special Purpose Sabotage and Reconnaissance Center - Military Unit 641 (Dəniz Təxribat və Kəşfiyyat Mərkəz Xüsusi Təyinat - 641 Saylı Hərbi Hissə)
Bahrain
Royal Guard Special Forces Battalion (الحرس الملكي كتيبة قوات خاصة - Alharas Almalakiu Katibat Quwwat Khasa)
Bangladesh
Army
Para-Commando Brigade
1st Para Commando Battalion "Leopard"
2nd Para Commando Battalion
School of Infantry and Tactics - Special Warfare Wing
Navy
Special Warfare Diving and Salvage
Air Force
41st Squadron
Belarus
Special Operations Forces Command (Камандаванне сіл спецыяльных аперацый - Kamandavannie Sil Spiecyjaĺnych Apieracyj)
5th Independent Special Assignments Brigade (5-я асобная брыгада спецыяльнага прызначэння - 5-ja Asobnaja Bryhada Spiecyjaĺnaha Pryznačennia)
38th Independent Guards Air Assault Brigade "Wien" (38-ю Венская асобную гвардзейскую дэсантна-штурмавую брыгаду - 38-ju Venskaya Asobnuju Hvardziejskuju Desantna-Sturmavuju Bryhadu)
"Viciebsk" (103-ю Віцебскую асобную гвардзейскую паветрана-дэсантную брыгаду - 103-ju Viciebskuju Asobnuju Hvardziejskuju Pavietrana-Desantnuju Bryhadu)
Belgium
Special Operations Regiment
2nd Commando Battalion (2e Bataillon de Commandos - 2 Bataljon Commandos)
3rd Parachute Battalion (3e Bataillon de Parachutistes - 3 Bataljon Parachutisten)
Special Forces Group
6th Communication and Information Systems Group (6 Groupe Systèmes de Communication et d'Information - 6 Groep Communicatie- en Informatiesystemen)
Paratrooper Training Center (Centre d'Entraînement de Parachutistes - Trainingscentrum voor Parachutisten)
Benin
1st Parachute Commandos Battalion (1er Bataillon de Commandos Parachutistes)
Bolivia
Army
16th Special Forces Regiment "Jordán" (Regimiento de Fuerzas Especiales Nº 16 "Jordán")
18th Airborne Commandos Regiment "Victoria" - Special Troops instruction Center (Regimiento de Comandos Aerotransportados Nº 18 "Victoria - Centro de Instrucción de Tropas Especiales")
Navy
Amphibious Commandos Battalion (Batallón de Comandos Anfibios)
Botswana
Commando Battalion
Para and Presidential Guards Battalion
Brazil
Army
Paratroopers Brigade (Brigada de Infantaria Pára-quedista)
Parachute Infantry Brigade Headquarters Company (Companhia de Comando da Brigada de Infantaria Pára-quedista)
25th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Campo dos Afonsos" (25º Batalhão de Infantaria Pára-quedista "Campo dos Afonsos")
26th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Alberto Santos-Dumont" (26º Batalhão de Infantaria Pára-quedista "Alberto Santos-Dumont")
27th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General Newton Lemos" (27º Batalhão de Infantaria Pára-quedista "General Newton Lemos")
8th Parachute Field Artillery Battalion (8º Grupo de Artilharia de Campanha Pára-quedista)
20th Parachute Logistics Battalion (20º Batalhão Logístico Pára-quedista)
Parachute Folding, Maintenance and Air Supply Battalion (Batalhão de Dobragem, Manutenção de Pára-quedas e Suprimento Pelo Ar)
(Companhia de Precursores Pára-quedista)
(1º Esquadrão de Cavalaria Pára-quedista)
21st Parachutist Anti Aircraft Artillery Battery (21ª Bateria de Artilharia Anti-Aérea Pára-quedista)
1st Parachute Combat Engineers Company (1ª Companhia de Engenharia de Combate Pára-quedista)
20th Parachute Signal Company (20ª Companhia de Comunicações Pára-quedista)
Parachute Training Company (Companhia de Instrução Pára-quedista)
36th Parachute Army Police Platoon (36º Pelotão de Polícia do Exército Pára-quedista)
Parachute Medical Detachment (Destacamento de Saúde Pára-quedista)
Special Operations Command (Comando de Operações Especiais)
1st Special Forces Battalion "" (1º Batalhão de Forças Especiais "António Dias Cardoso")
"Captain Francisco Padilha" (1º Batalhão de Ações de Comandos "Capitão Francisco Padilha")
3rd Special Forces Company "Brigadier General Thaumaturgo Sotero Vaz" (3ª Companhia de Forças Especiais "General de Brigada Thaumaturgo Sotero Vaz")
Parachutist Training Center "General Penha Brasil" (Centro de Instrução Pára-quedista "General Penha Brasil")
Navy
Combat Divers Group (Grupamento de Mergulhadores de Combate)
Naval Fusiliers Special Operation Battalion "Tonelero" (Batalhão de Operações Especiais de Fuzileiros Navais "Tonelero")
Air Force
Air-Land Rescue Squadron (Esquadrão Aeroterrestre de Salvamento)
Brunei
Army
Special Forces Regiment (Rejimen Pasukan Khas)
Air Force
Tactical Air Supply Parachute Unit (Unit Payung Terjun Pembekal Udara Taktikal)
Bulgaria
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 (Съвместно Командване на Специалните Операции - Sŭvmestno Komandvane na Spetsialnite Operatsii)
Army
1st Special Forces Battalion (1ви Батальон Специални Сили - 1vi Batalion Spetsialni Sili)
2nd Special Forces Battalion (2ри Батальон Специални Сили - 2ri Batalion Spetsialni Sili)
3rd Special Forces Battalion (3ти Батальон Специални Сили - 3ti Batalion Spetsialni Sili)
Navy
(65-и Морски Специален Разузнавателен Отряд "Черноморски Акули" - 65-i Morski Spetsialen Razuznavatelen Otriad "Chernomorski Akuli")
Burkina Faso
25th Parachute Commando Regiment (25e Régiment Parachutiste Commando)
Airborne Technics Training Center (Centre d'Instruction aux Techniques Aéroportées)
Burundi
121st Parachute Regiment (121e Régiment de Parachutistes)
Cambodia
Special Forces Command (បញ្ជាការដ្ឋានទ័ពពិសេស - Banhcheakear Dthan tp Pises)
1st Airborne Commando Battalion
2nd Airborne Commando Battalion
3rd Airborne Commando Battalion
4th Airborne Commando Battalion
Cameroon
Airborne Troops Battalion (Bataillon des Troupes Aéroportées)
Canada
Army
Mike Company, 3rd Battalion, The Royal Canadian Regiment
Alpha Company, 3rd Battalion, Royal 22nd Regiment
Alpha Company, 3rd Battalion, 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Parachute Company (Reserve), The Queen's Own Rifles of Canada
Parachute Training Company, Canadian Army Advanced Warfare Centre
Air Force
Search and Rescue Technicians - Canadian Forces School of Search and Rescue
SAR Techs Teams - 103 Search and Rescue Squadron
SAR Techs Teams - 413 Transport and Rescue Squadron
SAR Techs Teams - 424 Transport and Rescue Squadron
SAR Techs Teams - 435 Transport and Rescue Squadron
SAR Techs Teams - 442 Transport and Rescue Squadron
Canadian Special Operations Forces Command
Joint Task Force 2
Canadian Special Operations Regiment
Chile
Army
Special Operations Brigade "Lautaro" (Brigada de Operaciones Especiales "Lautaro")
1st Parachute Battalion "Pelantarú" (Batallón de Paracaidistas Nº 1 "Pelantarú")
5th Commando Company "Lientur" (Compañía de Comandos Nº 5 "Lientur")
6th Commando Company "Iquique" (Compañía de Comandos Nº 6 "Iquique")
12th Commando Company "Galvarino" (Compañía de Comandos Nº 12 "Galvarino")
Special Forces Group (Agrupación de Fuerzas Especiales)
Airborne Company (Compañía Aerotransportada)
Amphibious Company (Compañía Anfibia)
Mountain Company (Compañía de Montaña)
Paratroopers and Special Forces School (Escuela de Paracaidistas y Fuerzas Especiales)
Navy
(Comando de Fuerzas Especiales de la Armada)
Air Force
(Grupo de Fuerzas Especiales - Comandos de Aviación "Águilas Negras")
Special Forces Tactical Unit - 2nd Air Force Group (Unidad Táctica de Fuerzas Especiales del Grupo de Aviación Nº 2)
Special Forces Tactical Unit - 5th Air Force Group (Unidad Táctica de Fuerzas Especiales del Grupo de Aviación Nº 5)
Special Forces Tactical Unit - 6th Air Force Group (Unidad Táctica de Fuerzas Especiales del Grupo de Aviación Nº 6)
Special Forces Tactical Unit - 8th Air Force Group (Unidad Táctica de Fuerzas Especiales del Grupo de Aviación Nº 8)
Special Forces Tactical Unit - 9th Air Force Group (Unidad Táctica de Fuerzas Especiales del Grupo de Aviación Nº 9)
China (People’s Republic of China)
Army
People's Liberation Army Special Operations Forces ( 中國人民解放軍特種部隊 )
71st Special Warfare Brigade "Sword of the Kunlun Mountains" (「昆仑利刃」特战第71旅 )
72nd Special Warfare Brigade (特战第72旅 )
73rd Special Warfare Brigade "Flying Dragon" (「飛龍」特战第73旅 )
74th Special Warfare Brigade (特战第74旅 )
75th Special Warfare Brigade "Sword of South China" (「華南之劍」特战第75旅 )
76th Special Warfare Brigade "Snow Maple" (「雪枫」特战第76旅 )
77th Special Warfare Brigade "Hunting Leopard" (「獵豹」特战第77旅 )
78th Special Warfare Brigade (特战第78旅 )
79th Special Warfare Brigade "Siberian Tiger" (「東北虎」特战第79旅 )
80th Special Warfare Brigade "Mount Tai Eagle" (「泰山雄鹰」特战第80旅)
81st Special Warfare Brigade "Oriental Sword" (「東方神劍」特战第81旅 )
82nd Special Warfare Brigade "Ringing Arrow" (「響箭」特战第82旅 )
83rd Special Warfare Brigade "Heroic Eagle" (「雄鷹」特战第83旅 )
84th Special Warfare Brigade "Night Tiger" (「暗夜之虎」特战第84旅 )
85th Special Warfare Brigade "Highland Snow Leopard" (「高原雪豹」特战第85旅 )
Hong Kong Special Battalion (香港特种营 )
Macau Special Company (澳門特种连 )
Academy of Airborne Troops
Navy
Marine Special Operations Brigade "Scaly Dragon" (海军陆战队特种作战旅 (蛟龍) )
Marine Corps 1st Brigade Amphibious Reconnaissance Special Team (海军陆战队第1旅两栖侦察特战队 )
Marine Corps 2nd Brigade Amphibious Reconnaissance Special Team (海军陆战队第2旅两栖侦察特战队 )
Air Force
Airborne Corps Special Operations Brigade "Thunder God" (中国人民解放军空降兵军特种作战旅(雷神) )
People's Liberation Army Air Force Airborne Corps (中國人民解放軍空降兵軍 )
127th Airborne Brigade (127空降旅 )
128th Airborne Brigade (128空降旅 )
130th Airborne Brigade (130空降旅 )
131st Airborne Brigade (131空降旅 )
133rd Airborne Brigade (133空降旅 )
134th Airborne Brigade (134空降旅 )
China (Republic of China/“Taiwan”)
Army
Army Special Operations Command (陸軍特戰指揮部 - Lùjūn Tè Zhàn Zhǐhuī Bù)
1st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Might" (特種作戰第一營 "威" - Tèzhǒng Zuòzhàn Dì Yī Yíng "Wēi")
2nd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Dare" (特種作戰第二營 "敢" - Tèzhǒng Zuòzhàn Dì Èr Yíng "Gǎn")
3rd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Firm" (特種作戰第三營 "剛" - Tèzhǒng Zuòzhàn Dì Sān Yíng "Gāng")
4th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Fierce" (特種作戰第四營 "猛" - Tèzhǒng Zuòzhàn Dì Sì Yíng "Měng")
5th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Strong" (特種作戰第五營 "強" - Tèzhǒng Zuòzhàn Dì Wǔ Yíng "Qiáng")
High Altitude Special Service Squadron (高空特種勤務中隊 - Gāokōng Tèzhǒng Qínwù Zhōngduì)
Army Airborne Training Center (陸軍空降訓練中心 - Lùjūn Kōngjiàng Xùnliàn Zhōngxīn)
Navy
Marine Corps
Amphibious Reconnaissance Unit (兩棲偵搜大隊 - Liǎngqī Zhēn Sōu Dàduì)
Colombia
Army
19th Airborne Infantry Battalion "General Joaquín París" (Batallón de Infantería Aerotransportado No. 19 "General Joaquín París")
20th Airborne Infantry Battalion "" (Batallón de Infantería Aerotransportado No. 20 "General Manuel Roergas Serviez Medina")
21st Airborne Infantry Battalion "Battle of Vargas Swamp" (Batallón de Infantería Aerotransportado No. 21 "Batalla de Pantano de Vargas")
28th Airborne Infantry Battalion "Colombia" (Batallón de Infantería Aerotransportado No. 28 "Colombia")
31st Airborne Infantry Battalion "Rifles" (Batallón de Infantería Aerotransportado N°31 "Rifles")
7th Airborne Engineers Battalion "General Carlos Albán" (Batallón de Ingenieros Aerotransportado No. 7 "General Carlos Albán")
18th Airborne Cavalry Group "General " (Grupo de Caballería Aerotransportado No. 18 "General Gabriel Revéiz Pizarro")
Military Parachuting School (Escuela de Paracaidismo Militar)
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 (Comando Conjunto de Operaciones Especiales)
Army
Special Forces Division (División de Fuerzas Especiales)
1st Special Forces Regiment (1° Regimiento de Fuerzas Especiales)
2nd Special Forces Regiment (2° Regimiento de Fuerzas Especiales)
3rd Special Forces Regiment (3° Regimiento de Fuerzas Especiales)
Navy
Marine Infantry Special Forces Battalion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Infantería de Marina)
Air Force
Special Air Commandos Group (Agrupación de Comandos Especiales Aéreos)
Congo-Brazzaville (Republic of Congo)
Parachute Commando Group (Groupement Para-Commando)
102nd Airborne Battalion (102ème Bataillon Aéroporté)
Congo-Kinshasa (Democratic Republic of Congo)
31st Fast Reaction Brigade (31e Brigade de Réaction Rapide)
three Para-Commando Battalions
Airborne Troops Training Center (Centre d'Entraînement des Troupes Aéroportées)
Croatia
Special Operations Command (Zapovjedništvo Specijalnih Snaga)
1st Special Forces Group (1. Grupa Specijalnih Snaga)
2nd Special Forces Group (2. Grupa Specijalnih Snaga)
Commando Company (Komando Satnija)
Cuba
Airborne Brigade (Brigada Aerotransportada)
(Brigada Móvil de Tropas Especiales "Avispas Negras")
National Special Troops School "Baraguá" (Escuela Nacional de Tropas Especiales "Baraguá")
Cyprus (Republic of Cyprus)
Raiders Command (Διοίκηση Kαταδρομών - Dioíkisi Katadromón)
Underwater Demolition Team (Ομάδες Υποβρυχίων Καταστροφών - Omádes Ypovrychíon Katastrofón)
Cyprus (Turkish Republic of Northern Cyprus)
Parachute and Commando Training Battalion (Hava Indirme ve Komando Eğitim Tabur)
Czech Republic
601st Special Forces Group "General Moravec" (601.Skupina Speciálních Sil "Generála Moravce")
43rd Airborne Regiment (43.Výsadkový Pluk), including:
Airborne Training Center (Středisko Výsadkové Přípravy)
Denmark
Special Operations Command (Specialoperationskommandoen)
Army
Light Infantry Corps (Jægerkorpset)
Navy
Frogman Corps (Frømandskorpset)
Djibouti
National Gendarmerie Intervention Group (Groupe d'Intervention de la Gendarmerie Nationale)
Dominican Republic
Air Force
Special Forces Command "Brigadier General Freddy Franco Diaz" (Comando de Fuerzas Especiales "General de Brigada Freddy Franco Díaz")
Ecuador
Army
9th Special Forces Brigade "Fatherland" (Brigada Fuerzas Especiales Nº 9 "Patria")
25th Special Forces Group "South Base" (Grupo de Fuerzas Especiales Nº 25 "Base Sur")
26th Special Forces Group "Cenepa" (Grupo de Fuerzas Especiales Nº 26 "Cenepa")
27th Special Forces Group "General Miguel Iturralde" (Grupo de Fuerzas Especiales Nº 27 "General Miguel Iturralde")
53rd Special Forces Group "Rayo" (Grupo de Fuerzas Especiales Nº 53 "Rayo")
Special Operations Group "Ecuador" (Grupo Especial de Operaciones "Ecuador")
9th Special Forces School "Captain Alejandro Romo Escobar" (Escuela de Fuerzas Especiales Nº 9 "Capitán Alejandro Romo Escobar")
Navy
21st Marine Infantry Battalion "" - Special Operations (Batallon de Infanteria Marina N°21 "Jaramijó" - Operaciones Especiales)
Air Force
Air Force Special Operations Group (Grupo de Operaciones Especiales de la Fuerza Aérea)
Egypt
414th Parachute Brigade
176th Mechanized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224th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225th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226th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Parachute Reconnaissance Company
Parachute Forces School (مدرسة قوات المظلات - Madrasat Quwwat al-Mizallat)
El Salvador
Special Forces Command (Comando de Fuerzas Especiales)
Army
Special Operations Group (Grupo de Operaciones Especiales)
Air Force
Parachute Battalion (Batallón de Paracaidistas)
Estonia
Special Operations Force (Erioperatsioonide Väejuhatus)
Special Operations Group (Erioperatsioonide Grupp)
Eswatini (Swaziland)
one Paratrooper platoon
Ethiopia
102nd Airborne Division (አየር ወለድ 102ኛ ክፍለ ጦር - Āyeri Weledi 102nya Kifile T'ori)
Fiji
Special Operations Company
Finland
Army
Light Infantry Regiment "Utti" (Utin Jääkärirykmentti)
"Special Light Infantry Battalion"
Parachute Light Infantry Company (Laskuvarjojääkärikomppania)
Special Light Infantry Company (Erikoisjääkärikomppania)
Navy
Coastal Brigade Special Operations Department (Rannikkoprikaatin Erikoistoimintaosasto)
France
Army
Special Forces Command (Land) (Commandement des Forces Spéciales Terre)
1st Marine Infantry Parachute Regiment (1 Régiment de Parachutistes d'Infanterie de Marine)
13th Parachute Dragoon Regiment (13 Régiment de Dragons Parachutistes)
11th Parachute Brigade (11 Brigade Parachutiste)
Commando Parachute Group (Groupement des Commandos Parachutistes)
1st Parachute Hussar Regiment (1Régiment de Hussards Parachutistes)
1st Parachute Chasseur Regiment (1 Régiment de Chasseurs Parachutistes)
2nd Foreign Parachute Regiment (2 Régiment Étranger de Parachutistes)
3rd Marine Infantry Parachute Regiment (3 Régiment de Parachutistes d'Infanterie de Marine)
8th Marine Infantry Parachute Regiment (8 Régiment de Parachutistes d'Infanterie de Marine)
(1 Régiment du Train Parachutiste)
35th Parachute Artillery Regiment (35 Régiment d'Artillerie Parachutiste)
17th Parachute Engineer Regiment (17 Régiment du Génie Parachutiste)
(11 Compagnie de Commandement et de Transmissions Parachutiste)
Airborne Troops School (École des Troupes Aéroportées)
11th Parachute Brigade Troops Initial Formation Centre / 6th Marine Infantry Parachute Regiment (Centre de Formation Initiale des Militaires du rang 11 Brigade Parachutiste / 6 Régiment de Parachutistes d'Infanterie de Marine)
2nd Marine Infantry Parachute Regiment (2 Régiment de Parachutistes d'Infanterie de Marine)
(3 Régiment du Matériel)
1st Mobility Maintenance Company (1 Compagnie de Maintenance Mobilité)
2nd Mobility Maintenance Company (2 Compagnie de Maintenance Mobilité)
(14 Régiment d'Infanterie et de Soutien Logistique Parachutiste)
2nd Combatant Support Company (Paratrooper) (2 Compagnie de Soutien du Combattant (Parachutiste))
(Plongeurs du Combat du Génie)
National Commando Training Center / 1st Shock Regiment (Centre National d'Entraînement Commando / )
Navy
Navy Commandos (Commandos Marine)
Commando Hubert
Air Force
"Air Special Forces Brigade"
Air Commando Force Wing (Escadre Force Commando Air)
"10th Air Force Parachute Commando"
(30th Air Force Parachute Commando)
Flying Jump Air Center (Centre Air de Sauts en Vol)
(Air Force Combatants Operational Preparation Center)
Air Protection Force (Force Protection Air)
("s0th Air Force Parachute Commando")
Gendarmerie
National Gendarmerie Intervention Group (Groupe d'Intervention de la Gendarmerie Nationale)
Joint
Action Service of the External Security General Directorate (Service d'Action de la Direction Générale de la Sécurité Ectérieure)
Parachute Reservists Instruction Center (Centre d'Instruction des Réservistes Parachutistes)
Parachute Special Instruction Center (Centre Parachutiste d'Instruction Spécialisée)
Parachute Special Training Center (Centre Parachutiste d'Entraînement Spécialisé)
Parachute Special Training Center for Maritime Operations (Centre Parachutiste d'Entraînement aux Opérations Maritimes)
Military Health Service (Service de Santé des Armées)
eight Parachutist Surgical Detachments (Antenne Chirurgicale Parachutiste)
Gabon
1st Parachute Regiment (1er Régiment Parachutiste)
Georgia
Special Operations Forces (სპეციალური ოპერაციების ძალები)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East (სპეციალური ოპერაციების ბატალიონი აღმოსავლეთ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West (სპეციალური ოპერაციების ბატალიონი დასავლეთში ), including:
Naval Special Forces Squadron (საზღვაო სპეციალური დანიშნულების რაზმი სოძ-ის )
Special Training Center "Major Gela Chedia" (მაიორ გელა ჭედიას სახელობის სპეციალური დანიშნულების სასწავლო ცენტრი , including:
Parachute Training School (საპარაშუტო მომზადების სკოლა )
Germany
Army
Rapid Forces Division (Division Schnelle Kräfte)
1st Airborne Brigade "Saarland"]]
Headquarters and Signals Company (Stabs- und Fernmeldekompanie)
Fallschirmjägerregiment 26
Fallschirmjägerregiment 31
260th Airborne Reconnaissance Company]] (Luftlandeaufklärungskompanie 260)
Luftlandeaufklärungskompanie 310
260th Airborne Engineer Company
270th Airborne Engineer Company
(Airborne/Air-transport School)
Kommando Spezialkräfte (Special Forces Command)
Navy
Kommando Spezialkräfte Marine (Navy Special Forces Command)
Kampfschwimmerkompanie (Combat Swimmer Company)
Air Force
Kampfretter (air force combat rescuemen)
Ghana
69 Airborne Force
Greece
Army
1st Raider/Paratrooper Brigade (1η Ταξιαρχία Kαταδρομών-Αλεξιπτωτιστών)
1st Raider Regiment (1ο Σύνταγμα Καταδρομών)
2nd Paratrooper Regiment (2ο Σύνταγμα Αλεξιπτωτιστών)
Special Paratrooper Section
Paratrooper School (Σχολή Αλεξιπτωτιστών)
Mountain Raiders Company (Λόχος Ορεινών Καταδρομών)
Navy
Underwater Demolition Command (Διοίκηση Υποβρυχίων Καταστροφών)
Air Force
31st Search and Rescue Operations Squadron "Achilles" (31η Μοίρα Επιχειρήσεων Έρευνας Διάσωσης "Αχιλλέας")
Guatemala
Special Operations Brigade "Brigadier " (Brigada de Operaciones Especiales "General de Brigada Pablo Nuila Hub")
Special Forces Battalion "Kaibiles"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Kaibiles")
Parachute Brigade "General Felipe Cruz" (Brigada de Paracaidistas "General Felipe Cruz")
1st Parachute Battalion (I Batallón de Paracaidistas)
2nd Parachute Battalion (II Batallón de Paracaidistas)
Military Parachutist School (Escuela Militar de Paracaidismo)
Guinea
Commando Special Battalion (Bataillon Speciale des Commandos)
Independent Airborne Troops Battalion (Bataillon Autonome des Troupes Aéroportées)
Guyana
31 Special Forces Squadron
Honduras
Special Operations Command (Comando de Operaciones Especiales)
1st Special Forces Battalion (1º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2nd Airborne Infantry Battalion (Special Tactical Group) (2º Batallón de Infantería Aerotransportado (Agrupamiento Táctico Especial))
Armed Forces Parachutist School (Escuela de Paracaidismo de las Fuerzas Armadas)
Hungary
HDF 2nd vitéz Bertalan Árpád Special Operations Brigade
HDF 34th Bercsényi László Special Forces Battalion
HDF 88th Light Mixed Battalion
Deep Reconnaissance Company, HDF 24. Bornemissza Gergely Reconnaissance Regiment
HDF 86th Szolnok Helicopter Base Special Parachute Training Group
India
Army
Para (Special Forces)
50th Parachute Brigade
two Parachute Battalions (on rotation from the Parachute Regiment units listed below)
one Parachute Special Forces Battalion (on rotation from the Parachute Regiment units listed below)
one Parachute Field Regiment (Artillery) (on rotation from the Parachute Artillery units listed below)
60 Parachute Field Hospital
411th (Independent) Parachute Field Company, Bombay Sappers
622 Parachute Composite Company (Army Service Corps)
50th (Independent) Parachute Brigade (Ordnance Field Park)
50th (Independent) Parachute Brigade Signal Company
2 (Independent) Parachute Field Workshop Company (Electronics and Mechanical Engineers)
252 (Para) Air Defence Battery
50th (Independent) Parachute Brigade Provost Section
President's Body Guard Pathfinder Company
Parachute Regiment (पैराशूट रेजिमेंट )
Parachute Special Forces Battalions (पैरा स्पेशल फोर्सेज़ )
1st battalion - 1 PARA (SF)
2nd battalion - 2 PARA (SF)
3rd battalion - 3 PARA (SF)
4th battalion - 4 PARA (SF)
9th battalion - 9 PARA (SF)
10th battalion - 10 PARA (SF)
11th battalion - 11 PARA (SF)
12th battalion - 12 PARA (SF)
13th battalion - 13 PARA (SF)
21st battalion - 21 PARA (SF)
Parachute Airborne Battalions (पैराशूट बटालियन )
5th battalion - 5 PARA (SF/Airborne)
6th battalion - 6 PARA (SF/Airborne)
7th battalion - 7 PARA (SF/Airborne)
23rd battalion - 23 PARA (SF/Airborne)
29th battalion - 29 PARA (SF/Airborne)
Parachute Battalions (Territorial Army) (पैराशूट बटालियन (प्रादेशिक सेना) )
106th Infantry Battalion (Territorial Army) (based at Bengaluru, Karnataka)
116th Infantry Battalion (Territorial Army) (based at Devlali, Maharashtra)
31st Battalion - 31 PARA (Commando), Rashtriya Rifles (31. बटालियन (कमांडो), राष्ट्रीय राइफल्स )
9th Parachute Field Artillery Regiment
17th Parachute Field Artillery Regiment
Navy
Marine Commando Force (मरीन कमांडो फोर्स )
Air Force
"Garuda" Commando (गरुड़ कमांडो )
Paratroopers Training School (पैराट्रूपर्स ट्रेनिंग स्कूल )
Indonesia
Army
Special Forces Command (Komando Pasukan Khusus)
1st Parachute Commando Group (Grup 1 Para Komando)
11th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Batalyon Para Komando 11)
12th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Batalyon Para Komando 12)
13th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Batalyon Para Komando 13)
14th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Batalyon Para Komando 14)
2nd Parachute Commando Group (Grup 2 Para Komando)
21st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Batalyon Para Komando 21)
22nd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Batalyon Para Komando 22)
23rd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Batalyon Para Komando 23)
Special Forces Instruction and Training Unit (Satuan Pendikan dan Latihan Pasukan Khusus)
81st Special Forces Counterterrorism Unit (Satuan Penanggulangang Teror 81 Pasukan Khusus)
Army Strategic Command (Komando Strategis Angkatan Darat)
1st Infantry Division (Divisi Infanteri 1)
17th Airborne Infantry Brigade (Brigade Infanteri Lintas Udara 17)
(Batalyon Infanteri Para Raider 305)
(Batalyon Infanteri Para Raider 328)
(Batalyon Infanteri Para Raider 330)
2nd Infantry Division (Divisi Infanteri 2)
(Brigade Infanteri Lintas Udara 18)
(Batalyon Infanteri Para Raider 501)
(Batalyon Infanteri Para Raider 502)
(Batalyon Infanteri Para Raider 503)
3rd Infantry Division (Divisi Infanteri 3)
(Brigade Infanteri Lintas Udara 3)
(Batalyon Infanteri Para Raider 431)
(Batalyon Infanteri Para Raider 432)
(Batalyon Infanteri Para Raider 433)
Combat Reconnaissance Platoon (Peleton Intai Tempur)
Navy
"Prawn Net" Detachment (Detasemen Jala Mangkara)
Air Force
Quick Reaction Special Forces Corps (Korps Pasukan Gerak Cepat)
"Bravo 90" Detachment (Satuan "Bravo 90")
(Danwing I Pasukan Khas)
461st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Prajurit Batalyon Komando 461)
(Prajurit Batalyon Komando 463)
(Prajurit Batalyon Komando 467)
( Danwing II Pasukan Khas)
(Prajurit Batalyon Komando 464)
466th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Prajurit Batalyon Komando 466)
468th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Prajurit Batalyon Komando 468)
(Danwing III Pasukan Khas)
462nd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Prajurit Batalyon Komando 462)
465th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Prajurit Batalyon Komando 465)
469th Parachute Commando Battalion (Prajurit Batalyon Komando 469)
Iran
Army
55th Airborne Brigade (تیپ ۵۵ هوابرد )
126th Airborne Battalion (گردان هوابرد ۱۲۶ )
135th Airborne Battalion (گردان هوابرد ۱۳۵ )
146th Airborne Battalion (گردان هوابرد ۱۴۶)
65th Airborne Special Forces Brigade (تیپ ۶۵ نیروهای ویژه هوابرد )
Army Ranger and Parachuting School (کمیته تکاور و چتربازی ارتش )
Revolutionary Guards
33rd Al-Mahdi Airborne Brigade (تیپ ۳۳ هوابرد المهدی )
66th Airborne Special Forces Brigade
"Sabre" Special Brigade (یگان ویژه صابرین )
Sepah Navy Special Force (نیروی ویژه دریایی سپاه )
Ireland
Army Ranger Wing (Sciathán Fiannóglaigh an Airm)
Israel
Army
98th Parachute Division (Reserve) "Fire Formation"
35th Parachute Brigade "Flying Serpent"
101st Parachute Battalion "Cobra"
202nd Parachute Battalion "Viper"
890th Parachute Battalion "Adder"
5135th Reconnaissance Battalion "Flying Serpent"
55th Parachute Brigade (Reserve) "Tip of the Spear"
7063rd Parachute Battalion
8150th Parachute Battalion
9264th Parachute Battalion
8171st Reconnasissance Battalion
551st Parachute Brigade (Reserve) "Arrows of Fire"
697th Parachute Battalion
699th Parachute Battalion
7008th Parachute Battalion
89th Commando Brigade "Courage"
Unit 212 - Maglan ("Ibis")
Unit 217 - Duvdevan ("Cherry")
Unit 621 - Egoz ("Walnut")
146th Armored Division (Reserve) "Bang"
226th Parachute Brigade (Reserve) "Eagle Formation" (Otzvat Nesher)
7056th Parachute Battalion
9255th Parachute Battalion
9263rd Parachute Battalion
99th Infantry Division (Reserve) "Flash"
646th Parachute Brigade (Reserve) "Sky Foxes"
420th Parachute Battalion
466th Parachute Battalion
8105th Parachute Battalion
Engineering Unit for Special Tasks "Diamond"
Unit 269 - Sayeret Matkal - General Staff Reconnaissance Unit
Parachute School
Air Force
7th Wing
Unit 5101 - Shaldag Unit "Kingfisher"
Search and Rescue Flight 669
Navy
Shayetet 13 (Flotilla 13)
Italy
Army
Folgore Parachute Brigade (Brigata Paracadutisti "Folgore")
183rd Paratroopers Regiment "Nembo" (183º Reggimento Paracadutisti "Nembo")
1st Paratroopers Battalion "" (1º Battaglione Paracadutisti "Grizzano")
186th Paratroopers Regiment "Folgore" (186º Reggimento Paracadutisti "Folgore")
(5th Paratroopers Battalion "El Alamein")
187th Paratroopers Regiment "Lightning" (187º Reggimento Paracadutisti "Folgore")
2nd Paratroopers Battalion "Tarquinia" (2º Battaglione Paracadutisti "Tarquinia")
Regiment "Savoia Cavalleria" (3rd) (Reggimento "Savoia Cavalleria" (3º))
8th Parachute Demolition Engineers Regiment "Lightning" (8º Reggimento Genio Guastatori Paracadutisti "Folgore")
185th Paratroopers Artillery Regiment "Folgore" (185º Reggimento Artiglieria Paracadutisti "Folgore")
1st Paratroopers Artillery Group "Viterbo" (1º Gruppo Artiglieria Paracadutisti "Viterbo")
Logistic Regiment "Folgore" (Reggimento Logistico "Folgore")
Headquarters and Tactical Supports Unit "Lightning" (Reparto Comando e Supporti Tattici "Folgore")
Parachuting Training Center (Centro Addestramento di Paracadutismo)
3rd Paratroopers Battalion "Poggio Rusco" (3º Battaglione Paracadutisti "Poggio Rusco")
Army Special Forces Command (Comando delle Forze Speciali dell'Esercito)
9th Paratroopers Assault Regiment "Moschin Hill" (9º Reggimento d'Assalto Paracadutisti "Col Moschin"),
1st Raiders Battalion (1º Battaglione Incursori)
Raiders Training Unit (Reparto Addestramento Incursori)
Special Operations K9 Unit (Nucleo Cinofili per le Operazioni Speciali))
Special Operations Training Center (Centro Addestramento per Operazioni Speciali)
Special Operations Support Unit (Reparto Supporti alle Operazioni Speciali)
4th Alpini Parachutist Regiment (4º Reggimento Alpini Paracadutisti)
Alpini Paratroopers Battalion "Monte Cervino"" (Battaglione Alpini Paracadutisti "Monte Cervino")
Alpini Paratroopers Battalion "Intra" - Operational Support Battalion (Battaglione Alpini Paracadutisti "Intra" - Battaglione Supporto Operativo)
185th Paratroopers Reconnaissance Target Acquisition Regiment "Folgore" (185º Reggimento Paracadutisti Ricognizione Acquisizione Obiettivi "Folgore")
Navy
Comando Raggruppamento Subacquei e Incursori Teseo Tesei (Raggruppamento Subacquei e Incursori "Teseo Tesei")
Operational Raiders Group (Gruppo Operativo Incursori)
Submarine Parachute Assistance Section of the Operational Divers Group (Nucleo SPAG del Gruppo Operativo Subacquei)
1st San Marco Regiment (1º Reggimento Marina "San Marco")
Parachute Swimmers Company (Compagnia Nuotatori Paracadutisti)
Air Force
17º Stormo Incursori
Raiders Group (Gruppo Incursori)
Carabinieri
1st Paratroopers Carabinieri Regiment "Tuscania" (1º Reggimento Carabinieri Paracadutisti "Tuscania")
1st Carabinieri Paratroopers Battalion "" (1º Battaglione Carabinieri Paracadutisti "Eluet el Asel")
Gruppo di intervento speciale
Ivory Coast
1st Commando Parachutists Battalion (1er Bataillon des Commandos Parachutistes)
Japan
Japan Ground Self-Defense Force
Ground Component Command (陸上総隊)
1st Airborne Brigade (第1空挺団)
Headquarters Company (団本部中隊 ), including:
Reconnaissance Company (偵察小隊 )
Landing Guidance Company (降下誘導小隊 )
(第1普通科大隊 )
(第2普通科大隊 )
(第3普通科大隊 )
(空挺特科大隊 )
(空挺後方支援隊 )
Signal Company (通信中隊 -)
Engineer Company (施設中隊 )
(空挺教育隊 )
Special Operations Group (特殊作戦群 )
Japan Maritime Self-Defense Force
Special Boarding Unit (特別警備隊 )
Japan Air Self-Defense Force
Pararescue detachments, Air Rescue Wing (航空救難団 )
Jordan
Royal Special Operation Forces Group "King Abdullah II"
1st Special Unit
2nd Special Unit
Rapid Intervention Brigade "Sheikh Muhamad bin Zayid Al Nahyan" ( لواء الشيخ محمد بن زايد آل نهيان التدخل السريع )
61st Rapid Intervention Battalion - Raiders (كتيبة التدخل السريع / 61 المغاوير )
81st Rapid Intervention Battalion (كتيبة التدخل السريع/81 )
91st Rapid Intervention Battalion (كتيبة التدخل السريع/91 )
Kazakhstan
Air Assault Forces ( Десанттық-шабуылдаушы Әскерлері)
35th Independent Guards Air Assault Brigade (35-ші жеке гвардиялық десанттық-шабуылдаушы бригадасы )
36th Independent Air Assault Brigade (36-ші жеке десанттық-шабуылдаушы бригадасы )
37th Independent Air Assault Brigade (37-ші жеке десанттық-шабуылдаушы бригадасы )
38th Independent Air Assault Brigade (38-ші жеке десанттық-шабуылдаушы бригадасы )
Independent Intelligence Battalion
Independent Signal Battalion
Kenya
Special Operations Regiment (Kenya)
20th Parachute Battalion
30th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40th Rangers Strike Force.
Korea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North Korea”)
Army
26th Air Landing Brigade (제26항공육전여단 - je26 Hang Gong Yugjeon Yeodan)
38th Air Landing Brigade (제38항공육전여단 - je38 Hang Gong Yugjeon Yeodan)
45th Air Landing Brigade (제45항공육전여단 - je45 Hang Gong Yugjeon Yeodan)
48th Air Landing Brigade (제48항공육전여단 - je48 Hang Gong Yugjeon Yeodan)
58th Air Landing Brigade (제58항공육전여단 - je58 Hang Gong Yugjeon Yeodan)
525th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제525특수작전대대 - je525 Teugsujagjeondaedae)
Air Force
11th Airborne Snipers Brigade (제11항공저격여단 - je11 Hang Gongjeogyeog Yeodan)
16th Airborne Snipers Brigade (제16항공저격여단 - je16 Hang Gongjeogyeog Yeodan)
21st Airborne Snipers Brigade (제21항공저격여단 - je21 Hang Gongjeogyeog Yeodan)
Korea (Republic of Korea/“South Korea”)
Army
Army Special Forces Command "Lion" (육군특수전사령부 "사자" - Yuggunteugsujeonsalyeongbu "Saja")
(1 공수특전여단 "독수리" - 1 Gongsuteugjeon-Yeodan "Dogsuli")
1st Special Forces Battalion (제1특전대대 - je 1 Teugjeon Daedae)
2nd Special Forces Battalion (제2특전대대 - je 2 Teugjeon Daedae)
3rd Special Forces Battalion (제3특전대대 - je 3 Teugjeon Daedae)
5th Special Forces Battalion (제5특전대대 - je 5 Teugjeon Daedae)
3rd Airborne Special Forces Brigade "Flying Tiger" (3 공수특전여단 "비호" - 3 Gongsuteugjeon-Yeodan "Biho")
11th Special Forces Battalion (제11특전대대 - je 11 Teugjeon Daedae)
12th Special Forces Battalion (제12특전대대 - je 12 Teugjeon Daedae)
13th Special Forces Battalion (제13특전대대 - je 13 Teugjeon Daedae)
15th Special Forces Battalion (제15특전대대 - je 15 Teugjeon Daedae)
7th Airborne Special Forces Brigade "Pegasus" (7공수특전여단 "천마" - 7 Gongsuteugjeon-Yeodan "Cheonma")
31st Special Forces Battalion (제31특전대대 - je 31 Teugjeon Daedae)
32nd Special Forces Battalion (제32특전대대 - je 32 Teugjeon Daedae)
33rd Special Forces Battalion (제33특전대대 - je 33 Teugjeon Daedae)
35th Special Forces Battalion (제35특전대대 - je 35 Teugjeon Daedae)
9th Airborne Special Forces Brigade "Ghost" (9 공수특전여단 "유령" - 9 Gongsuteugjeon-Yeodan "Yulyeong")
51st Special Forces Battalion (제51특전대대 - je 51 Teugjeon Daedae)
52nd Special Forces Battalion (제52특전대대 - je 52 Teugjeon Daedae)
53rd Special Forces Battalion (제53특전대대 - je 53 Teugjeon Daedae)
55th Special Forces Battalion (제55특전대대 - je 55 Teugjeon Daedae)
11th Airborne Special Forces Brigade "Golden Bat" (11 공수특전여단 "황금박쥐" - 11 Gongsuteugjeon-Yeodan "Hhwang-Geumbagjwi")
61st Special Forces Battalion (제61특전대대 - je 61 Teugjeon Daedae)
62nd Special Forces Battalion (제62특전대대 - je 62 Teugjeon Daedae)
63rd Special Forces Battalion (제63특전대대 - je 63 Teugjeon Daedae)
65th Special Forces Battalion (제65특전대대 - je 65 Teugjeon Daedae)
(13 특수임무여단 "흑표" - 13 Teugsu-Immuyeodan "Heugpyo)
71st Special Missions Battalion (제71특수임무대대 - je 71 Teugsu-Immu Daedae)
72nd Special Missions Battalion (제72특수임무대대 - je 72 Teugsu-Immu Daedae)
73rd Special Missions Battalion (제73특수임무대대 - je 73 Teugsu-Immu Daedae)
75th Special Missions Battalion (제75특수임무대대 - je 75 Teugsu-Immu Daedae)
(국제평화지원단 (온누리) – Gugjepyeonghwajiwondan "Onnuri")
201st Special Operations Brigade "Golden Eagle" (201특공여단 "황금독수리" 201 Teuggong-Yeodan "Hwang-Geumdogsuli")
203rd Special Operations Brigade "Tiger Dragon" (203 특공여단 "용호" - 203 Teuggong-Yeodan "Yongho")
707th Special Mission Battalion "White Tiger" (707특수임무대대 "백호" - 707 Teugsu-Immu Daedae "Baegho")
Navy
Special Warfare Flotilla (해군 특수전전단 - Haegun Teugsujeonjeondan)
Marines
21st Airborne Expeditionary Battalion (제21공정대대 - je21Gongjeongdaedae)
31st Airborne Expeditionary Battalion (제31공정대대 - je31Gongjeongdaedae)
73rd Airborne Expeditionary Battalion (제73공정대대 - je73Gongjeongdaedaee)
Kuwait
one Special Forces Unit
Kyrgyzstan
Army
24th Independent Special Purpose Battalion "Snow Leopard" (Өзгөчө Бригада Ой-ниети Жөнүндө 25-Өзүнчө "Илбирс")
25th Independent Special Purpose Brigade "Scorpion" (Өзгөчө Бригада Ой-ниети Жөнүндө 25-Өзүнчө )
National Guard
Special Forces Battalion "Panther" (Батталион Атайын Көздөлгөн "Чайка" )
Latvia
Special Operations Command (Speciālo Operāciju Pavēlniecība)
Special Task Unit (Speciālo Uzdevumu Vienība)
Lesotho
one "Recce" (Special Forces) unit
Lithuania
Army
Reconnaissance Company, Mechanized Infantry Brigade "Iron Wolf" (Zvalgybos Kompanija, Mechanizuotoji Pėstininkų Brigada "Geležinis Vilkas")
Parachute Training Center (Parašiutinio Rengimo Centras)
Special Operations Force (Specialiųjų Operacijų Pajėgos)
Army
Light Infantry Battalion "Vytautas the Great" ("Ytauto Didžiojo" Jegerių Batalionas)
Navy
Combat Divers Service (Kovinių Narų Tarnyba)
Air Force
Special Operations Team (Specialiųjų Operacijų Grandis)
Macedonia (Republic of North Macedonia)
Army
Regiment for Special Operations (Полк за специјални операции - Polk za Specijalni Operacii)
Battalion for Special Purposes "Wolves" (Баталјон за специјални намени "Волци" - Bataljon za Specijalni Nameni "Volci")
Rangers Battalion (Ренџерски баталјон - Rendžerski Bataljon)
Air Force
501st Special Purposes Platoon "Falcons" (501.Вод за Специални Намени "Соколи" - 501. Vod za Specijalne Razmene "Sokoli")
Madagascar
1st Intervention Forces Regiment (1er Régiment des Forces d'Intervention)
Malawi
Parachute Battalion
Malaysia
Army
10th Parachute Brigade (Briged ke-10 Payung Terjun)
8th Battalion Royal Ranger Regiment (Para) (Batalion ke-8 Rejimen Renjer Diraja (Para))
9th Battalion Royal Malay Regiment (Para) (Batalion ke-9 Rejimen Askar Melayu Diraja (Para))
17th Battalion Royal Malay Regiment (Para) (Batalion ke-17 Rejimen Askar Melayu Diraja (Para))
18th Battalion Royal Malay Regiment (Para) (Batalion ke-18 Rejimen Askar Melayu Diraja (Para))
1st Royal Artillery Regiment (Para) (Rejimen Pertama Artileri Diraja (Para))
Armoured Squadron (Para) (Skuadron Armor Diraja (Para))
10th Squadron Royal Signals Regiment (Para) (10 Skuadron Semboyan Diraja (Para))
361th Battery Air Defence Royal Artillery Regiment (Para) (361 Bateri Rejimen Artileri Diraja PU (Para))
10th Squadron Royal Engineer Regiment (Para) (10 Skuadron Askar Jurutera Diraja (Para))
Pathfinder Platoon (Para) (Platun Pandu Udara (Para))
Support Company (Para) (Kompeni Bantuan (Para))
Royal Military Police Corps Platoon (Para) (Kor Polis Tentera Diraja (Para))
Royal Medical Corps Company (Para) (Kompeni Perubatan (Para))
Maldives
Special Forces unit
Mali
(33ème Régiment des Commandos Parachutistes)
Mauritania
1st Paratrooper and Commando Battalion (الكتيبة الأولى للصاعقة و المظليين - Alkatibat Al'uwlaa Lilssaeiqat w Almazaliyiyn)
Mexico
Army
Special Reaction Force (Fuerza Especial de Reacción)
Navy
Commando Special Forces (Fuerzas Especiales de Comandos)
Special Forces Group of the Gulf (Grupo Fuerzas Especiales del Golfo)
Special Forces Group of the Pacific (Grupo Fuerzas Especiales del Pacifico)
Special Forces Group of the Center (Grupo Fuerzas Especiales del Centro)
(Fuerzas Especiales del Alto Mando)
Marine Infantry Parachute Rifle Battalion (Batallón de Infantería de Marina de Fusileros Paracaidistas)
Air Force
Parachute Rifle Brigade (Brigada de Fusileros Paracaidistas)
Headquarters Company (Compañía de Cuartel General)
1st Parachute Rifle Battalion (1º Batallón de Fusileros Paracaidistas)
2nd Parachute Rifle Battalion (2º Batallón de Fusileros Paracaidistas)
3rd Parachute Rifle Battalion (3º Batallón de Fusileros Paracaidistas)
(Fuerza Especial de la Brigada de Fusileros Paracaidistas)
4th Logistics Company (4ª Compañía de Intendencia)
Parachutist Training Center (Centro de Adiestramiento de Paracaidismo)
Moldova
Special Purpose Battalion "Lightning" (Batalionul cu Destinaţie Specială "Fulger")
Special Purpose Company (Companie cu Destinaţie Specială)
Parachutist Company (Compania de Parașutiști)
Mongolia
84th Air Landing Battalion (Aгаарын Десант 84-р Батальон - Agaaryn Dyesant 84-r Battalion)
Montenegro
Army
Special Forces Company (Чете Специјалних Снага - Čete Specijalnih Snaga)
Navy
Naval Detachment ( Поморскi Одред - Pomorski Odred)
Morocco
1st Parachute Infantry Brigade (لوائي جنود مظلات1 - Lwayiy Junud Mazallat 1)
2nd Parachute Infantry Brigade (لوائي جنود مظلات2 - Lwayiy Junud Mazallat 2)
Royal Gendarmerie Parachute Intervention Squadron (Escadron Parachutiste d'Intervention de la Gendarmerie Royale)
Airborne Troops Training Center (Centre d'Instruction des Troupes Aéroportés)
Myanmar
4th Military Operation Command (4. စစ်ဆင်ရေးကွပ်ကဲမှုဌာနချုပ် - 4. cacchangre: kwapkaihmu thanakhyup)
Namibia
one Special Forces unit
Parachute Training School
Nepal
Special Forces (No.10 Brigade) (विशेष सेना (न। १० ब्रिगेड) - Viśēṣa Sēnā (na.10 Brigēḍa))
23rd Parachute Battalion "Shree Bhairavnath" (२३ प्यारासुट बटालियन "श्री भैरवनाथ" - 23 Pyārāsuṭa Baṭāliyana "Śrī Bhairavanātha")
Special Forces Battalion "Shree Yuddha Bhairav" (विशेष सेना बटालियन "श्रीयुद्ध भैरव" - Viśēṣa Sēnā Baṭāliyana "Śrī Yud'dha Bhairava")
Para Training School (प्यारा प्रशिक्षण स्कूल - Pyārā Praśikṣaṇa Skūla)
Netherlands
Army
11th Airmobile Brigade "7th December" (11 Luchtmobiele Brigade "7 December")
11th Headquarters Company (11 Stafstafcompagnie)
11th Infantry Battalion "Garde Grenadiers en Jagers" (11 Infanteriebataljon Garde Grenadiers en Jagers)
12th Infantry Battalion "Regiment van Heutsz" (12 Infanteriebataljon Regiment Van Heutsz)
13th Infantry Battalion "Regiment Stoottroepen Prins Bernhard" (13 Infanteriebataljon Regiment Stoottroepen Prins Bernhard)
11th Brigade Reconnaissance Squadron "Regiment Huzaren van Boreel" (11 Brigadeverkenningseskadron Regiment Huzaren van Boreel)
11th Engineer Company (11 Geniecompagnie)
11th Repairs Company (11 Herstelcompagnie)
11th Supply Company (11 Bevoorradingscompagnie)
11th Medical Company (11 Geneeskundigecompagnie)
Commando Troops Corps (Korps Commandotroepen)
Defence Parachute School (Defensie Para School)
Marine Corps
11th (Parachute) Raiding Squadron
23rd (Parachute) Raiding Squadron
Maritime Special Operations Forces
New Zealand
Army
1st New Zealand Special Air Service Regiment
Air Force
Parachute Training and Support Unit
Nicaragua
Special Operations Command "Major General " (Comando de Operaciones Especiales "General de División Pedro Altamirano")
Niger
322nd Parachute Regiment
Nigeria
401st Special Forces Brigade
72nd Special Forces (Paratrooper) Battalion
Norway
Army
Armed Forces Special Command (Forsvarets Spesialkommando)
Navy
Navy Light Infantry Command (Marinejegerkommandoen)
Oman
Sultan of Oman's Parachute Regiment (سلطان فوج المظليين العماني - Sultan Fawj Alazaliiyn Aleumanii)
Sultan's Special Force ( قوات السلطان الخاصة - Qawat al-Sultaniya al-Khasah)
Pakistan
Army
50th Airborne Division
Special Service Group, with:
eight Special Forces Battalions
Parachute Training School
Navy
Special Service Group (Navy)
Pakistan Air Force
Special Services Wing
Paraguay
Air Force
Airborne Brigade "Silvio Pettirossi" (Brigada Aerotransportada "Silvio Pettirossi")
1st Parachute Battalion (Batallón de Paracaidistas Nº 1)
Parachute Packing and Maintenance and Air Resupply Section (Sección Doblaje y Mantenimiento de Paracaídas y Abastecimiento Aéreo)
Paratroopers School (Escuela de Paracaidistas)
Inter-Services
Joint Special Forces Battalion (Batallón Conjunto de Fuerzas Especiales)
Special Operations Company (Compañia de Operaciones Especiales)
Peru
Army
1st Special Forces Brigade "Maj.General Gonzalo Briceño Zevallos" (1ª Brigada de Fuerzas Especiales "Gen.Div. Gonzalo Briceño Zevallos")
39th Special Forces Battalion "Colonel "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Nº 39 "Coronel Juan Valer Sandoval")
40th Special Forces Battalion ""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Nº 40 "Guardia Chalaca")
3rd Special Forces Brigade (3ª Brigada de Fuerzas Especiales)
201st Special Forces Battalion "Colonel Guillermo Paz Bustamante"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Nº 201 "Coronel Guillermo Paz Bustamante")
313rd Special Forces Battalion "Colonel "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Nº 313 "Coronel Pablo Arguedas Hurtado")
6th Special Forces Brigade "Pachacutec" (6ª Brigada de Fuerzas Especiales "Pachacutec")
613th Special Forces Battalion "Captain Ilich Montesinos Quiroz"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Nº 613 "Capitán Ilich Montesinos Quiroz")
623rd Special Forces Battalion "Lieutenant Gerardo Iturraran García"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Nº 623 "Teniente Gerardo Iturraran García")
Army Paratrooper School (Escuela de Paracaidistas del Ejercito)
Navy
Special Operations Force (Fuerza de Operaciones Especiales)
Marine Corps
Commando Battalion "1st Lt. Leoncio Prado Gutierrez" (Batallón de Comandos "Teniente Primero Leoncio Prado Gutierrez")
Air Force
Air Force Commandos (Comandos de la Fuerza Aérea del Perú)
Paratrooper Company (Compañía de Paracaidistas)
Police
Los Sinchis (Dirección Táctica Rural "Los Sinchis")
Philippines
Army
Special Forces Regiment (Airborne)
1st Special Forces Battalion "Anytime Anywhwere"
2nd Special Forces Battalion "Sabretooth"
3rd Special Forces Battalion "Arrowhead"
4th Special Forces Battalion (Riverine) "Dolphin Warriors"
5th Special Forces Battalion "Primus Inter Pares"
6th Special Forces Battalion "Lionheart"
Special Forces Airborne School
Navy
Naval Special Operations Command
Marine Corps
Marine Special Operations Group
Air Force
710th Special Operations Wing
Poland
Army
6th Airborne Brigade "Brigadier General Stanisław Franciszek Sosabowski" (6 Brygada Powietrznodesantowa im. gen. bryg. Stanisława Franciszka Sosabowskiego)
"Lieutenant General " (6 Batalion Dowodzenia im. gen. broni. Józefa Kuropieski)
"Major General " (6 Batalion Powietrznodesantowy im. gen. dyw. Edwina Rozłubirskiego)
"Brigadier General " (16 Batalion Powietrznodesantowy im. gen. bryg. Mariana Zdrzałki)
"Captain " (18 Batalion Powietrznodesantowy im. kpt. Ignacego Gazurka)
"Major General Ignacy Prądzyński" (6 Batalion Logistyczny im. gen. dyw. Ignacego Prądzyńskiego)
6th Medical Security Group (6 Grupa Zabezpieczenia Medycznego)
Aeromobile-Parachute Training Center (Ośrodek Szkolenia Aeromobilno-Spadochronowego)
Special Forces Component Command (Dowództwo Komponentu Wojsk Specjalnych)
Army
Operational Maneuver Response Group Military Unit "Silent Unseen of the Home Army" (Jednostka Wojskowa Grupa Reagowania Operacyjno-Manewrowego im. Cichociemnych Spadochroniarzy Armii Krajowe)
Commandos Military Unit (Jednostka Wojskowa Komandosów)
AGAT Military Unit (Jednostka Wojskowa AGAT)
Navy
Formoza Military Unit (Jednostka Wojskowa Formoza)
Portugal
Army
Rapid Reaction Brigade (Brigada de Reacção Rápida)
15th Infantry Regiment (Regimento de Infantaria nº 15)
1st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1.º Batalhão de Infantaria Paraquedista)
(Regimento de Infantaria nº 10)
2nd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2.º Batalhão de Infantaria Paraquedista)
Paratroopers Regiment (Regimento de Paraquedistas)
(Batalhão Operacional Aeroterrestre)
Training Battalion (Batalhão de Formação)
Air-Land Pathfinders Company (Companhia de Percursores Aeroterrestres)
Air Supply Company (Companhia de Abastecimento Aéreo)
Technical Dogs Platoon (Pelotão Cinotécnico)
4th Artillery Regiment (Regimento de Artilharia Nº 4)
Reconnaissance Squadron, (Esquadrão de Reconhecimento - Regimento de Cavalaria N.º 3)
Special Operations Troops Centre (Centro de Tropas de Operações Especiais)
Special Operations Force (Força de Operações Especiais)
Navy
Special Actions Detachment (Destacamento de Ações Especiais)
Qatar
Joint Special Forces Command
Romania
Romanian Special Operations Forces Command (Comandamentul Forțelor pentru Operații Speciale")
51st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Vulturii" (Batalionul 51 Operații Speciale "Vulturii")
52nd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Băneasa-Otopeni" (Batalionul 52 Operații Speciale "Băneasa-Otopeni")
53rd Commando Battalion "Smaranda Brăescu" (Batalionul 630 Comando "Smaranda Brăescu")
313th Search Battalion "Burebista" (Batalionul 313 Cercetare "Burebista")
495th Parachute Battalion "Captain Ștefan Sovereth" (Batalionul 495 Parașutiști "Căpitan Ștefan Soverth")
Training Center for ISR, Paratroopers, Special operations and JTAC "Major General " (Centrul de Instruire pentru ISR, Parașutiști, Operații Speciale și JTAC "General-maior Grigore Baștan")
Russian Federation
Army
Russian Airborne Forces
7th Guards Mountain Air Assault Division
108th Guards Kuban Cossack Air Assault Regiment
247th Guards Air Assault Regiment
1141st Guards Artillery Regiment
3rd Anti-Aircraft Missile Regiment
162nd Reconnaissance Battalion
629th Engineer-Sapper Battalion
743rd Guards Signal Battalion
1681st Materials Supply Battalion
32nd Medical Unit (Airmobile)
967th Airborne Security Company
Radiolectronic Warfare Company
Unmanned Flying Company
76th Guards Air Assault Division
104th Guards Air Assault Regiment
234th Guards Air Assault Regiment "Holy Blessed Alexander Nevsky"
1140th Guards Artillery Regiment
4th Anti-Aircraft Missile Regiment
175th Guards Reconnaissance Battalion
656th Guards Engineer-Sapper Battalion
728th Guards Signal Battalion
1682nd Materials Supply Battalion
35th Medical Unit (Airmobile)
968th Airborne Security Company
Radiolectronic Warfare Company
Unmanned Flying Company
98th Guards Svir Air Assault Division "70th Anniversary of the Great October Revolution"
217th Guards Parachute Regiment
331st Guards Parachute Regiment
1065th Guards Artillery Regiment
5th Anti-Aircraft Missile Regiment
215th Guards Reconnaissance Battalion
661th Guards Engineer-Sapper Battalion
674th Guards Signal Battalion
1683rd Materials Supply Battalion
36th Medical Unit (Airmobile)
969th Airborne Security Company
Radiolectronic Warfare Company
Unmanned Flying Company
106th Guards Airborne Division "Tula"
"Dmitry Donskoy"
137th Guards Parachute Regiment
1182nd Guards Artillery Regiment
1st Anti-Aircraft Missile Regiment
173rd Guards Reconnaissance Battalion
388th Guards Engineer-Sapper Battalion
731st Guards Signal Battalion
1060th Materials Supply Battalion
39th Medical Unit (Airmobile)
970th Airborne Security Company
Radiolectronic Warfare Company
Unmanned Flying Company
45th Guards Special Purpose Brigade
218th Special Purpose Battalion
901st Special Purpose Battalion
11th Guards Air Assault Brigade
1st Air Assault Battalion
2nd Air Assault Battalion
3rd Air Assault Battalion
31st Guards Air Assault Brigade
1st Air Assault Battalion
2nd Air Assault Battalion
3rd Parachute Battalion
56th Guards Air Assault Brigade
1st Air Assault Battalion
2nd Air Assault Battalion
3rd Parachute Battalion
83rd Guards Air Assault Brigade
1st Air Assault Battalion
2nd Air Assault Battalion
3rd Air Assault Battalion
38th Guards Command Brigade
150th Repairs and Recovery Battalion
Ryazan Higher Airborne Command School "General V.F. Margelov"
242nd Junior Specialist Training Center
226th Parachute Training Regiment
285th Parachute Training Regiment
Special Purposes Forces
2nd Special Purposes Brigade
70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177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329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700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3rd Guards Special Purposes Brigade "Warsaw-Berlin"
330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501st Special Purposes Detachment
503rd Special Purposes Detachment
509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510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512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85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95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104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551st Special Purposes Detachment
282nd Special Purposes Detachment
294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308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546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742nd Special Purposes Detachment
370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379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585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664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669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22nd Guards Special Purposes Brigade
108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173rd Special Purposes Detachment
305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411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261st Special Purposes Detachment
281st Special Purposes Detachment
297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641st Special Purposes Detachment
690th Special Purposes Detachment
691st Special Purposes Detachment
1327th Application Center for Reconnaissance Units and Special Purpose Units
Navy
Marine Corps
61st Marine Infantry Brigade "Kirkenes"
876th Air Assault Battalion
155th Marine Infantry Brigade "Kazakhs "
47th Air Assault Battalion
336th Guards Marine Infantry Brigade "Belostok"
879th Air Assault Battalion
810th Guards Marine Infantry Brigade "60th Anniversary of the Formation of the USSR"
542nd Air Assault Battalion
3rd "Krasnodar-Harbin" Marine Infantry Regiment
Air Assault Battalion
(Морские разведывательные пункты специального назначения )
42nd Marine Reconnaissance Point
160th Marine Reconnaissance Point
420th Marine Reconnaissance Point
431st Marine Reconnaissance Point
457th Marine Reconnaissance Point
461st Marine Reconnaissance Point
National Guard
Main Directorate of the Special Purpose Forces of the Federal Service of the National Guard Troops of the Russian Federation
- Military Unit 3179
Inter-services (Ministry of Defence)
Special Operations Forces
Specialist Training Center "Senezh" - Military Unit 43292
Special Purpose Center "Kubinka-2" - Military Unit 01355
561st Emergency Rescue Center - Military Unit 00317
Rwanda
one Para Commando battalion
Saudi Arabia
Paratroopers and Special Security Forces (وحدات المظليين وقوات الأمن الخاصة - Wahadat Almazaliiyn Waquwwat Al'amn Alkhasa)
1st Parachute Brigade
4th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5th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لواء القوات الخاصة الرابع والستون - Liwa' al-Quwwat al-Khasat alrrabie Walsutuwn)
85th Special Forces Battalion (الكتيبةالقوات الخاصة الخامسة والثمانون - Al-Ktybtalqwat al-Khasat al-Khamisat Walthamanun)
Parachute Center and School (مركز ومدرسة المظليين - Markaz Wamadarisat al-Muzliiyn)
Senegal
Parachute Battalion (Bataillon Parachutiste)
Serbia
63rd Parachute Brigade (63. Падобранска Бригада - 63. Padobranska Brigada), including:
Parachute Training Company (Падобранска Чета за Обуку - Padobranska Četa za Obuku)
Parachute Combat Search and Rescue Company (Падобранска Чета Борбеног Трагања и Спасавањ - Padobranska Četa Borbenog Traganja i Spasavanj)
72nd Brigade for Special Operations (72. Бригада за Специјалне Oперације - 72. Brigada za Specijalne Operacije)
Battalion for Special Operations "Griffins" (Батаљон за Специјалне Oперације "Грифони"- Bataljon za Specijalne Operacije "Grifoni")
Battalion for Special Operations "Hawks" (Батаљон за Специјалне Oперације "Соколови" - Bataljon za Specijalne Operacije "Sokolovi")
Seychelles
Special Forces Unit "Barracuda" (Unité des Forces Spéciales "Tazar")
Singapore
Special Operations Task Force (Operasi Khas Pasukan Khas)
Singapore Armed Forces Commando Formation
1st Commando Battalion
Special Operations Force
Naval Diving Unit
Parachute Training Wing
Slovakia
5th Special Purpose Regiment "Jozef Gabčík" (5. Pluk Špeciálneho Určenia "Jozefa Gabčíka")
Slovenia
(Enota za Specialno Delovanje)
PEST(Posebna enota specialne taktike) military police special forces
South Africa
Army
44 Parachute Regiment
1 Parachute Battalion - Parachute Training Centre
Bagaka Regiment (Reserve)
3 Parachute Battalion (Reserve)
44 Pathfinder Platoon
13 Signal Squadron
101 Air Supply Unit - South African Ordnance Services Corps
Steve Biko Artillery Regiment (Reserve)
South African Special Forces Brigade
4 Special Forces Regiment
5 Special Forces Regiment
Military Health Service
7 Medical Battalion Group
44 Medical Task Group (detached to 44 Parachute Regiment)
South Ossetia
Special Purpose Battalion "Zelim Muldarov" (Батальона Специального Назначения имени Зелима Мулдарова - Batal'ona Spetsial'nogo Naznacheniya imeni Zelima Muldarova)
Spain
Army
6th Parachute Brigade "Almogavars" (Brigada "Almogávares" VI de Paracaidistas)
Headquarters Battalion (Batallón del Cuartel General),
Headquarters Company (Compañía de Cuartel General)
Forward Reconnaissance Company (Compañía de Reconocimiento Avanzado)
Intelligence Company (Compañía de Inteligencia)
Nuclear, Bacteriological and Chemical Defense Company (Compañía de Defensa Nuclear, Bacteriológica y Química)
"Naples" (Regimiento de Infantería "Nápoles" n.º 4 de Paracaidistas)
"Roger de Flor" (Bandera "Roger de Flor" I/4)
"Roger of Lauria" (Bandera "Roger de Lauria" II/4)
5th Parachute Infantry Regiment "Zaragoza" (Regimiento de Infantería "Zaragoza" n.º 5 de Paracaidistas)
"Ortiz de Zárate" (Bandera "Ortiz de Zárate" III/5)
(Regimiento de Caballería "Lusitania" n.º 8)
I/8th Light Armored Cavalry Group "Sagunto" (Grupo Ligero Acorazado I/8 "Sagunto")
6th Parachute Field Artillery Group (Grupo de Artillería de Campaña Paracaidista VI)
6th Parachute Engineers Battalion (Batallón de Zapadores Paracaidistas VI)
6th Logistic Group (Grupo Logístico VI)
6th Parachute Signals Company (Compañía de Transmisiones Paracaidista)
Parachute Training Battalion ( Batallón de Instrucción Paracaidista )
Cargo Airdrop and Packing Group (Grupo de Lanzamiento y Preparacion de Cargas)
Special Operations Command "" (Mando de Operaciones Especiales "Órdenes Militares")
2nd Special Operations Group "Granada" (Grupo de Operaciones Especiales "Granada" II)
3rd Special Operations Group "Valencia" (Grupo de Operaciones Especiales "Valencia" III)
4th Special Operations Group "Tercio of Ampurdán" (Grupo de Operaciones Especiales "Tercio del Ampurdán" IV)
19th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of the Spanish Legion "Gentleman Legionary " (Bandera de Operaciones Especiales de la Legión "Caballero Legiónario Maderal Oleaga" XIX)
Navy
Special Naval War Force (Fuerza de Guerra Naval Especial), including:
Submarine Parachute Assistance Group (Grupo Paracaidista de Apoyo al Submarino)
Marine Infantry Force (Fuerza de Infantería de Marina)
Target Recognition and Acquisition Company (Compañía de Reconocimiento y Adquisición de Blancos)
Air Force
"Further Beyond" Flight of His Majesty the King's Royal Guard Regiment (Escuadrilla "Plus Ultra" del Regimiento de la Guardia Real de Su Majestad el Rey)
(Escuadrón de Zapadores Paracaidistas)
(Escuadrón de Apoyo al Despliegue Aéreo)
(Escuela Militar de Paracaidismo "Méndez Parada")
Sri Lanka
Army
Special Forces
12th Special Forces Regiment (12 විශේෂ බලකා රෙජිමේන්තුව - 12 Viśēṣa Balakā Rejimēntuva)
13th Special Forces Regiment (13 විශේෂ බලකා රෙජිමේන්තුව - 13 Viśēṣa Balakā Rejimēntuva)
Commando Regiment
1st Commando Regiment (1 කමාන්ඩෝ රෙජිමේන්තුව - 1 Kamānḍō Rejimēntuva)
2nd Commando Regiment (2 කමාන්ඩෝ රෙජිමේන්තුව - 2 Kamānḍō Rejimēntuva)
3rd Commando Regiment (3 කමාන්ඩෝ රෙජිමේන්තුව - 3 Kamānḍō Rejimēntuva)
4st Commando Regiment (4 කමාන්ඩෝ රෙජිමේන්තුව - 4 Kamānḍō Rejimēntuva)
Commando Training School Parachute Wing
Navy
Special Boat Squadron (විශේෂ යාත්රා බලඝණය - Viśēṣa Yātrā Balaghaṇaya)
Air Force
Special Airborne Force
Parachute Training School ( පැරෂුට් පුහුණු පාසල - Pæraṣuṭ Puhuṇu Pāsala)
Sudan
9th Airborne Division
two Airborne Brigades
144th Special Forces Battalion
Suriname
Special Troops Corps (Korps Speciale Troepen)
Sweden
323rd Parachute Ranger Squadron (323. Fallskärmsjägarskvadronen)
Special Operations Group (Särskilda Operationsgruppen)
Switzerland
Special Forces Command (Kommando Spezialkräfte - Commandement des Forces Spéciales - Comando Forze Speciali)
Army Reconnaissance Detachment 10 (Armee-Aufklärungsdetachement 10 - Détachement de Reconnaissance de l'Armée 10 - Distaccamento d'Esplorazione dell'Esercito 10)
Parachute Reconnaissance Company 17 (Fallschirmaufklärer Kompanie 17 - Compagnie d'Eclaireurs Parachutistes 17 - Compagnia di Esploratori Paracadutisti 17)
Special Forces Training Center (Ausbildungszentrum Spezialkräfte - Centre d'Instruction des Forces Spéciales - Centro di Istruzione Forze Speciali)
Syria
14th Special Forces Division
36th Special Forces Regiment
554th Special Forces Regiment
556th Special Forces Regiment
Republican Guard
511th Parachute Battalion
Tajikistan
7th Air Assault Brigade (Бригадаи 7-уми ҳамла ба десанти ҳавоӣ - Brigadai 7-umi Hamla ʙa Desanti Havoī)
Tanzania
one Special Forces unit
Thailand
Army
31st Guards Infantry Regiment (กรมทหารราบที่ 31 รักษาพระองค์ - Krm Thh̄ār Rāb Thī̀ 31 Rạks̄ʹā Phraxngkh̒)
1st Infantry Battalion (กองพันทหารราบที่ 1 - Kxngphạn thh̄ār rāb thī̀ 1)
2nd Infantry Battalion (กองพันทหารราบที่ 2 - Kxngphạn thh̄ār rāb thī̀ 2)
3rd Infantry Battalion (กองพันทหารราบที่ 3 - Kxngphạn thh̄ār rāb thī̀ 3)
Royal Thai Army Special Warfare Command (หน่วยบัญชาการสงครามพิเศษ)
1st Special Warfare Division (กองพลรบพิเศษที่ 1 - Kxngphl Rb Phiṣ̄es̄ʹ Thī̀ 1)
1st Special Warfare Regiment (กรมรบพิเศษที่ 1 - Krm Rb Phiṣ̄es̄ʹ Thī̀ 1)
2nd Special Warfare Regiment (กรมรบพิเศษที่ 2 - Krm Rb Phiṣ̄es̄ʹ Thī̀ 2)
3rd Special Warfare Regiment King's Guard (กรมรบพิเศษที่ 3 รักษาพระองค์ - Krm Rb Phiṣ̄es̄ʹ Thī̀ 3 Rạks̄ʹā Phraxngkh̒)
4th Special Warfare Regiment (กรมรบพิเศษที่ 4 - Krm Rb Phiṣ̄es̄ʹ Thī̀ 4)
5th Special Warfare Regiment (กรมรบพิเศษที่ 5 - Krm Rb Phiṣ̄es̄ʹ Thī̀ 5)
Navy
Naval Special Warfare Command Battle Squadron (หน่วย บัญชาการ สงคราม พิเศษ ทาง เรืเรือ ยุทธการ - H̄ǹwy bạỵchākār s̄ngkhrām phiṣ̄es̄ʹ thāng reụ̄x kxng reụ̄x yuthṭhkār)
RTMC Reconnaissance Battalion (กองพันลาดตระเวน กองพลนาวิกโยธิน)
Air Force
Special Operations Regiment (กรมปฏิบัติการพิเศษ - Krm Pt̩ibạtikār Phiṣ̄es̄ )
Togo
Parachute Commando Regiment (Régiment Parachutiste Commando)
Transnistria
Special Puropose Battalion (Батальон Специального Назначения - Batal'on Spetsial'nogo Naznacheniya)
Tunisia
(لواء القوات الخاصة للجيش - lwa' Alquwwat Alkhasat Liljaysh)
Turkey
Army
1st Commando Brigade (1. Komando Tugayı)
four Commando Battalions (Komando Taburu)
one Airborne Battalion (Hava İndirme Taburu)
Artillery Battalion (Topçu Taburu)
Logistic Support Battalion (Lojistik Destek Taburu)
Airborne and Commando Training Battalion (Hava İndirme ve Komando Eğitim Taburu)
Guard Company (Muhafız Bölüğü)
Anti-tank Unit (Tanksavar Birliği)
Communication Electronic Systems Company (Muhabere Elektronik Sistemler Bölüğü)
Engineering Company (İstihkam Bölüğü)
Service Unit (Hizmet Birliği)
Special Forces Command (Özel Kuvvetler Komutanlığı)
Air Force
Combat Search and Rescue Parachute Group (Muharebe Arama Kurtarma Paraşüt Grup)
Navy
Underwater Offence Group (Su Altı Taarruz Grup)
Parachute Search and Rescue Team (Paraşütle Arama Kurtarma Timi)
Turkmenistan
152nd Independent Air Assault Brigade (152-я отдельная воздушно-штурмовая бригада - 152-ya Otdel'naya Vozdushno-Shturmovaya Brigada)
Uganda
Special Forces Command
"Amilcar Cabral" Airborne School
Ukraine
Army
Air Assault Forces
25th Airborne Brigade "Dnipropetrovsk"
45th Air Assault Brigade
46th Air Assault Brigade
79th Air Assault Brigade
80th Air Assault Brigade
81st Airmobile Brigade
95th Air Assault Brigade
132nd Recon Bataillon
135th Signals Battalion
199th Training Center
Special Operations Forces
3rd Special Purpose Regiment
8th Special Purpose Regiment
99th Command and Security Battalion
140th Special Purpose Center
142nd Special Operations Forces Training and Formation Center
Navy
73rd Special Purpose Marine Center "Ataman Antin Holovaty"
36th Separate Marine Brigade
88th Marine Infantry Air Assault Battalion
United Arab Emirates
Special Mission Unit of the Presidential Guard (وحدة المهام الخاصة - الحرس الرئاسي - Wahdat Almahami Alkhasat - Alharas Alriyasiu)
United Kingdom
British Army
16th Air Assault Brigade
2nd Battalion, The Parachute Regiment
3rd Battalion, The Parachute Regiment, including:
No 6 (Guards Parachute) Platoon
4th Battalion, The Parachute Regiment (Reserve)
7th Parachute Regiment Royal Horse Artillery
23 Parachute Engineer Regiment
Pathfinder Platoon
216th (Parachute) Signal Squadron
144 Parachute Medical Squadron (Royal Army Medical Corps) (Volunteer)
Light Electronic Warfare Teams, 226 Signal Squadron, 14th Cyber Electromagnetic and Electronic Warfare Signal Regiment
Airborne Troop, 821 Explosive Ordnance Disposal & Search Squadron, Royal Logistic Corps
Parachute Training Support Unit
Royal Navy
Submarine Parachute Assistance Group
Fleet Diving Unit 1
Royal Marines
3 Commando Brigade Patrol Troop
Reconnaissance Troop 40 Commando
Reconnaissance Troop 42 Commando
Reconnaissance Troop 45 Commando
Surveillance Reconnaissance Squadron, 30 Commando Information Exploitation Group
Royal Air Force
No. II Squadron RAF Regiment
Airborne Delivery Wing
Inter-service
United Kingdom Special Forces
British Army
21 Special Air Service Regiment (Artists) (Reserve)
22 Special Air Service Regiment, including:
L Detachment SAS (Reserve)
23 Special Air Service Regiment (Reserve)
63rd Signal Squadron (Reserve)
264 SAS Signal Squadron
Royal Navy
Royal Marines
Special Boat Service
Special Boat Service (Reserve)
Special Boat Service Signal Squadron
Special Forces Support Group
1st Battalion, Parachute Regiment, including:
one Royal Marines parachute platoon each in A, B and C companies
one RAF Regiment parachute flight (platoon) in B company
United States
Army
XVIII Airborne Corps
27th Engineer Battalion (Combat) (Airborne)
82nd Airborne Division
1st Brigade Combat Team "Devil Brigade"
3rd Squadron, 73rd Cavalry Regiment
2nd Battalion, 501st Infantry Regiment
1st Battalion, 504th Infantry Regiment
2nd Battalion, 504th Infantry Regiment
3rd Battalion, 319th Field Artillery Regiment
127th Brigade Engineer Battalion
307th Brigade Support Battalion
2nd Brigade Combat Team "Falcon Brigade"
1st Squadron, 73rd Cavalry Regiment
1st Battalion, 325th Infantry Regiment
2nd Battalion, 325th Infantry Regiment
2nd Battalion, 508th Infantry Regiment
2nd Battalion, 319th Field Artillery Regiment
37th Brigade Engineer Battalion
407th Brigade Support Battalion
3rd Brigade Combat Team "Panther Brigade"
5th Squadron, 73rd Cavalry Regiment
1st Battalion, 505th Infantry Regiment
2nd Battalion, 505th Infantry Regiment
1st Battalion, 508th Infantry Regiment
1st Battalion, 319th Field Artillery Regiment
307th Brigade Engineer Battalion
82nd Brigade Support Battalion
173rd Airborne Brigade Combat Team "Sky Soldiers"
1st Squadron, 91st Cavalry Regiment
1st Battalion, 503rd Infantry Regiment
2nd Battalion, 503rd Infantry Regiment
1st Battalion, 143rd Infantry Regiment (Texas Army National Guard)
4th Battalion, 319th Field Artillery Regiment
54th Brigade Engineer Battalion
173rd Brigade Support Battalion
2nd Infantry Brigade Combat Team (Airborne), 11th Airborne Division
1st Squadron, 40th Cavalry Regiment
1st Battalion, 501st Infantry Regiment
3rd Battalion, 509th Infantry Regiment
2nd Battalion, 377th Field Artillery Regiment
6th Brigade Engineer Battalion
725th Brigade Support Battalion
2nd Battalion (Airborne), 134th Infantry Regiment (Nebraska ARNG)
1st Battalion, 509th Infantry Regiment (Airborne) "Geronimo"
Airborne and Ranger Training Brigade
United States Army Airborne School
United States Army Jumpmaster School
United States Army Pathfinder School
United States Army Civil Affairs and Psychological Operations Command (Airborne) (Army Reserve)
Navy
Explosive Ordnance Disposal Group One
Explosive Ordnance Disposal Group Two
Marines
Force Reconnaissance Company, 1st Reconnaissance Battalion
Force Reconnaissance Company, 2nd Reconnaissance Battalion
Force Reconnaissance Company, 3rd Reconnaissance Battalion
Marines Reserve
3rd Force Reconnaissance Company
4th Force Reconnaissance Company
Air Force
31st Rescue Squadron (Pararescue)
38th Rescue Squadron (Pararescue)
48th Rescue Squadron (Pararescue)
57th Rescue Squadron (Pararescue)
58th Rescue Squadron (Pararescue)
820th Base Defense Group
820th Combat Operations Squadron
822d Base Defense Squadron
823d Base Defense Squadron
824th Base Defense Squadron
Air Force Reserve
304th Rescue Squadron (Pararescue) (AFRC)
306th Rescue Squadron (Pararescue) (AFRC)
308th Rescue Squadron (Pararescue) (AFRC)
Air National Guard
103rd Rescue Squadron (Pararescue) (New York ANG)
131st Rescue Squadron (Pararescue) (California ANG)
212th Rescue Squadron (Pararescue) (Alaska ANG)
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s Command
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
Army
1st Special Forces Operational Detachment Delta (Airborne)
Regimental Reconnaissance Company, 75th Ranger Regiment
Navy
Naval Special Warfare Development Group
Air Force
24th Special Tactics Squadron
US Army Special Operations Command
75th Ranger Regiment
2nd Battalion, 2nd Special Warfare Training Group (Airborne) including:
Military Free Fall School
1st Special Forces Command (Airborne)
1st Special Forces Group (Airborne), 1st Special Forces Regiment
3rd Special Forces Group (Airborne), 1st Special Forces Regiment
5th Special Forces Group (Airborne), 1st Special Forces Regiment
7th Special Forces Group (Airborne), 1st Special Forces Regiment
10th Special Forces Group (Airborne), 1st Special Forces Regiment
19th Special Forces Group (Airborne), 1st Special Forces Regiment (Army National Guard)
20th Special Forces Group (Airborne), 1st Special Forces Regiment (Army National Guard)
39th Special Forces Detachment (Airborne), 1st Special Forces Regiment
112th Special Operations Signal Battalion (Airborne)
389th Military Intelligence Battalion (Airborne)
Special Operations Detachment - Africa (Airborne) (Texas ARNG)
Special Operations Detachment - Central (Airborne) (Florida ARNG)
Special Operations Detachment - Europe (Airborne) (West Virginia ARNG)
Special Operations Detachment - Global (Airborne) (Rhode Island ARNG)
Special Operations Detachment - Joint (Airborne) (Maryland ARNG)
Special Operations Detachment - Korea (Airborne) (Colorado ARNG)
Special Operations Detachment - North (Airborne) (California ARNG)
Special Operations Detachment - Pacific (Airborne) (Washington ARNG)
Special Operations Detachment - South (Airborne) (Mississippi ARNG)
Special Operations Detachment - X (Airborne) (North Carolina ARNG)
United States Naval Special Warfare Command
Naval Special Warfare Group 1
SEAL Team 1
SEAL Team 3
SEAL Team 5
SEAL Team 7
Naval Special Warfare Unit 1
Naval Special Warfare Unit 3
Naval Special Warfare Group 2
SEAL Team 2
SEAL Team 4
SEAL Team 8
SEAL Team 10
Naval Special Warfare Unit 2
Naval Special Warfare Group 3
SEAL Delivery Vehicle Team One
SEAL Delivery Vehicle Team Two
Naval Special Warfare Group 4
Special Boat Team 12
Special Boat Team 20
Special Boat Team 22
Naval Special Warfare Group 11 (Navy Reserve)
SEAL Team 17
SEAL Team 18
United States Marine Corps Forces Special Operations Command
Marine Raider Regiment
1st Marine Raider Battalion
2nd Marine Raider Battalion
3rd Marine Raider Battalion
Marine Raider Training Center
Air Force Special Operations Command
24th Special Operations Wing
720th Special Tactics Group
17th Special Tactics Squadron
21st Special Tactics Squadron
22nd Special Tactics Squadron
23rd Special Tactics Squadron
26th Special Tactics Squadron
193rd Special Operations Wing (Pennsylvania ANG)
123rd Special Tactics Squadron (Kentucky ANG)
125th Special Tactics Squadron (Oregon ANG)
352nd Special Operations Wing
321st Special Tactics Squadron
353d Special Operations Wing
320th Special Tactics Squadron
Uruguay
Army
14th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Batallón de Infantería Paracaidista Nº14), including:
Special Operations Company "Scorpion" (Compañía de Operaciones Especiales "Escorpión")
Army Paratroopers and Special Operations Training Center (Centro de Instrucción de Paracaidistas y Operaciones Especiales del Ejército)
Air Force
Special Operations Company (Compañía de Operaciones Especiales)
Rescue Operations and Training Section (Seccion de Operaciones y Entrenamiento de Rescate)
Uzbekistan
17th Air Assault Brigade (17-Havo Hujumi Brigadasi)
Independent Special Purpose Battalion "Lynx" (Maxsus Operatsiyalar Bo'limi "Kaplan")
Venezuela
Army
42nd Parachute Infantry Brigade (42 Brigada de Infantería Paracaidista)
Brigade HQ
421st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José Leonardo Chirino" (421 Batallón de Infantería Paracaidista "José Leonardo Chirino")
422nd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Colonel " (422 Batallón de Infantería Paracaidista "Coronel Antonio Nicolás Briceño")
423rd Parachute Infantry Battalion "Colonel " (423 Batallón de Infantería Paracaidista "Coronel Ramón García de Sena")
4201st Parachute Headquarters Company (4201 Compañía de Comando Paracaidistas")
4202nd Parachute Scout and Reconnaissance Company (4202 Compañía de Exploración y Reconocimiento Paracaidistas)
4203rd Parachute Supply and Transportation Company (4203 Compañía de Abastecimiento y Transporte Paracaidistas)
4204th Parachute Signal Company (4204 Compañía de Comunicaciones Paracaidistas)
4207th Parachute Engineers Company (4207 Compañía de Ingenieros Paracaidistas)
4208th Packaging, Maintenance and Air Delivery Company (4208 Compañía de Empaque, Mantenimiento y Entrega Aérea)
4209th Parachute Snipers Company (4209 Compañía de Francotiradores Paracaidistas)
4210th Parachute Medical Company (4210 Compañía de Sanidad Paracaidistas)
Combat and Airborne Operations Training Center "Brigadier General Rafael Nogales Méndez" (Centro de Adiestriamento de Combate y de Operaciones Aerotransportadas "General de Brigada Rafael Nogales Méndez")
Special Operations Command "General in Chief Félix Antonio Velásquez" (Comando de Operaciones Especiales "General en Jefe Félix Antonio Velásquez")
Army
99th Special Forces Brigade (99 Brigada de Fuerzas Especiales)
991st Special Forces Battalion "Colonel Domingo Montes" (991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Coronel Domingo Montes")
992nd Special Forces Battalion "General in Chief José Gregorio Monagas" (992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General en Jefe José Gregorio Monagas")
993th Special Forces Battalion "Lieutenant Colonel Eliezer Otaiza Castillo" (993 Batallón de Fuerzas Especiales "Teniente Coronel Eliezer Otaiza Castillo")
Navy
8th Marine Special Operations Brigade "Generalissimo Francisco de Miranda" (8 Brigada de Comandos del Mar "Generalísimo Francisco de Miranda")
81st Special Operations Battalion "Lieutenant Commander Henry Lilong García" (Batallón de Operaciones Especiales Nro. 81 "Capitán de Corbeta Henry Lilong García")
Air Force
20th Special Forces Group (Grupo de Fuerzas Especiales N.º 20)
National Guard
Commando Operations Group (Grupo de Acciones de Comando)
Vietnam
(Lữ đoàn Đặc công 1)
(Lữ đoàn Đặc công 113)
(Lữ đoàn Đặc công 198)
(Lữ đoàn Đặc công 429)
Zambia
1st Commando Battalion
Zimbabwe
Parachute Regiment
Special Air Service Squadron
See also
List of CBRN warfare forces
List of cyber warfare forces
List of marines and naval infantry forces
List of mountain warfare forces
References
Notes
Sources
.01
.
Para
Paratrooper
Units and formations |
https://ko.wikipedia.org/wiki/%EC%97%98%EB%A1%9C%EC%9D%B4%EC%A6%88 | 엘로이즈 | 엘로이즈(Héloïse, ? - 1164년 5월 16일)는 프랑스의 수녀원장이자 저술가겸 학자이다. 피에르 아벨라르와의 사랑이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여성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엘로이즈의 서간은 근대 이후 여러 교양 소설 작가들의 소재가 되었다.
배경
엘로이즈의 이름은 Helöise, Héloyse, Hélose, Heloisa, Helouisa, Eloise, 그리고 Aloysia 등의 여러 철자로 전해져 오는데 이는 게르만어파의 조어인 Hailawidis에서 파생한 것으로 성스러운 나무(Holy wood)를 뜻한다. 엘로이즈는 라틴어와 히브리어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다. 귀족 출신이었던 아벨라르는 엘로이사의 집안을 성당 참사회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엘로이즈는 성당 참사회원이던 삼촌 풀베르투스의 집에서 살았다. 중세 시기 성당 참사회원은 성당으로부터 일정한 급료를 받고 일하던 의전사제 직군으로 귀족은 아니었다. 엘로이즈의 부모가 누구였는 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당대의 파리에서 가장 명망있는 철학자였던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집에 하숙하면서 엘로이즈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에게서 철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배웠다. 그 때 배운 의학적 소양은 훗날 수녀원장이 되었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랑
아벨라르는 1132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내 불행의 내력》()에서 자신이 엘로이즈를 만난 1115년 당시 엘로이즈가 15세의 소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엘로이즈가 1100–01년 무렵 태어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콘스탄트 뮤와 같은 역사가는 당시 엘로이즈가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에 근접한 나이였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후 둘 사이에 오간 서간에서 둘 모두 장성하여 만났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뮤는 엘로이즈의 출생년도가 1092년까지도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유혹하고 때로는 강압하면서 관계를 가졌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소문이 파다했지만 엘로이즈의 삼촌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가장 늦게 알았다. 둘이 사제 지간이 아니라 연인 지간으로 지내는 것을 알게 된 풀베르투스는 아벨라르는 내 쫓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엘로이즈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임신 소식을 듣고 결혼을 결심하지만 엘로이즈는 삼촌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였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결혼을 강행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엘로이즈를 데려가 출산하게 한다. 풀베르투스는 이들의 비밀 결혼을 폭로하였고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안전을 위해 잠시 수녀원에 들어가 의지하게 하고는 화해를 할 목적으로 풀베르투스와 만난다. 그러나 풀베르투스는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버리기 위해 수녀원에 집어넣었다고 오해하고 아벨라르를 잡아 거세하여 버린다. 이 일로 둘의 결혼은 파탄이 나고 엘로이즈는 진짜 수녀가 되어 수도 생활을 하게 된다.
수도 생활
풀베르투스의 복수로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사랑은 결국 파탄으로 끝났다. 둘은 별 다른 연락 없이 20년 동안 각자의 수도 생활을 하며 살았다. 아벨라르는 주변의 많은 적을 피해 옮겨다니다가 트루아 지역에 파라클레투스(, 성신)라는 기도처를 마련하였다. 그 사이 엘로이즈는 아르장퇴유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 둘이 다시 연락이 닿게 된 것은 엘로이즈가 곤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엘로이즈가 이끌던 수녀원은 1127년 무렵 생드니 수도원과 토지 소유권 마찰을 겪었고 결국 재판에서 패소하여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즈음 엘로이즈는 아벨라르가 쓴 《내 불행의 내력》을 읽게 되었고 그에게 여전히 사랑을 간직하고 있으며 도움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받은 아벨라르는 자신의 기도처를 아르장퇴유 수녀원에 기증하였다. 이후 엘로이즈는 여러 차례의 편지를 통해 지난 사랑을 되새기고 수녀원의 운영에 대한 여러 자문을 구한다. 아벨라르는 1142년 사망하여 수녀원에 안치되었고, 1164년 엘로이즈가 사망하자 둘은 합장되었다.
서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열두차례에 걸쳐 편지를 주고 받았다. 둘의 서신에 대해서는 진위를 의심하는 입장도 있고 후대에 그럴듯한 목적에 따라 재편집 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체로 사실로 인정된다. 서간에서 아벨라르는 자신이 욕정에 의해 엘로이즈를 범했으며 그로 인해 정신과 육체 모두에서 벌을 받았다고 여기지만, 엘로이즈는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 그 만남이 부도덕한 것이었더라도 자신은 스스로 그 사랑을 선택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고 고백한다. 엘로이즈는 사랑과 욕정을 구분하면서 자신이 과연 욕정으로 그러했는 지를 의심하지만 그저 아벨라르를 사랑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한정숙은 이러한 엘로이즈의 사상이 여성 스스로가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밝힌 것으로 중세인 당시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영향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는 중세 시대 동안에도 널리 알려진 사랑 이야기로 《장미 이야기》의 모델이 되었고, 근대에 들어서는 장자크 루소가 《신 엘로이즈》를 발표하였다.
같이 보기
로멘스 (사랑)
트리스탄과 이졸데
각주
외부 링크
1101년 출생
1164년 사망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수녀
프랑스의 작가
프랑스의 철학자
12세기 철학자
로마 가톨릭 철학자
여성주의자 | https://en.wikipedia.org/wiki/H%C3%A9lo%C3%AFse | Héloïse | Héloïse (; c. 1100–01? – 16 May 1163–64?), variously Héloïse d'Argenteuil or Héloïse du Paraclet, was a French nun, philosopher, writer, scholar, and abbess.
Héloïse was a renowned "woman of letters" and philosopher of love and friendship, as well as an eventual high-ranking abbess in the Catholic Church. She achieved approximately the level and political power of a bishop in 1147 when she was granted the rank of prelate nullius.
She is famous in history and popular culture for her love affair and correspondence with the leading medieval logician and theologian Peter Abelard, who became her colleague, collaborator and husband. She is known for exerting critical intellectual influence upon his work and posing many challenging questions to him such as those in the Problemata Heloissae.
Her surviving letters are considered a foundation of French and European literature and primary inspiration for the practice of courtly love. Her erudite and sometimes erotically charged correspondence is the Latin basis for the bildungsroman genre and serve alongside Abelard's Historia Calamitatum as a model of the classical epistolary genre. Her influence extends on later writers such as Chrétien de Troyes, Geoffrey Chaucer, Madame de Lafayette, Thomas Aquinas, Choderlos de Laclos, Voltaire, Rousseau, Simone Weil, and Dominique Aury.
She is an important figure in the establishment of women's representation in scholarship and is known for her controversial portrayals of gender and marriage which influenced the development of modern feminism.
Name
Héloïse is variously spelled Heloise, Helöise, Héloyse, Hélose, Heloisa, Helouisa, Eloise, and Aloysia. Her first name is probably a feminization of Eloi, the French form of Saint Eligius, a Frankish goldsmith, bishop, and courtier under Dagobert I much venerated in medieval France. Some scholars alternatively derive it from Proto-Germanic reconstructed as *Hailawidis, from *hailagaz ("holy") or *hailaz ("healthy") and *widuz ("wood, forest"). The details of her family and original surname are unknown. She is sometimes called Heloise of Argenteuil () from her childhood convent or Heloise of the Paraclete () from her midlife appointment as abbess of the convent of the Paraclete near Troyes, France.
Life
Background and education
Early in life, Héloïse was recognized as a leading scholar of Latin, Greek and Hebrew hailing from the convent of Argenteuil just outside Paris, where she was educated by nuns until adolescence. She was already renowned for her knowledge of language and writing when she arrived in Paris as a young woman, and had developed a reputation for intelligence and insight. Abélard writes that she was nominatissima, "most renowned" for her gift in reading and writing. She wrote poems, plays and hymns, some of which have been lost.
Her family background is largely unknown. She was the ward of her maternal uncle (avunculus) Canon Fulbert of Notre Dame and the daughter of a woman named Hersinde, who is sometimes speculated to have been Hersint of Champagne (Lady of Montsoreau and founder of the Fontevraud Abbey) or possibly a lesser known nun called Hersinde at the convent of St. Eloi (from which the name "Heloise" would have been taken).
In her letters she implies she is of a lower social standing than Peter Abélard, who was originally from the lower nobility, though he had rejected knighthood to be a philosopher. Speculation that her mother was Hersinde of Champagne/Fontrevaud and her father Gilbert Garlande contests with Heloise's depiction of herself as lower class than Abelard. Hersinde of Champagne was of lower nobility, and the Garlandes were from a higher social echelon than Abelard and served as his patrons. The Hersinde of Champagne theory is further complicated by the fact that Hersinde of Champagne died in 1114 between the ages of 54 and 80, implying that she would have had to have given birth to Heloise between the ages of 35 and 50.
What is known for sure is that her Uncle Fulbert, a canon of Notre Dame collected her to Notre Dame from her childhood home in Argentuil. By her mid teens to early twenties, she was renowned throughout France for her scholarship. While her birth year is disputed, she is traditionally held to be about 15 to 17 when meeting Abelard. By the time she became his student, she was already of high repute herself. As a poetic and highly literate prodigy of female sex familiar with multiple languages, she attracted much attention, including the notice of Peter the Venerable of Cluny, who notes that he became aware of her acclaim when he and she were both young. She soon attracted the romantic interest of celebrity scholar Peter Abelard.
Heloise is said to have gained knowledge in medicine or folk medicine from either Abelard or his kinswoman Denise and gained reputation as a physician in her role as abbess of Paraclete.
Meeting Abelard
In his autobiographical piece and public letter Historia Calamitatum (c. 1132?), Abélard tells the story of his relationship with Héloïse, whom he met in 1115, when he taught in the Paris schools of Notre Dame. Abelard describes their relationship as beginning with a premeditated seduction, but Heloise contests this perspective adamantly in her replies. (It is sometimes speculated that Abelard may have presented the relationship as fully of his responsibility in order to justify his later punishment and withdrawal to religion and/or in order to spare Heloise's reputation as an abbess and woman of God.) Heloise contrastingly in the early love letters depicts herself as the initiator, having sought Abelard herself among the thousands of men in Notre Dame and chosen him alone as her friend and lover.
In his letters, Abelard praises Heloise as extremely intelligent and just passably pretty, drawing attention to her academic status rather than framing her as a sex object: "She is not bad in the face, but her copious writings are second to none." He emphasizes that he sought her out specifically due to her literacy and learning, which was unheard of in most un-cloistered women of his era.
It is unclear how old Héloïse was at the time they became acquainted. During the twelfth century in France, the typical age at which a young person would begin attending university was between the ages of 12 and 15. As a young female, Heloise would have been forbidden from fraternizing with the male students or officially attending university at Notre Dame. With university education offered only to males, and convent education at this age reserved only for nuns, this age would have been a natural time for her uncle Fulbert to arrange for special instruction.
Heloise is described by Abelard as an adolescentula (young girl). Based on this description, she is typically assumed to be between fifteen and seventeen years old upon meeting him and thus born in 1100–01. There is a tradition that she died at the same age as did Abelard (63) in 1163 or 1164. The term adolescent, however, is vague, and no primary source of her year of birth has been located. Recently, as part of a contemporary investigation into Heloise's identity and prominence, Constant Mews has suggested that she may have been so old as her early twenties (and thus born around 1090) when she met Abelard. The main support for his opinion, however, is a debatable interpretation of a letter of Peter the Venerable (born 1092) in which he writes to Héloïse that he remembers that she was famous when he was still a young man. Constant Mews assumes he must have been talking about an older woman given his respect for her, but this is speculation. It is just as likely that a female adolescent prodigy amongst male university students in Paris could have attracted great renown and (especially retrospective) praise. It is at least clear that she had gained this renown and some level of respect before Abelard came onto the scene.
Romantic liaison
In lieu of university studies, Canon Fulbert arranged for Heloise's private tutoring with Peter Abelard, who was then a leading philosopher in Western Europe and the most popular secular canon scholar (professor) of Notre Dame. Abelard was coincidentally looking for lodgings at this point. A deal was made—Abelard would teach and discipline Heloise in place of paying rent.
Abelard tells of their subsequent illicit relationship, which they continued until Héloïse became pregnant. Abelard moved Héloïse away from Fulbert and sent her to his own sister, Denise, in Brittany, where Héloïse gave birth to a boy, whom she called Astrolabe (which is also the name of a navigational device that is used to determine a position on Earth by charting the position of the stars).
Abelard agreed to marry Héloïse to appease Fulbert, although on the condition that the marriage should be kept secret so as not to damage Abélard's career. Heloise insisted on a secret marriage due to her fears of marriage injuring Abelard's career. Likely, Abelard had recently joined Religious Orders (something on which scholarly opinion is divided), and given that the church was beginning to forbid marriage to priests and the higher orders of clergy (to the point of a papal order re-affirming this idea in 1123), public marriage would have been a potential bar to Abelard's advancement in the church. Héloïse was initially reluctant to agree to any marriage, but was eventually persuaded by Abelard. Héloïse returned from Brittany, and the couple was secretly married in Paris. As part of the bargain, she continued to live in her uncle's house.
Tragic turn of events
Fulbert immediately went back on his word and began to spread the news of the marriage. Héloïse attempted to deny this, arousing his wrath and abuse. Abelard rescued her by sending her to the convent at Argenteuil, where she had been brought up. Héloïse dressed as a nun and shared the life of the nuns, though she was not veiled. Fulbert, infuriated that Heloise had been taken from his house and possibly believing that Abelard had disposed of her at Argenteuil in order to be rid of her, arranged for a band of men to break into Abelard's room one night and castrate him. In legal retribution for this vigilante attack, members of the band were punished, and Fulbert, scorned by the public, took temporary leave of his canon duties (he does not appear again in the Paris cartularies for several years).
After castration, filled with shame at his situation, Abélard became a monk in the Abbey of St Denis in Paris. At the convent in Argenteuil, Héloïse took the veil. She quoted from Cornelia's speech in Lucan's Pharsalia: "Why did I marry you and bring about your fall? Now...see me gladly pay."
It is commonly portrayed that Abelard forced Heloise into the convent due to jealousy. Yet, as her husband was entering the monastery, she had few other options at the time, beyond perhaps returning to the care of her betrayer Fulbert, leaving Paris again to stay with Abelard's family in rural Brittany outside Nantes, or divorcing and remarrying (most likely to a non-intellectual, as canon scholars were increasingly expected to be celibate). Entering religious orders was a common career shift or retirement option in twelfth-century France. Her appointment as a nun, then prioress, and then abbess was her only opportunity for an academic career as a woman in twelfth-century France, her only hope to maintain cultural influence, and her only opportunity to stay in touch with or benefit Abelard. Examined in a societal context, her decision to follow Abelard into religion upon his direction, despite an initial lack of vocation, is less shocking.
Astrolabe, son of Abelard and Heloise
Shortly after the birth of their child, Astrolabe, Heloise and Abelard were both cloistered. Their son was thus brought up by Abelard's sister, Denise, at Abelard's childhood home in Le Pallet. His name derives from the astrolabe, a Persian astronomical instrument said to elegantly model the universe and which was popularized in France by Adelard. He is mentioned in Abelard's poem to his son, the Carmen Astralabium, and by Abelard's protector, Peter the Venerable of Cluny, who wrote to Héloise: "I will gladly do my best to obtain a prebend in one of the great churches for your Astrolabe, who is also ours for your sake".
'Petrus Astralabius' is recorded at the Cathedral of Nantes in 1150, and the same name appears again later at the Cistercian abbey at Hauterive in what is now Switzerland. Given the extreme eccentricity of the name, it is almost certain these references refer to the same person. Astrolabe is recorded as dying in the Paraclete necrology on 29 or 30 October, year unknown, appearing as "Petrus Astralabius magistri nostri Petri filius" (Peter Astrolabe, son of our magister [master] Peter).
Later life
Heloise rose in the church, first achieving the level of prioress of Argenteuil. At the disbandment of Argenteuil and seizure by the monks of St Denis under Abbot Suger, Heloise was transferred to the Paraclete, where Abelard had stationed himself during a period of hermitage. (He had dedicated his chapel to the Paraclete, the holy spirit, because he "had come there as a fugitive and, in the depths of my despair, was granted some comfort by the grace of God".) They now rededicated it as a convent, and Abelard moved on to St. Gildas in Brittany where he became abbot. Heloise became prioress and then abbess of the Paraclete, finally achieving the level of prelate nullius (roughly equivalent to bishop). Her properties and daughter-houses (including the convents of Sainte-Madeleine-de-Traîne (c. 1142), La Pommeray (c. 1147-51?), Laval (ca. 1153), Noëfort (before 1157), Sainte-Flavit (before 1157), Boran / Sainte-Martin-aux-Nonnettes (by 1163)) extended across France, and she was known as a formidable businesswoman.
Correspondence
The primary correspondence existing today consists of seven letters (numbered Epistolae 2–8 in Latin volumes, since the Historia Calamitatum precedes them as Epistola 1). Four of the letters (Epistolae 2–5) are known as the 'Personal Letters', and contain personal correspondence. The remaining three (Epistolae 6–8) are known as the 'Letters of Direction'. An earlier set of 113 letters discovered much more recently (in the early 1970s) is vouched to also belong to Abelard and Heloise by historian and Abelard scholar Constant Mews.
Correspondence began between the two former lovers after the events described in the last section. Héloïse responded, both on the behalf of the Paraclete and herself. In letters which followed, Héloïse expressed dismay at problems that Abelard faced, but scolded him for years of silence following the attack, since Abelard was still wed to Héloïse.
Thus began a correspondence both passionate and erudite. Héloïse encouraged Abelard in his philosophical work, and he dedicated his profession of faith to her. Abelard insisted that his love for her had consisted of lust, and that their relationship was a sin against God. He then recommended her to turn her attention toward Jesus Christ who is the source of true love, and to consecrate herself fully from then on to her religious vocation.
At this point the tenor of the letters changes. In the 'Letters of Direction', Héloïse writes the fifth letter, declaring that she will no longer write of the hurt that Abelard has caused her. The sixth is a long letter by Abelard in response to Héloïse's first question in the fifth letter about the origin of nuns. In the long final, seventh letter, Abelard provides a rule for the nuns at the Oratory of the Paraclete, again as requested by Héloïse at the outset of the fifth letter.
The Problemata Heloissae (Héloïse's Problems) is a letter from Héloïse to Abélard containing 42 questions about difficult passages in scripture, interspersed with Abelard's answers to the questions, probably written at the time when she was abbess at the Paraclete.
Philosophy and legacy
Héloïse heavily influenced Abelard's ethics, theology and philosophy of love. A scholar of Cicero following in his tradition, Heloise writes of pure friendship and pure unselfish love. Her letters critically develop an ethical philosophy in which intent is centrally placed as critical for determining the moral correctness or "sin" of an action. She claims: "For it is not the deed itself but the intention of the doer that makes the sin. Equity weighs not what is done, but the spirit in which it is done." This perspective influenced Abelard's intention-centered ethics described in his later work Etica (Scito Te Ipsum) (c. 1140), and thus serve as a foundation to the development of the deontological structure of intentionalist ethics in medieval philosophy prior to Aquinas.
She describes her love as "innocent" yet paradoxically "guilty" of having caused a punishment (Abelard's castration). She refuses to repent of her so-called sins, insisting that God had punished her only after she was married and had already moved away from so-called "sin". Her writings emphasise intent as the key to identifying whether an action is sinful/wrong, while insisting that she has always had good intent.
Héloïse wrote critically of marriage, comparing it to contractual prostitution, and describing it as different from "pure love" and devotional friendship such as that she shared with Peter Abelard. In her first letter, she writes that she "preferred love to wedlock, freedom to a bond." She also states, "Assuredly, whomsoever this concupiscence leads into marriage deserves payment rather than affection; for it is evident that she goes after his wealth and not the man, and is willing to prostitute herself, if she can, to a richer." Peter Abelard himself reproduces her arguments (citing Heloise) in Historia Calamitatum. She also writes critically of childbearing and child care and the near impossibility of coexistent scholarship and parenthood. Heloise apparently preferred what she perceived as the honesty of sex work to what she perceived as the hypocrisy of marriage: "If the name of wife seems holier and more impressive, to my ears the name of mistress always sounded sweeter or, if you are not ashamed of it, the name of concubine or whore...God is my witness, if Augustus, who ruled over the whole earth, should have thought me worthy of the honor of marriage and made me ruler of all the world forever, it would have seemed sweeter and more honorable to me to be called your mistress than his empress." (The Latin word she chose now rendered as "whore", scortum [from "scrotum"], is curiously in medieval usage a term for male prostitute or "rent boy".)
In her later letters, Heloise develops with her husband Abelard an approach for women's religious management and female scholarship, insisting that a convent for women be run with rules specifically interpreted for women's needs.
Heloise is a significant forerunner of contemporary feminist scholars as one of the first feminine scholars, and the first medieval female scholar, to discuss marriage, child-bearing, and sex work in a critical way.
Influence on literature
Héloïse is accorded an important place in French literary history and in the development of feminist representation. While few of her letters survive, those that do have been considered a foundational "monument" of French literature from the late thirteenth century onwards. Her correspondence, more erudite than it is erotic, is the Latin basis for the Bildungsroman and a model of the classical epistolary genre, and which influenced writers as diverse as Chretien de Troyes, Madame de Lafayette, Choderlos de Laclos, Rousseau and Dominique Aury.
Early development of the legend
Jean de Meun, the first translator of Héloïse's work, is also the first person, in around 1290, to quote, in the Roman de la Rose (verses 8729 to 8802), the myth of Héloïse and Abelard, which must have meant that her work was sufficiently popular in order for the readership to understand the allusion.
In around 1337, Petrarch acquired a copy of the Correspondence, which already included the Historia Calamitatum (translated by Jean de Meun). Petrarch added many notes to the manuscript before starting to compose in the following year a Chansonnier dedicated to Laure de Sade.
The Breton lament song (Gwerz) titled Loiza ac Abalard sings of the ancient druidess picking 'golden grass' with the features of a sorceress-alchemist known as Héloïse. This spread a popular tradition, perhaps originating in Rhuys, Brittany, and going as far as Naples. This text and its later tradition associated magic with rationalism, which remained an important component of Abelardian theology as it was perceived until the twentieth century.
In 1583, the Abbey of Paraclet, heavily damaged during the Wars of Religion, was deserted by its monastic residents who disagreed with the Huguenot sympathies of their mother superior. The Abbess Marie de la Rochefoucauld, named by Louis XIII to the position in 1599 in spite of opposition from Pope Clement VIII, set to work on restoring the prestige of the establishment and organised the cult of Héloïse and Abelard.
Early modern period
Following a first Latin edition, that of Duchesne dated to 1616, the Comte de Bussy Rabutin, as part of his epistolary correspondence with his cousin the marquise de Sévigné, sent her a very partial and unfaithful translation on 12 April 1687, a text which would be included in the posthumous collected works of the writer.
Alexander Pope, inspired by the English translation that the poet John Hughes made using the translation by Bussy Rabutin, brought the myth back into fashion when he published in 1717 the famous tragic poem Eloisa to Abelard, which was intended as a pastiche, but does not relate to the authentic letters. The original text was neglected and only the characters and the plot were used.
Twenty years later, Pierre-François Godard produced a French verse version of Bussy Rabutin's text.
Jean-Jacques Rousseau drew on the reinvented figure in order to write 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which his editor published in 1761 under the title Lettres des deux amans.
In 1763, Charles-Pierre Colardeau loosely translated the version of the story imagined by Pope, which depicted Héloïse as a recluse writing to Abelard, and spread the sentimental version of the legend over the continent.
An edition designed by André-Charles Cailleau and produced by the heiress of André Duchesne further spread amongst reading audiences a collection of these re-imaginings of the figure of Héloïse.
Romantic period
At the very beginning of the romantic period, in 1807, a neo-Gothic monument was constructed for Héloïse and Abelard and was transferred to the Cimetière de l'Est in Paris in 1817.
In 1836, A. Creuzé de Lesser, the former Préfet of Montpellier, provided a translation of 'LI poèmes de la vie et des malheurs d'Eloïse et Aballard' which was published alongside his translation of the 'Romances du Cid'
In 1836, the scholar Victor Cousin focused on Héloïse as part of his studies on Abelard.
In 1839, François Guizot, the former minister for public education, published the posthumous essay of his first wife, Pauline de Meulan, as a preface to the hugely-popular first edition of the Lettres d'Abailard et d'Héloïse, which were transposed rather than translated into French and in two volumes illustrated by Jean Gigoux.
In the same year, the colibri Héloïse (Atthis heloisa) is dedicated to her by the ornithologists René Primevère Lesson and Adolphe Delattre.
In 1845, Jean-Pierre Vibert created a species of rose named after Héloïse.
Following the romantic tradition, Lamartine published in 1859 a version of Héloïse et Abélard.
In 1859, Wilkie Collins published the hugely popular novel The Woman in White, which relies on a similar story involving a male tutor ending up in love with his female pupil, told in an epistolary format.
Charles de Rémusat, a biographer of Abelard, wrote in 1877 a play based on the story of the medieval figures.
Disputed issues
Attribution of works
The authorship of the writings connected with Héloïse has been a subject of scholarly disagreement for much of their history.
The most well-established documents, and correspondingly those whose authenticity has been disputed the longest, are the series of letters that begin with Abelard's Historia Calamitatum (counted as letter 1) and encompass four "personal letters" (numbered 2–5) and "letters of direction" (numbers 6–8) and which include the notable Problemata Heloissae. Most scholars today accept these works as having been written by Héloïse and Abelard themselves. John Benton is the most prominent modern skeptic of these documents. Etienne Gilson, Peter Dronke, and Constant Mews maintain the mainstream view that the letters are genuine, arguing that the skeptical viewpoint is fueled in large part by its advocates' pre-conceived notions.
Heloise, Abelard, and sexual consent
The great majority of academic scholars and popular writers have interpreted the story of Héloïse's relationship with Abelard as a consensual and tragic romance. However, much controversy has been generated by a quote from Abelard in the fifth letter in which he implies that sexual relations with Heloise were, at least at some points, not consensual. While attempting to dissuade Heloise from her romantic memories and encourage her to fully embrace religion, he writes: "When you objected to [sex] yourself and resisted with all your might, and tried to dissuade me from it, I frequently forced your consent (for after all you were the weaker) by threats and blows." Importantly, this passage runs in stark contrast to Heloise's depiction of their relationship, in which she speaks of "desiring" and "choosing" him, enjoying their sexual encounters, and going so far as to describe herself as having chosen herself to pursue him amongst the "thousands" of men in Notre Dame. Nevertheless, working solely from the sentence in Abelard's fifth letter, Mary Ellen Waithe argued in 1989 that Héloïse was strongly opposed to a sexual relationship, thus presenting her as a victim and depicting an Abelard who sexually harassed, abused, and raped his student.
Most scholars differ in their interpretation of Abelard's self-depiction. According to William Levitan, fellow of the American academy in Rome, "Readers may be struck by the unattractive figure [the otherwise self praising Abelard] cuts in his own pages....Here the motive [in blaming himself for a cold seduction] is part protective...for Abelard to take all the moral burden on himself and shield, to the extent he can, the now widely respected abbess of the Paraclete—and also in part justificatory—to magnify the crime to the proportions of its punishment." David Wulstan writes, "Much of what Abelard says in the Historia Calamitatum does not ring true: his arrogation of blame for the cold seduction of his pupil is hardly fortified by the letters of Heloise; this and various supposed violations seem contrived to build a farrago of supposed guilt which he must expiate by his retreat into monasticism and by distancing himself from his former lover."
Heloise is thus motivated in her responses to Abelard's letters to set the record straight, that if anything she had initiated their relationship. Héloïse's writings express a much more positive attitude toward their past relationship than does Abelard. She does not renounce her encounters as sinful and she does not "accept that [Abelard's] love for her could die, even by the horrible act of...castration."
It is important in investigating these allegations of abuse or harassment on Abelard's part to consider the crude sexual ethics of the time (in which a prior relationship was generally taken as establishing consent), Heloise's letters which depict her as complicit if not the initiator of sexual interaction, and Abelard's position as an abbot relative to Heloise, an abbess, towards whom he owed a debt of responsibility and guardianship. By depicting himself—a castrated and now repentant monk—as to blame for their liaison, he denied Heloise her own sexual scandal and maintained the purity of her reputation. An allegation of sexual impropriety on the part of Heloise would furthermore endanger the sanctity of Abelard's property, the Paraclete, which could be claimed by more powerful figures in government or the Catholic Church. Heloise's prior convent at Argenteuil and another convent at St. Eloi had already been shut down by the Catholic hierarchy due to accusations of sexual impropriety by nuns. Monasteries run by male monks were generally in no such danger, so Abelard sealing his reputation as a repentant scoundrel would not harm him.
Waithe indicated in a 2009 interview with Karen Warren that she has "softened the position [she] took earlier" in light of Mews' subsequent attribution of the Epistolae Duorum Amantium to Abelard and Héloïse (which Waithe accepts), though she continues to find the passage troubling.
Burial
Héloïse's place of burial is uncertain. Abelard's bones were moved to the Oratory of the Paraclete after his death, and after Héloïse's death in 1163/64 her bones were placed alongside his. The bones of the pair were moved more than once afterwards, but they were preserved even through the vicissitudes of the French Revolution, and now are presumed to lie in the well-known tomb in Père Lachaise Cemetery in eastern Paris. The transfer of their remains there in 1817 is considered to have considerably contributed to the popularity of that cemetery, at the time still far outside the built-up area of Paris. By tradition, lovers or lovelorn singles leave letters at the crypt, in tribute to the couple or in hope of finding true love.
This remains, however, disputed. The Oratory of the Paraclete claims Abélard and Héloïse are buried there and that what exists in Père Lachaise is merely a monument, or cenotaph. Others believe that while Abelard is buried in the tomb at Père Lachaise, Heloise's remains are elsewhere.
Cultural references
In literature
Jean-Jacques Rousseau's 1761 novel, 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refers to the history of Héloïse and Abélard.
Mark Twain's comedic travelogue The Innocents Abroad (1869) tells a satirical, comedic version of the story of Abélard and Héloïse.
Etienne Gilson's 1938 Héloïse et Abélard contains a historical account of their lives.
George Moore's 1921 novel, Heloise and Abelard, treats their entire relationship from first meeting through final parting.
Charles Williams' 1931 novel The Place of the Lion features a character, Damaris, who focuses her research on Peter Abelard.
Helen Waddell's 1933 novel Peter Abelard depicts the romance between the two.
Dodie Smith's 1948 novel I Capture the Castle features a dog and a cat named Héloïse and Abélard.
Marion Meade's 1976 novel Stealing Heaven depicts the romance and was adapted into a film.
Sharan Newman's Catherine LeVendeur series of medieval mysteries feature Héloïse, Abélard, and Astrolabe as occasional characters, mentors and friends of the main character, formerly a novice at the Paraclete.
Lauren Groff's 2006 short story "L. DeBard and Aliette" from her collection Delicate Edible Birds recreates the story of Héloïse and Abélard, set in 1918 New York.
Wendy Waite's 2008 illustrated rhyming children's story Abelard and Heloise depicts a friendship between two cats named after the medieval lovers.
Sherry Jones's 2014 novel, The Sharp Hook of Love, is a fictional account of Abélard and Héloïse.
Mandy Hager's 2017 novel, Heloise, tells Heloise's story from childhood to death, with frequent reference to their writings.
Rick Riordan's 2017 book, Trials of Apollo: The Dark Prophesy, has a pair of gryphons named Heloise and Abelard.
Luise Rinser's 1991 novel Abaelard's Liebe (German) depicts the love story of Héloïse and Abelard from the perspective of their son, Astrolabe.
Abelard and Héloïse are referenced throughout Robertson Davies's novel The Rebel Angels.
Henry Adams devotes a chapter to Abelard's life in Mont Saint Michel and Chartres
James Carroll's 2017 novel The Cloister retells the story of Abelard and Héloïse, interweaving it with the friendship of a Catholic priest and a French Jewish woman in the post-Holocaust twentieth century.
Melvyn Bragg's 2019 novel Love Without End intertwines the legendary medieval romance of Héloïse and Abélard with a modern-day historian's struggle to reconcile with his daughter.
In art
Héloïse et Abeilard, oil on copper, Jean-Baptiste Goyet, 1830.
Abaelardus and Heloïse surprised by Master Fulbert, oil, by Romanticist painter Jean Vignaud, 1819
Monument to Abelard and Heloise at Le Pallet by Sylviane and Bilal Hassan-Courgeau
Heloise & Abelard, painting by Salvador Dalí
Abelard und Heloise, oil on canvas, by Gabriel von Max, circa 1900-15, The Jack Daulton Collection
In music
Abelard and Heloise is a 1970 soundtrack album by the British Third Ear Band.
Mon Abélard, mon Pierre, one track of the quebec singer Claire Pelletier in her album Murmures d'histoire.
Pájaros de Portugal, a song of Joaquin Sabina makes reference to their tragedy.
In poetry
François Villon's "Ballade des Dames du Temps Jadis" ("Ballad of the Ladies of Times Past") mentions Héloïse and Abélard in the second stanza.
Their story inspired the poem, "The Convent Threshold", by the Victorian English poet Christina Rossetti.
Their story inspired the poem, "Eloisa to Abelard", by the English poet Alexander Pope.
In Robert Lowell's poetry collection History (1973), the poem "Eloise and Abelard" portrays the lovers after their separation.
Onstage and onscreen
Ronald Millar's play Abelard & Heloise was a 1971 Broadway production at the Brooks Atkinson Theatre, starring Diana Rigg and Keith Michell, script published by Samuel French, Inc, London, 1970.
In the film Being John Malkovich, the character Craig Schwartz (played by John Cusack), a failed puppeteer, stages a sidewalk puppet show depicting correspondence between Héloïse and Abélard. This gets him beaten up by an irate father, due to its sexual suggestiveness.
The film, Stealing Heaven (1988), chronicles their story and stars Derek de Lint, Kim Thomson, and Denholm Elliott. The film is based on Marion Meade's 1979 novel of same name.
In the 58th episode of The Sopranos (Sentimental Education), Carmela Soprano finds a copy of The Letters of Abelard & Héloïse while using her ex-marital lover Mr. Wegler's bathroom. The book alludes both to the impossibility of Carmela and Mr. Wegler's romantic affair, and arguably, and ironically, to the doomed platonic love between Carmela and her daughter, Meadow: for many years it was a mother-daughter tradition to have tea under the portrait of Eloise at the Plaza Hotel.
Anne Carson's 2005 collection Decreation includes a screenplay about Abelard and Héloïse.
Henry Miller uses Abelard's "Foreword to Historia Calamitatum" as the motto of Tropic of Capricorn (1938).
Howard Brenton's play In Extremis: The Story of Abelard & Heloise was premiered at Shakespeare's Globe in 2006.
Michael Shenefelt's stage play, Heloise, 2019
See also
Peter Abelard
Peter the Venerable
Bernard of Clairvaux
Astrolabe
Stealing Heaven
Hildegarde of Bingen
Teresa of Avila
Sei Shōnagon
References
Further reading
Abelard and Heloise. The Letters and Other Writings. Translated, with an introduction and notes, by William Levitan. Selected songs and poems translated by Stanley Lombardo and Barbara Thorburn. Indianapolis and Cambridge: Hackett Publishing Co., 2007.
External links
The Letters of Abelard and Heloise
About.com article
Short history of Abelard and Heloise with references.
Newer musical of the story of Abélard and Héloïse
Abelard and Heloise from In Our Time (BBC Radio 4)
1164 deaths
Benedictine abbesses
French Roman Catholic abbesses
Burials at Père Lachaise Cemetery
12th-century French nuns
12th-century French writers
12th-century French women writers
French women writers
French philosophers
French women philosophers
12th-century French philosophers
Love stories
Catholic philosophers
12th-century writers in Latin
French feminist writers
Catholic feminists
1100 births |
https://ko.wikipedia.org/wiki/%EB%8F%8C%EC%99%B8 | 돌외 | 돌외(이명: 덩굴차, 칠엽담(七葉膽), 교고람(絞股藍); 영어: Gynostemma pentaphyllum (Thunberg) Makino)는 박목 박과에 속하는 쌍떡잎식물로서 자웅이주이며 덩굴성 다년초 식물이다.
어원
잎을 씹으면 단맛이 있어 수국차를 연상시키므로 감차덩굴이란 의미로 “덩굴차”라는 이름도 있다. 중국에서는 “교고람(絞股藍)”이라고 하는데, 본 명칭은 명대(서기 1406) 주숙이 지은 구황본초《救荒本草》에 처음 등장한다. 구황본초에 “교고람은 덩굴을 이어 자란다. 잎은 작은 푸른 잎처럼 짧고 가장 자리가 연하며 가장자리는 톱니 모양이 있다. 잎이 연한 색이며 오엽이 한 곳에 모여있다"로 기록되어 있다. 덩굴이 갈라지는 곳에서 덩굴손이 나와 다른 물건을 얽어매고 열매가 익으면 흑색을 띠는 남색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또한, 학명 “Gynostemma”란 암술(gyne)+갓(stemma)으로서 암술에 갓이 있다는 뜻이며, “pentaphyllum”은 5개(penta)+엽(phyllum)으로서 잎사귀가 5개의 작은 잎으로 형성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1]
경작 및 식물특징
분포 및 재배환경
전세계적으로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 등에 수종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부지역, 제주도, 울릉도의 산야지에 자생하는 식물이다. 주로 습도가 높은 곳에서 자라며, 해안가, 강가, 숲 가장자리 등 읍습한 곳 위주로 분포되어 있다.
채취 및 제법
수확은 대개 1년에 2번 하는데 7월과 10월에 하는 것이 좋으며, 수확 후 잎이나 덩굴이 녹색이 되도록 태양볕에 건조하여야 한다 [2].
식물특징
잎은 어긋나기하며 양면에 다세포로 된 백색털이 있으나 곧 없어진다. 소엽은 보통 5개이지만 3-7개인 것도 있으며 좁은 난상 타원형이고, 정소엽은 작은 잎자루와 더불어 길이 4-8cm, 폭 2-3cm로서 끝이 뾰족하며 표면 맥위에 잔털이 있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꽃은 8-9월에 피며 황록색이고 원뿔모양꽃차례 또는 총상 원뿔모양꽃차례로서 길이가 8-15cm 정도 된다. 꽃받침열편이 아주 작고 꽃부리는 5개로 갈라지는데 열편은 길이 3mm정도로서 피침형이며 끝이 길게 뾰족해진다. 장과는 지름 6-8mm이고 둥글며 흑록색으로 성숙하고 상반부에 1개의 횡선이 있으며 종자는 길이 4mm정도된다. 마디에는 흰털이 있고 사방으로 엉켜서 자라지만 덩굴손으로 기어 올라가기도 한다 [3]. 또한, 돌외는 외형상 거지덩굴과 비슷하기에 이를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은데, 거지덩굴은 포도과이고 돌외는 박과로서 각각의 자세한 식물특성 및 효능에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4].
역사
중국 남부 지역에서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산악지역에서는 돌외를 차로 마시는 경우가 잦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평균수명보다 더 오래 무병장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돌외를 “불노초”로 여기며 “남쪽의 인삼”으로 칭하기도 한다. 1986년 중국에서는 향후 개발 예정의 중국 여러 명품 약재 중 “돌외”를 첫 번째에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도 1977년 덕도문리대학약학부의 죽본상송가 일본생약학회에서 발표한 것이 시초가 되어 각광을 받게 되었으며, 자연산 돌외를 차로 마시면서 다이어트, 스트레스 완화 등 건강상 여러 효능을 보고하고 있다.
성분과 약효
돌외는 스테롤, 당류, 색소, 배당체를 성분으로 함유하고 있으며, 맛은 쓰고 성질은 차다고 알려져있다. <한국본초도감> 및 <중약대사전>에서는 돌외가 소염(消炎), 해독(解毒), 거담(祛痰), 지해(止咳)에 효능이 있으며, 특히 만성기관지염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만성기관지염에 1회에 3그램을 물을 넣고 달여서 1일 3회 복용하고 10일 후에 일정한 효과를 보았다’는 보고가 있다 [5, 6]. 또한, 돌외의 생체방어(면역반응) 증강 및 항암 효능이 입증된 바 있으며, 정상인에서 돌외추출물 복용에 따른 스트레스, 불안지수의 변화 및 생체 호르몬 변화를 통해 스트레스 완화에 효과적임이 밝혀졌다 [7, 8]. 일본의 기능식품 시장에서는 ‘스트레스 관련 상품’이 주목을 받고 있으며, 활성산소, 수면, 미용, 비만, 노화, 알레르기 등 스트레스의 유해성이 인식되면서 기능식품을 통한 스트레스 조절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채취한 자연산 돌외가 차, 드링크, 술 등으로 많이 개발되고 있다. 돌외잎은 예전에는 주로 약재로 먹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차로 복용하고 있으며, 체지방 분해, 콜레스테롤 및 혈당 조절을 통해 적극적인 다이어트식품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돌외 사포닌
돌외는 자생하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지페노사이드(gypenoside-UL1, -UL2, -UL3, -UL4, -UL5, -UL6, -UL7, -XLVIII)를 포함하는 담마란(dammarane type)계 사포닌을 함유하고 있다. 국내에서 돌외는 제주, 울릉도 및 거창 지역 등에 분포되어 있으며, 각 산지별로 사포닌의 종류 및 함량이 상이함이 보고된 바 있다 [9, 10]. 죽본(竹本)의 연구에 의하면, 돌외에는 약용인삼(藥用人參)과 같은 유효성분이 있다고 한다. 추출된 성분은 50종 이상의 사포닌으로서 그 중의 4종류가 약용인삼과 같은 구조를 가진 진세노사이드이며 중추신경에 대해서 진정작용과 흥분작용의 쌍방으로 작용을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11]. 그 외에 사포닌은 새롭게 발견된 것으로서, 이들 신종 사포닌의 약리효과에 대해서는 당뇨, 면역기능 및 스트레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담마란계 트리터페노이드 사포닌 화합물을 함유한 돌외의 지페노사이드 추출물의 경우 비만, 제2형 당뇨병, 고지혈증 치료 및 예방효과가 있었으며, 돌외 사포닌은 항당뇨 및 항고지혈 작용에 있어서 인삼 사포닌과 유사한 정도의 효과를 나타내었다 [9, 12].
가공 및 쓰임새
일반적으로 돌외 건초는 티백 및 분말가루로 가공되어 차 및 건강기능식품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돌외를 주성분으로 항염증 조성물과의 배합을 통해 증류한 숙취해소음료로도 가공되고 있다. 또한 돌외 잎에 죽염, 찹쌀, 맵쌀, 엿기름 등의 재료를 가마솥에 넣고 은은한 소나무 장작불에 오랜 시간 달여 돌외청으로 섭취하기도 한다. 최근 돌외의 다양한 효능이 연구됨에 따라 특정 질환의 개선 및 예방차원에서 건강기능식품 개발 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와 함께 돌외의 유효 성분 활용도를 높이고자 재배, 추출 및 가공법 개발에 치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각주
[1] <약용식물대사전> 다나카 고우지 지음, 동학사 (2004.07.15. 출간)
[2] <덩굴차의 약효와 재배> 유징자 외편 지음, 탐구당 (1985.06.01. 출간)
[3]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돌외편
[4] 울릉자생식물도감, 거지덩굴/돌외편
[5] <한국본초도감> 안덕균 지음, 교학사 (2003.07.20. 출간)
[6] <중약대사전> 정담편집부, 정담 (2006.04.01. 출간)
[7] 논문 (Kor. J. Pharmacogn. 2009, 40(1) : 35-40)
[8] 논문 (Kor. J. Clin. Pharm. 2011, 21(2) : 131-137)
[9] 특허 (KR20130069430A/ 2013-06-26/ 출원인 (주)셀트리온)
[10] 특허 (KR101773081B1/ 2017-08-30/ 특허권자 국가식품클러스터지원센터, (주)비티씨)
[11] 애원대학의학부, 오전척도등과 죽본과의 공동연구
[12] 논문 (Yakhak Hoeji. 2001, 45(5) : 545-556)
같이 보기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곰포기네족
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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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페테르 툰베리가 명명한 분류군 | https://en.wikipedia.org/wiki/Gynostemma%20pentaphyllum | Gynostemma pentaphyllum | Gynostemma pentaphyllum, also called jiaogulan (), is a dioecious, herbaceous climbing vine of the family Cucurbitaceae (cucumber or gourd family) widely distributed in South and East Asia as well as New Guinea. Jiaogulan has recently been incorporated into traditional medicine.
Description
Among many common names are five-leaf ginseng, poor man's ginseng, miracle grass, fairy herb, sweet tea vine, gospel herb, and southern ginseng.
Jiaogulan belongs to the genus Gynostemma, in the family Cucurbitaceae, which includes cucumbers, gourds, and melons. Its fruit is a small purple inedible gourd. It is a climbing vine, attaching itself to supports using tendrils. The serrated leaflets commonly grow in groups of five (as in G. pentaphyllum) although some species can have groups of three or seven leaflets. The plant is dioecious, meaning each plant exists either as male or female. Therefore, if seeds are desired, both a male and female plant must be grown.
Taxonomy
Gynostemma pentaphyllum is known as Jiaogulan ( in China. The plant was first described in 1406 CE by Zhu Xiao, who presented a description and sketch in the book Materia Medica for Famine as a survival food rather than a medicinal herb. The earliest record of jiaogulan's use as a drug comes from herbalist Li Shizhen's book Compendium of Materia Medica published in 1578, identifying jiaogulan for treating various ailments such as hematuria, edema in the pharynx and neck, tumors, and trauma. While Li Shizhen had confused jiaogulan with an analogous herb Wulianmei, in 1848 Wu Qi-Jun rectified this confusion in Textual Investigation of Herbal Plants.
Modern recognition of the plant outside of China originated from research in sugar substitutes. In the 1970s, while analyzing the sweet component of the jiaogulan plant (known as amachazuru in Japan), Masahiro Nagai discovered saponins identical to those in Panax ginseng. Continued research has described several more saponins (gypenosides) comparable or identical to those found in ginseng. Panax ginseng contains ginsenosides while gypenoside saponins have been found in jiaogulan.
Distribution and habitat
G. pentaphyllum is one of about 17 species in the genus Gynostemma, including nine species endemic to China. However, G. pentaphyllum has a wide distribution outside of China, ranging from India and Bangladesh to Southeast Asia to Japan and Korea as well as to New Guinea. In China, it grows in forests, thickets, and roadsides on mountain slopes at elevations of above sea level.
Jiaogulan is a vine hardy to USDA zone 8 in which it may grow as a short lived perennial plant. It can be grown as an annual in most temperate climates, in well-drained soil with full sun. It does not grow well in cold climates with temperatures below freezing.
Chemistry and toxicity
Constituents of G. pentaphyllum include sterols, saponin, flavonoids, and chlorophyll. Gypenosides have been extracted from its leaves. Some saponin compounds are the same as those found in ginseng roots. While there have been in vitro studies on toxicity, there have been no clinical trials, therefore no information is available about human toxicity.
Uses
The plant is used in folk medicine, typically as a herbal tea, but may be used as an alcohol extract or in dietary supplements. It has not seen widespread use in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 being adopted only in the past 20 years, because it grows far from central China where TCM evolved; consequently, it was not included in the standard pharmacopoeia of the TCM system. Before then, it was a locally-known herb used primarily in mountainous regions of southern China and in northern Vietnam. It is described by the local inhabitants as the "immortality herb" (仙草, xiān cǎo), because a large number of elderly people within Guizhou Province reported consuming the plant regularly. In the European Union, jiaogulan is considered a novel food following a 2012 court ruling that prohibited its sale as food.
Research
Some limited research has assessed the potential for jiaogulan to affect such disorders as cardiovascular diseases, hyperlipidemia, or type 2 diabetes, but these studies were too preliminary to allow any conclusion that it was beneficial. A small trial suggested mild anxiety reducing effects, though these were not statistically significant.
References
Cucurbitaceae
Herbs
Chinese folklore
Dietary supplements
Sugar substitutes
Plants used in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Herbal tea
Chinese teas
Flora of tropical Asia
Flora of China
Flora of Japan
Flora of Korea
Flora of Taiwan
Taxa named by Carl Peter Thunberg
Dioecious plants |
https://ko.wikipedia.org/wiki/ComicFesta | ComicFesta | ComicFesta(코믹 페스타)는 웨이브가 운영하는 전자 코믹 착신 사이트.
출판사 직영의 사이트인 것이 특징으로 오리지널 작품도 많이 착신하고 있어, 이것이 후발임에도 불구하고 존속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AnimeFesta
2021년 5월 10일부터 웨이브가 운영하고 있는 서브 스크립션 방식의 애니메이션 전송 사이트.
전신인 사이트는 ComicFesta 사이트 내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2017년 3월부터 〈애니메Zone〉로서 개설. ComicFesta의 사이트 내에 있는 애니메이션 전송 사이트. 2019년 2월부터 〈ComicFesta 애니메〉로 개명했다. 아래와 같은 오리지날 작품 외, 타 작품의 모션 코믹판이나, 코믹 유신 원작의 드라마 작품 등의 전달도 실시하고 있다.
AnimeFesta 오리지널
2017년부터 웨이브의 그룹사가 제작하고 있는 작품. 처음에는 〈ComicFesta 애니메〉 명칭을 사용했지만, 2021년 5월부터 〈AnimeFesta 오리지널〉로 개명했다.
틴즈 러브나 성인 만화이기 때문에 이들 작품은 성인용의 〈완전판〉이 제작되어 독점 전달되고 있다.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이나 인터넷 전달 사이트에서도 통상판(일부 방송국에 의해서는 부분적으로 완화한 R-15판)가 방송 · 착신되고 있다. 《거인족의 신부》 이후의 작품은 〈통상판〉을 〈온에어판〉, 〈완전판〉을 〈프리미엄판〉으로 호칭이 개정되어 있다.
또한 최초로 방송 · 전송한 작품 《승려와 나누는 색욕의 밤에…》를 빗대어 〈승려계〉라는 호칭도 받고 있다. 후에 이 호칭은 공식화해, 애니메이션화를 확약한 만화상 〈승려계 쟁탈 만화 대상〉 등에 사용된다.
오리지널 작품
승려와 나누는 색욕의 밤에… (2017년 4월 ~ 6월, 전 12화+특별편 1화)
스커트 안은 짐승이었습니다. (2017년 7월 ~ 9월, 전 12화)
맞선 상대는 제자, 기가 센, 문제아 (2017년 10월 ~ 12월, 전 12화)
25세의 여고생 (2018년 1월 ~ 3월, 전 12화)
달콤한 징벌 ~나는 간수의 펫~ (2018년 4월 ~ 6월, 전 12화)
천장에서 떨어진 그녀 ~2층에서 여자가...떨어졌다!?~ (2018년 7월 ~ 8월, 전 9화)
막차가 끊긴 뒤, 캡슐 호텔에서 상사에게 미열을 전하는 밤 (2018년 10월 ~ 12월, 전 12화)
아빠도, 하고 싶어 (2019년 1월 ~ 2월, 전 8화)
목욕관리사씨! ~나와 그 녀석이 여탕에서!?~ (2019년 4월 ~ 5월, 전 8화)
손끝에서부터 진심의 열정 -소꿉친구는 소방관- (2019년 7월 ~ 9월, 전 8화)
XL 상사 (2019년 10월 ~ 11월, 전 8화)
오버플로 (2020년 1월 ~ 2월, 전 8화)
내 손가락으로 흐트러져라. ~폐점 후 둘만 남은 살롱에서~ (2020년 4월 ~ 5월, 전 8화)
거인족의 신부 (2020년 7월 ~ 8월, 전 9화)
늑대 씨는 잡아먹히고 싶어 (2020년 9월, 전 3화)
어른은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2020년 10월 ~ 11월, 전 8화)
지미헨!! ~지미코를 바꾸는 순이성교유~ (2021년 1월 ~ 2월, 전 8화)
흑갸루가 됐으니까 절친과 해봤다. (2021년 4월 ~ 5월, 전 8화)
손끝에서부터 진심의 열정 2 -연인은 소방관- (2021년 7월 ~ 8월, 전 8화)
마왕 이브로기아에게 몸을 바쳐라 (2021년 10월 ~ 11월, 전 9화)
쇼타임! ~노래의 언니라도 하고 싶다~ (2021년 10월 ~ 11월, 전 8화)
왕자의 본명은 악역 영애 (2022년 1월 ~ 3월, 전 8화)
3초 후, 야수. ~미팅에서 구석에 있던 그는 육식이었습니다. (2022년 4월 ~ 6월, 전 8화)
숲 속의 곰, 동면 중. (2022년 7월 ~ 9월, 전 9화)
하렘 캠프! (2022년 10월 ~ 12월, 전 8화)
쇼타임! 2 ~노래의 언니라도 하고 싶다~ (2023년 1월 ~ 3월, 전 8화)
사자나미 소우시에게 순결을 바치다 (2023년 4월 ~ 6월, 전 8화)
부부 교환 ~돌아올 수 없는 밤~ (2023년 7월 ~ 9월, 전 8화)
시크릿 미션 ~잠입수사관은 절대 지지않아!~ (2023년 10월 ~ (예정))
덧말 캐릭터인 주제에 스파다리 왕자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시기 미정)
잉태할 때까지 흐트러져라 ~대신 신부와 군복의 맹애 (시기 미정)
각주
외부 링크
ComicFesta
AnimeFesta
애니메 작품
AnimeFesta LINE UP
보이스 드라마
ASMR
웹 만화 연재처 | https://en.wikipedia.org/wiki/ComicFesta | ComicFesta | ComicFesta is a digital comic platform operated by WWWave Corporation, focused on manga with sexual content.
AnimeFesta
In March 2017, ComicFesta added an anime streaming service called "Anime Zone" to their website. It was rebranded as "ComicFesta Anime" in February 2019, and then as "AnimeFesta" in May 2021.
In addition to existing anime, the platform also streams ecchi anime based on comics originally distributed by ComicFesta, such as "Sōryo to Majiwaru Shikiyoku no Yoru ni...". As these comics include TL comics, MENS comics, BL comics, or adult comics which feature mature content, the platform also produces and distributes an exclusive adult-rated "complete versions" of those anime.
Anime originally created by the platform are also aired on television channels and streamed by other internet platforms, but they only provide either a "regular version" or an "R-15 version" with varying degrees of censorship.
The platform also distributes motion comic versions of other series and TV Drama adaptions of other comics published by the platform's parent company.
All of the originally adapted anime on the platform are also available with English subtitles through Coolmic, WWWave's international digital comic distribution and anime streaming service.
References
External links
ComicFesta's website
ComicFesta's AnimeZone website
Coolmic's website
Manga hosting services
Pages with unreviewed translations |
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B%84%90%EB%A6%AC%20%EC%97%B4 | 코널리 열 | 코널리 열(, )은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에 참여했던 아일랜드 공화주의자 의용병들을 소급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아일랜드 시민군 지도자로 부활절 봉기 때 처형당한 노조운동가 제임스 코널리의 이름을 땄다. 규모는 중대급이었다.
모집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막 터졌을 때, 전세계의 좌파 조직들은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지했고, 같은 해 9월 공화파와 함께 파시스트 국민파 반군을 물리치기 위한 국제여단이 설립되었다. 이것은 아일랜드의 좌파 단체들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아일랜드의 국제여단 조직가로는 산 머레이, 파더르 오 도우널, 프렌시어스 오 리안이 있었다.
머레이는 당시 아일랜드 공산당(CPI) 서기장이었고, 텔만 대대의 빌 스콧(Bill Scott)과 연결선이 있어서 스페인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받아볼 수 있었다. 머레이는 스콧이 보내온 정보를 공산당 당보에 게재했다. 오 도우널은 전 타흐터 달러(의회의원)로, 나치 독일 치하의 베를린에서 열린 1936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하기 위해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인민올림픽에 참여하러 바르셀로나에 가 있었다. 오 도우널은 무정부주의 성향의 노동자 민병대가 쿠데타 시도를 분쇄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합류하여 아라곤 전선으로 갔다. 그 뒤 귀국한 오 도우널은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지키기 위한 아일랜드인 의용연대 편성운동을 했다. 오 리안은 아일랜드 내전 때 아일랜드 공화국군 조약 반대파(ATIRA) 편에서 싸웠고, 공산주의 성향의 공화회의 회원이었다. 그도 국제여단에 참여해 싸울 의용병을 모집했다.
아일랜드 의용병은 대부분 공화회의에서 모집되었다. 1925년에서 1931년 사이에 소련은 영국과 미국을 정탐해줄 것을 대가로 ATIRA에 자금을 지원했다. 여기에 많은 CPI 당원들이 참여했고 스르 에이레 같은 통일전선 조직도 만들었다. 그러나 공화주의와 공산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ATIRA 내부에서 공산주의 성향은 1930년대 초부터 퇴색하기 시작했다. 이에 새 길을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공화회의였다.
좌파 아일랜드인들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동기는 우선 스페인 제2공화국에 대한 지지도 있었지만, 1936년 말엽에 스페인으로 출국하여 국민파에 가담한 아일랜드인 여단에 대한 증오와 분노도 컸다. 아일랜드인 여단은 파시스트 아일랜드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로서 병력은 800여명이었다. ATIRA와 이들 파시스트 사이의 적대는 아일랜드 내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ATIRA와 청의사는 1932년에서 1933년까지 길바닥에서 주로 몽둥이, 때로는 총까지 동원된 패싸움을 벌이곤 했다. 이 두 집단은 모두 스페인 내전을 아일랜드 내전의 연장선으로 보고 참전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 사제였다가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로버트 마틴 힐러드, 1927년에 법무장관 키빈 크리스토르 오 히긴을 암살한 빌 개넌 등도 있었다.
전사(戰史)
1936년 12월, 프렌시어스 오 리안이 이끄는 80명이 선발대로 스페인에 도착했다. 대부분은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모집되었지만 일부는 벨파스트 등 북아일랜드에서도 왔다. 미할 오 리르단, 찰리 도넬리, 프랭크 콘로이, 에디 오플라허티(Eddie O'Flaherty), 폴 번스(Paul Burns), 재키 헌트(Jackie Hunt), 빌 헨리(Bill Henry), 에이먼 맥그로티(Eamon McGrotty), 빌 비틀(Bill Beattie), 패디 로 맥로글린(Paddy Roe McLaughlin), 빌 헨리(Bill Henry), 피터 오코너(Peter O'Connor), 피터 파워(Peter Power), 조니 파워(Johnny Power), 리엄 툴민슨(Liam Tumilson), 짐 스트래니(Jim Stranney), 윌리 오 핸런(Willie O'Hanlon), 벤 머레이(Ben Murray) 프레드 맥마흔(Fred McMahon) 등이 이 선발인원이었다. 대다수가 아일랜드 공산당 당원이었다.
남프랑스 페르피냥까지 열차를 타고 이동한 그들은 1936년 12월 스페인 마드리구에라스에 모여 국제여단 "제임스 코널리 부대"를 선언했고, 이것이 후에 통칭 "코널리 열"로 알려지게 된다. 이 부대는 제12(프랑스인)IB대대에 배속되어 코르도바 근교의 안달루시아 전선에 처음 배치, 국민파의 공세를 격퇴하는 데 일조했다. 그달 말에는 마드리드 전투에 참여해 많은 부대원이 전사했다.
해가 바뀌어 1937년 1월, 아일랜드인 의용병 부대는 다른 국제여단 의용병들과 함께 제15국제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코널리 부대는 제16대대(영국인 대대) 산하 1개 중대를 이루었다. 하지만 일부 병사들이 자신들은 아일랜드 공화주의 신념에 서약했으므로 영국인 대대에서는 복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중대장 오 리안은 노동자 계급연대가 국민감정 따위보다 중한 문제라고 대원들을 달랬지만, 막상 그 자신도 한 영국인 의용병이 아일랜드 독립전쟁 때 악명높았던 블랙 앤 탠스 소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분노해서 총으로 쏘아 죽일 뻔했다. 이렇게 부대원들 간에 갈등이 고조되자 일부 아일랜드인 의용병들은 영국인 대대에서 이탈하여 미국인 대대인 제17대대 링컨 대대로 갔다. 그러나 링컨 대대로 간 아일랜드인들은 정식 부대로 편성되지는 못했다. 코널리 열은 1938년 2월 마드리드 근교에서 벌어진 하라마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찰리 도넬리, 에이먼 맥그로티, 빌 헨리, 리엄 툴민슨, 빌 비틀이 모두 죽었다. 중대장 오 리안도 하라마에서 심한 부상을 입어 정양을 위해 아일랜드로 귀국해야 했다. 그 뒤 스페인에 돌아온 오 리안은 공화국군 장군 호세 미아하 메난트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6월, 코널리 열은 예비대로 돌려졌다. 그보다 앞서 남스페인 보소플랑코에서 싸웠던 제20대대 영국계 미국인 중대의 중대원들이 합류했다. 7월, 제15국제여단은 브루네테 전투에 참여했고 여기서 제16대대는 450명이 전사했다. 코널리 열은 빌라누에바 데 카나다 주변에서 싸우다 7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8월, 제15여단은 벨치테 전투에서 싸웠다. 이 때 피터 달리가 부상을 입었고, 패디 오 다러가 제16대대 전체를 지휘했다. 10월, 코널리 열은 비교적 평온한 아라곤 전선으로 이동했다. 해가 바뀌어 1938년 1월, 테루엘 전투에 참여했다. 3월에 벌어진 간데사 전투에서 전선이 붕괴하면서 코널리 열도 패주했다. 4월 1일의 아라곤 공세에서 프렌시어스 오 리안이 포로로 잡혔고, 미란다 델 에브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에이먼 데 벌레라의 탄원으로 노역 3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그는 1940년 독일 해외방첩청에 넘겨져 IRA-아프베어 합작의 아일랜드 쪽 연락책이 되었다.
1938년 7월, 코널리 열은 에브로 전투에 참여하여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에브로 전투는 공화파의 마지막 공세 시도였으며, 괴멸적 패배로 끝났다. 살아남은 아일랜드인 의용병들은 스페인 공화정부의 국제여단 해산 방침에 따라 1938년 9월 아일랜드로 송환되었다. 공화정부는 국제여단을 해산하면 다른 민주국가들이 군사개입을 해주거나, 또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철수할 것을 기대했지만 헛된 희망으로 끝났다.
코널리 열은 작은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문헌마다 기록된 병력 수가 다르다. 국제여단 영국인-아일랜드인 표창자 명단에는 아일랜드인 36명이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참전 당사자인 오 리르단은 부대원은 총 145명이었고 그 중 61명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더블린으로 귀항한 코놀리 열을 마중한 것은 미할 오 플란나간 신부 한 명 뿐이었다.
크리스티 무어의 노래 〈제5여단 만세〉는 오 리르단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이 아일랜드인 의용병들을 찬양한 노래다.
각주
국제여단
아일랜드의 연대
아일랜드 공화국군 조약 반대파
아일랜드 공화주의 무장 단체
아일랜드의 극좌 정치 | https://en.wikipedia.org/wiki/Connolly%20Column | Connolly Column | The Connolly Column (, ) was the name given to a group of Irish republican socialist volunteers who fought for the Second Spanish Republic in the International Brigades during the Spanish Civil War. They were named after James Connolly, the executed leader of the Irish Citizen Army. They were a company-strength unit of the XV International Brigade, which also included the US, British and Latin American battalions in Spain. The name is now retroactively applied to all Irish volunteers who fought for the Spanish Republic.
Origins
On the outbreak of the Spanish Civil War in July 1936, support for the Spanish Republic grew among left-wing organizations, taking tangible form in a decision in September 1936 to form an International Brigade of volunteers to fight with the Republican government against the fascist-dominated Nationalist rebels. This decision was echoed in Ireland by various left-wing groups; the chief organizers of this effort were Sean Murray, Peadar O'Donnell, and Frank Ryan.
Murray was chairman of the Communist Party of Ireland (CPI) at the time, and a fine orator. he was in contact with Bill Scott, a volunteer with the Thälmann Battalion who sent regular reports of conditions in Spain, and which Murray published in the party newspaper, The Worker.
O'Donnell, a socialist and Irish republican, was in Barcelona for the "People's Olympics" – held in opposition to the Olympic Games being held in Berlin under the Nazi regime. O'Donnell sympathised with the anarchist workers' militia that defeated the attempted military coup in the city and joined one of their militias on the Aragon front.
On his return to Ireland, O'Donnell urged the formation of Irish volunteer regiments to support the Popular Front government.
Ryan had fought during the Irish Civil War and was a member of the communist-orientated Republican Congress, and had also been a member of the Irish Republican Army (IRA). He was keen to form a volunteer group to join the International Brigades and fight.
Most of the Irish volunteers came from the Republican Congress. From the period of 1925–1931, the IRA received money from the Soviet Union in return for spying on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States. This had led to many Communist Party of Ireland members joining and even setting up front groups such as Saor Éire. This attempt to form a synthesis of republican and communist concerns had largely failed and within the IRA the communist-element declined in prominence by the early 1930s, leading these people to found the separate Republican Congress.
Motivation
As well as sympathy for the Spanish Republic, many Irish Republican volunteers were also motivated by enmity towards the Irish Brigade, an 800 strong force that volunteered in late 1936 to fight on the Spanish Nationalist side. This antagonism dated back to the Irish Civil War of 1922–23, when some of the predecessors of the two factions had fought on opposing sides. In 1932–33 small groups of IRA men and Blueshirts had fought each other in the streets with fists, bats and occasionally guns; the Blueshirts were outlawed in 1933.
Some of these men on both sides saw the Spanish conflict as a continuation of Ireland's own civil war. Neither group had a candidate elected in any Irish elections, despite the hardships of the Great Depression. Already a small group, some left-leaning IRA or ex-IRA men had formed the breakaway Republican Congress in 1934, which also divided later that year.
Not all the volunteers were Irish Republicans, however, as the Irish International Brigaders included many other strains of socialist and left wing ideology. They even included a communist ex-clergyman, Robert Hilliard.
Bill Gannon, former IRA member who had been among the assassins of Justice Minister Kevin O'Higgins in 1927, and who later joined the Irish Communist Party, had a major role in the recruitment and organising.
In Spain
In December 1936, a group of eighty volunteers, led by Frank Ryan, arrived in Spain. The majority came from the Irish Free State, but there were also a group of republican socialists from Belfast and other parts of Northern Ireland. Those who went included Michael O'Riordan, Charles Donnelly, Frank Conroy, Eddie O'Flaherty, Paul Burns, Jackie Hunt, Bill Henry, Eamon McGrotty, Bill Beattie, Paddy Roe McLaughlin, Bill Henry, Peter O'Connor, Peter Power, Johnny Power, Patrick Smith, Liam Tumilson, Jim Stranney, Willie O'Hanlon, Ben Murray and Fred McMahon. Many were members of the Communist Party of Ireland.
After travelling through southern France by train to Perpignan, they assembled in Madrigueras and in December 1936 constituted the "James Connolly Centuria" of the International Brigade, colloquially known as the "Connolly Column". The unit first saw action on the Andalusian front near Cordova as part of the 12th (French) IB battalion where they helped repulse a Nationalist attack. Later that month they fought at the battle of Madrid, where they lost a number of men.
In January 1937 the unit was re-organized, with new recruits from Ireland and elsewhere, and placed with the newly formed (English-speaking) XV (Abraham Lincoln) Brigade. The Connolly's formed a company of the 16th (British) Saklatvala Battalion, but some Irish volunteers refused to serve in the British battalion due to their Irish Republican convictions. Ryan wrote of the importance of workers solidarity outweighing national sentiment, though he also on one occasion threatened to shoot an English volunteer when he found out that he had served in the Black and Tans in the Irish War of Independence. As a result of these tensions, some of the Irish left the British to join the 17th (American) Lincoln Battalion, another part of the XV Brigade. However these volunteers were not a formal unit in that battalion and other Irish volunteers also fought in other units of the Brigades. With the XV Brigade the Connolly's suffered heavy losses at the battle of Jarama, near Madrid, in February 1937. Charlie Donnelly, Eamon McGrotty, Bill Henry, Liam Tumilson and Bill Beattie were all killed during this battle.
Frank Ryan was also badly wounded at Jarama in February 1937 and returned to Ireland to recuperate. On his return to Spain he was appointed adjutant to the Republican General José Miaja.
In June 1937 they went into reserve, where they were joined by men from the Anglo-American company of 20th Battalion which had fought earlier near Pozoblanco in southern Spain.
In July the XV Brigade took part in the battle of Brunete, where the Saktvala battalion suffered 450 casualties; the Connolly's, fighting around Villanueva de Canada, lost 7 men killed and many others wounded.
In August XV Brigade was fought the battle of Belchite, where Paddy O'Daire of the Connolly's took command of the British battalion during the battle following the wounding of Peter Daly.
In October they moved to the Aragon front, a quiet sector, but in January 1938 they took part in the attack on Teruel; in March during the battle of Gandesa they were forced to retreat when the front collapsed, and Ryan was captured.
In July 1938 the Connolly's fought their last battle; en route for home after the Spanish Republican government agreed to repatriate all foreign soldiers, the Connolly Column returned to the front to take part in the Battle of Ebro the last, doomed, Republican offensive of the war.
The surviving Irish volunteers were repatriated to Ireland after September 1938, when the Republican government disbanded the International Brigades in the vain hope of securing military aid from other democracies and of getting the fascist troops from Italy and Germany to withdraw.
Ryan was captured during the Aragón offensive on 1 April 1938 and was held at the Miranda del Ebro detention camp. He was sentenced to death but after representations from Éamon de Valera his sentence was commuted to thirty years hard labour.
Michael O'Riordan went on to become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of Ireland in 1970.
Though a small unit, sources differ on the numbers involved. The Brigade's British and Irish roll of honour lists 36 Irishmen killed in Spain in the war. O'Riordan listed 145 men, and "..of that number 61 never came back". Returning to Dublin, Connolly Column was greeted by the solitary figure of Fr. Michael O'Flanagan, who unveiled a banner in their honour.
Related material
Christy Moore's song "Viva la Quince Brigada" is about the Irish volunteers who fought with the International Brigades in the Spanish Civil War, and was inspired by Michael O'Riordan's book, Connolly Column.
See also
Irish Brigade (Spanish Civil War)
Irish Socialist Volunteers in the Spanish Civil War
Foreign involvement in the Spanish Civil War
Irish involvement in the Spanish Civil War
Ireland–Spain relations
References
Bibliography
Cronin, Séan. 1980. Frank Ryan: The search for The Republic. Dublin: Repsol. .
Doyle, Bob. 2006. Brigadista: An Irishman's Fight Against Fascism. Dublin: Currach Press. .
Hoar, Adrian. 2004. In Green and Red: The Lives of Frank Ryan. Kerry: Brandon. .
McGarry, Fearghal. 1999. Irish Politics and the Spanish Civil War. Cork: Cork University Press. .
Ó Duinnín, Eoghan. 1986. La Niña Bonita agus an Róisín Dubh. Dublin: An Clóchomhar.
O'Riordan, Michael. 2005 [2nd edition]. Connolly Column: The story of the Irishmen who fought for the Spanish Republic 1936–1939. Torfaen: Warren & Pell. .
External links
Ireland and the Spanish Civil War
Far-left politics in Ireland
Foreign volunteers in the Spanish Civil War (Republican faction)
International Brigades
Irish Republican Army (1922–1969)
Irish anti-fascists
Irish regiments
Irish republican militant groups |
https://ko.wikipedia.org/wiki/%EB%82%99%ED%83%80%EA%B1%B0%EB%AF%B8%EB%AA%A9 | 낙타거미목 | 낙타거미목() 또는 피일목은 동물계, 절지동물문, 협각아문, 거미강에 속하는, '태양거미()' 또는 '바람전갈(', '낙타거미()'라고도 불리는 동물계의 한 목이다. 이 목은 153개의 속과 1,000 종이 넘는 종들을 포함한다. 이름에 거미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거미나 완전한 전갈의 형태와는 차이를 보인다. 대부분의 거미들과 비슷하게 낙타거미 또한 두흉부와 후체부에 두개의 합체절이 있다. 두흉부는 종 대부분에서 눈에 띄게 큰 두 개의 앞쪽 끝 협각을 지탱한다. 협각은 턱의 역할을 하며 많은 종들에서 울음소리를 내기 위해 사용된다. 전갈과 다르게 꼬리에 세번째 협각을 갖지 않는다. 피일목의 대부분의 종들은 건조한 기후에서 서식하며, 육지에서 서식하는 절지동물과 작은 동물들을 먹이로한다. 가장 큰 종은 다리를 포함하여 12-15cm까지 자란다. 많은 도시전설에서 낙타거미의 크기와 속도, 인간에 대한 잠재적인 위험을 과장해서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과는 다른, 어디까지나 도시전설의 이야기이다.
해부학적 구조
피일목은 몸길이가 작게는 ㎜단위부터 크게는 ㎝단위까지 존재한다. 큰 종들은 다리를 포함하여 12-15 cm정도이다. 실제로는 각 종들마다 다리 길이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결과적인 수치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다리 길이와 별도로 몸길이를 사용한다. 몸 길이는 최대 7cm이다.
거미목과 마찬가지로, 낙타거미 또한 두개의 주 합체절을 가진다. 앞에 있는 전체부는 두흉부이고, 뒤에 있는 후체부는 열 구획으로 나뉜 복부이다. 낙타거미의 전체부와 후체부는 거미목의 거미에서 나타나는 수축과 연결관 또는 "pedicel"과는 달리 분명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pedicel이 부족한 것은 거미와 낙타거미의 또 다른 차이점으로 낙타거미가 방적 돌기와 실크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고 거미줄을 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미는 방적 활동에 있어서 복부에 상당한 이동성이 필요하지만 낙타거미는 그럴 필요가 없다.
전체부는 머리, 구기, 다리들과 각수를 견디는 몸마디로 이루어져있다. 다른 이름인 "두흉부"는 전체부가
곤충으로 치면 머리와 가슴을 이루는 부위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전체부는 두 개의 명확한 체절로 나뉘지는 않지만 눈과 턱을 지탱하는 큰 비교적 명확한 앞 쪽의 등껍질()가진다. 두흉부와는 다르게 작은 엉덩이 부분은 다리를 지탱한다.
게벌레와 장님거미 같이 낙타거미는 서폐가 없는 대신 여러 개의 숨구멍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잘 발달한 기관계를 가진다. 숨구멍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걷는 다리 쌍의 사이에 한 쌍, 복부의 세 번째와 네 번째 구획 사이에 두 쌍, 다섯 번째 복부 구획에 짝 없이 한 개가 있다.
협각
낙타거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많은 종에서 협각이 두흉부보다 크다는 것이다. 게와 비슷한 집게를 형성하는 강력한 두 개의 협각들은 각각 하나의 관절로 연결된 부분인 연결부를 가지는 데, 각각의 연결부는 종에 따라 다양한 수의 이빨을 지탱한다. 많은 종들의 턱은 척추동물 먹이로부터 머리카락 또는 깃털을 자르고, 작은 새 같은 얇은 뼈나 피부를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많은 피일목들이 협각을 이용해 운다.
다리와 각수
다른 대부분의 거미강들과 같이 낙타거미는 다섯 쌍의 다리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직 뒤 쪽의 네 쌍만이 진짜 '다리'이다. 각각의 '다리'들은 기절, 전절, 퇴절, 무릎마디, 종아리마디, 척절, 부절이라는 7개의 구획을 가진다.
다 섯쌍의 다리같은 부속물들 중 첫번째, 즉 앞에 것은 진짜 다리가 아닌 각각 다섯 개의 구획만을 가지는 '각수'이다. 피일목의 각수는 부분적으로 곤충의 더듬이와 비슷한 감각기관으로 기능하며, 이외에도 이동, 사냥, 싸움에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이동할 때, 각수는 바닥을 거의 건드리지 않지만. 무언가를 붙잡고 이동해야 할 때나, 먹이를 붙잡을 때는 각수를 사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각수는 여분의 다리 또는 팔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일목이 촉각에 크게 의존하는 것을 반영하듯이 앞쪽의 진짜 다리는 뒤쪽의 세 쌍보다 보통 더 작고 얇다. 더 작은 앞 쪽 한 쌍의 다리는 주로 각수의 감각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많은 종들에서 각수는 그에 맞춰 부절이 없다. 각수의 끝 부분은 날아다니는 먹이를 잡을 때 사용할 것이고 일부 종들은 부드러운 표면을 타고 올라갈 때 사용하는 들러붙고 바깥쪽으로 뒤집을 수 있는 기관을 지탱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오직 뒤 쪽 세 쌍의 다리만이 이동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피일목은 기절의 아랫부분과 마지막 다리쌍의 전절에 malleoli 또는 라켓 기관이라고 불리는 부채꼴 모양의 감각기관을 가진다. 때때로 malleoli의 날 부분들은 앞쪽을 향해지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있다. Malleoli는 위협과 먹이 또는 짝을 찾기 위해 흙의 진동을 감지하는 감각 기관으로 예상된다. 이 구조물은 화학 수용체일지도 모른다.
수컷은 주로 암컷보다 작으며, 비교적으로 긴 다리를 가진다. 암컷과는 달리 수컷은 협각 하나 당 한 쌍의 편모를 가진다. 옆의 수컷 낙타거미의 사진에서 각각의 협각의 끝부분 근처에 하나씩 편모가 보인다. 협각의 뒤로 젖혀진 편모는 때때로 뿔이라고 불리며, 일부 성관계에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 기능은 아직 완벽하게 밝혀지지않았다.
눈
몇몇 종들은 중앙에 위치한 아주큰 눈을 가진다. 눈은 홑눈처럼 생겼으며 매우 정교하다. 형태를 알아보는 것이 가능하며, 사냥과 적들을 피할 때 사용된다. 눈의 내부구조는 단순한 홑눈의 집합체를 겹눈에 통합하고, 겹눈을 홑눈에 통합하는 단계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그에 반해서 많은 종에서 측면의 눈은 없으며, 그나마 존재하는 것도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하위 과
낙타거미는 종종 거미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거미목과는 완벽하게 다른 목을 이룬다. 피일목은 12개의 과, 153개 속, 1000종이 넘는 종을 포함한다.
Ammotrechidae Roewer, 1934
Ceromidae Roewer, 1933
Daesiidae Kraepelin, 1899
Eremobatidae Kraepelin, 1901
Galeodidae Sundevall, 1833
Gylippidae Roewer, 1933
Hexisopodidae Pocock, 1897
Karschiidae Kraepelin, 1899
Melanoblossidae Roewer, 1933
Mummuciidae Roewer, 1934
Rhagodidae Pocock, 1897
Solpugidae Leach, 1815
†Protosolpugidae Petrunkevitch, 1953]
생태
낙타거미는 사막 생물대 고유의 지표종으로 여겨지지만, 스텝 기후와 오스트리아 대륙의 가시 덤불 지대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한다. 몇몇 종들은 풀밭 또는 숲에서 서식하기도 한다. 낙타거미는 호주와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의 모든 따뜻한 사막과 관목지를 포함한 거의 모든 따듯하고 매우 건조한 재역에서 서식한다.
낙타거미는 대부분의 종들이 흰개미, 거저리 그리고 다른 작은 육상 절지동물들을 먹이로하는 육식성이거나 잡식성이다. 낙타거미가 뱀, 작은 도마뱀, 설치류를 먹는 모습이 기록되기도 했다. 먹이는 각수에 의해 잡혀 턱으로 토막으로 잘린다. 그 뒤 먹이는 액화되고 인두를 통해 섭취된다. 일반적으로 낙타거미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지만, 낙타거미의 턱은 사람의 피부를 찢을 수 있으며, 상처는 고통스럽다고 보고된다.
큰틈새얼굴박쥐, 전갈, 두꺼미, 식충목과 같은 다양한 다른 생물들은 낙타거미를 먹이로한다.
한살이
피일목은 주로 일화성이다. 번식은 정자를 직접적인 방법 외에도 간접적으로 이동시켜 이루어진다. 간접적인 경우, 수컷은 정포를 바닥에 두고 턱으로 암컷의 생식공에 삽입한다. 그 뒤 암컷은 땅굴을 파고 그 안에 50-200개의 알을 낳는다. 몇몇 종들은 알이 부화할 때까지 알을 지킨다. 이 기간 동안 암컷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기 때문에 사전에 스스로 살을 찌우며, 연구실의 환경에서 5cm되는 한 종이 100마리가 넘는 파리를 이 기간 동안에 먹은 것이 관찰되었다. 낙타거미는 알, 후배, 9-10 단계의 님프, 성체를 포함하여 많은 발달 단계를 거친다.
어원
Solifugae라는 목명은 "태양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로부터 유래되었으며, Solpugida, Solpugides, Solpugae, Galeodea, and Mycetophorae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다. 일반명으로는 태양거미, 바람전갈, 낙타거미 등으로 불린다.
낙타거미와 사람
낙타거미는 고대부터 뚜렷하게 생물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거미()와 낙타거미()를 나눠 불렀다. 클라우디우스 아에리아누스(, c. 175 - c. 235 Ad)의 <동물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animalium)>에서 낙타거미는 전갈에 속한다고 잘 못 언급된다.
도시전설
낙타거미는 많은 전설들과 그들의 크기, 속도, 행동, 식욕, 치명적임의 과장에 대한 주인공이다. 낙타거미는 특별히 크지도 않고 가장큰 다리 폭도 약 12 cm정도이다. 낙타거미의 속도는 다른 무척추동물에 비해 육지에서는 빠르며 최고 속력은 시속 16 km로 가장 빠른 인간 단거리 주자의 반에 해당하는 속력과 가깝다.
각주
거미강
낙타거미목 | https://en.wikipedia.org/wiki/Solifugae | Solifugae | Solifugae is an order of animals in the class Arachnida known variously as camel spiders, wind scorpions, sun spiders, or solifuges. The order includes more than 1,000 described species in about 147 genera. Despite the common names, they are neither true scorpions (order Scorpiones), nor true spiders (order Araneae). Most species of Solifugae live in dry climates and feed opportunistically on ground-dwelling arthropods and other small animals. The largest species grow to a length of , including legs. A number of urban legends exaggerate the size and speed of the Solifugae, and their potential danger to humans, which is negligible.
Anatomy
Solifuges are moderately small to large arachnids (a few millimeters to several centimeters in body length), with the larger species reaching in length, including legs. In practice, the respective lengths of the legs of various species differ greatly, so the resulting figures are often misleading. More practical measurements refer primarily to the body length, quoting leg lengths separately, if at all. The body length is up to . Most species are closer to long, and some small species are under in head-plus-body length when mature.
Like that of the spider order, the Araneae, the body plan of the Solifugae has two main tagmata: the prosoma, or cephalothorax, is the anterior tagma, and the 10-segmented abdomen, or opisthosoma, is the posterior tagma. The abdominal tergites and sternites are separated by large areas of intersegmental membranes, giving it a high degree of flexibility and ability to stretch considerably, which allows it to consume a large amount of food. As shown in the illustrations, the solifuge prosoma and opisthosoma are not separated by nearly as clear a constriction and connecting tube or "pedicel" as occurs in Araneae. The lack of the pedicel reflects another difference between the Solifugae and spiders, namely that solifuges lack both spinnerets and silk, and do not spin webs. Spiders need considerable mobility of their abdomens in their spinning activities, and the Solifugae have no such adaptation.
The prosoma comprises the head, the mouthparts, and the somites that bear the legs and the pedipalps. It is covered by a carapace, also called a prosomal dorsal shield or peltidium, which is composed of three distinct elements called propeltidium, mesopeltidium and metapeltidium. The propeltidium contains the eyes, the chelicerae that, in most species, are conspicuously large, the pedipalps and the first two pairs of legs. Meso- and metapeltidium contains the third and fourth pairs of legs. The chelicerae serve as jaws and in many species also are used for stridulation. Unlike scorpions, solifuges do not have a third tagma that forms a "tail".
Currently, neither fossil nor embryological evidence shows that arachnids ever had a separate thorax-like division, so the validity of the term cephalothorax, which means a fused cephalon, or head, and thorax, has been questioned. Also, arguments exist against use of "abdomen", as the opisthosoma of many arachnids contains organs atypical of an abdomen, such as a heart and respiratory organs.
Like other arachnids outside the orders of scorpions and the Tetrapulmonata, the Solifugae lack book lungs, having instead a well-developed tracheal system that inhales and exhales air through a number of spiracles - one pair between the second and third pair of walking legs, two pairs on the abdomen on abdominal segments three and four, and an unpaired spiracle on the fifth abdominal segment. As embryos they also have opisthosomal protuberances resembling the pulmonary sacs found in some palpigrades.
Chelicerae
Among the most distinctive features of the Solifugae are their large chelicerae, which in many species are longer than the prosoma. Each of the two chelicerae has two articles (segments, parts connected by a joint), forming a powerful pincer, much like that of a crab; each article bears a variable number of teeth, largely depending on the species. The chelicerae of many species are surprisingly strong; they are capable of shearing hair or feathers from vertebrate prey or carrion, and of cutting through skin and thin bones such as those of small birds. Many Solifugae stridulate with their chelicerae, producing a rattling noise.
Legs and pedipalps
These elements work the same way as in most other arachnids. Although the Solifugae appear to have five pairs of legs, only the hind four pairs are true legs. Each true leg has seven segments: coxa, trochanter, femur, patella, tibia, metatarsus, and tarsus.
The first, or anterior, of the five pairs of leg-like appendages are not "actual" legs, but pedipalps, and they have only five segments each. The pedipalps of the Solifugae function partly as sense organs similar to insects' antennae, and partly in locomotion, feeding, and fighting. In normal locomotion, they do not quite touch the ground, but are held out to detect obstacles and prey; in that attitude, they look particularly like an extra pair of legs or perhaps arms. Reflecting the great dependence of the Solifugae on their tactile senses, their anterior true legs commonly are smaller and thinner than the posterior three pairs. That smaller anterior pair acts largely in a sensory role as a supplement to the pedipalps, and in many species they accordingly lack tarsi. At the tips of their pedipalps, Solifugae bear a membranous suctorial organ, which are used for capturing prey, and also for bringing water to their mouthparts for drinking and climbing smooth surfaces.
For the most part, only the posterior three pairs of legs are used for running. On the undersides of the coxae and trochanters of the last pair of legs, the Solifugae have fan-shaped sensory organs called malleoli or racquet (or racket) organs. Sometimes, the blades of the malleoli are directed forward, sometimes not. They have been suspected to be sensory organs for the detection of vibrations in the soil, perhaps to detect threats and potential prey or mates. These structures may be chemoreceptors.
Males are usually smaller than females, with relatively longer legs. Unlike females, the males bear a pair of flagella, one on each chelicera. In the accompanying photograph of a male solifuge, one flagellum is just visible near the tip of each chelicera. The flagella, which bend back over the chelicerae, are sometimes called horns and are believed to have some sexual connection, but their function has not yet been clearly explained.
Eyes
Some species have very large central eyes. They look like simple eyes or ocelli, but are quite sophisticated. They can recognise forms, and are used in hunting and avoiding enemies. These eyes may represent the last step in the integration of the aggregate of simple ocelli into a compound eye, and of further integration of a compound eye into a simple eye. Lateral vestigial eyes can be found inserted into pits on the inner side of the cuticle. The lenses of these eyes are usually atrophied, but in some species there are both nerves and pigment cells present, and their function could be to detect motions or changes in light intensity.
Classification
The Solifugae are an order of their own, though are sometimes confused with spiders, which form a completely distinct order, the Araneae. The order comprises over 1000 described species in 146 genera assigned to these 13 families:
Ammotrechidae Roewer, 1934
Ceromidae Roewer, 1933
Daesiidae Kraepelin, 1899
Eremobatidae Kraepelin, 1901
Galeodidae Sundevall, 1833
Gylippidae Roewer, 1933
Hexisopodidae Pocock, 1897
Karschiidae Kraepelin, 1899
Melanoblossiidae Roewer, 1933
Mummuciidae Roewer, 1934
Rhagodidae Pocock, 1897
Solpugidae Leach, 1815
†Protosolpugidae Petrunkevitch, 1953
Ecology
Although the Solifugae are considered to be endemic indicators of desert biomes, they occur widely in semidesert and scrub. Some species also live in grassland or forest habitats. The Solifugae generally inhabit warm and arid habitats, including virtually all warm deserts and scrublands in all continents except Antarctica and Australia.
Solifugae species are carnivorous or omnivorous, with most feeding on termites, darkling beetles, and other small, ground-dwelling arthropods. They are aggressive hunters and voracious opportunistic feeders, and have been recorded as feeding on snakes, small lizards, birds, and rodents. Prey is located with the pedipalps and killed and cut into pieces by the chelicerae. The prey is then liquefied, and the liquid ingested through the pharynx. Although they do not normally attack humans, their chelicerae can penetrate human skin, and painful bites have been reported.
Various other predators, such as the large slit-faced bat, scorpions, toads, and insectivores, may prey on the Solifugae.
Life cycle
The Solifugae are typically univoltine (reproducing once a year). Reproduction can involve direct or indirect sperm transfer; when indirect, the male emits a spermatophore on the ground and then inserts it with his chelicerae in the female's genital pore. To do this, he flings the female on her back.
The female then digs a burrow, into which she lays 50 to 200 eggs; some species then guard them until they hatch. Because the female does not feed during this time, she tries to fatten herself beforehand, and a species of has been observed to eat more than 100 flies during that time in the laboratory. The Solifugae undergo a number of stages including, egg, postembryo, 9–10 nymphal instars, and adults.
Etymology
The name Solifugae derives from Latin, and means "those that flee from the sun". The order is also known by the names Solpugida, Solpugides, Solpugae, Galeodea, and Mycetophorae. Their common names include camel spider, wind scorpion, scorpion carrier, jerrymunglum, sun scorpion, and sun spider. In southern Africa, they are known by a host of names, including red romans, ("hair cutters"), and ("beard cutters"), the latter two relating to the belief they use their formidable jaws to clip hair from humans and animals to line their subterranean nests.
Solifuges and humans
Solifuges have been recognized as distinct taxa from ancient times. In Aelian's De natura animalium, "four-jawed spiders" are credited, along with scorpions, as being responsible for the abandoning of a desert region near the Astaboras river (said to be in India, but thought to be a river in Ethiopia). Anton August Heinrich Lichtenstein theorized in 1797 that the "mice" that plagued the Philistines in the Old Testament were Solifugae. During World War I, troops stationed in Abū Qīr, Egypt, would stage fights between captive "jerrymanders", as they referred to them, and placed bets on the outcome. Similarly, British troops stationed in Libya in World War II staged fights between solifuges and scorpions.
Urban legends
The Solifugae are the subject of many legends and exaggerations about their size, speed, behavior, appetite, and lethality. They are not especially large, the biggest having a leg span around . They are fast on land compared to other invertebrates, with their top speed estimated to be , close to half as fast as the fastest human sprinter.
The Solifugae apparently have neither venom glands nor any venom-delivery apparatus such as the fangs of spiders, stings of wasps, or venomous setae of caterpillars (e.g., Lonomia or Acharia species). One 1978 study is frequently quoted, in which the authors report detection of an exception in India, in that Rhagodes nigrocinctus had venom glands, and that injection of the secretion into mice was frequently fatal. However, no supporting studies have confirmed either statement, such as by independent detection of the glands as claimed, or the relevance of the observations, if correct. Even the authors of the original account admitted to having found no means of delivery of the putative venom by the animal, and the only means of administering the material to the mice was by parenteral injection. Given that many non-venoms such as saliva, blood and glandular secretions can be lethal if injected, and that no venomous function was even speculated upon in this study, there is still no evidence for even one venomous species of solifuge.
Because of their unfamiliar spider-like appearance and rapid movements, Solifugae have startled or even frightened many people. This fear was sufficient to drive a family from their home when one was allegedly discovered in a soldier's house in Colchester, England, and caused the family to blame the solifuge for the death of their pet dog. An Arizona resident developed painful lesions due to a claimed solifuge bite but could not produce a specimen for confirmation. Though they are not venomous, the powerful chelicerae of a large specimen may inflict a painful nip, but nothing medically significant.
Claims that Solifugae aggressively chase people are also untrue, as they are merely trying to stay in the shade/shadow provided by the human.
References
Videos
Camel Spider Feeding by Stefan F. Wirth
External links
Arachnid orders
Extant Pennsylvanian first appearances
Pennsylvanian taxonomic orders
Urban legends |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B%A7%90%EB%A6%AC%EC%9D%B8%20%EA%B7%80%EC%A1%B1%EC%A0%9C | 소말리인 귀족제 | 소말리인 귀족제란 소말리인들이 수립한 여러 군주정체들에서 존재한 귀족작위체계다. 본 항목에서는 통치작위 뿐 아니라 이슬람 존칭이나 관직명도 함께 수록한다.
작위
남성 작위
술단(): 아랍어 술탄에서 비롯되었다. 식민지화되기 전 및 식민지 시절 여러 통치자들이, 특히 이사크 씨족에서 애용했다. 유명한 소말리인 술단으로는 모가디슈 술단국의 초대 술단 파크르 앗딘, 가르하지스 씨족의 술단이자 다라위시 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인 누르 아흐메드 아만, 와르상겔리 술단국의 초대 술단 마하무드 칼리 시레, 19세기 초 마제르텐 술단국의 마하무드 4세 하와다네, 호브요 술단국의 창업군주 유수프 알리 케나디드, 겔레디 술단국의 창업군주 이브라힘 아데르 등이 있다.
우가즈(): 외래어인 "술단"의 소말리어 고유어 표현. 주로 북부와 서부, 특히 에티오피아의 소말리인 거주지역에서 사용되었다. 남부나 동부에서도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다부르시 씨족은 현재까지도 우가즈가 씨족 지도자를 지내고 있다. 또한 다로드 씨족의 하위 씨족인 디시셰 씨족에서도 수 세기 전까지 올라가는 씨족장 칭호를 우가스(Ugas)라고 했다.
보코르(: 사전적 의미는 왕(王). 하지만 실제로는 동배중 제1인자, 왕중왕이라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보코르라는 말은 아프로아시아어족에 속하는 소말리어의 "혁대"를 의미하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혁대가 허리를 졸라매듯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역할이라는 뜻이다. Kobishchanow (1987)에 따르면 "보코르"는 오늘날의 수단에 위치한 나일강변 국가 메로에의 군주 호칭("전하") 파카르(Paqar)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소말리어의 호칭 다수가 "보코르"를 어원으로 두고 있으며, 또한 "군주국/왕국/제국"을 소말리어로 보코르토요(), "왕족/귀족/고관대작"을 보코르니모(), 군주의 신분, "왕위/제위"는 보코르티니모()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코르 작위는 주로 동북부의 푼틀란드에서 사용되었다. 보코르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세기에 마제르텐 술단국을 다스린 키스만 3세 마하무드가 있다. 또한 가다부르시 씨족에서는 "왕과 100인의 법()"이라는 것이 있다.
게라드/가라드(): 술단과 상호 교체될 수 있는 동의어로 종종 쓰인다. 어원을 따져보면 "지혜", "정신", "이해" 같은 뜻이다. Basset (1952)에 따르면, 게라드 작위는 중세 에티오피아의 무슬림 지역의 지방관의 경칭이었던 "알자라드(al-Jaraad)"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게라드는 역사적으로 소말리아 북부에서 쓰였다. 유명한 게라드로는 와르상겔리 술단국의 창업군주 게라드 디딘, 항구도시 제일라 주위로 튼튼한 방벽을 쌓은 게라드 라도(Gerad Lado)가 있다.
이맘(): 국가원수라는 뜻으로 쓰인다. 특히 아달 술탄국과 아주란 술단국에서 사용되었다. 유명한 이맘으로는 중세에 에티오피아를 여러 차례 턴(아비시니아-아달 전쟁) "왼손잡이" 아흐마드 이븐 이브리힘 알가지가 있다.
에미르(): 아달 술단국의 지도자들이 사용했다. 또한 아주란 술단국에서 군사령관들의 작위로 사용되었다. 유명한 에미르로는 하라르 에미르로서 도시 주위에 거대한 방벽 주골(Jugol)을 세운 누르 이븐 무자히드가 있다.
아미르(): 왕자. 보코르 또는 술단의 아들. 유명한 왕자로는 호브요 술단 유수프 알리 케나디드의 아들 알리 유수프 케나디드가 있다.
이나 보코르(): 왕자. 아주란 술단국에서 사용했다.
와지르(): 각료 또는 세금징수관. 북부의 마제르텐 술단국과 호브요 술단국, 남부의 아주란 술단국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와지르는 중세 모가디슈 술단국에서 궁정 칭호로도 사용되었다. 모로코 탐험가 이븐 바투타가 1331년 모가디슈를 방문했을 때 모가디슈는 북부의 바르바라에서 내려온 술단이 다스렸는데, 술단은 와지르, 법무관, 사령관, 환관 등 관리들을 거느렸다. 소말리인 장군 압둘라히 아흐메드 이로의 외할아버지도 와지르였다.
보코르티셰(): 부왕. 주로 아주란 술단국에서 왕을 대리해 식민지를 다스렸다. 유명한 보코르티셰로는 몰디브를 다스린 압드 알아지즈가 있다.
와킬보코르(): 부왕을 가리키는 다른 칭호.
나이브(): 궁내관 또는 술단의 대리자. 병사들이 걷어온 공물을 관리하는 것 따위의 일을 맡아 했다. 아주란 술단국, 마제르텐 술단국, 호브요 술단국에서 사용되었다.
카디(): 수석법관. 북부에서 주로 쓰이지만 남부의 아주란 술단국에서도 쓰였다. 유명한 카디로는 19세기의 외교관, 역사가, 시인, 학자였던 압드 알아지즈 알아마위가 있다. 또한 소말리어를 표기하는 보라마 문자의 고안자 압두라흐만 셰이크 누르의 부친도 카디였다.
여성 작위
보코라드(): 보코르, 즉 군주의 아내. 후비(后妃).
아미라드(): 아미르의 여성형. 왕녀.
이나보코르(): 보코르의 딸. 왕녀.
종교지도자
셰이크(): 고위 무슬림 성직자 와다드()의 경칭. 약칭은 "Sh". 유명한 셰이크로는 북소말리아의 초기 무슬림 지도자 압디라흐만 빈 이스마일 알자바르티, 하라르의 수호성인 아바디르 우마르 아르리다, 카이로 리와크의 셰이크로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을 기록한 압드 알라흐만 알자바르티, 동아프리카의 카디르파 수피즘 확산에 지대한 역할을 한 압드 알라흐만 빈 아흐마드 알자일라이, 19세기의 학자, 시인, 점성술사 셰이크 수피, 신학자 압달라 알쿠트비, 메카의 마스지드 알하람에서 가르치며 오늘날의 이슬람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무하마드 알수말레 등이 있다.
사이드(): 대부(大夫), 주인. 이슬람 예언자 무하마드의 혈통을 가진 남자. 인정되는 혈통은 외손자 하산 이븐 알리, 후세인 이븐 알리의 후손, 딸 파티마 자흐라의 후손, 사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이다. 다라위시 운동에서 사용했는데, 그 대표적 지도자인 마하메드 캅둘레 하산이 사이드를 칭했다.
샤리프(), 복수형 아시라프():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들. 샤리프 유수프 빈 아흐마드 알카우네인 같은 초기 이슬람 지도자도 샤리프로 불린다. 샤리프 유수프는 북소말리아 최대의 이슬람 성인으로 꼽힌다.
하지(): 성지순례 하즈를 다녀온 사람의 경칭.
관습역직
이하는 헤르()라는 소말리인의 관습법에서 나타나는 역직들이다.
이슬란(): 씨족장. 14세기부터 아프리카의 뿔 지역을 지배하던 하르티 연맹이 18세기에 분열된 뒤에 출현했다. 씨족파편화, 지방분권화가 진행되면서 이슬란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지도자들이 자기 동네에서는 과거 술단이 누리던 것 같은 위세를 누리게 되었다. 이슬란이 지배하는 씨족들은 술단국으로부터의 독립을 표방하기는 했으나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직위였다.
말라크(): 전쟁 지도자. 남소말리아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라하눼인 씨족에서 주로 사용했고, 같은 지역의 다른 씨족들도 사용했다. 남자 두 명이 선택되어서 군사업무를 맡았다.
아킬(): "현자"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비롯되었다. 남자 장로들, 씨족장들에게 흔한 칭호다. 북부, 특히 소말릴란드에서 사용된다.
오다이(), 복수형 오다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장로". 씨족장이나 재판관들에게 가장 흔한 칭호. 소말리인이 사는 지역 전체적으로 사용된다.
헤르 베그티() 또는 헤르 보게얄(): 법학자 내지 헤르법 전문가.
구르티얄(): 형사수사관.
가르하지얄(): 헤르법 재판에서 변호인.
무르카티얄(): 헤르법 재판에서 증인.
와라늘레(): 헤르법을 집행하는 일선 경찰리.
참고 자료
Warsangeli Sultanate (Official website)
귀족 작위
소말리인 | https://en.wikipedia.org/wiki/Somali%20aristocratic%20and%20court%20titles | Somali aristocratic and court titles | This is a list of Somali aristocratic and court titles that were historically used by the Somali people's various sultanates, kingdoms and empires. Also included are the honorifics reserved for Islamic notables as well as traditional leaders and officials within Somali customary law (xeer), in addition to the nobiliary particles set aside for distinguished individuals.
Monarchs and aristocrats
Below is a list of the royal court titles historically retained by the Somali monarchies and aristocracies.
Male titles
Kings or Rulers
Suldaan: From the Arabic for Sultan or English "Ruler". Very common title for rulers in the pre-colonial and colonial periods; used throughout the Somali territories, particularly by the Isaaq. Famous Sultans include Fakr ad-Din, the first Sultan of the Sultanate of Mogadishu, who built the 13th-century Fakr ad-Din Mosque; Nur Ahmed Aman, 5th Sultan of the Habr Yunis and one of the founders of the Dervish state; Sultan Abdillahi Deria of the Isaaq Sultanate, who was an anti-colonial figure in the mid-20th century; Sultan Mohamoud Ali Shire of the Warsangali, described as a sovereign ruler of immense influence and a man of mercurial image by the historian I.M. Lewis, would change the court title of the Warsangeli Sultanate from Gerad to Sultan after taking over the reign from his ailing father; Sultan Mohamoud Ali Shire reigned in the early 19th century as one of the Gerads of the Warsangeli Sultanate, which is the longest of all Somali sultanates; Sultan Mohamoud Ali Shire also held the title as the Sultan of Somaliland. Yusuf Ali Kenadid, founder of the Sultanate of Hobyo; and Ibrahim Adeer, founder of the Geledi Sultanate. The title, Suldaan was used by the influential Ajuran Sultanate that ruled large parts of East Africa form14th-century to 17th. The Ajuran Sultanate center of power was the House of Garen. Suldaan Olol Dinle was the last of Ajuran Dynasty that ruled the Shabelle Zone.
Ugaas: Authentic Somali term for "Sultan". Used throughout the northern and western Somali territories; particularly in the Somali region of Ethiopia and Somaliland, but also in central Somalia, southern and northeastern Somalia. The Gadabursi, Gaalje'el and Deshiishe gave their sultan the title of "Ugaas" romanized as "Ughaz".
Boqor: Literally denotes King. However, in practice, it is the primus inter pares or "King of Kings". The title is etymologically derived from one of the Afro-Asiatic Somali language terms for "belt", in recognition of the official's unifying role within society. According to Kobishchanow (1987), Boqor is also related to the style Paqar, which was employed by rulers in the early Nile Valley state of Meroe. Various Somali honorifics and designations have Boqor as their root. The latter include Boqortooyo, signifying "monarchy", "kingdom" or "empire"; Boqornimo, meaning "royalty", "nobility" or "dignitaries"; and Boqortinnimo, denoting "kingship". Historically, the title was mainly used by rulers in the northeastern Puntland region of Somalia. The most prominent Boqor in recent times was Osman Mahamuud, who governed the Majeerteen Sultanate (Majeerteenia) during its 19th-century heyday. Also used among the Gadabuursi as the law of the King and the 100 men' (heerka boqorka iyo boqolka nin).
Garaad: Often employed interchangeably with "Suldaan" to denote a Sultan. Etymologically signifies "wisdom", "mind" or "understanding". According to Basset (1952), the title corresponds with the honorific Al-Jaraad, which was used during the Middle Ages by Muslim governors in the Islamic parts of Ethiopia. Gerad was historically employed throughout Somaliland by the Tol Je'lo as well as the Habar Awal until the clan's leadership adopted a Suldaan in the 20th century. It is still used by the Dhulbahante today. Garad also denotes a "chief" in Harari and Silt'e languages respectively.
Imaam: Denotes the Head of State. Style was used especially by rulers Of hawiye Clans in the Sultanate of Adal, Imamate Of Hiraab and the Ajuran Sultanate. Notable Imams include Ahmad ibn Ibrahim al-Ghazi, also known as Ahmed Gurey or Gran (both meaning "the Left Handed"), who led a military campaign during the Middle Ages known as the Conquest of Abyssinia (Futuh al-Habash). Imam Yacquub who led the Inmate Of hiraab is one of famous imam in Horn of Africa.
Emir: Used by leaders in the Adal Sultanate. Also employed by commanders in the Ajuran Sultanate's armed forces and navy. Prominent Emirs include Nur ibn Mujahid, the Emir of Harar who built the great wall (Jugol) around the city.
Royal family
Amiir: Prince. Honorific set aside for the hereditary son of the King or Sultan. Notable Princes include Dolal Nur of the Rer Ainanshe, the son and heir of Sultan Nur Ahmed Aman.
Ina Boqor: Alternate court style for the Prince. A term used by Ajuran Empire and a powerful Ajuran princess called Faduma Sarjelle
Court officials
Wasiir: Minister and/or tax and revenue collector. Title used in the northern Majeerteen Sultanate and Sultanate of Hobyo, as well as the southern Ajuran Sultanate. Wazirs were also quite common at the royal court of the medieval Sultanate of Mogadishu. When the Moroccan traveller Ibn Battuta visited Mogadishu in 1331, he indicated that the city was ruled by a Somali sultan of Barbara origin, who had a retinue of wazirs, legal experts, commanders, royal eunuchs, and other officials at his service. Other notable wazirs include the maternal grandfather of the Somali General Abdullahi Ahmed Irro, who was part of the Sultanate of Hobyo's aristocratic contingent in the southern town of Kismayo.
Boqortiishe: Viceroy. Style reserved for court officials governing territory on behalf of their Kingdom was mostly used by Ajuran Empire that established many colonies and a famous ruler was Abd al-Aziz of Mogadishu who ruled Maldive islands on behalf of Ajuran Empire
Wakiil-Boqor: Alternate court title designating a Viceroy.
Na'ib/Naïb: Deputy or representative of the Sultan. Duties included the administration of tribute, which was collected by court soldiers. Style was used in the Ajuran Sultanate, Majeerteen Sultanate and Sultanate of Hobyo.
Qaadi: Denotes a Chief Judge. Especially common title in Somaliland, but also used in the southern Ajuran Sultanate. Prominent Qadis include Ismail ibn Ash-Shaykh Ishaaq, the ancestor of the Garhajis clan, Abd al Aziz al-Amawi, an influential 19th-century diplomat, historian, poet, jurist and scholar who was appointed Qadi of the Kilwa Sultanate at the age of 18 by Muscat and Oman's Sultan Said bin Sultan; and the father of Sheikh Abdurahman Sheikh Nuur, inventor of the Borama script for the Somali language.
Female titles
Consorts
Boqorad: Literally translates as "Queen". Title mainly reserved for the queen consort of the King (Boqor).
Royal family
Amiirad: Princess. Honorific set aside for the hereditary daughter of the King or Sultan.
Ina Boqor: Alternate court style for the Prince or Princess.
Religious leaders
Islamic leaders within Somali society were often drawn from or elevated to the noble ranks. Below is a list of the titles most often used historically by the clergymen (ulama):
Sheekh: Honorific for senior Muslim clerics (wadaad). Often abbreviated to "Sh". Famous Sheikhs include Abdirahman bin Isma'il al-Jabarti, an early Muslim leader in northern Somalia; Abadir Umar Ar-Rida, the patron saint of Harar; Abd al-Rahman al-Jabarti, Sheikh of the riwaq in Cairo who recorded the Napoleonic invasion of Egypt; Abd Al-Rahman bin Ahmad al-Zayla'i, scholar who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spread of the Qadiriyya movement in Somalia and East Africa; Shaykh Sufi, 19th-century scholar, poet, reformist and astrologist who authored Shadjarat al-Yakim ("The Tree of Certitude"); Abdallah al-Qutbi, polemicist, theologian and philosopher best known for his five-part Al-Majmu'at al-mubaraka ("The Blessed Collection"); and Muhammad As-Sūmālī, teacher in the Masjid al-Haram in Mecca who influenced many of the prominent Islamic scholars of today.
Sayyid: Title of high honour meaning "Lord" or "Master". Denotes males accepted as descendants of the Islamic prophet Muhammad through his grandsons, Hasan ibn Ali and Hussein ibn Ali, sons of the prophet's daughter Fatima Zahra and his son-in-law Ali ibn Abi Talib. Used by leaders in the Dervish State; notably by Mohammed Abdullah Hassan ("Mad Mullah").
Shariif (pl. Ashraaf): Historically used to distinguish descendants of Hassan 'Ali Abuu Taalib (Hasan ibn Ali). Often reserved for early Islamic leaders such as Sharif Yusuf Barkhadle (popularly known as Aw Barkhadle or the "Blessed Father"), a man described as "the most outstanding saint in northern Somalia". Sharif Aydurus was also a notable Sharif and Somali scholar from Mogadishu.
Xaaji: Honorific reserved for distinguished individuals who have performed the hajj, or pilgrimage to the holy city of Mecca.
Traditional leaders and officials
Below is a list of the titles traditionally employed by leaders and officials within the Somali customary law or xeer.
Leaders
Islan: Clan chief. Title evolved after the fragmentation in the 18th century of the great Harti confederation that dominated the northeastern Horn region since at least the 14th century. A general process of decentralization ensued, with new leaders known as Islaan assuming at the local level some of the power that was previously solely commanded by the Sultan of Majeerteenia, the titular head of the entire confederation. Although they nominally asserted independence from the sultanate, Islaan's mainly wielded religious rather than political authority.
Malakh: Signifies "War Leader". Historically used mainly by the Rahanweyn clan that today forms one of the largest constituencies in southern Somalia, in addition to a few sympatric clans. Usually assigned to the Herabow sub-lineage, from which two male constituents were selected to manage the group's military affairs.
Akil: From the Arabic for "wise man". A common title for male elders, who are the traditional clan chiefs. Used particularly in Somaliland.
Officials
Oday (pl. Odayaal): Literally "elder". The most common title for advisors to the clan head or judges in xeer hearings. Used throughout the Somali territories.
Heer begti or Heer boggeyal: Jurists or legal experts in xeer.
Gurtiyal: Detectives.
Garhajiyal: Attorneys in xeer cases.
Murkhatiyal: Witnesses in official xeer proceedings.
Waranle: Police officers to enforce the customary law.
Nobiliary particles
Aw: Nobiliary particle meaning "honorable", "venerable", or simply "Sir". Reserved for learned Islamic clerics, and used throughout the Somali territories. During his research in the ancient town of Amud, the historian G.W.B. Huntingford noticed that whenever an old site had the prefix Aw in its name (such as the ruins of Awbare and Awbube), it denoted the final resting place of a local saint. Similarly, the ancient island of Aw Garweyne on the southeastern Benadir littoral was named for the late Sheikh 'Ismaan, whose tomb is found there. Surveys by A.T. Curle in 1934 on several of these important ruined cities recovered various artefacts, such as pottery and coins, which point to a medieval period of activity at the tail end of the Sultanate of Adal's reign. Somaliland and northeastern Somalia in general is home to numerous such archaeological sites, with similar edifices found at Haylan, Qa’ableh, Macajilayn, Booco, Qombo'ul, El Ayo, Heis, Botiala, Salweyn, Mudun, Abasa, Maduna, Gelweita and Damo, among other areas.
See also
Maritime history of Somalia
Somali architecture
Ethiopian aristocratic and court titles
Notes
References
Warsangeli Sultanate (Official website)
External links
Warsangeli Sultanate (Official website)
Somalian monarchy
Somali culture
Court titles
Gubernatorial titles
Noble titles
Royal titles
Titles of national or ethnic leadership |
https://ko.wikipedia.org/wiki/%ED%80%B4%EC%96%B4%20%EC%8B%A0%ED%95%99 | 퀴어 신학 | 퀴어 신학()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게일 루빈(Gayle Rubin), 이브 세지윅(Eve Kosofsky Sedgwick),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라는 학자의 퀴어 이론에 대한 철학적 접근에서 발전한 신학이다. 퀴어 신학은 성경을 포함한 인류 역사에서 성비적합과 게이와 레즈비언적 욕구가 항상 존재해왔다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한때 게이 신학과 레즈비언 신학이라는 두 개의 분리된 신학으로 분리되었으며, 나중에 두 개의 신학은 합쳐져서 좀 더 포괄적인 퀴어 신학의 용어가 되었다.
용어학
퀴어라는 용어는 세 가지 의미 중 하나를 포괄하는 것으로 퀴어이론 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산 용어로서, 횡행 작용으로, 그리고 경계를 지우는 것으로, 퀴어, 퀴어 신학의 이 세 가지 뜻을 바탕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LGBTQI(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트랜스젠더, 퀴어, 간성) 개인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특정한 요구에 초점을 맞춘 신학.
성별과 성별에 관한 사회문화적 규범을 의도적으로 반대하는 신학으로, 신학을 새로운 견해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숨은 목소리나 숨겨진 시각을 발굴하고자 한다.
특히 성 정체성에 관한 경계를 도전하고 해체하는 신학.
퀴어 신학은 개인의 성 정체성에 포함되며 LGBTQ 공동체가 기독교에서의 그들의 공간을 되찾을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제니퍼 퍼피스(Jennifer Purvis)는 "퀴어"는 다양한 성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비이성애적 성생활, 저항의 자세, 질문하는 태도, 그리고 일련의 기술과 접근법들로 인하여, 퀴어 신학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훈련되고, 통제되며 우리에게 퀴어 인식을 다시 일깨워줄 것을 요구한다.
이 용어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때 J. 마이클 클라크는 "친여성주의 게이 신학(pro-feminist gay theology)"이라는 용어를 제안했고, 로버트 고스(Robert Goss)는 "퀴어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신학자
휴 몬테피오레의 예수의 초기 생애에 대한 견해
1967년 Conference of Modern Churchmen에서 발표된 “예수, 하나님의 계시”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휴 몬테피오레(Hugh Montefiore) 목사는 예수의 초기 생애에 대하여 논쟁이 될 해석을 내놓는다. 예수는 서른 살 즈음까지 메시야로 부름받았다는 점을 몰랐으며, 이 부름은 예수가 독신으로 살았음을 설명할 수 없다고 몬테피오레는 주장한다. 에세네파와 달리 유대인들에게 독신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몬테피오레는 예수가 독신인 이유를 종교가 아닌 데서 설명을 찾자고 제안한다.
몬테피오레는 예수가 동성애자였다는 설명이 그가 지닌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과의 정체성과 부합한다고 본다.
마르셀라 알트하우스 리드
퀴어 신학의 한 지지자는 마르셀라 알트하우스 리드(Marcella Althaus-Reid)였는데, 그는 라틴 아메리카 해방 신학을 그리고 성경을 여성, 퀴어인들, 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녀는 가난하고 괴상한 사람들을 포함한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신학을 제안했다. 알트하우스 리드를 위해서는 신학이 육체와 연결되어 경험을 살아야 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퀴어 신의 신학에서 한 가지 주제는 그녀가 강하고 활기찬 신앙생활과 성욕의 교차점과 본질적인 모순을 탐구하면서 동성애 클럽의 신성함이다. 성경에서 다른 것과 욕망을 발견하는 예로는 그녀가 히브리 사람으로부터 예레미야 2장 23~25절을 읽은 것이다.
존 J. 맥네일
존 J. 맥네일은 공공연히 게이 예수회 신부였고 퀴어 신학의 성악가였다. 그의 작품은 진정으로 게이와 레즈비언 기독교인을 포함하는 진화하는 새로운 기독교 구조를 추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갈 길은 멀다고 믿는다. 맥네일은 수용을 요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게이와 레즈비언 기독교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융성을 허용하는 공동체를 제공하는 교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포함은 게이와 레즈비언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공동체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문화부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맥네일의 저서 "교회와 동성애자(The Church and the Homosexual)"(Beacon Press, 1976년)는 동성애와 카톨릭 전통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 재구성된 전통적 도덕 신학에서 동성애가 어디에 속하는지 발견하는 것, 그리고 동성애를 허락할 현대 기독교 부처에서 필요한 변화 등 3개의 섹션으로 퀴어 신학을 다루고 있다. 레즈비언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잘 지킨다.
입장
보수주의 신학
보수주의 신학 입장에서는 다른 자유주의 신학의 분파와 마찬가지로 이단신학으로 보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주요 교단에서는 이단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곳이 많다.
대한민국 주요 교단의 입장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대신은 퀴어신학자들의 행태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으로, 셔윈 베일리, 다니엘 헬미니악, 테오도르 제닝스 등 성경을 퀴어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시도는 명백한 이단 사상이라는 입장이다. 이는 구약과 신약에 걸쳐서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에 대하여 일관되게 증거함을 근거로 한다.
주요 인물
존 J. 맥네일
마르셀라 알트하우스 리드(Marcella Althaus-Reid)
테오도르 제닝스(:en:Theodore Jennings)
임보라
같이 보기
동성애와 기독교
성경 속의 동성애
종교와 성적 지향
각주
기독교 신학
기독교 급진주의
동성애와 기독교
성소수자와 기독교
퀴어 이론 | https://en.wikipedia.org/wiki/Queer%20theology | Queer theology | Queer theology is a theological method that has developed out of the philosophical approach of queer theory, built upon scholars such as Marcella Althaus-Reid, Michel Foucault, Gayle Rubin, Eve Kosofsky Sedgwick, and Judith Butler. Queer theology begins with the assumption that gender variance and queer desire have always been present in human history, including faith traditions and their sacred texts such as the Jewish Scriptures and the Bible. It was at one time separated into two separate theologies; gay theology and lesbian theology. Later, the two would merge and expand to become the more inclusive term of queer theology.
Terminology
The term queer can be understood within queer theory as encompassing one of three meanings: as an umbrella term, as transgressive action, and as erasing boundaries. Its use has become more popular in social settings for personal identification and in academic settings leading to the creation of programs such as the Center for LGBTQ and Gender Studies in Religion, a program created in 1996 at Pacific School of Religion. Building upon these three meanings of queer, queer theology can be understood as:
Theology done by, with, and for LGBTQIA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 intersex, and asexual) individuals focusing on their specific needs as stated by persons identifying within the LGBTQIA+ community.
Theology that purposefully opposes the fixity of social and cultural norms regarding gender and sexuality. It seeks to bring equitable value to marginalized voices, experiences, and perspectives that allows theology in queer people.
Theology that challenges and deconstructs harmful and historically imposed boundaries, particularly with respect to sexual and gender identity.
Queer theology is inclusive to individuals' sexual and gender identity and allows the LGBTQ+ community to reclaim what they see as their rightful space in Christianity and the Imago Dei, as well as other religions and faith traditions. Furthermore, according to Jennifer Purvis, "queer" signifies not only a range of variant genders and non-heterosexual sexualities, but a posture of resistance, questioning attitude, and a set of techniques and approaches. For that reason, queer theology calls for thinking beyond what may be known, disciplined and controlled and asks us to re-embrace our queer cognizance.
The term can be traced back to the 1990s, when J. Michael Clark proposed the term "pro-feminist gay theology" and Robert Goss used the term "queer theology." The term "queer" was also used to describe the early Adamites sect.
Theologians
One proponent of queer theology was Marcella Althaus-Reid, who drew on Latin American liberation theology and interpreted the Bible in a way in which she saw as positive towards women, queer people and sex. She proposed a theology that centered marginalized people, including people in poverty and queer people. For Althaus-Reid, theology ought to be connected to the body and lived experience. She put it this way:
One theme in the theology of her The Queer God (Routledge, 2003) is the holiness of the gay club, as she explores the intersection and essential non-contradiction of a strong, vibrant faith life and sexual desire. An example of finding otherness and desire in Biblical texts is her reading of Jeremiah 2:23–25 from the Hebrew, presented in her previous work Indecent Theology:
In a paper read at the Conference of Modern Churchmen in 1967 titled "Jesus, the Revelation of God", Hugh William Montefiore offers a controversial interpretation of the early life of Jesus. Jesus was not aware of his vocation as Messiah until approximately age thirty, Montefiore argues, and this vocation can therefore not explain the celibacy of Jesus. Apart from the Essenes, celibacy was not a common practice in Jewish life. Montefiore suggests we might need to look for a non-religious reason to explain the celibacy of Jesus:Men usually remain unmarried for three reasons: either because they cannot afford to marry or there are no girls to marry (neither of these factors need have deterred Jesus); or because it is inexpedient for them to marry in the light of their vocation (we have already ruled this out during the "hidden years" of Jesus' life); or because they are homosexual in nature, in as much as women hold no special attraction for them. The homosexual explanation is one which we must not ignore.
Montefiore finds the explanation that Jesus was homosexual consistent with his identification with the poor and oppressed: All the synoptic gospels show Jesus in close relationship with the 'outsiders' and the unloved. Publicans and sinners, prostitutes and criminals are among his acquaintances and companions. If Jesus were homosexual in nature (and this is the true explanation of his celibate state) then this would be further evidence of God's self-identification with those who are unacceptable to the upholders of 'The Establishment' and social conventions.
John J. McNeill was an openly gay Jesuit priest and a vocal proponent of queer theology. His work focuses on the pushing of a new and evolving Christian structure that is truly inclusive of gay, lesbian and bisexual Christians. He highlights the importance of acknowledging how far Christian mentality has come in its view of homosexuality but believes there is a long way to go. McNeill argues that it is not enough to demand acceptance but to strive for a Church that provides a community that allows for the spiritual and moral enrichment of gay, lesbian and bisexual Christians. This inclusion can be achieved by engaging with and allowing gay, lesbian and bisexual Christians to not only participate in such a community but be leaders in the ministry.Homosexuals within the Church have an obligation to organize and attempt to enter into dialogue with Church authorities. Church authorities in turn should show an example in terms of just behavior toward the homosexual minority by displaying an active willingness to hear, to enter dialogue, and to seek ways to resolve whatever injustice becomes clear as a result of dialogue. It is only by means of such a dialogue that the process can begin of separating the true implications of Christian faith and morality for the homosexual from the misunderstandings and prejudices of the past.McNeill's book The Church and the Homosexual (Beacon Press, 1976) addresses queer theology in three sections: a histor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homosexuality and the Catholic tradition, finding where homosexuality belongs in a restructured traditional moral theology, and the shifts necessary in the modern Christian ministry that will allow gay, lesbian and bisexual Christians to thrive in their faith.
Others notable in the field include David Eng and Alice Y. Hom, authors of Q & A: queer in Asian America, Delroy Constantine-Simms, author of The greatest taboo: homosexuality in Black communities, Michael Hames-Garcia and Ernesto Javier Martinez, authors of Gay Latino studies: a critical reader and United Church of Christ pastor Yvette Flunder.
See also
Side A, Side B, Side X, Side Y (theological views)
The Bible and homosexuality
Religion and sexuality
References
Further reading
Althaus-Reid, Marcella (2000). Indecent Theology: Theological perversions in sex, gender and politics. .
Althaus-Reid, Marcella (2003). The Queer God. .
Lightsey, Pamela (2015). Our Lives Matter: A Womanist Queer Theology. Pickwick Publications. .
Tonstad, Linn (2018). Queer Theology: Beyond Apologetics. Cascade Books. .
External links
Theology
Christian theological movements
LGBT and Christianity
Neologisms |
https://ko.wikipedia.org/wiki/%EB%B0%9C%EB%AA%85%EC%82%AC%20%EC%97%B0%ED%91%9C | 발명사 연표 |
원시시대
석기시대 이전
2300만 년 전-530만 년 전 마이오세: 침대와 베개.
구석기 시대
330만 년 전-260만 년 전 오늘날의 케냐 및 에티오피아: 석기(찍개). 너무 오래 되어서 이것을 만든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가장 오래된 석기를 사용한 전(前)인류 문화가 올도완 문화이며, 발명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 또는 호모 하빌리스.
230만 년 전: 초기 인류의 불의 이용. 그에 따른 요리 개념의 탄생. 발명자는 호모 하빌리스.
170만 년 전 오늘날의 케냐: 찍개보다 발전한 석기인 주먹도끼. 발명자는 아슐 문화의 호모 에렉투스.
90만 년 전-4만 년 전: 보트.
79만 년 전 오늘날의 이스라엘: 불구덩이.
40만 년 전 오늘날의 잠비아: 안료.
40만 년 전-30만 년 전 오늘날의 독일: 창. 발명자는 하이델베르크인으로 추정.
35만 년 전-15만 년 전: 언어.
30만 년 전: 현생인류 출현.
20만 년 전 오늘날의 이탈리아: 접착제를 이용한 슴베고정.
17만 년 전-8만 3000년 전: 의복.
16만 4000년 전: 돌날의 열처리.
13만 5000년 전-10만 년 전 오늘날의 이스라엘 및 알제리: 비즈.
13만 년 전-11만 5000년 전: 엠 간빙기 기간. 간빙기가 끝나고 마지막 빙기 도래.
10만 년 전 오늘날의 이스라엘: 매장.
9만 년 전 오늘날의 민주콩고: 작살.
7만 7000년 전 오늘날의 남아프리카: 침대 방충.
6만 4000년 전-6만 1000년 전 오늘날의 남아프리카: 골각기. 또한 뼈를 깎아 만든 것이 화살촉이었다는 점에서 궁시와 바늘의 발명도 시사됨.
5만 년 전-4만 년 전: 행동 현대성. 사람이 사람다워짐.
4만 9000년 전 오늘날의 호주-3만 년 전 오늘날의 일본: 간석기.
4만 4000년 전–4만 2000년 전 오늘날의 에스와티니: 엄대(레봄보 골각기).
4만 년 전-2만 년 전 오늘날의 호주: 화장.
4만 년 전 오늘날의 에스파냐 및 인도네시아: 동굴벽화.
3만 7000년 전 오늘날의 서남아시아: 막자.
3만 6000년 전-9000년 전 오늘날의 터키: 직조. 오늘날의 사카르트벨로 및 모라바에서 먼저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지만, 확실하게 유물이 발견된 것은 터키 차탈회위크가 가장 오래됨.
3만 5000년 전 오늘날의 독일: 관악기.
2만 8000년 전: 밧줄.
2만 8000년 전 오늘날의 독일: 남근상.
2만 년 전 - 수의 발견
1만 6000년 전 오늘날의 중국: 도예.
1만 5000년 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울림널.
1만 4500년 전 오늘날의 요르단: 빵.
1만 4000년 전 오늘날의 북이탈리아: 치의학.
1만 3000년 전-1만 2000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 농업.
1만 3000년 전-1만 1000년 전 오늘날의 서남아시아: 양의 가축화.
신석기 시대
1만 1700년 전: 마지막 빙기 종료. 홀로세 시작.
1만 1000년 전-8000년 전 오늘날의 중국: 쌀농사.
1만 1000년 전 오늘날의 터키: 건물(괴베클리 테페).
1만 년 전 ~ 기원전 8000년: 거대영구정착지 원도시(예리코, 차탈회위크 등).
기원전 7000년 오늘날의 중국: 발효주, 특히 봉밀주.
기원전 6500년 오늘날의 터키 차탈회위크: 납제련.
기원전 6000년 오늘날의 이라크: 가마.
기원전 6000년 오늘날의 이란: 관개.
기원전 5000년 오늘날의 세르비아: 동제련.
기원전 5000년 오늘날의 중국: 옻칠.
기원전 5000년–기원전 4500년 오늘날의 중국: 노.
기원전 4500년–기원전 3500년 오늘날의 이스라엘: 밀랍주조법.
기원전 4400년 오늘날의 이집트: 구리바늘.
기원전 4000년–기원전 3500년: 바퀴. 메소포타미아의 발물레, 북캅카스 마이코프 문화와 중앙유럽 쿠쿠테니-트리필리아 문화의 수레.
기원전 3630년 오늘날의 중국: 견섬유.
기원전 3500년: 말의 가축화.
기원전 3400년-기원전 3100년 남유럽: 문신.
기원전 3200년 고대 이집트: 범주.
기원전 제3천년기
기원전 3000년 오늘날의 이라크: 쓰기(쐐기문자).
기원전 3000년 중앙아시아: 주석 채굴.
기원전 3000년 메소포타미아: 청동.
기원전 3000년 이집트: 파피루스.
기원전 3000년 오늘날의 이란: 빗.
기원전 3000년 한반도: 고인돌에 새긴 성도.
기원전 3000년 한반도: 시루
기원전 3000년: 숫자
기원전 2700~2300년 메소포타미아: 주판
기원전 2500년 이집트: 접안시설.
기원전 제2천년기
기원전 2000년 수메르: 기보법.
기원전 2000년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전차.
기원전 2000년 이집트: 유리.
기원전 1700년 페니키아(오늘날의 레바논): 음소문자.
기원전 1500년 바빌로니아: 파종기.
기원전 1500년 페니키아 또는 리디아: 주화.
기원전 1500년 이집트: 가위.
기원전 1300년 이집트: 선반.
기원전 제1천년기
기원전 7세기
기원전 600년 이집트: 등대.
기원전 7세기 말-기원전 6세기 초 고대 그리스: 마차도(디올코스).
기원전 6세기
기원전 6세기 말 카르타고 또는 기원전 6세기 켈티베리아: 크랭크.
기원전 515년경 그리스: 기중기.
기원전 5세기
기원전 5세기 오늘날의 중국: 주철.
기원전 5세기 오늘날의 중국 및 그리스: 쇠뇌.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 중반 호북성에서 발견되었고,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421년 가스트라페테스.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 오늘날의 중국: 견인식 트레뷰셋.
기원전 421년 이전 그리스 또는 카르타고: 캐터펄트.
기원전 480년경 오늘날의 시칠리아: 와선계단.
기원전 4세기
기원전 375년–기원전 350년 카르타고: 연자방아.
기원전 4세기 오늘날의 중국: 톱니바퀴.
기원전 350년경: 아이네이아스 탁티코스가 위드라블리코스 틸레그라포스 발명.
기원전 3세기
기원전 3세기: 아르키메데스 나선양수기.
기원전 3세기 초: 갑문(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치하의 파라오 운하)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세계: 캠(자동기계에 사용됨).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세계: 수차와 탈진기, 짐벌 (필로 메카니우스의 기록)
기원전 2세기-기원전 3세기 오늘날의 중국: 고로.
기원전 2세기
기원전 2세기 오늘날의 중국: 종이. 기원후 1세기 사람인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다는 통설이 있으나 감숙성에서 기원전 2세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50년경 헬레니즘 세계: 천문관측의.
기원전 1세기
기원전 1세기 오늘날의 레바논: 유리불기.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국: 홍예교(사인트마르틴교, 산 로렌초교).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국: 아치댐(글라눔댐).
기원전 71년 이전 동지중해: 그리스인들이 물레방아 발명.
기원전 40년 이전 오늘날의 중국: 메공이.
기원전 25년 이전 오늘날의 에스파냐: 로마인들이 역상사식 수차 발명.
기원후 제1천년기
기원후 1세기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 헤론이 증기 터빈(에올리스 구), 자판기, 자동문 발명
기원후 1세기 말: 책
기원후 2세기
118년 오늘날의 중국 사천성: 손수레.
132년 오늘날의 중국: 장형이 지진계와 진자 제작.
기원후 3세기
220년 이전 오늘날의 중국: 목판인쇄. 이로써 중국은 세계 최초의 인쇄문화권이 된다.
3세기 하반 로마령 소아시아: 연결봉 및 그것을 사용한 제재소(히에라폴리스 제재소).
3세기 말-4세기 초 로마 아프리카 속주: 물터빈.
기원후 4세기
4세기 오늘날의 중국: 낚시얼레.
347년 오늘날의 중국: 유정 및 시추공. 최대 깊이 240 미터.
322년경 오늘날의 중국: 등자.<ref name="autogenerated2">[https://web.archive.org/web/20071013231319/http://findarticles.com/p/articles/mi_m1310/is_1988_Oct/ai_6955868 "The stirrup – history of Chinese science." UNESCO Courier, October, 1988]</ref> 중국 전체로 널리 퍼진 것은 477년 이전.
4세기-5세기 로마 제국: 외륜선(『전쟁업무론』).
기원후 5세기
5세기 남북조시대 중국: 말목사리. 477년-499년 사이에 그려진 둔황 석굴벽화에 말목사리 그림이 나타난다.
5세기-6세기 동로마 제국 카파도키아: 첨두홍예교(카라마가라교).Warren, John (1991): "Creswell's Use of the Theory of Dating by the Acuteness of the Pointed Arches in Early Muslim Architecture", Muqarnas, Vol. 8, pp. 59–65 (61–63)
기원후 6세기
500년 이후 인도 아대륙: 물레.
563년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우식 돔(하기아 소피아).
577년 이전 오늘날의 중국: 유황성냥.
589년 이전 오늘날의 중국(수조): 휴지. 안지추(531년생-591년몰)의 기록에 언급되며 증거상 이후 왕조들에서도 계속 사용된 듯.Hunter (1978), 207.
기원후 7세기
650년 오늘날의 이란: 풍차.
672년 동로마 제국: 소이탄(그리스의 불). 성자 테오파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바알베크 난민 출신의 레바논 그리스인 칼리니코스가 발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사적 실재성에 의문이 제기되며, 실재한다 하더라도 칼리니코스는 원래 존재하던 무기를 개선만 시킨 것일 수도 있다.
7세기 오늘날의 중국(당조): 지폐. 지폐는 당송시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 뿌리는 상인들의 영수증이었으며, 큰 거래를 하는 도매상들이 묵직한 동전 대신 사용했다.Bowman (2000), 105.
7세기 오늘날의 중국(당조): 도자기. 북중국에서는 7세기부터 도기 및 자기가 생산되었으나 남중국에서는 10세기까지 생산되지 않았다.
기원후 8세기
700년 오늘날의 인도(찰루키아조) 카르나타카 비루파크샤 신전: 바늘구멍 사진기.
기원후 9세기
9세기 오늘날의 중국(당조): 흑색화약. 화약은 9세기 중국 연단술사들이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들려다 발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화약은 오대십국 시대부터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고, 1044년(송대)에 쓰여진 『무경총요』에 처음으로 화약제조법이 기록되었다.Gernet (1996), 311.
9세기 오늘날의 시리아: 대수학.
9세기 오늘날의 모로코: 학위를 주는 대학교.
9세기 인도 아대륙: 숫자 0. 인도에서는 0의 개념의 발명과 별개의 숫자로서의 분리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0을 이용해 실질적인 계산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9세기까지는 나눗셈에 있어서도 다른 숫자들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Britannica Concise Encyclopedia (2007). algebra
기원후 10세기
10세기 오늘날의 중국(송조): 개인화기(화창). 처음에는 죽통을, 그 뒤에는 금속통을 사용하여 약한 화약을 발사했다. 둔황 석굴벽화에 가장 이른 묘사가 나타난다. 화창은 세계 최초의 개인화기이며, 또한 최초의 화약무기다.
10세기 오늘날의 중국(송조): 불꽃놀이(폭죽). 시장 상인들에게서 흔히 구매할 수 있었다. 이 최초의 불꽃놀이 도구는 죽통에 화약이 채워진 형태로, 그래서 폭죽이라고 했다.
10세기 오늘날의 중국(송조): 건선거.
기원후 제2천년기
기원후 11세기
11세기 레반트: 십자군들이 구급차 발명.
11세기 동아시아: 초기 형태의 베서머 법.
11세기 오늘날의 중국(송조): 소송이 천문시계 부속으로서 체인 구동계 발명.
1088년 오늘날의 중국(송조): 필승이 활자 발명. 세계 최초의 활자인쇄물은 『몽계필담』.Gernet (1996), 335.Day & McNeil (1996), 70.
기원후 12세기
1119년 이전 오늘날의 중국(송조): 습식 나침반. 자화된 바늘을 항법 용도로 사용했다는 가장 이른 기록은 주욱의 『평주가담』(1119년)에 나타난다.Gernet (1962), 77.Needham (1986), Volume 4, Part 1, 279.Gernet (1996), 328. 이 때 중국에서 사용된 나침반은 물사발 위에 자화된 바늘을 띄우는 형태의 습식 나침반이었다. 오늘날 사용하는 것과 같은 건식 나침반은 1300년대 이후 중세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서 발명되었다.
기원후 13세기
1206년 이스마일 알자자리가 캠샤프트 처음 설명.
13세기 오늘날의 중국: 로켓이 군용 및 오락 목적으로 사용.
13세기 유럽: 최초의 기계식 탈진기인 굴대 탈진기.
1231년 오늘날의 중국(금조): 폭탄. 여진 황조였던 금조에서 송조의 도시를 공략하기 위해 개발했다. 당시 최초의 폭탄은 무쇠 껍질 속에 흑색화약을 채운 것으로, 진천뢰라고 했다.
1275년 하산 알라마흐가 어뢰 개념 제시.
1277년 오늘날의 중국(송조): 지뢰. 몽골 제국군이 광서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장군 누검할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1286년 오늘날의 이탈리아: 안경.
13세기 오늘날의 중국(원조): 핸드 캐넌. 가장 오래된 핸드 캐넌 유물은 흑룡강성에서 발굴되었다. 또한 『원사』에 1288년에 원조를 섬긴 여진족 장군이 기독교도 나얀의 반란을 "총수"를 동원해서 진압했다는 기사가 있다.
기원후 14세기
1300년대 오늘날의 중국(명조): 초옥의 『화룡경』에서 다단계 로켓 개념 제시.
1326년 이전 오늘날의 중국(명조): 캐넌포.
1378년 한반도(고려조): 함포.
14세기 레오 헤브라에우스가 직각기 발명.
14세기 오늘날의 중국(명조): 기뢰. 『화룡경』 및 요기(1311년생-1375년몰)가 연철로 껍데기를 만들어서 소 방광에 넣어 밀봉하여 방수처리한 폭탄을 강이나 바다에 띄우는 개념을 제시. 이후 1637년 송응성이 쓴 백과사전 『천공개물』에도 언급.
기원후 15세기
15세기 초 유럽: 나선 용수철.
15세기 유럽: 태엽.
1420년대 플란데런 백국: 브레이스.
1434년 조선: 자격루
1440년 이전 독일 왕국 마인츠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나사압착기를 바탕으로 인쇄기 발명. 인쇄기의 존재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문서는 1439년 구텐베르크를 고발한 소송장이었다.
1441년 조선: 측우
15세기 중반 아마도 오늘날의 에스파냐: 화승총(아쿼버스).
15세기 유럽: 강선.
1480년대 오늘날의 포르투갈: 항해용 천문관측의.
1494년 루카 파치올리가 복식부기 개발.
기원후 16세기
1551년: 타키 앗딘 무함마드 이븐 마루프가 증기 잭에 사용된 단순한 증기 터빈을 묘사.
1560년 베네치아 공화국: 부선거.
1569년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가 점장도법 개발.
1589년 윌리엄 리가 양말틀 발명.
1594년 존 데이비스가 후측의 발명.
1597년 이전에 한스 슈토플러가 리볼버 발명.
기원후 17세기
1605년 슈트라스부르크의 요한 카롤루스가 신문(『렐라티온 알러 퓌르네멘 운트 게덴크뷔르디겐 히스토리엔』) 발간(오래된 신문 목록 참조).Weber, Johannes (2006): "Strassburg, 1605: The Origins of the Newspaper in Europe", German History, Vol. 24, No. 3, pp. 387–412 (396f.)
1608년 오늘날의 네덜란드의 한스 리퍼세이가 망원경 특허등록. 하지만 이미 망원경이 널리 쓰이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실제 최초 발명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1620년경 유럽에 현미경 등장. 먼저 발명된 망원경을 뒤집어 응용한 것으로 보이나, 마찬가지로 발명자는 불명이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발명자 후보자로는 자카리아스 얀선, 코르넬리스 드레벌,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다.
1630년 윌리엄 오트레드가 계산자 발명.
1642년 블레즈 파스칼이 기계식 계산기(파스칼 계산기) 발명.
1640년 가스파로 베르티 또는 1643년 에반겔리스타 토리첼리가 청우계 발명.
1650년 오토 폰 구에리케가 진공펌프 발명.
1656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추시계 발명. 그 개념은 1637년 갈릴레오가 제시했으나 그에게 실물을 만들 능력은 없었다.
1663년 오토 폰 구에리케가 기전기 발명.
1680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최초의 피스톤 기관(화약기관) 개념 제시.
1698년 토머스 세이버리가 증기기관 특허등록.
기원후 18세기
1709년경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피아노 발명.
1709년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가 알코올 온도계 발명.
1710년 조선: 직교 라틴 방진
1712년 토머스 뉴커먼이 최초의 상업적 증기기관 발명.
1730년경 토머스 고드프리와 존 해들리가 각자 독립적으로 팔분의 발명.
1733년 존 케이가 나는 북 발명. 이로써 한 명이 베틀을 작동할 수 있게 되다.
1736년 존 해리슨이 최초의 크로노미터 H1 시험.
1738년 루이스 폴과 존 와트가 최초의 기계식 방적기(폴-와트 제면기) 발명.
1745년 피터르 판 뮈스헨브루크와 에발트 게오르크 폰 클라이스트가 각자 독립적으로 초기형 축전기인 라이덴병 발명.
1746년 존 로벅이 연실법 발명.
1755년 윌리엄 컬렌이 최초의 인공 냉장기계 발명.
1764년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다축방적기 발명.
1765년 제임스 와트가 복수기 분리식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기관 성능을 개선.
1767년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탄산수 제조법 발명.
1769년 니콜라조제프 퀴뇨가 증기자동차 발명.
1770년 리처드 솔터가 저울 발명.
1774년 존 윌킨슨이 천공기 발명. 최초의 공작기계(기계를 만드는 기계)로 간주된다.
1775년 제시 램즈던이 나사절삭선반 발명.
1776년 존 윌킨슨이 공기압축기 발명.
1783년 클로드 드 주프루아가 최초의 증기선 조선.
1783년 몽골피에 형제가 최초의 유인열기구 건조.
1785년 마르티누스 판 마룸이 최초로 전기분해 시전.
1786년 앤드루 메이클이 탈곡기 발명.
1789년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역직기 발명.
1790년 토머스 세인트가 재봉틀 발명.
1792년 클로드 샤페가 수기전신 발명.
1793년 엘리 휘트니가 조면기 발명.
1795년 조지프 브라마가 유압프레스 발명.
1796년 알로이스 제네펠더가 석판인쇄술 발명.
1797년 새뮤얼 벤담이 합판 발명.
1798년 에드워드 제너가 최초의 성공적인 예방접종인 종두법 개발.
1799년 조지 메드허스트가 동력공기압축기 발명.
1799년 루이니콜라 로베르가 초지기 발명.
기원후 19세기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가 전지(볼타 전지) 발명.
1802년 험프리 데이비가 호광등 발명. 하지만 발전체계가 발명되기 전에는 그다지 효율적인 조명이 아니었다.
1804년 프리드리히 제르튀르너가 아편에서 모르핀 추출.
1804년 리처드 트레비식이 증기기관차 발명.
1804년 하나오카 세이슈가 전신마취제(통선산) 발명.
1807년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최초의 쓸만한 내연기관 발명.
1807년 프랑수아 이사크 드 리바가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 설계. 연료는 수소.
1807년 로버트 풀턴이 증기선 운송 및 무역체계 확장.
1810년 니콜라 아페르가 밀폐가열포장(병조림) 발명.
1811년 프리드리히 쾨니히가 동력인쇄기 발명.
1812년 윌리엄 레이드 클래니가 안전등 발명.
1814년 제임스 폭스, 매튜 머레이, 리처드 로버츠가 각자 독립적으로 대패기계 발명.
1816년 프랜시스 로널즈가 정전기를 이용하는 최초의 전신 발명.
1816년 로버트 스털링이 스털링 기관 발명.
1817년 카를 폰 드라이스 남작이 벨로시페드(드라이지네) 발명.
1818년 마크 이점바드 브루넬이 터널링 실드 발명.
1822년 토머스 블랜차드가 패턴추적 선반(형삭반에 가까움) 발명.
1822년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최초의 사진술(헬리오그래피) 발명.
1822년 찰스 배비지가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기계식 컴퓨터 제작 시작.
1823년 요한 볼프강 되베라이너가 라이터(되베라이너의 램프) 발명.
1824년 요한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가 볼트액션 소총(드라이제 췬트나델게베어) 발명.
1825년 윌리엄 스터전이 전자석 발명.
1826년 존 워커가 마찰성냥 발명.
1828년 제임스 보몬트 닐슨이 열풍로 발명.
1828년 패트릭 벨이 수확기 발명.
1828년 제들릭 아뇨쉬가 전동기 발명.
1829년 윌리엄 맨이 복식공기압축기 발명.
1830년 에드윈 버딩이 잔디깎기 발명.
1831년 마이클 페러데이가 전자기 유도법 발명. 이듬해 조지프 헨리도 독립적으로 발명.
1834년 모리츠 폰 야코비가 실용적인 전동기 발명.
1835년 조지프 헨리가 계전기 발명.
1837년 새뮤얼 모스가 모스부호 발명.
1838년 모리츠 폰 야코비가 전주법 발명.
1839년 윌리엄 오티스가 동력삽(증기삽) 발명.
1839년 제임스 네이스미스가 증기망치 발명.
1839년 에드몽 베크렐이 광기전효과를 이용, 최초의 태양전지 발명.
1857년 윌리엄 피(William Fee)가 면화씨 대량 분쇄기를 발명.
기원후 20세기
1900년 테오도어 코베르가 최초의 경식 비행선 설계(LZ 1).
1901년 영국의 허버트 세실 부스와 미국의 데이비드 T. 케네이가 각자 독립적으로 진공청소기 특허등록.
1903년 옌스 애기디우스 엘링이 최초의 가스 터빈 발명.
1903년 에두아르 베네딕튀스가 합판유리 발명.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고정익 동력비행(플라이어 1호).
1904년 존 앰브로즈 플레밍이 진공관과 다이오드 발명.
1907년 폴 코르뉘가 최초의 회전익기 비행.최고.
1907년 리오 베이클랜드가 합성수지 발명(베이클라이트).
1908년 자크 에드빈 브란덴베르거가 셀로판 발명.
1909년 프리츠 하버가 하버법 개발.
대통령 선정
1909년 조르주 리그누와 A. 푸르니에가 최초의 동시화상전송, 즉 텔레비전 방송 수행.
1911년 찰스 톰슨 리스 윌슨이 입자검출기 발명(안개상자).
1913년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가 베르기우스법 개발.
1913년 빅토르 카플란이 카플란수차 발명.
1915년 최초의 전차 설계. 영국에서 1916년부터, 프랑스에서 1917년부터 전투에 동원. 영국 측 설계자는 월터 고든 윌슨과 윌리엄 트리톤, 프랑스측 설계자는 외젠 브리예.
1916년 얀 초크랄스키가 초크랄스키법 개발.
1917년 알렉산더 M. 니콜슨이 로셸염으로 결정진동자 발명.
1925년 프란츠 요제프 에밀 피셔와 한스 트로프슈가 피셔-트로프슈법 개발.
1926년 우다 신타로와 야기 히데츠구가 야기 안테나 발명.
1926년 로버트 고더드가 최초의 액체연료 로켓 발사.
1927년 워렌 매리슨과 J. W. 호턴이 수정시계 발명.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 검출. 다만 약용화한 것은 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하인, 노먼 히틀리 등임.
1928년 프랭크 휘티가 터보제트기관에 대한 아이디어 공식 제출. 1930년 1월 16일 특허 제출하여 1932년 취득.
1928년 필로 판즈워스가 최초의 실용적인 전자 텔레비전 시연.
1929년 루돌프 G. 보엠이 볼나사 발명.
1930년 프리츠 체르니케가 위상차현미경 발명.
1931년 에른스트 루스카가 전자현미경 발명.
1933년 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이 주파수변조(FM)방송 특허출원.
1935년 월리스 캐러더스가 합성섬유 발명(나일론).
1938년 콘라트 추제가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컴퓨터 개발(Z1).
1938년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핵분열 발견. 이후 맨해튼 계획, 소비에트 원자폭탄 계획, 우란프로젝트 등 각국의 핵무기 개발계획으로 이어진다.
1939년 G. S. 유니예프 또는 나움 구리비치가 전류 제세동기를 발명.
1941년 존 윈필드와 제임스 딕슨이 폴리에스테르 발명.
1942년 나치 독일에서 세계 최초의 탄도유도탄 발명(보복무기 2호).
1945년 미국, 영국, 캐나다 합작으로 원자폭탄 개발(맨해튼 계획).
1946년 제임스 마틴이 사출좌석 발명.
1947년 데니스 가보르가 홀로그램 발명.
1947년 플로이드 패리스와 J. B. 클라크가 수압파쇄법 개발.
1947년 존 바딘과 월터 하우저 브래튼이 최초의 반도체 소자, 이극 점접촉형 트랜지스터 발명.
1948년 미국 국가표준국에서 최초의 원자시계 개발.
1948년 로베르 뒤레르가 산소전로제강법 개발. 이후 전세계의 강철의 대부분은 이 공정으로 만들어진다(2000년 기준 60%).
1951년 미국 아이다호주 아크로시에서 최초의 핵발전.Fifty years ago in December: Atomic reactor EBR-I produced first electricity American Nuclear Society Nuclear news, November 2001
1952년 알레이스터 필킹턴이 플로트 유리공법 개발.
1952년 미국에서 최초의 열핵무기 개발.
1953년 사와자키 노리카즈가 최초의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 발명.
1954년 캘빈 사우더 풀러 등이 태양전지 발명. 태양 에너지를 전류로 바꾸는 최초의 실용적인 기술.
1955년 크리스토퍼 코커렐이 공기부양정 특허출원.
1955년 맬컴 맥린이 컨테이너 발명.
1956년 IBM에서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발명.
1957년 IBM에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PC) 발명(IBM 610).
1957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
1958년 잭 킬비와 로버트 노이스가 집적회로를 독립적으로 발명.
1959년 모하메드 아탈라와 다완 카흥이 MOS 트랜지스터 발명. 이전의 이극 트랜지스터보다 우월하여 오늘날의 거의 모든 전자제품에 사용된다. 컴퓨터 혁명과 통신통제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촉발시킨다.https://www.computerhistory.org/atchm/who-invented-the-transistor/
1960년 시어도어 마이만이 최초의 작동하는 유도방출광선증폭(레이저) 장치 발명.
1963년 허버트 A. 길버트가 최초의 전자담배 발명.
1965년 스테파니 쿠올렉이 케블라 발명.
1969년 UCLA, SRI, UCSB, UofU 간에 아르파넷 개통.
1970년 일본에서 휴대용 계산기 발명.
1971년 레이 톰린슨이 전자우편 발명.
1971년 페데리코 파긴 연구진이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발명(인텔 4004). PC혁명의 기초를 놓다.
1972년 최초의 비디오 게임기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개발.
1973년 최초의 상용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도입(제록스 알토).
1973년 CERN에서 터치스크린 개발.
1973년부터 빈트 서프와 로버트 칸이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TCP/IP) 제안. 오늘날의 인터넷의 기반이 된다.
1975년 앨테어 8800이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의 효시를 쏘아올리다.
1980년 마스오카 후지오가 플래시메모리 발명(NOR과 NAND 모두). 1984년 상용화.
1982년 읽기 전용 CD롬 발명. 소니에서 그 표준을 개발했고 필리스에서 모든 이진 파일 저장수단으로 그것을 채택하다.
1983년 척 헐이 최초의 3차원 인쇄 공정인 광조형법 개발.
1984년 모토롤라에서 최초의 상용 휴대전화 DynaTAC 8000X 출시.
1985년 존 굿이너프, 래치드 야자미, 요시노 아키라가 리튬이온 전지 발명. 가전 및 전동수송기기 전반에 영향을 미치다.
1990년 팀 버너스리가 월드 와이드 웹 공개.
1993년 최초의 대중용 웹 브라우저 모자이크 발매.
1994년 소니에서 플레이스테이션 발매.
1995년 필리스, 소니, 토시바, 파나소닉 공동개발로 DVD가 광디스크 저장매체 표준으로 개발.
기원후 제3천년기
기원후 21세기
2019년 IBM에서 최초의 상용 양자컴퓨터 IBM Q 시스템 원 발매.
2021년 한국 누리호 발사
각주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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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 연표 | https://en.wikipedia.org/wiki/Timeline%20of%20historic%20inventions | Timeline of historic inventions | The timeline of historic inventions is a chronological list of particularly important or significant technological inventions and their inventors, where known.
Paleolithic
The dates listed in this section refer to the earliest evidence of an invention found and dated by archaeologists (or in a few cases, suggested by indirect evidence). Dates are often approximate and change as more research is done, reported and seen. Older examples of any given technology are often found. The locations listed are for the site where the earliest solid evidence has been found, but especially for the earlier inventions, there is little certainty how close that may be to where the invention took place.
Lower Paleolithic
The Lower Paleolithic period lasted over 3 million years, and corresponds to the human species prior to the emergence of Homo sapiens. The original divergence between humans and chimpanzees occurred 13 (Mya), however interbreeding continued until as recently as 4 Ma, with the first species clearly belonging to the human (and not chimpanzee) lineage being Australopithecus anamensis. This time period is characterized as an ice age with regular periodic warmer periods – interglacial episodes.
3.3-2.6 Mya: Stone tools – found in present-day Kenya, they are so old that only a pre-human species could have invented them. The otherwise earliest known stone tools (Oldowan) were found in Ethiopia developed perhaps by Australopithecus garhi or Homo habilis
2.3 Mya: Earliest likely control of fire and cooking, by Homo habilis
1.76 Mya: Advanced (Acheulean) stone tools in Kenya by Homo erectus
1.75Mya-150 kya: Varying estimates for the origin of language
1.5 Mya: Bone tools in Africa
900-40 kya: Boats
500 kya: Hafting in South Africa
400 kya: Pigments in Zambia
400-300 kya: Spears in Germany likely by Homo heidelbergensis
Middle Paleolithic
The dawn of Homo sapiens around 300 kya coincides with the start of the Middle Paleolithic period. Towards the middle of this 250,000-year period, humans begin to migrate out of Africa, and the later part of the period shows the beginning of long-distance trade, religious rites and other behavior associated with Behavioral modernity.
kya: The trade and long-distance transportation of resources (e.g. obsidian), use of pigments, and possible making of projectile points in Kenya
279 kya: Early stone-tipped projectile weapons in Ethiopia
c. 200 kya: Glue in Central Italy by Neanderthals. More complicated compound adhesives developed by Homo sapiens have been found from c. 70 kya Sibudu, South Africa and have been regarded as a sign of cognitive advancement.
170-83 kya: Clothing (among anatomically modern humans in Africa). Some other evidence suggests that humans may have begun wearing clothing as far back as 100,000 to 500,000 years ago.
164-47 kya: Heat treating of stone blades in South Africa.
135-100 kya: Beads in Israel and Algeria
100 kya: Compound paints made in South Africa
100 kya: Funerals (in the form of burial) in Israel
90 kya: Harpoons in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77 kya: Beds in South Africa
70-60 kya: Oldest arrows (and evidence of bow-and-arrow technology), and oldest needle, at Sibudu, South Africa
Upper Paleolithic to Early Mesolithic
50 ka has been regarded by some as the beginning of behavioral modernity, defining the Upper Paleolithic period, which lasted nearly 40,000 years (though some research dates the beginning of behavioral modernity earlier to the Middle Paleolithic). This is characterized by the widespread observation of religious rites, artistic expression and the appearance of tools made for purely intellectual or artistic pursuits.
49–30 ka: Ground stone tools – fragments of an axe in Australia date to 49–45 ka, more appear in Japan closer to 30 ka, and elsewhere closer to the Neolithic.
47 ka: The oldest-known mines in the world are from Eswatini, and extracted hematite for the production of the red pigment ochre.
45 ka: Shoes, as evidenced by changes in foot bone morphology in Eurasia. Bark sandals dated to 10 to 9 ka were found in Fort Rock Cave in the US state of Oregon in 1938. Oldest leather shoe (Areni-1 shoe), 5.5 ka.
44–42 ka: Tally sticks (see Lebombo bone) in Eswatini
43.7 ka: Cave painting in Indonesia
37 ka: Mortar and pestle in Southwest Asia
36 ka: Weaving – Indirect evidence from Moravia and Georgia. The earliest actual piece of woven cloth was found in Çatalhöyük, Turkey.
35 ka: Flute in Germany
33-10 ka: Star chart in France and Spain
28 ka: Rope
27 ka: Fishing Impliments in Korea
26 ka: Ceramics in Europe
23 ka: Domestication of the dog in Siberia.
22 ka: Fishing hook in Okinawa Island modern day Japan.
19 ka: Bullroarer in Ukraine
16 ka: Pottery in China
14.5 ka: Bread in Jordan
Agricultural and proto-agricultural eras
The end of the Last Glacial Period ("ice age") and the beginning of the Holocene around 11.7 ka coincide with the Agricultural Revolution, marking the beginning of the agricultural era, which persisted there until the industrial revolution.
Neolithic and Late Mesolithic
During the Neolithic period, lasting 8400 years, stone remained the predominant material for toolmaking, although copper and arsenic bronze were developed towards the end of this period.
12-11 ka: Agriculture in the Fertile Crescent
12–11 ka: Domestication of sheep in Southwest Asia (followed shortly by pigs, goats and cattle)
11-8 ka: Domestication of rice in China
11 ka: Oldest known surviving building – Göbekli Tepe, in Turkey
9000 BC: Mudbricks, and clay mortar in Jericho.
8000–7500 BC: Proto-city – large permanent settlements, such as Tell es-Sultan (Jericho) and Çatalhöyük, Turkey.
7000 BC: Alcohol fermentation – specifically mead, in China
7000 BC: Sled dog and Dog sled, in Siberia.
7000 BC: Tanned leather in Mehrgarh, Pakistan.
6500 BC: Evidence of lead smelting in Çatalhöyük, Turkey
6000 BC: Kiln in Mesopotamia (Iraq)
6th millennium BC: Irrigation in Khuzistan, Iran
6000-3200 BC: Proto-writing in present-day Egypt, Iraq, Romania, China, India and Pakistan.
c. 5500 BC: Sailing - pottery depictions of sail boats, in Mesopotamia, and later ancient Egypt
5000 BC: Copper smelting in Serbia
5000 BC: Seawall in Israel
5th millennium BC: Lacquer in China
5000 BC: Cotton thread, in Mehrgarh, Pakistan, connecting the copper beads of a bracelet.
5000–4500 BC: Rowing oars in China
4500–3500 BC: Lost-wax casting in Israel or the Indus Valley
4400 BC: Fired bricks in China.
4000 BC: Probable time period of the first diamond-mines in the world, in Southern India.
Around 4000 BC: Paved roads, in and around the Mesopotamian city of Ur, Iraq.
4000 BC: Plumbing. The earliest pipes were made of clay, and are found at the Temple of Bel at Nippur in Babylonia.
4000–3500 BC: Wheel: potter's wheels in Mesopotamia and wheeled vehicles in Mesopotamia (Sumerian civilization), the Northern Caucasus (Maykop culture) and Central Europe (Cucuteni–Trypillia culture).
3630 BC: Silk garments (sericulture) in China
3500 BC: Probable first domestication of the horse in the Eurasian Steppes.
3500 BC: Wine as general anesthesia in Sumer.
3500 BC: Seal (emblem) invented around in the Near East, at the contemporary sites of Uruk in southern Mesopotamia and slightly later at Susa in south-western Iran during the Proto-Elamite period, and they follow the development of stamp seals in the Halaf culture or slightly earlier.
3400-3100 BC: Tattoos in southern Europe
Bronze Age
The beginning of bronze-smelting coincides with the emergence of the first cities and of writing in the Ancient Near East and the Indus Valley. The Bronze Age starting in Eurasia in the 4th millennia BC and ended, in Eurasia, c.1300 BC.
c. 4650 BC: Copper-tin bronze found at the Pločnik (Serbia) site, and belonging to the Vinča culture, believed to be produced from smelting a natural tin baring copper ore, Stannite.
bef. 3500 BC: ploughing, on a site in Bubeneč, Czech Republic. Evidence, c. 2800 BC, has also been found at Kalibangan, Indus Valley (modern-day India).
c. 3300 BC: City in Uruk, Sumer, Mesopotamia (modern-day Iraq).
c. 3300 BC: Writing – Cuneiform in Sumer.
bef. 3200 BC: dry Latrines in the city of Uruk, Iraq, with later dry squat Toilets, that added raised fired brick foot platforms, and pedestal toilets, all over clay pipe constructed drains.
bef. 3000 BC: Devices functionally equivalent to dice, in the form of flat two-sided throwsticks, are seen in the Egyptian game of Senet. Perhaps the oldest known dice, resembling modern ones, were excavated as part of a backgammon-like game set at the Burnt City, an archeological site in south-eastern Iran, estimated to be from between 2800 and 2500 BC. Later, terracotta dice were used at the Indus Valley site of Mohenjo-daro (modern-day Pakistan).
c. 3000 BC: Tin extraction in Central Asia
3000 - 2560 BC: Papyrus in Egypt
c. 3000 BC: Reservoir in Girnar, Indus Valley (modern-day India).
c. 3000 BC: Receipt in Ancient Mesopotamia (Iraq)
c. 2600 BC: Planned city in Indus Valley (modern-day: India, Pakistan).
By 2650 BC: The Ruler, or Measuring rod, in the subdivided Nippur, copper rod, of the Sumerian Civilisation (modern-day Iraq).
c. 2600 BC: Public sewage and sanitation systems in Indus Valley sites such as Mohenjo-daro and Rakhigarhi (modern-day: India, Pakistan).
c. 2600 BC: Public bath in Mohenjo-daro, Indus Valley (modern-day Pakistan).
c. 2600 BC: Levee in Indus Valley.
by 2556 BC: Docks A harbor structure has been excavated in Wadi al-Jarf, Egypt, which was developed by the reign of the Pharaoh Khufu (2589–2566 B.C).
3000 - 2500 BC: Rhinoplasty in Egypt.
c. 2600 BC: balance weights and scales, from the Fourth Dynasty of Egypt; examples of Deben (unit) balance weights, from reign of Sneferu (c. 2600 BC) have been attributed.
2500 BC: Puppetry in the Indus Valley.
2400 BC: Fork in Bronze Age Qijia culture in China
c. 2400 BC: Copper pipes, the Pyramid of Sahure, an adjoining temple complex at Abusir, was discovered to have a network of copper drainage pipes.
aft. 2400 BC: Touchstone in the Indus Valley site of Banawali (modern-day India).
2300 BC: Dictionary in Mesopotamia.
c. 2200 BC: Protractor, Phase IV, Lothal, Indus Valley (modern-day India), a Xancus shell cylinder with sawn grooves, at right angles, in its top and bottom surfaces, has been proposed as an angle marking tool.
c. 2000 BC: Water clock by at least the old Babylonian period (c. 2000 – c. 1600 BC), but possibly earlier from Mohenjo-Daro in the Indus Valley.
c. 2000 BC: Chariot in Russia and Kazakhstan
c. 2000 BC: Fountain in Lagash, Sumer
bef. 2000 BC: Scissors, in Mesopotamia.
c. 1850 BC: Proto-alphabet (Proto-Sinaitic script) in Egypt.
by 1500 BC: Sundial in Ancient Egypt or Babylonia (modern-day Iraq).
c. 1500 BC: Glass manufacture in either Mesopotamia or Ancient Egypt
by 1600 BC: Surgical treatise appeared in Egypt.
c. 1500 BC: Seed drill in Babylonia
bef. 1400 BC: Rubber, Mesoamerican ballgame.
c. 1300 BC: Lathe in Ancient Egypt
1400 - 1200 BC: Concrete in Tiryns (Mycenaean Greece). Waterproof concrete was later developed by the Assyrians in 688 BC, and the Romans developed concretes that could set underwater. The Romans later used concrete extensively for construction from 300 BC to 476 AD.
Iron Age
The Late Bronze Age collapse occurs around 1300-1175 BC, extinguishing most Bronze-Age Near Eastern cultures, and significantly weakening the rest. This is coincident with the complete collapse of the Indus Valley civilisation. This event is followed by the beginning of the Iron Age. We define the Iron Age as ending in 510 BC for the purposes of this article, even though the typical definition is region-dependent (e.g. 510 BC in Greece, 322 BC in India, 200 BC in China), thus being an 800-year period.
1300 BC: Iron smelting in the Hittite Empire of the Middle East.
1200 BC: Distillation is described on Akkadian tablets documenting perfumery operations.
700 BC: Saddle (fringed cloths or pads used by Assyrian cavalry)
650 BC: Crossbow in China.
650 BC: Windmills in Persia
600 BC: Coins in Phoenicia (Modern Lebanon) or Lydia
Late 7th or early 6th century BC: Wagonway called Diolkos across the Isthmus of Corinth in Ancient Greece
6th century BC to 10th century AD: High Carbon Steel, produced by the Closed Crucible method, later known as Wootz steel, of South India.
6th century BC: University in Taxila, of the Indus Valley, then part of the kingdom of Gandhara, of the Achaemenid Empire (modern-day Pakistan).
6th century to 2nd centuries BC: Systematization of medicine and surgery in the Sushruta Samhita in Vedic Northern India. Documented procedures to:
Perform cataract surgery (couching). Babylonian and Egyptian texts, a millennium before, depict and mention oculists, but not the procedure itself.
Perform Caesarean section.
Construct Prosthetic limbs.
Perform Plastic surgery, though reconstructive nasal surgery is described in millennia older Egyptian papyri.
Late 6th century BC: Crank motion (rotary quern) in Carthage or 5th century BC Celtiberian Spain Later during the Roman empire, a mechanism appeared that incorporated a connecting rod.
Before 5th century BC: Loan deeds in Upanishadic India.
c. 515 BC: Crane in Ancient Greece
500 BC Lighthouse in Greece
Classical antiquity and medieval era
5th century BC
500 to 200 BC: Toe stirrup, depicted in 2nd century Buddhist art, of the Sanchi and Bhaja Caves, of the Deccan Satavahana empire (modern-day India) although may have originated as early as 500 BC.
485 BC: Catapult by Ajatashatru in Magadha, India.
485 BC: Scythed chariot by Ajatashatru in Magadha, India.
5th century BC: Cast iron in Ancient China: Confirmed by archaeological evidence, the earliest cast iron is developed in China by the early 5th century BC during the Zhou Dynasty (1122–256 BC), the oldest specimens found in a tomb of Luhe County in Jiangsu province.
c. 480 BC: Spiral stairs (Temple A) in Selinunte, Sicily (see also List of ancient spiral stairs)
By 407 BC: Early descriptions what of what may be a Wheelbarrow in Greece. First actual depiction of one (tomb mural) shows up in China in 118 AD.
By 400 BC: Camera obscura described by Mo-tzu (or Mozi) in China.
4th century BC
4th century BC: Traction trebuchet in Ancient China.
4th century BC: Gears in Ancient China
4th century BC: Reed pens, utilising a split nib, were used to write with ink on Papyrus in Egypt.
4th century BC: Nailed Horseshoe, with 4 bronze shoes found in an Etruscan tomb.
375–350 BC: Animal-driven rotary mill in Carthage.
By the late 4th century BC: Corporations in either the Maurya Empire of India or in Ancient Rome (Collegium).
Late 4th century BC: Cheque in the Maurya Empire of India.
Late 4th century BC: Potassium nitrate manufacturing and military use in the Seleucid Empire.
Late 4th century BC: Formal systems by Pāṇini in India, possibly during the reign of Chandragupta Maurya.
4th to 3rd century BC: Zinc production in North-Western India during the Maurya Empire. The earliest known zinc mines and smelting sites are from Zawar, near Udaipur, in Rajasthan.
3rd century BC
3rd century BC: Analog computers in the Hellenistic world (see e.g. the Antikythera mechanism), possibly in Rhodes.
By at least the 3rd century BC: Archimedes' screw was first used in the Nile river for irrigation purposes in Ancient Egypt
Early 3rd century BC: Canal lock in Canal of the Pharaohs under Ptolemy II (283–246 BC) in Hellenistic Egypt
3rd century BC: Cam during the Hellenistic period, used in water-driven automata.
By the 3rd century BC: Water wheel. The origin is unclear: Indian Pali texts dating to the 4th century BCE refer to the cakkavattaka, which later commentaries describe as arahatta-ghati-yanta (machine with wheel-pots attached). Helaine Selin suggests that the device existed in Persia before 350 BC. The clearest description of the water wheel and Liquid-driven escapement is provided by Philo of Byzantium (c. 280 – 220 BC) in the Hellenistic kingdoms.
3rd century BC: Gimbal described by Philo of Byzantium
Late 3rd century BC: Dry dock under Ptolemy IV (221–205 BC) in Hellenistic Egypt
3rd–2nd century BC: Blast furnace in Ancient China: The earliest discovered blast furnaces in China date to the 3rd and 2nd centuries BC, although most sites are from the later Han dynasty.
2nd century BC
2nd century BC: Paper in Han dynasty China
206 BC: Compass in Han dynasty China
Early 2nd century BC: Astrolabe invented by Apollonius of Perga.
1st century BC
1st century BC: Segmental arch bridge (e.g. Pont-Saint-Martin or Ponte San Lorenzo) in Italy, Roman Republic
1st century BC: News bulletin during the reign of Julius Caesar. A paper form, i.e. the earliest newspaper, later appeared during the late Han dynasty in the form of the Dibao.
1st century BC: Arch dam (Glanum Dam) in Gallia Narbonensis, Roman Republic (see also List of Roman dams)
Before 40 BC: Trip hammer in China
38 BC: An empty shell Glyph for zero, is found on a Maya numerals Stela, from Chiapa de Corzo, Chiapas. Independently invented by Claudius Ptolemy, in the second century CE Egypt, and appearing in the calculations of the Almagest.
37-14: Glass blowing developed in Jerusalem.
Before 25 BC: Reverse overshot water wheel by Roman engineers in Rio Tinto, Spain
25 BC: Noodle in Lajia in China
1st century
1st century: The aeolipile, a simple steam turbine is recorded by Hero of Alexandria.
1st century: Vending machines invented by Hero of Alexandria.
By the 1st century: The double-entry bookkeeping system in the Roman Empire.
2nd century
132: Seismometer and pendulum in Han dynasty China, built by Zhang Heng. It is a large metal urn-shaped instrument which employed either a suspended pendulum or inverted pendulum acting on inertia, like the ground tremors from earthquakes, to dislodge a metal ball by a lever trip device.
2nd century: Carding in India.
3rd century
By at least the 3rd century: Crystallized sugar in India.
Early 3rd century: Woodblock printing is invented in Han dynasty China at sometime before 220 AD. This made China become the world's first print culture.
Late 3rd–early 4th century: Water turbine in the Roman Empire in modern-day Tunisia.
4th century
280-550 AD: Chaturanga, a precursor of Chess was invented in India during the Gupta Empire.
4th century: Roman Dichroic glass, which displays one of two different colors depending on lighting conditions.
4th century: Mariner's compass in Tamil Southern India: the first mention of the use of a compass for navigational purposes is found in Tamil nautical texts as the macchayantra. However, the theoretical notion of magnets pointing North predates the device by several centuries.
4th century: Simple suspension bridge, independently invented in Pre-Columbian South America, and the Hindu Kush range, of present-day Afghanistan and Pakistan. With Han dynasty travellers noting bridges being constructed from 3 or more vines or 3 ropes. Later bridges constructed utilising cables of iron chains appeared in Tibet.
4th century: Fishing reel in Ancient China: In literary records, the earliest evidence of the fishing reel comes from a 4th-century AD work entitled Lives of Famous Immortals.
347 AD: Oil Wells and Borehole drilling in China. Such wells could reach depths of up to 240 m (790 ft).
4th–5th century: Paddle wheel boat (in De rebus bellicis) in Roman Empire
5th century
400 AD: The construction of the Iron pillar of Delhi in Mathura by the Gupta Empire shows the development of rust-resistant ferrous metallurgy in Ancient India, although original texts do not survive to detail the specific processes invented in this period.
5th century: The horse collar as a fully developed collar harness is developed in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China during the 5th century AD. The earliest depiction of it is a Dunhuang cave mural from the Chinese Northern Wei Dynasty, the painting dated to 477–499.
5th/6th century: Pointed arch bridge (Karamagara Bridge) in Cappadocia, Eastern Roman Empire
6th century
By the 6th century: Incense clock in India and China.
After 500 AD: Charkha (spinning wheel/cotton gin) invented in India (probably during the Vakataka dynasty of Maharashtra, India), between 500 and 1000 A.D.
563 AD: Pendentive dome (Hagia Sophia) in Constantinople, Eastern Roman Empire
577 AD: Sulfur matches exist in China.
589 AD: Toilet paper in Sui dynasty China, first mentioned by the official Yan Zhitui (531–591), with full evidence of continual use in subsequent dynasties.
7th century
619 AD: Toothbrush in China during the Tang Dynasty
672 AD: Greek fire in Constantinople, Byzantine Empire: Greek fire, an incendiary weapon likely based on petroleum or naphtha, is invented by Kallinikos, a Lebanese Greek refugee from Baalbek, as described by Theophanes. However, the historicity and exact chronology of this account is dubious, and it could be that Kallinikos merely introduced an improved version of an established weapon.
7th century: Banknote in Tang dynasty China: The banknote is first developed in China during the Tang and Song dynasties, starting in the 7th century. Its roots are in merchant receipts of deposit during the Tang Dynasty (618–907), as merchants and wholesalers desire to avoid the heavy bulk of copper coinage in large commercial transactions.
7th century: Porcelain in Tang dynasty China: True porcelain is manufactured in northern China from roughly the beginning of the Tang Dynasty in the 7th century, while true porcelain was not manufactured in southern China until about 300 years later, during the early 10th century.
8th century
9th century
9th century: Gunpowder in Tang dynasty China: Gunpowder is, according to prevailing academic consensus, discovered in the 9th century by Chinese alchemists searching for an elixir of immortality. Evidence of gunpowder's first use in China comes from the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period (618–907). The earliest known recorded recipes for gunpowder are written by Zeng Gongliang, Ding Du, and Yang Weide in the Wujing Zongyao, a military manuscript compiled in 1044 during the Song Dynasty (960–1279).
9th century: Playing card in Tang Dynasty China
857-859: Degree-granting university in Morocco
10th century
10th century: Fire lance in Song dynasty China, developed in the 10th century with a tube of first bamboo and later on metal that shot a weak gunpowder blast of flame and shrapnel, its earliest depiction is a painting found at Dunhuang. Fire lance is the earliest firearm in the world and one of the earliest gunpowder weapons.
10th century: Fireworks in Song dynasty China: Fireworks first appear in China during the Song Dynasty (960–1279), in the early age of gunpowder. Fireworks could be purchased from market vendors; these were made of sticks of bamboo packed with gunpowder.
10th century: Bi Sheng in Song dynasty China: invents movable printing.
11th century
11th century: Early versions of the Bessemer process are developed in China.
11th century: Endless power-transmitting chain drive by Su Song for the development an astronomical clock (the Cosmic Engine)
1088: Movable type in Song dynasty China: The first record of a movable type system is in the Dream Pool Essays, which attributes the invention of the movable type to Bi Sheng.
12th century
12th century: Ismail al-Jazari invents the elephant clock .
13th century
13th century: Rocket for military and recreational uses date back to at least 13th-century China.
13th century: The earliest form of mechanical escapement, the verge escapement in Europe.
13th century: Buttons (combined with buttonholes) as a functional fastening for closing clothes appear first in Germany.
1277: Land mine in Song dynasty China: Textual evidence suggests that the first use of a land mine in history is by a Song Dynasty brigadier general known as Lou Qianxia, who uses an 'enormous bomb' (huo pao) to kill Mongol soldiers invading Guangxi in 1277.
1286: Eyeglasses in Italy
13th century: Explosive bomb in Jin dynasty Manchuria: Explosive bombs are used in 1221 by the Jin dynasty against a Song Dynasty city. The first accounts of bombs made of cast iron shells packed with explosive gunpowder are documented in the 13th century in China and are called "thunder-crash bombs", coined during a Jin dynasty naval battle in 1231.
13th century: Hand cannon in Yuan dynasty China: The earliest hand cannon dates to the 13th century based on archaeological evidence from a Heilongjiang excavation. There is also written evidence in the Yuanshi (1370) on Li Tang, an ethnic Jurchen commander under the Yuan Dynasty who in 1288 suppresses the rebellion of the Christian prince Nayan with his "gun-soldiers" or chongzu, this being the earliest known event where this phrase is used.
13th or 14th century: Worm gear cotton gin in Peninsular India (i.e. probably under the Yadava dynasty although may also be the Vijayanagara Empire or Bahmani Sultanate).
14th century
Early to Mid 1300s: Multistage rocket in Ming dynasty China described in Huolongjing by Jiao Yu.
By at least 1326: Cannon in Ming dynasty China
14th century: Jacob's staff described by Levi ben Gerson
14th century: Naval mine in Ming dynasty China: Mentioned in the Huolongjing military manuscript written by Jiao Yu (fl. 14th to early 15th century) and Liu Bowen (1311–1375), describing naval mines used at sea or on rivers and lakes, made of wrought iron and enclosed in an ox bladder. A later model is documented in Song Yingxing's encyclopedia written in 1637.
14th Century Bidriware in the Bahmani Sultanate in India.
15th century
Early 15th century: Coil spring in Europe
15th century: Mainspring in Europe
15th century: Rifle in Europe
1420s: Brace in Flandres, Holy Roman Empire
1439: Printing press in Mainz, Germany: The printing press is invented in the Holy Roman Empire by Johannes Gutenberg before 1440, based on existing screw presses. The first confirmed record of a press appeared in a 1439 lawsuit against Gutenberg.
Mid 15th century: The Arquebus (also spelled Harquebus) is invented, possibly in Spain.
1480s: Mariner's astrolabe in Portuguese circumnavigation of Africa
16th century
16th century: Chintz in Golconda, India
1560: Floating Dry Dock in Venice, Venetian Republic
1569: Mercator Projection map created by Gerardus Mercator
1589: Stocking frame: Invented by William Lee.
1594: Backstaff: Invented by Captain John Davis.
By at least 1597: Revolver: Invented by Hans Stopler.
Modern era
17th century
1605: Newspaper (Relation): Johann Carolus in Strassburg (see also List of the oldest newspapers)
1608: Telescope: Patent applied for by Hans Lippershey. Actual inventor unknown since it seemed to already be a common item being offered by the spectacle makers in the Netherlands with Jacob Metius also applying for patent and the son of Zacharias Janssen making a claim 47 years later that his father invented it.
c. 1620: Compound microscopes, which combine an objective lens with an eyepiece to view a real image, first appear in Europe. Apparently derived from the telescope, actual inventor unknown, variously attributed to Zacharias Janssen (his son claiming it was invented in 1590), Cornelis Drebbel, and Galileo Galilei.
1630: Slide rule: invented by William Oughtred
1642: Mechanical calculator. The Pascaline is built by Blaise Pascal.
1643: Barometer: invented by Evangelista Torricelli, or possibly up to three years earlier by Gasparo Berti.
1650: Vacuum pump: Invented by Otto von Guericke.
1656: Pendulum clock: Invented by Christiaan Huygens. It was first conceptualized in 1637 by Galileo Galilei but he was unable to create a working model.
1663: Friction machine: Invented by Otto von Guericke.
1668: First functional reflecting telescope constructed by Isaac Newton.
1679: Pressure-cooker: Invented by Denis Papin.
1680: Christiaan Huygens provides the first known description of a piston engine.
1698: Thomas Savery developes a steam-powered water pump: for draining mines
18th century
1700s
c. 1709: Bartolomeo Cristofori crafts the first piano.
1709: Daniel Gabriel Fahrenheit invents the alcohol thermometer.
1710s
1712: Thomas Newcomen builds the first commercial steam engine to pump water out of mines. Newcomen's engine, unlike Thomas Savery's, uses a piston.
1730s
c. 1730: Thomas Godfrey and John Hadley independently develop the octant
1733: John Kay enables one person to operate a loom with the flying shuttle
1736: John Harrison tests his first Sea Clock, H1.
1738: Lewis Paul and John Wyatt invent the first mechanized cotton spinning machine.
1740s
1742: Benjamin Franklin invents the Franklin stove.
1745: Musschenbroek and Kleist independently develop the Leyden jar, an early form of capacitor.
1746: John Roebuck invents the lead chamber process.
1750s
1752: Benjamin Franklin invents the lightning rod.
1755: William Cullen invents the first artificial refrigeration machine.
1760s
1760: John Joseph Merlin invents the first Roller skates.
1764: James Hargreaves invents the spinning jenny.
1765: James Watt invents the improved steam engine utilizing a separate condenser.
1767: Joseph Priestley invents a method for the production of carbonated water.
1769: Nicolas-Joseph Cugnot invents the first steam-powered vehicle capable of carrying passengers, an early car.
1770s
1770: Richard Salter invents the earliest known design for a weighing scale.
1774: John Wilkinson invents his boring machine, considered by some to be the first machine tool.
1775: Jesse Ramsden invents the modern screw-cutting lathe.
1776: John Wilkinson invents a mechanical air compressor that would become the prototype for all later mechanical compressors.
1778: Robert Barron invents the first lever tumbler lock.
1780s
1780 Hyder Ali of Mysore develops the first metal-cylinder rockets.
1783: Claude de Jouffroy builds the first steamboat.
1783: Joseph-Ralf and Jacques-Étienne Montgolfier build the first manned hot air balloon.
1783: Louis-Sébastien Lenormand invents and uses the first modern parachute.
1785: Martinus van Marum is the first to use the electrolysis technique.
1786: Andrew Meikle invents the threshing machine.
1789: Edmund Cartwright invents the power loom.
1790s
1790: Thomas Saint invents the sewing machine.
1792: Claude Chappe invents the modern semaphore telegraph.
1793: Eli Whitney invents the modern cotton gin.
1795: Joseph Bramah invents the hydraulic press.
1796: Alois Senefelder invents the lithography printing technique.
1797: Samuel Bentham invents plywood.
1799: George Medhurst invents the first motorized air compressor.
1799: The first paper machine is invented by Louis-Nicolas Robert.
19th century
1800s
1800: Alessandro Volta invents the voltaic pile, an early form of battery in Italy, based on previous works by Luigi Galvani.
1802: Humphry Davy invents the arc lamp (exact date unclear; not practical as a light source until the invention of efficient electric generators).
1804: Friedrich Sertürner discovers morphine as the first active alkaloid extracted from the opium poppy plant.
1804: Joseph Marie Jacquard develops his automated Jacquard loom.
1804: Richard Trevithick invents the steam locomotive.
1804: Hanaoka Seishū creates tsūsensan, the first modern general anesthetic.
1807: Nicéphore Niépce invents an early internal combustion engine capable of doing useful work.
1807: François Isaac de Rivaz designs the first automobile powered by an internal combustion engine fuelled by hydrogen.
1807: Robert Fulton expands water transportation and trade with the workable steamboat.
1810s
1810: Nicolas Appert invents the canning process for food.
1810: Abraham-Louis Breguet creates the first wristwatch.
1811: Friedrich Koenig invents the first powered printing press, which was also the first to use a cylinder.
1812: William Reid Clanny pioneered the invention of the safety lamp which he improved in later years. Safety lamps based on Clanny's improved design were used until the adoption of electric lamps.
1814: James Fox invents the modern planing machine, though Matthew Murray of Leeds and Richard Roberts of Manchester have also been credited at times with its invention.
1816: René Laennec invents the first Stethoscope.
1816: Francis Ronalds builds the first working electric telegraph using electrostatic means.
1816: Robert Stirling invents the Stirling engine.
1817: Baron Karl von Drais invents the dandy horse, an early velocipede and precursor to the modern bicycle.
1818: Marc Isambard Brunel invents the tunnelling shield.
1820s
1822: Thomas Blanchard invents the pattern-tracing lathe (actually more like a shaper). The lathe can copy symmetrical shapes and is used for making gun stocks, and later, ax handles. The lathe's patent is in force for 42 years.
1822: Nicéphore Niépce invents Heliography, the first photographic process.
1822: Charles Babbage, considered the "father of the computer", begins building the first programmable mechanical computer.
1823: Johann Wolfgang Döbereiner invents the first lighter.
1824: Johann Nikolaus von Dreyse invents the bolt-action rifle.
1825: William Sturgeon invents the electromagnet.
1826: John Walker invents the friction match.
1826: James Sharp invents and goes on to manufacture the first practical gas stove.
1828: James Beaumont Neilson develops the hot blast process.
1828: Patrick Bell invents the reaping machine.
1828: Hungarian physicist Ányos Jedlik invents the first commutated rotary electromechanical machine with electromagnets.
1829: Louis Braille invents the Braille reading system for the blind.
1829: William Mann invents the compound air compressor.
1829: Henry Robinson Palmer is awarded a patent for corrugated galvanised iron.
1830s
1830: Edwin Budding invents the lawn mower.
1831: Michael Faraday invents a method of electromagnetic induction. It would be independently invented by Joseph Henry the following year.
1834: Moritz von Jacobi invents the first practical electric motor.
1835: Joseph Henry invents the electromechanical relay.
1837: Samuel Morse invents Morse code.
1838: Moritz von Jacobi invents electrotyping.
1839: William Otis invents the steam shovel.
1839: James Nasmyth invents the steam hammer.
1839: Edmond Becquerel invents a method for the photovoltaic effect, effectively producing the first solar cell.
1839: Charles Goodyear invents vulcanized rubber.
1839: Louis Daguerre invents daguerreotype photography.
1840s
1840: John Herschel invents the blueprint.
1841: Alexander Bain devises a printing telegraph.
1842: William Robert Grove invents the first fuel cell.
1842: John Bennet Lawes invents superphosphate, the first man-made fertilizer.
1844: Friedrich Gottlob Keller and, independently, Charles Fenerty come up with the wood pulp method of paper production.
1845: Isaac Charles Johnson invents modern Portland cement.
1846: Henri-Joseph Maus invents the tunnel boring machine.
1847: Ascanio Sobrero invents Nitroglycerin, the first explosive made that was stronger than black powder.
1848: Jonathan J. Couch invents the pneumatic drill.
1848: Linus Yale Sr. invents the first modern pin tumbler lock.
1849: Walter Hunt invents the first repeating rifle to use metallic cartridges (of his own design) and a spring-fed magazine.
1849: James B. Francis invents the Francis turbine.
1849: Walter Hunt invents the Safety pin.
1850s
1850: William Armstrong invents the hydraulic accumulator.
1851: George Jennings offers the first public flush toilets, accessible for a penny per visit, and in 1852 receives a UK patent for the single piece, free standing, earthenware, trap plumed, flushing, water-closet.
1852: Robert Bunsen is the first to use a chemical vapor deposition technique.
1852: Elisha Otis invents the safety brake elevator.
1852: Henri Giffard becomes the first person to make a manned, controlled and powered flight using a dirigible.
1853: François Coignet invents reinforced concrete.
1855: James Clerk Maxwell invents the first practical method for color photography, whether chemical or electronic.
1855: Henry Bessemer patents the Bessemer process for making steel, with improvements made by others over the following years.
1856: Alexander Parkes invents parkesine, also known as celluloid, the first man-made plastic.
1856: James Harrison produces the world's first practical ice making machine and refrigerator using the principle of vapour compression in Geelong, Australia.
1856: William Henry Perkin invents mauveine, the first synthetic dye.
1857: Heinrich Geissler invents the Geissler tube.
1859: Gaston Planté invents the lead acid battery, the first rechargeable battery.
1860s
1860: Joseph Swan produces carbon fibers.
1864: Louis Pasteur invents the pasteurization process.
1865: Carl Wilhelm Siemens and Pierre-Émile Martin invented the Siemens-Martin process for making steel.
1867: Alfred Nobel invents dynamite, the first safely manageable explosive stronger than black powder.
1867: Lucien B. Smith invents barbed wire, which Joseph F. Glidden will modify in 1874, leading to the taming of the West and the end of the cowboys.
1870s
1872: J.E.T. Woods and J. Clark invented stainless steel. Harry Brearley was the first to commercialize it.
1873: Frederick Ransome invents the rotary kiln.
1873: William Crookes, a chemist, invents the Crookes radiometer as the by-product of some chemical research.
1873: Zénobe Gramme invents the first commercial electrical generator, the Gramme machine.
1874: Gustave Trouvé invents the first metal detector.
1875: Fyodor Pirotsky invents the first electric tram near Saint Petersburg, Russia.
1876: Nicolaus August Otto invents the four-stroke cycle.
1876: Alexander Graham Bell has a patent granted for the telephone. However, other inventors before Bell had worked on the development of the telephone and the invention had several pioneers.
1877: Thomas Edison invents the first working phonograph.
1878: Henry Fleuss is granted a patent for the first practical rebreather.
1878: Lester Allan Pelton invents the Pelton wheel.
1879: Joseph Swan and Thomas Edison both patent a functional incandescent light bulb. Some two dozen inventors had experimented with electric incandescent lighting over the first three-quarters of the 19th century but never came up with a practical design. Swan's, which he had been working on since the 1860s, had a low resistance so was only suited for small installations. Edison designed a high-resistance bulb as part of a large-scale commercial electric lighting utility.
1880s
1881: Nikolay Benardos presents carbon arc welding, the first practical arc welding method.
1884: Hiram Maxim invents the recoil-operated Maxim gun, ushering in the age of semi- and fully automatic firearms.
1884: Paul Vieille invents Poudre B, the first smokeless powder for firearms.
1884: Sir Charles Parsons invents the modern steam turbine.
1884: Hungarian engineers Károly Zipernowsky, Ottó Bláthy and Miksa Déri invent the closed core high efficiency transformer and the AC parallel power distribution.
1885: John Kemp Starley invents the modern safety bicycle.
1886: Carl Gassner invents the zinc–carbon battery, the first dry cell battery, making portable electronics practical.
1886: Charles Martin Hall and independently Paul Héroult invent the Hall–Héroult process for economically producing aluminum in 1886.
1886: Karl Benz invents the first petrol or gasoline powered auto-mobile (car).
1887: Carl Josef Bayer invents the Bayer process for the production of alumina.
1887: James Blyth invents the first wind turbine used for generating electricity.
1887: John Stewart MacArthur, working in collaboration with brothers Dr. Robert and Dr. William Forrest develops the process of gold cyanidation.
1888: John J. Loud invents the ballpoint pen.
1888: Thomas Edison and William Kennedy Dickson invents Kinetoscope.
1888: Heinrich Hertz publishes a conclusive proof of James Clerk Maxwell's electromagnetic theory in experiments that also demonstrate the existence of radio waves. The effects of electromagnetic waves had been observed by many people before this but no usable theory explaining them existed until Maxwell.
1890s
1890s: Frédéric Swarts invents the first chlorofluorocarbons to be applied as refrigerant.
1890: Robert Gair would invent the pre-cut cardboard box.
1891: Whitcomb Judson invents the zipper.
1892: Léon Bouly invents the cinematograph.
1892: Thomas Ahearn invents the electric oven.
1893: Rudolf Diesel invents the diesel engine (although Herbert Akroyd Stuart had experimented with compression ignition before Diesel).
1895: Guglielmo Marconi invents a system of wireless communication using radio waves.
1895: Wilhelm Conrad Röntgen invented the first radiograph (xrays).
1898: Hans von Pechmann synthesizes polyethylene, now the most common plastic in the world.
1899: Waldemar Jungner invents the rechargeable nickel-cadmium battery (NiCd) as well as the nickel-iron electric storage battery (NiFe) and the rechargeable alkaline silver-cadmium battery (AgCd)
20th century
1900s
1900: The first Zeppelin is designed by Theodor Kober.
1901: The first motorized cleaner using suction, a powered "vacuum cleaner", is patented independently by Hubert Cecil Booth and David T. Kenney.
1903: The first successful gas turbine is invented by Ægidius Elling.
1903: Édouard Bénédictus invents laminated glass.
1903: First sustained and controlled heavier-than-air powered flight achieved by an airplane flown at Kitty Hawk, North Carolina by Orville and Wilbur Wright. See Claims to the first powered flight.
1904: The Fleming valve, the first vacuum tube and diode, is invented by John Ambrose Fleming.
1907: The first free flight of a rotary-wing aircraft is carried out by Paul Cornu.
1907: Leo Baekeland invents bakelite, the first plastic made from synthetic components.
1907 (at some time during the year), the tuyères thermopropulsives after 1945 (Maurice Roy (fr)) known as the statoreacteur a combustion subsonique (the ramjet) – R. Lorin
1908: Cellophane is invented by Jacques E. Brandenberger.
1909: Fritz Haber invents the Haber process.
1909: The first instantaneous transmission of images, or television broadcast, is carried out by Georges Rignoux and A. Fournier.
1910s
1911: The cloud chamber, the first particle detector, is invented by Charles Thomson Rees Wilson.
1912: The first commercial slot cars or more accurately model electric racing cars operating under constant power were made by Lionel (USA) and appeared in their catalogues in 1912. They drew power from a toy train rail sunk in a trough that was connected to a battery.
1912: The first use of articulated trams by Boston Elevated Railway.
1913: The Bergius process is developed by Friedrich Bergius.
1913: The Kaplan turbine is invented by Viktor Kaplan.
1915: Harry Brearley invents a process to create Martensitic stainless steel, initially labelled Rustless Steel, later marketed as Staybrite, and AISI Type 420.
1915: The first operational military tanks are designed in Great Britain and France. They are used in battle from 1916 and 1917 respectively. The designers in Great Britain are Walter Wilson and William Tritton and in France, Eugène Brillié. (Although it is known that vehicles incorporating at least some of the features of the tank were designed in a number of countries from 1903 onward, none reached a practical form.)
1916: The Czochralski process, widely used for the production of single crystal silicon, is invented by Jan Czochralski.
1917: The crystal oscillator is invented by Alexander M. Nicholson using a crystal of Rochelle Salt although his priority was disputed by Walter Guyton Cady.
1920s
1925: The Fischer–Tropsch process is developed by Franz Fischer and Hans Tropsch at the Kaiser-Wilhelm-Institut für Kohlenforschung.
1926: The Yagi-Uda Antenna or simply Yagi Antenna is invented by Shintaro Uda of Tohoku Imperial University, assisted by his colleague Hidetsugu Yagi. The Yagi Antenna was widely used during World War II. After the war they saw extensive development as home television antennas.
1926: Robert H. Goddard launches the first liquid fueled rocket.
1926: Harry Ferguson, patents the Three-point hitch equipment linkage system for tractors.
1926: John Logie Baird demonstrates the world's first live working television system.
1927: The quartz clock is invented by Warren Marrison and J.W. Horton at Bell Telephone Laboratories.
1928: Penicillin is first observed to exude antibiotic substances by Nobel laureate Alexander Fleming. Development of medicinal penicillin is attributed to a team of medics and scientists including Howard Walter Florey, Ernst Chain and Norman Heatley.
1928: Frank Whittle formally submitted his ideas for a turbo-jet engine. In October 1929, he developed his ideas further. On 16 January 1930, Whittle submitted his first patent (granted in 1932).
1928: Philo Farnsworth demonstrates the first practical electronic television to the press.
1929: The ball screw is invented by Rudolph G. Boehm.
1930s
1930: The Supersonic combusting ramjet — Frank Whittle.
1930: The Phase-contrast microscopy is invented by Frits Zernike.
1931: The electron microscope is invented by Ernst Ruska.
1933: FM radio is patented by inventor Edwin H. Armstrong.
1935: Nylon, the first fully synthetic fiber is produced by Wallace Carothers while working at DuPont.
1938: Z1, built by Konrad Zuse, is the first freely programmable computer in the world.
1938: Nuclear fission discovered in experiment by chemists Otto Hahn and Fritz Strassmann and physicists Lise Meitner and Otto Robert Frisch. The German nuclear energy project was based on this research. The Tube Alloys project and, subsequently, the Manhattan Project and the Soviet atomic bomb project were influenced by this research.
1939: G. S. Yunyev or Naum Gurvich invented the electric current defibrillator
1940s
1940: Pu-239 isotope (isotope of plutonium) a form of matter existing with the capacity for use as a destructive element (because the isotope has an exponentially increasing spontaneous fissile decay) within nuclear devices — Glenn Seaborg.
1940: John Randall and Harry Boot would develop the high power, microwave generating, cavity magnetron, later applied to commercial Radar and Microwave oven appliances.
1941: Polyester is invented by John Whinfield and James Dickson.
1942: The V-2 rocket, the world's first long range ballistic missile, developed by engineer Wernher von Braun.
1944: The non-infectious viral vaccine is perfected by Dr. Jonas Salk and Thomas Francis.
1945: The atomic bomb is developed by the Manhattan Project and swiftly deployed in August 1945 in the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effectively ending World War II.
1945: Percy Spencer, while employed at Raytheon, would patent a magnetron based microwave oven.
1946: James Martin invents the ejector seat, inspired by the death of his friend and test pilot Captain Valentine Baker in an aeroplane crash in 1942.
1947: Holography is invented by Dennis Gabor.
1947: Floyd Farris and J.B. Clark (Stanolind Oil and Gas Corporation) invents hydraulic fracturing technology.
1947: The first transistor, a bipolar point-contact transistor, is invented by John Bardeen and Walter Brattain under the supervision of William Shockley at Bell Labs.
1948: The first atomic clock is developed at the National Bureau of Standards.
1948: Basic oxygen steelmaking is developed by Robert Durrer. The vast majority of steel manufactured in the world is produced using the basic oxygen furnace; in 2000, it accounted for 60% of global steel output.
1950s
1950: Bertie the Brain, debatably the first video game, is displayed to the public at the Canadian National Exhibition.
1950: The Toroidal chamber with axial magnetic fields (the Tokamak) is developed by Igor E. Tamm and Andrei D. Sakharov.
1952: The float glass process is developed by Alastair Pilkington.
1951: First use of nuclear power to produce electricity for households in Arco, Idaho.
1952: The first thermonuclear weapon is developed.
1953: The first video tape recorder, a helical scan recorder, is invented by Norikazu Sawazaki.
1954: Invention of the solar battery by Bell Telephone scientists, Calvin Souther Fuller, Daryl Chapin and Gerald Pearson capturing the sun's power. First practical means of collecting energy from the sun and turning it into a current of electricity.
1955: The hovercraft is patented by Christopher Cockerell.
1955: The intermodal container is developed by Malcom McLean.
1956: The hard disk drive is invented by IBM.
1957: The laser and optical amplifier are invented and named by Gordon Gould and Charles Townes. The laser and optical amplifier are foundational to powering the Internet.
1957: The first personal computer used by one person and controlled by a keyboard, the IBM 610, is invented in 1957 by IBM.
1957: The first artificial satellite, Sputnik 1, is launched.
1958–59: The integrated circuit is independently invented by Jack Kilby and Robert Noyce.
1959: The MOSFET (MOS transistor) is invented by the Egyptian Mohamed Atalla and the Korean Dawon Kahng at Bell Labs. It is used in almost all modern electronic products. It was smaller, faster, more reliable and cheaper to manufacture than earlier bipolar transistors, leading to a revolution in computers, controls and communication.
1960s
1960: The first functioning laser is invented by Theodore Maiman.
1961: The first crewed spaceflight is achieved by Vostok 1.
1963: The first electronic cigarette is created by Herbert A. Gilbert. Hon Lik is often credited with its invention as he developed the modern electronic cigarette and was the first to commercialize it.
1964: Shinkansen, the first high-speed rail commercial passenger service.
1965: Kevlar is invented by Stephanie Kwolek at DuPont.
1969: ARPANET and the NPL network implement packet switching, drawing on the concepts and designs of Donald Davies, and Paul Baran.
1970s
1970s: Public-key cryptography is invented and developed by James H. Ellis, Clifford Cocks, Malcolm J. Williamson, Whitfield Diffie, Martin Hellman, Ralph Merkle, Ron Rivest, Adi Shamir, Leonard Adleman, et al.
1970: The pocket calculator is invented.
1971: The first single-chip microprocessor, the Intel 4004, is invented. Its development was led by Federico Faggin, using his silicon-gate MOS technology. This led to the personal computer (PC) revolution.
1971: The first space station, Salyut 1 is launched.
1972: The first video game console, used primarily for playing video games on a TV, is the Magnavox Odyssey.
1973: The first fiber optic communication systems were developed by Optelecom.
1973: The first commercial graphical user interface is introduced in 1973 on the Xerox Alto. The modern GUI is later popularized by the Xerox Star and Apple Lisa.
1973: The first capacitive touchscreen is developed at CERN.
1974: The Transmission Control Program is proposed by Vinton Cerf and Robert E. Kahn, building on the work of Louis Pouzin, creating the basis for the modern Internet.
1975: Altair 8800 is the spark that ignited the microcomputer revolution.
1977: Dr. Walter Gilbert and Frederick Sanger invented a new DNA sequencing method for which they won the Nobel Prize.
1977: The first self-driving car that did not rely upon rails or wires under the road is designed by the Tsukuba Mechanical Engineering Laboratory.
1978: The Global Positioning System (GPS) enters service. While not the first Satellite navigation system, it is the first to enter widespread civilian use.
1979: The first handheld game console with interchangeable game cartridges, the Microvision is released.
1979: Public dialup information, messaging and e-commerce services, were pioneered through CompuServe and RadioShack's MicroNET, and the UK's Post Office Telecommunications Prestel services.
1980s
1980: Flash memory (both NOR and NAND types) is invented by Fujio Masuoka while working for Toshiba. It is formally introduced to the public in 1984.
1981: The first reusable spacecraft, the Space Shuttle undergoes test flights ahead of full operation in 1982.
1981: Kane Kramer develops the credit card sized, IXI digital media player.
1982: A CD-ROM contains data accessible to, but not writable by, a computer for data storage and music playback. The 1985 Yellow Book standard developed by Sony and Philips adapted the format to hold any form of binary data.
1982: Direct to home satellite television transmission, with the launch of Sky One service.
1982: The first laptop computer is launched, the 8/16-bit Epson HX-20.
1983: Stereolithography is invented by Chuck Hull.
1984: The first commercially available cell phone, the DynaTAC 8000X, is created by Motorola.
1984: DNA profiling is pioneered by Alec Jeffreys.
1985: The lithium-ion battery is invented by John B. Goodenough, Rachid Yazami and Akira Yoshino. It has impacted modern consumer electronics and electric vehicles.
1989: Karlheinz Brandenburg would publish the audio compression algorithms that would be standardised as the: MPEG-1, layer 3 (mp3), and later the MPEG-2, layer 7 Advanced Audio Compression (AAC).
1989: The World Wide Web is invented by computer scientist Tim Berners-Lee.
1990s
1990: The Neo Geo AES becomes the first video game system to launch that used Memory Cards
1990: The first search engine invented was “Archie”, created by a Student at McGill in Montreal
1991: The first commercial flash-based solid-state drive is launched by SunDisk.
1991: The first sim card is developed by Munich smart-card maker Giesecke & Devrient,
1993: IBM created the first mobile app with SIMON, it had 10 bulit-in apps from Email to Calendar
1994: IBM Simon, World's first smartphone is developed by IBM.
1994: First generation of Bluetooth is developed by Ericsson Mobile. A form of data communication on short distances between electronic devices.
1994: A Tetris variant on the Hagenuk MT-2000 device becomes the first mobile game
1995: DVD is an optical disc storage format, invented and developed by Philips, Sony, Toshiba, and Panasonic in 1995. DVDs offer higher storage capacity than compact discs while having the same dimensions.
1995: Match.com launches as the first dating site ever and is the number 1 most visited dating site in the US
1995: Waiter.com launches as the first online food ordering service
1996: Ciena deploys the first commercial wave division multiplexing system in partnership with Sprint. This created the massive capacity of the internet.
1996: Mobile web was first commercially offered in Finland on The Nokia 9000 Communicator phone and it was also the first phone with texting
1997: The first weblog, a discussion or informational website, is created by Jorn Barger, later shortened to "blog" in 1999 by Peter Merholz.
1997: Bolt and Six Degrees. both become the first social media sites
1998: The first portable MP3 player is released by SaeHan Information Systems.
1999: The first digital video recorder (DVR), the TiVo, is launched by Xperi.
1999: NTT DoCoMo launches i-mode, the first integrated Online App store for mobile phones
1999: The Dreamcast launched and is the first gaming console with internet and broadband
21st century
2000s
2000: Inventor Wen-Chin Yang designed and patented the first cellphone charger
2000: Sony develops the first prototypes for the Blu-ray optical disc format. The first prototype player was released in 2004.
2000: First documented placement of Geocaching, an outdoor recreational activity, in which participants use a Global Positioning System (GPS) receiver or mobile device and other navigational techniques to hide and seek containers, took place on May 3, 2000, by Dave Ulmer of Beavercreek, Oregon.
2001: The Xbox Launches and is the first game console with internal storage
2004: First podcast, invented by Adam Curry and Dave Winer, is a program made available in digital format for download over the Internet and it usually features one or more recurring hosts engaged in a discussion about a particular topic or current event.
2005: YouTube, the first popular video-streaming site, was founded
2007: Netflix debuted the first popular video-on-demand service
2007: The Bank of Scotland develops the worlds first banking app
2007: SoundCloud, the first on-demand service to focus on music is debuted
2007: First Kindle introduced by Amazon (company) founder and CEO Jeff Bezos, who instructed the company's employees to build the world's best e-reader before Amazon's competitors could. Amazon originally used the codename Fiona for the device. This hardware evolved from the original Kindle introduced in 2007 and the Kindle DX (with its larger 9.7" screen) introduced in 2009.
2007: The term "cli-fi" was coined in 2007 or 2008 by Dan Bloom, an English teacher and former journalist. "Cli-fi" is short for "climate fiction" and describes an emerging literary genre that expresses concerns about climate change. The term has been retroactively applied to a number of works.
2008: Satoshi Nakamoto develops the first blockchain.
2009: The Zeebo is released becoming the first digital-only video game console
2010s
2010: The first solar sail based spacecraft, IKAROS.
2010: The first quantum machine
2010: The first synthetic organism, Mycoplasma laboratorium is created by the J. Craig Venter Institute.
2010: ASML releases the first prototype of an extreme ultraviolet lithography machine.
2011: Twitch, launches as the first live-streaming service.
2011: HIV treatment as prevention (HPTN 052)
2012: Discovery of the Higgs boson
2013: Cancer immunotherapy
2014: The first known "NFT", Quantum, was created by Kevin McCoy and Anil Dash in May 2014, that explicitly linked a non-fungible, tradable blockchain marker to a work of art, via on-chain metadata (enabled by Namecoin).
2015: CRISPR genome-editing method
2016: The Laser Interferometer Gravitational-Wave Observatory makes the first observation of gravitational waves, fulfilling Einstein's prediction
2017: The Nintendo Switch launches becoming the first handheld to tv hybrid
2017: Cosmic convergence: Neutron star merger (GW170817)
2018: Development cell by cell
2019: IBM launches IBM Q System One, its first integrated quantum computing system for commercial use.
2019: First black hole image released
2020s
2020: The first RNA vaccine to be approved by public health medicines regulators is co-developed by Pfizer and BioNTech for COVID-19.
2020: Artificial intelligence-assisted coding began to emerge in the early 2020s.
2022: Pfizer develops the worlds first pill for COVID
See also
Accelerating change
List of emerging technologies
List of inventors
List of years in science
Outline of prehistoric technology
Timeline of prehistory
By type
History of communication
Timeline of agriculture and food technology
Timelin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 engineering
Timeline of transportation technology
Timeline of heat engine technology
Timeline of rocket and missile technology
Timeline of motor and engine technology
Timeline of steam power
Timeline of temperature and pressure measurement technology
Timeline of mathematics
Timeline of computing
Notes
Footnotes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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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ernal links
U.S. 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s Greatest Engineering Achievements of the 20th Century Timeline
Historic
Historic inventions
Technology-related lists |
https://ko.wikipedia.org/wiki/%ED%97%AC%EB%AC%B4%ED%8A%B8%20%ED%95%A0%EB%9F%AC | 헬무트 할러 | 헬무트 할러(; 1939년 7월 21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 ~ 2012년 10월 11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는 독일의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공격수로 활약하였다. 국제 무대에서, 그는 서독을 대표로 3번의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클럽 무대에서,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 리그에서 활약하였는데, 볼로냐와 유벤투스에서 모두 이탈리아 리그 우승을 거둔 적이 있다.
클럽 경력
클럽 무대에서, 할러는 1948년부터 1962년까지 BC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활약하였고, 이후 이탈리아 무대로 건너갔는데, 당시 750,000 마르크의 이적료에 200,000 마르크의 연봉 계약을 맺었다. 당시 독일 리그 월급은 공개적으로 500마르크에 제한되어 있었는데, 1963년 분데스리가가 출범해서야 월급 상한선이 2,500 마르크로 올라갔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1962년에 서독을 대표로 FIFA 월드컵에 함께 참가했던 알버트 브륄스, 칼-하인츠 슈넬링어, 그리고 호어스트 시마니아크와 마주치게 되었다.
할러가 이탈리아에서 처음 활약한 구단은 볼로냐로,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감독의 지도 하에 1964년 리그 우승을 올랐는데, 이는 볼로냐의 23년 만의 리그 정상 등극이며, 현재까지 구단이 거둔 마지막 리그 우승이었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는 유벤투스 소속이었는데, 그는 1972년과 1973년에 우승을 거두었다. 유벤투스는 1973년에 디노 초프가 골문을 지켰고, 프란코 카우시오, 파비오 카펠로, 그리고 브라질의 주제 아우타피니와 협력하여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올라 아약스를 상대하였다. 요한 크라위프가 이끌며, 전 시즌 우승을 거둔 아약스는 결승전에서 요니 레프가 머리로 골망을 갈라 앞서나갔다. 체스트미르 비츠팔레크 감독은 49분에 할러를 빼고 로베르토 베테가를 투입했지만, 동점골이 터지지 않았다. 2년 전, 유벤투스는 1970-71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에서 빌리 브렘너의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2-2, 1-1로 비겨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우승이 좌절되기도 했다.
1973년, 그는 고향에 복귀해 아우크스부르크에 입단했는데, 당시 친정이었던 BC 아우크스부르크와 인근 숙적 TSV 슈바벤이 통합된 후 2부 리그인 레기오날리가로 승격한 새내기였다. 구단은 할러를 영입하기 위해 44,000을 지불하였고, 할러는 고정 수입을 포기하고, 급여 5% 선에서 합의를 보았다. "할러-할러-할렐루야"가 아우크스부르크의 새 응원 구호로 자리잡았다. 1973년 늦여름, 1860 뮌헨과의 올림픽 경기장 원정 경기에서 2부 리그 최다 관중 기록인 90,000명의 구경꾼을 모아 인기를 끈 것 외에도 외에도, 아우크스부르크는 남부 레기오날리가 1위를 거두었다. 승격전에서 아우크스부르크는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에 1점차로 밀려 아깝게 분데스리가 승격이 좌절되었다.
1979년, 할러는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국가대표팀 경력
1958년, 19세의 나이로 국가대표팀 신고식을 치른 할러는 1962년 칠레, 1966년 잉글랜드, 그리고 1970년 멕시코에서 열린 3번의 FIFA 월드컵에 참가하였고, 33번의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13골을 넣었다.
1962년 FIFA 월드컵에서, 할러는 서독 대표팀 주전으로 이탈리아와 비기고 스위스와 개최국 칠레를 조별 리그에서 제치고 통과했지만, 유고슬라비아와의 8강전에서 0-1로 패해 탈락하였다. 1966년 FIFA 월드컵에서는 볼프강 오베라트와 신예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서독의 중원을 맡았다. 서독은 대회 결승전에 올랐고, 할러는 선제골을 기록했지만, 개최국 잉글랜드를 상대로 2-4로 졌다. 준우승 메달을 건 것 외에도, 할러는 공인구를 가져갔는데, 30년 후 잉글랜드에 돌아가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제프 허스트에게 건냈고 승자가 공인구를 수집하는 전통이 생겼다. 9골을 기록한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우에 이어, 그는 6골을 넣어 대회 득점 2위에 이름을 올렸다. 3위를 차지한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할러는 모로코와의 조별 리그 1차전에 출전하는데 그쳤는데, 그는 후반 시작과 함께 위어겐 그라보프스키와 교체되어 나갔다. 할러는 대회 기간에 부상으로 인해 많은 시간을 출전할 수 없었다.
플레이스타일
플레이메이커 겸 골잡이로, 할러는 특출한 기술적 능력과 공격수로서의 역량의 장점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현역 시절 내내 문제가 되었던 체중 문제도 알려져 있었다. 할러는 이탈리아에서 60년대 최고의 측면 미드필더로 손꼽히는 선수로, 볼로냐의 대표적인 선수였다. 그는 "매혹적인 공몰이, 천부적인 재능, 골을 포착하는 눈, 그리고 매력"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은퇴 후
이후 할러는 아우크스부르크를 포함해 아마추어 무대에서 감독일을 했고, 패션숍을 운영하기도 했다.
사생활
2006년 12월 26일, 할러는 심각한 심장마비를 앓고 조치 후 호전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후 할러는 치매와 파킨슨병 투병 소식을 전했다. 할러는 2012년 10월 11일에 별세했다. 그는 당시 2003년에 배우자로 맞이할 당시 21세였던 3번째 아내인 쿠바의 노라이미 로드리게스 구티에레스와 동거했는데, 슬하에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다. 할러의 조카는 크리스티안 호흐슈테터인데, 그는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오랫동안 활약했으며 서독 국가대표팀 경기에 2번 출전하기도 했다.
수상
클럽
볼로냐
세리에 A: 1963–64
유벤투스
세리에 A: 1971–72, 1972–73
유러피언컵 준우승: 1972–73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준우승: 1970–71
코파 이탈리아 준우승: 1972–73
아우크스부르크
남부 레기오날리가: 1973–74
국가대표팀
서독
FIFA 월드컵 준우승: 1966
각주
외부 링크
헬무트 할러 - WorldFootball.net
1939년 출생
2012년 사망
파킨슨병으로 죽은 사람
치매로 죽은 사람
아우크스부르크 출신 스포츠인
바이에른의 축구 선수
독일의 남자 축구 선수
독일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FC 아우크스부르크의 축구 선수
유벤투스 FC의 축구 선수
볼로냐 FC 1909의 축구 선수
세리에 A의 축구 선수
2. 분데스리가의 축구 선수
레기오날리가의 축구 선수
독일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이탈리아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이탈리아에 거주한 독일인
1962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196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197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독일의 신경학적 질병으로 죽은 사람
남자 축구 공격수
서독의 남자 축구 선수 | https://en.wikipedia.org/wiki/Helmut%20Haller | Helmut Haller | Helmut Haller (; 21 July 1939 – 11 October 2012) was a German footballer who played as a forward. At international level, he represented West Germany at three World Cups. At club level, he played in both Germany and Italy, and won Italian league titles with Bologna and Juventus.
Club career
In his club career, Haller played from 1948 until 1962 for BC Augsburg, before being lured to Italy by a one off fee of 750,000 Marks and an annual salary of 200,000 Marks. Back then in Germany player salaries were officially limited to 500 Marks per month – an amount that rose to 2500 Marks after the introduction of the Bundesliga as unified first division in 1963. In Italy Haller encountered with Albert Brülls, Karl-Heinz Schnellinger and Horst Szymaniak three more German World Cup participants of 1962.
Initially Haller played for Bologna, winning in 1964 under coach Fulvio Bernardini the first Italian league title for the club in 23 years and the hitherto last in the club's history. From 1968 until 1973 he played for Juventus where he won the league in 1972 and 1973. In 1973 Juventus – with Dino Zoff in goal, Franco Causio, Fabio Capello and the Brazilian José Altafini – reached the European Champions Cup final in Belgrade against AFC Ajax. The Johan Cruijff led title holder went into the lead by a fourth minute Johnny Rep header. Haller was brought on by coach Čestmír Vycpálek in the 49th minute for Roberto Bettega, but the result stood. Two years earlier Juventus narrowly missed out in the finals of the 1970–71 Inter-Cities Fairs Cup, having to concede the title to the Billy Bremner led Leeds United after results of 2–2 and 1–1 on the away goal rule.
In 1973, he returned to his hometown and joined FC Augsburg, then newly created through a merger of his former club BC Augsburg with local rivals TSV Schwaben and just promoted to the second division Regionalliga. The club had paid just DM 44,000 for the transfer of Haller and Haller renounced a fixed salary, settling for 5% of the revenue. "Haller-Haller-Hallerluja" became the new battlecry of the team. In late summer 1973, it was not the least due to his popularity that a match in the Munich Olympic Stadium against hosts TSV 1860 attracted an audience of estimated up to 90,000, a world record for second division matches. Augsburg finished that season first in the southern division of the Regionalliga. In the promotion the club missed out on ascension to the Bundesliga by one point to Tennis Borussia Berlin.
Haller retired as player in 1979.
International career
After he made his international debut at age 19 in 1958, he played in three World Cups; his first in the 1962 World Cup held in Chile, the 1966 World Cup in England and the 1970 World Cup held in Mexico, earning a total of 33 caps and scoring 13 goals.
At the World Cup 1962, Haller was a regular of the German side that drew against Italy and overcame hosts Chile and Switzerland in the group phase, but in the quarterfinals Yugoslavia prevailed 1–0. At the World Cup 1966 he formed the West German midfield together with Wolfgang Overath and the young Franz Beckenbauer. West Germany reached the final of competition and Haller scored the opening goal of the game which Germany lost 2–4 to England. Along with his medal, Haller also got the match ball, though more than 30 years later he returned to England to present it to Geoff Hurst, who had scored a hat-trick in the contest and was therefore by tradition considered to be entitled to the ball. After Portugal's Eusébio, who scored nine goals, he was with six goals the second best marksman of the tournament. At the 1970 World Cup, where West Germany attained third place, Haller was only used in the first group match against Morocco, being replaced by Jürgen Grabowski at halftime. Haller was plagued by injury problems in the run-up to the tournament.
Style of play
Both a playmaker and goalscorer, Haller was noted for his exceptional technique and finesse as a striker, yet also for his weight problems, which troubled him throughout his career. In Italy Haller is considered one of the greatest wingers of the sixties and the defining player of Bologna. He remains famed for his "irresistible dribbling, his innate genius, his great eye for goal, his charisma."
After retirement
In later years Haller did some coaching of amateur level clubs, including FC Augsburg, and ran a fashion shop.
Personal life
On Boxing Day 2006, Haller suffered a serious heart attack and was reported to be recovering well after treatment. Later he also suffered from dementia and Parkinson's disease. Haller died on 11 October 2012. He was survived by his third wife, the native Cuban Noraimy Rodriguez Guiterrez, whom he married in 2003 when she was aged just 21, two sons and a daughter. Haller was also an uncle of Christian Hochstätter, a long-serving Borussia Mönchengladbach player and twice West German international.
Honours
Bologna
Serie A: 1963–64
Juventus
Serie A: 1971–72, 1972–73
European Cup: runner-up 1972–73
Inter-Cities Fairs Cup: runner-up 1971
Coppa Italia: runner-up 1972–73
Augsburg
Regionalliga Süd: 1973–74
Germany
FIFA World Cup: runner-up 1966, third place 1970
References
External links
1939 births
2012 deaths
Deaths from Parkinson's disease
Deaths from dementia in Germany
Neurological disease deaths in Germany
Footballers from Augsburg
West German men's footballers
German men's footballers
Men's association football forwards
Germany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1962 FIFA World Cup players
1966 FIFA World Cup players
1970 FIFA World Cup players
FC Augsburg players
Juventus FC players
BSV 07 Schwenningen players
Bologna FC 1909 players
Serie A players
2. Bundesliga players
Regionalliga players
West German expatriate men's footballers
West German expatriate sportspeople in Italy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Italy |
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C%88%A0%20%EA%B2%BD%EC%98%81 | 기술 경영 | 기술 경영(technology management)은 경쟁 우위를 만들기 위해 조직이 테크놀로지의 중요한 부분을 경영할 수 있게 하는 경영 원칙의 모임이다. 기술경영에 쓰이는 일반적인 개념은 다음과 같다:
기술전략 (조직 내 기술의 논리 또는 역할)
기술예측 (조직의 잠재적인 관련 기술의 식별. 기술 스카우팅 등을 통할 수 있음)
기술 로드맵 (기술을 비즈니스 및 시장 수요에 대응시키는 일)
기술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개발 중인 프로젝트들의 집합) 및 기술 포트폴리오 (사용 중인 기술들의 집합)
조직 내 기술 경영의 역할적 기능은 조직을 위해 특정 기술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다. 지속적인 기술 개발은 고객에게 가치가 있는 한 가치가 있으므로 조직 내 기술 경영 기능은 언제 기술 개발에 투자되어야 하고 언제 철회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요
기술 경영은 기술 제품, 프로세스, 서비스의 통합 계획, 설계, 최적화, 운영, 통제로 정의할 수 있으며, 간단히 말해 인간의 이익을 위해 기술을 사용하는 경영으로 정의할 수 있다.
Association of Technology, Management, and Applied Engineering은 기술 스펙트럼과 다양하고 복잡한 기술 시스템을 통해 인원의 관리와 관련된 분야로 기술 경영을 정의한다. 기술 경영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생산 및 운영 관리, 프로젝트 관리, 컴퓨터 애플리케이션, 품질 제어, 보안 및 건강 문제, 통계, 일반 경영 원칙의 지시를 포함한다.
주요 대학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경영대학원(Stanford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Business)
메사추세츠공과 대학교 슬론 경영대학원(MIT, Sloan Business School)
조지아 공과 대학교 쉘러 경영대학원(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Scheller Business School)
버클리 대학교 하스 경영대학원(UC Berkeley, Haas Business School)
미국 뉴욕 대학교 스턴 경영대학원(New York University, Stern Business School)
영국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얼라이언스 경영대학원(The University of Manchester, AMBS)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 저지 경영대학원(University of Cambridge, Judge)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사이드 경영대학원(University of Oxford, Said)
영국 워릭 대학교 경영대학원(Warwick University, WBS)
영국 서섹스 대학교 과학기술정책대학원(University of Sussex, SPRU)
한국
고려대학교 기술경영대학원
서강대학교 기술경영대학원
성균관대학교 기술경영대학원
서울대학교 기술경영대학원
동국대학교 기술경영대학원
연세대학교 기술경영대학원
한국과학기술원 기술경영대학원
한양대학교 기술경영대학원
기술 관리
일반적인 어의(語義)로서 기술은 생산활동에서 몇 배의 산출량(算出量)을 낳게 하는 일련의 기계의 조작(操作)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생산성(生産性)이란 개념과 직접 연결되며, 기술 즉 생산성의 향상으로 인식되고, 이 생산성의 향상이야말로 현대의 서구자본주의 선진국가가 달성한 고도성장 산업사회(産業社會)의 원동력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뜻에서 통용되는 기술의 전형적(典型的)인 예로서 우리는 1730년, 와이어트(Wyatt)에 의하여 발명된 방적기(紡績機)를 들 수 있고, 더 큰 경제적 결과를 가져다 준 것으로는 석탄 채광(採鑛)에 최초로 사용된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을 손꼽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다주는 기술은 테크니크(technique)의 뜻일 수도 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기술은 복합적인 뜻을 가지고 사용된다. 테크놀러지(technology)로 통하는 이 용어는 비단 생산방식의 개량에 국한되지 않고 신제품(新製品)의 개발에 연결되어 있다. 과학 및 다른 지식의 조직적인 응용에 의한 생산성의 증가 및 신제품의 생산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테크놀러지의 전형적인 예로서 우리는 인공위성 및 이것을 궤도에 올리는 미사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테크놀러지는 복잡하고, 그만큼 비용도 많이 든다. 하나의 신제품이 나오기까지의 연구기간도 또한 길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이 부문에서도 극단적인 분업이 절대조건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우주선을 발사하는 데 드는 연료만 하더라도 많은 전문가들은 연료만을 또한 고열(高熱)에 연소되지 않는 금속을 담당한 전문가들은 이것만을 각기 분담· 연구한다. 이렇게 전문분야 각 부문에서 이룩한 결과를 집합시킴으로써 하나의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기술관리는 통틀어 연구 개발(research and developement)이라는 용어로 집약되며, 이 연구 개발은 현대기업체의 필수조건이다. 더욱이 신제품의 수명(life cycle)이 급속도로 단축되는 오늘날에 있어서 연구 개발은 기업의 생명이기도 하다. 이 연구 개발은 선진공업국, 특히 미국에서는 기업체 내의 한 중요부소(部所)로 독립하여 관리된다.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나 듀퐁 드 네무르(Dupont de Nemour)와 같은 기업체는 이 연구개발에 대규모의 자본을 투입함으로써 신제품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기술관리가 기업체에 의하여 행해짐은 그것이 기업의 이익과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에 모든 기업체는 자체의 능력으로 이 활동을 벌일 수는 없고 타기업(他企業)으로부터 특허권을 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특히 이 연구 개발의 문제는 후진국의 경우 심각한 양상을 띠는데, 후진국에서는 선진국에 비해 기술적 격차가 큰 만큼 이를 줄여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들에서는 자체의 능력으로 이 갭을 메꿀 수 있는 기술적·재정적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선진국과의 기술적 격차는 점점 커진다. 후진국에서는 다만 합작투자(合作投資)라는 명목 아래 턴키(turn key) 방식에 의한 플랜트를 수입하는 데 그치는 실정이다. 즉 이 나라에서 절실히 필요한 기술진보는 정체상태에 있으며, 이것은 대선진국(對先進國)과의 경제적인 격차가 점점 크게 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 연구 개발은 또한 국가기관에 의하여 추진되는 경우도 있다. 대규모의 비용과 높은 수준의 과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는 기업체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설 경우가 많다. 특히 이것이 방위산업과 직접 연결될 때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에 의하여 관리된다. 미국의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NSF), 프랑스의 국립과학연구소(Centre National de Recherche Scientifique:CNRS), 영국의 과학기술정보국(Secretary of State for Education and Science), 서독의 카이저 빌헬름 게젤샤프트(Kaiser Wilhelm Gesellschaft) 등은 민간 및 정부기관의 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각 연구소간의 상호 조정을 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민간 및 정부의 연구개발 진흥정책에 따라 최근 이에 종사하는 세계 각국의 과학자·기술자 및 그 연구소의 수는 급증(急增)하였고,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학술지와 보고서의 수도 역시 급증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각 연구자가 자기에 필요한 정보를 적시에 입수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파생한 기관이 소위 연구정보센터이며, 이 센터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 그 명칭·형태 등이 다소 다르기는 하나 과학기술의 정보를 동일한 목적, 즉 필요한 수요자에게 공급해 준다는 점에서는 거의가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민간단체에 의하거나 정부기관에 속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정보활동은 물론 국가간의 교류로 발전되고 있다. 기술의 내용상 비밀이 필요한 부문은 제외하고 각국간의 과학기술의 교류는 국제문헌정보연맹(FID)·유네스코 등에 의하여 추진되는데, 이것은 연구자에게 중복연구를 피하게 하고 연구단계를 단축시키며 연구효율을 높이는 데 절대로 필요한 활동으로 간주된다.
같이 보기
기술예측
산업공학
각주
유형별 경영 | https://en.wikipedia.org/wiki/Technology%20management | Technology management | Technology management is a set of management disciplines that allows organizations in managing their technological fundamentals to create customer advantage. Typical concepts used in technology management are:
Technology strategy (a logic or role of technology in organization),
Technology forecasting (identification of possible relevant technologies for the organization, possibly through technology scouting),
Technology roadmap (mapping technologies to business and market needs), and
Technology project portfolio (a set of projects under development) and technology portfolio (a set of technologies in use).
The role of the technology management function in an organization is to understand the value of certain technology for the organization. Continuous development of technology is valuable as long as there is a value for the customer and therefore the technology management function in an organization should be able to argue when to invest on technology development and when to withdraw.
Overview
Technology management can also be defined as the integrated planning, design, optimization, operation and control of technological products, processes and services, a better definition would be the management of the use of technology for human advantage.
Technology Management was deemed an emerging field of study by the Department of Education and received a new Classification of Instructional Program (CIP) code in 2020. Technology Management education is defined as a program that prepares individuals to develop science, technical, and business skills required for management of people and systems in technology-based industries, government agencies, and non-profit organizations. Includes instruction in computer applications, general management principles, production and operations management, project management, quality control, safety and health issues, and statistics. 52.0216 2020 CIP Code
Perhaps the most authoritative input to our understanding of technology is the diffusion of innovations theory developed in the first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It suggests that all innovations follow a similar diffusion pattern – best known today in the form of an "s" curve though originally based upon the concept of a standard distribution of adopters. In broad terms the "s" curve suggests four phases of a technology life cycle – emerging, growth, mature and aging.
These four phases are coupled to increasing levels of acceptance of an innovation or, in our case a new technology. In recent times for many technologies an inverse curve – which corresponds to a declining cost per unit – has been postulated. This may not prove to be universally true though for information technology where much of the cost is in the initial phase it has been a reasonable expectation.
The second major contribution to this area is the Carnegie Mellon Capability Maturity Model. This model proposes that a series of progressive capabilities can be quantified through a set of threshold tests. These tests determine repeatability, definition, management and optimization. The model suggests that any organization has to master one level before being able to proceed to the next.
The third significant contribution comes from Gartner – the research service, it is the Hype cycle, this suggests that our modern approach to marketing technology results in the technology being over hyped in the early stages of growth. Taken together, these fundamental concepts provide a foundation for formalizing the approach to managing technology.
Mobile device management
Mobile device management (MDM) is the administrative area dealing with deploying, securing, monitoring, integrating and managing mobile devices, such as smartphones, tablets and laptops, in the workplace and other areas. The intent of MDM is to optimize the functionality and security of mobile devices within the enterprise, while simultaneously protecting the corporate network. MDM is usually implemented with the use of a third party product that has management features for particular vendors of mobile devices.
Modern Mobile Device Management products supports tablets, Windows 10 and macOS computers. The practice of using MDM to control PC is also known as unified endpoint management.
Accreditation and certification
The Association of Technology, Management, and Applied Engineering (ATMAE), accredits selected collegiate programs in technology management. An instructor or graduate of a technology management program may choose to become a Certified Technology Manager (CTM) by sitting for a rigorous exam administered by ATMAE covering production planning & control, safety, quality, and management/supervision.
ATMAE program accreditation is recognized by the Council for Higher Education Accreditation (CHEA) for accrediting technology management programs. CHEA recognizes ATMAE in the U.S. for accrediting associate, baccalaureate, and master's degree programs in technology, applied technology, engineering technology, and technology-related disciplines delivered by national or regional accredited institutions in
the United States.(2011)
See also
Technology forecasting
Innovation management
Industrial engineering
Engineering management
Dominant design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
References
Technological management
Management by type
Technology systems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B%8F%84%EC%9C%A0%EB%9F%BD%EC%A1%B0%EC%96%B4%20%EC%9D%8C%EC%9A%B4%EB%A1%A0 | 인도유럽조어 음운론 | 인도유럽조어의 음운론은 여러 인도유럽어족 언어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바탕으로 비교 재구되었다. 인도유럽조어는 문자로 기록된 바가 없으므로 음운론 재구는 히타이트어, 산스크리트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등 이른 시기에 문증된 후손 언어에서 나온 근거에 의존해야 한다.
인도유럽조어 음운론을 구성하는 추상적 요소, 즉 음소의 재구는 일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잘 확립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실제 음성학적으로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밝혀내기 힘들다. 모음, 이른바 후두음, 경구개음과 연구개음, 유성음과 유기음의 발음이 특히 그러하다.
음소 목록
전통적으로 인도유럽조어의 음소 목록은 다음과 같이 재구된다. 각 음소가 여러 후손 언어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인도유럽어족 음운 변화 문서를 참고하라.
자음
위 표에 쓰인 기호는 오늘날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들이다. 그 밖의 다양한 표기법은 아래에 설명하였다. 위첨자 는 기식을 나타내고 위첨자 는 순음화를 나타낸다. 는 국제 음성 기호에서 로 표시되는 경구개 접근음을 나타낸다. (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파열음 계열
과거에는 무성 무기음과 유기음, 유성 무기음과 유기음 등 4개의 파열음 계열을 재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무성 유기음을 파열음과 후두음의 연쇄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따라서 ‘무성음’, ‘유성음’, ‘유성 유기음’의 3개 계열만 재구하는 것이 표준이다. 그런데 이러한 체계는 어떤 후손 언어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며(산스크리트어에는 3개 계열이 모두 있지만 무성 유기음까지 모두 4개 계열이 있다), 세계의 모든 언어 중에서도 몹시 드물다. *b가 없거나 드문 것도(아래 참고) 특이하다. 또한 인도유럽조어 어근에는 무성음과 유성 유기음이 함께 나타나거나 유성음 두 개가 함께 나타나지 못한다는 제약이 있다. 이런 까닭에 어떤 학자들은 ‘유성음’이 실제로는 성문음화된 소리였고 ‘유성 유기음’은 보통의 유성음이었다고 주장한다.
성문음화가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별로 없지만 간접적인 증거는 조금 있다. 발트슬라브어파에서 드러난 빈터의 법칙이나, 게르만어파에서 무성음과 유성 유기음 계열이 모두 마찰음으로 변했지만 유성음은 파열음으로 남았던 점 등이 그렇다.
순음과 설정음
인구조어 를 통틀어 P라는 기호로 나타낸다. 가 음소로 존재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다. 는 어두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아래에 설명할 *bel- 등 몇몇 의심스러운 어근을 제외하면), 어중에 *b가 나타나는 어근들은 대체로 서쪽 어파들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인구조어에 존재했는지 의심된다.
어떤 학자들은 *b를 포함한 어근을 후대의 음운 변화의 결과로 설명하려 시도했다. 이렇게 제안된 음운 변화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ml- > *bl-: 의심스러운 어근 *bel- ‘힘’ (> 산스크리트어 bálam, 고대 그리스어 beltíōn)을 라틴어 melior의 mel-과 연결하고, *h₂ebl-/*h₂ebōl ‘사과’를 가상의 초기 형태 *h₂eml-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후자는 ‘사과’를 뜻하는 또다른 인구조어 단어인 *méh₂lom (> 히타이트어 maḫla-, 라틴어 mālum, 고대 그리스어 mēlon)이 음위전환을 겪지 않은 형태이다.
인구조어 *ph₃에서 *p는 규칙적으로 *b로 변화한다. 예를 들어 *peh₃ ‘마시다’의 현재형 중첩 어간 > *pi-ph₃> 산스크리트어 píbati.
인구조어 가 음소였다 할지라도 그 지위는 매우 주변적이었을 것이다.
표준적인 재구에서는 3개의 설정 파열음 또는 치 파열음 을 재구한다. 이를 통틀어 T라는 기호로 나타낸다.
설배음
브루크만의 《인도게르만어족 비교문법학 개요》 등 한 세기도 더 지난 전통적인 재구에서, 인구조어에는 3개의 연구개음 계열이 있었다고 재구되었다.
경구개음화 연구개음 (또는 ‘경구개음’): (나 나 로도 표기함.)
‘기본 연구개음’ (또는 ‘단순 연구개음’): .
순음화 연구개음: (로도 표기함. 위첨자 또는 는 순음화(입술 둥글리기)를 나타냄.)
이 소리들이 실제로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최근의 관점 중 하나에 따르면 ‘경구개음화 연구개음’이 실제로는 단순 연구개음 였으며 ‘기본 연구개음’은 보다 뒤쪽에서 어쩌면 구개수음 으로 발음되었지도 모른다. ‘순음화 연구개음’이 그저 ‘기본 연구개음’이 순음화된 소리였다면 로 발음되었겠지만, 로 발음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
또다른 이론에 따르면 인도유럽조어에는 기본 연구개음과 순음화 연구개음의 두 계열만 존재했으며, 경구개음화 연구개음 계열은 사템어에서 발생한 조건부 음운 변화의 결과로 생겨났다고 한다.
사템어에 속하는 언어들은 순음화 연구개음 을 기본 연구개음 계열 로 합류시켰고, 경구개음화 연구개음 은 언어에 따라 다양한 치찰 마찰음 및 파찰음으로 바꾸었다. 어떤 음운론적 환경에서는 탈구개음화가 일어나 마치 사템어에 켄툼어 단어가 나타나는 듯한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발트슬라브어파와 알바니아어에서 경구개음화 연구개음이 공명음 앞에 오는 경우, 그 공명음 뒤에 전설모음이 오지 않으면 탈구개음화되어 기본 연구개음으로 바뀌었다. 사템어에서 순음화 연구개음은 일반적으로 기본 연구개음과 구분할 수 없게 되었지만, 몇몇 단어에서는 뒤따르는 모음에 순음화의 흔적이 남기도 했다.
반면 켄툼어에 속하는 언어들은 경구개음화 연구개음 을 기본 연구개음 계열 로 합류시켰고, 순음화 연구개음 계열 은 별개로 남았다. 사템어에서 탈구개음화가 일어난 것과 비슷하게, 켄툼어에서 *w (또는 그 변이음 *u)와 이웃한 순음화 연구개음은 보콜로스 법칙에 따라 탈순음화했다.
마찰음
인구조어에 존재했음이 확실한 마찰음 음소는 뿐이다. 이 소리는 음성적으로 [s]나 [] 또는 []로 실현되었다. ‘둥지’ 따위의 단어에서는 동화를 통해 유성 변이음 로 발음되었는데, 몇몇 후손 언어에서는 독립된 음소로 발전했다. 어떤 인구조어 어근은 어두에 가 붙은 변이형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를 s-mobile이라 한다.
‘후두음’은 마찰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후두음의 음성적 실현에 관해선 합의된 바가 없다.
후두음
‘후두음’음소 는 통틀어 로 나타낸다(또는 및 로도 표기). 발음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후두음’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인도유럽어학 분야에만 표준으로 남아 있다.
후두음 음소의 실제 발음은 논란의 대상이다. 가 구강 먼 뒤쪽에서 조음된 마찰음이며 이 순음화를 수반했다는 사실 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조심스러운 주장이 있는 반면, = , = , = 또는 였음이 “사실상 확실하다”는 미하엘 마이어브뤼거와 같은 입장도 있다. 후두음 이 였다는 주장도 즐겨 인용된다 (로버르트 베이커스 등). Simon (2013)은 루위어 신성문자 기호 *19가 를 나타내며 (와 구분됨) 의 반영이라고 주장했다. 발트슬라브어파 등 어떤 어파에서는 세 후두음 음소 모두가 성문 파열음으로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자음과 자음 사이 ‘성절음’ 위치에 있는 후두음은 ‘인도유럽어 슈와’(schwa indogermanicum) 기호 로 표기하기도 한다.
공명음
음운론적으로, 인도유럽조어의 공명음은 음절핵에도 나타날 수 있고 음절핵 밖에도 나타낼 수 있는 음소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도유럽조어의 공명음은 유음·비음·활음 (혹은 ), (혹은 )이 있었으며, 통틀어 기호 R로 표기한다.
모든 공명음 음소는 성절음 변이음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이는 자음과 자음 사이, 어두에서 자음 앞에, 어말에서 자음 뒤에 나타났다. 이 변이음을 로 나타낸다. 와 는 음성학적으로 모음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음운론적으로는 성절 자음으로 취급한다.
후손 언어에의 반영
인도유럽조어의 자음은 다양한 변화를 거쳐 후손 언어들에 반영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켈트조어, 알바니아어, 발트슬라브조어, 이란조어는 유성유기음 계열 을 유성음 계열 와 합쳤다. (발트슬라브조어의 경우 이 변화는 빈터의 법칙보다 이후에 일어났다. 켈트조어의 경우 는 *gw로 반영하고 는 *b로 반영하여 둘은 서로 다른 음소가 되었다.)
게르만조어는 그림의 법칙과 베르너의 법칙을 통해 무성 파열음 계열을 무성·유성 마찰음으로, 유성음 계열을 무성음으로, 유성유기음 계열을 마찰음으로 바꾸었다.
몇몇 후손 언어는 그라스만의 법칙( > , 예: > )와 바르톨로메의 법칙( > , 예: > )에 따라 유기음의 분포를 바꾸었다.
인도유럽조어 자음을 재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언어는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게르만어이며 라틴어도 상당히 유용하다. 이 언어들은 무성·유성·유성유기음 계열을 별개로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게르만어파의 경우 베르너의 법칙과 순음화 연구개음 계열에 일어난 변화(특히 고트어 이외의 언어) 때문에 원래의 대립 중 일부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스어와 산스크리트어에 영향을 미친 그라스만의 법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장점이 있다. 라틴어도 세 파열음 계열을 별개로 유지하였지만 어두에서 유성유기음 사이의 대립이 대부분 사라졌고(를 제외한 모두가 로 변함) 어중에서도 많은 대립이 사라졌다. 그리스어는 순음화 연구개음을 재구하는 데 특별히 중요한데, 다른 언어에서는 여러 환경에서 순음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후두음을 재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언어들은 아나톨리아어파와 그리스어이다. 아나톨리아어파는 여러 연구개음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그리스어는 다른 언어에서 후두음이 사라져 버린 환경(어두 등)에 후두음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대부분의 환경에서 각각의 후두음을 다르게 반영한다(이른바 ‘삼중 반영’). 발트슬라브어파도 가끔 도움이 되는데, ‘양음(acute)’과 ‘곡절(circumflex)’ 모음의 대립에 후두음의 흔적이 남았기 때문이다. 고아베스타어는 후두음 어간 명사의 모음교체에서 나온 수많은 흔적(후두음성 모음충돌, 후두음성 기식, 후두음성 장음화 등)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지만 아베스타어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유용성이 떨어진다. 베다 산스크리트어는 같은 흔적을 보다 덜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지만 자료의 양이 많아 가끔씩 유용하게 쓰인다.
모음
인도유럽조어에 몇 개의 모음이 있었는지, 심지어 무엇이 모음이고 모음이 아닌지조차 논란의 여지가 있다. 최소한 4개의 모음소가 있었다는 데는 대부분이 동의한다. 이들 모두는 어느 정도 형태론적 교체를 보였다. 두 장모음은 단모음보다 덜 흔하게 나타났으며 특정한 형태론적 환경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강해, 보다 과거에는 길이 대립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모음 두 개(또는 일부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한 개)로 이루어진 체계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
그에 더해 표면형에서 모음 가 매우 흔했으며 성절 자음 가 존재했다. 이들은 공명 자음 이 성절음 위치에 올 때의 변이음이다. 예를 들어 가 포함된 인구조어 단어 (‘멍에’)의 어근은 동사 (‘멍에를 씌우다’)에도 나타난다. 이와 비슷하게 인구조어 (‘나무’)는 단수 속격형이 이고 복수 여격형이 였던 것으로 재구된다. 등 일부 저자는 성절음과 비성절음 간 교체를 보이는 말고도 항상 성절음으로 나타나는 별개의 음소 를 재구할 상당한 증거가 있으며, 항상 성절음인 를 재구할 증거도 약하게나마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모든 후손 언어에는 가 음소로 존재하며, 장모음이 있는 언어에는 대체로 가 존재한다. 20세기 중반까지 인구조어는 이들 모음을 모두 갖는 것으로 재구되어 왔다. 그러나 후두음 이론을 받아들인 현대의 재구들은 이 모음들이 인구조어에서 후두음 로 재구되는 소리가 변화한 결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이전에 인구조어 로 재구되었던 소리는 오늘날 로 재구되고 는 로 재구된다(*H는 임의의 후두음). 또 의 경우 다양한 기원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성절성’ (모음과 인접하지 않은 임의의 후두음)이며 또 하나는 이다. 그러나 어떤 연구자들은 독립된 음소 를 반드시 재구해야 하며 이를 후두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공명 자음은 복합적인 음절핵의 둘째 요소가 될 수 있다. 중 임의의 모음 뒤에 와서 ‘이중모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 등등)
인구조어에서 모음은 어두에 올 수 없다는 데 대다수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과거 재구에서 모음으로 시작한다고 여겨진 단어들은 오늘날 후두음으로 시작한다고 재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후두음들은 히타이트어를 제외한 후손 언어에서는 모두 사라졌다. (뒤따르는 모음에 영향을 남긴 경우는 있다.)
장모음
특정한 형태론적 환경(인도유럽조어 모음교체의 결과 등)이나 음운론적 환경(공명음으로 끝나는 명사의 단수 주격형의 마지막 음절, 시그마 아오리스트형의 어근 음절 등; 세메레니의 법칙, 스탕의 법칙 참고)에서 모음 는 그에 대응하는 장모음으로 장음화되었다. 단어의 기본형은 단모음만을 포함했으며 장모음 를 포함하는 형태는 잘 확립된 형태음운론적 규칙의 결과로 형성되었다.
초기 인도유럽조어에서 모음의 장음화는 음운론적 조건에 따른 변화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재구의 대상이 되는, 인도유럽조어가 사라지기 직전 시기에는 더 이상 모든 장모음의 존재를 음운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음운 규칙의 결과로 나타난 장모음이 유추의 과정을 거쳐, 음운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형태로까지 번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나타나는 장음 는 인도유럽조어 내의 공시적 음운 규칙인 세메레니의 법칙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만, ‘발’에 나타나는 장음 는 유추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a/
인도유럽조어의 몇몇 형태론적으로 고립된 단어에 모음 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희생’; 라틴어 daps, 고대 그리스어 dapánē, 고대 아일랜드어 dúas)이나, (‘왼쪽’; 라틴어 laevus, 고대 그리스어 laiós, 고대 교회 슬라브어 lěvъ) 등이 그 예이다. 의 음소로서의 지위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Beekes는 “따라서 인도유럽조어에 음소 가 존재했다는 근거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의 제자 알렉산더 루보츠키도 같은 결론을 내린다.
히타이트어 자료의 발견과 후두음 이론의 발전을 통해, 이전 재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의 사례를 각각 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일부 인도유럽어학자가 주장하는 바대로 인도유럽조어에 라는 음소가 존재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박을 제시할 수 있다. 모음 는 다른 모음들과 달리 모음교체에 참여하지 않고, 접미사와 굴절어미에 나타나지 않고, 매우 제한된 위치에만 나타나며(주로 어두 의 뒤인데, 특히 그 실제 발음이 구개수음 이었을 경우 그에 동화된 결과일 수 있다), 가 재구되는 단어들의 반영은 소수의 인도유럽어족 언어로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수염’은 서부와 북부 어파로 국한된다. 따라서 그 유래가 후기 인도유럽조어 방언의 특징이며 따라서 비교 재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설명하거나, 가 존재하는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셈조어 *θawru > 인구조어 (‘오록스’)와 같은 단어가 있다.
그러나 만프레트 마이어호퍼와 같은 학자들은 와 가 와는 별개의 음소로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이 음소는 (‘흰색’)이나 (‘아버지’) 따위의 어근에 있었다고 하는데, 각각의 히타이트어 반영을 통해 후두음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 𒀠𒉺𒀸 al-pa-aš, ‘구름’, 𒀜𒋫𒀸 at-ta-aš, ‘아버지’)
후손 언어에의 반영
고대 그리스어는 인구조어의 원래 모음 체계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어, 어떤 음절에서든 모음의 변화가 별로 없다. 그러나 등 몇몇 자음의 탈락 때문에 종종 보상적 장음화나 모음충돌로 인한 변화가 일어나 재구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산스크리트어와 아베스타어는 를 단일한 모음 로 합쳤고, 장모음에서도 이에 대응하는 합류가 일어났다. 하지만 인구조어의 모음 길이 구분을 (특히 모음교체에서) 그리스어보다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그리스어와 같은 자음 탈락으로 인한 어려움도 없다. 또한 브루크만의 법칙을 통해 를 재구할 수 있는 경우가 많고, 선행 연구개음의 구개음화를 통해 를 재구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게르만어파는 장·단모음 와 를 합치고, 첫 음절을 제외한 환경에서 와 를 합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고트어의 경우) 인구조어 모음을 재구하는 데 중요하다. 이와 비슷하게 발트슬라브어파도 단모음 와 를 합쳤고 그 중 슬라브어파는 장모음 와 를 합쳤다.
아나톨리아어파와 토하라어 자료는 보수적이기 때문에 중요성이 크지만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히 토하라어는 복잡하고 광범위한 모음 변화를 겪었다.
이탈리아어파와 켈트어파는 일방적인 모음 합류를 겪지 않았지만 광범위한 모음 변화를 겪어 (특히 켈트어파와 상고 라틴어의 극단적인 모음 약화) 유용성이 떨어진다. 알바니아어와 아르메니아어가 가장 유용성이 떨어지는데, 문증된 시기가 늦으며 다른 인도유럽 어파에서 많은 어휘를 차용했고 복잡하고 잘 이해되지 못한 모음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발트슬라브조어는 게르만조어와 마찬가지로 > 의 변화를 겪은 것을 제외하면 인구조어 단모음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환경에서는 빈터의 법칙에 의해 와 의 구분이 장음화된 형태로 남았다고 주장된 바 있다. 그 이후에 초기 슬라브조어는 와 를 합쳤지만 발트어파는 둘의 구분을 유지했다. 또한 일부 발트슬라브어의 악센트 구분을 통해, 인구조어 이후 단계의 장모음이 인구조어에서도 장모음이었는지 아니면 후두음 앞의 보상적 장음화로 일어난 것인지 구별할 수 있다.
강세
인구조어는 자유 음정강세언어로서, 단어의 어떤 음절에든 강세가 올 수 있었고 굴절 패러다임 상에서 강세의 위치가 달라지기도 했다. 예컨대 동사의 단수형과 복수형 간에, 또는 명사의 주격·대격과 기타 격들 간에 강세의 위치가 다를 수 있었다. 강세의 위치는 모음교체, 특히 특히 일반급 모음(/e/과 /o/)와 영급 모음(모음의 탈락) 사이의 교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모음어간 명사·동사(어근과 어미 사이에 일반적으로 /e/나 /o/인 ‘어간모음’이 나타나는 단어들)은 강세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었고, 단어에 따라 그 위치는 어근이나 어미가 될 수 있었다. 이 단어들은 패러다임 내에 모음교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센트와 모음교체는 여전히 연관이 있었다. 예를 들어 어근에 강세가 오는 모음어간 동사는 어근에 e급 모음교체가 있는 경향이 있었고, 어미에 강세가 오는 것들은 어근에 영급 모음교체가 있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무모음어간 명사·동사는 대체로 강세의 위치가 유동적이었다. 이러한 단어들은 어근에 완전급 모음과 강세가 오는 강형(strong form; 예컨대 동사의 능동태 단수형, 명사의 주격·대격형) 및 어근에 영급 모음이 오고 어미에 강세가 오는 약형(weak form; 예컨대 동사의 능동태 단수형 및 중간태, 명사의 사격) 사이의 교체를 보였다. 또 ‘나르텐 어간’(Narten stem)이라 불리는 또다른 명사·동사들은 이와 달리 장음급 모음과 완전급 모음 사이의 교체를 보였고 강세는 대체로 어근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
인구조어의 강세가 가장 잘 보존된 언어는 베다 산스크리트어와 (명사의 경우) 고대 그리스어이다. 또한 일부 발트슬라브어파 언어(라트비아어, 리투아니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 등)의 악센트 패턴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또 게르만어파의 베르너의 법칙에 끼친 영향 등 등 몇몇 인도유럽어족 언어에도 간접적으로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탈리아어파나 켈트어파 등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현대 그리스어와 발트슬라브어 및 (어느 정도는) 아이슬란드어를 제외한 현대 인도유럽어에는 인구조어 강세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인도유럽조어 | https://en.wikipedia.org/wiki/Proto-Indo-European%20phonology | Proto-Indo-European phonology | The phonology of the Proto-Indo-European language (PIE) has been reconstructed by linguists, based on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among current and extinct Indo-European languages. Because PIE was not written, linguists must rely on the evidence of its earliest attested descendants, such as Hittite, Sanskrit, Ancient Greek, and Latin, to reconstruct its phonology.
The reconstruction of abstract units of PIE phonological systems (i.e. segments, or phonemes in traditional phonology) is mostly uncontroversial, although areas of dispute remain. Their phonetic interpretation is harder to establish; this pertains especially to the vowels, the so-called laryngeals, the palatal and plain velars and the voiced and voiced aspirated stops.
Phonemic inventory
Proto-Indo-European is reconstructed to have used the following phonemes. Note that the phonemes are marked with asterisks to show that they are from a reconstructed language. See the article on Indo-European sound laws for a summary of how these phonemes reflected in the various Indo-European languages.
Consonants
The table gives the most common notation in modern publications; variant transcriptions are given below. Raised stands for aspiration, and raised for labialization. The corresponds to the palatal semivowel whose IPA transcription is (and not to IPA ).
Stop series
Former reconstructions involved series of four stops: voiceless unaspirated and aspirated, and voiced unaspirated and aspirated: *t, *tʰ, *d, *dʰ. The voiceless aspirated stops, however, came to be reinterpreted as sequences of stop and laryngeal and so the standard reconstruction now includes series of only three, with the traditional phonetic descriptions of voiceless, voiced and voiced aspirated. However, such a tripartite system is not found in any descendant language (Sanskrit has a fourfold distinction, including a voiceless aspirated series), and it is typologically rare across attested languages. The absence or rarity of *b (see below) is also unusual. Additionally, Proto-Indo-European roots have a constraint that forbids roots from mixing voiceless and voiced aspirate stops or from containing two voiced stops. All that has led some scholars to propose an alternative theory of the PIE stop system, replacing the voiced stops with glottalized and the voiced aspirated stops with plain voiced. Direct evidence for glottalization is limited, but there is some indirect evidence, including Winter's law in Balto-Slavic as well as the parallel development of voiceless consonants and voiced aspirated consonants in Germanic: both became fricatives and glottalized (plain voiced in the earlier theory) consonants remained stops.
Labials and coronals
PIE are grouped with the cover symbol P. The phonemic status of is disputed: it seems not to appear as an initial consonant (except in a few dubious roots such as *bel-, noted below), while reconstructed roots with internal *b are usually restricted to Western branches, casting doubt on their validity for PIE.
Some have attempted to explain away the few roots with *b as a result of later phonological developments. Suggested such developments include
*ml- > *bl-, connecting the dubious root *bel- 'power, strength' (> Sanskrit bálam, Ancient Greek beltíōn) with mel- in Latin melior, and *h₂ebl-/*h₂ebōl 'apple' with a hypothetical earlier form *h₂eml-, which is in unmetathesized form attested in another reconstructible PIE word for apple, *méh₂lom (> Hittite maḫla-, Latin mālum, Ancient Greek mēlon).
In PIE *ph₃ the *p regularly gives *b; for example, the reduplicated present stem of *peh₃- 'to drink' > *pi-ph₃- > Sanskrit píbati.
At best, PIE remains a highly marginal phoneme.
The standard reconstruction identifies three coronal, or dental, stops: . They are symbolically grouped with the cover symbol T.
Dorsals
According to the traditional reconstruction, such as the one laid out in Brugmann's Grundriß der vergleichenden Grammatik der indogermanischen Sprachen more than a century ago, three series of velars are reconstructed for PIE:
"Palatovelars" (or simply "palatals"), (also transcribed or or .
"Plain velars" (or "pure velars"), .
Labiovelars, (also transcribed ). The raised or stands for labialization (lip rounding) accompanying the velar articulation.
The actual pronunciation of these sounds in PIE is not certain. One current idea is that the "palatovelars" were in fact simple velars, i.e. , while the "plain velars" were pronounced farther back, perhaps as uvular consonants, i.e. . If the labiovelars were just labialized forms of the "plain velars", they would then have been pronounced but the pronunciation of the labiovelars as would still be possible in uvular theory, if the satem languages first shifted the "palatovelars" and then later merged the "plain velars" and "labiovelars". See for more support of this theory.
Another theory is that there may have been only two series (plain velar and labiovelar) in PIE, with the palatalized velars arising originally as a conditioned sound change in satem languages. See .
The satem languages merged the labiovelars with the plain velar series , while the palatovelars became sibilant fricatives or affricates of various types, depending on the individual language. In some phonological conditions, depalatalization occurred, yielding what appears to be a centum reflex in a satem language. For example, in Balto-Slavic and Albanian, palatovelars were depalatalized before resonants unless the latter were followed by a front vowel. The reflexes of the labiovelars are generally indistinguishable from those of the plain velars in satem languages, but there are some words where the lost labialization has left a trace, such as by u-coloring the following vowel.
The centum group of languages, on the other hand, merged the palatovelars with the plain velar series , while the labiovelars were kept distinct. Analogous to the depalatalization of the satem languages, the centum languages show delabialisation of labiovelars when adjacent to *w (or its allophone *u), according to a rule known as the boukólos rule.
Fricatives
The only certain PIE fricative phoneme was a strident sound, whose phonetic realization could range from [s] or to palatalized or . It had a voiced allophone that emerged by assimilation in words such as ('nest'), and which later became phonemicized in some daughter languages. Some PIE roots have variants with appearing initially: such is called s-mobile.
The "laryngeals" may have been fricatives, but there is no consensus as to their phonetic realization.
Laryngeals
The phonemes (or and ), marked with cover symbol (also denoting "unknown laryngeal"), stand for three "laryngeal" phonemes. The term laryngeal as a phonetic description is largely obsolete, retained only because its usage has become standard in the field.
The phonetic values of the laryngeal phonemes are disputable; various suggestions for their exact phonetic value have been made, ranging from cautious claims that all that can be said with certainty is that represented a fricative pronounced far back in the mouth, and that exhibited lip-rounding up to more definite proposals; e.g. Meier-Brügger writes that realizations of = , = and = or "are in all probability accurate". Another commonly cited speculation for is (e.g. Beekes). Simon (2013) has argued that the Hieroglyphic Luwian sign *19 stood for (distinct from ) and represented the reflex of . It is possible, however, that all three laryngeals ultimately fell together as a glottal stop in some languages. Evidence for this development in Balto-Slavic comes from the eventual development of post-vocalic laryngeals into a register distinction commonly described as "acute" (vs. "circumflex" register on long vocalics not originally closed by a laryngeal) and marked in some fashion on all long syllables, whether stressed or not; furthermore, in some circumstances original acute register is reflected by a "broken tone" (i.e. glottalized vowel) in modern Latvian.
The schwa indogermanicum symbol is sometimes used for a laryngeal between consonants, in a "syllabic" position.
Sonorants
In a phonological sense, sonorants in Proto-Indo-European were those segments that could appear both in the syllable nucleus (i.e. they could be syllabic) and out of it (i.e. they could be non-syllabic). PIE sonorants are the liquids, nasals and glides: more specifically, (or ) are non-labial sonorants, grouped with the cover symbol R, while labial sonorants (or ), are marked with the cover symbol M.
All of them had allophones in a syllabic position, which is generally between consonants, word-initially before consonants and word-finally after a consonant. They are marked as . Even though and were phonetically certainly vowels, phonologically they were syllabic sonorants.
Reflexes
Some of the changes undergone by the PIE consonants in daughter languages are the following:
Proto-Celtic, Albanian, Proto-Balto-Slavic and Proto-Iranian merged the voiced aspirated series with the plain voiced series . (In Proto-Balto-Slavic this postdated Winter's law. Proto-Celtic retains the distinction between and – the former became while the latter became .)
Proto-Germanic underwent Grimm's law and Verner's law, changing voiceless stops into voiceless or voiced fricatives, devoicing unaspirated voiced stops, and fricativizing and deaspirating voiced aspirates.
Grassmann's law ( > , e.g. > ) and Bartholomae's law ( > , e.g. > ) describe the behaviour of aspirates in particular contexts in some early daughter languages.
Sanskrit, Greek, and Germanic, along with Latin to some extent, are the most important for reconstructing PIE consonants, as all of these languages keep the three series of stops (voiceless, voiced and voiced-aspirated) separate. In Germanic, Verner's law and changes to labiovelars (especially outside of Gothic) obscure some of the original distinctions; but on the other hand, Germanic is not subject to the dissimilations of Grassmann's law, which affects both Greek and Sanskrit. Latin also keeps the three series separate, but mostly obscures the distinctions among voiced-aspirated consonants in initial position (all except become ) and collapses many distinctions in medial position. Greek is of particular importance for reconstructing labiovelars, as other languages tend to delabialize them in many positions.
Anatolian and Greek are the most important languages for reconstructing the laryngeals. Anatolian directly preserves many laryngeals, while Greek preserves traces of laryngeals in positions (e.g. at the beginning of a word) where they disappear in many other languages, and reflects each laryngeal different from the others (the so-called triple reflex) in most contexts. Balto-Slavic languages are sometimes valuable in reconstructing laryngeals since they are relatively directly represented in the distinction between "acute" and "circumflex" vowels. Old Avestan faithfully preserves numerous relics (e.g. laryngeal hiatus, laryngeal aspiration, laryngeal lengthening) triggered by ablaut alternations in laryngeal-stem nouns, but the paucity of the Old Avestan corpus prevents it from being more useful. Vedic Sanskrit preserves the same relics rather less faithfully, but in greater quantity, making it sometimes useful.
Vowels
It is disputed how many vowels Proto-Indo-European has or even what counts as a "vowel" in the language. It is generally agreed that at least four vowel segments existed, which are typically denoted as and All of them are morphologically conditioned to varying extents. The two long vowels are less common than the short vowels, and their morphological conditioning is especially strong, suggesting that at an earlier stage there may not have been a length opposition, and a system with as few as two vowels (or even only one vowel, according to some researchers) may have existed.
In addition, the surface vowels and were extremely common, and syllabic sonorants existed. All of them alternated in a syllabic position with sonorant consonants For example, the root of the PIE word ('yoke') with a also appears in the verb ('to yoke, harness, join') with Similarly, the PIE word ('tree, wood') is reconstructed with genitive singular and dative plural Some authors (e.g. ) have argued that there is substantial evidence for reconstructing a non-alternating phoneme in addition to an alternating phoneme as well as weaker evidence for a non-alternating phoneme
Furthermore, all the daughter languages have a segment and those with long vowels generally have long . Until the mid-20th century, PIE was reconstructed with all of those vowels. Modern versions incorporating the laryngeal theory, however, tend to view the vowels as later developments of sounds that should be reconstructed in PIE as laryngeals . For example, what used to be reconstructed as PIE is now reconstructed as ; are now reconstructed as , *H representing any laryngeal; and has various origins, among which are a "syllabic" (any laryngeal not adjacent to a vowel) or an next to the "a-coloring" laryngeal . (Though they may have phonetically contained the vowel in spoken PIE, it would be an allophone of not an independent phoneme.) Some researchers, however, have argued that an independent phoneme *a must be reconstructed, and it cannot be traced back to any laryngeal.
Any sonorant consonant can comprise the second part of a complex syllable nucleus; all can form diphthongs with any of the vowels (such as etc.).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PIE did not allow vowels word-initially; the vowel-initial words in earlier reconstructions are now usually reconstructed as beginning with one of the three laryngeals; they disappeared in all daughter languages except Hittite before a vowel (after coloring it, if possible).
Lengthened vowels
In particular morphological (such as a result of Proto-Indo-European ablaut) and phonological conditions (like in the last syllable of nominative singular of a noun ending on sonorant, in root syllables in the sigmatic aorist, etc.; compare Szemerényi's law, Stang's law) vowels and would lengthen, yielding respective lengthened-grade variants. The basic lexical forms of words contained therefore only short vowels; forms with long vowels, and appeared from well-established morphophonological rules.
Lengthening of vowels may have been a phonologically-conditioned change in Early Proto-Indo-European, but at the period just before the end of Proto-Indo-European, which is usually reconstructed, it is no longer possible to predict the appearance of all long vowels phonologically, as the phonologically-justified resulting long vowels have begun to spread analogically to other forms without being phonologically justified. The prosodically-long in 'father' results by the application of Szemerényi's law, a synchronic phonological rule that operated within PIE, but prosodically-long in 'foot' was analogically levelled.
/a/
It is possible that Proto-Indo-European had a few morphologically-isolated words with the vowel 'sacrifice' (Latin daps, Ancient Greek dapánē, Old Irish dúas) or appearing as a first part of a diphthong 'left' (Latin laevus, Ancient Greek laiós, OCS lěvъ). The phonemic status of *a has been fiercely disputed; Beekes concludes: "There are thus no grounds for PIE phoneme "; his former student, Alexander Lubotsky, reaches the same conclusion.
After the discovery of Hittite and the development of the laryngeal theory, almost every instance of previous could be reduced to the vowel preceded or followed by the laryngeal (rendering the previously reconstructed short and long respectively). Against the possibility of PIE phoneme still today held by some Indo-Europeanists, the following can be said: vowel does not participate in ablaut alternations (it does not alternate with other vowels, as the "real" PIE vowels do), it makes no appearance in suffixes and endings, it appears in a very confined set of positions (usually after initial which could be the result of that phoneme being a-coloring, particularly likely if it was uvular ), and the reflexes of words upon which is reconstructed are usually confined only to a few Indo-European languages. For example, *bʰardʰéh₂ 'beard,' is confined to the western and northern daughter families. That makes it possible to ascribe it to some late PIE dialectalism or of expressive character (like the interjection 'alas') and so is not suitable for comparative analysis, or they are argued to have been borrowed from some other language which had phonemic (like Proto-Semitic *θawru > PIE ('aurochs')).
However, others, like Manfred Mayrhofer, argue that and phonemes existed independently of . This phoneme appears to be present in reconstructions such as ("white"), or ("father"), where the absence of a laryngeal is suggested by the respective Hittite descendants; 𒀠𒉺𒀸 (al-pa-aš, "cloud") and 𒀜𒋫𒀸 (at-ta-aš, "father").
Reflexes
Ancient Greek reflects the original PIE vowel system most faithfully, with few changes to PIE vowels in any syllable; but its loss of certain consonants, especially and often triggered a compensatory lengthening or contraction of vowels in hiatus, which can complicate reconstruction.
Sanskrit and Avestan merge and into a single vowel (with a corresponding merger in the long vowels) but reflect PIE length differences (especially from the ablaut) even more faithfully than Greek, and they do not have the same issues with consonant loss as Greek. Furthermore, can often be reconstructed by Brugmann's law and by its palatalization of a preceding velar (see Proto-Indo-Iranian language).
Germanic languages show a merger of long and short and as well as the merger of and in non-initial syllables, but (especially in the case of Gothic) they are still important for reconstructing PIE vowels. Balto-Slavic languages have a similar merger of short and and Slavic languages a merger of long and
Evidence from Anatolian and Tocharian can be significant because of their conservatism but are often difficult to interpret; Tocharian, especially, has complex and far-reaching vowel innovations.
Italic languages and Celtic languages do not unilaterally merge any vowels but have such far-reaching vowel changes (especially in Celtic and the extreme vowel reduction of early Latin) that they are somewhat less useful. Albanian and Armenian are the least useful, as they are attested relatively late, have borrowed heavily from other Indo-European languages and have complex and poorly understood vowel changes.
In Proto-Balto-Slavic, short PIE vowels were preserved, with the change of > as in Proto-Germanic. A separate reflex of the original or is, however, argued to have been retained in some environments as a lengthened vowel because of Winter's law. Subsequently, Early Proto-Slavic merged and which were retained in the Baltic languages. Additionally, accentual differences in some Balto-Slavic languages indicate whether the post-PIE long vowel originated from a genuine PIE lengthened grade or is a result of compensatory lengthening before a laryngeal.
Accent
PIE had a free pitch accent, which could appear on any syllable and whose position often varied among different members of a paradigm (e.g. between singular and plural of a verbal paradigm, or between nominative/accusative and oblique cases of a nominal paradigm). The location of the pitch accent is closely associated with ablaut variations, especially between normal-grade vowels (/e/ and /o/) and zero-grade vowels (i.e. lack of a vowel).
Generally, thematic nouns and verbs (those with a "thematic vowel" between root and ending, usually /e/ or /o/) had a fixed accent, which (depending on the particular noun or verb) could be either on the root or the ending. These words also had no ablaut variations within their paradigms. (However, accent and ablaut were still associated; for example, thematic verbs with root accent tended to have e-grade ablaut in the root, while those ending accent tended to have zero-grade ablaut in the root.) On the other hand, athematic nouns and verbs usually had mobile accent, with varied between strong forms, with root accent and full grade in the root (e.g. the singular active of verbs, and the nominative and accusative of nouns), and weak forms, with ending accent and zero grade in the root (e.g. the plural active and all forms of the middle of verbs, and the oblique cases of nouns). Some nouns and verbs, on the other hand, had a different pattern, with ablaut variation between lengthened and full grade and mostly fixed accent on the root; these are termed Narten stems. Additional patterns exist for both nouns and verbs. For example, some nouns (so-called acrostatic nouns, one of the oldest classes of noun) have fixed accent on the root, with ablaut variation between o-grade and e-grade, while hysterodynamic nouns have zero-grade root with a mobile accent that varies between suffix and ending, with corresponding ablaut variations in the suffix.
The accent is best preserved in Vedic Sanskrit and (in the case of nouns) Ancient Greek. It is also reflected to some extent in the accentual patterns of the Balto-Slavic languages (e.g. Latvian, Lithuanian and Serbo-Croatian). It is indirectly attested in some phenomena in other PIE languages, especially the Verner's law variations in the Germanic languages. In other languages (e.g. the Italic languages and Celtic languages) it was lost without a trace. Other than in Modern Greek, the Balto-Slavic languages and (to some extent) Icelandic, few traces of the PIE accent remain in any modern languages.
Phonological rules
A number of phonological rules can be reconstructed for Proto-Indo-European. Some of them are disputed to be valid for "PIE proper," and are claimed to be later innovations in some of the daughter branches. Some of these laws are:
Szemerényi's law
Szemerényi's law deleted word-final s or h₂ when preceded by a sonorant and a vowel, triggering compensatory lengthening of the vowel: -VRs, -VRh₂ > VːR. For example:
*ph₂tér-s 'father' > *ph₂tḗr > Ancient Greek patḗr, Sanskrit pitā́.
This rule was no longer productive in late PIE, and many potential examples were restored by analogy. For example, the genitive singular of neuter nouns in -men- is reconstructed as -mén-s rather than -mḗn. It was grammaticalised for the nominative singulars of nouns ending in a sonorant, as well as the nominoaccusative of neuter collectives. By analogy, several nouns ending in other consonants also acquired a long vowel in the nominative singular, but retained the -s ending where possible, e.g. *pṓd-s, *dyḗw-s.
Stang's law
Stang's law affects sequences of final consonants, much like Szemerényi's law, but the result is to delete the second-last consonant rather than the final one. Specifically, w is deleted when between a vowel and a final m, again with compensatory lengthening: Vwm > *Vːm.
*dyéw-m 'sky' (accusative singular) > *dyḗm > Sanskrit dyā́m, Latin diem.
*gʷow-m 'cattle' (acc. sg.) > *gʷṓm > Sanskrit gā́m.
Some linguists include an additional rule to delete h₂ before final m: *Vh₂m > *Vːm.
Avoidance of geminates
PIE generally disallowed two of the same consonant to appear next to each other. Various rules were employed in order to eliminate such sequences.
When two of the same sonorant or *s appeared in sequence and were preceded by a vowel, one of the two was deleted. Additionally, if the sequence was word-final, the preceding vowel received compensatory lengthening.
*h₁és-si 'thou art' > *h₁ési > Sanskrit asi, Proto-Slavic *esi.
*ném-mn̥ 'gift' > *némn̥ > Old Irish neim.
*h₂éws-os-s 'dawn' > *h₂éwsōs > Ancient Greek ēṓs.
*dóm-m̥ 'house' (acc. sg.) > *dṓm.
In a sequence of dental stops, an epenthetic *s was inserted between them.
'eateth' > > Hittite ezzi.
This rule has been preserved in Hittite where cluster *tst is spelled as z (pronounced as [ts]). The cluster was often simplified to -ss- in the later descendants (Latin and Germanic among others). Sanskrit does not have the rule (Bartholomae's law takes precedence instead), but it does occur in Iranian.
'eateth' > Sanskrit átti
> Sanskrit buddhá, but Avestan busta.
If a sonorant followed a dental sequence, one of the dentals was deleted. The evidence is conflicting on which dental was deleted.
*sed-tlo- 'seat' > (second dental deleted) *sedlo- > Gothic sitls, Latin sella, Ancient Greek sedlon.
*méd-tro- 'measure' > (first dental deleted) *métro- > Ancient Greek métron.
*h₁éd-tro- 'nourishment' > (first dental deleted) *h₁etro- > Sanskrit átra.
Siebs' law
Siebs' law is related to the feature of s-mobile: whenever it is added to a root that begins with a voiced or aspirated stop, that stop is devoiced. If the stop was aspirated, it might retain its aspiration in some branches. For example:
> Latin fragor, but > > Sanskrit sphūrjati
Thorn clusters
A thorn cluster is any sequence of a dental stop followed by a velar stop. In the IE branches other than Anatolian and Tocharian, thorn clusters undergo metathesis, and in many, the dental also assibilates. For example, for the noun *dʰéǵʰ-ōm, genitive *dʰǵʰ-m-és, Hittite has tēkan, tagnās, dagān and Tocharian A tkaṃ, tkan-, but these forms appear in Sanskrit kṣā́ḥ and Ancient Greek as khthṓn. Sanskrit has assibilation of the cluster *kt to kṣ, while Greek has metathesis alone.
The following cases illustrate some possible outcomes of the metathesis:
'bear' > Hittite ḫartaggas /ḫartkas/, but Latin ursus, Ancient Greek árktos, Sanskrit ṛ́kṣas.
'decaying, decline, ruin' > Ancient Greek phthísis, Sanskrit kṣítis, perhaps Latin sitis
Metathetized and unmetathetized forms survive in different ablaut grades of the root * ('burn' whence also English day) in Sanskrit, ('is being burnt') < * and ('burns') < *, and the root * ('beget, bring forth') in Ancient Greek, ('had begoten') < * and ('begets') < * (perfect vs. present) .
Thorn clusters presented a problem in the reconstruction of some cognate sets in which Indo-Iranian sibilants in clusters with dorsals exceptionally correspond to coronal stops in certain other branches (particularly the Hellenic languages). 'Bear' and 'decaying' above are examples; another is Sanskrit tákṣan 'artisan' vs. Greek téktōn 'carpenter'. As was the case with the laryngeal theory, these cognate sets were first noted prior to the connection of Anatolian and Tocharian to PIE, and early reconstructions posited a new series of consonants to explain these correspondences. Brugmann 1897's systematic explanation augmented the PIE consonant system with a series of interdentals (nowhere directly attested) appearing only in clusters with dorsals, *kþ *kʰþʰ *gð *gʰðʰ. The use of the letter thorn led to the name "thorn cluster" for these groups.
Once discovered, Anatolian and Tocharian evidence suggested that the original form of the thorn clusters was, in fact, *TK, so that the development outside Anatolian and Tocharian involved a metathesis. The conventional notations *þ *ð *ðʰ for the second elements of these metathesised clusters are still found, and some, including Fortson, continue to hold to the view that interdental fricatives were involved at some stage of PIE. An alternative interpretation (e.g. Vennemann 1989, Schindler 1991 (informally and unpublished)) identifies these segments as alveolar affricates . In this view, thorn clusters developed as TK > TsK > KTs and then variously in daughter languages; this has the advantage that the first change can be identified with the dental assibilation rule above, which is then broadened in application to affrication of dental stops before any stops. Melchert has interpreted the Cuneiform Luwian īnzagan- 'inhumation', probably [ind͡zɡan], from * 'in the earth', as preserving the intermediate stage of this process.
Laryngeal deletion rules
Once the laryngeal theory was developed, and the rules for sound change of laryngeals worked out, it was clear that there were a number of exceptions to the rules, in particular with regard to "syllabic" laryngeals (former "schwa indogermanicum") that occurred in non-initial syllables. It was long suggested that such syllabic laryngeals were simply deleted in particular of the daughters; this is based especially on the PIE word * "daughter", which appears in a number of branches (e.g. Germanic, Balto-Slavic) with no vowel in place of expected /a/ for "syllabic" /h₂/ (cf. English "daughter", Gothic daúhtar). With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role of ablaut, however, and a clearer understanding of which roots did and did not have laryngeals in them, it became apparent that this suggestion cannot be correct. In particular, there are some cases where syllabic laryngeals in medial syllables delete in most or all daughter languages, and other cases where they do not delete even in Germanic and/or Balto-Slavic.
This has led to the more recent idea that PIE had a number of synchronic "laryngeal deletion" rules, where syllabic laryngeals in particular contexts were deleted even in the protolanguage. In the case of *, for example, it appears that PIE had an alternation between a "strong" stem * and a "weak" stem *, where a deletion rule eliminated the laryngeal in the latter context but not the former one. Forms in daughter languages with the laryngeal (Ancient Greek thugátēr, Sanskrit duhitṛ) or without the laryngeal (Gothic dauhtar, Lithuanian duktė̃) are due to analogical generalization of one or the other protoforms.
This is a new area, and as a result, there is no consensus on the number and nature of the deletion rules. A wide variety of rules have been proposed; Ringe (2006) identifies the following three as the most likely candidates (where C=any consonant, V=any vowel, H=any laryngeal, R=any resonant):
A laryngeal in the sequence *oRHC was dropped. Example: *tórmos ('borehole') from *terh₁- "bore" (cf. Gk tórmos 'socket', OE þearm 'intestine'). This seems to have operated particularly in the thematic optative suffix *-oy-h₁-, which was reduced to *-oy- in most forms.
A laryngeal in the sequence *VCHy was dropped. Examples: *wérye- ('say' present tense) from *werh₁- (cf. Homeric Greek eírei '[he] says', not *eréei); *h₂érye- ('plow' present tense) from *h₂erh₃- ('plow' cf. Lith. ãria '[he] plows', not *ária). See Pinault's law.
A laryngeal in the sequence *CH.CC was dropped, where a syllable boundary follows the laryngeal (i.e. the following two consonants are capable of occurring at the start of a word, as in *tr- but not *rt-). An example is the weak stem * given above, compared to the strong stem *.
It seems unlikely that this is a correct and complete description of the actual phonological rules underlying laryngeal deletion. These rules do not account for all the potential cases of laryngeal deletion (hence the many other rules that have been proposed); for example, the laryngeal in the desiderative suffixes *-h₁s- and *-h₁sy- appears to delete after an obstruent but not a resonant. In any case,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when a particular laryngeal loss is due to a protolanguage rule versus an instance of later analogy. In addition, as synchronic phonological rules the set of above rules is more complicated than what is expected from a cross-linguistic standpoint, suggesting that some of the rules may have already been "morphologized" (incorporated into the morphology of certain constructions, such as the o-grade noun-forming rule or the rule forming y-presents); the above-mentioned laryngeal deletion in the desiderative suffixes may be an example of such morphologization.
Phonotactics
Roots
Proto-Indo-European roots have the syllable structure (C)CVC(C), where C is any consonant, and V is any vowel or syllabic consonant. An *s- or laryngeal (H) may precede the initial consonant. Roots which appear to be VC- are actually HVC- (e.g. *h₁es-, "to be") and roots that appear to be CV- are CVH- (e.g. *steh₂-, "to stand"). In some cases, however, presence of a laryngeal before apparent VC- roots cannot be proven, especially for those with initial *h₁-. PIE most likely could not have *r- alone in the onset of a root's syllable (apparent occurrences were *Hr-). Roots which ended in laryngeals are sometimes called disyllabic roots, as descendants in later languages would yield a disyllabic root, such as *ḱerh₂- "to mix", which later became kera in Greek. In PIE itself, though, roots were always monosyllabic. Roots usually followed the sonority hierarchy, thus *ḱret- could possibly be a root, but *ḱetr- could not. There are also restrictions that govern what consonants can occur in a root; a root cannot have two (or more) voiced consonants (e.g. *gerd- is impossible), and root cannot have both unvoiced and aspirated consonants (e.g. *gʰet- is impossible), except for when the root starts with *s- (e.g. *steygʰ-, "to march, to ascend").
Suffixes
Nominal suffixes almost always have the syllable structure -VC- or -CVC-. More complex formations are possible, usually having no (ablauting) vowel (e.g. *-tuh₂t-), but are quite rare. Suffixes with two consonants following the vowel always ended in *-t (e.g. *-ent-, *-went-).
Endings
Nominal case endings almost always have the forms -(C)(V)C or -(C)V, with most of the exceptions occurring in the plural (e.g. *óHom). Verb endings usually have the form -(C)CV (e.g. *-mi).
Ablaut
The Indo-European ablaut is a system of apophony (i.e. variations in the vowels of related words, or different inflections of the same word) in the Proto-Indo-European language. This was used in numerous morphological processes, usually being secondary to a word's inflectional ending. It is the most common source of apophony in Indo-European languages today.
Proto-Indo-European vowels had 5 different grades, or forms, they could be in:
If a syllable had plain *e, it is termed "e-grade" or "full-grade", and if a syllable had *ē, it is termed "lengthened e-grade"; likewise if a syllable had *o, it is termed "o-grade", and if a syllable had *ō, it is termed "lengthened o-grade". When a syllable had no vowel at all, it is termed "zero-grade" (sometimes written "∅-grade"). The vowels *u and *i do not alternate in this way, and thus are often referred to as "non-ablauting" or "not ablauting", sometimes even not being referred to as vowels at all.
See also
Indo-European sound laws
Proto-Indo-European accent
Citations
References
Further reading
glottothèque – Ancient Indo-European Grammars online, an online collection of introductory videos to Ancient Indo-European languages produced by the University of Göttingen
Phonology
Indo-European phonologies |
https://ko.wikipedia.org/wiki/%EC%97%AC%ED%98%B8%EC%99%80%20%EB%AC%B8%EC%84%9C | 여호와 문서 | 여호와 문서(Jahwist, Yahwist; J 문서)는 신명기 문서, 제사장 문서와 함께 모세오경의 출처로 널리 인정되는 문서 중 하나이다. 여호와 문서의 실존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되고 있는데, 심지어 유럽의 학자들 중 다수는 이 문서가 독립적인 문서로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문서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며, 구성 연대는 바빌론 유수기(기원전 597-539년)이나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한다. 여호와 문서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 ,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문서의 특징에서 기인하였다.
배경
현대의 성서비평학자들은 모세오경을 여러개의 출처로 구분하는 것에 동의했지만, 각 출처가 본문 내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합의는 난항을 겪고 있다. 문서설이 20세기의 대부분을 지배한 가설이라지만, 이 가설에 대한 동의는 최근에 와서 깨지기 시작했다. 문서설의 지지자들은 개정자들에게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는데, 문서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개정자들이 단순히 문서들을 조합한 것으로 볼 수 없을정도로 많은 본문들을 첨가했다고 주장한다.
문서설의 단순한 형태는 문서설 지지자들에게도 비판을 받아왔다. 이 사람들은 J문서와 E문서가 과거에 JE문서로 합쳐져 더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되었거나, E문서가 J문서의 일부로 존재했다고 주장했고, 결국 문서설이 정정되었다.
특징
J문서에서 여호와는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고(창 3:8; 11:5; 17:7), 정신적으로도 의인화되어 등장한다. 정신적 의인화의 사례로 첫째는 아브라함과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협상하는 모습이며, 둘째는 출애굽시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이 약하므로 모세의 자손을 세우시겠다고 하셨다가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서 돌이킨' 사건이다.
J 문서는 특별히 유다 왕국의 입장에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웃이자 적국인 에돔, 예루살렘 등 유다의 도시, 다윗 가문의 정통성 등에 대한 서술에서 특히 그렇다. 또 다른 이스라엘의 지파들에 대해 특별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인 세겜이 원주민들을 대량학살한 결과로 얻어졌다고 주장하는 부분(창세기 34장)이 바로 그러한 부분이다.
마이클 D. 코간(Michael D. Coogan)은 J문서가 세개의 주제를 반복적으로 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다음이 그것들이다.
인간과 땅의 관계
J문서의 독특한 점은 인간과 땅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주제는 창세기 2장 4절에서 3장 24절 사이에 등장하는데, 첫 번째 인간이 흙(히브리어로 아다마)에서 취해졌으므로 아담이라 불리게 된다. 처음에 인간은 땅과 조화롭게 지냈는데,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이 관계가 파탄나게 된다. 창세기 3장 17-19절에서 땅은 저주를 받게 되어 인간은 힘써 일해야만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고, 인간은 죽어 땅과 다시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이 주제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도 등장하는데, 창세기 4장 11절에서 카인은 살인 후에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게된다. 창세기 5장 29절에서 노아는 인간과 땅의 관계를 회복시키리라는 어른들의 기대를 받았는데, 후에 창세기 9장 20절에서 농군(공동번역, a man of soil)이라고도 묘사된다. 그러나 노아가 술취한 모습은 여전히 땅이 저주를 받아 인간과 땅의 관계가 여전히 저주받은 상태로 놓여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J 문서는 이 외에도 여러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인간의 타락과 땅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신성과 인성의 구분
J문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신성과 인성의 구분이다. 창세기 3장 22절에서 기록되듯 인간은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게 되니, 생명나무열매까지 따먹어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 주제는 창세기 6장 1-4절에서도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자 그들의 자손의 수명을 백이십년으로 제한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주제는 창세기 11장 1-9절에서 등장하는데, 인간들이 하늘에 닿고자 바벨탑을 세우려고 하자 그들의 언어를 다르게하고 땅 위에 흩어버린다.
인간 타락의 과정
J문서의 세번째 주제는 인간이 계속 타락해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보기에 "참 좋게" 창조하였는데, 모든 생물이 풀을 먹고 서로를 해치지 않았다. 하지만 하와가 불순종을 저지르고,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며, 인간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차 대홍수로 이를 쓸어버리게 된다. 타락은 대홍수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는 흠이 있는 이 세계를 용납하였다.
연대
고전적인 문서설의 주장자인 19세기 독일의 학자인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J문서의 연대를 이스라엘의 왕정기로 모호하게 추정하였다. 1938년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J문서를 솔로몬의 시대인 기원전 950년경으로 추정하였는데, 이 문서의 설립 의도는 솔로몬의 부왕인 다윗에 의해 세워진 통일왕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Hans Heinrich Schmid)의 연구논문인 《여호와 문서라고 하는 것 (Der sogenannte Jahwist)》(1976)에서 J 문서가 8세기와 7세기에 쓰여진 예언서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7세기 이후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대부분의 이론은 J 문서의 연대를 더 늦춰 바빌론 유수기나 그 이후(기원전 6-5세기)로 추정한다.
모세오경에서
다음은 학계에서 인정하는 성경의 기록 중 J 문서를 출처로 가진다고 여겨지는 내용들이다.
창세기
여호와 문서는 창세기 2장 4절의 창조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창세기 1장은 P 문서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이 이야기는 에덴동산 이야기, 카인과 아벨, 카인의 후손 (아담의 후손은 P 문서로 간주한다), 대홍수 (P 문서와 섞여있다고 간주한다), 노아의 후손과 바벨탑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브라함 이전의 이 첫 열한장을 두고 원역사라고도 부르는데, J 문서와 P 문서가 비슷한 분량으로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여호와 문서는 나머지 창세기의 큰 부분을 기여했는데,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출애굽기
성서비평학자들은 출애굽기의 얼마만큼이 J와 E의 기여를 받았는지에 대해 논쟁중인데, E 문서로 보이는 출애굽기 3장에서도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다. J 문서는 출애굽기 1-5장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E 문서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창세기 1-15장에서 어디까지가 J 문서이고, E 문서인지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P 문서에서 온 부분은 굉장히 쉽게 구분된다.
J 문서는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한 기적과 만나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려준것에 대한 고유한 증언을 담고 있다. 이후 출애굽기에서 등장하는 J 문서의 기사는 의식법 십계명이 전부로, 법률에 크게 초점을 두고있지는 않다.
레위기
정말 대부분의 학자들은 레위기의 거의 대부분이 P 문서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민수기
J 문서는 민수기 10장-14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은 시나이반도를 떠나 정탐꾼들을 가나안에 파견한 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게 되는데, 여호와는 여기에 분노하여 이 민족이 다음 40년동안 광야를 떠돌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J 문서는 민수기 16장에서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 기사로 이어지는데, P 문서의 내용인 고라의 반란 기사와 조합되어 쓰여져 있다. 이 외에도 21장에서 24장까지의 내용 중 놋 뱀, 발람의 이야기(프리드만은 이를 E 문서로 간주한다)를 거쳐 바알브올의 사건의 첫번째 구절까지가 J 문서의 내용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신명기
신명기의 대부분은 요시야의 개혁기에 쓰여졌다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다. 그러나 신명기 문서가 모세오경의 일부로 편입될 때 모세의 사망 기사가 민수기 끝부분에서 신명기로 넘겨졌을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의 이야기들 중 하나가 J 문서를 출처로 가질 것이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같이 보기
엘로힘 문서
신명기 문서
제사장 문서
노트
각주
외부 링크
The Jahwist source isolated, at wikiversity
문서설
야훼 | https://en.wikipedia.org/wiki/Jahwist | Jahwist | The Jahwist, or Yahwist, often abbreviated J, is one of the most widely recognized sources of the Pentateuch (Torah), together with the Deuteronomist, the Priestly source and the Elohist. The existence of the Jahwist is somewhat controversial, with a number of scholars, especially in Europe, denying that it ever existed as a coherent independent document. Nevertheless, many scholars do assume its existence. The Jahwist is so named because of its characteristic use of the term Yahweh (German: Jahwe; Hebrew: ) for God.
Background
Modern scholars agree that separate sources underlie the Pentateuch, but there is much disagreement on how these sources were used by the authors to write the first five books of the Bible. The explanation called the documentary hypothesis dominated much of the 20th century, but the consensus surrounding this hypothesis has now broken down. Its critics suggest that contemporary upholders tend to give a much larger role to the redactors, who are now seen as adding much material of their own rather than as simply passive combiners of documents.
The simple form of the documentary hypothesis has come under criticism from within its own constituents as well. The most notable revision in recent decades has been to suggest that the individual E and J documents are irrecoverable altogether, major parts of them having been scrapped by the first JE redactor; or that the E document was never independent at all, but rather is a part of the J document.
Characteristics
In J, Yahweh is an anthropomorphic figure both physically (, , ) and mentally (such as when Abraham bargains with Yahweh for the fate of Sodom and Gomorrah, or when, during the exodus, Yahweh, incensed by the Israelites' lack of faith, threatens to destroy them all and raise Moses' descendants instead but "relented and did not bring on his people the disaster he had threatened" when dissuaded by Moses).
J has a particular fascination for traditions concerning Judah, including its relationship with its rival and neighbor, Edom; its focus on Judahite cities such as Jerusalem; and its support of the legitimacy of the Davidic monarchy. J is also critical of the other tribes of Israel, for example, by suggesting that the Northern Kingdom's capital of Shechem was captured via a massacre of the original inhabitants ().
Michael D. Coogan suggests three recurring themes in the Jahwist tradition: the relationship between humans and soil, separation between humans and God, and progressive human corruption:
Relationship between humans and soil
J is unique in emphasizing a close relationship between humans and soil. This motif is first found in when "the first human is called Adam because he is taken from the soil [Adamah in Hebrew]." Initially, man lives in harmony with the soil. After man eats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however, the relationship is marred. In Yahweh God curses the soil and man will toil in order to eat from it. Humans will return to the soil at death as described in . The motif is furthered in the story of Cain and Abel. Cain is a tiller of the soil (Adamah), and after the murder, Cain is cursed from the ground . The bond between man and the soil is, seemingly, restored with Noah. He is described as a man of the soil and is described as the one who will bring relief from the toil of agriculture . Noah's drunkenness also alludes to the link between humans and the soil or plant/food the soil produces and corruption. In the end, J repeatedly shows a connection between human corruption and the soil.
The separation between the divine and human
One of the recurring themes of J in Genesis is the boundary between the divine and human realms. In , by eating the forbidden fruit, man and woman become like gods and are banished from the Garden of Eden, preventing them from retaining their immortality and full divinity. This theme is also seen in in the sexual union of the sons of God with human women: Yahweh declares this a violation of the separation and limits the life span of their offspring. Lastly, this theme continues in in the story of the Tower of Babel in which Yahweh confuses mankind's language to prevent them from understanding each other and approaching divinity.
Progressive human corruption
A third theme in the Jahwist is the increase of human corruption. God creates a world that is "very good", one in which all creatures are vegetarian and violence is unknown, but Eve's disobedience is followed by Cain's murder of his brother Abel, until Yahweh sees that the whole Earth is filled with corruption and resolves to destroy it with the Flood. Corruption does not cease after the Flood, but God accepts that his creation is flawed.
Date
Julius Wellhausen, the 19th century German scholar responsible for the classical form of the documentary hypothesis, did not attempt to date J more precisely than the monarchical period of Israel's history. In 1938, Gerhard von Rad placed J at the court of Solomon, c. 950 BCE, and argued that his purpose in writing was to provide a theological justification for the unified state created by Solomon's father, David. This was generally accepted until a crucial 1976 study by H. H. Schmid, Der sogenannte Jahwist ("The So-called Yahwist"), argued that J knew the prophetic books of the 8th and 7th centuries BCE, while the prophets did not know the traditions of the Torah, meaning J could not be earlier than the 7th century. A minority of scholars place J even later, in the exilic and/or post-exilic period (6th–5th centuries BCE).
Scope
The following is a record of the stories in the Bible that are generally accepted by the wider academic community as having been written by the J source:
Genesis
The Jahwist begins with the creation story at (the creation story at Genesis 1 is from P), this is followed by the Garden of Eden story, Cain and Abel, Cain's descendants, the Nephilim, a flood story (tightly intertwined with a parallel account from P), Noah's descendants, the incest incident in Noah's tent from Genesis 6, the Table of Nations, and the Tower of Babel. These chapters make up the so-called Primeval History, the story of mankind prior to Abraham, and J and P provide roughly equal amounts of material. The Jahwist provides the bulk of the remainder of Genesis, the material concerning Abraham, Isaac, Jacob and Joseph.
Those following the classical documentary hypothesis today describe the J text spanning Genesis 2:4 to Genesis 35 with the end of the renaming of Jacob as Israel and the completion of the patriarchs of the twelve tribes. The Joseph narrative seems to be an addition from a northern "E" narrative due to the more ethereal, pro-active, and prophetic nature of God compared to the reactive and anthropomorphic God of the J text. The latest additions of the P text frame the J narratives. P text "glue" can be perceived in Genesis 1 (framing the book), Genesis 5 recounts Genesis 1 and provides a characteristic priestly lineage detail for Adam and, amongst other locations, Genesis 35, bridging the J text patriarchal narratives to the "E" Joseph narrative with more lineage details assumed important to post-exilic authors for the purpose of rebuilding the nation in the second temple period.
Exodus
Scholars argue regarding how much of Exodus is attributable to J and how much to E, as beginning in the E source also refers to God as Yahweh. J provides much of the material of but is closely intertwined with E. Thus,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what portion of is J and what is E; however, it is easy to see the parallel P strand, which also gives an account of Israel's bondage and the Exodus miracles of its own.
After leaving Egypt, J gives its own account of releasing water from a rock and God raining Manna upon the Israelites. Thereafter, there is almost no J material in Exodus, except J's account of the Ten Commandments, also known as the Ritual Decalogue. J is generally not focused on law.
Leviticus
The vast majority of scholars attribute almost the entirety of Leviticus to P.
Numbers
J begins with , the departure from Sinai, the story of the spies who are afraid of the giants in Canaan, and the refusal of the Israelites to enter the Promised Land—which then brings on the wrath of Yahweh, who condemns them to wander in the wilderness for the next forty years. J resumes at chapter 16, the story of the rebellion of Dathan and Abiram, which was spliced together with the account of Korah's rebellion from P by the Redactor. It is generally also believed that J provides large portions of chapters 21 to 24, covering the story of the bronze serpent, Balaam and his talking ass (although Friedman attributes this to E), and finally ending with the first verses of the Heresy of Baal Peor.
Deuteronomy
The majority of Deuteronomy was composed during the era of Josiah's reforms by the Deuteronomist, or D, writer. However, when Deuteronomy was incorporated into the completed Pentateuch by the Redactor, the events of Moses's death were moved from the end of Numbers to Deuteronomy. Thus, one of the accounts of Moses's death in Deuteronomy is attributable to J, although scholars debate which verses this includes.
See also
Elohist
Deuteronomist
Priestly source
The Book of J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The Jahwist source isolated, at wikiversity
Documentary hypothesis
Yahweh |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C%B6%A9%EC%84%A4 | 보충설 | 보충설(supplementary hypothesis)은 모세오경이 기존에 존재하던 문서들이 일련의 직접적 가감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는 성서학 이론이다. 독립적인 완전한 이야기들이 후에 조합되어 모세오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초기의 문서설이 수정된 이론이다.
보충설은 문서설의 오류를 보완하고자 제안되어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거쳐 발전되었으며, 1970년에 존 반 세터즈, 루돌프 렌드토프,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의 저작들이 출판되면서 주류 학설로 부상하였다. 쿠글러(Kugler)와 하틴(Hartin)은 책 《An Introduction to the Bible》에서 "존 반 세터즈의 저작은 보충설의 부활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 세터즈의 보충설 요약은 "모세오경의 세가지 원천 또는 문학적 층위"를 인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가지 원천은 여호와 문서(J), 제사장 문서(P), 신명기 문서(D)를 의미한다. 세터즈는 이 세가지 문서를 시대순으로 DJP로 나열하였다.
신명기 문서(D)는 대략 기원전 700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여호와 문서(J)는 바빌론 유수기인 대략 기원전 600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제사장 문서(P)는 유수 후기인 대략 기원전 400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보충설이 유일한 문서설의 보완 가설은 아니지만,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현재 가장 중요한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가설 중 하나이다.
역사적 상황
문서설 지지자들이 모세오경의 연대를 기원전 10세기에서 7세기 사이로 비정하였다면, 보충설 지지자들은 좀 더 이후인 7세기에서 5세기 사이로 비정하고 있다. 이렇게 연대를 늦춘 가장 주요한 이유는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기원전 13세기에 가나안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성경에만 의존한 추정이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서 활동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성경에 이름이 등장하는 모든 장소들에서 발굴작업을 했는데, 훨씬 후인 7세기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고고학적 증거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7세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뚜렷한 활동양상이 없다면, 모세오경의 수립은 기원전 7세기 이후로 비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고고학적 발견들은 현대 문서설 지지자들의 주장보다 보충설 지지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문서설과의 차이점들
문서설을 지지하는 대표적 인물인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모세오경이 네 개의 독립적이고 온전한 이야기들이 편집자에 의해 융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문서설은 반 세터즈가 정리한 바와 같이, 크게 다음의 세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엘로힘 문서(E)의 존재여부
보충설은 문서설에서 독립적이고 온전한 네 문서중 하나로 주장하는 온전한 엘로힘 문서(E)의 존재를 거부한다. 대신 구전이나 파피루스의 형태로 전해져오던 기록들의 내용이 여호와 문서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J 문서가 다수의 초기 전승들을 수집한 결과물이지, 문서설 지지자들의 말처럼 엘로힘 문서와 여호와 문서의 여러명의 저자들이 직접 기록한 두개의 독립적 문서가 존재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보충설은 J 문서와 E 문서가 기원전 6세기에 형성된 하나의 단일 문서(J 또는 JE문서라 한다)라고 주장한다.
문서들의 연대순
보충설은 신명기 문서(D)가 모든 문서의 원천이며 7세기 말엽에 쓰여진 가장 오래된 문서라고 주장하며, 여호와 문서(J)는 유수기인 기원전 540년 경에, 제사장 문서(P)는 유수 후기인 기원전 400년 경에 쓰여졌다고 본다.
마르틴 노트와 같은 초기 모세오경 학자들은 신명기가 기원전 6세기의 한 저자가 바빌론 유수 이전의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8년에 프랭크 무어 크로스는 신명기가 실제로는 요시아의 개혁을 지지하기 위해 기원전 7세기경에 쓰여진 원 신명기 문서(Dtr1)를 노트의 주장처럼 기원전 6세기의 한 저자가 개정하며 바빌론 유수가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주제를 포함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이중편집(dual-redactor) 이론은 오늘날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이다. 반 세터즈 역시 이 이론에 동조하는데, "신명기는 . . . 오래된 중심핵을 후대에 확장시킨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문서설은 여호와 문서(J)가 기원전 10세기에 쓰여졌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보충설은 유수기인 기원전 6세기에 쓰여졌다고 말한다. 이는 대부분 1970년대에 수행된 연구들에 기반한다.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는 1976년 그의 논문에서 여호와 문서(J)가 기원전 8-7세기 경의 종교적 저작물들에 감동되어 쓰여진 문서임을 논증하였다. 반 세터즈는 여호와 문서(J)가 "일부는 문학적 형태로, 나머지는 민간 설화의 형태로 전해져오던 파편들"을 사용해 민수기 문서(D)위에 신학적 창조 이야기를 확장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유수 후기 이전에 신명기 문서(D)와 여호와 문서(J)로부터 하나의 신학적 저작(DJ)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반 세터즈는 제사장 문서(P)가 여호와 문서(J)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문서가 아닌, 여호와 문서에 종속적인 문서였음을 논증하였다. 따라서 만일 J 문서가 유수기의 문서라면 P 문서는 기원전 5세기경, 즉 유수 이후인 제 2 성전기에 쓰여진 것이어야만 한다.
정리하자면, 보충설은 신명기 문서를 가장 먼저로(DJP), 문서설은 좀 더 이후의 순서로(JEDP) 배치하는 것이 두 이론의 연대순 차이이다.
여호와 문서와 제사장 문서의 독립성
문서설은 네 개의 독립적이고 온전한 문서들을 주장하는 반면, 반 세터즈는 보충설에는 "후대에 형성된 문서인 J와 P 사이에 독립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 대신 초기의 저작에 직접적인 첨가가 이루어진 형태로 간주한다"고 말한다. 보충설은 신명기 문서만이 독립적으로 형성된 문서이고, 여호와 문서는 신명기문서에 "고해성사식 교정"을 통해 바빌론 유수가 오게 된 신학적 배경을 설명하는 문서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보충설은 제사장 문서(P) 역시 종속적인 문서라고 주장하는데, 반 세터즈는 P 문서가 "더 큰 여호와 문서(J)의 맥락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며 제사장 문서의 저자들이 J 문서의 교정자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보충설은 교정자의 존재 없이도 모세오경의 통일성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반 세터즈는 "처음 하나 이후로 독립적인 문서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교정자를 필요가 사라진다. 현재의 문서설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다수의 교정자에 의한 정교한 시스템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각주
성서학
문서설 | https://en.wikipedia.org/wiki/Supplementary%20hypothesis | Supplementary hypothesis | In biblical studies,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proposes that the Pentateuch (the first five books of the Bible) was derived from a series of direct additions to an existing corpus of work. It serves as a revision to the earlier documentary hypothesis, which proposed that independent and complete narratives were later combined by redactors to create the Pentateuch.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was developed over the 19th and 20th centuries, primarily deriving from a dissatisfaction with the adequacy of the documentary hypothesis, and came to a head in the 1970s with the publication of works by John Van Seters, Rolf Rendtorff, and Hans Heinrich Schmid. In their book, An Introduction to the Bible, Kugler and Hartin argue that "the work of John Van Seters best reflects the revival of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Van Seters' summation of the hypothesis accepts "three sources or literary strata within the Pentateuch," which have come to be known as the Yahwist (J), the Priestly Writer (P), and the Deuteronomist (D). Van Seters ordered the sources chronologically as DJP and clarifies that he does not view the (J) and (P) sources as independent documents but as direct additions:
the Deuteronomist source (D) was likely written c. seventh century BCE, and influenced the composition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from the Book of Joshua to 2 Kings) in the early phase of the Babylonian captivity.
the Yahwist source (J) was likely added c. 540 BCE in the late phase of the Babylonian captivity, influencing the stories from the Genesis creation narrative to the death of Moses (Book of Genesis to the Book of Exodus and the Book of Numbers).
the Priestly source (P) was likely added c. 400 BCE in the Second Temple period.
While the hypothesis is not the only revision of the documentary hypothesis to be made, it is one of the few at the forefront of Pentateuch studies and has been suggested by many scholars.
Historical context
While documentarians originally placed the authorship of the Pentateuch in the 10th to the 6th centuries BCE,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places the authorship of the Pentateuch later in the 7th to 5th centuries. A major driver of this reassessment has been the evolving understanding of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early Israelites. Biblical estimates put the earliest activity of the Israelites in Canaan in the 13th century, with Joshua's conquest.
The archeological findings have caused some recent Pentateuch scholars to reject earlier documentarian claims of 10th-century authorship, in favor of later authorship, as reflected in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Major divergences from the documentary hypothesis
Julius Wellhausen, the leading proponent of the documentary hypothesis, proposed that the Pentateuch is the amalgamation of four independent and complete narratives which were combined by redactors.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as outlined by Van Seters, differs from it in three major ways:
The existence of the Elohist (E) source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denies the existence of an extensive Elohist (E) source, one of the four independent sources described in the documentary hypothesis. Instead, it describes the Yahwist as having borrowed from an array of written and oral traditions, combining them into the J source. It proposes that because J is compiled from many earlier traditions and stories, documentarians mistook the compilation as having multiple authors: the Yahwist (J) and the Elohist (E). Instead,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proposes that what documentarians considered J and E are in fact a single source (some use J, some use JE), likely written in the 6th century BCE.
The chronology of the sources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proposes that the Deuteronomist (D) was the original, and earliest, Pentateuch writer, having been written at the end of the seventh century, and ascribes the Jahwist (J) to the exilic (c. 540BCE) and the Priestly (P) to the post-exilic (c. 400BCE) periods.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argues that the Deuteronomist (D) source is of the seventh century BCE. Early Pentateuch scholars, most notably Martin Noth, argued that the Deuteronomist (D) was a single sixth century author explaining the events preceding the Babylonian exile theologically. In 1968 Frank Moore Cross suggested that Deuteronomist (D) actually originated from "dual-redactors," with the original Deuteronomist (Dtr1) being a seventh century author supporting Josiah's reforms, and Noth's later sixth century Deuteronomist (Dtr2) revising the earlier work, imbuing it with themes of punishment for the sinful as to explain the Babylonian exile. This "dual-redactor" view is likely the most common held among scholars today; Van Seters affirmed this view arguing that both the emphasis on seventh century reform and on sixth century exile shows that "Deuteronomy ... consists of an older nucleus with later expansions."
While the documentary hypothesis held that the Yahwist (J) was likely of the 10th century,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puts it much later, in the 6th century, during the exilic period. That reassessment was made largely because of research conducted in the 1970s. A 1976 study by Hans Heinrich Schmid demonstrated that the Yahwist (J) was aware of earlier religious writings of the 8th and 7th centuries BCE, refuting the original assessment of J as a work of the 10th century. Van Seters argues that the Yahwist (J) used "fragments, some in literary form, others as popular motifs and stories" to create a theological creation story, expanding upon the Deuteronomist's established corpus of work. By the post-exilic period, he theorizes that there was an established theological work (DJ) created by the Deutoronomist (D) and Yahwist (J).
Van Seters argues that the Priestly source (P) is not independent from the Yahwist source (J) but indeed relies heavily upon it. If J is ascribed to the exilic period, P must be of the post-exilic, or Second Temple, period, likely in the 5th century. This reassessment of chronology places the Deuteronomist as the first writer (DJP) whereas the documentary hypothesis places the Deuteronomist as a later writer (JEDP).
Independence of the Yahwist and Priestly sources
Whereas the documentary hypothesis proposed that the four Pentateuch sources were complete and independent accounts, Van Seters writes that the supplementary hypothesis "does not view the later sources J and P as independent documents but as direct additions to the earlier corpus." The hypothesis proposed that the Deuteronomist is the only independent source and that the Yahwist (J) is a reply to the Deuteronomic explanation of the Exile and a "confessional reformulation" as a theological corrective. Further, the hypothesis views the Priestly (P) source as non-independent as well. Because many P texts, Van Seters argues, "do not make sense without the larger J context," the Priestly writer is viewed as a redactor of J. A major consequence of this view that the later two sources are not independent is the removal of the need for redactors to explain the cohesion of the Pentateuch. Van Seters writes, "Since there are no separate sources after the first one, there is no need for redactors. The elaborate system of multiple redactors used by current documentarians is unnecessary".
References
Biblical studies
Documentary hypothesis |
https://ko.wikipedia.org/wiki/%ED%8A%B8%EB%A1%9C%EC%9D%BC%EB%9F%AC%EC%8A%A4%EC%99%80%20%ED%81%AC%EB%A6%AC%EC%84%B8%EC%9D%B4%EB%93%9C |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 |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Troilus and Cressida)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다. 1602년 무렵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반니 보카치오의 시 《필로스트라토》를 바탕으로 제작된 제프리 초서의 동명의 소설이 모티브이다.
영국의 근세 희곡 연구자였던 프레드릭 S. 보아스는 이 작품을 셰익스피어의 문제극 가운데 하나로 평가한 바 있다. 극은 트로이의 귀족 헥토르가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 사이에서 사랑의 파국을 맞고 사망하는 매우 비참한 장면에서 끝난다. 이 희곡은 오늘날에도 "매우 활발한 비평 토론"의 소재가 되고 있다.
연극은 전반적으로 외설스런 희극과 우울한 비극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고 독자나 관객은 종종 하나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양 극단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미국의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는 캐릭터들이 지니는 주요 요소 몇 가지들, 이를테면 계층, 명예, 사랑과 같은 것의 본질적 가치를 묻는 질문은 확실히 "현대적"으로 여겨진다고 평한 바 있다.
등장 인물
트로이
프리아모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자녀들: 카산드라 (예언자), 헥토르, 트로일러스, 파리스, 데이포보스, 헳레노스, 마르가렐론(서자)
안드로마케, 헥토르의 아내
아이네이아스, 사령관
안테노르, 장로
칼카스, 그리스 진영과 함께 한 트로이의 사제
크리세이드, 칼카스의 딸
알렉산드로스, 크리세이드의 종복
판다로스, 크리세이드의 삼촌
그리스
아가멤논, 그리스 연합군 사령관
아킬레우스, 왕자
아이아스, 왕자
디오메데스, 왕자
네스토르, 현명한 왕자
오디세우스, 이타카의 왕
메넬라오스, 스파르타의 왕, 아가멤논의 형제
헬레네, 메넬라오스의 아내,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도망가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테르시테스, 저열하고 상스러운 "바보"
파트로클로스, 아킬레우스의 동료
플롯
개요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는 트로이 전쟁 후반 아킬레우스가 참전을 거부한 장면부터 헥토르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까지 《일리아드》의 줄거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 속에 두 가지 플롯이 놓인다. 하나는 트로이의 왕자로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트로일러스가 그리스편으로 넘어간 사제 칼카스의 딸 크리세이드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세이드가 포로교환의 댓가로 그리스 진영에 넘겨저 디오메데스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연극은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를 제목으로 내세우지만, 실제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차지하는 부분은 작다. 연극의 대부분은 그리스의 사령관 아가멤논과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아가멤논이 이끄는 그리스군은 자존신 강한 아킬레스가 전투에 복귀하여 도전장을 보내온 헥토르와 일대일로 싸우게 하려고 노력하고있다. 원래 아이아스가 나서도록 헥토르와 싸우기 전에 휴전을 맺었다. 트로이의 성벽 앞에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가 아끼는 동료이자 아마도 연인이었을 파트로클로스를 죽이고 아킬레우스는 다시 참전하게 된다. 아킬레스는 헥로르와 싸워 그를 붙잡고 자신이 이끄는 미르미돈 군에게 헥토르를 죽이라 지시한다. 그리스는 트로이를 정복하고자 계속 싸우고 있고 트로이는 자신들의 영웅이 죽는 것을 목도하는 가운데 극은 결말을 맞는다.
1 막
1장
군인 한 명이 등장하여 트로이 전쟁의 줄거리를 설명하며 연극이 시작된다.
트로이 성벽 안에서 트로일러스는 판다로스에게 자신이 그의 질녀 크리세이드를 깊이 흠모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상심으로 전투에 참전할 수 없노라고 토로한다. 판다로스는 크리세이드와 트로일러스를 이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노라며 그의 노고에 비해 돌아오는 감사가 적다고 불형한다. 판다로스가 떠나자 트로이의 사령관 아이네아스가 들어와 메넬라오스와 싸우다 파리스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전투의 소음이 무대를 감싸면 트로일러스는 그 자리에서 참전을 수락한다.
2장
도시의 다른 한 켠에서 크리세이드는 종복과 전날 용감하지만 어리석은 그리스의 아이아스가 위대한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를 맞아 싸우기로 결정하였는데, 헥토르가 행여나 이 싸움에 패배할까봐 두렵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판다로스가 들어와 트로이의 왕자들에 대해 평을 하면서 헥토르보다는 트로일러스가 더 위대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트로일러스와 안테노르, 아이아네스, 헥토르, 파리스 같은 트로이의 영주들이 전투를 마치고 행렬을 이루어 지나간다. 판다로스는 이들 모두를 칭찬하지만 그 누구도 트로일러스와 같을 수 없다고 말한다. 판다로스는 트로일러스에게서 사랑의 정표를 얻어오마 하고 말하며 떠나고 크리세이드는 홀로 남아 트로일러스를 연모한다.
3장
그리스군 막사에서 사령관이자 위대한 왕인 아가멤논은 휘하와 함께 대화를 한다. 트로이 공방전이 7년이 지나는 동안 아무런 성과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낙담하고 있다. 넥토르는 영웅의 길이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라 하고, 오디세우스는 그리스군 진영의 권위가 무너질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충고한다. 아킬레우스와 그의 동료 파트로클로스가 참전을 거부하고 있어 진영이 분열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와 그의 하인들마저 독설을 내뱉을 뿐이어서 진영 전체가 무너질 위기라고 말한다. 그리스군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아이아네스가 휴전의 짓발을 들고 나타나 헥토르의 도전장을 전한다. 헥토르는 각자의 아내를 걸고 일대일로 맞서 싸울 그리스 영주는 없느냐고 도발한다. 그리스 군은 이 도전에 응하고 아이아네스는 돌아간다. 아이아네스가 나가자 오디세우스는 네스토르에게 이 도전은 아킬레우스를 겨냥한 것이라 말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참전에 불응하고 있으므로 아이아스를 내세워 그를 도발하자고 제안한다. 아이아스가 이기면 그것대로 좋고 아이아스가 지게 되면 그것대로 아킬레우스를 참전시킬 명분이 된다는 계획이다. 네스토르는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동의한다.
2 막
1장
그리스군 막사에서 아이아스는 자신의 종복 테르시테스를 불러 자신에게 전달된 명령의 진의를 묻는다. 상스러운 입을 가진 사악한 테르시테스는 명령에 불복하라고 충동질을 하며 그의 주인과 그리스 군 전체를 싸잡아 저주하여 매를 번다.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가 들어오자 테르시테스는 그들 마저 저주한다. 파트로클로스가 위협하자 입을 다물지만 "아킬레스의 브로치가 날 선택하면 아마도 내가 평화롭게 되겠지요"라고 비아냥거린다., 16 세기의 용례에서 브로치는 여러가지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뾰족한 막대나 침 또는 바늘'을 의미했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연인 사이임을 암시하면서 이를 비아냥 거린 것이다. 아킬레스는 테르시테스를 물리치며 아이아스에게 선택은 알아서 할 일이나 헥토르와의 싸움은 비웃음만을 살 것이라 말한다.
2장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아들들과 함께 헬레네를 돌려보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지 토론한다. 헥토르는 헬레네를 데려 온 것이 용감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렇게까지 댓가를 치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카산드라는 헬레네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트로이가 불태워 질 것이라 울부짖는다. 카산드라가 떠나자 트로일러스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헬레네를 보낼 수 없다고 말하고 파리스 역시 자신과 뜻을 같이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이래서 도덕에 대한 젊은이의 결정은 믿을 수가 없다고 반빅하지만 트로일러스는 헬레네야말로 명예와 명성의 상징이라 주장한다. 헥토르는 불만이 남아있지만 어찌되었든 아킬레우스의 결전을 희망한다.
3장
테르시테스가 홀로 나와 아이아스와 아킬레우스를 모두 비웃는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나타나자 테르시테스는 둘 모두 바보라고 놀린다. 파트로클로스가 테르시테스를 때리려 하자 아킬레우스가 막아선다. 이때 사령관 아가멤논과 오디세우스, 네스토르, 디오메데스, 아이아스가 함께 등장한다. 이 모습을 본 아킬레우스는 그의 막사로 황급히 들어가고 파트로클로스가 이들을 맞는다.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를 만나고자 하지만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가 아프다고 둘러댄다. 아가멤논은 화를 내며 아이아스에게 아킬레우스를 데려 나오라고 명령한다. 오디세우스는 이를 만류하며 아이아스야말로 전자 중의 전사라고 치켜세운다. 그들은 아킬레우스를 막사에 남겨둔 채 아이아스를 그리스군의 챔피언으로 결정한다.
3 막
1장
트로이 성안, 판다로스는 파리스와 헬레네를 만나려고 기다리는 사이 종복 하나와 대화를 한다. 파리와 헬레네가 들어오자 판다로스는 그날 저녁 있을 연회에서 프리아모스가 트로일러스가 어디있느냐고 묻거든 변명을 해 달라고 요청한다. 파리스와 헬레네는 트로일러스가 어디 있을 것이냐 묻지만 판다로스는 답하지 않는다. 판다로스가 전사들의 귀환을 맞이하러 나가자 둘은 아마도 크리세이드와 함께 있을 것이라며 상스러운 농담을 한다.
2장
트로일러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이고 판다로스는 그의 욕망이 곧 실현될 것이라고 확언한다. 판다로스는 밖으로 나가 우연을 가장하여 크리세이드를 안으로 불러들이고 트로일러스와 포옹하라고 종용한다. 판다로스가 자리를 피해주자 둘은 서로의 사랑을 고백한다. 크리세이드는 자신의 사랑이 진실하다고 선언하며 만일 그녀가 변심하면 후세에 "크리세이드의 사랑"이란 말이 거짓 사랑을 대표하는 말로 쓰일 것이라 맹세한다.
3장
한편 그리스 막사에서 트로이를 배신한 크리세이드의의 아버지 칼카스는 그리스군에게 호의를 베풀어달라 요청한다. 그는 사로잡은 트로이 장군 안테노르를 그의 딸 크리세이드와 교환하여 딸을 다시 만나기를 희망한다. 아가멤논은 요청을 받아들이고 디오메데스에게 포로 교환을 관할하도록 명령한다.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따라 그리스의 장군들은 아킬레스의 천막 앞을 지나며 그를 무시한다. 아킬레우스가 오디세우스에게 왜 자신이 모욕당하는 지 묻자 오디세우스는 그가 더 이상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고 곧 잊혀질것이라 대답한다. 오디세우스가 사라지자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적의 여자와 그만 관계를 맺고 다시 전장에 나서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 말은 오디세우스가 알려준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조언에 동의한다. 이때 테르시테스가 들어와 아이아스가 출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린다. 파트로클로스는 테르시테스에게 다음날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에 맞설 것이니 아가멤논과 아이아스는 안심하고 있으라고 전하라 명령한다.
4 막
1장
디오메데스가 안테노르와 크리세이드의 교환을 위해 트로이에 당도한다. 아이아네스와 파리스는 진심으로 그를 환영한다. 아이아네스는 이 교환이 성사되면 트로일러스가 크게 상심할 것이라고 하고, 파리스는 동의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아이네아스가 자리를 뜨자 디오메데스는 파리스와 메넬라오스 가운데 누가 더 헬레네와 함께 할 자격이 있는 지 자문하고, 둘 모두 "창녀"에게 위대한 피를 댓가로 지불하는 바보들이라며 입맛이 쓴 자답을 남긴다.
2–3장
다음날 아침 트로일러스는 크리세이드의 침실을 나서고 크리세이드는 조금만 더 머물다 가기를 간청한다. 판다로스가 들어와 이 연애에 대해 짖굳은 농담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크리세이드는 트로일러스를 황급히 숨긴다. 문을 열자 아이아네스가 들어와 트로일러스를 데려오도록 명령한다. 트로일러스가 불려오고 아이아네스는 그 앞에서 크리세이드와 안테노르의 교환 소식을 전한다. 트로일러스는 아버지 프리아모스에게 항의하기 위해 아이아네스와 함께 떠나고 판다로스가 남겨진 크리세이드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그녀는 흐느낀다.
4장
트로일러스가 트로이의 영주들과 함께 디오메데스를 크리세이드의 집에 데려오고 트로일러스는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둘만 남겨지자 트로일러스는 변치 않는 사랑을 선언하고 크리세이드는 그리스군의 막사에 가더라도 자신의 마음은 여전히 그와 함께할 것이라 언약한다. 디오메데스에게 크리세이드를 넘기며 트로일러스는 "온당한 대우를 하지 않으면 끔찍한 플루토스의 저주가 내릴것"이라고 위협한다. 디오메데스는 그러겠노라 약속하고 이 때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결투를 알리는 나발이 울린다.
5장
그리스군 막사에 도착한 크리세이드는 그리스군의 모든 장군들에게 선보녀 진다. 크리세이드는 모두에게 키스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이를 거부한다. 크리세이드가 막사를 나가자 오디세우스는 그녀가 부덕하다고 비난한다. 트로이의 영주들이 도착하고 아이아네스가 결투 조건을 내건다. 아이아네스는 헥토르가 아이아스와의 인연 때문에 이 결투를 내켜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한다. 두 결투자가 준비하는 사이 아가멤논은 오디세우스에게 "왜 트로이인들은 모두 똑같이 큼지막해 보이는 지" 묻고 오디세우스는 트로일러스야말로 트로이인 가운데 가장 위대하며 헥토르마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답한다.
5 막
1장
결전을 앞둔 밤 그리스군은 양 진영을 위해 연회를 배푼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능히 헥토르를 죽일 수 있다고 장담한다. 테르시테스는 아킬레우스의 연인이 된 사로잡힌 트로이의 공주 폴리세나가 헥토르와 싸우지 말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전달하며, 군영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파트로클로스를 "아킬레우스의 남창"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연회가 끝나고 모두가 잠자리에 들기 위해 떠나지만 테르시테스는 남아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엿본다. 모두가 잠자리로 가는데 디오메데스는 크리세이드를 보기 위해 빠져나가고, 그 뒤를 오디세우스와 트로일러스가 밟는다. 디오메데스는 도덕이고 자시고 욕정밖에 없어 보이고, 테르시테스는 그 뒤를 쫓아 간다.
2장
칼카스의 막사 안에서 디오메데스는 크리세이드를 찾는다. 칼카스가 딸을 대려오고 한켠에서는 트로일러스와 오디세우스가 다른 한켠에서는 테르시테스가 이를 엿본다. 디오메데스가 크리세이드를 칭송하며 자신과 함께 하기를 청한다. 이를 본 테르시테스는 상스러운 욕설을 내밷고 트로일러스는 충격을 받는다. 크리세이드는 트로일로스가 정표로 주었던 소매자락을 디오메데스에게 주며 다시는 디오메데스를 보지 않길 원한다고 말하지만 디오메데스가 이를 돌려주자 누그러진다. 결국 크리세이드는 장래에 디오메데스와 잠자리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고 둘은 각자 막사를 떠난다. 크리세이드는 연인의 변심 장면을 직접 목도하고 고통에 휩싸여 전장에서 디오메데스를 죽이리라 결심한다. 마침내 아침이 밝아오고 아이아네스는 트로일러스를 데리고 트로이로 귀환한다.
3장
헥토르는 고함을 지르며 전투를 알리고,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와 여동생 카산드라는 가지 말라고 간청한다. 둘 다 헥토르가 죽는 꿈을 꾸었다고 만류하지만 그는 경고를 무시한다. 트로일러스가 와서 그도 함께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트로일러스는 그 동안 헥토르가 적에게 너무 관대하였다고 하면서 오늘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죽일 것이라 장담한다. 카산드라를 앞세우고 들어선 늙은 왕 프리아모스는 그 역시 오늘 좋지 않은 징조를 느낀다며 싸움을 만류하지만, 헥토르는 들으려 하지도 않고 전장으로 나선다. 판다로스가 트로일러스에게 크리세이드의 편지를 전하지만 트로일러스는 편지를 읽지도 않고 찢어버린 후 헥토르를 따른다.
4장
전투가 벌어지자 테르시테스는 겁을 먹고 이리 저리 피하며 죽음을 모면한다.
5장
전장의 한 켠에서 아가멤논이 전황을 설명한다. 도레우스는 사로잡혔고 파트로클로스는 죽임을 당하여 그리스군에게 불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네스토르는 "전장에 천명의 헥토르가 있는듯 하다"(5.4.3. )고 말한다. 아킬레우스가 어디에 헥토르가 있냐고 묻는다.
6장
트로일러스는 디오메데스, 아이아스를 맞아 싸운다. 헥토르가 아킬레우스를 찾고 둘은 격돌한다.
7장
전장의 다른 편에선 메넬라오스와 파리스가 싸우고 있다. 테르시테스는 프리아모스의 서자와 맞닥드리지만, 자신도 서자라며 서자끼리 싸워서 무슨 득이 있겠냐고 싸움을 피한다.
8장
아킬레우스와 그의 부하들이 헥토르를 찾아내 무찌르고 그의 황그 갑옷을 벗겨낸다. 갑옷이 벗겨진 핵토르는 그리스군에 둘러쌓여 죽임을 당한다.
9장
아가멤논, 아이아스, 메넬라오스, 네스토르, 디오메데스, 그리고 다른 그리스군들이 등장하여 행진한다. 그들은 헥토르의 영웅적 죽음을 칭송한다.
10장
판다로스가 무대에 홀로 남아 그는 단지 왜 갈망하는 이들을 조금이나마 도왔을 뿐인데 이런 오명을 얻어야만 하는지 자문한다.
장르 정의 문제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는 공연 시기를 특정하는 문제와 함께 장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
19세기의 유명한 문학 비평가 프레드릭 S. 보아스 (Frederick S. Boas)는 《자에는 자로》와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등과 함께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를 셰익스피어의 대표적인 문제극으로 규정하였다. 문제극이란 용어는 보아스와 동시대에 활동한 극작가들인 입센, 쇼 등의 사회적 문제 의식을 드러내는 희곡에서 유래 한 것으로,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논쟁을 촉발하지만 해결은 쉽지 않은 문제를 드러내는 연극을 뜻한다.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가 갖는 혼란스러운 특성 때문에 독자나 관객은 연극을 이해하기 어렵다. 장르는 연극을 쉽게 이해하는 방법가운데 하나지만,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는 "이 연극의 장르는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사랑의 파멸이라는 비극적 요소와 함께 위선을 꼬집는 "환멸의 희곡"의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딱히 장르를 구분하기 어려운 희극이다.
앤서니 B. 도우슨은 이 희곡은 장르를 넘나드는 수수께끼로 가득하 있으며 이것이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의 참된 묘미라고 평한다.
이러한 근대적 평가 이전에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는 전통적으로 비극으로 인식되어 왔다. 보아스가 이를 문제극이라 평한 이후 장르에 대한 다각도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러한 비평의 변화는 셰익스피어 연극이 보여주는 사랑, 명예, 계층에 대한 가치들이 현대적 수용 면에서 실질적인 변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셰익스피어 당시로서도 이 주제들은 매우 문제적이었을 것이다. 오츠는 장르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인해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가 여전히 현재성을 갖는 비극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고 믿는다.
출처
연극은 《일리아드》의 한 부분을 취하는 형식이지만,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의 줄거리는 그리스 신화에서 온 것이 아니라 중세의 이야기에 바탕을 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제프리 초서가 지은 같은 이름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존 리드게이트의 《트로이 서》와 윌리엄 캑스턴이 번역한 프랑스 로맨스 《트로이 역사 선집》 등을 참조하였다.
초서의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도 조반니 보카치오의 《Il Filostrato》 속의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옮긴 베누이 드 상트모르의 12세기 작품을 참고하였다. 셰익스피어 당대에는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였다.
희곡
희곡은 햄릿이 작성된 해인 1602년 무렵 쓰인 것으로 여겨진다. 1609년 두 종류의 4절판으로 출판되었다. 두 판의 희곡이 서로 다른 점이 많아 실재 공연이 이루어졌는 지는 확실치 않다.
공연
희곡의 최초 판본이 작성된 1602년 초연이 있었을 수 있지만 확실치 않다. 근대 이전에 이 대본으로 공연을 열었다는 기록은 없다. 근대에 이르러는 19세기 이후 공연되었으며 1차 대전이 있기 전까지 점차 인기를 얻었다.
최근의 공연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2012년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미국의 더 우스터 그룹과 공동 제직하여 스완 극장에서 상연된 것이 있다. 이 때에도 불분명한 질문이 가득하다는 비평을 들었다.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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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ilus and Cressida dir. Ben Iden Payne, Shakespeare Memorial Theatre, Stratford-upon-Avon. Prompt book used for Shakespeare Memorial Theatre production: RSC/SM/1/1936/TRO1 – held at Shakespeare Centre Library and Archive, Henley Street, Stratford-upon-Avon. The Times (1936) Review. The Times, 25 April (no author/by-line).
Wells, Stanley; Taylor, Gary (1987). William Shakespeare: A Textual Companion.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ISBN 0-393-31667-X.
외부 링크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의 역사 – HTML 버전.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 홈페이지, 인터넷 셰익스피어 에디션. 텍스트 판, 책 팩시밀리, 공연 및 인터넷 사이트.
SparkNotes Chapter Summaries and Study Guides
조이스 캐럴 오츠의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
성소수자 희곡
아가멤논
1602년 희곡
조반니 보카치오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작품
제프리 초서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작품 | https://en.wikipedia.org/wiki/Troilus%20and%20Cressida | Troilus and Cressida | {{Infobox play
| name = Troilus and Cress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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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ption = Portrait of a Lady in the Character of Cressida, John Opie (c. 1800)
| writer = William Shakespe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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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tting = Troy, Trojan War
| orig_lang =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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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 Trojan War
| genre = Shakespearean problem play
}}Troilus and Cressida ( or ) is a play by William Shakespeare, probably written in 1602.
At Troy during the Trojan War, Troilus and Cressida begin a love affair. Cressida is forced to leave Troy to join her father in the Greek camp. Meanwhile, the Greeks endeavour to lessen the pride of Achilles.
The tone alternates between bawdy comedy and tragic gloom. Readers and theatre-goers have frequently found it difficult to understand how they are meant to respond to the characters. Frederick S. Boas has labelled it one of Shakespeare's problem plays. In recent years it has "stimulated exceptionally lively critical debate".
Characters
The Trojans
Priam, King of Troy
Priam's children: Cassandra (a prophetess), Hector, Troilus, Paris, Deiphobus, Helenus, and Margarelon (bastard)
Andromache, Hector's wife
Aeneas, a commander and leader
Antenor, another commander
Calchas, a Trojan priest who is taking part with the Greeks
Cressida, Calchas's daughter
Alexander, servant to Cressida
Pandarus, Cressida's uncle
The Greeks
Agamemnon, King of the Greeks and leader of the Greek invasion
Achilles, prince
Ajax, prince
Diomedes, prince
Nestor, wise and talkative prince
Ulysses, King of Ithaca (In some editions, the character is referred to as Odysseus.)
Menelaus, King of Sparta, brother to Agamemnon
Helen, wife to Menelaus, living with Paris
Thersites, a deformed and scurrilous low-class "fool"
Patroclus, protégé and lover of Achilles
Plot
Synopsis Troilus and Cressida is set during the later years of the Trojan War, faithfully following the plotline of the Iliad from Achilles' refusal to participate in battle to Hector's death. Essentially, two plots are followed in the play. In one, Troilus, a Trojan prince (son of Priam), woos Cressida, another Trojan. They profess their undying love, before Cressida is exchanged for a Trojan prisoner of war. As he attempts to visit her in the Greek camp, Troilus glimpses Diomedes flirting with his beloved Cressida, and decides to avenge her perfidy.
While this plot gives the play its name, it accounts for only a small part of the play's run time. The majority of the play revolves around the leaders of the Greek and Trojan forces, Agamemnon and Priam, respectively. Agamemnon and his cohorts attempt to get the proud Achilles to return to battle and face Hector, who sends the Greeks a letter telling them of his willingness to engage in one-on-one combat with a Greek soldier. Ajax is originally chosen as this combatant, but makes peace with Hector before they are able to fight. Achilles is prompted to return to battle only after his protege Patroclus is killed by Hector before the Trojan walls. A series of skirmishes conclude the play, during which Achilles catches Hector and has the Myrmidons kill him. The conquest of Troy is left unfinished, as the Trojans learn of the death of their hero.
Act 1
Scene 1
The play opens with a Prologue, an actor dressed as a soldier, who gives us the background to the plot, which takes place during the Trojan War. Immortalized in Greek mythology and Homer's Iliad, the war occurs because a Trojan prince, Paris, has stolen the beautiful Helen from her husband, King Menelaus of Sparta, and carries her home to Troy with him. In response, Menelaus gathers his fellow Greek kings, and they sail to Troy hoping to capture the city and reclaim Helen.
Within the walls of Troy, Prince Troilus complains to Pandarus that he is unable to fight because of heartache; he is desperately in love with Pandarus's niece, Cressida. Pandarus complains that he has been doing his best to further Troilus's pursuit of his niece, and that he has received small thanks for his labors. After he departs, Troilus remarks that Pandarus has been growing irritable lately. As he ponders, the Trojan commander Aeneas comes in, bringing news that Paris has been wounded in combat with Menelaus. As the noise of battle comes in offstage, Troilus agrees to join his Trojan comrades on the field.
Scene 2
In another part of the city, Cressida converses with her servant, who recounts how a Greek warrior named Ajax, a valiant but stupid man, managed to overcome the great Trojan prince Hector the previous day, and that Hector is fighting furiously because of this defeat. Cressida is joined by Pandarus, and they discuss the Trojan princes, with Pandarus taking the unlikely position that Troilus is a greater man than Hector. As they converse, several Trojan lords pass by them returning from battle, including Antenor, Aeneas, Hector, and Paris; Pandarus praises each one, but tells his niece that none of them can match Troilus. He then leaves Cressida, promising to bring a token from Troilus. Alone, Cressida says that while she returns Troilus's feelings, she is holding him off; she is enjoying his pursuit of her.
Scene 3
In the Greek camp, the great general and king Agamemnon is conversing with his lieutenants and fellow kings. He asks why they seem so glum and downcast for although their seven-year siege of Troy has met little success so far, they should welcome the adversity that the long war represents, since only in difficult times can greatness emerge. Nestor, the oldest of the Greek commanders, cites examples of how heroism emerges from hardship. In response, Ulysses expresses his deep respect for what they have said, but points out that the Greek army is facing a crisis not because of the duration of the war, but because of a breakdown in authority within the Greek camp. Instead of being united, they are divided into factions: Achilles refuses to fight, and instead sits in his tent while his boyfriend Patroclus makes fun of the Greek commanders; others, like Ajax and his foul-mouthed slave Thersites, follow this example, and so the entire army is corrupted. The others agree that this is a great problem, and as they discuss what is to be done, Aeneas appears under a flag of truce, bringing a challenge from Hector. The Trojan prince offers to fight any Greek lord in single combat, with the honour of their respective wives as the issue. The Greeks agree to find a champion and offer Aeneas hospitality. As Aeneas is led away, Ulysses tells Nestor that this challenge is truly directed at Achilles, since only Achilles could match the great Hector in battle. But to have Achilles fight Hector would be dangerous, because if Achilles lost, it would dishearten the entire army. Therefore, Ulysses suggests, they should have Ajax fight Hector instead; even if Ajax loses, they can still claim that Achilles would have won in his place. At the same time, by choosing Ajax as their champion, they will infuriate Achilles and perhaps goad him into rejoining the war, bringing with him all his soldiers. Nestor, impressed with Ulysses's intelligence, agrees to the plan.
Act 2
Scene 1
In the Greek camp, Ajax summons his slave, Thersites, and orders him to find out the nature of the proclamation that has just been posted. Thersites, a foul-mouthed ruffian, refuses to obey and instead curses his master and the Greeks with equal vigor, provoking Ajax to beat him. Achilles and Patroclus come upon them and he includes them in his curses. Offended at Patroclus' request he stop, he replies "I will hold my peace when Achilles' brooch bids me, shall I?", the term "in the 16th century meant, among other things, a 'pointed rod, spit or pricker,'" implying that Achilles and Patroclus were lovers. They send him away, and Achilles tells Ajax the news of Hector's challenge to any brave Greek warrior. The selection of the warrior has been put to a lottery otherwise, Achilles says as he leaves, he would have been the only possible choice, a remark that produces a sneer from Ajax.
Scene 2
In Troy, King Priam and his sons debate the wisdom of continuing the war, when they can end it by returning Helen to the Greeks. Hector, supported by his brother Helenus, argues eloquently that while the theft of Helen may have been a brave act, she cannot be worth the great and bloody price they are paying to keep her. When he is done speaking, his sister Cassandra, a prophetess who is considered mad, dashes in and cries that if they do not let Helen go, Troy will burn. When she is gone, Troilus dismisses her warning as ravings, and argues that they must keep Helen for the sake of their honor and Paris supports him. Hector retorts that this is why young men cannot be trusted to make moral decisions, since passion overwhelms their reason. But Troilus says that Helen is more than a woman, she is a theme of honour and renown, and Hector yields and agrees to continue the war. He goes on to report the challenge that has been sent out to the Greeks, and how he hopes it will bring Achilles to the field.
Scene 3
Alone, Thersites sneers at the pretensions of both Ajax and Achilles. When Patroclus and Achilles appear, he calls them fools; Patroclus moves to strike him, but Achilles holds him off. They see the Greek commanders Agamemnon, Ulysses, Nestor, and Diomedes approaching, accompanied by Ajax, and Achilles quickly retires to his tent. When Agamemnon asks to see him, Patroclus tells the general that Achilles is ill. Agamemnon grows angry, but Achilles refuses to emerge, and tells Ulysses, who goes in to see him, that he still refuses to fight the Trojans. Agamemnon suggests that Ajax go in and plead with Achilles, but Ulysses declares that doing so would be insulting to Ajax, and then he, with the other Greek commanders, praises Ajax profusely, saying that he is the best of their warriors. They agree to leave Achilles in his tent, and decide that Ajax will be their champion against Hector the next day.
Act 3
Scene 1
In Troy, Pandarus converses with a servant while he waits to speak with Paris and Helen. When they come in, he compliments Helen profusely, and asks her to excuse Troilus if Priam asks about him at dinner that night. Paris and Helen ask where Troilus will be dining, and Pandarus refuses to tell him but they both guess that he will be in pursuit of Cressida, and they make bawdy jokes about it as they depart to greet the returning warriors.
Scene 2
Pandarus finds Troilus pacing about impatiently in an orchard, and assures him that his desire for Cressida will soon be satisfied. He goes out, leaving Troilus giddy with expectation, and brings in Cressida; after urging them to embrace, Pandarus departs. Left alone, they profess their love for one another, and each pledges to be faithful to the other. He reassures her and again pledges to be faithful, declaring that thereafter history will say of all lovers that they were as true as Troilus. Cressida declares that if she ever strays from him, she hopes that people will say of false lovers that they were as false as Cressida. Pandarus declares that if ever the pair prove false, may 'all pitiful goers-between' be called after his name.
Scene 3
Meanwhile, in the Greek encampment, Cressida's father, Calchas, who has betrayed Troy in order to join the Greeks, asks the Greek general to grant him a favor. He asks that they exchange the Trojan commander Antenor, for his daughter, so that he might be reunited with her. Agamemnon agrees, and orders Diomedes to supervise the exchange. On Ulysses's advice, the Greek commanders then file past Achilles's tent, and scorn the proud warrior, ignoring his greetings and making him uneasy. He goes to Ulysses and asks him why he is being scorned, and Ulysses tells him that he is no longer a hero and he will be forgotten quickly. He tells, and suggests that Achilles could restore his fame and honor if he stopped dallying with enemy women and took the field. When Ulysses is gone, Patroclus tells Achilles to follow Ulysses's advice; seeing that his reputation is at stake, Achilles agrees. Thersites comes in and reports that Ajax is now striding about the camp, completely puffed up with his own importance. Patroclus persuades the foul-mouthed slave to talk Ajax into bringing Hector, safely conducted by Agamemnon, to Achilles' tent after their fight the next day, so that Achilles may speak with Hector.
Act 4
Scene 1
Diomedes comes to Troy to make the exchange of Antenor for Cressida, and he is greeted heartily by Aeneas and Paris. Aeneas goes to fetch Cressida, remarking that this exchange will deal a heavy blow to Troilus; Paris concurs, but says regretfully that they have no choice: "the bitter disposition of the time will have it so". After Aeneas is gone, Diomedes is asked who he thinks deserves Helen more: Paris, or Menelaus? With great bitterness, the Greek replies that both deserve her, since both are fools, willing to pay a great price in blood for a whore.
Scenes 2–3
Meanwhile, as morning breaks, Troilus takes a regretful leave of Cressida while she pleads with him to stay a little longer. Pandarus comes in and makes several bawdy jokes about their recent lovemaking; suddenly, there is a knock at the door, and Cressida hides Troilus in her bedroom. Aeneas enters, and demands that Pandarus fetch Troilus. When the young prince emerges, Aeneas tells him the sad news that Cressida must be sent to her father in the Greek camp. Troilus is distraught, and goes with Aeneas to see his father, Priam, while Pandarus breaks the news to Cressida, who begins to weep.
Scene 4
Troilus brings Diomedes, together with the great lords of Troy, to Cressida's house, and begs leave to say goodbye to his lady. When they are alone, he pledges to be faithful, and Cressida promises that even in the Greek camp, she will remain true to him. Then Diomedes is brought in, and Troilus demands that he "use her well...for, by the dreadful Pluto, if thou dost not, Though the great bulk Achilles be thy guard, I'll cut thy throat" (1.4.124–129). Diomedes retorts that he will make no promises but will treat Cressida as she deserves, not because any Trojan prince orders him to. At that moment, a trumpet sounds, calling them all to the Greek camp for the duel between Hector and Ajax.
Scene 5
In the Greek camp, the newly arrived Cressida is greeted by all the Greek commanders. Ulysses insists that she be kissed by everyone, only then refusing to kiss her himself and when she is gone, he declares that she is a loose, unvirtuous woman. Then the Trojan lords arrive, and the conditions of the duel are set by Aeneas, who remarks that since Ajax and Hector are related, Hector's whole heart will not be in this fight. As the two combatants prepare, Agamemnon asks Ulysses "what Trojan is that same that looks so heavy" (4.5.113.1). Ulysses tells his general that the downcast Trojan is Troilus, and then goes on to praise him profusely, saying that Troilus may even be a greater man than Hector.
Act 5
Scene 1
Achilles boasts to Patroclus how he will kill Hector. The two encounter Thersites, who delivers a letter to Achilles, and then unloads his usual torrent of abuse on them, calling Patroclus Achilles' male varlot, his 'masculine whore', and on the entire campaign. The letter is from the Trojan princess, Polyxena, whom Achilles loves, and it begs him not to fight the next day; he tells Patroclus sadly that he must obey her wishes. They go out, and Thersites remains; he watches from the shadows as the feast breaks up. Most of the lords go to bed, but Diomedes slips off to see Cressida, and Ulysses and Troilus follow him. Noting that Diomedes is an untrustworthy, lustful rogue, Thersites follows him as well.
Scene 2
At Calchas's tent, Diomedes calls to Cressida. Her father fetches her, while Troilus and Ulysses watch from one hiding place and Thersites from another. With Thersites's profanity and Troilus's shock providing a counterpoint, Diomedes woos Cressida, who behaves reluctantly but coyly toward his advances, fending him off for a time but never allowing him to leave. Eventually, she gives him a sleeve that Troilus presented to her as a love-token then she takes it back, and says that she never wants to see Diomedes again then she softens, gives it to him once more, and promises to wait for him later, when he will come to sleep with her. When she is gone, and Diomedes too, Troilus is in agony, first denying the evidence seen with his own eyes, and then pledging to find Diomedes on the field of battle and kill him. Finally, as morning nears, Aeneas arrives to lead him back to Troy.
Scene 3
Hector girds for battle, while the women, i.e. his wife, Andromache and his sister, Cassandra plead with him not to go. Both have had dreams that prophesy his death, but he dismisses their warnings. Troilus comes in and says that he will be fighting too; indeed, he chides Hector for having been too merciful to his enemies in the past, saying that today Troilus plans to slay as many men as he can. Cassandra leads Priam in, and the old king pleads with his son not to fight, saying that he too feels foreboding about this day, but Hector refuses to listen and goes out to the battlefield. Pandarus brings Troilus a letter from Cressida; Troilus tears it up and follows Hector out to the field.
Scene 4
As the battle rages, Thersites wanders the field, escaping death by brazen cowardice.
Scene 5
Another part of the plains, Agamemnon summarises the ways the Greeks are doing badly in the battle, including that Doreus is taken prisoner and Patroclus probably slain. Then Nestor enters and says that "There is a thousand Hectors in the field" (5.4.3.) The scene ends with Achilles asking where Hector is.
Scene 6
Troilus calls Diomedes a traitor for capturing his horse. Diomedes, Ajax and Troilus exit, fighting.
Hector spares the unprepared Achilles, who boasts that Hector was simply fortunate to find him unarmed. Hector sees a Greek in ornate armour and pursues him.
Scene 7
In another part of the plains. Menelaus and Paris enter the scene fighting. Thersites is confronted by a bastard son of Priam, but declares that as he is himself a bastard they have no business fighting each other.
Scene 8
Achilles and his men find Hector, who has finished fighting and taken off his armour in order to try on the golden armour of the warrior he has conquered. Surrounding the unarmed Trojan, they stab him to death.
Scene 9
Agamenon, Ajax, Menelaus, Nestor, Diomedes and others enter marching. Word spreads among the Greeks of the death of Hector.
Scene 10
An embittered Troilus informs the Trojans of Hector's death, and curses Pandarus. Left alone on the stage, the unhappy Pandarus wonders why he should be so abused, when his services were so eagerly desired only a little while before.
Analysis
Genre identification problems
The difficulties about the date of the play are insignificant compared with the difficulties of its genre identification.
A famous 19th century literary critic named Frederick S. Boas argued that Troilus and Cressida (along with Measure for Measure and All's Well That Ends Well), deserves its own special category: "Problem Play." The term problem play was drawn from the socially conscious drama of playwrights contemporaneous with Boas, like Ibsen and Shaw, and describes a play centred on a social or political problem in such a way as to promote debate but not easy resolution. Yet the deep sense of Troilus and Cressida, according to Anthony B. Dawson, lies exactly in its perplexity: "It is still full of puzzles, but that fact has been recognized as a virtue rather than a defectits difficulties are generative, its obstacles fruitful".
Jonathan Bate is one of many modern authors who regard the play as a satire, deliberately undermining the heroic and romantic style of George Chapman's new and popular translation of Homer. He instances the cynical attitude of Pandarus towards the overnight tryst arranged between the lovers, and the weak, "feminine" language of the supposedly valiant warriors. The warrior in magnificent armour delivering the prologue to the play may have been a parody of Ben Jonson's Poetaster.
Although positioned between the Histories and the Tragedies in the First Folio, the editors' initial intention was for it to follow The Tragedy of Romeo and Juliet, placing it unequivocally with the tragedies it resembles, notwithstanding the lack of typical tragic plot structure. It was only a delay in the typesetting process which caused it to be "slotted in" after The Famous History of Henry VIII, when the volume was finally published. Nowadays Troilus and Cressida is often grouped with the so-called "problem comedies" with Measure for Measure and All's Well That Ends Well. Throughout this work we can observe Shakespeare's tone changing from light comic to intensely tragic.
Literary critic and scholar Joyce Carol Oates wrote that in reality these shifts complemented the values Shakespeare questioned in the play: love, honour, and hierarchy. To Oates Troilus and Cressida is one of the most intriguing plays ever written, and in her opinion appears remarkably 'modern'. Oates considered the play a new kind of contemporary tragedy – a grand existential statement:
Sources
The story of the persuasion of Achilles into battle is drawn from Homer's Iliad (perhaps in the translation by George Chapman), and from various medieval and Renaissance retellings, whereas the story of Troilus and Cressida is a medieval chivalric romance that is not part of Greek mythology.
Shakespeare drew on a number of sources for this plotline, in particular Chaucer's version of the tale, Troilus and Criseyde, but also John Lydgate's Troy Book and Caxton's translation of the Recuyell of the Historyes of Troye.
The two storylines of Troilus and Cressida—the love story of the title characters, and the warfare mainly around Hector, Ajax and Achilles—have completely different origins. While the warfare is of ancient origins and is at the core of the Troy saga in the Homeric epics, especially the Iliad, the story of Troilus and Cressida is part of the narrative material of the Middle Ages: it does not come from Greek mythology, but belongs to the narrative motifs found in the medieval retelling of popular material.
At its first appearance this new storyline is an embellishment by Benoît de Sainte-Maure in his Roman de Troie, which was written for the court of King Henry Plantagenet as a kind of "prince mirror". For his part, Benoît extended stories from Dictys Cretensis and Dares Phrygius from the late Roman period, which entwine around the Iliad material, with his own romantic sub-plot. The Roman de Troie was in turn a source for Boccaccio's "Il Filostrato", which was the main source for Chaucer's poetry Troilus and Criseyde (c. 1380); Shakespeare knew Chaucer's works very well. Other versions of the material, such as John Lydgate's "Troy Book" and Caxton's "Recuyel of the History of Troy", were at the time of Shakespeare in England in circulation and probably known to him.Theodore Morrison, The Portable Chaucer, Viking Press, 1949, p. 363.
The story was a popular one for dramatists in the early 17th century and Shakespeare may have been inspired by contemporary plays. Thomas Heywood's two-part play The Iron Age also depicts the Trojan War and the story of Troilus and Cressida, but it is not certain whether his or Shakespeare's play was written first. In addition, Thomas Dekker and Henry Chettle wrote a play called Troilus and Cressida at around the same time as Shakespeare, but this play survives only as a fragmentary plot outline.
Date and text
The play is believed to have been written around 1602, shortly after the completion of Hamlet. It was published in quarto in two separate editions, both in 1609. It is not known whether the play was ever performed in its own time, because the two editions contradict each other: One announces on the title page that the play had been recently performed on stage; the other claims in a preface that it is a new play that has never been staged.
The play was entered into the Register of the Stationers' Company on 7 February 1603, by the bookseller and printer James Roberts, with a mention that the play was acted by the Lord Chamberlain's Men, Shakespeare's company. Publication followed in 1609; the stationers Richard Bonian and Henry Walley re-registered the play on 28 January 1609, and later that year issued the first quarto, but in two "states". The first says the play was "acted by the King's Majesty's servants at the Globe"; the second version omits the mention of the Globe Theatre, and prefaces the play with a long epistle that claims that Troilus and Cressida is "a new play, never staled with the stage, never clapper-clawed with the palms of the vulgar".
Some commentators (like Georg Brandes, the Danish Shakespeare scholar of the late 19th century) have attempted to reconcile these contradictory claims by arguing that the play was composed originally around 1600–1602, but heavily revised, possibly by another hand, shortly before its 1609 printing. The play is noteworthy for its bitter and caustic nature, similar to the works that Shakespeare was writing in the 1605–1608 period, King Lear, Coriolanus, and Timon of Athens. In this view, the original version of the play was a more positive romantic comedy of the type Shakespeare wrote ca. 1600, like As You Like It and Twelfth Night, while the later revision injected the darker material – leaving the result a hybrid jumble of tones and intents.
The Quarto edition labels it a history play with the title The Famous Historie of Troylus and Cresseid, but the First Folio classed it with the tragedies, under the title The Tragedie of Troylus and Cressida. The confusion is compounded by the fact that in the original pressing of the First Folio, the play's pages are unnumbered, the title is not included in the Table of Contents, and it appears to have been squeezed between the histories and the tragedies. Based on this evidence, scholars believe it was a very late addition to the Folio, and therefore may have been added wherever there was room.
Performance history
Being composed around 1602, the play was most probably staged between 1602 and 1603, as the Stationers' Register entry for 1602/3 records a public performance by the Chamberlain's Men. Taking into account the fact that the second public printing of the quarto edition (1609) dropped the first's familiar testimonial "as acted by the King's Majesty's Servant's at the Globe", it has been suggested that work was performed only once. Instead, the volume was recommended for the libraries of the "eternal reader".
Public performances through history seem sparse. In 1679 John Dryden "new modell'd the plot", re-ordered the scenes, and presented the work as The Truth Found Too Late at the Duke's Theatre, London. In 1795 John Philip Kemble prepared an acting version which emphasised the warriors and sidelined Cressida, but he abandoned the production before opening night. Henry Irving, actor-manager of the Lyceum Theatre, London, commissioned a new version in 1889 but he did not stage it.
Since then, it has become increasingly popular. Peter Holland of Cambridge University attributes this to the work's relevance at times of impending war: William Poel's 1912 production served as a warning as the Great Powers of Europe armed themselves for conflict and Michael Macowan's modern dress production of 1938 at the Westminster Theatre coincided with the Munich crisis. In the international production at the Swan Theatre, Stratford of August 2012 the depiction of Thersites as a wounded war veteran, and the manner in which the Myrmidons killed Hector, "resonat[ed] with […] the ongoing wars in Iraq and Afghanistan.".
In comparison to the performance history of other, more frequently performed plays, the delayed acceptance of Troilus and Cressida into the theatre also means that the claims of relevance become especially acute. When the play had been chosen for performance during the twentieth century, while being out of fashion before, it showed that there was something about its themes and subject matter which was familiar in the mindset of the contemporary audience. Colin Chambers characterised the mood of that period thus: There were signs that British theatre was beginning to reconnect to its society, having previously failed, in [Peter] Hall’s words, "to take into account the fact that we have had a World War […] and that everything in the world has changed – values, ways of living, ideals, hopes and fears". Theatre was staking its claim as a cultural force of significance.
As Barbara Bowen points out: 'We see the play as modern partly because we have so little history of premodern readers seeing the play'.
The play can be seen as a metaphorical mirror, reflecting contemporary issues and political concerns. For example: John Barton, during his preparation for the 1968 Royal Shakespeare Company production, saw the parallels between the prolonged war in Viet Nam and the stalemated siege of Troy as offering a way into the script, commenting that: "The basic situation […] is ludicrous, but also an insoluble impasse where both sides are inexorably committed.". This was not referenced on stage, however, where the "wars and lechery" of the play (Act 5 scene 2) were shown in the context of the new sexual freedoms of the late nineteen-sixties.
Modern revivals
The BBC broadcast a modern-language and modern-dress version by Ian Dallas as The Face of Love in 1954, which was then staged by RADA at the Vanbrugh Theatre in 1956, providing Albert Finney with his first lead stage role.
In July 2009, the Hudson Shakespeare Company of New Jersey presented a production as part of their annual Shakespeare in the Parks series. Director Jon Ciccarelli set the action in ancient Greece but sought to put a modern twist on the action by comparing the title pair to Romeo and Juliet and posing the question: would their relationship have lasted if they had lived? Ciccarelli hypothesized that Shakespeare knew the answer and that it was that it would have not. He stated that Troilus and Cressida pine for each other, like their more famous counterparts, and share a passionate evening, the morning after which Troilus is eager to leave. Cressida is later exiled from Troy and quickly takes up with another man proving love is fickle and fleeting. Other notable departures show that the Greek heroes are anything but heroic, showing Shakespeare satirized revered figures like Achilles as childish and barbaric, and sympathized with the pragmatic Hector.
The Public Theater has produced three revivals, in 1965, 1995, and 2016.
Literary and cultural references
The siege of Troy was one of the popular literary subjects in England circa 1600 and was among the most important events in world history for the contemporaries of Shakespeare. An abundance of allusions in Shakespeare's complete works show that Shakespeare felt able to assume his audience would be aware of this narrative material. In addition, from the records of Philip Henslowe, at least two lost dramas on this subject are known.
Translations of the Iliad were made in Greek, Latin and French in Elizabethan England; moreover, Shakespeare’s contemporary George Chapman also prepared an English version. Shakespeare probably knew the Iliad'' through Chapman’s translation and may have drawn on it for some of the parts of his play, but Shakespeare probably also drew on medieval and post-medieval traditions.
In the traditions of Middle English literature, the material was presented on the one hand in a knightly courtly form, but on the other hand increasingly transformed in a negative-critical way. Above all, the image of Cressida changed in the course of the 16th century, so that at the turn of the century Troilus and Cressida had become increasingly included in infidelity and falsity and the name Pandarus became used as a synonym for procurers ("pander").
Accordingly, Shakespeare's arrangement of events and figures is part of a longer tradition of transforming and, in particular, detracting from the established narrative material. Almost all the characters prove unworthy of their legendary reputation. In his drama, Shakespeare does not simply intensify these negative tendencies, but links and superimposes contradictory characterizations in order to make his characters interesting and accessible to his audience. The play's lack of popularity in the playhouse indicates that in this he was unsuccessful.
References
Sources
External links
SparkNotes Chapter Summaries and Study Guides
The History of Troilus and Cressida – HTML version of this title.
Joyce Carol Oates on Troilus and Cressida
1602 plays
English Renaissance plays
Shakespearean tragedies
Trojan War literature
Plays set in ancient Greece
Love stories
LGBT-related plays
Agamemnon
Plays based on works by Geoffrey Chaucer
Plays based on works by Giovanni Boccaccio
Plays based on the Iliad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93%9C%EB%A1%9C%EC%9D%B4%EB%93%9C%2010 | 안드로이드 10 | 안드로이드 10 또는 안드로이드 Q(Android 10, Android Q)은 10번째 주요 릴리스이며 안드로이드 모바일 운영 체제의 17번째 버전이다. 2019년 9월 3일에 정식 출시되었다.
역사
2019년 3월 13일 구글은 안드로이드 10의 첫 베타 버전을 안드로이드 Q라는 예비 이름으로 출시하였다. 2018년 10월까지 업데이트가 보장된 1세대 픽셀 및 픽셀 XL 장치는 안드로이드 10 버전 업데이트를 받았다. 픽셀 2와 픽셀 2 XL은 구글 스토어에서 처음 출시되었을 때부터 최소 3년 동안 안드로이드 버전 업데이트를 보장하는 연장된 보증 기간을 부여받은 후 포함되었다. 최종 릴리스 이전에 총 6개의 베타 버전 또는 릴리스 후보 버전이 출시되었다.
베타 프로그램은 2019년 5월 7일 베타 3의 출시와 함께 확장되었으며 11개 OEM의 14개 파트너 장치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베타 액세스는 2019년 5월 21일 미국 정부의 제재로 인해 화웨이 메이트 20 프로에서 제거되었다가 5월 31일 복원되었다.
구글은 2019년 6월 5일 최종 안드로이드 Q API와 SDK를 포함한 베타 4를 출시하였다. 동적 시스템 업데이트(DSU)도 베타 4에 포함되어 있다. Dynamic System Update를 사용하면 Android Q 기기가 일시적으로 GSI(Generic System Image)를 설치하여 최신 버전의 Android를 현재 Android 버전 위에 설치할 수 있다. 일단 사용자가 선택된 GSI 이미지 테스트를 끝내기로 결정하면, 그들은 간단히 그들의 기기를 재부팅하고 그들의 일반 기기의 안드로이드 버전으로 재부팅할 수 있다.
구글은 2019년 7월 10일 최종 API 29 SDK와 최신 최적화 및 버그 수정을 포함한 베타 5를 출시하였다. 구글은 2019년 8월 7일 베타 6를 출시하였다.
2019년 8월 22일, 안드로이드 Q는 코드네임 없이 안드로이드 10으로 브랜드화 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구글은 디저트를 기반으로 한 주요 출시 타이틀을 부여하는 관행을 종료하였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음식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일부 언어로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 엔지니어링 부사장인 데이브 버크는 팟캐스트에서 Q로 시작하는 대부분의 디저트는 이국적이었으며 개인적으로 퀸 케이크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내부 파일과 릴리스와 관련된 빌드 시스템 내에 모과 타르트(quince tart)의 약자인 "qt"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언급했다.
출시 예정인 동상도 숫자 10이며, 숫자 0 안에 안드로이드 로봇 로고(또한 머리로만 구성됨)가 있다.
기능
움직임
안드로이드 10에는 디스플레이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스와이프하여 뒤로 이동, 위로 스와이프하여 홈화면으로 이동, 개요에 액세스하기 위해 스와이프하고 하단 모서리에서 대각선으로 스와이프하는 등의 제스처가 포함된 개선된 전체 화면 제스처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구글 어시스턴트를 활성화하고 화면 하단의 제스처 표시선을 따라 스와이프하여 앱을 전환한다. "뒤로"명령으로 엣지 스와이프 제스처를 사용하면 사이드 바 메뉴를 사용하는 앱과 스와이프하여 액세스할 수 있는 기타 기능과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앱은 API를 사용하여 화면의 특정 영역 내에서 뒤로 제스처를 처리하지 않도록 선택할 수 있으며, 제스처를 활성화하기 위해 대상 영역의 크기를 조정하기 위해 감도 제어가 추가되었으며 구글은 나중에 서랍 위젯이 지원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화면 가장자리 근처를 길게 눌러 "탐색"한 다음 열었다. 안드로이드 "허니콤"이후로 사용된 기존의 3키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옵션으로 지원된다.
구글 인증 요구 사항에 따라 OEM은 안드로이드 10의 기본 제스처 및 3 키 탐색을 지원해야한다. OEM은 그들 자신의 제스처를 자유롭게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용하도록 설정해서는 안되며 다른 탐색 설정보다 한 수준 더 깊은 별도의 영역에 나열되어야하며 알림을 사용하여 승격할 수 없다. 안드로이드 파이에서 사용되는 2키 제스처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파이에서 업그레이드 된 장치에서는 사용자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으로만 포함할 수 있다 (단, 지침에서 권장하는 방법).
사용자 경험
"버블"이라는 기능을 사용하여 지원되는 앱의 컨텐츠를 팝업 오버레이 (페이스북 메신저의 오버레이 기반 "채팅 헤드"기능과 유사)로 표시할 수 있다. 앱은 알림을 통해 버블을 생성할 수 있다. 이 기능의 사용 사례에는 채팅 및 메시징 응용 프로그램, 미리 알림 및 "실행중인 작업 및 업데이트"가 포함된다. 버블은 기존의 오버레이 권한을 대체하도록 설계되었다. 기존의 오버레이 권한은 보안 (클릭 재킹 악성 프로그램의 사용으로 인해) 및 성능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사이드로드 된 앱은 30 초 후에 자동으로 오버레이 권한을 잃고, 기기가 재부팅 될 때마다 플레이 스토어의 앱은 오버레이 권한을 잃는다. 안드로이드 10 Go는 오버레이 권한의 사용을 완전히 금지한다.
안드로이드 10에는 시스템 수준 다크 모드가 포함되어 있다. 타사 앱이 활성화되면 자동으로 다크 모드로 전환될 수 있다.
또한 앱은 오버레이 패널을 통해 특정 설정 (예 : 인터넷이 필요한 경우 인터넷 연결 및 Wi-Fi 설정 등)에 대한 "설정 패널"을 표시할 수 있다.
개인정보 및 보안
안드로이드 10에는 몇 가지 주요 보안 및 개인 정보 변경 사항이 있다. 사용자가 포그라운드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에만 위치 데이터에 액세스할 수 있도록 앱을 제한할 수 있다. 백그라운드 앱에 의한 활동 시작에 대한 새로운 제한 사항도 있다.
구글은 2019년 2월 로우 엔드 기기와 같은 AES (Advanced Encryption Standard)에 대한 하드웨어 가속 지원이 없는 기기에서 사용하도록 설계된 암호화 코드인 Adiantum을 발표했다. 구글은 이 암호가 ARM Cortex-A7 CPU에서 AES-256-XTS보다 5배 빠르다고 말했다. 따라서 CPU가 하드웨어 가속 AES를 지원할 수 없는 경우 Adiantum을 사용하여 사양에 관계없이 모든 안드로이드 10 디바이스에서 디바이스 암호화가 필수이다. 또한 모든 파일에 "파일 기반 암호화"(Android Nougat에 처음 도입된)의 구현도 필수적이다.
안드로이드 10과 함께 제공되는 기기에서는 선택한 시스템 구성 요소 (예 : ANGLE, Conscrypt, 미디어 프레임 워크, 네트워킹 구성 요소 등)에 대한 보안 패치를 전체 시스템 업데이트 ("프로젝트 메인 라인")없이 구글 플레이 스토어를 통해 서비스할 수 있다. 구글 모바일 서비스의 라이센스를 받으려면 제조업체는 특정 모듈에 대해 이러한 업데이트를 지원해야하며 나머지는 "권장"으로 표시되지만 선택 사항이다. 이 시스템에서 선택된 모듈은 새로운 APEX 패키지 형식을 사용하는데, 이는 저수준 시스템 구성 요소를 수용하고 서비스하기 위해 설계된 APK 파일의 변형이다.
"범위 스토리지"로 알려진 스토리지 액세스 권한의 주요 변경 사항은 안드로이드 10에서 지원되며 안드로이드 11로 시작하는 모든 앱에서 필수가 된다. 앱은 자신이 생성 한 외부 스토리지의 파일에만 액세스할 수 있다 (바람직하게는 앱별 디렉토리) 및 음악, 사진 또는 비디오 디렉토리에 포함된 오디오, 이미지 및 비디오 파일. 다른 파일은 Storage Access Framework를 통한 사용자 개입을 통해서만 액세스할 수 있다.
IMEI 번호와 같이 재설정 불가능한 장치 식별자를 읽으려면 앱에 새로운 "권한있는 전화 상태 읽기"권한이 있어야 한다.
또한 안드로이드 10은 기본적으로 TLS 1.3 지원을 활성화했다.
플랫폼
모드 변경시 앱 연속성, 다중 창 모드로 변경하여 모든 앱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도록 (현재 사용중인 앱만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애플리케이션이 "일시 중지 된"것으로 간주 됨), 접이식 스마트 폰에 대한 플랫폼 최적화가 이루어졌다. 다중 디스플레이에 대한 추가 지원.
"바로 가기 공유"로 "직접 공유"에 성공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유 메뉴 내에서 사용하기 위해 앱이 공유 할 직접 대상 목록 (예 : 앱과 특정 연락처의 조합)을 반환할 수 있다. Direct Share와 달리 앱은 대상을 미리 게시하고 런타임에 폴링 할 필요가 없으므로 성능이 향상된다.
MIDI 컨트롤러, AV1 비디오 코덱, Opus 오디오 코덱 및 HDR10 +에 대한 기본 지원이 추가되었다. 카메라 사진에서 깊이 정보를 검색하기위한 새로운 표준 API가 있으며,보다 고급 효과에 사용할 수 있다.
안드로이드 10은 WPA3 암호화 프로토콜과 Enhanced Open을 지원하여 Wi-Fi에 대한 기회 암호화를 제공한다. 안드로이드 10은 DSS (Dual-SIM dual-standby)에 대한 지원을 추가하지만 처음에는 Pixel 3a 및 Pixel 3a XL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구글 플레이 시스템 업데이트
안드로이드 10의 신기능이다. 안드로이드 10부터는 일부 보안 업데이트를 구글이 스마트폰에 전송한다.
기타
이스터 에그에서는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Android와 10이 표시되어 있다. 10의 1을 돌려 0 안에 맞춰 알파벳 Q(안드로이드 10의 별칭)를 만들었다면 네모네모 로직을 플레이할 수 있다.
이 버전이 탑재(업데이트)된 기기는 대부분 Android Project Treble이 지원된다. 그 이유는 안드로이드는 대부분 메이저 업데이트가 두 번씩 진행되기 때문이다. 예외로 에센셜 폰은 안드로이드 누가(7.x)를 탑재하여 출시되었지만 Android Project Treble을 지원한다.
이스터에그
안드로이드 10 로고에서 원 모양인 O 안에 1을 왼쪽으로 45도가량 돌려 맞추면 다음과 같이 Q가 나온다. 이때 배경의 줄무늬가 움직이는데 android 글자를 세 번 정도 누르면 로직 같은 게임이 나온다. 화면 회전 기능을 활성화하고 가로 세로를 돌리면서 맞추면 된다.
더 보기
윈도우가 애초에 설치되어 있던 컴퓨터에는 모든 버전의 안드로이드를 설치할 수 없다. 하는 경우에는 EULA를 위반하는 행위이니 주의할 것.
각주
외부 링크
10
2019년 소프트웨어 | https://en.wikipedia.org/wiki/Android%2010 | Android 10 | Android 10 (codenamed Android Q during development) is the tenth major release and the 17th version of the Android mobile operating system. It was first released as a developer preview on March 13, 2019, and was released publicly on September 3, 2019.
Android 10 was officially released on September 3, 2019, for supported Google Pixel devices, as well as the third-party Essential Phone and Redmi K20 Pro in selected markets. The OnePlus 7T was the first device with Android 10 pre-installed. In October 2019, it was reported that Google's certification requirements for Google Mobile Services will only allow Android 10-based builds to be approved after January 31, 2020.
As of July 2023, 9.27% of Android devices (mobile & tablet) ran Android 10 (which has ceased receiving security updates in February), making it the 4th most common Android version.
History
Google released the first beta of Android 10 under the preliminary name "Android Q" on March 13, 2019, exclusively on their Pixel phones, including the first-generation Pixel and Pixel XL devices where support was extended due to popular demand. Having been guaranteed updates only up to October 2018, the first-generation Pixel and Pixel XL devices received version updates to Android 10. The Pixel 2 and Pixel 2 XL were included, after being granted an extended warranty period which guaranteed Android version updates for them for at least 3 years from when they were first available on the Google Store. A total of six beta or release-candidate versions were released before the final release.
The beta program was expanded with the release of Beta 3 on May 7, 2019, being made available on 14 partner devices from 11 OEMs; twice as many devices compared to Android Pie's beta. Beta access was removed from the Huawei Mate 20 Pro on May 21, 2019, due to U.S. government sanctions, but was later restored on May 31.
Google released Beta 4 on June 5, 2019, with the finalized Android Q APIs and SDK (API Level 29). Dynamic System Updates (DSU) were also included in Beta 4. The Dynamic System Update allows Android Q devices to temporarily install a Generic System Image (GSI) to try a newer version of Android on top of their current Android version. Once users decide to end testing the chosen GSI image, they can simply reboot their device and boot back into their normal device's Android version.
Google released Beta 5 on July 10, 2019, with the final API 29 SDK as well as the latest optimizations and bug fixes. Google released Beta 6, the final release candidate for testing, on August 7, 2019.
On August 22, 2019, it was announced that Android Q would be branded solely as "Android 10" with no codename, effectively ending the practice of alphabetically codenaming major releases based on names of confectionary products (including brand names), arguing that this was not inclusive to international users, due either to the aforementioned products not being internationally known, or being difficult to pronounce by speakers of certain languages. Additionally, Android VP of engineering Dave Burke stated that most desserts with a name beginning with the letter Q were exotic, and that he personally would have chosen queen cake. He also noted that there were references to "qt"—an abbreviation of quince tart—within internal files and build systems relating to the release.
The statue for the release is likewise the numeral 10, with the Android robot logo (which, as part of an accompanying rebranding, has also been changed to only consist of a head) resting inside the numeral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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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oid 10 introduces a revamped full-screen gesture navigation system and new app open and close animations, with gestures such as swiping from either side edge of the display to go back, swiping up to go to the home screen, swiping up and holding to access Overview, swiping diagonally from a bottom corner of the screen to activate the Google Assistant, and swiping along the gesture bar at the bottom of the screen to switch apps. The use of an edge swiping gesture as a "Back" command was noted as potentially causing conflicts with apps that utilize sidebar menus and other functions accessible by swiping. An API can be used by apps to opt out of handling a back gesture within specific areas of the screen, a sensitivity control was added for adjusting the size of the target area to activate the gesture, and Google later stated that the drawer widget would support being "peeked" by long-pressing near the edge of the screen, and then swiped open. The traditional three-key navigation system used since Android "Honeycomb" remains supported as an option, along with the two-button "pill" style navigation introduced in Android 9.0 Pie.
Per Google certification requirements, OEMs are required to support Android 10's default gestures and three-key navigation. OEMs are free to add their own gestures alongside them. However, they must not be enabled by default, they must be listed in a separate area one level deeper than other navigation settings, and they cannot be promoted using notifications. The two-key gesture navigation system used on Android Pie is deprecated, and may not be included on devices that ship with Android 10. However, it can still be included as an option for continuity purposes on devices upgraded from Pie.
User experience
Android 10 includes a system-level dark mode. Third-party apps can automatically engage a dark mode when it is active.
Apps can also present "settings panels" for specific settings (such as, for example, internet connection and Wi-Fi settings if an app requires internet) via overlay panels, so that the user does not have to be taken outside of the app in order to configure them.
Privacy and security
Several major security and privacy changes are present in Android 10: apps can be restricted by users to only having access to location data when they are actively being used in the foreground. There are also new restrictions on the launching of activities by background apps. For security (due to its use by clickjacking malware) and performance reasons, Android 10 Go Edition forbids use of overlays, except for apps that received the permission before a device was upgraded to Android 10.
Encryption
In February 2019, Google unveiled Adiantum, an encryption cipher designed primarily for use on devices that do not have hardware-accelerated support for the Advanced Encryption Standard (AES), such as low-end devices. Google stated that this cipher was five times faster than AES-256-XTS on an ARM Cortex-A7 CPU. Therefore, device encryption is now mandatory on all Android 10 devices, regardless of specifications, using Adiantum if their CPU is not capable of hardware-accelerated AES. In addition, implementation of "file-based encryption" (first introduced in Android Nougat) is also mandatory for all devices.
On devices shipping with Android 10, security patches for selected system components (such as ANGLE, Conscrypt, media frameworks, networking components, and others) may be serviced via Google Play Store, without requiring a complete system update ("Project Mainline"). In order to license Google Mobile Services, manufacturers must support these updates for specific modules, while the remainder are marked as "recommended" but optional. Selected modules within this system use the new APEX package format, a variation of APK files designed for housing and servicing low-level system components.
Scoped storage
A major change to storage access permissions known as "Scoped storage" is supported on Android 10, and became mandatory for all apps beginning with Android 11. Apps are only allowed to access files in external storage that they had created themselves (preferably contained within an app-specific directory), and audio, image, and video files contained within the Music, Pictures, or Videos directories. Any other file may only be accessed via user intervention through the backwards-incompatible Google Storage Access Frameworks.
Apps must have a new "read privileged phone state" permission in order to read non-resettable device identifiers, such as IMEI number.
Transport Layer Security
TLS 1.3 support is also enabled by default.
Platform
Platform optimizations have been made for foldable smartphones, including app continuity when changing modes, changes to multi-window mode to allow all apps to run simultaneously (rather than only the actively-used app running, and all others being considered "paused"), and additional support for multiple displays.
"Direct Share" has been succeeded by "sharing shortcuts". As before, it allows apps to return lists of direct targets for sharing (such as a combination of an app and a specific contact) for use within share menus. Unlike Direct Share, apps publish their targets in advance and do not have to be polled at runtime, improving performance.
Native support has been added for MIDI controllers, the AV1 video codec, the Opus audio codec, and HDR10+. There is also a new standard API for retrieving depth information from camera photos, which can be used for more advanced effects. Native support for aptX Adaptive, LHDC, LLAC, CELT and AAC LATM codecs was added as well.
Android 10 supports WPA3 encryption protocol and Enhanced Open, which introduce opportunistic encryption for Wi-Fi. Android 10 adds support for Dual-SIM dual-standby (DSDS), but is initially only available on the Pixel 3a and Pixel 3a XL.
Android 10 Go Edition has performance improvements, with Google stating that apps would launch 10% quicker than on Pie.
RISC-V support
In 2021, Android 10 was ported to the RISC-V architecture by Chinese-owned T-Head Semiconductor. T-Head Semiconductor managed to get Android 10 running on a triple-core, 64-bit, RISC-V CPU of their own design.
See also
Android version history
References
External links
Android (operating system)
2019 software |
https://ko.wikipedia.org/wiki/%EC%A0%80%EC%82%B0%EC%86%8C%EC%A6%9D%20%EC%9C%A0%EB%8F%84%EC%9D%B8%EC%9E%90 | 저산소증 유도인자 | 저산소증 유도인자(低酸素症誘導因子, , HIF)는 세포에 대한 산소 공급이 부족 상태에 빠진 경우에 유도되는 단백질이며 전사 인자로 기능을한다.
발견
HIF 전사 복합체는 1995년, Gregg L. Semenza와 박사 후 연구원 Guang Wang에 의해 발견되었다. 2016년에, William kaaelin Jr, Peter J. Ratcliffe와 Gregg L. Semenza는 산소의 감지에서 HIF-1이 하는 역할과 저산소 환경에서의 생존에서 HIF-1이 하는 역할을 규명한 공로로 the Lasker Award를 수상하였다. 2019년에 이들 3명은 산소 공급량에 대해 세포적으로 감지하고 적응하는 방법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구조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산소 호흡 생물은 고도로 보존된 전사 복합체 HIF-1을 발현하는데, 이는 알파와 베타 서브 유닛으로 구성된 이형 복합체이고, 베타 서브 유닛은 아릴 탄화수소 핵 전위체로 구성된다. HIF-1은 전사 인자 중 기본 나선-고리-나선에서 PER-ARNT-SIM에 속한다. 알파와 베타 서브유닛은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구성
기능
조혈 줄기세포에서의 HIFα 발현은 한 생물체의 생활 사이클에서 오랜 시간 동안 줄기 세포의 잠재성을 보존하기 위해 낮은 산소 비율에서 대사학적으로 유지되는 줄기세포의 정지 본능으로 설명된다.
HIF 신호가 세포에서 저산소 환경의 영향, 낮은 산소 농도를 조정한다. 저산소 환경은 종종 차별화로부터 보존한다. 그러나, 저산소 환경은 혈관의 형성을 촉진하고, 배아와 종양에서 혈관계의 형성에 중요하다. 상처에서 저산소 환경은 또한 각질 세포의 이동과 상피 세포의 회복을 촉진한다.
일반적으로, HIF는 발달에 필수적이다. 포유동물에서, HIF-1 유전자를 제거하면 분만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HIF-1은 연골 세포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뼈의 판의 생존을 통해 세포가 저산소 상태에 적응하게 한다. HIF는 사람의 물질대사 규칙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복구 및 재생
보통의 상황에서 부상을 입은 후, HIF-1α는 프롤린 하이드록실화 효소에의 해 줄어든다. 2018년 6월에, 과학자들은 재생 반응을 할 수 있는 포유류에서 PHD 억제제가 결실되거나 피해를 입은 조직을 재생하면서 HIF-1α의 조절이 지속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계속된 HIF-1α의 규제가 이전의 결실된 조직에서 재생 반응을 보이던 포유류들에서 흉터 반응을 동반한 치유를 일으킨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HIF-1α의 조절 작용은 포유동물의 재생을 조절하는 핵심 작용일 수 있다.
의학적 목표
빈혈
최근에, HIF 프롤린 하이드록실화효소 저해제에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몇몇 약물은 발전해왔다. 가장 눈에 띄는 화합물은 Roxadustat, Roxadustat, Daprodustat, Desidustat, Molidustat인데, 모두 빈혈의 치료를 위해 경구 섭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부류에서 다른 중요한 화합물은MK-8617, YC-1, IOX-2, 2-methoxyestradiol, GN-44028, AKB-4924, Bay 87-2243, FG-2216, FG-4497를 포함하는데, 이것들은 연구에만 쓰이고 사람의 의약품 목적으로는 개발되지 않았다. 프롤린 하이드록실화효소 저해를 통해, 신장에서의 HIF-2α의 안정성이 높아지는데, 이는 에리트로포이에틴의 내생성을 일으킨다. 두 파이브로겐 화합물 모두 2단계 임상시험까지 진행되었지만, 이것들은 그것들은 2007년 5월 극발성 간염 때문에 FG-2216을 복용한 공판 참여자의 죽음으로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확실히 FG-2236의 복용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FG-4592의 추가 실험의 보류는 2008년에 진행되었고, 그 후 FDA는 파이브로겐에 대한 철저한 대응을 검토하고 승인했다. Roxadustat, vadadustat, daprodustat, molidustat는 모두 신장성 빈혈의 치료를 위한 3단계 임상시험까지 진행되었다.
염증과 암
다른 예상들과 위에서 설명한 치료법과는 달리, 최근의 연구는 정상 산소 상태에서의 HIF의 도입이 만성 염증 성분이 있는 질병 환경에서 심각한 결과를 일으킬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만성 염증이 자급자족하고, 이상 활동을 보이는 번역 인자에 의해 미세 환경을 변형한다는 것 또한 보였다. 그 결과, 성장인자, 케모카인, 사이토카인, ROS 균형에서의 변형이 세포적 환경에서 암의 새로운 발달과 전이에 필요한 성장과 생존의 축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NF-와 HIF, 두 중요한 핵심 번역 인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는 약물 발달의 과정을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생각된다.
HIF 활동은 암과 종양의 성장에 필요한 혈관의 형성 또한 포함한다. 그래서 phenethyl isothiocyanate같은 HIF 방해 인자와 Acriflavine은 (2006년 이래로) 항암 효과에 대해 연구되고 있다.
신경학
쥐에게 수행된 연구는 HIF 프롤린 하이드록실화 저해 효소를 이용한 안정된 HIF가 에리트로포이에틴 효과를 증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마의 기억력을 신장시킬 수 있음을 시사한다. ML-228과 같은 HIF 경로 활성화 효소가 신경 보호 효과를 가질 것으로 보이며, 뇌졸중과 척수 손상의 잠재적인 대안으로써 주목된다.
전사인자
인간 1번 염색체상 유전자
인간 2번 염색체상 유전자
인간 14번 염색체상 유전자
인간 19번 염색체상 유전자 | https://en.wikipedia.org/wiki/Hypoxia-inducible%20factor | Hypoxia-inducible factor | Hypoxia-inducible factors (HIFs) are transcription factors that respond to decreases in available oxygen in the cellular environment, or hypoxia. They are only present in parahoxozoan animals.
Discovery
The HIF transcriptional complex was discovered in 1995 by Gregg L. Semenza and postdoctoral fellow Guang Wang. In 2016, William Kaelin Jr., Peter J. Ratcliffe and Gregg L. Semenza were presented the Lasker Award for their work in elucidating the role of HIF-1 in oxygen sensing and its role in surviving low oxygen conditions. In 2019, the same three individuals were jointly awarded the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for their work in elucidating how HIF senses and adapts cellular response to oxygen availability.
Structure
Oxygen-breathing species express the highly conserved transcriptional complex HIF-1, which is a heterodimer composed of an alpha and a beta subunit, the latter being a constitutively-expressed aryl hydrocarbon receptor nuclear translocator (ARNT). HIF-1 belongs to the PER-ARNT-SIM (PAS) subfamily of the basic helix-loop-helix (bHLH) family of transcription factors. The alpha and beta subunit are similar in structure and both contain the following domains:
N-terminus – a bHLH domain for DNA binding
central region – Per-ARNT-Sim (PAS) domain, which facilitates heterodimerization
C-terminus – recruits transcriptional coregulatory proteins
Members
The following are members of the human HIF family:
Function
HIF1α expression in haematopoietic stem cells explains the quiescence nature of stem cells for being metabolically maintaining at a low rate so as to preserve the potency of stem cells for long periods in a life cycle of an organism.
The HIF signaling cascade mediates the effects of hypoxia, the state of low oxygen concentration, on the cell. Hypoxia often keeps cells from differentiating. However, hypoxia promotes the formation of blood vessels, and is important for the formation of a vascular system in embryos and tumors. The hypoxia in wounds also promotes the migration of keratinocytes and the restoration of the epithelium. It is therefore not surprising that HIF-1 modulation was identified as a promising treatment paradigm in wound healing.
In general, HIFs are vital to development. In mammals, deletion of the HIF-1 genes results in perinatal death. HIF-1 has been shown to be vital to chondrocyte survival, allowing the cells to adapt to low-oxygen conditions within the growth plates of bones. HIF plays a central role in the regulation of human metabolism.
Mechanism
The alpha subunits of HIF are hydroxylated at conserved proline residues by HIF prolyl-hydroxylases, allowing their recognition and ubiquitination by the VHL E3 ubiquitin ligase, which labels them for rapid degradation by the proteasome. This occurs only in normoxic conditions. In hypoxic conditions, HIF prolyl-hydroxylase is inhibited, since it utilizes oxygen as a cosubstrate.
Inhibition of electron transfer in the succinate dehydrogenase complex due to mutations in the SDHB or SDHD genes can cause a build-up of succinate that inhibits HIF prolyl-hydroxylase, stabilizing HIF-1α. This is termed pseudohypoxia.
HIF-1, when stabilized by hypoxic conditions, upregulates several genes to promote survival in low-oxygen conditions. These include glycolysis enzymes, which allow ATP synthesis in an oxygen-independent manner, and vascular endothelial growth factor (VEGF), which promotes angiogenesis. HIF-1 acts by binding to hypoxia-responsive elements (HREs) in promoters that contain the sequence 5'-RCGTG-3' (where R is a purine, either A or G). Studies demonstrate that hypoxia modulates histone methylation and reprograms chromatin. This paper was published back-to-back with that of 2019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winner for Medicine William Kaelin Jr. This work was highlighted in an independent editorial.
It has been shown that muscle A kinase–anchoring protein (mAKAP) organized E3 ubiquitin ligases, affecting stability and positioning of HIF-1 inside its action site in the nucleus. Depletion of mAKAP or disruption of its targeting to the perinuclear (in cardiomyocytes) region altered the stability of HIF-1 and transcriptional activation of genes associated with hypoxia. Thus, "compartmentalization" of oxygen-sensitive signaling components may influence the hypoxic response.
The advanced knowledge of the molecular regulatory mechanisms of HIF1 activity under hypoxic conditions contrast sharply with the paucity of information on the mechanistic and functional aspects governing NF-κB-mediated HIF1 regulation under normoxic conditions. However, HIF-1α stabilization is also found in non-hypoxic conditions through an unknown mechanism. It was shown that NF-κB (nuclear factor κB) is a direct modulator of HIF-1α expression in the presence of normal oxygen pressure. siRNA (small interfering RNA) studies for individual NF-κB members revealed differential effects on HIF-1α mRNA levels, indicating that NF-κB can regulate basal HIF-1α expression. Finally, it was shown that, when endogenous NF-κB is induced by TNFα (tumour necrosis factor α) treatment, HIF-1α levels also change in an NF-κB-dependent manner. HIF-1 and HIF-2 have different physiological roles. HIF-2 regulates erythropoietin production in adult life.
Repair, regeneration and rejuvenation
In normal circumstances after injury HIF-1a is degraded by prolyl hydroxylases (PHDs). In June 2015, scientists found that the continued up-regulation of HIF-1a via PHD inhibitors regenerates lost or damaged tissue in mammals that have a repair response; and the continued down-regulation of Hif-1a results in healing with a scarring response in mammals with a previous regenerative response to the loss of tissue. The act of regulating HIF-1a can either turn off, or turn on the key process of mammalian regeneration. One such regenerative process in which HIF1A is involved is skin healing. Researchers at the Stanford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demonstrated that HIF1A activation was able to prevent and treat chronic wounds in diabetic and aged mice. Not only did the wounds in the mice heal more quickly, but the quality of the new skin was even better than the original. Additionally the regenerative effect of HIF-1A modulation on aged skin cells was described and a rejuvenating effect on aged facial skin was demonstrated in patients. HIF modulation has also been linked to a beneficial effect on hair loss. The biotech company Tomorrowlabs GmbH, founded in Vienna in 2016 by the physician Dominik Duscher and pharmacologist Dominik Thor, makes use of this mechanism. Based on the patent-pending HSF ("HIF strengthening factor") active ingredient, products have been developed that are supposed to promote skin and hair regeneration.
As a therapeutic target
Anemia
Several drugs that act as selective HIF prolyl-hydroxylase inhibitors have been developed. The most notable compounds are: Roxadustat (FG-4592); Vadadustat (AKB-6548), Daprodustat (GSK1278863), Desidustat (ZYAN-1), and Molidustat (Bay 85-3934), all of which are intended as orally acting drugs for the treatment of anemia. Other significant compounds from this family, which are used in research but have not been developed for medical use in humans, include MK-8617, YC-1, IOX-2, 2-methoxyestradiol, GN-44028, AKB-4924, Bay 87-2243, FG-2216 and FG-4497. By inhibiting prolyl-hydroxylase enzyme, the stability of HIF-2α in the kidney is increased, which results in an increase in endogenous production of erythropoietin. Both FibroGen compounds made it through to Phase II clinical trials, but these were suspended temporarily in May 2007 following the death of a trial participant taking FG-2216 from fulminant hepatitis (liver failure), however it is unclear whether this death was actually caused by FG-2216. The hold on further testing of FG-4592 was lifted in early 2008, after the FDA reviewed and approved a thorough response from FibroGen. Roxadustat, vadadustat, daprodustat and molidustat have now all progressed through to Phase III clinical trials for treatment of renal anemia.
Inflammation and cancer
In other scenarios and in contrast to the therapy outlined above, research suggests that HIF induction in normoxia is likely to have serious consequences in disease settings with a chronic inflammatory component. It has also been shown that chronic inflammation is self-perpetuating and that it distorts the microenvironment as a result of aberrantly active transcription factors. As a consequence, alterations in growth factor, chemokine, cytokine, and ROS balance occur within the cellular milieu that in turn provide the axis of growth and survival needed for de novo development of cancer and metastasis. These results have numerous implications for a number of pathologies where NF-κB and HIF-1 are deregulated, including rheumatoid arthritis and cancer. Therefore, it is thought that understanding the cross-talk between these two key transcription factors, NF-κB and HIF, will greatly enhance the process of drug development.
HIF activity is involved in angiogenesis required for cancer tumor growth, so HIF inhibitors such as phenethyl isothiocyanate and Acriflavine are (since 2006) under investigation for anti-cancer effects.
Neurology
Research conducted on mice suggests that stabilizing HIF using an HIF prolyl-hydroxylase inhibitor enhances hippocampal memory, likely by increasing erythropoietin expression. HIF pathway activators such as ML-228 may have neuroprotective effects and are of interest as potential treatments for stroke and spinal cord injury.
von Hippel–Lindau disease-associated renal cell carcinoma
Belzutifan is an hypoxia-inducible factor-2α inhibitor under investigation for the treatment of von Hippel–Lindau disease-associated renal cell carcinoma.
See also
HIF-1α
References
External links
PDBe-KB provides an overview of all the structure information available in the PDB for Human Hypoxia-inducible factor 1-alpha
PDBe-KB provides an overview of all the structure information available in the PDB for Human Aryl hydrocarbon receptor nuclear translocator
PDBe-KB provides an overview of all the structure information available in the PDB for Human Endothelial PAS domain-containing protein 1
PDBe-KB provides an overview of all the structure information available in the PDB for Human Hypoxia-inducible factor 3-alpha
short scientific animation visualises the crystal structure of the Heterodimeric HIF-1a:ARNT Complex with HRE DNA
Developmental genes and proteins
Transcription factors
World Anti-Doping Agency prohibited substances |
https://ko.wikipedia.org/wiki/%ED%81%AC%EB%A1%A0%EB%B0%94%ED%9D%90%20%EC%95%8C%ED%8C%8C%20%EA%B3%84%EC%88%98 | 크론바흐 알파 계수 | 타우동등신뢰도(tau-equivalent reliability, )는 크론바흐 알파(Cronbach's alpha)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단일 실행 신뢰도(즉, 고정된 시간에서 여러 항목에 대한 응답자의 신뢰도) 계수이다. 는 단일 실행 신뢰도 계수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흔히 사용되지만, 최근 연구들은 이 계수를 무조건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 의 대안으로 흔히 언급되는 것은 구조방정식 기반 신뢰도 계수(예: 동류신뢰도)이다.
공식과 계산
체계적 공식과 관행적 공식
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검사에서 번째 항목의 (관찰) 점수를 , 그 분산을 라고 하자. 각 항목 점수의 합을 , 그 분산을 라고 하자. 와 간의 공분산을 라고 하자. 는 항목 분산의 합과 항목간 공분산의 합으로 구성된다. 즉, . 항목간 공분산의 평균을 이라고 하자. 즉, 이다. 의 공식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우선, 이해하기 쉬운 "체계적 공식"은 다음과 같다.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관행적 공식은 다음과 같다.
계산 예
올바른 자료에 적용한 경우
타우동등의 조건을 만족하는 다음의 자료에 를 적용해 보자.
이므로, 이다.
올바르지 않은 자료에 적용한 경우
타우동등의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다음의 자료에 를 적용해 보자.
이고 이므로, 이다.
같은 자료에 동류 신뢰도를 적용한 결과와 비교할 수 있다.
타우동등신뢰도의 전제조건
를 신뢰도 계수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료가 다음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1) 단일차원이다.
2) (본질적으로) 타우동등하다.
단일차원 평행, 타우동등, 동류 조건
평행 조건
평행한 (parallel) 자료는 모집단 수준에서 모든 항목간 공분산(공분산 행렬의 비대각 요소)이 같고, 모든 분산(공분산 행렬의 대각 요소)이 같다. 예를 들어, 다음의 자료는 평행 조건을 충족한다. 평행한 자료에서, 공분산 행렬 대신 상관관계 행렬을 사용하더라도 정보의 손실이 없다. 모든 평행한 자료는 타우동등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즉, 세 조건 중 평행 조건이 가장 충족되기 어렵다.
타우동등 조건
타우동등한 (tau-equivalent) 자료는 모집단 수준에서 모든 공분산이 같아야 한다. 분산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의 자료는 타우동등 조건을 충족한다. 타우동등한 자료에서 모든 항목은 동일한 변별력 혹은 중요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아래의 자료에서 모든 항목은 동일한 변별력을 갖는다. 모든 타우동등한 자료는 동류이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동류 조건
동류 (congeneric) 자료는 모집단 수준에서 모든 공분산과 분산이 다를 수 있다. 단, 단일차원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의 자료는 동류 조건을 충족한다. 동류 자료에서 모든 항목은 서로 다른 변별력 혹은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래의 자료에서 2번째 항목은 1번째 항목보다 4배 더 큰 변별력을 갖는다.
다른 신뢰도 계수들과의 관계
신뢰도 계수의 체계적 분류
수많은 신뢰도계수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서로 관련이 깊고 자주 사용되는 신뢰도 계수들의 관행적 명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행의 이름과 열의 이름을 조합하면 해당 신뢰도 계수의 전제조건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크론바흐 알파와 거트먼의 은 단일차원 및 타우동등의 조건에서 유도되는 신뢰도 계수이다.
관행적 명칭은 무질서하고 비체계적이다. 마치 사용자들에게 최대한의 혼동과 오해를 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관행적 명칭은 각 계수의 성격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거나, 혹은 부정확한 정보(예: 표준화된 알파)를 준다. 관행적 명칭은 비일관적이다. 어떤 것은 공식이고, 어떤 것은 계수이다. 어떤 것은 최초 개발자의 이름이 붙고, 어떤 것은 최초 개발자도 아닌 사람의 이름이 붙고, 다른 것은 어떤 사람의 이름도 붙지 않는다. 같은 공식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지칭되는가 하면, 서로 다른 공식이 같은 이름(예: 여러 알파 및 오메가)으로 지칭된다. 이들 신뢰도 계수에 대해 제안된 체계적 명칭과 그 표기는 다음과 같다.
평행신뢰도와의 관계
타우동등 신뢰도()는 흔히 크론바흐 알파 혹은 알파 계수로, 평행신뢰도()는 흔히 표준화된 알파라는 이름으로 지칭된다. 알파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어 와 가 같은 신뢰도 계수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흔하다. 를 표준화된 알파로 지칭하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 크론바흐는 이 계수를 알파라고 지칭하지 않았고, 이 계수의 사용을 권장하지도 않았다. 는 1970년대 이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SPSS가 를 표준화된 알파라는 이름으로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이 계수가 가끔씩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는 보다 더 엄격한 조건인 평행 조건을 요구하며, 이 계수의 사용은 권장되지 않는다.
반분 타우동등 신뢰도와의 관계
모든 가능한 반분에 대해 반분 타우동등 신뢰도()를 계산한다고 가정하자. 그 평균값()은 타우동등 신뢰도()와 같다. 크론바흐가 증명한 이 관계는 의 직관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의 과소추정 성향, 즉 타우동등하지 않은 자료에 가 적용될 경우 신뢰도보다 작다는 수학적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의 과소추정을 감안하면 평균값이 아니라 최댓값()이 신뢰도에 더 가깝다. 의 잠재적 유용성은 크론바흐의 증명 이전에 거트먼에 의해 이미 언급된 적이 있다. 한 비교연구에 의하면 는 조사에 포함된 신뢰도 계수중에서 가장 정확하다. 르벨은 의 최솟값()을 베타 계수로 지칭하며, 베타가 다른 신뢰도 계수는 보여주지 못하는 보완적 정보를 제시한다고 추천한다.
동류 신뢰도와의 관계
단일차원과 타우동등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자료에 적용될 경우, 와 동류신뢰도()의 값은 같다.
단일차원은 만족하지만, 타우동등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자료에 를 적용하면, 보다 작다.
와 를 모두 보고한 연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는 보다 평균적으로 .02 작다.
는 다음으로 흔히 사용되는 신뢰도 계수이다. 사용자들은 를 대신해서 를 사용하기 보다는, 둘 다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다차원 신뢰도 계수와의 관계
를 다차원 자료에 적용하면, 그 값은 다차원 신뢰도 계수보다는 작고, 보다는 크다.
역사
쿠더-리처드슨 (1937) 이전
쿠더-리처드슨 이전에는 반분 평행 신뢰도()만이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모든 항목들을 임의의 반분(예: 짝-홀, 앞-뒤)으로 나눈 후, 를 적용하여 신뢰도 추정치를 얻었다. 이 방법의 문제는 어떤 반분이 선택되느냐에 따라 신뢰도 추정치가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20여 년 동안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다.
쿠더-리처드슨 (1937)의 연구
쿠더-리처드슨 (1937)은 기존의 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신뢰도 계수를 제안하였다. 그들은 신뢰도 계수에 별도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이 발표한 여러 공식들 중 식 20이 이다. 이 공식은 흔히 쿠더-리처드슨 식 20, 혹은 KR-20으로 지칭된다. 쿠더-리처드슨 (1937)은 관찰 점수가 이분적(예: 정답/오답)인 경우에 대해 다루었으므로, KR-20은 의 관행적 공식과 약간 다르게 표현되었다. 를 항목 의 정답 비율, 를 항목 의 오답 비율이라고 하자 (). KR-20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이므로 KR-20은 와 동일한 의미이다.
쿠더-리처드슨 (1937)과 크론바흐(1951) 사이의 연구
KR-20의 일반식을 발표한 여러 연구
쿠더-리처드슨 (1937)은 을 유도하기 위해 불필요한 제약조건을 제시하였다. 을 쿠더-리처드슨 (1937)과 다른 방식으로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가 다수 발표되었다.
호잇 (1941)은 ANOVA(Analysis of variance)를 이용하여 를 유도하였다. 호잇을 KR-20의 일반식에 대한 최초의 연구로 볼 수도 있지만, 그는 의 공식을 제시하지 않았다. 의 현대적 공식을 최초로 표현한 것은 잭슨과 퍼거슨 (1941)이다. 그들이 제시한 버전은 아래와 같다. 에저턴과 톰슨 (1942)도 같은 버전을 이용하였다.
거트먼 (1945)은 여섯 개의 신뢰도 공식을 유도하였으며, 각각을 으로 표기하였다. 그는 이 공식들이 모두 신뢰도보다 항상 작거나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으며,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이 공식들을 '신뢰도의 하한선'이라고 지칭하였다. 거트먼의 가 이며, 가 이다. 그는 가 보다 항상 크거나 같다 (즉, 더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 당시에는 모든 계산을 손으로 하던 시기였으며 의 공식이 더 계산하기 간단하였으므로 그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 가 유용하다고 언급하였다.
굴릭센 (1950)은 기존 연구들보다 더 적은 가정만으로 을 유도하였다. 그가 사용한 가정은 현대적 용어로 본질적 타우동등 조건과 같다.
KR-20의 원래 식과 일반식의 관계에 대한 당시의 인식
두 공식은 정확히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KR-20의 일반식이라는 표현도 사용되지 않았다. 호잇은 자신의 방법이 KR-20과 “정확히 같은 결과를 낸다"(p.156)고 설명하였고,잭슨과 퍼거슨도 두 공식이 "똑같다(identical)" (p.74)고 언급하였으며, 거트먼은 가 KR-20와 ”대수적으로 똑같다" (p.275)고 하였고, 굴릭센도 두 공식이“똑같다" (p.224)고 인정하였다. KR-20에 비판적인 연구들조차 KR-20의 원래 식이 이분적 자료에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단점으로 지적하지 않았다.
KR-20의 과소추정 성향에 대한 당시의 논란
가 신뢰도를 과소추정한다는 것은 이 공식의 개발자들도 언급하였다. 후속 연구는은 의 이 특성 만으로도 (신뢰도를 과소추정할지 과다추정할지 알 수 없는) 반분 신뢰도 기법보다 추천할 만하다고 주장하였다. 크론바흐 (1943)는의 과소추정 성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의 과소추정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음수의 값도 도출될 수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그는 가 반분 신뢰도 기법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으로 권장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크론바흐 (1951)의 연구
기존 연구들과 마찬가지로, 크론바흐 (1951)는 를 유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안하였다. 그의 해석은 기존 연구들의 것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웠다. 즉, 그는 가 모든 가능한 반분에서 얻어진 의 평균과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또한 그는 KR-20이라는 이름이 이상하다고 언급하면서 coefficient alpha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안하였다. 그의 접근은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핵심적 사실을 누락하였을 뿐 아니라, 부정확한 설명을 제시하였다.
첫째, 그는 coefficient alpha가 KR-20의 일반식이라는 해석을 제시하였지만, 기존의 다른 연구들도 정확히 같은 공식을 발표하였다는 설명을 생략하였다. 따라서 배경지식 없이 크론바흐 (1951)만을 읽은 사람들은 그가 KR-20의 일반식을 처음 개발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둘째, 그는 가 언제 신뢰도와 같은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비전문가들은 가 전제조건에 관계없이 모든 자료에 사용할 수 있는 신뢰도 계수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셋째, 그는 자신이 에 대한 태도를 왜 바꿨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강력히 비판하던 의 과소추정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았다.
넷째, 그는 높은 값은 자료의 동질성 혹은 단일차원성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크론바흐 (1951) 이후의 연구
노빅과 루이스 (1967)은 이 신뢰도와 같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증명하였으며, 이 조건을 본질적 타우동등이라고 명명하였다.
크론바흐 (1978)는 크론바흐 (1951)가 많은 인용을 받게 된 이유를 "흔한 공식에 브렌드 네임을 붙였기 때문" (p.263)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다른 유형의 신뢰도 계수(예: 평가자간 신뢰도, 검사-재검사 신뢰도)에 베타, 감마, 델타,...등의 이름을 연속적으로 붙일 계획이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었다고 설명하였다.
크론바흐와 샤벨슨 (2004)은 독자들에게 보다는 일반화 가능성이론의 사용을 권장하였다. 그는 Cronbach's alpha라는 이름의 사용에 반대하였다. 그는 KR-20의 일반식을 크론바흐 (1951)보다 먼저 발표한 기존 연구들의 존재를 명시적으로 부인하였다.
타우동등신뢰도에 대한 흔한 오해
타우동등신뢰도는 0과 1 사이의 값을 갖는다
정의에 의해, 신뢰도는 0보다 작을 수 없고, 1보다 클 수 없다. 많은 교과서들은 을 신뢰도와 동일시하며, 그 범위에 대한 부정확한 설명을 한다. 는 타우동등하지 않은 자료에 적용될 경우 신뢰도보다 작다. 2번 항목은 1번 항목의 값을 그대로 복사하고, 3번 항목은 1번 항목의 값에 –1을 곱하여 복사했다고 하자. 항목간 공분산 행렬은 아래와 같으며, 이다.
음의 는 음의 변별력, 혹은 역항목 처리의 실수 등의 이유로 발생할 수 있다.
와 달리, 구조방정식 기반 신뢰도 계수들은 항상 0보다 같거나 크다.
이 이상현상은 를 비판하기 위해 Cronbach (1943)가 처음 지적했지만, Cronbach (1951)은 와 관련된 온갖 주제를 다루어서 Cronbach and Shavelson (2004)가 "백과사전적"(p.296)이라 묘사한 그의 논문에서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측정오차가 없으면 타우동등신뢰도는 1의 값을 갖는다
가 신뢰도를 과소추정하며, 신뢰도와 동일시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성이다. 2번 항목은 1번 항목의 값을 그대로 복사하고, 3번 항목은 1번 항목의 값에 2를 곱하여 복사했다고 하자. 항목간 공분산 행렬은 아래와 같으며, 이다.
위 자료에 대해 와 은 모두 1의 값을 갖는다.
높은 타우동등신뢰도 값은 자료의 동질성 혹은 단일차원성을 보여준다
많은 교과서들은 가 항목간 동질성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언급한다. 이것은 높은 값이 항목간 동질성을 보여준다는 크론바흐(1951)의 부정확한 설명에서 유래한다. 동질성은 요즘의 문헌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용어로서, 관련 연구들은 동질성이 항목 간 단일차원성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한다. 여러 연구들이 높은 값이 단일차원성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증명 혹은 반례를 제시했다.아래의 반례를 보자.
위의 단일차원 자료에서 이다.
위의 다차원 자료에서도 이다.
위의 자료에서는 로 높지만, 다차원이다.
위의 자료에서는 로 매우 낮지만, 단일차원이다.
단일차원성은 의 전제조건이다. 즉, 단일차원을 확인하기 위해 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를 구하기 전에 단일차원을 확인해야 한다.
높은 타우동등신뢰도 값은 자료의 내적일관성을 보여준다
내적 일관성이라는 용어는 신뢰도 문헌에서 흔히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이 용어는 때로는 특정한 종류의 신뢰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예: 내적 일관성 신뢰도), 외에 정확히 어떤 신뢰도 계수가 여기에 포함되는지는 불명확하다. 크론바흐 (1951)는 내적 일관성이라는 용어를 명시적 정의를 내리지 않고 여러 맥락에서 사용하였다. 조와 김 (2015)은 가 이 중 어떤 것의 지표도 아니라는 것을 보였다.
"alpha if item deleted"를 이용하여 항목을 제거하면 신뢰도는 항상 증가한다
"alpha if item deleted"를 이용하여 항목을 제거하면 표본 수준의 신뢰도 값이 모집단 수준의 신뢰도 값보다 더 높게 보고되는 '알파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으며, 실제 신뢰도 값은 오히려 낮아질 수도 있다.
신뢰도를 낮추는 항목의 제거는 통계적 근거 뿐만 아니라, 이론적 논리적 근거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또한 표본을 둘로 나누어 교차검증하는 것이 권장된다
신뢰도는 얼마나 높아야 하고,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
신뢰도 수준에 대한 너낼리의 권고
신뢰도 계수가 얼마 이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가장 자주 인용되는 원천은 너낼리의 책이다. 그러나 그의 권고 수준은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용되고 있다. 그의 의도는 연구의 목적이나 단계에 따라 다른 신뢰도 기준을 적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기 연구, 기초 연구, 응용 연구, 척도개발 연구 등 연구의 성격에 관계없이 .7의 신뢰도 기준이 사용되고 있다. 0.7이라는 수치는 너낼리가 연구의 초기 단계에 대해서 언급한 수치로서, 학술지에 게재된 대부분의 연구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7보다는 너낼리가 응용연구에 대해 언급한 .8이라는 기준이 대부분의 실증연구에 더 적합하다.
또한 권고 수준에 대한 그의 의도는 컷오프 포인트가 아니었다. 어떤 기준이 만약 컷오프 포인트를 의미한다면, 그것을 충족했는지의 여부가 중요할 뿐, 얼마나 넘었는지 혹은 모자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너낼리는 어떤 기준 (가령, .8)을 말할 때 엄밀하게 .8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8 근처의 어떤 범위를 의미하는 뉴앙스로 제시하였다.
또한 그의 아이디어는 신뢰도를 높이는 데에도 비용이 발생하므로, 모든 상황에서 최대한의 신뢰도를 얻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높은 신뢰도의 비용
많은 교과서들은 신뢰도 값이 클수록 바람직하다고 설명한다. 높은 신뢰도의 잠재적 부작용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원칙은 신뢰도에도 적용된다.
신뢰도와 타당성 간의 상충관계
완벽한 신뢰도를 갖는 측정은 타당성이 결여된다. 예를 들어, 신뢰도가 1인 시험에 응하는 수험자는 만점 혹은 0점만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한 항목에 정답 혹은 오답을 낸 수험자는 다른 모든 항목에도 똑같이 정답 혹은 오답을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뢰도를 증가시키기 위해 타당성이 희생되는 현상을 attenuation paradox라고 한다.
높은 신뢰도 값은 내용 타당성과 상충관계를 갖는다. 높은 내용타당성을 위해 각각의 항목은 측정하고자 하는 내용을 포괄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본질적으로 같은 질문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복해서 측정하는 전략이 흔히 사용되고 있다.
신뢰도와 경제성 간의 상충관계
다른 조건이 같을 때, 항목의 수가 증가하면 신뢰도도 증가한다. 그러나 항목 수의 증가는 측정의 경제성을 저해한다.
신뢰도를 증가시키는 전략
위에서 논의한 신뢰도 증가에 수반되는 비용에도 불구하고, 높은 신뢰도가 요구될 수 있다. 신뢰도를 증가시키기 위해 다음의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자료 수집 이전
측정 항목의 모호성을 제거한다.
응답자가 모르는 내용은 측정하지 않는다.
항목 수를 증가시킨다. 단, 측정의 경제성과의 상충관계를 고려한다.
신뢰도가 높다고 이미 알려진 척도를 사용한다.
사전조사를 실시한다. 신뢰도에 문제가 있는 척도를 미리 찾아낸다.
다른 항목들과 내용이나 형식이 다른 항목(예: 역항목)을 제외하거나 수정한다.
자료 수집 이후
"alpha if item deleted"를 이용하여 문제가 되는 항목을 제거한다. 단, 여기에는 논리적 이론적 근거가 수반되어야 한다.
보다 더 정확한 신뢰도 계수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는 보다 평균적으로 .02 크다.
어떤 신뢰도 계수를 사용해야 하는가?
타우동등신뢰도를 계속 사용해야 하는가?
는 압도적인 비율로 사용되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97% 이상의 연구가 신뢰도 계수로서 를 사용한다.
그러나 여러 신뢰도 계수들의 정확성을 비교한 시뮬레이션 연구들
은 가 부정확한 신뢰도 계수라는 공통된 결과를 도출하였다.
관련 연구들은 사용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기존 연구들의 결론을 단순화하여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조건적 사용: 특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에만 를 사용한다.
(2) 사용 반대: 는 열등하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타우동등신뢰도의 대안
모든 자료에 무조건적으로 을 사용하는 관행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들은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대신 어떤 신뢰도 계수를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고 있다.
여러 신뢰도 계수들의 정확성을 비교한 시뮬레이션 연구들마다 서로 다른 신뢰도 계수가 1위를 차지하였다.
다수 의견은 의 대안으로 구조방정식 기반 신뢰도 계수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구조방정식 기반 신뢰도 계수 (예: 단일차원 혹은 다차원 모형)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사용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대한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를 대안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는 신뢰도와 성격이 다르며, 그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이다.
구조방정식 기반 신뢰도 계수 중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것은 단일차원 모형에 기반한 이다.
구조방정식 기반 신뢰도 계수를 위한 소프트웨어
SPSS와 SAS 등의 범용 통계 소프트웨어는 를 계산해주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사용자들은 의 공식을 모르더라도 마우스 클릭 몇 번만으로 그 값을 얻을 수 있다.
AMOS, LISREL, MPLUS 등의 구조방정식 전용 소프트웨어는 구조방정식 기반 신뢰도 계수를 계산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사용자들이 직접 계산하는 것은 불편하고, 오류의 가능성도 높다. 아마도 이런 사용자 편의성의 부재로 인해 구조방정식 사용을 보고하는 연구들조차 구조방정식 기반 신뢰도 계수 대신 를 사용한다. 구조방정식 기반 신뢰도 계수를 자동적으로 계산하기 위한 다음의 대안이 있다.
1) R(무료): psych package는 여러 가지 신뢰도 계수를 계산할 수 있다.
2) EQS(유료): 구조방정식 전용 소프트웨어이며, 신뢰도 계수를 계산해 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
3) RelCalc(무료): Microsoft Excel이 있으면 사용가능하다. 구조방정식 전용 소프트웨어가 없어도 를 구할 수 있다. 또한 구조방정식 전용 소프트웨어의 결과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다차원 구조방정식 신뢰도 계수를 계산할 수 있다.
공식의 유도
<가정 1> 항목의 관찰점수는 항목의 진점수와, (진점수와 독립인) 항목의 오차로 구성된다.
<보조정리>
<가정 2> 오차는 서로 독립이다.
<가정 3> (본질적 타우동등 가정) 항목의 진점수는 항목 공통의 진점수와 항목의 상수로 구성된다.
이고, 를 진점수 분산이라고 한다.
<정의> 신뢰도는 진점수 분산과 관찰점수 분산의 비율이다.
의 분산을 , 의 분산을 라고 할 때, 위의 가정들로부터 다음의 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항목간 공분산 행렬은 다음과 같다.
은 항목간 공분산의 평균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위의 가정을 만족할 때의 신뢰도를 라고 하자. 는 다음과 같다.
참고 문헌
통계학
심리측정학 | https://en.wikipedia.org/wiki/Cronbach%27s%20alpha | Cronbach's alpha | Cronbach's alpha (Cronbach's ), also known as rho-equivalent reliability () or coefficient alpha (coefficient ), is a reliability coefficient and a measure of the internal consistency of tests and measures.
Numerous studies warn against using Cronbach's alpha unconditionally. Statisticians regard reliability coefficients based on structural equation modeling (SEM) or generalizability theory as superior alternatives in many situations.
History
Lee Cronbach first referred to the coefficient as Coefficient alpha in his initial 1951 publication. That paper also described an additional derivation. Coefficient alpha had been used implicitly in previous studies, but his interpretation was thought to be more intuitively attractive relative to previous studies and it became quite popular.
In 1967, Melvin Novick and Charles Lewis proved that is equal to reliability if the true scores of the compared tests or measures vary by a constant, which is independent of the persons measured. In this case, the tests or measurements are said to be "essentially tau-equivalent".
In 1978, Cronbach asserted that the reason his initial 1951 publication was widely cited was "mostly because [he] put a brand name on a common-place coefficient." He explained that he had originally planned to name other types of reliability coefficients, such as those used in inter-rater reliability and test-retest reliability, after consecutive Greek letters (i.e., , , etc.), but later changed his mind.
Later, in 2004, Cronbach and Richard Shavelson encouraged readers to use generalizability theory rather than . Cronbach opposed the use of the name Cronbach's alpha" and explicitly denied the existence of studies that had published the general formula of KR-20 before Cronbach's 1951 publication of the same name.
Prerequisites for using Cronbach's alpha
To use Cronbach's alpha as a reliability coefficient, the following conditions must be met:
The data is normally distributed and linear;
The compared tests or measures are essentially tau-equivalent;
Errors in the measurements are independent.
Formula and calculation
Cronbach's alpha is calculated by taking a score from each scale item and correlating it with the total score for each observation. The resulting correlations are then compared with the variance for all individual item scores. Cronbach's alpha is best understood as a function of the number of questions or items in a measure, the average covariance between pairs of items, and the overall variance of the total measured score. represents the number of items in the measure
the variance associated with each item i
the variance associated with the total scores
Alternatively, it can be calculated through the following formula:
where
represents the average variance
represents the average inter-item covariance.
Common misconceptions
The value of Cronbach's alpha ranges between zero and one
By definition, reliability cannot be less than zero and cannot be greater than one. Many textbooks mistakenly equate with reliability and give an inaccurate explanation of its range. can be less than reliability when applied to data that are not essentially tau-equivalent. Suppose that copied the value of as it is, and copied by multiplying the value of by -1.
The covariance matrix between items is as follows, .
Negative can occur for reasons such as negative discrimination or mistakes in processing reversely scored items.
Unlike , SEM-based reliability coefficients (e.g., ) are always greater than or equal to zero.
This anomaly was first pointed out by Cronbach (1943) to criticize , but Cronbach (1951) did not comment on this problem in his article that otherwise discussed potentially problematic issues related .
If there is no measurement error, the value of Cronbach's alpha is one.
This anomaly also originates from the fact that underestimates reliability.
Suppose that copied the value of as it is, and copied by multiplying the value of by two.
The covariance matrix between items is as follows, .
For the above data, both and have a value of one.
The above example is presented by Cho and Kim (2015).
A high value of Cronbach's alpha indicates homogeneity between the items
Many textbooks refer to as an indicator of homogeneity between items. This misconception stems from the inaccurate explanation of Cronbach (1951) that high values show homogeneity between the items. Homogeneity is a term that is rarely used in modern literature, and related studies interpret the term as referring to uni-dimensionality. Several studies have provided proofs or counterexamples that high values do not indicate uni-dimensionality. See counterexamples below.
in the uni-dimensional data above.
in the multidimensional data above.
The above data have , but are multidimensional.
The above data have , but are uni-dimensional.
Uni-dimensionality is a prerequisite for . One should check uni-dimensionality before calculating rather than calculating to check uni-dimensionality.
A high value of Cronbach's alpha indicates internal consistency
The term "internal consistency" is commonly used in the reliability literature, but its meaning is not clearly defined. The term is sometimes used to refer to a certain kind of reliability (e.g., internal consistency reliability), but it is unclear exactly which reliability coefficients are included here, in addition to . Cronbach (1951) used the term in several senses without an explicit definition. Cho and Kim (2015) showed that is is not an indicator of any of these.
Removing items using "alpha if item deleted" always increases reliability
Removing an item using "alpha if item deleted" may result in 'alpha inflation,' where sample-level reliability is reported to be higher than population-level reliability. It may also reduce population-level reliability. The elimination of less-reliable items should be based not only on a statistical basis but also on a theoretical and logical basis. It is also recommended that the whole sample be divided into two and cross-validated.
Ideal reliability level and how to increase reliability
Nunnally's recommendations for the level of reliability
Nunnally's book is often mentioned as the primary source for determining the appropriate level of dependability coefficients. However, his proposals contradict his aims as he suggests that different criteria should be used depending on the goal or stage of the investigation. Regardless of the type of study, whether it is exploratory research, applied research, or scale development research, a criterion of 0.7 is universally employed. He advocated 0.7 as a criterion for early stages of a study, most studies published in the journal do not fall under that category. Rather than 0.7, Nunnally's applied research criterion of 0.8 is more suited for most empirical studies.
His recommendation level did not imply a cutoff point. If a criterion means a cutoff point, it is important whether or not it is met, but it is unimportant how much it is over or under. He did not mean that it should be strictly 0.8 when referring to the criteria of 0.8. If the reliability has a value near 0.8 (e.g., 0.78), it can be considered that his recommendation has been met.
Cost to obtain a high level of reliability
Nunnally's idea was that there is a cost to increasing reliability, so there is no need to try to obtain maximum reliability in every situation.
Trade-off with validity
Measurements with perfect reliability lack validity. For example, a person who takes the test with a reliability of one will either receive a perfect score or a zero score, because if they answer one item correctly or incorrectly, they will answer all other items in the same manner. The phenomenon where validity is sacrificed to increase reliability is known as the attenuation paradox.
A high value of reliability can conflict with content validity. To achieve high content validity, each item should comprehensively represent the content to be measured. However, a strategy of repeatedly measuring essentially the same question in different ways is often used solely to increase reliability.
Trade-off with efficiency
When the other conditions are equal, reliability increases as the number of items increases. However, the increase in the number of items hinders the efficiency of measurements.
Methods to increase reliability
Despite the costs associated with increasing reliability discussed above, a high level of reliability may be required. The following methods can be considered to increase reliability.
Before data collection:
Eliminate the ambiguity of the measurement item.
Do not measure what the respondents do not know.
Increase the number of items. However, care should be taken not to excessively inhibit the efficiency of the measurement.
Use a scale that is known to be highly reliable.
Conduct a pretest - discover in advance the problem of reliability.
Exclude or modify items that are different in content or form from other items (e.g., reverse-scored items).
After data collection:
Remove the problematic items using "alpha if item deleted". However, this deletion should be accompanied by a theoretical rationale.
Use a more accurate reliability coefficient than . For example, is 0.02 larger than on average.
Which reliability coefficient to use
is used in an overwhelming proportion. A study estimates that approximately 97% of studies use as a reliability coefficient.
However, simulation studies comparing the accuracy of several reliability coefficients have led to the common result that is an inaccurate reliability coefficient.
Methodological studies are critical of the use of . Simplifying and classifying the conclusions of existing studies are as follows.
Conditional use: Use only when certain conditions are met.
Opposition to use: is inferior and should not be used.
Alternatives to Cronbach's alpha
Existing studies are practically unanimous in that they oppose the widespread practice of using unconditionally for all data. However, different opinions are given on which reliability coefficient should be used instead of .
Different reliability coefficients ranked first in each simulation study comparing the accuracy of several reliability coefficients.
The majority opinion is to use SEM-based reliability coefficients as an alternative to .
However, there is no consensus on which of the several SEM-based reliability coefficients (e.g., uni-dimensional or multidimensional models) is the best to use.
Some people suggest as an alternative, but shows information that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reliability. is a type of coefficient comparable to Reveille's . They do not substitute, but complement reliability.
Among SEM-based reliability coefficients, multidimensional reliability coefficients are rarely used, and the most commonly used is , also known as composite or congeneric reliability.
Software for SEM-based reliability coefficients
General-purpose statistical software such as SPSS and SAS include a function to calculate . Users who don't know the formula have no problem in obtaining the estimates with just a few mouse clicks.
SEM software such as AMOS, LISREL, and MPLUS does not have a function to calculate SEM-based reliability coefficients. Users need to calculate the result by inputting it to the formula. To avoid this inconvenience and possible error, even studies reporting the use of SEM rely on instead of SEM-based reliability coefficients. There are a few alternatives to automatically calculate SEM-based reliability coefficients.
R (free): The psych package calculates various reliability coefficients.
EQS (paid): This SEM software has a function to calculate reliability coefficients.
RelCalc (free): Available with Microsoft Excel. can be obtained without the need for SEM software. Various multidimensional SEM reliability coefficients and various types of can be calculated based on the results of SEM software.
Notes
References
External links
Cronbach's alpha SPSS tutorial
The free web interface and R package cocoon allow us to statistically compare two or more dependent or independent Cronbach alpha coefficients.
Comparison of assessments
Statistical reliability
Psychometrics |
https://ko.wikipedia.org/wiki/%EB%B9%85%ED%86%A0%EB%A5%B4%20%EB%AC%B4%EB%87%A8%EC%8A%A4 | 빅토르 무뇨스 | 빅토르 무뇨스 만리케(, 1957년 3월 15일, 아라곤 지방 사라고사 ~)는 줄여서 빅토르()로 알려진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미드필더로 활약했으며, 현재 감독일을 하고 있다.
다목적 미드필더로, 그는 강력한 신체적인 힘으로 경기 초반부터 상대를 방전시키곤 했다. 그는 현역 시절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며 8번의 주요 대회를 우승하였고, 라 리가 332번의 경기에 나서서 25골을 기록했으며, 사라고사 소속으로 여러 대회에 참가했었다.
1980년대의 스페인 국가대표 선수로, 빅토르는 1번의 FIFA 월드컵과 2번의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였다.
클럽 경력
빅토르는 아라곤 지방 사라고사 출신이다. 고향 사라고사에서 첫 발을 뗀 빅토르는 현역 1년차에 소속 구단이 강등되었고, 이후 라 리가의 강호 바르셀로나가 그를 1981년에 영입하여 카탈루냐 연고 구단의 주축으로 7년 동안 활약하였다. 1983년 6월 4일, 그는 2-1로 이긴 레알 마드리드와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의 선제골을 기록하였다.
빅토르는 스페인 선수로는 세리에 A에서 선구자였는데, 삼프도리아에서 2년을 보냈다. 잠깐 사라고사에 복귀해 현역 시절의 이름을 불리며 활약한 후 34세의 나이로 바르사 시절 동료인 스티브 아치벌드와 세인트 미렌에서 재회한 후 은퇴하였다.
국가대표팀 경력
무뇨스는 1980년대에 대체로 스페인 국가대표팀 주전을 맡았는데, 1981년 3월 25일에 2-1로 이긴 잉글랜드와의 친선경기에서 첫 출전 기회를 잡은 이래 59번의 출전 기회를 추가로 잡았고, 3골을 넣었다. 그는 1986년 FIFA 월드컵 외에도 UEFA 유로 1984와 UEFA 유로 1988에서 활약하였는데, 1984년 대회에서 개최국 프랑스를 상대한 결승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그는 1988년 대회에서 조별 리그에서 일찍 탈락한 후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감독 경력
1990년대 중반부터, 무뇨스는 감독으로 전향하여 마요르카, 로그로녜스, 례이다, 비야레알, 그리고 사라고사를 성공적으로 지도했고, 사라고사에서는 2004년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2006년 10월 8일, 빅토르는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와 2년 계약했는데, 그는 초록 군단을 근 10년 기간에 지휘한 18번째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는 2007년 6월에 레크레아티보 지휘봉을 잡으로 스페인에 복귀하게 되었고, 안달루시아 연고 구단을 지휘하다 이듬해 2월에 경질되었다.
2008년 6월 18일, 무뇨스는 2008-09 시즌을 앞두고 헤타페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다음해 4월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고, 후임으로 전 레알 마드리드 선수였던 미첼이 내정되었다.
2010년 12월 말, 1년 반 축구계 밖에서 은둔하던 무뇨스는 러시아 프리미어리그의 테레크 그로즈니 감독이 되었다. 그는 1달도 안되어 사표를 내고 후임 감독은 뤼트 휠리트가 맡았다.
무뇨스는 2011년 9월 초에 현장에 복귀하였는데, 호아킨 카파로스를 대신해 스위스 뇌샤텔 샤막스의 2011-12 시즌 3번째 감독이 되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2012년 12월부터 시옹의 지휘봉을 이듬해 2월까지 잠깐 잡았다.
감독 통계
2014년 11월 22일 기준
수상
선수
바르셀로나
라 리가: 1984–85
코파 델 레이: 1982–83, 1987–88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3
코파 데 라 리가: 1983, 1986
UEFA 컵위너스컵: 1981–82
삼프도리아
코파 이탈리아: 1988–89
UEFA 컵위너스컵: 1989–90
감독
사라고사
코파 델 레이: 2003–04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4
각주
외부 링크
Eu-Football 스페인 국가대표팀 통계
195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사라고사 출신 스포츠인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아라곤주 출신 축구 선수
남자 축구 미드필더
라리가의 축구 선수
세군다 디비시온의 축구 선수
레알 사라고사의 축구 선수
FC 바르셀로나의 축구 선수
세리에 A의 축구 선수
UC 삼프도리아의 축구 선수
스코티시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
세인트 미렌 FC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아마추어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B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UEFA 유로 1984 참가 선수
198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UEFA 유로 1988 참가 선수
스페인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1980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스페인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이탈리아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스코틀랜드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이탈리아에 거주한 스페인인
스페인의 축구 감독
라리가의 축구 감독
세군다 디비시온의 축구 감독
RCD 마요르카의 축구 감독
CD 로그로녜스의 축구 감독
UE 례이다의 축구 감독
비야레알 CF의 축구 감독
레알 사라고사의 축구 감독
레크레아티보 우엘바의 축구 감독
헤타페 CF의 축구 감독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축구 감독
파나티나이코스 FC의 축구 감독
뇌샤텔 크사막스의 축구 감독
FC 시옹의 축구 감독
스페인의 해외 진출 축구 감독
그리스의 외국인 축구 감독
스위스의 외국인 축구 감독
스위스에 거주한 스페인인
스위스 슈퍼리그의 축구 감독 | https://en.wikipedia.org/wiki/V%C3%ADctor%20Mu%C3%B1oz | Víctor Muñoz | Víctor Muñoz Manrique (born 15 March 1957), known simply as Víctor as a player, is a Spanish retired football midfielder and manager.
An all-around midfield unit, he was best known for his great physical strength that helped him tire his opponents in the early stages of the match. He spent most of his professional career with Barcelona, winning six titles and amassing La Liga totals of 332 games and 25 goals; in the competition, he also represented Zaragoza.
A Spain international during the 1980s, Víctor represented the country at the 1986 World Cup and two European Championships. He later became a manager, leading four top-division teams and winning the Copa del Rey for Zaragoza in 2004.
Playing career
Club
Víctor was born in Zaragoza, Aragon. After starting off with hometown club Real Zaragoza and being relegated in his first professional season, he was purchased by La Liga powerhouse FC Barcelona, being a very important element for the Catalans in a seven-year spell; on 4 June 1983, he scored his team's first goal in a 2–1 win against Real Madrid in the final of the Copa del Rey.
Víctor was also one of the first Spaniards to ever play in Serie A, with two seasons with U.C. Sampdoria. After a quick return to Zaragoza he finished his career at 34, teaming up with former Barça teammate Steve Archibald at St Mirren.
International
Víctor was a regular for Spain for most of the 1980s, making his debut on 25 March 1981 in a 2–1 friendly win over England and going on to earn a further 59 caps with three goals. He played for the nation at the 1986 FIFA World Cup as well as the UEFA Euro 1984 (in a final runner-up position to hosts France) and 1988 tournaments, retiring from international duty immediately after that group-stage exit.
International goals
Coaching career
Muñoz started working as a manager in the mid-1990s, being successively at the helm of RCD Mallorca, CD Logroñés, UE Lleida, Villarreal CF and Zaragoza. With the last of those teams, he won the 2003–04 domestic cup with a 3–2 extra time victory over Real Madrid's Galácticos.
On 8 October 2006, Muñoz signed a two-year contract with Greece's Panathinaikos FC, becoming their 18th coach in ten years. However, he returned to Spain in June 2007 to take over at Recreativo de Huelva, from where he was sacked the following February.
For the 2008–09 campaign, Muñoz was appointed at Getafe CF. Following a string of seven losses in nine games that left the team from the outskirts of Madrid one point above the relegation zone, he was dismissed in April 2009, making way for former Real Madrid player Míchel.
In late December 2010, after more than one year out of football, Muñoz was named head coach of Russian Premier League side FC Terek Grozny. He left his post in Chechnya after less than one month due to failed contract negotiations, being replaced by Ruud Gullit.
Muñoz returned to active in early September 2011, when he became Neuchâtel Xamax FCS's third manager of the season, replacing his compatriot Joaquín Caparrós. He continued his career in the Swiss Super League, with a brief stint at FC Sion from December 2012 until the following February.
On 19 March 2014, Muñoz returned to Zaragoza, succeeding Paco Herrera at a club at risk of relegation to Segunda División B. He was dismissed on 24 November with the side in 8th, one point off the play-offs.
Managerial statistics
Honours
Player
Zaragoza
Segunda División: 1977–78
Barcelona
La Liga: 1984–85
Copa del Rey: 1982–83, 1987–88
Supercopa de España: 1983
Copa de la Liga: 1983
UEFA Cup Winners' Cup: 1981–82
Sampdoria
Coppa Italia: 1988–89
UEFA Cup Winners' Cup: 1989–90; Runner-up 1988–89
Spain
UEFA European Championship runner-up: 1984
Manager
Zaragoza
Copa del Rey: 2003–04
Supercopa de España: 2004
References
External links
1957 births
Living people
Spanish men's footballers
Footballers from Zaragoza
Men's association football midfielders
La Liga players
Segunda División players
Real Zaragoza players
FC Barcelona players
Serie A players
UC Sampdoria players
Scottish Premier League players
St Mirren F.C. players
Spain men's under-23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amateur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B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UEFA Euro 1984 players
1986 FIFA World Cup players
UEFA Euro 1988 players
Olympic footballers for Spain
Footballers at the 1980 Summer Olympics
Spanish expatriate men's footballers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Italy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Scotland
Spanish expatriate sportspeople in Italy
Spanish expatriate sportspeople in Scotland
Spanish football managers
La Liga managers
Segunda División managers
RCD Mallorca managers
CD Logroñés managers
UE Lleida managers
Villarreal CF managers
Real Zaragoza managers
Recreativo de Huelva managers
Getafe CF managers
Super League Greece managers
Panathinaikos F.C. managers
Swiss Super League managers
Neuchâtel Xamax FCS managers
FC Sion managers
Spanish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Greece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Russia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Switzerland
Spanish expatriate sportspeople in Greece
Spanish expatriate sportspeople in Russia
Spanish expatriate sportspeople in Switzerland |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D%99%94%ED%95%AD%EA%B3%B5%20676%ED%8E%B8%20%EC%B6%94%EB%9D%BD%20%EC%82%AC%EA%B3%A0 | 중화항공 676편 추락 사고 | 중화항공 676편 추락 사고()는 1998년 2월 16일 중화항공의 에어버스 A300B4-622R 여객기가 인도네시아 발리 응우라라이 국제공항에서 대만 중정국제공항(현재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착륙 당시 고도가 너무 높아 조종사가 고어라운드(복행; 재상승)를 하다 실수로 추락해 활주로 옆 담장을 들이받고 활주로 밖 중정국제공항 옆 국제로 2단(대15선) 도로까지 돌진했다.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196명과 지상에 있던 7명이 모두 숨져 총 203명이 사망했다.
비행 정보
당시 비행을 실시한 항공기는 프랫 & 휘트니 PW4158 엔진이 장착 된 에어버스 A300B4-622R이며 항공기 등록 번호는 B-1814이다. 1990년에 중화항공의 비행 시간은 약 20,000 시간이었다.
기내 안에는 총 182명의 승객이있었다. (이 중 175명은 중화민국 국적자, 5명의 미국인, 1명의 프랑스인, 1명의 인도네시아 인 및 당시 중앙 은행 총재 인 쉬 위동 (Xu Yuandong)도 탑승했고, 승무원 14명의 승무원이 항공기에 탑승했다, 기장은 강 룽린(Kang Longlin) (1990년 중화항공에 합류, 총 비행 시간은 7210시간), 보조 조종사는 지앙 더성 (Jiang Desheng) (1996년에 합류, 총 비행 시간 3,530 시간)이었다.. 승객들 중 42명은 가오슝 국제공항 가는 다른 항공편으로 갈아 타고, 3명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가는 다른 항공편으로 갈아 타고, 다른 항공편은 치앙마이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쑤 완동(Xu Yuandong) 외에도 당시 비행기에 탑승 한 승객은 동남아시아 중앙 은행 총재의 연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그를 데려 간 대통령의 아내와 강연 장의 부인, 강 룽린 기장의 아내와 2명이 같이탔었다 .
국적
사고 및 수색 및 구조
1998년 2월 16일 15시 27분에 676편이 응우라라이 국제공항에서 이륙, 20시 04분, 중정 국제공항 (현재의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의 05L 활주로에 착륙 준비를 할 때 비행기 조종사는 항공기의 높은 고도로 인해 다시 비행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OPEN DESCENT 모드를 사용해도 고도가 너무 높아서 조종사가 현장에 들어 왔을 때, 유휴 상태에서 스로틀이 세 번째 활공 경사를 계속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고도는 최대 1000피트였다. 조종사 중 한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조종간을 눌러 자동 모드를 해제하고 해제 신호음이 울렸다. 조종사는 그 점에 주의를 하지 않고 한 사람이 버튼을 누르고 신호음을 끈 후, 둘이서 점검을 계속했다. 곧 아직 3번 글라이드 슬로프를 초과했기 때문에 활주로 끝을 넘어 19초 후 지상에서 1,475 피트 (450 m)에서 기장은 복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동 조종 장치가 해제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자동 조종 장치가 기체를 제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조종사는 날아가지만 자동 운전이 해제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항공기는 11초 동안 무인 상태였으며 항공기의 추력 선이 비행기보다 훨씬 아래쪽에 있었기 때문에 레버리지 하에서 최대 마력이되었습니다. 착륙 복행을 위해 엔진이 고출력 되었기 때문에, 기체의 받음각이 갑자기 커져 최고 속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기체는 랜딩 기어를 올리고 플랩은 20 도로 설정되어 35도의 피치 업에서 1,723 피트 (525 m) 이상 상승했다. 기체가 2,751 피트 (839 m) 에 도달하면은 42.7도 피치 업에 45 노트 (83 km/h; 52 mph)의 최고 속도가 기체은 실속했다. 두 조종사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 자동 모드를 사용하려 했지만, 피치와 최고 속도가 자동 조종 장치의 한도 (envelope)를 초과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이어 조종간을 눌러 기체를 고쳐 세우려고했지만, 최고 속도가 너무 느려 방향타는 듣지 않았다. 착륙 점검 목록을 실행하는 동안 조종사 중 한 명이 조이스틱을 한 번 누른 이유와 자동 운전이 해제되고 취소 알림이 울리는 것을 알 수 없어 충돌이 계속되었다. 집과 차가 화재로 추락하여 탑승 한 모든 사람과 차 안에 있는 5명이 사망했다. 676편은 활주로에서 200 피트 (61 m) 떨어진 위치에 추락했다. 기체는 전주 등에 충돌하여 미끄럼하면서 인근 민가 나 양어장 · 공장 · 창고를 차례로 침몰시키고 폭발 화염했다.
20시 5분에 타워가 비행과의 접촉을 잃은 후 공항의 소방차 검색을 명령하라는 알림을 발행 한 후 타워는 비행기가 공항 외부에서 추락 한 것을 발견하고 소방차에 구조대를 서두르라고 다시 지시했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소방차 네 가정이 파괴된것을 발견한 후, 장면은 패스하고, 땅이 잔해 가득 때 불꽃과 폭발이다 토막 시체, 수하물 등이 있었다.. 현장에서 총 수천 건의 경찰과 군사 구호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민간 구호 단체가 투자했지만 재난 구호 장소 초기에는 타오위안 구조 협회 (Taoyuan Rescue Association)와 경찰 충돌이 일어 났으며 많은 수의 인근 사람들이 현장을 걸어 다니면서 혼란을 겪었다. 또한 사고에 대해 알게 된 후 대만 TV 방송국은 현장에서 생방송을 통해 재난 구호 현장 현장에서 보도했다.
이 사고로 탑승자 14명 · 승객 182명 등 총 196명 전원과 인근 주민 7명 등 총 203명이 사망했다. 탑승자는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ASEAN) 중앙 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에 있던 중화민국 중앙은행 총재의 엑스 위안 이해 부부 및 간부 4명이 있었다.
이 사고의 상황은 1994년에 나고야 공항에서 발생한 회사의 동형 기 (B-1816 본 사고 계약 2개월 후 납입) 에 의한 사고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 와 흡사하고, 중화 항공은 과거 사건에 대한 교훈을 얻지 못했으며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사고 후
이 사건은 중화 항공 비행의 안전, 회사의 변화 및 통신부와 중화민국 교통부 중화민국 교통부 민용항공국 의해 제거 된 정치적 문제에 대한 정치적 우려를 얘기했다.. 당시 통신부 민간 항공 국장 인 카이 두(Cai Du)는 사고 후 밤에 통신부 카이자 오양 (Cai Zhaoyang) 에게 사임했지만 당시에는 승인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카이 자오양 (Cai Zhaoyang)은 많은 정치인들에게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도록 요청 받았으며, 그는 스스로 스택 위치를 유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표명했다. 3월에 국화항공 7623편이 추락 한 후, 다시 문제가 다시 한 번 초점이되었으며, 3월 25일, 카이 두의 사임 인 중화민국의 행정원장 샤오완창 의지도 아래 [[중화항공]] 총책임자 인 푸준(Fu Jun)으로 교체 될 것이다. 카이 자오양 (Cai Zhaoyang)은이 사건에 불만을 품고 3월 30일에 공식적으로 사임을 제출했다. 내용은 "공개 전에 카이 차오 (Cai Tsao) 국장이 승인을 받아야한다"는 내용과 "정치 목적으로 일을하는 데 관심이있는 사람들은 계속 정치 문제를 밟고있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미래 사건의 사임 후 페이안(Fei'an)의 문제로 샤오 완창(Xiao Wanchang)은 사직을 승인하고 린 펑정(Lin Fengzheng)통신부 장관으로 인계 하도록 임명했다 .
그중에서도 중화민국 중앙은행, 쑤 언통 (Xu Yuandong) 외환 첸 황 (Chen Huang) 및 기타 행정 공무원의 희생자들.
중화항공의 경우 중화항공의 최대 주주 인 중국 항공 개발 재단 (AVIC) 이 6월에 이사회를 재개하기로 결정했으며 Jiang Hongjun 회장 만 유지되었고 나머지는 다양한 분야에서 왔으며 동시에 정부가 설립되었다. 항공 항법 협회의 소유권과 차이나 항공의 향후 출시 계획은 차이나 항공의 전반적인 변화를 수행하기 위해 수행될 것이다. 1998년 5월 25일, 항공기 비행 안전위원회 (현재 비행 안전 조사위원회) 가 설립되었다.
이 사고 이후, 응우라라이 국제공항에서 중정 국제공항 (현재의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 까지의 항공편 번호가 "CI688" 로 변경되었다.
에어버스 A300/A310 이 완전히 유사한 항공기 충돌 사고를 겪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기 때문에 같은 해 12월 A310-200의 동일한 시스템을 사용했던 타이 항공 261편은 완전히 유사한 과정으로 인해 추락했다. 이 두 차례의 공기 충돌로 인해 A300/A310 주문이 급격히 감소하여 2007년에 두 모델이 중단되었다.
전 DA 소스 타운십 (공중 충돌의 희생자 가족 중 한 명)의 두 번째 아들 인 첸 이펑(Chen Yifeng)은 야외 경관 커피집 "미라클 카페" 로 재건축했다.
같이 보기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
타이항공 261편 추락 사고
각주
참조
CBC 총재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보관)
외부 링크
Airliners.net에이 충돌 사진 전
이 사고의 AirDisaster.com 기록
"205 dead as China Air jet slams into Taiwan" CNN ()
"Mourners gather to identify victims of Taiwan crash" CNN (보관)
Research paper on this accident (해당 사고의 고급) (이상 영문) - 빌레펠트 대학교
676편 CVR 성적표
타오위안시의 역사
다위안구
조종사 실수로 인한 항공 사고
1998년 항공 사고
1998년 대만
1998년 2월
1998년 기상 | https://en.wikipedia.org/wiki/China%20Airlines%20Flight%20676 | China Airlines Flight 676 | China Airlines Flight 676 was a scheduled international passenger flight. On Monday, 16 February 1998, the Airbus A300 jet airliner operating the flight crashed into a road and residential area in Tayuan, Taoyuan County (now Taoyuan City), near Chiang Kai-shek International Airport (present-day Taoyuan International Airport), Taiwan.
The A300, registered as B-1814, was en route from Ngurah Rai Airport in Bali, Indonesia to Taipei, Taiwan. The weather was inclement, with rain and fog when the aircraft approached Chiang Kai-shek International Airport, so the pilot executed a missed approach. After the jet was cleared to land at runway 05L, the autopilot was disengaged, and the pilots then attempted a manual go-around. The jet slowed, pitched up by 40°, rose , stalled, and crashed into a residential neighborhood, bursting into flames at local time 4:20 pm. All 196 people on board were killed (including the governor of Taiwan's central bank, Sheu Yuan-dong, his wife, and three central bank officials), along with seven people on the ground. Hsu Lu, the manager of the Voice of Taipei radio station, said that one boy was pulled alive from the wreckage and later died.
It remains the deadliest aviation accident on Taiwanese soil. China Airlines had 12 A300s in its fleet at the time of the accident.
Aircraft and crew
The aircraft involved in the accident was an Airbus A300B4-622R, registration It was delivered to China Airlines on 14 December 1990 and was powered by two Pratt and Whitney PW4156 engines. The aircraft was 7.3 years old at the time of the accident, and had completed 20,193 flight hours. The flight was flown by Captain Kang Long-Lin, 49, who joined China Airlines in 1990, and had 7,226 hours total flight time (2,382 of them on the Airbus A300) and First Officer Jiang Der-Sheng, 44, joined China Airlines in 1996, and had 3,550 hours total flight time (304 of them on the Airbus A300). Both pilots were formerly with the Republic of China Air Force. The flight consisted of 175 Taiwanese nationals, along with five Americans, one French, and one Indonesian.
Accident
The plane took off from Ngurah Rai Int'l Airport, Bali, en route to Chiang Kai-Shek International Airport, Taipei, Taiwan, with 182 passengers and 14 crew at 15:27.
The Airbus carried out an instrument landing system/distance-measuring equipment (ILS/DME) approach to runway 05L at Taipei Chiang Kai Shek Airport in light rain and fog, but came in too high above the glide slope (at and short of the runway threshold). Go-around power was applied 19 seconds later, and the landing gear was raised and the flaps set to 20° as the aircraft climbed through in a 35° pitch-up angle.
Reaching (42.7° pitch-up, speed), the A300 stalled. Control could not be regained, as the aircraft fell and smashed into the ground left of the runway. It then surged forward, hit a utility pole and a median strip of Provincial Highway 15 and skidded into several houses, surrounded by fish farms, rice paddies, factories, and warehouses, and exploded, killing all on board.
Weather was visibility, runway visual range runway 05L of , broken ceiling, overcast. According to the cockpit voice recorder, the last words, from the first officer, were "Pull up, too low!" This was surrounded by the terrain alarm and stall warnings.
Investigation and conclusion
On initial approach to land, the aircraft was more than 300 m above its normal altitude when it was only 6 nautical miles away from the airport. Nonetheless, it continued the approach. Only when approaching the runway threshold was a go-around initiated. During this time, the pilot had pushed the yoke forward and the plane's autopilot was disengaged, but was not aware of it, so during the go-around, he did nothing to actively take control of the plane, as he thought the autopilot would initiate the maneuver. For 11 seconds, the plane was under no one's control.
Following a formal investigation that had continued for nearly 2 years, a final report by a special task force under the Civil Aviation Administration concluded that pilot error was the cause of the crash of Flight 676. The report concludes by criticizing China Airlines for "insufficient training" and "poor management of the resources in the pilot's cabin".
Transcript
The transcript of the cockpit voice recording was leaked on the Internet, but has been removed as it is a property of the Taiwanese government.
The person speaking is listed in bold.
TWR - Chiang Kai-shek International Airport control tower
F/O - First officer on board CI676
Capt - Captain on board CI676
GPWS - Ground proximity warning system (aircraft system)
CAM - Cockpit area microphone where sound of cockpit environment can be recorded by the cockpit voice recorder (CVR), includes descriptors of various unidentified sounds picked up by the CAM, including the GPWS
CAL - Unknown, may be intended to mean CI (China Air Lines) 676 First Officer
12:04:26 TWR Clear to land. Wind 360 at 3.
12:04:27 F/O Roger. Clear to land. Dynasty 676.
12:04:32 F/O OK. Glide Slope blue. Localiser green.
12:04:41 Capt It's 1,000 feet higher.
12:04:51 Capt It's coming. 1,000 feet.
12:04:54 Capt OK. Thirty forty.
12:04:55 F/O Thirty forty.
12:05:01 F/O Landing gear.
12:05:02 F/O Three green.
12:05:03 Capt Anti-skid
12:05:03 F/O Normal and...
12:05:05 Capt Slat flap.
12:05:05 F/O Thirty forty.
12:05:06 Capt Spoiler.
12:05:07 CAM [Sound of autopilot disconnect warning]
12:05:08 F/O Armed
12:05:09 Capt Landing light
12:05:10 F/O On
12:05:11 CAM [Sound of triple click (indicates landing capability category change)]
12:05:12 Capt OK, Landing check list complete
12:05:13 Capt GO lever, go around
12:05:14 F/O Go around, GO lever
12:05:16 CAM [Sound of triple click]
12:05:18 Capt Positive gears up
12:05:19 F/O Gears down?
12:05:20 Capt Gear up!
12:05:20 F/O Gear up
12:05:22 F/O Heading select, plus
12:05:22 F/O Plus ten
12:05:24 CAM [Sound of gear retraction]
12:05:24 Capt Flaps
12:05:24 CAM [Sound of sel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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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45 Capt A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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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45 TWR Dynasty 676, confirm go 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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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48 CAL 676 (F/O) Confirm go 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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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53 GPWS Whoop, whoop, pull up
12:05:56 GPWS Whoop, whoop, pull up
12:05:56 CAM [Sound of autopilot disconnect warning]
12:05:57 End of recording
Aftermath
After the accident, China Airlines flight number 676 was retired and changed to flight 772; it was still operated by the Airbus A300 until they were replaced by Airbus A330 aircraft.
The A300 was in the fleet of China Airlines until 2006, when it was replaced by the Airbus A330-300 and Boeing 747-400 aircraft.
See also
China Airlines Flight 140, another crash involving a CAL Airbus A300 during the 1990s, which also stalled and crashed on final approach.
Flydubai Flight 981
2021 Piedade de Caratinga Beechcraft King Air crash
List of accidents and incidents involving commercial aircraft
References
External links
The Crash of Flight CI676, a China Airlines Airbus A300, Taipei, Taiwan, Monday 16 February, 1998: What We Know So Far (Archive) – University of Bielefeld
CVR Transcript of Flight 676
Aviation accidents and incidents in 1998
Airliner accidents and incidents caused by weather
Airliner accidents and incidents caused by pilot error
Aviation accidents and incidents in Taiwan
Airliner accidents and incidents involving fog
Accidents and incidents involving the Airbus A300
676
1998 in Taiwan
February 1998 events in Asia
1998 meteorology
Airliner accidents and incidents caused by stalls
1998 disasters in Taiwan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8%88%EC%9D%B4 | 이금이 | 이금이는 1962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1984년 "'새벗문학상'"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2020 한스 크리스티안 어워드 글 작가 부분에 한국후보자로 등록되었다.(NOMINATION FOR THE HANS CHRISTIAN ANDERSEN AWARDS 2020)
생애정보
작가 이금이는 1962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원에서 출생했으며 1968년 서울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그러나 이금이는 서울에 살면서도 방학 때마다 고향으로 가서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그리고 할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이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자존심의 원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으로 자리 잡았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고향의 할머니는 이금이에게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해주었다. 할머니가 들려 준 스토리텔링의 힘이 이금이에게 전달되었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근간이 되었다.
이야기에 빠져 유년기를 지낸 이금이는 초등학생 시절부터는 아버지가 사주신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본격적인 작가의 꿈을 갖게 됐다. 특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읽고 이런 작품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아동 문학 장르임을 자각하기도 전이었다. 드디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습작을 거듭하여 1984년 ‘새벗문학상’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85년에는 어린이잡지 《소년중앙》 문학상에도 당선되었다.
1989년 결혼과 함께 이금이는 서울을 떠나 다시 충청북도 청원의 농촌 마을로 이주한다. 어린 시절의 꿈을 남겨 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금이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농민의 삶’에 관심을 가졌으며 농촌 운동에 몸담은 남편의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금이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과는 달리 농촌의 무거운 현실과 충돌하는 경험을 맞게 된다. 한국 농촌은 도시와 농촌의 빈부 격차와 산업 위주의 경제성장의 결과로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가족 해체, 아동 소외 등의 문제가 일어났다. 또한 농촌은 점점 환경오염 문제에도 노출되었다. 이에 그는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려는 의지와 함께 농촌 생활자로서 사회를 향한 문제의식도 발전해갔다. 그는 농촌을 자신의 작품의 주요 무대로 등장시켰으며 그 중에서 농촌의 가족문제에 집중한다.
그러나 1999년 이금이는 개인적으로 더욱 어려워진 경제적 상황에 부딪쳐 농촌 생활을 정리하고 도시로 이주하게 된다. 서울에 살면서 그는 더욱 아동문학과 청소년문학 창작에 모든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 특히 농촌과 상반된 공간으로 도시에서 일어나는 아동과 청소년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한국 문학에서 생소한 장르였던 청소년소설 장르를 개척하게 된다. 그는 한국 여성 청소년들이 겪는 여러 사회적 심리적 문제를 작품의 중심 주제로 형상화해 나간다. 2004년 청소년소설 《유진과 유진》을 발표한 이후에는 주로 청소년소설을 창작하고 있다.
청소년소설과 동화를 꾸준히 발표하던 이금이는 2016년 장편 역사소설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를 발표한다. 한국 최고의 아동청소년소설 작가로 정점에 오른 작가에게 이러한 역작은 일생의 성실함을 대변해주는 결과물이다. 여성 청소년의 문제이자 한국 현대사의 슬픈 비밀을 이야기한 이 작품으로 이금이는 2018년 IBBY 어너리스트 글 부문 작가로 선정되었다.
아동문학에 공헌
여성의 삶을 주목하다
작가 이금이에게 ‘여성’은 하나의 핵심 주제이다. 이금이가 ‘여성’을 주목한 것은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부터다. 그는 결혼과 함께 여성의 삶을 새롭게 인식하였고 딸을 키우면서 동화 속에서 여성인물을 어떻게 그릴지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초기작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에서 비전형적인 새엄마를 등장시켜 독자에게 ‘모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새로운 인물을 통해 한국 동화에서 ‘새엄마’는 비로소 한 차원 발전하였다.
또한 그는 2004년 성폭행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룬 청소년소설 《유진과 유진》을 발표했다. 《유진과 유진》은 이름이 같은 두 소녀의 이야기이다. 두 아이 모두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데 각각의 어머니의 양육태도가 달라지면서 발생하는 결과도 달라진다. 작가는 유아나 청소년이 성폭행이나 추행을 당했을 때 부모를 비롯한 어른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그것이 잘못될 경우 불행하게도 피해자의 자기존중감 상실로 귀결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한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의 소재 중에 금기시되어 왔던 ‘성의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이를 계기로 한국 청소년소설은 여성 청소년들의 성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2013년에 발표된 청소년 소설 《얼음이 빛나는 순간》은 십대 소녀의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 문제를 다룬다. 이를 주제로 한 대부분의 청소년소설이 소녀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비하여 《얼음이 빛나는 순간》은 남성주인공의 고민 역시 여성주인공의 생각을 함께 드러낸다. 또한 두 소년 소녀가 출산과 양육을 함께 하며 긍정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성장과정을 희망적으로 제시한다.
작가의 최근작인 장편 역사소설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는 한국 현대사와 전쟁 성폭력이라는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1920년대에서 현대까지 수남과 채령이라는 두 소녀의 스펙타클한 삶을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깊이 있게 조명했다. 특히 한국사회의 큰 사회적 이슈인 2차대전 중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수남이가 경험한 일본군 위안부로의 삶과 종전 후 일본 패잔병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서 불행했던 여성민중의 삶을 복원한다.
이처럼 작가는 청소년소설 장르를 통해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주목한다.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은 전 세계적으로 드문 입시경쟁을 겪고 있으며 청소년을 대하는 어른들의 잣대 또한 매우 엄격한 편이다. 특히 여성 청소년들에게는 한국사회에 아직도 남아 있는 가부장제로 인하여 남성보다 훨씬 어려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이금이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삶을 주목하면서 그것을 청소년소설 장르 안에서 녹여냈다. 이 작업은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의 발전을 가져왔고 한국사회에서 여성 청소년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여성과 청소년에 대한 애정은 작품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성폭행과 십대 임신을 주제로 한 작품을 읽고 보내오는 독자들의 반응이 점차 그를 변화시켰다. 그는 현재 ‘한국어린이청소년책작가연대’에서 성평등위원회 활동을 통해 작품과 그의 삶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농촌이라는 공간을 주목하다.
이금이에게 농촌은 단지 서사의 배경이 아니라 그의 문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펼치는 무대다. 이금이에게 농촌은 첫째 자신을 받아주고 신뢰해주는 영원한 자연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가진다. 데뷔작인 《영구랑 흑구랑》, 《봉삼 아저씨》, 첫 장편동화 《목장의 꽃바람》, 1987년 계몽문학상 수상작 《가슴에서 자라는 나무》 등이 모두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자연만이 줄 수 있는 위안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다.
두 번째 이금이에게 농촌은 한국 사회의 냉정한 현실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이금이가 결혼 후 충북 청원군으로 이주한 후, 현실로 체험한 농촌은 어린 시절 느꼈던 이상향과는 달랐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급격한 현대화로 도시와 농촌 간 경제격차가 커졌다. 1960년대 이후 농촌의 경제적 문제는 가족 해체 등 어린이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작품 활동 초반 ‘농촌 작가’라는 명칭을 얻을 정도로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여러 편 쓰던 이금이는 농촌의 현실과 만난 후 이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때 발표된 대표작은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이다. 작품에서 주인공 남매인 큰돌이와 영미는 가정의 어려움을 가진 농촌의 아이들이었다. 아버지의 경제적, 심리적 상황은 심각하고 어머니는 집을 떠난다. 이런 큰돌이 네를 딱하게 여기던 이웃 할머니의 제안으로 영미는 입양을 가게 된다. 영미가 입양된 곳은 밤티 마을이라는 농촌마을과는 대조되는 도시 공간이다. 영미를 입양한 새엄마와 새아빠는 따듯하지만 영미는 그곳에 적응하지 못한다.
이런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이 바로 큰돌이 아버지와 결혼한 새엄마 팥쥐엄마다. ‘팥쥐엄마’라는 별명은 한국의 신데렐라라고 할 수 있는 옛이야기 《콩쥐와 팥쥐》에 나오는 새엄마에서 따온 것이다. 외모가 우락부락하여 팥쥐엄마라 불리지만 흔히 생각하는 새엄마에 대한 편견을 깬 반전의 인물이라 더욱 흥미롭다. 이후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 의 후속 작 두 편에서 작가는 팥쥐엄마의 노력으로 안정된 큰돌이네를 중심으로 노인 부양의 문제나 친엄마와 새엄마라는 모성의 문제, 입양 문제 등 한국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정과 사회의 문제로 이야기를 확대해간다. 물론 밤티마을이 농촌이기에 이러한 모든 문제는 한국 농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이금이 작가는 한국 농촌과 그곳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에 주목하였지만 동시에 농촌을 도시와 대비된 아름다운 인간미가 숨쉬는 공간으로 끝까지 인식한다. 아동소설 《너도 하늘말나리야》는 시골의 보건소장으로 부임한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소녀 미르의 이야기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에 의지하여 이를 극복하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농촌과 도시의 입체적 대비는 농경사회에서 출발했지만 급격한 도시화로 이제 대부분 도시생활을 하는 현대 한국인에게 깊은 성찰과 정서의 울림을 안겨준다.
약자와 소수자에 주목하다.
그가 쓴 작품은 다양한 소재를 넘나든다. 작품의 공통점은 한국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살피려는 작가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장편동화 《내 어머니 사는 나라》는 남한에 사는 어린이 수빈이가 북한이 고향인 할아버지와 북한의 금강산 여행에 동행하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직접 금강산을 방문한 체험에 남북통일과 이산가족의 만남에 대한 바람을 담아냈다. 장편동화 《나와 조금 다를 뿐이야》는 발달장애인 어린이를 등장시켜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이야기이다.
한편 이금이가 한국에서 청소년소설이라는 장르를 주목하고 시도한 초기 작가라는 점도 이러한 그의 스타일과 연결된다.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은 매우 힘든 존재다. 한국 청소년 인권과 문화에 대한 인식이 낮은 만큼 청소년문학도 뒤늦게 발전하여 청소년을 교육의 대상이 아닌 문화 주체로 보고 그들을 응원하는 문학이 집중적으로 창작된 것은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이다. 이금이가 그 선두에 서 있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소재를 찾으려는 성실함과 문학을 대하는 진지함으로 그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을 한 차원 높이 발전시켰다.
수상목록
1984년 새벗문학상으로 데뷔, 수상작 《영구랑 흑구랑》
1985년 소년중앙 문학상, 수상작 《봉삼 아저씨》
1987년 계몽사 아동문학상 《가슴에서 자라는 나무》
2007년 소천문학상, 동화집 《금단현상》
2011년 윤석중문학상, 동화집 《사료를 드립니다》
2017년 방정환문학상, 《하룻밤》
2018년 IBBY 아너리스트 글 부문 선정, 장편소설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
대표 도서목록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 시리즈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 (1994, 푸른책들, 173*225, 143쪽)
《밤티마을 영미네 집》(2004, 푸른책들, 148*210, 132쪽)
《밤티마을 봄이네 집》(2005, 푸른책들, 152*223, 135쪽)
한국 농촌에 살고 있는 큰돌이와 영미 남매는 친엄마가 집을 나가고 없다. 어느 날 이웃 할머니의 제안으로 여동생 영미는 도시로 입양을 떠나게 된다. 영미를 입양한 새부모는 친절하고 다정한 어른들이지만 영미는 도시에 적응을 할 수 없다. 영미에게 밤티마을이라는 시골마을은 그리움의 공간이 된다. 때마침 큰돌이아빠와 재혼한 팥쥐엄마가 집안에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팥쥐엄마는 곰보 가득한 얼굴의 여성이지만 영미를 다시 찾아오고 따듯하게 아이들과 가족을 품는다. 후속작에서는 팥쥐엄마의 사랑으로 단단해진 가족을 바탕으로 벌어지는 농촌의 노인문제나 친엄마와 새엄마의 만남을 통한 모성의 문제 등으로 주제를 확장해나간다.
《소희의 방》시리즈
《너도 하늘말나리야》 (1999,푸른책들, 152*223, 264쪽)
《소희의 방》 (2010, ,푸른책들127*288, 304쪽)
《숨은 길 찾기》 (2014 ,푸른책들, 127*288 , 240쪽)
《너도 하늘말나리야》는 이금이의 초기 동화에서 나타난 농촌사회를 배경으로 하되 현대 가족의 또 하나의 모습이면서도 한국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던 주제인 한부모 가정의 다양한 모습을 다룬다. 후속작에서는 각각 가정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다르게 성장하는 세 청소년의 모습을 통해 가족해체가 가져온 변화와 그들의 미묘한 심리를 이야기한다. 일례로 소희를 주인공으로 택한 《소희의 방》 에서는 엄마의 재혼으로 소희가 새로운 가족구성원을 만나는 과정에서 느끼는 소외의식과 불안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다룬다. 《숨은 길 찾기》는 세 소년, 소녀들이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신의 진로와 미래를 탐색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유진과 유진》
《유진과 유진》 (2004, 푸른책들, 127*188, 285쪽)
두 소녀 유진과 유진은 중학교에서 다시 만나게 된 친구 사이로 이들은 유치원시절에 유아 성추행을 겪은 과거를 공유하고 있다. 두 소녀의 어머니는 양육태도가 다르다. 한 어머니는 딸의 아픔 앞에서 딸을 보듬으려 노력하는 데에 비하여 다른 어머니는 이 사건을 숨기려는 데에 급급하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아이들의 심리상태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유아나 청소년이 성폭행 혹은 추행을 당했을 때 부모를 비롯한 어른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그것이 잘못될 경우 불행하게도 피해자의 자기존중감 상실로 귀결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한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의 소재 중에 금기시되어 왔던 ‘성의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 1 (2016, 사계절, 145*225, 292쪽)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 2 (2016, 사계절, 127*188, 285쪽)
한국 현대사를 조명하면서 동시에 전쟁 성폭력이라는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역사소설이면서 동시에 두 소녀의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1920년대에서 한국사회까지라는 시대적 배경을 통해 수남과 채령이라는 두 소녀의 스펙타클한 삶을 보여주고 한국 현대사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특히 일본의 한국 점령과 세계 2차대전이 낳은 비극, 한국 여성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수남이가 경험한 일본군 위안부와 종전 후 일본 패잔병들에게 능욕을 당하는 이야기 등은 한국 현대사에서 불행했던 여성민중의 삶을 복원한다.
《내 어머니 사는 나라》
《내 어머니 사는 나라》(2007, 푸른책들, 173*226, 167쪽)
남한에 사는 어린이가 북한이 고향이지만 한국전쟁으로 실향민이 된 할아버지와 북한의 금강산 여행에 동행하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직접 금강산을 방문한 체험에 남북통일과 이산가족의 만남에 대한 바람을 담아내었다. 백두산과 함께 북한의 대표적인 명산인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함께 여행하는 할아버지 외 여러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남북문제에 대한 고민과 미래의 전망을 담고 있다. 세계에서 드물고 오래된 분단국가의 현대사의 비극을 통해 한국 어린이독자뿐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의 어린이독자에게 전쟁의 비극과 공동체의 소중함을 알려줄 수 있는 작품이다.
각주
참고
작가연구자료집2018, KBBY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196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소설가 | https://en.wikipedia.org/wiki/Lee%20Geum-yi | Lee Geum-yi | Lee Geum-yi () is a Korean author of children's and young adult literature. Since her debut in 1984, she has written more than fifty literary works. In the early days of her career, she mainly wrote children's stories set in rural areas including Keundori in Bamtee Village, leading her to earn the nickname “the writer of agricultural villages.” Lee's works often explore Korean society and issues involving minorities including women and the disabled. Since the release of her first young adult novel Yujin and Yujin in 2004, Lee has incorporated the lives of teenagers and the varied social and psychological issues they face into her work. Her historical novels Can’t I Go Instead? and The Picture Bride, are works of young adult fiction. In 2018, she was selected for the IBBY Honour List for Can’t I Go Instead? She was nominated for the Hans Christian Andersen Award in both 2020 and 2024.
Career
Lee Geum-yi made her official debut as an author in 1984 with Younggu and Heukgu In 2018, she was selected for the IBBY Honour List for Can’t I Go Instead?. In 2020, she was selected as the Korean nominee for the Hans Christian Andersen Award.The Picture Bride , which was published in 2020, is her first novel to be published in English. The Picture Bride and Yujin and Yujin (published in 2004) have been adapted into musicals.The Picture Bride and Yujin and Yujin (published in 2004) have been adapted into musicals.
Awards
2024, 2020 Korean nominee for the Hans Christian Andersen Award
2018 IBBY Honour List - Can’t I Go Instead?
2017 Bang Jeong-hwan Literary Award - One Night
Adaptations
2022 Musical <Aloha, My Moms〉 (Based upon The Picture Bride)
2021 Webtoon 〈Can't I Go Instead?〉 (Based upon the same title)
2021 Musical 〈Yujin and Yujin〉 (Based upon the same title)
2021 Theater Play 〈Yujin and Yujin〉 (Based upon the same title)
2013 Short Animation for Improving Awareness of the Disabled (Based upon Just Different from Me)
2002 EBS Children Literature in TV Drama: Just Different from Me
2001 KBS TV Drama - Keundori in Bamtee Village
Works
Young adult novels
2020The Picture Bride (Changbi Publishers) ISBN 978-89-364-6576-6
2022 (Forge Books/Macmillan, USA) (trans. An Seonjae) ISBN 978-12-508-0866-0
2022 (Scribe Publications, Australia) (trans. An Seonjae) ISBN 978-19-223-1085-9
2019 Life traveler (Munhakdongne Publishing)
2016 Can’t I Go Instead? (Sakyejul Publishing)
2023 (Forge Books/Macmillan, USA) (trans. An Seonjae)
2022 (そこに私が行ってもいいですか?, 里山社, Japan) (trans. 神谷丹路)
2014 Youth Stories (Sakyejul Publishing)
2014 Searching For the Hidden Path (Prooni Publishing)
2021 (rev.) (Bamtee Publishing)
2013 The Moment Ice Sparkles (Prooni Publishing)
2121 Us, In the Land of the Giants (Prooni Publishing)
2022 (Bamtee Publishing) ISBN 979-11-91826-05-0
2013 So-hee’s Room (Prooni Publishing)
2021 (Bamtee Publishing) ISBN 979-11-91826-02-9
2010 A Marionette’s Dance (Prooni Publishing)
2022 (Bamtee Publishing) ISBN 979-11-91826-19-7
2009 Goodbye, My First Love (Prooni Publishing)
2021 (Bamtee Publishing) ISBN 979-11-91826-04-3
2008 Cliff (Prooni Publishing) ISBN 979-11-91826-22-7
2008 The Whale in My Pocket (Prooni Publishing)
2021 (Bamtee Publishing) ISBN 979-11-971205-5-8
2004 Yujin and Yujin (Prooni Publishing)
2020 (Bamtee Publishing) ISBN 979-11-97120-54-1
2023 (有真与有真 Beijing Yuchen Culture, China)
2011 (Yujin et Yujin Picquier, France)
1999 You Too Are a Twilight Lily (Prooni Publishing)
2021 (Bamtee Publishing, 2021) ISBN 978-89-5798-102-3
Children's fiction
2012 Pet Food for You (Prooni Publishing)
2006 Foster Care (Prooni Publishing)
2021 (Bamtee Publishing)
2004 A Very Tiny School (Prooni Publishing) ISBN 9788957980071
2003 Mito’s Poop Is Cute Too (Prooni Publishing)
2002 Handy Boy (Prooni Publishing)
2002 Jaedeok My Friend (Prooni Publishing) ISBN 9788957980873
2000 Mother Earth (Prooni Publishing) ISBN 9788988578346
2000 Just Different from Me (Prooni Publishing) ISBN 9788957980705
2000 The Country of My Mother (Prooni Publishing) ISBN 9788957980583
1999 A Rat Called Hamster (Prooni Publishing) ISBN 9788957980637
1999 Kkebi from Dodeulmaru (Sigongsa Publishing) ISBN 9788957980637
1996 My Teeth on the Roof (Doosan Donga Publishing) ISBN 9788900051285
2001 (Prooni Publishing) ISBN 9788957980538
1996 Sand Pebble School (Daekyo Publishing) ISBN 9788939507401
2002 (Prooni Publishing) ISBN 9788988578797
1996 Barefooted Children (Hyeonamsa Publishing)
2007(Prooni Publishing) ISBN 9788957981290
1994 Bamtee Village Series
1994 Keundori in Bamtee Village (Daekyo Publishing)| 2004 (Prooni Publishing)
2000 Yeongmi in Bamtee Village (Prooni Publishing)
2005 Bomi in Bamtee Village (Prooni Publishing)
1994 Children at Solmoru Ranch (Donga Publishing) ISBN 9788900033755
1991 Younggu and Heukgu (Hyeonamsa Publishing)
2002 (Prooni Publishing) ISBN
1988 The Flower-Scented Wind (Daekyo Publishing)
1999, 2007 (Prooni Publishing)
1987 Be the Bridge (Kyemongsa Publishing) ISBN 9788957982846
2005 (Prooni Publishing)
Early reader books
2021 Looking for Cha Daegi (Sakyejul Publishing) ISBN 9791160947304
2019 They Called My Name (Suntree Books) ISBN 9788962681840
2019 Like the Rowdy Princess (Sakyejul Publishing) ISBN 9791160944570
2022 A Princesa indomável (Atalante Editores Ltda./Casa Oito, Brazil)
2016 One Night (Sakyejul Publishing) ISBN 9788958284468
2011 The Granny Riding a Tiger (Prooni Publishing) ISBN 9788961702072
2010 Hate It, Don’t Know It, Just Because (Prooni Publishing)
2022 (Bamtee Publishing) ISBN 9791191826081
2009 Not the Way I Want (Prooni Publishing)
2022 (Bamtee Publishing)
2008 Secret Helper at Our House (Prooni Publishing) ISBN 9788961700641
2008 My Teacher Hates Me (Prooni Publishing) ISBN 9788961700405
2022 (Bamtee Publishing) ISBN 9791191826067
2007 Popsicles and Water Skiing (Prooni Publishing) ISBN 9788957980972
2005 Twelve Animals in the Tripitaka Koreana (Prooni Publishing) ISBN 9788990794147
2002 I’m Right, It’s a Whale! (Prooni Publishing) ISBN 9788988578544
2002, 2007 Pruni and Gouni (Prooni Publishing) ISBN 9788990794697
2001 Kimchi Is Kimchi Even in English (Prooni Publishing) ISBN 9788957980392
1991 Betting Your Calf (Junghan Publishing)
2008 (Prooni Publishing) ISBN 9788961700306
Other titles
2012 Fermata Italy (Sakyejul Publishing) ISBN 9791160947564
2006, 2011 Lee Geum-yi’s Children’s Book Creative Class (Prooni Publishing)
References
External links
Official Website
Personal Blog
"Author Talks: Lee Geum-Yi”, Korea Society”, October 04, 2022
"Panel Discussion and Talk,” Asian Festival of Children’s Content, May 26-29, 2022
"Letter by Lee Geum-yi, Author of The Picture Bride,” August 11, 2022
"Asian Revier of Books,The Picture Bride” by Lee Geum-yi” October 2, 2022
Living people
1962 births
20th-century South Korean writers
21st-century South Korean writers
Young adult literature
South Korean women children's writers
South Korean children's writers |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94%BC%EC%96%B4%EB%A7%8C%20%EB%B8%8C%EB%9D%BC%EC%9A%B4%20%EA%B3%B5%EC%8B%9D | 스피어만 브라운 공식 | 스피어만 브라운 공식(Spearman-Brown formula) 혹은 브라운 스피어만 공식은 심리측정 및 교육측정 분야에서 스피어만 브라운 예측 공식, 스피어만 브라운 예언 공식 등으로도 지칭된다. 스피어만 브라운 공식은 검사의 길이를 변경시켰을 때 검사의 신뢰도를 예측하는 공식으로 사용된다. 혹은, 검사의 임의의 반분간 상관관계에서 항목간 신뢰도를 구하기 위한 반분 신뢰도 공식으로도 사용된다.
예측식의 계산
예측 공식 은 다음과 같다.
.
여기서, n은 새롭게 만들어진 검사가 현재 검사의 몇 배인지의 비율, 은 현재 검사의 신뢰도이다.
이 공식은 현재 검사의 n배, 즉 현재 검사와 평행(parallel)인 n개의 검사를 만들었을 때 새 검사의 신뢰도를 예측한다.
예를 들어, n=2는 현재 검사와 동일한 속성을 가진 항목을 추가하여 검사의 길이를 두 배로 늘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1보다 작은 n을 쓸 경우, 검사를 줄일 때의 효과를 예측할 수 있다.
검사 길이의 예측
위의 공식을 정리하면, 특정 수준의 신뢰도를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검사가 얼마나 더 길어져야 하는지도 예측할 수 있다.
반분 신뢰도
타우동등 신뢰도(tau-equivalent reliability)가 개발되기 전까지, 반분 신뢰도는 항목간 신뢰도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즉, 전체 항목을 임의의 절반으로 나눈 후, 항목간 상관관계를 스피어만 브라운 공식에 의해 신뢰도로 변환하는 것이다.
여기서, 은 예를 들면 짝수문항번호와 홀수문항번호간의 반절씩 반분한 피어슨 상관관계를 표현한다. 위의 공식은 앞서 제시한 예측식에서 n=2를 대입한 것이다. 타우동등 신뢰도의 개발 이후 반분 신뢰도 계수로서 스피어만 브라운 공식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 이 방법이 유용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 크론바흐 알파 계수도 신뢰도가 높다.
다른 반분 신뢰도 계수와의 관계
반분 평행 신뢰도
Cho(2016)는 기존의 신뢰도 계수들이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고 무의미한 이름과 무원칙적이고 비일관적인 공식 표현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체계적 명칭과 공식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스피어만 브라운 공식의 가정은 두 반분이 평행(parallel)하다는 것, 즉 두 반분의 분산이 같다는 것이다. 스피어만 브라운 공식에 제안된 체계적 명칭은 반분 평행 신뢰도(split-half parallel reliability)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체계적 공식이 제안되었다.
반분 타우동등 신뢰도
반분 평행 신뢰도는 현실의 자료가 쉽게 충족하기 어려운 엄격한 가정을 요구한다. 반분 타우동등 신뢰도(Split-half tau-equivalent reliability)는 두 반분의 분산이 서로 같지 않은 경우에 사용될 수 있는 반분 신뢰도 계수이다. Flanagan-Rulon<ref>Flanagan, J. C. (1937). A proposed procedure for increasing the efficiency of objective tests. Journal of Educational Psychology, 28, 17-21. doi:10.1037/h0057430.Rulon, P. J. (1939). A simplified procedure for determining the reliability of a test by split-halves. Harvard Educational Review, 9, 99-103.</ref>(, ), Guttman()에 의해 다음과 같은 공식들이 제안되었다.
,
,
.
여기서 , , ,는 각각 첫번째 반분, 두번째 반분, 두 반분의 합, 두 반분의 차이의 분산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이 공식들은 모두 대수적으로 동일하다. 그 체계적 공식은 다음과 같다.
.
반분 동류 신뢰도
반분 타우동등 신뢰도는 두 반분의 길이가 같다는 가정을 갖고 있다. 반분 동류 신뢰도(Split-half congeneric reliability)는 이 가정을 완화시킨 반분 신뢰도이다. 단, 주어진 정보보다 추정해야 하는 모수가 더 많기 때문에 또 다른 가정이 필요하다. Raju(1970)는 각 반분의 상대적 길이가 알려져 있을 때의 반분 동류 신뢰도 계수를 발표하였다. Angoff(1953)과 Feldt(1975)는 각 반분의 길이가 각각의 분산과 공분산의 합에 비례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반분 동류 신뢰도를 발표하였다.
역사
스피어만 브라운 공식은 Brown (1910)과 Spearman (1910)이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에 동시에 발표한 논문에서 유래한다. 찰스 스피어만은 킹스 칼리지 런던에 함께 근무하던 칼 피어슨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둘은 서로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논문을 주고 받았다. 브라운은 피어슨의 지도를 받아 박사학위를 받았다. Brown은 박사 학위 논문의 중요한 부분을 Spearman의 연구를 비판하는 데 할애했다. 이 공식에서 스피어만이 브라운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스피어만이 브라운보다 더 명성이 높은 학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피어만은 신뢰도에 대한 최초의 이론을 정립하였으며, "고전적 신뢰도 이론의 아버지"라고 지칭된다. 즉, 마태 효과 혹은 스티글러의 명명법칙의 한 사례이다.
다음의 이유에서 이 공식은 브라운 공식, 혹은 브라운 스피어만 공식으로 지칭되어야 한다. 첫째,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공식은 Spearman(1910)이 제안한 버전이 아니라, Brown(1910)이 제안한 버전이다. 반분신뢰도 공식도 Brown(1910)만이 명시적으로 제시하였다. 둘째, Brown(1910)의 공식 유도가 Spearman(1910)보다 더 간결하고 우아하다. 셋째, Brown(1910)의 논문이 Spearman(1910)보다 먼저 쓰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Brown(1910)은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논문이 발표될 당시에 그는 이미 박사학위를 취득한 상태였다. Spearman(1910)은 Brown(1910)을 비판했지만, Brown(1910)은 Spearman(1904)만을 비판하였다.넷째, 저자들을 알파벳 순서로 표기하는 것이 미국 심리학회의 인용 원칙(APA 양식)이다.
각주
같이 보기
고전검사이론
크론바흐 알파 계수
참고 문헌
신뢰도 | https://en.wikipedia.org/wiki/Spearman%E2%80%93Brown%20prediction%20formula | Spearman–Brown prediction formula | The Spearman–Brown prediction formula, also known as the Spearman–Brown prophecy formula, is a formula relating psychometric reliability to test length and used by psychometricians to predict the reliability of a test after changing the test length. The method was published independently by Spearman (1910) and Brown (1910).
Calculation
Predicted reliability, , is estimated as:
where n is the number of "tests" combined (see below) and is the reliability of the current "test". The formula predicts the reliability of a new test composed by replicating the current test n times (or, equivalently, creating a test with n parallel forms of the current exam). Thus n = 2 implies doubling the exam length by adding items with the same properties as those in the current exam. Values of n less than one may be used to predict the effect of shortening a test.
Forecasting test length
The formula can also be rearranged to predict the number of replications required to achieve a degree of reliability:
Split-half reliability
Until the development of tau-equivalent reliability, split-half reliability using the Spearman-Brown formula was the only way to obtain inter-item reliability. After splitting the whole item into arbitrary halves, the correlation between the split-halves can be converted into reliability by applying the Spearman-Brown formula. That is,
,where is the Pearson correlation between the split-halves. Although the Spearman-Brown formula is rarely used as a split-half reliability coefficient after the development of tau-equivalent reliability, this method is still useful for two-item scales.
Its relation to other split-half reliability coefficients
Split-half parallel reliability
Cho (2016) suggests using systematic nomenclature and formula expressions, criticizing that reliability coefficients have been represented in a disorganized and inconsistent manner with historically inaccurate and uninformative names. The assumption of the Spearman-Brown formula is that split-halves are parallel, which means that the variances of the split-halves are equal. The systematic name proposed for the Spearman-Brown formula is split-half parallel reliability. In addition, the following equivalent systematic formula has been proposed.
Split-half tau-equivalent reliability
Split-half tau-equivalent reliability is a reliability coefficient that can be used when the variances of split-halves are not equal. Flanagan-Rulon (, ), Guttman () suggested the following formula expressions:
,
, and
.
Where , , , and is the variance of the first split-half, the second half, the sum of the two split-halves, and the difference of the two split-halves, respectively.
These formulas are all algebraically equivalent. The systematic formula is as follows.
.
Split-half congeneric reliability
Split-half parallel reliability and split-half tau-equivalent reliability have the assumption that split-halves have the same length. Split-half congeneric reliability mitigates this assumption. However, because there are more parameters that need to be estimated than the given pieces of information, another assumption is needed. Raju (1970) examined the split-half congeneric reliability coefficient when the relative length of each split-half was known. Angoff (1953) and Feldt (1975) published the split-half congeneric reliability assuming that the length of each split-half was proportional to the sum of the variances and covariances.
History
The name Spearman-Brown seems to imply a partnership, but the two authors were competitive. This formula originates from two papers published simultaneously by Brown (1910) and Spearman (1910) in the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 Charles Spearman had a hostile relationship with Karl Pearson who worked together in King's College London, and they exchanged papers that criticized and ridiculed each other. William Brown received his Ph.D. under Pearson's guidance. An important part of Brown's doctoral dissertation was devoted to criticizing Spearman' work. Spearman appears first in this formula before Brown because he is a more prestigious scholar than Brown. For example, Spearman established the first theory of reliability and is called "the father of classical reliability theory." This is an example of Matthew Effect or Stigler's law of eponymy.
This formula should be referred to as the Brown-Spearman formula for the following reasons: First, the formula we use today is not Spearman's (1910) version, but Brown's (1910). Brown (1910) explicitly presented this formula as a split-half reliability coefficient, but Spearman (1910) did not. Second, the formal derivation of Brown (1910) is more concise and elegant than that of Spearman (1910). Third, it is likely that Brown (1910) was written before Spearman (1910). Brown (1910) is based on his doctoral dissertation, which was already available at the time of publication. Spearman (1910) criticized Brown (1910), but Brown (1910) criticized only Spearman (1904). Fourth, it is the APA style to list the authors in alphabetical order.
Use and related topics
This formula is commonly used by psychometricians to predict the
reliability of a test after changing the test length. This relationship is
particularly vital to the split-half and related methods of estimating
reliability (where this method is sometimes known as the "Step Up" formula).
The formula is also helpful in understanding the nonlinear relationship
between test reliability and test length. Test length must grow by increasingly larger values as the desired reliability approaches 1.0.
If the longer/shorter test is not parallel to the current test, then the prediction will not be strictly accurate. For example, if a highly reliable test was lengthened by adding many poor items then the achieved reliability will probably be much lower than that predicted by this formula.
For the reliability of a two-item test, the formula is more appropriate than Cronbach's alpha (used in this way, the Spearman-Brown formula is also called "standardized Cronbach's alpha", as it is the same as Cronbach's alpha computed using the average item intercorrelation and unit-item variance, rather than the average item covariance and average item variance).
Citations
References
Spearman, Charles, C. (1910). Correlation calculated from faulty data.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 3, 271–295.
Brown, W. (1910). Some experimental results in the correlation of mental abilities.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 3, 296–322.
Psychometrics
Comparison of assessments
Statistical reliability |
https://ko.wikipedia.org/wiki/%EC%95%BC%EB%A7%88%EB%AA%A8%ED%86%A0%20%EC%9A%94%EC%8B%9C%EB%85%B8%EB%B6%80 | 야마모토 요시노부 | 야마모토 요시노부(, 1998년 8월 17일 ~ )는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이며, 현재 퍼시픽 리그인 오릭스 버펄로스의 소속 선수(투수)이다. 오카야마현 비젠시 출신이다.
2021년에 일본 프로 야구(NPB) 역대 8번째이자 레이와 시대에서는 처음으로 투수 부문 5관왕을 달성했고 이듬해 2022년에는 NPB 역사상 최초가 되는 2년 연속 투수 부문 5관왕을 달성했다.
상세 정보
출신 학교
미야코노조 고등학교
선수 경력
오릭스 버펄로스(2017년 ~ )
국가 대표 경력
2019년 WBSC 프리미어 12 일본 국가대표
2020년 하계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
202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
수상·타이틀 경력
타이틀
다승왕 : 3회(2021년 ~ 2023년) ※3회 달성은 이나오 가즈히사, 노모 히데오, 와쿠이 히데아키에 이은 퍼시픽 리그 공동 4위. 3년 연속은 노모 히데오 다음으로 역대 공동 2위
최우수 평균 자책점 : 4회(2019년, 2021년 ~ 2023년) ※4회 달성은 이나오 가즈히사에 이은 역대 공동 2위. 2년 연속은 이나오 가즈히사, 스가노 도모유키와 나란히 역대 최장 타이 기록
최다 탈삼진 : 4회(2020년 ~ 2023년) ※4회 달성은 스즈키 게이시, 노리모토 다카히로에 이은 퍼시픽 리그 공동 3위. 4년 연속은 에나쓰 유타카, 스즈키 게이시, 노리모토 다카히로에 이은 공동 4위
최고 승률 : 3회(2021년 ~ 2023년) ※3회 달성은 야마다 히사시, 구도 기미야스에 이은 역대 공동 3위. 3년 연속은 NPB 역사상 최장 기록
수상
NPB
사와무라 에이지상 : 2회(2021년, 2022년) ※2년 연속 수상은 퍼시픽 리그 사상 최초
MVP : 2회(2021년, 2022년) ※투수로서의 연속 수상은 역대 5번째
베스트 나인 : 2회(2021년, 2022년)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상 : 2회(2021년, 2022년) ※투수 부문
월간 MVP : 8회(2020년 9월, 2021년 6월, 2021년 7·8월, 2021년 9월, 2021년 10·11월, 2022년 6월, 2022년 9·10월, 2023년 9·10월) ※투수 부문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최우수 선수(MVP) : 1회(2021년)
최우수 배터리상 : 3회
2021년 ※포수: 와카쓰키 겐야
2022년 ※포수: 와카쓰키 겐야
2023년 ※포수: 와카쓰키 겐야
일본 시리즈 감투상 : 1회(2021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솔상 : 1회(2022년)
월간 최우수 배터리상 : 6회
2021년
6월 ※포수: 후시미 도라이
8월, 9월, 10월 ※포수: 와카쓰키 겐야
2022년
6·7월, 9월 ※포수: 와카쓰키 겐야
올스타전 감투상 : 2회(2019년 1차전, 2021년 1차전)
국제 대회
올림픽 야구 올 올림픽 팀(우완 투수 : 2021년)
개인 기록
투수 기록
첫 등판·첫 선발 등판 : 2017년 8월 20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9차전(교세라 돔 오사카), 5이닝 1실점 6탈삼진으로 승패는 연결되지 않음
첫 탈삼진 : 상동, 1회초에 윌리 모 페냐로부터 헛스윙 삼진
첫 승리·첫 선발 승리 : 2017년 8월 31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22차전(ZOZO 마린 스타디움), 5이닝 2실점 2탈삼진
첫 홀드 : 2018년 4월 28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4차전(교세라 돔 오사카), 8회초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첫 세이브 : 2018년 5월 1일,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4차전(교세라 돔 오사카), 9회초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이닝 무실점
첫 완투·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 2019년 6월 28일,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10차전(메트라이프 돔), 9이닝 무실점(5피안타 2볼넷 11탈삼진)
기타
투수 부문 3관왕 : 3회(2021년 ~ 2023년) ※역대 21번째, 3회 달성과 3년 연속은 모두 사상 최초
투수 부문 4관왕(3관왕+최고 승률) : 3회(2021년 ~ 2023년) ※역대 12번째, 2021년에는 레이와 시대 최초, 여러 차례는 사상 최초
투수 부문 5관왕(4관왕+최다 완봉) : 2회(2021년, 2022년) ※역대 8번째 다른 투수와 5개 부문 중 하나로 나란히 투수 부문 5관왕 달성은 사상 최초
투수 부문 7관왕(7관왕+최다 투구 이닝+최다 완투) : 2회(2021년, 2022년) ※1938년 빅토르 스타루힌, 1943년 후지모토 히데오에 이은 역대 3번째, 양대 리그 출범 이후 최초
노히트 노런 : 2회 ※여러 차례 달성한 것은 역대 10번째
1회째 : 2022년 6월 18일,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11차전(베루나 돔), 9이닝 102구 9탈삼진 1볼넷 무실점 ※역대 86명째(97번째), 구단 역사상 9명째(10번째), 허용한 주자가 1명뿐이었던(준퍼펙트 게임) 것은 역대 18명째(19번째)
2회째 : 2023년 9월 9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9차전(ZOZO 마린 스타디움), 9이닝 102구 2사사구 무실점 8탈삼진 ※역대 100번째, 2년 연속 달성한 것은 역대 3번째, 82년 만에 양대 리그제 이후로는 처음
5년 연속 시즌 WHIP 0점대 : 2019년 ~ 2023년 ※퍼시픽 리그 기록, NPB에서는 고야마 마사아키에 이은 역대 공동 2위
시즌 평균 자책점 1.21 : 2023년 ※1956년 이나오 가즈히사(1.06)에 이은 퍼시픽 리그 역대 2위
시즌 피홈런 2개 : 2023년 ※규정 투구 이닝을 도달한 투수로는 양대 리그제 이후 최소 기록
한 이닝 3사구 : 2020년 7월 5일,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6차전(메트라이프 돔), 6회말에 야마카와 호타카, 나카무라 다케야, 기무라 후미카즈에게 사구 ※NPB 타이 기록, 역대 11번째
25이닝 연속 탈삼진 : 2020년 7월 26일 ~ 8월 25일 ※일본인 2위, 역대 4위
시즌 15연승 : 2021년 5월 28일 ~ 10월 25일 ※역대 9명째, 10번째 구단 기록
일본 시리즈 20탈삼진(2021년) : 6경기로 치른 일본 시리즈로서는 역대 3위
클라이맥스 시리즈 17이닝 연속 무실점 : 2021년, 2022년 ※와쿠이 히데아키, 스가노 도모유키와 함께 프로 야구 최다 타이 기록
개막전 선발 투수 : 2회(2021년, 2022년)
올스타전 출장 : 5회(2018년, 2019년, 2021년 ~ 2023년)
등번호
43(2017년 ~ 2019년) ※2019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서도 착용
18(2020년 ~ )
연도별 투수 성적
2023년 시즌 종료 기준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연도별 투수(선발) 성적 소속 리그내에서의 순위
‘-’는 10위 미만(평균 자책점에 있어서의 규정 투구 이닝 미달도 ‘-’로 표기)
연도에서 굵은 글씨는 규정 투구 이닝을 도달한 연도
WBSC 프리미어 12에서의 투수 성적
올림픽에서의 투수 성적
WBC에서의 투수 성적
연도별 수비 성적
2023년 시즌 종료 기준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연도에서 굵은 글씨는 골든 글러브상 수상 연도
각주
외부 링크
2016년 일본 프로 야구 신인 선수 선택 회의 - 오릭스 버펄로스 드래프트 지명 선수 목록 - 일본 야구 기구 공식 홈페이지
199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야구 선수
일본 프로 야구 투수
오릭스 버펄로스 선수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
사와무라 에이지상 수상자
2019년 WBSC 프리미어 12 참가 선수
2020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일본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올림픽 야구 메달리스트
2020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일본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오카야마현 출신
202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 https://en.wikipedia.org/wiki/Yoshinobu%20Yamamoto | Yoshinobu Yamamoto | is a Japanese professional baseball pitcher for the Orix Buffaloes of the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NPB). He made his NPB debut in 2017. Yamamoto is a two-time Pacific League Most Valuable Player, a three-time Eiji Sawamura Award winner, and a three-time Japanese Triple Crown winner.
Professional career
Orix Buffaloes
Yamamoto made his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NPB) debut on August 20, 2017, for the Orix Buffaloes of the Pacific League. Yamamoto finished the 2021 season with an 18–5 record and 206 strikeouts across innings pitched. His 1.39 earned run average (ERA) lead the league for the season. Yamamoto won the Pacific League Most Valuable Player Award following the season.
On June 18, 2022, Yamamoto threw the year's fourth no-hitter and the 97th in NPB, pitching the Buffaloes to a 2–0 win over the Saitama Seibu Lions. In 26 starts for Orix in 2022, Yamamoto registered a 15–5 record and 1.68 ERA with 205 strikeouts in 193 innings pitched. Following the season, he was named the Eiji Sawamura Award winner for the second consecutive season. He also won his second consecutive pitching Triple Crown.
On September 9, 2023, Yamamoto threw his second NPB career no-hitter, blanking the Chiba Lotte Marines. In doing so, he became the first pitcher in NPB history to throw no-hitters in consecutive seasons.
International career
Yamamoto represented the Japan national baseball team in the 2019 exhibition games against Mexico and 2019 WBSC Premier12.
On February 27, 2019, he was selected at the 2019 exhibition games against Mexico.
On October 1, 2019, he was selected at the 2019 WBSC Premier12.
In May 2021, Yamamoto was named to the roster of the Japan national baseball team who hosted baseball at the 2020 Summer Olympics. The Japanese baseball team went on to win gold, beating Team USA in the gold-medal game. Yamamoto was also named to the Tokyo 2020 All-Olympic Baseball Team.
In 2023, Yamamoto represented Japan in the 5th World Baseball Classic winning the tournament.
Playing style
Yamamoto is a , right-handed pitcher. With a three-quarters delivery, he throws a fastball averaging 95 mph (153 km/h), which tops out at 99 mph (159 km/h), a deceptive splitter, a cutter, and a curveball. Scouts said that the splitter is a legitimate out-pitch at the big league level. He also has great command, posting a BB/9 of 2.1 in his NPB career.
References
External links
Career statistics – NPB.jp
1998 births
Living people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pitchers
Orix Buffaloes players
Baseball people from Okayama Prefecture
2019 WBSC Premier12 players
Baseball players at the 2020 Summer Olympics
Olympic baseball players for Japan
Olympic medalists in baseball
Olympic gold medalists for Japan
Medalists at the 2020 Summer Olympics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MVP Award winners
2023 World Baseball Classic players |
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C%9D%B4%EC%8A%A4%20%EC%B9%B4%EB%A5%B4%EB%8B%88%EA%B8%80%EB%A6%AC%EC%95%84 | 루이스 카르니글리아 | 루이스 안토니오 카르니글리아(; 1917년 10월 4일, 올리보스 ~ 2001년 6월 22일,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아르헨티나의 전 선수이자 감독으로, 현역 시절 공격수로 활약하였다. 그는 1930년대 보카 주니어스에서 활약한 주요 선수이나, 1950년대에 레알 마드리드를 지휘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루이스 카르니글리아는 사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라 레콜레타 공동묘지에 묻혔다.
선수 경력
카르니글리아는 올리보스 출신으로, 1932년에 4부 리그 클럽인 클루브 데 올리보스에서 축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1년을 보낸 후 티그레에 합류하였지만, 이 곳은 그가 유년 시절부터 동경하던 보카 주니어스에 입단하기 위한 디딤돌에 불과하였는데, 그는 1936년에 청색과 금색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그가 처음 출전한 보카 경기는 파라나와의 친선경기로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가르니글리아는 3분 만에 득점을 올렸지만, 시작 5분 만에 왼팔이 골절되기도 하였다. 보카는 이 경기에서 3-0으로 이겼다. 그는 보카의 1940년 아르헨티나 1부 리그와 코파 독토르 카를로스 이바르구렌의 우승 주역이었다.
1941년, 그는 프로 무대 최대의 암초를 만났는데, 카르니글리아는 산 로렌소와의 경기에서 다리가 골절되었다. 그는 재활에만 3년을 보냈는데, 차카리타와 아틀라스에서 재활한 그는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 디비시옹 1과 디비시옹 2에서 경력을 이어나갔는데, 툴롱과 니스에서 활약하였다. 이 중 니스에서 감독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현역 말년은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니스에서 1952년에 디비시옹 1과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경험했고, 1954년에 또다시 쿠프 드 프랑스를 우승했다.
감독 경력
1953년, 니스로 복귀한 후, 카르니글리아는 2년을 더 활약하다가 축구화를 벗고 영국인 조지 베리의 바통을 이어받아 니스의 신임 감독이 되었다. 그는 니스 감독 1년차에 디비시옹 1 우승의 성적을 냈다. 이듬해인 1956-57 시즌, 니스는 리그 1에서 1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카르니글리아는 이후 니스를 떠나 스페인의 거함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 되었다. 니스는 그를 대신해 프랑스인 장 루시아노를 후임 감독으로 앉혔다.
카르니글리아는 1957년 6월부터 1959년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사령탑을 맡았는데, 1959년 2월부터 두 달 동안 신장통으로 지휘봉을 잠시 내려놓았었다. 당시 마드리드는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들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 레몽 코파, 그리고 엑토르 리알이 포진한 선수단이었는데, 디 스테파노는 당시 발롱도르의 수상자였다. 여기에 1957년 선수단에 호세 산타마리아와 푸슈카시 페렌츠가 1958년 합류하였다. 카르니글리아는 푸슈카시 영입 당시 찬동하는 입장이 아니었는데, 이는 푸슈카시가 1년 넘게 프로 무대에서 활약한 적이 없고 눈에 띌 정도로 과체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카르니글리아는 푸슈카시가 오비에도와의 라 리가 경기에 출전하기 전까지 15kg의 체중을 감량케 채찍질했다. 카르니글리아는 1959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푸슈카시를 출전 명단에서 제외되었는데, 그에 따라 카르니글리아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회장에 의해 해임되었다. 카르니글리아는 감독으로 전향한 후 레알 마드리드 사령탑으로서 가장 성공적인 시기를 보냈는데, 유러피언컵을 2번 우승하였다: 1958년에는 결승전에서 밀란에 3-2로, 1959년에는 랭스에 2-0으로 이겼다. 그는 1958년에 라 리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카르니글리아는 ACF 피오렌티나와 바리의 감독을 잠깐 맡고 1961년에 로마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로마 감독으로 1961년에 페어스컵을 우승했다. 1963년 시즌 도중, 카르니글리아는 구단 수뇌부와 마찰을 겪고 사퇴하였고, 그가 1958년에 마드리드를 이끌고 이긴바 있는 밀란의 감독이 되었다. 밀란은 당시 유러피언컵 정상에 오른 구단으로 인터콘티넨털컵에 참가했다. 밀란의 상대는 브라질의 산투스로 펠레를 주축 선수로 둔 위협적인 상대였다. 밀란은 밀라노에서 1차전 경기를 4-2로 이겼는데, 산투스에 허용한 2실점은 모두 펠레에 당한 것이었다. 2차전을 앞두고 아르헨티나인 주심이 매수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밀란이 그에 따라 심판 교체를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2차전에서는 산투스가 부상당한 펠레 없이 4-2로 이겼다. 두 경기에서 동률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던 두 구단 간의 맞대결 승자는 2차전 종료 48시간 만에 산투스에서 벌어진 3차전에 가려졌다. 승자를 가리기 위한 3차전에서 조반니 트라파토니가 페널티 구역에서 산투스 선수를 넘어뜨린 것으로 보였는데, 산투스의 페널티킥이 선언되어, 이것이 실점으로 이어졌다. 체사레 말디니는 격렬히 항의하다 퇴장당했고, 경기는 산투스에 0-1로 패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은퇴 후
감독직 은퇴 후, 카르니글리아는 실비오 마르솔리니 감독을 보좌할 보카 주니어스의 단장이 되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들의 노동조합인 아르헨티나 축구인 노조(FAA)의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수상
감독
니스
디비시옹 1: 1955–56
레알 마드리드
라 리가: 1957–58
유러피언컵: 1957–58, 1958–59
로마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1960–61
참고 문헌
각주
외부 링크
1917년 출생
2001년 사망
남자 축구 공격수
아르헨티나의 남자 축구 선수
아르헨티나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CA 티그레의 축구 선수
CA 보카 주니어스의 축구 선수
차카리타 주니어스의 축구 선수
OGC 니스의 축구 선수
SC 툴롱의 축구 선수
아틀라스 FC의 축구 선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축구 선수
리가 MX의 축구 선수
리그 1의 축구 선수
리그 2의 축구 선수
프랑스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멕시코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세리에 A의 축구 감독
라리가의 축구 감독
아르헨티나의 축구 감독
아르헨티나의 해외 진출 축구 감독
OGC 니스의 축구 감독
레알 마드리드 CF의 축구 감독
ACF 피오렌티나의 축구 감독
SSC 바리의 축구 감독
AS 로마의 축구 감독
AC 밀란의 축구 감독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의 축구 감독
볼로냐 FC 1909의 축구 감독
유벤투스 FC의 축구 감독
CA 산로렌소의 축구 감독
FC 지롱댕 드 보르도의 축구 감독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팀 감독
프랑스에 거주한 아르헨티나인
프랑스의 외국인 축구 감독
이탈리아의 외국인 축구 감독
스페인의 외국인 축구 감독
라 레콜레타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 | https://en.wikipedia.org/wiki/Luis%20Carniglia | Luis Carniglia | Luis Antonio Carniglia (4 October 1917 – 22 June 2001) was an Argentine football striker and manager. He played for Boca Juniors in the 1930s, but is probably best known for managing Real Madrid in the 1950s.
Luis Carniglia was buried in La Recoleta Cemetery in Buenos Aires.
Playing career
Born in Olivos, Carniglia began his career in the fourth division club Club de Olivos, in 1932. He remained there for one season before joining Club Atlético Tigre, but this was only a stepping stone on his way to completing his childhood dream of playing for Boca Juniors, whom he signed for in 1936. His debut, for Boca, was in a friendly played in Parana and was quite a spectacle. Carniglia had a goal within 3 minutes and a fractured left arm by the fifth minute. Boca went on to win the game 3–0. He was part of the Boca side that won the 1940 Argentine First Division and the Copa Dr. Carlos Ibarguren.
1941 was a turn for the worse in his professional career, in a game against San Lorenzo, Carniglia broke his leg. The recovery took three years which he spent at Chacarita Juniors and Atlas, though he was never be the same player again. He prolonged his career by playing in the French Ligue 1 and Ligue 2 with SC Toulon and OGC Nice. Transitioning into the role of manager with OGC Nice. That is not to say that his final years as a player were entirely fruitless, he won the Ligue 1 title and a Coupe de France in 1952, and the Coupe de France again in 1954, all with Nice.
Managerial career
Following his return to OGC Nice in 1953 Carniglia played two more seasons before retiring as a player and taking over the reins as the new Nice manager, from the British manager George Berry. He had immediate success winning the Ligue 1 title with Nice in his first year. The following season, 1956–57, saw Nice finish 13th in Ligue 1. Carniglia then left to take over the Spanish giants Real Madrid. Nice replaced him with the French coach Jean Luciano.
Carniglia was Real Madrid head coach from June 1957 to July 1959 with a two-month stop from February 1959 due to a renal colic. Madrid, at the time, had some of the greatest footballing talent in the world with Alfredo di Stéfano (holder of the Ballon d'Or at the time), Francisco Gento, Raymond Kopa and Héctor Rial. These greats were joined in 1957 by José Santamaría and Ferenc Puskás in 1958. Carniglia did not have a high opinion of Puskás when he arrived, as he had not played professionally in over a year and was considerably over weight. Carniglia whipped him into shape with Puskás losing 15 kg before his first La Liga game against Oviedo. Carniglia left Puskás out of the 1959 European cup final, which led to his being sacked by Santiago Bernabéu, the chairman of Real. Carniglia's time with Real was the most fruitful in his management career, winning the European Cup twice, in 1958 with a 3–2 win over A.C. Milan and in 1959 with a 2–0 win over Reims. He also won the La Liga title in 1958.
Carniglia had short spells at ACF Fiorentina and A.S. Bari before joining Roma in 1961. With Roma, he won the 1961 Fairs Cup.
Following his mid season departure from Roma in 1963, apparently due to arguments with the club directors, he took over at A.C. Milan, the team he had beaten in the 1958 European Cup Final. Milan were the reigning European Cup holders and competed in the Intercontinental Cup. They played the Brazilian side Santos featuring Pelé at the height of his prowess in the final 1963 final. Milan won the opening game 4 – 2 in Milan, Pelé scoring both goals for Santos. Before the second leg rumors began to circulate that the Argentinian referee had been bribed, Milan tried to have match official changed but were barred from doing so. Santos won the second game 4 – 2, without Pelé who was injured. With the two leg final a stalemate, a third decisive play-off game took place in Santos just 48 hours after the second leg. The same match official was used for the playoff game. In the third minute, of the playoff, Giovanni Trapattoni was adjudged to have fouled a player in the box and Santos had a penalty, which they duly converted. Cesare Maldini protested and was sent off. Santos won the fixture 1 – 0.
Following his retirement as a coach Carniglia had a spell as General Manager of Boca Juniors with Silvio Marzolini as the coach. He was the first president of FAA (Futbolistas Argentinos Agremiados), his home country's footballers union.
Personal life
His son Luis César Carniglia was also a footballer. he spent his entire career in Italy playing some Serie A matches before lowering to amateurs leagues. Lot of media and references mistakenly consider father and sons to be the same person.
Honours
Manager
Nice
Ligue 1: 1955–56
Real Madrid
La Liga: 1957–58
European Cup: 1957–58, 1958–59
Roma
Inter-Cities Fairs Cup: 1960–61
References
General
Specific
External links
1917 births
2001 deaths
Sportspeople from Vicente López Partido
Men's association football forwards
Argentine men's footballers
Argentine expatriate men's footballers
Club Atlético Tigre footballers
Boca Juniors footballers
Chacarita Juniors footballers
OGC Nice players
SC Toulon players
Atlas F.C. footballers
Argentine Primera División players
Liga MX players
Ligue 1 players
Ligue 2 players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France
Expatriate men's footballers in Mexico
Serie A managers
La Liga managers
Argentine football managers
Argentine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OGC Nice managers
Real Madrid CF managers
ACF Fiorentina managers
SSC Bari managers
AS Roma managers
AC Milan managers
Deportivo de La Coruña managers
Bologna FC 1909 managers
Juventus FC managers
San Lorenzo de Almagro managers
FC Girondins de Bordeaux managers
UEFA Champions League winning managers
Argentine expatriate sportspeople in France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France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Italy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Spain
Burials at La Recoleta Cemetery
Boca Juniors managers
Argentine expatriate sportspeople in Spain
Argentine expatriate sportspeople in Mexico
Argentine expatriate sportspeople in Italy
Footballers from Buenos Aires Province |
https://ko.wikipedia.org/wiki/SageMath | SageMath | SageMath(과거 명칭: Sage 또는 SAGE, "System for Algebra and Geometry Experimentation")는 대수학, 조합론, 그래프 이론, 수치해석, 수론, 미적분학, 통계학 등 수학의 다양한 분야의 기능을 갖춘 컴퓨터 대수학 시스템이다.
SageMath의 첫 버전은 2005년 2월 24일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를 따르는 오픈 소스 자유 소프트웨어로 배포되었다. SageMath는 마그마, 메이플, 매스매티카, MATLAB을 대체하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사용 예제
대수 및 미적분
x, a, b, c = var('x, a, b, c')
# Note that IPython also supports a faster way to do this, by calling
# this equivalent expression starting with a comma:
# ,var x a b c
log(sqrt(a)).simplify_log() # returns 1/2*log(a)
log(a / b).expand_log() # returns log(a) - log(b)
sin(a + b).simplify_trig() # returns sin(a)*cos(b) + sin(b)*cos(a)
cos(a + b).simplify_trig() # returns -sin(a)*sin(b) + cos(a)*cos(b)
(a + b)^5 # returns (a + b)^5
expand((a + b) ^ 5) # a^5 + 5*a^4*b + 10*a^3*b^2 + 10*a^2*b^3 + 5*a*b^4 + b^5
limit((x ^ 2 + 1) / (2 + x + 3 * x ^ 2), x=Infinity) # returns 1/3
limit(sin(x) / x, x=0) # returns 1
diff(acos(x), x) # returns -1/sqrt(-x^2 + 1)
f = exp(x) * log(x)
f.diff(x, 3) # returns e^x*log(x) + 3*e^x/x - 3*e^x/x^2 + 2*e^x/x^3
solve(a * x ^ 2 + b * x + c, x) # returns [x == -1/2*(b + sqrt(-4*a*c + b^2))/a,
# x == -1/2*(b - sqrt(-4*a*c + b^2))/a]
f = x ^ 2 + 432 / x
solve(f.diff(x) == 0, x) # returns [x == 3*I*sqrt(3) - 3,
# x == -3*I*sqrt(3) - 3, x == 6]
미분 방정식
t = var('t') # define a variable t
x = function('x')(t) # define x to be a function of that variable
de = (diff(x, t) + x == 1)
desolve(de, [x, t]) # returns (c + e^t)*e^(-t)
선형 대수
A = matrix([[1, 2, 3], [3, 2, 1], [1, 1, 1]])
y = vector([0, -4, -1])
A.solve_right(y) # returns (-2, 1, 0)
A.eigenvalues() # returns [5, 0, -1]
B = matrix([[1, 2, 3], [3, 2, 1], [1, 2, 1]])
B.inverse() # returns
[ 0 1/2 -1/2]
[-1/4 -1/4 1]
[ 1/2 0 -1/2]
# same matrix, but over the ring of doubles (not rationals, as above)
sage: B = matrix(RDF, [[1, 2, 3], [3, 2, 1], [1, 2, 1]])
sage: B.inverse()
[-5.55111512313e-17 0.5 -0.5]
[ -0.25 -0.25 1.0]
[ 0.5 0.0 -0.5]
# The Moore-Penrose pseudo-inverse
sage: C = matrix([[1 , 1], [2 , 2]])
sage: C.pseudoinverse()
[1/10 1/5]
[1/10 1/5]
# Alternatively, call NumPy for the pseudo-inverse
# (only numerical)
import numpy
C = matrix([[1 , 1], [2 , 2]])
matrix(numpy.linalg.pinv(C)) # returns
[0.1 0.2]
[0.1 0.2]
정수론
prime_pi(1000000) # returns 78498, the number of primes less than one million
E = EllipticCurve('389a') # construct an elliptic curve from its Cremona label
P, Q = E.gens()
7 * P + Q # returns (24187731458439253/244328192262001 :
# 3778434777075334029261244/3819094217575529893001 : 1)
sage: E2 = EllipticCurve(CC, [0,0,-2,1,1])
sage: E2
Elliptic Curve defined by y^2 + (-2.00000000000000)*y =
x^3 + 1.00000000000000*x + 1.00000000000000 over
Complex Field with 53 bits of precision
sage: E2.j_invariant()
61.7142857142857
가환대수
sage: P.<x, y, z> = PolynomialRing(QQ) # polynomial ring in x, y, z over the rationals
sage: (x**3 + y**3 + z**3 - 3*x*y*z).factor()
(x + y + z) * (x^2 - x*y + y^2 - x*z - y*z + z^2)
sage: I = P.ideal(x**2, x*y - y**2) # ideals defined by generators
sage: I.groebner_basis()
[y^3, x^2, x*y - y^2]
같이 보기
매스잭스
각주
외부 링크
SageMath 공식 홈페이지
SageMath 웹 인터페이스
컴퓨터 대수학 시스템 | https://en.wikipedia.org/wiki/SageMath | SageMath | SageMath (previously Sage or SAGE, "System for Algebra and Geometry Experimentation") is a computer algebra system (CAS) with features covering many aspects of mathematics, including algebra, combinatorics, graph theory, numerical analysis, number theory, calculus and statistics.
The first version of SageMath was released on 24 February 2005 as free and open-source software under the terms of the GNU General Public License version 2, with the initial goals of creating an "open source alternative to Magma, Maple, Mathematica, and MATLAB". The originator and leader of the SageMath project, William Stein, was a mathematician at the University of Washington.
SageMath uses a syntax resembling Python's, supporting procedural, functional and object-oriented constructs.
Development
Stein realized when designing Sage that there were many open-source mathematics software packages already written in different languages, namely C, C++, Common Lisp, Fortran and Python.
Rather than reinventing the wheel, Sage (which is written mostly in Python and Cython) integrates many specialized CAS software packages into a common interface, for which a user needs to know only Python. However, Sage contains hundreds of thousands of unique lines of code adding new functions and creating the interfaces among its components.
SageMath uses both students and professionals for development. The development of SageMath is supported by both volunteer work and grants. However, it was not until 2016 that the first full-time Sage developer was hired (funded by an EU grant). The same year, Stein described his disappointment with a lack of academic funding and credentials for software development, citing it as the reason for his decision to leave his tenured academic position to work full-time on the project in a newly founded company, SageMath, Inc.
Achievements
2007: first prize in the scientific software division of Les Trophées du Libre, an international competition for free software.
2012: one of the projects selected for the Google Summer of Code.
2013: ACM/SIGSAM Jenks Prize.
Performance
Both binaries and source code are available for SageMath from the download page. If SageMath is built from source code, many of the included libraries such as OpenBLAS, FLINT, GAP (computer algebra system), and NTL will be tuned and optimized for that computer, taking into account the number of processors, the size of their caches, whether there is hardware support for SSE instructions, etc.
Cython can increase the speed of SageMath programs, as the Python code is converted into C.
Licensing and availability
SageMath is free softwar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GNU General Public License version 3.
Although Microsoft was sponsoring a native version of SageMath for the Windows operating system, prior to 2016 there were no plans for a native port, and users of Windows had to use virtualization technology such as VirtualBox to run SageMath. SageMath 8.0 (July 2017), with development funded by the OpenDreamKit project, successfully built on Cygwin, and a binary installer for 64-bit versions of Windows was available. As of SageMath 10.0 (May 2023), it requires Windows Subsystem for Linux in version 2, which in turn requires Windows to run as a Hyper-V client.
Linux distributions in which SageMath is available as a package are Fedora, Arch Linux, Debian, Ubuntu and NixOS. In Gentoo, it is available via layman in the "sage-on-gentoo" overlay. The package used by NixOS is available for use on other distributions, due to the distribution-agnostic nature of its package manager, Nix.
Gentoo prefix also provides Sage on other operating systems.
Software packages contained in SageMath
The philosophy of SageMath is to use existing open-source libraries wherever they exist. Therefore, it uses many libraries from other projects.
See also
CoCalc
Comparison of numerical-analysis software
Comparison of statistical packages
List of computer algebra systems
References
External links
Computer algebra system software for Linux
Computer algebra system software for macOS
Computer algebra system software for Windows
Free and open-source Android software
Free computer algebra systems
Free educational software
Free mathematics software
Free software programmed in Python
Mathematical software
Python (programming language) scientific libraries |
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C%9D%B4%EC%8A%A4%20%EB%AA%B0%EB%A1%9C%EB%8B%88 | 루이스 몰로니 | 루이스 몰로니 아르벨로(; 1925년 5월 12일, 카나리아 제도 산타 크루스 데 테네리페 ~ 2010년 2월 12일, 카나리아 제도 라스 팔마스)는 스페인의 전 축구 미드필더이자 감독이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와 라스 팔마스 소속으로 도합 12년 동안 라 리가 175경기 출전 90골을 기록하였다. 그는 두 구단에서 감독으로 일했는데, 전자의 구단에서 선수와 감독으로서 도합 12번의 주요 대회 우승을 거두었다.
몰로니는 1950년 FIFA 월드컵에 스페인을 대표로 하여 참가했다. 1960년대 말에 잠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클럽 경력
몰로니는 카나리아 제도 산타 크루스 데 테네리페 출신이다. 그의 성씨인 몰로니는 아일랜드계 성씨로, 클레어 주에서 유래했으며, 대게 말로니라고 불린다.
그는 유년 시절에 테네리페에 입단 시험을 보았지만, 시험 경기 후 입단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골대 뒤에 자리를 잡아 장외로 나간 공을 회수해 다시 투입하는 볼보이가 되었는데, 다양한 기술을 선보인 후 산타 크루스에 입단했지만, 당시 18세가 되지 못했던 그는 친선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다.
1946년, 마리노 소속으로 카나리아 지역 대회를 우승한 후, 몰로니는 동시에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눈도장을 찍었다. 전자의 구단은 대변인을 배편으로 보내 영입하려 했고, 후자의 구단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이 레우스 여행 도중 라 반구아르디아지의 기사를 읽고 하신토 킹코세스 단장에 즉시 전화로 연락해 몰로니를 영입할 것을 요청하였다. 비록 첫 선을 보인 경기에서 형편 없는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베우의 믿음은 확고했고, 250,000 페세타와 3,000의 월급에 이적을 확정지었다.
1946년 12월 1일, 몰로니는 레알 마드리드 신고식을 치렀는데, 바르셀로나와의 라 리가 안방 경기에서 79분에 머리로 결승골을 넣어 2-1로 이겼다. 그는 15번의 경기에 출전해 10골을 추가하고 1년차를 마감했고,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를 우승했다.
마드리드에서 11년을 보내면서, 몰로니는 모든 대회를 통틀어 198번의 경기에 출전해 107번 골망을 흔들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5번의 우승을 거두었는데, 이 중에는 2번의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컵 초대 대회 우승도 있다. 다만, 그는 후자의 대회 결승전에 출전하지는 않았다.
국가대표팀 경력
몰로니는 5년보다 적은 시간 동안 스페인 국가대표팀 경기에 7번 출전하였다. 그의 첫 국가대표팀 경기는 1950년 4월 2일, 차마르틴 신구장에서 벌어진 포르투갈과의 1950년 FIFA 월드컵 예선전 경기로, 그는 이 경기에서 7경기에 넣은 2골 중 한 골을 기록해 5-1 대승에 일조하였다.
기예르모 에이사기레 감독에 의해 브라질에서 열릴 본선에 참가할 선수단에 이름을 올린 몰로니는 2-2로 비긴 우루과이와의 2차 조별리그 2차전에 출전했고, 스페인은 이 대회를 4위로 마무리했다.
감독 경력
몰로니는 1958년 1월, 32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하였고, 은퇴 무대인 라스 팔마스의 지휘봉을 잡아 감독일을 시작하였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주로 감독 대행을 맡았는데, 1959-60 시즌에는 1부 리그 강등을 막지 못했다. 1968-69 시즌, 정식 감독으로 취임한 몰로니의 라스 팔마스는 그 시즌 우승을 거둔 레알 마드리드에 이어 역대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1969년 3월부터 6월까지, 몰로니는 스페인 성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4경기를 지휘했다. 그의 임기에 스페인은 2승 1무 1패의 성적을 냈고, 1패는 핀란드에게 당한 것이었다.
1973-74 시즌 말, 몰로니는 레알 마드리드의 단장직을 맡던 도중 (그는 1990년까지 단장직을 맡았다) 미겔 무뇨스를 대신해 1군 감독을 맡았다. 그는 그해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을 이끌었고, 해임된 밀랸 밀랴니치, 부야딘 보슈코브, 그리고 아만시오 아마로의 바통을 이어받아 1977-78 시즌과 1978-79 시즌에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또한 그는 1984-85 시즌과 1985-86 시즌 UEFA컵을 우승할 당시에도 머랭 군단을 지휘했다.
사망
축구계에서 은퇴한 후, 몰로니는 고향 동네에 복귀했다. 2010년 2월 12일 84세의 나이로 라스 팔마스에서 영면했다.
같이 보기
UEFA컵 및 UEFA 유로파리그 우승팀 감독 목록
각주
외부 링크
Eu-Football 스페인 국가대표팀 통계
1925년 출생
2010년 사망
아일랜드계 스페인인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 출신 스포츠인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카나리아 제도 출신 축구 선수
남자 축구 미드필더
라리가의 축구 선수
레알 마드리드 CF의 축구 선수
UD 라스팔마스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195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스페인의 축구 감독
라리가의 축구 감독
UD 라스팔마스의 축구 감독
레알 마드리드 CF의 축구 감독
UEFA컵 우승팀 감독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https://en.wikipedia.org/wiki/Luis%20Molowny | Luis Molowny | Luis Molowny Arbelo (12 May 1925 – 12 February 2010) was a Spanish football midfielder and coach.
He amassed La Liga totals of 175 matches and 90 goals during 12 seasons, with Real Madrid and Las Palmas. He went on to work as a manager with the two clubs, winning 12 major titles with the former in both capacities combined.
Molowny represented Spain at the 1950 World Cup. For a brief period in the late 1960s, he also coached the national team.
Club career
Molowny was born in Santa Cruz de Tenerife, Canary Islands. His surname originated from County Clare in Ireland, where it is now most often spelt Maloney. He trialled for CD Tenerife as a youngster, but was not allowed to play in the scouting match. He positioned himself behind one of the goals in order to act as a ball boy and retrieve lost balls and return them, and after a display of skills he was signed by Santa Cruz CF but, not being 18 at the time, he was limited to appear in friendly games.
In 1946, after winning the Canarian regional championships with Marino FC, Molowny caught the eye of both FC Barcelona and Real Madrid. The former club sent an emissary by boat to sign him, and the latter's president, Santiago Bernabéu, upon reading the developments in La Vanguardia whilst he was travelling to Reus, telephoned to director Jacinto Quincoces and ordered that the player be signed; after he performed poorly in a match where he was due to showcase his talent, Bernabéu was still adamant, and a deal was eventually closed for 250.000 pesetas and a 3.000 monthly salary.
Molowny made his debut for his new team on 1 December 1946, scoring through a 79th-minute header in a 2–1 La Liga home win against Barcelona. He finished his first season with a further ten goals in 15 appearances, winning the Copa del Generalísimo.
During his 11-year stint in Madrid, Molowny appeared in 198 games all competitions comprised, netting 107 times. He conquered five titles with his main club, including two national championships and the 1955–56 edition of the European Cup, even though he did not take part in the final of the latter tournament itself.
International career
Molowny earned seven caps for Spain, during slightly less than five years. His first came on 2 April 1950, and he contributed with one of his two international goals to a 5–1 win over Portugal for the 1950 FIFA World Cup qualifiers, at the Nuevo Chamartín.
Selected by manager Guillermo Eizaguirre for the finals in Brazil, Molowny appeared in the 2–2 second group stage draw against Uruguay, helping to a final fourth place.
Coaching career
Molowny retired in January 1958 at the age of 32, and immediately started coaching UD Las Palmas where he had last played. Over the following seasons he often acted as interim manager, not being able to prevent top flight relegation in 1960; in the 1968–69 campaign, already as a full-time coach, he led the team to a best-ever runner-up finish only behind champions Real Madrid.
From March–June 1969, Molowny was in charge of the Spanish senior side who he coached for four games. During his tenure, he won twice, drew once and lost to Finland.
Late into 1973–74 Molowny, who was working with Real Madrid in directorial capacities (where he remained until 1990), replaced Miguel Muñoz at the helm of the first team. He won the domestic cup that year, and successively took the place of Miljan Miljanić, Vujadin Boškov and Amancio Amaro after they were fired, being crowned champion in 1978 and 1979; additionally, he was also on the bench as the Merengues won consecutive UEFA Cups in 1984–85 and 1985–86.
Death
After quitting football altogether, Molowny settled in his native region. He died on 12 February 2010 at the age of 84, in Las Palmas.
In film
Molowny played himself in three Spanish films:
Once pares de botas (1954).
Radio Stories (1955). He is interviewed for a radio program.
Saeta rubia (1956), a biopic about Alfredo Di Stéfano.
Honours
Player
Real Madrid
La Liga: 1953–54, 1954–55, 1956–57
Copa del Generalísimo: 1947
Copa Eva Duarte: 1947
European Cup: 1955–56
Latin Cup: 1955, 1957
Manager
Real Madrid
La Liga: 1977–78, 1978–79, 1985–86
Copa del Rey: 1973–74, 1981–82
Copa de la Liga: 1985
UEFA Cup: 1984–85, 1985–86
Individual
Manager
Don Balón Award (La Liga Coach of the Year): 1977–78, 1978–79, 1979–80
See also
List of UEFA Cup winning managers
References
External links
1925 births
2010 deaths
Spanish people of Irish descent
Spanish men's footballers
Footballers from Santa Cruz de Tenerife
Men's association football midfielders
La Liga players
Real Madrid CF players
UD Las Palmas players
Spain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1950 FIFA World Cup players
Spanish football managers
La Liga managers
UD Las Palmas managers
Real Madrid CF managers
UEFA Cup winning managers
Spain national football team managers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B%B9%84%EC%97%90%EB%A5%B4%20%EC%9D%B4%EB%A3%A8%EB%A0%88%ED%83%80 | 하비에르 이루레타 | 하비에르 이루레타고예나 아미아노(, 1948년 4월 1일, 바스크 지방 이룬 ~)는 줄여서 하비에르 이루레타()로 알려진 스페인의 전 축구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감독이다.
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특출한 활약을 펼쳤는데, 두 구단 소속으로 도합 344번의 라 리가 경기에 출전해 70골을 넣었다.
이루레타는 스페인 1부 리그의 여러 구단 지휘봉을 맡았는데, 특히 데포르티보 지도자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그는 갈리시아 지방의 양강 데포르티보와 셀타 비고, 바스크 지방의 양강 아틀레틱 빌바오와 레알 소시에다드를 모두 지휘한 적이 있는 유일한 감독이기도 하다.
클럽 경력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루레타는 기푸스코아 주 이룬 출신으로 1965년에 인근 구단 레알 우니온에서 성인 무대 신고식을 치렀다. 2년 후, 그는 소속 구단이 2부 리그 플레이오프전 진출권을 얻도록 도왔고, 이후 같은 해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였다. 아틀레티코 소속으로 이루레타는 아델라르도, 루이스 아라고네스, 그리고 호세 에울로히오 가라테와 협력하여 라 리가 2회 우승과 코파 델 레이 1회 우승에 공헌했다.
매트릭스 제작자들은 1974년에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하였지만, 바이에른 뮌헨이 우승하고도 인터콘티넨털컵 참가를 거절하면서 우승 자격으로 대신 참가하여 아르헨티나의 CA 인데펜디엔테를 상대해 합계 2-1 승리에 공헌하였는데, 이루레타는 2차전에서 2-0으로 이기는 경기에서 1득점을 올렸었다.
아틀레틱 빌바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일원으로 8년을 보낸 이루레타는 고향 바스크 지방으로 복귀해 아틀레틱 빌바오에 입단하였다. 빌바오에서 거둔 최고의 성적은 1977년에 2개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둔 것이었는데, 하나는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 하나는 UEFA컵에서 얻은 것으로, 당시 이루레타는 노련한 호세 앙헬 이리바르와 신예 호세 라몬 알렉상코와 동행하였다.
1980년, 이루레타는 32세의 나이로 400번이 넘는 공식 경기에 출전해 100골 가까이 넣고 은퇴하였다.
국가대표팀 경력
이루레타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약 3년이라는 기간 (정확히 2년 11개월) 동안에 6경기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에 따라 그는 주요 대회에 참가한 적이 없다. 그가 출전한 첫 국가대표팀 경기는 2-0으로 친선경기에서 승리한 마드리드에서의 우루과이전이었다.
현역 생활 말년, 이루레타는 바스크 국가대표팀 경기에 참가하기도 했다.
감독 경력
초창기부터 데포르티보까지
감독으로 전향한 후, 이루레타는 하부 리그의 세스타오 지휘봉을 잡고 4년 뒤에 로그로녜스 감독이 되었으며, 그 다음으로 오비에도에서 1990-91 시즌 6위의 성적을 내어 이듬해 UEFA컵 진출 자격을 얻었다. 그는 셀타 비고에서도 1997-98 시즌에 같은 업적을 세워 돈 발론과 엘 파이스의 올해의 감독상을 석권하였고, 1994-95 시즌, 그는 잠깐 아틀레틱 빌바오로 복귀하였고, 이어서 이웃 레알 소시에다드를 지도했다.
그러나, 이루레타는 데포르티보 감독으로 최고의 성과를 냈는데, 그는 데포르티보를 7년 지휘하면서, 2000년에 돈 발론 올해의 감독으로 또 선정되었다. 2년차에 그는 데포르의 사상 첫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2000-01 시즌과 2001-02 시즌에 준우승, 이어지는 2시즌 동안에는 3위를 기록하면서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2000-01 시즌과 2001-02 시즌에 8강, 2003-04 시즌에는 준결승 진출의 성과를 냈다. 2001-02 시즌에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제압하고 코파 델 레이 정상에 올랐다.
베티스
이루레타는 2006년 6월에 베티스와 1년 계약을 맺고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리그에서의 부진으로 12월 21일에 해임되었다. 그는: "제 계약은 상호 계약 해지로 종료되었지만, 제가 먼저 제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금같이 좋지 않은 상황을 더 이어나갈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말년
2007년 10월, 이루레타는 잉글랜드의 볼턴 원더러스 후임 감독 지망자로 이름을 올렸지만, 이 자리는 게리 멩슨의 것이 되었고, 12월에는 레알 소시에다드의 크리스 콜먼 감독의 유력한 후임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빅토르 페르난데스에 이어 사라고사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2008년 3월 3일, 취임 1달 반도 되지 않아 이루레타가 감독직 취임 이후로는 없었던 4경기 연속 패배를 당하면서 사표를 냈고, 아라곤 연고 구단이 강등권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을 임무를 수행할 마음이 없었다고도 밝혔다. (이후 사라고사는 시즌이 끝나고 강등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사라고사의 전 골키퍼이자 당시 우에스카 감독을 맡던 마놀로 비야노바가 이루레타의 뒤를 맡게 되었다.
감독 통계
2019년 5월 24일 기준
수상
선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라 리가: 1969–70, 1972–73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1971–72
인터콘티넨털컵: 1974
유러피언컵 준우승: 1973–74
아틀레틱 빌바오
UEFA컵 준우승: 1976–77
코파 델 레이 준우승: 1976–77
감독
데포르티보
라 리가: 1999–2000
코파 델 레이: 2001–02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0, 2002
각주
외부 링크
아틀레틱 빌바오 프로필
아틀레틱 빌바오 감독 프로필
Eu-Football 스페인 국가대표팀 통계
194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이룬 출신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교도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바스크주 출신 축구 선수
남자 축구 미드필더
라리가의 축구 선수
테르세라 디비시온의 축구 선수
레알 우니온의 축구 선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축구 선수
아틀레틱 빌바오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아마추어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바스크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의 축구 감독
라리가의 축구 감독
세군다 디비시온의 축구 감독
세군다 디비시온 B의 축구 감독
세스타오 SC의 축구 감독
CD 로그로녜스의 축구 감독
레알 오비에도의 축구 감독
라싱 산탄데르의 축구 감독
아틀레틱 빌바오의 축구 감독
레알 소시에다드의 축구 감독
셀타 비고의 축구 감독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의 축구 감독
레알 베티스의 축구 감독
레알 사라고사의 축구 감독 | https://en.wikipedia.org/wiki/Javier%20Irureta | Javier Irureta | Javier Iruretagoyena Amiano (born 1 April 1948), Irureta for short, is a Spanish retired football attacking midfielder and manager.
He had a distinguished playing career with Atlético Madrid and Athletic Bilbao, playing in 344 La Liga games for both teams combined and scoring 70 goals.
Irureta managed several Spanish top flight clubs, most notably Deportivo. He was the only person to have coached both the two major Galician (Deportivo and Celta) and Basque (Athletic and Real Sociedad) sides.
Playing career
Atlético Madrid
Irureta was born in Irun, Gipuzkoa, making his senior debut for local Real Unión in 1965. Two years later he helped them reach the second division play-offs, before joining Atlético Madrid later that year. During his time at the club he was part of a team that won two La Liga titles and a Copa del Rey, playing alongside the likes of Adelardo, Luis Aragonés and José Eulogio Gárate.
The Colchoneros also reached the European Cup final in 1974, but after the winners, FC Bayern Munich, declined to participate in the Intercontinental Cup, they were invited as runners-up: facing Club Atlético Independiente of Argentina the side won 2–1 on aggregate, with Irureta scoring one of the goals in the 2–0 second-leg home victory.
Athletic Bilbao
After eight seasons at Atlético, Irureta returned to the Basque Country and signed for Athletic Bilbao. The highlight of his career there was winning two runners-up medals in 1977 – Spanish and UEFA Cups, as among his teammates were veteran José Ángel Iribar and an emerging José Ramón Alexanko.
Irureta retired in 1980 aged 32, with more than 400 official matches to his credit and nearly 100 goals.
Spain
Irureta won six caps for Spain in a three-year span (exactly two years and 11 months). However, he did not experience a successful time with the national side, and never took part in any major tournament; his debut came on 23 May 1972 in a 2–0 friendly win with Uruguay, in Madrid.
Towards the end of his playing career, Irureta also played one game for the Basque Country national team.
Coaching career
Early years / Deportivo
As a coach, Irureta started with lowly Sestao Sport Club and joined CD Logroñés four years later, then led Real Oviedo to a sixth-place finish in the 1990–91 season, with subsequent qualification to the UEFA Cup – he repeated the feat with RC Celta de Vigo (where he was awarded Manager of the Year titles by both Don Balón and El País) in 1998. In 1994–95 he briefly returned to Athletic Bilbao, then coached neighbours Real Sociedad.
However, Irureta's greatest successes came with Deportivo de La Coruña where he spent seven years, winning another Don Balón coaching accolade in 2000. In his second year he led Depor to its first ever league title, adding runner-up finishes in 2001 and 2002 and third-places in the following two years while also reaching the UEFA Champions League quarter-finals in 2001 and 2002 and the semi-finals in 2004; in 2002 they also won the domestic cup, beating Real Madrid at the Santiago Bernabéu Stadium.
Betis
Irureta was appointed at Real Betis in June 2006 on a one-year contract, being sacked on 21 December after the team's poor start to the campaign. He stated: "My contract has been rescinded by mutual agreement but I made the first move. We could have continued like this for much longer but it wasn't good".
Later career
In October 2007, Irureta put his name forward to be the new coach of English club Bolton Wanderers, but lost out in the running to Gary Megson, and was also touted by December as possible replacement for Real Sociedad's Chris Coleman.
Eventually, he took over at Real Zaragoza after replacing Víctor Fernández. However, on 3 March 2008, after merely one and a half months in charge, he resigned, arguing that never as a manager had he lost four games in a row, and that he did not feel up to the task of stopping the Aragonese side's slump into the relegation zone (eventually, they dropped down a tier). He was quickly replaced by former Zaragoza goalkeeper Manolo Villanova, whom at the time was in charge of SD Huesca.
Managerial statistics
Honours
Player
Atlético Madrid
La Liga: 1969–70, 1972–73
Copa del Generalísimo: 1971–72; runner-up: 1974–75
Intercontinental Cup: 1974
European Cup runner-up: 1973–74
Athletic Bilbao
UEFA Cup runner-up: 1976–77
Copa del Rey runner-up: 1976–77
Manager
Deportivo
La Liga: 1999–2000
Copa del Rey: 2001–02
Supercopa de España: 2000, 2002
Individual
Don Balón Award: Best Coach 1999–2000
References
External links
Athletic Bilbao manager profile
1948 births
Living people
Footballers from Irun
Spanish men's footballers
Men's association football midfielders
La Liga players
Tercera División players
Real Unión footballers
Atlético Madrid footballers
Athletic Bilbao footballers
Spain men's under-23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amateur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in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Basque Country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nish football managers
La Liga managers
Segunda División managers
Segunda División B managers
Sestao Sport managers
CD Logroñés managers
Real Oviedo managers
Racing de Santander managers
Athletic Bilbao managers
Real Sociedad managers
RC Celta de Vigo managers
Deportivo de La Coruña managers
Real Betis managers
Real Zaragoza managers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B%9C%EC%95%84%EC%9D%98%20%EC%A7%80%EB%A6%AC | 아시아의 지리 | 아시아의 지리는 대략 50개 국가로 구성되는 유라시아의 중부, 동부 지역인 아시아를 분류하는 지리적 개념을 다룬다.
아시아(Asia)의 어원은 앗시리아어 ‘Acu (해뜨는 나라의 뜻)’에서 유래되어 ‘Ereb (해지는 나라)’에서 유래된 유럽(Europe)의 동쪽을 뜻한다. 오늘날의 아시아와 그 서쪽 대륙과의 경계는 대체로 우랄 산맥-카스피해-카프카스 산맥-흑해-보스포루스 해협-에게해-수에즈 지협부-홍해를 통하는 선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자연경계는 문화적·인문적 면으로 보아 여러 가지 무리한 점이 많다. 우랄산맥 동쪽의 소련 영토 및 수에즈 종족의 이집트 영토를 제외한 그 나머지 부분을 아시아로 보는 견해가 옳다. 아시아는 북아시아·중앙아시아·동아시아·동남아시아·남아시아·서아시아의 6지역으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나, 이들 지역은 지형·기후 등 풍토적 조건이 다종다양하다. 이에 아시아는 한랭 아시아·건조 아시아·습윤 아시아 등 3개의 풍토대(風土帶)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들의 풍토적 조건에 따라 한랭 아시아에서는 수렵생활형이, 건조 아시아에는 유목생활형과 오아시스 생활형이, 또 습윤 아시아에는 농경생활형 및 해양생활형(연해부와 도서부)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인문·자연의 양조건을 발판으로 해서 아시아는 다음의 4대문화권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 농경문화권 ② 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 농경문화권 ③ 북아시아 유목문화권 ④ 이란이나 이슬람의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서아시아·오아시스 문화권이다.크게 나누면 아시아는 동아시아 문화권(중국 및 인도)과 서아시아 문화권(메소포타미아)의 2문화권으로 나뉘며, 종교적으로는 불교세계 및 이슬람 세계가 된다.그러나 고대 중세를 뛰어넘어(15 16세기) 이후 유럽 여러 나라의 아시아에 대한 침입이 시작된 이후 18세기 후반까지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화되고, 또 산업자본주의 시대에서 제국주의시대가 되면서 아시아의 식민지화는 완료되었다. 이것으로 아시아의 사회적·경제적 발전은 정체되고, 아시아에는 위대한 고대문명은 있었으나, 발전이 뒤진 후진지역이라는 인식을 널리 심어주기에 이르렀다.이와 같은 아시아상(像)의 한 반영은, 예를 들면 극동·중동·근동이라는 호칭이다. 극동은 거의 동북 아시아를, 중동은 거의 서아시아를, 근동은 발칸 반도 제국(諸國)과 터키를 각각 가리키나, 이것은 영국을 기점으로 한 호칭으로 영국의 식민지주의적·제국주의적인 입장을 반영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식민지의 독립, 민족해방운동의 전진과 함께 식민지 아시아의 이미지는 변모되고, 아시아는 발전도상의 제3세계라는 유력한 구성부분으로서 세계정치·경제무대에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지리적 구분
소아시아 반도의 서북안(岸)에서 파미르 고원, 히말라야 산맥, 대싱안링 산맥, 홋카이도 북부에 걸치는 선을 중심으로 그 북쪽을 비(非)아시아적인 아시아로 구분할 수 있다. 비아시아적인 아시아는 오랫동안 몽골의 정복하에 있었으나, 그 뒤 그리스도교, 마르크스주의 등 외래문화가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 지역인가 하면, 아시아적 아시아인 초승달 지역은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하여 왔고 근래에는 표면상 유럽문화의 영향을 받았어도 그 근본은 유럽화되지 않은 지역이다. 후자는 또한 생계의 기초를 주로 농업에 의존하고 기계문명보다는 토착의 농업문화가 지배적인 대인구 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공통된 목표로 민족통일·생활향상·정치적 자유 등을 내걸고 있다.아시아적 아시아지역은 다시 다음의 4개 지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① 이슬람교·유목(遊牧)·오아시스농(農)·건조기후로 대명사화할 수 있고,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등 3대륙의 십자로에 있는 서남부 아시아, ② 종교적으로는 다양성을 보이고 있으나, 고래로 인도라는 뚜렷한 이미지 속에 싸여 있는 인도지방 또는 남부 아시아, ③ 강력한 양대(兩大) 농업문화권인 중국·인도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아왔고, 많은 도서와 반도로 구성된 해양적인 성격이 강한 동남아시아, ④ 한자(漢字)로써 대표되는 중국 기원(起源)의 문화와 유교·불교적인 사상이 생활의 근저에 뿌리박고 있는 동부아시아로 구분할 수 있다.
지형
북부 저지
대부분의 지역이 오비·예니세이·레나강 등의 하천분지 지역으로 형성되는 대평원으로, 대유럽평원과는 낮은 우랄산맥으로 분리된다. 한편 그 서남부는 아랄해로 배수되는 내륙수계(內陸水系) 지역을 형성하여, 북극해로 배수되는 3대강 분지 지역과 구분된다.북부의 3대강은 강의 길이에 비하여 경사가 몹시 완만하고, 결빙기간이 길어 그 이용도가 낮을 뿐 아니라 해빙기가 가까워지면 상류로부터 내려온 물이 흐르지 못하여 대평원이 혼지화(混地化)하는 경우가 많다.
중부 고지
무수한 신기습곡산계(新期褶曲山系)와 이들 산계가 둘러싸고 있는 고원·분지들로 형성된다. 이들 무수한 산계들은,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북부저지가 있는 방향을 제외하고 모든 방향을 향하여 뻗고 있다. 파미르 고원의 서쪽은 2대산계로 나뉘며, 그 첫째는 파미르 고원에서 서남으로 슐라이만 산맥-코토르 산맥-페르시안만을 따른 마라칸 산맥-자그로스 산맥을 이루고, 그 둘째는 파미르 고원에서 서쪽으로 달려 힌두쿠시 산맥-엘부르즈 산맥을 이룬다. 이들 2대산계는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다시 만났다가 소아시아 반도 서쪽의 폰틱 산맥, 남쪽의 타우루스 산맥으로 갈라져 알프스 조산대로 연결된다. 2대산계가 파미르 고원에서 분리되었다가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다시 만나기까지의 중간에 이루어진 넓은 지역은 대이란 고원을 형성한다. 한편, 힌두쿠시 산맥의 서쪽 한 갈래는 카스피해를 넘어 카프카스 산맥을 이룬다. 파미르 고원의 동쪽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산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나뉜다.
남동부 고지
파미르 고원에서 남동으로 뻗은 카라코람, 트란스 히말라야 등 세계 최대 최고의 험준한 산맥들이 북서에서 남동으로 달려, 인도반도 지역과는 높은 자연 장벽을 이루고 있다. 트란스 히말라야 산맥과 남쪽의 히말라야 산맥 사이를 동류하는 대종곡(大縱谷)이 창포강이다. 또한 히말라야 대습곡 산맥의 동쪽 끝은 나가·아라칸 산지를 이루며 미얀마를 지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수마트라-자바-티모르로 연결되는 대산계를 이루고 끝난다. 남동부 고지의 이들 산계는 제3기의 선신세(鮮新世) 이래 현재에 이르는 융기 운동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믿는 학설이 유력시된다. 다시 파미르 고원에서 동쪽으로 바로 뻗은 쿤룬·알틴·아스틴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는 평균 고도 4,000
5,000m 나 되는 세계 최대의 티벳 고원이 있다. 이 고원은 남서에서 북동으로 경사진 세계 최고의 고원으로 우량은 적은데 증발량은 많아 산지사막이 널리 분포되며, 이들 사막 중에 많은 호소(湖沼)가 발달하여 동부 및 남부 아시아의 큰 강들의 원류지역을 이룬다. 티벳 고원의 북단을 이루는 쿤룬·아스틴·알틴 등 산맥과 그 북쪽의 톈산 산맥 사이에는 표식적(標式的) 내륙분지인 타림분지가 전개된다. 동서 1,400km 남북 500km에 이르는 분지의 중앙부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이룬다.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맥들의 고도는 6,000
7,000m 에 달하나, 분지는 500
1,500m 에 달하여 산지로부터 수많은 하천들이 분지로 흘러 선상지를 형성하고 이들 중 큰 하천은 다시 타림강을 이루고 분지를 돌아 동부의 로브노르호로 유입된다. 유명한 ‘비단길’이란 바로 이 선상지 오아시스를 지나는 길이다.
서부 고지
파미르 고원에서 콜리아 산맥에 이르는 지역으로 파미르 고원과 중앙시베리아 탁상지(卓狀地)간에는 톈산·알타이·자얀 등의 산맥이 있고, 그 사이에는 중가르·투르판 등의 분지가 있다. 이들 산지와 분지들은 심한 부조화 관계를 이루는데 이는 선신세(鮮新世) 이후의 지배사적(地背斜的) 융기 및 습곡산맥의 구조적인 회춘(回春)을 뜻하며, 특히 톈산 산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세계 최심(-1,741m)의 구조호(構造湖) 바이칼호 남방엔 사얀·알타이·난산·인산·대싱안링 등의 산맥으로 둘러싸인 광대한 몽골고원이 있다. 이 고원은 대체로 완만한 파장을 형성하며, 그 중에는 드문드문 몽골어로 타라(搭拉)라 불리는 凸지가 있으며, 새로운 퇴적물(堆積物)로 덮여 저평지를 이루어 이를 고비(?壁)라 부르며, 고원의 중앙부를 고비사막이라 함도 이에서 유래된다. 한편 4기 이후의 융기작용에 의해 형성된 야블로노이·콜리마·코리야크·베르호얀스크·스타노보이 등 산맥이 바이칼 주향과 사얀 주향을 따라 달리고 있다. 중부고지의 동부지역은 시호테 산맥에서 송코이강에 이르는 낮은 산지 및 평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몽골고원의 동부에서 대싱안링 산맥이, 동해에 연하며 시호테·창바이산맥(長白山脈)이 각각 바이칼 주향으로 달리고 있다. 이들 산계간에는 랴오허·쑹화·아무르 등의 강을 중심으로 낮은 평지가 이루어져 소위 만주평야가 전개된다. 한편, 중국 동부는 북쪽에 쿤룬 산맥의 지맥인 알틴·난상의 양산맥이 있고, 이에서 동으로 뻗으면 웨이수이강과 양쯔강 사이에 친링·푸뉴 등의 산맥이 있어 화북(華北)과 화중(華中)의 경계를 이룬다.남쪽의 센샤링·우이·난링 등의 산맥은 화중과 하남의 경계를 이룬다. 이렇게 해서 중국 동부는 3지형구(地形區)로 구분된다. 즉, 화북은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화중은 양쯔강 유역을 중심으로, 화남은 주장강(珠江) 유역을 중심으로 각각 전개된다.
아라비아 반도
아라비아 고원부와 그 동북의 메소포타미아 평원부로 구성된다. 아라비아 고원은 남서에서 동북으로 기울어진 탁상지로, 그 기초는 곤드와나랜드(Gondwana Land)를 형성한 고대 육괴(陸塊)와 이를 덮고 있는 새로운 암층으로 되어 있으며, 북쪽은 네푸드 사막, 남쪽은 룹앨할티 사막으로 덮여 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평원은 넓은 충적평야로 그 가운데로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이 흘러 페르시아만으로 주입된다.
인도 아대륙
인도 아대륙 또는 인도 반도는 북쪽의 대장벽을 이루는 히말라야·슐라이만·아라칸·나가 등의 산지 지역, 갠지스강과 인더스강 유역과 양강 상류의 펀자브 지방을 포함한 북부대평원지역, 3각상(三角狀)의 반도부 등 3대 지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부의 산지지역은 오랫동안 인도지역을 다른 세계와 차단해 온 자연의 대장벽일 뿐 아니라 기후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다만 예부터 카이버를 비롯한 많은 영(嶺)을 통해 외부와 연락되어 왔다. 인더스·갠지스 양대강 유역은 넓은 충적평원으로, 퇴적층의 두께는 몹시 두꺼워 해면하 1,000ft 이상인 지역도 많다. 또한 3각상의 반도부는 대체로 서남에서 동북으로 경사져 있으며, 고대 육괴의 화강·편마암층과 용암으로 된 현무암의 데칸고원을 중심으로 서쪽은 서고츠, 동쪽은 동고츠 산맥이 각각 해안을 따라 달리고 있다. 북부의 평원과는 삿푸라 산지가 장벽을 이루어 민족과 문화의 전반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다.
아나톨리아
북부는 폰투스 산맥, 남부에는 토로스 산맥이 각각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서쪽으로 흑해와 지중해에 연하여 달리고, 그 중앙부를 아나톨리아 고원이라 부른다. 이 고원의 서부는 차차 낮아져 좁은 해안 저지를 이루고에게 해로 깊은 입강(入江)을 발달시킨다.
인도차이나 반도
아시아 대륙의 동남부에 자리잡고, 그 끝은 길고 좁은 말레이 반도가 ‘손’형으로 뻗고 있다. 제3기에 형성된 나가·아라칸산지와 중생대·고생대에 형성된 도우나·인도지나산지 등이 북에서 남으로 달리고, 그 사이에 이라와디·샐위인·메남·메콩 등의 하천이 남류하여 그 지역에 넓은 충적평야를 전개시켜 이 지역의 생활 중심을 이룬다.
동북부의 여러 반도
산둥·랴오둥·한·추코트·타이미르 등 여러 반도는 고생대·중생대 이전에 된 것으로, 그 뒤 새로운 융기가 이루어진 지역들인데 대체로 산지가 많고 퇴적층이 적다.
다만 캄차카 반도만은 제3기에 형성된 것이다.
도서부
아시아의 동부 및 남부 해역에는 대체로 고생대와 그 뒤의 새로운 지층으로 된 많은 열도가 있다. 그 형이 호상(弧狀)을 이룬다 하여 호상열도(弧狀列島:Festoon Is)라 한다. 이들 열도는 환태평양 조산대의 서반부를 이루어 화산활동이 잦고, 대체로 아시아대륙 중심부를 향하여 굽어지고 태평양·인도양 쪽으로 볼록부면을 보인다. 일본 열도·필리핀 열도의 동쪽 사면은 깊은 해구(海溝)를 이루어서, 해구저(海溝底)와 열도상의 산정의 높이를 비교하면 수만 미터에 달하니, 해수가 없다면 세계 최고·최대의 산지(山地)가 형성될 것이다.
같이 보기
북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외부 링크
아시아
아시아의 지질 | https://en.wikipedia.org/wiki/Geography%20of%20Asia | Geography of Asia | Geography of Asia reviews geographical concepts of classifying Asia, the central and eastern part of Eurasia, comprising approximately fifty countries.
Geographical characteristics
Boundary
The land mass of Asia is not the sum of the land masses of each of its regions, which have been defined independently of the whole. For example, the borders of Central Asia and the Middle East depend on who is defining them and for what purpose. These varying definitions are not generally reflected in the map of Asia as a whole; for example, Egypt is typically included in the Middle East, but not in Asia, even though the Middle East is a division of Asia.
The demarcation between Asia and Africa is the isthmus of Suez and the Red Sea.
The border with Europe starts with the coast of the eastern Mediterranean, even though Turkey in the Near East extends partly into the Aegean Islands and includes Istanbul on the European side of the Bosphorus. On the north the boundary between the continents of Asia and Europe is commonly regarded as running through the Dardanelles, the Sea of Marmara, the Bosporus, the Black Sea, the Caucasus Mountains, the Caspian Sea, the Ural River to its source, and a long border generally following the eastern side of the Ural Mountains to the Kara Sea, Russia. The Arctic Ocean is the northern border. The Bering Straits divide Asia from North America.
On the southeast of Asia are the Malay Peninsula (the limit of mainland Asia) and Indonesia ("Isles of India", the former East Indies), a vast nation among thousands of islands on the Sunda Shelf, large and small, inhabited and uninhabited. Australia nearby is a different continent. The Pacific islands northeast of Australia more remotely removed from Japan and Korea are Oceania rather than Asia. From Indonesia the border runs along the Indian Ocean to the Red Sea. Most of the islands in the Indian Ocean are Asian.
Overall dimensions
Multiple sources give different estimates of the area enclosed by the imaginary border of Asia. The New York Times Atlas of the World gives . Chambers World Gazetteer rounds off to , while the Concise Columbia Encyclopedia gives . The 2011 Pearson's has . The methods of obtaining these figures and exactly what areas they include have not been divulged.
The map surface of mainland Asia is entirely contained within a Geodetic quadrangle formed from segments of latitude going through its north and south extremes and segments of longitude passing through the east and west extremes. Cape Chelyuskin is at 77° 43′ N; Cape Piai in the Malay Peninsula is at 1° 16′ N; Cape Baba in Turkey is at 26° 4′ E; Cape Dezhnyov is at 169° 40′ W; that is, mainland Asia ranges through about 77° of latitude and 195° of longitude, distances of about long by wide according to Chambers, or long by wide according to Pearson's.
Indonesia to the southeast, a nation consisting of thousands of islands, adds a significant amount of territory to mainland Asia and extends the extreme Asian latitude further south. The geographic nature of the country raises such questions as whether the sea and the seabed count as Asia. The Australia–Indonesia border is still being negotiated. Currently, a 1997 treaty remains unratified. As there are questions of fishing rights in the waters and mineral rights in the seabed, two different boundaries are being negotiated, one for the water column and one for the seabed. The southernmost seabed boundary is 10° 50' S, the latitude of Point A3, the Australia, Indonesia and Papua New Guinea common tripoint. The southernmost water column boundary is still further south at Point Z88, 13° 56' 31.8".
European views of Asia
The geographical or traditional view
Medieval Europeans considered Asia as a continent, a distinct landmass. The European concept of the three continents in the Old World goes back to classical antiquity. Definition of continents has long been and remains primarily the realm of geographers, including cultural geographers as well as physical geographers. A wide majority of geographers, in nearly all atlases and many other publications from the National Geographic to the CIA World Factbook and Merriam-Webster's Geographical Dictionary, define Europe, Asia, and Africa as continents.
The Hellenic origin
The three-continent system was an idea devised in Archaic Greece, a time of Greek colonial expansion and trade throughout the Mediterranean and the spread of writing again. Writing is a prerequisite of written geography. It had been lost during the preceding Greek Dark Ages, a period of piracy at sea and defensive parochialism on land. The preceding Mycenaean Greece left scant record of some serving women from a locality in the later Asia Minor called Asia. Europe was mainly Greece, while Libya was a small region to the west of Egypt. There was no systematic definition of "continent;" however, the Greek mariners did make a distinction that was to become one: the islands, nēsoi, versus the mainland, ēpeiros. One etymology relates ēpeir- to the same Indo-European root from which English "over" came. The Armenian form means "bank, coast." The Greek form must be some sort of "overland," whether continuous land or a coast that looms over. In Latin it became continens terra, "the continuous land," shortened to just continens, stem continent-.
Most ships of the Archaic Period were not ocean-going. They followed the shores closely, ready to put in at the first sign of trouble.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 first continents were "shores," as they are in Herodotus, first historian whose works are extant, who relies on earlier geography now missing except for fragments. Asia is defined by two akrai, "bluffs" or "shores." One runs from Phasis in Colchis (Georgia) at the eastern end of the Black Sea around the coast of Asia Minor to Phoenicia. The second runs from Phoenicia to the Red Sea (the ancient Red Sea comprised also the Persian Gulf and the Indian Ocean) and from there to India, after which "no man can say what sort of region it is."
Asia is equal to its shores, which also define Europe and Libya. The northern shore runs eastward along the line if the Phasis and Araxes Rivers; that is, south of the Caucasus Mountains, and around the south of the Caspian Sea. The southern shore continues the Red Sea and the Nile River, as Darius the Great had constructed a canal between them. This division and system was already in place before Herodotus. He professes not to understand it: "I am astonished that men should ever have divided Libya, Asia and Europe as they have, for they are exceedingly unequal." His astonishment continues: "I cannot conceive why three names, and women's names especially, should ever have been given to a tract which is in reality one ... nor can I even say who gives the three tracts [akrai] their names." Previously he had spoken of two tracts. He says that an alternate northern border is the mouth of the Don River.
Strabo, geographer of the Early Roman Empire, has an explanation of the geography Herodotus found so puzzling. The key is the coast-hugging requirement of most ancient navigation. As the ancient navigator passed under the Rock of Gibraltar on his way into the Mediterranean Sea ("our sea" to those who lived there), two paths appeared to him, the north shore or the south shore. Strabo says:"Now as you sail into the strait at the Pillars, Libya lies on your right hand as far as the stream of the Nile, and on your left hand across the strait lies Europe as far as the Tanais."
To the ancient navigators of Our Sea, the continents were separated by seas. The canal extended the southern shore into the Red Sea. The symmetry of the scheme was too geometric for the Greeks to resist, as they represented all geographic masses by regular figures if they could. A triangle prevailed in the Greek imagination with points at the Pillars, the Tanais and the Red Sea. As the sides were three shores, the continents were three.
Imperial Roman geography
The geographer, Claudius Ptolemaeus, distinguishes between geography, which is "a representation in picture of the whole known world," and chorography ("study of places"), which "treats more fully the particulars." The idea of the continents is geography and is presented as such. A chorographer in Ptolemy's view was the expert in a specific locality, such as a ship captain, a merchant, or a native. Geographers consult them but they do not write geography unless they happen to be both.
Ptolemy was a geographer of the middle Roman Empire, an Egyptian. The idea of the continents preceded the imperial Romans but through them reached to modern time to determine today's geographic views, which are enhancements and refinements of the classical. Stating that "continents are bounded more properly, when it is possible, by seas than by rivers," Ptolemy defines a three-continent system: Europe, Libya, Asia. His Libya is the North Africa of today, containing a province, Africa, whose name replaced Libya. Rejecting the Nile River as the Asian border so as not to split Egypt, Ptolemy designates the Red Sea as the border between Libya and Asia. In the north, the border between Asia and Europe is a meridian through the mouth of the Don River northward "to the unknown region." Asia Minor remains "Asia properly so called."
Ptolemy's Asia extends to the Far East, approximately identical to today's Asia, except that the European border runs through the future location of Moscow, then a wilderness of forest skirted by Sarmatian tribesmen. In a striking foreshadowing of European and Asian Russia, European Sarmatia lies between the Vistula River and the Don River, while Asiatic Sarmatia runs east of the Don to Scythia.
Geologic view
The relatively recent study of plate tectonics has discovered that Asia has several regions that would be considered distinct landmasses if strictly geologic and tectonic criteria were used (for example, South Asia and East Asia). Definition of continental plates is the realm of geologists. Strictly in terms of geological landmasses or tectonic plates, Europe is a western peninsula of Eurasia and of the Africa-Eurasia landmass. In the latter, Europe and Asia are parts of the Eurasian plate, which excludes the Arabian and Indian tectonic plates.
Regional view
In human geography, there are several schools of thought. The more common school follows historical convention and treats Europe and Asia as different continents, categorizing East Asia, South Asia, and the Middle East as specific regions for more detailed analysis. Other schools equate the word "continent" to geographical "region" when referring to Europe and Asia in terms of physical geography.
Ethnic view
In European languages, the term "Asian" more commonly refers to ethnic heritage rather than a strict geographic area. In American English, "Asian" often refers to East Asians, while in British English, Asian often refers to South Asians. See the List of transcontinental countries for further geographic definitions. The term Asia Pacific generally refers to a combination of East Asia, Southeast Asia, and islands in the Pacific Ocean – and most are also considered part of Australasia or Oceania. Asia contains the Indian subcontinent, Iranian Plateau, Arabian peninsula, as well as a piece of the North American plate in Siberia.
Regions
Since the 18th century, Asia has been divided into several subregions. There has been no universal consensus on the use of these terms.
The regions of Asia include:
Central Asia
Commonly understood as comprising Kazakhstan, Kyrgyzstan, Tajikistan, Turkmenistan, and Uzbekistan.
East Asia
Commonly understood as comprising China, Hong Kong, Japan, Macau, Mongolia, North Korea, South Korea, and Taiwan. A common synonym for East Asia is Northeast Asia, although some geographers only include Japan, Korea, and Northeast China in this subregion.
South Asia
Commonly understood as comprising Afghanistan, Bangladesh, Bhutan, British Indian Ocean Territory, India, Maldives, Nepal, Pakistan, and Sri Lanka. A common approximate synonym for South Asia is the Indian subcontinent which excludes Afghanistan.
Southeast Asia
Commonly understood as comprising Brunei, Cambodia, Christmas Island, Cocos (Keeling) Islands, East Timor, Indonesia, Laos, Malaysia, Myanmar, Philippines, Singapore, Thailand, and Vietnam. This subregion can be further subdivided into two smaller subregions: Mainland Southeast Asia (Indochinese Peninsula) and Maritime Southeast Asia (Malay Archipelago).
West Asia
Commonly understood as comprising Armenia, Azerbaijan, Bahrain, Cyprus, Georgia, Iran, Iraq, Israel, Jordan, Kuwait, Lebanon, Oman, Palestine, Qatar, Saudi Arabia, the Sinai Peninsula (Egypt), Syria, Turkey, United Arab Emirates, and Yemen. Common synonyms for West Asia are Southwest Asia and the Middle East. The Middle East generally includes Egypt, a transcontinental country between Africa and Asia.
North Asia
Commonly understood as comprising Asian Russia. A common synonym for North Asia is Siberia.
Asia's changing climate
A survey carried out in 2010 by global risk analysis firm Maplecroft identified 16 countries that are extremely vulnerable to climate change. Each nation's vulnerability was calculated using 42 social, economic and environmental indicators, which identified the likely climate change impacts during the next 30 years. The Asian countries of Bangladesh, India, Vietnam, Thailand, Pakistan and Sri Lanka were among the 16 countries facing extreme risk from climate change. Some shifts are already occurring. For example, in tropical parts of India with a semi-arid climate, the temperature increased by 0.4 °C between 1901 and 2003.
A 2013 study by the International Crops Research Institute for the Semi-Arid Tropics (ICRISAT) aimed to find science-based, pro-poor approaches and techniques that would enable Asia's agricultural systems to cope with climate change, while benefiting poor and vulnerable farmers. The study's recommendations ranged from improving the use of climate information in local planning and strengthening weather-based agro-advisory services, to stimulating diversification of rural household incomes and providing incentives to farmers to adopt natural resource conservation measures to enhance forest cover, replenish groundwater and use renewable energy.
General data for countries defined as Asian by the UNSD
The United Nations Statistics Division, charged with collecting statistical data on global regions including Asia, publishes a classification standard, United Nations M49, which assigns code numbers to continental regions, areas and countries, based on statistical purposes, and the countries and regions grouped together don't imply any assumption regarding political or other affiliations between the grouped countries. Some general data on the countries listed in M49 for the continental region, Asia (142), and one non-official region, "Northern Asia," are presented below.
M49 is a device for collecting useful statistics for the UNSD and is a suggested reference guide offered as a global standard for all agencies and institutions within the various UN departments that might be interested. The United Nations Statistics Division does not present it as an authoritative standard or as one that is more valid or more worthy of adoption than some other. It is not a requirement for other agencies within the United Nations, which use their own standards as are convenient for their operations.
No nations have adopted M49 as a mandatory standard. It does, however, reflect general usage concerning the political geography of Asia. M49 is updated frequently to reflect changing geopolitical circumstances.
One problematic aspect of the classification of Asia not yet definitively addressed by the Statistics Division is "Northern Asia," which has no regional code and is not currently officially a region of Asia. Russia, or "the Russian Federation," is a nation of Europe. The "Northern Asia" name is unofficially recognized; for example, the UN Group of Experts on Geographical Names includes an Eastern Europe, Northern and Central Asia Division. "Northern Asia" comes from traditional usage, which divides Europe from Asia at the Ural Mountains. No one at the UN is suggesting that European Russia be included in Asia or that Asian Russia be included in Europe. Their policy is that a nation shall appear once in one region. They have selected Europe. The problem remains unsolved.
Geopolitical map of Asia
The nations of this map with one major exception (and a few minor ones) are those defined by The World Factbook. Short forms of the names are used; sometimes abbreviations. All the nations can be found in the table below. The one major exception to the scheme is "Russia," not currently officially in the continental region of Asia, but unofficially partly in it even though classified as Europe.
Geopolitical data for Asia
Introduction
The countries in this table are categorised mainly, but not entirely, according to the UNSD scheme for statistical purposes used by the United Nations Statistics Division. For example, the UNSD statistical geoscheme does not recognize a "North Asia," but problematic differences in point of view reach down to the country level elsewhere as well. Part of Egypt (Sinai Peninsula) is geographically in West Asia, and the Australian external territories of Christmas Island and the Cocos (Keeling) Islands are often associated with Asia. However, these are not present in the UNSD geoscheme.
There is no universally defined standard Asia. Traditional views are approximate at best. Even today borders are still being defined, as between Indonesia, Australia and Oceania. As long as conflict over territory remains a human trait there may well be "an eastern question," as the British Empire said of the Ottoman Empire.
In evaluating the geographic position of nations of the edge of Asia some writers utilize the amorphous concept of "transcontinental countries," which has different meanings to different authorities. Merriam-Webster defines it as "going across a continent," as might a railroad. With regard to Asia, there is only one such country, the Russian Federation.
In a second definition, Petrovsky refers to a new tendency to form transcontinental agencies, meaning agencies whose jurisdictions cross continental borders, rather than the whole continent. Petrovsky's examples put together widely scattered sections of continents. There is no question of their trans- status. More precise views, however, require definitions of continents, which in the case of Asia are not quite so facile.
A third definition emphasizes transformation in place from one continent to another. Fahey at first defines Turkey as transcontinental by virtue of being in both Anatolia and the Balkans, neglecting the historical circumstance that the Balkans as part of the Ottoman Empire were once Asian, as was much of North Africa. He then hypothesizes that Turkey, accepted into the European Union, is defined by that circumstance to be European. By this usage, the very region to which "Asia" was first applied is now Europe. If it is, Turkey cannot be transcontinental by being split between two continents. This sort of paradox only underlines that Asia has no precise definition in the same way that nations do, to whom a mere 100 yards of border may be of great concern.
Data included in the table below are per sources in linked articles when available, the CIA World Factbook when not. No attempt is made to split populations. That of Russia is for the whole country; thus, the populations and areas cannot be summed to produce those of any defined Asia. The notes state which nations might be considered transcontinental by some agency, but there is little agreement generally.
Table
Table notes
Regional maps of Asia
See also
List of Asian countries by population
United Nations geoscheme for Asia
Indo-Pacific
Asia-Pacific
Pacific Rim
References
External links
Geography of Asia
Geology of Asia |
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C%98%A4%20%EB%B2%A0%EC%9D%B8%ED%95%98%EC%BB%A4%EB%A5%B4 | 레오 베인하커르 | 레오 베인하커르(, 1942년 8월 2일, 로테르담 ~)는 네덜란드의 축구 감독이다. 그는 장기간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많은 성과를 냈다. 그는 아약스와 페예노르트 지휘봉을 잡고 모두 에레디비시를 우승한 경험이 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국내 대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맡은 국가대표팀으로는 2006년 FIFA 월드컵 당시 지휘봉을 잡은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UEFA 유로 2008 당시 이끌던 폴란드가 있는데, 두 나라 모두 각 대회에 처음으로 본선에 올랐다. 그는 스페인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엽궐련과 담담한 유머로 레오 옹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감독 경력
베인하커르는 아약스, 페예노르트, 레알 마드리드, 사라고사, 그리고 아메리카 같은 다수의 명성 높은 구단을 이끌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폴란드, 그리고 네덜란드 등의 국가대표팀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2006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대표팀은 베인하커르의 지도 하에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여 1차전에서 스웨덴과 0-0으로 비겼고, 잉글랜드와의 2차전에서도 경기 막판까지 무실점으로 버텼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베인하커르는 아약스의 기술 고문을 맡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코 아드리안서 감독을 해임하고 로날트 쿠만을 후임으로 내정하였다.
폴란드
2006년 7월 11일, 베인하커르는 폴란드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본래, 그는 UEFA 유로 2008이 끝날 때까지 폴란드를 지도하기로 합의를 보았지만 계약 기간이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전이 종료되는 2009년 11월까지로 연장되었다. 2007년 11월 17일, 벨기에를 2-0으로 이기면서 폴란드는 사상 첫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에 진출하였는데, 폴란드의 "황금 세대"가 포진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대회 본선에 진출한 적은 없었다. 2008년 2월 20일, 베인하커르 감독은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으로부터 폴란드 재건 기사단 훈장을 받았다. 기사단 훈장은 교육, 과학, 스포츠, 문화, 예술, 경제, 국방, 사회 공헌, 봉사, 혹은 국가간 외교에서의 성과를 인정받은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폴란드가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오르지 못하면서, 베인하커르 감독은 경질되었다.
페예노르트
폴란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와중에도, 페예노르트는 2007년 5월 5일에 베인하커르로 하여금 감독 대행을 맡게 했고, 구단을 2006-07 시즌 플레이오프전으로 이끌었다. 폴란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은 후, 그는 페예노르트 기술 단장으로 계약하였는데, 임기는 2009년 10월 9일부터 2011년 6월 30일까지였다.
우이페슈트
네덜란드에서 기술 단장으로 역임한 후, 베인하커르는 헝가리 1부 리그의 우이페슈트와 3년 게약을 맺고, 2011년 7월 29일 백자 군단의 새 단장으로 기자 회견에 참석했다. 버르터 처버가 새 단장으로 나오면서, 베인하커르의 주 업무는 1군과 활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단은 그의 다양하고 오랜 기간 인맥을 쌓은 그를 통해 유럽 전역에 양방향으로 활용할 스카우트망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의 계약은 롤랑 뒤쇼틀레의 아들이자 벨기에의 사업가 로데리크 뒤쇼틀레가 구단을 인수하면서 2011년 10월에 해지되었다.
2017년 11월을 기점으로, 베인하커르는 스파르타 로테르담의 기술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다.
언어
베인하커르는 몇 개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데, 네덜란드어, 영어, 그리고 스페인어를 유창히 구사할 수 있다. 그는 폴란드 국가대표팀을 역임하면서 폴란드어 몇 단어도 구사할 수 있다.
수상
아약스
에레디비시: 1979–80, 1989–90
레알 마드리드
라 리가: 1986–87, 1987–88, 1988–89
코파 델 레이: 1988–89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8, 1989*
(* 1989년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는 라 리가와 코파 델 레이를 모두 석권하여 자동으로 획득하였다.)
페예노르트
에레디비시: 1998–99
요한 크라위프 스할: 1999
각주
외부 링크
194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네덜란드의 축구 감독
로테르담 출신 축구인
네덜란드의 축구 단장
SC 페인담의 축구 감독
레알 사라고사의 축구 감독
레알 마드리드 CF의 축구 감독
AFC 아약스의 축구 감독
고 어헤드 이글스의 축구 감독
SC 캄뷔르의 축구 감독
라리가의 축구 감독
클루브 아메리카의 축구 감독
CD 과달라하라의 축구 감독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0년 FIFA 월드컵 참가 감독
2006년 FIFA 월드컵 참가 감독
UEFA 유로 2008 참가 감독
페예노르트의 축구 감독
피테서의 축구 감독
트리니다드 토바고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의 축구 감독
네덜란드의 해외 진출 축구 감독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멕시코의 외국인 축구 감독
스페인의 외국인 축구 감독
튀르키예의 외국인 축구 감독
폴란드의 외국인 축구 감독
차코니아 메달 수상자
이스탄불스포르의 축구 감독
츠바르-비트 '28의 축구 선수
네덜란드의 남자 축구 선수
리뉘스 미헐스 상 수상자
스페인에 거주한 네덜란드인
폴란드에 거주한 네덜란드인
멕시코에 거주한 네덜란드인
튀르키예에 거주한 네덜란드인
20세기 네덜란드 사람
21세기 네덜란드 사람
에레디비시의 축구 감독
리가 MX의 축구 감독
스위스 슈퍼리그의 축구 감독
쉬페르리그의 축구 감독
에이르스터 디비시의 축구 감독
AFC 아약스의 비선수진
페예노르트의 비선수진 | https://en.wikipedia.org/wiki/Leo%20Beenhakker | Leo Beenhakker | Leo Beenhakker CM (; born 2 August 1942) is a Dutch football coach. He has had an extensive and successful career both at club and international level. He led both Ajax and Feyenoord to Dutch championships and also had domestic success with Real Madrid. At international level, he led Trinidad and Tobago to the 2006 FIFA World Cup and Poland to UEFA Euro 2008, both firsts for each nation. His role in Spanish football has earned him the nickname Don Leo, largely due to his fondness of cigars and dry humour.
Playing career
A right winger, Beenhakker played at amateur clubs , XerxesDZB and Zwart-Wit '28.
Coaching career
Beenhakker has been the coach of several prestigious clubs including Ajax, Feyenoord, Real Madrid, SC Veendam, Club America and Real Zaragoza. He has also coached the national teams of Saudi Arabia, Poland and the Netherlands. He coached the Trinidad and Tobago national team in the year leading up to the 2006 FIFA World Cup. Under Beenhakker's guidance, the team secured a 0–0 draw against Sweden in their first match, and gave England cause for concern in the second match.
From 2000 to 2003, Beenhakker was director of technical affairs with Ajax. In that period, he fired head coach Co Adriaanse and replaced him with Ronald Koeman.
Poland
On 11 July 2006, Beenhakker was appointed as the manager of the Poland national team. Originally, he was appointed to manage Poland until the end of UEFA Euro 2008, however his contract was extended until November 2009, the end of qualifying for the 2010 World Cup. On 17 November 2007, after Poland defeated Belgium 2–0, he managed to qualify Poland for the UEFA European Championship for their first time – even in Poland's "golden years" of the 1970s and '80s, the nation never qualified for the Euro final stages. On 20 February 2008, Beenhakker was decorated with the Order of Polonia Restituta by President of Poland Lech Kaczyński. The Order is conferred for outstanding achievements in the fields of education, science, sport, culture, art, economics, defense of the country, social work, civil service, or for furthering good relations between countries. However, after Poland's failure to qualify for the 2010 World Cup, Beenhakker was sacked.
Feyenoord
While still in charge of Poland, Feyenoord hired Beenhakker on 5 May 2007 as an interim coach to lead the club through the 2006–07 play-offs. After his departure from Poland, he was named the sports director of the club, signing a contract on 9 October 2009 lasting until 30 June 2011.
Újpest
Following his spell in the Netherlands, Beenhakker agreed on a three-year deal with Hungarian first division side Újpest, and was officially introduced as the new sports director of the purple-whites in a press conference on 29 July 2011. As managing director Csaba Bartha revealed, Beenhakker's main duty was to work with the first team. However, the club also intended to use his diverse and extensive personal relationships to establish a scouting network across Europe, which could be used in both directions. His contract was terminated in October 2011, after Belgian businessman Roderick Duchatelet, son of Roland Duchâtelet, purchased the club.
In December 2013, Beenhakker was appointed technical director at Sparta Rotterdam, a position he held on to until June 2015, before announcing his retirement from football. In November 2017, he joined the Sparta board as a technical advisor, which he did voluntarily until Sparta found a technical director. When in March 2018 Sparta appointed Henk van Stee, Beenhakker left his spot and announced his retirement again.
Languages
Beenhakker speaks several languages, including Dutch, English and Spanish. He also learned a few words in Polish during his time as national team manager.
Personal life
As coach of the Trinidad and Tobago squad that competed at the 2006 FIFA World Cup in Germany, Beenhakker was awarded the Chaconia Medal (Gold Class), the second highest state decoration of Trinidad and Tobago.
Honours
Ajax
Eredivisie: 1979–80, 1989–90
Real Madrid
La Liga: 1986–87, 1987–88, 1988–89
Copa del Rey: 1988–89
Supercopa de España: 1988, 1989*
(* Won Copa del Rey and La Liga)
Feyenoord
Eredivisie: 1998–99
Johan Cruyff Shield: 1999
Individual
Chaconia Medal, Gold Class: 2006
Order of Polonia Restituta, Officer's Cross: 2008
References
External links
1942 births
Living people
Dutch men's footballers
Footballers from Rotterdam
Men's association football wingers
XerxesDZB players
Zwart-Wit '28 players
Dutch football managers
Go Ahead Eagles non-playing staff
SC Veendam managers
SC Cambuur managers
Go Ahead Eagles managers
Feyenoord non-playing staff
AFC Ajax non-playing staff
AFC Ajax managers
Real Zaragoza managers
FC Volendam managers
Netherlands national football team managers
Real Madrid CF managers
Grasshopper Club Zürich managers
Saudi Arabia national football team managers
Club América managers
İstanbulspor managers
C.D. Guadalajara managers
SBV Vitesse managers
Feyenoord managers
Directors of football clubs in the Netherlands
De Graafschap non-playing staff
Trinidad and Tobago national football team managers
Poland national football team managers
Sparta Rotterdam non-playing staff
Eerste Divisie managers
Eredivisie managers
La Liga managers
Swiss Super League managers
Liga MX managers
Süper Lig managers
Rinus Michels Award winners
Recipients of the Chaconia Medal
1990 FIFA World Cup managers
2006 FIFA World Cup managers
UEFA Euro 2008 managers
Dutch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Dutch expatriate sportspeople in Spain
Dutch expatriate sportspeople in Switzerland
Dutch expatriate sportspeople in Saudi Arabia
Dutch expatriate sportspeople in Mexico
Dutch expatriate sportspeople in Turkey
Dutch expatriate sportspeople in Trinidad and Tobago
Dutch expatriate sportspeople in Poland
Dutch expatriate sportspeople in Hungary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Spain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Switzerland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Saudi Arabia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Mexico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Turkey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Trinidad and Tobago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Poland
Officers of the Order of Polonia Restituta |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D%9A%8C%ED%95%B4%EC%B2%B4%EB%A1%A0 | 사회해체론 | 사회해체론(社會解體論, social disorganization theory)은 사회학에서 사회 생태학적 모델과 관련하여 시카고 학파가 개발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범죄율과 이웃의 생태학적 특성을 직접 연결시킨다.
사회해체의 의미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대표적인 견해로 지적되고 있는 엘리엇(M. A. Eliot, 1898-?)과 메릴(F. E. MERRILL, 1898-?)의 설에 의하면 '사회해체(social disorganization)와 사회조직화(social organization)는 같은 기능의 반대적인 사회측면을 나타내며, 사회해체는 세력의 균형에 변화가 있을 때. 즉 사회구조가 붕괴할 때에 나타난다. 그 결과로 이전의 양식은 통용되지 않고 사회통제의 기존형태는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라고 정의되고 있다. 따라서 사회해체는 광의(廣義)와 협의(狹義)의 두 가지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광의의 사회해체란 모든 기능적 사회의 병리적 측면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분석을 도시에 적용하였을 경우에는 도시적 대중사회 전체의 사회해체적 현상과 도시 특정 지역의 사회해체적 현상의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협의의 사회해체란 기능적 사회의 현실체인 지역사회 레벨의 지역해체적 병리에 한정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광의의 사회해체를 다룬다.
도시대중사회의 사회해체
도시적 대중사회 전체라고 하는 구조적 레벨에 있어서의 병리인 대중 아노미(amomie)적, 또는 인간소외적 병리가 문제된다. 오늘날의 대중사회화 상황에는 여러 가지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 마이너스적 측면은 특히 도시환경에 집약적·전형적으로 나타나고, 도시사회의 전역에 걸쳐 대중 아노미적 병리가 현저하게 나타난다.아노미라 함은 사회의 무규제적(無規制的)·무규범적(無規範的)인 혼란상태를 의미한다. 뒤르켐(E. Durkheim, 1858-1917)에 의하면 아노미는 근대사회에서 나타난 일종의 풍토병이며, 그것은 인간의 욕망 중에서 탐욕이라는 자본주의 윤리가 지배적인 경제영역에 있어서의 관습적 구속이나 도덕적 제한이 약화되었을 경우에 특히 해로운 사회병리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즉 아노미적 병리는 봉건사회로부터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사회혼란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봉건사회에서는 인간의 욕망은 사회적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자본주의사회가 진행됨에 따라 신분적·제도적 구속은 해제되고 욕망이 무한대화되어 탐욕의 목표는 한없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끝없는 탐욕의 환상에 비하면 현실은 무가치한 것으로 방기(放棄)되고 만다. 이리하여 인간의 영혼은 봉건사회에 있어서와 같은 안정된 근거지를 상실하고 무규제적·무규범적인 황량한 세계를 방황하게 된다.자본주의사회가 고도로 발달하여 독점체제단계에 접어들면 인간욕망의 목표와 이를 달성하려는 수단은 점점 사회구조적으로 강한 규제를 받게 된다. 특히 인간의 욕망이 주저함이 없이 개방되게 되고,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온갖 과당경쟁이 정당화되며, 상층계급과 하층계급간의 격차가 큰 도시사회에서는 목표와 현실과의 분열이 심화되어 아노미적 병리가 범람하게 된다. 특히 도시적 시민사회가 대중화됨에 따라서 대중 아노미적 병리가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대중 아노미적 병리의 특성으로서 다음 5가지가 지적되고 있다. (1) 기업규모의 확대, 기업조직의 거대화, 관료제화의 진행과 더불어 일어나는 인간의 기계화, 주체성·인간성의 상실 사태, (2) 노동자계급의 계층분화, 생활수준의 평준화의 진행과 더불어 일어나는 근로대중의 분열화·확산화(擴散化)·연대성(連帶性)의 상실 사태, (3) 대중의 정치적·경제적 수익화(受益化)에 따르는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화, 소비·여가의 매몰화(埋沒化)사태, (4)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발달과 영향에 의한 대중적 사고방식의 획일화, 수동화 및 리스먼(D. Riesman, 1909-?)이 지적한 바와 같은 전통지향형이나 내부지향형의 인간에 대항하는 외부지향형의 대중적 인간의 출현사태, (5) 밀스(C. W. Mils, 1916-1962)가 지적한 바와 같은 정치적 권력가와 경제적 실력자의 집중에 의하여 일어나는 파워 엘리트(power elite)의 출현과, 그들의 매스 미디어(mass media, 大衆媒體) 독점에 의한 대중설득적·대중조작적(大衆操作的) 지배의 위기 출현이라는 5가지이다. 이러한 대중 아노미적 병리는 특히 도시적 환경 속에서 융합생성되어 다양한 출현형태를 통하여 그 병태현상을 전형적·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도시환경에 있어서 대중사회적 병리의 출현상태를 그 병상(病狀)에 대한 저항, 병상으로부터 도피, 병상에의 매몰·중독이라는 반응유형에 따라서 분류하면 그것을 각각 모브(mob)적, 패닉(panic)적, 메타볼리즘(metabolism)적 병태현상이라는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모브적 병태현상
'모브(mob)'란 공격적인 군중의 상태로서 폭동·사형(死刑)·테러와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폭동은 경제변동기에 피악밥민(被壓迫民)이 인종적·신분적·계급적 차별에 대한 불만으로, 지배자에 대해 폭력적으로 그들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불만이 특히 오늘날의 대도시적 환경 속에서 발생하여 새로운 형태의 모브적 병태현상을 유발시키고 있다. 이러한 모브적 병태현상의 예(例)로 1971년 여름에 발생한 성남단지(城南團地)의 폭도사건(暴徒事件)을 들 수 있다.성남단지는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의 주민을 도시계획에 의하여 이주·정착(定着)시켜 형성된 저소득층(低所得層) 지역이었다. 성남단지사건은 단지민(團地民) 자체 속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 배경적 요인은 관료제화(官僚制化)·대중사회화의 부정적인 면이 도시화 상황으로 강화된 측면에서도 지적할 수 있다. 관료제(官僚制)는 단순한 기술적 조직기구로서 만인에 대해 중립적·획일적으로 사무와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립적이며 획일적인 사무처리가 하층민(下層民)에게는 차별적이며 비인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성남단지로 이주시킬 때 시(市)가 이주민에게 한 약속을 시는 관료제의 중립적이며 획일적인 속성으로 처리했고 이주민은 시의 약속을 지나치게 믿었었다. 이러한 양자 사이의 거리가 급기야는 이주민의 폭발적 불만으로 나타나 '우리도 인간대접을 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력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도시의 하층민들은 평소에 불만이 있더라도 복잡한 도시기구 속에서 불만의 대상이나 적(敵)이 구체적이거나 또는 군중적으로 자각되거나 발견되지 않으면 냉혹한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무력하게 생활한다. 그러나 불만이 폭발되지 않는다 뿐이지 억압·연기(延期)되어 심리적으로 부단히 축적(蓄積)되는 상태에 있게 된다. 한편 대중사회화에 따라서 주체성과 합리성을 상실한 인간들이 대중조작(大衆操作)에 걸리기 쉽게 된다. 그리하여 단순한 명목하에 종적으로 결합하여 카리스마(charisma)적 지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 기반(基盤)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뜻에서 성남단지폭동은 관료제화·대중사회화의 부정적 측면이 도시환경요인으로 유발되어 확대된 전형적인 예(例)라 할 수 있다.
패닉적 병태현상
'패닉(panic)'이란 도피적·난민적(難民的)인 군중상태를 말한다. 통근지옥과 교통기관의 연속적 대(大)사고는 거대도시화(巨大都市化) 과정의 물리적 패닉 현상의 전형(典型)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사회적 패닉현상을 문제로 다룬다. 도시적 환경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여러 면으로 자극되어 이상하게 된다. 또한 도시는 과당경쟁의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서 욕망의 목표가 용이하게 달성되지 않는다. 목표는 점차 심리적으로 높아가는데 반하여 그 달성수단은 제도적으로 강하게 구속된다. 이로 인해 목표와 달성수단의 격차가 커짐에 따라 대중 아노미적 병리가 심화되어 간다. 더구나 기계적인 도시노동환경 속에서 주체성·인간성의 상실사태가 촉진됨에 따라 그 병상(病狀)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촉진되어 간다. 이 도피는 도시적 환경 속에서 강화·과장되어 여러 가지 형태를 나타내게 된다. 즉 대중화된 도시인의 소비·여가문화에의 도피, 매몰, 자기망각의 형태를 택하게 된다. 퇴폐적·허식적(虛飾的) 문화, 도색적인 행태(行態)가 번성하여 소외를 잊어버릴 수 있는 환경이 생겨난다. 노동하는 곳에서 주체성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여가에 있어서도 주체성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피는 타락으로까지 기울어지게 된다. 때로는 에테르(ether, 靈氣)적 정신문화에로의 도피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사교, 신흥종교의 난립, 히피족의 횡행 등이 그 예가 된다. 도피의 종착역으로서의 아노미적 자살이 특히 도시에서 높아지고 있는 것도 패닉적 병태이상의 일종으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고독화되고 군중화된 도시인은 점차 자기의 존재의의를 발견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최근에는 도시형 인간증발(都市型人間蒸發)이 많아지고 있다. 대도시 속에서의 하층민의 변화가 증가되는 것도 이 인간증발의 예라 할 수 있다.
메타볼리즘적 병태현상
도시사회에서 일어나는 신진대사·동화작용(同化作用)은 일면 사회적 도태작용(陶胎作用)의 의미를 갖고 있다. 도시생활에 동조(同調)하여 살아 남거나 성공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정치적 수익(受益) 기회를 추구함으로써 사물화·독점화하기 위한 생존경쟁과 사회적 도태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이것 때문에 모략과 허영이 지배하여 왜곡(歪曲)된 우월감·정복감이나 과당경쟁이 횡행하게 된다. 대량생산에 따른 생활수준의 평준화와 투표에 따른 정치적 평등의 보급으로 중간층의 경제적·정치적 수익감(受益感)이 깊어져서 도시적 대중사회에 대한 동조자가 증가함에 따라 메타볼리즘적 인간이나 사회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촉진되어 간다. 대중의 지향은 횡적인 연대(連帶)보다도 상층에 동화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들의 준거집단(準據集團)은 상류사회이며 거기에 동화하기 위하여 상류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서 고급자동차, 가스라이터, 시계와 같은 물건에 인기가 집중된다. 소박한 것보다는 화려한 것, 절약보다는 소비, 노동보다는 노는 것이 도시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하여 수평적·인간관계적 국면에서의 동화·연대는 없어지고 사회적 도태작용이 지배적이 된다. 도시인의 목표는 하나같이 상향(上向)하는 수직적인 준거집단적 국면으로 동화하려고 함으로써 허영과 책략에 가득찬 과당경쟁적 메타볼리즘이 횡행하여 우월감·정복감에 사로잡힌 인간과 사회가 출현된다. 경제적 수익감의 배후에는 위험한 자가당착이 도사리게 된다. '소비자는 왕이다. 소비는 미덕이다'라는 쾌적한 소비생활을 즐기는 이면에는 월부지불과 임시지출이 뒤따르게 된다. 즉 한없이 상승하는 번영을 뒤좇아가지 못하는 심리적 궁핍감에 번민하게 된다.메타볼리즘은 경제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전면적으로 침투해 가고 있다. 거대도시화와 초대도시화(超大都市化)는 이러한 경향을 구체화시켜 가고 있는 일례이다.
지역해체
일반적으로 사회병리를 과학적으로 적출(摘出)하기 위해서는 고찰의 대상을 사회계층적 레벨, 지역사회적 레벨, 소집단 및 개인적 레벨로 구분하고 각각의 레벨에 대응한 사회병리를 적출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지역사회 레벨에 대응하는 사회병리는 소위 사회해체적 병리이다. 즉 현실의 기능적 사회로서의 지역사회에 있어서 도시화 등의 사회변동 때문에 사회구조·권력구조가 붕괴하기 시작하고, 그 결과 이전의 사고·행동양식이나 가치기준은 이미 통용되지 않게 되고, 나아가 사회통제와 도덕적 규제가 상실되어 지역사회로서의 기능이 저해되며, 무규제적·무규범적인 혼란상태가 나타난다. 이것이 지역사회의 사회해체현상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변동기에 있어서 지역사회의 사회구조·권력구조는 크게 변화해가고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사회형태는 중세공동체로부터 대중사회로 변화하여 왔다. 과거에 사람들은 마을이나 고장이라는 지역공동사회 속의 몰아적(沒我的) 일원(一員)으로서 그 지역사회의 구속을 받으면서도 안정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의 근대화와 더불어 지역공동체적 결합의식이 쇠퇴하고, 개인은 그 의리와 인정이라는 굴레로부터 해방되었으나 반면에 영혼의 정착지를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대중사회화 상황 속에는 일반사회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근대화→비인간화→자기소외라는 위기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등이다. 미국의 근린주거구역적(近隣住居區域的) 주택계획에 의한 따뜻한 이웃 관계의 유지라는 생각이나, 영국의 뉴 타운(new town)적 주택계획에 의한 직장·주거지·소비지를 일체(一▩)로 한 자급자족의 연대의식에 충만한 공동체 형성이라는 생각은, 지역사회의 사회해체적 현상을 둘러싼 문제의 제기에 대하여 하나의 이념적 해결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의 지역해체적 병리의 문제도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것이다.
도시지역사회의 사회해체
20세기 초두(初頭) 이래의 과학기술의 진보와 자본주의의 고도화는 오늘날에 와서 급격히 광범한 사회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산업구조의 근대화의 진행에 따라 산업과 인구가 대도시에 집중됨으로써 1970년에는 서울의 대도시권(大都市圈) 인구가 700만에 달하게 되었고, 부산과 대구권도 각각 200만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구집중을 촉진한 것은 갖가지 기능(機能)이 특정지역에 집중함으로써 얻어지는 '집적(集積)의 이익' 원리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은 산업지상주의 경제 개발은 지금까지 주민의 생활복지를 목표로 하는 사회개발을 밀어젖히고 일방적인 독주를 해왔다. 이러한 기능과 인구의 도시집중은 집적의 이익을 가져 오기는 하지만, 반면에 대도시의 '과밀폐해(過密弊害)'를 유발시킨다. 이러한 집중이 일정한도를 넘게 되면 도시와 농촌에서 갖가지 물리적·사회적 병태가 빈번히 일어나게 된다. 유해가스와 먼지가 모여 발생하는 '스모그(smog)' 현상, 소음, 하천의 오염, 교통마비, 통근지옥과 같은 물리적 병태현상과 더불어 도시지역에서는 특히 빈민가(slum)의 확대, 노동자 숙박소의 증대, 노동자의 폭도화, 근로세대·연소근로자의 대량유입에 따른 과밀거주와 같은 사회적 병태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또한 주택난, 과밀거주, 고가의 토지 구입과 같은 도시경제적인 이유로 대도시에서 밀려나가는 사람들이 교외에 대량으로 이동함에 따라 교외지역에서는 신천지에 던져진 고독감이나 소외감, 또는 과잉조직에 휘말려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부적응현상 등이 교외적 비애(suburban sadness)나 교통불편, 생활불편, 범죄 다발(多發)과 같은 사회적 병태현상으로 나타난다. 한편 농촌지역에서는 소득저하, 가출, 농촌형 인간증발, 가족붕괴, 과소현상(過疎現象) 등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도시·교외·농촌에 걸쳐 물리적·사회적 병태현상이 현저히 일어나서 도시화에 따른 지역해체적 병리의 새로운 상황이 지적되고 있다.
같이 보기
슬럼
외부 링크
Social Disorganisation Theory (PDF)
범죄학 | https://en.wikipedia.org/wiki/Social%20disorganization%20theory | Social disorganization theory | In sociology, the social disorganization theory is a theory developed by the Chicago School, related to ecological theories. The theory directly links crime rates to neighbourhood ecological characteristics; a core principle of social disorganization theory that states location matters. In other words, a person's residential location is a substantial factor shaping the likelihood that that person will become involved in illegal activities. The theory suggests that, among determinants of a person's later illegal activity, residential location is as significant as or more significant than the person's individual characteristics (e.g., age, gender, or race). For example, the theory suggests that youths from disadvantaged neighborhoods participate in a subculture which approves of delinquency, and that these youths thus acquire criminality in this social and cultural setting.
Larry Gaines and Roger Miller state in their book Criminal Justice in Action that "crime is largely a product of unfavorable conditions in certain communities". According to the social disorganization theory, there are ecological factors that lead to high rates of crime in these communities, and these factors linked to constantly elevated levels of "high school dropouts, unemployment, deteriorating infrastructures, and single-parent homes" (Gaines and Miller). The theory is not intended to apply to all types of crime, just street crime at the neighborhood level. The theory has not been used to explain organized crime, corporate crime, or deviant behavior that takes place outside neighborhood settings.
Up to the beginning of 1970s, this theory took a back seat to the psychological explanation of crime. A recent overview of social disorganization theory, including suggestions for refining and extending the theory, is a journal article by Kubrin and Weitzer (2003).
Park and Burgess
Robert E. Park and Ernest Burgess (1925) developed a theory of urban ecology which proposed that cities are environments like those found in nature, governed by many of the same forces of Darwinian evolution; i.e. competition, which affects natural ecosystems. When a city is formed and grows, people and their activities cluster in a particular area (this is the process of "concentration"). Gradually, this central area becomes highly populated, so there is a scattering of people and their activities away from the central city to establish the suburbs (this is "dispersion").
They suggested that, over time, the competition for land and other scarce urban resources leads to the division of the urban space into distinctive ecological niches, "natural areas" or zones in which people share similar social characteristics because they are subject to the same ecological pressures. As a zone becomes more prosperous and "desirable", property values and rents rise, and people and businesses migrate into that zone, usually moving outward from the city center in a process Park and Burgess called "succession" (a term borrowed from plant ecology), and new residents take their place.
At both a micro and macro level, society was thought to operate as a super organism, where change is a natural aspect of the process of growth, and is neither chaotic nor disorderly. Thus, an organized area is invaded by new elements. This gives rise to local competition, and there will either be succession or an accommodation which results in a reorganization. But, during the early stages of competition, there will always be some level of disorganization because there will be disruption to (or breakdowns in) the normative structure of the community, which may or may not lead to deviant behavior. Thus, although a city was a physical organization, it also had social and moral structures that could be disorganized.
Their model—known as concentric zone model and first published in The City (1925)—predicted that, once fully grown, cities would take the form of five concentric rings, with areas of social and physical deterioration concentrated near the city center and more prosperous areas located near the city's edge. This theory seeks to explain the existence of social problems such as unemployment and crime in specific Chicago districts, making extensive use of synchronic mapping to reveal the spatial distribution of social problems and to permit comparison between areas. They argued that "neighborhood conditions, be they of wealth or poverty, had a much greater determinant effect on criminal behavior than ethnicity, race, or religion" (Gaines and Miller). In the post-war period, the cartographic approach was criticized as simplistic in that it neglected the social and cultural dimensions of urban life, the political and economic impact of industrialization on urban geography, and the issues of class, race, gender, and ethnicity.
Sutherland
Edwin Sutherland adopted the concept of social disorganization to explain the increases in crime that accompanied the transformation of preliterate and peasant societies—in which "influences surrounding a person were steady, uniform, harmonious and consistent"—to modern Western civilization, which he believed was characterized by inconsistency, conflict, and un-organization (1934: 64). He also believed that the mobility, economic competition, and individualistic ideology that accompanied capitalist and industrial development had been responsible for the disintegration of the large family and homogeneous neighborhoods as agents of social control. The failure of extended kin groups expanded the realm of relationships no longer controlled by the community and undermined governmental controls, leading to persistent "systematic" crime and delinquency.
Sutherland also believed that such disorganization causes and reinforces the cultural traditions and cultural conflicts that support antisocial activity. The systematic quality of the behavior was a reference to repetitive, patterned, or organized offending, as opposed to random events. He depicted the law-abiding culture as dominant and more extensive than alternative criminogenic cultural views, and as capable of overcoming systematic crime if organized for that purpose (1939: 8). But because society is organized around individual and small group interests, society permits crime to persist. Sutherland concluded that if the society is organized with reference to the values expressed in the law, the crime is eliminated; if it is not organized, crime persists and develops (1939:8).
In later works, Sutherland switched from the concept of social disorganization to differential social organization to convey the complexity of overlapping and conflicting levels of organization in a society.
Cavan
In 1928, Ruth Shonle Cavan produced Suicide, a study of personal disorganization in which she confirmed that the mortality rate is relatively stable, regardless of economic and social conditions. Despite finding this result, Cavan was excluded from faculty status at Chicago. She served on various research committees for six years, and then moved to Rockford College in Illinois.
She was particularly interested in dance halls, brothels, insanity, divorce, nonvoting, suicide, and other forms of socially problematic behavior of interest to the political reformers, studying the working lives of "business" girls and their dispersal throughout the zones of Chicago (1929). Partly as a result of her studies, Cavan (1953) emphasized the importance to the efficient functioning of the entire social order of the regulation of sex. While there are variations in the specific arrangements, all societies contain family groups, forbid incest, sanction marriage, approve more highly of legitimate than of illegitimate births, and look upon marriage as the most highly approved outlet for sexual expression of adults.
She has continued the work to review delinquency in different countries (1968), returning to write of the Chicago School itself in 1983.
Shaw and McKay
Mapping can also show spatial distributions of delinquency and crime, but it cannot explain the results. Indeed, such research has often been used politically to ascribe immorality to specific population groups or ethnicities. Social disorganization theory and cultural transmission theory examine the consequences when a community is unable to conform to common values and to solve the problems of its residents.
Clifford Shaw and Henry D. McKay (1942) applied Sutherland's theory of systematic criminal behavior, and claimed that delinquency was not caused at the individual level, but is a normal response by normal individuals to abnormal conditions. Thus, if a community is not self-policing and if it is imperfectly policed by outside agencies, some individuals will exercise unrestricted freedom to express their dispositions and desires, often resulting in delinquent behavior. They considered the concentric zone model, and produced a diachronic analysis to demonstrate that delinquency was already dispersed in urban areas, and that more wealthy and important groups moved to avoid the existing social disorganization.
Their concepts, hypothesis, and research methods have been a strong influence on the analysis of delinquency and crime. Their dependent variables in the delinquency rates were measured by arrests, court appearances, and court adjudications of institutional commitment. Their independent variables were economic conditions by square-mile areas, ethnic heterogeneity, and population turnover. These variables were based on where delinquents lived and consisted of 10- to 16-year-old males who were petitioned to juvenile court (56,000 juvenile court records from 1900–1933 were used as data). The time frames they selected showed strong patterns of immigrant migration; Shaw and McKay believed that they could demonstrate whether delinquency was caused by particular immigrant groups or by the environment in which the immigrants lived:
If high delinquency rates for particular immigrant groups remained high during their migration through the city's different ecological environments, then delinquency could be associated with their distinctive constitutional or cultural features.
If delinquency rates decreased as immigrants moved through different ecological environments, then delinquency could not be associated with the particular constitution of the immigrants, but must somehow be connected with their environment.
Shaw and McKay demonstrated that social disorganization was endemic to the urban areas which were the only places the newly arriving poor could afford to live. In these areas, there was a high rate of turnover in the population (residential instability), and mixes of people from different cultural backgrounds (ethnic diversity). Shaw and McKay's analyses relating delinquency rates to these structural characteristics established key facts about the community correlates of crime and delinquency:
The rates of juvenile delinquency were consistent with an ordered spatial pattern, with the highest rates in the inner-city areas, and the rates declining as distance from the city center increases.
There was an identical spatial pattern revealed by various other indexes of social problems.
The spatial pattern of delinquency rates showed significant long-term stability, even though the nationality structure of the population in the inner-city areas changed greatly throughout the decades.
Within inner-city areas, the course of becoming delinquent occurred through a network of interpersonal relationships, involving family, gangs, and the neighborhood.
Comparing the maps, Shaw and McKay recognized that the pattern of delinquency rates corresponded to the "natural urban areas" of Park and Burgess' concentric zone model. This evidenced the conclusion that delinquency rates always remained high for a certain region of the city (ecological zone 2), no matter which immigrant group lived there. Hence, delinquency was not "constitutional", but was to be correlated with the particular ecological environment in which it occurs. In this context, Shaw and McKay asserted that ethnic diversity interferes with communication among adults, with effective communication less likely in the face of ethnic diversity because differences in customs and a lack of shared experiences may breed fear and mistrust.
Although research in different countries has tended to support Shaw and McKay's findings that delinquent rates are highest in areas with economic decline and instability, that research has not found that crime rates spatially disperse from the city center outward. In fact, in some countries, the wealthy live in city centers, while the poorest zones are near city fringes. Further, their work does not consider why there is significant non-delinquency in delinquency areas. Thus, the theory identifies social causes of delinquency that seem to be located in specific geographical areas, but its conclusions are not completely generalizable. For a general discussion of their work, see Snodgrass (1976).
Shaw and McKay's Chicago Area Project is an example of practicing public criminology.
Faris
Robert E. Lee Faris (1955) extended the concept of social disorganization to explain social pathologies and social problems in general, including crime, suicide, mental illness, and mob violence. Defining organization as definite and enduring patterns of complementary relations (1955: 3), he defined social disorganization as the weakening or destruction of the relationships which hold together a social organization (1955: 81). Such a concept was to be employed objectively as a measurable state of a social system, independent of personal approval or disapproval. When applied to crime, Faris' central proposition was that, "A crime rate is ...a reflection of the degree of disorganization of the control mechanisms in a society." In turn, crime also contributes to disorganization, and disorganization of such conventional mechanisms is especially likely in large, rapidly growing industrial cities where such disorganization permits highly organized criminality, as well as less organized forms of group and individual crime and delinquency.
Sampson
Robert J. Sampson (1993) claims that any theory of crime must begin with the fact that most violent criminals belonged to teenage peer-groups, particularly street gangs, and that a gang member will become a full-time criminal if social controls are insufficient to address delinquent behaviour at an early age. He follows Shaw and McKay (1969) in accepting that, if the family and relatives offer inadequate supervision or incomplete socialization, children from broken families are more likely to join violent gangs, unless others take the parents' place. However, even children from unstable families are less likely to be influenced by peer groups in a community where most family units are intact. Tight-knit communities are more likely to identify strangers, report deviants to their parents, and pass warnings along. High rates of residential mobility and high-rise housing disrupt the ability to establish and maintain social ties. Formal organizations like schools, churches, and the police act as surrogates for family and friends in many communities, but poor, unstable communities often lack the organization and political connections to obtain resources for fighting crime and offering young people an alternative to deviant behavior. Sampson concludes that "the empirical data suggest that the structural elements of social disorganization have relevance for explaining macro level variations in violence."
Social disorganisation may also produce crime by isolating communities from the mainstream culture. Sampson and Wilson (1995) proposed a theory of race and urban inequality to explain the disproportionate representation of African Americans as victims and offenders in violent crime. The basic idea proposed was that community-level patterns of racial inequality give rise to the social isolation and ecological concentration of the truly disadvantaged, which in turn leads to structural barriers and cultural adaptations that undermine social organisation and ultimately the control of crime. Sampson and Wilson (1995) pursued this logic to argue that the community-level causes of violence are the same for both whites and blacks, but that racial segregation by community differentially exposes members of minority groups to key violence-inducing and violence-protecting social mechanisms, thereby explaining black-white disparities in violence. Their thesis has come to be known as "racial invariance" in the fundamental causes of crime.
Bursik and Grasmick
Robert J. Bursik Jr's scholarly work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revival of Social Disorganization Theory following its fall in popularity during the 1960s. One of the main criticisms of Shaw and McKay's theory was that it suggested, in certain area's delinquency rates remained high regardless of the ethnicity group that lived there. Researchers during this period felt that it was unlikely that crime patterns remained stable even though there were constant changes in population without these areas. Bursik's work helped negate some of the criticisms associated with Shaw and McKay's work; Bursik showed that it was possible and likely to have stable crime patterns within an area that showed constant population change. Specifically Bursik points out that “development of primary relationships that result in informal structures of social control is less likely when local networks are in continual state of flux.” In the example of Chicago, as immigrants continue to come in, the population already there leave soon as it's financially feasible, which in return makes it difficult for any stable form of social control to take place.
Robert J. Bursik and Harold G. Grasmick further contributed to Social Disorganization Theory by reformulating concepts of social control within neighbourhoods that was introduced by Sampson and Groves, into three types of social control that are influenced by structural factors. Personal Social Control, Parochial Social Control and Public Social Control which are influenced by structural factors within a neighbourhood such as poverty, residential mobility, heterogeneity and broken homes affect the ability of the neighbourhood to implement models of social control.
Personal Social Control: In this model there are no personal relationships between neighbours and as a result no friendship networks for social control are formed. Example would be neighbourhoods with high number of residents with different race and backgrounds or low income and high unemployment which cause mistrust and lack of communication among the community.
Parochial Social Control: In this model the residents take a more active approach to Social Control observing strangers coming into the neighbourhood to stop vandalism and theft within the community. Example would be neighbourhoods that participate in programs like “Neighbourhood Watch”.
Public Social Control: In this model the entire community works together as an organization to improve and protect the community. Example would be playing an active role to the schools, community center and other institutions within the neighbourhood.
Lee and Martinez
When scholars associated with Social Disorganization theory developed spatial analytical techniques seventy years ago, they wanted a way to study violent crimes. These theorists were particularly concerned about the adverse impacts of that immigration, and how internal migration and ethnic heterogeneity might impact the ability of neighborhoods to control the behavior of their residents. Shaw and McKay, Sampson and Groves and Bursik and Grasmick all suggest that immigration and ethnic heterogeneity within the neighborhood can have adverse effect within the community. Recent work by Matthew T. Lee and Ramiro Martinez JR, suggest that this might not always be the case; recent studies have found that immigration generally does not increase crime rates in areas in where immigrants settle; in fact some studies show that these areas are less involved in crime than natives. Lee and Martinez suggest that current immigration trends do not have the negative consequences expected by disorganization theories; rather these studies show that immigration can strengthen social control rather than compromise it.
Immigration Revitalization argues that immigration can revitalize poor areas and strengthen social control within neighborhoods because of strong familial ties and job opportunities associated with enclave economies that result in less crime. In fact Lee and Martinez state that immigration is required as an essential ingredient for continued viability of urban areas where population has declined or community decay occurs, as was the case in previous decades.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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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ernal links
Social Disorganisation Theory (PDF)
Criminology |
https://ko.wikipedia.org/wiki/%EB%B0%80%EB%9E%B8%20%EB%B0%80%EB%9E%B4%EB%8B%88%EC%B9%98 | 밀랸 밀랴니치 | 밀랸 밀랴니치(; 1930년 5월 4일, 유고슬라비아 왕국 비톨라 ~ 2012년 1월 13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는 유고슬라비아와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 감독이자 행정가로, 현역 선수 시절 수비수로 활약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북마케도니아 비톨라에서 몬테네그로 닉시치의 베냐니족 출신 가정에서 난 밀랴니치는 훗날 유고슬라비아 SFR의 마케도니아 SR를 거쳐 현재의 북마케도니아가 되는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감독으로, 밀랴니치는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이끌고 10번 대회를 우승하였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라 리가를 2년 연속 우승하고, 1974-75 시즌에는 리그와 코파 델 레이를 모두 석권해 2관왕을 달성했으며, 발렌시아에서는 1982-83 시즌 4분의 3의 기간 동안 리그 17위를 기록하는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였으나,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는 1974년과 1982년에 2차례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였다.
그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축구 협회 회장으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는 2001년에 사임하기 전까지 이 직위를 맡았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축구계에 큰 영향을 끼쳐 차세대 감독들인 치로 블라제비치, 이비차 오심, 토자 베셀리노비치 등의 감독들을 제자로 두었다. 그가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기도 하지만 밀랴니치는 전매특허인 신중한 수비 전술과 노장에 크게 의존하는 성향의 단점이 있고, 이는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이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괄목할 만한 성적을 내지 못하게 막았다.
2002년, 그의 축구에 대한 공헌으로, 밀랴니치는 FIFA로부터 최고의 상인 FIFA 명예의 훈장을 받게 되었다.
유년 시절
밀랴니치는 1930년 기하학자이자 그의 부친인 아킴 밀랴니치가 2년 전인 1928년에 가족을 이끌고 업무 목적으로 입주한 비톨라에서 출생했다. 아킴은 앞서 1922년에 몬테네그로의 바냐니 거주지역에서 베오그라드로 이주하여 새로 개교한 측지학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가족은 부친 말고도 모친 조르카와 자매인 미라와 나다가 있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고, 점령하고, 해체하여 지역별로 이웃 추축국들이 지배하자, 밀랴니치 가문은 불가리아가 점령하고 바르다르 바노비나의 수중에 떨어진 비톨라를 떠나야만 했다. 피난길에 오른 가족은 우선 야고디나 마을에 정착하였고, 이후 크라구예바츠로 이동하였는데, 이 곳은 1941년 10월에 독일 국방군이 민간인을 2,700명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1944년, 14세의 말랴니치는 크라구예바츠에서 유고슬라비아 유격대에 합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밀랴니치 가족은 1946년에 베오그라드로 이주했다.
감독 경력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
밀랴니치는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역임했는데, 1기는 1965년부터 1966년까지였다. 2기와 3기는 각각 1973년부터 1974년까지, 1979년부터 1982년까지로, 1974년과 1982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참가하였다.
1992년까지,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 감독은 보스니아 출신이자 UEFA 유로 1992 본선 진출권을 이비차 오심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사라예보 포위전으로 오심의 가족이 위기에 처하자, 오심은 5월 23일에 사임을 발표했다. 그를 대신하여 유고슬라비아 협회는 이슬람 여성을 배우자로 맞이한 세르비아의 이반 차브리노비치와 밀랴니치에 공동 감독직을 맡겼다. 감독 선임 이튿날, 선수 명단이 발표되었다. 밀랴니치와 차브리노비치 감독의 지도 하에 유고슬라비아는 피렌체에서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적은 수의 관중이 크게 야유를 하는 가운데 딱 한 번 비공식 경기를 치렀다. 유고슬라비아가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대회에서 실격될 것이라는 소문이 당일 알려졌고, 밀랴니치는 선수들을 실력보다 출신별로 차출했냐고 많아지는 질문에 역겨움을 표시했고, 축축한 눈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환영받지 않았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요?" 5월 31일, 선수단이 스웨덴에 도착한 가운데, 본선 개막 열흘을 앞두고 실격이 확정되었다.
레알 마드리드
1974년 2월 고전 더비에서 요한 크라위프의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0-5 완패를 당하고, 그 시즌 리그를 8위로 마감하면서, 레알 마드리드 역대 최장 기간 역임한 감독인 미겔 무뇨스가 경질되고 시즌 도중에 취임한 루이스 몰로니의 레알 마드리드 감독 임기가 짧은 시일 내에 끝났다.
그 해 여름 이적 시장에서, 구단의 전설적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예스테 회장은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밀랸 밀랴니치를 1974년 7월 5일에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내정하였다. 세르비아인 감독의 권한은 같은 국적의 스레츠코 "펠릭스" 라디시치를 체력 코치로 데려오는 것밖에 없었다. 라디시치는 그에 따라 구단 역사상 최초의 체력 코치로 기록되었다. 밀랴니치의 나머지 감독진은 구단이 배정했는데, 후안 산티스테반이 골키퍼 코치를 맡았고, 안토니오 루이스가 수석 코치로 보좌하게 되었다.
밀랴니치는 레알 마드리드의 훈련에 여러면에서 참신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체력과 전술적 준비에 집중하면서, 그는 일간 훈련 횟수를 1번에서 3번으로 증가시켰는데, 이는 처음에 불만을 샀다. 그 외에도 그는 선수로 하여금 공에 2번 이상 발을 대지 못하게 하였고, 선수들 전체가 정밀한 조직력을 통해 작동하며 흠 잡을 데 없이 길게 공을 넘기도록 하였다. 그는 피리를 중원에서 후방으로 내려 최후방 수비를 맡도록 하였고, 공격을 전개할 경우 가운데로 공을 넘겨 공격수인 산티야나나 에스파뇰에서 이적한 로베르토 마르티네스가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덧붙여서, 밀랴니치는 미겔 앙헬이 문지기를 맡도록 하였고, 수비형 미드필더 비센테 델 보스케, 노련한 우측 미드필더 아만시오 아마로, 서독의 미드필더 귄터 네처, 바이에른에서 새로 들어온 수비수 파울 브라이트너, 그리고 유소년부에서 갓 올라온 신예 수비수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를 포진시켰다. 매력적이지 못한 경기력에 지지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밀랴니치의 1년차에 리그와 컵을 모두 석권하여 2관왕을 달성하였고, 컵위너스컵에서 밀랴니치의 친정 구단 츠르베나 츠베즈다와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로 밀리기 전까지 순항했다. 츠르베나 즈베즈다와의 경기는 1975년 3월, 2번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밀랴니치는 베오그라드 원정 2차전에서 친정을 상대로 앞서나갈 경우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저는 제 마음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선수단을 따라 원정길에 오르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다. 그 대신, 그는 마드리드에 기자들을 불러모아 경기를 텔레비전 중계로 지켜보았다. 1차전에서 2-0으로 이겼던 레알 마드리드는 밀랴니치 대신에 안토니오 루이스의 지휘를 받아 임전했지만, 머랭 군단은 베오그라드에서 0-2로 지고, 승부차기 끝에 탈락하였다.
1976-77 시즌을 무관으로 마무리한 후, 밀랴니치는 1977년 9월에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4년차를 시작했다. 그러나, 살라망카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1-2로 지면서 밀랴니치는 사표를 제출했다.
사생활
밀랴니치는 올리베라 "베라" 렐리치를 배우자로 맞이해 슬하에 두 자식을 두었다: 아들은 밀로시 밀랴니치는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며, 딸은 조르카이다.
그는 2012년 1월 13일, 알츠하이머병으로 수 년을 투병한 끝에 81세의 나이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영면하였다. 구단의 전 거장을 애도하면서, 조제 모리뉴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는 이튿날 마요르카와의 리그 원정 경기에서 검은 완장을 차고 경기를 치렀다.
수상
감독
츠르베나 즈베즈다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1967–68, 1968–69, 1969–70, 1972–73
유고슬라비아 컵: 1967–68, 1969–70, 1970–71
미트로파컵: 1967–68
레알 마드리드
라 리가: 1974–75, 1975–76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1974–75
행정가
FIFA 명예의 훈장: 2002
각주
외부 링크
라 리가 통계
1930년 출생
2012년 사망
비톨라 출신 스포츠인
유고슬라비아의 남자 축구 선수
몬테네그로의 남자 축구 선수
세르비아의 남자 축구 선수
북마케도니아의 남자 축구 선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축구 선수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의 축구 선수
남자 축구 수비수
세르비아의 축구 감독
세르비아의 해외 진출 축구 감독
유고슬라비아의 축구 감독
북마케도니아의 축구 감독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라리가의 축구 감독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축구 감독
레알 마드리드 CF의 축구 감독
발렌시아 CF의 축구 감독
1974년 FIFA 월드컵 참가 감독
1982년 FIFA 월드컵 참가 감독
세르비아계 북마케도니아인
몬테네그로계 북마케도니아인
스페인의 외국인 축구 감독
세르비아 축구 협회 회장
세르비아의 스포츠 행정가
베오그라드 신공동묘지에 묻힌 사람
UAE 프로리그의 축구 감독
쿠웨이트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감독 | https://en.wikipedia.org/wiki/Miljan%20Miljani%C4%87 | Miljan Miljanić | Miljan Miljanić (; 4 May 1930 – 13 January 2012) was a Yugoslav and Serbian football administrator, coach and player who played as a defender.
Born in Bitola, Vardar Banovina, Kingdom of Yugoslavia, to a family originating from the Banjani clan in the Nikšić municipality in Montenegro, Miljanić spent the first years of his life in what would later become SR Macedonia within SFR Yugoslavia and eventually present day North Macedonia.
During his colourful career, Miljanić coached Red Star Belgrade (won 10 trophies), Real Madrid (won back-to-back La Liga titles, including a League/Cup double in the 1974–75 season), Valencia CF (disappointing stint that lasted three quarters of the 1982–83 season when he got sacked with the team in 17th place in the league), and the Yugoslavia national team, of which he was a head coach in the 1974 and 1982 World Cups.
He is equally known as the all-powerful president of the Football Association of FR Yugoslavia (FSJ), a post he occupied for years before leaving in 2001.
His influence on the game of football in Yugoslavia is huge as an entire generation of coaches including Ćiro Blažević, Ivica Osim, Toza Veselinović, etc. came up under his tutelage. In addition to admirers, Miljanić has his share of detractors who feel his trademark cautious and defensive tactics, as well as reliance on older players, contributed to the Yugoslavia national team's poor results and unattractive play throughout the 1970s and 1980s.
In 2002, for his contributions to association football, Miljanić became the recipient of the FIFA Order of Merit — the highest honour awarded by FIFA.
Early life
Miljanić was born in 1930 in Bitola, a town his geometer father Akim Miljanić had moved the family to two years earlier in 1928 after finding employment there. Previously, in 1922, Akim had arrived to Belgrade from Montenegro's Banjani region in order to study at the newly opened Geodesy School. The family also consisted of mother Zorka and sisters Mira and Nada.
In 1941, with Nazi Germany invading, conquering, and dismembering Kingdom of Yugoslavia into territories administered by newly established local collaborationist regimes or neighbouring Axis powers states, the Miljanićs were forced into fleeing Bitola by the occupying Bulgarian force that had been handed the territory of Vardar Banovina by the Nazis. The fleeing family first settled in the town of Jagodina followed by relocating to Kragujevac, a city reeling from the October 1941 massacre of more than 2,700 civilians committed by the Wehrmacht force.
In 1944, in Kragujevac, 14-year-old Miljanić reportedly joined the Yugoslav Partisans.
Following the end of World War II, the family moved to Belgrade in 1946.
Coaching career
Yugoslavia national team
Miljanić had three stints as the head coach of the Yugoslavia national football team, 1965–66, 1973–74 and 1979–82. He coached the national team at the 1974 FIFA World Cup and the 1982 FIFA World Cup.
By the year of 1992, the team was coached by Bosnian Ivica Osim, whose rule had qualified Yugoslavia to UEFA Euro 1992. However, with his family under the siege of Sarajevo, Osim resigned on 23 May. To replace him, the Yugoslav federation called a duo of Miljanić and Ivan Čabrinović, a Serb married with a Muslim woman. One day later, it was announced the squad list. Under Miljanić and Čabrinović, Yugoslavia played just one unofficial friendly against the club ACF Fiorentina, in Florence, for a minor attendance and under huge protests, on 28 May. It was known by that day the rumor that Yugoslavia would be banned of the tournament due to Yugoslav wars, to which Miljanić, disgusted with increasingly questions about his players origins rather than their efficiency, reacted with wet eyes: "are we not welcomed? What? They do not want us anymore?". On 31 May, with the squad already in Sweden, the ban was confirmed, just ten days before the opening match.
Real Madrid
Miljanić's arrival to Real during the summer 1974 transfer window came on the heels of a turbulent season that saw the famous club make a coaching change after almost 14 seasons of Miguel Muñoz at the helm. The longtime coach's mid-season replacement Luis Molowny didn't fare well, losing 0–5 at home in El Clásico to the Johan Cruijff-led FC Barcelona in February 1974 and further cementing the club's league table placing away from the European spots. Right away, the club's iconic president Santiago Bernabéu Yeste felt it was time for major changes, initiating yet another approach to the Red Star Belgrade head coach Miljanić who had simultaneously been heading the Yugoslavia national team head coaching commission while awaiting the 1974 FIFA World Cup in West Germany. The Serb had reportedly been on Real's radar for a few years already, consistently rejecting their prior overtures. This time, within weeks, by March 1974, Miljanić committed to a two-year contract with Real Madrid effective summer 1974 following the World Cup, an arrangement reportedly set to see him receive US$150,000 in salary compensation (US$900,000 in 2022) over the agreed period. Other coaches Bernabéu reportedly considered for the job at this time included Inter Milan's head coach Helenio Herrera. The news of Yugoslavia head coaching commission leader Miljanić's signature with Real only a few months before World Cup was not received particularly well at home with certain press outlets calling for his sacking from the national team coaching commission. He would be allowed to stay, however, and lead the national team in West Germany.
Molowny completed the ongoing league season as Real's head coach knowing he'll be gone at the end of it no matter the outcome. In the end, he led the team to the eight spot in the league while winning the Copa del Generalísimo emphatically 4–0 against biggest rivals FC Barcelona. Miljanić, for his part, led Yugoslavia at the 1974 FIFA World Cup, managing to make it out of the first round group before losing each of the three matches in the next round group.
On 5 July 1974, three days after ending his World Cup participation in West Germany with a loss against Sweden, Miljanić was presented as Real Madrid's new head coach. The Serb's only condition was reportedly that he be allowed to bring along compatriot Srećko "Felix" Radišić as fitness coach. Radišić thus became the first fitness coach in club's history. Others in Miljanić's coaching staff were the club-assigned goalkeeping coach Juan Santisteban and assistant coach Antonio Ruiz.
1974–75 season: league-cup double
Incoming Miljanić initiated a number of innovative changes in the training methods at Real. Insisting on optimal physical and tactical preparation, he increased the number of daily training sessions from one to three—the first two (morning and noon) focusing on fitness and the late afternoon one with the ball—thus causing an outrage within the club initially. In addition to enhanced fitness training with fitness coach Radišić involving medicine balls, weights as well as speed and endurance tests, Miljanić further insisted on Real players not having more than two touches on the ball, having them perfect the long pass game with the entire team functioning as a precise mechanism. He also moved Pirri from his midfield role into the sweeper defensive role while the offensive movement usually converged with crosses for target forwards Santillana and new signing from Espanyol Roberto Martínez. Furthermore, at Miljanić's disposal were goalkeeper Miguel Ángel, defensive midfielder Vicente del Bosque, veteran right winger Amancio Amaro, West German midfielder Günter Netzer, newly signed defenceman from Bayern Paul Breitner, and young defender from the youth system José Antonio Camacho.
Despite facing fan criticism over unattractive play, Real won the league and cup double in his first season as coach.
In the Cup Winners' Cup, they got eliminated at the quarterfinal stage on penalties by Miljanić's former team Red Star Belgrade. The tie took place over two legs in March 1975, and Miljanić somewhat controversially decided not to travel to Belgrade for the return leg because he reportedly couldn't bear to lead the team against his former side, saying: "I can not betray my heart". Others speculated that contentious relations between SFR Yugoslavia and the Spanish State under the regime of Francisco Franco played a role in Miljanić's decision. Instead, the coach invited journalists to watch the game with him on television in Madrid. Going into the return leg Real had a 2–0 first leg lead, however, led by Antonio Ruiz who stepped in for Miljanić that night, los merenegues lost 2–0 in Belgrade and then got eliminated in the penalty shootout.
As his two-year contract at Real was set to expire, Miljanić began to be courted by Arsenal F.C. that was looking for a replacement for their manager Bertie Mee who had put the club on notice about resigning at the end of the current season. After visiting London on 20 April 1976 and receiving a reportedly lucrative offer to manage the club starting from the 1976-77 season, Miljanić decided not to sign with Arsenal and eventually re-signed with Real.
After ending the 1976–77 season without silverware, Miljanić started his fourth campaign as Real's coach in September 1977. However, after losing the opening match of the league season to Salamanca 1–2, Miljanić resigned his post.
Miljanić took a full year away from coaching after resigning from Real. Among the offers he considered during the period was Chelsea FC's whose chairman Brian Mears courted the Yugoslav heavily, even flying him in to spend two weeks with the club in mid October 1978 with a view of assessing the club's potential before deciding whether to stay at Stamford Bridge in some permanent capacity. The activities Miljanić partook in while in London and Stamford Bridge included watching Chelsea come back from 0-3 down to win 4-3 in the league versus Bolton Wanderers. Ultimately, not keen on fighting for survival in the English League Top Division, he opted not to join the club.
Within weeks of returning from London, Miljanić was appointed manager of Yugoslavia's national team.
Personal life
Miljanić was married to Olivera "Vera" Reljić with whom he had two children: son Miloš Miljanić (former footballer and current manager of Alianza F.C. of El Salvador) and daughter Zorka.
He died on 13 January 2012, aged 81, in Belgrade, Serbia after suffering from Alzheimer's disease for several years. Mourning the loss of the club's former great, on 14 January, Real Madrid side coached by José Mourinho played their away league match at Real Mallorca with Madrid players wearing black armbands.
Honours
Manager
Red Star Belgrade
Yugoslav First League: 1967–68, 1968–69, 1969–70, 1972–73
Yugoslav Cup: 1967–68, 1969–70, 1970–71
Mitropa Cup: 1967–68
Real Madrid
La Liga: 1974–75, 1975–76
Copa del Rey: 1974–75
Individual
FIFA Order of Merit: 2002
Don Balón Award: 1976
References
External links
1930 births
2012 deaths
Footballers from Bitola
Macedonian people of Serbian descent
Macedonian people of Montenegrin descent
Men's association football defenders
Yugoslav men's footballers
Red Star Belgrade footballers
Yugoslav First League players
Yugoslav football managers
Macedonian football managers
Yugoslavia national football team managers
1974 FIFA World Cup managers
1982 FIFA World Cup managers
Red Star Belgrade non-playing staff
Red Star Belgrade managers
Real Madrid CF managers
Valencia CF managers
Qadsia SC managers
Al Ain FC managers
La Liga managers
Kuwait Premier League managers
UAE Pro League managers
Yugoslav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Spain
Yugoslav expatriate sportspeople in Spain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Kuwait
Yugoslav expatriate sportspeople in Kuwait
Expatriate football managers in the United Arab Emirates
Yugoslav expatriate sportspeople in the United Arab Emirates
Presidents of the Football Association of Serbia
Serbian sports executives and administrators
Burials at Belgrade New Cemetery |
https://ko.wikipedia.org/wiki/%EA%B1%B4%EC%84%A0%EA%B1%B0 | 건선거 | 건선거(乾船渠) 또는 드라이독(도크)()은 선박이 들어올 때 물을 채우고, 선박이 들어온 뒤에는 물을 뺄 수 있는 시설이다. 선박의 건조, 유지보수, 수리 등에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물 위에 띄어 놓는 것은 부선거(浮船渠) 또는 플로팅 도크()라고 한다.
역사
중세 중국
중국에서 드라이도크의 사용은 적어도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088년, 송나라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심괄(1031–1095)은 그의 《몽계필담》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한 크기의 선박을 위한 부두에는 75만 갤런의 물이 있었을 것으로 계산되었다. 로마시대에 나르니의 조선소가 아직도 연구되고 있는데, 이 조선소가 드라이 도크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르네상스 유럽
최초의 현대 초기 유럽이자, 아직 사용 중인 가장 오래된 드라이 도크는 1495년 HMNB 포츠머스에서 영국의 헨리 7세에 의해 의뢰되었다.(튜더 해군 참조). 이 드라이 도크에는 현재 1차 세계 대전 모니터함 HMS M33이 있다.
플로팅 도크에 대한 가장 초기의 설명은 1560년 베니스에서 인쇄된 《인공 기계 해설》(Descrittione dell'artifitiosa machina)라는 이탈리아 소책자에서 비롯된 것 같다. 무명의 저자는 소책자에서 좌초된 선박의 구조를 위해 새로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요청하고, 그의 접근 방식을 설명하고 서술한다. 포함된 목판화에는 두 개의 큰 떠 있는 가대가 옆에 있어 선박 위의 지붕을 형성하는 선박이 표시된다. 배는 상부 구조에 부착된 다수의 로프에 의해 수직 위치로 당겨진다.
현대
생나제르의 아틀랑티크 조선소는 1,200 ☓ 60m의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를 소유하고 있다. 포르투갈 알마다에 있는 알프레도 다 실바 드라이 도크는 2000년에 폐쇄되었다. 지붕이 있는 가장 큰 드라이 도크는 독일 파펜부르크에 있는 독일 마이어 베르프트 조선소에 있으며, 길이 504m, 너비 125m, 높이 75m이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있는 할랜드 앤드 울프 중공업은 556 ☓ 93m의 대형 드라이 도크 부지이다. 거대한 크레인은 성서에 나오는 삼손과 골리앗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62 ☓ 76m의 뉴포트 뉴스 조선소에 있는 드라이 도크 12는 미국에서 가장 큰 드라이 도크이다. 북미에서 가장 큰 플로팅 도크는 비거러스라고 한다. 그것은 윌라메테강을 따라 스완 아일랜드 산업 지역에서 포틀랜드의 비거 중공업에서 운영한다.
유형
그레이빙형
그레이빙 도크(graving dock)는 건선거의 전통적인 형태이다. 좁은 분지이며, 일반적으로 흙으로 된 둑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지며, 문이나 케이슨으로 닫혀 있다. 문이 열린 상태로 배를 띄운 다음 문이 닫히고, 물이 펌프로 배출되면, 선박이 블록에 지지되어 있는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선박의 “도킹 계획”에 따라 킬 블록(keel block)과 빌지 블록(bilge block)이 도크 바닥에 배치된다. 드라이 도크의 일상적인 사용은 그레이빙(graving), 즉 청소, 따개비와 녹 제거, 선체 재도장을 위한 것이다.
잠수부가 배의 위치를 미세 조정하는 작업은 배를 조종할 수 있는 물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수행할 수 있다. 지지 블록이 구조 부재와 일치하여 선박의 무게가 블록에 의해 지지될 때 선박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일부 대잠전 군함에는 선체 아래에 소나돔이 돌출되어 있어 선체를 드라이독 바닥에서 몇 미터 위로 지지해야 한다.
나머지 물을 펌핑하면 선박을 자유롭게 검사하거나 수리할 수 있다. 배 작업이 끝나면 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이 열리고 배는 조심스럽게 다시 뜨게 된다.
현대적인 그레이빙 도크는 박스 모양으로 되어 있어 보다 새롭고, 더 큰 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반면, 오래된 드라이 도크는 종종 그곳에 정박할 예정인 선박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그러한 부두를 건설하기가 더 쉬웠고, 배를 측면 지지하기 더 쉬웠으며, 더 적은 양의 물을 펌핑해야 했기 때문에 유리했다.
해군 선박 건조에 사용되는 드라이 도크는 정찰 위성이 드라이 도크와 그 안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선박의 사진을 찍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붕을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군은 연합군의 공습으로부터 잠수함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화된 드라이 도크를 사용했다. (잠수함 펜 참조)
덮개가 있는 드라이 도크의 장점은 어떤 날씨에도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조선소에서 특히 지연으로 인해 높은 비용이 발생하는 유람선과 같은 복잡하고 고부가가치 선박의 건설에 자주 사용된다.
부유형
플로팅 드라이 도크는 침수 가능한 부력 챔버와 ‘U’자형 단면을 가진 드라이 도크 선박용 폰툰 유형이다. 벽은 바닥이나 데크가 수면 아래에 있을 때 드라이 도크의 안정성을 제공하는 데 사용된다. 밸브가 열리면 챔버가 물로 채워져 드라이 도크가 물 아래로 뜨게 된다. 갑판이 물에 잠기게 되어 선박이 내부의 위치로 이동할 수 있다. 물이 챔버 밖으로 펌핑되면 드라이 도크가 상승하고 배는 상승 데크에서 물 밖으로 들어 올려져 선체 작업이 진행될 수 있다.
대형 플로팅 드라이 도크에는 여러 개의 직사각형 구간이 포함된다. 이 섹션은 다양한 길이의 선박을 처리하기 위해 결합될 수 있으며, 섹션 자체는 다른 치수로 제공될 수 있다. 각 섹션에는 밸러스트를 비우고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자체 장비가 포함되어 있으며, 선수 섹션을 추가하면 조립된 드라이 도크를 쉽게 견인할 수 있다. 소형 보트의 경우, 기존의 구식 바지선에서 원피스 플로팅 드라이 도크를 구성하거나 변환할 수 있으며, 잠재적으로 고유한 선수 및 조향 장치와 함께 제공된다.
조선소는 선박을 운반하거나 도킹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플로팅 드라이 도크를 운영한다. 플로팅 드라이도크는 버뮤다 석회암 군도에 있는 영국 해군 도크 야드와 같이 다공성 지반으로 인해 기존의 드라이도크를 사용할 수 없는 위치에서 중요하게 이용된다. 플로팅 드라이 도크의 또 다른 장점은 필요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중고로도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 해군은 원격 위치에서 유지보수를 제공하기 위해 이러한 보조 부유식 드라이도크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이들의 두 가지 예는 1,000피트 AFDB-1과 850피트 AFDB-3이다. 후자는 괌에서 작업을 본 어드밴스 기지 플로팅 도크는 버지니아주 노퍽 근처에서 막혀 결국 메인주 포틀랜드로 견인되어 배스 철공소(Bath Iron Works) 수리 시설의 일부가 되었다.
플로팅 드라이 도크의 단점은 2018년 러시아 도크 PD-50에서와 같이 예정에 없던 침몰과 설계 외 다이빙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HMB-1(Hughes Mining Barge)은 씨새도우(Sea Shadow) 스텔스함의 개발뿐만 아니라 글로마 익스폴로러(Glomar Explorer) 함선 아래의 기계식 리프팅 장치의 비밀스런 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잠수할 수도 있는 덮개가 있는 부유식 드라이도크이다.
1854년 뉴욕시에 지어진 그레이트 밸런스 도크는 진수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플로팅 드라이도크였다. 길이는 99m였으며, 8,000톤을 들어 올릴 수 있었으며, 당시 가장 큰 배를 수용할 수 있었다.
대체 드라이도크 시스템
그레이빙 도크 및 플로팅 드라이 도크 외에도 선박은 다음을 통해 드라이 도크 및 진수할 수도 있다.
해상 철도 — 최대 약 3000톤의 선박 중량까지 대형 선박 수리용
쉽리프트 — 수리 및 신축용. 선박 중량 800~25000톤
슬립웨이, Patent Slip — 소형 보트 수리 및 새로 만드는 대형 선박의 진수용
기타 용도
일부 드라이 도크는 교량, 댐 및 기타 대형 물체를 건설하는 동안 사용된다. 예를 들어 닐티얀스(Neeltje-Jans)의 인공섬에 있는 드라이 도크는 각각 무게가 18,000톤인 65개의 콘크리트 기둥으로 구성된 네덜란드의 대형 댐인 오스터셀더기링댐(Oosterscheldekering) 건설에 사용되었다. 기둥은 드라이도크에서 건설되어 해저의 최종 위치까지 견인되었다.
드라이 도크는 또한 보스턴의 실버 라인에서와 같이 침수된 튜브 터널의 요소를 제자리에 띄우기 전에 사전 제작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Gallery
각주
외부 링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드라이 도크
그랜드 바하마 프리포트의 드라이 독에 있는 카니발 리버티 유람선.
"Docks's Life". 알마즈 조선소의 플로팅 도크에 대한 모든 것.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중국의 발명품
해안구조물 | https://en.wikipedia.org/wiki/Dry%20dock | Dry dock | A dry dock (sometimes drydock or dry-dock) is a narrow basin or vessel that can be flooded to allow a load to be floated in, then drained to allow that load to come to rest on a dry platform. Dry docks are used for the construction, maintenance, and repair of ships, boats, and other watercraft.
History
Greco-Roman world
The Greek author Athenaeus of Naucratis (V 204c-d) reports something that may have been a dry dock in Ptolemaic Egypt in the reign of Ptolemy IV Philopator (221-204 BC) on the occasion of the launch of the enormous Tessarakonteres rowing ship.
It has been calculated that a dock for a vessel of such a size might have had a volume of 750,000 gallons of water. In Roman times, a shipyard at Narni, which is still studied, may have served as a dry dock.
Medieval China
The use of dry docks in China goes at least as far back as the 10th century A.D. In 1088, Song Dynasty scientist and statesman Shen Kuo (1031–1095) wrote in his Dream Pool Essays:
Renaissance Europe
The first early modern European and oldest surviving dry dock still in use was commissioned by Henry VII of England at HMNB Portsmouth in 1495 (see Tudor navy). This dry dock currently holds First World War monitor HMS M33.
Possibly the earliest description of a floating dock comes from a small Italian book printed in Venice in 1560, called Descrittione dell'artifitiosa machina. In the booklet, an unknown author asks for the privilege of using a new method for the salvaging of a grounded ship and then proceeds to describe and illustrate his approach. The included woodcut shows a ship flanked by two large floating trestles, forming a roof above the vessel. The ship is pulled in an upright position by a number of ropes attached to the superstructure.
Modern era
The Saint-Nazaire's Chantiers de l'Atlantique owns one of the biggest in the world: . The Alfredo da Silva Dry Dock in Almada, Portugal, was closed in 2000. The largest roofed dry dock is at the German Meyer Werft Shipyard in Papenburg, Germany, it is 504 m long, 125 m wide and stands 75 m tall.
Harland and Wolff Heavy Industries in Belfast, Northern Ireland, is the site of a large dry dock . The massive cranes are named after the Biblical figures Samson and Goliath.
Dry Dock 12 at Newport News Shipbuilding at is the largest dry dock in the USA. The largest floating-dock in North America is named The Vigorous. It is operated by Vigor Industries in Portland, OR, in the Swan Island industrial area along the Willamette River.
Types
Graving
A graving dock is the traditional form of dry dock. It is a narrow basin, usually made of earthen berms and concrete, closed by gates or by a caisson. A vessel is floated in with the gates open, then the gates are closed and the water is pumped out, leaving the craft supported on blocks.
The keel blocks as well as the bilge block are placed on the floor of the dock in accordance with the "docking plan" of the ship. Routine use of dry docks is for the "graving" i.e. the cleaning, removal of barnacles and rust, and re-painting of ships' hulls.
Some fine-tuning of the ship's position can be done by divers while there is still some water left to manoeuvre it about. It is extremely important that supporting blocks conform to the structural members so that the ship is not damaged when its weight is supported by the blocks. Some anti-submarine warfare warships have sonar domes protruding beneath the hull, requiring the hull to be supported several metres above the bottom of the drydock.
Once the remainder of the water is pumped out, the ship can be freely inspected or serviced. When work on the ship is finished, the gates are opened to allow water in, and the ship is carefully refloated.
Modern graving docks are box-shaped, to accommodate newer, boxier ships, whereas old dry docks are often shaped like the ships that are planned to be docked there. This shaping was advantageous because such a dock was easier to build, it was easier to side-support the ships, and less water had to be pumped away.
Dry docks used for building Navy vessels may occasionally be built with a roof, to prevent spy satellites from taking pictures of the dry dock and any vessels that may be in it. During World War II, fortified dry docks were used by the Germans to protect their submarines from Allied air raids (see submarine pen).
An advantage of covered dry docks is that work can take place in any weather; this is frequently used by modern shipyards for construction especially of complex, high-value vessels like cruise ships where delays would incur a high cost.
Floating
A floating dry dock is a type of pontoon for dry docking ships, possessing floodable buoyancy chambers and a "U"-shaped cross-section. The walls are used to give the dry dock stability when the floor or deck is below the surface of the water. When valves are opened, the chambers fill with water, causing the dry dock to float lower in the water. The deck becomes submerged and this allows a ship to be moved into position inside. When the water is pumped out of the chambers, the dry dock rises and the ship is lifted out of the water on the rising deck, allowing work to proceed on the ship's hull.
A large floating dry dock involves multiple rectangular sections. These sections can be combined to handle ships of various lengths, and the sections themselves can come in different dimensions. Each section contains its own equipment for emptying the ballast and to provide the required services, and the addition of a bow section can facilitate the towing of the dry dock once assembled. For smaller boats, one-piece floating dry docks can be constructed or converted out of an existing obsolete barge, potentially coming with their own bow and steering mechanism.
Shipyards operate floating dry docks as one method for hauling or docking vessels. Floating drydocks are important in locations where porous ground prevents the use of conventional drydocks, such as at the Royal Naval Dockyard on the limestone archipelago of Bermuda. Another advantage of floating dry docks is that they can be moved to wherever they are needed and can also be sold second-hand. During World War II, the U.S. Navy used such auxiliary floating drydocks extensively to provide maintenance in remote locations. Two examples of these were the 1,000-foot AFDB-1 and the 850-foot AFDB-3. The latter, an Advance Base Sectional Dock which saw action in Guam, was mothballed near Norfolk, Virginia, and was eventually towed to Portland, Maine, to become part of Bath Iron Works' repair facilities.
A downside of floating dry docks is that unscheduled sinkings and off-design dives may take place, as with the Russian dock PD-50 in 2018.
The "Hughes Mining Barge", or HMB-1, is a covered, floating drydock that is also submersible to support the secret transfer of a mechanical lifting device underneath the Glomar Explorer ship, as well as the development of the Sea Shadow stealth ship.
The Great Balance Dock, built in New York City in 1854, was the largest floating drydock in the world when it was launched. It was long and could lift 8,000 tons, accommodating the largest ships of its day.
Alternative dry dock systems
Apart from graving docks and floating dry docks, ships can also be dry docked and launched by:
Marine railway — For repair of larger ships up to about 3000 tons ship weight
Shiplift — For repair as well as for new-building. From 800 to 25000 ton ship-weight
Slipway, patent slip — For repair of smaller boats and the new-building launch of larger vessels
Other uses
Some dry docks are used during the construction of bridges, dams, and other large objects. For example, the dry dock on the artificial island of Neeltje-Jans was used for the construction of the Oosterscheldekering, a large dam in the Netherlands that consists of 65 concrete pillars weighing 18,000 tonnes each. The pillars were constructed in a drydock and towed to their final place on the seabed.
A dry dock may also be used for the prefabrication of the elements of an immersed tube tunnel, before they are floated into position, as was done with Boston's Silver Line.
Gallery
See also
— 1942 attack on a dry dock during World War II.
References
Sources
External links
Encyclopædia Britannica, dry-dock
Carnival Liberty Cruise Ship in Dry Dock in Freeport, Grand Bahamas
"Docks's Life". All about floating docks of shipbuilding firm "Almaz". St.-Petersburg. Russia.
Coastal construction |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A%B5%AC%20%EC%9C%84%ED%97%98%20%ED%95%9C%EA%B3%84%EC%84%A0 | 지구 위험 한계선 | 지구위험한계선(planetary boundaries)은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반드시 보존해야 하는 영역들을 지구시스템과학적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 이상의 지구위험한계선을 침범할 경우 기하급수적인 환경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대륙 또는 전체 지구가 영향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재앙적인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한계선의 기준은 지구의 환경에 인간이 미치는 영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산업혁명 이후로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환경변화에 미치는 영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과학적 분석이 이러한 패러다임 제시의 시발점이 되었다. 2009년 요한 로크스트룀과 윌 스테판을 비롯한 환경과학자, 지구과학자들이 처음 제안하였고, 이들은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전세계 각국의 정부, 국제기구, 시민사회, 과학계, 민간 부문이 지켜야 할 필수 전제조건을 정의하고자 하였다. 지구위험한계선에서는 인류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과 함께 인류가 지구를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패러다임이 제시된 2009년을 기준으로, 총 9개의 한계선 중 2개가 이미 침범되었으며, 다른 한계선들 역시 무너질 위험성에 처해있는 상태이다.
개념의 역사
2009년 스톡홀름 회복센터의 요한 로크스트룀과 호주 국립 대학교의 윌 스테판이 이끄는 지구 시스템 및 환경과학자 그룹은 노벨상 수상자인 파울 크뤼천, 고더드 우주 연구소(GISS)의 기후과학자 제임스 한센, 독일 총리의 수석 기후 고문 한스 요아힘 셸른후버를 포함한 26명의 석학들과 함께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9개의 “행성 생명유지 시스템 (planetary life support systems)”을 확인하고, 이들 항목 중 7개가 이미 정상 범주를 벗어났음을 정량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행성 거주가능성이 위협받지 않는 선에서 인간이 얼마나 이 항목들을 침범할 수 있는지를 예측했다. 행성 생명유지 시스템 중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 손실, 생물지질학적 흐름 경계의 3가지 항목이 이미 정상 범주의 한계선을 침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2009년 제시한 지구위험한계선의 구체적 수치는 “대략적인 첫 번째 추정치”였으며, 지금까지 알려진 지식들의 한계로 인해 큰 불확실성을 가진 불확실한 값임을 밝혔다. 한계선의 항목들은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작용한다고 생각된다. 한계선은 “인간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정의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며, 이는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접근법을 보완한 것이다. 이들의 2009년 보고서는 암스테르담에 소재한 로마 클럽 총회에 제출되었고, 편집본이 2009년 네이처 특별판에서 특집 기사로 발표되었다. 이 기사는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오 J. 몰리나와 생물 학자 크리스티안 삼페르와 같은 선구적인 학자들로부터 비평을 받았다. 2015년에 지구위험한계선 개념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사이언스 지에 두 번째 논문이 게시되었으며, 여기엔 조사내용과 분야별 한계선의 수치가 포함되었다. 이 내용은 2015년 1월 다보스에서 열렸던 세계 경제 포럼에서 발표되었다.
2018년에 로크스트룀이 참여한 연구 결과는 파리 협약에 명시된 기준, 즉 산업혁명 이전 평균 기온보다 2도 높은 수준으로 지구 온난화를 제한하려는 국제 협약에 의문을 제기한다. 과학자들은 평균 기온 수준을 파리 협약 기준까지 제한하기 위해 온실 가스 배출량이 실질적으로 감소하더라도, 기후 시스템이 양성 피드백을 통한 지구 온난화를 발생시켜 최종적으로 온실기후 상태(hothouse climate state)를 만들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것은 일부 지역을 사람이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 것이다. 구체적으로 해수면을 최대 60 미터 높이고, 과거 120만년 전의 간빙기보다 기온을 4–5 °C (7.2–9.0 °F) 정도 높은 수준으로 올릴 것이다. 록스트롬은 이것이 일어날 지 여부를 “과학에서 가장 실존적인 문제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연구 저자인 캐서린 리차드슨(Katherine Richardson)은 “지구는 역사 상 온도가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준안정 상태(quasi-stable)를 가진 적이 없었다. 산업혁명 이전보다 2 °C 높은 기온을 유지한다는 계획은 기후 시스템 자체가 계속해서 온난화를 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여서 2 °C 높은 기온을 유지하더라도 다른 경로를 통해서 지구의 온도는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온실 가스의 배출을 줄이는 것 자체뿐만 아니라 더 혹독하게 가스를 감축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했다.
같이 보기
지구보건
생태경제학
탄소의 순환
가이아 이론
지구 온난화
대전환
성장의 한계
각주
외부 링크
The Boundaries of the Planetary Boundary Framework: A Critical Appraisal of Approaches to Define a “Safe Operating Space” for Humanity , Annual Review of Environment and Resources (2020)
지구위험한계선: 특집 (영어) - 네이처 (2009년 9월 24일)
요한 록스트롬: 환경이 발전의 목표가 되도록 (영어) TED 강연 (2010년 7월)
인류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영어) - 이코노미스트, 2011년 5월 26일
The Smart Way to Play God with Earth's Limited Land (영어) - Scientific American, 2012년 1월 20일
Planetary boundaries: what are the limits of the earth? - 팟캐스트 (영어) - 가디언, 2013년 1월 30일
지구과학
공중위생
세계화
지속 가능성
자본주의 비판 | https://en.wikipedia.org/wiki/Planetary%20boundaries | Planetary boundaries | Planetary boundaries are a framework to describe limits to the impacts of human activities on the Earth system. Beyond these limits, the environment may not be able to self-regulate anymore. This would mean the Earth system would leave the period of stability of the Holocene, in which human society developed. The framework is based on scientific evidence that human actions, especially those of industrialized societies since the Industrial Revolution, have become the main driver of global environmental change. According to the framework, "transgressing one or more planetary boundaries may be deleterious or even catastrophic due to the risk of crossing thresholds that will trigger non-linear, abrupt environmental change within continental-scale to planetary-scale systems."
The normative component of the framework is that human societies have been able to thrive under the comparatively stable climatic and ecological conditions of the Holocene. To the extent that these Earth system process boundaries have not been crossed, they mark the "safe zone" for human societies on the planet. Proponents of the planetary boundary framework propose returning to this environmental and climatic system; as opposed to human science and technology deliberately creating a more beneficial climate. The concept doesn't address how humans have massively altered ecological conditions to better suit themselves. The climatic and ecological Holocene this framework considers as a "safe zone" doesn't involve massive industrial farming. So this framework provides no clear way to feed modern populations.
The concept has since become influential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e.g.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Sustainable Development), including governments at all levels, international organizations, civil society and the scientific community. The framework consists of nine global change processes. In 2009, according to Rockström and others, three boundaries were already crossed (biodiversity loss, climate change and nitrogen cycle), while others were in imminent danger of being crossed.
In 2015, several of the scientists in the original group published an update, bringing in new co-authors and new model-based analysis. According to this update, four of the boundaries were crossed: climate change, loss of biosphere integrity, land-system change, altered biogeochemical cycles (phosphorus and nitrogen). The scientists also changed the name of the boundary "Loss of biodiversity" to "Change in biosphere integrity" to emphasize that not only the number of species but also the functioning of the biosphere as a whole is important for Earth system stability. Similarly, the "Chemical pollution" boundary was renamed to "Introduction of novel entities", widening the scope to consider different kinds of human-generated materials that disrupt Earth system processes.
In 2022, based on the available literature, the introduction of novel entities was concluded to be the 5th transgressed planetary boundary. Freshwater change was concluded to be the 6th transgressed planetary boundary in 2023.
Framework overview and principles
The basic idea of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is that maintaining the observed resilience of the Earth system in the Holocene is a precondition for humanity's pursuit of long-term social and economic development.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contributes to an understanding of global sustainability because it brings a planetary scale and a long timeframe into focus.
The framework described nine "planetary life support systems" essential for maintaining a "desired Holocene state", and attempted to quantify how far seven of these systems had been pushed already. Boundaries were defined to help define a "safe space for human development", which was an improvement on approaches aiming at minimizing human impacts on the planet.
The framework is based on scientific evidence that human actions, especially those of industrialized societies since the Industrial Revolution, have become the main driver of global environmental change. According to the framework, "transgressing one or more planetary boundaries may be deleterious or even catastrophic due to the risk of crossing thresholds that will trigger non-linear, abrupt environmental change within continental-scale to planetary-scale systems." The framework consists of nine global change processes. In 2009, two boundaries were already crossed, while others were in imminent danger of being crossed. Later estimates indicated that three of these boundaries—climate change, biodiversity loss, and the biogeochemical flow boundary—appear to have been crossed.
The scientists outlined how breaching the boundaries increases the threat of functional disruption, even collapse, in Earth's biophysical systems in ways that could be catastrophic for human wellbeing. While they highlighted scientific uncertainty, they indicated that breaching boundaries could "trigger feedbacks that may result in crossing thresholds that drastically reduce the ability to return within safe levels". The boundaries were "rough, first estimates only, surrounded by large uncertainties and knowledge gaps" which interact in complex ways that are not yet well understood.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lays the groundwork for a shifting approach to governance and management, away from the essentially sectoral analyses of limits to growth aimed at minimizing negative externalities, toward the estimation of the safe space for human development. Planetary boundaries demarcate, as it were, the "planetary playing field" for humanity if major human-induced environmental change on a global scale is to be avoided.
Authors
The authors of this framework was a group of Earth System and environmental scientists in 2009 led by Johan Rockström from the Stockholm Resilience Centre and Will Steffen from the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They collaborated with 26 leading academics, including Nobel laureate Paul Crutzen, Goddard Institute for Space Studies climate scientist James Hansen, oceanographer Katherine Richardson, geographer Diana Liverman and the German Chancellor's chief climate adviser Hans Joachim Schellnhuber.
Most of the contributing scientists were involved in strategy-setting for the Earth System Science Partnership, the precursor to the international global change research network Future Earth. The group wanted to define a "safe operating space for humanity" for the wider scientific community, as a precondi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
Nine boundaries
Thresholds and tipping points
The 2009 study identified nine planetary boundaries and, drawing on current scientific understanding, the researchers proposed quantifications for seven of them. These are:
climate change (CO2 concentration in the atmosphere < 350 ppm and/or a maximum change of +1 W/m2 in radiative forcing);
ocean acidification (mean surface seawater saturation state with respect to aragonite ≥ 80% of pre-industrial levels);
stratospheric ozone depletion (less than 5% reduction in total atmospheric O3 from a pre-industrial level of 290 Dobson Units);
biogeochemical flows in the nitrogen (N) cycle (limit industrial and agricultural fixation of N2 to 35 Tg N/yr) and phosphorus (P) cycle (annual P inflow to oceans not to exceed 10 times the natural background weathering of P);
global freshwater use (< 4000 km3/yr of consumptive use of runoff resources);
land system change (< 15% of the ice-free land surface under cropland);
the erosion of biosphere integrity (an annual rate of loss of biological diversity of < 10 extinctions per million species).
chemical pollution (introduction of novel entities in the environment).
For one process in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the scientists have not specified a global boundary quantification:
atmospheric aerosol loading;
The quantification of individual planetary boundaries is based on the observed dynamics of the interacting Earth system processes included in the framework. The control variables were chosen because together they provide an effective way to track the human-caused shift away from Holocene conditions.
For some of Earth's dynamic processes, historic data display clear thresholds between comparatively stable conditions. For example, past ice-ages show that during peak glacial conditions, the atmospheric concentration of CO2 was ~180-200 ppm. In interglacial periods (including the Holocene), CO2 concentration has fluctuated around 280 ppm. To know what past climate conditions were like with an atmosphere with over 350 ppm CO2, scientists need to look back about 3 million years. The paleo record of climatic, ecological and biogeochemical changes shows that the Earth system has experienced tipping points, when a very small increment for a control variable (like CO2) triggers a larger, possibly catastrophic, change in the response variable (global warming) through feedbacks in the natural Earth System itself.
For several of the processes in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it is difficult to locate individual points that mark the threshold shift away from Holocene-like conditions. This is because the Earth system is complex and the scientific evidence base is still partial and fragmented. Instead,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identifies many Earth system thresholds at multiple scales that will be influenced by increases in the control variables. Examples include shifts in monsoon behavior linked to the aerosol loading and freshwater use planetary boundaries.
"Safe operating spaces"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proposes a range of values for its control variables. This range is supposed to span the threshold between a 'safe operating space' where Holocene-like dynamics can be maintained and a highly uncertain, poorly predictable world where Earth system changes likely increase risks to societies. The boundary is defined as the lower end of that range. If the boundaries are persistently crossed, the world goes further into a danger zone.
It is difficult to restore a 'safe operating space' for humanity that is described by the planetary boundary concept. Even if past biophysical changes could be mitigated, the predominant paradigms of social and economic development appear largely indifferent to the looming possibilities of large scale environmental disasters triggered by human actions. Legal boundaries can help keep human activities in check, but are only as effective as the political will to make and enforce them.
Interaction among boundaries
Understanding the Earth system is fundamentally about understanding interactions among environmental change processes. The planetary boundaries are defined with reference to dynamic conditions of the Earth system, but scientific discussions about how different planetary boundaries relate to each other are often philosophically and analytically muddled. Clearer definitions of the basic concepts and terms might help give clarity.
There are many many interactions among the processes in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While these interactions can create both stabilizing and destabilizing feedbacks in the Earth system, the authors suggested that a transgressed planetary boundary will reduce the safe operating space for other processes in the framework rather than expand it from the proposed boundary levels. They give the example that the land use boundary could "shift downward" if the freshwater boundary is breached, causing lands to become arid and unavailable for agriculture. At a regional level, water resources may decline in Asia if deforestation continues in the Amazon. That way of framing the interactions shifts from the framework's biophysical definition of boundaries based on Holocene-like conditions to an anthropocentric definition (demand for agricultural land). Despite this conceptual slippage, considerations of known Earth system interactions across scales suggest the need for "extreme caution in approaching or transgressing any individual planetary boundaries."
Another example has to do with coral reefs and marine ecosystems: In 2009, researchers showed that, since 1990, calcification in the reefs of the Great Barrier that they examined decreased at a rate unprecedented over the last 400 years (14% in less than 20 years). Their evidence suggests that the increasing temperature stress and the declining ocean saturation state of aragonite is making it difficult for reef corals to deposit calcium carbonate. Multiple stressors, such as increased nutrient loads and fishing pressure, moves corals into less desirable ecosystem states. Ocean acidification will significantly change the distribution and abundance of a whole range of marine life, particularly species "that build skeletons, shells, and tests of biogenic calcium carbonate. Increasing temperatures, surface UV radiation levels and ocean acidity all stress marine biota, and the combination of these stresses may well cause perturbations in the abundance and diversity of marine biological systems that go well beyond the effects of a single stressor acting alone."
Proposed new or expanded boundaries since 2012
In 2012, Steven Running suggested a tenth boundary, the annual net global primary production of all terrestrial plants, as an easily determinable measure integrating many variables that will give "a clear signal about the health of ecosystems".
In 2015, a second paper was published in Science to update the Planetary Boundaries concept. The update concluded four boundaries had now been transgressed: climate, biodiversity, land use and biogeochemical cycles. The 2015 paper emphasized interactions of the nine boundaries and identified climate change and loss of biodiversity integrity as 'core boundaries' of central importance to the framework because the interactions of climate and the biosphere are what scientifically defines Earth system conditions.
In 2017, some authors argued that marine systems are underrepresented in the framework. Their proposed remedy was to include the seabed as a component of the earth surface change boundary. They also wrote that the framework should account for "changes in vertical mixing and ocean circulation patterns".
Subsequent work on planetary boundaries begins to relate these thresholds at the regional scale.
Debate and further research per boundary
Climate change
A 2018 study calls into question the adequacy of efforts to limit warming to 2 °C above pre-industrial temperatures, as set out in the Paris Agreement. The scientists raise the possibility that even if greenhouse gas emissions are substantially reduced to limit warming to 2 °C, that might exceed the "threshold" at which self-reinforcing climate feedbacks add additional warming until the climate system stabilizes in a hothouse climate state. This would make parts of the world uninhabitable for people, raise sea levels by up to 60 metres (200 ft), and raise temperatures by 4–5 °C (7.2–9.0 °F) to levels that are higher than any interglacial period in the past 1.2 million years.
Change in biosphere integrity
According to the biologist Cristián Samper, a "boundary that expresses the probability of families of species disappearing over time would better reflect our potential impacts on the future of life on Earth." The biodiversity boundary has also been criticized for framing biodiversity solely in terms of the extinction rate. The global extinction rate has been highly variable over the Earth's history, and thus using it as the only biodiversity variable can be of limited usefulness.
Nitrogen and phosphorus
The biogeochemist William Schlesinger thinks waiting until we near some suggested limit for nitrogen deposition and other pollutions will just permit us to continue to a point where it is too late. He says the boundary suggested for phosphorus is not sustainable, and would exhaust the known phosphorus reserves in less than 200 years.
The ocean chemist Peter Brewer queries whether it is "truly useful to create a list of environmental limits without serious plans for how they may be achieved ... they may become just another stick to beat citizens with. Disruption of the global nitrogen cycle is one clear example: it is likely that a large fraction of people on Earth would not be alive today without the artificial production of fertilizer. How can such ethical and economic issues be matched with a simple call to set limits? ... food is not optional."
Peak phosphorus is a concept to describe the point in time at which the maximum global phosphorus production rate is reached. Phosphorus is a scarce finite resource on earth and means of production other than mining are unavailable because of its non-gaseous environmental cycle. According to some researchers, Earth's phosphorus reserves are expected to be completely depleted in 50–100 years and peak phosphorus to be reached by approximately 2030.
Ocean acidification
Surface ocean acidity is clearly interconnected with the climate change boundaries, since the concentration of carbon dioxide in the atmosphere is also the underlying control variable for the ocean acidification boundary.
The ocean chemist Peter Brewer thinks "ocean acidification has impacts other than simple changes in pH, and these may need boundaries too."
Land-system change
Across the planet, forests, wetlands and other vegetation types are being converted to agricultural and other land uses, impacting freshwater, carbon and other cycles, and reducing biodiversity. In the year 2015 the boundary was defined as 75% of forests rested intact, including 85% of boreal forests, 50% of temperate forests and 85% of tropical forests. The boundary is crossed because only 62% of forests rested intact as of the year 2015.
The boundary for land use has been criticized as follows: "The boundary of 15 per cent land-use change is, in practice, a premature policy guideline that dilutes the authors' overall scientific proposition. Instead, the authors might want to consider a limit on soil degradation or soil loss. This would be a more valid and useful indicator of the state of terrestrial health."
Freshwater
The freshwater cycle is another boundary significantly affected by climate change. Overexploitation of freshwater occurs if a water resource is mined or extracted at a rate that exceeds the recharge rate. Water pollution and saltwater intrusion can also turn much of the world's underground water and lakes into finite resources with "peak water" usage debates similar to oil.
The hydrologist David Molden stated in 2009 that planetary boundaries are a welcome new approach in the "limits to growth" debate but said "a global limit on water consumption is necessary, but the suggested planetary boundary of 4,000 cubic kilometres per year is too generous."
Green and blue water
A study concludes that the 'Freshwater use' boundary should be renamed to the 'Freshwater change', composed of "green" and "blue" water components. 'Green water' refers to disturbances of terrestrial precipitation, evaporation and soil moisture. Water scarcity can have substantial effects in agriculture. When measuring and projecting water scarcity in agriculture for climate change scenarios, both "green water" and "blue water" are of relevance.
In April 2022, scientists proposed and preliminarily evaluated 'green water' in the water cycle as a likely transgressed planetary boundary, as measured by root-zone soil moisture deviation from Holocene variability.
Ozone depletion
The stratospheric ozone layer protectively filters ultraviolet radiation (UV) from the Sun, which would otherwise damage biological systems. The actions taken after the Montreal Protocol appeared to be keeping the planet within a safe boundary.
The Nobel laureate in chemistry, Mario Molina, says "five per cent is a reasonable limit for acceptable ozone depletion, but it doesn't represent a tipping point".
Atmospheric aerosols
Worldwide each year, aerosol particles result in about 800,000 premature deaths from air pollution. Aerosol loading is sufficiently important to be included among the planetary boundaries, but it is not yet clear whether an appropriate safe threshold measure can be identified.
Novel entities (chemical pollution)
Some chemicals, such as persistent organic pollutants, heavy metals and radionuclides, have potentially irreversible additive and synergic effects on biological organisms, reducing fertility and resulting in permanent genetic damage. Sublethal uptakes are drastically reducing marine bird and mammal populations. This boundary seems important, although it is hard to quantify. In 2019, it was suggested that novel entities could include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 pesticides and even artificial intelligence.
A Bayesian emulator for persistent organic pollutants has been developed which can potentially be used to quantify the boundaries for chemical pollution. To date, critical exposure levels of polychlorinated biphenyls (PCBs) above which mass mortality events of marine mammals are likely to occur, have been proposed as a chemical pollution planetary boundary.
There are at least 350,000 artificial chemicals in the world. They are coming from "plastics, pesticides, industrial chemicals, chemicals in consumer products, antibiotics and other pharmaceuticals". They have mostly "negative effects on planetary health". Their production increased 50 times since 1950 and is expected to increase 3 times more by 2050. Plastic alone contain more than 10,000 chemicals and create large problems. The researchers are calling for limit on chemical production and shift to circular economy, meaning to products that can be reused and recycled.
In January 2022 a group of scientists concluded that this planetary boundary is already exceeded, which puts in risk the stability of the Earth system. They integrated the literature information on how production and release of a number of novel entities, including plastics and hazardous chemicals, have rapidly increased in the last decades with significant impact on the planetary processes.
In August 2022, scientists concluded that the (overall transgressed) boundary is a placeholder for multiple different boundaries for NEs that may emerge, reporting that PFAS pollution is one such new boundary. They show that levels of these so-called "forever chemicals" in rainwater are ubiquitously, and often greatly, above guideline safe levels worldwide. There are some moves to restrict and replace their use.
Related concepts
Planetary integrity
Planetary integrity is also called earth's life-support systems or ecological integrity. Scholars have pointed out that planetary integrity "needs to be maintained for long-term sustainability". The current biodiversity loss is threatening ecological integrity on a global scale. The term integrity refers to ecological health in this context. The concept of planetary integrity is interlinked within the concept of planetary boundaries.
An expert Panel on Ecological Integrity in 1998 has defined ecological integrity as follows: "Ecosystems have integrity when they have their native components (plants, animals and other organisms) and processes (such as growth and reproduction) intact."
The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might be able to act as a steering mechanism to address the current loss of planetary integrity. There are many negative human impacts on the environment that are causing a reduction in planetary integrity.
The "Limits to Growth" (1972) and Gaia theory
The idea that there are limits to the burden placed upon our planet by human activities has been around for a long time.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acknowledges the influence of the 1972 study, The Limits to Growth, that presented a model in which exponential growth in world population, industrialization, pollution, food production, and resources depletion outstrip the ability of technology to increase resources availability. Subsequently, the report was widely dismissed, particularly by economists and business people, and it has often been claimed that history has proved the projections to be incorrect. In 2008, Graham Turner from the Commonwealth Scientific and Industrial Research Organisation (CSIRO) published "A comparison of The Limits to Growth with thirty years of reality". The Limits to Growth has been widely discussed, both by critics of the modelling approach and its conclusions and by analysts who argue that the insight that societies do not live in an unlimited world and that historical data since the 1970s support the report's findings. The Limits to Growth approach explores how the socio-technical dynamics of the world economy may limit humanity's opportunities and introduce risks of collapse. In contrast,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focuses on the biophysical dynamics of the Earth system.
Our Common Future was published in 1987 by United Nations'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It tried to recapture the spirit of the Stockholm Conference. Its aim was to interlock the concepts of development and environment for future political discussions. It introduced the famous defini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 "Development that meets the needs of the present without compromising the ability of future generations to meet their own needs."
Another key idea influencing the Planetary Boundaries framework is the Gaia theory or hypothesis. In the 1970s, James Lovelock and microbiologist Lynn Margulis presented the idea that all organisms and their inorganic surroundings on Earth are integrated into a single self-regulating system. The system has the ability to react to perturbations or deviations, much like a living organism adjusts its regulation mechanisms to accommodate environmental changes such as temperature (homeostasis). Nevertheless, this capacity has limits. For instance, when a living organism is subjected to a temperature that is lower or higher than its living range, it can perish because its regulating mechanism cannot make the necessary adjustments. Similarly the Earth may not be able to react to large deviations in critical parameters. In Lovelock's book The Revenge of Gaia, he suggests that the destruction of rainforests and biodiversity, compounded with global warming resulting from the increase of greenhouse gases made by humans, could shift feedbacks in the Earth system away from a self-regulating balance to a positive (intensifying) feedback loop.
Anthropocene
Scientists have affirmed that the planet has entered a new epoch, the Anthropocene. In the Anthropocene, humans have become the main agents of not only change to the Earth System but also the driver of Earth System rupture, disruption of the Earth System's ability to be resilient and recover from that change, potentially ultimately threatening planetary habitability. The previous geological epoch, the Holocene began about 10,000 years ago. It is the current interglacial period, and was a relatively stable environment of the Earth. There have been natural environmental fluctuations during the Holocene, but the key atmospheric and biogeochemical parameters have remained within relatively narrow bounds. This stability has allowed societies to thrive worldwide, developing agriculture, large-scale settlements and complex networks of trade.
According to Rockström et al., we "have now become so dependent on those investments for our way of life, and how we have organized society, technologies, and economies around them, that we must take the range within which Earth System processes varied in the Holocene as a scientific reference point for a desirable planetary state."
Various biophysical processes that are important in maintaining the resilience of the Earth system are also undergoing large and rapid change because of human actions. For example, since the advent of the Anthropocene, the rate at which species are going extinct has increased over 100 times, and humans are now the driving force altering global river flows as well as water vapor flows from the land surface. Continuing perturbation of Earth system processes by human activities raises the possibility that further pressure could be destabilizing, leading to non-linear, abrupt, large-scale or irreversible environmental change responses by the Earth system within continental- to planetary-scale systems.
Reception and debate
The 2009 report was presented to the General Assembly of the Club of Rome in Amsterdam. An edited summary of the report was published as the featured article in a special 2009 edition of Nature alongside invited critical commentary from leading academics like Nobel laureate Mario J. Molina and biologist Cristián Samper.
Development studies scholars have been critical of aspects of the framework and constraints that its adoption could place on the Global South. Proposals to conserve a certain proportion of Earth's remaining forests can be seen as rewarding the countries such as those in Europe that have already economically benefitted from exhausting their forests and converting land for agriculture. In contrast, countries that have yet to industrialize are asked to make sacrifices for global environmental damage they may have had little role in creating.
The biogeochemist William Schlesinger queries whether thresholds are a good idea for pollutions at all. He thinks waiting until we near some suggested limit will just permit us to continue to a point where it is too late. "Management based on thresholds, although attractive in its simplicity, allows pernicious, slow and diffuse degradation to persist nearly indefinitely."
In a global empirical study, researchers investigated how students of environmental and sustainability studies in 35 countries assessed the planetary boundaries. It was found that there are substantial global differences in the perception of planetary boundaries.
Subsequent developments
The "safe and just space" doughnut
National environmental footprints
Several studies have assessed environmental footprints of nations based on planetary boundaries: for Portugal, Sweden, Switzerland, the Netherlands, the European Union, India, many of Belt and Road Initiative countries as well as for the world's most important economies. While the metrics and allocation approaches applied varied, there is a converging outcome that resource use of wealthier nations – if extrapolated to world population – is not compatible with planetary boundaries.
Boundaries related to agriculture and food consumption
Human activities related to agriculture and nutrition globally contribute to the transgression of four out of nine planetary boundaries. Surplus nutrient flows (N, P) into aquatic and terrestrial ecosystems are of highest importance, followed by excessive land-system change and biodiversity loss. Whereas in the case of biodiversity loss, P cycle and land-system change, the transgression is in the zone of uncertainty—indicating an increasing risk (yellow circle in the figure), the N boundary related to agriculture is more than 200% transgressed—indicating a high risk (red marked circle in the figure). Here, nutrition includes food processing and trade as well as food consumption (preparation of food in households and gastronomy). Consumption-related environmental impacts are not quantified at the global level for the planetary boundaries of freshwater use, atmospheric aerosol loading (air pollution) and stratospheric ozone depletion.
Individual and collective allowances
Approaches based on a general framework of ecological limits include (transferable) personal carbon allowances and "legislated" national greenhouse gas emissions limits. Consumers would have freedom in their (informed) choice within (the collective) boundaries.
Usage at international policy level
United Nations
The United Nations secretary general Ban Ki-moon endorsed the concept of planetary boundaries on 16 March 2012, when he presented the key points of the report of his High Level Panel on Global Sustainability to an informal plenary of the UN General Assembly. Ban stated: "The Panel's vision is to eradicate poverty and reduce inequality, to make growth inclusive and production and consumption more sustainable, while combating climate change and respecting a range of other planetary boundaries." The concept was incorporated into the so-called "zero draft" of the outcome of the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Sustainable Development to be convened in Rio de Janeiro 20–22 June 2012. However, the use of the concept was subsequently withdrawn from the text of the conference, "partly due to concerns from some poorer countries that its adoption could lead to the sidelining of poverty reduction and economic development. It is also, say observers, because the idea is simply too new to be officially adopted, and needed to be challenged, weathered and chewed over to test its robustness before standing a chance of being internationally accepted at UN negotiations."
In 2011, at their second meeting, the High-level Panel on Global Sustainability of the United Nations had incorporated the concept of planetary boundaries into their framework, stating that their goal was: "To eradicate poverty and reduce inequality, make growth inclusive, and production and consumption more sustainable while combating climate change and respecting the range of other planetary boundaries."
Elsewhere in their proceedings, panel members have expressed reservations about the political effectiveness of using the concept of "planetary boundaries": "Planetary boundaries are still an evolving concept that should be used with caution [...] The planetary boundaries question can be divisive as it can be perceived as a tool of the "North" to tell the "South" not to follow the resource intensive and environmentally destructive development pathway that rich countries took themselves... This language is unacceptable to most of the developing countries as they fear that an emphasis on boundaries would place unacceptable brakes on poor countries."
However, the concept is routinely used in the proceedings of the United Nations, and in the UN Daily News. For example, the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 (UNEP) Executive Director Achim Steiner states that the challenge of agriculture is to "feed a growing global population without pushing humanity's footprint beyond planetary boundaries." The UNEP Yearbook 2010 also repeated Rockström's message, conceptually linking it with ecosystem management and environmental governance indicators.
In their 2012 report entitled "Resilient People, Resilient Planet: A future worth choosing", The High-level Panel on Global Sustainability called for bold global efforts, "including launching a major global scientific initiative, to strengthen the interface between science and policy. We must define, through science, what scientists refer to as "planetary boundaries", "environmental thresholds" and "tipping points"".
European Commission
The planetary boundaries concept is also used in proceedings by the European Commission, and was referred to in the European Environment Agency synthesis report The European environment – state and outlook 2010.
See also
Ecological footprint
Global catastrophic risk
Global change
Holocene extinction
Human impact on the nitrogen cycle
Human impacts on the environment
Planetary health
Planetary management
Sustainability
Triple Planetary Crisis
References
Sources
See also: Peak water.
The web page inverts the book title.
External links
Figures and data for the updated Planetary Boundaries can be found at the Stockholm Resilience Centre website.
Planetary Boundaries: Specials Nature, 24 September 2009.
Johan Rockstrom: Let the environment guide our development TED video, July 2010. Transcript html
Earth sciences
Global environmental issues
Globalization
Sustainability
Criticism of capitalism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7%B8%EB%82%98%EC%8B%9C%EC%98%A4%20%EC%97%90%EC%9D%B4%EC%82%AC%EA%B8%B0%EB%A0%88 |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 | {{축구 선수 정보
|이름=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
|사진=
|사진크기=
|설명=
|전체 이름= Ignacio Eizaguirre Arregui
|출생일= 1920년 11월 7일
|출생지=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사망일=
|사망지 =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키= 1.81m
|포지션= 은퇴 (과거 골키퍼)
|현 소속팀=
|등번호=
|청소년 클럽 연도= 1936–1939
|청소년 클럽= 아레나스 콘차 쿠엔토 렌테리아 라군 아르테아 레알 소시에다드
|클럽 연도= 1939–1940 1940–1950 1950–1956 1956–1960 합계:
|클럽= 레알 소시에다드 발렌시아 레알 소시에다드 오사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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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 연도= 1945–1952
|국가대표팀=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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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
|국가대표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
|감독 연도= 1959–1960 1960–1962 1962–1963 1963–1964 1964–1965 1965–1966 1967–1969 1969–1970 1971–1972 1973 1975 1975–1977
|감독 클럽= 오사수나 (선수 겸 감독) 무르시아 셀타 비고 그라나다 코르도바 세비야 셀타 비고 코르도바 에르쿨레스 테네리페 알라베스 코르도바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 아레기'(; 1920년 11월 7일, 바스크 지방 산 세바스티안 ~ 2013년 9월 1일 바스크 지방 산 세바스티안)는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골키퍼로 활약하였다.
그는 19시즌에 걸쳐 318번의 라 리가 경기에 출전했는데, 레알 소시에다드, 발렌시아, 그리고 오사수나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7년을 활동하면서 1950년 FIFA 월드컵에 자국을 대표로 참가하였다.
클럽 경력
에이사기레는 기푸스코아 주 산 세바스티안 출신으로, 1936년에 레알 소시에다드와 계약하였으나, 당시 1939년까지 스페인 내전으로 국내 축구 대회가 중단되었다. 그는 세군다 디비시온에서 신고식을 치르고, 한 시즌 만에 발렌시아로 이적하여 라 리가 무대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에이사기레는 동지'' 소속으로 1년차에 출전 정지 징계로 출전하지 못했으나, 발렌시아에서의 처음 6년 중에 3차례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 과정에서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기도 했다. 10년 가까이 발렌시아에서 활약한 그는 바스크 지방의 친정 구단 레알 소시에다드에 복귀하여 6년을 1부 리그에서 더 활동하였다.
에이사기레는 4년을 또다른 1부 리그 구단인 오사수나에서 활동하고 거의 불혹이 되어서 은퇴하였다.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59-60 시즌, 그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였는데, 나바라 지방의 구단은 시즌을 강등으로 마무리했다. 이후, 그는 1970년대 말까지 감독일을 했는데, 그가 지휘봉을 잡은 구단으로는 코르도바, 세비야, 그리고 그라나다가 있었는데 당시 1부 리그와 2부 리그에 있던 구단들이었다.
국가대표팀 경력
에이사기레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경기에 18번 출전하였는데, 첫 출전 경기는 1945년 3월 11일, 리스본에서 2-2로 비긴 포르투갈과의 친선경기였다. 그는 브라질에서 열린 1950년 FIFA 월드컵에서 기예르모 에이사기레(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가 이끄는 스페인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해 3-1로 이긴 미국과의 1차 조별 리그 경기와 1-3으로 패한 스웨덴과의 2차 조별 리그 경기에 출전하였고, 스페인은 이 대회에서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사생활
에이사기레의 부친 아구스틴 또한 축구 선수이자 골키퍼였다. 그는 레알 소시에다드에서만 활약하였다.
사망
2013년 9월 1일, 그는 92세의 나이로 고향 산 세바스티안에서 영면하였다.
수상
클럽
발렌시아
라 리가: 1941–42, 1943–44, 1946–47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1949
코파 에바 두아르테: 1949
개인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 1943–44, 1944–45
각주
외부 링크
Eu-Football 스페인 국가대표팀 통계
1920년 출생
2013년 사망
산세바스티안 출신 스포츠인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바스크주 출신 축구 선수
남자 축구 골키퍼
라리가의 축구 선수
세군다 디비시온의 축구 선수
레알 소시에다드의 축구 선수
발렌시아 CF의 축구 선수
CA 오사수나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195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스페인의 축구 감독
라리가의 축구 감독
세군다 디비시온의 축구 감독
CA 오사수나의 축구 감독
레알 무르시아의 축구 감독
셀타 비고의 축구 감독
그라나다 CF의 축구 감독
코르도바 CF의 축구 감독
세비야 FC의 축구 감독
에르쿨레스 CF의 축구 감독
CD 테네리페의 축구 감독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의 축구 감독
부르고스 CF (1936년)의 축구 감독 | https://en.wikipedia.org/wiki/Ignacio%20Eizaguirre | Ignacio Eizaguirre | Ignacio Eizaguirre Arregui (7 November 1920 – 1 September 2013) was a Spanish footballer who played as a goalkeeper.
He played 381 La Liga games during 19 seasons, representing Real Sociedad, Valencia and Osasuna. He was a Spanish international for seven years, and appeared for the country at the 1950 World Cup.
Club career
Born in San Sebastián, Gipuzkoa, Eizaguirre signed with Real Sociedad in 1936, but no football was played in the country from that year and 1939 due to the Spanish Civil War. He made his debuts with the club in Segunda División and, after one season, reached La Liga as he moved to Valencia CF.
With the Che, Eizaguirre – who did not lineup in his first year due to suspension – won his three national championships in his first six seasons, conquering two Ricardo Zamora Trophy awards in the process. After one full decade he returned to his native Basque Country and Real Sociedad, for a further six top flight campaigns.
Eizaguirre retired at the age of nearly 40 after four seasons with CA Osasuna, still in the main category – before the last one, 1959–60, ended, he was named the club's player-coach, as the campaign ended in relegation for the Navarrese. He worked as a manager until the late 70s, with Córdoba CF, Sevilla FC and Granada CF in the top division and a host of teams in the second level.
International career
Eizaguirre won the first of his 18 caps for Spain on 11 March 1945, in a 2–2 friendly draw with Portugal in Lisbon. He was chosen by manager Guillermo Eizaguirre (no relation) for his 1950 FIFA World Cup squad, and in Brazil he featured against the United States (3–1 first group stage win) and Sweden (1–3 second group stage loss) for the eventual fourth-placed team.
Personal life and death
Eizaguirre's father, Agustín, was also a footballer and a goalkeeper. He played solely for Real Sociedad.
Ignacio died on 1 September 2013 in his hometown of San Sebastián, aged 92.
Honours
Valencia
La Liga: 1941–42, 1943–44, 1946–47
Copa del Generalísimo: 1949
Copa Eva Duarte: 1949
Individual
Ricardo Zamora Trophy: 1943–44, 1944–45
References
External links
1920 births
2013 deaths
Spanish men's footballers
Footballers from San Sebastián
Men's association football goalkeepers
La Liga players
Segunda División players
Real Sociedad footballers
Valencia CF players
CA Osasuna players
Spain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1950 FIFA World Cup players
Spanish football managers
La Liga managers
Segunda División managers
CA Osasuna managers
Real Murcia CF managers
RC Celta de Vigo managers
Granada CF managers
Córdoba CF managers
Sevilla FC managers
Burgos CF (1936) managers
Hércules CF managers
CD Tenerife managers
Deportivo Alavés managers |
https://ko.wikipedia.org/wiki/SFINAE | SFINAE | SFINAE(대체 실패는 오류가 아님, Substitution failure is not an error)는 C++에서 템플릿 매개변수에 자료형이나 값을 넣을 수 없어도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이를 이용한 프로그래밍 테크닉을 설명하기 위해 SFINAE라는 줄임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David Vandevoorde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함수 오버로드 후보 집합을 만들 때 그 중에는 템플릿 매개 변수에 자료형이나 값이 대입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대체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가 C++ 표준이 허용하는 것이라면, 컴파일러는 컴파일 오류를 보고하지 않고, 후보 집합에서 그 후보를 제외한다. 만약 하나 이상의 후보가 남고 오버로드 결정(Overload Resolution)에 성공한다면, 호출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시
다음은 SFINAE의 기본 예시이다. struct Test {
typedef int foo;
};
template <typename T>
void f(typename T::foo) {} // 정의 1
template <typename T>
void f(T) {} // 정의 2
int main() {
f<Test>(10); // 정의 1을 호출한다.
f<int>(10); // SFINAE 덕분에
// int::foo가 없으므로 오류 없이 정의 2를 호출한다.
} 위 예제에서, f<int>를 사용했을 때 int 내부에 foo 가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T::foo에서 대체 오류가 발생하지만, 유효한 함수가 후보 집합에 남아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은 잘 작동한다.
이 개념은 잘못된 템플릿 선언이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헤더 파일이 포함되었을 때 등) 도입되었지만, 많은 개발자들이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컴파일 시에 활용할 수 있는 검사 기법을 만들어냈다. 특히 SFINAE는 템플릿을 인스턴스화할 때 템플릿 전달인자의 속성들을 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예를 들어, SFINAE를 사용하면 주어진 자료형에 특정 typedef가 포함되어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include <iostream>
template <typename T>
struct has_typedef_foobar {
// 자료형 "yes"와 "no"는 다른 크기를 가지도록 보장되어있다.
// 여기서 sizeof(yes) == 1 이고 sizeof(no) == 2이다.
typedef char yes[1];
typedef char no[2];
template <typename C>
static yes& test(typename C::foobar*);
template <typename>
static no& test(...);
// 만약 test<T>(nullptr)를 호출한 결과의 sizeof가 sizeof(yes)와 같다면,
// 첫번째 오버로드가 호출된 것이고 주어진 자료형 T는 foobar라는 내부 타입을
// 가지고 있다.
static const bool value = sizeof(test<T>(nullptr)) == sizeof(yes);
};
struct foo {
typedef float foobar;
};
int main() {
std::cout << std::boolalpha;
std::cout << has_typedef_foobar<int>::value << std::endl; // false를 출력
std::cout << has_typedef_foobar<foo>::value << std::endl; // true를 출력
} T 내부에 자료형 foobar가 정의되어 있으면 첫번째 test가 후보로 선택되고 널포인터 상수가 성공적으로 전달된다. (이 때 호출 결과의 자료형은 yes이다. ) 반대의 경우,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함수는 두번째 test이고 결과의 자료형은 no이다. 여기서 생략 부호는 아무 자료형이나 받을 수 있으면서, 변환 순위가 가장 낮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 첫번째 함수가 호출되도록 만든다. 이를 통해 모호성을 없앨 수 있다.
C++11에서 더 단순하게 사용하기
C++11에서는 위 코드를 다음과 같이 더 단순하게 사용할 수 있다. #include <iostream>
#include <type_traits>
template <typename... Ts>
using void_t = void;
template <typename T, typename = void>
struct has_typedef_foobar : std::false_type {};
template <typename T>
struct has_typedef_foobar<T, void_t<typename T::foobar>> : std::true_type {};
struct foo {
using foobar = float;
};
int main() {
std::cout << std::boolalpha;
std::cout << has_typedef_foobar<int>::value << std::endl;
std::cout << has_typedef_foobar<foo>::value << std::endl;
} Library fundamental v2 (n4562)에서 제안된 탐지 패턴 표준을 이용하면, 위 코드를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include <iostream>
#include <type_traits>
template <typename T>
using has_typedef_foobar_t = typename T::foobar;
struct foo {
using foobar = float;
};
int main() {
std::cout << std::boolalpha;
std::cout << std::is_detected<has_typedef_foobar_t, int>::value << std::endl;
std::cout << std::is_detected<has_typedef_foobar_t, foo>::value << std::endl;
} Boost의 개발진은 boost::enable_if과 같은 방법으로 SFINAE를 사용하였다.
참고 문헌
소프트웨어 디자인 패턴
C++ | https://en.wikipedia.org/wiki/Substitution%20failure%20is%20not%20an%20error | Substitution failure is not an error | Substitution failure is not an error (SFINAE) is a principle in C++ where an invalid substitution of template parameters is not in itself an error. David Vandevoorde first introduced the acronym SFINAE to describe related programming techniques.
Specifically, when creating a candidate set for overload resolution, some (or all) candidates of that set may be the result of instantiated templates with (potentially deduced) template arguments substituted for the corresponding template parameters. If an error occurs during the substitution of a set of arguments for any given template, the compiler removes the potential overload from the candidate set instead of stopping with a compilation error, provided the substitution error is one the C++ standard grants such treatment. If one or more candidates remain and overload resolution succeeds, the invocation is well-formed.
Example
The following example illustrates a basic instance of SFINAE:
struct Test {
typedef int foo;
};
template <typename T>
void f(typename T::foo) {} // Definition #1
template <typename T>
void f(T) {} // Definition #2
int main() {
f<Test>(10); // Call #1.
f<int>(10); // Call #2. Without error (even though there is no int::foo)
// thanks to SFINAE.
return 0;
}
Here, attempting to use a non-class type in a qualified name (T::foo) results in a deduction failure for f<int> because int has no nested type named foo, but the program is well-formed because a valid function remains in the set of candidate functions.
Although SFINAE was initially introduced to avoid creating ill-formed programs when unrelated template declarations were visible (e.g., through the inclusion of a header file), many developers later found the behavior useful for compile-time introspection. Specifically, it allows a template to determine certain properties of its template arguments at instantiation time.
For example, SFINAE can be used to determine if a type contains a certain typedef:
#include <iostream>
template <typename T>
struct has_typedef_foobar {
// Types "yes" and "no" are guaranteed to have different sizes,
// specifically sizeof(yes) == 1 and sizeof(no) == 2.
typedef char yes[1];
typedef char no[2];
template <typename C>
static yes& test(typename C::foobar*);
template <typename>
static no& test(...);
// If the "sizeof" of the result of calling test<T>(nullptr) is equal to
// sizeof(yes), the first overload worked and T has a nested type named
// foobar.
static const bool value = sizeof(test<T>(nullptr)) == sizeof(yes);
};
struct foo {
typedef float foobar;
};
int main() {
std::cout << std::boolalpha;
std::cout << has_typedef_foobar<int>::value << std::endl; // Prints false
std::cout << has_typedef_foobar<foo>::value << std::endl; // Prints true
return 0;
}
When T has the nested type foobar defined, the instantiation of the first test works and the null pointer constant is successfully passed. (And the resulting type of the expression is yes.) If it does not work, the only available function is the second test, and the resulting type of the expression is no. An ellipsis is used not only because it will accept any argument, but also because its conversion rank is lowest, so a call to the first function will be preferred if it is possible; this removes ambiguity.
C++11 simplification
In C++11, the above code could be simplified to:
#include <iostream>
#include <type_traits>
template <typename... Ts>
using void_t = void;
template <typename T, typename = void>
struct has_typedef_foobar : std::false_type {};
template <typename T>
struct has_typedef_foobar<T, void_t<typename T::foobar>> : std::true_type {};
struct foo {
using foobar = float;
};
int main() {
std::cout << std::boolalpha;
std::cout << has_typedef_foobar<int>::value << std::endl;
std::cout << has_typedef_foobar<foo>::value << std::endl;
return 0;
}
With the standardisation of the detection idiom in the Library fundamental v2 (n4562) proposal, the above code could be re-written as follows:
#include <iostream>
#include <type_traits>
template <typename T>
using has_typedef_foobar_t = typename T::foobar;
struct foo {
using foobar = float;
};
int main() {
std::cout << std::boolalpha;
std::cout << std::is_detected<has_typedef_foobar_t, int>::value << std::endl;
std::cout << std::is_detected<has_typedef_foobar_t, foo>::value << std::endl;
return 0;
}
The developers of Boost used SFINAE in boost::enable_if and in other ways.
References
C++
Articles with example C++ code
Software design patterns |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D%97%A4%EC%86%8C%EC%BC%80%EC%96%B4%EC%A1%B1 | 미헤소케어족 | 미헤·소케어족()은 멕시코의 테우안테펙 지협과 인근 지역에서 쓰이는 언어들이 이루는 어족이다. 멕시코 정부는 화자 수 188,000명의 미헤어, 화자 88,000명의 소케어, 화자 69,000명의 포폴루카어(일부는 미헤어파, 일부는 소케어파에 속함)를 공인한다. 그러나 각 집단 내의 언어적 다양성은 상당하다. 에스놀로그는 미헤소케어족에 17개의 언어가 속한다고 보며, Wichmann (1995)의 분류에 따르면 오늘날 12개의 언어와 11개의 방언이 속한다. 미헤소케어족에 속한 사어로는 과거에 치아파스주 동남해안의 타파출라에서 쓰였던 타파출텍어가 있다.
역사
과거에 미헤소케어족은 지금보다 훨씬 넓은, 과테말라 태평양 연안(소코누스코 지역)에 이르는 영역에 분포했을 수도 있다. 테렌스 코프먼과 라일 캠벨은 다른 메소아메리카 언어들에 널리 퍼져 있는 여러 차용어를 근거로 하여, 가장 이른 시기에 메소아메리카를 지배한 문화인 올멕이 미헤소케어족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코프먼과 존 저스티슨은 라 모하라 스텔라 1에 새겨진 지협 문자가 고대의 미헤소케어족 언어를 적은 것이라는 가정 하에 그 텍스트를 상당 부분 해독했다고 주장한다.
두 주장 모두 비판을 받았다. 마이클 D. 코와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현전하는 지협 문자 기록은 너무나 적어서 어떤 식으로든 해독을 주장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코프먼과 저스티슨의 해독 방법을 다른 지협 문자 자료에 적용해 보았지만 의미 있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Wichmann (1995)은 미헤소케어족 차용어라고 주장된 몇몇 메소아메리카 언어 단어들이 실제로는 소케어파 차용어이며 미헤어파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차용 시점은 올멕 문화의 전성기였던 미헤소케조어 시기보다 훨씬 나중이 된다. 그러나 이후에 미헤어파와 소케어파의 분기 시점이 앞당겨짐으로 인해 이 논거는 과거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나중에 Kaufman (2001)은 또 미헤소케어족 차용어를 근거로 테오티와칸에 미헤소케어족이 존재했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메소아메리카 언어 지역을 특징짓는 여러 공통점을 퍼뜨리는 데 미헤소케어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어족과의 계통 관계
미헤소케어족은 여러 대어족 가설에 포함된 바 있다. 예컨대 에드워드 사피어는 자신의 펜우티어족 가설의 “멕시코 펜우티” 분기군에 미헤소케어족을 포함시켰고 노먼 매콘은 미헤소케어족, 마야어족, 토토낙어족을 확대 마야어족 가설로 한데 묶었다. 20세기 말 라일 캠벨은 이러한 가설 대부분에 방법론적 결함이 있다며 격하했지만 그 중 확대 마야어족 가설은 가장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평가했다. 보다 최근에 발표된 두 논문은 미헤소케어족을 토토낙어족(“토토소케어족”) 또는 마야어족과 연결지을 근거를 제시한다.
분류
Wichmann (1995)
Søren Wichmann (1995)은 미헤소케어족의 내적 분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Kaufman & Justeson (2000)
다음 분류는 Kaufman & Justeson (2000)에 따른 것으로 Zavala (2000)에 인용되었다.
미헤·소케어족
미헤어파
타파출텍어
올루텍어
핵심 미헤어군
사율텍어
(분기군)
저지 미헤어
고지 미헤어
소케어파
멕시코만 소케어군
소테아판 소케어 (시에라 포폴루카어)
(분기군)
테히스테펙 소케어
아야파 소케어
소케어군
치아파스 소케어
오아하카 소케어
음운론
Wichmann (1995)이 비교 재구한 미헤소케조어의 음운 목록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현대의 후손 언어 중 다수는 거기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어떤 언어들은 모음의 수가 많아졌고 어떤 언어들은 파열음 계열에서 평음과 격음의 대립이 생겼다. 어떤 언어의 일부 단어에는 설측음 음소 이 나타나지만, 아마도 의성어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대신 를 재구하기도 한다.
음절
미헤소케조어의 특징 중 하나는 여러 모음과 성문 파열음 및 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음절핵의 존재이다. 많은 후손 언어는 복잡한 음절말 자음군이라는 특징을 보이며 이는 조어에서도 재구된다.
미헤소케조어의 음절핵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질 수 있었다.
V – 단모음
V' – 단모음과 성문 파열음
VV – 장모음
V'V – 중간에 성문 파열음이 오는 장모음
VV' – 끝에 성문 파열음이 오는 장모음
Vh – 단모음과 h
문법적 특징
미헤소케어족 언어들은 핵어표시 포합어이며 복잡한 동사 형태론과 단순한 명사 형태론을 지녔다. 주어와 목적어가 동사에 표시된다. 능격-절대격 정렬이 흔하며, 생물성과 주제성에 영향을 받는 직류-역류 언어도 찾아볼 수 있다. 미헤소케어 동사 형태론은 절을 독립절과 종속절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며, 절의 유형에 따라 다른 상 접사와 인칭 접사가 쓰인다. 두 유형 모두 미완료상(incompletive), 완료상(completive), 비현실상(irrealis)의 3가지 상을 구분한다.
각주
참고 문헌
Campbell, L., and T. Kaufman (1976), "A Linguistic Look at the Olmecs", American Antiquity, 41 pp. 80–89.
Justeson, John S., and Kaufman, Terrence, (1997),"A Newly Discovered Column in the Hieroglyphic Text on La Mojarra Stela 1: a Test of the Epi-Olmec Decipherment", Science, 07/11/97, Vol. 277 Issue 5323, p. 207.
Justeson, John S., and Kaufman, Terrence (2001) Epi-Olmec Hieroglyphic Writing and Texts.
Kaufman, Terrence, (2001) Nawa linguistic prehistory, published at website of the Mesoamerican Language Documentation Project
Brigham Young University press release on behalf of Brigham Young University archaeologist Stephen Houston and Yale University professor emeritus Michael Coe disputing Justeson/Kaufman findings.
어족
메소아메리카의 언어 | https://en.wikipedia.org/wiki/Mixe%E2%80%93Zoque%20languages | Mixe–Zoque languages | The Mixe–Zoque (also: Mixe–Zoquean, Mije–Soke, Mije–Sokean) languages are a language family whose living members are spoken in and around the Isthmus of Tehuantepec, Mexico. The Mexican government recognizes three distinct Mixe–Zoquean languages as official: Mixe or ayook with 188,000 speakers, Zoque or o'de püt with 88,000 speakers, and the Popoluca languages of which some are Mixean and some Zoquean with 69,000 speakers. However, the internal diversity in each of these groups is great. Ethnologue counts 17 different languages, and the current classification of Mixe–Zoquean languages by Wichmann (1995) counts 12 languages and 11 dialects. Extinct languages classified as Mixe–Zoquean include Tapachultec, formerly spoken in Tapachula, along the southeast coast of Chiapas.
History
Historically the Mixe–Zoquean family may have been much more widespread, reaching into the Guatemalan Pacific coast (i.e. the Soconusco region). Terrence Kaufman and Lyle Campbell have argued, based on a number of widespread loanwords in other Mesoamerican languages, that it is likely that the Olmec people, generally seen as the earliest dominating culture of Mesoamerica, spoke a Mixe–Zoquean language. Kaufman and John Justeson also claim to have deciphered a substantial part of the text written in Isthmian script (called also by them and some others 'Epi-Olmec') which appears on La Mojarra Stela 1, based upon their deciphering of the text as representing an archaic Mixe–Zoquean language.
Both of these claims have been criticized: Michael D. Coe and David Stuart argue that the surviving corpus of the few known examples of Isthmian inscriptions is insufficient to securely ground any proposed decipherment. Their attempt to apply Kaufman's and Justeson's decipherments to other extant Isthmian material failed to produce any meaningful results. Wichmann (1995) criticizes certain proposed Mixe–Zoquean loans into other Mesoamerican languages as being only Zoquean, not Mixean, which would put the period of borrowing much later than the Proto-Mixe–Zoquean time-frame in which the Olmec culture was at its height. The date of the Mixe–Zoque split has however since been pushed back, and the argument is therefore much weaker than it once was thought to be.
Later, Kaufman (2001), again on the basis of putative loans from Mixe–Zoque into other Mesoamerican languages, argued a Mixe–Zoquean presence at Teotihuacan, and he ascribed to Mixe–Zoquean an important role in spreading a number of the linguistic features that later became some of the principal commonalities used in defining the Mesoamerican Linguistic Area.
Genetic relations with other families
The Mixe–Zoque languages have been included in several long-range classification proposals, e.g. in Edward Sapir's "Mexican Penutian" branch of his proposed Penutian linguistic superfamily, or as part of the Macro-Mayan proposal by Norman McQuown which groups together the Mixe–Zoque languages with the Mayan languages and the Totonacan languages. At the end of the last century, Lyle Campbell dismissed most earlier comparisons as methodologically flawed, but considered the Macro-Mayan proposal the most promising, but yet unproven hypothesis. In two more recently published articles, evidence is presented for linking the Mixe–Zoque languages either with the Totonacan languages ("Totozoquean"), or with the Mayan languages.
Classification
Wichmann (1995)
The following internal classification of the Mixe–Zoquean languages is by Søren Wichmann (1995).
Proto-Mixe-Zoquean
Proto-Mixean
Tapachultec
Sayula Popoluca (Sayultec)
Oluta Popoluca (Olutec)
Proto-Oaxaca Mixean
North Highland Mixe
South Highland Mixe
Midland Mixe, Lowland Mixe
Proto-Zoquean
Proto-Gulf Zoquean
Chimalapa Zoque
Chiapas Zoque
Kaufman & Justeson (2000)
The following internal classification of the Mixe–Zoquean languages is by Kaufman & Justeson (2000), cited in Zavala (2000). Individual languages are marked by italics.
Mixe-Zoque
Mixe
Tapachultec
Olutec
Mixe Proper
Sayultec
(branch)
Lowland Mixe
Highland Mixe
Zoque
Gulf Zoquean
Soteapan Zoque (Sierra Popoluca)
(branch)
Texistepec Zoque
Ayapanec Zoque
Zoque
Chiapas Zoque
Oaxaca Zoque
Justeson and Kaufman also classify the language represented in the Epi-Olmec script as an early Zoquean language, although this claim is disputed by Andrew Robinson.
Phonology
The phoneme inventory of Proto-Mixe–Zoquean as reconstructed by Wichmann (1995) can be seen to be relatively simple, but many of the modern languages have been innovative; some have become quite vowel rich, and some also have introduced a fortis–lenis contrast in the stop series. Although the lateral phoneme is found in a few words in some of the languages, these are probably of onomatopoeic origin.
has also been reconstructed .
Syllables
Mixe–Zoquean languages are characterized by complex syllabic nuclei made up of combinations of vowels together with the glottal stop and in the proto-language. Complex syllable-final consonant clusters are also typical in the daughter languages and can be reconstructed for the proto-language.
Proto-Mixe–Zoquean syllable nuclei could be either:
V – short vowel
V' – short vowel with glottal stop
VV – long vowel
V'V – long vowel with medial glottal stop
VV' – long vowel with final glottal stop
Vh – short vowel with h
Grammatical features
The Mixe–Zoquean languages are head-marking and polysynthetic, with morphologically complex verbs and simple nouns. Grammatical subjects as well as objects are marked in the verb. Ergative alignment is used, as well as direct–inverse systems triggered by animacy and topicality. In Mixe–Zoquean verbs, a morphological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wo basic clause-types, independent and dependent; verbs take different aspectual and personal affixes, depending on the type of clause in which they appear. There are two different sets of aspect-markers, one used in dependent clauses and another used in independent clauses. Three aspects are distinguished within each clause-type: incompletive, completive, and irrealis.
Ethnologue classification and SIL ISO-codes
Ethnologue still uses the earlier pre-Wichmann classification, based on surveys of mutual intelligibility and comparative work by William Wonderly, as a basis for their work. This classification is not used by historical linguists, and Lyle Campbell's authoritative 1997 presentation uses Wichmann's classification.
Mixe languages — an estimated 90,000 native speakers
Eastern Mixe — An estimated 72,000 native speakers
Dialects: Coatlán (mco), Istmo (mir), Quetzaltepec (pxm), Juquila (mxq), Mazatlán (mzl)
Veracruz Mixe — An estimated 4,000 native speakers
Dialects: Oluta (plo) nearly extinct – only 100 speakers, Sayula (pos)
Western Mixe
An estimated 10,000 native speakers
Dialects: Totontepec (mto), Tlahuitoltepec (mxp)
Zoque languages — an estimated 60,000 native speakers
Chiapas Zoque — An estimated 22,000 native speakers
Dialects: Copainalá (zoc), Rayón (zor), Francisco León (zos)
Oaxaca Zoque – An estimated 4,500 native speakers
Dialect: Chimalapa (zoh)
Veracruz Zoque — An estimated 30,000 native speakers
Dialects: Highland (poi), Texistepec (poq) nearly extinct – only 450 speakers, Tabasco (zoq) nearly extinct – only 40 speakers
Notes
References
Campbell, L., and T. Kaufman (1976), "A Linguistic Look at the Olmecs", American Antiquity, 41 pp. 80–89.
Justeson, John S., and Kaufman, Terrence, (1997),"A Newly Discovered Column in the Hieroglyphic Text on La Mojarra Stela 1: a Test of the Epi-Olmec Decipherment", Science, 07/11/97, Vol. 277 Issue 5323, p. 207.
Justeson, John S., and Kaufman, Terrence (2001) Epi-Olmec Hieroglyphic Writing and Texts.
Kaufman, Terrence, (2001) Nawa linguistic prehistory, published at website of the Mesoamerican Language Documentation Project
Brigham Young University press release on behalf of Brigham Young University archaeologist Stephen Houston and Yale University professor emeritus Michael Coe disputing Justeson/Kaufman findings.
External links
Mixe–Zoque language family
Language families
Mesoamerican languages
Indigenous languages of Mexico |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C%84%B8%20%EC%95%99%ED%97%AC%20%EC%9D%B4%EB%A6%AC%EB%B0%94%EB%A5%B4 | 호세 앙헬 이리바르 | 호세 앙헬 이리바르 코르타하레나(, 1943년 3월 1일 ~ )는 포플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전 축구 골키퍼이자 감독이다.
현역 시절 대부분을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보낸 그는, 바스크 연고 구단 소속으로 라 리가 18시즌을 치러 600번이 넘는 공식 경기에 출전해 2번의 주요 대회 우승을 거두었다.
이리바르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1964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과 1966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는데, 전자의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클럽 경력
이리바르는 기푸스코아 주 사라우츠 출신이다.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프로 1년차의 라 리가 3경기 만에, 그는 바스크 연고 구단의 붙박이 수문장으로 16년을 자리매김하였다. 그가 성인 무대 첫 발을 디딘 곳은 바스코니아로, 1961년 데뷔 당시 위성 구단이 아니던 시절, 바스코니아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 꺾었고, 이리바르는 훌륭한 활약으로 당시 역대 최고 이적료인 1M 페세타에 계약하게 되었다.
아틀레틱 입단 후, 카르멜로 세드룬이 1963년 10월에 부상으로 빠지자 이리바르가 기회를 잡아 코파 델 레이 2번을 우승하였고, 유벤투스에 패했지만 1976-77년 UEFA컵 결승까지 올라갔다. 1970-71 시즌, 그는 안방 10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는데, 그는 1,018분 동안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1971년 이리바르는 1-1로 비긴 아틀레틱 빌바오의 전 감독이 이끄는 로니 앨런의 웨스트브로미치 앨비언과 헌정 경기를 치렀는데, 그는 앞서 몇 주 전에 잉글랜드에서 같은 상대의 보비 호프 헌정 경기를 치렀었다. 그는 9년 뒤 37세의 나이로 모든 대회 도합 614번의 경기에 출전한 뒤 은퇴하였는데, 그는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세웠다. 그가 은퇴한 해 여름에, 또다른 거물 골키퍼 안도니 수비사레타가 선수단에 합류하였다. 이리바르는 유럽대항전 역대 최다 출장 기록도 지니고 있었지만, 2016년에 마르켈 수사에타가 그의 55경기 출장 기록을 돌파하였다.
국가대표팀 경력
이리바르는 1964년 3월 11일, 5-1로 이긴 아일랜드와의 1964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예선 최종전 안방 1차전에서 스페인 국가대표팀 신고식을 치렀고, 스페인은 아일랜드에 합계 7-1로 이겨 본선에 올라갔다. 그는 본선에서 주전 수문장이었고, 스페인은 안방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리바르는 1966년 FIFA 월드컵에서도 스페인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해 3번의 조별 리그 경기에 모두 출전하였다. 그는 10년 더 국가대표팀 주전 골키퍼를 맡았는데, 그가 출전한 마지막 경기는 1976년 4월 24일, 1-1로 비긴 서독과의 UEFA 유로 1976 예선전 경기로, 스페인은 이 대회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 경기를 끝으로 그는 49번의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하였다.
감독 경력
은퇴 후, 이리바르는 아틀레틱의 감독진에 합류하였는데, 골키퍼 코치 자리를 맡았다. 1983-84 시즌, 그는 2군 빌바오 아틀레틱을 지도하여 역대 최고 기록인 2부 리그 준우승을 기록했는데, 바로 위에 리그에 1군이 있어서 승격 자격은 없었다.
이리바르는 1986-87 시즌에 1군 감독을 맡았는데, 이 시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반기에 리그를 3부분으로 나누어 치렀는데, 아틀레틱은 강등권 '최상위'인 1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1988년을 기점으로, 그는 20년 가까이 바스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다.
플레이스타일
2010년 FIFA 월드컵 우승 주역 골키퍼인 이케르 카시야스는 이리바르를 자신의 역대 최고의 골키퍼 10인 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그를 "스페인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들 중 하나로 그는 골문 앞에 존재감 있는 자로, 상대를 움츠려들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리바르는 크기 단독으로만은 무의미하기에, 크기만이 특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체격적 능력을 위치 선정 능력과 결합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묘사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이리바르는 "초프의 쌍둥이"라는 별칭을 붙였는데, 골문을 지키는 능력 외에도, 지도력, 그리고 이탈리아인 골키퍼 디노 초프와의 비슷한 체격 조건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정치 활동
1976년 12월 5일,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경기를 앞두고, 이리바르와 이나시오 코르타바리아 레알 소시에다드 주장이 바스크 국기인 이쿠리냐를 경기장 중앙 원에 갖다놓았다. 이 사건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공공장소에 바스크 국기를 선보인 것인데, 당시 불법이었다.
이후, 그는 바스크 지역 정치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민족주의 정당 에리 바타수나의 창당 일원이었다.
수상
클럽
아틀레틱 빌바오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1969, 1972–73
UEFA컵 준우승: 1976–77
국가대표팀
스페인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1964
개인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 1969–70
각주
외부 링크
이리바르 - 아틀레틱 빌바오
아틀레틱 빌바오 감독 프로필
Eu-Football 스페인 국가대표팀 통계
1943년 출생
1964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
196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빌바오 아틀레틱의 축구 감독
아틀레틱 빌바오의 축구 감독
남자 축구 골키퍼
헌정 경기를 치른 축구 선수
아틀레틱 빌바오의 축구 선수
바스크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바스크주 출신 축구 선수
바스크 민족주의자
CD 바스코니아의 축구 선수
에리 바타수나 당원
라리가의 축구 감독
라리가의 축구 선수
살아있는 사람
사라우츠 출신
세군다 디비시온의 축구 감독
세군다 디비시온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스페인의 축구 감독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팀 선수 | https://en.wikipedia.org/wiki/Jos%C3%A9%20%C3%81ngel%20Iribar | José Ángel Iribar | José Ángel Iribar Kortajarena (born 1 March 1943), nicknamed El Chopo ("the Poplar"), is a Spanish retired football goalkeeper and manager.
Having played almost exclusively for Athletic Bilbao, he appeared in more than 600 official games for the club over the course of 18 La Liga seasons, winning two major titles.
Iribar represented the Spain national team in the 1964 Nations' Cup and the 1966 World Cup, winning the former tournament.
Club career
Iribar was born in Zarautz, Gipuzkoa. After only three La Liga games in his first professional season at Athletic Bilbao, he proceeded to become the Basques' undisputed starter for the following 16 seasons; his senior starts were made at CD Basconia in 1961, when the latter was still not the feeder team: they eliminated Atlético Madrid in the Copa del Generalísimo, and the keeper's stellar performance prompted his signing for a then-record 1 million pesetas.
At Athletic, Iribar profited from injury to Carmelo Cedrún in October 1963 and never looked back, winning two Spanish Cups and reaching the final of the 1976–77 UEFA Cup, lost to Juventus FC. During the 1970–71 campaign he kept a clean sheet at ten successive home games, which translated into a record of 1,018 minutes.
Iribar was awarded a benefit match in 1971, a 1–1 draw against West Bromwich Albion (the former club of Athletic's manager at the time, Ronnie Allen), having already played the same opponents a few weeks earlier in England for Bobby Hope's testimonial. He retired nine years later at 37, having played in 614 matches in all competitions (a club record by some margin), as another club great in the position, Andoni Zubizarreta, would arrive in the summer; he also held its appearance record in European competition until 2016, when his total of 55 was passed by Markel Susaeta.
Subsequently, Iribar joined Athletic's coaching staff, taking charge of the goalkeepers. In 1983–84 he coached the reserve team Bilbao Athletic, leading them to the second place in the second division, a best-ever, although they were not eligible for promotion.
Iribar also managed the first team in the 1986–87 season – for the only time, the league had a second stage divided in three groups, and Athletic 'won' the relegation section (ranking 13th overall). From 1988 and for over two decades, he was in charge of the Basque Country representative team.
International career
Iribar made his debut for Spain on 11 March 1964, in the first leg of the 1964 European Nations' Cup's last qualifying stage, a 5–1 home win against the Republic of Ireland (7–1 aggregate). He was the starter during the finals, and the nation emerged victorious on home soil.
Iribar also represented Spain at the 1966 FIFA World Cup, playing all three group stage matches. He retained his position for a further ten years; on 20 November 1974, in a UEFA Euro 1976 qualifier away to Scotland, he equalled the record of 46 caps held by fellow goalkeeper Ricardo Zamora, and overtook him the following 5 February at home to the same opponents. His 49th and final game was on 24 April 1976 in a 1–1 draw against West Germany in the quarter-finals of the same tournament; he missed the second leg, officially due to a finger injury, which he denied decades later amidst theories that he was dropped for his political views. Another goalkeeper, Luis Arconada, took his record in 1983.
Style of play
Spanish 2010 World Cup winning goalkeeper Iker Casillas included Iribar in his list of the ten greatest goalkeepers of all time, and described him as "one of the greatest keepers Spain has ever produced. He was a big presence in goal and had that ability to intimidate opponents. But it wasn't all about his size, which is useless on its own. He combined his physicality with terrific positioning." In Italy, the former was given the nickname "Zoff's twin", due to his goalkeeping ability, leadership and physical resemblance to Italian counterpart Dino Zoff.
Political views
On 5 December 1976, before a game against Real Sociedad, Iribar and the opposing captain, Inaxio Kortabarria, carried out the Ikurriña, the Basque flag, and placed it ceremonially on the centre-circle. This was the first public display of the flag since the death of Francisco Franco, but it was still illegal.
He subsequently became involved in Basque local politics, and was a founding member of the independentist and political arm of ETA terrorist group coalition Herri Batasuna.
International statistics
Honours
Athletic Bilbao
Copa del Generalísimo: 1969, 1972–73; runner-up 1965–66, 1966–67, 1976–77
UEFA Cup: runner-up 1976–77
Spain
UEFA European Championship: 1964
Individual
Ricardo Zamora Trophy: 1969–70
See also
List of Athletic Bilbao players (+200 appearances)
List of La Liga players (400+ appearances)
References
External links
Athletic Bilbao manager profile
1943 births
1964 European Nations' Cup players
1966 FIFA World Cup players
Athletic Bilbao B managers
Athletic Bilbao managers
Men's association football goalkeepers
Athletic Bilbao footballers
Basque Country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Basque nationalists
CD Basconia footballers
Herri Batasuna politicians
La Liga managers
La Liga players
Living people
People from Zarautz
Segunda División managers
Segunda División players
Spain men's international footballers
Spanish men's footballers
Spanish football managers
UEFA European Championship-winning players
Footballers from Gipuzkoa |
https://ko.wikipedia.org/wiki/%EB%B6%84%EC%84%9D%EB%B2%95 | 분석법 | 분석법(分析法) 또는 어세이()는 대상 개체(분석물질)의 존재, 양 또는 기능적 활성을 정성적으로 평가하거나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위한 의학, 약리학, 환경생물학, 분자생물학 실험실에서의 분석 방법이다. 분석물질은 생물체 또는 유기 샘플에서의 약물, 생화학 물질 또는 세포일 수 있다. 측정되는 대상은 분석물질(analyte), 측정물질(measurand), 분석대상이라고 한다. 분석법은 일반적으로 분석물질의 집약적인 특성을 측정하고 관련 측정 단위(예: 몰 농도, 밀도, 효소, 국제 단위의 기능적 활성, 표준과 비교한 효과의 정도 등)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분석에 외인성 반응물(시약)이 포함되는 경우, 표적의 양과 품질이 유일한 제한 요소가 되도록 그 양은 고정(또는 초과)으로 유지된다. 분석 결과의 차이는 해당 대상의 알려지지 않은 품질 또는 수량을 추론하는 데 사용된다. 일부 분석(예: 생화학적 분석)은 화학적 분석 및 적정과 유사할 수 있다. 그러나 분석은 일반적으로 구성이나 행동, 또는 둘 모두에서 본질적으로 더 복잡한 생물학적 물질 또는 현상을 포함한다. 따라서 분석 결과를 읽는 것은 시끄럽고 정확한 화학적 적정보다 해석에 더 큰 어려움을 수반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구세대 정성적 분석, 특히 생물학적 분석은 훨씬 더 총체적이고 덜 정량적일 수 있다(예: 개체군 내 유기체 또는 세포의 사망 또는 기능 장애, 또는 동물 그룹의 일부 신체 부위의 일부 설명적 변화를 계산).
분석은 현대 의학, 환경, 제약 및 법의학 기술의 일상적인 부분이 되었다. 다른 기업에서도 산업, 도로변 또는 현장 수준에서 이들을 확인할 수 있다. 높은 상업적 수요에 대한 분석은 전문 산업의 연구 및 개발 부문에서 잘 조사되었다. 그들은 또한 여러 세대에 걸쳐 발전과 정교함을 거쳤다. 어떤 경우에는 발명에 부여된 특허와 같은 지적 재산권 규정에 의해 보호된다. 이러한 산업 규모의 분석은 시설이 잘 갖추어진 실험실에서 분석 주문부터 분석 전 시료 처리(시료 수집, 필요한 조작, 예를 들어 분리를 위한 회전, 필요한 경우 분주, 저장, 검색, 피펫팅, 흡인 등). 분석물은 일반적으로 고처리량 자동 분석기에서 테스트되며 결과가 확인되어 주문 서비스 제공업체 및 최종 사용자에게 자동으로 반환된다. 이는 최종 사용자, 중앙 서버, 물리적 자동 분석기 기기 및 기타 자동 장치가 있는 여러 컴퓨터 터미널과 인터페이스하는 고급 실험실 정보학 시스템의 사용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일반 단계
분석은 사전 및 사후 분석 절차와 함께 수행되어야 하므로 결코 분리된 프로세스가 아니다. 통신 명령(분석 및 관련 정보 수행 요청)과 표본 자체의 처리(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수행되는 수집, 문서화, 운송 및 처리)는 모두 사전 분석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분석이 완료된 후 결과를 문서화하고 검증하고 전달해야 한다(분석 후 단계). 모든 다단계 정보 처리 및 전송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최종 결과 보고의 변동 및 오류에는 분석 자체에 고유한 것뿐만 아니라 분석 전 및 분석 후 절차에서 발생하는 오류도 포함된다.
분석 자체의 단계는 많은 관심을 받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많은 오류를 누적하는 것은 사전 분석 및 분석 후 절차인 사용자 사슬의 관심을 덜 받는 단계이다. 예를 들어, 의료 실험실 분석의 사전 분석 단계는 모든 실험실 오류의 32-75%를 기여할 수 있다.
분석은 매우 다양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단계를 포함한다.
탐지 시스템에 식별 가능하거나 측정 가능한 형태로 대상을 선택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시료 처리 및 조작. 이는 간단한 원심 분리 또는 세척 또는 여과 또는 일부 형태의 선택적 결합에 의한 포획을 포함하거나 표적을 수정하는 것을 포함할 수도 있다. 면역학적 분석에서 에피토프 검색 또는 표적을 조각으로 절단 질량 분석에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분석 전에 수행되는 여러 개별 단계가 있으며 사전 분석 처리라고 한다. 그러나 일부 조작은 분석 자체의 불가분의 일부일 수 있으므로 사전 분석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표적별 식별 원칙: 유사한 구성요소의 배경(소음)을 구별하고 생물학적 물질의 특정 특성을 통해 특정 표적 구성요소("분석물")를 구체적으로 식별한다. (예를 들어, PCR 분석에서 특정 올리고뉴클레오티드 프라이머는 표적에 고유한 특정 뉴클레오티드 서열을 기반으로 하는 염기쌍을 통해 표적을 식별한다).
신호(또는 표적) 증폭 시스템: 해당 분석물의 존재 및 양은 일반적으로 일부 신호 증폭 방법을 포함하는 검출 가능한 신호로 변환되어 노이즈와 쉽게 구별되고 측정될 수 있다. DNA 염기서열의 혼합물 중 PCR 분석에서 특정 표적만이 DNA 중합효소에 의해 수백만 카피로 증폭되어 다른 잠재적 구성요소에 비해 더 두드러진 구성요소로 식별될 수 있다. 때로는 분석물의 농도가 너무 커서 분석에 샘플 희석 또는 음성 증폭인 일종의 신호 감소 시스템이 포함될 수 있다.
신호 감지(및 해석) 시스템: 증폭된 신호를 정량적 또는 정성적 해석 가능한 출력으로 해독하는 시스템이다. 시각적 또는 수동 매우 조잡한 방법이거나 매우 정교한 전자 감지기일 수 있다.
신호 향상 및 노이즈 필터링: 위의 단계 중 일부 또는 전체에서 수행할 수 있다. 분석 중 단계/프로세스의 다운스트림이 많을수록 이전 프로세스의 노이즈를 전달하고 증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정교한 분석의 여러 단계에는 신호별 선명화/향상 배열 및 노이즈 감소의 다양한 수단이 포함될 수 있다. 필터링 장치. 이들은 단순히 좁은 대역 통과 광학 필터의 형태이거나, 비특이적 결합을 방지하는 결합 반응의 차단 시약 또는 배경 물체의 "자가형광"을 방지하는 형광 검출 시스템의 소광 시약의 형태일 수 있다.
분석 유형
측정 시간 및 횟수
분석이 단일 시점을 보는지 또는 여러 시점에서 취한 시간 측정 판독인지에 따라 분석은 다음과 같을 수 있다.
고정된 잠복기 후에 단일 측정이 수행되는 종말점 분석.
측정이 고정된 시간 간격에 걸쳐 여러 번 수행되는 운동 분석. 동역학 분석 결과는 수치적으로(예를 들어, 시간 경과에 따른 신호 변화율을 나타내는 기울기 매개변수로) 또는 그래픽으로(예를 들어, 각 시점에서 측정된 신호의 플롯으로) 시각화될 수 있다. 운동 분석의 경우 시간 경과에 따른 측정된 반응의 크기와 모양 모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고처리량 분석은 일반적으로 96, 384 또는 1536웰 마이크로플레이트 형식(고처리량 스크리닝)의 자동화 플랫폼에서 수행되는 종점 또는 운동 분석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많은 수의 화합물 또는 분석물을 테스트하거나 테스트 중인 자극 및 화합물에 대한 반응으로 기능적 생물학적 판독을 할 수 있다.
검출된 분석물 수
일반적인 분석은 다중화라고 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기본값인 단순 또는 단일 표적 분석이다.
다중 분석(Multiplex assays)은 단일 테스트에서 여러 분석 물질의 존재, 농도, 활성 또는 품질을 동시에 측정하는 데 사용된다. 다중 분석의 출현으로 면역학, 세포화학, 유전학/유전체학, 약동학 및 독성학을 포함한 많은 분야에서 빠르고 효율적인 샘플 테스트가 가능해졌다.
결과 유형
정성적 분석, 즉 일반적으로 합격 또는 불합격, 또는 양성 또는 음성 또는 정확한 양보다는 약간의 정성적 변화를 제공하는 분석이다.
반정량적 분석, 즉 물질의 양에 대한 정확한 수치보다는 대략적인 방식으로 판독값을 제공하는 분석. 일반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두 가지 결과보다 몇 가지 더 많은 계조가 있다. 그룹화 시약(혈액형 항원에 대한 항체)에 대한 RBC 응집을 기반으로 하는 혈액 그룹화 검사에 사용되는 1+에서 4+의 척도로 점수를 매긴다.
정량적 분석, 즉 샘플에 있는 물질의 양에 대한 정확하고 정확한 수치적 정량적 측정을 제공하는 분석이다. 예시는 흔한 유전성 출혈 질환인 폰 빌레브란트병에 대한 응고 검사 실험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의 예는 혈액 샘플에 존재하는 VWF의 양이 면역 분석에 의해 측정되는 VWF 항원 분석이다.
기능적 분석, 즉 활성 물질의 양보다는 활성 물질의 기능을 정량화하려는 분석이다. VWF 항원 분석의 기능적 대응물은 외인성 포르말린 고정 혈소판을 추가하고 고정 혈소판의 응집을 측정하면서 리스토세틴이라는 약물의 양을 점진적으로 증가시켜 환자 혈장에 존재하는 VWF의 기능적 활성을 측정하는 리스토세틴 보조인자 분석이다. 유사한 분석법이지만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리스토세틴 유도 혈소판 응집 또는 RIPA라고 하며, 이는 리스토세틴(외인성) 및 VWF(일반적으로 내인성)에 대한 반응으로 환자의 내인성 살아있는 혈소판의 반응을 테스트한다.
샘플 유형 및 방법
생물학적 분석(Bioassay): 반응이 살아있는 물체의 생물학적 활동인 경우 예는 다음과 같다.
생체 내, 전체 유기체(예: 쥐 또는 약물이 주사된 기타 대상)
생체 외 신체 부위(예: 개구리 다리)
생체 외 기관(예: 개 심장)
기관의 생체 외 부분(예: 장의 한 부분).
조직(예: 리물루스 용해물(limulus lysate))
세포(예: 혈소판)
리간드(보통 작은 분자)가 수용체(보통 큰 단백질)에 결합할 때 리간드 결합 분석.
반응이 항원 항체 결합형 반응인 경우 면역검정.
신호 증폭
효소 분석: 효소는 기질의 손실 또는 제품 제조가 특정 파장 또는 빛 또는 전기화학발광 또는 전기/산화환원과 같은 측정 가능한 속성을 가질 수 있는 색상 또는 흡광도를 가질 수 있는 경우 다수의 기질에서 고도로 반복되는 활성으로 테스트할 수 있다.
증폭을 사용할 수 있는 빛 감지 시스템. 광다이오드 또는 광전자 증배관 또는 냉각 전하 결합 장치에 의해 측정한다.
방사성 면역 분석 및 평형 투석 분석에 사용되는 방사성 동위원소 표지된 기질로 감마 계수기, X선 플레이트 또는 인광 영상기에서 증폭하여 검출할 수 있다.
신호가 아닌 DNA(또는 RNA) 표적을 증폭하는 중합효소 연쇄 반응 분석.
조합 방법. 분석은 감도를 개선하기 위해 위의 방법과 다른 증폭 방법의 조합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효소 결합 면역 분석 또는 EIA, 효소 결합 면역 흡착 분석 등이 있다.
탐지 방법 및 기술
콜로니 형성 또는 가상 콜로니 수: 예. 박테리아를 증식시키거나 세포를 증식시켜 그 개수를 세거나 크기 등으로 측정한다.
측광 / 분광 광도법 액체 시험 시료의 큐벳을 통해 고정된 경로 길이의 빛을 통과하면서 특정 파장의 빛의 흡광도를 측정하고 그 흡광도를 블랭크 및 표준물질과 비교하여 목표 화합물의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방출된 빛이 특정 가시광선 파장인 경우 이를 비색법이라고 하거나 특정 파장의 빛을 포함할 수 있다. 레이저를 사용하여 매우 특정한 파장의 광학 필터를 통해 감지되는 다른 특정 파장의 형광 신호를 방출한다. 빛의 투과율을 측정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혈소판 응집 반응 동안 덩어리 수 감소로 인해 부유 입자에 의해 생성된 액체의 불투명도 제거된다.
액체 샘플을 통과하는 직선 투과광의 불투명도가 광원을 가로질러 직선으로 배치된 검출기로 측정되는 탁도 측정법.
빛의 광선이 용액을 통과할 때 발생하는 광산란의 양을 측정하여 시료에 있는 입자의 크기 및 농도 및 크기 분포를 결정하는 네펠로메트리(Nephelometry) 기법.
반사 측정법 (일반적으로 건조한) 샘플 또는 반응물에서 반사된 빛의 색상을 평가할 때 예를 들어 스트립 소변 계량봉 분석의 자동 판독.
계수 분석: 예. 광학 Flow cytometric 셀 또는 입자 계수기 또는 coulter/임피던스 원리 기반 세포 계수기.
수동 또는 소프트웨어에 의한 이미지 분석을 포함하는 사진 분석:
세포계측법: 세포의 크기 통계가 이미지 프로세서에 의해 평가될 때.
전기 감지 예. 전류 측정법, 전압 전류법, 전기량 측정법과 관련된 많은 유형의 정량적 측정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다른 물리적 특성 기반 분석은 이하 내용 등이 있다.
삼투압계
점탄성 측정 예. 점도계, 탄성조영술(예: 혈전탄성조영술)
이온 선택 전극
증후군 검사
신뢰도
여러 분석이 동일한 목표를 측정할 때 분석의 특성과 방법론, 신뢰성 등에 따라 결과와 유용성이 비교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비교는 분석의 일반적인 품질 속성 연구를 통해 신뢰도를 증명받는다.
측정 원리(식별, 증폭 및 검출 포함), 검출의 동적 범위(일반적으로 표준 곡선의 선형성 범위), 분석 감도, 기능적 감도, 분석 특이성, 양성, 음성 예측 값, 전환 시간 즉 소요 시간 사전 분석 단계에서 마지막 사후 분석 단계(보고서 발송/전송)가 끝날 때까지 전체 과정을 완료해야 한다.
처리량, 즉 단위 시간당 수행된 분석 수(일반적으로 시간당으로 표시) 등 전문가를 위한 분석을 수행하는 조직 또는 실험실 목적 예 의학적 진단 및 예후, 환경 분석, 법의학 절차, 제약 연구 및 개발은 방법 검증, 정기적인 교정, 분석적 품질 관리, 숙련도 테스트, 테스트 인증, 테스트 허가를 포함하여 잘 규제된 품질 보증 절차를 거쳐야 하며 관련 규정의 적절한 인증을 문서화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서는 분석의 신뢰성을 확립하기 위해, 특히 분석 결과의 품질에 대해 법적으로 허용되고, 책임을 유지하고, 또한 고객이 분석을 상업적으로/전문적으로 사용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같이 보기
분석화학
MELISA
의약화학
적정
각주
외부 링크
This includes a detailed, technical explanation of contemporaneous metallic ore assay techniques.
생화학
실험 기술
적정 | https://en.wikipedia.org/wiki/Assay | Assay | An assay is an investigative (analytic) procedure in laboratory medicine, mining, pharmacology, environmental biology and molecular biology for qualitatively assessing or quantitatively measuring the presence, amount, or functional activity of a target entity. The measured entity is often called the analyte, the measurand, or the target of the assay. The analyte can be a drug, biochemical substance, chemical element or compound, or cell in an organism or organic sample. An assay usually aims to measure an analyte's intensive property and express it in the relevant measurement unit (e.g. molarity, density, functional activity in enzyme international units, degree of effect in comparison to a standard, etc.).
If the assay involves exogenous reactants (the reagents), then their quantities are kept fixed (or in excess) so that the quantity and quality of the target are the only limiting factors. The difference in the assay outcome is used to deduce the unknown quality or quantity of the target in question. Some assays (e.g., biochemical assays) may be similar to chemical analysis and titration. However, assays typically involve biological material or phenomena that are intrinsically more complex in composition or behavior, or both. Thus, reading of an assay may be noisy and involve greater difficulties in interpretation than an accurate chemical titration. On the other hand, older generation qualitative assays, especially bioassays, may be much more gross and less quantitative (e.g., counting death or dysfunction of an organism or cells in a population, or some descriptive change in some body part of a group of animals).
Assays have become a routine part of modern medical, environmental, pharmaceutical, and forensic technology. Other businesses may also employ them at the industrial, curbside, or field levels. Assays in high commercial demand have been well investigated in research and development sectors of professional industries. They have also undergone generations of development and sophistication. In some cases, they are protected by intellectual property regulations such as patents granted for inventions. Such industrial-scale assays are often performed in well-equipped laboratories and with automated organization of the procedure, from ordering an assay to pre-analytic sample processing (sample collection, necessary manipulations e.g. spinning for separation, aliquoting if necessary, storage, retrieval, pipetting, aspiration, etc.). Analytes are generally tested in high-throughput autoanalyzers, and the results are verified and automatically returned to ordering service providers and end-users. These are made possible through the use of an advanced laboratory informatics system that interfaces with multiple computer terminals with end-users, central servers, the physical autoanalyzer instruments, and other automata.
Etymology
According to Etymology Online, the verb assay means "to try, endeavor, strive, test the quality of"; from Anglo-French assaier, from assai (noun), from Old French essai, "trial". Thus the noun assay means "trial, test of quality, test of character" (from mid-14th century), from Anglo-French assai; and its meaning "analysis" is from the late 14th century.
For assay of currency coins this literally meant analysis of the purity of the gold or silver (or whatever the precious component) that represented the true value of the coin. This might have translated later (possibly after the 14th century) into a broader usage of "analysis", e.g., in pharmacology, analysis for an important component of a target inside a mixture—such as the active ingredient of a drug inside the inert excipients in a formulation that previously was measured only grossly by its observable action on an organism (e.g., a lethal dose or inhibitory dose).
General steps
An assay (analysis) is never an isolated process, as it must be accompanied with pre- and post-analytic procedures. Both the communication order (the request to perform an assay plus related information) and the handling of the specimen itself (the collecting, documenting, transporting, and processing done before beginning the assay) are pre-analytic steps. Similarly, after the assay is completed the results must be documented, verified and communicated—the post-analytic steps. As with any multi-step information handling and transmission system, the variation and errors in reporting final results entail not only those intrinsic to the assay itself but also those occurring in the pre-analytic and post-analytic procedures.
While the analytic steps of the assay itself get much attention, it is those that get less attention of the chain of users—the pre-analytic and post-analytic procedures—that typically accumulate the most errors; e.g., pre-analytic steps in medical laboratory assays may contribute 32–75% of all lab errors.
Assays can be very diverse, but generally involve the following general steps:
Sample processing and manipulation in order to selectively present the target in a discernible or measurable form to a discrimination/identification/detection system. It might involve a simple centrifugal separation or washing or filtration or capture by some form of selective binding or it may even involve modifying the target e.g. epitope retrieval in immunological assays or cutting down the target into pieces e.g. in Mass Spectrometry. Generally there are multiple separate steps done before an assay and are called preanalytic processing. But some of the manipulations may be inseparable part of the assay itself and will not thus be considered pre-analytic.
Target-specific discrimination/identification principle: to discriminate from background (noise) of similar components and specifically identify a particular target component ("analyte") in a biological material by its specific attributes. (e.g. in a PCR assay a specific oligonucleotide primer identifies the target by base pairing based on the specific nucleotide sequence unique to the target).
Signal (or target) amplification system: The presence and quantity of that analyte is converted into a detectable signal generally involving some method of signal amplification, so that it can be easily discriminated from noise and measured - e.g. in a PCR assay among a mixture of DNA sequences only the specific target is amplified into millions of copies by a DNA polymerase enzyme so that it can be discerned as a more prominent component compared to any other potential components. Sometimes the concentration of the analyte is too large and in that case the assay may involve sample dilution or some sort of signal diminution system which is a negative amplification.
Signal detection (and interpretation) system: A system of deciphering the amplified signal into an interpretable output that can be quantitative or qualitative. It can be visual or manual very crude methods or can be very sophisticated electronic digital or analog detectors.
Signal enhancement and noise filtering may be done at any or all of the steps above. Since the more downstream a step/process during an assay, the higher the chance of carrying over noise from the previous process and amplifying it, multiple steps in a sophisticated assay might involve various means of signal-specific sharpening/enhancement arrangements and noise reduction or filtering arrangements. These may simply be in the form of a narrow band-pass optical filter, or a blocking reagent in a binding reaction that prevents nonspecific binding or a quenching reagent in a fluorescence detection system that prevents "autofluorescence" of background objects.
Assay types based on the nature of the assay process
Time and number of measurements taken
Depending on whether an assay just looks at a single time point or timed readings taken at multiple time points, an assay may be:
An end point assay, in which a single measurement is performed after a fixed incubation period; or
A kinetic assay, in which measurements are performed multiple times over a fixed time interval. Kinetic assay results may be visualized numerically (for example, as a slope parameter representing the rate of signal change over time), or graphically (for example, as a plot of the signal measured at each time point). For kinetic assays, both the magnitude and shape of the measured response over time provide important information.
A high throughput assay can be either an endpoint or a kinetic assay usually done on an automated platform in 96-, 384- or 1536-well microplate formats (High Throughput Screening). Such assays are able to test large number of compounds or analytes or make functional biological readouts in response to a stimuli and/or compounds being tested.
Number of analytes detected
Depending on how many targets or analytes are being measured:
Usual assays are simple or single target assays which is usually the default unless it is called multiplex.
Multiplex assays are used to simultaneously measure the presence, concentration, activity, or quality of multiple analytes in a single test. The advent of multiplexing enabled rapid, efficient sample testing in many fields, including immunology, cytochemistry, genetics/genomics, pharmacokinetics, and toxicology.
Result type
Depending on the quality of the result produced, assays may be classified into:
Qualitative assays, i.e. assays which generally give just a pass or fail, or positive or negative or some such sort of only small number of qualitative gradation rather than an exact quantity.
Semi-quantitative assays, i.e. assays that give the read-out in an approximate fashion rather than an exact number for the quantity of the substance. Generally they have a few more gradations than just two outcomes, positive or negative, e.g. scoring on a scale of 1+ to 4+ as used for blood grouping tests based on RBC agglutination in response to grouping reagents (antibody against blood group antigens).
Quantitative assays, i.e. assays that give accurate and exact numeric quantitative measure of the amount of a substance in a sample. An example of such an assay used in coagulation testing laboratories for the most common inherited bleeding disease - Von Willebrand disease is VWF antigen assay where the amount of VWF present in a blood sample is measured by an immunoassay.
Functional assays, i.e. an assay that tries to quantify functioning of an active substance rather than just its quantity. The functional counterpart of the VWF antigen assay is Ristocetin Cofactor assay, which measures the functional activity of the VWF present in a patients plasma by adding exogenous formalin-fixed platelets and gradually increasing quantities of drug named ristocetin while measuring agglutination of the fixed platelets. A similar assay but used for a different purpose is called Ristocetin Induced Platelet Aggregation or RIPA, which tests response of endogenous live platelets from a patient in response to Ristocetin (exogenous) & VWF (usually endogenous).
Sample type and method
Depending on the general substrate on which the assay principle is applied:
Bioassay: when the response is biological activity of live objects. Examples include
in vivo, whole organism (e.g. mouse or other subject injected with a drug)
ex vivo body part (e.g. leg of a frog)
ex vivo organ (e.g. heart of a dog)
ex vivo part of an organ (e.g. a segment of an intestine).
tissue (e.g. limulus lysate)
cell (e.g. platelets)
Ligand binding assay when a ligand (usually a small molecule) binds a receptor (usually a large protein).
Immunoassay when the response is an antigen antibody binding type reaction.
Signal amplification
Depending on the nature of the signal amplification system assays may be of numerous types, to name a few:
Enzyme assay: Enzymes may be tested by their highly repeating activity on a large number of substrates when loss of a substrate or the making of a product may have a measurable attribute like color or absorbance at a particular wavelength or light or Electrochemiluminescence or electrical/redox activity.
Light detection systems that may use amplification e.g. by a photodiode or a photomultiplier tube or a cooled charge coupled device.
Radioisotope labeled substrates as used in radioimmunoassays and equilibrium dialysis assays and can be detected by the amplification in Gamma counters or X-ray plates, or phosphorimager
Polymerase Chain Reaction Assays that amplify a DNA (or RNA) target rather than the signal
Combination Methods Assays may utilize a combination of the above and other amplification methods to improve sensitivity. e.g. Enzyme-linked immunoassay or EIA, enzyme linked immunosorbent assay.
Detection method or technology
Depending on the nature of the Detection system assays can be based on:
Colony forming or virtual colony count: e.g. by multiplying bacteria or proliferating cells.
Photometry / spectrophotometry When the absorbance of a specific wavelength of light while passing through a fixed path-length through a cuvette of liquid test sample is measured and the absorbance is compared with a blank and standards with graded amounts of the target compound. If the emitted light is of a specific visible wavelength it may be called colorimetry, or it may involve specific wavelength of light e.g. by use of laser and emission of fluorescent signals of another specific wavelength which is detected via very specific wavelength optical filters.
Transmittance of light may be used to measure e.g. clearing of opacity of a liquid created by suspended particles due to decrease in number of clumps during a platelet agglutination reaction.
Turbidimetry when the opacity of straight-transmitted light passing through a liquid sample is measured by detectors placed straight across the light source.
Nephelometry where a measurement of the amount of light scattering that occurs when a beam of light is passed through the solution is used to determine size and/or concentration and/or size distribution of particles in the sample.
Reflectometry When color of light reflected from a (usually dry) sample or reactant is assessed e.g. the automated readings of the strip urine dipstick assays.
Viscoelastic measurements e.g. viscometry, elastography (e.g. thromboelastography)
Counting assays: e.g. optic Flow cytometric cell or particle counters, or coulter/impedance principle based cell counters
Imaging assays, that involve image analysis manually or by software:
Cytometry: When the size statistics of cells is assessed by an image processor.
Electric detection e.g. involving amperometry, Voltammetry, coulometry may be used directly or indirectly for many types of quantitative measurements.
Other physical property based assays may use
Osmometer
Viscometer
Ion Selective electrodes
Syndromic testing
Assay types based on the targets being measured
DNA
Assays for studying interactions of proteins with DNA include:
DNase footprinting assay
Filter binding assay
Gel shift assay
Protein
Bicinchoninic acid assay (BCA assay)
Bradford protein assay
Lowry protein assay
Secretion assay
RNA
Nuclear run-on
Ribosome profiling
Cell counting, viability, proliferation or cytotoxicity assays
A cell-counting assay may determine the number of living cells, the number of dead cells, or the ratio of one cell type to another, such as enumerating and typing red versus different types of white blood cells. This is measured by different physical methods (light transmission, electric current change). But other methods use biochemical probing cell structure or physiology (stains). Another application is to monitor cell culture (assays of cell proliferation or cytotoxicity).
A cytotoxicity assay measures how toxic a chemical compound is to cells.
MTT assay
Cell Counting Kit-8 (WST-8 based cell viability assay)
SRB (Sulforhodamine B) assay
CellTiter-Glo® Luminescent Cell Viability Assay
Cell counting instruments and methods: CASY cell counting technology, Coulter counter, Electric cell-substrate impedance sensing
Cell viability assays: resazurin method, ATP test, Ethidium homodimer assay (detect dead or dying cells), Bacteriological water analysis, Clonogenic assays, ...
Environmental or food contaminants
Bisphenol F
Aquatic toxicity tests
Surfactants
An MBAS assay indicates anionic surfactants in water with a bluing reaction.
Other cell assays
Many cell assays have been developed to assess specific parameters or response of cells (biomarkers, cell physiology). Techniques used to study cells include :
reporter assays using i.e. Luciferase, calcium signaling assays using Coelenterazine, CFSE or Calcein
Immunostaining of cells on slides by Microscopy (ImmunoHistoChemistry or Fluorescence), on microplates by photometry including the ELISpot (and its variant FluoroSpot) to enumerate B-Cells or antigen-specific cells, in solution by Flow cytometry
Molecular biology techniques such as DNA microarrays, in situ hybridization, combined to PCR, Computational genomics, and Transfection; Cell fractionation or Immunoprecipitation
Migration assays, Chemotaxis assay
Secretion assays
Apoptosis assays such as the DNA laddering assay, the Nicoletti assay, caspase activity assays, and Annexin V staining
Chemosensitivity assay measures the number of tumor cells that are killed by a cancer drug
Tetramer assay detect the presence of antigen specific T-cells
Gentamicin protection assay or survival assay or invasion assay to assess ability of pathogens (bacteria) to invade eukaryotic cells
Metastasis Assay
Petrochemistry
Crude oil assay
Virology
The HPCE-based viral titer assay uses a proprietary, high-performance capillary electrophoresis system to determine baculovirus titer.
The Trofile assay is used to determine HIV tropism.
The viral plaque assay is to calculate the number of viruses present in a sample. In this technique the number of viral plaques formed by a viral inoculum is counted, from which the actual virus concentration can be determined.
Cellular secretions
A wide range of cellular secretions (say, a specific antibody or cytokine) can be detected using the ELISA technique. The number of cells which secrete those particular substances can be determined using a related technique, the ELISPOT assay.
Drugs
Testing for Illegal Drugs
Radioligand binding assay
Quality
When multiple assays measure the same target their results and utility may or may not be comparable depending on the natures of the assay and their methodology, reliability etc. Such comparisons are possible through study of general quality attributes of the assays e.g. principles of measurement (including identification, amplification and detection), dynamic range of detection (usually the range of linearity of the standard curve), analytic sensitivity, functional sensitivity, analytic specificity, positive, negative predictive values, turn around time i.e. time taken to finish a whole cycle from the preanalytic steps till the end of the last post analytic step (report dispatch/transmission), throughput i.e. number of assays done per unit time (usually expressed as per hour) etc. Organizations or laboratories that perform Assays for professional purposes e.g. medical diagnosis and prognostics, environmental analysis, forensic proceeding, pharmaceutical research and development must undergo well regulated quality assurance procedures including method validation, regular calibration, analytical quality control, proficiency testing, test accreditation, test licensing and must document appropriate certifications from the relevant regulating bodies in order to establish the reliability of their assays, especially to remain legally acceptable and accountable for the quality of the assay results and also to convince customers to use their assay commercially/professionally.
List of BioAssay databases
Bioactivity databases
Bioactivity databases correlate structures or other chemical information to bioactivity results taken from bioassays in literature, patents, and screening programs.
Protocol databases
Protocol databases correlate results from bioassays to their metadata about experimental conditions and protocol designs.
See also
Analytical chemistry
MELISA
Multiplex (assay)
Pharmaceutical chemistry
Titration
References
External links
This includes a detailed, technical explanation of contemporaneous metallic ore assay techniques.
Biochemistry
Laboratory techniques
Titration |
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B%A5%B4%EC%8A%A4%ED%82%A4%20%EA%B3%A0%EC%A0%95%EC%A0%90%20%EC%A0%95%EB%A6%AC | 타르스키 고정점 정리 | 순서론에서 타르스키 고정점 정리() 또는 크나스터-타르스키 정리()는 완비 격자에서 자신으로 가는 단조함수의 고정점이 존재한다는 정리이다.
이는 이론 컴퓨터 과학의 형식 의미론 및 추상 해석 분야에서 중요한 정리이다.
정의
완비 격자 과 단조함수 가 주어졌다고 하자. 타르스키 고정점 정리에 따르면, 의 고정점의 집합
역시 완비 격자를 이룬다. (그러나, 가 의 부분 격자일 필요는 없다. 즉, 에서의 상한과 하한은 에서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의 최대 고정점과 최소 고정점이 존재하며, 특히 는 적어도 하나의 고정점을 갖는다. 또한, 의 최대·최소 고정점은 각각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증명
타르스키를 따라, 다음 순서대로 증명한다.
(가) 는 의 최대 고정점이다.
(나) 는 의 최소 고정점이다.
(다) 는 완비 격자이다.
명제 (가)의 증명. 라고 하자. 임의의 에 대하여, 이므로, 이다. 따라서 이다. 반대로, 이므로, 의 정의에 따라 이다. 따라서 이다. 따라서, 은 의 고정점이다. 모든 고정점은 에 속하므로, 은 의 최대 고정점이다.
명제 (나)의 증명. 의 반대 격자 를 생각하자. 역시 완비 격자를 이루며, 는 위에서도 단조함수이다. 따라서 에 대하여 명제 (가)가 성립한다. 이는 정확히 에 대한 명제 (나)와 일치한다.
명제 (다)의 증명. 가 의 임의의 부분 집합이라고 하자. 에서 의 상한이 존재함을 보이면 충분하다. 의 에서의 상한 를 생각하자. 그렇다면 구간 는 의 상계의 집합이며, 완비 격자를 이룬다 (이는 부분 격자이기도 하지만, 부분 완비 격자가 아닐 수 있다). 임의의 에 대하여 이므로, 이다. 에 대하여, 만약 라면, 이다. 따라서, 를 위의 함수 로 여길 수 있다. 명제 (나)에 따라, 의 최소 고정점이 존재한다. 이는 의 고정점이며, 의 상계가 되는 가장 작은 의 고정점이다. 다시 말해, 의 에서의 상한이다.
고정점 집합이 부분 격자가 아닌 경우
고정점 집합은 완비 격자이지만, 부분 격자가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 순서 집합을 생각하자.
그렇다면, 은 완비 격자를 이룬다. 이제 이며
라고 하자. 는 위의 단조함수이며, 와 은 의 고정점이지만, 는 의 고정점이 아니다. (와 의 에서의 상한은 가 아닌 이다.) 따라서, 는 의 부분 격자가 아니다.
귀결
완비 격자는 공집합일 수 없으므로, 이 정리는 상기한 에 적어도 한개의 고정점이 있음을, 나아가서 최소 고정점이 있음을 보장한다.
조건을 추가하여 임의의 부분 순서 집합에 대하여 유사한 결과를 증명할 수 있다. 이를 동역학계 이론에 적용하여 프랙탈의 일종인 반복함수계(iterated function system) 연구에 사용할 수 있다.
모든 증가수열 에 대해 이면, 의 최소 고정점은 이며, 이는 정리의 구성적 버전(Kleene fixed-point theorem)을 제공한다.
이론 컴퓨터 과학에서, 단조함수에 대한 최소 고정점 정리는 프로그램 의미론을 정의하는 데 사용된다. 이 경우 특히 격자 L을 특정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들을 모은 것, 즉 멱집합 격자로 가정하는 특수한 케이스에 대하여 집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나서 f의 고정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가지는 최소의 집합을 찾아낸다.
역
반대로, 모든 단조함수의 고정점이 존재하는 격자는 완비 격자이다. 즉, 타르스키 고정점 정리는 완비 격자의 정의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단조함수가 고정점이 존재하는 부분 순서 집합은 완비 격자일 필요가 없다.
역의 증명
격자 이 완비 격자 위에 항상 고정점이 없는 단조함수 를 구성하면 족하다. 두 부분 집합 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을 생각하자.
(라) 는 정렬 전순서 집합이다.
(마) 의 반대 순서 집합 는 정렬 전순서 집합이다.
(바) 임의의 및 에 대하여,
(사) 동시에 의 상계이자 의 하계인 의 원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와 가 위 조건들을 만족시킨다면, 함수
는 단조함수이며, 고정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건 (라)~(사)를 만족시키는 와 를 찾는 것으로 족하다. 모든 부분 집합의 상한이 존재하는 부분 순서 집합은 완비 격자이므로, 상한이 없는 의 부분 집합 가 존재한다. 편의상 그 크기 가 최소라고 하자. 이 격자이므로, 은 0이거나 무한 기수이다. 이제, 임의의 순서수 에 대하여, 의 크기는 미만이므로, 상한
이 존재한다. 는 단조 초한 점렬이지만, 순단조가 아닐 수 있다. 중복된 항을 제거하여 순단조 초한 점렬 로 만들자 (길이가 인 것은 의 최소성을 사용하여 보일 수 있다). 이 경우, 는 정렬 전순서 집합이다. 만약 의 상한이 존재한다면, 이는 의 상한이 되어 모순이 일어난다. 따라서 의 상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 상계들로 구성된 순감소 초한 점렬들의 집합 위에 다음과 같은 부분 순서를 주자.
즉, 끝에 항을 추가하면 더 큰 초한 점렬을 얻는다. 초른 보조정리에 따라, 이 부분 순서에 따른 극대 원소 가 존재한다 (가 기수일 필요는 없다). 의 반대 순서 집합 은 정렬 전순서 집합이다. 만약 가 존재한다면, 역시 의 상계이다. 의 상한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 의 상계 가 존재한다. 이 경우, 는 의 상계이며, 이다. 이는 의 극대성과 모순이다. 따라서, 의 하한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와 에 대하여 조건 (사)를 증명하는 일만 남았다. 귀류법을 사용하여, 이 의 상계이자 의 하계라고 하자. 그렇다면, 의 극대성에 따라 이다. 따라서 는 의 하한이며, 이는 모순이다.
일반화
격자 의, 공집합이 아닌 두 부분 격자 ,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항 관계를 정의하자.
특히, 만약 이라면, 임의의 에 대하여, 인 이 존재하며, 마찬가지로 임의의 에 대하여, 인 이 존재한다. 즉, 이며 이다. 이 이항 관계는 공집합이 아닌 부분 격자의 집합 위의 부분 순서를 이룬다. 의 원소는 자연스럽게 의 부분 격자로 여길 수 있다. 이 경우, 부분 격자의 순서는 원소의 순서를 확장한다. 따라서, 아래의 정리는 타르스키 고정점 정리를 일반화한다.
다음이 주어졌다고 하자.
완비 격자
단조함수 . 여기서 은 의 부분 완비 격자의, 위에서 정의한 순서에 따른 부분 순서 집합이다. (부분 완비 격자는 완비 격자인 부분 격자보다 더 강한 개념이다. 전자는 모든 상한과 하한이 원래 격자와 일치하지만, 후자는 모든 유한 집합의 상한·하한의 일치만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의 고정점 집합
은 완비 격자를 이룬다. 또한, 의 최대·최소 고정점은 다음과 같다.
일반화의 증명
타르스키 고정점 정리의 증명과 유사하게, 다음 네 명제를 보인다. 이들 가운데 명제 (아)와 (자), 명제 (차)와 (카)는 서로 쌍대이므로 하나씩만 증명하여도 좋다.
(아) 에 대하여, 은 의 최대 고정점이다.
(자) 에 대하여, 은 의 최소 고정점이다.
(차) 모든 의 에서의 상한이 존재한다.
(카) 모든 의 에서의 하한이 존재한다.
명제 (아)의 증명. 이므로, 이면 충분하다. 임의의 가 주어졌다고 하자. 의 정의에 따라, 이며 라고 하자. 이며 가 단조함수이므로, 이며 라고 하자. 이 부분 완비 격자이므로, 이다. 임의의 에 대하여 이므로, 이다. 의 단조성에 따라, 인 가 존재한다. 즉, 이며, 따라서 이다. 따라서, 은 의 고정점이 맞다.
명제 (차)의 증명. 가 의 에서의 상한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은 완비 격자를 이룬다. 임의의 에 대하여, 이며 이므로, 인 가 존재한다. 이 경우, 이며 이다. 따라서, 의 단조성에 의하여, 만약 라면, 은 공집합이 아니다. 또한, 는 의 부분 완비 격자이다. 따라서, 는 의 부분 완비 격자를 이룬다. 즉, 는 단조함수 를 정의한다. 명제 (자)에 따라, 의 최소 고정점이 존재하며, 이는 의 에서의 상한이다.
역사
1927년 브로니스와프 크나스터()와 알프레트 타르스키가 멱집합 격자 위 단조함수의 고정점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타르스키 고정점 정리의 오늘날 형태는 1939년 타르스키가 도입하였으며, 1939년~1942년 동안 타르스키의 몇몇 공개 강의에서 소개되었다. 타르스키 고정점 정리의 역은 앤 모렐()이 증명하였다. 타르스키 고정점 정리의 다중 값 일반화는 저우린()이 초모듈러 게임()의 내시 균형의 존재를 보이기 위하여 증명 및 사용하였다.
같이 보기
고정점 정리
완비 격자
참고 문헌
외부 링크
격자 이론
고정점 정리 | https://en.wikipedia.org/wiki/Knaster%E2%80%93Tarski%20theorem | Knaster–Tarski theorem | In the mathematical areas of order and lattice theory, the Knaster–Tarski theorem, named after Bronisław Knaster and Alfred Tarski, states the following:
Let (L, ≤) be a complete lattice and let f : L → L be an order-preserving (monotonic) function w.r.t. ≤ . Then the set of fixed points of f in L forms a complete lattice under ≤ .
It was Tarski who stated the result in its most general form, and so the theorem is often known as Tarski's fixed-point theorem. Some time earlier, Knaster and Tarski established the result for the special case where L is the lattice of subsets of a set, the power set lattice.
The theorem has important applications in formal semantics of programming languages and abstract interpretation, as well as in game theory.
A kind of converse of this theorem was proved by Anne C. Davis: If every order-preserving function f : L → L on a lattice L has a fixed point, then L is a complete lattice.
Consequences: least and greatest fixed points
Since complete lattices cannot be empty (they must contain a supremum and infimum of the empty set), the theorem in particular guarantees the existence of at least one fixed point of f, and even the existence of a least fixed point (or greatest fixed point). In many practical cases, this is the most important implication of the theorem.
The least fixpoint of f is the least element x such that f(x) = x, or, equivalently, such that f(x) ≤ x; the dual holds for the greatest fixpoint, the greatest element x such that f(x) = x.
If f(lim xn) = lim f(xn) for all ascending sequences xn, then the least fixpoint of f is lim f n(0) where 0 is the least element of L, thus giving a more "constructive" version of the theorem. (See: Kleene fixed-point theorem.) More generally, if f is monotonic, then the least fixpoint of f is the stationary limit of f α(0), taking α over the ordinals, where f α is defined by transfinite induction: f α+1 = f (f α) and f γ for a limit ordinal γ is the least upper bound of the f β for all β ordinals less than γ. The dual theorem holds for the greatest fixpoint.
For example, in theoretical computer science, least fixed points of monotonic functions are used to define program semantics, see for an example. Often a more specialized version of the theorem is used, where L is assumed to be the lattice of all subsets of a certain set ordered by subset inclusion. This reflects the fact that in many applications only such lattices are considered. One then usually is looking for the smallest set that has the property of being a fixed point of the function f. Abstract interpretation makes ample use of the Knaster–Tarski theorem and the formulas giving the least and greatest fixpoints.
The Knaster–Tarski theorem can be used to give a simple proof of the Cantor–Bernstein–Schroeder theorem.
Weaker versions of the theorem
Weaker versions of the Knaster–Tarski theorem can be formulated for ordered sets, but involve more complicated assumptions. For example:
Let L be a partially ordered set with a least element (bottom) and let f : L → L be an monotonic function. Further, suppose there exists u in L such that f(u) ≤ u and that any chain in the subset has a supremum. Then f admits a least fixed point.
This can be applied to obtain various theorems on invariant sets, e.g. the Ok's theorem:
For the monotone map F : P(X ) → P(X ) on the family of (closed) nonempty subsets of X, the following are equivalent: (o) F admits A in P(X ) s.t. , (i) F admits invariant set A in P(X ) i.e. , (ii) F admits maximal invariant set A, (iii) F admits the greatest invariant set A.
In particular, using the Knaster-Tarski principle one can develop the theory of global attractors for noncontractive discontinuous (multivalued) iterated function systems. For weakly contractive iterated function systems the Kantorovitch fixpoint theorem (known also as Tarski-Kantorovitch fixpoint principle) suffices.
Other applications of fixed-point principles for ordered sets come from the theory of differential, integral and operator equations.
Proof
Let us restate the theorem.
For a complete lattice and a monotone function on L, the set of all fixpoints of f is also a complete lattice , with:
as the greatest fixpoint of f
as the least fixpoint of f.
Proof. We begin by showing that P has both a least element and a greatest element. Let D = {x | x ≤ f(x)} and x ∈ D (we know that at least 0L belongs to D). Then because f is monotone we have f(x) ≤ f(f(x)), that is f(x) ∈ D.
Now let (u exists because D ⊆ L and L is a complete lattice). Then for all x ∈ D it is true that x ≤ u and f(x) ≤ f(u), so x ≤ f(x) ≤ f(u). Therefore, f(u) is an upper bound of D, but u is the least upper bound, so u ≤ f(u), i.e. u ∈ D. Then f(u) ∈ D (because f(u) ≤ f(f(u))) and so f(u) ≤ u from which follows f(u) = u. Because every fixpoint is in D we have that u is the greatest fixpoint of f.
The function f is monotone on the dual (complete) lattice . As we have just proved, its greatest fixpoint exists. It is the least fixpoint of L, so P has least and greatest elements, that is more generally, every monotone function on a complete lattice has a least fixpoint and a greatest fixpoint.
For a, b in L we write [a, b] for the closed interval with bounds a and b: {x ∈ L | a ≤ x ≤ b}. If a ≤ b, then [a, b], ≤ is a complete lattice.
It remains to be proven that P is a complete lattice. Let , W ⊆ P and . We show that f([w, 1L]) ⊆ [w, 1L]. Indeed, for every x ∈ W we have x = f(x) and since w is the least upper bound of W, x ≤ f(w). In particular w ≤ f(w). Then from y ∈ [w, 1L] follows that w ≤ f(w) ≤ f(y), giving f(y) ∈ [w, 1L] or simply f([w, 1L]) ⊆ [w, 1L]. This allows us to look at f as a function on the complete lattice [w, 1L]. Then it has a least fixpoint there, giving us the least upper bound of W. We've shown that an arbitrary subset of P has a supremum, that is, P is a complete lattice.
Computing a Tarski fixed-point
Chang, Lyuu and Ti present an algorithm for finding a Tarski fixed-point in a totally-ordered lattice, when the order-preserving function is given by a value oracle. Their algorithm requires queries, where L is the number of elements in the lattice. In contrast, for a general lattice (given as an oracle), they prove a lower bound of queries.
Deng, Qi and Ye present several algorithms for finding a Tarski fixed-point. They consider two kinds of lattices: componentwise ordering and lexicographic ordering. They consider two kinds of input for the function f: value oracle, or a polynomial function. Their algorithms have the following runtime complexity (where d is the number of dimensions, and Ni is the number of elements in dimension i):
The algorithms are based on binary search. On the other hand, determining whether a given fixed point is unique is computationally hard:
For d=2, for componentwise lattice and a value-oracle, the complexity of is optimal. But for d>2, there are faster algorithms:
Fearnley, Palvolgyi and Savani presented an algorithm using only queries. In particular, for d=3, only queries are needed.
Chen and Li presented an algorithm using only queries.
Application in game theory
Tarski's fixed-point theorem has applications to supermodular games. A supermodular game (also called a game of strategic complements) is a game in which the utilty function of each player has increasing differences, so the best response of a player is a weakly-increasing function of other players' strategies. For example, consider a game of competition between two firms. Each firm has to decide how much money to spend on research. In general, if one firm spends more on research, the other firm's best response is to spend more on research too. Some common games can be modeled as supermodular games, for example Cournot competition, Bertrand competition and Investment games.
Because the best-response functions are monotone, Tarski's fixed-point theorem can be used to prove the existence of a pure-strategy Nash equilibrium (PNE) in a supermodular game. Moreover, Topkis showed that the set of PNE of a supermodular game is a complete lattice, so the game has a "smallest" PNE and a "largest" PNE.
Echenique presents an algorithm for finding all PNE in a supermodular game. His algorithm first uses best-response sequences to find the smallest and largest PNE; then, he removes some strategies and repeats, until all PNE are found. His algorithm is exponential in the worst case, but runs fast in practice. Deng, Qi and Ye show that a PNE can be computed efficiently by finding a Tarski fixed-point of an order-preserving mapping associated with the game.
See also
Modal μ-calculus
Notes
References
Further reading
External links
J. B. Nation, Notes on lattice theory.
An application to an elementary combinatorics problem: Given a book with 100 pages and 100 lemmas, prove that there is some lemma written on the same page as its index
Order theory
Fixed points (mathematics)
Fixed-point theorems
Theorems i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Articles containing proofs |
https://ko.wikipedia.org/wiki/%EC%84%A0%EC%95%84%EB%8B%B4%EC%9D%B8%EB%A5%98%EB%A1%A0 | 선아담인류론 | 선아담인류론(pre-Adamite hypothesis, pre-Adamite)은 지성적으로 현 인류와 다른 인류가 아담 이전에 존재했다는 창조론 중 하나이다. 아담이 첫 번째 사람이었다는 아브라함계 종교의 고전적 해석과는 차이가 있으나, 현대에 있어서는 널리 사용되는 해석 중 하나다.
초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이교도와 기독교도의 토론을 담고 있다. 이 책 12권의 10장과 18권의 40장은 각각 "세계가 수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역사의 거짓됨에 대하여"와, "십만년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집트인들의 지긋지긋한 거짓말"이라는 제목을 가진다. 이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와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세계의 기원과 역사가 서로 다른 것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랍비들과 교부들 역시 이러한 태도로, 세계가 오래되었다는 관점들을 이교 신화나 우화로 보고 그냥 무시해버렸다.
서기 900-1700년
초기 이슬람교에는 인류가 진과 힌의 후손이라는 믿음이 존재했다. 중세 이슬람의 전승은 진이 아담 이전의 존재였으며 인간과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각은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아담 이전에 다른 인류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9세기 중반에는 하나님이 여러 아담을 만들어 각 아담마다 5만년동안 세상의 지배자가 되게 하였다는 주장이 등장하였는데, 대부분의 이슬람교도는 이를 배척하였지만 이스마일파와 수피파에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븐 와흐쉬이야가 904년에 쓴 《나바테아의 농업Nabatean Agriculture》에서는 나바테아인을 위시한 아라비아 민족들이 이슬람에 반하는 바빌로니아의 문화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아담 이전에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아담의 부모는 인도에서 왔다는 주장이 실려있다.
유대인 시인인 유다 하레비는 1130년에서 1140년 사이에 《쿠자리Kuzari》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는 하자르의 왕이 유대인 랍비, 기독교인, 무슬림에게 무엇이 참된 종교인지 묻는 내용이 담겨있다. 여기서 왕은 수백만년의 역사를 가진 건축물을 가지고 있다는 인도인의 주장에 대한 생각을 묻는데, 랍비는 "그 족속이 역사적인 모순이 없는 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단일한 책이나 굳게 선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라며 자신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하며, 인도인들은 방종하고 믿을 수 없는 족속들이므로 그들의 말을 무시해도 좋다고 말한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하레비는 경전의 형태로 된 계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나바테아인들의 주장들을 거부하고, 헬라인들의 영원불멸한 세계에 대한 이론 역시 거부한다. 책의 결론에서 아담이 세계의 첫 사람이었다는 주장은 유지하나, "결국, 만일 율법의 신자가 물질의 영원성이나 이전에 많은 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믿도록 강요받는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세상이 어떤 한 순간에 창조되었으며 아담과 노아가 첫번째 인류였다는 믿음은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다"며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나바테아의 농업》에 실린 주장은 마이모니데스(1135-1204)의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The Guide for the Perplexed》에서도 반박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사비교인들의 주장이 유대인들의 문헌을 다신교적으로 해석하여 창작한 신화와 전설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가져오며 "그들은 아담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한 명의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간주하며, 그를 숭상하고 달의 사절이자 선지자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달을 숭배하게 하였다고 믿는다. 그리고 흙을 경작하는 방법에 대한 저작을 남겼다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마이모니데스는 아담이 인도에서 와서 바빌론으로 갔다는 주장을 적어두었다.
존 로저스John Rogers가 1578년에 남긴 기록을 통해 프리슬란트주의 종교 단체인 사랑의 가족Familia Caritatis 내에서 아담 이전의 인류에 대한 믿음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1591년에 유대인과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명의 아담을 창조했거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선아담인류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천년왕국설을 믿는 17세기의 프랑스인 이삭 라페레르는 선아담인류론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되는데, 1655년에 라틴어로 출판된 《선아담인류Prae-Adamitae》에서 그는 바울이 로마서 5장 12-14절에서 한 말을 두고 "만일 아담이 도덕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면 아담 자신이 따랐던 법규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 법규가 아담과 함께 시작되었다면, 아담 이전에 무법세계와 거기에 살았던 인류가 존재했어야만 한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라페레르에 의하면 두 번의 창조가 이루어졌는데, 첫번째로 이방인이 만들어진 뒤 히브리인들의 조상인 아담이 창조되었어야만 한다. 선아담인류의 존재는 카인이 아내를 취하고 아벨이 죽은 후 도시를 세웠다는 창세기의 기사에 대한 좋은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은 인종 이론은 프랑수아 베르니에가 《Journal des sçavans》에 기고한 "거주민의 인종 차이에 따른 지구의 새로운 분할A new division of the Earth, according to the different species or races of men who inhabit it "에서 인종을 4~5개로 나눈 1684년 4월 24일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의 친구 라페레르의 선아담인류론에 대한 신학계의 격렬한 반발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니에는 그의 기사를 익명으로 투고할 수 밖에 없었다.
계몽시대
계몽시대에는 선아담인류론이 인류의 기원에 대한 성경의 증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19세기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이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로부터 창세기의 첫 부분에 대한 인종차별적 해석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선아담인류론자들 중 일부는 카인이 가족을 버리고 "백인 몽골족"으로 묘사되는 열등한 족속에게 갔다거나, 카인이 열등한 선아담인류들중 하나와 결혼했다고 주장한다.
수피파
17세기 수피교단 중 하나인 카디리야의 유명한 신비주의자 술탄 바후 역시 이 이론을 지지했다. 그의 저작 중 하나에서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오 무함마드야, 내가 너희의 선조 아담을 창조하기 전에 한 아담을 창조하여 그에게 천년의 삶을 주었단다. 그리고 나는 만 오천명의 아담을 만들었는데 이들 모두에게 만년의 삶을 주었단다. 그리고 나서 너희의 아담을 창조하였단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선아담기는 일억 오천만 천년동안 지속되었다.
1800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종차별적 선아담인류론자들
19세기 유럽에서 선아담인류론은 유색인종과 백인이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인종주의자들에 의해 유색인종의 열등함을 논증하려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찰스 콜드웰, 조시아 C. 노트, 새뮤얼 조지 모턴과 같은 과학자들은 유색인종이 아담의 후예라는 관점을 거부했는데, 모턴은 선아담인류론을 두개골 계측법과 결합시켰다. 마이클 바쿤Michael Barku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사벨라 던컨은 1860년에 《성경과 과학이 말하는 아담 이전의 인간, 혹은 오래된 우리 행성과 그 거주민Pre-Adamite Man, Or, The Story of Our Old Planet and Its Inhabitants, Told by Scripture & Science》라는 책에서 지질학과 성경의 해석을 혼합하였다. 이 책은 성경의 사건들을 과학과 함께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수의 지질학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던컨은 아담 이전의 인류가 오늘날의 천사이며, 그들이 죄가 없었고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기 전까지 죄가 세계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가 재림할 때의 아담의 후손들처럼 그들이 천국으로 휴거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던컨은 또한 몇몇 천사들이 천국에서 타락하여 죄를 지어 쫓겨나 악마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던컨은 이러한 대변동이 지구의 지질에 상처를 냈다고 보았으며, 루이 아가시는 이 상처가 바로 빙하기로 선아담기와 현대를 구분하는 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미국 남북 전쟁 이후에 남부인들은 흑인이 열등하다는 그들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잘 받아들였다. 버크너 페인은 아리엘이라는 필명으로 〈니그로: 그들의 인종적 상태는 어떠한가?The Negro: What is His Ethnological Status?〉라는 팜플렛을 작성했다. 여기서 그는 니그로(흑인의 멸칭)가 아담 이전에 땅을 배회하던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야수로, 노아의 방주에 태워져 목숨을 보전받았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캠벨은 1891년 코카서스인(Caucasian)이라는 필명으로 《인민을 위한 인류학: 모든 인종이 아담의 후예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Anthropology for the People: A Refutation of the Theory of the Adamic Origin of All Races》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유색인종들이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어떤 관점에서도 우리의 형제가 아니며 하등한 피조물"이고, 다계조상설만이 "성경과 조화될 수 있는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페인의 뒤를 이어 캠벨은 대홍수가 아담의 후손인 백인과 선아담인류인 유색인종이 서로 결혼한 결과로 보고 이것이 "세계의 타락과 그에 따른 심판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이고 충분한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레스터 A. 호일은 1875년에 그의 책 《선아담인류가 아니라면 누가 이브를 유혹했겠는가?The Pre-Adamite, or who tempted Eve?》에서 인종에 걸친 다섯번의 창조가 일어났으며, 아담을 선조로 두는 백인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밴더빌트 대학교의 진화적 창조론자이자 지질학자인 알렉산더 윈첼은 1878년에 소책자 〈아담인류와 선아담인류Adamites and Preadamites〉에서 니그로는 아담의 후손이라기에는 인종적으로 너무 열등하다는 것을 근거로 인류의 선아담인류적 기원에 대해 기술하였다. 윈첼은 또한 진화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아일랜드의 법률가인 도미닉 매커즐랜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던 반-다윈 논객이었는데, 모세의 연대를 맞추기 위해 이 이론을 지지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이 카인의 후예이며 코카서스인종이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인종들을 멸절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그는 오직 코카서스인종만이 아담의 후예이므로 창조세계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 외의 수많은 비 코카서스인종들은 함의 후예로서 추방된 인종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찰스 캐롤은 1900년 《니그로, 짐승인가 하나님의 형상인가The Negro a Beast; or, In the Image of God》라는 책에서, 백인만이 아담이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니그로는 아담 이전에 살았던 짐승들로 부도덕성과 못생김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흑인과 같은 선아담인류들은 영혼도 없다고 주장했으며, 인종간의 혼합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자 하나님이 인종을 다르게 창조하신 계획을 망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인종이 섞인 결과 무신론과 진화라는 오류에 다다르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천년왕국설 지지자인 조지 디키슨은 1902년에 그의 글 《창조에 대한 모세의 증언이 창세기를 펼치고, 과학에 의해 검증되었다The Mosaic Account of Creation, As Unfolded in Genesis, Verified by Science》에서 창세기를 과학적으로 읽는 방법을 소개하였으며 아담 이전에도 인류가 살았음을 보여주는 지질학적 증거들이 지구가 6000년의 역사를 가진 아담인류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디키슨은 고생물학과 화석 증거들을 환영했으며, 선아담인류론의 증거로 사용했다.
심령주의자인 알란 카르덱은 다계조상설을 가르치며 지구가 "기록 이전부터" 가득 차있었고 아담의 후손이 "다른 모든 인종들을 밀어냈다"고 주장하였다.
19세기 영국에서 발달한 브리티쉬 이스라엘리즘의 교리는 선아담인류론을 소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선아담인류를 하등한 짐승의 인종으로 간주하며, 백인으로 하나님의 첫번째 아들이 된 아담과는 다른 생명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사탄이 이브를 유혹한 결과 태어난 자식이 카인이고, 카인이 동튀르케스탄으로 도망쳐 지구를 정복하고자 하는 악마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도시를 세웠다고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더 나아가 가나안인이 카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데까지 이르고, 유다 지파 사람들이 카인의 후손과 혼인하였다면 유대인들 역시 유색인종인 선아담인류와 사탄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브리티쉬 이스라엘리즘은 유대인들을 "잡종화된mongrelized" 뱀의 씨라고 부르는 반유대주의 기독교 정체성 운동 속에서 맹렬히 발전하게 된다.
정상적인 선아담인류론자들
오컬트 학자인 파스칼 비버리 랜돌프는 마다가스카르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예로서 노예제에 반대하던 연설가이다. 파스칼은 선아담인류론을 믿었으며 1863년에는 그리핀 리라는 필명으로《선아담인류: 1억년전 지구에 존재하던 인류를 논증하다!Pre-Adamite Man: Demonstrating The Existence of the Human Race Upon the Earth 100,000 Thousand Years Ago! 》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성경의 증언에만 근거하지 않고 고대 종교나 밀교 등 여러 문헌들을 참고하여 선아담인류론을 옹호하였다. 또한 파스칼은 아담이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었고 그 이전에 모든 대륙에 선아담인류가 삼만 오천년에서 십만년 전에도 살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파스칼은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선아담인류를 사람과의 짐승으로 간주한 것과는 다르게 선아담인류가 문명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에도 많은 수의 주류 기독교인들이 선아담인류론을 지지하고 있으며, 회중 교회의 복음주의자로서 간격 창조론을 믿었던 R. A. 토레이(1856-1928) 역시 이 이론을 지지하였다.
글리슨 아처 역시 선아담인류론자였는데, 1985년 그의 책 《구약성경의 서문 조사A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ion》에서 "안트로포피테쿠스, 스완즈콤 원인,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로 추정되는 기원전 2만년의 크로마뇽인까지 포함될 수 있는)나머지의 문제를 돌아봤을 때, 이들이 아담 이전에 존재했던 인류로 아담의 언약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유물을 보았을 때, 이들이 영혼(삼분법에 의하면 영(靈, sprits))을 가졌는지에 대한 문제는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글리슨은 오직 아담과 그의 후손만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하나님과 정신적 유사점이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아담 이후의 인류는 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크로마뇽인과 같은 선아담인류 개념을 계속 유지하였으며,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현 인류의 조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절멸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순절주의자들 중에서는 캐서린 쿨만과 데렉 프린스가, 성공회교도들 중에서는 존 스토트가, 오랜 지구 창조설자들 중에서는 휴 로스가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임마누엘 벨리코프스키는 선아담인류론을 지지하는 기독교신자로서 그의 책 《태초에In the Beginning》에서 그의 또다른 책 《충돌하는 우주Worlds in Collision》를 집필하기 이전에 일어났던 대재앙들을 언급하고 있다. 책의 첫 부분에 "아담 이전의 시대The Pre-Adamite Age"라는 챕터를 두어 선아담인류론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탈무드와 랍비의 전승은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세상에 한번 이상 누군가 살고 있었으며 한번 이상 파괴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벨리코프스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다른 전승들을 참고하여 아담과 이브가 유일한 한 쌍의 사람이 아닌, 이미 존재하고 있던 더 많은사람들 중 한 쌍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같이 보기
창조론
에덴동산
오랜 지구 창조설
노아의 자손들
과학
인류의 진화
고고학적 시대분류 목록
현생 인류의 다지역 기원
선사 시대
각주
참고 문헌
Duncan, Isabella (1860). Pre-Adamite man : or, the story of our old planet & its inhabitants, told by Scripture & science.. London : Saunders, Otley, and Co. (Originally published anonymously, but known subsequently that the author was the wife of George John C. Duncan, the son of Henry Du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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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A.J. Maas, "Preadamites", Catholic Encyclopedia (1911) : Catholic view
"Neanderthal Man: Pre-Adamite, Co-Adamite, or Adamite?" , 29 Creation Research Society Quarterly (Mar. 1993) : Protestant creation science view
Hugh W. Nibley, "Before Adam", Provo, Utah: Maxwell Institute : Latter-day Saint view
아담과 하와
유사역사학 | https://en.wikipedia.org/wiki/Pre-Adamite | Pre-Adamite | The pre-Adamite hypothesis or pre-Adamism is the theological belief that humans (or intelligent yet non-human creatures) existed before the biblical character Adam. Pre-Adamism is therefore distinct from the conventional Abrahamic belief that Adam was the first human. Advocates of this hypothesis are known as "pre-Adamites", along with the humans who they believe existed before Adam.
Early development
The first known debate about human antiquity took place in 170 AD between a Christian, Theophilus of Antioch, and an Egyptian pagan, Apollonius the Egyptian (probably Apollonius Dyscolus), who argued that the world was 153,075 years old.
An early challenge to biblical Adamism came from the Roman Emperor Julian the Apostate, who, upon his rejection of Christianity and his return to paganism, accepted the idea that many pairs of original people had been created, a belief termed co-Adamism or multiple Adamism.
Augustine of Hippo's The City of God contains two chapters indicating a debate between Christians and pagans over human origins: Book XII, chapter 10 is titled Of the falseness of the history that the world hath continued many thousand years and the title of book XVIII, chapter 40 is The Egyptians' abominable lyings, to claim their wisdom the age of 100,000 years. These titles tend to indicate that Augustine saw pagan ideas concerning both the history of the world and the chronology of the human race as incompatible with the Genesis creation narrative. Augustine's explanation aligned with most rabbis and with the church fathers, who generally dismissed views on the antiquity of the world as myths and fables, whereas Jewish and Christian claims were based on revealed truth.
Augustine did take a critical view of the young earth narrative in some aspects, arguing that everything in the universe had been created simultaneously by God, and not seven literal days. He was primarily concerned with arguing against the idea of humanity having existed eternally rather than a Bible-based chronology of human history.
900–1700
In early Islam, a common belief held that mankind is actually the successor of other intelligent creatures such as jinn and hinn. Medieval Muslim traditions referred to the jinn as pre-Adamites, depicted as human-like in various ways. Although the notion of Jinn as pre-Adamites was generally accepted, the idea that other humans lived before the known Adam was controversial. From the mid-ninth century onward the idea appeared that God created several Adams, each of whom presides over an era lasting around 50,000 years. This concept was regarded as heretical, but was widely accepted by Ismailis and some Sufis.
A book titled Nabatean Agriculture, written or translated by Ibn Wahshiyya in 904, collated texts about the activities and beliefs of Arabic groups such as the Nabataeans, in defense of Babylonian culture against Islam. The book discussed the ideas that people lived before Adam, that he had parents, and that he came from India. It proposed that Adam was the father of an agricultural civilization, rather than the father of the entire human race.
The Jewish poet Yehuda Halevi wrote his Kitab al Khazari between 1130 and 1140, which featured a discussion wherein the King of the Khazars questioned three theologians (a Jewish rabbi, a Christian, and a Muslim) which was the true religion, and raised the challenge that people in India said they had buildings and antiquities which were millions of years old. The rabbi responded that his faith was unshaken, as the Indians lacked "a fixed form of religion, or a book concerning which a multitude of people held the same opinion, and in which no historical discrepancy could be found." The rabbi dismissed Indians as dissolute, unreliable people, whose claims could be ignored. Later in the book, Halevi rejected the Nabatean claims as these people did not know of the revelation in Scripture, and he dismissed Greek theories of an eternal world. In his conclusion, Halevi maintained that Adam was the first human in this world but left open other possibilities: "If, after all, a believer in the Law finds himself compelled to admit an eternal matter and the existence of many worlds prior to this one, this would not impair his belief that this world was created at a certain epoch, and that Adam and Noah were the first human beings."
The claims in Nabatean Agriculture were also disputed by Maimonides (1135–1204) in The Guide for the Perplexed. He attributed the concepts to the Sabians and said they were just legends and mythology which deviated from monotheism though drawing on Jewish sources, but in refuting the speculations, he circulated an outline of the ideas among other scholars: "They deem Adam to have been an individual born of male and female like any other human individuals, but they glorify him and say that he was a prophet, the envoy of the moon, who called people to worship the moon. and there are compilations of his on how to cultivate the soil." He noted the claim that Adam came from India, and went on to Babylon.
The presence of a belief in the existence of men before Adam among the Familists, a religious community in Friesland, was noted by John Rogers in 1578.
In 1591, Giordano Bruno argued that, because no one could imagine that the Jews and the Ethiopians had the same ancestry, God must have either created separate Adams or that Africans were the descendants of pre-Adamic races.
The 17th-century French millenarian Isaac La Peyrère is usually credited with formulating the pre-Adamite theory because of his influence on subsequent thinkers and movements. In his Prae-Adamitae, published in Latin in 1655, La Peyrère argued that Paul's words in should be interpreted to mean that "if Adam sinned in a morally meaningful sense there must have been an Adamic law according to which he sinned. If law began with Adam, there must have been a lawless world before Adam, containing people." Thus, according to La Peyrère, there must have been two creations; first the creation of the Gentiles and then the creation of Adam, who was the father of the Hebrews. The existence of pre-Adamites, La Peyrère argued, explained Cain's taking of a wife and the building of a city after Abel's murder in the Book of Genesis.
In Politica Hermetica, Lazslo Toth wrote that "racial theory has as its official birthdate 24 April 1684," when François Bernier distinguished four or five races in an article titled A new division of the Earth, according to the different species or races of men who inhabit it published in the Journal des sçavans. Because of widespread theological opposition to the pre-Adamite theories of his friend La Peyrère, Bernier published his paper anonymously.
Age of Enlightenment
During the Age of Enlightenment, pre-Adamism was adopted widely as a challenge to the biblical account of human origins. In the 19th century, the idea was welcomed by advocates of white superiority. A number of racist interpretive frameworks involving the early chapters of Genesis arose from pre-Adamism. Some pre-Adamite theorists held the view that Cain left his family for an inferior tribe described variously as "nonwhite Mongols" or that Cain took a wife from one of the inferior pre-Adamic peoples.
1800–present
Racist pre-Adamism
In 19th-century Europe, pre-Adamism was attractive to those who were intent on demonstrating the inferiority of non-Western peoples, and in the United States, it appealed to those who were attuned to racial theories who found it unattractive to contemplate a common history with non-whites.
Scientists such as Charles Caldwell, Josiah C. Nott and Samuel G. Morton rejected the view that non-whites were the descendants of Adam. Morton combined pre-Adamism with cranial measurements. As Michael Barkun explains:
In 1860, Isabella Duncan wrote Pre-Adamite Man, Or, The Story of Our Old Planet and Its Inhabitants, Told by Scripture & Science, a mixture of geology and scriptural interpretation. The book was popular among a number of geologists because it mixed biblical events with science. She suggested that the pre-Adamites are today's angels. Since they were without sin, for sin did not enter the world until Adam disobeyed God, there was no reason for them not to have been at least raptured into heaven, anticipating what would again occur with the second coming of Jesus Christ. Duncan also believed that some angels had sinned and fallen from Heaven, which caused them to become demons. Duncan believed that such an upheaval would leave geological scars on the earth. The concept of ice ages, pioneered by Louis Agassiz, seemed to provide evidence of such events, drawing the line between the pre-Adamic era and the modern one, which she posited began about 6,000 years ago.
In 1867, Buckner H. Payne, writing under the pen name Ariel, published a pamphlet titled The Negro: What is His Ethnological Status? He insisted that all of the sons of Noah had been white. According to his hypothesis, if the Flood had been universal, the only survivors of it should have been white, so why were non-white people living on Earth? To answer this question, Payne suggested that the "Negro" is a pre-Adamic beast of the field (specifically, a higher order of monkey), which was preserved on Noah's Ark. According to Payne, the Pre-Adamites were a separate species without immortal souls.
The Irish lawyer Dominick McCausland, a Biblical literalist and anti-Darwinian polemicist, maintained the theory in order to uphold the Mosaic timescale. He believed that the Chinese were descended from Cain and he also believed that the "Caucasian race" would eventually exterminate all other races. He also believed that only the "Caucasian" descendants of Adam were capable of creating civilization, and he tried to explain away the existence of the numerous non-"Caucasian" civilizations by attributing all of them to a vanished "Caucasian race", the Hamites.
In 1875, A. Lester Hoyle wrote a book, The Pre-Adamite, or who tempted Eve? In his book, he claimed that there had been five distinct creations of races, but only the fifth race, the white race, of which Adam was the father, had been made in God’s own image and likeness. Hoyle further suggested that Cain was the "mongrel offspring" of Eve's being seduced by "an enticing Mongolian" with whom she had repeated trysts, thus laying the foundation for the white supremacist bio-theology that miscegenation was "an abomination".
In an unusual blend of contemporary evolutionary thinking and pre-Adamism, the Vanderbilt University theistic evolutionist and geologist Alexander Winchell argued in his 1878 tract, Adamites and Preadamites, for the pre-Adamic origins of the human race, on the basis that the Negroes were too racially inferior to have been descended from the Biblical Adam. Winchell also believed that the laws of evolution operated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In 1891, William Campbell, under the pen name "Caucasian", wrote in Anthropology for the People: A Refutation of the Theory of the Adamic Origin of All Races that the non-white peoples were not the descendants of Adam and were therefore "not brothers in any proper sense of the term, but inferior creations" and he also wrote that polygenism was the "only theory reconcilable with scripture." Like Payne before him, Campbell viewed the Great Flood as a consequence of intermarriage between the white (Adamic) and the nonwhite (pre-Adamic) peoples "the only union we can think of that is reasonable and sufficient to account for the corruption of the world and the consequent judgement."
In 1900, Charles Carroll wrote the first of his two books on pre-Adamism, The Negro a Beast; or, In the Image of God, in which he sought to revive the ideas which had previously been presented by Buckner H. Payne, describing the Negro as a literal ape rather than a human. In a second book which was published in 1902, The Tempter of Eve, he put forth the idea that the serpent was actually a black female, and he also theorized that miscegenation was the greatest of all sins. Carroll claimed that the pre-Adamite races, such as blacks, did not have souls. He believed that race mixing was an insult to God because it spoiled His racial plan of creation, and he also believed that the mixing of races had led to the errors of atheism and evolution.
The Scottish millennialist George Dickison wrote The Mosaic Account of Creation, As Unfolded in Genesis, Verified by Science in 1902. The book mixed science with a scientifically enhanced reading of Genesis and it also listed geological discoveries which showed that men existed before Adam had been created and proved that Earth was much older than the 6000-year-old span of the Adamic race. Dickison welcomed scientific discoveries from fossil evidence and the palaontological record and used them as evidence of pre-Adamism.
The doctrine which is known as British Israelism, which developed in England in the 19th century, also included a pre-Adamic worldview but Pre-Adamism was a minority position. The model viewed pre-Adamites as a race of inferior bestial creatures which was not descended from Adam, because according to it, Adam was the first white man and consequently, he was the first son of God. In the narrative, Satan seduces Eve, and the resulting offspring is a hybrid creature, Cain. Later, Cain flees to East Turkestan to establish a colony of followers who are intent on realizing the Devil’s plan for domination of the earth. A further elaboration of this myth involved the identification of the Jews with the Canaanites, the putative descendants of Cain, but the eponymous ancestor of the Canaanites is not Cain, but Canaan. It followed that if the tribes of Judah were supposed to have intermarried with Cain’s descendants, the Jews were both the offspring of Satan and the descendants of sundry nonwhite pre-Adamic races.
In the United States, philo-Semitic British Israelism developed into the antisemitic Christian Identity movement and the serpent seed doctrine. Identity preacher Conrad Gaard wrote that the serpent was a "beast of the field" who was the father of Cain, and since Cain married a pre-Adamite, his descendants were a "mongrel, hybrid race".
Non-racist pre-Adamism
The occultist Paschal Beverly Randolph published Pre-Adamite Man: Demonstrating The Existence of the Human Race Upon the Earth 100,000 Thousand Years Ago! under the name Griffin Lee in 1863. The book took a primarily scientific view of pre-Adamism, relying on evidence from linguistics, anthropology, archaeology, paleontology, and ancient history. Being a polygenist, Randolph argued that the color of races, particularly black, was not the result of climate and was proof of separate, pre-Adamite origins.
Pre-Adamite theories have also been held by a number of mainstream Christians such as the Congregational evangelist R. A. Torrey (1856–1928), who believed in the Gap Theory. Torrey believed it was possible to accept both evolution and biblical infallibility, with the pre-Adamite as the bridge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Gleason Archer Jr. was a believer in pre-Adamism. In his 1985 book A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ion he wrote,
Archer asserted that only Adam and his descendants were infused with the breath of God and a spiritual nature corresponding to God himself, and that all mankind subsequent to Adam’s time must have been literally descended from him. Regarding the concept of pre-Adamic races (such as the Cro-Magnon man), he says: "They may have been exterminated by God for unknown reasons prior to the creation of the original parent of the present human race."
More recently, such ideas have been promoted by Kathryn Kuhlman and Derek Prince among Pentecostals, John Stott among Anglicans, Old Earth creationist Hugh Ross, and computational biologist S. Joshua Swamidass.
See also
Creationism
Curse and mark of Cain
Curse of Ham
Garden of Eden
Multiregional origin of modern humans
Sons of Noah
References
Further reading
Book of Genesis
Christianity and race
Pseudohistory
Religious concepts related with Adam and Eve |
https://ko.wikipedia.org/wiki/%EB%B9%84%EB%91%90%ED%82%A8%ED%8A%B8%20%28%EC%9E%91%EC%84%BC%29 | 비두킨트 (작센) | 비두킨트 폰 작센(, 730년 ~ 807년/809년경)은 게르만 작센족의 부족 지도자로,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에 저항하였다. 그는 작센족의 부족 공작으로 알려져 있다.
작센족의 기록보다는 아날 연대기의 777년 기사에 처음 언급되고 프랑크족 역사가들의 사서에 주로 언급되는데, 프랑크족의 관점에서 그는 반역자, 반란자로 기록되었다. 777년부터 785년 카를 대제의 원정 당시 그는 작센족의 지도자였고, 8년간의 프랑크족의 공격에 저항하였다. 프랑크족과의 전쟁에서 수천 명의 작센 족이 학살당했고, 부족 고유의 종교를 버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강제 개종당했다. 후일 비두킨트는 작센족 독립의 상징이자 전설적인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생애
비두킨트의 출신 가계나 삶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고, 베스트팔렌 출신이며, 작센 족의 유력자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이름 비두킨트는 고대 작센어로 나무의 자녀(child of the wood) 또는 늑대(wolf)를 의미한다. 비두킨트가 그의 본명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별명이었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그와 함께 카를 대제에 저항한 작센 족 지도자 아비(Abbi) 또는 아비오(Abbio)라는 인물과도 정확하게 어떤 관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정확한 가족 관계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후일 작센족을 통치하는 오토 왕가의 인물 중 하인리히 1세의 부인 마틸다 폰 링겔하임이 비두킨트의 후손이라 한다. 비두킨트 폰 코르바이의 마틸다 연대기에는 마틸다 폰 링겔하임이 그의 후손이라 기록하였다. 일설에는 하인리히 1세 역시 그의 증손자뻘 혹은 4대손 정도 되는 친척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하인리히 1세나 오토 광휘공, 리우돌핑가의 시조 리우돌프와 비두킨트의 관계는 정확하지 않다. 그의 아내 게브하(Gevha) 혹은 게우아(Gheua)에 대한 기록도 단편적이어서 브라운슈바이크의 민담과 동요를 통해 구전된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그의 원수인 카롤루스 대제 측과 프랑크 족 역사가들의 기록에 주로 의존하기 때문에 명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프랑크 왕국의 역사서에서는 그를 줄곧 반란군, 반역자로 묘사하고 있다.
772년부터 785년 카를 대제는 작센족 원정을 단행한다. 프랑크인 열왕편년사 아날 연대기(Royal Frankish Annals)에 의하면 772년 카를 대제는 작센족을 정벌하고, 작센 땅에 있는 이르민술(Irminsul, 작센의 부족 토속신앙)의 파괴를 명하였다. 773년에 그는 작센족을 이끌고 이르민술 파괴에 대한 보복으로, 카를 대제가 이탈리아를 방문한 틈을 타, 프랑크 왕국의 데벤테르를 습격하였다. 초기에 작센족은 카를 대제의 요구대로, 부족 토속신앙을 버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카를 대제가 군사를 이끌고 회군한 뒤 작센족은 다시 자신들의 전래 토속신앙을 유지했고, 분개한 카를 대제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작센족 원정을 단행하고, 작센 전쟁 기간 중 베스트팔렌 일대는 황폐화되었다. 카를 대제는 변경백령을 신설하고 법을 제정, 작센 부족 정벌을 전담하게 했다. 비두킨트는 작센 출신 장수 아비 또는 아비오와 함께 카를 대제가 이끄는 프랑크족 군대와 맞서 저항하였다.
비두킨트는 아날 연대기의 777년 기사에 처음 언급되는데 그는 작센족 귀족이 카를 대제에 의해 파데보른(Paderborn)의 종교법정에 연행될 때 끌려가지 않은 유일한 작센 부족 귀족으로 나타난다. 그는 덴마크족 지도자 지그프리드 혹은 시구르드 흐링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듬해 베스트팔렌의 작센족을 이끌고 프랑크 왕국의 라인란트를 공격, 이베리아반도를 원정하러 간 카를 대제는 비두킨트를 상대할 수 없었다. 비두킨트는 다시 덴마크로 가서 지원군을 요청했고, 782년 비두킨트는 덴마크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작센족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카를 대제는 곧바로 원정을 단행했고,[782년부터 784년 비두킨트의 작센 군은 프랑크족 군대와 교전했다. 이때 베르덩 대학살에서 카를 대제는 4,500여 명의 [작센족을 처형하였다.
비두킨트는 다시 프리기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카를 대제의 784년 혹은 785년의 겨울철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프리기아인 부족공작과 그의 동맹들은 다시 고국으로 퇴각했다. 785년 바르덴가우에서 최종 패배한 뒤, 비두킨트는 자신과 작센족에 대한 더 이상의 신체적 상해가 없음을 보장하는 대가로, 프랑크 왕국에 항복하기로 정했다. 그와 작센족 귀족들은 아마도 아팅기에(Attigny)에서 카를 대제를 그의 대부로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비두킨트는 카를 대제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고, 이후 프랑크족 군주들에 의해 귀족 계급으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작센 족의 분리독립, 저항은 804년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785년경까지 그는 작센족의 지도자였고, 785년 이후로는 에크베르트(Egbert), 아보(Abo) 등이 작센족의 부족 지도자로 활동했다.
비두킨트의 세례 이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가 게르트 아르토프(Gerd Althoff)는 비두킨트가 만년에 수도원에서 투옥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는 라이네하우 수도원(Reichenau Abbey)에서 만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12세기의 한 자료에 의하면 그는 카를 대제의 왕비 힐데가르트 폰 히스파니아의 남동생 혹은 오라비이자 바이에른의 태수로 파견된 바아아르의 게르홀트(Gerold of Baar)에게 살해됐다고도 한다.
19세기 이후에 와서 독일의 기독교 민족주의자에 의해 그는 프랑스인 침략자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보는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주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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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tz Vater: Weking - Die Saga vom Heldenkampf in Niedersachsen. Hrsg.: Franz v. Bebenburg. Verlag Hohe Warte, Pähl 1956, S. 381.
9세기 사람
작센
게르만족
게르만의 군사 지도자
작센 공작 | https://en.wikipedia.org/wiki/Widukind | Widukind | Widukind, also known as Wittekind and Wittikund, was a leader of the Saxons and the chief opponent of the Frankish king Charlemagne during the Saxon Wars from 777 to 785. Charlemagne ultimately prevailed, organized Saxony as a Frankish province, massacred thousands of Saxon nobles, and ordered conversions of the pagan Saxons to Christianity. In later times, Widukind became a symbol of Saxon independence and a figure of legend. He is also venerated as a blessed in the Catholic Church.
Life
Very little is known about Widukind's life. His name literally translates as "child of the forest". In the chronicles he is accompanied by Abbi who may have been a close relative. However, it is uncertain how they were related because all sources about him stem from his enemies, the Franks, who painted a negative picture representing him as an "insurgent" and a "traitor". While Widukind was considered the leader of the Saxon resistance by the Franks, his exact role in the military campaigns is unknown.
According to the Royal Frankish Annals, the Franks campaigned in Saxony in 772, when Charlemagne ordered the destruction of the Irminsul sanctuary. The Saxon Wars continued when Westphalian tribes devastated the church of Deventer and the Angrarii laid siege to the Frankish court at Fritzlar. The king retaliated against the local nobility, enforcing the decree to incorporate the Saxon lands as a Frankish march.
Widukind was first mentioned by the Annals in 777 when he was the only one of the Saxon nobles not to appear at Charlemagne's court in Paderborn. Instead, he stayed with the Danish king Sigfred (possibly Sigurd Hring). The next year, the Westphalians again invaded the Frankish Rhineland and subsequently fought a running battle against the Franks and their local allies while Charlemagne was busy in Spain.
By 782, Widukind had returned from Denmark and goaded the Saxon nobles into rebellion. From 782 to 784, battles between Saxons and Franks occurred annually, while Charlemagne had 4,500 Saxons executed at the Massacre of Verden. Widukind allied himself with the Frisians but Charlemagne's winter attacks of 784/785 were nevertheless successful, and the dux and his allies were pushed back to their homelands. Charlemagne, leading an expedition towards the mouth of the Elbe, learned that Widukind was in the land of the Nordalbingians, on the right bank of the river. In the Bardengau in 785, Widukind agreed to surrender in return for a guarantee that no bodily harm would be done to him. He and his allies were then baptized, possibly in Attigny, with Charlemagne as his godfather. Widukind thereby reached a peace agreement and the acknowledgement of the Saxon noble rank by their Frankish overlords.
There are no contemporary sources about Widukind's life or death after his baptism. Historian Gerd Althoff assumed that he was imprisoned at a monastery—a fate that happened to other rulers deposed by Charlemagne. He tried to identify Reichenau Abbey as a likely location where Widukind may have spent the rest of his life, but his results are inconclusive and widely rejected. Alternatively, he may have received a position in the administration of occupied Saxony. The Vita Liudgeri biography of Saint Ludger mentions him accompanying Charlemagne on his campaign against the Veleti leader Dragovit. According to the 12th-century Kaiserchronik, he was slain by Charlemagne's brother-in-law Gerold of Baar.
Legend
Numerous legends developed around Widukind's life; he eventually appeared as a saintly figure (becoming "Blessed Widukind") and the builder of many churches. He was later assumed to have died in 807 or 808; his feast day is commemorated on January 6.
According to legend, Widukind experienced a vision that led to his conversion. Disguised as a beggar, he was spying on Charlemagne's troop camp during Easter. He witnessed a priest performing a Holy Sacrifice of the Mass and the priest was holding a beautiful child during the consecration. To his astonishment, people would receive communion and the priest would give the same child to each person. Widukind was dumbfounded by this scene and went to beg outside after the mass. One of the emperor's servants recognized Widukind behind his disguise—due to an odd formation of one of his fingers—and Widukind was captured. He was interrogated and confessed to spying on Charlemagne's camp for the purpose of becoming better acquainted with the Christian faith. He later confessed the divine vision he had seen. The emperor concluded that God had given Widukind the grace of witnessing the divine child, Jesus, behind the Sacred Host of the Mass. Widukind then renounced his worship of pagan idols.
Later perception
Medieval
Since the 9th century, Widukind had been idolized as a mythical hero. Around 1100, a tomb for him was made in Enger; recent excavations have found that the contents of the tomb are indeed early medieval, but are the remains of a young woman. In 1971, archaeologists discovered three graves in a prominent place in front of the altar. The remains of three men who had died in the early 9th century, two of them about sixty-year-old warriors, the third a young man, were identified after a DNA analysis in 2002 as half-brothers or maternal cousins and a nephew. The man buried in front of the altar is assumed to be Widukind. When in the 10th century Saxon kings (of the Ottonian dynasty) replaced the Frankish kings in East Francia (the later Holy Roman Empire), these kings proudly claimed descent from Widukind: Matilda, the wife of King Henry I, was apparently a great-great-great-granddaughter of Widukind. The House of Billung, to which several Dukes of Saxony belonged, had Matilda's sister among its ancestors and thus also claimed descent from Widukind. The Italian family Del Carretto (and its supposed French branch, family de Charette) also claimed to descend from the hero.
In German nationalism
Widukind became a hero for German nationalists in the early 20th century. German neo-pagans saw him as an heroic defender of Germany's traditional beliefs and their gods, resisting the Middle Eastern religion of Christianity. Christian nationalists also lauded him, linking Charlemagne with the humiliation of French domination after World War I, especially the occupation of the Rhineland, portraying Charlemagne as a "French" invader.
After the Nazi Party came to power in 1933, so many plays and other works were written about Widukind that there were complaints that he was becoming a cliché. Alfred Rosenberg praised him as a hero of German freedom, who finally joined with the founder of the German Reich (Charlemagne). Two important plays about the Saxon leader were produced in 1934, Der Sieger by Friedrich Forster and Wittekind by Edmund Kiss. The first celebrated the conversion of Widukind, but the second caused controversy because of its explicit anti-Christian message. In that play after the massacre of Verden, Saxon leaders say, "That is what the Christians have done; they feign love, but bring murder!"—a line that led to protests from the audience. The play portrays Catholic church leaders planning to destroy German freedom by forcing racial mixture on them, thus turning them into pliable "Untermenschen". Thousands of German maidens are captured and will be forced to mate with "Jews and Moors" unless Widukind converts, which he does only to avoid this horrifying prospect. He gives a speech saying that the survival of the German race was his principal concern, and that future generations will praise him for this when the true spirit of the German people arises once more.
Present
Many buildings are named after him in the area of Enger, including the Widukind-Gymnasium Enger.
Sainthood
He is called 'Blessed Wittikund' in the Catholic Church and his feast day is celebrated on 7 January. Wittikund apparently saw an apparition of the child Jesus at Christmas mass one time. Following his baptism in 785 AD he forfeited engaging in warfare and became a prolific founder/restorer of churches; it was for this reason that he is regarded as a holy person.
See also
Abbi (Saxon)
Ambiorix
Alaric I
Ardaric
Arminius
Athanaric
Boudica
Fritigern
Gaius Julius Civilis
Totila
Tribigild
Vercingetorix
Viriathus
References
Trans. Bernard S. Bachrach and David S. Bachrach.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External links
Widukind Museum, Enger, Germany
8th-century births
Year of birth unknown
Year of death unknown
Westphalia culture
8th-century dukes in Europe
8th-century Saxon people
Dukes of the Saxons
Saxon warriors |
https://ko.wikipedia.org/wiki/The%20Life%20of%20Pablo | The Life of Pablo | The Life of Pablo는 2016년 2월 14일 GOOD 뮤직과 데프 잼 레코딩스에서 발매된 미국의 래퍼, 프로듀서 카니예 웨스트의 7번째 정규 음반이다. 이 음반은 2013년 11월부터 2016년 2월 까지라는 긴 기간 동안 제작되었으며, 이탈리아, 멕시코, 캐나다, 미국 등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스튜디오 안에서 작업이 되었다. 이 음반은 카니예 웨스트의 주도 하에 많은 프로듀서들이 참여했으며, 릭 루빈, 노아 골드스테인, 마이크 딘, 메트로 붐인, 허드슨 모호크, 플레인 팻, 매들립 등의 프로듀서진이 음반 제작에 참여했다. 또한 다양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가수들 역시 피처링에 참여했는데, 크리스 브라운, 타이 달라 사인, 위켄드, 디자이너, 키드 커디, 더 드림, 켈리 프라이스, 커크 프랭클린, 찬스 더 래퍼, 리한나, 시아, 프랭크 오션, 샘파, 빅 멘사, 포스트 말론, 켄드릭 라마, 영 서그, 캐롤라인 쇼 등이 참여했다.
음반 발매에 앞서 "Real Friends"와 "No More Parties in LA"를 포함한 싱글들이 선공개된 바 있으며, 발매하기 한달 전부터 음반명과 수록곡 구성이 계속해서 바뀌었으며, 웨스트의 지속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한 기행으로 인해 많은 논란이 되었다. 이 음반의 초기 버전은 2016년 2월 1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아디다스와의 협력 하에 열린 패션 쇼 이지 시즌 3 (Yeezy Season 3)에서 초연되었으며, 이후 음반 수록곡 수정 및 추가를 거쳐 3일 뒤 타이달을 통해 처음 발매되었다.
웨스트는 발매 이전 이 음반을 힙합과 가스펠 음악이 섞인 음반이라고 언급했다. 공식적으로 발매된 뒤에도 웨스트는 이 음반을 계속해서 수정해 나갔으며, 데프 잼 레코딩스 측에서는 웨스트의 수정안을 계속해서 업데이트 할 의향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2016년 4월 1일 믹싱과 수록곡 추가 등 다양한 수정 과정을 거친 버전의 음반이 다른 음악 플랫폼에도 발매되었으며, 별도의 CD 등으로는 제작되지 않았다. 발매 이후 "Famous", "Father Stretch My Hands", "Fade"를 추가적으로 싱글 발매하였다.
이 음반은 매체로부터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이 음반의 단편적인 면과 미완성적인 면에 많은 평론가들이 주목했다. 이 음반은 콤플렉스, 피치포크, NME 등으로부터 2016년 최고의 음반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인버스 지에서는 이 음반을 2016 올해의 음반 1위에 선정하기도 한다. 이 음반은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랩 음반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수록곡인 "Ultralight Beam"과 "Famous" 역시 노미네이트된다. 타이달에서 처음 발매되었을 때와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 발매되었을 때 이 음반은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웨스트의 7번째 연속 1위 기록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캐나다, 덴마크, 핀란드, 아일랜드, 네덜란드, 스웨덴 등지에서 음반 순위 10위에 진입한 바 있으며, 2017년 4월 미국 음반 산업 협회 (RIAA)에서 플래티넘 인증을 받은 최초의 스트리밍 전용 음반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수록곡
전 트랙은 2016년 6월 14일 최종적으로 수정된 사안이며, 칸예 웨스트 공식 웹사이트 내 크레딧과 타이달을 기반으로 쓰여졌다.
Notes
signifies a co-producer
signifies an additional producer
"Frank's Track" features uncredited vocals by Frank Ocean
샘플 크래딧
"Father Stretch My Hands, Pt. 1" contains samples of "Father I Stretch My Hands", written and performed by Pastor T. L. Barrett featuring Youth for Christ.
"Pt. 2" contains samples of the song "Panda", written by Sidney Selby III and Adnan Khan, and performed by Desiigner; samples of "Father I Stretch My Hands", written and performed by Pastor T. L. Barrett featuring Youth for Christ; and contains elements of the video game Street Fighter II: The World Warrior.
"Famous" contains samples of "Do What You Gotta Do", written by Jimmy Webb and performed by Nina Simone; samples of "Bam Bam", written by Winston Riley and performed by Sister Nancy; and contains samples of "Mi Sono Svegliato E... Ho Chiuso Gli Occhi", written by Luis Bacalov, Sergio Bardotti, Giampiero Scalamogna, and Enzo Vita, and performed by Il Rovescio della Medaglia.
"Feedback" contains samples of "Talagh", written by Ardalan Sarfaraz and Manouchehr Cheshmazar, and performed by Googoosh.
"Low Lights" contains samples of "So Alive (Acapella)", written by Sandy Rivera and performed by Kings of Tomorrow.
"Freestyle 4" contains samples of "Human", written by Alison Goldfrapp, William Gregory, Robert Locke, and Timothy Norfolk, and performed by Goldfrapp.
"Waves" contains samples and elements of "Fantastic Freaks at the Dixie", written by Fred Bratwaithe, Robin Diggs, Kevin Ferguson, Theodore Livingston, Darryl Mason, and James Whipper, and performed by Fantastic Freaks.
"FML" contains interpolations of "Hit", written by Lawrence Cassidy, Vincent Cassidy, and Paul Wiggin, and performed by Section 25.
"Real Friends" contains interpolations of "Friends", written by Jalil Hutchins and Lawrence Smith, and performed by Whodini.
"Wolves" contains samples of "Walking Dub", written and performed by Sugar Minott.
"30 Hours" contains samples of "Answers Me", written and performed by Arthur Russell; interpolations of "Hot in Herre", written by Cornell Haynes, Pharrell Williams, and Charles Brown, and performed by Nelly; interpolations of "EI", written by Cornell Haynes and Jason Epperson, and performed by Nelly; and samples of "Joy", written and performed by Isaac Hayes.
"No More Parties in LA" contains samples of "Give Me My Love", written and performed by Johnny "Guitar" Watson; samples of "Suzie Thundertussy", written and performed by Walter "Junie" Morrison; samples of "Mighty Healthy", written byHerbert Rooney, Ronald Bean, Highleigh Crizoe, and Dennis Coles, and performed by Ghostface Killah; and samples of "Stand Up and Shout About Love", written by Larry Graham Jr., Tina Graham, and Sam Dees, and performed by Larry Graham.
"Facts (Charlie Heat Version)" contains samples of "Dirt and Grime", written by Nicholas Smith and performed by Father's Children; interpolations of "Jumpman", written by Aubrey Graham, Leland T. Wayne, and Nayvadius D. Wilburn, and performed by Drake and Future; and contains elements of the video game Street Fighter II: The World Warrior.
"Fade" contains samples of "(I Know) I'm Losing You", written by Eddie Holland, Norman Whitfield, and Cornelius Grant, and performed by Rare Earth; samples of "(I Know) I'm Losing You", written by Eddie Holland, Norman Whitfield, and Cornelius Grant, and performed by The Undisputed Truth; samples of "Mystery of Love", written by Larry Heard and Robert Owens, and performed by Mr. Fingers; samples of "Deep Inside", written by Louie Vega and performed by Hardrive; samples of "I Get Lifted (The Underground Network Mix)", written by Louie Vega, Ronald Carroll, Barbara Tucker, and Harold Matthews, and performed by Barbara Tucker; and contains an interpolation of "Rock the Boat", written by Stephen Garrett, Rapture Stewart, and Eric Seats, and performed by Aaliyah.
"Saint Pablo" contains samples of "Where I'm From", written by Shawn Carter, Marek Manning, Deric Angelettie, Ronald Lawrence, and Norman Whitfield, and performed by Jay-Z.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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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예 웨스트가 프로듀싱한 음반 | https://en.wikipedia.org/wiki/The%20Life%20of%20Pablo | The Life of Pablo | The Life of Pablo is the seventh studio album by American rapper and producer Kanye West. It was released on February 14, 2016, through GOOD Music and distributed by Def Jam Recordings. Recording sessions took place from 2013 to 2016, in Italy, Mexico, Canada, and the United States. West and a variety of producers, including co-executive producers Rick Rubin and Noah Goldstein handled production. West enlisted guest vocals for the album from The-Dream, Kelly Price, Chance the Rapper, Kirk Franklin, Kid Cudi, Desiigner, Rihanna, Young Thug, Chris Brown, The Weeknd, Ty Dolla Sign, Vic Mensa, Sia, Frank Ocean, Kendrick Lamar, Post Malone, and Sampha.
Several promotional singles preceded the release of The Life of Pablo, including the tracks "Real Friends" and "No More Parties in LA". During the months before its release, the album's title and tracklist went through several publicized changes. West premiered an early version at Madison Square Garden on February 11, 2016, as part of his Yeezy Season 3 fashion show. After several additional sessions and alterations, the exclusive launch occurred for streaming on Tidal three days later.
Following its official streaming debut, West continued to make changes to The Life of Pablo. A largely updated version of it, including alternate mixes and other changes, was made available on other streaming services and for digital purchase on his website on April 1, 2016. The singles "Famous", the two-part "Father Stretch My Hands", and "Fade" were released to support it in 2016. The album received generally positive reviews from music critics, with particular attention being paid to the fragmented, unfinished nature of the composition and release. Multiple publications named it one of 2016's best albums.
The Life of Pablo received five nominations at the 2017 Grammy Awards, including Best Rap Album, though the Album of the Year rejection was deemed a snub by numerous publications. Following Tidal's initial disclosure of its streaming data and its release to competing streaming services, the album debuted at number one on the US Billboard 200, becoming the first to reach the summit primarily through streaming, and was ultimately certified double platinum by the 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 (RIAA). It also debuted at number one in Norway, and in the top ten in Canada, Denmark, Finland, Ireland, the Netherlands, and Sweden.
Background and development
In November 2013, Kanye West began working on his seventh studio album, with the working title of So Help Me God intended for a 2014 release date. Q-Tip announced he and Rick Rubin, one of the executive producers of West's sixth studio album Yeezus (2013), would produce the album. Early recording sessions resulted in several tracks released as standalone singles or given to other artists, including West's Paul McCartney collaborations "All Day", "Only One", and the McCartney and Rihanna collaboration "FourFiveSeconds". In 2015, West announced the album's new title as SWISH, though he noted the title could change. West announced in January 2016 that SWISH would be released on February 11. He released a new song "Real Friends" that month simultaneously with a snippet of "No More Parties in LA". This signified a revival of the GOOD Fridays initiative where West had released new singles every Friday. On January 26, 2016, West revealed he had renamed the album Waves.
The track "Famous", featuring vocals by frequent West collaborator Rihanna and American hip hop recording artist Swizz Beatz, was scrutinized on social media for its controversial lyrical reference to American singer Taylor Swift, because West had interrupted her acceptance speech at the 2009 MTV Video Music Awards.
On February 9, 2016, several days ahead of its release, West changed the title to The Life of Pablo. On February 11, West premiered an early version of the album at Madison Square Garden during the presentation of his Yeezy Season 3 clothing line. Following the preview, West announced he would modify the track list again before its public release. He delayed the release further to finalize the recording of the track "Waves" at the behest of co-writer Chance the Rapper.
Recording
Initial sessions
The Life of Pablo was recorded between 2013 and 2016, though recording for the track "No More Parties in LA" started in 2010, during the sessions for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Ty Dolla Sign reported that writing and recording for the album took place in Mexico in September 2014; he recalled McCartney and Rihanna were present. American rappers Pusha T and Consequence confirmed that they had ended their feud to work with West on music to be released by him.
In April 2014, during an interview with Self-Titled, English electronic music producer Evian Christ explained that despite West not always being musically clear, he just seemed "interested in pushing aesthetic boundaries as far into the Avant as possible". He will say "This is not experimental enough. This is too poppy. Make something else." This can confuse other musicians. Christ said that West is "a dream to work with", adding that when it comes to creative freedom, West is on his own level in terms of the freedom. He explained "he wants you to work to a blueprint, the blueprint is: 'Don't make a rap beat. Anything but a rap beat'. In February 2015, while West was continuing work on The Life of Pablo, he confirmed the album was around 80% complete.
In March 2015, during an interview with MTV, promoting his third studio album Dark Sky Paradise (2015), Big Sean spoke about the multiple recording locations involved in The Life of Pablo including Mexico and Hawaii. In an October 2015 interview with The Fader, Post Malone, who is featured on the track "Fade" with Ty Dolla Sign, discussed his experiences with West describing him as "just a normal guy, like me, and super cool".
On January 27, 2016, West revealed the update of the final track listing for The Life of Pablo on his official Twitter account. The updated track listing included a number of unannounced potential collaborators: Earl Sweatshirt, The-Dream, Tyler, the Creator, The World Famous Tony Williams, Diddy, Danny!, ASAP Rocky, Kid Cudi, Lil Uzi Vert, Drake, Teyana Taylor, Zoë Kravitz, Bibi Bourelly, Doug E. Fresh, How to Dress Well, and French Montana, as well as a return of his frequent production collaborators, such as Mike Dean, Hudson Mohawke, Plain Pat, Vicious, Anthony Kilhoffer, A-Trak, and Noah Goldstein. Following the album's premiere at Madison Square Garden, it was revealed that Brooklyn-based rapper Desiigner contributed vocals to "Pt. 2" and "Freestyle 4".
Post-release updates
West released The Life of Pablo for streaming on February 14, 2016, following a performance on Saturday Night Live. Although a statement by West around the time of The Life of Pablos release indicated it would be a permanent exclusive to Tidal, the album was released through several other competing services beginning in April 2016. Before the release of The Life of Pablo, West had tweeted that it was a hip hop and a gospel album. In an interview on Big Boy Radio, West said: "When I was sitting in the studio with Kirk, Kirk Franklin, and we're just going through it, I said this is a gospel album, with a whole lot of cursing on it, but it's still a gospel album." Following The Life of Pablos initial Tidal release, West said he intended to continue altering the songs, declaring the album a "living breathing changing creative expression". On March 13, 2016, over a month after the release, West uploaded an updated version of "Famous", swapping out the lyric "She be Puerto Rican day parade wavin' for "She in school to be a real estate agent", as well as making slight tweaks to the overall mix. Three days later, West updated the album's Tidal track list with a reworked version of "Wolves", which included previously removed guest vocals by Vic Mensa and Sia, and separated the ending portion sung by Frank Ocean into a separate interlude under the title of "Frank's Track". This reworking was done around a month after West proposed a fix to the song. On March 30, The Life of Pablo received a major update, with at least 12 tracks appearing in altered forms. The updates included prominent vocal additions, new lyrics, and altered mixes. Def Jam confirmed this incarnation to be "a newly updated, remixed and remastered version", and clarified that the album would continue to appear with "new updates, new versions and new iterations" in the following months, calling it "a continuous process". A minor update was published on April 2, fixing the outro vocals for "30 Hours" which had been rendered off-time during the March 31 update. Finally, on June 14, The Life of Pablo was updated to include an additional track titled "Saint Pablo" featuring vocals by British musician Sampha, with other miscellaneous alterations throughout the album.
Discussing The Life of Pablos continued alterations, Jayson Greene of Pitchfork mused "at what point is a record 'over', and who gets to make the call"? He claimed West was "seeing how far he can stretch the point right now, in a way no pop star has ever quite tried", describing him as "testing the shifting state of the 'album cycle' to see if he can break it entirely, making his album like another piece of software on your phone that sends you push updates". Winston Cook-Wilson of Inverse described the album as "a fluid construct", writing that "as a way of holding the public's attention span, Kanye's choice to continue to tweak The Life is Pablo indefinitely is genius". He elaborated, "It encourages people spend time processing an album that deserves it: a bewildering, sprawling, and controversy-courting piece of art." The unconventional updates post-release inspired other artists to do the same, with Future and Young Thug making similar alterations after the release of their albums. However, in The Guardian, Nosheen Iqbal noted the criticism that West faced for updating the album. Brian Welk and Ross A. Lincoln from TheWrap claimed West should have ended the updates after his initial changes to The Life of Pablo three days after its release. In a January 2020 interview with GQ, West explained his continuous updates to the album, saying, "Nothing is ever done."
Musical style
The Life of Pablo was noted by Entertainment Weeklys Madison Vain for its "raw, occasionally even intentionally messy, composition" in contrast to West's previous albums. Compared to his pre-Yeezus work, Robert Yaniz Jr of Cheat Sheet viewed the album as West taking on a sound that is not as accessible and "more self-indulgent". Rolling Stones Rob Sheffield wrote that The Life of Pablo sounds messy, though he expressed the feeling the sound is purposeful to follow on from "the laser-sharp intensity of Yeezus", saying the album is "designed to sound like a work in progress". Carl Wilson of Slate suggested that with the given context of the sonic landscaping throughout The Life of Pablo, the point is that "in West's kamikaze, mood-swinging way, Pablo now seems undeniably (not half-assedly, as I'd been about to conclude) like an album of struggle", noting the strange connections that it created "between Kanye's many iterations—soul-sample enthusiast, heartbroken Auto-Tune crooner, hedonistic avant-pop composer, industrial-rap shit-talker" while making use of bass and percussion lines "that are only the tail-end decay of some lost starting place, some vanished rhythmic Eden". Writing for The Daily Telegraph, Neil McCormick claimed the album sounds like abstract hip hop work and noted the somewhat disjointed sound, while Pretty Much Amazing critic Nathan Wisnicki noted occasional elements of "hyperactive" progressive hip hop.
West described the music on The Life of Pablo as "The gospel according to Ye", explaining that his gospel differs somewhat from what happened in the Bible, "but it's this story idea of Mary Magdalene becoming Mary". Corbin Reiff of The A.V. Club claimed the album only works "as a gospel record if, as a listener, you worship at his altar". Madison Vain described The Life of Pablo as "a gospel album". In Uproxx, Steven Hyden dubbed the album as West's "ecstatically bleary gospel-rap excursion". Gavin Haynes of NME described The Life of Pablo as the point where West suddenly changes direction "from futuristic beats on the likes of 'Feedback' to bog-standard modern trap", with Haynes citing Desiigner's vocals on "Pt. 2" as an example of the latter, while he noted West took on the direction of "vintage soul on 'Ultra Light Beam'. Chance the Rapper and his instrumental collaborator Donnie Trumpet bring elements of soul revivalism into the track during Chance the Rapper's guest verse. Greg Kot of the Chicago Tribune contrasted Chance the Rapper's "gospel-informed hip-hop tracks" with West's take on that tradition, claiming the version of gospel provided by West includes "some of those sonic cues – heavy organ, soaring choirs". However, Kot concluded by describing West as "more preoccupied with gospel text and the notion of redemption". "Ultralight Beam", in particular, has been described as featuring several gospel elements, including "the sound of a 4-year-old preaching gospel, some organ", as well as a church choir singing the refrain of "This is a God dream". Gospel elements similar to those of the song are included in "Low Lights", adding to the general gospel theme. "Father Stretch My Hands, Pt. 1" was described as gospel music in its composition.
Lyrics and themes
Ray Rahman of Entertainment Weekly noted the album's frequent meditations on matters of faith, family, and West's own role as a cultural figure while observing that "Pablo frequently (some might say abruptly) toggles between Sad Kanye and the bombastic and celebratory Kanye". McCormick described West as "constantly veering between swaggering bravado and insecurity bordering on paranoia, smashing the sacred against the profane and disrupting his own flowing grooves with interjections". He claimed the interjections sound as if "they are spilling over from another studio altogether". Referencing West's lyrical performance, Sheffield wrote that he "knows he's got some issues to work on". The Life of Pablo features "gloomy, doomy" discussions of trust issues, antidepressants, and familial problems on tracks such as "FML" and "Real Friends".
Chance the Rapper explained certain lyrics on his "Ultralight Beam" verse are a reference to his "own leadership of all other artists towards independence and freedom". The song itself is focused around West's faith in God. Miles Raymer of GQ wrote that "Father Stretch My Hands, Pt. 1" is "a gospel song about fucking models" and described it as transitioning into "a soul-baring confessional dance track" in "Pt. 2", which includes "two entire verses of an entirely different song about drug-dealing and cars" from Desiigner, with his single "Panda" being sampled. Raymer noted that after Desiigner's vocals, the song resolves "into a meditative piece for vocoder" from contemporary classical composer Caroline Shaw.
The song "Famous" includes the controversial lyric "I feel like me and Taylor might still have sex/Why? I made that bitch famous". The lyric refers to West interrupting Taylor Swift's acceptance speech at the 2009 MTV Video Music Awards. This was heavily publicized and many publications and viewers criticized West. Kot called the song "an example of just how brilliant and infuriating West can be at the same time". Greene wrote that the lyric "feels like a piece of bathroom graffiti" and felt its intention is to "reignite the most racially-charged rivalry in 21st-century pop". Throughout the song, West references the fame and wealth that he's gathered during his career, and he also showcases braggadocio.
"Feedback" features West responding to his critics with the lyric, "Name one genius that ain't crazy" to do so. Raymer wrote the lyric is confirming the two frequent major criticisms of West "that he's an egomaniac and that he's mentally unwell". God and his connection to spirituality are referenced within "Low Lights", with the vocals coming from an unknown woman delivering a sample of Sandy Rivera's performance on the a cappella version of "Save Me" by the duo Kings of Tomorrow. West raps about the newfound fame and fortune in his life after marrying Kim Kardashian in "Highlights". West uses sexually explicit lyrics to describe his fantasies and dreams on "Freestyle 4". The interlude "I Love Kanye" features self-aware a cappella lyrics referencing West's changing public image. The track "Waves" is "uplifting", including braggadocious lyrics mixed with those of a darker tone that reference death or the ending of relationships. Within "FML", West raps about maintaining his loyalty to Kardashian, and the title stands for "Fuck My Life" as well as "For My Lady", as both phrases are mentioned in the song. Raymer claimed that the lyric "You ain't never seen nothing crazier than this nigga when he off his Lexapro" is confirmation of West's major sources of criticism. West touches on trust issues with his family on "Real Friends", which includes lyrics about a cousin blackmailing him.
West shows fear of possibly being viewed as a guilt-ridden son on "Wolves". The song features the lyrics "Cover Nori in lamb's wool/We surrounded by/The fuckin wolves", used by West to offer an image of him and Kardashian as the biblical figures Mary and Joseph. The interlude "Frank's Track" consists of Frank Ocean crooning depressing and dark lyrics. American rapper Max B delivers a voicemail about "good vibes" on "Siiiiiiiiilver Surffffeeeeer Intermission", which is followed by fellow rapper French Montana blurting out the phrase "silver surfer" repeatedly on the interlude, until the phrase is repeated by Max B. The song "30 Hours" includes West delivering the "real life commentary" that he has become known for. West unapologetically declares his greatness in "No More Parties in LA", while fellow rapper Kendrick Lamar adds to the backdrop of the song. "Facts (Charlie Heat Version)" is a Nike diss track that features West bragging about the success of his Yeezy shoes. Forrest Wickman from Slate wrote that "Fade" is where "West, R&B singer-songwriter Ty Dolla Sign, and 'White Iverson' singer Post Malone alternate verses", with Wickman viewing the lyrics as being centered on "trying to hold on to a love that's fading". West raps in a self-reflective way on "Saint Pablo", which also includes him rapping with political edge, humor, and a logically clear through-line.
Promotion and release
West marked his first music release since "All Day" with the release of the promotional single "Facts" on December 31, 2015. A new version of the song was released on The Life of Pablo under the title "Facts (Charlie Heat Version)". On January 8, 2016, Kardashian announced via Twitter the release of "Real Friends", which simultaneously initiated the return of West's GOOD Fridays; West had launched this initiative as a weekly free music giveaway leading up to the release of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Real Friends", featuring vocals by Ty Dolla Sign, was released the day it was announced via West's SoundCloud account with the disclosure of The Life of Pablos release date. As well as debuting the song, West shared a snippet of the forthcoming GOOD Friday release, titled "No More Parties in LA", which features vocals by Kendrick Lamar. On August 16, 2019, "Real Friends" was certified silver in the United Kingdom by the British Phonographic Industry (BPI) for selling 200,000 units. "No More Parties in LA" experienced its proper release the following week, also through SoundCloud. Madlib and West produced the song, which contains a sample of "Suzie Thundertussy" performed by Walter "Junie" Morrison. It was certified gold in the US by the 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 (RIAA) for sales of 500,000 units on August 15, 2018. After a number of delayed premieres, On February 12, 2016, West released a new track, titled "30 Hours", as part of his GOOD Fridays series. The song features vocals by American musician André 3000.
On February 14, West performed "Highlights" and "Ultralight Beam" on Saturday Night Live. That same day, The Life of Pablo was released for streaming exclusively on Tidal through GOOD Music, distributed by Def Jam Recordings. It was made available for purchase for $20 for a few hours, though it reverted to streaming-only afterwards. West announced the album would be available outside of Tidal a week later, while imploring people to sign up for the service. However, the following day, West claimed he would never release The Life of Pablo outside of Tidal, encouraging his fans to sign up for the service. On the same day, Pigeons & Planes claimed the version of the album made available for streaming on Tidal was not its final version. After an active weekend, during which he was finishing The Life of Pablo, West stated he had $53,000,000 in personal debt and called for Facebook founder Mark Zuckerberg to invest $1 billion in his ideas. West also called on other tech billionaires to help him. The album's premier and launch won the awards for Innovation and Integrated Campaign, respectively, at the 2017 Clio Awards.
Streaming and commercial release
The Life of Pablo initially received an exclusive Tidal release on February 14, 2016. West urged the public to download the application to hear the album, which resulted in it temporarily reaching the number one spot on the US App Store. West later tweeted that he "was thinking about not making CDs ever again", and stated that he would never release The Life of Pablo outside of Tidal. The album's initial exclusive release on Tidal resulted in a large increase in subscribers to the service, 250 million streams in the first 10 days, and 400 million streams in the first six weeks before its release to other streaming platforms. Following the Tidal exclusive release, it was announced that "Famous" would be sent to radio stations in the United States on March 28 as the lead single from The Life of Pablo; the song was exclusively released for streaming on Spotify and Apple Music on that date. It peaked at number 34 on the US Billboard Hot 100 and lasted for 14 weeks on the chart. The song was certified double platinum in the US by the RIAA for selling two million units on March 7, 2018. The song reached number 33 on the UK Singles Chart and remained on it for 16 weeks. On January 19, 2018, "Famous" was certified gold in the UK by the BPI for sales of 400,000 units. "I Love Kanye" was the next song from the album to be released on streaming services other than Tidal on March 30, 2016; it also became available on Spotify and Apple Music.
On April 1, 2016, West released an updated version of The Life of Pablo for streaming on Spotify, Apple Music, and Google Play. He also made the album available for purchase on his official website. Though "Father Stretch My Hands, Pt. 1" and "Pt. 2" were released as separate tracks on the album, both parts of the song were serviced to radio stations across the United States as the second single, "Father Stretch My Hands", on June 7. On the Billboard Hot 100, "Father Stretch My Hands, Pt. 1" charted at number 37 and spent 23 weeks on the chart. The song was certified double platinum in the US by the RIAA for sales of two million units on March 7, 2018. It peaked at number 54 on the UK Singles Chart and stayed on the chart for three weeks. The song was certified silver in the UK by the BPI for pushing 200,000 units on October 20, 2017. "Pt. 2" reached number 54 on the Billboard Hot 100 and remained on the chart for three weeks. On February 1, 2018, the song was certified platinum in the US by the RIAA for selling one million units. The song reached number 70 on the UK Singles Chart and remained there for three weeks, tying the chart stay of "Father Stretch My Hands, Pt. 1". "Fade" was released as the third and final single to radio stations in the UK on September 9, 2016, and sent to US radio stations on September 20. On the Billboard Hot 100, the song peaked at number 47 and spent 13 weeks on the chart. It reached number 50 on the UK Singles Chart and remained there for eight weeks. On May 12, 2017, "Fade" was certified silver in the UK by the BPI for selling 200,000 units.
Lawsuit
The release onto other streaming platforms, along with West's claims that the album would remain a permanent Tidal "exclusive" prompted a lawsuit to be filed on April 18, 2016 by law firm Edelson PC. It was filed against West and Jay-Z, who was involved as the owner of Tidal, with each of them being sued for $5 million. The lawsuit was filed on behalf of California resident Justin Baker-Rhett accusing them of false advertising. Seeking class-action status, the lawsuit claimed that Tidal and West never intended to have the album as a Tidal limited exclusive forever, but said so to boost Tidal's struggling subscriber growth; with the lawsuit claiming that Tidal's subscriber numbers tripled following the initial release of the album. The lawsuit also claimed that "Kanye has the power to send one tweet out into the world and get 2 million people to act on it" and suing West "is about holding him accountable when he abuses that power". In January 2019, it was reported the lawsuit had been settled with undisclosed terms; the class action lawsuit did not proceed.
Tour
In August 2016, West embarked on the Saint Pablo Tour in support of The Life of Pablo, two months after announcing it. The performances featured a floating platform, the first time West had used one. West postponed several dates in October following the Paris robbery of his then-wife Kim Kardashian. The remainder of the tour was canceled on November 21, 2016, following controversy over comments West made that week supporting president-elect Donald Trump and public criticism by other artists; fellow rapper Snoop Dogg spoke negatively of West's critical comments. West was admitted for psychiatric observation at the UCLA Medical Center later that month. Before its cancellation, the Saint Pablo Tour was set to run until December 2016.
Artwork and title
On February 11, 2016, West revealed the album's artwork, designed by Belgian artist Peter De Potter. De Potter's level of fame at the time was not as great as that of artists such as George Condo and Takashi Murakami, who had previously designed cover art for West. As De Potter had collaborated with fashion designer Raf Simons in the past, and West had cited him as an influence, there was much speculation that Simons was the reason the two became involved with each other. The artwork was described as a "post-modern cover" and it displays the album's title in all caps, as well as featuring a small family photo in the bottom corner. West shared another cover for The Life of Pablo on the same date with the phrase "which one" on it that was included on the notepad of the final track list, and a cropped photo of British model Sheniz Halil that shows her butt; this artwork was used for the official release. Kim Kardashian reportedly chose Halil for the artwork. After this information was revealed, Halil's Instagram popularity increased. In response to being selected, Halil said in an interview with the New York Daily News that she "couldn't be more flattered and honoured", thanking both West and Kardashian.
By titling his album The Life of Pablo, West confused people as to which Pablo he was referencing with the title. Pablo Escobar, Pablo Neruda, Pablo Picasso and a child named Pablo who famously shouted his support of West for president at the 2015 VMAs were viewed as potential people referenced in the album's title. MTV pointed to the title being in reference to Picasso, as West had said during a 2015 lecture at the University of Oxford that if he "was going to do art, fine art", then he would have aimed "to become Picasso or greater". By writing "Which one?" on his notepad, West hinted that he might not remember the meaning of the title he had chosen. West eventually revealed the meaning during an episode of the American talk show Kocktails with Khloé in April 2016. His sister-in-law Khloé Kardashian asked him, "Who the fuck is Pablo"? He replied the title was inspired by Escobar, Picasso and the Apostle Paul, since Paul translates into Pablo in Spanish. Writing for The Guardian, Jonathan Jones drew an artistic comparison between West and Picasso, claiming that West's sampling of music, "reworking old songs" and "mixing it all up" is similar to the way in which Picasso "first put bits of the real world into modern art".
Critical reception
The Life of Pablo was met with generally positive reviews from music critics. At Metacritic, which assigns a normalized rating out of 100 to reviews from professional publications, the album received an average score of 75, based on 35 reviews. Aggregator AnyDecentMusic? gave it 7.4 out of 10, based on their assessment of the critical consensus.
Rob Sheffield dubbed it both a mess and masterpiece: "This is a messy album that feels like it was made that way on purpose." He elaborated, writing that "West just drops broken pieces of his psyche all over the album and challenges you to fit them together". Corbin Reiff opined that The Life of Pablo "feels far different from any of the tightly constructed, singular works of West's past", asserting instead that "as a beautiful, messy, mixed-up collection of 18 songs, it's a brilliant document". Writing for The New York Times, Jon Caramanica said West "has perfected the art of aesthetic and intellectual bricolage, shape-shifting in real time and counting on listeners to keep up", concluding "this is Tumblr-as-album, the piecing together of divergent fragments to make a cohesive whole". In a highly positive review, Jayson Greene wrote that all of West's work is animated by "a madcap sense of humor", and claimed "The Life of Pablo has a freewheeling energy that is infectious and unique to his discography", finding that it manages to come across "as both his most labored-over and unfinished album, full of asterisks and corrections and footnotes". Robert Christgau of Vice found the record "wittingly casual and easy on the ears", writing that, "unlike Yeezus, it won't top many 2016 lists—it's too blatantly imperfect, too flagrantly unfocused. But that's also its charm, and I prefer it". Spins Greg Tate wrote that "even if Mr. West feels (for now, at least) that his best years as a rap superstar are behind him, there's still hella great beats roaming around that dazed and befuddling noggin per The Life of Pablo for dang sure" and described the album as "long on musical confidence and short on inspirational verses". He viewed the "plaintive vulnerability and alienation" expressed by West as at least seeming "cathartically crafted". Writing for USA Today, Patrick Ryan claimed that even though the album "may not deliver on West's promise of being 'the album of the life', it's undeniably the work of one of music's most boundary-pushing artists and will give fans plenty to unpack".
Ray Rahman was less enthusiastic, calling The Life of Pablo "an ambitious album that finds the rapper struggling to compact his many identities into one weird, uncomfortable, glorious whole". He elaborated, claiming that like West "himself, the album is emotional, explosive, unpredictable, and undeniably thrilling". Alexis Petridis expressed further criticism in The Guardian, finding the album "at turns, rambling, chaotic, deeply underwhelming, impressively audacious, and completely infuriating", suggesting that it "appears to have had ideas thrown at it until it feels messy and incoherent", despite concluding that "when The Life of Pablo is good, it's very good indeed". Neil McCormick wrote, "The Life of Pablo is certainly rich in musical scope, chock a block with inspired ideas", but he felt the work to be "so self-involved it crosses over into self-delusion, marked by such a tangible absence of perspective and objectivity". In a mixed review, Greg Kot expressed the viewpoint that "The Life of Pablo sounds like a work in progress rather than a finished album", though he claimed that "West comes off as a man with hundreds of ideas in play all at once" who lacks any filter.
Rankings
The Life of Pablo appeared on several year-end lists of the best albums of 2016. Dummy ranked the album as the best of 2016, claiming that "it delivered some of the hugest musical moments of the year", noting elements of songs such as "Ultralight Beam" and "Pt. 2". Caramanica also named The Life of Pablo the best album of the year and called it: "A grand, caustic album about grace: finding it, praying for it, falling from it." Time Out London was among the three publications to list The Life of Pablo as the best album of 2016, writing that "the incredible, exciting and daring The Life of Pablo really does show Kanye as a restless, Jobs-esque genius, with a flair for convening talented people and getting exceptional work out of them".
As well as ranking at number three on the Pitchfork Readers' Poll: Top 50 Albums of 2016, the album was voted fifth by readers for both the most underrated and most overrated album of the year. On the Top 50 Songs of 2016 poll, "Ultralight Beam" ranked at number one. "Real Friends" and "No More Parties in LA" also appeared on the list as the 13th and 16th best songs, respectively. In February 2016, Inverse named The Life of Pablo West's best album.
Industry awards
At the 2016 BET Hip Hop Awards, The Life of Pablo was nominated for Album of the Year. The album received a nomination for Best Rap Album at the 2017 Grammy Awards, ultimately losing to Chance the Rapper's third mixtape Coloring Book. At the same ceremony, "Ultralight Beam" and "Famous" were both nominated in the categories of Best Rap/Sung Performance and Best Rap Song. West's failure to win any awards gave him a streak of losing 16 Grammy nominations in a row. Despite The Life of Pablo being more successful in terms of Grammy nominations than Yeezus,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and West's fourth studio album 808s & Heartbreak (2008), several publications viewed the lack of a nomination for Album of the Year as being a snub. Writing for Bustle, Sam Rullo called West's lack of a nomination for the award "so disappointing", though he claimed that "the snub can't be deemed surprising, because it follows in a long tradition of the awards show shying away from his more experimental albums". Rullo also claimed that other tracks from The Life of Pablo should have been nominated in award categories as well as "Ultralight Beam" and "Famous". The Life of Pablo was nominated for Best Album at the 2017 NME Awards. At the 2016 Soul Train Music Awards, the album earned a nomination for Album of the Year.
Commercial performance
After being made available solely on Tidal, The Life of Pablo failed to chart initially because West declined to share the streaming numbers with Nielsen Music. The album was reportedly subject to over 500,000 illegal downloads within 24 hours of its release, becoming the most illegally downloaded album ever and causing a resurgence in the file sharing of music. Despite West asking Tidal to withhold streaming numbers for The Life of Pablo in February, the service revealed in March 2016 that the album was streamed over 250 million times within ten days of being released. In May 2018, the Norwegian newspaper Dagens Næringsliv published an investigative report that accused Tidal of manipulating Beyonce's Lemonade and Kanye West's Life of Pablo streaming numbers. The report claimed that "listener numbers on Tidal have been manipulated to the tune of several hundred million false plays"; the service denied the report.
On April 9, 2016, Billboard reported that after The Life of Pablo had been released to services other than Tidal the album was set to debut atop the US Billboard 200 and had sold 90,000 album-equivalent units at the time. The Life of Pablo was a chart-topping debut, West's seventh consecutive number one studio album in the United States, selling 94,000 album-equivalent units. 28,000 of the album-equivalent units for The Life of Pablo were pure album sales, while the remaining 66,000 units were streaming equivalent albums that equated to over 99 million streams and accounted for 70% of the units. This stood as the first time an album had topped the Billboard 200 with the majority of the units coming from streaming equivalent albums, surpassing the previous benchmark of 44.6% set by Rihanna's eighth studio album Anti (2016). The Life of Pablos 66,000 streaming equivalent albums stood as the second highest streaming sum behind the 67,000 by Canadian singer Justin Bieber's fourth studio album Purpose (2015).
In its second week on the Billboard 200, The Life of Pablo descended three places to number four and pushed 47,000 album-equivalent units, experiencing a 50% decline from the first week's sales. The album dropped 95% in pure album sales, selling around 1,000 copies. The album ranked as the 27th most popular album of 2016 on the Billboard 200, while ranking at number 88 on the US Top R&B/Hip-Hop Albums chart for that year. On April 4, 2017, The Life of Pablo was certified platinum in the US by the RIAA for sales of one million album-equivalent units, 798,000 of which had been sold up to January 1. Though it had been confirmed that the RIAA do not break out the components of any certifications, West's label Def Jam confirmed the album was certified from streaming-only. This made it stand as the first streaming-only album to go platinum in the US and also gave West his eighth album to achieve an RIAA certification of platinum or higher. The album was certified double platinum in the US by the RIAA for selling two million album-equivalent units on February 27, 2020.
The Life of Pablo debuted at number one on the Norwegian Albums Chart and remained on it for 62 weeks, giving West his first chart-topping solo album in Norway as well as his longest-charting album there. The album peaked at number two on the Swedish Albums chart, standing as West's highest charting album in Sweden and ultimately ranking as the 55th most popular album of 2016 on the chart. In Denmark, The Life of Pablo attained the same peak position on the Danish Albums chart. The album ranked as the 12th most popular album of 2016 on the chart. On November 12, 2018, The Life of Pablo was certified double platinum in Denmark by IFPI Danmark for shipments of 40,000 copies. The album debuted on the Finnish Albums (Top 50) chart at number 12 and climbed seven places to number five in its second week on the chart. On the Canadian Albums Chart, The Life of Pablo entered at number six and ranked as the 40th most popular album of 2016 on the chart. In the week of Jesus Is Kings release in 2019, The Life of Pablo rose 93 places from number 159 to number 66 on the Canadian Albums chart, increasing in consumption units by 51%. The album reached number eight on the Dutch Album Top 100 and ranked as the 72nd most popular album on the chart in 2016. The same position was attained by The Life of Pablo on the Irish Albums Chart. On the UK Albums Chart, the album charted at number 30. It stood as West's eighth top 40 album in the UK and spent 47 weeks on the chart. The Life of Pablo was certified gold in the UK by the BPI on March 3, 2017, for sales of 100,000 album-equivalent units that were the results of streams, becoming the first album to ever do so in the country. Official Charts data reported that the 100,000 units required for being gold accounted to each song being streamed an average of 10.5 million times and that the album equivalent streams amounted to 100,316.
The same week that The Life of Pablo debuted on the Billboard 200, 12 of the tracks appeared on the US Hot R&B/Hip-Hop Songs chart, with "Famous" charting the highest at number 13. However, since the song had debuted on the chart a week prior, only 11 of the 12 tracks entered the Hot R&B/Hip-Hop Songs that week; the entry of "Father Stretch My Hands, Pt. 1" at number 14 stood as the highest debut. Eight of the tracks debuted on the Billboard Hot 100, with "Famous" having the highest entry at number 34. The tracks appearing on the charts lead to West reaching a new peak of number three on the Billboard Artist 100, which was the first time he reached the top ten of the chart. On the UK Singles Chart, nine of the tracks charted upon the album's release, with "Famous" having the highest debut by opening at number 33.
Track listing
Notes
signifies a co-producer
signifies an additional producer
"Ultralight Beam" features vocals by Chance the Rapper, Kirk Franklin, The-Dream, and Kelly Price, and additional vocals by Natalie Green and Samoria Green
"Father Stretch My Hands Pt. 1" features vocals by Kid Cudi and Kelly Price
"Pt. 2" features vocals by Desiigner and Caroline Shaw
"Famous" features vocals by Rihanna and Swizz Beatz
"Highlights" features vocals by Young Thug, and additional vocals by The-Dream, El DeBarge, and Kelly Price
"Freestyle 4" features vocals by Desiigner
"Waves" features vocals by Chris Brown and Kid Cudi
"FML" features vocals by The Weeknd, and additional vocals by Caroline Shaw
"Real Friends" features vocals by Ty Dolla Sign
"Wolves" features vocals by Vic Mensa, Sia, and Caroline Shaw
"Frank's Track" features uncredited vocals by Frank Ocean
"Siiiiiiiiilver Surffffeeeeer Intermission" features vocals by Max B and French Montana
"30 Hours" features background vocals by André Benjamin
"No More Parties in LA" features vocals by Kendrick Lamar
"Fade" features vocals by Post Malone and Ty Dolla Sign
"Saint Pablo" features vocals by Sampha
Sample credits
"Father Stretch My Hands, Pt. 1" contains samples of "Father I Stretch My Hands", written and performed by Pastor T. L. Barrett featuring Youth for Christ.
"Pt. 2" contains samples of the song "Panda", written by Sidney Selby III and Adnan Khan, and performed by Desiigner; samples of "Father I Stretch My Hands", written and performed by Pastor T. L. Barrett featuring Youth for Christ; and contains a sound effect from the video game Street Fighter II: The World Warrior.
"Famous" contains samples of "Do What You Gotta Do", written by Jimmy Webb and performed by Nina Simone; samples of "Bam Bam", written by Winston Riley and performed by Sister Nancy; and samples of "Mi Sono Svegliato E... Ho Chiuso Gli Occhi", written by Luis Bacalov, Sergio Bardotti, Giampiero Scalamogna, and Enzo Vita, and performed by Il Rovescio della Medaglia.
"Feedback" contains samples of "Talagh", written by Ardalan Sarfaraz and Manouchehr Cheshmazar, and performed by Googoosh.
"Low Lights" contains samples of "So Alive (Acapella)", written by Sandy Rivera and performed by Kings of Tomorrow.
"Freestyle 4" contains samples of "Human", written by Alison Goldfrapp, Robert Locke, Timothy Norfolk, and William Gregory, and performed by Goldfrapp.
"Waves" contains samples and elements of "Fantastic Freaks at the Dixie", written by Fred Bratwaithe, Robin Diggs, Kevin Ferguson, Theodore Livingston, Darryl Mason, and James Whipper, and performed by Fantastic Freaks.
"FML" contains interpolations of "Hit", written by Lawrence Cassidy, Vincent Cassidy, and Paul Wiggin, and performed by Section 25.
"Real Friends" contains interpolations of "Friends", written by Jalil Hutchins and Lawrence Smith, and performed by Whodini.
"Wolves" contains samples of "Walking Dub", written and performed by Sugar Minott.
"30 Hours" contains samples of "Answers Me", written and performed by Arthur Russell; interpolations of "Hot in Herre", written by Cornell Haynes, Pharrell Williams, and Charles Brown, and performed by Nelly; interpolations of "EI", written by Cornell Haynes and Jason Epperson, and performed by Nelly; and samples of "Joy", written and performed by Isaac Hayes.
"No More Parties in LA" contains samples of "Give Me My Love", written and performed by Johnny "Guitar" Watson; samples of "Suzie Thundertussy", written and performed by Walter "Junie" Morrison; samples of "Mighty Healthy", written by Herbert Rooney, Ronald Bean, Highleigh Crizoe, and Dennis Coles, and performed by Ghostface Killah; and samples of "Stand Up and Shout About Love", written by Larry Graham Jr., Tina Graham, and Sam Dees, and performed by Larry Graham.
"Facts (Charlie Heat Version)" contains samples of "Dirt and Grime", written by Nicholas Smith and performed by Father's Children; interpolations of "Jumpman", written by Aubrey Graham, Leland T. Wayne, and Nayvadius D. Wilburn, and performed by Drake and Future; and contains elements of the video game Street Fighter II: The World Warrior.
"Fade" contains samples of "(I Know) I'm Losing You", written by Eddie Holland, Norman Whitfield, and Cornelius Grant, and performed by Rare Earth; samples of "(I Know) I'm Losing You", written by Eddie Holland, Norman Whitfield, and Cornelius Grant, and performed by The Undisputed Truth; samples of "Mystery of Love", written by Larry Heard and Robert Owens, and performed by Mr. Fingers; samples of "Deep Inside", written by Louie Vega and performed by Hardrive; samples of "I Get Lifted (The Underground Network Mix)", written by Louie Vega, Ronald Carroll, Barbara Tucker, and Harold Matthews, and performed by Barbara Tucker; and contains an interpolation of "Rock the Boat", written by Stephen Garrett, Rapture Stewart, and Eric Seats, and performed by Aaliyah.
"Saint Pablo" contains samples of "Where I'm From", written by Shawn Carter, Deric Angelettie, Ronald Lawrence, and Norman Whitfield, and performed by Jay-Z.
Personnel
Credits adapted from West's website and Tidal.
Technical
Andrew Dawson – engineering (1–8, 10, 11, 13, 16–20)
Mike Dean – engineering (1–8, 10, 11, 13, 16, 18–20), mastering (all tracks)
Noah Goldstein – engineering (1–13, 16–20), mixing (9, 14, 15)
Anthony Kilhoffer – engineering (1–8, 10, 11, 13, 16, 18–20)
Mike Malchicoff – engineering (1, 7)
Nathaniel Alford – engineering (7)
Dee Brown – engineering (7)
Alex Tumay – engineering (7)
Tom Kahre – engineering (8, 10)
Ty Dolla Sign – engineering (12)
French Montana – engineering (15)
MixedByAli – engineering (17)
Manny Marroquin – mixing (1–8, 10–13, 16–20)
Kez Khou – mix assistance (7, 13)
Chris Galland – mix assistance (12, 17, 20)
Jeff Jackson – mix assistance (12, 17, 20)
Ike Schultz – mix assistance (12, 17, 20)
Kuk Harrell – vocal production for Rihanna (4)
Zeke Mishanec – vocals recording for Swizz Beatz (4)
Marcos Tovar – vocals recording for Rihanna (4)
Shin Kamiyama – vocals recording for The Weeknd (11)
Joe Balaguer – vocals assistance for Rihanna (4)
Musicians
Mike Dean – keyboards (1, 2, 7, 11, 12), bass guitar (1), Moog modular (2), vocoder (16)
Donnie Trumpet – trumpets (1)
Anthony Evans – choir contracting (1)
Shanika Bereal – choir (1)
Kenyon Dixon – choir (1)
Aaron Encinas – choir (1)
Crystal Lewis Ray – choir (1)
LaKesha Shantell – choir (1)
Tiffany Stevenson – choir (1)
Chavonne Stewart – choir (1)
Rachel Whitlow – choir (1)
George Young – choir (1)
Greg Phillinganes – keyboards (7)
Design
Virgil Abloh – assistant creative direction
Peter De Potter – album artwork design
DONDA – art direction
Joe Perez
Mark Seekings
Justin Saunders
Nate Brown
Ryan Dwyer – photography
Sheniz H – photo model
Kanye West – creative direction
Charts
Weekly charts
Year-end charts
Decade-end charts
Certifications
Release history
See also
2016 in hip hop music
GOOD Fridays
List of Billboard 200 number-one albums of 2016
List of number-one albums in Norway
References
External links
2016 albums
Albums produced by Allen Ritter
Albums produced by Boi-1da
Albums produced by Cashmere Cat
Albums produced by DJDS
Albums produced by Frank Dukes
Albums produced by Havoc (musician)
Albums produced by Hudson Mohawke
Albums produced by Kanye West
Albums produced by Karriem Riggins
Albums produced by Madlib
Albums produced by Metro Boomin
Albums produced by Mike Dean (record producer)
Albums produced by Plain Pat
Albums produced by Rick Rubin
Albums produced by Southside (record producer)
Albums produced by Swizz Beatz
Albums recorded at Noble Street Studios
Def Jam Recordings albums
GOOD Music albums
Gospel albums by American artists
Kanye West albums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8D%94%ED%8C%A8%EB%93%9C | 이더패드 | 이더패드(Etherpad, 과거 명칭: EtherPad)는 저자들이 텍스트 문서를 동시에 편집하고 실시간으로 모든 참여자의 편집을 보며 각 저자의 텍스트를 자신들만의 색으로 표시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는 오픈 소스 웹 기반 협업 실시간 편집기이다. 또, 사이드바에는 메타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채팅 상자가 있다.
2008년 11월 처음 런칭된 이 소프트웨어는 2009년 12월 구글에 인수되었으며 그 달 후반에 오픈 소스로 출시되었다. 추가 개발은 이더패드 재단에 의해 조율되고 있다.
기능 및 구현
누구든지 패드(pad)라는 이름의 새로운 협업 문서를 만들 수 있다. 각 패드는 저만의 URL이 있으며 이 URL을 알고 있다면 누구든지 패드를 수정하고 관련 채팅에 참여할 수 있다. 패드를 비밀번호로 보호할 수도 있다. 각 참여자는 색과 이름으로 식별된다.
이 소프트웨어는 정기적이고 짧은 주기로 문서를 자동 저장하지만 참여자들은 언제든지 특정 판(체크포인트)를 영구적으로 저장할 수 있다. 변경사항을 병합하는 일은 운영 형식을 통해 관리된다. 타임 슬라이더(time slider) 기능을 통해 누구든지 패드의 역사를 둘러볼 수 있다. 문서는 플레인 텍스트, HTML, 오픈도큐먼트,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PDF 포맷으로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자동화된 자바스크립트 코드 마크업은 런칭 직후 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더패드 자체는 앱젯 플랫폼 위에 자바스크립트로 구현되어 있으며 코멧 스트리밍을 통해 수행되는 실시간 기능이 포함된다.
런칭 당시 이더패드는 진정한 실시간 성능을 달성하는 유형의 첫 웹 애플리케이션이었으며, 당시 이 기능은 서브에사에딧 (맥용), Gobby, 문에디트(둘 다 크로스 플랫폼) 등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들만이 지원하였다. 당시의 기존의 협업 웹 편집기들은 실시간에 가까운 성능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더패드와 이더패드 라이트 포크(fork)의 클라이언트 사이드의 문서 편집기는 자바스크립트로 작성된 앱젯의 인 브라우저 텍스트 편집기를 사용하여 구현되어 있다.
런칭
이더패드는 2008년 11월 19일 데이비드 그린스펀(David Greenspan), 아론 이바(Aaron Iba), J.D. Zamfirescu(후자 2명은 전 구글 직원이었음)에 의해 런칭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전 구글 직원 대니얼 클레멘스와 디자이너 데이비드 콜에 의해 합류되었다. 오리지널 웹사이트는 etherpad.com이었다.
이더패드는 2008년 11월 21일 슬래시닷에 커버되었으며, 서버 속도 저하 및 다운타임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개발자들은 일시적으로 이 도구를 클로즈드 베타로 되돌림으로써 서버 인프라가 개선되는 동안 새로운 패드들이 생성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패드들에 대한 접근은 제한 없는 온전한 접근이 가능하였음)
소프트웨어의 재작성이 완료된 이후 새로운 버전이 2009년 1월 29일 활성화되었으며, 2월 3일 사이트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인수
아파치 웨이브가 발표되었을 때 이더패드 팀은 팀 블로그에 두 플랫폼 간의 차이를 기술하였으며 미니멀리스트와 대상 이더패드 인터페이스가 일부 유스 케이스에서 장점이 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2009년 12월 4일 이더패드는 자체 블로그에서 구글 웨이브로 통합하기 위해 구글에 의해 인수되었음을 발표하였다. 기존의 이더패드 사용자들은 구글 웨이브의 초대를 받게 된다.
2010년 3월 31일, 이더패드는 새로운 패드의 생성이 4월 14일까지 가능하고(그러나 패드 생성은 4월 18일 기준으로도 계속 가능하였음) 기존의 패드들은 5월 14일까지 접근 및 사용이 가능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다운로드/내보내기를 위한 옵션의 사용이 가능하였다. 이더패드 서비스는 5월 14일 종료되었다.
오픈 소스
구글은 2009년 12월 17일 아파치 라이선스 버전 2.0으로 이더패드의 소스 코드를 출시하였다.
구글은 라이선스 조항을 이유로 이더패드 코드 유지보수자들에게 코드 트리에서 JSMin을 제거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구글 디벨로퍼스에서 허용되는 오픈 소스 라이선스와 호환되지 않기 때문이었으며 "소프트웨어는 악이 아닌 선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좋다"고 언급하였다.
소프트웨어를 오픈 소스로 출시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은 이더패드 서버를 구축하였는데, 이는 오리지널 웹사이트의 클론이었다. 머지 않아 이더패드의 사용자들과 프로그래머들은 프리노드의 #etherpad 채널에서의 초기 회의 이후 추가 개발을 조율하기 위해 이더패드 재단을 설립하였다. 웹사이트는 이더패드 소프트웨어를 구동하는 수많은 사이트의 목록을 관리하고 있다.
이더패드 라이트
이더패드 라이트(Etherpad Lite)는 오리지널 이더패드 소프트웨어를 거의 완전히 다시 작성한 것으로, 다른 기술 재단들에 기반을 두면서 다른 개발자들이 작성한 것이다. 오리지널 이더패드가 자바와 스칼라로 작성되었고 상당한 시스템 요구사항을 요구하는 반면, 이더패드 라이트는 Node.js를 사용하는 서버사이드 자바스크립트로 작성되었다. 이지싱크(Easysync)라는 이름의 오리지널 실시간 동기화 라이브러리는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되었다.
각주
협업 실시간 편집기
구글 인수 기업
자바 플랫폼
자바스크립트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 https://en.wikipedia.org/wiki/Etherpad | Etherpad | Etherpad (previously known as EtherPad) is an open-source, web-based collaborative real-time editor, allowing authors to simultaneously edit a text document, and see all of the participants' edits in real-time, with the ability to display each author's text in their own color. There is also a chat box in the sidebar to allow meta communication.
First launched in November 2008, the software was acquired by Google in December 2009, and released as open source later that month. Further development is coordinated by the Etherpad Foundation.
Features and implementation
Anyone can create a new collaborative document, known as a "pad". Each pad has its own URL, and anyone who knows this URL can edit the pad and participate in the associated chats. Password-protected pads are also possible. Each participant is identified by a color and a name.
The software auto-saves the document at regular, short intervals, but participants can permanently save specific versions (checkpoints) at any time. Merging of changes is handled by operational transform. A "time slider" feature allows anyone to explore the history of the pad. The document can be downloaded in plain text, HTML, Open Document, Microsoft Word, or PDF format.
Automated markup of JavaScript code was made available shortly after the launch.
Etherpad itself is implemented in JavaScript, on top of the AppJet platform, with the real-time functionality achieved through Comet streaming.
At the time of its launch, Etherpad was the first web application of its kind to achieve true real-time performance, a feat previously only achieved by desktop applications such as SubEthaEdit (for Mac), Gobby, or MoonEdit (both cross-platform). Existing collaborative web editors at the time could only achieve near-real-time performance.
The client-side text editor in Etherpad and its Etherpad Lite fork is implemented using Appjet's in-browser text editor, written in JavaScript.
Launch
Etherpad was launched on November 19, 2008 by David Greenspan, Aaron Iba, and J.D. Zamfirescu (the latter two being former Google employees).
They were later joined by former Googler Daniel Clemens and designer David Cole. The original website was etherpad.com.
Etherpad was covered by Slashdot on November 21, 2008, resulting in server slowdown and downtime. This led the developers to temporarily revert the tool to closed beta, not allowing new pads to be created (but providing full and unrestricted access to the existing ones), while the server infrastructure was being improved.
After the rewrite of the software was completed, the new version went live on 29 January 2009, and on February 3, the site became again open to all.
Acquisition
When Google Wave was announced, the Etherpad team wrote on their blog comparing the two platforms and stating that the minimalist and targeted Etherpad interface could be an advantage in some use cases.
Still, on 4 December 2009, Etherpad announced on its blog that it had been acquired by Google for integration into Google Wave. Existing Etherpad users would receive invites for Google Wave.
On 31 March 2010, Etherpad announced that creation of new pads would be allowed until April 14 (pad creation was still allowed as of April 18, though) and existing pads could still be accessed and used until May 14. Options for download/export were available. The Etherpad service terminated on May 14.
Open source
Google released the source code for Etherpad under the Apache License version 2.0 on December 17, 2009.
Subsequently, Google asked the Etherpad code maintainers to remove JSMin from its code tree due to a clause in its license stating, "The Software shall be used for Good, not Evil," which is not compatible with the open source licenses allowed on Google Code.
After the release of the software as open source, a number of people have set up Etherpad servers, as clones of the original website. Soon after, users and programmers of Etherpad, after an initial meeting, created the Etherpad Foundation to coordinate further development. Their website maintains a list of a growing number of sites that run the Etherpad software.
Etherpad Lite
Etherpad Lite is an almost complete rewrite of the original Etherpad software, based on different technical foundations and written by different authors.
While the original Etherpad is written in Java and Scala and has quite demanding system requirements, Etherpad Lite is written in server-side JavaScript using Node.js. The original realtime synchronization library (called Easysync) remains the same.
Etherpad Lite has some distinctive features which are not available in the original version:
An HTTP API which allows the user to interact with the pad contents, and with user and group management
A jQuery plugin exists which helps embedding the collaborative editor in other sites
Clients for PHP, Python, Ruby, JavaScript, Java, Objective-C and Perl which interface with the API.
More than 50 plugins, among them email_notifications, invite_via_email, offline_edit, fileupload, tables or rtc for video calls based on WebRTC.
Etherpad Lite offers a number of export formats, including LaTeX, but , not Markdown.
But there is an official addon to export in markdown. Etherpad Lite supports many natural languages. Localization is achieved collaboratively through translatewiki.net.
See also
Collaborative real-time editor
Real-time text
Sync.in — an application based on Etherpad
References
Collaborative real-time editors
Google acquisitions
Java platform
Free software programmed in JavaScript |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C%9A%94%ED%83%80%20%ED%81%AC%EB%A0%88%EC%8A%A4%ED%83%80 | 토요타 크레스타 | 토요타 크레스타(Toyota Cresta)는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 토요타 자동차가 생산 및 판매한 고급 중형 승용차이다. 형제 차종으로 체이서와 마크 Ⅱ가 있었다. 생산은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시 모토마치 공장에서 진행했으며, 판매는 오로지 토요타 오토 스토어(나중에 비스타 스토어로 변경)에서만 진행했다. 다만 오키나와현에서는 비스타 딜러가 없어서 도요타 오키나와 딜러에서 판매했다.
1세대(X50/X60)
경쟁 차종인 닛산 로렐을 대항할 목적으로 1980년 4월에 출시되었다. 출시 당시의 코드네임은 X50였다. 형제 차종인 체이서, 마크 Ⅱ와는 달리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졌으며, 오로지 4도어 하드탑 세단만 선보였다. 4개의 사각형 모양을 가진 전조등과 스퀘어 컷 형식의 후미등이 장착되었다. 트림의 경우 슈퍼 루센트, 슈퍼 투어링, 슈퍼 디럭스, 슈퍼 커스텀, 커스텀으로 구성되었다.
엔진의 경우 SOHC 2.0L M-EU 엔진과 2.0L 1G-EU 직렬 6기통이 각각 장착되었는데, 이 엔진들은 상급 모델인 크라운에도 사용되었다. 변속기는 4단 자동이 장착되었다.
1982년 8월에 마이너 체인지를 감행하여 코드네임이 X60으로 바뀌었고, 전조등 모양 2개로 변경되면서 안개등이 추가되었다.
1983년 8월에 당시 회장이었던 도요다 에이지가 국제 시장을 위한 세계적인 고급 세단 생산을 목표로 하는 F1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결과로 출시된 차량은 렉서스 LS(1989년 출시)였다.
2세대(X70)
1984년 3월 8일에 출시되었다. 형제 차종인 X70계 마크 Ⅱ와 플랫폼을 공유했으며, 변속기는 4단 자동이 장착되었다.
엔진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1988 cc 1G-EU I6
1988 cc M-TEU 터보 I6
1988 cc 1G-GEU DOHC 24V I6
1988 cc 1G-GTEU
2446 cc 2L 디젤 I4
2446 cc 2L-T TD I4
1세대에 있었던 2.2L 디젤 엔진은 2.4L로 대체되었다.
1985년 4월에는 특별 한정 사양인 엑시드가 선보였고, 10월에는 트윈 터보 1G-GTEU 엔진이 탑재된 GT트림이 출시되었다.
1986년 8월에는 부분 변경을 통해 앞범퍼에 안개등이 장착되었다.
3세대(X80)
1988년 8월에 출시되었으며, 하드톱 스타일이 일반적인 세단 형태로 바뀌었다. 엔진은 1G-GZE, 1G-FE, 1G-GTE, 7M-GE, 1JZ-GE, 1JZ-GTE, 2L-T 디젤이 각각 장착되었다. 그 중에서 출시 당시에 최고급 트림이었던 수퍼 루센트 G는 1G-GZE 엔진이 장착되었고, 1JZ-GE, 1JZ-GTE 엔진은 형제 차종인 체이서와 플랫폼을 공유했다.
1989년 1월에 슈퍼 루센트의 하위 사양인 슈퍼 커스텀 엑스트라가 추가되었고, 8월에는 3.0L 7M-GE형 엔진을 탑재한 3.0 슈퍼 루센트 G가 추가되었다. 기존의 4륜 ESC (ABS) 외에 TRC도 기본으로 장착됨과 동시에 새로운 색상도 조금 추가되었다. 10월에는 슈퍼 루센트 엑시드가 선보였다.
1990년 4월에는 크레스타 출시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 한정 사양인 10주년 기념 익시드가 선보였다. 이 사양은 3.0 슈퍼 루센트 G 트림에 알루미늄 휠, 펄 화이트 바디 컬러 등이 추가된 것 정도 밖에 없다. 7월에는 10주년 기념 슈퍼 커스텀 엑스트라가 선보였고, 8월에 마이너 체인지를 감행하였다.
4세대(X90)
1992년 10월에 출시되었다. 형제 차종인 마크 II, 체이서와 함께 일부 트림이 추가되고, 차체 크기도 증가됐다.
엔진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1.8L 4S-FE I4
2.4L 2L-TE 터보 디젤 I4
2.0L 1G-FE I6
2.5L 1JZ-GE I6
3.0L 2JZ-GE I6
2.5L 1JZ-GTE 트윈 터보 I6
온도 조절 장치, 사이드 임팩트 바 등이 기본적으로 적용됐다. 수퍼 루센트의 경우의 편의사양은 ABS, 15 인치 휠, 크루즈 컨트롤 등이 적용되었고, 투어러의 경우에는 2.5L 1JZ-GE 엔진이 장착되었다. 변속기는 4단 자동과 5단 수동이 각각 장착되었다. 트림 명칭의 일부가 바뀌었는데, 슈퍼 커스텀 엑스트라는 슈필, 슈퍼 커스텀은 SC로 개명되었다.
1993년 10월에 역대 크레스타 최초로 4륜구동이 선보였는데, 트림명은 각각 슈퍼 루센트 Four, 슈퍼 루센트 G Four였다. 1994년 9월에는 마이너 체인지를 통해 프론트 그릴 및 범퍼와 테일 램프의 형태가 변화되었다. 1995년 9월에 모든 사양에 운전석 에어백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었다.
역대 크레스타 중에서 튜너나 마니아들이 가장 인기가 많은 차종이기도 했다.
5세대(X100)
1996년 9월에 출시되었다. 역대 크레스타 중 차체 크기가 가장 컸다.
엔진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3.0 L 2JZ-GE I6
2.5 L 1JZ-GE I6
2.5 L 1JZ-GTE 터보차지 I6
2.0 L 1G-FE I6
2.4 L 2L-TE 터보차지 디젤 I4
1998년 9월에 부분 변경을 감행하였고, 2001년 7월에 후속 차종인 베로사가 출시되어 체이서와 함께 단종되었다.
크레스타
크레스타
크레스타
크레스타
크레스타
크레스타
크레스타
크레스타
크레스타 | https://en.wikipedia.org/wiki/Toyota%20Cresta | Toyota Cresta | The is a mid-size car built by Toyota. It was launched in 1980 and shared the chassis with the Mark II/Cressida, sold at Toyopet Store dealerships in Japan. The goal of the Cresta was a higher level of luxury in comparison to the Mark II, while the Chaser was the performance-oriented version of the Mark II, but sold at different dealerships. Often available with two-tone paint and more interior convenience options, with the result ending up being more similar to the Cressida sold in export markets. The Cresta was produced for five generations, and production eventually ceased in 2001, when it was merged with the Chaser to form the short lived Verossa.
The name "Cresta" is Italian/Spanish for "crest", a type of ornament found on a helmet.
X50-X60 series (1980–1984)
The first Cresta was introduced April 1980 and was available exclusively at the renamed Toyota Vista Store (formerly Toyota Auto Store) sales channels across Japan, joining the X40 Chaser. The Cresta was positioned as a high-level luxury sedan just below the established, traditional luxury sedan, the Crown. The sales goal of the Cresta was to provide buyers with a luxury sedan, but not incur tax consequences for exceeding dimension regulations, the vehicle was limited to an engine size at 2000cc as well as dimensions under long, wide, and high, and allowing another Toyota dealership network to offer a luxury-sports oriented product originally exclusive to Toyota Store and Toyopet Store locations. The Cresta was introduced with halogen headlights to provide a modern European appearance, and was available with a full range of luxury amenities and conveniences. The SOHC 2.0 L M-EU engine was used with an automatic transmission only, which was shared with the Crown, as well as the 2.0L 1G-EU straight six engine, also used in the Crown. Trim levels used names meant to suggest luxury overtones, such as Super Lucent, Super Touring, Super Deluxe, Super Custom, and Custom, names that were similarly used on the Crown. Upper level trim levels used two-tone paint schemes to further the Cresta's elevated status towards a younger demographic. The Nissan competitor was the Laurel.
This new luxury approach was well received with buyers. In August 1983, Toyota chairman Eiji Toyoda initiated the F1 project ("Flagship" and "No. 1 vehicle"; alternatively called the "Circle-F" project), a clandestine effort aimed at producing a world-class luxury sedan for international markets. This led to the creation of an all new, full size luxury sedan designed for export markets, called the Lexus LS.
X70 series (1984–1988)
The X70 series was introduced March 8, 1984, with styling cues shared with the platform sharing Mark II, with the Cresta now offered as a 4-door, 4-window sedan (with window frames) while the X70 Mark II was offered as a 4-window hardtop bodystyle similar to the Chaser, alongside a 6-window style Mark II sedan. The Cresta has a distinct, creased rear windshield. The X70 series continued to enjoy the popularity enjoyed by the first generation Cresta. Power side view mirrors were now installed western style at the leading edge of the front doors instead of on the front fenders above the front wheels to provide a more modern appearance, and retracted electrically for confined parking spaces. The 2.2-litre diesel engine used in the first generation was upgraded to one with 2.4 litres displacement.
Styling upgrades and engine changes were introduced in 1985. The twin turbo 1G-GTEU was introduced in October 1985, with the trim level designation GT Twin Turbo. As a result of the twin turbo introduction, the M-TEU engine was no longer offered. Foglights imbedded in the front bumper were made standard equipment, with another minor styling upgrade August 1986.
X80 series (1988–1992)
The third generation was introduced March 8, 1988, with a transition away from straight edges previously used by Toyota products of the period and it was no longer a hardtop sedan. The top-of-the-line model, called the Super Lucent G included a supercharger equipped 1G-GZE engine. The 1JZ-GE and 1JZ-GTE were shared with the Chaser. Special anniversary trim levels were introduced May 1990, with a body refresh introduced later that year.
X90 series (1992–1996)
The X90 Cresta debuted in 1992 with significant styling and mechanical changes over the X80. The car increased in size and gained some new trim levels similar to its sister cars, the Mark II and Chaser. Engines were carried over from the past generation albeit without the 7M or supercharged 1G I6's. Toyota also changed the front grille and taillight design in 1994. Under Japanese exterior dimension regulations, this series was no longer regarded as a "compact car".
The X90 Cresta was offered in 4 primary trim levels throughout its run (the SC, Suffire, Super Lucent and Tourer), each with their own options and even more specific trim categorizations. All cars shared common longitudinal layout architecture as well as certain options standard, like automatic climate control and side-impact bars, not to mention driver-side airbags in 1995. The base trim level SC had very little in terms of options; it was powered by either a petrol or diesel engine mated to a 4-speed automatic. The next level Suffire had the same options available (or lack thereof) as the SC plus an optional 5-speed manual.
The Super Lucent however was a much different story: this trim offered 3 different straight 6 engines from 2.0L-3.0L mated to an electronically controlled 4-speed automatic with options like a moon roof or a factory LSD. Further differentiating Super Lucent models was the "G" package, which featured options like ABS, 15-inch wheels, Cruise control, Digital Instrument cluster, and leather interior. Permanent 4WD was offered as an option in 1993. The various sized engine displacements gave Japanese buyers choices as to which annual road tax obligation they were willing to pay.
The Tourer trim levels all featured a 2.5L 1JZ straight 6, but with a few differences. The Tourer S had a naturally aspirated engine and only a 4-speed automatic whereas the Tourer V's came with a pair of turbochargers and the option of an R154 5-speed manual. All Tourers had front- and rear-stabilizer bars but only the Tourer V's came with traction control, ABS and an LSD standard. Tourer V's were very popular amongst enthusiasts and drifters due to their stiff chassis, price point compared to other RWD/Turbo Toyota's, and power-to-weight ratio.
X100 series (1996–2001)
In 1996 the X100 series was released. Although the dimensions are extremely similar to the X90 series, the X100 series Cresta boasts an extra in weight, in part because of stricter safety regulations.
Predecessor to the Toyota Verossa, the new Cresta X100 series started its differences from the X90 series with an updated front and rear end. The new generation Cresta also lost its previous generation's 1.8L 4S-FE I4 engine option.
The Cresta, along with the Chaser, ceased production in 2001 (the Mark II saw one more generation, the X110, before production ceased in 2004) to make way for its replacement, the Toyota Verossa.
The Cresta came in four different trim levels: SC, Exceed, Super Lucent, and Roulant.
In popular culture
The car is notable for featuring in the anime and manga Great Teacher Onizuka, in which it is owned by Hiroshi Uchiyamada, whose car gets destroyed multiple times after a series of mishaps.
References
External links
Toyota Cresta Technical Wikipedia (@ JZX World – jzx100.com)
1990s cars
2000s cars
Cresta
Luxury vehicles
Sports sedans
Cars introduced in 1980
Cars discontinued in 2001 |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A%B0%95%ED%95%B4%EC%A0%84 | 마강해전 | 마강해전(馬江海戰) 또는 마미해전(馬尾海戰)은 청불전쟁의 서전을 기록한 전투이다. 프랑스 해군의 아메데 쿠르베 제독은 프랑스 극동함대를 이끌고 청나라 복건수사와 복주선정국을 괴멸시켰다.
배경
베트남 진출을 목표로 했던 프랑스와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종주국을 주장하던 청나라와의 반목은 베트남 내에서의 필연적인 충돌을 야기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좋은 전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 했다. 청나라의 온건파 이홍장은 1884년 5월 11일 청나라군의 철수, 통킹을 분할한 무역로의 확정 등을 동의한 〈톈진 협약〉(리-푸르니에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협약 조항의 해석에 대한 양국의 상당한 인식차가 생기면서, 청나라 국내의 주전파가 큰 목소리를 내게 되었고, 박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프랑스에서 개전론이 높아졌고, 1884년 7월 12일 프랑스 함대 8척을 복주 근해인 신성탑에 정박시켜 두고 민강을 봉쇄했다.
청나라의 복건수사는 복주의 마미항에 양무(揚武) · 복파(伏波) 등 13척의 군함을 대기시켜 두고 있었지만, 복주 선정대신 하여장과 복건 군무위원회 장패륜은 개전을 피하려는 길을 찾고 있었고, 함대는 항구의 수비만 공고히 하고, 적극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8월 중순, 양국 간에 계속되고 있었던 평화 회담이 결렬되었다. 1884년 8월 22일, 프랑스군은 프랑스 극동함대의 아메데 쿠르베 제독에게 복주선정국을 파괴하고, 마미항과 복건수사를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쿠르베는 다음날 청나라 측의 민절총독과 나성탑에 정박하고 있던 중립국 군함 사령관에 공격을 통보했다.
준비 과정
프랑스
8월 23일 공격의 시점에서 신성탑에 정박하고 있었던 함선은 프랑스 해군의 극동 함대의 일부였다. 특히 함대의 주력인 4척의 강갑함은 모두 투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쿠르베의 기함이던 바야르(Bayard)는 마쭈 열도 근처의 샤프 피크에서 전보 기지를 지키고 있었고, 아탈란트(Atalante)는 통킹만에서 해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그래서 쿠르베는 상하이에서 철갑함인 트리용판트(Triomphante)와 라 글리소니에르(La Galissonnière)를 기륭에서 복주로 호출했다. 그러나 라 글리소니에르는 기륭에서 악천후로 움직이지 못했고, 트리용판트도 도착이 늦어질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민강을 거슬러 입구를 통과할 수 있을지도 불명확했다.
쿠르베는 서둘러 아래의 함정으로 급히 전시 편성을 했다.
순양함 : 듀게 트루앙 (Duguay-Trouin), 빌라(Villars), 데스탱 (d' Estaing, 볼타 (Volta)
포함 : 링크스 (Lynx), 아스픽 (Aspic), 비뻬르 (Vipère)
45호, 46호 어뢰정
이 함대를 이끌고 교전 지역으로 향했다. 또한, 아래의 배를 중국 군함의 이탈을 막기 위해 민강 하구에 대기시켰다.
순양함 : 샤또르노 (Châteaurenault)
병력 수송선 : 사온느 (Saône)
프랑스 함정의 총배수량은 14,500톤이었고, 병력은 1,780명에 달했다. 또한, 프랑스 함대가 청나라 보다 병력의 숙련도와 무기 장비 성능 면에서 월등했다.
표 1: 민강 작전의 프랑스 전함, 1884년 8월
{| class="wikitable"
|-
! 함명
! 함명(Fr)
! 유형
! 제원
! 건조
! 함장
|-
| 트리용판트
| Triomphante
| 철갑함 (cuirassé de croisière)
| 4,585톤
| 1879, 로슈포르
| 함장' Baux
|-
| 라 갈라소니에르
| La Galissonnière
| 철갑함 (cuirassé de croisière)
| 4,645톤
| 1874, 브레스트
| 함장 Fleuriais
|-
| 듀게 트루앙
| Duguay-Trouin
| 1급 철갑 순양함
| 3,479톤
| 1879, 셰르부르옥트빌
| 함장 Desnouy
|-
| 빌라르
| Villars| 1급 순양함
| 2,363톤
| 1881, 셰르부르옥트빌
| 함장 Vivielle
|-
| 데스탱
| d'Estaing| 1급 순양함
| 2,363톤
| 1881, 브레스트
| 함장 Coulombeaud
|-
| 샤또르노
| Châteaurenault
| 2급 목조 순양함
| 1,820톤
| 1869, 노르망
| capitaine de frégate Le Pontois
|-
| 볼타
| Volta| 3급 목조 순양함
| 1,323톤
| 1869, 셰르부르옥트빌
| capitaine de frégate Gigon
|-
|사온느
| Saône| 수송선
| 1,575톤
| 1880, 툴롱
| capitaine de frégate Monin
|-
| 링크스
| Lynx| 복합 포함
| 465톤
| ~1870s, 셰르부르옥트빌
| lieutenant de vaisseau Bonaire
|-
| 아스픽
| Aspic| 복합 포함
| 465톤
| ~1870s, 로슈포르
| lieutenant de vaisseau de Fauque de Jonquières
|-
| 비페르
| Vipère| 복합 포함
| 465톤
| ~1870s, 로슈포르
| lieutenant de vaisseau Picard Destelan
|-
| 어뢰정 No. 45
| -
| 어뢰정
| 30,58톤
| ~1879, 르아브르
| lieutenant de vaisseau Latour
|-
| 어뢰정 No. 46
| -
| 어뢰정
| 30,58톤
| ~1879, 르아브르
| lieutenant de vaisseau Douzans
|}
청나라
전투 직전 복건함대는 복주군무회판 장패륜이 이끌고 있었다. 복건함대는 목조 코르벳함 양무(揚武)를 기함으로 하여 아래와 같은 전력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정찰-수송선 :
침항(琛航)
영보(永保)
복파(伏波)
비운(飛雲)
제안(濟安)
외륜선 : 예신(藝新)
목조 포함 : 진위(振威), 복성(福星)
렌델 포함 : 복승(福勝), 건승(建勝)
다른 12척의 대형 정크선이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청나라 측의 총배수량은 8,000톤에, 병력은 1,040명이었다. 프랑스 함대에 비해 총배수량도 떨어졌고, 게다가 청나라는 목조함이 많았고, 또한 기관이 흘수선 위에 있었기 때문에 적에게 명중탄을 허용하기도 쉬웠으며, 대포도 구식이었다.표 2: 복건함대 일람, 1884년 8월 해전
전개
복건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남북에서 끼워 넣는 형태로 배치되었다. 북쪽에 8척(양무 · 복성 · 복파 · 건승 · 복승 · 예신 · 영보 · 침항)은 조선소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함대와 복주 조선소 사이에 배치되었고, 남쪽의 3척(제안, 비운, 진위)은 프랑스 함대의 아래 지역인 세관 건물의 정면에서 세관 건물을 방어하고, 쿠르베 함대의 퇴로를 끊도록 배치되었다.
그에 반해, 쿠르베는 복건함대에게 압도적인 화력을 가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그는 흘수가 얕은 청나라 군함이 조수에 흔들리고, 함미가 드러나는 만조가 되는 다음 8월 23일 오후 2시를 공격 시작 시간으로 꼽았다. 이 타이밍을 결정한 또 다른 이유는 만약 트리용판트가 민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다면, 전장에 도착하게 되는 시간이 그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함대가 진형을 바꾸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쿠르베는 프랑스 각 함에 오후 1:45에 전투 준비를 완료하고, 오후 2시경에 쿠르베가 명령하면 전투에 돌입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지시했다.
전투
공격 시간이 임박해도 복건함대는 진형 변경 등의 전투 준비를 하지 않았다. 1시 30분, 프랑스 함대가 전투 준비를 시작해도 복건함대는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 준비가 완료된 프랑스 함대의 분주함이 차분해지자, 1시 55분 드디어 청나라 측의 소함정이 프랑스 함대를 향해 갔다. 이에 따라 쿠르베는 예정보다 5분 빨리 공격 시작 명령을 내렸다.
최초의 프랑스 함대의 공격은 46호 어뢰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46호 어뢰정은 복건함대의 기함 양무의 외장에 어뢰 공격을 가했다. 어뢰 공격은 성공했지만, 46호 어뢰정은 공격 중에 보일러를 손상당했다. 45호 어뢰정도 복성을 공격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45호 어뢰정은 그 볼타의 어뢰 공격에 휘말려 대파당했다. 공격을 마친 2척의 어뢰정은 중립국 선박의 정박지인 하류로 향해 표류했다.
한편, 프랑스의 순양함과 전투 직전에 함대에 합류한 트리용판트 등은 나머지 복건함대의 함선을 상대했다. 침항, 영보, 비운, 제안, 복승, 건승은 순양함 듀게 트루앙, 빌라, 데스탱의 포격에 침몰하거나 화재를 일으켰다. 진위는 트리용판트 등의 포격으로 폭파되었다. 복파와 예신은 포함 링크스, 아스픽, 비뻬르와 교전하기 전에 이탈하여 치명적인 손상없이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화력이 떨어지는 복건함대는 전투력을 상실하기 전에 쿠르베와 그의 주변의 장교를 쓰러뜨리기로 목표를 정하고, 프랑스의 기함 볼타에 포격을 집중했다. 이로 인해 전투 개시 직후 기함 갑판원이 사상당하고, 함교에 있던 쿠르베의 측근 몇 명이 사상을 당했다.
전투는 오후 5시에 끝났다. 프랑스 함대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그날 밤에 청나라 군대가 프랑스 함대에 화공을 시도했고, 프랑스 함대는 정박지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복주 조선창 포격
8월 24일 아침, 쿠르베는 복주 조선창을 파괴하기 위해 해군 기관 장교를 상륙시키려 했다. 하지만 청나라가 도크 주변에 보병을 배치하여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포격에 의한 파괴로 정책을 변경했다.
프랑스 함대는 포격을 퍼부어 조선창 주변의 많은 건물에 피해를 주었고, 건조 중인 슬루프선 ‘횡해’에도 큰 구멍을 뚫었다. 하지만 조수의 시간대로 인해, 프랑스 함대는 얕은 여울에 있는 조선창에 충분히 접근할 수 없었으며, 쿠르베가 당초 기대했던 만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다.
8월 24일 밤, 정박해 있는 프랑스 함대에 다시 복건수사가 야습을 감행했다. 오전 4시, 청나라의 어뢰정 2척이 프랑스 함대의 선두에 정박해 있던 포함 비뻬르에 공격을 시도했다. 다행히 기습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두 척 모두 프랑스 함대의 탐조정에 발각되었다. 듀게 트루앙의 호치키스포에 공격으로 한 척은 순식간에 침몰했고, 다른 한 척의 선원도 배를 버리고 강에 뛰어들어 강변으로 헤엄쳐 달아났다.
민강 하구
나성탑 근처에서 전투가 끝난 8월 25일 프랑스 함대는 민강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함대는 가장 화력이 센 트리용판트 등과 듀게 트루앙을 앞세우고, 25일 · 26일, 민강을 따라 청나라의 강변 포대가 있는 전라만, 민안을 잇달아 포격해 파괴했다.
다음날 27일 · 28일에는 민강 하구의 금패수로를 양안으로부터 보호하는 금패포대, 장문포대를 공격했다. 금패포대는 포격으로 침묵했지만, 장문포대는 호치키스 기관포로 반격했기 때문에 프랑스 함대는 해병대를 상륙시켜 포대를 침묵시키고 듀게 트루앙의 포격으로 파괴했다.
이렇게 복주 일대의 청나라 해안 방어 시설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남아 있던 복건수사의 함선은 주산군도로 도주하면서 전투는 끝났다. 프랑스 함대는 민강 하구에서 잠시 머무르며, 통킹만 함대가 합류하길 기다렸다. 그들이 합류하자 정식으로 프랑스 극동함대를 편성하고, 8월 29일에 드디어 민강 하구를 떠나 대만으로 이동했다.
결과
손실
프랑스 함대의 손실은 서전에 손상을 당한 46호 어뢰정과 해전 참여는 늦었지만 장문포대 공격에 참가했다가 중파를 당한 장갑함 라 가리소니에르 외에는 사망자 10명, 부상자 48명으로 비교적 적었다. 대부분이 해전에서 포격에 당한 손해가 아니라 민강을 내려가는 동안 양안에서 저격수에 의한 사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반면, 복건수사는 11척의 함선 중 9척을 상실했다. 그중 몇 척은 나성탑와 복주 조선창 부근의 포격을 받은 장소에서 침몰했지만, 다른 배는 민안 근처까지 표류하다가 좌초했다. 민강 하구에 대기하고 있던 순양함 샤또르노의 장교는 8월 23일 저녁에, 선상 화재가 일어나 선원들이 버린 세 척의 청나라 군함이 민강에 표류해 온 것을 목격했다. (3척 중 1척은 그의 눈앞에서 폭발했다.)
쿠르베는 청나라 측 사망자를 2,000명에서 3,000여 명으로 추산했다. 전투 직후 나성탑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이 전투로 인한 사망자가 83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민강을 내려가며 발생한 전사자는 포함하지 않았다.
청나라의 책임자 처벌
이 전투 이후 패배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좌종당이 흠차대신으로 파견되었고, 관계자들의 처벌이 이루어졌다. 전투를 직접 책임졌던 복건 군무위원회판 장패륜은 복건수사에 의한 반격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면직되었다. 민절총독인 하경, 복건순무인 장조동, 복주선정대신인 하여장 등도 면직되었다.
그러나, 금패수로에서 전투를 지휘한 복주장군 목도선(穆図善)은 유임되었다.
복주 선정학당 졸업생으로 복건수사의 주력이자 기함인 양무함의 함장이었던 장성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배를 버렸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프랑스 함대 승리 요인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요인 중 하나는 프랑스 함대가 양국이 개전 전에 민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평화 협상을 진행하고 있던 청나라는 프랑스 함대가 민강을 거슬러 올라가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쿠르베는 멀쩡하게 함대를 나성탑까지 진행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요인은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창설하기 위해, 독일에서 건조된 현대식 전함 정원과 진원이 전쟁 중에 청나라에 인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나라가 새로 건조한 전함은 쿠르베가 보유한 어떤 함선보다 강력했다. 이 때문에 개전이 임박한 1883년 12월, 프랑스는 독일 정부에게 청나라와 프랑스가 개전할 경우 청나라에 전함을 인도 않도록 요청했다. 프랑스의 요청을 수용한 독일 정부는 청불전쟁 내내 청나라에 대해 갖은 변명을 늘어 놓으며, 3척의 전함을 항구에 묶어 두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1885년 7월 인도하게 된다. 이 함선들이 북양함대에 합류한 것은 1885년 10월이었다.
일부 중국 역사학자들은 청나라의 완패의 원인을 그 지휘 계통의 불일치에 있다고 단언했다.
당시 청나라의 지역함대, 지역군은 각각의 수령이 지역의 예산과 사재를 지출하여 만들어 냈다. 이 전력들은 동시에 중앙의 조정에 자신의 영향력을 떨칠 수 있는 원천이기도 했다. 따라서 각 함대의 수장은 자신들의 전력이 전투로 깎여 나가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따라서 복건수사의 거듭된 증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다른 세 함대(북양수사 · 남양수사 · 광동수사)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것이다.
장패륜으로부터 증원해 달라는 요구가 올라가자 서태후는 다른 세 함대에게 지원을 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린다. 그러나 그들은 복건수사에게 구원군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1882년 통킹만에서 프랑스군의 동향을 조사하기 위해 복건수사가 광동수사에게 빌려준 비운과 제안 두 척은 양광총독 장지동에 의해 복주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광동수사의 배는 단 1척도 지원해 주지 않았다. 북양함대를 맡은 이홍장은 2척을 복주로 지원하라는 명령을 거역했으며, 절강순무 유병장도 군함 초무(超武)를 복주로 파견해 달라는 장패륜의 요청을 거절했다.
참고자료
Destelan, P., Annam et Tonkin: Notes de voyage d'un marin (Paris, 1892)
Duboc, E., Trente cinq mois de campagne en Chine, au Tonkin (Paris, 1899)
Ferrero, S., Formose, vue par un marin français du XIXe siècle (Paris, 2005)
Huard, La guerre du Tonkin (Paris, 1887)
Loir, M., L'escadre de l'amiral Courbet (Paris, 1886)
Lung Chang [龍章], Yueh-nan yu Chung-fa chan-cheng [越南與中法戰爭, Vietnam and the Sino-French War] (Taipei,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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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참가한 전투
프랑스가 참가한 해전
프랑스가 참가한 전투
푸저우시
푸젠성의 역사
대만 해협
1884년 분쟁
청불 전쟁의 해전
1884년 8월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20of%20Fuzhou | Battle of Fuzhou | The Battle of Fuzhou, or Battle of Foochow, also known as the Battle of the Pagoda Anchorage (French: Combat naval de Fou-Tchéou, Chinese: , 馬江之役 or 馬尾海戰, literally Battle of Mawei), was the opening engagement of the 16-month Sino-French War (December 1883 – April 1885). The battle was fought on 23 August 1884 off the Pagoda Anchorage in Mawei () harbour, to the southeast of the city of Fuzhou (Foochow). During the battle Admiral Amédée Courbet's Far East Squadron virtually destroyed the Fujian Fleet, one of China's four regional fleets.
Background
On 11 May 1884 French and Chinese negotiators concluded the Tientsin Accord, an agreement designed to end several months of undeclared hostilities between France and China in Tonkin. On 23 June 1884, French troops advancing to occupy Lạng Sơn, in accordance with the terms of this agreement, clashed near the small town of Bắc Lệ with a detachment of the Chinese Guangxi Army. The Chinese opened fire on the advancing French, precipitating a two-day battle in which the French column was seriously mauled. This incident, the Bắc Lệ ambush, was the proximate cause of the Sino-French War.
When news of the Bắc Lệ ambush reached Paris, there was fury at what was perceived as blatant Chinese treachery. Jules Ferry's government demanded an apology, an indemnity, and the immediate implementation of the terms of the Tianjin Accord. The Chinese government agreed to negotiate, but refused to apologise or pay an indemnity. The mood in France was against compromise, and although negotiations continued throughout July, Admiral Courbet was ordered to take his squadron to Fuzhou (Foochow).
Courbet was instructed to prepare to destroy the Foochow Navy Yard, downriver from Fuzhou at Mawei, and to attack the Chinese fleet in Mawei harbour. Ironically, the Foochow Navy Yard represented a substantial French investment in China's future, having been built several years earlier under the direction of the French administrator Prosper Giquel. During the second half of July and the first half of August Courbet gradually concentrated his squadron in Mawei harbour, at the Pagoda Anchorage—named for a conspicuous Chinese pagoda, the Luoxingta (), which stood on a hill above the harbour.
Negotiations between France and China broke down in mid-August, and on the evening of 22 August Courbet was authorised by the French government to commence hostilities. He duly notified the foreign consuls, the governor-general of Fujian and Zhejiang, and the commanders of several neutral warships moored at the Pagoda Anchorage (the British gunboats , and and the American corvette ).
Order of battle
Only a fraction of the Far East squadron was present off the Pagoda Anchorage on the morning of 23 August. In particular, none of the Far East squadron's four ironclads was immediately available. Bayard, Courbet's flagship, was at Sharp Peak near the island of Matsu, guarding a vital telegraph station. Atalante was hunting down pirate ships in the Gulf of Tonkin. Courbet had summoned the ironclads Triomphante from Shanghai and La Galissonnière from Keelung to join him off Fuzhou, but La Galissonnière had been detained at Keelung by bad weather, and although Triomphante was approaching the Min River, it was not clear whether she would be able to cross the bar at its entrance.
Courbet had under his immediate command the first-class cruisers Duguay-Trouin, Villars and d'Estaing, the third-class cruiser Volta (which he chose as his flagship during the engagement), the gunboats Lynx, Aspic and Vipère and Torpedo Boats No. 45 and No. 46. The second-class cruiser Châteaurenault and the troopship Saône had been left at the Jinpai pass, at the entrance to the Min River, to stop the Chinese from laying a barrage to prevent the squadron's escape.
The Chinese Fujian fleet consisted of the wooden corvette Yangwu (the flagship), the scout-transports Chenhang, Yongbao, Fupo, Feiyun and Ji'an, the paddle steamer Yixin, the wooden gunboats Zhenwei and , and the Rendel flatiron gunboats Fusheng and Jiansheng. Twelve large junks were nearby, but did not take part in the battle. The French squadron displaced 14,500 tons and included 1,780 men, while the eleven warships in the Chinese fleet displaced 8,000 tons, and included 1,040 men. The French squadron was much better-led and better-armed than the Chinese fleet. Only a few of the Chinese ships were capable of offering serious resistance to Courbet's attack. The Chinese defence was under the command of the imperial commissioner Zhang Peilun (), one of the leading members of China's war party.
French squadron
Chinese squadron
Fleet deployments
The Chinese fleet was deployed into a northern group of eight ships and a southern group of three ships, with the French squadron lying in between. The wooden corvette Yangwu, the wooden gunboat Fuxing, the armed transport Fupo, the Rendel flatiron gunboats Jiansheng and Fusheng and the small paddle steamer Yixin were deployed on the northwest curve of the river, between the French ships and the Foochow Navy Yard. A little behind them lay the unarmed transports Yongbao and Chenhang, anchored just off the dockyard. The role of this northern group of ships was obviously to prevent the French from attacking the Navy Yard. Meanwhile, the armed wooden transports Ji'an and Feiyun and the wooden gunboat Zhenwei lay downstream of the French squadron, dangerously isolated on the southwesterly leg of the river, in front of the Customs building. Their job seems to have been to protect the Customs building and to block Courbet's exit from the Min River.
Courbet's plan provided for overwhelming firepower to be deployed against the Chinese fleet. He had noticed that the Chinese ships swung with the tide, and determined to make his attack just before the top of the tide at 2:00 pm on the following afternoon, Saturday 23 August, when with luck the Chinese ships would have swung away from the French ships and would be presenting their vulnerable sterns to the attackers. This timing was also important for another reason. If Triomphante successfully ascended the Min River, it was about then that she would be making her appearance.
Assuming that the Chinese fleet did not change its position, Courbet's orders provided for the French ships to be at action stations at 1:45 pm and to go into action at around 2:00 pm, on his signal. The battle would begin with an attack by Torpedo Boats No. 45 and No. 46 on Yangwu and Fupo. This attack would be supported by cannon and rifle fire from Volta. Volta would then concentrate on destroying a line of war junks and fireships drawn up just to the west of Losing Island. Once the attack by the torpedo boats had cleared the way, the gunboats Aspic, Vipère and Lynx would sail upriver towards the Navy Yard and take on the other ships of the Chinese northern group. Four steam launches under the command of lieutenant de vaisseau Augustin Boué de Lapeyrère, the future French admiral, were given the job of protecting Volta and the three French gunboats from attack by the Chinese mineboats. To the east Duguay-Trouin, Villars and d'Estaing were to reduce the three ships of the Chinese southern group, to engage the war junks from the flank, and to engage a battery armed with three Krupp cannon near the Pagoda, and three other batteries armed with Krupp cannon which protected the Arsenal. Their launches would be deployed to give protection against Chinese torpedo attacks.
The battle of Fuzhou
On the morning of Saturday 23 August, although the Chinese commanders knew that the French would launch their attack at around 2:00 pm, the sailors in both fleets went about their routine business. The ships of the Fujian Fleet made no attempt to redeploy or to anticipate the French attack by opening fire first. The French crews went to their action stations at 1:30 pm, after eating their midday meal. The Chinese did not react to this obvious threat, and at 1:45 pm the flurry of activity aboard the French ships died down. For the next ten minutes the tension grew aboard the French ships as the minutes ticked away towards 2:00 pm. At 1:55 pm a Chinese mineboat advanced towards the French squadron. Courbet immediately ordered the attack to begin, only five minutes short of his original timetable.
At the outset of the battle the Chinese flagship Yangwu was successfully attacked with a spar torpedo by Torpedo Boat No.46 (lieutenant de vaisseau Douzans) and grounded. The French torpedo boat suffered damage to her boiler during this attack. The despatch vessel Fupo was attacked less successfully by Torpedo Boat No.45 (lieutenant de vaisseau Latour), and was subsequently crippled by Voltas torpedo launch and carried by boarding by Boué de Lapeyrère's sailors. She had already been set alight by French shellfire, and was eventually abandoned by the French prize crew and sank in the middle of the Min River.
Their spar torpedoes expended, the two French torpedo boats drifted downriver after making their attack, towards the anchorage of the neutral vessels off Losing Island. Lieutenant Latour had been seriously wounded in the eye during the attack, but he refused an offer of medical assistance from American officers on Enterprise, explaining that he could not leave his post while the battle was still in progress.
Meanwhile, the French cruisers and the ironclad Triomphante, which joined the French squadron only minutes before the battle began, were making short work of the rest of the Chinese fleet. Chenhang, Yongbao, Feiyun, Ji'an, Fusheng and Jiansheng were either sunk or set alight by shellfire from the cruisers Duguay-Trouin, Villars and d'Estaing. Only Fupo and Yixin survived the battle without serious damage, by escaping upriver before the gunboats Lynx, Aspic and Vipère had a chance to engage them. Zhenwei was blown up by a single shell from Triomphante.
Before they were put out of action the outgunned Chinese vessels concentrated their fire on the French flagship Volta, hoping to kill Courbet and the officers of his entourage. Several sailors aboard the French cruiser were killed or wounded, and shortly after the start of the battle a roundshot ploughed through Courbet's command group on the flagship's bridge, killing the British pilot Thomas and only narrowly missing capitaine de frégate Gigon, Volta'''s captain. A few minutes later splinters from an exploding Chinese shell wounded lieutenant de vaisseau Ravel, Courbet's aide-de-camp.
The fighting ended at 5:00pm, but during the night of 23August the Chinese made a number of unsuccessful attacks with fireships on the French warships, obliging some of them to shift their anchorages to evade them.
Bombardment of the Foochow Navy Yard
On the morning of 24 August Courbet issued orders for his ships' landing companies to go ashore with the naval engineers to destroy the Foochow Navy Yard. Preparations were made for a landing, but Courbet then changed his mind, after observing that the Navy Yard was defended by organised groups of Chinese infantry. The attack was cancelled as the French sailors were on the point of climbing into their launches.
Instead, the French bombarded the Foochow Navy Yard, damaging a number of outbuildings and holing the sloop Henghai (Heng-hai, 橫海), still under construction and lying on the slips. A certain amount of damage was inflicted, but without the support of the heavy guns of Triomphante and Duguay-Trouin or the slightly lighter guns of the cruisers Villars and d'Estaing, which drew too much water to enter the shallows off the Navy Yard except around high tide, Courbet was unable to destroy the Yard completely. He himself admitted in his official report that the damage done 'was not as much as I had hoped for'.
The French squadron remained off Fuzhou during the night of 24 August. Once again the Chinese tried to make a night attack. At 4:00 am two Chinese torpedo launches tried to attack the gunboat Vipère, anchored at the head of the French line. Both launches were lit up by searchlights on the French ships and attacked with Hotchkiss fire by Duguay-Trouin. One launch was sunk instantly, while the crew of the other abandoned ship and swam for the shore.
Descent of the Min River
On 25 August, after receiving the congratulations of the captains of the neutral warships on the professionalism displayed by the French squadron during the action of 23 August, Courbet began to lead his ships back down the Min River. The squadron's two heaviest ships, Triomphante and Duguay-Trouin, led the way.
On 25 and 26 August the French bombarded the Tianluowan () and Min'an () batteries, two Chinese shore batteries covering the approach to Fuzhou through the narrow Min'an Pass. The Chinese batteries, built to fire only on enemy ships approaching from the mouth of the river, were taken in reverse and destroyed by Duguay-Trouin and Triomphante.
On 27 and 28 August the French squadron bombarded and destroyed the Chinese defences at the Jinpai pass near the entrance to the Min River. The Jinpai () and Changmen () batteries, known to the French as Fort Kimpai and the White Fort (Fort Blanc), were put out of action, and the French also inflicted heavy casualties on a number of Chinese field batteries and infantry formations. However, before its guns were destroyed the White Fort was able to inflict moderate damage on the French ironclad La Galissonnière, which had sailed up from Keelung to join Courbet's squadron and attempted unsuccessfully to fight its way into the Min River. Chinese infantry at the Jinpai pass also killed and wounded several French sailors aboard the gunboat Vipère on 27 August.
Losses
The losses of the French squadron in the course of the operations before Fuzhou and in the Min River were relatively light (10 dead and 48 wounded). Most of these casualties were inflicted not by shellfire during the engagement of 23 August but by sniper fire from Chinese infantry during the squadron's descent of the Min River. The French dead included lieutenant de vaisseau Bouët-Willaumez, second-in-command of the gunboat Vipère and son of the noted French admiral Louis-Édouard Bouët-Willaumez (1809–71), who was shot dead on Vipères bridge during an exchange of fire with the defenders of Fort Kimpai on 27 August. With the exception of La Galissonnière and Torpedo Boat No. 46, none of Courbet's vessels suffered serious damage.
The Chinese lost nine of the eleven ships of the Fujian Fleet. Some of the Chinese ships foundered where they were struck, sinking off the Pagoda anchorage and the Foochow Navy Yard. Others drifted downriver and either ran aground or sank between Losing Island and the Min'an pass. French officers aboard Châteaurenault, anchored near the entrance to the Min River, saw three Chinese warships drifting downriver on the evening of 23 August, abandoned by their crews and blazing from stem to stern. One of the Chinese ships exploded in front of their eyes.
Courbet estimated Chinese casualties at between 2,000 and 3,000 dead. The commemorative tablets in a shrine erected shortly after the war at the Pagoda Anchorage to honour the Chinese dead list the names of 831 sailors and soldiers killed on 23 August, but this list does not include the hundreds of Chinese soldiers killed by the French during their descent of the Min River.
The Chinese imperial commissioner Zhang Peilun, who made no serious attempt to coordinate the resistance of the Fujian fleet, was degraded after the battle and replaced by the veteran general Zuo Zongtang (). He Jing (), the governor-general of Fujian and Zhejiang, Zhang Zhaotong (), the governor of Fujian, and He Ruzhang (), the director-general of the Foochow Navy Yard, were also degraded. The Manchu General of Fuzhou Mutušan (), who had directed the defence of the Jinpai pass on 27 and 28 August with skill and energy, kept his job.
The Cantonese naval officer Zhang Cheng (), a graduate of the Foochow naval college and captain of the Chinese flagship Yangwu, abandoned ship as soon as the battle started and was later beheaded for cowardice.
Factors in the French victory
One of the factors in the French victory at Fuzhou was that the French squadron had sailed up the Min River in time of peace. The Chinese claimed after the battle, with some justification, that the French would never have been able to ascend the river if the two countries had been at war. A second important factor was the absence from the battle of the modern battleships Dingyuan and Zhenyuan, which had recently been completed in Germany for China's Beiyang Fleet (Northern Seas fleet). The Chinese battleships were more powerful than any of the ships under Courbet's command, and in December 1883, foreseeing that war with China was imminent, the French persuaded the German government to detain them in the event of hostilities. The German government invented a number of plausible excuses for keeping the two battleships in port, and they remained in Germany for the duration of the Sino-French War. They were finally released in July 1885, and joined the Northern Seas fleet in October of the same year.
Some Chinese historians have asserted that disunity in the Chinese command structure was an important factor in the Chinese defeat. The Chinese regional fleets and armies represented a considerable 'personal' investment of revenue and prestige that was used to leverage influence at court, and the respective fleet commanders were often loath to see these important assets diminished by war damage. The result, at Fuzhou, was that the Fujian Fleet received little help from China's three other regional fleets. Despite appeals from Zhang Peilun and direct orders from the Empress Dowager Cixi, the commanders of the Beiyang Fleet, the Nanyang Fleet and the Guangdong Fleet declined to send ships to reinforce the Fujian Fleet. Feiyun and Ji'an, two Fujian vessels which had been loaned to the Guangdong Fleet in 1882 to observe French movements in the Gulf of Tonkin, were sent back to Fuzhou in early August by Zhang Zhidong, the governor-general of the two Guangs, arriving just in time to share the fate of their comrades in the forthcoming battle. However, Zhang did not release any of his own Guangdong ships. Li Hongzhang defied an order to send two ships from the Beiyang Fleet to Fuzhou, and the Zhejiang governor Liu Bingzhang () refused to release the Nanyang ship Chaowu.
Ships involved in the Min River actions
France:
China:
French naval uniforms, 1884
The battlefield today
Notes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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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zhou
Fuzhou 1884
Military history of Fujian
1884 in France
1884 in China
August 1884 events |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8E%98%EC%9D%B8%20%EB%8C%80%20%EB%AA%B0%ED%83%80%20%28UEFA%20%EC%9C%A0%EB%A1%9C%201984%20%EC%98%88%EC%84%A0%29 | 스페인 대 몰타 (UEFA 유로 1984 예선) | 1983년 12월 21일, 스페인 대 몰타의 경기는 UEFA 유로 1984 예선 최종전 경기들 중 하나이다. 이 경기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경기들 중 하나로 회자되곤 한다.
배경
경기를 나흘 앞두고, 네덜란드가 몰타를 5-0으로 꺾고 대회 예선을 승점 13점 골득실 +16으로 마무리지었다. 스페인은 최종전에서 승리할 시 승점 13점으로 동률이 될 것이며, 골득실에 따라 본선 진출국이 갈리게 될 것이었다.
스페인은 한 경기를 남긴 상태에서 골득실차가 +5였는데, 따라서 스페인은 몰타를 11골 차이 이상의 대승을 일궈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은 앞서 7번의 경기에서 12골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경기를 앞두고 몰타의 골키퍼 존 보넬로는 "스페인은 어린애들로 구성된 선수단을 상대로도 11골을 득점할 수 없다"라고 도발하기까지 했다.
12월 17일과 스페인과 몰타의 경기 사이의 기간에 7조의 순위표는 다음과 같았다:
1983년 12월 17일 기준 순위. 출처: UEFA
다음 라운드 진출 규정: 순위 규정
(탈): 탈락
경기
요약
스페인이 UEFA 유로 1984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몰타를 11골 차이 이상으로 이기는 것밖에 없었다.
스페인은 경기 시작 2분 만에 페널티 킥 기회를 얻었는데, 프란시스코 호세 카라스코가 페널티 구역 안에서 걸려넘어졌다. 그러나, 주자로 나선 후안 안토니오 세뇨르가 경기 4분에 페널티 킥을 실축했는데, 왼쪽 골대를 맞고 나온 공은 몰타 수비수가 걷어내면서 코너킥이 되었다. 스페인은 15분이 되어서야 산티야나가 골문을 열었는데, 24분에 몰타의 미카엘 데조르조에게 동점골을 헌납하면서 1-1이 되어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전반이 종료되었을 때, 스페인이 3-1로 앞서나갔는데, 전반이 끝날 때만 해도 스페인이 본선에 진출할 만큼 충분한 득점을 올릴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앞서 경기 초반에 페널티 킥을 실축한 후안 안토니오 세뇨르가 88분에 스페인의 12번째 골이자 마지막 골을 기록하였다. 라파엘 고르디요는 경기 막판에 13번째 득점을 기록할 뻔했지만 주심이 그의 골을 취소하였다. 이와 무관하게,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제치고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 필요한 11골차 승리를 거두어 극적으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상세 정보
경기 진행상황 도표
경기 후
이 경기는 스페인의 RTVE를 통해 중계되었다. 경기 후, 몰타의 골키퍼가 최선을 다하지 말고 스페인이 큰 점수 차이로 이길 수 있도록 매수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소문에 따르면 몰타와 스페인의 선수진과 관계자들이 전반전 종료 후 합의를 본 것으로 떠돌았다. 2018년 3월, 실미오 데마누엘레와 카르멜 부수티 두 몰타 선수들은 스페인이 금지 약물을 복용했다고 주장했는데, "스페인 선수들 입에서 거품이 나와 물 마시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몰타 선수들은 전반전이 끝나고 레몬 조각을 이용해 약물을 복용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2018년까지 승부 조작에 관한 어느 물증도 나오지 않았다.
몰타 축구 협회는 이 경기에 대한 수사를 요청했고, 나중에 몰타의 대통령직까지 역임한 조지 아벨라 회장은 국가대표팀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아벨라 회장은 체계적인 시설의 부족은 국가대표팀이 유럽 선수권 같은 큰 대회에 전문적인 준비를 하는데 미흡한 것으로 연결되었고, 짧은 시일 내에 원정 경기를 연속해서 치르는 일정 또한 문제로 지적되었고, 향후에 경기 일정이 이런 방식으로 짜여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였다. (몰타는 세비야에서 1-12 대패를 당하기 불과 나흘 전에 네덜란드를 상대했었다)
최종 순위표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승점 13점으로 동률을 이루었고, 맞대결을 통한 상대 전적의 골득실에서도 동률을 이루었다. 결국, 전체 골득실에서도 동률임에 따라 스페인이 기록한 총득점이 24골이었고, 그에 따라 총 22골을 넣은 네덜란드를 제치고 다득점차에 따라 대회 본선에 진출하였다.
1983년 12월 17일 기준 순위. 출처: UEFA
다음 라운드 진출 규정: 순위 규정
기록
이 경기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역사상 2번째로 큰 점수차 승리를 기록한 경기이며, 몰타의 역대 최다 점수차 패배 경기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역대 최고로 큰 점수차 승리를 거둔 경기는 불가리아와의 1933년 경기로, 이 경기에서 13-0 승리를 거두었다.
산티야나는 이 경기에서 4골을 추가해 예선 7조의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
각주
외부 링크
'스페인 12-1 몰타'의 주요 영상 - rtve.es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경기
UEFA 유로 1984 예선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
몰타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
1983년 12월
몰타-스페인 관계 | https://en.wikipedia.org/wiki/Spain%2012%E2%80%931%20Malta | Spain 12–1 Malta | On 21 December 1983, Spain played Malta in the last qualifying match for UEFA Euro 1984. The game is often describ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in Spain's national football team's history.
Background
Four days before the game, the Netherlands defeated Malta 5–0 and finished their qualification schedule with 13 points and a goal difference of +16. If Spain won their final qualifier and thus also finished on 13 points, then goal difference would decide which team qualified.
With a goal difference of +5, Spain would need to defeat Malta by a margin of at least 11 goals. If they scored 11 goals then the total goals scored by them would surpass Netherlands' goals scored and thus qualify. The team had only managed to score 12 goals in their previous seven matches, and before the game the Maltese goalkeeper, John Bonello, said: "I wouldn't return to my country if they scored 11 goals."
After 17 December, and before Spain's match against Malta, the group 7 table stood as follows:
Match
Summary
Spain's only chance of qualifying for Euro 1984 was to defeat Malta by at least 11 goals.
In the second minute of the match, Spain were awarded a penalty kick after a foul on Francisco José Carrasco inside the box. However, Juan Antonio Señor subsequently missed the penalty in the fourth minute after the shot deflected back off the left post and was cleared by a Maltese defender for a corner. After Santillana opened the scoring for Spain in the 15th minute, Malta's Michael Degiorgio levelled the score 1–1 in the 24th minute.
When half-time came and the scoreline was 3–1 to Spain, few expected them to score enough goals to qualify. However, Juan Antonio Señor, who had missed the early penalty, scored Spain's 12th and last goal in the 88th minute; Rafael Gordillo nearly scored a 13th in the final minutes of the game but it was disallowed by the referee. That did not matter, however, as the Spaniards won by the 11-goal margin required for them to beat the Netherlands to qualification.
Details
Timeline
Aftermath
The match was broadcast by RTVE in Spain. Afterwards, in Malta, many claimed that the Maltese were paid to not play their best and to let Spain win by a large margin, and it was rumoured that words had been exchanged between Maltese and Spanish officials and players at half-time. In March 2018, two Maltese players, Silvio Demanuele and Carmel Busuttil, claimed that Spain had been using doping as "they had foam in their mouths and could not stop drinking water". They also claim the Maltese players were drugged via lemon wedges during halftime. However, as of 2018, no evidence has come forth to support these allegations.
The Malta Football Association launched an inquiry into the result, and its chairman George Abela (later the President of Malta) brought about changes to the national team. Abela said that a lack of facilities meant that the team lacked serious professional preparation for a tournament such as the European Championships, and the closeness of away fixtures (Malta had played in the Netherlands only four days before their 12–1 loss in Seville) was a further hindrance and such scheduling would be avoided in future.
Final table
Spain and the Netherlands finished the qualification stage level on 13 points, level on goal difference, but Spain qualified on goals scored (24, compared to 22 for the Netherlands).
Records
The match produced the second-largest win in Spain's history (the largest was 13–0 against Bulgaria in 1933), and Malta's largest loss.
The four goals scored by Santillana put him as the top goalscorer in qualifying group 7.
See also
UEFA Euro 1984 qualifying Group 7
Spain national football team results
References
External links
Integral video of the game 'ESP 12–1 MLT' rtve.es
UEFA European Championship matches
UEFA Euro 1984 qualifying
1983
1983
Malta
Spain
December 1983 sports events in Europe
Sports competitions in Seville
20th century in Seville
Malta–Spain relations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2%EC%84%B1%EC%A0%84%EA%B8%B0 | 제2성전기 | 제2성전기는 유대인의 역사에서 예루살렘에 제2성전이 존재했던 기원전 516년에서 서기 70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 그리고 초기 기독교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제2성전기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과 로마의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로 끝난다.
마지막 네비임(유대인 선지자)의 죽음 이후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있을 때, 유대인의 통치는 다섯명의 주곳(zugot, 짝)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곳에 의한 통치체계는 페르시아 통치기(기원전 539 - 332년), 헬레니즘 통치기(기원전 332 - 167년), 그리고 독립 하스모니안 왕국(기원전 140-37년)과 로마 통치기(기원전 63-기원후 132년)까지 계속 번성하였다.
이 시기의 제2성전 유대교는 세개의 기로를 맞이하고 다양한 유대인 공동체들이 이에 서로 다른 대응 양상을 보여준다. 첫 번째 기로는 기원전 587/6년의 남유다 왕국의 멸망이다. 유대왕국의 사람들은 독립국으로서의 자유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제 1 성전과 거룩한 도시 역시 잃어버리고 바빌론 유수를 당하게 된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연, 힘, 신의 선함에 대한 신학적 고비를 맞이하게 되고, 이교도들 사이로 옮겨짐에 따라 문화, 종교, 의식적인 위협 역시 직면하게 된다. 게다가 유수 후기에는 주목할만한 선지자 역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인도와 지지가 가장 필요할 때에 하나님의 지도 역시 받지 못하게 된다. 두 번째 기로는 헬레니즘의 영향이다. 그 결과 기원전 167년에 마카베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세 번째 기로는 기원전 63년에 있었던 폼페이우스 황제의 예루살렘 포위로 시작된 로마의 통치이다. 이 시기에 로마 원로원에 의해 헤로데 1세가 유대인의 왕으로 추대되고 유대의 헤로데 왕국이 수립되는데, 현재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가 여기에 포함된다.
제2성전의 건립
제2성전의 수립은 페르시아의 승인과 지원 아래 마지막 세 선지자인 하깨, 즈카리야, 말라기의 시기에 건립되었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바빌론 유수로부터 스룹바벨의 지도 하에 시온으로 귀환한 이후, 70년 전에 남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황폐해진 예후드 속주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바로 이어졌다. 42,360명의 순례자들은 사개월 동안 유프라테스강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끔찍한 여정을 마친 후 강한 종교적 동기로 도시를 복원하기 시작했는데, 파괴된 성전을 복원하고 코르바놋(korbanot)이라고도 불리는 희생 의식을 부활시키는 것 역시 우선적인 목표중 하나였다.
예후드 속주의 통치자인 스룹바벨은 일천 다릭과 함께 여러 선물을 보내어 관대한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강한 열망으로 이러한 선물들을 성지 복원에 사용하였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제단을 정확히 이전에 있던 위치에 다시 세우고 제사를 드린 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건물의 잿더미를 치웠다. 이듬해(기원전 535년) 2월, 강한 희열과 환호속에 제2성전의 기초가 놓였다. 구경꾼들의 복잡한 심경을 포함하여 많은 관심들이 이러한 운동에 집중되었다.
이스라엘의 수도에 거주하고 있던 사마리아인들 역시 이러한 운동에 동참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는데, 스룹바벨과 장로들은 오로지 유대인들의 힘으로만 건설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였다. 곧이어 유대인들 사이에서 안좋은 소문이 퍼졌는데, 에즈라 4장 5절에 의하면 사마리아인들은 "성전을 지으려는 계획을 꺾고" 엑바타나와 수사에 사절을 보내 성전의 건축을 중단시킨 것으로 간주되었다..
7년 후,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온으로 귀환케 하여 성전을 짓도록 허락한 왕인 키루스 2세(고레스)가 사망하고 그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즉위한다. 캄비세스가 사망한 뒤 가짜 스메르디스가 왕권을 7~8개월정도 잡은 뒤, 기원전 522년 다리우스 1세(다리오)가 즉위하게 된다. 다리우스 1세 즉위 2년, 성전 건설이 재개되고 완료되기까지 하깨와 즈가리야의 지도 하에 진행되어 유수 후 20년 되는 해인 기원전 516년 정결작업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다. 비록 유대인들이 독립을 얻지는 못했지만, 다리우스 황제 제육년 아달월 3일, 모든 민족의 기쁨 속에 성전의 건설이 끝을 맺는다. 하깨서는 제2성전이 첫번째 성전보다 더욱 영화로울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다.
헬레니즘 통치기
기원전 332년, 페르시아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배한다. 알렉산더의 붕어 이후 그의 장군들에 의해 영토가 분할될 때, 셀레우코스 제국이 세워진다.
이 시기에 유대교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칠십인역 성경을 집필하며 헬레니즘 유대교의 정점을 찍는다. 헬레니즘 유대교의 대표적인 옹호자로는 필론이 있다.
하스모니안 왕조
헬레니즘 유대인들과 정통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황제로 하여금 유대교의 전통적 종교의식을 금지하는 법령을 포고하게 하는데 이른다. 이에 따라 정통 유대인들은 마카베오로 대표되는 하스모니안 가문의 지도 하에 반기를 들고, 결국 하스모니안 왕조 하의 독립 유다 왕국을 수립하는데 이르른다. 이 왕국은 기원전 165년부터 37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결국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두 아들인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반목과 내분으로 망조를 띄게 된다. 신정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로마에게 이러한 상황에 개입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로마는 폼페이우스의 지휘 아래 시리아를 정복한 뒤 이 내전에 개입한다. 그러나 하스모니안 내부의 친 파르티아파가 파르티아의 지원을 받아오고, 헤로데 1세가 유대 속주의 왕으로서 로마에 복속되기 전까지 파르티아계열의 왕이 군림한다.
헤로데 왕조
헤로데 1세는 로마의 종속국으로서의 유대 지역의 지배자로, 이 시기를 헤로데 왕국이라 한다. 로마의 충성스런 동맹으로서 헤로데는 아라비아까지 통지권을 확장시켰고 유대에 대규모 건설 사업을 시행하였는데, 예루살렘의 제2성전의 확장이 바로 이 때 이루어진 것이다. 헤로데 1세는 왕국을 성장시키고 번영을 가져왔다. 이스라엘의 관광객들은 대부분 통곡의 벽과 다윗의 탑을 방문하는데, 이 건축물들 역시 이 때 세워진 것이다.
기원전 4년 헤로데의 죽음 이후 왕국은 그의 세 아들들에 의해 나뉘어 사두정 체제에 들어선다. 사두정의 핵심은 헤로데 아르켈라오스로, 에돔과 사마리아 지역 역시 그의 통치를 받았다. 헤로데의 죽음은 높은 세율과 헤로데의 소비에 불만을 가지던 사람들의 쌓인 분노를 폭발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의 죽음에 따라 일자리를 제공해주던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 역시 중지되어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는다. 이와 같이 쌓인 분노는 결국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원인이 된다.
서기 6년, 왕국은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헤로데 왕은 로마가 유대를 속주화하면서 물러나게 된다. 헤로데 2세는 서기 34년에 사망하기까지 이두래아와 트라코니티스를 통치하고, 할키스의 영주였던 헤로데 아그리파 1세는 영토를 그의 형제 헤로데에게 양위하고 헤로데 2세의 영토를 물려받아 분봉왕(分封王, tetrarch)으로 통차한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39년에 죽으면서 아그리파는 갈릴래아 또한 다스리게 되는데, 서기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유대 총독이었던 마룰루스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전 4년경에 헤로데 1세(해롯 대왕)의 통치시기에 유대 갈릴래아 지방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사적 관점에서 제2성전기에 시작된 종교인 것이다.
로마 통치기
로마 속주로써의 프로빈키아 유다이아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영토와 헤로데 왕조를 모두 포함한다. 서기 6년에 수립되어 퀴리노의 인구조사를 하고, 135년 이후에는 시리아 팔레스티나에 병합된다.
각주
이스라엘의 역사 |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20Temple%20period | Second Temple period | The Second Temple period or post-exilic period in Jewish history denotes the approximately 600 years (516 BCE – 70 CE) during which the Second Temple stood in the city of Jerusalem. It began with the return to Zion and subsequent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in Jerusalem, and ended with the First Jewish–Roman War and the Roman siege of Jerusalem.
In 587/586 BCE, the Neo-Babylonian Empire conquered the Kingdom of Judah; the Judeans lost their independence upon the Babylonian siege of Jerusalem, during which the First Temple was destroyed. After the Babylonians annexed Judah as a province, part of the subjugated populace was exiled to Babylon. This exilic period lasted for nearly five decades, ending after the Neo-Babylonian Empire itself was conquered by the Achaemenid Persian Empire, which annexed Babylonian territorial possessions after the fall of Babylon. Soon after the conquest, Persian king Cyrus the Great issued a proclamation known as the Edict of Cyrus, encouraging the exiles to return to their homeland after the Persians raised it as an autonomous Jewish-governed province. Under the Persians (), the returned Jewish population restored the city and rebuilt the Temple in Jerusalem. In 332 BCE, the Achaemenid Empire fell to Alexander the Great, and the region was later incorporated into the Ptolemaic Kingdom () and the Seleucid Empire ().
The Maccabean Revolt against Seleucid rule led to the establishment of a nominally independent Jewish kingdom under the Hasmonean dynasty (140–37 BCE). While it initially exercised governance semi-autonomously under Seleucid hegemony, the Hasmoneans' kingdom increasingly exercised total self-governance as it undertook military campaigns to push the weakening Seleucids out of the region, establishing itself as the last Jewish kingdom and preceding an almost 2000-year-long hiatus in Jewish sovereignty in the Levant. In 63 BCE, the Roman Republic conquered the kingdom. In 37 BCE, the Romans appointed Herod the Great as king of a vassal Judea. In 6 CE, Judea was fully incorporated into the Roman Empire as the province of Judaea. Growing dissatisfaction with Roman rule and civil disturbances eventually led to the First Jewish–Roman War (66–73 CE), resulting in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and its Temple, which ended the Second Temple period.
As Second Temple Judaism developed, multiple religious currents emerged and extensive cultural, religious, and political developments occurred. The development of the Hebrew Bible canon, the synagogue and Jewish eschatology can be traced back to the Second Temple period. According to Jewish tradition, prophecy ceased during the early Second Temple period; this left the Jews without their version of divine guidance when they felt most in need of support and direction. Under Hellenistic rule, the growing influence of Hellenism in Judaism became a source of dissent for those Jews who clung to their monotheistic faith; this was a major catalyst for the Maccabean revolt. In the latter years of the period, Jewish society was deeply polarized along ideological lines, and the sects of the Pharisees, Sadducees, Essenes, Zealots, and early Christianity were formed. Important Jewish writings were also composed during the Second Temple period, including portions of the Hebrew Bible, such as the books of Ezra, Nehemiah, Esther and Daniel and writings that are a part of the Apocrypha and the Dead Sea Scrolls. Among the major sources for the time period are the writings of Josephus, Philo, the Books of the Maccabees, Greek and Roman writers and later Rabbinic literature.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and the Second Temple in 70 CE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cataclysmic events in Jewish history. The loss of mother-city and temple necessitated a reshaping of Jewish culture to ensure its survival. Judaism's Temple-based sects disappeared. Rabbinic Judaism, centered around communal synagogue worship and Torah study, eventually evolved out of the Pharisaic school and became the mainstream form of the religion. During the same period, Christianity gradually separated from Judaism, becoming a predominantly Gentile religion. A few decades after the First Jewish-Roman War, the Bar-Kokhba Revolt (132–135 CE) erupted; its brutal suppression by the Romans further dwindled the Jewish population in Judea and enhanced the role of Jewish diaspora, relocating the Jewish demographic center to Galilee, where the Mishnah was redacted, and eventually to Babylonia, with smaller communities across the Mediterranean.
History
Persian period (538–332 BCE)
According to the Book of Ezra, the Persian Cyrus the Great ended the Babylonian exile in 538 BCE, the year after he captured Babylon. The exile ended with the return under Zerubbabel the Prince (so-called because he was a descendant of the royal line of David) and Joshua the Priest (a descendant of the line of the former High Priests of the Temple) and their construction of the Second Temple in the period 521–516 BCE. The Cyrus Cylinder, an ancient tablet on which is written a declaration in the name of Cyrus referring to restoration of temples and repatriation of exiled peoples, has often been taken as corroboration of the authenticity of the biblical decrees attributed to Cyrus, but other scholars point out that the cylinder's text is specific to Babylon and Mesopotamia and makes no mention of Judah or Jerusalem. Professor Lester L. Grabbe asserted that the "alleged decree of Cyrus" regarding Judah, "cannot be considered authentic", but that there was a "general policy of allowing deportees to return and to re-establish cult sites". He also stated that archaeology suggests that the return was a "trickle" taking place over decades, rather than a single event.
The Persians may have experimented initially with ruling Judah as a Davidic client-kingdom under descendants of Jehoiachin, but by the mid–5th century BCE Judah had become in practice a theocracy, ruled by hereditary High Priests and a Persian-appointed governor, frequently Jewish, charged with keeping order and seeing that tribute was paid.
A second group of 5,000, led by Ezra and Nehemiah, returned to Judah in 456 BCE. The first was empowered by the Persian king to enforce the Torah, the second had the status of governor and a royal mission to restore the walls of the city. The Bible mentions tension between the returnees and those who had remained in Judah, the former rebuffing the attempt of the "peoples of the land" to participate in the rebuilding of the Temple; this attitude was based partly on the exclusivism which the exiles had developed while in Babylon and, probably, partly on disputes over property. The careers of Ezra and Nehemiah in the 5th century BCE were thus a kind of religious colonisation in reverse, an attempt by one of the many Jewish factions in Babylon to create a self-segregated, ritually pure society inspired by the prophesies of Ezekiel and his followers.
The Persian era, and especially the period between 538 and 400 BCE, laid the foundations for the unified Judaic religion and the beginning of a scriptural canon. The final Torah is widely seen as a product of the Persian period (probably 450–350 BCE). This consensus echoes a traditional Jewish view which gives Ezra a pivotal role in its promulgation. It has been suggested that Darius' reform of the empire's administrative structures, which included the collection, codification, and administration of local law codes, was the driving force behind the Jewish Torah's redaction.
Yehud's population significantly decreased during the Persian era; it is likely that it never exceeded 30,000. This represents a 70% decrease when compared to the late First Temple period. Jerusalem's area was also smaller compared with the late First Temple period. The city shrank to its pre-eighth century BCE size, and its inhabited areas—the City of David and the Temple Mount—had a population of around 1500. Together with the surrounding farms and unwalled settled areas, Jerusalem's population was around 3000 people. The rest of the population lived in small, unwalled towns and villages. The Israel of the Persian period consisted of descendants of the inhabitants of the former Kingdom of Judah, returnees from the Babylonian exile community, Mesopotamians who had joined them or had been exiled themselves to Samaria at a far earlier period, Samaritans, and others.
Hellenistic period (333–110 BCE)
In 332 BCE, the region was conquered by Alexander the Great of Macedon, ushering in the Hellenistic period. After his death in 322 BCE, his generals divided the empire and Judea became a frontier region between the Seleucid Empire and Ptolemaic Egypt. Under the Hellenistic kingdoms, Judea was ruled by the hereditary office of the High Priest of Israel as a Hellenistic vassal. On the same time, Hellenism gradually spread to varied degrees on all sides in the region through a variety of contacts, but especially as a result of the development of commerce and the arrival of Greek settlers.
Between 301 and 219 BC the Ptolemies ruled Judea in relative peace. Jews often found themselves working in the Ptolemaic administration and army, which led to the rise of a Hellenized Jewish elite class (e.g. the Tobiads). This period also saw the rise of a Hellenistic Judaism, which first developed in the Jewish diaspora of Alexandria and Antioch, and then spread to Judea. The major literary product of this cultural syncretism is the Septuagint translation of the Hebrew Bible from Biblical Hebrew and Biblical Aramaic to Koiné Greek. The reason for the production of this translation seems to be that many of the Alexandrian Jews had lost the ability to speak Hebrew and Aramaic.
At the turn of the 2nd-century BCE, a successful military campaign in Coele-Syria led by the Seleucid Antiochus III finally brought the region into the Seleucid empire, with Jerusalem falling under his control in 198 BC. The Seleucids, like the Ptolemies before them, held a suzerainty over Judea: they respected Jewish culture and protected Jewish institutions.
This policy was drastically reversed by Antiochus IV, possibly due to a dispute over leadership of the Temple in Jerusalem and the office of High Priest or a revolt whose nature was lost to time. Antiochus IV issued decrees forbidding many traditional Jewish practices and began a campaign of persecution against devout Jews. This triggered a revolt against his rule, the Maccabean Revolt. These decrees were a departure from typical Seleucid practice, which did not attempt to suppress local religions in their empire. Scholars of Second Temple Judaism sometimes refer to Antiochus' reign as the 'Antiochene crises' for the Jews, and as a period of civil war between Hellenized and orthodox forms of Judaism.
Maccabean Revolt (167–141 BCE)
According to 1 Maccabees, 2 Maccabees, and Josephus, the Seleucid Emperor Antiochus IV () moved to assert strict control over the Seleucid satrapy of Coele Syria and Phoenicia after his successful invasion of Ptolemaic Egypt (170 to 168 BCE) was turned back by the intervention of the Roman Republic. He sacked Jerusalem and the Temple, suppressing Jewish and Samaritan religious and cultural observances, and imposed Hellenistic practices ( 168-167 BCE).
Antiochus' actions enraged the elites but also the rural population, who had remained mostly untouched by Hellenism. In 167 BCE, Mattathias, a Hasmonean-lineage Jewish priest, killed a Jew in his hometown Modi'in who stepped forward to offer sacrifice to the Greek gods; he then killed a Seleucid official who ordered the sacrifice. According to 1 Maccabees, he declared, "Let everyone who is zealous for the law and supports the covenant come out with me!", and fled with his sons and followers to the wilderness of Judea. These events signaled the start of the Maccabean Revolt.
When Mattathias died, his son Judas Maccabeus took over as leader of the revolt. He used guerrilla tactics to defeat several small Seleucid armies while Antiochus IV was fighting a war in the east. The conflict was heavily religiously charged because, in order to distinguish themselves from their Jewish opponents, the Maccabees presented themselves as radical Jews and carried out large-scale forced circumcisions. Judas eventually succeeded in capturing Jerusalem and purifying the allegedly desecrated temple. This event is commemorated by the Jewish festival of Hannukkah.
The Maccabean cause was aided further in 164 BCE when Antiochus IV died and his generals fought over guardianship of his young son Antiochus V; this turmoil ended when Antiochus IV's nephew, Demetrios I, returned from exile in Rome, deposed Antiochus V, and ascended to the Seleucid throne. Demetrios continued the war against the Maccabees and backed their Jewish opponents. Around this time Judas was able to make a treaty with the Romans. Around 161 BCE, a Roman–Jewish Treaty was signed. In 160 BCE, the Seleucid general Bacchides defeated the Maccabees at the Battle of Elasa in 160 BCE; Judas' death during the battle dealt a blow to the rebels.
After Judas died, his brother Jonathan Apphus took over as the leader of the revolt. He benefited from another internal Seleucid struggle between King Demetrius I Soter and an usurper, Alexander Balas. Both turned to Jonathan, attempting to win him over with concessions, and Alexander Balas even elevated him to the position of high priest. Alexander Balas was eventually able to assert himself, but he was quickly defeated by Demetrios' son Demetrios II. The battle for the throne was now between him and the general Diodotos Tryphon, which strengthened Jonathan's position even more. This did not change when Tryphon was able to capture and murder Jonathan in Acre through treachery.
In 142 BCE, Simon Thassi, the last of Mattathias' sons, took over as rebellion leader and high priest. He was eventually successful in destroying the Acra, a fortified complex in Jerusalem that was the last symbol of Seleucid rule in Judea.
Hasmonean vassal state (140–110 BCE)
After Simon was assassinated and replaced by his son John Hyrcanus I (), Antiochus VII led a large army into Judea, forcing Hyrcanus to surrender as a vassal ruler in Jerusalem after a two-year siege. However, following Antiochus' death in the Seleucid-Parthian Wars in 129 BCE, the Seleucids were soon too weak to pursue an active policy outside of Syria; Hyrcanus was relieved of his burden, establishing the now de-facto independent Hasmonean state of Judea, minting coins for the first time, and doubling the state's territory.
Hasmonean period (110–63 BCE)
Around 110 BCE, Hyrcanus launched an invasion of Transjordan. His army laid siege to the city of Medeba and took it after a six-month siege. After this victory, he turned north and invaded Samaria, which had long separated Judea from Jewish settlements in Galilee. Shechem was reduced to a village and the Samaritan Temple on Mount Gerizim was destroyed. Archaeological evidence places these events between 111 and 110 BCE. Hyrcanus also launched a military campaign in Idumea, capturing Marisa and Adora. The Idumeans were forced to convert to Judaism, by threat of exile or death, depending on the source.
Following the death of Hyrcanus, his son Aristobulus I () assumed the title of king for the first time and combined it with the office of high priest. People were now more open to Hellenistic influences that had been demonized as un-Jewish during the war; the Hasmonean kingship bore clear Hellenistic monarchy traits, but combined these with theocratic elements. Aristobulus conquered and annexed Galilee. The Galilee, which had previously been sparsely inhabited, mostly by pagan populations, but also by Jewish communities, experienced an influx of Jewish settlement following these conquests. Josephus writes that he had also subjugated and Judaized Iturea, but this claim is not supported by archeological evidence.
Alexander Jannaeus () waged a series of expansionist wars, primarily against the Hellenistic cities surrounding Judea. Unlike his predecessors, who were focused on the concentration of the Jewish population in one country, his military efforts were motivated by a desire to control key economic points such as ports and trade routes. On the same time, he carried on his predecessors' conversion policy, and destroyed Pella because its inhabitants refused to convert. During his reign, the Hasmonean kingdom expanded to its greatest extent, now including the coastal plain, the northern Negev, and western parts of Transjordan. Jannaeus' dual role as king and high priest, his inclination towards the Sadducees, the high cost of the wars in both money and lives threatened the governmental balance and sparked opposition to his rule, resulting in the Judean Civil War, which Jannaeus brutally suppressed.
Salome Alexandra (), Jannaeus' widow, ascended to power following her husband's death. Under her rule, the priesthood was separated from the other powers of government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rise of the Hasmoneans. Salome appointed her son, Hyrcanus II, as high priest and his brother, Aristobulus II, as army commander, and pursued a moderate, mostly defensive policy that included the formation of a large and deterring army. Her nine-year reign is described as one of peace and economic prosperity, during which the country recovered from wars. The queen clearly supported the Pharisees, even allowing them to persecute and punish the Sadducees. Her rule had a distinct Hellenistic flavor, as there was no tradition of female rule in Judea.
Hasmonean kings attempted to revive the Judah described in the Bible: a Jewish monarchy ruled from Jerusalem and including all territories once ruled by David and Solomon. In order to carry out this project, the Hasmoneans forcibly converted neighbor nations to Judaism. Some scholars argue that the Hasmonean dynasty institutionalized the final Jewish biblical canon.
Hasmonean civil war
After Salome Alexander died in 67 BCE, Hyrcanus II, her older son, was entitled to assume the throne and was already acting as high priest. However, Aristobulus II, her younger son, was more energetic and determined to become king. Aristobulus gathered an army to attack Jerusalem, forcing Hyrcanus to abdicate the crown. The abdication was formally carried out in the temple, and Aristobulus' son, Alexander, married Hyrcanus' daughter, Alexandra. However, Antipater, an Edomite noble who served as Hyrcanus' advisor, convinced him that giving up the throne was a mistake that needed to be undone. Along with Aretas III, king of the Nabateans, these two formed an alliance and together they attacked and besieged Jerusalem.
During the same period, Roman general Pompey was in the midst of a campaign in the Eastern Mediterranean. After defeating Mithridates VI of Pontus, Pompey conquered the Seleucid Kingdom, which became a Roman province called Syria. The warrying brothers, who saw a mighty army camped near them, appealed to Pompey to decide between them. Three delegations then appeared before Pompey: one sent by Aristobulus, one sent by Hyrcanus, and another from "the people" who demanded to abolish the Hasmonean dynasty, which had transformed the rule of the priests into the rule of kings. Pompey heard the delegations but refrained from deciding. Eventually, in 63 BCE, Pompey invaded Judea, conquered Jerusalem, desecrated the Holy of Holies, imprisoned Aristobulus, and declared Hyrcanus an "ethnarch", a title inferior to the title "king". Judea then became a vassal kingdom of the Roman Republic.
Early Roman period (63 BCE – 70 CE)
After Pompey's conquest of Judea in 63 BCE, Hyrcanus II assumed the role of ethnarch; however, his advisor Antipater was ruler in practice and managed the kingdom's affairs. Some cities which were conquered by the Hasmoneans were removed from Judaean rule, including Azotus, Jaffa and Samaria, as well as Scythopolis and several cities in Transjordan, which formed the semi-autonomous Decapolis.
Hyrcanus II's rule was unstable. Alexander II, Aristobulus II's son, raised a large army and seized Jerusalem, forcing Hyrcanus to leave the city. The Roman general Aulus Gabinius invaded Judea in retaliation, sent Hyrcanus back to Jerusalem, and reinstated him as high priest. When Caesar's civil war broke out, Julius Caesar attempted to install Aristobulus on the throne; however, Aristobulus was poisoned, and his son Alexander, who was preparing to support him, was beheaded at Antioch at the command of Pompey. Antipater and his sons Phasael and Herod gained status and power at the expense of the Hasmonean dynasty's waning power.
When the Parthians invaded the area in 40 BCE, they installed Antigonus II Mattathias, Aristobulus II's youngest son, as king. Phasael committed suicide, and Hyrcanus II was taken as a prisoner to Babylon after having his ear severed in order to prevent him from ever acting as high priest again. Herod, who fled the Parthians, found his way to Mark Antony, who then controlled the eastern part of the Roman Republic. In agreement with his co-ruler Augustus, who controlled the western part, the two decided to appoint Herod as king of Judaea, and sent him with an army to seize the throne. In 37 BCE, Jerusalem was taken after a siege, and Antigonus was captured and executed.
Herodian dynasty
In 37-36 BCE, Herod the Great was appointed king of the Jews by the Roman Senate. The kingdom of Judea during his period is also referred to as the Herodian kingdom. As a close and loyal ally to the Romans, Herod extended his rule as far as Arabia and the Hauran. Herod undertook many colossal building projects, including fully rebuilding the Second Temple and expanding the Temple Mount, and founding Caesarea Maritima as a major port city. Herod also constructed the enclosure around the Cave of the Patriarchs in Hebron, the fortress at Masada, and Herodium. The Herodian kingdom under Herod experienced a period of growth and expansion. After Herod's death in 4 BCE, the kingdom was partitioned to several parts to each of his three sons (initially four parts), forming the Tetrarchy. The central part of the Tetrarchy was given to Herod Archelaus, including Judea proper, Idumea and Samaria. Herod's death in 4 BCE caused the release of built up frustrations of the people who were suppressed by his brutality. Many people were impoverished because of Herod's high taxes and spending. When he died, his building projects that once allowed for job opportunities were stopped, and many people lost their jobs. This built up frustrations that ultimately contributed to the causes of the First Jewish–Roman War.
Roman Judaea
In 6 CE, the country fell into unrest, and the Herodian ruler of Judea was deposed in favor of forming the new Iudaea Province under direct Roman rule. The Roman province of Judaea extended over parts of the former regions of the Hasmonean and Herodian kingdoms. It was created in 6 CE with the Census of Quirinius and merged into Syria Palaestina after 135 CE.
Jerusalem reached a peak in size and population during the late Second Temple period. The majority of scholars estimate that city's population at that time to have been between 70,000 and 100,000.
Herod II ruled Ituraea and Trachonitis until his death in 34 CE when he was succeeded as tetrarch by Herod Agrippa I, who had previously been ruler of Chalcis. Agrippa surrendered Chalcis to his brother Herod and ruled in Philip's stead. On the death of Herod Antipas in 39 CE Herod Agrippa became ruler of Galilee also, and in 41 CE, as a mark of favour by the Emperor Claudius, succeeded the Roman prefect Marullus as ruler of Judea.
The era from roughly 4 BCE to 33 CE is also notable as being the time period when Jesus of Nazareth lived, primarily in Galilee, under the reign of Herod Antipas. It is therefore considered in specifically Jewish history as being when Christianity arose as a messianic sect from within Second Temple Judaism.
First Jewish-Roman War
In 66 CE, the Jews of Judea rose in revolt against Rome, sparking the First Jewish–Roman War (66-73 CE), also known as the Great Jewish Revolt. Flavius Josephus, a contemporary Jewish historian who fought as the commander of Jewish forces in Galilee but later defected to the Roman side, chronicled the events of the war in his book The Jewish War.
Vespasian, an experienced Roman general, was sent by emperor Nero to crush the rebellion. He arrived at Ptolemais along with legions X Fretensis and V Macedonica. There he was joined by his son Titus, who arrived from Alexandria at the head of Legio XV Apollinaris, as well as by the armies of various local allies including that of king Agrippa II. During the Galilee campaign, many towns surrendered without a fight, and others were taken by force. Yodfat, a fortified town in the Lower Galilee, was besieged for 47 days before it fell to treachery; the city was razed, many people were killed, and the rest were enslaved. Gamla, the major Jewish stronghold in the Golan Heights, fell after a one month siege. Following a lull in military operations caused by civil war and political turmoil in Rome, Vespasian was summoned to Rome and appointed Emperor.
In early 70 CE, Titus moved to besiege Jerusalem, the center of rebel resistance in Judaea. The city had been taken over by several rebel factions following a period of massive unrest and the collapse of a short-lived provisional government. The first two walls of Jerusalem were breached in three weeks, but the Roman Army was unable to breach the third and thickest wall due to a stubborn rebel standoff. According to Josephus, a contemporary historian and the main source for the war, the city was ravaged by murder, famine and cannibalism. On Tisha B'Av, 70 CE (August 30), Roman forces finally overwhelmed the defenders and set fire to the Temple. Resistance continued for another month, but eventually the upper and lower parts of the city were taken as well, and the city was burned to the ground. Titus spared only the three towers of the Herodian citadel as a testimony to the city's former might. Josephus wrote that over a million people perished in the siege and the subsequent fighting. While contemporary studies dispute this figure, all agree that the siege had a major toll on human life, with many people being killed and enslaved, and large parts of the city destroyed.
After the fall of Jerusalem, Titus returned to Rome, leaving the remaining Jewish strongholds, including Herodium and Machaerus, to the Roman Legions. The war ended in 73-74 CE with the siege of Masada. According to Josephus, the siege resulted in the mass suicide of the Sicarii rebels and resident Jewish families, though the historicity of the mass suicide is debated.
Aftermath
Two generations after the First Jewish-Roman War, the Bar Kokhba Revolt (132-136 CE) erupted. One reason seems to be the re-establishment of Jerusalem as a Roman colony under the name of Aelia Capitolina. The revolt was brutally suppressed by the Romans and resulted in the extensive depopulation of Judean communities, more so than during the First Jewish–Roman War of 70 CE. Some scholars have described these events as genocide. According to Cassius Dio, 580,000 Jews perished in the war and many more died of hunger and disease, 50 fortresses and 985 villages were destroyed. In addition, many Judean war captives were sold into slavery. Some modern historians assert that Dio's numbers were somewhat exaggerated, but based on the archeological evidence, virtually all scholars support Dio's claim of massive depopulation. The revolt put an end to Jewish aspirations for the reconstruction of Jerusalem and the Temple as well as, more concretely, for Jewish settlement in the region of Judaea. The province of Judea was renamed Syria Palaestina.
Jewish presence in the region significantly dwindled after the failure of the Bar Kokhba revolt. Nevertheless, there was a continuous small Jewish presence and Galilee became its religious center. Jewish communities also continued to reside in the southern Hebron Hills and on the coastal plain. The Mishnah and part of the Talmud, central Jewish texts, were composed during the 2nd to 4th centuries CE in Tiberias and Jerusalem. Over the next centuries, more Jews emigrated to flourishing communities in the Diaspora. Others remained in the Land of Israel, and some converted to Christianity. Jewish historians occasionally refers to this time period, which corresponds with the world's late antiquity, as the Rabbinic or Talmudic period.
After the destruction of the Second Temple, Judaism separated into a linguistically Greek and a Hebrew / Aramaic sphere. The theology and religious texts of each community were distinctively different. Hellenized Judaism never developed yeshivas to study the Oral Law. Rabbinic Judaism (centered in the Land of Israel and Babylon) almost entirely ignores the Hellenized Diaspora in its writings. It is unknown whether Hellenized Judaism ultimately vanished as its adherents assmiliated into the Christianized Greco-Roman society, or if it persisted as a distinct, bible-oriented community that later affected the development of Karaite Judaism.
By the first century, the Jewish community in Babylonia, to which Jews were exiled after the Babylonian conquest as well as after the Bar Kokhba revolt in 135 CE, already held a speedily growing population of an estimated one million Jews, which increased to an estimated two million between the years 200 CE and 500 CE, both by natural growth and by immigration of more Jews from the Land of Israel, making up about one-sixth of the world Jewish population at that era.
Religion
During the 600 years of the Second Temple period, multiple religious currents emerged and extensive religious developments occurred. The development of the Hebrew Bible canon, the synagogue, Jewish eschatology can all be traced back to the Second Temple period.
According to Jewish tradition, prophecy ceased during the early Second Temple period; this left the Jews without their version of divine guidance at a time when they felt most in need of support and direction.
During the Hellenistic period, currents of Judaism were influenced by Hellenistic philosophy developed from the 3rd century BCE, notably the Jewish diaspora in Alexandria, culminating in the compilation of the Septuagint. An important advocate of the symbiosis of Jewish theology and Hellenistic thought is Philo. The growing influence of Hellenism in Judaism became a source of dissent for some Jews; this was a major catalyst for the Maccabean revolt.
The sects of the Pharisees and Sadducees were formed, according to most scholars, around the mid 2nd century BCE. It is thought that the mystic sect of the Judaean desert, most likely the Essenes, was founded in the second third of the second century BCE. The sect serves as a useful illustration of the profound impact these years had on the emergence of new patterns, beliefs, and lifestyles. The sect members' flight into the desert was a direct protest against what was taking place in Jerusalem at the time. The emergence of a new leadership in the city, a leadership that would shape the course of Jewish history for more than a century, is what led to the cult's estrangement and alienation.
From 170 BCE to 30 CE, five successive generations of zugot ("pairs of") leaders headed the Jews' spiritual affairs.
A number of messianic ideas developed during the later Second Temple period. Christianity first emerged as a Second Temple Judaic sect in the 1st century Hellenistic Judaism in Roman Judea. Jesus of Nazareth was a first-century Jewish preacher and religious leader. After his death, his apostles and their followers spread around the Levant, Europe, Anatolia, Mesopotamia, the South Caucasus, Egypt, and Ethiopia, despite initial persecution. It soon attracted gentile God-fearers, which led to a departure from Jewish customs, and, after the fall of Jerusalem which ended the Temple-based Judaism, Christianity slowly separated from Judaism.
Literature
The religious literature of the Second Temple period can be split into three categories: the Apocrypha and Pseudepigrapha; the literature of the Greek-speaking diaspora; and the Dead Sea Scrolls. The first two categories were preserved by Christians, while the third one was discovered in the 20th century in the Qumran caves.
The Apocrypha ('hidden books') were accepted as canonical scripture by various Christian denominations, and includes books like 1–4 Maccabees, Sirach, Wisdom of Solomon, Baruch (inc. the Letter of Jeremiah), Tobit and Judith, along with 1–2 Esdras and Prayer of Manasseh which are not considered as canonical by any church. The Pseudepigrapha ('false superscription') include books attributed to well-known biblical figures, including Enoch, Abraham, Moses and others. The Dead Sea Scrolls are generally believed to be the library of a mystic sectarian community that lived at Qumran, most likely the Essenes. Together with the works from the first two categories, it also contains other writings including the Community Rule, the Damascus Document, the Temple Scroll, the War Scroll, the Thanksgiving Hymns, the pesharim, and others.
A fourth category would be some parts of the Hebrew Bible that were composed during the Second Temple period, including the prophetic books of Zechariah, Haggai, Malachi, Joel, and parts of Isaiah (24–7, 56–66), all dating from the Persian period, along extensive portions of the Ketuvim. However, these books are not typically included in scholarship as part of the Second Temple period literature.
Economy
Agriculture
Almost all of the national Jewish economy's needs during the Second Temple period were met domestically; there was virtually little exporting or importing. Agriculture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economic life. Josephus explains why earlier texts did not mention Jews by stating that: As for ourselves, therefore, we neither inhabit a maritime country, nor do we delight in merchandise, nor in such a mixture with other men as arises from it; but the cities we dwell in are remote from the sea, and having a fruitful country for our habitation, we take pains in cultivating that only.It is believed that the majority of Judaea's farmland was used to grow grain, predominantly wheat but also hardier but less popular barley in drier areas. Archaeologists have found numerous olive and winepresses, indicating the importance of these products as well. Rabbinic literature, Josephus' writings, and the New Testament further reveal that herbs, garden vegetables, and legumes were also grown. Legumes were especially important, because they could be stored for a long time and frequently flourished in years when other crops failed. Sources from the late first and early second centuries CE indicate that rice was introduced to Palestine by Jewish farmers during the early Roman period. The local crop was fine, large-kernel rice.
The main products of livestock were milk, butter, and cheese (albeit these foods made up a small portion of the diet), wool, and food for the Roman army, whose diet, unusually for the time period, included a daily ration of meat. There was also fish, probably generally pickled, though not in great quantities. The Galilean city of Tarichaeae, located along the shore of the Sea of Galilee, got its name from Greek: ταρίχη, "pickled fish".
A few small areas in the province dedicated to the cultivation of cash crops. A famous example is the balsam plantations around Jericho. Josephus also indicates that in his day, the olive was extensively grown in some parts of Upper Galilee, and that its oil was occasionally sold to neighboring cities.
Import and export
There are several sources that do suggest there may have been a limited amount of importing. Wheat imports are mentioned in Makhshirin 3:4, and the rabbis' ruling that imported pottery and glass were ritually impure also seems to suggest that these products were brought into the region. The Hellenistic-period Hefzibah inscription demonstrates that there was some exchange of goods among the local communities, and there may have even been some export. it is also possible that the area served as a form of commerce enclave, as balsam and dates from the Jericho area were sold outside the area and it is obvious that the locals there were not self-sufficient in other ways.
But, when looking at the overall economic picture, the scale of imports and exports was insignificant. For instance, the Romans imposed a yearly land tax and harbor tax on Hyrcanus in the sum of 20,665 modia, or around 135.5 tons of wheat for Joppa. A levy of 135.5 tons of wheat was absurdly low considering Joppa was the main Jewish port, indicating that the city only exported a little amount of goods. According to Josephus, the main commercial hubs were the Phoenician coastal cities. They took part in international trade in the Mediterranean sea and reportedly served as the main ports for the Land of Israel's meager import and export requirements. Some of those cities were conquered by the Hasmoneans, while they may not have been completely abandoned, their economic situation and prestige degraded. During this period, only Ascalon remained an independent city, and Joppa continued to function as a small harbor city. The Phoenician coastal cities prospered once more and resumed their status as economic hubs after the Romans seized Palestine.
Importing food was important at times of drought or famine, as it was during the time of Herod, and Helena. Nonetheless, as is evident from the Testament of Job, trading at this time was often a characteristic of the coastal cities.
Goods
Jerusalem during the late Second Temple period was a significant center of consumption at this time. This economic center developed to meet the needs of both the Temple and pilgrims, as well as those of the locals who did not work in agriculture. Doves were raised in the Judean Lowlands and sent to the Temple.
The locations from which the Temple received high-quality agricultural items are listed in the Mishnah's Menachot tractate. The highest quality fine flour was transported from farms in Michmas and Zonicha (now Zanoah). The Aforayim flour came in second. Olive trees near Teqoa of Galilee served as the Temple's main source of olive oil. Regev in the Transjordan came in second. Qerouthim (Keruthim) and Hatoulim were the main producers of wine, followed by Beit Rima (now Bani Zeid al-Gharbia, Beit Lavan (now al-Lubban al-Gharbi), and Kefar Signa (in the lower Galilee).
Language
Overview
Judea's linguistic situation during the Second Temple period is defined by the co-existence of two spoken languages: Aramaic and Hebrew. The meaning of the population's bilingualism is debated; opinions differ on whether speakers express themselves equally in Hebrew or Aramaic, or whether one language is preferred over the other depending on region. Aramaic became widely spoken in Samaria and Galilee, while Judea continued to use Hebrew. Although Aramaic had eventually surpassed Hebrew as the most widely spoken language in the region, many people learned Hebrew as a liturgical language.
During the two centuries of Persian rule (538–332 BCE), the administrative language was Imperial Aramaic. Beginning in 333 BCE, Koine Greek became the official language of administration and was used to spread Hellenistic culture. Even under Roman rule, the administrative language in the eastern provinces, including Judaea, remained Greek.
The square script (also known as Ktav Ashuri) had probably already started to replace the paleo-Hebrew script during the Persian period, though the transition was not complete until the Hellenistic period and traces of the previous script were still in use until the Bar-Kokhba revolt.
Latin, the language of the Roman army and higher levels of administration, had almost no impact on the linguistic landscape. It is less common in texts and archaeology. Only a few Latin papyri were discovered in the region; those discovered at Masada belonged to the Roman garrison.
Aramaic
During the Persian period, Aramaic was the civil administration language. The contract texts were written in Aramaic. The ketubah (marriage contract), get (divorce certificate), and other legal documents mentioned in the Talmud are written in Aramaic. The formulas for the Aramaic texts of the ketubot have been preserved since the Persian period, even though they were modified during the Hellenistic period. Elephantine's Jewish community has adopted Aramaic, and it was the main language used in the Elephantine papyri and ostraca. Jesus, a native of the Galilee, and his disciples spoke Aramaic.Despite the fact that Aramaic has become the most widely spoken language, there are few Aramaic texts that provide information on the language spoken in the region during the Second Temple period. Three books of the Hebrew Bible contain passages in Aramaic: Ezra 4:8 to 6:18 and 7:12 to 26 and Daniel 2:4 to 7:28. The Megillat Ta'anit ("The Scroll of Fasting") was written in Aramaic around the first century CE. This is also true of the targumim, or Aramaic paraphrases of the Bible, but dating them is difficult.
Hebrew
Some of the later books of the Hebrew Bible, including Ezra and Nehemiah, Esther, Daniel, Chronicles, and Haggai, Zechariah, and Malachi, are explicitly dated to the Second Temple period. The first and second verses of the book of Ezekiel were written during the Babylonian exile. There are varying opinions about when Ecclesiastes, the Song of Songs, Jonah, some of the Psalms, and possibly the Book of Job were written. The majority of researchers, however, agree that they were composed during the Second Temple period. Most of these books were written in what linguistics call "Late Biblical Hebrew". This later form of Biblical Hebrew is particularly notables in the Book of Chronicles since it occasionally rewrites sections from Samuel and Kings and modifies parts to conform to post-exilic usage. However, not all of the Second Temple literature exhibits the language traits of late Biblical Hebrew to the same degree; some of it is written in a manner that is strikingly reminiscent of classical Biblical Hebrew.
Hebrew was still a spoken language during the Second Temple period at least in some areas of Judea. It continued to be used up until 200 CE, and possibly even after. It is thought that the Hebrew spoken during the Second Temple period evolved from Biblical Hebrew, possibly from a distinct dialect. This form of Hebrew is now known as Mishnaic Hebrew. The Hasideans, who are believed to be the precursors of both the Essenes and the Pharisees, used a combination of Biblical Hebrew and Mishnaic Hebrew as their literary language, with Mishnaic Hebrew dominating. The literature of the Tannaim and Amoraim of the Land of Israel and Babylonia is written in Mishnaic Hebrew, which is later found in the Mishnah. Among the earliest are the tractates of Tamid and Middot. It reflects a living Hebrew that is not just an artificial language reserved for Jewish scholars, despite the fact that this language has been fixed in rabbinic discussions. The Qumran group continued to use Late Biblical Hebrew, which was still a literary language, while fusing it with their own unique linguistic traits.
The first century Jewish historian Flavius Josephus asserts that he addressed the people of Jerusalem in Hebrew. But as usual, his testimony is ambiguous and at odds with the Aramaic transcriptions he uses to describe Jewish traditions. Spoken Hebrew saw a brief resurgence in interest during the Bar Kokhba revolt (132–135 CE). The Mishna, however, was written down circa 200 CE because it could no longer be memorized and could no longer be transmitted orally due to the lack of Hebrew speakers who could memorize it.
Archaeology provides evidence of the usage of Mishnaic Hebrew in the Second Temple period. It can be found in texts found in the Judaean Desert from the first and second centuries, including the Copper Scroll found in Qumran and the Bar Kokhba letters and other writings found in caves near Nahal Hever. These documents provide a glimpse of everyday Hebrew, without indicating which regions they pertain to. Judean Desert examples tend to indicate that it is a southern dialect.
Greek
Greek was the primary language of the Jews of Hellenistic and Roman Egypt, particularly those of Alexandria. Although the Jews of Egypt used Aramaic in the early Ptolemaic period, it was quickly abandoned in favor of Greek. It is only in the early Byzantine period that Egyptian Jewish communities communicated with one another in Hebrew, which again served as the official language.
The use of Greek was not limited to the Jewish Diaspora. From the third century BCE onward, almost all inscriptions in the Southern Levant were written in Greek, with the exception of tombs and ossuaries, as well as those in synagogues. Many ossuaries of the period bear inscriptions in Greek, either indicating the tombs of families descended from the Diaspora or assisting authorities in identifying the tombs. According to the Mishna, Greek was even present in the Temple of Jerusalem.
Greek was widely used in Judaea, at least in a certain social stratum. Greek was also used in legal documents such as the Babatha Archives and the Bar Kokhba letters. The Septuagint, a Greek translation of the Hebrew Bible, was not limited to Jews in the Diaspora - it was also used in Judea, as evidenced by the discovery of fragments at Qumran and Nahal Hever.
Greek names like Jason, Menelaus, and Alexander were popular among Jews throughout most of the Second Temple period. Some Pharisees, too, had Greek names like Antigonus of Sokho or P[t]ollion.
Identity
In classical antiquity, the Jewish people were constantly identified by Greek, Roman, and Jewish authors as an ethnos, one of the many ethne living in the Greco-Roman world. Van Maaren demonstrates why Jews of the late Second Temple period may be regarded as an ethnic group in modern terms by using the six characteristics that co-ethnics share as outlined by Hutchinson and Smith. Those include:
(1) An ethnonym, a common proper name, that identifies and conveys the "essence" of its community. In antiquity, three proper names were used to refer to the Jewish ethnos, namely: "Hebrew", "Israel", and "Jews". In Second Temple period texts, the term "Hebrew" was used to describe an individual from the pre-monarchic period of Jewish history. The term "Israel" was used as a timeless designation of the ethnos or to refer to members who were a part of the united monarchy, the earlier northern kingdom, or eschatological Israel. Members of the contemporary ethnos were usually referred to as "Jews," and the name can also apply to a geographically confined subgroup or to the descendants of the earlier kingdom of Judah.
(2) A myth of common ancestry. In the Jewish case, of descent from eponymous ancestor Jacob/Israel; moreover, the purported descent from Abraham was exploited by the Hasmoneans to broaden definitions of Jewishness, although this claim was disputed by others.
(3) Shared memories of the past, including historical events and heroes. Jewish sacred scriptures provide a fundamental collection of those historical stories. The community reading of the Hebrew Bible and other texts in synagogues helped to further ingrain the stories and characters they contain in the collective Jewish identity. That includes figures such as the Patriarchs, Moses and David, and events such as the Exodus, the covenant at Mount Sinai, the heyday of the united monarchy, the Babylonian captivity, the Antiochene persecutions, and the Maccabean revolt.
(4) One or more elements of shared culture, which need not be specified, but usually include religion, language, and customs. There were significant overlaps between the religion, languages, customs, and other cultural aspects shared by ancient Jews; moreover, religion cannot be separated from other cultural aspects, especially in ancient times. The worship of the God of Israel, the work of the Temple in Jerusalem and other cultic sites, and the following of particular Jewish customs (dietary laws, Sabbath observance, etc.) were major aspects of Jewishness at the period. Despite the fact that not all Jews spoke the same language, because many of the sacred writings were written in Hebrew, it also served as a symbol for Jews who did not speak the language.
(5) A connection to a homeland, which need not be physically occupied by the ethnic group in order for it to have symbolic attachment to their ancestral homeland, as is the case for diaspora populations. In the Jewish case, this is the Land of Israel, or Judaea/Palaestina. For both the local Jews and those residing in the diaspora, the land held symbolic value. It endures despite the frequently shifting, occasionally nonexistent borders.
(6) A sense of solidary on the part of at least some sections of the ethnic population. The strength of this sentiment varies. Josephus reports that when the First Jewish–Roman War broke out, the Jews of Scythopolis joined the city in fighting the Jewish rebels because they had weaker sense of solidarity for the Jewish ethnos.
In the centuries following the First Jewish–Roman War and the destruction of the Second Temple, Jewish identity gradually transformed from an ethnos with a distinct religious identity to a religious community that also considered itself a nation.
Nationalistic aspirations
Early Hellenistic Greek observers described the Jews as eastern philosophers who lived outside of the Hellenistic political unrest of the time in an autopian ethno-national context. Jewish texts from the Persian era don't reflect any political aspirations for independence, and later, in the early Hellenistic era, Jews had a favorable view of the Hellenistic rulers.
However, the circumstances leading up to the Maccabean revolt caused a militaristic-zealot tradition to form between the 70s and 60s of the second century BCE, and it continued to play a key role in the national life until the Bar Kokhba revolt.
Diaspora
The homeland remained the common symbolic tie of Diaspora Jews. It was the center of the universe, despite the fact that the majority of Jews living abroad would not come back and despite the fact that many of them showed a love for both their native Greco-Roman cities and the city of the temple in Jerusalem. It is possible that the Jews of Smyrna, Asia Minor, donated money to support city projects. Trebilco refers to them as "former Judeans" rather than "former Jews," implying that they were being referred to as a group whose origins were in Judea but who were now devoted to their current city of residency and even made contributions to public enterprises. Jews in Acmonia, Phrygia made donations to their city and referred to it as their patris, "home city" or "native town".
The works of Philo of Alexandria, writing in the early 1st century CE, shed more light on the connection of Diaspora Jews with Judea. At Philo's time, Jews had long been present in the Diaspora and particularly in Alexandria for quite a long time, and because his fellow nationals had lived in Alexandria for many generations, Philo appears to have thought of it as his city. But on the same time, Philo wrote that while the Diaspora Jews refer to the place where they were born and raised as their fatherland, they consider Jerusalem to be their mother city:...they hold the Holy City where the sacred Temple of the most high God to be their mother city, yet those which are an inheritance from their fathers, grandfathers, and ancestors even farther back, are in each case, accounted by them to be their fatherland in which they were born are reared.In an effort to explain the situation of the Jews in terms that Greek readers would comprehend, Philo portrayed the Jews in the Diaspora as immigrants who founded colonies (Greek: apoikiai), with Jerusalem being their mother-city (metropolis). According to Kasher, Alexandria could only be considered a homeland in this case since it was where a Jewish "colony" was founded. The colony was organized as a distinct ethnic union with a recognized political and legal status (politeuma), with Jerusalem serving as its mother-city.
For Philo, the ethnic distinctions between Egyptians and Jews are more significant than those between Greeks and Jews since native Egyptians from Alexandria are the lowest-class residents and practiced ridiculous habits. Around the same time, Apion, an Alexandrian who may have Egyptian ancestry, spoke of the closeness between Jews and Egyptians and the inherent enmity between Jews and Greeks. Apion held the view that Jews were descended from Egyptians, which Josephus denied. As Philo himself writes, both communities practiced circumcision and showed passion for their nationalistic and religious beliefs, yet the bulk of each population was not Roman citizens.
Demography
This section refers to the late Second Temple period, unless specified.
By area
During the late Second Temple period and up until the Bar Kokhba revolt, Judea proper, Galilee, Peraea, Sharon, and western Samaria constituted a band of nearly continuous Jewish settlement. Central and northern Samaria was inhabited by Samaritans.
Galilee
The Galilee was sparsely populated up to the Hasmonean conquest, with the majority of its inhabitants concentrated in fortified centers on the margins of the western and central valleys. During that time, the Upper Galilee was home to a predominantly pagan populace with ties to the Phoenician coast. According to the Book of Maccabees, Jewish communities were already present in Galilee during the Maccabean Revolt and before the area was incorporated into the Hasmonean kingdom.
Much of the Galilee was conquered and annexed by the first Hasmonean king Aristobulus I around 104–103 BCE. This conquest encouraged a significant Jewish influx into Galilee. After the Roman conquest of Judaea in 63 BCE, a second, larger wave of Jewish immigration settled in the region. During the end of the first century BCE and the beginning of the first century CE, large and important towns were founded in Galilee.
The Jewish population in Galilee continued to prosper after the Second Temple period and especially as a result of the Bar Kokhba revolt, when it replaced the depopulated Judea as the spiritual, demographic and cultural center of Jews in the Land of Israel. Judaism reached its political and cultural pinnacle in Galilee during the late second and early third century CE.
Perea
Historical accounts and archaeological discoveries from the late Second Temple period provide evidence of the Jewish settlements in Perea. Based on the database of the Jordanian Antiquities Department, Sagiv's research of Jewish Transjordan revealed 160 settlement sites in Peraea with Late Hellenistic and/or Early Roman potsherds.
The little excavations that have been done there show that Jewish habitation there continued after the First Jewish Revolt, was abandoned or destroyed during the Bar Kokhba Revolt, and then there was a settlement gap throughout the Late Roman period.
Idumaea
Even before the final collapse of the kingdom of Judah in 586 BCE, the Edomites were driven from their ancestral homeland and former kingdom east of the Arabah and began to settle in the southern parts of Judea, which came to be known in classical sources as "Idumaea". This settlement process was continuous, and it was carried out using both peaceful penetration and military invasion.
Ostraca dating from the 4th century BCE from sites in Idumaea including Arad, Beer-sheba, Tell Jemmeh, Maresha, and others, indicate a very diverse population that inhabited the district during the late Persian period, with about 32% Arab names, 27% Idumean names, 25% general West Semitic names, 10% Judahite names, and 5% Phoenician names.
Around the mid-third century BCE, a Hellenized Phoenician community from Sidon settled in Maresha. During the reign of Hasmonean leader John Hyrcanus in the late second century BCE, the Edomites converted to Judaism and were assimilated into the Jewish people.
Samaria
The majority of Samaria's people in the first century CE are thought to have been Samaritans. Samaria was also inhabited by Jews (in southern and central Samaria), native Hellenized Semitic people, descendants of Macedonians who settled in the city of Samaria under Alexander the Great, colonists who flocked there under the Roman governor of Syria, Gabinius, and mercenaries "of the neighboring populations" who were brought to Sebaste by Herod the Great.
Samaritans and Jews had a hostile relationship; Josephus describes one instance in which Jews from the Galilee were attacked by Samaritans in Ginae while traveling to a festival in Jerusalem, resulting in the death of one of them.
Coastal plain (Paralia)
The coastal plain, or Paralia as it was known since the Hellenistic period, did not have a Jewish majority. With the exception of a brief period of Hasmonean rule, Herod's reign, and Agrippa's brief reign, the region was not under Jewish rule for the most of the Second Temple period. The coast was home to mostly Hellenistic-pagan settlements during Josephus' day, some of which were particularly significant from an economic, cultural, and political standpoint. Joppa was the only Jewish city on the coast and remained so up until the First Jewish-Roman war (66–73 CE), when there were significant Jewish minorities in Caesarea and Jamnia, and to a lesser degree, in Ascalon and Ptolemais and other settlements along the coast.
Total numbers
The number of Jews residing in the world and in Judea in ancient times is almost impossible to determine, as it is with other ancient populations, and research in that area has fallen out of scholarly favor in recent years. Nonetheless, a few academics have offered estimates over the years using different approaches.
In Judaea
Broshi estimated that there were not much more than 1 million people living in Palestine during Roman and Byzantine times, by multiplying the estimated population of the 26 towns that were known during the Roman-Byzantine period (based on projected population density) by three, using the assumption that the urban population made up around a third of the total population.
According to Seth Schwartz, the most responsible estimates put the pre-modern sustainable population of Palestine at about one million, a figure that was attained in the middle of the first century, with about half of them being Jews.
According to Ze'ev Safrai, "at this point we do not have exact information regarding the population of Provincia Judaea during the Roman period". He asserts that there were more people living in Palestine than the one million people suggested by Broshi.
Although McGinn cautions that it is nearly impossible to estimate Judaea's carrying capacity, he estimates that Palestine's agricultural population at the same time period may have reached up to one million people, not all of whom were Jews. Also, he suggested a maximum population range for Jerusalem and Caesarea, of 70,000 to 100,000 and 38,000 to 47,500 respectively.
Worldwide
In the 13th century, Christian writer Bar Hebraeus claimed that 6,944,000 Jews were counted in the Claudius census, which was conducted in the middle of the 1st century CE. Salo Wittmayer Baron asserted that there were 8 million Jews in the first century, based on Bar Hebraeus' estimate of 7 million Jews living inside the Roman Empire and adding an estimated million people living outside the empire. However, these figures are much disputed by contemporary scholars.
Material culture
As archeological evidence reveals, Jewish communities in Judea, Galilee, and Gaulanitis were quite divided by cultural attitudes but were interconnected by religious customs and, likely, beliefs. Workshops for kitchen pottery, standardized oil jars, and household or community ritual baths (mikvaot) show that Jews began to incorporate explicitly religious practices and attitudes into their homes and everyday lives as early as the first century BCE. They started using stone vessels and a particular new type of oil lamps in the latter first century BCE and early first century CE to further distinguish and identify themselves. However, in the affluent neighborhoods of Jerusalem, the wealthy adopted the use of decorated tableware, Italian cooking utensils, foreign eating customs, and the construction of lavish display tombs, all of which reflect foreign, classicizing practices and attitudes. These findings are rare in Judea, the Jewish Galilee, and Gaulantis.
Burial
In contrast to earlier and later Jewish burial practices, the two acceptable types of burial during the late Second Temple period (1st–2nd centuries BCE and CE) were primary burial in coffins and secondary burial in ossuaries. For primary burial, coffins were placed in kokhim. After a while, bones were collected for secondary burial in kokhim and placed in ossuaries. Ossuaries, which were cut from local limestone, were either kept on the floor or on shelves in specially carved niches in the walls of the tomb. It was common for the ossuaries to be decorated with ornaments that included typical motifs of the period. In Jerusalem, for example, palm branches and flowers, especially the rosette, were typical motives. Funerary inscriptions with names etched or inscribed in Hebrew or Greek ossuaries are commonly found on ossuaries and sometimes on tombs.
In Jerusalem
A number of especially lavish tombs were built around Jerusalem during the early Roman period. Examples are the so-called "Tombs of the Sanhedrin" and the monumental tombs of the Kidron Valley. As a common practice in the Greco-Roman world, these tombs were built along ancient roads that have since disappeared. Scholars believe these tombs were built by individuals seeking to elevate themselves and their families in the eyes of Jews in both the Land of Israel and the Diaspora by employing temple-like architectural designs. One of the most well known sites of the period, also built near Jerusalem, is the rock-cut funerary complex known as the "Tombs of the Kings", which may be associated with Helena of Adiabene.
According to Jewish Law (Mishnah, Bava Batra tractate), due to the sanctity of Jerusalem and the impurity of the dead, burial was only allowed beyond the city's walls and fifty cubits away. When the city expanded, the cemeteries were removed (except for the graves of the House of David and Huldah).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e Uzziah Tablet, which says "Hither were brought the bones of Uzziah, king of Judah. Not to be opened", might indicate that king Uzziah's tomb was relocated beyond the city's walls during this period. Jericho's cemetery was also located outside the town's limits.
In rural Judea
Elaborate rock-cut tombs with designs resembling those found in Jerusalem were found in multiple sites in Western Samaria, including Khirbet Kurkush, Deir ed-Derb and Mokata 'Aboud, and in the Western Hebron Hills, including Khirbat al-Simia, Rujm el-Fihjeh and Khirbet el Jof. The great similarity between these tombs and the Jerusalem tombs and the lack of a local Hellenistic prototype have led the researchers to the assumption that the decorated tombs in western Samaria and western Mount Hebron are not the result of an internal development of the burial system there but rather the result of a deliberate copying of the Jerusalem tombs, at the special request of local, affluent families.
Most researchers concur that these tombs date from the same period as the Jerusalem tombs that were served as a model for replication, however, Magen thinks otherwise: the visible difference in the quality of the design and carving between the tombs indicates a chronological gap between them in his opinion, and therefore he suggests dating the tombs of West Samaria and the Western Hebron Hills later than the Jerusalem tombs, at the end of the first century or the beginning of the second century. Magen also raised the possibility that their hewing is connected to the flight of Jewish artisans to Samaria and the Hebron Hills with the beginning of the siege of Jerusalem and perhaps even a little earlier, when the construction enterprises in the city began to dwindle and many quarrymen were left without employment.
Peleg-Barkat suggests distinguishing between the rock-cut tombs of western Samaria and those of the western Hebron Hills. In her opinion, the western Samaria' tombs are closer to the Jerusalem style, and imitate them. The Hebron Hills' tombs, in comparison, do not try to imitate the facade decorations of the Jerusalem tombs, but are influenced by them to a certain degree, and display Judean and Nabatean influences at the same time. In her opinion, the tombs should be dated to a date before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in 70 CE, although it is possible that the tradition of decorating in the Jerusalem style continued even after that. The phenomenon indicates that the adorned tombs of the Jewish elite in Jerusalem had an impact on the local elites in the towns and rural communities of Judaea.
See also
Archaeology of Israel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
History of the Jews in the Roman Empire
Intertestamental period
Jerusalem during the Second Temple Period
Second Temple Judaism
Timeline of Jewish history
References
Citations
Bibliography
Ancient Jewish Greek history
Ancient Jewish Persian history
Historical eras
Jews and Judaism in the Roman Republic and the Roman Empire |